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5권, 현종 7년 1666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4.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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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술

일식이 있었다.

 

상평청이 3월부터 진휼을 시작하였다. 먹으려고 온 백성이 3백여 명이었는데, 끼니가 떨어진 사대부 집에 건량을 지급한 숫자는 그 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밀과 보리가 익었다 하여 전례에 따라 진휼을 중지하고, 그 가운데서 특히 곤궁한 자를 뽑아 양식을 주어 보냈다.

 

장선징(張善澂)을 대사간으로, 이후산(李後山)을 판결사로, 조복양(趙復陽)을 이조 참판으로, 이정(李程)을 부응교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이완(李浣)을 판의금으로, 이시술(李時術)을 병조 참지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년에 온천에 갔을 때 본도 감사와 온양 군수를 모두 가자(加資)했었다. 이번에도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되겠으니, 감사 임의백(任義伯)과 군수 박매(朴邁)를 모두 가자하라."
하였는데, 장령 이광적이 그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6월 5일 갑인

응교 이민서가, 전후로 내린 하교가 거북하다고 아뢰며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8일 정사

이민서를 사인으로 삼았다.

 

6월 10일 기미

사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기강이 해이하여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서울의 백성들 중에도 호적에 누락된 자가 많습니다. 서울이 이와 같으니, 외방(外方)이 어떠할지 알 수 있습니다.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적발하여 사목(事目)에 따라 논죄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13일 임술

성후설(成後卨)을 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민서가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사소한 일로 인하여 일을 논한 신하의 기세를 꺾으시고 연이어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니, 신들은 지나치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두세 명의 유신(儒臣)이 ‘간교(奸巧)’라는 두 글자의 비답을 받은 뒤로 황공하여 인피하고 들어가 공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미 내리신 비답은 지금 도로 거둘 수는 없으나 후회한다는 뜻을 보이셔서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출사할 수 있도록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진실로 성덕(盛德)의 일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별도로 출사하지 말라는 명이 없었다. 그렇다면 돈독하게 타일러 출사하라고 권하란 말인가."
하였다.

 

헌납 맹주서가 동료와 상회례를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병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6월 14일 계해

함경도 진사 주여익(朱汝翼) 등이 상소하여 유세철 등이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임금을 속이고 어진이를 무함한 죄를 빨리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관학 유생이 올린 상소의 비답에 이미 하유하였다."

 

6월 15일 갑자

전 감사 이상일은 어의궁(於義宮)을 싸잡아 기록한 일로, 김휘는 풍기의 태봉 일에 연좌된 이유로 모두 고신을 빼앗겼는데, 금부의 아룀에 따른 것이다.

 

6월 16일 을축

장령 이동직이 간원을 처치할 때에 전의 규례에 어긋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6월 17일 병인

오상을 장령으로, 이유상을 헌납으로, 조헌경을 지평으로, 강백년을 형조 참판으로, 홍처대를 참지로 삼았다. 그런데 조헌경은 장령 최일과 내외사촌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6월 18일 정묘

정언 김징(金澄)이 아뢰기를,
"감역(監役) 박순(朴錞)의 처 조씨(趙氏)는 투기하다 그의 여종을 죽였습니다. 또 고(故) 익풍군(益豊郡) 이속(李涑)이 살아 있을 때에 가까이하던 여종이 있었는데, 그의 처 임씨(任氏)가 평소 질투하고 매섭게 굴었습니다. 속이 죽자 그 여종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달아나 숨자, 그 여종의 어미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을 가해 죽였습니다. 이처럼 흉악한 부녀자들에 대해서는 조종조에 종루(鐘樓) 거리에다 내놓고 곤장을 치는 법이 있었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대로 처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형조로 하여금 그 문장(門長)과 가장(家長)을 함문(緘問)하게 하고, 또 매질을 했던 종을 추문(推問)하게 하였다.

 

홍문관 응교 이민서, 부교리 이단하, 부수찬 유명윤 등이 일식의 변을 인하여 상차하였다. 경연을 열어 성지(聖智)를 넓힐 것, 기강을 세워 호오(好惡)를 분명히 할 것, 서정(庶政)을 다스려 고식(姑息)을 제거할 것, 어진 인재를 천거하여 직책을 맡길 것, 피폐한 정치를 혁파하여 민생을 편안히 할 것, 언로를 열어 총명을 넓힐 것 등이었다. 그 가운데 언로에 관해 논하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말의 시비는 살피지 않으시고, 오직 관직의 높고 낮음만으로 취사(取舍)를 보이십니다. 그래서 국정을 맡은 재상으로 하여금 공론을 돌보지 않게 하시고, 언책(言責)을 맡은 대각으로 하여금 할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조정이 청명하여 권세있는 간신의 화가 없지만, 만약 오늘과 사정이 달라진 훗날 매우 간특하여 주상의 총명을 가리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쓰는 자가 있어서 언로가 닫혀 감히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게 되는 화를 장차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임금과 정승이 모름지기 우장(優奬)을 가하고 기를 꺾지 않아야만 언로가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각이 한 해 동안 입이 아프게 논쟁한 일을 간혹 완강하게 거부하여 따르지 않으시고, 한두 가지 말을 아뢰었다가 뜻밖에 준엄한 배척을 당하기도 하니, 이는 성상께서 우장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근래 경연에서 대신이, 대간이 아뢴 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진달하면서 대간을 싸잡아 배척하여 공공연히 비난하였고, 심지어 ‘대각을 믿을 수 없다.’라고 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성상에게 대각을 경시하는 조짐을 열어준 것이고 대각을 한없이 수치스럽게 만든 것이니, 대신이 임금에게 아뢰는 체모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보면 정승 역시 대각의 기를 꺾은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언로가 막히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 장령 이동직은 먼저 민점에 대한 의논을 꺼냈다가 대신에게 배척당하고 나서 인피하는 말을 명백히 하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대각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체차하소서. 주사 제조(籌司提調)는 임무가 매우 중요한데, 김시진(金始振)과 남용익(南龍翼)은 모두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갈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천지의 변과 만물의 괴이가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또 일식의 재변까지 생기니, 나의 근심과 두려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과인을 경계시키고 가르치는 말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의리와 말을 아뢰는 체제는 단지 정성만을 다하고 그 사이에 다른 뜻이 개재되어 있지 않아야만 지극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차자의 끝에 아뢴 일은 다른 뜻이 개재되어 있다. 상신의 말에 버럭 화를 내어 ‘권세있는 간신’이라는 등의 말을 인용하고 ‘임금에게 조짐을 열어주었다.’는 등의 말로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우연히 한 말이 아니니 참으로 놀랍다. 또 동직의 경우 지난번 온천에 있을 때에 다만 추고하라고 의논하였으니, 그 의논을 먼저 꺼내었다가 대신에게 배척당했다는 등의 말은 더욱 근거가 없다. 더구나 주사 제조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내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제 강연에서 앞으로 나와 일을 아뢸 적에 차자 끝에 쓴 말은 어찌하여 아뢰지 않고 물러나 종이 끝에 적었단 말인가. 이것이 내가 더욱 그 뜻의 소재를 알지 못할 일이다."
하였다.

 

6월 19일 무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랫동안 빈청에 개좌(開坐)하지 않았는데 언제 개좌하려고 하는가?"
하니, 회계하기를,
"비국에 물었더니, 우상 허적이 옥당 차자에 불안한 바가 있어서 성 밖으로 나갔기 때문에 개좌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 이원정을 보내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유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죄는 언어에 관계된 작은 실수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성상의 총명을 속여 가리고 언로를 막는 것은 신하된 자의 큰 죄인데, 신이 이러한 죄를 지었으니 도리로 보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나라의 법을 적용하여 여론에 답하시고, 또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도록 속히 허락하소서."
하였다.

 

6월 20일 기사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김좌명(金佐明)을 판윤으로, 윤경교(尹敬敎)를 대교로 삼았다.

 

우상  허적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 등대(登對)하던 날 말끝에 우연히 대관(臺官)이 성상을 속이는 정상을 대략 아뢰었지만, 그래도 눈치를 보느라 생각을 다 토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이 제 몸처럼 임금을 사랑하지 못하여 세 조정에서 특별히 받았던 은혜를 저버리고 있는 것을 스스로 한하고 있는데 의외에 성상의 총명을 속여 가리고 언로를 막는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옥당이 차자로 논핵하였다는 말을 듣고 경황없이 성을 나가 짚자리를 깔고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삼가 들으니 차자의 비답에 유신을 우대하는 예가 결여되었다고 하니, 신의 죄가 배로 늘어났습니다. 신을 삭탈 관직하고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민심이 좋지 못해 논의가 엇갈림으로써 자기편은 사랑하고 상대편은 미워하며 사정(私情)을 앞세우고 공사(公事)를 뒤로 미룬다. 어제 차자에는 은밀히 다른 뜻을 삽입하여 행동이 바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매우 놀라웠다. 경은 어찌하여 부정한 망발의 논의를 개의하여 경황없이 성을 나가 거듭 체면을 손상시키는가. 나는 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긴다. 나라의 중한 임무를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되고 나랏일의 어려움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니,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들어오라. 나의 바람이 가뭄에 구름을 바라는 것보다 더 간절하니 경은 양찰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정언 김징이 인피하기를,
"원주 유생 김명주(金命胄)에게 대신의 진달로 인해 진시(陳試)할 수 있게 자격을 주도록 허락하였는데, 예조가 지금까지 여쭈어 보지 않고 있기에 해당 당상관을 추고할 것을 청했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들어보니, 사실과 달랐습니다."
하였는데, 체차되었다.

 

6월 21일 경오

원접사 김좌명이 보고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이달 18일에 이미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도망쳐 돌아온 안추원(安秋元)도 일시에 압송해 온다고 합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들어올 기한이 이미 박두하였으므로 의논해 정해야 할 일이 많은데, 우상이 불행히도 밖에 나가 있으니, 몹시 딱합니다. 일의 조사에 대한 건은 당초 우상의 뜻이 신들의 소견과 같지 않았는데, 그 뒤에 들어보니, 우상 역시 자기의 의견만 고수하려는 뜻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접사의 장계 중에 대통관(大通官) 김삼달(金三達)이 말한 ‘고단하다’라고 한 설은 무슨 뜻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만약 변방 신하 한 사람이 그 일을 떠맡는다면 저들이 가장 큰 죄로 논하고 싶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일선이 만약 칙사로 자처하려고 할 경우 잠시 그의 뜻을 따라 칙사로 대우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하니, 태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의 뜻도 그러합니다."
하였다. 공조 판서 이완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강을 건널 날짜가 가까운데, 원접사가 아직까지 조정의 의향을 모르고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불가불 미리 분부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완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번 조사의 건은 신과 좌상이 애초에 참여하였으므로 자연히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다마는, 우상은 원래 간여한 사람이 아니니, 그로 하여금 요량하여 주선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도 출사할 뜻이 없는 것 같습니다. 상께서 별도로 도타이 하유하신다면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떻게 감히 출사하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조정이 엄숙하지 않고 인심이 박해졌으니, 이를 진정할 길은 오직 상께 달려 있습니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대간의 신하에게 배척받은 게 우상이 받았던 정도뿐만이 아니었는데도 상께서 한결같이 출사하라고 재촉하시므로 분의로 보아 감히 출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상도 어떻게 감히 끝끝내 물러가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비국 당상 중 무고한 자가 매우 적기 때문에 신들이 상의하여 김시진과 남용익을 가려 차출하였는데, 의외의 배척을 받으니, 매우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 내 말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 김시진 같은 자가 과연 이 직임에 합당하지 않단 말인가?"
하니, 태화 등이 아뢰기를,
"신들도 그가 합당하지 않다는 점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논박을 받았으니, 재신은 여느 관원과는 다르므로 염치상 필시 공무를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성상의 뜻에 만일 적당하다고 여기시면 잠시 동안 그의 사직소에 따라 체차하도록 허락해 주셨다가 다음에 다시 차출하게 하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은 그와 다르다. 이왕 파직하자고 한 계사가 아니었고 또 삼사의 관원과 입장이 다른데 왜 공무를 보지 못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그리고 전부터 옥당이 비국의 당상에 대해 차자로 논박한 일이 있었던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옛날의 대신은 필시 인재를 가려 써서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흡족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옥당이 이와 같은 논박이 있었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조정 신하 가운데 명망이 있는 자가 의논을 주관할 경우에는 일시의 논의가 죄다 그 사람한테서 나오기 때문에 일이 엇갈리지 않고 조정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각자의 소견을 주장하므로 논의가 여러 갈래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김수항이 비록 전형의 장관으로 있기는 하나 어떻게 그때그때 돌아가고 있는 의논을 미리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도리어 권간(權奸)이 국정을 잡았을 때만 못하다고 합니다. 대체로 권간이 국정을 잡으면 그래도 조정의 의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지는 우환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뒤틀린 일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장선징이 간원의 장관으로 있는데, 한쪽에서는 그에게 상으로 품계를 올려주자고 논하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그를 출사하게 하자고 하는데 어찌 이런 법이 있겠습니까. 상으로 그의 품계를 올려 주는 데 대한 의논이 나온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고 굳이 거절하시니 참으로 거북합니다만 대간이 지금까지 쟁집한 것도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이 일은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서로 버티어 매양 종이에다 베껴 써서 날마다 올리고 있으니, 상의 마음을 돌릴 만한 무슨 성의가 있습니까. 신은 취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살펴보니, 명하가 전형의 장관으로 있을 때에 후배들의 의논을 장려하고 채택하기를 좋아하여 반드시 청의(請議)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신진 사류들도 그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승이 되자 지위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서 참여하여 들을 수가 없으므로 삼사의 논의 중 건의한 것들이 이따금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흡족하지 않아 도리어 후배들에게 곤욕을 치르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상이 도승지 김수흥을 보내어 우의정 허적에게 하유하기를,
"나의 지극한 뜻을 두 번이나 하유하고 나니 할 말도 없고 생각도 다하였다. 체면이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지금은 객사(客使)가 경내에 들어와 있어 일이 매우 복잡하므로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때인데 말해 뭐하겠는가. 경은 나라의 일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고 망령된 말은 개의할 것이 없다는 것을 살펴, 속히 들어와 나랏일을 도와 해결하라."
하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전후의 성지(聖旨)가 간절하신데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특별히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보내어 신하의 의리로 꾸짖으시고 속히 나오라고 하유하시니, 신이 비록 못났으나 그래도 사람인데 어찌 오늘날의 나랏일이 어렵다는 것을 모르겠으며, 또 어찌 군신의 의리는 천지 사이에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신이 진 죄가 지극히 무겁고도 크므로, 형벌을 면하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실로 감히 다시 조정에 들어가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한 몸의 구구한 염치나 절개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였다.

 

6월 22일 신미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수찬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6월 23일 임신

우상 허적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관편에 비답을 보내어 ‘급히 의논해 정할 일이 많으니, 모름지기 조정에 나오라.’는 뜻으로 하유하였다.

 

대사간 장선징이, 체차되지 못하여 지금까지 염치를 무릅쓰고 눌러 있음으로써 처치하는 관원이 대신에게 배척을 당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평안도 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 등지에 해일이 있었는데, 민가가 떠내려가고 사람이 빠져 죽었다.

 

6월 24일 계유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집의로, 김익렴(金益廉)을 사간으로, 홍만용(洪萬容)을 부교리로, 정만화(鄭萬和)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6월 26일 을해

우상 허적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원접사 김좌명이 장계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 사신이 임반(林畔)에 도착했는데, 제독(提督) 이일선(李一善)이 감사의 군관(軍官)을 불러 ‘안추원이 도망오던 날 의주 부윤이 반드시 감사에게 보고했을 것인데, 감사가 즉시 계문하였는지를 감사에게 가서 물어보고 와서 답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감사 이정영(李正英)과 상의하여 답하기를 ‘그때 의주 부윤이 보고하였으며, 의주 부윤이 곧장 원적관(原籍官)에게 공문을 보내 추원의 거주를 물었는데, 과연 풍덕인(豊德人)이라고 했으므로 잠시 친척집에 보수(保授)057)  하도록 하였다. 당초 즉시 치계하지 않은 책임은 진실로 면하기 어렵다.’ 하였더니, 일선이 화를 내며 ‘그 당시 계문한 연유 및 경기에서 풍덕으로 넘길 때에도 계문한 일이 있었음을 추원이 분명히 공초하는데 어찌 이렇게 대답하는가? 이는 필시 감사가 스스로 감당하려는 것이다. 비록 이 일로 조정에 이름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매우 중요한 데에 관계되므로 서울에 도착하여 조사할 때에 그냥 묻기만 하고 말지 않을 것이니, 어찌 끝내 바른 대로 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했습니다. 앞으로 신들에게 물어오는 일이 있을 경우, 조정을 떠나올 때에 정해준 대로 말을 만들어 밀막아 놓고 묘당에서 다시 지시하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우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지 않고자 했던 뜻은 일이 그다지 대단한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겨서였다. 그런데 지금의 형세로 보면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듯하니, 우선 ‘조정도 알고 있었다.’는 등의 말로 범범히 대답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이러한 뜻으로 빈신(儐臣)에게 분부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일은 권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사할 때에 신들이 ‘처음에 공문을 왕복한 것은 그의 거주를 상세히 알려는 것이었고, 그 친척에게 보수(保授)한 것은 대개 구류하려는 의도였다. 비국이 주문(奏聞)하려고 할 찰라에 이 사람이 이미 달아났으므로 도망가버린 일을 상국(上國)에 감히 아뢸 수 없어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와서 어떻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이정영은 조사를 받는 대상에 들어 있을 것이니 즉시 체차하고 후임자를 속히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의 신하 중에 이 직임에 합당한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가선 중에는 오정위와 김수흥이 있으나 모두 늙은 어버이가 있어서 차출해 보내기가 어려울 것 같고, 당상에는 정만화 밖에는 없지만 영상과 상피(相避)해야 하는 혐의가 있기 때문에 비국에서 의논해 천거하지 못하고 있는데, 우상도 그가 합당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오직 상께서 택하시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장선징을 병조 참지로, 여민제를 장령으로, 이은상을 우윤으로, 남용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특별히 정만화를 평안 감사로 제수하고 이어 가선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상이 우의정 허적에게 승지를 보내어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유하니, 허적이 대답하였다.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하유하시니, 일신의 염치는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병이 한창 심하므로 조금 나으면 도성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대사헌 이경휘가, 병조 판서 홍중보와 혼인한 사이로 상피해야 할 혐의가 있어서 상으로 품계를 올려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자고 한 의논에 대해 감히 가타부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최일이, 대간의 계사에 연명하지 않는 것을 허용한 근례가 있기는 하나, 장관의 사체는 일반 동료와는 다르다고 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뒤 최일이 처치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6월 29일 무인

이때 비가 오랫동안 내려 농사에 피해가 있었으므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오정위를 좌윤으로, 김징을 장령으로, 홍만영을 지평으로, 윤심을 수찬으로, 이정을 응교로, 유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경상도 유생 성진승(成震昇) 등이 상소하여 유세철에게 죄를 주자고 청하니, 상이, 관학 유생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이미 하유하였다고 답하였다.

 

6월 30일 기묘

집의 정계주, 장령 김징이 아뢰기를,
"고 익풍군(益豊君) 이속(李涑)의 처 임씨(任氏)는 즉 호조 판서 조한영의 외손녀입니다. 그런데 임씨가 투기하다 그의 여종을 죽였으므로 형관(刑官)이 그의 종을 잡아다 심문한 일이 있었는데, 조한영이 대정(大庭)의 문안하는 반열 속에서 형관을 직접 대놓고 욕설을 하면서 말투가 거칠었습니다. 그가 분기를 띠고 형관을 능멸한 것은 물론 놀라운 일입니다마는, 또 추함할 때 대관을 얕잡아보고 버젓이 성을 내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사대부의 풍습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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