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4.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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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신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장지를 옮길 때에 해도로 하여금 제수(祭需)를 갖추어 주도록 하였다.

 

8월 2일 신유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참판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장선징(張善瀓)을 헌납으로 삼았다.

 

8월 3일 임술

호조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내관이 본조의 하리를 불러다가 말하기를 ‘이달 9일 신풍 부원군과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의 장지를 옮길 때 왕대비께서 양화당(養和堂)에서 망곡(望哭)하실 것이므로 안에서 수리할 것이니, 더불어 소요될 여러 가지 물품을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 일은 정원을 거치지 않으니 근일 대간이 논계하여 윤허를 받은 뜻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날짜가 머지않으니, 부득이 먼저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수십 년 간의 일로 말하건대 수리 등의 일에 있어서는 본디 정원을 통하여 분부했던 일이 없었으니, 해조의 처사를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곡식까지도 모두 정원을 통하여 분부하기로 하면, 임금으로 하여금 산대를 잡도록 해야만 시원하단 말인가. 그리고 윤허를 받았다고 한 것은 중대한 일은 정원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에 의해 시행하여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호서(湖西)에 소의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이때, 상이 장릉(長陵)을 참배하려고 하였는데 몸이 편치 않았으며, 또 안질(眼疾) 때문에 침을 맞았다. 사간 오두인(吳斗寅) 등이 길이 조섭할 방도를 생각하고 속히 능에 참배한다는 명을 중지하라고 계청하자, 상이 답하였다.
"참배할 때마다 갑자기 질병으로 인하여 인정과 예절을 펴지 못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대단한 질병이 없다면, 폐지해서야 되겠는가. 날짜가 아직은 많이 남았으니 형세를 보아가며 결정하겠다. 오늘 아뢴 말은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교리 이정(李程) 등이 상차하여 전 승지 김익경에 대한 삭직의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 5일 갑자

사간 오두인 등이 아뢰기를,
"진주(晉州)는 영남에서 큰 고을인데, 새로 임명된 목사 이명부(李明傅)는 노쇠하고 병든데다가 명성마저 없으니, 번잡한 사무의 처리와 진정의 책임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 장단(長湍)은 바로 옛적의 삼보(三輔)와 같은데, 새로 임명된 부사 이필(李泌)은 명망이 본디 가벼운데 주색(酒色)에까지 빠져 있으니, 기보(畿輔)의 중요한 지역을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야 윤허하였다.

 

8월 6일 을축

대사간 이홍연(李弘淵)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전일 신이 도총 경력 박진한(朴振翰)을 탄핵했을 때, 상께서 윤허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이 체직된 뒤 묘당의 신하들이 등대한 자리에서 이 일이 사실과 달라 억울하다고 아뢰는 자가 있자, 조사하여 규명하라는 명을 내리셨다고 합니다. 신의 본뜻은 다만 잘못을 들추어내고 간사한 것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당초 그리 심하게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진한이 억울하게 되었다는 말이 벼슬아치들 사이에까지 퍼지고, 끝내는 대간이 사기를 잃고 무인들이 기세를 더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가 대간을 설치한 본의이겠습니까. 엊그제 또 삼가 듣건대, 해조가 함답(緘答)만을 받아들여 조사한 것의 내용으로 삼으려 했는데, 정원에서 제지하여 본도로 보냈다고 합니다. 만일 정원이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면, 진한이 변명한 말들이 과연 믿을 만한 공론의 단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진한의 기세를 여기에서 알 만합니다.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간원이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니, 따랐다.
이때 위를 잘 섬기는 무인들이 대부분 권문 세가와 결탁하고 있기 때문에 설령 죄악이 산같이 쌓여서 탄핵을 계속 하더라도 늘 진술한 것을 수용하기에 바빴다. 진한 역시 위를 잘 섬기는 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해(寧海)의 속읍인 영양현(英陽縣)에서 조암(趙顉) 등이 다시 상소하여 영양현을 예전대로 설치해 영해와 구별하여 민폐를 제거해 줄 것澂을 청하였는데, 해조가 의논드리기를,
"사민(士民)들이 올린 여러 차례의 소장은 매우 애절합니다만 읍을 합병한 지 오래되어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본부를 엄하게 단속하여 동등하게 취급하고 균등하게 부역을 시키며, 제거할 수 있는 고질적인 폐해는 곧바로 변통하여 그 고을 백성들을 보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8일 정묘

달이 건성(建星)을 범하였다.

 

왕대비가 양화당(養和堂)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는데, 신풍 부원군의 장지를 옮기기 위해 옛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치계하기를,
"본도는 몹시 추운데, 옷감이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삼(蔘)을 캐고 있으니, 정경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면포를 넉넉히 마련하여, 군사를 검열하고 활쏘기를 시험할 때 상품으로 쓰고, 군졸 가운데 너무나 추위에 떠는 자는 이따금 특별히 주어 조정에서 진휼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비국이 연례로 보내는 목화 6천 근 외에 면포 2천 5백 필을 더 지급하고, 사복시 목화 3천 근은 씨를 달린 채 실어보내어 편의에 따라 고루 나누어 주고, 아울러 종자를 취해 쓰도록 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8월 10일 기사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정륜(鄭錀)·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홍명하(洪命夏)를 훈련 도감 도제조로, 최후상(崔後尙)을 검열로, 이진(李𥘼)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 우상 홍명하 등이 아뢰기를,
"상께서 매양 편찮으실 때가 많으며, 안질(眼疾) 역시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1백 리의 길을 거둥하여 능침을 참배하자면 필시 새벽에 거둥하고 밤에 거둥하여야 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마다 이러하여 지금까지 폐하였으니, 금년에는 꼭 다녀와야 하겠다."
하였다. 강도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본부의 군병들이 이제 막 포(砲)에 대해 익히고 있는데, 화약을 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본부에 쌓아 둔 것을 가격을 낮추어 군병들로 하여금 사다가 사사로이 익히게 하고, 판매한 수량은 본부가 다시 채워놓도록 하소서. 그리고 본부의 백성들은 쌀 외에는 교환할 물품이 없는데 송도가 멀지 않으니 돈으로 유통하는 일을 모방해 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호조와 상평청에 있는 돈을 본부로 주어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호판 허적에게 묻기를,
"호조와 상평청에 남아 있는 돈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두 곳에 있는 것이 겨우 1백여 관(貫)입니다."
하자, 상이 모두 주도록 명하였다. 복양이 또 납탄[鉛丸]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상평청에 쌓아 둔 연철(鉛鐵)을 주기를 청하니, 상이 5백 근을 주라고 명하였다. 또 호조로 하여금 전에 준 각궁(角弓) 40통(桶) 외에 30통을 더 주라고 명하였으며, 또 공조에게 명하여 전칠(全漆) 3두를 주게 하여 화살을 칠하는 데 쓰도록 하였는데, 모두 복양의 청을 따른 것이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이만(李曼)과 서원리(徐元履)가 일찍이 유수가 되었을 때 참나무를 많이 사다가 포구(浦口)에다 묻어두고 난리를 당하면 목책(木柵)감으로 쓰려고 하였는데, 이제는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본부의 사면이 모두 산인데, 벌겋게 벗겨져 나무가 없으니, 이전태(移轉太) 1백 섬을 가져다가 상수리 열매 2백 섬과 바꾸어서 성과 가까운 산에 심는다면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참나무가 무성해질 것입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야말로 원대한 계획입니다. 이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복양이 또 선박을 만들 목재를 청하자, 상이 황해 감사로 하여금 장산곶(長山串)에서 소나무 1백 그루를 가져다가 강도(江都)로 운반해 주도록 명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본부의 고 중군 황선신(黃善身)이 정축년030)  의 난에 전사하였는데, 선왕께서 특별히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때 이미 그에게 증직(贈職)의 은전(恩典)이 있었겠지 하고, 전일 구원일(具元一)에게 증직하기를 청할 때 아울러 논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증직이 없었으니 자못 잘못되었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미 충렬사에 들어갔으니, 증직해야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증직하도록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장연(長淵)·옹진(瓮津)·강령(康翎) 등 세 고을은 본부와 수로의 거리가 상당히 멀어 이전미(移轉米)를 출납할 적에 폐단이 매우 많으니, 변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복양의 뜻은 이전미로 대동미 상납할 것과 바꾸자는 것인데 묵은 것을 쓰고 새것을 저축하게 되어서 좋긴 합니다만, 절목에 있어 까다로운 점이 많고, 서울에서 공물을 취급하는 사람들도 강도의 묵은 쌀을 원치 않아 꽤나 원망하고 있으니, 이 점이 매우 난처합니다. 우선 1천 섬을 바꾸게 하여 시행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태화와 명하가 함께 김익경(金益炅)을 삭직한 것은 지나쳤다고 진달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8월 11일 경오

어사 윤심(尹深)을 제주(濟州)에 보내어 문사와 무사를 시험하게 하고, 겸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묻도록 하였다.

 

8월 12일 신미

크게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렸다.

 

충청도에 큰 물이 졌다.

 

포로가 되었던 안추원(安秋元)이 심양에서 도망해 왔다. 추원은 경기 풍덕(豊德) 사람인데, 병자년 난에 13세의 나이로 난을 피해 강도에 들어갔다가 몽고 사람에게 붙잡혀 심양으로 들어간 뒤 한인(漢人)의 대장간에 팔렸다. 임인년031)  에 북경에서 도망해 나오다가 산해관(山海關) 수문장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보내져 얼굴에 경형(黥刑)을 입었다. 이때에 도망해 돌아왔는데,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과 주거지를 제대로 말하였다. 평양 감사가 추원을 의주(義州)에 가두어두고 장계를 올리자, 사안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내지로 옮기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3일 임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즘 들어 천재가 여러 차례나 발생하였는데, 어제 일어난 우레와 비는 심상치 않은 변괴이니, 또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우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외방에 서리가 내린 곳이 많다고 하니, 농사가 매우 염려됩니다. 예로부터 천재는 반드시 인사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인사가 이러한 이상 어찌 감히 천시(天時)가 순조롭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병판 김좌명이 아뢰기를,
"능에 거둥하시기로 이미 정하였는데, 장릉(長陵)은 길이 꽤나 먼데다가 해도 짧으니, 만일 저물녘에 능에 도착하여 봉심의 예를 거행하지 못하면 참으로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자, 명하 등도 그렇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번 참배는 광릉(光陵)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이홍연이 아뢰기를,
"장단 부사 정호신(鄭好信)은 전에 갑산 부사로 있을 때, 본도 감영에 삼세(蔘稅)를 줄여서 보고하였다가 발각되어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차출해 보내는 것은 가려서 보낸다는 뜻이 아니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4일 계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8월 15일 갑술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홍명하가 아뢰기를,
"양주(楊州)에 양전(量田)을 다시 하는 조처가 있는데, 농사가 잘 되지 않고 게다가 능에 거둥하실 날짜도 가까워지고 있어서 백성들이 다시 양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양주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양전을 다시 한다는 말을 듣고 혹 결수(結數)를 감해줄 것인가 하고 모두들 기뻐하였는데, 지금은 결수를 그대로 둔다는 것을 듣고 다시 양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호조에게 편리 여부에 대해 본도에 물어본 다음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8월 16일 을해

서리가 내렸다.전라도 운봉(雲峰)·전주(全州)·진안(鎭安) 등 고을에는 8일부터 서리가 내렸다는 보고도 왔다.

 

상이 또 침을 맞았다.

 

8월 18일 정축

남용익(南龍翼)을 도승지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호조 참판으로, 이관징(李觀徵)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또 침을 맞았다.

 

8월 19일 무인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전라도에 소의 돌림병이 크게 번져 도내를 휩쓸었다.

 

8월 20일 기묘

상이 또 침을 맞았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과거를 설치하여 문과에 한기백(韓紀百) 등 3인, 무과에 염우단(廉友端) 등 3백 인을 뽑았다.

 

8월 21일 경진

밤 5경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8월 22일 신사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어의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8월 23일 임오

상이 또 침을 맞았다.

 

박세모(朴世模)를 도승지로, 김수흥(金壽興)을 승지로, 이원정(李元禎)을 호조 참의로, 장선징(張善瀓)을 수찬으로 삼았다.

 

황해도 평산(平山)·강령(康翎) 등 고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전라도 무주(茂朱)·진산(珍山)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8월 24일 계미

상이 또 침을 맞았다. 예판 홍중보, 병판 김좌명이 청대하여 들어가 능에 갈 때의 절목을 품정하였다. 약방 도제조 홍명하가 아뢰기를,
"금년 가을은 바람과 우박의 피해뿐만 아니라, 외방에 소의 돌림병이 크게 번지고 있으니, 이는 큰 변괴입니다. 가을갈이를 사람이 대신해야 할 판인데, 만일 도살을 금지하지 않으면 남아 있게 될 소가 얼마 안 될 것입니다. 소의 도살을 금하는 것을 엄히 밝히소서."
하니, 상이
"법사(法司)로 하여금 엄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 공산(公山)·충주(忠州) 등 24개 고을에 연일 서리가 내렸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능에 거둥할 날짜가 가까워지자, 금군을 검열한 것으로 아뢰기를,
"내금위(內禁衛)는 실차(實差) 2백 3인, 예차(預差) 1백 99인이고, 겸사복(兼司僕)은 실차 78인, 예차 70인이며, 우림위(羽林衛)는 실차 74인, 예차 48인으로, 3청의 군인을 합하면 6백 72인인데, 말이 있는 자가 5백 61인이며, 말이 없는 자가 1백 11인입니다. 거둥하실 때에 어가를 따라가야 할 자가 6백 인인데, 말이 없는 39인에 있어서는 사복시로 하여금 말을 주게 하여 6백의 수효가 채워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효종 때 금군의 수효를 늘려 1천 명까지 되었는데 널리 재간과 무예가 있는 자를 뽑아 채웠으며, 상도 자주 내리고 급료도 풍부하게 주어 보통 군인보다 특별하였었다. 그뒤 군정(軍政)이 점차를 해이됨에 따라 금위도 점점 줄어들어 이 숫자만 남아 있었고 말이 없는 자도 많았다.

 

금군 신여기(申汝器) 등 10여 인이 도총 도사 심량(沈樑)을 때려 상처를 입혔다. 도총부가 아뢰기를,
"금군이 교만하고 거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만, 대낮에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조정의 관원을 때려 상처를 입힌 일은 예전에 있지 않았던 일이니, 참으로 놀랍고 해괴합니다. 유사로 하여금 곧 쫓아가 잡아다가 엄중하게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다. 형조가 신여기 등 6인을 잡아놓고 형추할 것을 계청하자, 상이 형추하지 말고 법을 상고하여 처치하라고 하였다. 모두 곤장을 때려 정배(定配)하였는데, 대신들이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영장(領將)도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8월 25일 갑신

황해도에 이달 초순에 서리가 내렸다고 도신이 아뢰었다.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올렸다. 《기효신서》는 명나라의 명장인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책이다. 계광이 가정(嘉靖)032)   연간에 항오(行伍)에서 일어나 절(淅)·민(閩) 지방의 향병(鄕兵)을 모아 여러 차례 왜구(倭寇)를 섬멸하였는데, 그때 사용했던 병졸을 조련하고 적을 제압하는 방법 가운데두루 시험하여 승리했던 것만 뽑아서 책을 만들었다. 임진년의 난에 고 상신 이덕형(李德馨)이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따라가 평양의 싸움에서 절병(浙兵)들이 잘 싸우는 것을 보고 훈련과 전술을 익히는 방법을 묻고는 이 책을 얻어 조정에 올렸다. 계사년033)   뒤에 맨 먼저 훈국(訓局)을 설치하여 군병에게 그 기예를 익히게 하고, 또 그 제도에 따라 교련을 시키는 한편, 그 책을 국중에 반포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변란을 치렀기 때문에 전수하여 익히는 자가 드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명이 그 책을 많이 인쇄하여 각영(各營)과 진(鎭)에 나누어 주고, 또 소를 올리면서 책을 올리니, 상이 군사 정책에 뜻을 둔 것을 가상히 여겨 너그럽게 답하였다.

 

장령 정창도(丁昌燾)가, 간원에 있을 때 일을 논하면서 사실과 틀리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8월 26일 을유

밤중에 우레와 번개가 쳤다.

 

장선징(張善瀓)을 장령으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삼았다.

 

8월 27일 병술

대사간 이홍연 등이 아뢰기를,
"금년 농사철에는 재해가 계속 생겼습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수재와 한재가 있었고, 그 뒤 풍재가 있어서 벼의 피해가 수재 때보다 심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별도로 진휼하지 않는다면 자못 재앙을 만나 백성을 위해 애쓰는 뜻이 없습니다. 해조에서 농사 작황을 결정하는 사목에는 수재만 인정하고, 풍재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유독 경기에만 복심(覆審)을 시행하지 않으니, 신들은 그리하면 안 된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가장 심한 풍재를 수재보다 못하다 하여 급재(給災)하지 않는다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수재와 풍재로 입은 피해는 경기나 각도가 같은데, 양전(量田)을 새로 하였다는 핑계로 재결(災結)과 실결(實結)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지난해의 결수(結數)대로 세금을 받는다면 균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조정에서 진념하는 본래의 뜻이겠습니까. 제도의 풍재를 입은 곳에 급재하는 한 조목과 경기도 다른 도와 일체로 복심할 것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상께 여쭈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8일 정해

장령 정륜 등이 아뢰기를,
"박진한(朴振翰)이 일찍이 호읍(湖邑)에 임명되었을 적에 미곡을 훔쳐 낸 정상이 대각의 신하들이 피혐한 계사에 숱하게 드러났습니다. 그 범행을 살펴보면 바로 큰 장오죄에 해당되니, 지난 일이라 하여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박진한을 잡아다가 정죄하소서. 그리고 관청의 쌀을 20여 섬이나 훔쳐냈다는 것은 대단한 장오죄인데, 안렴(按廉)하는 신하가 이미 적발한 뒤에 이름난 재상의 강력한 제지에 구애되어 사실대로 위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구해준 것이나 시키는 대로 따른 것이나 모두가 잘못이 있습니다. 그 당시 감사를 조사해 내어 파직하고 강력하게 제지했던 이름난 재상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당초 이홍연이 진한을 탄핵할 적에 자신이 판결하는 송사에 관계된 노비 가운데 두 명을 자기가 사들인 한 건을 거론하면서 관청의 쌀을 훔친 사건까지 아울러 언급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이 난색을 표명하였기 때문에 못하였다. 그러다가 경연의 신하가 진한을 위해 원통하다고 말한 일로 인해 조사하라는 조처가 있게 되자, 홍연이 인피하면서 비로소 미곡을 훔친 사건을 털어 놓은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정륜 등이 이와 같이 나문하라고 청한 계사가 있게 된 것이다. 집의 이준구(李俊耉)는 간원에 있을 때 참여하여 듣고도 논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홍연도 논핵을 하면서 미곡을 훔친 것을 아울러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8월 29일 무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병조 판서 김좌명,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을 인견하여, 능에 갈 때의 절목을 품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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