윤6월 1일 신유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바야흐로 추함(推緘)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동부승지 목겸선(睦兼善)이 청풍 부사(淸風府使)로서 소명을 받고 올라와서, 집안에 이상한 병이 있다는 이유로 상소를 진달하고 나오지 않았다. 정원이 계청하여 다시 명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상이 명하여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게 하였다.
윤6월 3일 계해
이경억(李慶億)을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헌납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전 면천 군수(沔川郡守) 강전(姜琠)이, 권근(權慬)의 일에 대한 조사를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감(推勘)을 받아 마침내 도배(徒配)를 당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신은 그 당시의 도신(道臣)이었으니, 지금 죄를 논함에 있어서 이치로 보아 같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지난번에 추고하지 말라는명을 받아 요행히 면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태연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홍연이 일찍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에, 덕산 현감(德山縣監) 권근이 빌려준 곡식을 받아들이는 일로 사람을 곤장을 쳐서 죽인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했었는데, 조사를 분명하게 하지 못하여 추관 강전 및 이홍연이 모두 추고를 당하였다. 이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인피한 것이다. 간원이 도신(道臣)은 사관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임금의 명령이 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패초를 하여도 나오지 않는 폐단이 있으니, 참으로 아주 한심한 일입니다. 오늘 대사헌 정지화(鄭知和)는 비록 병이 들었더라도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병을 무릅쓰고라도 나와서 사은을 하는 것이 일의 체모를 보아 당연한 것인데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체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사헌 정지화는 체차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또 아뢰기를,
"장령 여민제(呂閔齊)는 병으로 행공하지 못하니, 역시 아울러 체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또한 따랐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박천 군수(博川郡守) 강열(姜說)을 갑산(甲山)에 옮겨 제수하셨는데, 강열이 비록 잘 다스린다는 명성은 있으나 나이가 이미 일흔이니 아주 먼 변방에 부임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게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강열은 청렴하고 백성들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갑산의 직임을 체직하였으니, 박천에 잉임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호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동래(東萊)에 상왜(商倭)가 나오면 으레 시장을 여는데,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가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검속하고 살펴서 잠상(潛商)을 엄하게 금합니다. 지난번에 석류황(石硫黃) 매매하는 일을 틈타서 우리 나라 사람들도 물화를 많이 싣고 가서 사사로이 중간에서 교역을 하였으니, 앞으로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제수된 부사 안진(安縝)이 지금 내려가게 되었는데, 비국에서 분부하여 엄하게 금지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홍명하가 또 아뢰기를,
"경기(京畿)에 대동법을 시행한 뒤에 연호(烟戶)의 부역의 괴로움이 매우 한쪽으로 편중되어 있습니다. 사부(士夫)들은 모두 부역에 응하지 않아서 소민(小民)들만 그 폐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신칙하여 일체 부역에 차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교리 장선징이 아뢰기를,
"승문원 권지 정자(權知正字) 최후상(崔後尙)은, 등제(登第)한 뒤에 그를 음해하고자 하는 자가 강도(江都) 때의 일을 가지고 헤아릴 수 없는 추잡한 말을 얽어서 청선(淸選)에 나오는 길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최후상은 그 추잡스러운 욕이 그의 모친에게 미치자 원통한 마음을 품고 벼슬길에 뜻을 끊었습니다. 인심의 험악함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매우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대개 강도의 일은 신이 눈으로 직접 본 일입니다. 정축년 정월에 청나라 군대가 강도를 함락하고서, 처음에는 약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상의 형 최후량(崔後亮)이 집안 사람들을 모아 놓고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 말하기를 ‘나는 화친을 주장한 최상서(崔尙書)의 아들이다. 상서의 가족들이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니, 청나라 장수가 고 정승 윤방(尹昉)에게 가서 후량에 대해서 물어보고 그 실상을 안 뒤에 즉시 그 가족들을 성의 서쪽 민가에다 두고 자신의 군사들로 하여금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피난간 사부(士夫)의 가족 및 본토의 남녀 30여 명이 모두 최씨 집안의 노비라고 칭탁하여 아울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대개 청나라 장수가 강화섬을 함락시킨 처음에 한(汗)이, 최상서의 가족이 섬 안에 있으면 잘 대우하라고 명했었는데, 마침 후량이 청나라 장수를 찾아가서 만났기 때문에 한 집안이 모두 보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나라 장수가 말 4필을 내관(內官) 백대규(白大圭)에게 주어 최씨네 집에 가져다 주도록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실상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전일 덕산 현감(德山縣監) 최세경(崔世慶)이 학궁(學宮)의 재임(齋任)으로 있을 때에 새로 천거된 재임 유명견(柳命堅)의 이름을 삭제하였는데, 유명견의 친구 채시귀(蔡時龜)가, 천거를 삭제한 일이 후상에게서 나왔다고 잘못 전해듣고는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불측한 말을 지어내어 중상한 것입니다. 후상이 등과(登科)한 뒤에 무함하는 비방이 널리 전파되어 세상에 자자하였는데, 선동하고 얽어 무함한 그 일이 채시귀에게서 나왔는지는 모르겠니다만, 그 말의 뿌리를 따져보면 채시귀가 한 짓입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축년 이후로 국가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실로 최명길(崔鳴吉)의 공인데, 명길이 난리 뒤에 신인(新人)들을 끌어다 등용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또 사족 부녀자로서 저들에게 잡혀갔던 자들에 대해서 이혼을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비방하는 자들이 ‘그 집안에 필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후상이 등제하자 바로 이러한 비방이 있었으니, 그 말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만 지금 만약 그 말의 근원을 따지게 되면 점점 서로 끌어들어 추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나라의 체모만 손상시킬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이미 상께서 그 근거없고 망령된 것을 통촉하셨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자세히 알았으니, 그 말의 뿌리에 대해서 다시 물을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홍명하도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 좌참찬 허적도 아뢰기를,
"무릇 말이 나온 뒤에 혹 분명하지 못하여 밝히기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만, 이 일은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니, 굳이 조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삼사(三司)에게 물으니, 집의 이정(李程)과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모두 아뢰기를,
"비록 잡아다 추문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분명히 밝혀졌으니 저절로 원통함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함하여 비방한 정상이 이와 같이 명백하니, 저절로 원통함이 풀린 것이다. 말을 만든 자를 굳이 잡아다 추문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함경 감사 민정중이 여러 차례 사직을 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속히 부임하여 공경히 일을 하도록 하였다.
전 감사 서필원이 직임을 제수받은 지 오래지 않아서 죄로 파직되었으니 그 품계를 그대로 띠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진소하여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체직된 것은 스스로 면직되기를 도모한 것이 아니니, 이미 제수한 품계를 다시 깎아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윤6월 4일 갑자
황해도에서 전염병이 심하게 번져서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윤6월 5일 을축
밤에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왜인이 《퇴계집(退溪集)》과 《고사촬요(攷事撮要)》를 무역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사간 오두인이 월과(月課)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윤6월 7일 정묘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이준구(李俊耉)를 사간으로, 이행진(李行進)을 호조 참판으로, 남로성(南老星)을 병조 참판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대사헌으로, 정륜(鄭錀)을 장령으로, 이유(李秞)를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치계하기를,
"동래부(東萊府)는 대마도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지역으로서 항상 변란에 대비해야 하는 곳인데, 성지(城池)가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동래 부사 이성징(李星徵)과 좌병사 이지형(李枝馨)과 상의하여 경내에 읍을 옮기고 성을 쌓을 만한 곳을 정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읍을 옮기고 성을 축조하는 것은 실로 중대한 일이니, 새 감사가 부임한 뒤에 다시 잘 살펴서 계문하게 하고 그뒤에 의논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그 일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윤6월 8일 무진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는 윤6월 16일에 월식이 있는데 4편의 산법(算法)으로 추산해 보건대 시헌 역법(時憲曆法) 및 외편법(外篇法)은 월식이 땅 아래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고, 대명 역법(大明曆法) 및 내편법(內篇法)에는 처음 이지러지는 시각이 해가 뜨는 시각과 가깝습니다. 달의 운행은 혹 영축(盈縮)에 있어서 변동이 없지 않으니, 달이 질 때에 만약 이지러지는 일이 있게 되면 보는 대로 구식(救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상감의 관원으로 하여금 남산(南山)에 올라가 잘 살펴보고 있다가 즉시 구식을 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금부가 박형(朴泂)에게 가형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박형은 일찍이 전라 좌수사로 있다가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 잡물을 많이 싣고 왔다.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그가 탐장죄를 저지른 정상을 치계하여, 두 번 조사를 했는데 장물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잡혀와서 형을 받았는데 이때에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 당시에 장법(贓法)이 엄하지 않아서, 전후로 장법을 범한 자가 체포되어 형신을 당하면서도 오래도록 자복을 하지 않다가 결국은 사면을 인하여 용서를 받았다. 황헌(黃瀗)과 박형 같은 자는 모두 탐장을 심하게 하여 응당 죽어야 할 자인데, 황헌은 공신이라는 이유로 사면되었고 박형은 또 특별한 분부로 사면되었으니, 실형한 것이 심하다.
경상도 안동부(安東府)에 우박이 내렸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또 진소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본직을 차지하고 있은 지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무릇 군정(軍政)에 관계되는 모든 차제(差除)를 단지 전례만을 따라서 하였고 구투를 벗지 못하였습니다. 연하(輦下)의 병포(兵布)를 오래도록 간악한 무리들이 사사로이 훔쳐가는데도 전혀 살피지 못하였고, 무관(武官)을 처음 선발하는 데 있어서 대부분 형편없는 자들로 구차하게 충당을 하면서 변통하지 못했습니다. 번(番)드는 일을 조용(調用)하고 책략을 내어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나 물자를 모으고 군사들을 키우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드러난 처벌이 미치지 않는다고 해서 어찌 한결같이 국록만 받아먹으면서 얻을 줄만 알고 잃을 줄은 모를 수 있겠습니까.
무반을 승진 발탁한 것이 한두 사람이 아닌데, 비록 이름은 뽑아서 선발하는 안에 있으나, 주의(注擬)할 때에 올리고 내리고 먼저 하고 뒤에 하는 것은 실로 신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변장(邊將)을 의망하여 차임하는 것은 벼슬살이한 기간과 오래도록 근실하게 근무한 것을 가지고 하였으나, 이미 어진이와 어리석은이를 구별하지 못해서, 좋은 자리를 얻은 자는 덕분에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나쁜 자리를 얻은 자는 왜 자신은 돌봐주지 않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잘못은 신에게 있는데, 원망은 국가로 돌아갔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김좌명의 상소에 병조의 폐정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매우 상세하다. 대개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모두 허명(虛名)을 따르고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기를 책임지우지 않았다. 이조에서 선발하는 것은 모두 사부(士夫)이기 때문에 비록 허명이라고는 하나 근거할 바가 있었으나, 병조는 시험 제도가 세밀하지 못하여 무사(武士)들의 바라는 마음이 한이 없었지만, 정관(政官)이 된 자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취하고 버리는 데에 근거할 바가 없었다. 오래 근속한 자를 으레 천거하는 이외에, 더러운 관리는 뇌물을 받고 등제시켜 주고 나약한 관리는 청탁을 따라서 경중을 매겼다. 비록 염치를 조금 아는 자라고 해도 또한 장부에 따라 차례대로 천거할 따름이었다. 김좌명이 비록 옛 관습을 벗어던지고 묵은 폐단을 변혁시키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스스로 알고 자신의 죄를 자책하였으니, 역시 당연한 것으로 보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보다는 낫다.
집의 이정, 장령 정륜이 조감(照勘)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윤6월 12일 임신
대사간 이홍연이 일찍이 판결사로 있을 때에 양사국(梁士國)의 송사를 잘못 청리한 잘못이 있고 또 격쟁인(擊錚人) 이승익(李承益)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언 신후재가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따랐다.
이보다 앞서 출신(出身) 양사국이 이영(李楹)이라는 자와 노비 문제로 송사를 많이 하여 이미 두 번의 처결을 거쳤다. 그뒤 양사국이 또 격쟁을 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해원(該院)이 속공(屬公)하자는 뜻으로 회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경연 신하의 아룀을 인하여, 두 번 신리(伸理)한 송사는 청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제도가 정하여졌으니, 본원에서 임의로 송사를 청리하는 것은 참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하였다. 이홍연이 판결사로 있을 때에 또한 전례를 따라 회계했었기 때문에, 지금 파직 추고를 혼자만 면하게 되자 불안하게 여겼다. 또 황간(黃澗)의 유학(幼學) 이승익(李承益)은 보은(報恩) 사람 김득수(金得洙)와 선산(先山)을 놓고 송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이홍연이 일찍이 본도의 감사로 있을 때에 형조의 회계로 인하여 조사하여 처결한 적이 있었다. 그뒤 이승익이 격쟁하여 ‘득수는 바로 감사의 6촌 손서이니, 본도의 조사 처결은 사정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면서 심하게 욕하고 헐뜯었다. 이 때문에 홍연이 이렇게 인피하게 된 것이다.
헌부가, 서필원(徐必遠)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고 아뢰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서필원이 복수(復讐)의 의리에 대해서 논했던 애초의 뜻은, 본래 《예경(禮經)》을 바탕삼아 일정한 제도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김만균(金萬均)의 일을 다른 신하들의 예와 다르다고 여겨서, 치우치게 미워하는 마음으로 노기를 점점 더하여 심지어 그 상소를 다시 내주라고 아뢰기까지 한 것이다. 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서필원을 공격하고 김만균을 두둔하게 되자, 서필원이 더더욱 격분하여 멋대로 노기를 띠고 욕을 하였으며 반드시 이기려고 하여 못하는 말이 없었다.
대각에 있는 자는 본디 일찍이 그 죄를 청해야 마땅한데도 서필원은 오래도록 조정에서 장려하며 쓴 인물이어서 명망과 지위가 이미 높았고 따르는 무리도 또한 많았기 때문에, 비록 잘못한 일이 있었으나 바로잡는 논계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모두들 먼저 발론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상소가 들어간 지 한 달이 지나서 유학(幼學) 조해(趙楷) 등이 비로소 글을 올려 서필원을 공격하고, 논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 삼사(三司)를 비난하니, 양사(兩司)의 관원들이 잇달아 인피하였다. 그뒤 지평 이규령(李奎齡)이 먼저 발론하고 정언 조성보(趙聖輔)가 이어서 발론을 하였는데, 박증휘(朴增輝)·박세당(朴世堂)·윤심(尹深) 등에게 저지당하여, 대각의 의논은 서로 버티다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태학생(太學生) 윤헌(尹攇) 등이 또 글을 올려 따지며 비난하였는데, 상이 매우 화가 나서 조정을 마음대로 제어하였다는 것으로 죄를 주고, 소두(疏頭)를 부황(付黃)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여, 관학(館學)이 그대로 권당(捲堂)을 하였다. 이어서 이규령과 조성보 등을 변방의 읍으로 내쫓아 보임하고 정관(政官)을 파직 추고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조정의 의논이 둘로 갈라졌다.
오랜 뒤에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강도(江都)에서 돌아와 비로소 서필원의 죄를 청하고 이어 전후 대관(臺官)들의 잘못을 논박했는데 엄한 분부를 받고 특별히 체직되었다. 그뒤 양사가 연계(連啓)를 했으나, 사람들이 대부분 회피하고자 하여 혹은 고향으로 내려가 체직되기를 꾀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소명을 받고도 나오지 않음으로써 체직되기를 꾀하는 자도 있어서 양사가 모두 비었다. 한 달이 지난 뒤에 집의 이준구가 고향에서 소명을 받고 올라와서 한 달이 넘도록 연계하여 쟁론하였는데,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에 이르러 정지한 것이다.
대개 복수하는 의리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냐 형과 동생 관계이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조부와 손자의 경우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와 구별지은 글이 없다. 서필원이 굳이 복제(服制)로 비교를 해서 그 경중을 나누어 의리를 절충한 것처럼 한 것은 참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고, 그가 쟁론한 김만균의 일과 같은 것은 《예경(禮經)》에서 이른바 복수라고 한 것과는 같은 일이 아니다. 병자·정축년의 난리 뒤로 우리 나라는 청나라에 대해서 온 백성이 원수로 여겼다. 신하된 자는 모두가 영원토록 꼭 갚아야 할 원수가 있게 되었으니, 어찌 오로지 하찮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리를 가지고 분별을 한단 말인가. 우리의 형세가 약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보면 개인적인 의리에 있어서는 분풀이를 할 수 없는 바가 있었으니, 반드시 이것을 두고 복수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어그러뜨리게 하는 짓이라고 몰아부치는 것도 역시 꼭 정당한 의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온 나라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하는 의리에 있어서는, 세도(世道)를 염려하는 자가 밝혀서 알려주고 뜻을 키워주어서 세월이 오래되어 점점 잊혀지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시열이 일의 단서를 인하여 그 의리를 펴서 서필원을 심하게 논죄한 이유이다. 당시에 서필원을 공격한 자들은 이러한 뜻도 잘 모르면서 다만 김만균의 일로써 해당시켰으니, 또한 매우 미혹된 것이다. 더구나 서필원은 허황되고 무식하여 깊이 논할 것도 없는 자였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반드시 서필원을 편파적으로 비호하고 공론을 막으려고 하여, 공론이 여러 차례 발론되고 여러 차례 정지되다가, 마침내 대각이 오래도록 비고 온 조정이 엉망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윤6월 13일 계유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이유(李秞)를 장령으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윤강(尹絳)을 공조 판서로, 정륜(鄭錀)을 정언으로,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구문치(具文治)를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홍수가 진 뒤에 가뭄이 또 심하니, 백성들의 일이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경기 지방은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 매우 급하나 호남과 호서 지방은 큰물이 져서 곡식을 손상시켰으니 또한 걱정이 됩니다."
하였다. 우상 홍명화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이조 낭관의 정순(呈旬)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요즈음 조정이 존중되지 않고 체통이 크게 무너져 아랫사람들이 임금의 명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조금만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염치를 핑계대며 모두들 직무를 살피지 않습니다. 지금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의 말을 들으니, 이조에는 단지 좌랑 여성제(呂聖齊)만 남았는데 또한 정순(呈旬)하고 출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참으로 매우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성제가 무슨 일 때문에 불안해 하는가?"
하였는데, 홍명하가 아뢰기를,
"좌랑 이민서(李敏敍)가 특별히 파직될 때에 여성제도 같은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지방에 나가 있다가 홀로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불안하게 여깁니다. 해조 낭관은 근시(近侍)와 다르고 조정에서 대우하는 것도 같지 않은데 반드시 이민서와 더불어 거취를 같이 하려 하니, 그 습속이 가증스럽습니다. 인조(仁祖) 말년에 나이 어린 무리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는 없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정순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만약 병으로 나오지 않는 날이 30일이 차면 으레 체차를 합니다. 때문에 이것으로 기한을 삼아 반드시 체직되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는 실제로 병이 들어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그 사실을 아는 자를 제외하고는 비록 병으로 나오지 않는 날이 30일이 되더라도 체차를 허락하지 말라. 가랑청(假郞廳) 단자도 또한 정원으로 하여금 받아들이지 말게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에는 노비 면역(奴婢免役)이 큰 폐단이 되기 때문에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면역시키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이미 있었는데,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았으니, 관리들은 그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해년 금령을 정한 뒤로 마음대로 면역시킨 자를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일찍이 호조 판서 정치화의 아룀을 인하여, 관서미(關西米)를 맡아 운송해 온 차사원 광량첨사(廣梁僉使) 정섬(鄭暹), 조선 압령관(漕船押領官) 정석달(鄭碩達) 등에게 논상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대전(大典)》에 50척을 패선시키지 않고 운반한 자는 가자하고 자궁자(資窮者)에게는 준직(準職)을 준다는 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일에 맡아 운송해 온 강준(姜俊)도 만호에 제수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50척을 운송해 오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바다를 통해 운송해 오는 일은 과연 쉽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비록 준직을 상으로 주더라도 이미 거기에 해당하는 직책이 없으니, 끝내 등용해 쓸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즉시 첨사에 제수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또 노강 첨사(老江僉使) 고흡(高嶖)도 또한 서쪽에서 올라오는 쌀 1만여 석을 두 차례에 걸쳐 운송해 온 일이 있는데, 전일 정치화가 진달할 때에 빠지게 됨을 면치 못했습니다. 일체로 논상을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모두 만호라면 마땅히 첨사로 올려야 되겠으나 정섬과 고흡은 모두 첨사이니, 어떻게 상을 주어야 되겠습니까?"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들은 모두 재능이 있으니, 수령을 제수하더라도 무방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섬과 고흡은 수령에 제수하고 정석달은 벼슬을 올려 주도록 하라."
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시재(試才)에 중신을 보내야 합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굳이 중신을 보낼 것은 없고 승지를 보내도 된다고 봅니다."
하고, 좌참찬 허적이 아뢰기를,
"서필원은 처음 대신을 보내 변방을 순행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미 대신을 보내지도 않고 또 중신을 보내지도 않는다면 변방의 백성들이 필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변방을 시찰하면서 시재를 하는 것은 변방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상께서 명하신다면 누군들 못 가겠습니까? 신이 다녀오겠습니다."
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대사마(大司馬)가 변방에 나가는 것은 보고 듣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 것이니, 이것은 결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중신을 보내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경상도 전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병조가, 신이 각포(各浦)를 순찰할 때에 먼저 계문을 하지 않은 일 및 우수영 우후를 파출시킨 일을 가지고 추고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아주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대개 순찰을 할 때에 먼저 계문을 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전례가 있기는 하나, 새로운 규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크게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만, 우후를 논계하여 파출시킨 일을 가지고 관을 침해하였다고 하며 죄를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영의 우후 가운데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자를 순찰사가 살펴서 논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통영(統營)이 오직 교만한 버릇만 자라나서 방비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고 열진의 변장들도 따라서 감사를 멸시하고 통영을 기쁘게 하는 일에만 힘쓸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해변 방비를 위하여 깊이 염려하는 바입니다. 또 통영의 관리가 침탈과 횡령이 끝이 없는데, 때때로 발각하는 일이 있으면 혹 통영에 이문(移文)을 하고 혹 우후에게 전령(傳令)을 하여 조금이나마 저지시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 이렇게 추켜주게 되면 통영은 이문을 시행하지 않고 우후는 전령을 받지 않고서 자기들 멋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누가 다시 겁내어 조심을 하겠습니까. 신의 소장을 묘당에 자문하여 분명하게 지휘를 내리시어 일의 체모를 보존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안도 각읍의 포자(鋪子) 37개를 혁파하였다. 우상 홍명하의 말을 따른 것이다.
경상도 거제현(巨濟縣)의 읍치(邑治)가 기후 풍토가 매우 나빠서 관리들이 병들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감사 이상진이, 본현의 서쪽 20리 떨어진 명진촌(明珍村)으로 읍을 옮길 것을 계청하였다.
관서 지방에 큰 비가 내렸다.
윤6월 14일 갑술
장령 정창도(丁昌燾)와 지평 이섬(李暹)이 조율한 것이 합당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민시중이 아뢰기를,
"무릇 크고 작은 명령들을 반드시 정원을 거쳐서 하는 것은 사문(私門)을 막고 사경(私逕)을 예방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에는 정원 이외에 또 차비 전교(差備傳敎)가 있습니다. 지난번 반궁(泮宮)에 개좌(開坐)하던 날에 신이 관관(館官)으로서 나가 참여하였었는데, 내관(內官)이 본관의 하인을 불러 말을 전하기를, ‘상께서 내인(內人)의 양병가(養病家)를 짓도록 명하셨는데 북학(北學)의 섬돌[砌石]을 갖다가 쓰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이는 아마도 환관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터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여기고는, 이어 장관과 함께 의논하여 ‘만약 상의 명이 있었다면 마땅히 정원에 내려야 한다. 내관이 입으로 전한 것은 따를 수가 없다.’고 답을 보냈습니다. 지금 들으니, 주장 내관(主掌內官)이 호조에 직접 통지하여 ‘만약 본조에서 사유를 갖추어 초기(草記)를 올리면 윤허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상의 뜻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아,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는 나라가 망할 조짐입니다. 전하께서 한 나라에 높이 임하시어 호령을 발하여 시행하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기에, 도리어 집안의 종으로 하여금 은미한 의도를 전해 보이게 하여 넌지시 조정의 신하로 하여금 뜻을 굽혀 봉행하게 하십니까. 성세(聖世)에 있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렇게 해나가기를 마지 않으면, 뒷날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때에 내관은 ‘성상의 뜻이 이러하다’고 하고 조정 신하는 ‘내관이 전한 것이다’라고 하여 서로 받들면서, 감히 어기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전복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차비 내관(差備內官)이 상의 뜻을 빙자하여 멋대로 농간을 부린 일인데, 마침내 외정(外廷)을 마음대로 부리기까지 하였으니, 불문에 부쳐둘 수가 없습니다. 호조는 내관의 말을 받들어 조정의 체모를 무너뜨렸으니, 또한 아주 형편이 없습니다. 그 일을 맡았던 내관을 적발하여 죄를 주시고 호조의 담당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북학의 섬돌을, 호조의 초기를 인하여 어디로 옮겨 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이 일이 옳지 않음은 의리가 아주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고부터 역대 제왕(帝王) 가운데 의혹되지 않은 자가 드뭅니다. 그들을 쫓아내고 그들이 살던 곳을 학궁(學宮)으로 만들어, 우리 조정에서 한 것처럼 훌륭하게 처리한 자가 누가 있습니까. 사방에 소문이 퍼지고 사림(士林)들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거처하는 곳이 위치가 궁벽해서 학업을 닦기에 불편하다고 하여, 반궁(泮宮)으로 철거해 옮겨 학사를 수리하는 데에 보태게 하셨습니다. 앞뒤로 내리신 수교(受敎)가 매우 간곡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딴 곳으로 옮겨 써서, 당초 이교(異敎)를 내치고 학교를 숭상한 전하의 성스러운 뜻을 무너뜨리시는 것입니까? 더구나 내인의 질병을 요양하기 위한 집이 얼마나 미세한 일인데 그런 하찮은 일을 위하여 학궁의 섬돌을 가져다가 써서 사방에서 듣고 보는 사람들의 이목을 의아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일하기의 편리함 여부를 따지며 의리상의 마땅함 여부를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북학의 섬돌을 옮겨 쓰라는 명을 거두소서.
호조가 초기를 올릴 때에 하리가 이미 내관이 말을 전한 사유를 말했다면,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인데, 정원이 태만하여 주의하여 보지 아니하고 전례에 따라 입계를 하였으니,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체모를 잃은 것이 또한 호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담당 승지를 무겁게 추고하소서.
궁중과 정부는 일체이니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국가의 명령이 나오는 길이 두 갈래여서 하나는 정원으로 나오고 하나는 차비로 나옵니다. 이것은 실로 성인의 사사로움이 없는 도가 아니며 조종조에는 없던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크고 작은 명령을 모두 정원에 내리시어 출납의 책임을 전담하게 하여 공평하고 정명한 치도를 밝히소서.
제궁가의 작폐가 날로 더욱 심해져서 망할 조짐을 불러들이고 반란할 소지를 만들고 약한 자를 능욕하고 외로운 자를 속이니, 이것은 모두가 각궁의 주장 내관(主掌內官)들이 권세를 믿고 침탈하는 데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래 금평위(錦平尉) 집의 주장 내관 김희안(金希顔)이 상한(常漢) 이충준(李忠俊)의 계집종을 강제로 빼앗았는데, 충준이 형조에 정장(呈狀)을 하자, 형조가 판결하여 충준에게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희안이 궁노(宮奴)들을 많이 보내어 그 계집종을 빼앗아 끝내 내주지 않았습니다. 충준이 연줄을 통해 부마(駙馬)의 본가에다가 통고를 하고 출급해 주기를 바라면서 궁가 근처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마침 그 계집종을 만나 잡아 오려고 했는데, 궁노들이 뛰어나와 마구 때리고 궁문으로 끌고 들어가서 종일토록 묶어두었습니다. 길가던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하고 놀라서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짓을 저지른 궁노는 이미 본부에서 추고하여 다스렸습니다만, 이치에도 맞지 않게 멋대로 탈취한 죄는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집의 주장 내관 김희안을 파직하라고 명하소서.
탐장(貪贓)을 다스리는 법률은 법전에 분명하게 실려 있으니, 참으로 일시적인 은혜를 관대하게 베풀어 그 법을 굽혀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박형(朴泂)은 간사한 탐장이 낭자하여 형적이 드러났으니 유사는 마땅히 법대로 주벌을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려두었으니, 이미 실형을 한 것입니다. 하물며 이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누가 놀라고 분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정의 법은 오로지 관대한 것을 숭상하였으나 유독 장법(贓法)에 있어서만은 매우 엄히 지켜서 일찍이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 박형은 법을 농락하고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중한 죄를 지었는데, 무슨 용서할 만한 점이 있다고 특별히 관대하게 풀어주어서 탐관오리들로 하여금 징계되는 바가 없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박형에 대해서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정원의 임무는 오로지 출납을 맡는 것이니, 모든 제반 명령에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일에 따라 개진을 하여 잘못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 직분입니다. 지금 박형을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한명은 법에 있어서는 실형이고 일에 있어서는 잘못된 거조인데, 태만하여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봉행하기에 겨를이 없어 끝내 복역하지 않았으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그냥 둘 수가 없습니다. 담당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파직하는 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는 일, 추고하는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 해당 내관 김희안은 먼저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라. 끝에 거론한 박형의 일에 대한 두 조목은 그대들의 생각이 매우 짧은 것이다. 비록 악역의 죄라도 형을 가하여 승복하지 않으면 혹 의논해서 처리하는 일이 있다. 비록 장리(贓吏)라고 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여야 된다고 하는 경우가 아니면 혹 의논해 처결하게 하거나 조사해 처결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만약 죄가 있는데도 의논해 처결한 것이 너무 느슨하면 백방으로 논계해도 안 될 것이 없다. 그런데, 봉행한 승지를 추고하라고 아뢰기까지 한 것은 망령되고 경솔한 일이다."
하고, 드디어 정원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질병가(疾病家)를 설치하는 것은 단지 내외를 엄하게 하고 궁금을 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일이 비록 하찮고 긴요하지 않으나 말세에 궁금이 엄하지 않게 되는 것은 다만 이로 말미암는다. 그래서 우선 담당 내관으로 하여금 수본(手本)을 보내 다시 설치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데, 지금 말이 임금을 능멸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한 내관, 한 하리가 왕복하며 한 말을 가지고 바로 임금을 이토록 의심하니, 아, 위아래가 막힌 것이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어찌 하나의 하찮은 일로 인하여 이토록 수모를 겪어야 한단 말인가. 질병가를 다시 설치하는 일을 즉시 정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인수(仁壽)와 자수(慈壽)의 두 이원(尼院)을 혁파하여, 자수원의 것은 재목과 기와를 성균관에 내리어 학사를 수리하는 데에 쓰게 하였고 인수원의 자재는 옮겨다가 질병가를 짓도록 하였다. 질병가라는 것은 궁인 가운데에 질병이 든 자를 거처하게 하는 집이다. 조종조로부터 이 집을 설치해 두었었는데 중간에 폐지했던 것이므로 지금 다시 설치하려는 것이다. 내시(內侍) 윤완(尹完)이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자수원이 질병가에 가깝고 인수원이 성균관에 가까워 상께서 그 섬돌을 편리에 따라 바꾸어 쓰게 하였다는 것으로, 호조의 아전을 시켜서 관관(館官)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관관이
"당초에 떼어받은 것이 탑전의 결정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내관의 말을 따라서 선뜻 봉행할 수는 없다."
하니, 윤완이 또 그 뜻으로 호조의 아전에게 말하여, 호조로 하여금 스스로 초기를 쓰게 하였다. 이때에 이경억이 대사성으로 있다가 승지로 옮겨 제수되었는데, 아뢰기를
"섬돌을 바꾸어 쓰는 것은 일의 형세가 양쪽이 다 편리하나, 명백한 하교도 없는데 중관(中官)이 성상의 뜻이라고 칭탁하고 사사로이 해조에 분부를 하였으니, 실로 무궁한 폐단에 관계가됩니다. 해조가 허실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따라서 시행한 것은 일의 체모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담당 관원을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경억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지난밤에 본원에 내린 분부가 말씀이 매우 엄하였고 질병가를 짓는 일을 속히 중지시키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신이 어제 아침에 경솔하게 진계하여 해조를 추고하기를 청했는데, 지금 이 하교가 비록 대각의 논계가 지나친 것을 인하여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신의 진계가 실로 그 이전에 있었으니, 황공히 대죄합니다."
하고, 또 우승지 안후열과 함께 아뢰기를,
"질병가를 짓는 일은 실로 궁금을 엄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조종조의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으로서 이 일은 그만둘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각의 논계를 인하여 심지어는 말이 임금을 능멸했다느니 바로 임금을 의심했다느니 하는 말로 분부를 하시고 이어서 정파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거조가 평온하지 못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마음을 평온하게 지니시고 이치를 살피시어 비망기를 다시 거두시고 이전대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 홍만용(洪萬容)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헌부에 어제 밤에 내린 비답을 보고 이어 비망기를 보건대, 말씀이 매우 엄하였습니다.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깜짝 놀라, 천지처럼 큰 전하의 도량에 유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질병가를 설치하는 것은 내인을 여염에 섞여 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서, 조종조에서 설립한 뜻이 내외를 구분짓고 궁금을 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다시 복구하라고 하신 분부는 실로 한가하게 영선하는 일에 견줄 바가 아닌데, 내관 및 하리가 왕복하며 일을 잘못하여, 헌부가 바로잡는 논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뜻은 다만 사경(邪逕)을 예방하고 사문(私門)을 막으려는 데에 있었으니, 그 멀리 내다보는 염려와 과감하게 말을 하는 기상은 숭상할 만한 것이지 화를 낼 일이 아닙니다. 지금 대각의 논계는 다만 섬돌을 옮겨다 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만을 아뢰었는데, 전하께서는 갑자기 질병가 짓는 일을 정지하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이는 실로 말투가 불평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심지어 곧바로 임금을 의심하였다느니 능멸했다느니 수모를 당했다느니 하는 말들은 더더욱 실정을 벗어난 말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선(善)을 받아들이는 대성인(大聖人)의 도량은 아마 이러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더구나 형을 받은 장리(贓吏)에 대해서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을 깊은 생각 없이 선뜻 내리셨으니, 헌관이 환수할 것을 계청한 것은 실로 법을 지키자는 의논입니다. 어찌하여 굳이 망령되고 경솔했다는 등의 말로써 먼저 기를 꺾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민시중(閔蓍重)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어제 정원에 내리신 분부에 ‘임금을 지나치게 의심한다.’고까지 하교하셨다고 하니, 신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아,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의리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은 것인데, 일찍이 아비를 의심하는 아들이 없었다면, 어찌 임금을 의심하는 신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 내관이 성상의 뜻을 칭탁하였으니, 그 일이 비록 하찮으나 그 조짐은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신의 뜻은 다만 즉시 논죄하여 그 미세한 조짐을 막으려고 한 것인데,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도리어 엄한 비답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임금을 능멸했다고 하는 분부와 같은 것은 더욱이 신하로서는 감히 들을 바가 아닙니다. 신이 논한 것은, 환관이 임금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서 섬돌을 옮겨가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한 것일 뿐인데, 망령된 말이 한 번 나오자, 성상께서는 매우 노하여, 질병가 짓는 일을 정지시키기까지 하셨으니, 더욱 성인의 화평한 기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박형을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은 실로 크게 실형(失刑)을 한 것입니다. 박형이 지은 죄는 탐장을 극도로 한 것만이 아니고 그 형적도 다 드러나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압니다. 어찌 그가 승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용서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출납하는 신하는 끝내 복역을 하지 않았으니, 직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의견을 아뢰어 망령되이 성상의 노여움을 촉발시켰으니, 감히 얼굴을 들고 그대로 눌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간원이 출사시키기를 계청하니, 따랐다.
평안도 양덕(陽德) 땅에 연일 많은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고 네 사람이 깔려 죽었다.
윤6월 17일 정축
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이백린(李伯麟)을 지평으로, 홍처대(洪處大)를 병조 참의로, 이상일(李尙逸)을 형조 참의로, 정지화(鄭知和)를 우윤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성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수찬으로, 김우석(金禹錫)을 헌납으로 삼았다.
지평 민시중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망령되이 성상의 위엄을 저촉하여 스스로 죄를 자초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논열한 것은 꾸짖어 내치시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처치하여 출사하게 한 것은 실로 뜻밖이었습니다. 이어 옥당의 차본(箚本)을 보니, 신의 말이 지나치다고 하였습니다. 아, 내관의 교만 방자함을 바로잡는 것이 부당하단 말입니까? 임금의 잘못된 거조에 대해서 간쟁하는 것이 부당하단 말입니까? 아니면, 말하는 가운데 그릇 비호하려고 힘쓰는 것에 대해서 일에 따라 지적을 하여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부당하단 말입니까? 신은 하찮은 신진으로서 오래 알고 지내지도 못한 주제에 말을 심하게 하여 임금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고, 옥당은 공론이 있는 곳인데 또한 신이 한 말에 대해서 지나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태연히 무릅쓰고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출사시키기를 계청하니, 따랐다.
호군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여 문형(文衡)을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호남에 큰물이 졌다. 곡성(谷城), 구례(求禮) 등의 읍에 산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이 5명, 떠내려가 죽은 사람이 2명이고 많은 집들이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남원부(南原府)에는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이 2명이었다.
전라도 광주(光州)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윤6월 19일 기묘
대사간 이홍연 등이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은화(銀貨)는 근년에는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게 될 것을 염려하여 꾸어주는 것을 전혀 허락하지 않는데, 전 주부(主簿) 이제현(李齊賢)은 일찍이 낭청으로 있을 때에 상관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부경 역관(赴京譯官)들에게 마음대로 꾸어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군수(軍需)를 멋대로 꺼내어 사사로이 남에게 꾸어준 그 죄를 보통으로 처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전라도 고부(古阜) 등 일곱 고을에 소의 전염병이 심하게 번졌다.
헌납 김우석(金禹錫)이 추감(推勘)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윤6월 20일 경진
장선징(張善瀓)을 헌납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윤6월 21일 신사
호남에 큰물이 졌다. 전주(全州) 경내에 산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이 5명, 떠내려가서 죽은 사람이 18명이고 휩쓸려 떠내려간 집이 80여 호였다. 본도에 명하여 휼전을 거행하게 하였다.
전주(全州), 진안(鎭安) 등에 벼락을 맞아 죽은 사람이 4명이었다.
윤6월 22일 임오
행 대사헌 이일상(李一相)이 사직하니, 체직하였다.
황해도 안악(安岳)·서흥(瑞興)·봉산(鳳山)·수안(遂安) 등의 읍에 있던 포자(鋪子)를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당시에 의논하는 자들이 양서(兩西) 지방의 포자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황해 감사 오정원(吳挺垣)이 치계하기를
"영문(營門)의 용도가, 1년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1년에 쓸 비용을 비교해 보면 태반이 부족합니다. 만약 전환하여 이자를 불리지 않고 단지 본전으로 잇대어 쓰려고 한다면 실로 그 길이 없습니다. 도내의 포자 열한 곳 가운데, 여섯 곳은 혁파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없게 하고 다섯 곳은 그대로 두어 전판(轉販)하여 이자를 불리는 바탕으로 삼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비국이 이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윤6월 23일 계미
장령 이유(李秞)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 이두진(李斗鎭)은, 지난번 서원현(西原縣) 공도회(公都會) 때에 객사(客舍)에 시험장을 설치한 일을 가지고 거자들에게 화풀이를 하여 거자들을 내몰아 파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가 저지른 전도되고 망령된 정상은 조정에서도 다 아는 일이며 선비들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는 바입니다.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그 죄를 그냥 두고 논핵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윤6월 24일 갑신
권대운(權大運)을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박세모(朴世模)를 형조 참판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김우석(金禹錫)을 집의로, 이단하(李端夏)를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평사(評事)는, 인조조(仁祖朝)로부터 폐단이 있다고 하여 폐지하고 오래도록 두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신의 계청을 인하여 해조로 하여금 엄밀하게 선발하여 차견하게 한 것인데, 남이성(南二星)이 병으로 체직되자 이단하를 평사로 삼은 것이다.
경상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병이 위중하여, 비국이 아뢰어 체직시켰다.
경상도 여러 고을에 충재(蟲災)가 발생하여 곡식을 해쳤다.
밤 3경에 달이 필성(畢星)의 큰 별을 침범하였다.
윤6월 25일 을유
대사간 이홍연 등이 아뢰기를,
"사예 맹주서(孟胄瑞)와 정랑 정중휘(鄭重徽)는 일찍이 대관으로 있을 때에 혹은 전후로 분명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일이 매우 형편없었고 혹은 일에 임하여 몸을 사려 형적이 매우 구차하였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헌부의 관원들이 제회(齊會)하지 않아서, 도사(都事)와 수령들이 서경(署經)을 거치지 못한 자가 많았다. 정원이, 아직 숙배하지 않은 대관들을 패초할 것을 계청하여, 집의 김우석(金禹錫), 지평 이백린(李伯麟)이 소명을 받들고 대궐에 나왔는데, 숙배한 뒤에 바로 정고(呈告)를 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헌부 관원으로서 소명을 받들고 사은 숙배한 사람이 세 사람인데, 바로 정고를 하고는 계하한 일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근래에 태만하고 자신만 편하려는 습속을 비록 일일이 바룰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거조가 근거가 없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까닭없이 인피하고 들어간 대간을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여, 조정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보존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매우 한심하다. 모두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장건(張鍵)을 지평으로, 임의백(任義伯)을 경상 감사로 삼았다.
윤6월 26일 병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왜인이 야학(野鶴) 열 마리와 옥대구(玉帶鉤) 열 개를 사가고자 하였는데, 단지 야학만 허락하고 대구(帶鉤)는 본국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개유하고 허락하지 않고, 동래(東萊)의 상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매매하게 하였다.
윤6월 27일 정해
상이 희정당에 나가서 침을 맞았다. 다 맞은 뒤에 약방 도제조 홍명하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 정치화는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체직시키기는 아깝습니다만, 밖으로 사신을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이제 막 대각의 탄핵을 받았으니, 체직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홍명하가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충청 병사 이두진(李斗鎭)과 서원 현감(西原縣監) 홍주삼(洪柱三)의 일은, 서로 싸움질을 한 것과 같기 때문에 둘 다 잘못이 있었습니다. 이두진은 직첩을 거두고 진래추고(進來推考)하고, 홍주삼은 잡아다 추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감사를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윤6월 28일 무자
상이 침을 맞았다.
윤6월 29일 기축
선혜청이 아뢰기를,
"본청의 사목에, 각읍의 관수(官需)를 범삭(犯朔)024) 하여 남용하지 말 것으로 계하하였는데, 파주(坡州)의 전 목사 이정(李晶)·이경면(李慶綿), 죽산 부사(竹山府使) 구의준(具義俊)은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 모두 범삭하여 끌어썼습니다. 이정과 구의준은 사사로이 쓴 것은 아니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이경면은 사사로이 썼으니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는데, 따랐다.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지난번 호조에서 아뢴, 섬돌을 옮겨다 쓰게 하자는 계청은, 마침 그 날이 판서가 정고한 날이었기 때문에 참판 이행진(李行進)의 손에서 나온 것인데, 이행진의 사직하는 상소에는 그 실상은 전혀 말하지 않고 단지 ‘신도 참여했습니다.’라고만 하였으니, 일의 부실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번 상소한 뒤에 곧바로 출사하여 오로지 장관에게만 허물을 돌려서, 비방을 면해보려는 계책을 세웠으니, 염치에 큰 손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욕을 합니다. 신이 어제 간통(簡通)을 내어 논계하여 파직시키려고 했는데 동료들의 의견이 서로 달라 끝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헌납 장선징, 대사간 이홍연, 사간 이준구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해조의 크고 작은 일은 반드시 수석이 주관을 합니다. 자리에 있었거나 없었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허물을 돌리고 비방을 명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본래의 실정이 아닙니다. 갑자기 파직시키자고 탄핵을 하는 것은 법 적용이 너무 지나칠 듯합니다."
하였다. 정언 정륜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탄핵하는 글을 조금 고치고자 하였는데 동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단지 작은 실수를 가지고 단안(斷案)을 삼아 반드시 파직시킬 것으로 논계하고자 한 것은 지나친 일인 듯합니다. 글을 고치고자 한 것은 의논에 신중을 기하고자 한 것이나, 이미 그 의논을 따랐고 보면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후재, 정륜은 체차하소서. 사람을 논핵하는 일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먼저 일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책임질 사람이 있습니다. 장선징, 이홍연, 이준구는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8월 (0) | 2025.12.04 |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7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6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5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0권, 현종 5년 1664년 4월 (0) | 202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