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경인
상이 또 침을 맞았다.
7월 2일 신묘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윤집(尹鏶)을 병조 참지로, 우창적(禹昌績)을 지평으로, 정창도(丁昌燾)·윤심(尹深)을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 좌랑 이유상(李有相)이 병을 이유로 사직의 글을 올리자, 이조가 가랑청(假郞廳)으로 차출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정원이 받아들이지 않고 추고하라고 계청하였다. 상이 유상의 병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중한가를 정원에 묻자,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대답하기를,
"신이 본디 그 사람과 모르는 사이여서 그의 병세를 직접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리에게 물어보았더니 ‘한증(寒症)이 조금 낫자, 이질에 걸려 제대로 출입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나라의 기강이 아무리 해이되었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처럼 심한 적이 있었는가. 이조 좌랑의 일에 대해 두세 차례나 하문하였는데도 끝내 실상을 모른다고 대답하니, 임금을 속이고 국법을 무시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 다스리지 않으면 뒤에 오는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당해 승지를 잡아다 조사하여 처리하고, 유상의 추고 전지(推考傳旨)도 금부에 내리라."
하였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이원정이 하문을 받고서 그 즉시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대개 원정이 시골에서 생장한데다 줄곧 외직에만 있었으며, 이유상과는 본디 모르는 사이였으므로 병세가 어떠한지 참으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본정을 따져보면 필시 다른 뜻이 없는데, 이제 위를 속였다는 것으로 죄목을 만들어서 심지어 잡아다 추문하라고까지 하시니, 어찌 중도(中道)에 벗어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잡아다 추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릉(獻陵)의 정자각(丁字閣)을 중건하였다.
7월 3일 임진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홍명하(洪命夏),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이원정(李元禎)이 위를 속였다는 말은 본정에 맞지 않는다는 뜻을 진달하고 여러 차례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이행진(李行進)에 관한 의논에 관해 신이 감히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던 것은, 행진의 의도가 필시 이와 같은 데 이르지는 않았으리라고 여기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내 구차하고 나약한 처사가 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규핵하는 논의가 설령 과격했다 하더라도 분명하고 강직한 데는 손상됨이 없었습니다. 본의를 따져야 한다는 말은 신중한 데서 나온 것 같지마는 그로 인한 폐단은 무력하게 되는 그런 것이므로, 처치할 적에 신은 체직되었어야 합니다. 체직되지 않은 것을 요행으로 여겨 얼굴을 추켜들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장령 이유(李秞), 지평 장건(張鍵)이 처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헌납 장선징(張善瀓), 사간 이준구(李俊耉)도 이어 인피하였는데, 헌부가 모두 체차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우부승지 김수항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시폐(時弊)에 대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요즘 조정에 체통이 크게 무너지고 공론이 펼쳐지지 않아 안이하게 그럭저럭 시일이나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자질구레한 일에만 힘쓰고 잗단 일을 들추어내는 것만 숭상하고 있으며, 밑에서는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며 스스로 편한 것만 으뜸으로 삼고, 그저 죄나 면하려고만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한 번 살펴보소서. 오늘날 충심으로 나라를 위해 시무(時務)를 책임지는 자가 몇이나 되며, 지혜와 생각을 다하여 국사에 노고하는 자가 몇이나 되며, 아는 것을 다 말하여 위로 임금을 도우는 자가 몇이나 됩니까? 풍속이 날로 박해지고 기상도 위축되어 다시는 진작될 기세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특별히 대관(臺官)을 파직하신 것은 이를 격려하기 위해 취해진 조처로서, 신처럼 연약하고 못난 자도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 흥기되었습니다. 사람들도 고무되었으며, 조정의 관료들도 숙연해졌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처치를 알맞게 하여야 인심이 복종한다.’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미루어 나아가 굳센 의지를 분발하여 뭇 신하를 격려하고 대신을 믿으며 대간을 신중히 가리어 퇴폐된 폐습을 깨끗이 씻어버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질병가(疾病家)를 둔 것은 바로 조종(祖宗)의 옛 제도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의 계사가 뜻에 거슬리자 마침내 정파하라고 하셨으니, 이는 성상의 화평한 거조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사리를 살펴 다시금 전의 명을 거듭 밝히소서.
서북(西北)에 사는 백성들의 곤궁함은 극심합니다. 북로(北路)는 중신을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탐문할 것입니다만, 서관(西關)에는 조정의 호령과 정신이 미칠 겨를이 없는데다가 백성의 실정을 알릴 길이 없고, 폐정(弊政)을 변통할 방도가 없습니다. 한번 가까이 있는 신하를 보내어 사정을 염탐하고 물어보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장려하고,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7월 4일 계사
허적(許積)을 호조 판서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윤비경(尹飛卿)·강유(姜瑜)를 승지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간으로, 정륜(鄭錀)을 헌납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지평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좌참찬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사간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민진익(閔震益)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대사간 김수흥이 추함(推緘)을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차하였다.
경상도 각 고을의 진휼에 사용할 미곡에 대해서는 특별히 견감하였으며, 굶주리고 병든 백성이 받은 조적(糶糴)에 대해서는 모곡(耗穀)을 면제해 주었는데, 이는 전 감사 이상진(李尙眞)의 청에 따른 것이다.
7월 6일 을미
이경휘(李慶徽)를 대사간으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민유중(閔維重)을 교리로 삼았다.
집의 오두인이 두 차례나 추함을 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차하였다.
7월 8일 정유
이준구(李俊耉)를 집의로, 김수흥(金壽興)을 병조 참지로, 오두인을 수찬으로, 이진(李𥘼)을 호조 참의로, 홍만용을 부교리로, 김익경(金益炅)을 승지로, 장건(張鍵)을 지평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이상진이 본도 요새지에 성을 쌓는 일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동래에서 대구에 이르기까지 1개의 성지(城池)도 없으니, 적이 만일 상륙한다면 그 형세가 무인지경에 들어오는 것 같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임진년과 정유년에 혹독하게 병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동래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계문하였습니다만, 동래에서 직로(直路)로 1백 20리 되는 곳에 밀양부(密陽府)가 있습니다. 이 부의 성이 있는 곳은 그야말로 상류의 요충지로서 지형이 험악한데다가 강물을 끼고 있으니, 수비의 형세가 산성(山城)에 비할 만합니다. 비록 성 안에 샘물은 부족합니다만, 남문의 왼쪽은 바로 강언덕이니 절벽이 끝난 곳을 파서 쌓아 올린 다음, 비밀 수문(水門) 하나를 만들어 물을 끌어다가 저장한다면 물이 한정없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세가 이와 같은데도 설치하지 않은 채 버려두고 있으니, 그지없이 애석합니다.
그 다음으로 경주읍(慶州邑)도 하나의 요새지이니,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울산으로 상륙하여 올라오는 적의 길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영천군(永川郡)인데 경주와의 거리는 70리이며, 밀양과의 거리는 1백여 리입니다. 산기슭에 고을이 자리잡고 있어서 샘물이 넉넉하며 사면의 형세가 수비할 만하니, 성을 쌓기만 하면 역시 충분히 관방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대구부인데 곧 사통 오달하는 지역으로 비록 평지에 있다고는 하나 큰 관방을 만들 만합니다. 성을 굳게 쌓고 도랑을 깊이 판다면 어찌 평지라고 지키지 못하겠습니까. 동래·밀양·경주·영천에 모두 성이나 진(鎭)을 만들어 바둑돌처럼, 솔밭처럼 벌려놓아 성세가 서로 의지되게 한다면 남쪽에 대한 방비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논하기를,
"좌병사(左兵使)가 울산에 있으면서 바닷가에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각 고을의 군사들이 멀리 배후에 있으므로, 모이기 전에는 군졸이 없는 장수입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적을 만날 경우, 다만 한 몸으로 당하게 되어 쓸데없이 죽거나 도망가고 말 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병영(兵營)을 영천으로 옮기어 설치하고 관방을 만드는 것이 군사상의 일로 보아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묘당이 우물쭈물하다가 시행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오늘은 인견하시는 날짜가 아닙니다만, 전라도에서 일어난 수재가 너무나 참혹하여 익사자가 50인이나 되니, 곡식의 손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며, 전주부(全州府) 내 사직단(社稷壇) 근처에서는 땅이 꺼지는 변이 일어났으니, 더욱 놀랍고 괴이하므로 신들이 입대하여 소회를 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재이 가운데 충재와 수재는 그 응험이 가장 빠르므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시종 한결같아야만 하늘과 상응되어 재앙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이가 이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어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승지 김수흥의 상소로 인하여 서로(西路)에 보낼 어사(御史)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분부하셨는데, 서로뿐만 아니라 제도(諸道)에 있어서도 어사를 보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상께서 참작하여 나누어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에 적합한 인물을 묘당이 의논해 천거하여 들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김수항이 북도에서 시행할 시재(試才)의 일로 머지않아 내려갈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남도에 인물이 가장 많으니 봉사(奉使)하는 신하가 남도에 머물러 있을 때에 문무의 거자(擧子)들을 모이게 한다면 자연히 여론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듣건대 ‘순변(巡邊)’이라고 한다니, 번거로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순변이란 말을 시재로 고치면 시재할 때에도 여론을 청취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의 장계 가운데 ‘동래로부터 대구에 이르는 사이마다 성을 쌓고자 하였으나, 신이 장차 체직되어 돌아갈 것이니 새 감사가 내려간 다음 그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일이 너무나 중대하니 상진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서서히 의논하여 처리해야겠습니다. 밀양은 예로부터 방어사를 두었으며 성지를 수축하기가 매우 쉬우므로 무신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갑자기 무신을 보내서는 안 되니, 문신 가운데서 가려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진이 인동(仁同)에 있는 천생 산성(天生山城)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에 있어서는 신도 산성을 본 결과 지세는 높으나 물이 없으니, 수비할 만한 지역이 못 됩니다."
하니, 상이 그 성의 형세에 대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행군할 때에 하룻밤은 묵을 수 있겠으나,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하자, 병판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이미 쌓아놓은 성을 버리기는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하룻밤만 묵더라도 급할 때에는 쓸 수 있을 것인데, 하필 버리려고 하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진이 또 병영을 영천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는데, 적을 막는 방도는 변방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어찌 반드시 내지(內地)로 끌어들여야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병영을 옮기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세력이 병자년025) 처럼 밀어닥치면 설령 병영을 조금 먼 곳으로 옮긴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질병가(疾病家)를 두는 것은 바로 옛 제도인데, 갑자기 역사를 정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전(三殿)의 나인들이 자주 아프기 때문에 병을 조섭하는 곳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신(臺臣)이 나보고 그르다고 하기에 정지한 것이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민시중(閔蓍重)이 설령 이처럼 아뢰었다 하더라도 상께서는 옛 관례를 들어 깨우쳐서 역사를 파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정파하였는가 하면, 내관을 파직하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지나친 일입니다."
하였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이원정(李元禎)이 결코 이유상(李有相)을 사적으로 감싸줄 리가 없는데, 이로 나문을 받으니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에는 원정이 반드시 명관(名官)을 감쌌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나추하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상의 핵환(核患)이 조금 회복되었다고 하여 종묘에 고하는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주의(注擬)할 적마다 인재가 모자라 걱정하고 있는데, 가선(嘉善)에 있어서는 더욱 없으니 변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명단을 뽑아 아뢰어 발탁해 쓴 규례가 있었으니, 대신으로 하여금 명단을 뽑아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홍중보에게 이르기를,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026) 의 장지를 옮길 때에는 해조로 하여금 예장(禮葬)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마의 끝에 작은 부스럼이 나서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7월 11일 경자
의관 유후성(柳後聖)이 선영에 떼를 입히는 일로 말미를 받았는데, 상이 말을 지급하라고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의관에게 말을 지급하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지급하느냐 안 하느냐는 모두 위에서 명하는 것인데, 뒤늦게 아뢰니 나는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질병을 앓았기에 의관을 총애하여 조정의 신하보다 더 우대하였는데, 이같은 예우는 국조 이래로 없었다.
대신이 명을 받아 당상 가운데서 승진할 만한 5명을 뽑아 아뢰었는데, 이유태(李惟泰)·이경휘(李慶徽)·이정기(李廷夔)·김수흥(金壽興)·이진(李𥘼)이었다.
7월 13일 임인
정지화(鄭知和)를 도승지로, 이선(李選)을 검열로, 이경휘(李慶徽)를 부제학으로, 이구원(李久源)을 우윤으로, 민종도(閔宗道)를 봉교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14일 계묘
경상 감사 임의백(任義伯)이 관작을 추탈당한 아버지 임연(任兗)의 억울함에 대해 소장을 내었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027) 에 요동(遼東)을 건너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의논을 수렴할 때에, 신의 아비 마음에는 국가 존망의 기틀이 여기에 매여 있으니 신하로서는 자신만을 위해 이해에 대해 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의논 드린 내용에 ‘신이 순안 어사(巡按御史)로서 북도에 간 적이 있는데, 관방(關防)의 군졸들은 하나도 믿을 게 없다는 것을 익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저들의 경계선이 우리와 서로 인접해 있는데 한 줄기의 물만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깝게 접해 있는데, 저들의 계책으로 볼 때 동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어야만 북쪽에 전적으로 뜻을 둘 수 있을 것이므로 저들이 만일 동쪽에서 충돌하고 서쪽에서 공격하다가 거세게 몰아 깊이 들이닥치는 환란이 있게 되면 여지없이 패망하여 결국은 형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에 필요한 계책은 서둘러 장수를 뽑아 군사를 훈련시키고 험한 곳에다 방비를 설치해서 침범할 수 없는 형세를 만들어 놓은 다음, 저들이 오는 것을 기다려 의각(猗角)의 형세로 막아 그 세력을 분산시켜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중국이 변방에 대한 걱정을 조금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징병(徵兵)의 문제로 인하여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이 위급한 형세를 들어 낱낱이 아뢴다면 성스런 천자께서 반드시 우리의 충심을 알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예전대로 군사를 징발한다면 소방(小邦)이 망하는 것은 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아비가 의논드린 주의(主意)를 볼 때 충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후일까지 염려하는 데서 나온 말들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명나라를 저버리는 데 간섭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반정 초에 이르러 재신 윤휘(尹暉)가 화의를 맨 먼저 주장한 죄로 벼슬이 깎이고 귀향을 갔었으며, 신의 아비도 화의를 찬성했다고 하여 아울러 관작을 추탈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당시 노성한 신하들도 억울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윤휘는 살아있었기 때문에 바로 서용되어 벼슬이 회복된 다음 판서의 지위에 올랐지만, 신의 아비는 이미 죽었기에 서 용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죄적에 이름이 그대로 있는 지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신이 이제 명을 받들고 도성을 멀리 떠나게 되었는데, 만일 이때에 뼈에 사무친 원한을 호소하지 않는다면 죽은 아비의 원통함을 씻을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신의 소장을 유사에 내려 물으시어 시원스럽게 용서의 은전을 내리소서."
하니, 상이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사체가 중대하다고 하여 대신에게 물을 것을 청하니, 영상 정태화가 의논드리기를,
"임연에 대해 의논을 수렴하였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신이 전말을 알고 있습니다. 임의백의 소에서 아뢴 말이 사실 그대로입니다. 만일 임연이 살았을 적에 죄를 받았다면 필시 지금까지 죄적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니, 조정에서 용서의 은전을 베푸는 것은 살았든 죽었든 간에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하고, 우상 홍명하도 벼슬아치들 사이에 억울하다고 말하는 자가 많다고 하니, 상이 직첩을 도로 주라고 하였다.
임연은 광해군 때의 재신이다. 광해가 임해군(臨海君)을 죽일 때 임연이 대관으로서 국문에 참여하였는데 그 공로로 익사 공신에 기록되었으며, 그뒤 품계가 올라 풍안군(豊安君)에 봉해졌다. 무오년028) 에 조정이 군사를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건로(建虜)를 쳤는데, 임연이 윤휘와 함께 건로에게 아첨하는 계략을 주창하며 두 다리를 걸쳐 관망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분개하고 미워하였다. 그뒤 인조 반정이 일어나자 대신들이 소급해 논하여 관작을 깎아버렸다. 윤휘에 대해서는 주동자라는 이유로 양사가 함께 발론하여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부처만 하였으며, 뒤에 풀려나옴과 동시에 서용되어 판서까지 되었다가 죽었다. 임연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죄적에 있는 지 40여 년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의백이 이러한 소를 올려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상이 소장을 대신에게 내렸다. 대신 정태화와 홍명하는 모두 의백과 친하였으며, 명하는 또 그와 인척이었기 때문에 임연이 관작을 회복할 수 있었다.
사신은 논한다. 윤휘를 당초 서용한 것이 이미 공론이 아니었고 보면 어떻게 윤휘를 예로 삼아 임연에게 다시 그릇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앞뒤로 여러 신하들이 사정에 끌려 공론을 뭉개버리고 말았으니, 통탄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93면
【분류】정론(政論) / 군사(軍事)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사법-행형(行刑) / 외교(外交) / 변란-정변(政變)
[註 027]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註 028]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
사신은 논한다. 윤휘를 당초 서용한 것이 이미 공론이 아니었고 보면 어떻게 윤휘를 예로 삼아 임연에게 다시 그릇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앞뒤로 여러 신하들이 사정에 끌려 공론을 뭉개버리고 말았으니, 통탄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충청도의 석성(石城)·이산(尼山)·부여(扶餘)·은진(恩津)·연산(連山) 등의 고을에 소의 돌림병이 다시 극성을 부렸다.
7월 15일 갑진
제주도에서 세공마(歲貢馬) 2백필을 진상하였다.
용담현(龍潭縣)에 큰물이 져 시냇물이 넘치고 산골짝이 무너져서 논밭이 자갈로 뒤덮이고 인가가 떠내려가고 사람들도 많이 압사하였는데,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 명하였다.
7월 16일 을사
정치화(鄭致和)를 대사헌으로, 박경지(朴敬祉)를 평안 감사로 삼았다. 경지는 영남의 부자인데, 재산이 엄청나게 많았다. 윗사람을 잘 섬긴 것으로 발신하여 평안 병사·통제사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김자점(金自點)이 정권을 잡은 뒤로부터는 권세를 가진 재상들이 조정의 공론을 들어서 관리들을 진퇴시키지 않고, 자기를 잘 섬기는 무인으로 심복이나 하수인을 삼은 다음, 뇌물을 받아 서로 이익을 취하려고 꾀하였다. 이는 한때의 관습이 되어버렸으므로, 스스로 여기에서 빠져나와 폐습을 고치려는 자가 드물었으니, 통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이미 하옥되었는데 금부가 곤장을 치고 도배(徒配)하는데 해당된다고 하니, 영의정 정태화 등이 의논드리기를,
"원정은 가까이 모시는 자리에 있었으니, 조그만 죄로 곤장을 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곤장을 치지 말라고 명하였다.
7월 17일 병오
집의 이준구(李俊耉)와 장령 이관징(李觀徵)이, 박형(朴泂)을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수령 해유(解由)의 법은 수당상(首堂上)이 아니면 함부로 내주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일을 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 호조 참판 이행진(李行進)이 엊그제 본조 판서가 인피하고 들어갔을 때, 법례(法例)를 무시하고 각 고을의 해유를 제멋대로 만들어 준 것이 10여 고을이나 되며, 게다가 그 가운데는 법을 어겨가며 만들어 준 것도 있으니, 몹시 해괴한 일입니다. 이행진과 당해 낭청을 파직하고,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먼저 추고부터 하라 명하고, 이어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판서 허적(許積)이 법을 어기고 만들어 준 것들을 조사하여 아뢰니, 상이 행진을 잡아다 추문하라 명하였다. 그뒤 고신(告身)을 박탈하였다.
7월 19일 무신
처음에 대관이 내관 김희안(金希顔)에 대해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추고하라 명하고 또 송사(訟事)를 낸 이충준(李忠俊)을 형조로 이송하여 엄하게 조사하라 명하였는데, 그뒤 형조의 계목(啓目)에 사계(査啓)가 늦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특별히 당해 당상과 낭청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라 명하였다. 상이 또 궁노의 공초 가운데 충준이 갑자기 궁가에 들이닥쳐 비복을 잡아가고, 명관에게 청탁했다는 등의 말이 있다는 이유로 엄한 형벌로 충준을 다스리라 명하였다. 또 형조 당상과 낭청은 추고하는 반면, 희안은 특별히 서용되고, 형조 참판 김휘(金徽), 참의 강유(姜瑜)는 끝내 죄를 잘못 감정하였다는 이유로 고신이 박탈되었으며, 충준은 엄한 형벌을 받다가 죽었다.
일개 내비(內婢)의 일은 아주 사소한 것인데, 유사에게 넘겨 조사해 결정하도록 하지 않고 크게 언성과 낯빛을 내어가며 형관을 호되게 꾸짖는가 하면, 송사를 낸 자를 곤장을 쳐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임금의 덕에 큰 누가 되었다. 그런데 유사는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지 않고, 언관 또한 바로 잡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동래 부사 안진(安鎭)이 비밀히 장계하기를,
"왜국 상인들이 어둠을 타고 가덕진(加德鎭)에 정박하였는데, 우리 나라 상인 임지죽(林之竹) 등이 백금 6천 9백여 냥으로 석류황(石硫黃) 1만 1천 3백 근과 흑각(黑角)·조총(鳥銃)·장검(長劍) 등 물건과 바꾸었고 기타 별도로 준 물건도 많았습니다. 지죽이 이를 모조리 조정에 바쳤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대개 유황이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으므로 제군문(諸軍門)들이 널리 국경 밖에서 사들였다. 남쪽에서는 일본(日本)과, 서쪽에서는 요동(遼東)과 교역하였는데, 모든 금지하고 있는 물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잠상(潛商)을 비밀히 끌어들이다 보니 이따금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도 지난해 문위 역관(問慰譯官)이 대마도에 들어갔을 때 왜인들과 비밀히 약속하여 가덕도에서 서로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이르러, 비국이 밀양(密陽)에서는 선박으로 선산(善山)까지 운반하고, 선산에서는 마차로 충주(忠州)까지 운반한 다음, 번갈아 가면서 운반하여 서울에 도착시키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금부가, 상이 이미 박형(朴泂)을 논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는 아룀을 윤허하였다고 하여 예전대로 형추하고 다시 형벌을 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일 판부(判付)할 적에 이미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으며 대간들의 계사에도 형벌을 가하라고 한 청이 없었으니, 설령 형추하더라도 다시 계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어찌하여 먼저 형추하고서 들어와 아뢰는가?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금부가 대답하기를,
"박형은 바로 형추해야 할 죄인이었는데, 형추를 중지했던 것은 의논해 처리하라는 명 때문이었고 보면, 대간이 도로 명을 거둘 것을 계청하여 윤허를 받은 뒤에는 곧 예전대로 형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제 모였을 적에 관례에 따라 형추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교를 받고 보니, 형추를 한 다음 입계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니, 상이 뒤에는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다. 금부가 다시 예전대로 형추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헌부에 비답을 내릴 때 박형의 일이 누락되었으니, 예전에 판부한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드디어 헌부의 계사에 대한 비답 가운데 ‘박형에 대한 일은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더 써 넣은 다음 고쳐서 내렸다.
박형이 재물을 탐한다는 소문이 낭자하였는데도 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감싸주었다. 이는 박형이 병자년의 난에 홍명구의 군관으로서 직접 그의 시체를 거두어 주었기 때문에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집과 친하였다. 그래서 그 집에서 기어코 구원해 주려고 하였으며, 또 심양에 따라간 군관이었으므로 선조(先朝)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르러 끝내 도로 거두라는 명을 중지하니, 사람들이 자못 승복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안질(眼疾) 때문에 침을 맞았다.
영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양호(兩湖)에서 수재에 대해 아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호남이 가장 심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전주(全州)가 더욱 심합니다.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며, 전주는 또 왕업이 일어났던 자리입니다. 하늘이 다른 곳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이곳에만 유독 혹독하게 내린 것은, 우리 전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깨워 주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심상한 변괴로 여기어 예사롭게 대처해서야 되겠습니까.
옛적에 한필부가 원한을 품어도 재이가 일어났는데, 오늘날로 보건대, 부역이 무겁고 세금이 가혹하니 필시 원망한 자가 많을 것이며, 귀양보내고, 형벌주고, 송사하는 가운데에도 원한을 머금고 울부짖은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미련한 생각에는, 상께서 특별히 애통해 하는 뜻이 담긴 교서를 내리고 묘당의 신하들에게 물으시어 재이를 해소하고 억울함을 펴줄 수 있는 방도를 찾으시고, 한갓 눈앞의 형식에만 그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호남에는 도신과 읍재 및 대부나 선비들로 하여금 가장 힘겨운 역(役)부터 조목별로 나열케 하고 각기 소회를 진달하게 하여 가볍게 해주거나 감해주기도 하고 혹은 펴주거나 용서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어 다른 도에도 이렇게 미루어 나가 북로(北路)와 서관(西關) 같은 지역에 잡다한 공납(貢納)들을 방백으로 하여금 긴급한 것만 들어 계문하게 한 다음 변통하여, 먼 곳에 살고 있는 잔폐된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소생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하늘을 실질로써 응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보탬이 적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백관이 조정에서 화합하면 재야의 백성들이 화합하고, 대간이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면 나라의 기강이 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론(士論)은 뒤틀리고 조정은 안정되지 않아, 지지하여 주는 자는 좋아하고 지적하는 자는 미워하여 얼굴빛을 서로 붉히는가 하면 심지어는 혹 칼을 만지기도 합니다. 조정의 기상이 이러한데 감히 재야의 백성들이 화합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대간에 임명되면 이튿날 바로 사은 숙배하는 법도 없어져 버려서 으레 머뭇거리다가 반드시 사직하는 단자를 바치고 여러 날 지난 뒤에 비로소 나오고 있는데, 이게 무슨 도리입니까. 신은 삼가 듣건대, 옛 규식에 사은 숙배를 지체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는 규례가 있습니다만, 지금은 대간의 자리가 자주 비어 여러 가지 추감(推勘)할 일이나 수령의 서경(署經) 역시 모두 적체되어 있으니, 기강이 어떻게 해서 서겠습니까. 선왕의 법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무너지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어서 대관을 선택할 것, 언로를 넓힐 것, 강학하는 데에 뜻을 돈독히 할 것 등의 일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부덕한 내가 즉위한 이래로 하늘이 기뻐하지 않아 재이가 겹쳐 일어나는가 하면 수재와 한재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으니, 근심과 두려움이 가슴에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호남에서 일어난 수재는 실로 예전에 없던 변고인데 어찌 편안한 마음으로 예사일처럼 볼 수 있겠는가. 방금 차자의 내용을 보고 근심스럽고 두려운 심정을 더욱 무어라 표현할 줄 모르겠다. 그리고 과인에 대해 경계한 말들은 길이 깨우치고 유념하겠으며, 의논해 처리할 만한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차자 가운데 이른바 ‘재이를 없애고 억울함을 펴주는 방도’에 대해서는 면대하는 날을 기다렸다가 직접 여쭈어 시행해야 하겠습니다만, 그 나머지 호남·북로·서관의 공물 징납 등에 관한 일들은 차자의 말에 따라 정원으로 하여금 문안을 만들어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게 한 다음 계문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충청 병사 이두진(李斗鎭), 서원 현감(西原縣監) 홍주삼(洪柱三) 등이 금부에 내려졌는데, 두진은 고신(告身)을 박탈하고 주삼은 도배하였다.
당초에 두진이 병사로서 서원 객사의 담장 밖에 있는 촌가에 피접해 있었다. 현감 홍주삼이 공도회(公都會) 시관(試官)이 되어 객사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있었는데, 거자(擧子)들이 떠들자 두진이 장막을 높이 치지 않았다고 화를 내며 관리를 때리고 거자들을 가두니, 거자들이 파장(罷場)하고 나가버렸다. 주삼이 감사에게 알리자, 두진도 주삼을 헐뜯으면서
"유생들이 파장한 것은 주삼이 충동질한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주삼이 시관(試官)을 버리고 가버렸는데, 우상 홍명하가 주삼이 상관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잡아다 추문할 것을 청하였다. 주삼과 두진이 모두 하옥되어 서로 다투자, 상이 대면시켜 따지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두진은 당상관의 품계이며, 주삼은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내었는데 조그만 일로 면대하여 따지게 하는 것은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됩니다."
하고, 그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다. 두 사람 모두 고신만 박탈할 것으로 정하여 들였는데, 주삼에게는 특별히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여러 차례 쟁집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1일 경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고 나자, 병조 판서 김좌명, 우참찬 김수항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았으니, 북관(北關)으로 떠나야겠는데 출발할 기일이 임박하였기에 감히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북도의 무사들은 기예를 고루 갖추지 못하였으니 혹 두 가지 기예 중에서 한 가지 기예만 취하거나, 혹 세 가지 기예 중에서 두 가지 기예만 취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육냥전(六兩箭)으로 무사들을 시험하거나, 표문(表文)으로 선비들을 시험하면 북도에는 합격할 자가 없을 것이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시재(試才)에서 뽑은 사람은 다른 방(榜)에 붙일 것인가?"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별시에 붙였습니다."
하였다. 도제조 홍명하가 아뢰기를,
"전에는 승지나 어사를 보냈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중신을 보내니 전과는 사체가 다릅니다. 문과에 있어서는 바로 과차(科次)를 매긴 다음 올려보내도록 하여 서울에서 봉함을 열어 보게 하고, 무과에 있어서는 활쏘기가 끝나는 대로 출방(出榜)한 뒤 이어 방방(放榜)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정태화가 대궐 안에 와 있다고 하니, 사관을 시켜 불러오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명하의 말로 태화에게 물으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문과에 있어서는 본도에서 과차를 매긴 다음 서울로 올려보내어 봉함을 열어 보고, 그 봉함을 열어보기를 기다렸다가 홍패(紅牌)를 내려보내주고, 무과에 있어서는 홍패에다 어인(御印)을 찍은 다음 이름 쓸 자리를 비워두고 보내어 시관으로 하여금 이름을 써넣도록 하여 방방해야 합니다. 그리고 홍패와 어사화(御史花)를 보낼 때에는 선전관을 보내어 전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대독관(對讀官)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 역시 시관이 될 수도 있지만, 도내에 안변 부사나 다른 문관들도 자못 많으니, 모두 시관이 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수항은 시재하기 위해 명을 받은 것이니, 또한 하나의 명관(命官)이다. 시관은 감사와 도내 수령으로 가려서 차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수항이 봉명관(奉命官)이 되어 나간다는 것을 이유로 문형(文衡)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태화가 아뢰기를,
"예문관 제학을 차출하라고 명하셨는데,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전망(前望)이라고 혐의하여 감히 차출을 안 하고 있습니다. 전망에는 박장원과 조복양(趙復陽) 두 사람만 있으니, 삼망(三望)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써서 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2일 신해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7월 23일 임자
안후열(安後說)을 승지로, 김수흥(金壽興)을 대사성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은 뒤에 이어서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판의금 허적(許積)에게 이르기를,
"이제현(李齊賢)에 대한 의율(擬律)은 법에 해당된 것인가? 법에 비의한 것인가?"
하였다. 이때 제현이 훈국 낭청(訓局郞廳)으로서 대장에게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수백 금을 남에게 빌려준 일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는데, 금부가 사형으로 의율하자, 상이 너무 무겁다고 의심한 것이다. 허적이 아뢰기를,
"돈이나 곡물을 마음대로 대여해 준 조항에 대한 법이 이러하니, 바로 법에 해당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법이 이러하다면 참으로 변통할 수 없겠지만, 죽이는 것은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수상한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는 남병사(南兵使)의 장계를 내보였는데, 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에서 글을 아는 사람을 영고탑(寧古塔)에 내보내 두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의복으로 본다면 중국 사람 같기도 하고 오랑캐 같기도 한데, 혹시 우리 나라를 염탐하기 위해 왔는지도 모르니 서울로 잡아다가 추궁한 다음, 북경으로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과 정유성(鄭維城)이 대궐 밖에 와 있었는데, 상이 불러오라 명하였다. 태화가 경석이 올린 차자를 앞에다 펴놓고 아뢰기를,
"백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조목별로 나열하여 올린 것은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특별히 애통스런 교서를 내리라.’고 한 조목과 ‘귀양보내고, 형벌주고, 송사하는 가운데 억울하게 처리된 일이 없지 않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품처해야겠으나, 이른바 ‘억울함을 풀어주거나,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본도에서부터 먼저 해야 할 것입니까?"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신의 뜻 역시 본도를 말한 것입니다."
하니, 유성이 아뢰기를,
"여러 도도 아울러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에 백성을 교화하는 정사가 없어서 인심과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 경석이 매양 교화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백성을 가르치고 풍속을 변화하는 방도에 대해 경석과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상이 경석에게 물었다. 경석이 대답하기를,
"임금이 정사를 하는 데 있어 인의(仁義)를 버린다면 반드시 몽매한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들어가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서울로부터 시골에 이르기까지 정연하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의 도리로 인도하여야만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어 정치 교화가 시행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태화에게
"경의 의향도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떻게 교화의 방법을 알겠습니까. 경석이 예전부터 《소학(小學)》으로 가르쳐 인도하는 방법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대개 옛적에는 반드시 이 글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예조의 강론도 반드시 이 글로 하였는데, 이제는 점차로 폐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조조에 유생의 정시(庭試)에 있어서는 차상(次上) 이상이면 《소학》을 나누어 주었기에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사대부들이 있습니다. 양남(兩南) 감사로 하여금 《소학》 전질을 많이 인쇄해 보내도록 하여 중외에 반포하소서."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백성들이, 전일 대청포(大淸浦)에 둑을 만들어 몽리(蒙利)하는 것을 보고서, 우리도 포구(浦口)에 제방을 만들어 달라고 몰려와 호소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직접 살펴보니, 두어 곳에 제방을 만들어 몽리할 만한 곳이 있었습니다만 반드시 비용을 많이 들여 역군(役軍)을 모아야 될 것입니다. 본부에 호조와 병조에서 실어보내 쌓아둔 베가 매우 많이 있으니, 이를 내어 백성을 모집하면 공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뚝을 쌓던 관례에 따라 병조가 비치해 둔 베 2천 5백 필을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남한 산성에는 근방에 분속된 군졸이 있으나 강도에는 이런 예가 없어서, 방비가 매우 허술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강 부근 가까운 고을의 군졸을 알맞게 본부에다 분속시켜 위급할 때 쓰게 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자,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강도에 가까운 고을은 옛날부터 모두 강도에 소속한다고 이미 사목이 있습니다만, 이는 총융사가 관장하는 군병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본부에서 통솔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에는 훈련하는 규식이 없으므로 다른 고을의 분속된 군사가 필시 주둔지를 모를 것이니, 이제부터는 총융사가 거느린 군병을 강도에서 합해 조련토록 함으로써 군병들이 주둔지를 알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전일 헌부가 박형(朴泂)에 대한 일로 올린 계사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셨는데, 중관(中官)이 전하지 않아 형추를 받기까지 하였으니, 이렇게 된다면 상께서 명하지 않았는데도 죽음을 당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상께서 잊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중관이 전하지 않은 것입니까? 만일 전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잊은 것이다. 중관이 전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죄주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용익이 또 아뢰기를,
"이충준(李忠俊)의 일에 있어 심지어는 명관(名官)에게 청촉했다고까지 하셨는데, 상께서 어떻게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청촉했다는 말이 공사(公事) 가운데 있었기에 말한 것인데, 어찌 매양 누군가가 일러바쳤다고 의심하는가?"
하니, 용익이 아뢰기를,
"신은 공사를 보지 못하여 그랬습니다. 그러나 상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7월 25일 갑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7월 26일 을묘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승지 김익경(金益炅)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형조가 이충준에 대해 처리한 공사의 곡절을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엊그제 삼가 형조 공사에 대한 판부(判付)를 보건대, 말씀이 몹시 엄하고 죄를 논하는 것도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신이 그때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마땅합니다. 당초 이충준이 궁가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말은 궁노의 공초에서 나온 것인데, 추문하기도 기다리지 않은 채 엄한 형벌을 주었습니다. 선왕 후궁의 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대단히 큰 죄인데 허실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바로 논단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판부 가운데 명관에게 청촉했다고 한 분부는 더욱 미안한 말씀입니다. 대신(臺臣)이 일을 논함에는 풍문이라 하더라도 허용하는 것이니, 예로부터 대신이 아뢴 것이 반드시 전부가 눈으로 본 일만은 아니고 대부분 소문에 따라서 아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상께서 이미 이목(耳目)의 직임을 주시고서 또 청촉했을까 의심하고 계시니, 애석하게도 전하께서는 말씀을 신중히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대사간 남용익이 그저께 인대할 적에 이 일에 대해 말씀드리자, 전하께서 ‘형조의 공사를 보면 알 것이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신은 성상의 뜻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형조의 공사는 다만 각자의 공초를 받은 것일 뿐이며, 사실을 따져서 결정을 내리는 말은 없으니, 설령 청촉의 말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소송한 자가 욕한 말에 지나지 않는데, 바로 이 말로 청촉하였다고 단정하였으니,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 공사를 해조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처결하게 하지 않고, 공초만을 받아 별도로 지휘를 내리셨으니 어찌 존엄한 임금으로서 유사들이나 하는 직임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결단하여 이러한 규례 밖의 일을 하셨는데, 크게 사체에 손상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그 당시 대방(代房)으로서 공사를 출납하면서 소회를 말씀드리려고 하였으나,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쳐서 성명의 지나친 거조가 중외에 소문이 나도록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신을 삭직(削職)하소서."
하였다. 상이 계(啓)자를 찍어서 내리고, 익경(益炅)을 이어 삭직하였다.
익경이 대방이었을 때 사실에 의거하여 논열하지 않고 나중에 소를 올렸으니 늦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임금이 말을 듣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 말이 옳은가 그른가를 살펴 볼 뿐이지, 때가 이르고 늦은 것은 논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이런 식으로 미움을 받아 사직의 소를 올리자 삭직을 시켰으니, 너무나 지나친 일이다.
완원군(完原君) 이만(李曼)이 죽었다. 이만은 참의 이목(李莯)의 아들인데, 일찍 대과에 합격하여 청현의 직임을 두루 거쳤다. 갑신년029) 에 장령으로서 어떤 일에 대해 말한 것이 상의 뜻에 들어 승지로 발탁되었다. 공신의 적자라 하여 회맹연(會盟宴)에도 참여하였으며 품계가 오르고 군(君)에 봉해졌다. 조경(趙絅)이 전형을 맡았을 적에 추천하여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며 효묘(孝廟) 초에 경상 감사가 되었다. 이때 묘당이 성지를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데 뜻이 있어, 왜군이 침범할 우려가 있다고 말을 꾸며 청나라에 주청하면서 동래 부사 노협(盧協)과 이만의 장계 중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를 대었다. 그런데 그뒤 청나라 사람이 의심하고 성을 내어 사신을 보내 힐문하여 화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 두 사람과 영상 이경석을 한꺼번에 관소(館所)에 유치하고 대질시켰는데, 노협은 겁을 먹어 제대로 말을 못하였고, 이만 역시 끝내는 자기가 하였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석이 수상으로서 가장 무겁게 죄를 받아 처음에는 사형이 내려졌으나, 뒤에 감등(減等)되어 위리 안치되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은 ‘두 사람이 화가 두려워서 살아나기 위해 죄를 집정(執政)에게 떠밀었다.’고 하여 하옥하였다가 귀양보냈다. 그뒤에 이만은 다시 서용되어 네 도의 안찰사를 두루 거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이만은 치산(治産)을 잘 하였는데, 농사짓는 방식에 더욱 밝아 토질의 적성을 잘 판별하였으며, 성격이 법령을 엄하게 지키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당시에 번잡한 사무를 잘 처리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탐욕스럽고 인색하며 재물을 좋아하여 호중(湖中)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여러 변방을 맡았으나 청렴하다는 소문이 없었으므로 당시 여론이 이 때문에 가벼이 여겼다.
무주현(茂朱縣)에 큰 비가 내려 세 사람이 한꺼번에 익사하였는데,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호남에 큰물이 지고 곳곳에 골짜기가 무너져서, 압사하거나 익사한 자가 전후 50여 인이나 되었다.
7월 27일 병진
상이 또 침을 맞았다. 도승지 정지화(鄭知和)가 승지 김익경의 삭직에 대해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진달하자, 상이 일렀다.
"두 차례나 판부(判付)를 썼는데도 일찍이 일언반구도 없다가 뒤에야 물의가 있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말을 장황히 하여 나에게로 죄를 떠밀었으니 그 심술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죄를 준 것이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이 상의 앞에서 창원 현감 이여주(李汝舟)에 대해 파직할 것을 논한 다음, 밖으로 나아가 동료들에게 간통(簡通)하자, 정언 정창도(丁昌燾)와 윤심(尹深)이 모두 ‘잘 알았다.’고 썼다. 그런데 이튿날 용익이, 동료들과 의논하지 않고 먼저 탑전에서 아뢴 것에 대해 물의가 비난한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창도와 윤심도, 인피하지 않으면 사체에 틀린 것이라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윤집(尹鏶)을 병조 참지로, 이경휘(李慶徽)를 이조 참의로, 이진(李𥘼)·윤비경(尹飛卿)을 승지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이유(李秞)·윤형성(尹衡聖)을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판윤으로, 김시진(金始振)을 호조 참의로, 이정(李程)을 교리로 삼았다.
사간 송시철(宋時喆), 헌납 정륜(鄭錀)이, 논한 일이 사실과 틀렸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7월 29일 무오
집의 이준구(李俊耉) 등이 아뢰기를,
"전 승지 김익경이 가까이 모시는 직임에 있으면서 이러한 소를 올린 것은 조금도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직하는 소로 인하여 갑자기 중한 벌을 시행하니, 보고 듣는 이들이 놀라고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김익경에 대한 삭직의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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