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무오
일식이 있었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정언 장건(張鍵)이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평강(平康) 사람 이자봉(李自奉)이 아비의 원수를 죽였는데, 사형을 감면하고 곤장을 쳤다.
이자봉의 아비가 이천(伊川)에 사는 백성과 서로 싸우다가 살해되었는데, 자봉이 이 사실을 듣고는 10여 인을 거느리고 아비가 죽은 곳으로 달려가 그 원수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아비를 장사지낸 다음 원수를 끌고 관가로 나오다가 중도에서 이자봉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관가까지는 거리가 자못 멀다. 만약에 관가에 도착하기 전에 놓쳐버리면 원수를 다시는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
고 하면서 드디어 칼로 찔러 죽이고 머리의 가죽을 벗겨 이를 가지고 가 관가에 고하였다.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이 사실을 치계하면서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일을 형조에 내렸다. 형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이자봉이 그의 아비가 다른 사람에게 피살된 것을 원통하게 여겨 원수를 잡아 관가에 고하려다가 도망칠까 걱정이 되어 중도에서 찔러 죽여 지극한 정을 폈습니다. 그리고는 또 즉시 관가에 고하여 복수하는 의리를 제대로 다하였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의 부조피구조(父祖被歐條)에는 ‘조부모와 부모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되었는데 자손이 그 흉악한 짓을 한 사람을 함부로 죽였을 경우에는 장(杖) 60이다. 그 즉시에 죽인 경우에는 논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자봉이 범한 바는 그 즉시 죽인 것이 아니니, 율문 중의 장 60이 바로 그에 해당되는 율입니다. 이것으로 이보(移報)하소서."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12월 2일 기미
혜성이 나타났다.
황해도 암행 어사 박세당(朴世堂)이 돌아왔다. 수령 가운데 잘 다스린 자인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홍석(金弘錫)에게는 옷 안감과 겉감을 하사하고, 신천 군수(信川郡守) 홍주언(洪柱彦), 옹진 현령(甕津縣令) 권숙(權諔)은 모두 벼슬을 올려주었으며, 연안 부사(延安府使) 조세환(趙世煥)은 치적이 온 도내에서 최고여서 통훈 대부로 자급을 올렸다. 그리고 봉산 군수(鳳山郡守) 김하량(金厦樑)은 탐오스럽고 여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곡산 군수(谷山郡守) 유진삼(柳晋三)은 술을 좋아하고 망령되다는 이유로 모두 죄를 받았다. 박세당이 서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황해도 한 도에서 특히 심한 폐단은 대개 몇 가지 일이 있는데, 군포(軍布)와 조적(糶糴), 포자(鋪子)입니다. 신이 일찍이 평소의 군액(軍額)을 상고해 보니 단지 정병(正兵)만 있었을 뿐, 오늘날의 이른바 양도 감병(兩都監兵)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군액은 예전보다 3배나 더 많아 한 집에 많은 경우에는 4∼5명, 적은 경우에도 오히려 2∼3명이나 되어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병액(兵額)을 3분의 1이나 혹 4분의 1을 감하도록 하여 평소와 비교하여 대략 비슷하게 하도록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징수하는 포를 반으로 감해서 일로(一路)의 백성들을 크게 구제하고 이를 확대시켜 모든 도에까지 미치게 하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조적의 피해는 가는 곳마다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분명하게 전지를 내려 본도의 공채(公債)를 채워넣지 못한 것을 모두 견감하소서. 그리고 지금부터는 조곡을 갚지 못하고 절호(絶戶)된 것은 친족이나 이웃의 전지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 고을에 쌓아둔 곡식을 반을 옮겨서 국용에 보충하고 폐단을 막으소서.
포자(鋪子)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백성들과 교역하면서 관가에서 그 이익을 독차지하니 본래 국가의 정대한 체모를 잃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전들이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며, 또한 탐오한 수령이 있어서 그들과 뜻이 맞아 이익을 차지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어서, 가난한 백성들이 떠들어대면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조정에서 깊이 그 폐단을 살피고서 특별히 정파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더할 수 없이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감사의 아룀으로 인하여, 이미 파한 것을 혹 그대로 두도록 하여 은혜로운 뜻을 끝까지 펴지 못하게 하고, 폐해의 근원이 다시 뿌리내리게 하였습니다. 모두 정파하도록 하고, 거두지 못한 이자도 모두 감면하고 단지 본색(本色)만 거두도록 하여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군병과 포를 징수하는 것은, 이미 그 숫자를 줄이게 하였으니 진달한 폐단이 거의 제거될 것입니다. 포흠한 환자곡을 번번이 탕감해 준다면 간사하게 속이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원곡(元穀)의 다과를 통틀어 계산하여 2∼3차로 나누되, 1년 간격을 두고 거두어 들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많이 내게 되어 갚기 어려운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 곳의 포자(鋪子)는 이미 정파하도록 하였으나, 이미 흩어준 관가의 재산도 수습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시원스럽게 제거되지 못하였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좋은 쪽으로 변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3일 경신
혜성이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호조 판서로, 박세당(朴世堂)을 정언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이조 좌랑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우윤으로,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판서로, 성진문(成震炆)을 대구 영장(大丘營將)으로 삼았다.
효종조에 군정(軍政)이 느슨해져서 각도의 큰 주목(州牧)에 특별히 영장(營將)을 설치하고서 향병(鄕兵)을 전적으로 관할하게 하였는데, 순력(巡歷)하면서 점검하는 폐단으로 민간이 소란하였으며, 나이 어린 무부로서 공로와 재주도 없으면서 갑자기 승진한 자들이 몰려들어 곤수(閫帥)가 되는 중간 단계로 여기고 있으니, 외람되고 혼잡스러움이 몹시 심하다.
12월 4일 신유
혜성이 나타났다.
제주 판관 나팔기(羅八紀)가 체임 진상마(遞任進上馬) 3필을 진상하였다. 제주 세 고을에서 일정하게 진공하는 외에 수령이 체임되어 올 때에는 으레 말 3필을 헌상하였다.
12월 5일 임술
혜성이 나타났다.
12월 6일 계해
혜성이 나타났다.
전옥(典獄)에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부수찬 심재(沈梓)가 상소를 올려, 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노모를 봉양하기를 청하니, 상이 넉넉하게 음식물을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12월 7일 갑자
혜성이 나타났다.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장선징과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이정(李程)을 교리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8일 을축
혜성이 나타났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김흥운(金興運)은 가자(加資)하고, 맹산 현감(孟山縣監) 최양필(崔良弼)은 벼슬을 올려 주고, 증산 현령(甑山縣令) 한석량(韓碩良)에게는 옷 안감과 겉감을 하사하였다. 순안 현령(順安縣令) 서정리(徐正履)와 양덕 현감(陽德縣監) 유제(柳璾)에게는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주었다. 평안도 청남 암행 어사(平安道淸南暗行御史) 오시수(吳始壽)가 서계하였기 때문이다.
12월 9일 병인
혜성이 나타났다.
지평 신후재가 인피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몰래 탐문하라는 명을 받았었는데, 전 수원 부사 이정기(李廷夔)가 제대로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몹시 자자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접경 지역에 집을 지어 부민(府民)들이 가서 부역한 사실을 여러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여 몹시 정녕하였는데, 사람들이 혹 지난해 7월에 집을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그 말에 따라 서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이정기가 부임한 것은 10월이었다고 하니, 7월에 집을 지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이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서 한 말입니다. 신은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서 이런 착오가 있게 하였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차하였다.
12월 10일 정묘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우의정 허적(許積),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좌참찬 윤순지(尹順之), 예조 판서 이일상(李一相),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공조 판서 이완(李浣), 형조 판서 박장원(朴長遠), 호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돈녕 도정(敦寧都正) 이정한(李挺漢), 한성 좌윤 심지명(沈之溟), 해성군(海城君) 김여수(金汝水), 형조 참판 권대운(權大運), 형조 참의 이성징(李聖徵), 도승지 박세모(朴世模), 우승지 이천기(李天基), 좌부승지 김수흥(金壽興), 우부승지 이연년(李延年), 동부승지 이준구(李俊耉), 사간 오두인(吳斗寅), 장령 정창도(丁昌燾), 교리 윤심(尹深),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전례에 의거하여 입시해 사형수 13인을 단옥(斷獄)하였다. 승지가 나아가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자인 준일(俊逸)의 추안(推案)을 읽자,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이 죄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니, 영상 정태화 등이 모두 아뢰기를,
"율로는 비록 응당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나이가 겨우 13세입니다. 인조조에는 혹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죄(死罪)를 용서해 면케 해 준 경우도 있으니, 성상께서 참작하여 처치하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사형을 감하여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정신룡(鄭信龍)이란 자도 역시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어서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 중에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뛰어넘어 나간 것은 뛰어넘어 들어온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율에는 뛰어넘어 나간 데 대한 조문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신룡이란 자는 바로 뛰어넘어 나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사간 오두인과 장령 정창도가 불가하다고 고집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의논이 이와 같은데, 어떠한가?"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죄수를 판결하는 도는 한결같이 법조문대로만 하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반드시 애처롭고 불쌍하게 여기는 뜻을 그 사이에서 아울러 행하여야 하는 것인바, 여기에서 임금의 성대한 덕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간이 법을 지켜 논집하되 성상께서 덕을 베풀어 살려주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렇게 여겼다. 황기복(黃己福)·김상립(金尙立) 두 사람은 의금부의 도장을 위조하여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두 사람 가운데 스스로 도장을 만든 자는 죄가 더 무겁고 남의 사주를 받은 자는 죄가 가볍습니다. 상립은 사람됨이 미련하고 어리석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았으니, 구별이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자, 공조 판서 이완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속셈이 모두 가증스러우니, 한 사람은 살리고 한 사람은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 가운데는 혹 참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김상립은 사형을 감하여 조율하라."
하였다. 전가 사변(全家徙邊)된 죄인 장응상(張應祥)이란 자는 도망가 있다가 잡혀서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상이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정배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응상은 응당 사형에 해당되는데 살아났으니,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왕도를 행하기에 충분합니다. 노신(老臣)은 사직을 위하여 경하드립니다."
하였다. 김석홍(金石弘)의 일에 이르러서 상이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아뢰기를,
"복수한 일이 이미 분명하고 바르지 않으며, 뒤폐단 역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용서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율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계복을 마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에는 단지 황성(皇城)을 넘어 들어간 죄에 대해서만 말하고 넘어 나온 죄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으므로, 지금 이 정신룡의 옥사를 논의하는 즈음에 적당한 율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법을 정하여 궁궐의 담장을 넘은 자는 들어갔거나 나왔거나를 따지지 말고 똑같이 논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황성을 넘었다고 하였으니 나오고 들어간 구별이 없는 듯하다. 지금 이후부터는 나왔거나 들어갔거나 같은 죄를 주되, 수위(守衛)하는 군졸로서 만약 이 죄를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부대시(不待時)로 군문(軍門)에서 효시하라."
하였다. 장령 정창도가 남구만(南九萬) 등을 특별히 체직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라고 잇따라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체차하는 것은 아주 가벼운 벌인데도 오히려 다투는가. 한 번 특별히 체차하는 것이 무슨 불가한 점이 있기에 반드시 나를 이기려고 하는가? 그러니 내 어찌 지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수령을 정축년 이후부터는 대부분 무신으로 뽑아 보내었는데, 지금은 청천강 이남의 수령을 점차 문음(文蔭)으로 뽑아 보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사고가 있을 경우에는 염려가 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청천강 이남의 서너 고을 수령은 육진(六鎭) 수령의 예에 의거하여 문신과 무신을 번갈아 뽑아 보내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의 인재를 뽑아 쓰는 것을 인조조 때부터 거듭 밝혔으나 착실하게 거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두 전조(銓曹)로 하여금 가려뽑아 거두어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귀영(金貴榮)의 관작을 추복(追復)하였다. 김귀영은 선조조의 상신(相臣)이다. 임진년의 난리 때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명을 받들고 왕자를 호위하여 북로(北路)에서 병란을 피하였다가 모두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화친하자는 글을 지어 김귀영에게 부쳐 보냈다. 그러자 대간이, 적에게 붙잡혔는데도 죽지 않고 도리어 적의 글을 가지고 왔다는 것으로 죄안을 만들어 김귀영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단지 함께 온 첩의 아들만 형신하고 김귀영을 희천(熙川)으로 유배보내라고 명하였는데, 김귀영이 중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 당시 대신인 윤두수(尹斗壽)가 의논드리기를
"만약 적에게 무릎을 꿇고 오로지 화친을 구하는 것만 알았다는 것으로 죄를 준다면 아마도 온당치 않을 듯합니다. 지금 이리로 나온 것은 왕자의 분부로 나온 것이니, 또한 단지 일신의 사사로운 계책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 무슨 바랄 것이 있어서 말하는 자들의 말과 같은 구차하게 살려는 이런 짓을 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이 사실이 《선조실록》에 나온다.】 이때에 이르러 김귀영의 손자가 상언하니, 대신에게 물어서 그의 관작을 회복시킨 것이다.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이 상소를 올려 여러 직책을 파직시켜 주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계해년 이후부터 비로소 호위청(扈衛廳)을 설치하여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대궐 안에서 입직(入直)하였는데, 국가에서 그들을 대우하는 것이 금군(禁軍)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비로소 혁파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계속해서 요미(料米)를 감하는 일이 있었으며, 그후에는 또 정로위(定虜衛)에 조사해 충정시키자는 의논이 있었고, 지금은 또 모두 양역(良役)으로 돌리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그 무리들이 모두 의구해 하며 동요해 큰 환란을 만난 것 같습니다. 호위청의 군관은 단속하고 정제하여 이미 국가에 유용한 병사가 되었으니, 이들은 무단히 빠져 일생을 놀면서 지내는 자들과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그런데 어찌 다시 침해하여 인심을 잃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스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호위청의 군관에 대한 일에 대해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전 참봉 이중신(李重藎)이 상소를 올려 수령을 잘 가리고 곤수를 가려 뽑으며, 세초(歲抄)를 너그럽게 하고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는 등의 일을 아뢰니, 상이 따스한 말로 비답을 내리고 일을 해당 조(曹)에 내렸다.
12월 11일 무진
혜성이 나타났다.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목겸선(睦兼善)을 승지로, 김석주(金錫胄)를 지평으로 삼았다.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전후로 올린 소 가운데서 반드시 신을 무식하고 패려한 영역에다 들여놓고자 하였으니, 즉시 밝혀 논파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전에 하였던 말을 마저 다 말하고자 합니다. 단상이, 할아버지와 손자의 의리로 단정하는 것을 무식한 생각이라고 하였는데, 단상의 마음에는 어떤 친족 관계로 단정한 다음에야 유식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주자(朱子)가 당의서(讜議序) 가운데서 이미 복수(復讎)는 5대가 되어야 다한다는 의리를 논하고서도 유공(劉珙)의 행장을 지음에 미쳐서는 봉사(奉使)를 회피하지 않은 것으로 그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유공은 바로 유협(劉鞈)의 손자입니다. 유협이 정강(靖康)의 화(禍)045) 에 죽었으니 유공의 마음에 어찌 강북(江北)의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밟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도 봉사(奉使)하던 날에 일찍이 사사로운 원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어찌 영원 불변의 크나큰 윤리가 신하가 되던 날 정해졌기 때문에 감히 사사로운 의로 공사(公事)를 가리울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단상은 조용히 물러나 스스로를 즐기며 옛 글을 두루 보아 의젓하게 유학자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신이 만약 입을 다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단상은 반드시 ‘내가 말하자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가령 뒷날에 세차게 몰아치는 환란이 있을 때 국록을 먹는 모든 무리들이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말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진퇴할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상의 이 논의는 오늘날만 그르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뒷날을 그리칠 것이니, 어찌 거듭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2월 12일 기사
혜성이 나타났다.
12월 13일 경오
혜성이 나타났다.
이경억(李慶億)을 대사간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집의로, 이유(李秞)를 정언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윤경교(尹敬敎)를 검열로, 강백년(姜栢年)을 병조 참지로, 김시진(金始振)을 충청 감사로, 심재(沈梓)를 지평으로 삼았다.
평안도 청북 암행 어사 민유중이 돌아와 아뢰었다. 수령들 가운데 잘 다스린 자인 의주 부윤(義州府尹) 강유후(姜裕後)는 자급을 올리고, 강계 부사(江界府使) 유탄연(柳坦然), 만포 첨사(滿浦僉使) 홍우량(洪宇亮)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정주 목사(定州牧使) 정지호(鄭之虎), 태천 현감(泰川縣監) 이송로(李松老), 이산 군수(理山郡守) 김원위(金元瑋), 위원 군수(渭原郡守) 조현(趙鉉), 철산 부사(鐵山府使) 임익하(任翊夏), 벽동 군수(碧潼郡守) 이조립(李詔立), 운산 군수(雲山郡守) 남궁충(南宮忠)에게는 모두 잘 다스리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경중에 따라 죄를 주었다. 평안 병사 박경지(朴敬祉) 역시 불법을 저질러 파직되었다. 민유중이 또 서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서쪽 변방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백성들이 고통스러운 것이 있어도 위로 알릴 길이 없는데다가 수령들이 또 거리끼는 바가 없어서 많은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지금부터는 변방의 수령과 장수를 더욱더 가려뽑되, 반드시 이미 시험해 보아 성적(成績)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게 하소서. 그러면 조금이나마 변방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다시 폐단에 대해 조목별로 올렸는데, 첫번째는 아뢰기를,
"강변(江邊)의 백성들이 삼을 캐는 것을 금한 뒤부터는 전혀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호구수가 점차 줄어들고 전결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병영(兵營)에서는 한정(閑丁)을 찾아내도록 책임지우고, 도사(都事)는 자각(自覺)을 어거지로 받아들입니다. 이에 주현(州縣)에서는 마련해 낼 길이 없어서 사람들의 아들을 빼앗아 한정이라고 하고는 거짓으로 군적(軍籍)에다 이름을 채워넣고, 거짓으로 문서를 작성하여 어거지로 자각이라고 하면서 정결(正結)에다 세금을 첨가해 징수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통합니다. 지금부터는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아울러 모두 혁파하소서. 그러면 거의 연강(沿江) 일대의 흩어진 자들이 다시 모여들고 다른 곳의 사람들도 다투어 들어와서 10년도 채 되지 않아 완전히 회복될 것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두 번째는 아뢰기를,
"강변 각 고을의 내노비와 상의원 노비, 각사 노비 등은 그 숫자가 몹시 많습니다. 내노비의 신공포(身貢布)는 전례에는 4승포(四升布) 2필이었는데, 지금은 포의 등급이 점차 높아져 6, 7승포에 이르고 있습니다. 상의원 노비의 신공포는 명주 1필인데, 명주의 등급이 아주 좋은 것이어서 더욱더 마련해 내기가 어렵습니다. 각사 노비는 으레 내주(內紬) 1필을 내었는데 근래에는 반드시 표주(表紬)를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 노비들 중에는 한 집에서 신공을 내야 하는 자가 혹 6, 7인이나 되기도 하여 해마다 빚을 내어 빚문서가 한아름이나 됩니다. 처음에는 소나 밭을 팔고 끝내는 아들과 자신을 팔다가 계속해서 도망가버립니다. 바라건대, 육진의 예에 의거하여 여러 노비의 신공을 모두 쌀로 내도록 허락하여 군량에 보태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노비가 내는 2필의 포를 헤아려 반으로 감하고, 상의원 노비와 각사 노비가 신공으로 내는 명주를 마포(麻布)나 혹은 면포(綿布)로 바꾸되, 승수(升數)를 정함으로써 지나치게 좋은 것이어서 마련해 내기 어렵게 하지 마소서."
하고, 세 번째는 아뢰기를,
"강변에는 민호(民戶)는 매우 드문데 창곡(倉穀)이 아주 많아서, 실호(實戶)가 받는 것이 60, 70석이 넘으며 중호(中戶) 이하는 이에 비하여 좀 적게 받는데, 그 형세가 실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포흠(逋欠)하게 되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포흠된 숫자를 조사하여, 그 가운데서 도망하였거나 죽었거나, 특히 궁핍한 자들은 모두 탕감해 주소서."
하고, 네 번째는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포자(鋪子)는 아주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어서 지난번에 대신의 건의로 인하여 이미 혁파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단지 비용만 생각해 다 고치려고 하지 않아 평양·안주(安州)·의주(義州)는 그대로 두고 혁파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본도로 하여금 각처의 포자에 대해 전해져 온 문서를 상고하여 본채(本債)를 이미 상환하고 이자만 내지 않은 것은 모두 즉시 탕감하게 하소서."
하고, 다섯 번째는 아뢰기를,
"강변에서 삼 캐는 것을 금하여 육로에는 도직(道直)을 설치하고 수로에는 파수(把守)를 설치하였으며, 마을에는 오가작통법(五家作通法)을 세워 점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천강 이남과 이북의 각 고을 및 함경도의 삼 캐는 무리들의 경우, 해마다 강변으로 들어가면서 파수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기도 하고, 혹 틈을 엿보아 적당한 때 몰래 넘어들어가는 일이 전후로 잇따르고 있습니다. 금법을 엄하게 시행하고자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앞뒤에서 막아야만 합니다. 대개 강변에서 남쪽으로 통하는 길에는, 강계(江界)에 적유령(狄踰嶺)이 있어서 희천(熙川)으로 통하고, 이산(理山)에는 우령(牛嶺)과 차유령(車踰嶺)이 있어 운산(雲山)과 벽동(碧潼)으로 통하며, 창성(昌城)에도 고갯길이 있어 귀성(龜城)과 삭주(朔州)로 이어져 있으며, 함경도와의 경계에도 설한령(薛罕嶺)이 있습니다. 고개 이북은 강변의 여러 고을에서 스스로 관할하고, 고개 이남은 희천·운산·삭주·구성 등 고을로 하여금 관할하게 하되, 각 고갯길에 수직을 세워 금지시키며, 설한령은 함경도에서 금지시키고, 남도(南道)에는 각각 삼을 금하는 차사원을 정하여 그로 하여금 살펴보게 합니다. 그리고 금법을 범하고 넘어들어가 삼을 캐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고갯길을 관할하는 해당 관원과 강변의 해당 관원을 똑같이 논죄합니다. 그러면 피차간에 서로 경계하고 형세가 서로 제압되어서 금령을 시행하는 데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여섯 번째는 아뢰기를,
"평양부에 있는 기자 서원(箕子書院)의 유생들이 말하기를 ‘본부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과거를 베풀어 30인을 뽑은 다음 재사(齋舍)에 거처하게 해 권과(勸課)하는 방도로 삼고 있다. 그런데 재사에 거처하는 선비들의 양식을 마련할 방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평양은 바로 기자가 다스렸던 나라이며 문교(文敎)가 처음 열린 지방이어서 나라에서 항상 돌보아 온 곳입니다. 지금 만약 학전(學田)을 모두 잃어서 선비를 양성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방도가 폐해지는 데 이르게 된다면 백성들의 풍속을 가르쳐 인도하고 유교를 흥기시키는 데 크게 흠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본도로 하여금 형세를 살펴보고 도내의 둔전(屯田)을 떼어주어 선비들의 양식을 충당하게 하소서."
하고, 일곱 번째는 아뢰기를,
"강변의 사람들은 본디 활을 잘 쏜다고 칭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는 활을 잡는 것을 전폐하여 용감하고 강건한 젊은이가 헛되이 늙어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비단 인재가 아까울 뿐만 아니라 역시 뒷날의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대개 창성(昌城)에서 위원(渭源)에 이르기까지 원래 활을 만드는 사람이 없어서 비록 활쏘기에 뜻을 가진 자가 있어도 항상 활이 없어서 걱정이니, 특별히 조처하여 활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아마도 번잡한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으로, 오직 조정에서 잘 헤아려 선처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서로(西路)의 무사들이 함경도에 과거를 베푼 일을 듣고부터는 모두들 부러워하면서 심지어는 똑같이 변방인데 평안도만 특별한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유감이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만약 강변에 별도로 과거를 베푼다면 거의 변방 무사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과(別科)는 원래 항상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금 바라건대, 조정에서 변방의 젊은이들이 헛되이 썩고 있는 폐단을 생각해 특별히 오래도록 시행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강변 무사들을 1년에 한 차례 재주를 시험하되,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특별히 전시(殿試)에 곧장 나아가도록 허락하기를 서울의 권무청(勸武廳)의 예와 같이 하소서. 그러면 변방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분발하여 앞다투어 흠모해 활을 잡고 말을 달리면서 각자의 재주를 다하여,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기예가 이루어져 예전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한정과 자각 등의 일에 대해서는, 햇수를 한정하지 않고 모두 정파한다면 전혀 참작하는 뜻이 없습니다. 자각은 3년, 한정은 2년으로 정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든 관사의 노비 신공은 해조로 하여금 각자 엄하게 신칙하되 포와 주(紬)의 승수는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여 지나친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각 고을의 창곡(倉穀)의 폐단은 앞으로 어사를 특별히 파견할 때 다시 의논하여 분부할 수 있습니다. 포자는 이미 혁파하였는데도 아직도 폐단이 있다면 감사로 하여금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아울러 탕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강변과 고갯길에 금지하는 관원을 두는 것은 본도 감사와 함경 감사에게 다시 그 편부를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강변에 활을 만드는 사람이 없다면 감영과 병영으로 하여금 솜씨 좋은 활 만드는 사람을 들여보내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과거를 베풀어 재주를 시험하는 것은 일찍이 이미 품의하여 정하였는데, 매년 전시에 직부하게 하는 것은 시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암행 어사 민유중도 역시 함께 들어갔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천(舒川)에서 일어난 승인(僧人)의 변은 참으로 경악스러운데, 영장(營將) 양일한(楊逸漢)이 계문하지도 않고 병사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또 한산(韓山) 등지는 그의 소관이 아닌데도 전령(傳令)하고 달려가 군사를 뽑아냈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감사 이익한(李翊漢)은 영장을 보내면서도 계문하지 않고, 또 가두어둔 승인을 당초에 명백하게 공초받지 않고 곧장 효시하기를 청하였으니, 처사가 또한 몹시 놀랍습니다."
하였다. 당초에충청도 서천의 천방사(千房寺)의 승인들이 관가의 명령을 거역하자, 감사 이익한이 겸임 한산 군수 신숭구(申嵩耉)로 하여금 우두머리 승인을 잡아 가두고 죄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절의 승 수백 명이 조총이나 활을 가지고 험준한 곳을 의지하여 저항하였으며, 그뒤에는 화약으로 절을 불사르고 또 미워하는 관인(官人)의 집을 불태웠다. 이익한이 이 사실을 듣고는 조정에 묻지도 않고 지레 공주 영장 양일한을 한산에 보내어 그로 하여금 체포하게 하였다. 그러자 양일한이 한산과 임천 등 고을의 군사를 뽑아 체포하였다. 한산과 임천은 이미 우영장(右營將)의 관할이 아닌데다가 양일한이 또 치계하지도 않고 병사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군사를 뽑아쓴 것이다. 승인들이 모두 체포된 뒤에 이익한이 효시하기를 계청하였는데, 병사 민진익(閔震益)이 그 상황을 계문하였으므로 대신이 말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와 영장을 모두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김우명이 상소의 끝부분에서 말한 호위청 군관에 대한 일을 묘당에서 의논해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지난달 23일에 인견하셨을 때 ‘호위청 군관 중에서 서울의 업무자(業武者)는 달수를 한정하지 않고 소속되는 것을 허락하며, 외방의 한량(閑良)은 지금부터 절대로 소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비록 이미 소속된 자라도 군역(軍役)에 관계되어 본 고을에서 요청해오면 그대로 본 고을에 준다.’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서(注書)가 잘못 기록하여 무사들이 놀라 의아해 하는 걱정이 있게 되었으니, 전에 결정한 대로 거행 조목을 고쳐서 분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민유중에게 묻기를,
"그대는 품고 있는 생각이 있는가?"
하니, 민유중이 아뢰기를,
"서쪽 지방의 강변 고을은 서울과의 거리가 육진과 마찬가지로 매우 멀어 전부터 과거를 보러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별도로 과거를 베푸는 일이 없으므로 진작시키는 기풍이 없습니다. 그리고 강변 고을에는 역사(力士)가 많은데도 수십 년 이래로 활을 잡는 사람이 없는 것은, 대개 국가에서 면려하는 거조가 없어서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해마다 시재(試才)하되 장원을 차지한 자를 전시(殿試)에 직부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권면되어 흥기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대로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시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강가의 열읍(列邑)에 활 만드는 장인이 없으므로 비록 궁마(弓馬)에 뜻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무예를 연습할 수 없으니, 몹시 애석합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국가에서 서쪽 방면에 유의하였으므로 서쪽 지방의 활이 가장 좋다고 칭해져 ‘서궁 남전(西弓南箭)’이란 말이 있었는데, 정축년046) 이후로 활 만드는 장인들이 흩어져 없어져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서울에 있는 장인으로 하여금 가서 가르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군기(軍器)는 어떠한가를 물으니, 민유중이 대답하기를,
"신이 감히 마음대로 점검해 볼 수 없었으므로 상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략 들으니, 몹시 허술하였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양서 지방의 무비(武備)를 조정에서 전혀 유의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염려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영군(御營軍)을 관서에서 충정(充定)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신의 뜻으로는 관서도 충정하는 것을 허락하여 이미 감영과 병영에 소속된 자라도 어영에 소속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옮겨 충정해서 윤번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그런 다음 유혁연(柳赫然)으로 하여금 주관해서 교련하게 한다면 4, 5년이 지나지 않아 재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며,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 본도에 나누어 주어 싸우게 하면 쓸 만한 군사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관서의 경우에는 비록 이름은 어영군이라 하더라도 별도로 한 부대를 만들어 본영(本營)에 예속시키지 않으면 좋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의 딸을 이미 시집가기로 되어 있는데도 대궐 안에서 시녀로 택하여 들였으며, 또 차비문(差備門)에서 그의 아비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고 합니다. 이에 신이 몹시 놀라워서 물어보니 대전(大殿)에서 한 것이 아니라 대비전(大妃殿)에서 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이것이 대비전에서 한 일이기는 하지만 상께서 어찌 듣지 못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궐 안의 모든 일은 대전에서 모두 주관하고 있으나, 시녀를 뽑는 일에 있어서만은 일찍이 주관하지 않았는데, 대개 예전의 전례가 이와 같은 것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비록 예전의 규례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융통성없이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상께서 이미 그것을 들었으면 속히 그 여인을 돌려보내어 바깥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하게 성상의 뜻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곡절이 있을 것이니, 상세히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영돈녕 부사 김우명이 지난번에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추고받았는데, 대간의 논계가 참으로 옳으며, 상께서 따라주신 것도 잘하신 것입니다. 다만 추감(推勘)하는 즈음에 태장(笞杖)으로 조율하였는데, 국구(國舅)는 사체가 저절로 다르니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대간의 논계는 이미 시행되었으니, 추고하는 것은 내버려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분간(分揀)하라고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강변 고을에 시재하는 일에 대해 여쭈니, 상이 이르기를,
"제주(濟州)의 예에 의거하여 어사를 파견하여 무예를 시험해 뽑으라."
하였다. 민유중이 강변에 교양관(敎養官)을 설치하자고 다시금 청하니, 상이 따랐다. 민유중이 또 청하기를,
"강계(江界)는 바로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귀양가 죽은 곳입니다. 그 지방의 인사들이 서원을 세우고는 지금까지 제사지내는 것을 폐하지 않고 있습니다. 변방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오히려 선현을 경모할 줄 아니, 그 뜻이 가상합니다. 서원에 사액(賜額)하여 표창하여 권면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오두인이 아뢰기를,
"전 봉산 군수(鳳山郡守) 김하량(金厦樑)은 지난번에 어사가 탐문할 때 그 고을에 사는 여인이 어떤 행인에게 그가 고을살이할 때 저지른 비루한 일을 말하였다고 듣고는, 노여움을 발해 고을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그 여인을 마구 곤장을 쳐 끝내 숨이 끊어지게 하였습니다. 일이 몹시 놀라우니, 잡아다가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4일 신미
혜성이 나타났다.
전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이미 부직(付職)하여 머물러 있으라는 명을 받들고는 즉시 물러가면서 도중에서 소를 올려 진달하기를,
"신이 선조 때부터 은총을 받음이 일반적인 예를 뛰어넘었는데도 끝내 숨어 있으면서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은, 단지 허물이 있어 버려진 물건이 성대한 세상의 예수(禮數)를 헛되이 받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돌아보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내가 몹시 실망스럽다. 사직하지 말고 올라와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전후로 여러 차례 차자를 올려 극력 사직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15일 임신
혜성이 나타났다. 달이 귀성(鬼星)을 범하였다.
정언 박세당(朴世堂)이 인피하기를,
"명을 받들고 탐문할 때 그간에 특히 심하게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잘 다스리지 못한 몇 고을에 대해서, 신이 망령되이 이치상 먼저 드러내놓고 파출(罷黜)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여 창고를 봉하고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삼가 듣건대, 경연 중에 문서를 확보하지 않고 지레 먼저 창고를 봉한 것은 규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성상의 분부가 있었다고 하니, 신이 일에 당하여 살피지 못한 죄가 큽니다."
하고, 두 차례 인피하자, 체직하였다.
12월 16일 계유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남용익(南龍翼)을 경기 감사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응교로, 조가석(趙嘉錫)을 대교로,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유혁연(柳赫然)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아비를 시해한 죄인 일생(一生)을 삼성(三省)이 다시 조사하여 승복을 받아 정형(正刑)하였으며, 출생지인 청양현(靑陽縣)을 혁파하여 정산(定山)에 합하였다.
12월 17일 갑술
혜성이 구름이 짙어 보이지 않았다.
함경도 경성(鏡城) 등 고을에 지진이 있어 집들이 모두 흔들렸다.
안변(安邊)의 여진도(女眞島)에 사는 어부 김상인(金尙仁) 등 6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익사하였다.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8일 을해
혜성이 규수(奎宿) 안 우경성(右梗星) 위에 나타났는데, 꼬리의 형적이 줄어들었다.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자전(慈殿)께서 계시는 전 안에 귀매(鬼魅)의 변이 있었는데, 통명전(通明殿)이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대궐 안의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옮기시게 하고자 하였으나 자전께서 따르지 않으신다."
하였다.
전 경기 감사 윤순지(尹順之)와 조수익(趙壽益)을 사형수를 잘못 내보냈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잡아다 추문하라고 명하였다가, 우상 허적이 연로하다고 아뢰자, 상이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9일 병자
혜성이 나타났다.
12월 20일 정축
태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12월 21일 무인
태백이 사지에 나타났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이인(李𡐔)을 승지로, 심재(沈梓)를 부수찬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좌랑으로, 김만균(金萬均)을 부교리로, 조가석(趙嘉錫)을 봉교로, 장선징(張善瀓)을 수찬으로, 이경과(李慶果)를 지평으로, 이합(李柙)·민주면(閔周冕)을 장령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김좌명(金佐明)을 형조 판서로, 윤기상(尹起商)을 경상 좌수사로, 나이준(羅以俊)을 수찬으로, 남노성(南老星)을 호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우윤으로, 심황(沈榥)을 승지로, 이홍연(李弘淵)을 대사성으로 삼고, 김수흥(金壽興)을 특별히 올려 경기 감사로 삼았다.
12월 22일 기묘
태백이 사지에 나타났다. 밤에 혜성이 나타났다. 달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사간 오두인 등이 아뢰기를,
"여러 도에서 탐문한 뒤에 치적의 고하에 따라 상전(賞典)을 헤아려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리에서 나왔으나 당상관에 뛰어올려 제수하는 데 이르러서는 참으로 치적이 여러 도에서 제일인 자가 아니면 문득 폐단이 있을 상전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숙천 부사(肅川府使) 김흥운(金興運)과 마전 군수(麻田郡守) 허질(許秩) 등은 비록 가상한 치적은 있으나, 특별히 특이한 치적은 없습니다. 더구나 허질은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았으니 규례를 어기고 자급을 올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 개정하고 다른 상으로 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비로소 김흥운에게는 말을 하사하고 허질은 올려 서용하라고 허락하였다.
12월 24일 신사
혜성이 나타났는데, 형체가 점차 희미해져 거의 소멸되었다.
12월 25일 임오
태백이 사지에 나타났다.
집의 오시수(吳始壽) 등이 아뢰기를,
"대궐 안의 숙위(宿衛)에 있어서는 총부(摠府)가 중요하므로, 입직 당상(入直堂上)은 대궐 안에 잠시 출입할 때에도 반드시 표신(標信)을 지닌 후에 나아가 참여하니, 잠시도 마음대로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지난번에 입직 당상이 동료가 책임을 전가하여 미룸으로 인하여 지레 먼저 나아가 버려서 반나절 동안이나 대궐을 비웠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당해 당상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는 지난번에 강가에 집을 지을 때 친히 가까운 경기 지방의 사찰에 가서 중들을 위협해 역부(役夫)를 뽑아와 승도들이 원망하며 욕하고 있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대사성 이홍연(李弘淵)은 자급과 명망이 본디 가벼워 교육을 관장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은 결단코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장령 이합은 일찍이 헌부의 직책에 있을 때 일을 어물쩍하게 넘겨 버리기를 잘하였으므로 이번에 내직에 발탁된 것은 사람들의 기대에 차지 않으며, 또 장령 민주면(閔周冕)과 상피하여야 할 혐의가 있으며, 현재 추함(推緘)을 받고 있는데 아직까지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 제수한 명을 환수하고 그대로 전의 직임에 제수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으나, 낭선군 우는 단지 추고만 하게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김익렴(金益廉)이 혜성의 변으로 인하여 역대 이래의 성변(星變)에 대한 유를 모아 별도로 책자를 만들고는 《역대요성록(歷代妖星錄)》이라 이름한 다음 상소를 올리면서 진헌하였는데, 그 상소에,
"신이 삼가 역대로 혜성이 나타났을 때의 가언(嘉言)과 지론(至論)을 뽑고는, 간간이 생각한 바를 덧붙여서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든 다음, 삼가 옛 사람이 고사(古事)를 써서 진헌하였던 규례에 비기면서 첩황(貼黃)하여 진헌합니다."
하고, 또
"더구나 지금은 새봄이 돌아와 묵은 해가 가려 하고 있으니, 우리 성상께서 묵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교화를 펴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사람이 못났다고 해서 말까지 폐해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미천한 신 한몸만의 영광일 뿐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마장(馬裝)을 하사하였다.
12월 26일 계미
태백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권령(權坽)을 승지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남천한(南天漢)을 장령으로, 홍만형(洪萬衡)을 봉교로, 이선(李選)을 대교로, 윤심(尹深)을 부수찬으로, 김좌명(金佐明)을 다시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도승지 박세모(朴世模)가 아뢰기를,
"어제 사직 김익렴이 재변으로 인하여 상소하였고, 또 역대로 혜성이 나타났을 때 논한 바를 모은 것이라고 하면서 책자 하나를 만들어 진헌하였습니다. 그런데 견고하게 봉함하고 서명하여 몹시 비밀스럽게 해 반드시 승지와 사관으로 하여금 뜯어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우선 봉입(捧入)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중서(中書)는 왕명을 출납하는 관서이고 태사(太史)는 붓을 잡는 자리여서 비록 극히 비밀스러운 군무(軍務)나 아주 비밀스러운 급변(急變)에 관한 일도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는바, 이는 실로 수백 년 동안 통행해 온 규례입니다. 지금 이 김익렴의 책자는 요즈음 일어난 재변에 대해 진달하면서 예전의 일을 원용하여 오늘날의 일을 증명해 수성(修省)하는 바탕으로 삼게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승지와 사관조차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리에 있어서 실로 온당치 않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혹 도에 어그러지는 일을 가지고 연줄을 통해 비밀히 아뢰는 자가 있을 것이니, 뒷날의 해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펴보신 후에 즉시 본원에 내려 승지와 사관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전에도 혹 그렇게 한 경우가 있었다. 어찌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뒤에 간원이 탄핵하기를,
"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김익렴이 진헌한 책자를 뜯어보지 않은 채 흐리멍덩하게 봉입하였으니, 이미 상규에 어긋난 것이고, 또 뒤폐단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27일 갑신
혜성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홍중보는 온후하기만 할 뿐 다른 장점은 없었는데, 한갓 부마 홍득기(洪得箕)의 아비라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재신의 자리에 뛰어 올랐다. 병조 판서가 됨에 미쳐서는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상의 은총을 굳히고 승진하는 발판으로 삼았으므로 시의(時議)가 병통으로 여겼다.
12월 28일 을유
태백이 나타났다.
12월 29일 병술
부호군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지금 요성(妖星)과 풍뢰(風雷)의 변괴 때문에 성상께서 경동되시는 바가 있어서 하늘에 응답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에 미천한 신에게까지 특별히 은혜로운 전지를 내려 속히 올라와서 어려운 상황을 구제하라고 유시하였으며, 또 유시한 전지 안에는 신이 지난해 올린 상소를 자세하고 깊이 있게 읽어 바야흐로 묘당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해 거행하려 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옛 사람이 말한 것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법입니다. 이것을 들어 조처한다면 국가의 억만 년토록 무궁할 아름다움이 실로 여기에서 기초할 것으로, 한때 재변을 그치게 할 바탕이 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국면을 전환시키는 기틀은 바로 전하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먼저 큰 것을 세우고, 신의 상소 가운데서 시행할 만한 것을 들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성상께서 단안을 내리시어, 분발하고 격려하여 반드시 시행하겠다는 뜻을 보이소서. 그러면 여러 신하들이 누가 감히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아름다운 명을 받들어 널리 알리지 않겠습니까. 신의 진퇴와 같은 것은 애당초 그 사이에 아무런 비중이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번에 올린 소장을 바야흐로 의논해 처리하고자 하였다. 비록 책에 실려 있다고는 하지만 의논을 주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끝내 이루기가 어려울 듯하다. 고사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12월 30일 정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계문 중에서 진달한 산군(山郡)의 대동(大同)을 작포(作布)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 속히 의논해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동포 1필을 일찍이 쌀 7두 반으로 절가(折價)하였으나, 백성들이 오히려 어렵게 여깁니다. 을사년 봄부터는 쌀 8두를 포 1필로 작포하여 상납하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또 이르기를,
"금년에는 농사가 흉년이 들었으니, 오는 봄부터 거두는 쌀은 산군과 해군(海郡)을 막론하고 특별히 1두를 감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함경 감사 민정중이 본도의 폐단에 대해 계문하여 진달하기를,
"본도는 변방 지역이어서 조정에서의 조치도 다른 도와는 차이가 있어서 전결에 대한 정세(正稅)와 공사천에 대한 공미(貢米)를 모두 각 고을에 유치해 두어 군향(軍餉)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각 고을의 창곡(倉穀) 수가 많아 조적(糶糴)하여 모곡(耗穀)을 취하는 숫자가 한 고을에 혹 1천여 석이 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각 고을에서 일찍이 관수(官需)를 받아들이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병자년 이후에 국곡(國穀)이 다 떨어지자 상평청(常平廳)에서 3분의 2를 취하다가, 지난 경인년에 비로소 상평청에서 모곡을 취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뜻은 대개 다른 도와 균일하게 하려는 것인데, 실로 본도의 사세가 다른 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현재 도내의 22고을의 모곡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다가 또 관수(官需)를 받아들이는 규정이 없어서 일상 쓰는 것을 잇대어 댈 수 없고 사는 것도 부족하여, 그 사이의 구차스럽고 자질구레한 상황은 다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함흥(咸興)·북청(北靑)·경성(鏡城) 세 고을은 바로 감사와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가 머무는 곳이므로 쓰임새가 몇 배나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각영(各營)의 수요를 별도로 헤아려서 지급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세 고을의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영의 군사들에게 지공할 것을 각 고을에서 나누어 마련하게 하면 백성들을 수고롭히면서 멀리 운반하는 비용도 아울러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각 고을의 관수를 헤아려서 지급해 주면 백성들을 침해하는 자질구레한 일이 저절로 제거될 것이어서 고을들이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상평청에서 모곡을 취하는 법에 이르러서는, 원래 조종조의 옛 법이 아닙니다. 단지 난리 뒤에 부득이 편함을 취한 한때의 일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영원토록 없애는 것을 허락하여 여러 도에 혜택을 주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다시 생각건대, 영의 수요와 고을의 수요를 헤아려서 지급해 주는 일을 허락할 수 없을 경우에는 함흥 등 세 고을에 별도로 전결(田結)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지탱해 나갈 수 있게 하였으면 합니다. 이 일은 모름지기 먼저 전정(田政)을 바르게 한 뒤에야 시행할 수 있는데, 도내에 양전(量田)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다시 양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지금 바야흐로 본도에서 먼저 함흥부에다 시험해 보고 있으니, 편부와 득실을 알아본 뒤에 다시 계청하여 내년에 온 도를 다 양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도 내에 진보(鎭堡)를 설치한 곳 가운데 삼수(三水)·갑산(甲山)·단천(端川)·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부령(富寧) 등 일곱 고을은 모두 산골짜기에 있고 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 등 다섯 고을은 모두 강변에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야인들이 왕래하면서 넘는 고개나 건너는 나루의 길목을 방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가가 드문드문하여 의식(衣食)이 모두 곤란하며, 추울 때는 굴속에서 살고 더울 때는 나무 위에서 살아,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귀신이나 짐승과 같은데, 52개의 진보 가운데 이와 같은 것이 거의 반이나 됩니다.
변장들이 예전에 첨방(添防)할 때에는 토병(土兵)들이 모두 농사지으러 돌아가도 방수군(防守軍)이 있어서 둔전(屯田)을 경작해 살아갈 수 있었는데, 방수군을 철수시킨 뒤로는 둔전을 모두 폐해서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어사의 서계로 인하여 비록 요미(料米)를 주도록 허락하였으나 혹 피곡(皮穀)으로 헤아려 지급하기도 하고 또 둔전을 모두 빼앗아 호조에 귀속시켰습니다. 이에 한 해가 다가도록 염장(鹽醬)을 보지 못해 아침저녁으로 단지 조밥 한 그릇뿐이니, 이 어찌 사람으로서 감당할 노릇이겠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다시 마련하게 해서 첨사와 만호, 권관에게는 모두 대미(大米)로 요미를 주고, 군관은 원수(元數)를 정하되, 데리고 갔거나 아니나를 막론하고 역시 헤아려 주게 해서 늠자(廩資)를 넉넉하게 하소서. 그리고 둔전도 하루나 이틀 갈이를 떼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급(資給)할 수 있게 하소서.
본도에는 살고 있는 백성들이 매우 적어 신역(身役)의 고통이 다른 도보다 더욱 심해 궁핍한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해서 처자식을 팔고 끝내는 자신까지도 팔며, 자식을 낳으면 길에다 버리기까지 하는데도 오히려 신역을 낼 길이 없습니다. 찬찬히 그 폐단이 일어난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고공(雇工)과 솔정(率丁), 토노비(土奴婢)·국적(國糴) 등 네 가지 일에서 나왔습니다.
대개 고공과 솔정의 규례에 대해 고찰해 보니, 예전에 변방을 방비하던 때 야인들이 수시로 침입해 와 소란을 피우므로 변방 고을에서는 여름이나 겨울 할 것없이 성(城)을 지키면서 대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온 고을의 남녀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성안에 있으면서 각자 주둔지를 지켰는데, 지금의 여포수(女砲手) 제도 역시 그때의 제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을 지키는 사람들은 농사철을 당하여서도 경작할 수가 없어서 살아가기가 곤란하였으므로 고공을 정해주어 그들 대신 경작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법(本法)에서는 고공을 토착민으로 정해 주지 않고 흘러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들로 충정해 주었습니다. 이른바 솔정은 토민(土民)으로 정해 주어 모든 물품을 지공하게 한 것인데, 보인(保人)이 주호(主戶)를 위하는 것과 같이 하여 작고하거나 혹 늙고 병들면 역(役)을 대신 서 주었습니다. 그뒤에 변방의 환란이 일어나지 않아 성을 지키는 일이 없게 되었는데도 각자 고공과 솔정은 차지해 마음대로 부리는데, 이 법이 점차 확대되어 남북도에 통행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양민의 아들이 비록 강보에 싸여 있어도 그 집에 재산이 있으면 모두 먼저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이름을 알아내어 관가에 고해 체지(帖紙)를 받아 입안(立案)하고는 겨우 3, 4세만 지나면 문득 역가(役價)를 내도록 해 우마와 전답을 빼앗으며, 미처 10세도 되기 전에 잡아다가 부립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 살고 있는 자는 관가에 고하여 쇄환해 와 대대로 세습하기를 마치 노비처럼 하며 가혹하게 부립니다. 또 법적으로 목숨으로 보상해야 하는 규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가끔 노여움을 발해 때려 죽이면서 조금도 꺼리지 않습니다.
이른바 토노비(土奴婢)란 것은 바로 토착인 노비입니다. 본도의 전해 내려오는 규례에, 국초에 정해진 사목이라 하면서 토 노비의 경우에는 1백 구(口)가 넘더라도 관가의 역(役)에 정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데, 그 노비를 고공, 솔정과 다름없이 마찬가지로 혹독하게 부립니다.
이른바 국적(國糴)의 폐해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전에 올린 장계에서 모두 말하였습니다. 허다한 국곡(國穀)을 나누어 줄 즈음에 한 호당 받는 것이 많은 경우에는 70∼80석이나 되고 적은 경우에도 30∼40석을 밑돌지 않습니다. 부유한 백성은 고을 관원에게 간청하여 원조(元糶)를 받지 않고서 가을이 되어서는 단지 모곡(耗穀)의 숫자만을 내어 수납(受納)하는 비용을 덜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백성들은 눈앞에 다급하여 숫자대로 다 조곡(糶穀)을 받았다가 가을이 되어서는 낼 길이 없어서 첫해에는 먼저 자식을 팔고 2년이나 3년이 지나면 아내를 팔고 자신을 팔며, 심지어는 자신의 대는 물론 자식 대까지 되어도 오히려 적곡의 수효를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고공과 솔정의 법을 모두 혁파하고 단지 정군(正軍)과 속오군(束伍軍)에게만 보인을 주는 것을 허락하며, 각보(各堡)의 토병은 비록 군병이기는 하지만 주둔지에 살고 있으니, 역시 보인을 주지 않으며, 토노비는 집안에서 뿌리는 자 외에는 군사에 편입하도록 허락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거의 잔학하게 혹사시키는 습속을 없앨 수 있어서 궁한 백성들의 다 죽어가는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적을 변통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별도로 파견한 중신(重臣)과 반복하여 상의하였으므로 반드시 복명(復命)하는 날에 모두 진달하였을 것이니, 지휘를 기다리겠습니다.
북방 백성들이 자식을 기르지 않는 것은, 너무 궁핍해서 그런 것으로 법령으로 금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폐정(弊政)을 모두 제거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보전해 살아갈 수 있게 한 다음에야 저절로 이런 걱정이 없어질 것입니다. 당장에 이를 구제할 수 있는 계책을 생각해 보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해 한 수령이 3세 전에 거두어 기르면 자신의 아들과 같이 처리한다는 법을 선포하고는 백성들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자, 자식이 없는 사람들 중에 자못 거두어 기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지금 만약 법을 세우되,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자의 경우에 자신에 한하여 노비가 되게 하기를 한결같이 진구(賑救)하는 사목과 같이 한다면, 거두어 기르는 길이 더욱 넓어져 살아나는 아이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북도는 호강(豪强)들이 무단(武斷)하는 폐단이 가장 심하여 가난한 백성들이 침해를 당하고는 원통함을 품음이 그지없습니다. 그런데도 고을 수령들이 대부분 무신(武臣)들이어서 송사를 처리할 즈음에 한갓 위엄만을 일삼아 전혀 자상하게 처결하지 않고 있으며, 또 대부분 토호(土豪)들과 친분을 맺어 도리어 사사로이 비호하면서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친족의 노비라고 핑계대거나 혹 도망한 노비로서 자기 소유물이라고 하면서 어거지로 다른 사람의 전지와 재산을 빼앗으며 함부로 공선(貢膳)을 거두어들입니다. 이에 지극히 원통함을 품은 백성들이 고소할 데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북평사(北評事)를 한때의 인망을 지닌 사람으로 잘 가려 뽑는 것이 실로 공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니, 바라건대 조정에서 사목(事目) 하나를 만들어 평사로 하여금 송사를 처결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게 하되, 긴요한 일에 관계될 경우에는 일일이 감사에게 보고한 다음에 처결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호강들의 습속을 억제할 수 있고 호소할 데 없는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며, 고을 수령들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백성들이 믿고 의지할 데가 있게 될 것입니다.
육진은 예전에는 항상 오랑캐를 방비하는 것을 일삼아 성을 지키면서 변란에 대비하였으므로 온 고을의 군민(軍民)들이 모두 성안에 있으면서 관가에 복역(服役)하였으며, 비록 들판에 나가 경작하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토지를 개간한 것이 넓지 않아 전결의 숫자가 적었으므로 모든 일을 성안에 있는 군병들에게 책임지웠습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들판에 흩어져 살아 토지를 모두 개간하였으며, 또한 몹시 비옥하여 품관(品官)들이 모두 부유합니다. 그런데도 복역(服役)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들은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예전과 마찬가지로 군병들에게만 오로지 책임지우고 있습니다. 육진의 군병들이 감당해 내지 못하는 폐단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이 바야흐로 해당 고을에 분부하여 다음해부터는 크고 작은 관역(官役)에 모두 민결(民結)을 쓰고 절대로 다시는 군민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역(民役)에 관계되니 조정에서 규례를 정해 지휘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도내의 공사천(公私賤)으로 속오군에 편성된 자들은 가장 고된 역(役)이어서 감당해 내지 못하는데, 육진이 더욱 심합니다. 대개 그들은 자기 한 몸은 군인에 편성되어 역을 감면받으나, 그 나머지 한집안에 사는 처자식들은 수가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신공(身貢)을 납부하는데다가 또 보인과 고공마저 없어 형세가 실로 보전하기 어려우며, 실정 역시 애처롭습니다.
지금 만약 같은 처지에 있는 공사천으로 매년 2명씩 보인을 주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원하는 바에 따라 준다면, 그들의 처자와 자매들이 모두 보인이 될 수 있어서 한 집에서 아울러 부역하는 원통함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보인을 주는 규정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집의 여인을 보인으로 삼고자 할 경우에는 들어주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도내에서 응당 시행해야 하는 일을 조사해 보니, 그 가운데 병조에서 행회(行會)한 세초 정군(歲抄定軍)의 숫자를 한정한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더하도록 정한 숫자가 큰 고을의 경우에는 1백 명으로 한정하였는바, 이것으로 계산하면 10년이면 1천 명이 되니, 이것은 시행하기 곤란한 법인 듯합니다. 본도는 살고 있는 백성들이 적어 양인(良人)과 공사천(公私踐)의 호적과 문서가 분명하고, 또 삼금(蔘禁)으로 인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해 한 달이면 5, 6차례나 점고합니다. 그런데다가 또 각종의 보인, 솔정, 고공의 규정이 있어 각자 그 주호(主戶)가 수소문해 찾아내어 망정(望定)합니다. 이에 그 형세가 실로 한 장정도 한가하게 지내는 자가 없습니다.
신의 뜻으로는, 조정에서 평상시의 원액(元額)을 조사하고 각 고을의 크고 작음을 구별하여 참작해서 제도를 세워 일정한 수를 정한 다음 각 고을에 내려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그 숫자를 채우게 하되, 해마다 죽은 자만 채우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정군(正軍)이 중하게 되어 고공과 보인을 모두 색출하여서라도 정원수를 채울 것이어서, 한 차례 소요가 일어난 뒤에는 해마다 색출해내는 폐단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도내 각 진보(鎭堡)의 토졸(土卒)은 전부터 본 진보로 하여금 모집해 들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본도 각 진보의 토졸을 한 병사(兵使)가 공을 세우고자 하는 계책을 하여 모두 다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켜 군인의 숫자를 거짓으로 늘려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습니다. 현재 토졸들은 진보에 있어서는 첨사와 만호가 있고 본 고을에 있어서는 초관(哨官)이 있어, 이들이 각각 영장(領將)이라고 하면서 갖가지로 침책(侵責)하고 있으며, 본 고을에서 조련하면 본보가 텅 비고 본보에서 조련하면 본 고을에서 빠지게 됩니다. 이에 한 사람의 몸으로 두 가지 역(役)에 시달리느라 형세상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규식을 한 가지로 정하되, 변방 진보의 토졸은 모두 구별하여 본보에만 소속되게 하고 본 고을의 군오(軍伍)에 편입시키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각보에서 군사를 모집하는 규정은 살고 있는 곳의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모두다 모집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몹시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후로는 각진의 토졸은 먼저 액수(額數)를 정하여 본보로 하여금 모집해 들이도록 하되, 모집에 응한 자는 공사천(公私賤)이더라도 모두다 본역(本役)을 감면해 주기를 삼남(三南) 지방 각보의 사목(事目)과 같이 하고, 본보의 성안에 들어와 살지 않는 자는 절대로 소속시키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상사(上使)가 순시할 때 모집한 문서를 조사하고 가호수를 헤아려 일일이 점고해 살펴보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각 진보에 저축해 둔 군량은, 해마다 본보에서 조적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조곡(糶穀)을 받은 뒤 도망하거나 죽은 토졸 역시 많습니다. 이것은 징수할 대상이 없으므로 부득불 현재 살고 있는 토졸들에게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병사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계문하게 한 다음 특별히 탕감해 주어 조정에서 변방의 사졸에 대해 돌보아 주는 뜻을 보였으면 합니다.
도내에는 역역(驛役)이 가장 수월하므로 역리(驛吏)와 역졸의 보인이나 고공으로 투속한 양민과 역노비(驛奴婢)로 투속한 사천(私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에 현재 도내의 역안(驛案)으로 헤아려보면 그 숫자가 1만 8천 9백여 명인데 군안(軍案)으로 헤아려 보면 그 숫자가 겨우 1만 5천여 명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폐단은 모두 다 각 고을에 형지안(形止案)047) 이 없어서 본역(本驛)에서 임의대로 주관한 탓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모름지기 각 고을에 모두 역안(驛案)을 두어야만 이러한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고공과 보인에 이르러서도 모두 본 고을에 묻지 않고 역에서 마음대로 충정하여 갖가지로 술수를 뿌리니, 일의 체모에 있어서도 몹시 마땅치 않습니다. 대개 역인(驛人)의 고공과 보인은 입역(立役)한 지 몇년이 되면 호주(戶主)로 올리고는 도망하였다느니 죽었다느니 하면서 또다시 다른 사람을 보인이나 고공으로 정합니다.
그리고 한 차례 이방(吏房)을 지낸 역리는 역을 면제받고 집에서 지내면서 종신토록 한가롭게 지내는데, 이른바 이방이라 하는 것은 시임자(時任者)의 정원이 30명으로 되어 있는바, 이것은 실로 다른 역로(驛路)에는 없는 것이니, 법제를 만들어 금지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각역의 역리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정원수를 참작해 정하게 해 지나치게 많은 폐단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역리나 역졸에게 급복(給復)하는 규정은 실로 커다란 폐단이니, 모름지기 규례를 정해 매역마다 몇명이라고 정해 두어야만 합니다.
북병영(北兵營)을 창설할 때 정군(正軍)을 떼어주어 영중(營中)에서 입번(立番)하게 하고 혹 포목을 거두어 비용에 쓰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원래의 고사(故事)로 그 무리들이 병영에 영속(永屬)되어 이미 아졸(牙卒)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은 군역에 넣지 않고자 하여 병사에게 하소연하면서 본영에 소속시키도록 청하고 있으며, 병사 역시 포목을 거두어 비용에 쓰는 바탕으로 삼아 별도로 한 명목을 만들어 영한량(營閑良)이라고 하고는 각 고을로 하여금 군역에 충정시키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의 체모에 있어서 마땅치 않습니다. 이에 신이 현재 병사에게 분부하여 똑같이 군역에 충정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영에 소속된 군인 가운데 가난하거나 늙은 자가 있으면 병사가 어거지로 각 고을의 정군(正軍) 가운데 부유하고 건장한 자와 맞바꾸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더욱더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금지하도록 분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영(營)에서 분부하고 그만둔다면 반드시 영원토록 준행할 규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정에서 지휘해 주었으면 합니다.
도내에 목장(牧場)이 다섯 곳이 있는데, 말들이 제대로 번식하지 못하고, 민폐가 몹시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문천(文川)의 사눌도(四訥島), 영흥(永興)의 말응(末應), 단천(端川)의 두언(豆彦) 세 목장은 방목하기에 아주 좋으며, 또 말들이 살쪄 있으나 말 숫자가 매우 적고, 함흥(咸興)의 도련(都連)과 홍원(洪原)의 마랑(馬郞) 두 곳의 목장은 방목하기에 적당치 않은데도 오랫동안 변통하지 않았으니, 해당 시(寺)로 하여금 금번의 점마 별감(點馬別監)에게 실상을 물어본 다음 도련과 마랑 두 목장의 말을 말응과 사눌, 두언 세 목장에 나누어 방목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마정(馬政)에 있어서 아주 착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함경 감사 민정중이 폐단을 진달하면서 전후로 올린 장계에 대해 품정(稟定)하여 아뢰기를,
"조적의 모곡(耗穀)에 대해 민정중이 지금부터는 상평청에 속하게 하지 말고 관가에서 쓰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미 상평청에 속한 것을 옮겨 써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금년부터 병오년까지 3년 동안 상평청에서 모곡 거두는 것을 정지하고, 도내의 모곡 수효가 총 얼마이며 그 가운데에서 호조에서 관할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가 얼마인지를 안 다음, 도내 각 고을의 관수(官需)와 삼영(三營)에서 쓸 것을 이것으로 옮겨서 쓰게 하되, 본도에서 먼저 요리하여 계문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양전(量田)을 이미 함흥에서 먼저 시행하였는데, 북쪽 지방의 사세는 남쪽 지방과는 다르니, 일을 하는 처음에 십분 자세히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전할 때는 많이 얻기를 힘쓰지 말고 오로지 역(役)을 균등하게 하기를 힘써서 변방 백성들이 소요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고공과 솔정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말해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역시 갑자기 혁파하기는 곤란합니다. 전의 사목에 반드시 역의 고되고 수월함에 따라 수의 다소를 정한 것이 있을 것이니, 먼저 사목을 상고하여 정원 이외에 더 거느린 것을 먼저 없애고, 비록 당연히 보인과 솔정이 있어야 할 자라도 그들로 하여금 각자 거느리게 하여 위급할 때 뽑아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토노비(土奴婢)에 이르러서는, 성을 지키기에 합당한 노정(奴丁)에 대해서는 위급할 때 들어가 지키게 하는 규례가 있으니, 단지 예전 규례를 거듭 밝히는 것이 마땅하지 반드시 다 군오(軍伍)에 편입시킬필요는 없습니다.
조적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김수항(金壽恒)의 서계로 인하여 3분의 1로 정식을 삼았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고공과 솔정은 노비와는 다른데도 변방 백성들이 법에 목숨으로 보상해야 하는 규정이 없다고 여겨 혹 때려 죽이기까지 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범법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살인(殺人)에 대한 법으로 다스리되, 먼저 신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자식을 내다버리고 기르지 않는 것은 더욱 엄하게 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장계대로 3세 전에 거두어 기르는 자에 대해서는 자신에 한하여 노비가 되게 하되, 반드시 관청에 고하여 문서를 작성해 뒷날 상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민정중이 뒤에 올린 계문에서 진달한 크고 작은 관역(官役)에 모두 민결(民結)을 쓰는 일은, 장계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비록 군병을 침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일 및 변방의 방어에 관계되는 일에는 아울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병정(兵丁)의 보인을 사사로이 매매하는 일의 경우, 보인을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은 실로 법례(法例)가 아닙니다. 비단 보인뿐만 아니라 고공도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은 마땅치 않으니 엄하게 금지시켜야 합니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군역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역을 줄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매년의 군액(軍額)을 큰 고을은 1백 명, 중간 고을은 50명, 작은 고을은 20명으로 이미 한계를 정하였는데, 본도에 이르러서는 이미 김수항의 서계로 인하여 아울러 반으로 감하도록 하였으니, 지금 다시 감해서는 안 됩니다. 진보의 토졸(土卒)을 군오에 편입시키지 않는 일은, 본 고을의 군오를 감하여 본 진보에 전속시켜야 합니다. 각 진보의 토졸에 대해서는 감사가 병사와 더불어 상의하되, 먼저 관방(關防)이 긴급한지의 여부를 살펴보아야 하며, 모집해 들인 무리들에게는 신역(身役)을 감해주어야 합니다.
각 진보의 군기(軍器) 가운데 오래되었거나 쓸모없는 것은 모두 탕감하여야 합니다. 각 진보에 유치해 둔 군량 가운데 토졸이 받아먹고서 도망하거나 죽어 징수하기가 곤란한 것도 탕척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차례 이방(吏房)을 지낸 역졸은 종신토록 한가롭게 지내므로 이른바 이방이라고 하면서 현직에 있는 자가 몇 십 명이나 되는데, 이 일 역시 법조문을 엄하게 세워 일체 금하여야 합니다. 역리의 숫자를 정하는 일은, 본도의 사세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본도로 하여금 먼저 역리의 총수 및 각역에 꼭 남겨두어야 할 숫자를 파악하게 한 다음, 계문해 온 뒤에 처리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공조 판서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함흥의 도련포(都連浦)와 홍원의 마랑도(馬浪島) 목장을 지금 단천과 영흥·문천으로 옮겨 설치하려 한다고 합니다. 신이 두 번째로 남병사(南兵使)가 되었을 때 이 포(浦)에서 좋은 말이 많이 나온다고 들었으니, 혁파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수항의 상소에서 북병사를 문신(文臣)으로 차출하여 보내기를 청하였는데, 현재 천재(天災)가 심하고 변방의 걱정거리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연달아서 문신을 차출하여 보낼 경우에는 무비(武備)가 소홀해질 걱정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병사는 문신과 무신을 교대로 차임하여야 한다."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김수항의 상소에서 진달한 무사를 시재(試才)하여 급제를 하사하거나 변장으로 차임하는 일은, 감사로 하여금 북변(北邊)을 순시할 때 병사와 회동하여 시취(試取)하게 해 난잡한 폐단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사변(徙邊)하는 죄인을 모두 북로(北路)로 보내어 변방을 채우려는 뜻을 보존하는 일은, 해조로 하여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드러나게 절행(節行)이 있는 자도 해조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포상하게 해야 합니다.
내 노비(內奴婢)가 신공으로 내는 세포(細布)는 이미 해조에서 변통하게 하였습니다. 대신이 북쪽 변방의 일을 주관하는 일은, 이에 의거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경기 어사 여성제(呂聖齊)와 신후재(申厚載)의 서계 중에 연호(烟戶)의 폐단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는데, 변통하여야만 할 듯합니다."
하고,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동법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원망하기도 하고 편하게도 여기는데, 연호의 역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모두 몹시 괴롭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에 물어서 편의에 따라 변통하라."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의 궁인(宮人)으로 뽑힌 자를 지난번에 영상이 아룀으로 인하여 내보냈으니, 이는 참으로 성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의 아비 최우(崔𦸲)가 수금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두 차례나 형신을 받았습니다. 듣건대, 최우의 딸이 시집을 가지는 않았으나 이미 폐백을 받았으므로 대신이 들은 대로 진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를 이유로 잡아다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대신의 불안함이 어떠하겠으며, 또한 어찌 성덕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하문할 때 그 아비가 시집가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는데, 뒤에 시집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하여, 앞뒤의 말이 서로 달랐으므로 내가 엄하게 다스리려 한 것이다. 어찌 대신의 말 때문에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하였다. 홍명하가 또 대신이 불안해 하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뒤에 끝내 세 차례나 엄하게 형신하고 원지(遠地)에 유배보내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6년 1665년 2월 (0) | 2025.12.04 |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6년 1665년 1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5년 1664년 11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10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1권, 현종 5년 1664년 9월 (0) | 202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