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4.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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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경인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叅)을 하였다. 우의정 홍명하가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 처음 상참을 거행하셨는데, 여러 사람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이미 상참을 거행하였으니, 경연도 차례로 여셔야 합니다. 상께서 안질 때문에 글을 못 보신다 하더라도 때때로 경연을 여시어 신하들을 인접하시면 또한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즘 인재가 너무나 없어 3조 참판, 한성 우윤, 부제학, 대사성을 차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대사헌은 직임이 가장 중한데 반 년이 지나도록 공무를 보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 을 패초(牌招)하여 직임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인재가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우상이 자세하게 진달하였습니다. 본조에도 낭청이 없는 지 여러 달이 되었으니, 변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낭관이 없으면 새 낭관을 천거하거나 의망할 수 없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낭관이 없이 천거할 경우에는 천거된 자가 공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홍문관의 상번과 하번에 있어서도 인원이 부족하고 대간을 의망할 적에도 인재가 너무나 없는데, 파직된 자나 관직 없이 있는 자가 많기 때문에 폐단이 이러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된 자나 관직 없이 놀고 있는 자를 기록하여 올리고, 당상관으로서 파직되었거나 놀고 있는 자도 기록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지난해부터 성상께서 편치 않아 보통 걱정이 아니었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이제 회복되시는 경사를 얻게 되었으니, 사당에 고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자, 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회복되어서 앞으로 능에 참배하시는 예를 거행하실 것이니, 예의상으로 말하더라도 사당에 먼저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나았다고 하지마는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니, 정지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하였다. 승지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겸손해 하시면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뜻하신 바가 있겠습니다만, 앞으로 능에 거둥하시자면 예관이 차차로 계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뭇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은지 모르는 것은 아니나 질병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잠시 앞날을 보아가며 거행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장원이 아뢰기를,
"영직(影職)의 유를 더 늘리리라고 많이 기대하여 저마다 정장(呈狀)하는데, 신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영직을 더 늘리는 것은 절대 허락하면 안 됩니다. 박장원이 필시 가자(加資)를 주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장원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대죄(待罪)하였는데, 상이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9월 3일 신묘

허적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허적은 간사하고 조행이 없어 평소 명망이 없었으며, 일찍이 대사헌과 예조 판서 등의 직임을 맡았을 때 모두 탄핵을 받았다. 수상 정태화와 친하였으며, 게다가 임금의 뜻에 잘 영합하여 양조(兩朝)034)  의 사랑을 매우 받았다. 이를 인하여 갑자기 뛰어올라 호조 판서를 네 번, 병조 판서를 두 번이나 지냈다. 이에 이르러 복상(卜相)의 의망이 들어갔는데, 그의 이름이 없자, 상이 특별히 가복(加卜)하라 명하여 그를 임명하였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우창적(禹昌績)을 정언으로,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이일상(李一相)을 호조 판서로, 이광적(李光迪)을 지평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판윤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승자(陞資)하여 판의금으로, 이진(李𥘼)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핵환(核患)이 회복되신 것은 실로 막대한 경사이니, 사당에 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신들이 일찍이 진달하였으며, 정원도 계청하였으나, 모두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능에 참배하시자면 사당에 고하는 예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때 몇 마디 말을 더 만들어 넣어서 고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뭇 사람들도 이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 승지 김수흥, 사간 오두인, 교리 이정(李程) 등이 모두 입을 모아 청하니, 상이 원임 대신과 밖에 있는 유신에게 물어보라 하였다.

 

9월 5일 계사

예조가 임시로 감하였던 삼명일(三名日)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을 예전대로 진상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해마다 흉년이 들어 진상하는 물선을 임시로 감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신 것은 비록 성상께서 백성을 진념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위를 모시는 도리에 있어서 너무나 온당치 않습니다. 금년은 외방의 농사도 잘못된 편은 아니니, 금년 동지 물선부터는 각도와 개성부로 하여금 예전처럼 봉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대비전 외에는 아직은 예전대로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모든 도의 농사가 조금 잘 되었기 때문에 진휼청을 해체하고, 거기에서 사용하고 남은 쌀과 베는 호조에 돌려보내어 묵은 것을 쓰고 새것을 저축하게 하여 뒷날의 용도에 대비토록 하였다.

 

9월 6일 갑오

신풍 부원군의 장지를 옮기기 때문에 왕대비가 망곡례를 거행하였다.

 

9월 9일 정유

신유(申濡)를 호조 참판으로, 정창도를 장령으로, 이홍연을 병조 참의로, 장선징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박장원을 금부에 내리었다. 이에 앞서 장원이 정청(政廳)에 있을 적에 노인 박회무(朴檜茂) 등 8인에 대해 나이가 찼으니 가자(加資)해야 한다고 계품하면서 잘못 가자망 단자(加資望單子)까지 한꺼번에 올리었다. 상이 일을 전도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엄한 분부를 내려 특별히 추고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장원이 소를 올려 사직하고 감히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상이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장원이 전일에 전도되게 한 일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으나, 고의성이 없는 듯하여 우선 추고나 하고 다음 행동을 지켜 보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방자하게 소를 올리고 황공하게 여기는 뜻이 없으니, 신하된 분의(分義)에 있어서 이럴 수가 있겠는가. 나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장원이 당초 잘못한 과실 때문에 감히 직책을 그대로 지닌 채 추감(推勘)을 기다리지 못하여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한 것이니, 이는 실로 황공스런 뜻에서 한 것이지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방자하게 상소하였다.’고 분부하시고 심지어 나문하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니, 이것이 어찌 본정을 살펴서 죄를 정하는 것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육경(六卿)의 신하 중에 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다는 이유로 하옥된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방의 놀라움과 의혹을 불러올 뿐만 아니라 신하를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 손상이 있을까 깊이 염려되니,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두 차례나 아뢰었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대사간 이진(李𥘼) 등이 아뢰기를,
"박장원이 전일 잘못한 일 때문에 이미 엄한 분부를 내리고, 또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감히 태연하게 공무를 보지 못하고 소를 올려 견책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실로 염치에 관계되고 분의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문하라는 명이 뜻밖에 떨어졌으니, 예로 부린다는 도리에 있어서 이처럼 너무나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정한 송금(松禁)의 법이 지극히 엄하므로 무식한 백성들도 오히려 법을 두려워할 줄을 알아 감히 범하지 않는데, 사대부가 제멋대로 하여 꺼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 감사 조귀석(趙龜錫)은 홍씨 성을 가진 사람의 이름으로 정장(呈狀)하여 체문(帖文)이 나오도록 꾀한 다음, 동대문 밖의 5리쯤에 있는 금산(禁山)의 소나무를 무려 수백 그루나 베었으니, 방자하게 국법을 무시한 짓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행 호군 조형(趙珩)은 그 당시 판윤으로 있었는데, 체문을 만들어 주어 금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해당 감역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도 막아주고 감싸주었으니, 국법을 무시하고 사정을 따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석과 조형을 모두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뒤에 조형은 고신(告身)을 박탈하였으며, 귀석은 2년간 도배(徒配)하였다.

 

장령 정륜 등이 아뢰기를,
"며칠 전에 종반(宗班) 몇 사람이 궁노를 많이 데리고 강 너머에서 사냥을 하다가 동작진(銅雀津)에 이르러서는 배를 빨리 대지 않는다고 하여 뱃사공을 무수히 때렸는가 하면, 심지어는 신풍 부원군의 장지를 옮길 때 보낸 제수(祭需)를 던지고 짓밟는 등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이는 참으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종부시로 하여금 조사하여 나문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 명하였다.

 

9월 10일 무술

사간 오두인(吳斗寅)이 인피하기를,
"어제 동료가 보내온 간통(簡通)에 ‘금송(禁松)을 벤 일 때문에 전 감사 조귀석과 전 판윤 조형을 논핵하고자 한다.’고 하였기에, 신이 답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면 감히 나 혼자만 이의를 가지겠는가만, 그 중 한 조목은 사실인지 모르겠으니, 자세하게 물어본 다음 아뢰어야 한다.’ 하고, ‘잘 알았다.’는 말을 쓰지 않고 잠시 의견의 왕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다시금 간통하지 않았으며, 의율(擬律)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상의하지 않은 채 바로 나가 계사를 전해버렸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가볍게 보인 소치이니, 체차하소서."
하였다. 정언 이유 역시 경솔하게 계사를 전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두인은 출사시키고, 이유는 체직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교리 이정(李程) 등이 차자를 올려 박장원(朴長遠)을 나문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논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박장원을 하옥한 것은 아랫사람을 예로 대우하고 형벌을 적당하게 쓰는 성스런 조정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파직하고 방면하겠다."
하였다.

 

대사간 이진(李𥘼)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병환이 막 나으셔서 한기를 쏘여서는 안 됩니다. 날짜를 다시 뒤로 물리면 군병이 모여 기다려야 하고 도로를 수리해야 할 것이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능에 가는 것을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2일 경자

김수항을 이조 판서로, 이관징을 정언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수찬으로 삼았다.

 

정원이, 능에 거둥할 시기가 임박하였으므로 오늘은 사당에 고하기 위해 향을 전해야 하는데 대간의 논의가 중지되지 않아 향을 전하지 못하겠다고 계품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 향을 전하지 못하겠으면 사당에 고하는 제사는 생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예의상 생략할 수 없다는 뜻으로 다시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생략할 수 없다면 향을 전하는 일 외에 무슨 품할 만한 일이 있는가."
하였다.

 

상이 능에 가는 날을 연기하였다고 하여, 도성에 머물러 있는 군병들에게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계산하여 식량을 주도록 하였다.

 

9월 14일 임인

우부승지 김수흥이 상소하기를,
"전일 호남에서 일어난 수재는 근고에 없는 일이어서, 대신들이 등대했을 때 경계해야 한다고 극구 말씀드렸었는데, 그 날 입시한 삼사의 신하들은 끝내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물러갔는가 하면, 요즘 성상께서 병환이 회복되어 상참(常叅)과 인대(引對)를 연일 거행하시는데도, 입시한 삼사의 신하들은 모두 벙어리처럼 말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맡고 있는 직책을 생각한다면 이와 같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세도(世道)를 위해 슬퍼하는 바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박장원(朴長遠)은 인품이 풍후하고 신실하여 조정에서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겸손하고 우직해서 일어난 과실로 인해 갑자기 오만하고 방자하다는 죄를 시행하였으니, 이게 어찌 그의 본정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상이 능에 참배할 때에 군사들의 의용을 갖추라고 명하였는데, 백성들 사이에 ‘상이 강무(講武)하려고 한다.’고 소문이 났다. 이에 수흥이 상소에서
"강무는 본시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인데, 하필이면 능에 참배하시는 날에 아울러 행하여 백성들의 의심을 불러 일으키십니까."
하고 언급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9월 15일 계묘

상이 광릉(光陵)으로 행행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서 호위(扈衛) 3청의 군관을 거느리고 대가(大駕)가 궁중을 떠날 때는 비변사 앞에서 진을 치고 낮에는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진을 옮겼다. 이때 유도 군병은 총융청(摠戎廳) 소속으로서 경기 군병 가운데 윤번으로 입위(入衛)한 자들인데, 종루(鐘樓)에 진을 치고 있었다. 평명에 상이 군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나갔는데, 동관왕묘(東關王廟)에 이르러 마교(馬轎)로 갈아 타고서 정오가 되어 능소에 도착하였다. 잠깐 재실(齋室)에서 쉬었다가 정자각(丁字閣)으로 나아가 제사를 거행하였다. 상이 초헌(初獻)을 한 다음, 영의정 정태화가 아헌(亞獻)을, 청풍 부원군(淸豊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삼헌(三獻)을 하였다. 제사가 끝나자,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오랫동안 서서 예를 거행하셨는데, 이제 또 산릉을 봉심(奉審)하신다면 능이 있는 곳은 높고 급하므로 올라가실 적에 다칠까 염려스럽습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대행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처음에는 매우 거북하게 여겼는데, 정원이 여러 차례 대행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자신은 막차(幕次)에 있으면서 대행케 하는 것은 참으로 안 될 일이거니와, 봉심할 때 재실로 돌아가는 것 역시 온당치 못한 일이다."
하고, 승지를 시켜 대신에게 묻도록 하였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상께서 두 능 사이의 뜰 위에 앉아 계시고 대신으로 하여금 봉심을 대행하게 하면 온당치 못한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봉심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내일은 일찍 환궁해야 하니, 오늘 능을 하직하면 예로 보아 어떠하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모두 괜찮다고 하였다. 상이 이어 나오다가 홍문(紅門) 밖에 이르러 능을 하직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9월 16일 갑진

상이 환궁하였다. 평명에 대가가 능소를 떠나는데, 백관들이 모자에 깃털을 꽂고 따랐다. 진시(辰時)에 토계원(兎溪院)에 도착하여 소주정(小晝停)하고 출발하여 몇 리쯤 가니, 금군의 마병이 길 왼쪽에 주둔해 있다가 대가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포(砲)를 쏘고 북을 치며 깃발을 흔들어 진을 만들었는데, 이는 대개 상의 분부가 사전에 있었던 것이다. 상이 진 앞에 이르러 금군 마병의 두 별장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각기 소속의 병사를 이끌고 네 군데로 나누어 진을 만들게 하였다. 진이 이루어진 다음, 상이 또 대가 뒤의 금군에게 명하여 쫓아가 진을 습격하라 명하였다. 나아가고, 물러가고, 달아나고, 달려드는 등 마치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것처럼 하여 두세 번 진을 침범하였으나 끝내는 밀고 들어가지 못하였다. 대가를 멈추고 한참 동안 이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교리 이정(李程) 등이 말 앞에 와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도중에 오랫동안 머물러서 군사를 풀어놓고 병정놀이를 구경하시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속히 전진하소서."
하고, 승지 권대운(權大運)도 옥당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대답하지 않고, 미시(未時)에야 환궁하였다. 환궁할 때에 상언(上言)을 받아들였다.

 

9월 17일 을사

이유(李秞)를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수찬으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鄭知和), 대사간 이진(李𥘼) 이하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고 승지 김수흥이 지척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모두 인피하고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다. 옥당이 모두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고, 장령 정륜(鄭錀)은 가까이 입시해 있으면서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9월 19일 정미

정언 이유가 일을 논하면서 사실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하였다.

 

9월 20일 무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이관징(李觀徵)을 장령으로 삼았다.

 

상주 목사 박승건(朴承健)이 미(米)·조(租) 2천 9백여 섬을 별도로 마련하여 진휼의 밑천에 보탰으며, 또 조(租) 3백여 섬을 마련하여 민역(民役)에 보태게 하였다. 감사 이상진(李尙眞)이 이를 계문하자, 상이 특별히 자급을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9월 21일 기유

대사헌 정지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엊그제 모였을 때에 두 사람이 연명하여 올린 소장이 들어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그 아들이 양주(楊州)에서 도적을 다스리는 옥사에 끼어 억울하게 죽었다는 소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억울하다고 낸 소장이라서 믿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기각하기로 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양주 사람을 찾아 물어본 결과 과연 그런 사실이 있었으며 사람들의 말도 자자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목사 권집(權諿)은 여러 도적들이 자복하고 난 뒤 추가로 예운(禮云)과 죽지(竹只) 두 사람을 잡아다가 최가(崔哥)라는 천총(千摠)으로 하여금 두 차례나 형문하게 한 다음 가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파직된 날에 또 당초 도적을 잡았던 군관 정시창(鄭時昌)으로 하여금 밤새도록 문을 잠그고 특별한 매질로 엄하게 심문하여 허위의 공초를 꾸민 다음 죽어가는 가운데에서 억지로 수촌(手寸)을 받아내게 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자복했다는 수효를 허위로 늘리고 계문하여 포상까지 받았습니다. 중대한 옥사를 다스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직접 심문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믿는 휘하 사람의 손에 맡겨두고 사정의 허실을 따지지도 않았으니, 옥사를 다스리는 체모에 있어서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본도로 하여금 분명하게 조사한 다음 계문하여 처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본도가 조사하여 아뢰었는데, 형조가 회계하기를,
"여러 사람이 말했던 공초를 보건대, 이른바 ‘밤새도록 문을 잠그고 심문했다.’고 하는 한 조항은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죽지와 예운 등은 이미 자복한 적들이 끌어대는 말에서 나왔고 보면, 권집이 직접 심문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휘하의 사람에게 맡겼다가 매질로 심문하여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억지로 수촌을 받아 다시 추문한 내용을 그대로 자복한 공초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가령 예운 등이 참으로 적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말한 대로 이와 같이 관례를 어기며 자복을 받았다면, 예운 등의 아비가 어찌 원통하다고 떠들어대지 않겠습니까.
정시창은 당초 고발한 사람으로서 공을 탐내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권집이 한결같이 그가 하는 대로 맡겨두어 이와 같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가자(加資)의 상은 실로 지나칩니다. 그 죄를 공과 상쇄하여야 합당할 듯합니다. 내렸던 자급을 도로 환수하고, 시창에 대해서는 본도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여러 승지들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라 하자, 옥당의 홍만용(洪萬容)과 여성제(呂聖齊)도 동시에 들어갔다. 《통감(通鑑)》을 강하고 난 다음, 성제가 아뢰기를,
"신이 휴가의 은전을 받아 영남에 다녀왔는데, 연로에서 듣고 본 것들을 우러러 진달할까 합니다. 영남은 처음에 풍년이 될 가망이 있었으나, 사나운 바람을 겪고 나서는 벼가 손상되었는가 하면, 목화까지도 전부 말라 버려 종자도 얻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도신이 올린 장계 가운데에 이런 실태를 자세히 진달하였는데, 해조가 올린 회계에는 너무나 범범하게 말하였습니다. 민역(民役) 가운데 목면으로 공납하는 것들은 일체 변통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였다. 성제가 또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적에 상께서 지나친 거조가 있으셨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슬펐습니다. 박장원(朴長遠)이 본의 아닌 잘못으로 엄중한 견책을 받았는가 하면, 김익경(金益炅)이 지은 죄에 있어서도 고의가 아닌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경이 정원에 있을 적에는 말 한 마디도 안 하다가 밖에 나아가 물의가 그르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소를 올려 스스로를 해명하여 여론에 사과하고는 그가 잘못한 책임은 모두 내게로 떠밀었는데, 이것이 옳다는 것인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사당에 고하는 예를 거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고 길주 목사 임한백(任翰伯)에게 강등했던 자급을 도로 올려 주었다. 이에 앞서 한백이 길주 목사가 된 지 24삭(朔)이 지났는데, 재상(災傷) 때문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대간이 그가 싫어서 피하였다는 이유로 논핵하여 당상의 자급을 박탈하였는데,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한백이 병으로 죽었다. 좌상 홍명하가 전에 경연 석상에서 이런 사실을 진달하고, 파격적인 은혜를 미루어 자급을 도로 줄 것을 청하였고, 호판 허적 역시 한백이 당초부터 싫어서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다고 진달하니, 상이 자급을 도로 주라고 허락하였다. 그런데 오래도록 그 명이 내리지 않자, 이 날 승지 이경억(李慶億)이 명하가 진달하였던 말을 가지고 다시 여쭈니, 상이 드디어 강등된 자급을 도로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9월 22일 경술

평안도 창성(昌城)·강계(江界) 등 28개 고을에 8월 초부터 서리와 눈이 내리기도 하고, 혹은 바람과 우박의 재해로 모두 적지(赤地)가 되었다.

 

9월 23일 신해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9월 24일 임자

예조가 사당에 고하는 일에 대해 원임 대신에게 의논을 수렴하였는데, 영중추 이경석, 판중추 정유성(鄭維城)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종사에 관계되는 경사이니, 예로 보아 고해야 합니다. 뭇 의논을 널리 물으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들은 이와 같다마는 나의 뜻은 그렇지 않으니,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핵환(核患)이 한창 위중하실 때에는 아랫사람들의 걱정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상께서 편안하시니, 종사의 경사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당에 고해야 한다는 의논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마찬가지이니, 속히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마음에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니, 허락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건강이 좋지 못하셨을 때 신들이 집에 돌아가 처자들과 울었던 상황을 성상께서는 필시 모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당에 고해야 한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생각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종사에 관계된 경사인데 어찌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조종조 때에 상의 병환이 회복되면 으레 사당에 고하였습니다. 선조(宣祖)께서 경진년에 갑자기 감기 증세가 있다가 11월에 회복되시자 12월에 하례를 받으셨으며, 명묘(明廟) 때에도 성상의 병환이 회복되었다 하여 하례를 받으셨습니다."
하고, 교리 이정(李程), 대사간 이진(李𥘼) 등도 같은 내용으로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사당에 고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허락하지 않을 따름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어제 영남의 목면으로 내는 각종의 역(役)을 뒤로 물려 받아들이는 사안에 대하여 비국이 계품하였습니다. 양호(兩湖)에도 목화가 모두 알차지 못하니, 명년 봄에 산간 고을에서 대동미(大同米) 대신 목화로 낼 몫은 절반만 바치게 하고, 절반은 상평청에 있는 은과 베로 대용하게 하고, 명년 가을을 기다려 받아들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 신유(申濡)는 묵은 병이 있고, 예조 참판 조수익(趙壽益)은 오래도록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윤은 차정하지 못한 지 여러 달이 되었고, 전주 부윤도 오래도록 차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경기 감사 이시매(李時楳)는 늙고 병들어 일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임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체직할 것을 아뢰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나라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매는 체차하고, 오늘 도목 정사에서 대임자를 차출하라."
하였다.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전일 박장원이 잘못한 일이 있어 추고와 나문까지 하셨습니다만, 그때 상의 분부가 지나친 잘못이 있기에 감히 이에 진달합니다. 그 날 전관(銓官)과 승지를 호되게 꾸짖으셨는가 하면 심지어는 ‘괴상 망측하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임금의 말은 한 번 나오면 사방이 모두 듣는 법이므로, 성스런 덕에 누가 되는 것이 참으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희로(喜怒)의 공부에 있어 깊이 살피시고 유념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곤장은 군율에 관계되는 죄가 아니면 함부로 쓰지 못한다고 이미 조정에서 신칙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라 병사 유정(兪椗)이 곤장을 함부로 사용하여 4, 5인이 연이어 죽었기에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이는 우연히 죽게 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닌 것으로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진(李𥘼)이 아뢰기를,
"전일에 금송(禁松)을 벤 일로 인하여 전 판윤 조형(趙珩)과 전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이미 죄를 받았으니 공문(公文)을 만들어 준 홍전(洪瑑)만이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충주 목사 홍전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5일 계축

강원도 평강(平康) 등 고을에 소의 돌림병이 크게 번졌으며, 평안도에는 전염병과 소의 돌림병도 번졌다.

 

호조 판서 이일상(李一相)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일상이 명가의 아들로서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화려하고 높은 직임을 두루 거치었으므로 동료들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었다. 송시열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 일상은 경기 감사였는데, 아전(亞銓)을 삼아 함께 논의에 참여하게 할 것을 계청하였으니, 그가 우대를 받은 것이 이 정도였다. 그러나 내적으로 실용할 만한 점이 없었으며, 게다가 근신하지 않아 문형(文衡)을 맡았을 때에는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는가 하면 양영남(梁穎南)의 옥사에 있어서도 영남이 비록 죽을 지경이 되었더라도 자복하지 않았으니, 뭇 의논이 시원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호조 판서가 되자, 더욱 분해하면서 빈정거리니 부득이 사직하였는데, 체직되었다.

 

9월 26일 갑인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였다. 상이 1년이 지나도록 편찮다가 이에 이르러 회복되어 비로소 경연에 나아갔으므로 뭇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시독관 홍만용(洪萬容)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하였다. 한 문제(漢文帝)가 수희(受釐)035)  하는 일에 이르러 만용이 아뢰기를,
"문제가 수희하기 위해 선실(宣室)에 앉은 것은, 바야흐로 오치(五畤)에 제사지내는 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치를 맡은 신은 어떤 신인가?"
하자, 만용이 아뢰기를,
"바로 중앙과 사방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하였다. 검토관 여성제가 아뢰기를,
"그 당시는 천지와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복을 비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문제가 가의(賈誼)의 재주를 사랑하여 선실에 불러본 다음 귀신의 일에 대해 물었는데, 그때 가의가 대답한 것은 뒷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문제가 스스로 ‘미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필시 느낀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귀신의 일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천지 음양의 이치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과 끝을 따지고 보면 음양의 이치인 것이다."
하였다. 만용이 아뢰기를,
"귀신의 이치는 끝이 없는데,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동정(動靜)으로 말하면 귀(鬼)가 동(動)이고 신(神)은 정(靜)인 것이다."
하니, 성제가 아뢰기를,
"사시(四時)로 말하면 봄·여름은 귀이고, 가을·겨울은 신이 됩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귀신의 이치는 극도로 확대해서 말한다면 천지와 만물이 모두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문제의 질문과 가의의 대답은 수희하는 즈음에 있었으므로 재상(災祥)과 화복(禍福)에 대한 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이 이미 이 일에 대한 꼬투리를 내놓았는데, 강관이 본원을 설명하여 성상의 학문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자가 없고, 봄·여름은 귀가 되고 가을·겨울은 신이 된다고나 하고 말았으니, 너무나 어긋나고 전도되었다. 그리고 오치를 토지의 신이라고 하는 것도 너무나 상고해 보지도 않고 한 말들이다.
상이 이르기를,
"한 선제(漢宣帝)가 ‘한가(漢家)는 나름대로 제도가 있는데 본디 왕도(王道)와 패도(霸道)가 섞였다.’고 하였는데, 무슨 뜻인가?"
하니, 참찬관 김수흥이 아뢰기를,
"왕도와 패도의 구별에 대해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삼황(三皇)은 봄, 오제(五帝)는 여름, 삼왕(三王)은 가을, 오패(五霸)는 겨울이며, 칠국(七國)은 겨울을 지나고 난 여열(餘烈)이다.’고 하였으며, ‘한(漢)은 왕도를 폈으나 원만하지 못하였고, 진(晋)은 패도를 하면서도 여유가 있었으며, 삼국(三國)은 패자(霸者)의 영웅격이었으며, 십육국(十六國)은 패도의 전성기였으며, 남오대(南五代)는 패도의 편승기였으며, 북오대(北五代)는 패도의 과도기이다.’ 하고, ‘수(隋)는 진(晋)의 아들격이었으며, 당(唐)은 한(漢)의 동생격이었다. 수의 말엽 제군의 패도는 강한(江漢)의 여파(餘波)였으며, 당의 말엽 제진(諸鎭)들의 패도는 일월의 여광이었으며, 후오대(後五代)의 패도는 해가 아직 뜨지 않은 때의 별과 같은 격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잘 비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경연에 나오면 침착하고 말이 없어 질문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이제 음양의 이치와 왕패에 대한 이야기로 직접 꼬투리를 내놓아 강론하고자 하였는데, 경연의 신하들이 극진한 말로 논리를 펴서 상의 마음을 열어 주는 자가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강이 끝나자,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요즘 와서 학문하는 선비로는 송시열과 송준길뿐인데 제대로 써주지 않아 향리에 물러가 있습니다. 이번 경연을 여는 때에 참여하여 강론케 한다면 보탬이 어찌 적겠습니까. 특별히 교서를 내려 부르소서."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수흥이 아뢰기를,
"질병가(疾病家)를 짓는 것은 바로 묻혀져가는 전례(典禮)를 들추어 시행하는 일이었는데, 뒤이어 대간의 계사로 인해 상께서 격노하여 중지하셨으니 너무나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궐내의 일이 구차스런 점이 많기 때문에 처음에는 지어보려고 하였는데, 대신(臺臣)들이 긴급하지 않다고 하여서 그만둔 것이다."
하자, 중보가 명년 봄에 다시 지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안질로 글을 착실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대학연의》를 강독하게 한 것이다. 전일에 강독한 《중용(中庸)》을 끝마치지 못하였으니, 다음에는 《중용》으로 진강하고, 《중용》이 끝나면 《상서(尙書)》를 강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7일 을묘

집의 송시철(宋時喆) 등이 아뢰기를,
"작상(爵賞)은 임금이 세상의 무딘 사람을 분발시키기 위한 것이니, 신중히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주 목사 박승건(朴承健)이 진구할 미곡을 별도로 마련했다는 이유로 가자(加資)의 명까지 내려졌는데, 상주는 본디 큰 고을인데다가 관아에 저축된 것 또한 많으니, 필시 전량을 자기 스스로 마련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전 참판 권령(權坽)도 별도로 마련했다는 이유로 가자한 적이 있었으나, 연신이 진달하자 곧바로 개정하였으니, 이번 박승건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상주 목사 박승건에게 내려진 가자를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이 청대하니, 상이 희정당에서 인견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를 이번에 차출해야 한다고 해조가 와서 묻기에 홍중보(洪重普)를 수의(首擬)로, 이완(李浣)을 부의(副擬)로 하였으나, 말망(末望)에는 적당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종2품 중에서 정지화(鄭知和)를 의망할 만하나 영상이 한 집안이라고 혐의하여 허락하지 않아, 조복양(趙復陽)으로 고쳐 의망에 넣으려고 하였으나 강도(江都)의 추봉(秋捧)도 서투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성상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지화가 의망할 만하다고 여겼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정지화를 영상이 혐의스럽게 여기니 비록 발탁하여 이 직임에 임명하려고 하더라도 낭패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홍중보로 임명하더라도 사신이 나오면 반드시 체직될 것이므로 성상의 의향이 지화에게 있으시다면 그때 가서 제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한성 판윤 윤이지(尹履之)는 나이가 이미 90이니, 그가 자처하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와 허적이 인재가 너무 없다고 극력 진달하고, 이어 이상진(李尙眞)과 서필원(徐必遠)을 쓸 만하다고 천거하면서
"상진은 걸음을 잘 걷지 못하고, 필원은 공의(公議)에 거슬리고 있으므로 갑자기 등용해서는 안 된다."
고 하니, 상도 애석해 하였다.

 

9월 28일 병진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주강하였다. 시독관 홍만용이 《중용(中庸)》 제2장을 진강하였다. 만용과 여러 신하들이 ‘시중(時中)’의 의의를 해석하자, 상이 일렀다.
"안자(顔子)가 낙(樂)을 고치지 않은 것과, 하나라 우임금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본다면 중용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처지가 바뀌면 모두들 그렇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이윤(伊尹)으로 말하면 유신(有莘)에서 밭을 가는 것도 중용이거니와, 세 번 맞이하자 나아가는 것도 중용인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처음 사직의 소를 올렸는데, 상이 일렀다.
"아, 경은 한번 오늘날 나라의 사정을 보라. 어떤 때라고 하겠는가.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이야말로 임금과 신하 모두가 정성을 다하여 재앙이 소멸되고 그치게 해야 할 때이다. 경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니 묵은 병이 도질만도 하다만 달리 인혐하는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경의 너그럽고 큰 아량으로서 어찌 불만을 품고 일을 하는가. 경이 인혐하고 들어가려고 하지만 내가 윤허할 리가 없으니, 속히 내놓은 사장(辭章)을 중단하고, 더욱 덕을 닦는 데 힘써 뭇 관료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이 차자를 올리기를,
"호조의 자리가 비었으나 적당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기에, 신들이 어제 청대하였을 적에 각기 소견을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의향을 이미두신 데가 있으셨으므로 신들이 감히 길게 말씀드리지 않고 물러나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수상이 뜻밖에 사직의 소를 올렸는데, 혹 이 때문에 불안해 하여 그랬다면 신들이 청대한 것이 망령된 짓이었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고, 이어 대죄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명하와 허적 등이 이미 정태화에게 걸려서 정지화를 천거하지 않았으면서도 오히려 또 서둘러 청대하여 직접 천거한 것은, 대개 수상에게 어여쁘게 보이려는 뜻이었으며, 태화가 사직의 소를 올리게 된 뜻을 또 차자로 진달하여 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으로서 나라의 일을 공평하게 살펴가는 뜻이겠는가. 그야말로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9월 29일 정사

홍중보(洪重普)를 호조 판서로, 이유(李秞)를 정언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응교로, 장선징(張善瀓)을 교리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이원정(李元禎)을 전주 부윤으로 삼았다. 전주는 감사가 부윤을 겸하고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그런 제도를 파하고 다시 부윤을 내었다. 홍만형(洪萬衡)을 대교로, 김시진(金始振)을 수원 부사로, 이홍연(李弘淵)·이천기(李天基)를 승지로, 우창적(禹昌績)을 지평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허적(許積)을 내의 도제조로, 이경억(李慶億)을 부제학으로, 남구만(南九萬)을 대사성으로 삼고, 권대운(權大運)을 특별히 우윤으로 제수하였다.

 

9월 30일 무오

상이 선정전에 나아가 주강하였다. 시독관 이정(李程)이 《중용(中庸)》 제3장에서 제5장까지 강하였는데, 특진관 남노성(南老星)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오랫동안 경악(經幄)에 출입하였습니다. 대체로 강연의 규식은 상께서 전에 강한 대목이나 새로 강할 대목을 모두 주석까지 아울러 읽었는데, 지금은 상께서 다만 대문(大文)만 읽으시니, 이는 옛 관례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규식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안질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지평 이광적(李光迪)이 상소하여 상이 희로(喜怒)에 중도를 잃은 것에 대해 경계드리기를,
"노(怒)라는 것은 칠정(七情) 가운데 하나인데, 발작하기는 쉬우나 억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발작이 우레처럼 급한가 하면 바람처럼 빠르므로, 옛 사람들이 노를 다스리는 것을 산을 꺾거나, 타는 불을 끄는 어려움에다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겸허한 마음과 안정된 기운으로 사물이 앞에 닥칠 때 순리로 응하여 스스로 성내는 것을 잊고 사리상의 시비를 살피지 않는다면, 성을 내었을 때 중정(中正)한 마음을 얻지 못하게 되는 동시에, 정사를 해치고 덕을 상하는 일들이 항상 이로 말미암게 되니, 두렵지 않습니까."
하고, 이어 징분잠(懲忿箴) 한 편을 올리니, 가상히 여겨 격려하고 마장(馬裝) 1부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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