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무오
흰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우의정 허적이 네 번째 정사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2월 2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약방 제조 박장원(朴長遠)·박세모(朴世模) 등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눈병이 전보다 더욱 심하다. 눈을 치료하는 방법은 반드시 안정을 취한 뒤에 치료가 가능한 것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하므로 신속한 효험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하니, 박세모가 아뢰기를,
"요즘 잠자리가 편치 못하시고 정무 때문에 밤을 지새곤 하시니 어찌 병환이 악화될 염려가 없겠습니까. 신이 어제 합문 밖에 도착하여 비로소 일관(日官)이 일변(日變)에 관하여 주달한 것을 알고 즉시 들어가서 소회를 진달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 삼공(三公)과 육경(六卿)을 모두 불러서 재변을 해소시킬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성상의 눈병이 그러하셔서 일을 진행하기에 방해로울 듯하므로 감히 청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마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기가 고통스러워 인접할 수가 없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새로 하늘의 이변을 만났으니, 풍악을 울리면서 하례받는 것은 마음에 편치 못한 바가 있다. 그러니 모레 탄일(誕日)에 하례받는 일을 우선 임시로 정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시수(吳始壽)를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헌납으로,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우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이무를 석방시켜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경은 오늘날의 국세가 어떠한 때라고 여기는가? 천재와 시변이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뜻하지 않게도 음사한 무지개가 태양을 침범하니 걱정스러운 마음을 형언키 어렵다. 이 어찌 대신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이겠는가. 더구나 경은 선왕(先王)의 은혜를 받은 것이 얼마인가. 비록 간사한 자의 망령스러운 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소인배의 행위에 불과할 뿐인데 경이 어찌 들어가 국사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 이무의 말은 참으로 흉악하다고 할 만하니, 오늘날의 처치는 비단 오늘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뒷날의 무궁한 폐단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대신의 차자에 대해서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대개 지금 만약 느슨하게 다스리면 이 뒤로는 직무에 전념할 대신이 없을까 해서였다. 뒤 폐단으로 논한다면 내린 명령을 고칠 수 없으나 지금 경이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내 마땅히 경의 속마음을 헤아려 그의 죄를 조금 감하겠다. 경도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국가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속히 나와서 치도를 논해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고, 이어서 이무의 죄명을 감하여 삭출하라고만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하늘의 견책이 갈수록 심하여, 음사한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또 2월 초에 일어났습니다. 화의 기미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듯하여 인심은 날이 갈수록 의구에 차고, 국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위태롭습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입니다. 속히 신들을 면직시키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소서."
하고, 이어 이무의 죄에 대해 먼 변방에 유배까지 시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게 여긴다고 진달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경들이 무슨 잘못한 바가 있겠는가. 다만 수성할 책임이 이미 나에게 있고 보면 서로 협력하는 도리를 경들은 마땅히 스스로 힘써, 부박한 논의에 흔들리지 말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세의 습속을 참으로 변혁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경들에게 위임하고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경들은 여러 사람의 원망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이다. 아, 우상이 인혐하고 들어간 지가 이미 30일이 되어 가는데 조정의 분열은 아직까지도 진정되지 않고 있으니 한밤 중에 잠 못 이루고 나도 모르게 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한다. 경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직하지 말아서 더욱더 덕을 닦기를 힘써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이무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우상에게 내린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이때 경기 지방에 잇따라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나자, 감사 김수홍이 장계하기를,
"토포사가 치우친 곳에 처해 있어 형세상 금하여 체포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원(水原)·장단(長湍)·양주(楊州)·죽산(竹山)·파주(坡州)·통진(通津)·남양(南陽)과 같은 고을에서 혹 방어사를 겸임하거나 영장(營將)을 겸임해왔으니 지금부터 정식으로 만들어 방어사나 영장을 겸임한 수령으로 하여금 책략을 세워 모조리 체포하게 하되, 토포사가 총괄해 살피면서 신칙하게 한다면, 일이 짜임새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장계대로 시행하되, 감사로 하여금 일에 따라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3일 경신
상이 침을 맞았다.
부응교 김만기(金萬基) 등이 상차하기를,
"요즘 성상께서 지나치게 노여워하시어 거조가 중도(中道)를 잃었고, 견책을 잇따라 내리시어 백성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삼가 보건대 성상의 생각도 범연한 것이 아니라 대신을 위안시키고 붕당(朋黨)을 타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그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셔서 대신은 더욱 스스로 편치 못하고 붕당도 타파할 때가 없을 듯합니다.
우리 선조조에 논핵을 받은 대신이 매우 많았으며 인조조에 유백증(兪伯曾) 외 여러 사람이 상소하여 상신 김류(金瑬)를 배척하면서 간사한 소인에 비유하기도 하였으니 그들의 망령스럽고 참람한 것으로 보면 마땅히 죄를 주었어야 할 터인데 인조(仁祖)께서는 심한 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두 임금같이 성스러운 분들이 혹시라도 재상을 맡기는 데 있어서 의심을 했겠습니까. 이는 실로 국가의 체재와 언로를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이번에 이무의 상소가 비록 몹시 경솔하다고는 하나 신들이 생각하기에 성상께서 마땅히 두 임금이 처리했던 것처럼 처리하고 대신도 마땅히 자산(子産)이 향교를 헐지 않았고 장완(蔣琬)이 스스로 산란하다고 한 것으로 법을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성조의 언로로 하여금 이로 인하여 기구하게 만든다면 어찌 대신이 편케 여길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붕당을 혁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공명(公明)을 다하고 기강(紀綱)을 세워 군자와 소인의 실정으로 하여금 성상의 살피심 아래 도망할 수 없게 하는 데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 만일 그들이 지목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단정해버린다면 설사 그 실정을 얻었다 하더라도 억측으로 맞추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며 사람들은 필시 상의 마음을 엿보아 얼굴을 바꾸고 꾸며가며 사정을 구제하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송시철 등에게 이미 대신의 말을 인하여 벌을 감해 주셨으니 어느 누가 성상께서 들어 주신 성대한 마음을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삭탈 관작하고 파출한 율이 언로(言路)를 봐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무의 경우도 오히려 거친 변방에 보내는 형전(刑典)을 적용했다는 평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삼가 성상의 흔적 없이 허물을 고치는 정도가 오히려 백성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위로해 주지 못한 듯하여 염려됩니다.
또 김석주의 상소 내용에는 사정에 치우친 내용이 보이지 않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피차의 사정을 두었다고 의심하시고 갑자기 파직 체차하라고 하시니 상하의 정분이 미덥지 못하다보니 말 한마디만 하여도 전하의 의심을 불러일으켜 당(黨)을 비호한다는 죄에 빠지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떨며 감히 사실대로 진달하지 못합니다.
이준구 등을 서용하지 말라는 명에 대해서도 정원이 감히 복역하여 한편으로는 성상의 전지를 받들고 한편으로는 소회를 진달하지 못하여 대신으로부터 면전에서 바로잡지 못한 실책에 대해 추궁을 받고도 끝내 잠자코 있을 뿐이었으니 언로가 완전히 막혀서 통하지 않고 의지를 상실하게 하여 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지금 천재가 겹치고 흉년이 계속됨에 따라 도적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며, 현상으로 나타난 환란과 손쓸 수 없는 재해가 날이 갈수록 긴박하다는 것을 모든 백성이 다 아는 사실인데, 조정에서는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한 가지 선정(善政)을 이행하여 하늘과 백성들에게 보답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고 말 한 마디로 죄를 받은 자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오직 그 말을 어기지 말라.’고 한 데 대한 성인의 경계를 유독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우려하는 마음이 절실하였는데 지금 상소 끝에 진달한 내용을 보니 말 뜻이 자못 간절하다. 마음속 깊이 새겨두도록 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박세모 등이 옥당으로부터 침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2월 4일 신유
공산현(公山縣)에 지진이 발생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고 집들이 모두 흔들렸다. 은진 등지의 고을에도 지진이 발생하였다.
양사가, 송시철·권격·어진익 등에게 내린 삭직하라는 명과 이정·이준구·박세성 등에게 내린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5일 임술
대사간 이경억, 정언 정재희가 아뢰기를,
"시비를 가릴 때에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견해가 있는 법입니다. 김석주가 처치에 대해서 이론을 제시한 것은 소견이 마침 그러한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사실을 진술한 글에 이쪽 저쪽을 가르는 형적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갑자기 파척하였으니, 이 어찌 지나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김석주를 파직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서천(舒川)에서 군사를 동원한 일은 당초에 겸관(兼官)의 보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것을 보니, 승도들이 모여 변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사실이 없었습니다. 과장하여 동요시킨 말이 본 고을의 향소(鄕所)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그릇되게 상사(上司)에 보고한 죄에 대해서는 겸관으로 있는 자만 유독 면할 수 없습니다. 한산 군수 신숭구(申嵩耉)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신숭구는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본조 좌랑 홍만용의 하리 문제(下理問題)에 대하여 상소하기를,
"전조(銓曹)가 주의할 즈음에 진실로 공론(公論)에 흡족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면 낭관이 지난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당상이 억지로 비의할 수 없는 것이 유래되는 체례입니다. 대체로 전관(銓官)이라 하여 반드시 다 훌륭한 것은 아니며 그들이 주의한 것도 반드시 다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당상관이 주의한 것을 낭관이 어찌 감히 저지한단 말인가.’ 하면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한다면 낭관을 두어 참좌(參佐)하게 하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연소한 신진이 설령 과격한 행위를 하였더라도 그의 본정을 따져보면 단지 고례(古例)를 보존하고 공의(公議)를 따르기 위한 것인데 지금 만일 지나치게 의심하여 심한 죄를 준다면 일개 낭관이 견책을 받는 것이야 비록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더라도 다른 날 무궁한 폐단이 되는 것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에 김소(金素)를 승지에 다시 비의한 자는 신인데 물의가 이미 이 일로 말미암아 발생하였고, 간통(簡通)을 왕복할 즈음에 낭관의 의견을 억지로 저지할 것이 없다고 한 자도 신이었는데 낭관의 쟁집이 이 일로 말미암아 일어났으니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죄가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속히 신의 관직부터 전출시키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2월 6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강호(姜鎬)·이동명(李東溟)을 장령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응교로, 홍전(洪瑑)을 우윤으로 삼고, 김우석(金禹錫)을 발탁해서 동부승지로 삼았다.
충청 감사 김시진이 상소하기를,
"신이 근래 본도의 산군에서 대동미를 베로 환산하는 일로 진달하였다가 묘당의 논의에 배척을 받았는데, 이른바 ‘호서의 수미 수량을 반드시 호남에서 13두로 하는 것처럼 한 연후에 의논하여 처리할 수 있다.’고 한 말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호남은 당초에 13두로 정식을 삼았으므로 포 1필당 절미(折米)는 6두 5승이고, 호서는 10두로 정식을 삼았으므로 포 1필당 절미는 5두입니다. 이것이 당초에 가격을 환산하였던 정수입니다. 그 뒤에 호남은 절미 1두를 더 주었는데도 백성들이 포목을 무역하기 어렵게 여기고 본도에서 민간의 폐해에 대해 아뢰자 또 5승을 더해주었으니, 이것은 호남의 베값이 당초에 정한 것에 10분의 2를 더해 준 것에다가 또 2승을 더해 준 것입니다. 호서에서도 포목을 무역하기 어려움이 호남과 다름없는데도 가격을 환산한 숫자는 더해 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청한 것은 본래의 숫자에다 10분의 2를 더해 주어 6두로 가격을 환산해 주기를 바란 데 불과할 뿐입니다. 애당초 어찌 호남에 준하여 8두로 환산해 주기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신이 올린 이 상소를 다시 비국에 내려서 충분히 강구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호서에 대동법을 마련할 당시에 본도의 일 년 비용의 적정량을 계산하여 1결에 해당하는 수미를 10두로 결정했던 것인데, 지금 만일 베 1필 값에다 1두를 가산하게 되면 1결에 거두어들이는 수를 9두로 줄여야 하니, 경외의 비용이 필시 부족할 것입니다. 상소의 내용을 시행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장계하기를,
"일찍이 어사 민유중의 장계로 인하여 이동(梨洞)과 종포(從浦)를 합해 한 진(鎭)으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편리 여부를 두 진에 물으니, 이동은 토질이 척박하기 때문에 종포의 토병이 옮기는 것을 원치 않으며, 이동 역시 다른 보에 속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형세상 합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백성들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백성들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지금은 우선 전대로 진을 두되, 이동은 상사(上司)에서 분정(分定)한 물품을 특별히 정파하여 별도로 완호(完護)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7일 갑자
상이 희정당에서 침을 맞았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가 재이(災異)를 이유로 면직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재변을 만난 처음에는 성상께서 마음을 가다듬으셨으나 날짜가 오래됨에 미쳐서는 점점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이 마음을 보존하여 끝까지 가기가 실로 어려우나 상께서 다시금 면려하시어 조금도 해이되지 않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처음에 잘하려 들지 않는 자가 없으나 끝까지 잘 해내는 자는 드물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참으로 그렇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수항의 서계 중에 북병사(北兵使)를 문관으로 차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품의하여 정할 때 상께서 연신에게 하문하시고 문신과 무신을 교대로 차임하도록 하셨습니다마는 김수항의 말이 이와 같으니 문신을 차임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순변사(巡邊使)라 칭해야 하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반드시 그렇게 한 다음에야 감사에게 제압을 받지 않고 탄압에 대한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렇게 인재가 부족할 때 적합한 사람을 찾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소 중에 성진(城津) 행영(行營)을 설치하는 일도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행영은 옮겨 설치할 수 있으나 북병사를 문신으로 차임해 보내는 것은 시행하기가 곤란하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반드시 옮겨 설치할 것은 없고 감사로 하여금 길주(吉州)에 가서 있게 하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을이 지난 뒤에 가서 있게 하되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의 실정을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유혁연(柳赫然)이 무인이 부족하다고 극력 진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과거를 베푼다면 무재인(武才人)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거조는 비록 하찮은 일에 관계된 것이라도 재빨리 고친다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볼 것입니다. 지난번에 영상이 최우(崔𦸲)에 대한 일을 진달하였는데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신과 우상이 반복해서 진달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최우가 형신을 받고서 끝내 정배(定配)되었는데, 최우의 딸은 다시 궁중에 들이도록 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아비가 죄를 받았는데 그 딸을 도로 들였으니, 어찌 성스러운 덕에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로 인해서가 아니라 사세상 껄끄러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나인의 일로 외간에 말이 많습니다. 신의 한 마디 말로 인해서 모두 과중한 죄를 받고 그 딸은 도로 들이도록 명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불안함은 말할 것이 없겠으나 성스러운 덕에 얼마나 누가 되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들은 바가 있더라도 신이 무슨 얼굴로 다시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용히 여쭈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정언 윤변이 전에 홍양(洪陽)의 관적(官糴)을 맡고 있었던 일로 현재 조사받고 있다고 하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우의정 허적이 다섯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2월 8일 을축
이홍연(李弘淵)을 좌승지로, 이성징(李星徵)을 동부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를 인견하였다. 판의금 홍중보가 죄인에 대한 문서를 가지고 차례로 읽자, 상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죄를 정하였다. 마치고 나서 홍중보가 또 홍만용의 공사에 대해 진달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들 역시 일찍이 전조의 낭관으로 있었는데, 이조의 규례는 예전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대개 이조의 낭관은 다른 관서와는 달리 반드시 가부를 논의하므로 주의할 즈음에 낭관의 뜻이 맞지 않으면 반드시 쟁집하고야 맙니다. 홍만용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간 것이 참으로 온당치 않기는 하나, 이상진(李尙眞)이 끝까지 듣지 않은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하였다. 홍중보가 또 이익한(李翊漢)과 양일한(楊逸漢)의 공사에 대해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이익한과 양일한은 죄가 같은데 형신하기를 똑같이 청하지 않으니, 내 참으로 이상하게 여긴다. 이익한도 형추하여 사실을 캐내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상진이 전에 경상 감사로 있을 때 상소하여 어사를 파견하여 주사(舟師)를 순시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즈음 암행 어사를 뽑는 일이 있는데, 겸하여 순시하게 한다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어사를 보내고자 하니 합당한 사람을 다시 뽑아 들이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시(庭試)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방의 초시도 설행할 것인가? 이미 무과를 베풀었으니 문과도 함께 베풀어야 한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무과 초시의 인원수는 1천 명을 서울과 외방에 나누어 배정하되 반드시 강경(講經) 시험을 본 다음에야 인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조 판서 이상진이 상소하기를,
"삼가 장관(長官)의 상소와 낭관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일을 그르친 잘못을 모두 신에게 돌렸으니, 신은 참으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소(金素)는 인조조에 재주가 있다고 발탁되어 크고 번잡한 고을의 방백과 곤수(閫帥)를 두루 거쳤으며, 승지가 된 것도 30년 가까이 됩니다. 신이 처음에 정원에서 그와 함께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보니 질박하고 꾸밈이 없어 마음 속으로 그의 장점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그의 집이 몹시 가난하다고 듣고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겼으며, 그가 판결사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잘 처리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신은 생각하기를 ‘예전의 비방은 이미 밝히기 어렵게 되었고 직책에 알맞은다는 명망이 새롭게 드러난 셈이다. 지금같이 인재가 부족한 때 사람을 쓰는 도리에 있어서 지나치게 국한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대정(大政) 때 신이 다시 통망(通望)하자는 논의를 먼저 꺼냈는데, 물의가 준엄하게 일어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낭관이 쟁집한 것은 원래 통망하느냐 막느냐 하는 중대한 일에 관계되고 신이 고집한 것은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조용히 의논해 처리하되 언제 처리해도 무방합니다. 신의 망령된 잘못으로 인하여 예전 규례를 보전해 공의를 따르지 못하여 정사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뒤 폐단을 열어놓았으니, 속히 신의 직을 파하여 주소서."
하였다. 참의 이경휘(李慶徽)도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직무를 보라."
하였다.
2월 9일 병인
대신이 이익상(李翊相)·오두인(吳斗寅)·조성보(趙聖輔)·이규령(李奎齡)·심재(沈梓) 등이 어사로 합당하다고 뽑아 들였다.
상이 침을 맞았다.
2월 10일 정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양사가 전계(前啓)한 송시철·이준구·이정·김석주에 대한 일을 정계하였다.
충청도에 여역이 몹시 심하였다.
2월 11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강유(姜瑜)를 좌부승지, 심황(沈榥)을 동부승지로, 이시술(李時術)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2월 12일 기사
상이 침을 맞았다.
병조가 정시(庭試)의 무과 초시에 대해 계청하자, 3월 11일로 날짜를 정해 행하되, 1천 명의 정원을 서울과 외방에 나누어 배정하라고 분부하였다. 얼마 후에 1천 명은 적다는 이유로 양호(兩湖)는 각각 2백 인을 뽑고, 경상도는 2백 40인을 뽑고, 양서(兩西)는 각각 1백 인을 뽑고, 강원도와 함경도는 각각 80인을 뽑으며 서울은 경기와 합하여 5백 인을 뽑으라고 하였다.
한산 군수(韓山郡守) 신숭구(申嵩耉)를 파직하였는데, 간원이 누차 아뢰자, 이때에 이르러 따랐다.
2월 13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이준한(李俊漢)을 경상 우병사로, 김만기(金萬基)를 사인으로, 장선징(張善澂)을 부수찬으로 삼고, 민유중(閔維重)을 탁배하여 전라 감사로 삼았다.
2월 14일 신미
상이 침을 맞았다.
우의정 허적이 11번째 정사하니,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전라 감사 정만화의 장계로 인하여 낙안(樂安)·곡성(谷城) 두 고을도 순천 등 다섯 고을의 예에 따라 수령의 임기를 3년으로 줄이도록 하였는데 풍토병 때문이었다.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치계하기를,
"해주(海州) 기병과 보병 및 사복 제원(司僕諸員)의 전해 내려온 묵은 포목이 모두 45동(同) 남짓한데, 지정하여 받아들일 곳이 없어 해마다 불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모두 탕감하고, 충정(充定)하지 못한 것은 비국에서 정한 바에 따라 매년 60명씩 충정한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숫자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사안을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장계의 내용대로 탕감하고 빠진 액수는 3년을 기한으로 하여 충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5일 임신
상이 다리의 습창 때문에 침을 맞은 후에 뜸을 떴다.
2월 16일 계유
상이 침을 맞았다.
2월 17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2월 18일 을해
상이 침을 맞았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병조 참판 유혁연을 인견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차왜(差倭)가 공무목(公貿木)에 대한 일로 아직도 가지 않고 있으므로 속히 품의해 정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의 뜻은 허락하려는 것인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미(作米)를 2두를 줄인다면 햇수를 한정하지 않을 것이고 2두를 줄이지 않는다면 햇수를 한정하여 허락하겠다는 뜻으로 말한다면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2두는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가 만약 1두를 줄이는 것을 허락하면 우리도 햇수를 한정하여 주고, 2두를 줄이는 것을 허락하면 햇수를 한정하지 않고 주고, 줄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도 작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등의 세 가지 조항을 가지고 동래 부사를 시켜 개유하게 하되 동래 부사에게 다른 소견이 있으면 다시 치계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공작미(公作米)를 허락하지 않으면 그가 반드시 공목(公木)을 복구하자는 말을 할 것인데, 공목을 복구하면 몹시 곤란합니다. 그가 우리 나라의 시가(市價)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1년에 1만 6천석이나 되는 쌀을 배에 싣고 가게 하니 사체가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당초에 왜 이렇게 길을 틔워놓았는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심(柳淰)이 있을 때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하니, 승지 이성징(李星徵)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그 때 왜인이 2만 금(金)을 가지고 와서 쌀을 무역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부득이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그대로 포목으로 쌀을 무역하도록 한 것이 드디어 규례가 되었는데, 해읍(海邑)은 편하게 여기나 육읍(陸邑)은 몹시 고달프게 여깁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요즈음 사람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대사성을 오랫동안 차출하지 못해 성균관이 비어 있으니,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정사에서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이일상을 좌참찬으로, 이민서를 부교리로, 이상일을 호조 참의로, 정치화를 예조 판서로, 남용익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2월 19일 병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헌납 남이성이 추함을 마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20일 정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같은 별이 동쪽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성주(星州)의 아전 장원일(張元一)을 효시하였다. 장원일이 일찍이 군포(軍布)를 훔쳐냈다는 이유로 길주(吉州)에 전가 정배(全家定配)되었는데 그가 배소로 가지 않고 서울에 숨어 있자, 형조에서 그를 체포하여 엄하게 형신한 후에 효시하였다. 성주 목사 이동로(李東老)가 이에 연루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2월 21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우석(金禹錫)을 동부승지로, 정륜(鄭輪)을 헌납으로, 남이성(南二星)을 교리로, 신유(申濡)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관상감의 관원을 옥에 내렸다가 곤장을 친 다음 그대로 직임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혜성이 다시 나타난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일관(日官)이 즉시 정원에 알리지 않았다. 이에 정원이 추고하기를 계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성신(星辰)을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중대하다. 그런데 지금 관상감의 측후관이 직무를 제대로 거행하지 않아, 요성(妖星)이 또다시 나타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즉시 측후하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계문하니, 태만하여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꼴이 참으로 놀랍다. 오늘 입직한 관상감 관원을 모두 다 유사로 하여금 가두고서 엄하게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가, 곧바로 관상감에 측후할 관원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다 곤장을 치고 그대로 전과 같이 직무를 보게 한 것이다.
유성이 자미 서원 안에서 나왔다. 혜성이 위수(危宿) 3도에서 출현하였는데 꼬리의 길이가 5, 6척 쯤 되었다.
우의정 허적이 18번째 정사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하늘의 노여움이 갈수록 심해져 재변이 더욱 혹독해지니, 나의 걱정스런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금 같은 때를 당해서는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더라도 위태로움을 구제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점을 생각지 않고 한결같이 인피하여 들어가기만 하니, 경은 국사를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닌가? 속히 정사하는 것을 중지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지평 이백린이 상소하기를,
"전 충청 감사 이익한(李翊漢)이 발군(發軍)에 관한 일 때문에 형추를 받기까지 한 것은 신하를 예로 대우하는 도리에 흠이 됩니다.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기를,
"요즈음 재변이 겹쳐 나타나 혜성이 하늘에 떠있다가 해를 넘기고 사라졌으니, 전하를 아끼는 하늘이 전하께 경계를 보임이 가이없습니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수를 줄였으며, 구언(求言)하는 전지를 내리셨으니, 전하께서 허물을 듣고자 하심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감언(敢言)하는 길이 막히고 강직한 기풍이 꺾여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무엇을 통해 허물을 듣고 전하를 경계하는 하늘에 답하겠습니까. 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스스로 생각해 보니, 현재 감언하는 길이 막히고 강직한 기풍이 사라진 것은,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귀양간 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신하가 진언하는 경우에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뜻을 거스르는 것을 피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자는 망령든 사람이 아니라 이는 반드시 과감한 선비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말을 들어주는 경우에 지나친 말을 하여도 노여워하지 않고 광망스러워도 죄주지 않으면서 반드시 관대하게 대해주고 포용해 주는 것은, 강직한 기풍을 배양해 바른 말을 하는 길을 열어주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옛 성인들이 사람 때문에는 말을 폐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신이 삼가 윤선도가 예에 대해 논한 상소를 보건대, 그 생각과 말은 참으로 지나친 것이 많았으니, 윤선도는 참으로 망령되이 말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다 옳다고 하는 예제(禮制)를 윤선도 혼자 그르다고 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떠받드는 유현(儒賢)을 윤선도 혼자 그르다고 하였으니, 광망스러운 것은 죄주어야 하나, 감히 말한 것은 용서해야 합니다. 예전에 연 소왕(燕昭王)이 죽은 말을 사들이자 호걸스런 선비들이 다투어 모여들었으며, 월왕 구천(句踐)이 사마귀에게 절하자 절의있는 선비들이 죽음을 다투었습니다. 물(物)은 서로 감통하는 법이며 일은 서로 맞아들어 가는 법으로, 이로 인하여 저것을 감동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윤선도가 상소를 올리던 날 전하께서 이 점에 생각이 미치시어 윤선도가 망언한 죄를 특별히 용서하여 곧은 선비가 감언하는 길을 열었다면, 또한 일개 윤선도의 망언한 죄가 용서됨으로 인하여 날카롭고도 올바른 말이 지금 이 구언하는 날에 다투어 나왔을 줄도 모를 일입니다. 윤선도가 한번 북쪽 변방으로 귀양간 뒤에는 감언하는 선비들이 서로 다투어 입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록 하늘이 재변을 내려 경계를 보임에 성상께서 구언함이 간절하나, 한 사람도 거리낌없이 감언하여 전하로 하여금 허물을 듣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개 망언한 윤선도를 내쳤다가 감언하는 길을 막은 것이 애석합니다.
신이 듣건대, 윤선도는 나이가 80이 넘었다고 합니다. 흰머리의 얼마남지 않은 목숨이 풍상에 시달리고 인적이 끊어진 곳에 오랫동안 귀양가 6년이나 위리 안치되어 있으니, 얼마 안 있어 죽을 것입니다. 가령 윤선도로 하여금 끝내 변방에서 죽게 한다면, 망언하였다가 변방에서 죽은 것이 윤선도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마땅하나, 윤선도로 인해서 언로가 막히는 것을 신은 전하를 위하여 두렵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윤선도를 방환시키도록 명하여 오늘날 입다물고 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윤선도가 반드시 죽어야 할 죄를 짓고서도 방환되는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다투어 전하 앞에 와서 곧은 말을 아뢰어 전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게 하소서. 그러면 전하의 허물을 듣고서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2월 22일 기묘
이때 혜성이 다시 나타났다. 영관상감사 정태화가 아뢰기를,
"혜성을 측후하는 것을 본감의 관원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전례대로 남이성·여성제·심재·윤심을 측후관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원이, 요성(妖星)이 겨우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유로 진계(進戒)하기를,
"하늘에 응답함에 있어서는 실제로 해야 하고 형식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한갓 형식만을 일삼고 실제가 없으면서 재변을 돌이켜 상서로 만든 경우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능히 덕을 닦기를 힘쓰고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며, 하늘을 섬김에 경외하는 도리를 다하고 자신을 책함에 수성(修省)하는 실제를 다하며, 신료를 대함에 있어서 미더웁게 교제하는 실제를 다하고 언로를 넓힘에 있어서 마음 비우고 받아들이는 실제를 다하며, 백성의 고통을 돌보되 어루만져 주는 실제를 다하고 정령(政令)을 펴되 진작시키는 실제를 다하소서. 그리하여 한 생각 한 가지 일이라도 모두 성실에서 나오게 한다면 아래에서 인사(人事)를 다하여 위로 하늘의 뜻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무에 부지런하시어 조금도 나태하게 하지 말아, 국운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기원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은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떨리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금 계사를 보니 말뜻이 정성스럽고도 간절하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상이 성변(星變)으로 인하여 하교하였다.
"나의 부덕함으로 재위한 지 6년 사이에 수재와 한재가 잇따르고 변괴가 겹쳐서 한 해도 백성들이 생업에 즐거움을 누린 때가 없었고 국가에는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형세만 있었다. 지난 겨울 발생한 풍뢰(風雷)의 변과 올 봄에 나타난 무지개의 변이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하였는데, 또 오늘날 요사스런 별이 다시 나타나는 변이 발생하였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조용히 생각할수록 걱정과 두려움에 낯이 뜨거워 진실로 다시 백성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 경계하는 마음을 더하겠으니 찬선(饌膳)을 줄이고 풍악을 거두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혜성이 동쪽의 탁한 기운 안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2월 23일 경진
우창적(禹昌績)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가 재변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사면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에 대하여 모름지기 상하가 강구하여 그 방도를 다한 다음에야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산강(龍山江) 물이 단류(斷流)되었다고 하니, 더욱 놀랍습니다. 지난날 혜성이 처음 나타났을 때에는 상하가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오래 지난 뒤에는 점차 해이해졌습니다. 이제 만약 전의 습관을 답습한다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른바 수성(修省)이란 것은 정령을 베푸는 사이에서 구하여 새롭게 고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며 이는 한갓 수성한다는 이름만 있고 그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승지와 대간이 쟁집한 이무의 일에 대해서는 어찌 비호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꺾기는 너무 지나치게 하시면서 오히려 거두어 서용하기를 아끼시니 아무래도 대성인의 서용하는 도리에 흠이 될 것만 같습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이것은 규례에 따라 일을 논의한 것에 불과한데 점점 확대시켜 너무 심하게 꺾으셨습니다마는 오늘날에 와서 수용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정(私情)을 따르고 같은 무리와 당(黨)을 하는 죄는 실로 단단히 징계해야 하는데 참작하여 말감(末減)해 주고 죄는 파직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지금 어찌 갑자기 수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그전부터 재변을 만날 때면 의례적으로 심리하는 거조가 있었는데 이 일이 어떠한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사람이 원한을 사게 되면 재해를 부르기에 충분하므로 그 실정을 살펴서 원통함이 있을 경우 반드시 풀어준다면 재해를 이완시키는 데 일조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심리한 문서를 속히 수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외방(外方)에도 필시 해결하지 못한 의옥(疑獄)이 있을 것이니 문서를 초록하여 보내게 하여 일체로 심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속히 판결하여 계문하게 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회양(淮陽)은 철령(鐵嶺)의 관방(關防)인데 남한산성에 통속되어 있습니다. 설령 사변이 발생하더라도 멀리 떨어진 본진에 도착하려면 5, 6일이 걸리므로 형세상 반드시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회양을 별도의 한 진(鎭)으로 만들어 금성(金城)의 군병을 통솔하게 해서 철령을 방어하게 하고, 철원은 남한산성과 가까우니 철원의 겸영장을 남한산성에 통속시키게 한다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대신(臺臣)의 문제를 두 재상이 애써 청했는데도 끝내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이렇듯 대신(大臣)의 말도 오히려 흔쾌히 따르지 않으시는데 어찌 수성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겠으며, 이미 대신(大臣)의 말을 믿지 않으시는데 대신(臺臣)이 감히 한 마디 말로 성상께서 깨닫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로 인하여 언로가 열리기만 한다면 탈고신과 파직을 환수하는 것을 내가 어찌 아끼겠는가. 대신과 간신의 말이 이러하니, 송시철·어진익·권격·박세성·이준구·이정·김석주 등을 모두 서용하라."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하늘의 변고가 백성들이 원망하는 데서 생기는데 현재 백성들의 원망이 몹시 심합니다. 양주(楊州)에서 양전(量田)한 한 가지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초에 양주의 양전이 유독 무거웠으므로 옥당이 다시 양전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이 내린 후에 해조에서 원수(元數)를 줄이지 않고 그 가운데서 이리저리 옮겨붙여 균등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원수(元數)를 줄이지 않으면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조에서는 도리어 ‘백성들이 처음에는 다시 양전하기를 청하였으나 지금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회계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본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이런 불신받을 일을 하였으니, 원수를 정하지 말고 모두 다시 양전하여 원통해 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에 여역이 몹시 성하였다.
2월 24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실수(室宿) 6도로 옮겨갔다.
2월 25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금부·형조 당상, 삼사의 관원을 양심합에서 인견하여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였다. 판의금 홍중보(洪重普)가 죄인의 추안(推案)을 읽어 이익한(李翊漢)·양일한(楊逸漢)의 일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이 율이 어떠한가?"
하니, 홍중보가 아뢰기를,
"《대명률》에, 초적(草賊)이 일어났는데 보고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킨 자는 장 1백(杖一百)에 변원 충군(邊遠充軍)한다고 했습니다."
하고,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호서 사람들은 모두 ‘일개 승변(僧變)으로 인하여 감사가 잡혀갔으니, 조정의 처분이 전도되었다.’고 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이 때문에 충군된다면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 이익한은 감사로 있으면서 온 도를 전제(專制)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발군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받는다면 뒷날에 혹시라도 사변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감히 발군하지 않을 것입니다. 뒤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시라도 사변이 있을 경우에는 먼저 발군하고 뒤에 아뢰는 것이 옳다. 이익한의 경우는 끝내 계문하지 않아 병사가 치계한 다음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들었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하고, 모두 율문대로 변원 충군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익한 등에 관한 일은 참으로 이경억이 말한 바와 같이 뒤 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배(定配)로 고치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외방에 정배한 죄인의 추안을 아뢰자, 감등(減等)한 자가 4인이었고 석방된 자가 46인이었다. 또 윤선도의 일에 대해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윤선도는 상소 안의 말이 몹시 흉악하니 우선 놔두고 논하지 말라. 선조에서 사부로써 예우함이 몹시 융성하였으며, 또 나이도 70이 넘었는데, 변방에서 죽게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선도가 예에 대해 의논한 상소에서 신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으나 신 역시 공격받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다만 신이 매번 동료와 서로 말하면서 ‘윤선도가 비록 죄가 있으나 북쪽 변방에서 죽게 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일이다.’고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오늘날 달리 의논드리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윤선도는 예론(禮論)을 가탁해 마음대로 흉언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종통설(宗統說)로 유현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참작하여 죄를 감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얼마 전에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여 떠보는 것처럼 하였는데, 갑자기 이런 처치가 있으면 외방의 의논이 반드시 대단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내버려 두었다가 뒷날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다시 삼사의 의견이 어떤가를 물었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뜻이 범연하지 않은 줄을 압니다만, 그 죄가 몹시 중하여 오늘날 가벼이 의논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경억은 아뢰기를,
"좌상 이 진달한 성대경에 대한 일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고, 교리 남이성은 아뢰기를,
"윤선도의 죄는 사면해줄 수 없는 정도이므로 심리할 때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성대경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즉시 풀어주었을 것이다. 그 소의 내용이 가소롭기에 내가 알았다고 답한 것이다. 단지 선조의 사부였기 때문에 풀어주려는 것이다."
하자,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쪽 지방으로 정배하여 그의 고향에서 늙어죽게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형조 죄인의 추안을 아뢰었다. 석방자는 23인이었고 외방에 정배한 죄인으로 석방된 자가 34인이었으며, 그 나머지 중한 죄를 지은 자는 그대로 정배하였다.
혜성이 실수(室宿) 8도에 나타났다.
2월 26일 계미
상이 침을 맞았다.
평안도에 여역이 몹시 성하였다.
동지사 정치화, 부사 이상일, 서장관 우창적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이때 청주(淸主)가 어린 까닭에 크고 작은 정령이 다 사보정(四輔政)으로부터 나왔으며, 돌아오는 2월 12일에 수보정(首輔政) 손이(孫伊)의 손녀를 책정하여 황후로 삼아 책봉한 후에 사면을 반포하는 칙사의 행차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한을 선천(宣川)에, 양일한을 철산(鐵山)에 정배하였다.
2월 27일 갑신
상이 침을 맞았다.
윤선도를 광양(光陽)으로 옮겨 유배하였다.
2월 28일 을유
상이 침을 맞았다.
이상일(李尙逸)을 동부승지로,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오두인(吳斗寅)을 교리로, 장선징을 사간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혜성이 동북 간방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2월 29일 병술
혜성이 규수(奎宿) 1도로 옮겨갔는데 꼬리의 길이가 2장(丈) 남짓되었다.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이 장계하여 아뢰기를,
"경기 고을에 양전(量田)한 후 부역이 더욱 무거워져 백성들이 더 고생하고 있습니다. 각종의 가포(價布)를 추수 뒤로 물려 거두어 들인다면 눈 앞의 위급함은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여 물려 받아들이게 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대전》 가운데 폐지된 조항을 일찍이 본원에서 고치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반복해서 살펴보니, 현재 서울과 외방에서 준행하는 것은 비록 착실한 성과는 없으나 옛것을 형식적이나마 보존한다는 뜻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 제도가 변경되어 폐기된 지 이미 오래되었거나 예전과 지금의 상황이 달라져서 꽉 막혀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이에 우선 그 가운데에서, 거행할 만한데 완전히 폐기한 것 몇 조항을 별도로 뽑아내어 여쭙니다."
제사(諸司) 관원은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유시(酉時)에 퇴근하되, 한 사람은 남아서 숙직한다.
성균관에서 제기(祭器)와 서책(書冊)을 관장하는 한 사람은 구임자(久任者)로 맡기되 비록 대간이나 수령이라 할지라도 이차(移差)하지 말게 한다.
매년 정조(正朝) 때 각릉의 제헌관(祭獻官)이 능위의 초목이 제대로 있는지를 봉심하여 계문하게 한다.
역대 시조 및 고려 태조 이하 네 분의 능침이 있는 지역의 수령은 해마다 능을 살피고 또 전시(田柴)를 금지하게 한다.
사족(士族)의 여자로 30세 가까이 되었으나 집이 가난하여 시집가지 못한 자에게는 예조에 계문하여 자본을 헤아려 지급하게 한다.
친족도 없이 빌어먹는 자와 보호해 줄 자가 없는 노인에게는 아울러 의료(衣料)를 지급한다.
집잃은 어린 아이를 길러 주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에게 한성부 및 본읍에서는 보수를 주고 관청에서는 의료를 지급한다.
병든 사람이 오부(五部)에 알려 오면 즉시 월령의(月令醫)를 파견하여 치료해주게 하고 가난하여 약을 살 수 없는 자에게는 관아에서 지급해주고 예조에 보고한다.
이품직(二品職)의 일을 실지로 행한 자로서 나이가 70 이상 되어 시골로 물러가 사는 자에게는 복호(復戶)해 준다
공적인 일로 인하여 죽은 자에게는 삼 년 동안 복호해 준다.
제진 읍성 및 산성에 대해서는 절도사가 무너진 곳을 둘러본 뒤에 수축할 곳을 개좌(開坐)하여 매년마다 초록하여 계문하되, 만일 무너졌는데도 즉시 수축하지 않았거나 수축했는데 견고하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 해당 관원을 파출한다.
장적(帳籍)에 부치지 않은 자는 과거(科擧)와 시재(試才) 및 서리(書吏)와 생도(生徒) 등의 제원에 아울러 소속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성적(成籍)할 때에 빠뜨린 자는 죄를 다스려 고역(苦役)에 정하고, 규찰하지 않은 관리와 관령(管領)과 권농(勸農)은 율에 따라 논하고, 군적 사목(軍籍事目)에 대하여 실정을 알고도 은폐시킨 자는 형량을 감하여 죄를 부과하고, 사송자(詞訟者)와 범법자(犯法者)와 이름이 관부에 나타나 있는 자는, 아울러 본관을 고찰하여 누락된 후에 나타난 자는 죄를 다스려 고역(苦役)에 정하게 한다.
법사(法司)의 아전으로 장사꾼과 벗을 맺어 연음(宴飮)한 자와, 법금을 범한 사람을 체포하였다가 부탁을 받고 다시 석방시켜 준 자에게는 장 1백으로 결정한다.
승려는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되,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장 1백을 내리고, 기읍의 노비에 소속시킬 것이며, 허접인(許接人)은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한다.
관비(官婢)와 창기(娼妓)가 법에 따라 속신(贖身) 및 면역(免役)을 받은 외에 첩을 거느린 자와 수령이 사사로이 준 자와 추쇄하여 소환하지 않은 자는 제서유위율로 논하고, 품관(品官)으로 관역(官役) 외에 솔축한 자는 토호(土豪)로 논한다.
하니, 상이 경외에 준행하도록 하였으나, 사람들이 그럭저럭 지내려 하므로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3권, 현종 6년 1665년 4월 (0) | 2025.12.04 |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6년 1665년 3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6년 1665년 1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5년 1664년 12월 (0) | 2025.12.04 |
| 현종개수실록12권, 현종 5년 1664년 11월 (0) | 202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