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자
혜성이 익수(翼宿) 11도(度)에 나타났는데, 모양과 색이 점차 성해졌으며, 꼬리가 서쪽을 향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의 딸이 졸하였다. 상이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사간 남구만(南九萬)이 공안(貢案)을 개정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전부터 의논하는 자들이 공안을 개정하여야 한다고 많이 말하였는데도 지금까지 변통하지 못한 것은, 대개 사세상 곤란한 점이 있어서였습니다. 지금 간관이 이와 같이 아뢰어 청하였으니, 호조와 예조 판서, 선혜청 당상, 본사 유사 당상이 회동하여 공안에 실려 있는 각종의 원수(元數)와 정해 놓은 국용(國用)의 식(式)을 계산하되, 토산물이 아니고 한 철에만 나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 배정할 만한 것을 반복해서 강구하고 편리 여부를 따져본 다음, 품의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그후에 묘당에서 끝내 시행하지 않았다.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 근래의 폐단 중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해져 조석도 보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가 흘러온 폐단이 점차 쌓여 문득 전례가 되어, 위아래가 모두 준행하여서 고칠 수 없게 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삼사(三司)의 관원이 혹 한 해가 넘도록 쟁집하고 입이 닳도록 말하여 허락받은 것을 묘당에서 매번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 오랫동안 방치시키면서, 위로는 임금의 명을 폐기시키고 아래로는 물의를 막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국사가 어찌 해볼 만할 리가 있겠는가. 시장(柴場)이나 염분(鹽盆)·어전(漁箭)을 혁파하는 일과 같은 것에 있어서도 처음에는 모두 윤허를 받았으나 끝내는 실효가 없으며, 이른바 소결청(疏決廳) 및 공안을 개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윤허가 내린 후에 또한 모두 폐기하였으니, 대신들이 국사를 꾀함에 불충스럽고 명령을 어김에 거리낌이 없는바,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11월 2일 기축
혜성이 나타났다.
장령 이유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충훈부의 계사로 인하여 고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과 부인 조씨(趙氏)를 천장(遷葬)할 때 전에 특별히 내린 분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신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전에 비록 특별히 보살펴 주라는 명이 있었지만, 이것은 한때의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이에 이를 끌어다가 곧바로 은전을 내려 주기를 청하면서 응당 행하여야 할 옛 규례인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체에 있어서 참으로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당초에 이미 전례에 의거하여 예장(禮葬)하였으니, 지금 와서 천장하는 일로 인해 은지(恩旨)를 내려 주기를 바라 이를 감히 전하께 아뢰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기호(畿湖) 지방 백성들의 부역이 전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신경진 집에서 천장할 때 전에 특별히 내린 전교에 의거하여 거행하라는 분부를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아비를 시해한 것은 극악한 것으로, 하루도 목숨을 살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청양현(靑陽縣)에서 아비를 시해한 변고가 있었다고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전하는데, 본도에서는 아직까지도 계문하는 일이 없습니다.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은 추고하고 청양 현감 임윤석(任允錫)은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다음날 영상 정태화를 인견하였을 때 태화가 아뢰기를,
"외방의 옥사(獄事)의 체모는 반드시 죄수가 승복하기를 기다려 감사가 친히 심문한 뒤에 계문하는 법으로, 끝까지 캐묻기 전에는 감히 치계하지 못하는 것은 법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자세히 조사하여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사한 뒤에 처리하라."
하였다.
11월 3일 경인
혜성이 나타났다.
이성징(李星徵)을 형조 참의로, 유여량(柳汝𣛀)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상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요즘은 《대전(大典)》을 보니 막히는 곳이 많았다."
하니,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전》은 단지 강령(綱領)만 기록해 놓은 것이며, 전후의 《속록(續錄)》이 자못 상세합니다."
하고,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여러 조정에 걸친 수교(受敎)를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하였으니, 《속록》의 규정과 같이 정리하여 간행해 관리들로 하여금 준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정리하여 간행하고자 하면 반드시 국(局)을 설치하여야 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반드시 국을 설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상이 현재 추안(推案)을 고열(考閱)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로 하여금 수교를 정리하는 일을 아울러 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조정에 걸친 수교를 행할 만한 것과 행하지 못할 것을 모두 기록, 부표(付標)하여 품의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남구만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인재를 얻기 위하여 별천(別薦)하는 일이 있는데, 전부터 별천한 사람은 으레 서경(署經)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천거한 사람을 지금 비로소 서경하였으며, 또한 실제적으로 뽑아쓰는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별천한 사람을 또 이와 같이 뽑아쓰지 않는다면, 별천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입니다. 이조로 하여금 지난해와 금년에 별천한 사람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등급을 나누어 뽑아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해 탑전에서 품의해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간원이 아뢴 내인(內人)을 가려뽑은 일에 대해 여러 날 동안 잇따라 아뢰었는데도 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듣기에 아름답지 않으니 따라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윤허한 뒤에 혹 여종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제대로 시행하지 못할 경우에는 일이 몹시 불편할 것이기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양민을 뽑지 않았어도 부리는 데 부족한 걱정이 없었는데, 하필 규정 밖의 일을 하십니까."
하고, 정태화도 대간의 아룀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으로 진달하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부제학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성변(星變)이 일어난 후로 상께서 비록 공구수성하시었으나 현재 드러나게 한 일이 없습니다. 폐해를 일으키는 크고 작은 정사를 십분 강구하여, 변통시키는 바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각 아문의 둔전(屯田)은 바로 백 년 동안 내려온 고질적인 폐단으로 조종조에는 없었던 일이니, 이때에 변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둔전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에 속한 것이 가장 많은데, 만약 둔전이 없으면 모양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시험삼아 양지(陽智) 한 현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이 현은 본래 4개 면인데 2개 면이 둔전에 들어가 있으므로 고을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지는 공전(公田)이고 백성은 공민(公民)인데, 관가에서 손을 쓰지 못하여 경작하여 거둔 소출이 모두 아문으로 들어가버리고, 또 그 둔전은 도망친 자들이 모여드는 소굴이 되었는바, 이것이 고질적인 폐단이 된 까닭입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떠도는 백성들이 역(役)이 없는 것을 이롭게 여겨 와서 의지하는데, 그들이 흩어져 떠난 뒤에는 반드시 농사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설령 둔전의 백성들이 흩어져 떠나더라도 우리 나라 백성이 되는 데 불과하니, 어디로 가도 농민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점은 분명히 있으나, 반드시 도감이 일 년에 둔전에서 거두는 것이 얼마나 되며 전세(田稅)로 대동미(大同米)를 대신 주고서 부족한 숫자가 얼마나 되나를 안 다음에야 바야흐로 변통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에 의거하여 하라."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각 아문에서 은화(銀貨)를 많이 축적하고 있는데, 쌓아두고서 통행하지 않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이익을 놓쳐 자본을 취할 곳이 없어서 원망이 자못 심합니다. 그리고 매매하는 즈음에 백성들과 더불어 이익을 다투어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 아문에서 은을 무역하는 것이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병자년 난리에 국가의 저축이 고갈되었었는데, 각 아문이 전의 일에 징계되어 은을 경화(輕貨)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에 저축을 하여서 사변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지금 이후부터는 각 아문에 신칙하여 은을 무역하는 폐단을 엄히 금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는 각 아문으로 하여금 은화를 모으지 말게 하라."
하였다.
11월 4일 신묘
달이 우성(牛星)을 범하였다. 혜성이 익수(翼宿) 안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길이가 2장(丈)이었다.
11월 5일 임진
혜성이 익수 서남쪽 별 바깥의 장성(張星) 18도(度)에 나타났는데, 곧장 성성(星星)을 향하였다.
의정부와 육조가 동지(冬至)의 물선(物膳)을 올리니, 상이 재변으로 인하여 술을 금지하였다는 이유로 두 대비전 외에는 향온(香醞)을 봉진하지 말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평성 부원군 신경진과 부인 조씨 두 상(喪)을 천장하는 데 쓸 장구(葬具)를 이미 전에 내린 특교(特敎)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였으므로 관곽과 석회를 호조에서 제급(題給)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장은 초장(初葬)과는 차이가 있어 대신이 이미 또다시 예장(禮葬)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진달하였으니, 담군(擔軍)과 조묘군(造墓軍) 및 전수(奠需)를 해도로 하여금 헤아려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의 해변에 사는 백성들은 오직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영과 통영 및 병영·수영에서는 ‘해부(海夫)’라고 칭하면서 어거지로 체문(帖文)을 지급해 물선군(物膳軍)으로 충정하고는 달마다 고기를 징수해 갖가지로 침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선과 염분에 대해서는 그 세(稅)가 있고 본 고을에서는 또 토민세(土民稅)를 거두는데 4영(營)의 군관들이 해변에 출입하면서 서로 독촉하며 징수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몸에 이렇게 두세 가지의 역(役)이 있으니, 어찌 몹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좌도의 병영과 수영에서는 고기잡이를 하는 곳에다 포자(鋪子)를 설치하고는 해부들이 납부하는 것을 거두어 모은 다음 시장에다 좌판을 늘어놓고 어호(漁戶)들과 이익을 다투고 있으니, 참으로 몹시 형편없습니다. 만약 통렬히 금하지 않는다면 바닷가에 사는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장차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경상도 각영의 물선군을 모두 혁파하고 좌도의 병영과 수영에서 설치한 포자도 금지시키도록 하여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남구만 등이 동지(冬至)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조종(祖宗)이 묵묵히 가르쳐 주어 전하께서 혁연히 분발해 큰 일을 하려는 뜻을 가져 여러 신하들을 두루 만나보고 몸소 잘못된 정사에 대해 물으시었으니, 이는 바로 초 장왕(楚莊王)이 종(鍾)을 끊던 때037) 이고 제 위왕(齊威王)이 아대부(阿大夫)를 팽형(烹刑)에 처하던 그런 날038) 입니다. 이에 아래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눈을 씻고 다시 보면서 잘 다스려진 태평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양(陽)이 회복되는 시기가 마침 이러한 즈음에 있게 되었으니, 이는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신들은 구구한 충성심을 가눌 수 없어 감히 《주역(周易)》의 내복(來復)의 뜻을 미루어 이로써 동지(冬至)에 신발과 버선을 바치는 정성에 비깁니다."
하고, 이어 복괘(復卦) 6효(爻)의 뜻을 추연(推演)하여 아뢰기를,
"이 괘의 뜻은 모두가 지극한 훈계이나 그 가운데서도 육오효(六五爻)의 선을 회복함이 돈독하다는 것이 전하께서 오늘날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서 행하여야 할 바이며, 육삼효(六三爻)의 선을 회복함이 잦다는 것이 전하께서 오늘날 마땅히 두려워하면서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치고 누구인들 선을 회복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혹 끝내는 미혹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혹 이미 회복되었다가 도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단지 사욕에 가리워져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비록 선의 단서가 회복되고 천리(天理)의 마음이 드러났지만 쌓여온 폐단을 일소시켜 크게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하지 못하는 것도 사사로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항상 한 사람으로 인해서 천하가 다스려지고, 천하를 가지고 한 사람을 봉양하지는 않는다는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잊지 마소서. 그런 다음에야 육오효의 선을 회복함이 돈독하여 후회가 없음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개성부에 여역(癘疫)이 치성하였으며 우역(牛疫)도 치성하였다.
11월 6일 계사
새벽녘부터 신시(申時)까지 요사스런 운기(雲氣)가 끼어 사방이 어두침침하였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의영고 직장 성운한(成雲翰)은 조씨(趙氏) 성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선산(先山)에 투장(偸葬)하였는데도 본도에서 즉시 처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쟁(擊錚)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대부가 격쟁하는 것은 부형의 몸에 형륙(刑僇)이 가해지는 경우가 아니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재판을 하여 형(刑)을 받고난 뒤에도 그대로 직임을 가지고 있어서 염치와 부끄러움을 잊어 사대부들에게 욕을 끼쳤으니, 조정 신하의 반열에 끼워줄 수 없습니다. 성운한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성운한의 산송(山訟)의 곡직에 대해서는 양쪽편의 말을 들어보면 저절로 판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 경기 감사 이시매(李時楳)는 세 번이나 송관(訟官)을 바꾸고 어거지로 꿰맞추면서 판결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몹시 놀랍습니다. 이시매를 파직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성 안에 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직을 제수하고 음식물을 지급하여 그로 하여금 머물러 있게 하라."
하였는데, 부제학 이경억 등이 차자를 올려 진달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그러나 호조가 음식물을 보내었을 때는 윤선거는 이미 떠나갔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11월 7일 갑오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11월 8일 을미
혜성이 나타났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여 공격하였다는 이유로 상소하기를,
"신이 성상과 인척간이라는 혐의도 피하지 않고 오랫동안 본병(本兵)의 권한을 맡고 있었으니, 지금 와서 실패당하는 것도 늦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신이 크게 한스러운 것은, 신이 일찌감치 물러나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스러운 조정에 욕을 끼치고, 청렴하다는 명망을 지닌 선비로 하여금 벗을 팔았다는 이름을 얻게 한 것입니다.
신은 집의 이단상과는 평소에 교분이 있었는데, 연전에 단상이 밤중에 방문하여 곡진하게 신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떠도는 말을 내가 이미 들었으니 그대에게 말해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어찌 그대와 우암이 마음과 생각이 서로 막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우암은 바로 송시열의 별호(別號)입니다. 이에 신이 답하기를 ‘나는 우암과는 정분이 깊지 않다. 민유중이 우리 집안을 죄주기를 청한 논의에 대해 우암이 과연 그 당시에 알고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민유중에 대해서는 원망을 감추고 교제하지는 못하였지만 함께 국사를 처리하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음을 민유중 형제 역시 알고 있다. 그런데 더구나 참여하여 들은 우암에 대해서야 무슨 깊고도 묵은 원망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떠도는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우암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처럼 72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듯이 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단상이 또 묻기를 ‘그대는 복제(服制)의 논의에 대해 소견이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나는 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니 어떻게 절충할 수 있겠는가. 다만 윤선도(尹善道)가 속셈을 가지고 끌어대어 꾸며댄 것은 몹시 어질지 못한 것이나, 마땅히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붕우간에 심정을 토로한 말일 뿐입니다. 이단상은 뜻이 있어서 질문하였으나 신은 말 나오는 대로 응답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이것을 증거물로 삼아 신을 파는 바탕으로 삼을 줄 알았겠습니까.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어진이의 진퇴가 국구(國舅)의 의향이 어떠하냐에서 말미암았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말하기를 ‘김좌명의 뜻이 그렇다면 국구의 뜻도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더욱더 두려워할 만합니다. 국구의 뜻이 이와 같다면 또 장차 이를 미루어서 어느 곳까지 미칠 것입니까. 이미 지나간 일을 제기하여 무한한 뜻을 감추고서 내외로 하여금 의혹하게 하고 공사(公私)로 하여금 모두 근심하게 하고서도 이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신의 형세는 결단코 하루도 조정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속히 신을 파직한 다음 먼 변방으로 내쳐서 공의에 답하소서."
하고, 그의 동생인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도 상소하기를,
"집의 이단상이 상소에서 말한 바 ‘송시열이 마음속으로 불안해 한다.’는 한 조목은 크게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신 집안의 지난날 일은 무지하여 망령스러운 데서 나왔으니, 대론(臺論)의 내용에 사람의 자식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재앙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났으니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허물하겠습니까. 당시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찌 여러 해 동안 가슴 속에 담아두면서 사사로운 한으로 여겨 국가의 위급함을 뒤로 하였겠습니까. 한밤중 깊숙한 집안에서 정답게 대화하면서 은미한 단서를 이끌어내고는 이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서 때를 기다렸다가 지금에 와서 모두 다 말하였으니, 말과 글이 자연 서로 다릅니다. 또한 형을 미루어 동생에게 미치면서 슬며시 얽어넣었는데, 그가 이른바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亦必無異]’ 네 자도 어찌 ‘반드시 없다고는 할 수 없다.[莫須有]039) ’는 것의 유의(遺意)에서 나오지 않은 것임을 알겠습니까. 얼굴을 마주 대하여서는 정다운 체하고 돌아서서는 비난하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자신을 팔면서도 수치스러운 줄을 모르는 것은, 세간의 시정잡배들 교제에서는 혹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단상이 어찌 이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하고, 이어서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유배보내거나 쫓아내어서 언로를 열고 삿된 길을 막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두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아뢰기를,
"유신(儒臣)이 물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두 신하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한다면 두 신하가 불안해 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상소의 내용을 보니 본 실정을 다 알겠습니다. 어찌 이것으로 지나치게 인혐해서야 되겠습니까. 모두 직임을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첨지 조박(趙搏)과 행 부호군 안경(安鏡)은 모두 무인인데, 깍지[角指]에 혀[舌]가 있는 폐단을 상소하여 진달하였으며, 전 현감 지우룡(池遇龍)도 무인인데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하여 양역(良役)이 편중된 폐단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상이 모두 도타운 내용으로 답하였다.
이때 여러 차례 구언하는 전지를 내렸는데도 상소한 자가 아주 적었다. 그런데 몇 명의 무인이 이렇게 상소하여 진달하였으니, 비록 채용하기에는 부족한 내용이었으나 또한 이 당시의 말하기를 꺼리는 습속이 미워할 만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11월 9일 병신
혜성이 나타났다.
이민서(李敏敍)를 헌납으로 삼았다.
처음에 장령 이유가, 개성부 유생 조석(曺錫) 등이 차례로 돌아가면서 모여 술 마시는 폐단에 대해 논계하고, 또 교수 석지형(石之珩)이 부유한 상인과 결탁하여 대신 글을 지어주고 뇌물을 받은 일을 논핵하였는데, 유수 오정위(吳挺緯)가 글을 올려 사직하고 또 석지형을 위하여 변명하였다. 그러자 이유가 이를 이유로 인피하면서 이어 아뢰기를,
"개성부의 유생들이 모여 술 마시는 폐단이 그지없으니 본부에서는 마땅히 일체 금지시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내 금지시키지 못하였으며, 또 따라서 사직하였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교수 석지형의 일에 이르러서는, 지난번에 논계한 뒤에 조사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수 오정위는 감히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신구(伸救)할 바탕을 삼았으니, 사체에 있어서 이렇게 해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되도록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11월 10일 정유
혜성이 성성(星星) 아래 외주성(外廚星) 동쪽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제주 시재 어사(濟州試才御史) 윤심(尹深)이 돌아왔다. 상이 대제학에게 명하여 유생들의 시권을 과차(科次)하게 하여 문영후(文榮後) 등 세 사람을 뽑고, 무재(武才)에 우등으로 입격한 문창업(文昌業) 등 네 사람을 아울러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아가도록 하고, 그 나머지 40명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윤심이 서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본주(本州)의 해변 형세를 자세히 살펴보니, 섬 주위 사면이 모두 바위로 둘러싸여 있어서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겨우 7, 8곳뿐이었는데, 모두 이미 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사변이 있을 경우에는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방비하기만 하면 되니 누선(樓船)을 갖추어두는 것은 수어(守禦)하는 도구가 못 될 듯합니다. 그리고 물살이 내양(內洋)과는 달라 풍랑이 몹시 센데, 누선은 위가 무거워서 좌우로 흔들려 마음대로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포구 안에만 있는 채 감히 한 번도 바다 가운데로 나가지 못하니, 급할 때 쓸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쓸모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개삭(改槊)하고 개조하며 즙물(楫物)을 마련하느라 민력을 다 쓰고는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데, 이것이 섬의 고질적인 폐단 중 첫째가는 것입니다.
본주의 누선 5척과 방패선(防牌船) 5척을 모두 혁파하소서. 만약 유래가 오래되어 갑자기 혁파하기가 곤란하다면 누선의 상층부를 철거하고 방패선을 만드소서. 그러면 조금은 운용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폐단도 자못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본주의 군기(軍器)는 원래의 숫자가 많아서 한 도를 지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월과(月課)가 해마다 늘어나 물력(物力)이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 정철(正鐵)로 만드는 연환(鉛丸)은 본주에서 나는 것이 아니어서 해마다 마련해 갖추는 즈음에 백성들에게 피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묵은 것을 보수하기에도 겨를이 없습니다. 월과 군기의 숫자를 헤아려서 줄이소서."
하고, 또,
"본주에 예전에는 내수사선(內需司船)이 41척 있었는데 그 가운데 9척이 이미 패선(敗船)되어 문서에서 삭제되었고, 그 나머지 32척 역시 세월이 오래되어 썩어서 지금은 한 척도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수사에서 세(稅)를 거두는 것은 지금도 그치지 않아 당초에 배를 탔던 자들의 증손과 현손 및 그 족속과 이웃을 아울러서 인보(隣保)라고 하고는 똑같이 독촉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배가 없는데도 세를 징수하는 것은 사리에 있어서 마땅치 않을 뿐만 아니라 거두는 것은 아주 적으면서 갖가지로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세 거두는 것을 혁파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하소서."
하고, 또,
"섬의 옛 규정에 나이가 10세 이상인 백성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이름을 문서에 기록하는데, 그것을 ‘이장(里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크고 작은 요역을 오로지 인구수에 따라 책임지웁니다. 대정현(大靜縣)은 백성의 숫자가 아주 적어 잡고(雜故)를 제외하고 역을 하는 자가 1백 46명뿐으로, 이때문에 모든 일이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자(牧子)는 가장 고역이라고 하는데도 보인(保人)이 없는 40여 명이 많은 말들을 보살피고 있으니, 다른 잡역도 아주 고되다는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인근 고을 사람들이 대정현을 마치 구덩이처럼 보고 있으니, 변통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대정은 토지가 아주 비옥하여 논이 많고 목면이 생산됩니다. 그러므로 제주 사람들로 여러 대에 걸쳐 옮겨와 살고 있는 자의 숫자가 1천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제주의 이장에 들어가 있으므로 대정현에서 부역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섬 안의 세 고을은 모두 똑같으니 대정현 백성들로 하여금 치우치게 고통을 받게 해서는 부당합니다. 대정현 경내에 옮겨와 살고 있는 자를 모두 본현의 이장에 속하게 해 편하고 고됨을 균등하게 하소서."
하고, 또,
"도내의 각시 노비(各寺奴婢)로서 육지로 나가 사는 자들을 ‘출륙 노비(出陸奴婢)’라고 하는데, 해마다 공미(貢米)를 거두어 원곡(元穀)에 회록(會錄)합니다. 그런데 바다를 건너 왕래하면서 찾아내어 징수하는 즈음에 그 폐단이 몹시 큽니다. 모든 출륙 노비에 대해 그들이 살고 있는 고을에서 공미를 거두어서 경사(京司)로 곧바로 바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섬에 있는 세 고을의 누선의 폐단에 대해서는 전부터 고을을 맡고 있는 관원들이 모두 말하였으므로 일찍이 이미 그 숫자를 줄여 정하였습니다. 쓸 만한 것이 아닌데도 민력을 허비하고 있다면 옛 규정만을 고지식하게 지켜서는 안 됩니다. 병선으로 바꾸어 만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섬의 군기를 육지에 내어다 쓸 수 없다면 해마다 더 갖추는 것은 과연 무익할 듯합니다. 3년간 월과를 정지하고 예전 것을 수리하는 데 전념케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수사의 배에 대해서는, 이미 그 배가 없는데도 세를 징수하다니,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내수사에게 실제를 조사해서 감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정현에 들어가 살고 있는 제주 사람에 대해서는, 대정현에 이속시켜서 본현의 역에 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출륙 노비에 대해서는, 육지로 나온 지 오래되지 않은 자는 법대로 쇄환하고 육지에 산 지 오래되어 쇄환하기 곤란한 자는 그가 살고 있는 고을에서 공미를 거두어 곧바로 납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그뒤에 내수사의 관원이 상에게 아뢰기를,
"제주에 있는 배 32척은 현재 있는 숫자이니, 뱃사람들의 하소연하는 말로 인하여 경솔히 변통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햇수가 오래된 배는 응당 패선되는 걱정이 있을 것이니, 원통하다는 말은 실로 헛말이 아니다. 아울러 탕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11일 무술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침을 다 맞자 약방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한성부에는 단지 좌윤 한 사람만 있는데, 판윤 이완(李浣)은 늙은데다가 또 훈련 도감의 조련하는 일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한성부 역시 사무가 번잡한 곳이니 겸임하여 살피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또 병조 참의 이원진(李元鎭)이 늙고 병들어 출사하지 못하는 상황을 진달하고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송준길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고 이어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재변이 한꺼번에 몰아닥치자 성상께서 경계하여 두려워하고 계시는데, 천도(天道)는 현묘하고 심원하여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개 하늘이 임금을 사랑해서 임금으로 하여금 재변을 인해서 마음을 가다듬어 치세를 이루도록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임어하신 처음에도 경연을 열어 강독함에 있어서 이미 선왕만큼 부지런히 힘쓰지 못하셨는데, 그뒤에는 점차 폐하여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정에 있는 신하치고 그 누가 이 점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경연을 열라고 자주 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성상의 몸이 편치 못하여서일 뿐입니다.
기억하건대, 지난 무술년 겨울에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불편하신 몸이 미처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일찍이 신들을 부르시어 대조전(大造殿) 침실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조용히 강론하시었으며, 심지어는 유배 중에 있는 신하까지도 불러오도록 쾌히 허락하시었습니다. 신은 그 당시의 일을 생각할 적마다 감격스러워 눈물을 떨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효종 대왕을 본받으시어 날마다 유신(儒臣)들을 불러서 침실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전하께서는 앉거나 눕거나 편한 대로 하신 다음 입시한 자로 하여금 경사(經史)를 담론하고 고금(古今)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그러면 환관이나 궁녀와 더불어 깊숙한 구중 궁궐 속에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손해와 이익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여러 관사의 공사(公事)와 신하들의 소장(疏章)이 모두 적체되어 몇십 일이 걸리기도 하며 약방의 문안에 대한 비답 역시 아침이 다 가도록 내리지 않아 대신들로 하여금 새벽에 들어와 한낮에 물러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에 중외에서 서로들 말하기를 국조 이래로 없었던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은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몹시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고, 또,
"전하께서 이미 박장원(朴長遠)을 발탁하여 총재(冢宰)의 자리에 두었으며, 또 이미 복상(卜相)하였으니, 예로 대우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찮은 일로 옥리(獄吏)에게 내리면서 조금도 어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정사를 시행함에 있어서 걸핏하면 사사로움이 끼어들기에, 신이 일찍이 이를 개탄해 탑전에서 맞대놓고 진달하자, 성상께서 기뻐하시면서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뒤에 신이 자세히 살펴보니, 신의 말이 조금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대간이 혹 일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힘쓰시기를 권하는 바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문득 노여운 기색을 띠시며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니 이 이후로는 장차 어디에서 그칠 것입니까. 그리고 삼가 듣건대, 지난번에 어떤 백성이 노비의 일로 송사하자 전하께서는 갑자기 곤장을 때려 죽이도록 명하였다고 하는데, 성스러운 덕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또
"요즈음 여러 궁가에서 마구 거두어 들여 원망을 사는 폐단이 이루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전하께서 엄하게 단속하여도 이를 혁파시키기 어려울까 염려되는데, 때때로 그들을 도와서 그들의 욕심을 채우게 하십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왕자나 부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더구나 그들의 거처나 일상쓰는 물품이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사람들이 모두들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하늘의 녹을 영원히 누리게 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하고, 또
"일에 대해 말하는 신하가 말 때문에 죄를 받는 것은 성스러운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곽제화(郭齊華)와 이규령(李奎齡)·조성보(趙聖輔) 등은 모두 언관으로서 죄를 받아 유배되었는데, 이 세 사람은 일은 비록 각각 다르지만 말로 인해 죄를 받은 것은 똑같습니다. 이규령 등이 아직도 죄적(罪籍)에 올라 있어 송시열이 이 때문에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직하는 글도 감히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매번 이를 생각할 적마다 심정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이 떠도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자신을 책하는 교서를 내린 뒤 곧바로 궁녀를 뽑아들이라는 명이 있었으며, 심지어는 대간이 그에 대해 말했는데도 살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재변이 해소되기를 바라고자 한다면 뒷걸음질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도모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은 마침 양(陽)이 회복되는 때인데 하늘이 마음을 변치 않아서 만물이 소생하고 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니 온갖 감회가 가슴 속에 가득합니다. 이에 삼가 송축(頌祝)하는 구구한 정성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하늘의 노여움이 몹시 심하여 변괴가 거듭 일어나는데, 역사책에서 살펴보아도 오늘날 같이 심한 것은 없었다. 이에 몹시 놀랍고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말뜻이 간절하고 가르침이 절실하여 내가 몹시 기쁘다. 그러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은 단지 번연히 뜻을 바꾸어 올라오는 데 있다. 그런데 상소의 내용은 아득하기만 하니, 경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경과 찬성(贊成)040) 은 선왕에게 지우(知遇)의 은혜를 받은 것이 어찌 적겠는가.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되도록 속히 올라와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는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11월 12일 기해
혜성이 호성(弧星) 안에 나타났다.
11월 13일 경자
혜성이 군시성(軍市星) 동쪽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홍처후(洪處厚)를 병조 참의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삼았다.
장령 이유가 아뢰기를,
"오부(五部)의 방역(坊役)이 균등하지 않은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내사(內司) 및 여러 궁가의 노비는 역에 차출하지 않으며 포수와 솔정(率丁)도 차출하지 않습니다. 이에 방민(坊民)들 가운데 방역을 하지 않으려고 꾀하는 자들이 이런 부류라고 거짓으로 칭하여 중간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아주 많아서, 현재 살고 있는 방민들이 치우치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변통하여 균등하지 않은 폐단이 없게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이단상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후로 송시열 등 여러 사람을 예우한 것이 지극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근래에 송시열이 부르는 명을 받고도 올라오지 않고 묻는 것이 있어도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성상께서 반드시 의아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미 감히 올라오지 못하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감히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는 분명하게 지적할 수 없으나, 윤선도(尹善道)에 관한 일 이후의 일이 모두 송시열이 마음 속에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좌명의 집안과는 수도(隧道) 등에 관한 일로 마음과 생각이 서로 막혔다.’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고 모두 말하고 있으며, 신이 김좌명과 함께 마주 대하여 논한 것이 여러 차례입니다. 송시열이 물러가고 나오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가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여기는 것으로는 이것이 가장 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상소하면서 지난날의 일을 모두 거론하였으니, 어찌 이 한 조목에 대해서만 사사로이 대화한 것이라는 점을 혐의롭게 여겨 묻어둘 수 있겠습니까.
복제(服制)에 대한 의논에 대해서도 한쪽으로 귀결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국가를 위해서였고 송시열을 위해서였으며, 김좌명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상소에 신을 일러 벗을 팔았다고 하였으며, 또 신이 전에 문답한 말을 가지고 신이 속셈이 있어서 묻고는 지금 와서 벗을 파는 바탕으로 삼았다고까지 하였으며, 또 ‘은미한 단서를 끌어내어 가슴 속에 간직해 둔 채 때를 기다렸다가 지금 와서 진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의 말과 같다면 그 사이의 정태(情態)는 참으로 형편없는 일개 소인입니다. 어찌 이와 같이 심하고 참혹하게 신을 논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서필원(徐必遠)이 지난날 논의하면서 반드시 조손(祖孫)의 의리로 단안을 내리고자 한 것은 끝내 무식한 데로 귀결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른바 ‘그 사이에 어찌 참작할 도리가 없겠는가마는 의(義)로써 은혜를 가리워야 할 곳이다.’라고 한 것은, 나름대로의 견해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신의 의견도 일찍이 서필원의 견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초에 사나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서 그것이 송시열을 모욕하는 말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비록 본심은 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몹시 해괴하고 패만한 것으로 한 차례 벌을 받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서필원의 심사 역시 신이 아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상소에서 한 말은 모두 신이 평소에 본 것이며 평소에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서필원의 상소에서는 신의 상소를 가지고 ‘이 사람을 내치지 않으면 저 사람이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전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이어 사직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각사 노비의 이웃과 친족을 침해하는 폐단이 백성들에게 해독을 가장 많이 끼치고 있습니다. 을미년에 추쇄한 뒤로 서로 잇달아 유망(流亡)하여 빠진 인원이 몹시 많습니다. 그런데 식년(式年)에 가현(加現)할 때 차사원(差使員)이 반드시 형장(刑杖)을 쓰므로 잔약한 백성들이 매서운 매를 감당치 못하고 허명(虛名)을 지어내어 기록해 우선 당장 무사하기만을 도모합니다. 이에 신공(身貢)을 낼 때에는 도망하거나 죽은 자 및 허명이 기록되어 있는 자는 징수할 곳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조사해 아뢸 때 해조가 지난해 신공을 바치지 않은 자들만 감하고 지난해 신공을 바친 자들은 ‘현존(現存)’이라고 하고서 일체 독촉해 받아들였습니다만, 이것은 지난해 납부한 것 역시 이웃과 친족에게서 징수한 것임을 전혀 모른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제주(濟州)를 맡고 있으면서 보니, 본주의 각사 노비로서 육지로 나와서 살고 있는 자의 숫자가 1만 명에 가까웠는데, 한 사람당 신공으로 내는 쌀이 단지 2두(斗)였으므로 유망하는 자가 전혀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이 예에 의거해서 헤아려 감하여 규례를 정하되, 노(奴)나 비(婢)를 막론하고 바닷가 고을은 한 사람당 쌀 7두를, 산골 고을은 한 사람당 베 1필을 내게 하여 그들의 힘이 펴이게 하고, 이를 영원히 준행한다면, 유망하는 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반드시 도망하여 흩어지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군역에 충정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말한 자가 많습니다마는, 끝내 좋은 방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구언 전지에 응하여 올린 상소 가운데서 말하기를 ‘군적(軍籍)에 있어서는 실제 군병을 얻기를 힘쓰고 구차스럽게 한정(閑丁)을 충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15세가 안 된 자는 이름과 나이를 별도의 장부에다 기록하고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군적에 올리게 하며, 품팔이하는 자나 구걸하는 자는 일체 삭제합니다. 여러 고을의 군부(軍簿)는 우선 예전 인원수를 그대로 두고 몇 명이 충정되지 않았다고만 기록한 다음, 수령에게 명하여 백성들을 휴식시켜 기르고 모여들게 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장정을 얻는 대로 보충하게 하되, 시한을 한정하지 말고 모두 충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6년마다 으레 반드시 군적을 정리하여 갑자기 소요를 일으키는 걱정이 없게 합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치도(治道)를 제대로 아는 탁견으로 실로 오늘날의 폐단을 구할 수 있는 묘약입니다. 바라건대, 묘당에 물어서 6년마다 군적을 정리하는 한 조항을 특별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홍양 현감(洪陽縣監) 이후(李垕) 역시 전지에 응하여, 각년의 포흠된 곡식과 노비의 작미(作米)와 각종의 군포(軍布)를 거두지 못한 것을 침해하여 징수하는 폐단에 대해 진달하고, 변통하기를 청하였다. 이를 모두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복계하여 시행하지 않았다.
11월 14일 신축
혜성이 천측성(天厠星) 가운데 나타났다.
우찬성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였다가 크게 풍파를 일으켰으므로 신은 문닫아 걸고 스스로를 나무라면서 곧바로 죄를 청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너그럽게 포용하시어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었습니다. 신은 마땅히 잇따라 글을 올려 끝내 허락해 주시기를 바랐어야 했습니다만 성상의 위엄을 누차 범할 수 없는데다가 시론(時論)이 막 일어났으므로 감히 이름을 드러내어 듣기에 놀랍게 하지 못하고 묵묵히 답답함을 억누른 채 날짜만 보내었습니다. 지금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재변을 당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하시어 구언하는 교서를 내렸다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보건대, 송 효종(宋孝宗) 순희(淳熙) 8년에, 나타나는 징조들이 상도에 어긋나고 계속해서 겨울 우레의 변이 있었는데, 이때 주부자(朱夫子)가 고하여 경계시킨 것은 형정(刑政)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어리석은 신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망령되이 말하여 조정을 그르친 죄는 끝내 용서해서는 안 되는데, 마침내 주벌을 면하게 된다면 참으로 형벌이 중도를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 시골에 누워 있는 천한 신으로 하여금 다시 높은 자급과 직책을 띠고 세월을 보내게 한다면 또 어찌 정사의 체모에 있어서 마땅한 바이겠습니까.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리어 정사와 형정을 밝게 닦아 재변을 늦추는 한 가지 단서로 삼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아, 하늘이 노여워함이 어찌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심하단 말인가. 변괴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른 바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다. 한밤중에 고요히 생각해 보아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제 막 나의 뜻을 하유한 글에다 써보내고는 날마다 생각을 바꿔 올라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지 않게도 먼저 허물을 인책하는 글을 올리니, 어쩌면 그리도 멀리 나의 뜻과 어긋났단 말인가. 군신간에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귀중하다. 더구나 경은 스승으로 있었던 은혜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의(情義)가 서로 미더운 것이 어찌 얕겠는가. 경이 마음 속으로 얼마간 불안하게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해 내가 하나하나 분명하게 따져보고 싶다. 그러나 글에다 쓰면 말과 뜻이 어긋나겠기에 내가 주저하면서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건대, 끝까지 이와 같이 한다면 앞으로 나의 뜻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없겠다. 이에 다시 말하는 것이니 경은 이를 생각하라.
생각해 보건대, 평소 정의가 서로 미더웁기가 경과 나 사이만한 경우가 없었지만,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의심하기가 또한 경과 나 사이만한 경우가 없다. 이것은 모두가 나의 성의가 미진해서 그런 것이다. 대략만 거론하고 상세한 것은 거론하지 않는 것은, 경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조용히 면대해 유시하고자 해서이다. 올라와서 오래 머무는 것은 비록 바랄 수 없으나, 경은 어찌하여 한번 서로 만나보아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는가. 경은 이 뜻을 깊이 생각하여 속히 생각을 바꿔 올라와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최효건(崔孝騫)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공자가 애공(哀公)을 만났을 때 애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으니, 지(知)·인(仁)·용(勇) 세 달덕(達德)으로 말하였습니다. 지(知)란 만물에 두루 통하여 하는 일마다 이치에 맞는 것인데,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불세출의 지혜가 없으면 비상한 재주를 가진 인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진 목공(秦繆公)이 우구(牛口)에서 등용하고041) 한 고조(漢高祖)가 항오(行伍)에서 발탁한 것042) 과 같이 한 다음에야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이란 널리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을 구제하되 친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소원한 데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제거하기 어려운 것은 사사로움입니다. 전하께서는 정치를 펴고 인을 베푸는 데 있어서 반드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우선 베푸시니, 이것은 인입니다. 그러나 깊숙한 곳에 혼자 있어서 아무도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곳에 계실 때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이 없으십니까? 전하께서는 호령을 발하여 시행함에 있어서 사람을 상할까 두려워하시니, 이것은 인입니다. 그러나 한가히 계시면서 혼자서 즐기실 때도 조금도 편벽된 생각이 없으십니까?
용(勇)이란 분발하고 강건하고 강인하고 굳세어 일에 임하여 단호히 결정하되 의(義)를 으뜸으로 삼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말수레를 치달리며 눈을 시원스럽게 하고 뜻을 웅대하게 가지시니, 이것은 용입니다. 그러나 또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건하며, 정대하고도 꿋꿋한 기상이 있으십니까? 전하께서는 군사를 잘 지휘하시며 평상시에도 어려운 때를 잊지 않고 계시니, 이것은 용입니다. 그러나 또 의리에 입각해 일을 처리하시며 선을 택해 굳게 지키는 도가 있으십니까?"
하고, 또 다섯 조목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재상(宰相)에 대한 것이었고, 둘째는 간관(諫官), 셋째는 인재(人才), 넷째는 민곤(民困), 다섯째는 청탁(請托)에 대한 것이었다. 민곤에 대해 진달하면서는 아뢰기를,
"아, 오늘날 백성들이 곤궁합니다. 전쟁을 여러 차례 겪어서 백성들이 곤궁해졌고, 창곡(倉穀)이 지나치게 많아서 백성들이 곤궁해졌고, 군액(軍額)이 점차 많아져 백성들이 곤궁해졌고, 궁가에서 마구 수탈하여 백성들이 곤궁해졌고, 형옥이 맞지 않아서 백성들이 곤궁해졌고, 잇달아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곤궁해졌습니다.
대동법(大同法)을 새로 시행하였는데도 전조(田租)는 몇 배나 되는데다가 때아닌 부역이 있었으며, 또 연호(烟戶)의 고통이 많습니다. 창곡은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 산성과 강도(江都)에 쌓아둔 것이 몇십만 석이나 되어 해마다 장리를 놓아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뽑아갑니다. 군액은 나라를 보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각각 아문(衙門)을 설치하여 갖가지로 색출하여 빠지는 대로 채워넣어 양민이 모두 없어졌으며, 어미젖을 떼자마자 군졸로 편입됩니다. 이에 올해는 전지를 팔고 내년에는 집을 팔고 있으며, 또 이웃과 친족을 침해하는 폐단이 있어 다른 백성에게 피해가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벽한 산골짜기는 반 정도가 궁가의 시장(柴場)이 되었으며, 강이나 바닷가의 평지는 모두 다 종척(宗戚)들이 이익을 노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초목을 자라게 하였는데도 백성들이 손을 대지 못하고, 땅이 어염(魚鹽)을 내었는데도 이익은 세력있는 자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바짝 마른 채 사방에서 울부짖고 가슴을 치며 하늘에 하소연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형옥이 알맞은 다음에야 백성들이 기뻐하는 법입니다. 포승줄에 묶인 자 중에는 혹 무고한 경우가 있으되 한 마디 말로 옥사를 결단하는 그런 사람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모두들 형세를 위주로 하고 있으며 뇌물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강한 자가 약자를 집어삼키고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침해합니다. 이에 힘없는 백성들의 원망소리와 노쇠하고 잔약한 자의 통곡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한데, 중외가 모두 그러하니, 이것 역시 애처롭습니다.
날씨가 순조로운 다음에야 온갖 곡식이 풍년드는 법입니다. 그런데 한 해 여름 동안에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따른데다가 또 폭풍이 때없이 불고 서리가 일찍 내려, 몸이 땀에 푹 젖고 발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일하여 온몸이 모두 병들었으나 추수할 때에는 타작마당이 텅 비었습니다. 이에 진휼을 비록 급하게 하였으나 굶어죽은 시체가 많으며, 전염병이 날로 발생해 죽는 자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그들의 굶주린 상황을 보고 슬피 원망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반드시 차마 쌀밥에 수저를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긴급하지 않은 부역을 줄여 헛되이 낭비하는 것을 줄이고, 해마다 거두는 모곡(耗穀)을 탕감하여 먹을 것이 떨어진 백성들에게 보태주며, 군역의 인원수를 줄여 이웃과 친족들의 원망이 없게 하고, 여러 궁가에서 점유한 것을 혁파하여 여러 사람들이 이익되게 하며, 형옥을 살펴 곡직을 밝게 구분하고, 시절을 탓하는 마음을 없애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정성을 다하소서.
그리고 권문 세가의 청탁과 사대부들의 관절(關節)은 실로 일세의 고질적인 폐단인데, 일의 크고 작음과 죄의 무겁고 가벼움을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청탁하는 글을 주고받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힘없는 백성들을 침해하고 공물(公物)을 축내 자신을 살찌우는 일인데, 만약 통렬하게 금하지 않는다면 그 형세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학(幼學) 김남건(金南建) 역시 상소하여 조적(糶糴), 제언(堤堰), 군정(軍丁), 옥송(獄訟)의 폐단 및 거간(拒諫), 상무(尙武), 세록(世祿), 궁가(宮家), 둔전(屯田)의 폐해에 대해 말하였다. 상이 모두 너그러이 비답하고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11월 15일 임인
혜성이 구유성(九斿星) 위에 나타났다.
11월 16일 계묘
혜성이 천원성(天苑星) 동쪽에 나타났다.
11월 17일 갑진
혜성이 나타났다.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먼젓번에 경옥(京獄)의 죄수들을 판결한 문서를 가져다 보니, 그 가운데 살인한 죄인 맹호업(孟豪業)이 감사(減死)의 은전을 받은 것이 있었는바, 신들은 몹시 의혹스러웠습니다. 살인죄는 본래 용서해 주는 규례가 없고 감사의 명은 잘못 내려진 것인 듯하므로, 전후의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맹호업이 손으로 거장(鉅匠)을 때려 이마가 부서져 죽은 사실이 추고한 공사에 갖추어져 있어 조금도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형에 처하지 않았으니 크게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가벼운 쪽의 율을 적용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 일찍이 대신들과 의논하였다고는 하지만, 고 상신 원두표(元斗杓)는 ‘피살된 자는 자식이 없고 단지 늙은 아내만 있는데, 지금은 간 곳을 모른다. 그러니 죽은 자는 천하의 궁한 귀신이다. 어진 정사를 폄에 있어서는 더욱 엄하게 조사해 죄를 바루어서 황천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지 않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성상께서도 분부하시기를 ‘간교한 서리들 중에 분함을 인하여 이를 본받는 자들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경솔하게 의논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옥사를 단정한 말과 죄수를 처결한 분부는 바꿀 수 없는 단안(斷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조정하여 살리자는 의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법사로 하여금 율에 의거해 처단하게 해 떳떳한 형벌을 바루소서."
하였다. 다시 아뢰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공가(公家)에 진 빚을 일족에게 거두는 것이 가장 크게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정사입니다. 한 사람이 범한 바가 있으면 열 집이 가산을 탕진하여 원통해 울부짖는 모습을 이루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진 빚을 그 족속들이 모두 갚은 뒤에는 빚을 졌던 자는 편안히 죄를 면하니, 어찌 빚을 진 자는 그렇게 요행히 면하고 일족들은 치우치게 고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 폐단을 혁파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생활해 나갈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공가에 진 빚을 갚지 않은 자에 대해 그 빚의 다소를 헤아려서 주벌하거나 유배하여 해당되는 율에 따라 죄를 주고, 일족에게서 징수하는 것은 친부자(親父子) 외에는 일체 금지하여 영원히 뒷날의 규례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법을 세우는 처음에 잘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각 아문에서 빚을 징수하는 것이 과연 중외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빚을 징수하는 것으로 인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뒤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끝내 갚지 못하는 자는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그들의 처자를 모두 몰수하여 노비로 삼은 다음 그 빚진 것을 탕감해 주게 하고, 원수(元數)가 많지 않은 경우에는 경중을 나누어 정배하고 모두 납부한 다음에 석방하게 합니다. 그리고 소원한 친족에게는 참으로 침해하여 징수해서는 안 되나, 부자간 외에 삼촌과 사촌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볼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그에 대한 조항을 정해 계하받아 준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8일 을사
혜성이 천균성(天囷星) 동쪽에 나타났다.
박장원(朴長遠)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위원 군수(渭源郡守) 조현(趙鉉)을 고을 백성들이 유임시키기를 원하였다. 감사가 이를 아뢰자, 상이 1년을 한해 잉임하게 하였다.
11월 19일 병오
혜성이 나타났다.
이보다 앞서 청풍 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이 상이 편찮을 때 진어할 전복을 통영(統營)에다 사사로이 구하였는데, 통제사 김시성(金是聲)이 역말에 실어 올려보내었으며, 그뒤에 정부현(鄭傅賢)도 그렇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사간 남구만 등이 아뢰기를,
"신하가 위에 공상함에 있어서는 거기에 따른 바른 길이 있습니다. 한 번 사사로이 바치는 길이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지금 생전복을 진헌했다는 말이 이미 드러났으니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 내버려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청풍 부원군 김우명을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외방에 있는 장수가 사사로운 길을 통하여 진헌하는 것은 공법(公法)에 있어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로(一路)에서 함부로 역말을 내어 짐을 실어 수송하였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전후의 통제사인 김시성과 정부현을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김시성만 파직하였다.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이수창(李壽昌)은 전후로 관직에 있으면서 탐학하다 하여 탄핵하는 논의가 여러 차례 대간의 글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장오죄를 시행하지 않고 추천이 잇달아 탐관오리를 징계할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경기의 중진(重鎭)인 수원을 더욱더 이러한 사람의 손에 맡겨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래에 올라온 상소에서 대부분 군정(軍丁)을 충원하면서 어린아이까지 충정하는 폐단에 대해 말하였으며,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변방을 순시한 뒤에 폐단을 진달한 계문에서도 역시 이 폐단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기해년에 유계(兪棨)가 진달한 바로 인하여, 무술년 이전의 거두어들이지 못한 가포(價布)와, 기병·보병과 수군의 도고(逃故)와 아약(兒弱)을 탕감하였습니다. 그뒤에 고 상신 원두표가 청하여, 빠진 인원수를 헤아리고 대읍·중읍·소읍으로 나누어 대읍은 1백 명, 중읍은 50명, 소읍은 20명으로 숫자를 정하여 해마다 충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뒤에 잇달아 흉년이 들어 매년 거행할 수 없었으므로 지금 이정영의 장계에 대해 복계(覆啓)할 때, 희천(熙川)과 강계(江界) 등 7개 고을에 대해 3분의 1을 감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충청 감사 이익한 역시 이 폐단에 대해 말하였는데, 그때에도 면대해 품의해 이 예에 의거해 시행하고자 하였습니다. 3분의 1을 감한다면 각 고을의 한정(閑丁)의 폐단을 조금은 늦출 수 있을 것이며, 5년에 한 차례 빈자리를 채우는 숫자는 그에 따른 전례가 있으니, 겸하여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읍은 60명으로, 중읍은 30명으로, 소읍은 10명으로 규식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고질적인 폐해에 대해 올린 계본에서 산골 고을에서 쌀로 베를 바꾸는 것을 가장 큰 폐단이라고 하였는데, 주관 당상(主管堂上)인 김좌명이 현재 소장을 진달한 중에 있어서 상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김좌명을 패초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지금 중외의 논의가 모두 둔전을 혁파하고자 하니 지금 결정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장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훈련 대장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둔전에서 1년에 거두는 것을 호조에서 도감에 헤아려서 지급한다면 혁파하여도 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둔전을 혁파한 뒤에는 반드시 사대부들이나 토호들이 점거할 것이니 혁파하여도 아무 도움이 없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여러 도의 둔전은 형세를 살펴 다시 품의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경기의 둔전은 먼저 혁파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자, 어영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도감은 둔전을 혁파하여도 지탱해 나갈 수 있으나, 총융청은 혁파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수어사(守禦使) 홍중보(洪重普)는 아뢰기를,
"수어청은 둔전 백성으로 아병(牙兵)을 삼아 이미 재주를 익혔습니다. 둔전을 혁파하면 둔전 백성이 없어질 것이니 혁파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뭇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니 뒷날 다시 의논하라."
하였다.
11월 20일 정미
혜성이 나타났다.
행 판중추부사 정유성(鄭維城)이 졸하였다. 정유성은 사람됨이 신중하고 단정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명망이 있었다.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와 평안 감사, 호조 판서 등의 직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청렴하고 근실하다고 칭송받았다. 그의 손자인 정제현(鄭齊賢)이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한때의 공주와 혼인한 집들이 앞다투어 사치를 숭상하였는데도 정유성은 스스로 집안 대대로 선비의 집안이니 세속을 따라 화려하게 꾸며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항상 공주집을 계칙하였다. 이에 집과 의복이 제도를 뛰어넘는 것을 보면 문득 걱정스러워하면서 좋아하지 않았으며, 때로 간절히 책하기도 하였으므로 내간(內間)에서 자못 좋아하지 않았다.
저주(詛呪)의 옥사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효종께서 여러 어진이들을 끌어모아 장차 큰 일을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그가 청렴하고 곧아 함께 일할 만함을 알았으므로 중요한 직책을 맡겼으며, 정유성 역시 조심스런 마음으로 신중히 하여 직책에 있으면서 잘못함이 없었다. 조정에 있으면서는 붕당을 좋아하지 않았고, 재부(財賦)를 관장하면서는 긁어들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승이 됨에 미쳐서는 시사가 날로 글러가는 것을 보고는 항상 걱정스런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매번 상 앞에서 간절하게 일에 대해 말하였는데, 상 역시 경청하였다. 최후로 이숙(李肅)과 서필원(徐必遠)의 일에 대해 논하였다가 대간들에게 배척을 당하자 직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사직하여 체직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정유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조를 지켜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았다. 다만 기국이 편협하고 식견이 원대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정성은 있었으나 기록할 만한 사업은 없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혹 이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11월 21일 무신
혜성이 나타났다.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으로 들어갔다.
장령 이유가 아뢰기를,
"동내의 향도계(香徒契)는 단지 상(喪)을 당하였을 때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는 다른 계(契)의 좌목(座目)에 어거지로 이름을 써 넣고는, 스스로 상계(上契)라 하면서 계의 하인들을 협박하여 강가에 집을 지을 때 사역시키므로, 사람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낭선군 우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유학(幼學) 박문개(朴文開)가 상소하기를,
"홍범 구주(洪範九疇) 가운데 여덟 번째인 서징(庶徵)에 말하기를 ‘뭇 백성은 별이다.[庶民惟星]’ 하였는데, 이는 별의 아름다운 징조와 나쁜 징조가 모두 백성들에게서 말미암음을 말한 것입니다. 경기는 토질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니 부세(賦稅)를 마땅히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에 조정의 의논이 4등을 최고 등급으로 하고 4두로 대동미를 정하려고 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양전(量田)할 때 등급을 사실대로 나누지 않아 마땅히 4등급이 되어야 하는데도 2등급이나 3등급이 되었으며, 속전(續田)이 되어야 하는데도 도리어 5등급이나 6등급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래에는 수재와 한재가 고르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들이 요행을 바라고 산머리나 하구(河口)에다 그때 그때 기경(起耕)하는데, 한 차례 양전한 뒤에는 영원히 급진(給陳)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질은 양호(兩湖) 지방에 미치지 못하는데 대동미의 숫자는 도리어 1두가 더 많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초에 백성들은 6두 이외에 다시 다른 부세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잡역이 많으며 갖가지 명목으로 쌀을 내는 데다가 연호(烟戶)의 역이 있어서 더욱 심하게 침해합니다. 이것이 네 번째로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성변(星變)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정전을 피하고 반찬수를 줄이는 것이 한갓 말단의 절목이 될 것이며, 자신을 책하고 바른 말을 구하는 것이 모두 헛된 형식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호조에 내렸다.
11월 22일 기유
혜성이 나타났다.
송시철(宋時喆)을 집의로, 이광적(李光迪)·남이성(南二星)을 지평으로, 윤집(尹鏶)을 병조 참의로, 목겸선(睦兼善)을 참지로 삼고, 북청 판관(北靑判官) 이규령(李奎齡)과 이성 현감(利城縣監) 조성보(趙聖輔)를 특별히 다시 경직(京職)에 제수하였다.
대사간 남구만(南九萬), 사간 이정(李程), 헌납 이민서(李敏敍), 정언 이섬(李暹)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남구만이, 공가(公家)에 빚을 진 자에 대해 친부자간 외에 일족을 침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 잇따라 아뢰니, 상이 따랐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 집의 이단상(李端相)의 상소에서 ‘송시열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김좌명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김좌명과 송시열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지만, 김좌명이 송시열로 하여금 올라오지 못하게 한 일이 별로 없으며, 송시열 역시 김좌명으로 인하여 올라오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유신(儒臣)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오로지 김좌명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단상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국구의 뜻도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한 것은 어거지로 꿰맞춘 듯한 점이 있어서 말이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김좌명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이를 미루어 가면 어디에까지 이르겠는가.’라고 한 것은 더욱더 놀랍습니다. 이른바 어디라고 한 것은 가리키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이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더라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김좌명이 어찌 이런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요즈음 이 일로 인하여 논의가 분분합니다. 만약 이 즈음에 곡절을 분명하게 진달하지 않는다면 끝내 진정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의 시비는 바르게 해야 하니, 김좌명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이르기를,
"나는 오늘 면대를 청한 데는 계사(啓辭) 외에 별다른 소회가 있을 것으로 여겼다. 김좌명을 파직하기를 청하는 것이라면 어찌해서 면대를 청하기까지 하는가. 위로는 대신에서 아래로 온갖 집사(執事)들까지 모두 대간이 논하여 탄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면대를 청하는 것이 어찌 대간의 풍채에 합당하겠는가."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나약한 대간들을 질책하여 격려하시는 것은 참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들 역시 비단 이 일 때문에 면대를 청한 것은 아닙니다. 신 민서는 오랫동안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한 데다가 지금 또 혜성의 변고가 있어서 위아래가 모두 걱정하고 있으므로, 대략 소회를 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조종조의 옛 제도에는 각 고을의 조적(糶糴)이 다른 명목 없이 단지 호조의 원회부(元會付)만 있어서 모곡(耗穀)을 모두 본 고을로 귀속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해묵은 포흠(逋欠)과 유망(流亡)하거나 절호(絶戶)된 자의 것을 모두 이것으로 충당하였으며, 관가의 수요와 백성들의 역(役)까지도 모두 이것으로 보충하였으며, 또한 해마다 늘어나는 폐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인조조 말년에 김응조(金應祖)의 상소로 인하여 그 모곡을 빼앗아 상평청으로 이록(移錄)하였는데, 회록(會錄)이 점차 많아져 반도 넘게 빈 장부만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감영·병영·통영·수영 등 여러 영까지도 또 그것을 본받아 각자 미속(米粟)을 쌓아두고서 장부를 조사해 모곡을 계산하는데, 새것과 예전 것이 서로 이어져 한도가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공공연히 부세를 매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출납하는 사이에 몰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각 고을의 조적을 상평청이나 감영·병영·통영·수영을 막론하고 일체 국곡(國穀)을 받아들이는 예에 의거하여 해, 모곡의 수효를 첨가해 기록하는 일을 모두 금지하여 혁파하소서. 그리고 원곡(元穀)의 모곡을 상평청에 이록하는 일도 아울러 혁파하소서."
하고, 이민서가 아뢰기를,
"일찍이 효종조 때 이 폐단에 대해 상소하여 진달한 자가 있어서 비국에 계하하였는데, 선신(先臣)043) 의 회계로 인하여 회록(會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뒤에 시행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로 하여금 조사한 다음 품의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나라에서 서로(西路)와 북로(北路) 두 곳에 대해 본래 경중의 구별이 없이 보고 있는데, 함경도의 경우에는 이미 중신(重臣)을 보내어 과거를 베풀었으며, 이어 그로 하여금 폐해를 묻게 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미친 것도 많습니다. 평안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중신을 보내어 과거를 베풀고 겸하여 민간의 폐해를 묻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세초(歲抄)할 때 한정(閑丁)을 얻지 못하여 매번 어린아이로 충정하고 있으며, 물고(物故)된 자와 노제(老除)된 자에 대해서도 대신 충정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양민이 다른 곳에 투속하여 역(役)을 면하기를 도모해서인데, 서울의 경우에는 삼의사(三醫司)의 생도(生徒)와 교서관의 창준(唱准), 각 아문의 군관과 같은 것이 그것이며, 외방의 경우에는 감사의 아병(牙兵) 및 병사·수사·영장(營將)·방어사의 군관 등이 그것으로, 명목이 몹시 많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외방의 양민이 소속된 곳으로 원래 액수(額數)가 있는 곳은 정원 이외의 인원을 태거시키고 원래 액수가 없는 곳은 액수를 정하여 투속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무인이 발신(發身)하는 것은 모두 뇌물을 통하므로 탄핵장에 먹이 마르기도 전에 또 비국에서 추천하고 있습니다. 수원 부사 이수창(李壽昌)과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아주 탐학스런 큰 도둑’이라고 하는데도 상께서는 대간의 아룀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탐장(貪贓)으로 논핵받는 자는 모두 무인들이며 명사나 재상은 탐장으로 탄핵받는 자가 없는데, 어찌 무신은 모두 탐학스럽고 문관 중에는 한 명의 장리(贓吏)도 없겠는가."
하자, 이민서가 아뢰기를,
"문관은 참으로 탐학스럽다는 이름을 얻으면 종신토록 폐기되나 무신은 비록 탄핵받더라도 곧바로 서용됩니다. 황헌(黃瀗)이나 박형(朴泂) 같은 자도 모두 탐장죄에 대한 형벌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탐리(貪吏)가 어찌 징계되겠습니까."
하였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때 듣건대, 천재를 이유로 구언하는 교서가 내리자 원근에서 보고 듣고는 모두 고무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국가에서 수성(修省)하는 거조는 백성들의 바람에 크게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정에는 크게 덕을 잃은 일은 별로 없으나 모든 일에 매번 맥이 풀린 것이 걱정이며, 성상께서는 신료들을 인접함이 점차 드물어지고 심지어 지난번에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시면서는 삼사로 하여금 입시하지 못하게까지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자주 신료들을 인접하여 통치의 도리에 대해 물어보시고 한가한 날에는 유신들을 불러보아 경서를 강론하되, 혹 옥체가 피곤하시면 드러누워 듣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에 이르기를 ‘오랑캐를 포용하며, 하수(河水)를 맨몸으로 건너는 것 같은 과단성을 발휘한다.[包荒用馮河]’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몹시 용감스럽게 하여야만 편안하고 태평한 다스림을 오게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조금 변화하면 조금 이롭고 크게 변화하면 크게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부터 매번 강건한 덕을 크게 분발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정사를 변통하라는 등의 말로 진달한 것이 여러 차례였으니, 상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다.
11월 23일 경술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사관(史官) 이선(李選)의 서계 중에 있는, 강도(江都)에 보관해 둔 열성들의 실록 가운데 권질이 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예조가 춘추관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선왕조 때부터 이미 빠진 것을 보완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농사가 흉년이 들어 끝내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사기(史記)는 아주 중대하니 다른 폐단을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곳에 보관해 둔 실록을 속히 베껴서 빠진 것을 보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봄에 적상산(赤裳山)에 보관해 둔 것을 받들어 와서 전사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둔전을 혁파하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에 대해 총융사(摠戎使) 구인기(具仁墍)에게 물어보니 ‘둔전 백성을 대오에 편성해서 아병(牙兵)으로 삼은 자가 수백 명인데 염초를 굽는 데 쓰는 땔감과 소먹이로 쓰는 곡초(穀草) 및 숯 등을 오로지 이 무리들에게 책임지우고 있다. 총융사를 혁파한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고서 지레 둔전을 혁파하면 곤란한 일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총융청의 둔전은 결단코 혁파하도록 허락하기가 어렵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의 둔전 가운데 함부로 소속된 민전(民田)에서 세를 거두는 것이 아주 많은데 이것은 먼저 혁파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도감의 둔전 가운데 영광(靈光)·덕산(德山)·용인(龍仁)·음죽(陰竹) 등의 둔전은 모두 민전에서 세를 거두는 것이니 혁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기타 각 아문의 둔전 가운데도 민전이 함부로 소속된 것은 의당 구별하여 혁파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태화가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폐단을 진달한 계본 가운데 단천(端川)에서 은을 채취하는 폐단을 가지고 상께 여쭈었다. 이에 상이, 1년에 바치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를 묻자, 정태화가 1천 냥이라고 하니, 상이 4백 냥을 감하라고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김좌명과 신은 상피(相避)의 혐의가 있으나 품은 생각이 있으므로 감히 진달합니다. 김좌명을 파직한 것이 어찌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관장하고 있는 직무가 모두 중요한 직무인데, 상평청 제조의 경우에는 전담하여 관장한 지 오래되어 실로 난처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말을 좀 잘못한 것이었으니, 나 역시 파직하는 것이 맞는 벌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대간이 면대를 청하여 논계하기까지 하였으며 그 말한 내용을 살펴보니 그래도 취할 만한 점이 있었으므로 부득불 윤허한 것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김좌명의 말이 참으로 온당치 않았으나 이단상의 소장 내용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해 신들이 어찌 한 번 진달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진정시키는 것만 못하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좌명을 파직한 것을 신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제 대간의 아룀에 대해 즉시 윤허하신 것은, 상께서 과연 맞는 벌이라고 여겨서 공평한 마음으로 윤허하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전에도 김좌명이 논박을 받은 적이 있었으나, 이번의 아룀은 윤허하지 않으면 편치 않겠기에 즉시 따른 것이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간이 면대를 청한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권간을 논핵할 때에도 반드시 면대를 청하지는 않는데, 지금같이 맑고 밝은 세상에 일개 김좌명을 논핵하면서 어찌 면대를 청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김좌명은 혹 본직을 체직하는 것은 괜찮으나 파직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체직하고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간원이 아뢴 평안도에 과거를 베푸는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 물으니, 정태화·홍명하 등이 모두 명분이 없다고 하자, 상이 그렇게 여겼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부터 호패(號牌)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호패는 시행하기 어려운 점이 없는 일인데도 조정에서는 중대하게 여겨 끝내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신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면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영상과 좌상에게 물었다. 정태화와 홍명하가 모두 나라에 기강이 없어서 일을 일으킬 수 없다고 하고, 동지(同知) 유혁연(柳赫然) 역시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자, 상이 서서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1월 24일 신해
혜성이 나타났다.
홍중보(洪重普)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경기 우도 암행 어사 여성제(呂聖齊)가 돌아와서 수령들 가운데 잘 다스린 자로 김포 군수(金浦郡守) 유호연(柳浩然), 고양 군수(高陽郡守) 김중일(金重鎰), 양천 현령(陽川縣令) 윤게(尹垍), 마전 군수(麻田郡守) 허질(許秩), 전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단상(李端相)을 아뢰니, 상이 허질은 가자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모두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또 삭녕 현감(朔寧縣監) 윤후익(尹後益), 통진 현감(通津縣監) 박세견(朴世堅), 포천 현감(抱川縣監) 홍주명(洪柱溟)은 모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고 아뢰니, 경중에 따라 죄를 주라고 하였다.
11월 25일 임자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승지 김수흥(金壽興)이 추안(推案)을 읽었는데, 죄인 김석홍(金石弘)의 일에 이르러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대개 김석홍의 외삼촌인 장후량(張後良)이, 김석홍의 아비 김진탁(金振鐸)이 그의 처와 몰래 간통하였다는 이유로 관가에 고하였는데, 김진탁이 마침내 곤장을 맞다 죽었다. 그뒤에 김석홍이 장성하여 장후량을 죽이고는 이어 큰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고 하고서 드디어 도주하였다가 얼마 뒤에 관리에게 체포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이가 경우 13세였는데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이 원통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10년 동안 총쏘기를 연습해 마침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김석홍은 나이 겨우 13세에 복수할 마음을 품고 산속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으니 효성이 참으로 귀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석홍이 체포된 뒤에 스스로 말한 것이 이와 같으나, 지금 죽이지 않을 경우에는 이 뒤로 사사로운 원수로 서로 죽이는 폐단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후량이 김진탁을 직접 죽였다면 김석홍이 복수해도 괜찮다. 그러나 서로 송사하여 관가에서 형신을 받다가 죽었고 보면 장후량이 직접 죽인 것이 아니니, 복수한 경우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하자,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김석홍이 만약 스스로 관가에 자수하였다면 혹 용서해 줄 만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도망하다가 잡혔으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남구만이 아뢰기를,
"김석홍은 몰래 죽였으며 또 고하지도 않았으니, 공법으로 볼 때 복수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갇히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서 끝내 자수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효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래의 율대로 따랐다가 삼복(三覆)할 때 다시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함경도에서 돌아와 폐단에 대해 이미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몇 가지 조목을 상소를 올려 진달하기를,
"육진(六鎭)은 아주 멀어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데, 함흥(咸興)과의 거리가 먼 곳은 반 달이나 걸리고 그 사이에는 큰 고개가 세 개나 되어 육진의 백성들이 영문(營門)에 대해 마치 약수(弱水)044) 처럼 여깁니다. 방백(方伯)이 육진을 순시하는 것은 한 해에 한 차례 순시하는 데 불과하여 변방의 정세와 백성들의 폐해에 대해 두루 알 수가 없으며, 북 병사(北兵使)는 스스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의 임무가 아니라고 여겨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기를 소가 닭을 보는 것보다 더 무관심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변방 장수나 수령들은 한 구석에 치우쳐져 있어 제압하는 사람이 없는 탓에 마음이 쉽사리 방종해져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무신들에게 변방을 맡긴 것은 오로지 군사를 다스리고 적을 방어함에 있어서 문신보다 무신이 낫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지금으로 보면 군졸의 기예가 태반은 버려져 있고 성지(城池)나 병기도 날로 못 쓰게 되어가니 무신을 중용한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조종조 때에는 북병사를 대부분 직품이 높은 문신으로 차출해 보내었습니다. 세종조에는 명상 허종(許琮)이 두 번이나 북병사가 되었고, 성종조에는 중신(重臣) 정난종(鄭蘭宗)이 본도의 관찰사에서 체직되자마자 곧바로 북병사에 제수되어 온성(穩城)의 장성(長城) 40리를 축성하였는데, 그 방략과 계획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니, 변방을 굳건히 해 외침을 막는 것이 문신인지 무신인지에 달려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 평정한 뒤 드디어 함길도(咸吉道)를 나누어 남도와 북도로 만들고 관찰사 어세공(魚世恭)을 북도 관찰사로 옮겨 제수하였습니다.
지금 변통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북로의 관찰사를 나누어 두고 그대로 북병사를 겸하게 하는 것이 첫째 방책입니다. 그것이 만약 불편하다면 문신으로 북병사를 삼아 순찰사를 겸하게 해 군민(軍民)의 정사를 맡기고 관원들을 출척(黜陟)시키는 권한을 줍니다. 그것 역시 불편하다면 순찰사의 행영(行營)을 성진(城津)에다 설치하여, 북병사가 겨울철에 종성(鍾城)에 들어가 방수하는 예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설정이 막히지 않고 각 고을의 관원들도 꺼리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북로(北路)에 있어서 가장 급한 일로는 아마도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방백은 형세상 오랫동안 행영에 머무를 수 없으니, 본영(本營)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멀고 먼 북로에 호령이 미치기 어렵기가 예전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별도로 순찰사의 종사관을 설치하거나 혹 도사(都事)를 잘 가려뽑아 보내 그로 하여금 항상 이곳에 머물면서 가끔씩 육진을 순시하게 하고, 백성들의 폐해와 변방의 정세에 관계되는 모든 일과 수령과 변장의 치적과 같은 것을 알아내는 대로 방백에게 보고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어찌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북로의 군사와 말은 굳세다고 예전부터 일컬어 왔는데 지금은 무예에 대해 생소하고 권장하는 방도가 없습니다. 육진의 무사 가운데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는 자가 없지 않으나 서울에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기는 형세상 몹시 어려우며, 이번의 별과(別科) 역시 평상시에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 본도의 변장으로 취재(取才)하는 사람은, 남도의 경우에는 전의 규정에 의거해 변장을 차임하고, 북도의 경우에는 조정에서 규칙을 반포하고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회동해 시취(試取)하여 해마다 계문하게 한 다음 우등자에게 특별히 급제를 허락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비록 별도로 과거를 베풀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무사를 얻을 수가 있고 먼 변방 사람들의 마음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북로의 군역은 다른 도에 비하여 몹시 번거롭고 많습니다. 그런데 영속(營屬)이라고 칭해지는 한정(閑丁)에게는 각 사람마다에게 보인을 주어 그 숫자가 몹시 많으니, 일체 혁파하여 부족한 군액(軍額)을 채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역리(驛吏)의 역이 가장 수월하여 주인을 배반하고 신역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이 모두 이곳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고공(雇工)에 대한 법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지금은 노비가 되어 자손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단코 예전 규례라는 핑계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가 정배(全家定配)되는 사람들을 모두 북로로 들어가게 해서 변방을 채우는 뜻을 살려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북방의 인심은 어리석고 순박하여 아직 오랑캐의 유풍이 남아 있어 덕으로 교화시키기 어렵고, 또 형법을 엄하게 해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오직 먹고 사는 데 충분하게 해주고 가렴주구하는 길을 끊으며, 부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고 폐단을 제거해 은혜를 베풀어 은혜와 믿음에 두루 젖고 교화에 점차 물들게 해야 합니다. 덕이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자연 감동되는 법이니, 또한 어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절개와 행실이 뛰어난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표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흥(永興)의 사노(私奴) 만금(萬金)이 주인을 위하여 손가락을 자른 것과, 정평(定平)의 교생(校生) 이식(李湜)이 계모를 잘 섬긴 것과, 단천(端川)의 관비(官婢) 일선(一善)이 남편을 위하여 절개를 지킨 것과 같은 것은 모두 고금에 걸치는 뛰어난 행실이니, 해조로 하여금 먼저 정표(旌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이외에도 관찰사로 하여금 널리 알아보아서 계문하게 해 포상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이를 보고서 흥기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교화에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 마지막에 또 아뢰기를,
"역대의 제왕들은 모두들 국가의 기업을 처음 일으킨 곳을 중시하였으니, 한(漢)나라의 풍패(豊沛)와 당(唐)나라의 진양(晋陽)이 그것입니다. 더구나 아조(我朝)에서는 북방에 대하여 경영하고 넓혀 그 공을 백배나 더 들였으니, 풍패나 진양에 비할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한 줌의 흙, 한 명의 백성도 모두 아까운 것으로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변방의 방비에 위급한 사태가 없고 시세가 예전과 달라져 체찰사(體察使)를 다시 두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대신들 중에 한 사람을 정하여 북로의 일을 전담케 하여, 크고 작은 일을 한결같이 위임하기를 지난날에 대신이 강도(江都)를 주관하던 예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착실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이어 상소를 비국에 내렸다.
11월 26일 계축
혜성이 나타났다.
11월 27일 갑인
혜성이 나타났다.
대사간 남구만(南九萬), 헌납 이민서(李敏敍), 정언 이섬(李暹) 등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지난날 경연 중에 대신이, 김좌명을 파직하라고 청한 것은 지나치다고 하였으며, 면대를 청한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였으며,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걱정스럽다고 하였고, 대간의 의논을 듣지 못하였으니 개탄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가령 김좌명은 맡은 임무가 중하다고 말을 했다면 그래도 혹 괜찮습니다. 그러나 의율(擬律)한 것을 지나치다고 한다면,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청대한 것에 이르러서는, 신하에게 품은 생각이 있으면 모두가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정성을 다 토로하고자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문자가 있는데 하필 면대하는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끝내 볼 날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삼사가 청대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보통 일로 보는데, 지금 대신은 이에 특별한 일로 여기니, 언로를 막고 뒤폐단을 여는 것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요즈음 묘당에서도 청대하였는데 무슨 크나큰 이해에 관계되는 일이 있었습니까.
이른바 서로 화합한다고 하는 것은, 서로간에 본받으면서 서로 양보하는 것이며 옳고 그름을 따져 서로 올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지, 지나친 행동이 있어도 거론하지 않고 잘못된 행실이 있어도 논핵하지 않고 입다문 채 무마시켜 오로지 고식적으로 하기만을 힘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들이 김좌명을 논핵한 것은 단지 전례에 따라 서로 규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경(公卿) 이하가 놀라운 눈으로 서로 보며 큰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으로서 습속으로 굳어져 날이 갈수록 나약해졌습니다. 이에 조금이라도 귀척 대신에게 관계된 일이면 감히 그르다고 하지 못하고 비호하는 것을 진정시키는 것으로 여기고 잘못에 대한 질책을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국가의 체모와 언로가 앞으로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리고 잘못이 있으면 서로 규핵하고 지나간 일은 서로 잊는 것이 신하의 의리이며 서로 화합하는 도리입니다. 대신이 말한 서로 화합한다는 것에는 다시 무슨 의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신들이 또 ‘대간의 의논을 듣지 못하였으니 개탄스럽다.’고 하였는데, 대간이 일을 논하면서 반드시 재상들에게 여쭈어서 한다면, 이것은 재상의 심부름꾼이지 임금의 귀와 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이 재상에게 관계될 경우에는 또한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들이 그 즉시 인피해야 한다는 것을 모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재상과 대간이 득실과 시비를 따짐에 있어서는 참으로 공론으로 드러내놓고 따져야지 분란스럽게 인피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조방(朝房)에 모였을 때 한 차례 차자를 올려 사리가 그렇지 않음을 상세히 진달하고자 하였으며, 또 청대하였을 때 미진한 생각을 다시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언 장건(張鍵)은 종일토록 왕복하였으나 와서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들이 무시당한 탓에 일어난 일이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사간 이정(李程) 역시, 이미 그 논의에 동참하였는데 대신에게 배척당했다는 이유로 체차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며, 정언 장건은, 동료들에게 배척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11월 28일 을묘
혜성이 나타났다.
집의 송시철(宋時喆), 지평 이광적(李光迪) 등이, 대사간 남구만, 헌납 이민서, 정언 이섬, 사간 이정은 출사시키고, 정언 장건은 체차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전 병조 판서 김좌명을 체차한 다음 추고하라는 전지를 파직으로 부표(付標)를 고쳐 계하하라."
고 정원에 하교하고, 또
"사간 이정과 정언 장건은 출사시키라."
고 하교하였다. 이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오늘날 대신을 공격하는 말이 어쩌면 이다지도 심각하단 말인가. 23일의 경연 석상에 남구만이 이미 참여해 있었으면서도 끝내 변별하는 말이 없었으며, 또 대신의 말을 이유로 인피하지도 않았다. 대각의 거조가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대신의 말은 여러 재신(宰臣)의 말과는 격이 다르니, 대략 피혐하는 말을 써서 공의를 기다린 후 혹 차자를 올려 분명하게 따져서, 상신과 시비를 따지는 의리를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태연스레 공무를 보면서 스스로를 옳다고 여겨 도리어 차자를 올려 대신을 공격하는 계책으로 삼으니, 그 속셈이 무엇인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또 대간을 위협한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어거지로 대신에게 가하여 견제할 계획을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오늘날이 무리들의 공통된 걱정거리이니 참으로 몹시 가증스럽다. 거조가 전도되고 처사가 망령스럽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데도 헌부가 처치하면서는 감히 ‘조용히 차자를 올려 변별하는 것이 마땅함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이렇게까지 시비가 어긋나고 의견이 형편없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스럽다. 대사간 남구만, 헌납 이민서, 정언 이섬, 집의 송시철, 지평 이광적을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승지 김수흥(金壽興)·이준구(李俊耉)가 그 비답을 봉하여 도로 들이면서 너그럽게 받아들이라고 계청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좌상 홍명하가 사직서를 올리고 영상 정태화와 우상 허적이 모두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경들은 모두 숙덕(宿德)으로 재상 자리에 있으니 국가에서 믿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연소배들의 망령된 행동으로 인하여 한꺼번에 인피하여 들어가 재상 자리가 모두 비어 있게 하니, 어쩌면 그리도 생각하지 못하는가. 시비를 구별하는 것은 책임질 자가 따로 있으니 경들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 즉시 출사해 공무를 보라."
영돈녕부사 김우명이 교외로 나가 있으면서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김시성(金是聲)이 이미 사사로이 물품을 바쳤다는 이유로 파직당하였으니 신은 이치상 혼자만 파직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속히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수원 부사 이정기(李廷夔), 이천 부사(利川府使) 이휘조(李徽祚), 양성 현감(陽城縣監) 윤전(尹塼), 죽산 부사(竹山府使) 김익후(金益厚), 안산 현감(安山縣監) 최효건(崔孝騫),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지원(李志遠), 진위 현령(振威縣令) 성희주(成熙胄)는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경중에 따라 죄를 받았으며, 안성 군수(安城郡守) 이명담(李命聃), 남양 부사(南陽府使) 정석(鄭晳)은 옷 안감과 겉감을 하사받았는데, 경기 좌도 어사 신후재(申厚載)의 서계 때문이었다.
11월 29일 병진
혜성이 나타났다.
장령 이유가 대사간 남구만 등을 특별히 체차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대간들이 이미 망령되고 형편없는 거조를 하였으니, 체차한 가벼운 벌이 어찌 지나친 벌일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대는 방자하게 비호하면서 스스로 임금을 속이는 지경으로 빠져들어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대의 이 계청은 또한 입을 틀어막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이유가 엄한 비답이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부응교 김만기(金萬基) 등이 차자를 올려 남구만 등을 특별히 체차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30일 정사
혜성이 나타났다.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이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6년 1665년 1월 (0) | 2025.12.04 |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5년 1664년 12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10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9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8월 (0) | 202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