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5권, 현종 7년 1666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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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경진

평안 감사 정만화가 조정을 떠나려 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평안도는 군사 업무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정말 염려스러운데, 청나라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일이 또 뜻밖에 생겼다. 이는 강변의 파수를 엄하게 서지 않아서 일어난 것이니, 불가불 충분히 엄하게 주의시켜야 할 것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이렇게 분부하시는데 감히 엄하게 금하지 않겠습니까.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은 지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만, 때로 사냥을 한다면 자연 방해가 없을 것으로 여기는데 전에도 더러 시행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그래도 완전히 폐지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하였다. 만화가 또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의주의 소통사(小通事)들이 때를 틈타 말할 수 없이 농간을 부려 왔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간 뒤에 그중에서 특히 심한 자 한두 명을 지경에서 효시한다면 그 버릇을 단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을 처리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시의 분을 푼다고 하더라도 후일 말썽거리가 생기는 우환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오정위를 병조 참판으로, 이후산을 호조 참의로, 심재를 부교리로, 김만균을 부응교로, 김시진을 좌윤으로, 민유중을 판결사로 삼았다.

 

7월 2일 신사

집의 정계주, 장령 김징이, 추함을 받아들일 때에 불찰한 잘못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7월 3일 임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불러보았다.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 도망쳐 돌아온 사람의 건에 대해 신의 의견에는 묘당이 감당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비록 지방관으로 하여금 책임지게 하더라도 사형을 받을 죄는 아니기 때문에 감사로 하여금 책임지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묘당에서 책임지겠다는 뜻으로 이미 원접사에게 알렸다고 하니 지금 다시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마는, 처음에 접대할 때 할 말을 의논해 정해 놓아야만 그때 임해 군색한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의주 부윤이 조정에 보고했는가를 물으면 보고했다고 대답해야 하겠지만, 저들이 또 ‘보고한 후에도 주상은 끝내 몰랐는가?’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신들이, 아뢰려고 하였지만 미처 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더라도 저들이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다례를 마치고 처음 수작하는 때에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감히 함께 조사하지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그후 조사를 할 때에는 ‘소국이 일을 잘못 처리하여 황제께서 칙서를 내리게까지 하였으니, 황공하고 미안하다.’라고 말하면 어떠하겠는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실로 옳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부터 이러한 역경을 당하면 뇌물 주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대개 일이 국가에 관계된 때문이었지 신하들을 위해 죄를 면해 주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도 그러하다. 지금 국가에서 대신의 죄를 용서해 주게 하기 위하여 뇌물을 주더라도 저들이 또 대신들에게 사적으로 요구하여 밑도 끝도 없는 그들의 욕심을 채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국가에서 대신에게 주어 대신으로 하여금 사적으로 그들에게 주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호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정유년에 일을 조사할 때에는 이일선에게 1천 5백 냥을 주었고, 임인년에 일을 조사할 때에는 이일선에게 3천 냥, 거군(巨軍)에게 1천 냥을 주었으나, 그래도 부족하게 여겼기 때문에 초피(貂皮) 1백 벌을 더 주었습니다. 그뒤로 일선과 거군 무리들이 이 일로 예를 삼아 요구해 마지않았으니, 이 폐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상의 분부에 따라 죄를 용서해 주는 댓가의 금액을 여러 신하들에게 주어야겠습니다마는, 수량의 다소에 대해서는 그때 임해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역관 가운데 일을 맡아서 할 만한 자가 매우 부족합니다. 수역(首譯)으로 있는 장현(張炫)이라는 자가 지혜가 있는 듯하나 본디 영리하지 않고 서효남(徐孝男)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말을 전하는 데에 부족합니다. 다만 조동립(趙東立) 한 사람이 실로 사령에 적합한데 지금 상중(喪中)에 있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치화의 뜻에는 반드시 조동립을 써야만 저들의 의도를 탐지하고 주선하여 대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라면 그를 불러내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대사간 남용익,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상중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는 것은 전쟁의 일이 아닐 경우에는 경솔히 논할 일이 아니니, 호조 판서의 말이 잘못되었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민정중은 재임할 기간이 이미 찼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행한 일이 많아 미처 끝마치지 못한 것이 있고 본도의 양전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니, 잠시 동안 그대로 위임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금년까지만 그대로 위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소결청의 당상 정만화가 외직에 제수되었으니, 김시진을 차출하여 임무를 보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공조 판서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판의금이므로 일을 조사하는 데에 참석해야 하는데, 또한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불편한 일이 있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대 조정에서 ‘두 대장만큼은 저들과 서로 접하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분부가 계셨고, 또 판의금은 1품의 직책인데 저들이 얼굴을 모르고 있으니, 만약 저들이 캐묻기라도 한다면 밀막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판의금을 지금 잠시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어제 비국의 당상을 체차하자는 의논에 대해 나의 뜻에는 따르고 싶지 않았으나, 대신이 사세상 공무를 보기가 어렵다고 하였기 때문에 애써 따랐던 것이다. 지금 김시진과 남용익을 도로 비국의 당상에 차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7월 5일 갑신

윤선거를 집의로, 소두산을 장령으로, 이유상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특별히 정치화를 겸 판의금으로 제수하고 숭정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대사헌 유철이, 문서를 불찰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대사간 남용익, 사간 김익렴, 헌납 이동로가 처치하여 그를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유철이 의외에 출사할 것을 청하여 말이 구차하였다는 이유로 다시 인피하니, 남용익·김익렴·이동로 역시 처치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모두 체차되었다.

 

7월 7일 병술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정계주(鄭繼胄)를 사간으로, 이경휘(李慶徽)를 대사헌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예조 참의로, 남용익(南龍翼)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청나라 사신이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했는데, 영의정 정태화와 도승지 김수흥이 나가 영접하였다.

 

7월 8일 정해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칙사를 맞이하는 예를 행하였다. 원접사 김좌명을 인견하고 묻기를,
"들어볼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이일선(李一善)과 김거군(金巨軍)은 서로 마음이 잘 맞지만 김삼달(金三達)과는 뜻이 맞지 않습니다. 삼달은 우리 나라의 일에 성의를 보이는 듯합니다. 그러나 송도에 도착해서 비로소 ‘이 일은 매우 중요하여 말할 것이 많지만 가벼이 누설할 수 없으니 주상 앞에 나아가서 자세히 진달하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일선과 거군 등은 번번이 공갈하는 말을 하였으나 삼달은 거짓으로 성의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평안 감사와 묘당이 담당하면 일의 형세가 고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상이 담당한다면 결국은 죄가 신하에게 돌아가더라도 가볍게 끝날 수 있을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인정전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희 나라가 상국의 금지 조항을 깍듯이 따라 항상 주의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나라의 과실로 인하여 황제 폐하께서 칙서를 내리시고 여러 대인께서 더위에 먼 길을 오는 수고를 하게 하였으니, 황공하고 미안합니다."
하니,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진실로 국왕께서 분부하신 대로입니다. 저희들이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왔으니 즉시 조사하도록 해 주십시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방에서 죄인을 잡아오려면 형편상 하루 이틀은 미루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칙사가 분부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파하고 나갔다.

 

7월 9일 무자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삼공과 호조 판서 정치화를 인견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저들에게 은밀히 금을 줄 때에 조정에서 별도로 주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대신이 사적으로 주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까?"
하니, 우상 허적이 아뢰기를,
"전일 경연에서, 국가에서 준다고 하면 후일에 폐단이 있을 것이니 대신이 사적으로 주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역관의 말을 들어보니 대부분 ‘지금 국가에서 담당하기로 하였는데 만약 대신의 뜻으로 준다고 하면 저들이 조정에서도 별도로 주어야 한다고 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결국 겹쳐서 주는 우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의 뜻도 처음의 의견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조정에서 주는 것으로 하였으면 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각 개인에게 줄 금의 수량을 불가불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조정의 분부를 기다리지 않고 의주에서 2천 냥을, 평안 감사가 5천 냥을 주었으므로 저들이 서울에 들어와서는 필시 갑절은 바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선에게는 5천 냥, 거군에게는 2천 냥, 삼달에게는 1천 8백 냥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삼달의 말을 전해 들었는데, ‘반드시 상이 알고 있었다고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합니다."
하니, 상이 도승지 김수흥에게 이르기를,
"책문(柵門)에서 수색할 때, 유황에 관한 금령을 범한 무리들은 현장에서 붙잡히지만 않으면 그 이익이 몇 배나 되기 때문에 징계되는 바가 없었다. 이후로는 사신이 강을 건너 돌아올 때에 각별히 수색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11일 경인

상이 관소(舘所)의 막차(幕次)에 들어가 신하들을 인견하고 묻기를,
"오늘 조사할 때에 대답할 말을 미리 토론해 놓아야겠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도망온 사람의 일은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전하께서는 ‘변신(邊臣)이 보고하였으므로 나도 알고 있었다.’라고 대답하시고, 저들이 ‘왜 즉시 주문하지 않았는가.’ 하면, 전하께서는 ‘잠시 그의 부모와 처자를 만나게 해 주다 보니 즉시 보내지 못하여 지연되고 말았다. 일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저들이 또 ‘조정의 신하 중에 알고 있었던 자가 있는가?’ 하고 물으면, 전하께서는 ‘아무개가 알고 있었으나 내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 잘못은 실로 나에게 있다. 어떻게 신하에게 죄를 떠밀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거의 무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일선의 말을 들어보니 그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주상께서 스스로 담당하신다 하더라도 신들 또한 어찌 물러나 있으면서 담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이렇게 주상께서 욕을 보는 날을 당하여 어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있으면서 지존 혼자서 담당하시도록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신들이 담당하느니만 못하다고 봅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일선의 말을 들으니, ‘청나라 사신이 들어간 뒤에는 나의 힘으로 결코 주선할 수 없지마는 이곳에 있을 때에야 어찌 힘을 써 볼 곳이 없겠는가. 대신의 죄 등급이 낮아질 것 같다.’라고 하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도 대신의 죄 등급이 낮아질 때가 있었는가?"
하자, 모두 아뢰기를,
"김육(金堉)·이시백(李時白)이 정승으로 있을 때 권대덕(權大德) 사건이 있었는데 죄의 등급이 낮아졌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이미 사명을 받들고 와서 조사하고 있으니, 작은 일이 아니므로 죄의 등급을 낮추거나 파직만 하면 경미한 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약 억지로 죄를 면해 달라고 한다면 그들의 신경만 더 건드리고 말 것이니, 청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번 일은 모두 나의 잘못이다. 죄인을 심문하여 처분하는 것은 내가 함께 참여하여 의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오직 칙사의 처분에 달려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사체에 맞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이 서연청(西宴廳)에 나아가 다례를 행하였다. 이를 마치자 이일선이 앞으로 나와 칙사의 말을 전하기를,
"먼저 유황에 관한 금령을 범한 사람을 조사해야겠습니다."
하니, 금령을 범한 최선일(崔善一)을 뜰로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일선이 묻기를,
"염초(焰硝)는 법으로 금한 물건인데 어떻게 사왔느냐? 금한 물건인지 모르고 사왔는가?"
하니, 선일이 대답하기를,
"어리석고 못난 소인이 과연 금한 물건인지 몰랐으며, 사온 것은 실로 몸에 종기가 나서 약으로 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신이 왕래할 때에 매번 금한 물건이라고 신칙하였을 텐데 어찌 모를 리가 있었겠소. 이놈은 정상이 매우 간사하니 국문해야 하겠소."
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어디에서 샀으며, 판 자는 누구냐?"
하니, 선일이 대답하기를,
"판 자는 송참(松站)에 사는 왕씨 성을 가진 자인데,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금한 물건인 줄 알았으나 죽을 날이 닥쳐오므로 법을 무시하고 샀으니, 만 번 죽어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였다. 일선이 또 묻기를,
"사신은 몰랐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사신은 북쪽을 향하여 가고 저는 돌아올 때에 몰래 사가지고 왔으니, 사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신이 매우 엄하게 신칙하였는데 함부로 범하였으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염초는 몇 근이나 되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한 주먹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양이었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일선에게 말하기를,
"판 자나 산 자가 다 죄가 있으니, 대국(大國)도 엄히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일선이 수긍하였다. 또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등을 불러들여 월대(月臺) 위에 앉히고 묻기를,
"데리고 간 사람이 금령을 범하였으니 무슨 말로 대답하겠소?"
하니, 대답하기를,
"사신이 들어간 뒤에 그가 중도에서 되돌아오다가 몰래 샀으니 사신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법으로 금한 물건이니 범하지 말라고 제대로 신칙했소?"
하니, 대답하기를,
"영장(領將)도 함께 불러 매우 엄히 신칙했습니다."
하였다. 또 영장  박선일(朴善一)과 황산이(黃山伊)를 불러들여 묻기를,
"너희는 영장으로 있으면서 데려간 사람이 법령을 범하는데도 금하지 못하였으니, 사신이 처음에 엄히 신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니, 대답하기를,
"엄히 신칙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금한 물건을 몰래 사서 자루 속에 숨겨두었으니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말하기를,
"너희가 중도에 수색하였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말하기를,
"수색했다면 어떻게 자루 속에 둔 물건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간악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서로 짜고 사왔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신문을 하면 반드시 바른 대로 고할 것이오."
하니, 일선이 통관들과 함께 나가서 중문 밖에서 신문하였는데, 영장 등이 애당초 수색하지 않았다고 공초하였다. 일선이 또 선일을 국문하여 사신이 신칙했는지의 여부를 알아냈으면 한다고 청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명하여 나가서 죄인에게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선일이 말하기를,
"금령을 어기고 은밀히 사온 것은 사실 신칙이 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영장들과도 짰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정말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일선이 말하기를,
"이 한 가지 일은 조사를 다 하였는데, 어떤 죄안을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두 사신이 말하기를,
"금령을 범한 사람은 참형을 적용하고, 영장들은 한 등 낮은 법률인 장 일백 유 삼천리(杖一百流三千里)를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부사 목서(穆舒)가 좌상(座上)에서 조사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또 도망온 사람의 일을 조사하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도망해온 일은 잘못이 전부 나에게 있으므로 조사에 함께 참여하기가 매우 미안하오."
하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칙서에 이미 ‘국왕과 함께 조사하라.’ 하였는데 어찌 감히 인혐하십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함께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나의 입장은 실로 미안하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도망해온 사람의 일을 주상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는 실로 신하들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알면서 미처 주문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인데, 어찌 신하에게 잘못을 미루겠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참으로 주상의 분부와 같다면 본국에 마땅히 별도로 주문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우리가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태화와 홍명하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안추원이 처음 도망왔을 때 ‘부모와 처자를 만나러 왔다.’라고 했으므로 절대 도망쳐 돌아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또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머물러 부모 처자를 만나보게 해준 뒤에 그 친척에게 보수(保授)하고 사실대로 주문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예상밖에 추원이 먼저 스스로 달아나 돌아가 버렸습니다. 달아나 버리고 나자 뭐라고 주문할 말이 없어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므로 처음에 주문하려고 하였던 것을 드러내어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 칙사에게 신뢰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대신된 몸으로 위로는 임금을 잘 모시지 못하고 아래로는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여 상국의 견책을 초래한 것입니다. 죄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상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본뜻과 대신의 뜻은 오늘에 와서 드러내어 증명하기 어렵지만, 그 사건의 본말을 요약해 보면 오로지 내가 불민한 데 원인이 있소."
하니, 명하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대신을 지극히 염려하여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는 것일 뿐이지 주상께 어찌 잘못이 있겠습니까. 모두 우리들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입니다."
하였다. 두 사신이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군신 상하가 제각기 자기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죄를 돌리려 하니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는 한몸인데, 어찌 신하만 알고 임금은 모를 리가 있겠으며, 또 어찌 아래가 잘못했는데 위는 잘못이 없을 수 있겠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조사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면 미안하지 않겠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이렇게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므로 우리들이 독단적으로 조사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또 분별하여 밝혀야 할 일이 있어 갑자기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고 드디어 서로 읍하고 해산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저들이 자기들끼리 논란하다가 끝내 좋은 처리 방안을 모색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루자고 한 것이니,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일선의 행동을 보면 일이 자못 순조로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5천 냥을 주었기 때문에 필시 그가 담당하여 그런 것일 것이다."
하였다. 상이 환궁하였다.

 

7월 12일 신묘

상이 관소의 막차에 들어가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정치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역관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상사(上使)의 생각은 매우 엄준하여 ‘우리가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 왔으니, 국왕이 스스로 감당하려 한다 하더라도 대신도 이미 알고 있었던 이상 가볍게 죄를 정할 수는 없다.’ 하고, 부사는 ‘국왕이 친히 감당하려 한다면 대신에게 무거운 죄를 적용할 수 없다.’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하기를 한두 번만 한 것이 아니었는데 상사의 뜻은 확고하여 돌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모두가 신들이 국사를 잘못 도모하여 초래된 일이니 가볍게 죄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죄를 너무 가볍게 정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상께서 번번이 스스로 감당하시는데, 이는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목숨을 바치는 의리가 아닌 듯하니 신과 태화가 감당하겠습니다."
하니, 태화도 아뢰기를,
"상께서 어찌 신들의 죄를 대신 감당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방관의 일을 저들이 만약 끝내 거론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금 우리쪽에서 먼저 ‘이번 도망쳐 돌아온 사람의 건에 있어서는 지방관이 마음대로 한 일이 아니지만, 이왕 황제의 조칙 가운데 그 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의 죄도 일체로 논해야 할 것 같다.’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우리의 도리로 볼 때 전혀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마치 파묻힌 불씨를 뒤적이는 것과 같이 숱하게 불리한 점이 있으니, 경솔하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죄가 있어서 마땅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다만 조칙의 글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 그냥 둘 수 없다는 뜻으로 잘 말하면 아마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죄를 정할 때 내가 일어나서 치사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아마도 타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일어서시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입니다. 만약 태도를 바꾸어 경의를 표하면 혹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만약 청나라 임금을 위하여 북쪽을 향해 말씀하시어 경의의 뜻을 표하신다면 마땅할 것 같습니다마는, 일어섰던 관례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내 서연청(西宴廳)에 나아가 다례를 마치고 자리로 가자, 사신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제는 돌아간 뒤에 밤새도록 불안하였는데, 오늘 여기에 오니,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오늘은 마땅히 도망쳐 돌아온 사람의 건에 대해 조사해야 하는데 어느 사람을 먼저 문초해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모두 나의 잘못이오. 신하들에게 문초할 만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청의 사신이 말하기를,
"백성이 도망쳐 돌아온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이는 신하들이 고하지 않은 소치이니, 국왕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국왕께서 꼭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신다면 별도로 황제께 보고하겠습니다마는, 저희들이 할 일은 단지 그 당시의 관련된 신하들만 조사하면 됩니다."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무릇 우리 나라의 공사는 변방의 신하가 보고하면 우리들이 그 내막을 진술하여 아뢴 다음 상의 분부를 받들어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도망쳐 돌아온 사람의 일에 있어서는 우리들이 그가 부모 처자를 보고 싶다고 하는 마음을 측은하게 여기어 ‘잠시 구류하고 보수(保授)해 놓았다가 앞으로 상국(上國)에 보고하겠다.’는 뜻으로 아뢰었고 보면 상께서는 우리들의 주청으로 인해 따르신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건이 이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으니, 그 죄는 모두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상께서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죄인이 달아나 강변(江邊)에 도착하였을 때에 배를 보내 건너게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넘어올 수 있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말하기를,
"자문(咨文)에도 ‘그 사람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다.’라고 하였으니, 변방 신하가 배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건너온 뒤에 어느 관원이 어느 곳에다 보고하였기에 국왕에게 전달되었소?"
하니, 태화와 명하 등이 대답하기를,
"의주 부윤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비변사에 보고했는데, 비국 당상은 바로 우리들이 맡고 있는 책임입니다. 우리들이 그가 머물러 부모와 처자를 만나보도록 한 것은 결코 상국을 속이려고 한 뜻이 아니었는데 뜻밖에 안추원이 곧바로 도망가고 말았으니 우리들이 해명하고 싶지만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만약 상국에 주문하려 하였다면 구류하거나 보수(保授)한 지 한두 달 안에 잡아보낼 수 있을 터인데 3년 동안 주문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의도에서였소?"
하자, 태화와 명하 등이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죄를 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양국 조약 중에 도망온 사람을 숨겨줘서는 안 된다고 매우 엄하게 금지하고 있는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소?"
하니, 대답하기를,
"모르지는 않지만 일이 본래 의도와 다르게 되버렸으니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그때의 정승은 누구였소?"
하니, 태화와 명하가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과 원두표였는데, 원두표는 이미 죽었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묘당이 같이 의논한 사람 중 정승 말고 몇 사람이나 더 있소?"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묘당의 일은 대신이 주관하고 있는데 그때 참여한 사람은 비국의 당상 김좌명이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고 있었으므로 상이 사옹원에 명하여 통관 이하들에게 차를 나누어 주게 하였다. 칙사도 가정을 시켜 낙장(駱漿)을 상에게 올리니 상이 종자를 들어 마시자 사신이 또 여러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칙사가 김좌명을 불러 물으니, 좌명이 대답하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죄가 없다 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이 또 평안 감사 이정영에게 묻기를,
"왜 그 사람을 들여보내지 않고 묘당에 보고하였소?"
하니, 정영이 말하기를,
"의주 부윤이 보고하였는데 도신이 어찌 감히 조정에 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수하여 죄를 지었으니 황공하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그때 의주 부윤은 어디에 있소?"
하니, 태화가 말하기를,
"그때 부윤인 강유후(姜裕後)도 이미 죽었습니다."
하였다. 부사 목서가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상이 이일선에게, 그로 하여금 실상을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일렀다. 칙사가 말하기를,
"이번 조사 건의 문서는 누가 담당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 허적과 대제학 김수항이었소."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대간은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상의 잘못을 바로잡고 모든 관원을 조사하고 탄핵하는 것이 대간의 직책입니다."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이 일은 상국에 관계되는 것인데 왜 쟁집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대관도 조사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으레 자주 체차되므로 그때의 대간이 누구였는지 상고해 낸 다음에 조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칙사가 서로 돌아보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일선을 시켜 고하기를,
"이 일은 매우 중요하여 경솔하게 마무리지을 수 없으니, 다시 내일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사하는 일이 지체되어 마음에 매우 미안하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이 일로 인하여 며칠 동안 머물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파하고 상이 막차로 들어가니,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또 미루는 것은 다시 서로 의논하려는 것인데, 그들의 말투로 보면 대신의 죄는 그리 중하게 정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관(臺官)을 조사하겠다고 한 의도는 극히 흉칙하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이것은 훗날의 폐단이 될 수 있으니 절대로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환궁하였다.

 

7월 13일 임진

상이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어제 사신이 대관을 조사하겠다고 말하기에 그때 양사(兩司)의 장관을 상고해 보니, 정치화는 대사헌으로 제수되어 사은하기 전에 체차되었고 대사간은 이홍연이었는데 지금 회양 부사로 나가 있습니다. 지금 치화와 그때 간원의 부관이었던 사람을 참석하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치화가 미처 사은 숙배를 하지 못하였으니, 물론 참석할 수 없습니다마는, 회양(淮陽)이 서울과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불러오는 사이에 사신이 오래 머무는 폐단이 있으며, 차관(次官)이 참여하는 데 있어서도 그 예를 터 놓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이 공무를 보지 않았으며 대사간도 먼 고을에 나가 있다는 뜻을 통관으로 하여금 칙사에게 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상 허적이 관소(館所)에 나아가 연향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니, 사신이 이일선으로 하여금 묻기를,
"이 일은 국왕이 다만 대신과 상의하고 대간은 처음부터 몰랐습니까? 우상은 국왕에게 여쭈어서 오십시오."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대간은 주로 백관의 죄과를 논핵하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간할 뿐이지 국경에 대한 일은 원래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조사 대상 중에 싸잡아 넣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일선에게 농담하기를,
"우리 나라 사례를 제독이 어찌 모르기에 지금 이와 같이 간여하지 않은 사람까지 연이어 침해한단 말입니까? 아니 규례를 모른다고 소국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일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접 도감이 다시 역관으로 하여금 탐문하게 하였더니, 두 사신이 말하기를,
"대간이 이미 참여하지 않았다면 조사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하였으므로 그 일이 중지되었다.

 

과거보는 데 상피하는 법을 고쳐 정하였다. 처음에 시관이, 과거보는 자들이 상피할 때 다만 《대전》의 상피 조항의 원문만 적용하고 소주(小註)의 내용은 적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정관(政官)과 상하의 관원이 상피하는 법에 따라 소주의 내용까지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는 영의정 정태화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7월 14일 계사

이하(李夏)를 지평으로 삼았다.

 

사간 정계주(鄭繼胄) 등이 아뢰기를,
"전 진산(珍山) 군수 이성시(李聖時)는 어미를 모시는 데에 정성을 다하지 않아 성근(省覲)조차도 지체하였으며, 군에 있을 때에는 봉양하지 않았고 갑자기 돌아오게 되어서도 가서 뵙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미루어보면 평소에 어미를 어미로 대하지 않고 남처럼 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가 불효와 관계되므로 법률대로 처벌하여 윤리를 바로잡아야 하겠으니, 나문하여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5일 갑오

청나라 사신이 언서(諺書)로 번역한 조사 문건을 우상 허적에게 전하고 주문의 초안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그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말이 있고 또 사실과 틀린 점이 있다고 하여, 대제학 김수항과 함께 이일선을 통해 청나라 사신을 만나 논란한 끝에 겨우 바르게 고쳤다.

 

7월 16일 을미

우상 허적, 이판 김수항, 판윤 김좌명이 조사 문서의 초본을 경연에 가지고 들어와 의논하여 약간의 수정을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이번에 칙사가 나올 때 연로(沿路)에서 요구한 것이 전보다 배나 되었는데, 평안 감영에서는 60냥짜리 은주합(銀酒盒) 여러 벌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전에는 그들이 지니고 온 은화를 내주고 그릇을 만들게 하였는데, 이번에는 은의 냥(兩)을 강제로 정해주고 만들어 바치게 하니, 백성들의 힘이 어찌 감당해 내겠습니까. 이것은 역관의 무리가 곤란한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고 수령도 자기가 욕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고을에 비축된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살피지 않은 채, 백성의 힘이 탕갈된 것도 돌아보지 않고 힘을 다해 응해 주는 데서 말미암은 것인데, 그 수가 점점 증가하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이후로는 저들이 요구해 올 때 소통사로 하여금 극력 주선하게 하되, 수를 견감했을 경우에는 후한 상으로 논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엄중한 법률로 다스리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연로에다 이렇게 분부하라고 하였다.

 

7월 17일 병신

상이 관소(館所)에 나아갈 무렵에 우상 허적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허적이 아뢰었다.
"이일선과 김거군 등이 어제 도감에 말을 전하기를 ‘이번 조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상이 한결같이 인혐만 해서는 안 된다. 감죄할 때에 북쪽으로 향하여 서서 극력 간쟁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들이 상의 분부를 일일이 칙사에게 전하려고 하는데 이를 인하여 주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신에게 적용될 율에 대해 신들은 좌직이나 정배로 결정되리라고 여기었는데 지금 김대헌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했던 바와 크게 달랐습니다. 대체로 대헌이 신에게 요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저쪽의 비밀을 역관 변승형을 통해 신에게 말하기를 ‘칙사가 올 때 황제께서 「너희들은 필시 생소할 것이니 모든 일을 일선의 말에 따라 처리하라.」라고 하였는데, 상사(上使)가 매우 흉악하여 일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늘의 감죄는 매우 중대한 국면에 처하여 장차 추측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를 것 같다. 일선이 지금 힘써 반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듣지 않고 있으니 정배의 죄로 끝난다면 다행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상이 관소에 나아가 조사하였다. 영상과 좌상은 문 밖에 있고 우상만 들어와 참여하였다. 상이 두 사신과 다례를 행하였다. 끝나자 두 사신이 이일선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지금 신하들의 죄를 조사하여 정해야 하겠는데, 국왕의 분부를 듣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황공하여 할 말이 없으니 오직 칙사의 처분에 달려 있소."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황제의 교지에 ‘국왕과 함께 조사하라.’ 하였으니, 저희들이 국왕의 분부를 받지 않고 어떻게 감히 독단적으로 의논해 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감히 묻는 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이 신하들을 물리칠 것을 청하니, 운검(雲劍) 유혁연이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외국 사람과 계시는데 신들이 어떻게 다 나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운검 4명과 우상 허적과 승지, 한림원 주서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가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상에게 자리에 앉기를 청한 다음 자리로 나와 말하기를,
"대신이 되어 국정을 맡고 있는 자가 상국의 백성이 도망해 왔는데도 즉시 주문하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비호하고 머물려 두었다가 끝내 달아나 돌아오게 하였으며, 상국이 사실을 알고난 다음에야 감히 ‘주문하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극히 큰 죄이니, 사율(死律)로 논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즉시 자리를 피해 일어나 북쪽을 향해 꿇어 앉은 다음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죄이니, 황제께 죄를 청하지 않을 수 있겠소."
하자, 부사도 일어나서 말하기를,
"국왕이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뜻은 우리들이 돌아가서 황제께 아뢰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의논해야 하는 것은 단지 대신의 죄입니다."
하였으나, 상사 뇌호(雷虎)는 목석같이 조금도 표정을 바꾸지 않고 주위를 돌아볼 뿐이었다. 상이 자리로 돌아와서 이르기를,
"대신의 죄를 만약 사형으로 처리한다면 너무나 중하지 않습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대신뿐만이 아니라 여러 신하들의 죄도 모두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천하의 법이 금석(金石)처럼 엄하므로 일시의 견해로 경하게 하거나 중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경인년 일은 오늘날에다 비하면 중한데도 황제께서 특별히 너그러운 법을 적용하시어 사형은 면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대신의 죄가 어찌 사형에 이르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경인년의 일은 저희들이 경한지 중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법으로 논한다면 염초를 은밀히 사들이고 국경을 넘어 나무를 벤 죄도 사형으로 논하였는데 더구나 상국에서 도망쳐 돌아온 백성을 숨겨두고 즉시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국의 물품을 은밀히 사들이거나 상국의 국경을 넘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정해진 법이 있습니다마는 이 일은 미처 보고하지 못한 죄뿐입니다. 어떻게 비교해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안추원 한 사람이 저의 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꼭 비호하고 감추어둔 채 스스로 상국의 벌을 받으려 했겠습니까. 넓은 하늘의 아래가 모두 황제의 땅이고 보면 저희 나라도 황제의 땅입니다. 만약 중국의 백성이 도망쳐 중국의 땅에 숨었는데 미처 보고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의 죄도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상국에서 시행하는 법으로 저희 나라에 시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에 섭섭한 점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그러합니다만, 각자 지키는 경계가 있는데 또한 어찌 법의 적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이 이미 할 말을 다 하였으니, 국왕께서는 어떤 법으로 논죄하고 싶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칙사는 사죄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나는 사죄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오. 소견이 각기 다르니 다시 잘 생각해봐야 하겠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처음에 변방 신하가 대신에게 보고하여 대신이 의논한 뒤에 국왕에게 아뢰지 않았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이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스스로 죄를 감당하였기 때문에 실상을 숨긴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주 부윤이 감사에게 보고하자 감사가 곧장 장계를 올렸으므로 내가 먼저 보고 나서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소."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시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겠습니다."
하니, 정태화·홍명하·김좌명이 들어와 기둥 밖에 앉았다. 사신이 묻기를,
"처음에 문서를 대신이 먼저 보았소, 국왕이 먼저 보았소?"
하니, 세 신하가 일제히 대답하기를,
"신하의 의리상 군부에게 죄를 미룰 수 없기에 전날 조사받던 때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들로 하여금 사실대로 고하게 하시니, 어찌 감히 명을 어기겠습니까. 처음에 의주 부윤이 감사에게 보고하자 감사가 상에게 계문하여 비국에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서로 의논하여 아뢰었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세 사람을 나가게 한 다음 상에게 고하기를,
"국왕은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할지 분명히 분부해 주십시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죄의 법을 적용하시는 것은 칙사의 처분에 맡기겠소."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국왕의 말이 이렇게 간절하니, 분부대로 정배로 정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우 감사하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의주 부윤이 이미 죽어서 묘당이 그 죄를 대신 받았으니, 평안 감사는 별로 논할 만한 죄가 없습니다. 조사의 일이 끝나고 더위도 혹독하니 국왕께서는 궁으로 돌아가소서. 저희들도 19 일에는 길을 떠나겠습니다."
하자, 상이 더 머물렀다 가라고 청하니, 사신이 2일 더 머물러 있겠다고 허락하였다. 상이 궁으로 돌아왔다.
살피건대, 추원의 일을 조사하는 날에 상이 받은 곤욕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당초 추원이 도망쳐 돌아왔을 때에도 자문과 아울러 도로 보내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묘당의 신하들이 자잘한 인애심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우환을 염려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여 강한 이웃 나라에게 신의를 잃어서 임금에게 치욕을 끼쳤는데, 벌금을 무는 데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일을 맡은 신하들이 어떻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두 대신이 산림(山林)의 선비가 주장한 의논에 흔들려 그랬다고도 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세상에 이른바 선비의 의논이라는 것도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해적 정성공(鄭聖功)의 부하를 청나라로 들여보낼 적에 온 나라의 선비들이 미친듯이 분주하였고 심지어는 시를 지어 통곡하며 당시의 재상을 비난하였는데, 만약 그들의 말이 먹혀들었더라면 그 화가 어찌 추원의 일 정도로만 그치고 말았겠는가.

 

7월 18일 정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를 인견하였다. 태화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신들 때문에 저들을 접대하면서 적잖은 욕을 당하셨는데, 이렇게 임금이 욕을 당하는 날에 신하로서 임금을 위해 죽는 의리를 바치지 못한 채 대신의 반열에 얼굴을 들고 있으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우리 나라가 잘못한 것이다. 그가 고국으로 도망쳐 들어와 친척을 만나보려고 한 정상을 측은히 여겼다가 오늘과 같은 일을 초래하였으니, 그야말로 이른바 ‘작은 일을 참지 못하여 큰 계획을 그르쳤다.’는 것이다."
하였다. 태화 등이 아뢰기를,
"외인(外人)의 말을 들으니 근래 대내에 귀신이 요변을 일으키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통명전(通明殿) 근처에 정말 그런 일이 있다. 돌덩이와 기와 조각이 날아오거나 의복에 불이 붙거나 궁인의 머리카락이 잘리는 등의 일이 자주 있는데, 궁인들이 거처하는 곳은 더욱 심하다. 이치로 미루어 보면 넓은 집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또 이곳이 여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순음(純陰)이 많이 모여 요사스러운 재앙이 생긴 것 같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유자(儒者)의 논리로 말한다면 상께서 더욱 덕을 닦아 물리쳐야 하겠습니다만, 역시 자전을 이 궁에 그대로 모셔서는 안 되겠으니, 거처를 옮기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엊그제 전라 감사의 장계에는 단지 ‘이성시(李聖時)가 계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간원이 잡아오자고 한 계사에는 심지어 ‘그 어미를 어미로 여기지 않고 남처럼 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이 말대로면 삼성(三省)이 국문해야 될 죄인입니다. 너무나 지나치지 않습니까."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세상 사람들이 계모 섬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대간의 계사(啓辭)는 비록 풍문이라도 아뢸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으나, 이러한 일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만드는 데에 지나친 점이 있었으니, 이는 대간이 글을 잘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대간의 계사를 보건대, 사람의 과실을 말하는 데에는 말을 반드시 몹시 매섭게 하는데, 이게 어찌 글을 잘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인심이 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니, 도승지 김수흥이 아뢰기를,
"근래에 조사 건 때문에 상께서 여러 번 관소에 나가셨으니, 치욕을 많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언 이단석이 이때를 당해 날마다 사직 단자를 올리며 아직까지도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정말 매우 부당합니다."
하였다.

 

사간 정계주, 정언 정재희가 이성시의 일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최일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윽고 여론이 비난하자, 최일과 정계주·정재희가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대사간 강백년이 모두 체차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9일 무술

정언 이단석도 경연의 신하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청나라 사신이 역관을 불러 죄를 정하는 문서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는데, 두 대신에게 죄명을 가하여 전가정배(全家定配)하고 김좌명의 죄는 감하여 파직하도록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우상 허적을 부르라 명하여 아울러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신이 이미 나와 같이 조사하여 죄를 정해 놓고 지금에 이르러 독자적으로 고쳐 정하였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다. 이를 항의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김좌명이 죄를 감해 받았는데 난처할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좌명은 대신과 죄가 같은데 하필 그에게만 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저들이 ‘안추원이 온 뒤에 우리 나라가 본래 들여보내려고 하였다.’라고 한 말을 거짓으로 꾸몄다고 하여 문서 가운데에 첨가해 넣었으니,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건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 군신이 실정을 말한 것뿐인데 지금 도리어 거짓으로 꾸몄다고 하는가. 이는 대신만 해당될 뿐만 아니라 국왕도 부끄럽고 미안하게 여기고 있으니, 애당초 국왕과 같이 조사한 본의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라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 등이 관소로 가서 상이 말한 대로 청나라 사신에게 전하니, 전가 사변을 삭제하도록 허락하고 극변정배(極邊定配)로 정해 주었으나, ‘거짓으로 꾸몄다.’는 등의 말은 반복해서 변론하였으나 끝내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7월 20일 기해

성후설(成後卨)을 집의로 삼았다.

 

경덕궁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거처를 옮기기 위해서였다.

 

7월 21일 경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니, 상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전별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감죄한 대신을 본국에서 직무를 보게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국의 처분을 기다리겠소. 그 전에는 대죄하는 몸인데 어찌 공무를 볼 수 있겠소."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국왕의 말씀이 정말로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환궁하였다.

 

집의 성후설이 아뢰기를,
"병조 좌랑 이유룡(李猶龍)은 승문 박사(承文博士) 강필주(姜弼周)와 사이가 안 좋은 이유로 윤리에 관계되는 잘못을 들먹이며 공공연히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옳다면 필주는 진실로 의관의 반열에 끼일 수 없겠지만, 무고라면 유룡이 대신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한 곳에서 대질 심문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나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필주가 아버지뻘되는 일가에게 양자로 섰는데 그에 대한 예조의 입지(立旨)가 양부가 죽어 성복한 뒤에 나왔다. 삼 년이 되어 복을 벗을 때에 외딴 시골에 예를 아는 자가 없어서 달수와 날수를 계산해 보지 못한 채 복을 벗었다. 그러자 유룡이 혐오하다가 욕하면서 상의 기간을 줄여 복을 입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간이 이러한 청을 한 것이다. 그뒤 대신이 심리할 때 ‘필주가 비록 불행을 당하였으나 죄라고 할 수 없고 유룡이 한 행위는 야박하지마는 중한 법으로 다스릴 수가 없다.’라고 하여, 모두 파직하고 방면하였다.

 

7월 22일 신축

우상 허적이 경연에서 병에 대한 실정을 아뢰고 또 옥당이 올린 차자의 내용을 들어 말하니, 상이, 국사가 한창 어렵다고 반복해서 타이르고 사직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7월 24일 계묘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김징(金澄)을 헌납으로, 조헌경(曺憲卿)·어진익(魚震翼)을 정언으로, 안숙(安塾)을 지평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거처를 옮길 때에 종묘에 고하는 예가 있어야 합당할 듯합니다. 그런데 신들이 전례를 상고해 보았더니, 인조조에 이현궁(梨峴宮)으로 옮길 때에 잠시 옮기는 일로 종묘에 고하는 것은 번거로울 것 같다고 분부하셨으며, 그후 신묘·기해 두 해에 경덕궁으로 옮길 때에도 종묘에 고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근래의 전례에 따라 고하지 말라고 하였다.

 

7월 25일 갑진

한성부가 아뢰기를,
"올해 호적의 사안은 매우 엄하게 하여 백성의 호구가 누락된 것이 거의 없는데, 엊그제 대간의 계사로 인해 다시 수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대부가에서 일하는 노비 중 솔노비(率奴婢) 가운데에 이미 들어간 자가 주인집의 문 밖에 막을 치고 산다는 이유로 추가로 수색에 들어간 자가 많은데, 솔노비의 각 호구가 두 곳에 중복 기록되어 사리상 맞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런대로 가호의 면모를 갖춘 자를 제외하고 모두 삭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외방에 입적한 사람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빈집을 빌려 들어가거나, 협실에 붙어 살면서 서울에 입적한 사람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경기에 공문을 보내 조사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각부(各部)로 하여금 그때 거주하였는지의 여부를 적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혹은 고향에 처자식을 그대로 두고 혼자만 올라온 자도 있었고, 혹은 자신도 올라오지 않은 채 거짓으로 입적한 자도 있었고, 혹은 타인의 협실을 임시로 빌려 잠시 머물렀다가 돌아가려고 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유들은 모두 본적지로 돌아가게 하여 간사한 백성들이 요역을 피하려는 폐단을 막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7월 26일 을사

도목 대정을 열었다. 이후산을 원양 감사로, 김익렴을 집의로, 이은상을 홍문 제학으로, 이민적·이숙·이익·이유상·이단하·홍주국·이세장·홍만형을 지제교로, 이원로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헌납 김징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언로의 직책에 있을 때 투기하는 부녀자 두 명을 논핵하고서 나쁜 풍속을 조금 경계하게 되었을 것으로 여겼는데 뒤이어 대신의 수의로 인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 원임 대신의 수의에 많은 증거를 늘어 놓았으며 심지어는 두 집을 추고한 문안 가운데 언급되지 않은 것도 있는 등 인후한 뜻이 말에 넘쳐 흘렀습니다. 신이 읽고 놀라면서, 각박한 소인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재상이 옳다고 한 것을 대간이 그르다고 한 것은 참으로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니, 신 또한 어떻게 감히 들은 바를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익풍군 이속에게 사정을 나눈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이, 질투하고 사나운 임씨가 두려워서 다른 집에 가 숨었는데 임씨가 친히 가마를 타고 노복을 많이 데리고 가 그 집에 갑자기 들이닥쳐 그 여종을 붙잡아 줄로 목을 맨 다음 손으로 끌고 돌아와 참혹한 벌을 주었습니다. 속이 죽은 뒤에 그 여종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도주하자, 그 여종의 어미에게 화를 내어 죽이고는 길가에다 시체를 버렸습니다. 이는 정말로 전일에 올린 계사의 내용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임씨를 위해 변론하는 자들은 그 사건을 양령부인에게로 떠넘기려 하고 있으니, 이게 과연 인정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양령부인이 스스로 변명하지 않은 것은 어찌 처에게는 죄가 중하고 어미에게는 죄가 가볍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박순(朴錞)의 처 조씨(趙氏)의 일에 있어서는 더욱 더 명백합니다. 그가 죽일 때에 솜으로 입을 막아놓고 심지어 불에 달군 칼과 돌을 사용하여 갖은 음형(淫刑)을 가하였으니, 인체(人彘)058)  의 일과 그리 차이가 없습니다. 도성의 사대부와 여염 백성으로부터 지방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수근거리며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원임 대신만 우연히 못 들은 것입니다.
‘부녀자에게 곤장을 친다는 것은 법전이나 《대명률》에 뚜렷이 나타난 곳이 없다.’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 갑니다. 국전에 ‘사대부의 부녀자가 산수를 구경다니거나 몸소 성황당에 제사를 지낼 경우에는 모두 곤장 1백 대를 친다.’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투기심이 강하여 사람을 죽인 자에게 곤장을 칠 수가 없단 말입니까. 지금 인조조의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재상의 며느리가 불효하였거나 투기하여 몹쓸짓을 하였다가 대간의 계사로 인해 곤장을 맞은 사람이 5명이나 되었으나, 그때에 힘을 써 구한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이 도리어 풍속을 해치고 버린다는 죄목으로 돌리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신이 들은 바와는 다릅니다. 신이 이미 대신의 배척을 받았는데 어떻게 감히 대간의 직책에 그대로 있겠습니까. 체차해 내쳐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강백년이 아뢰기를,
"신이 형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이미 임씨·조씨 두 집의 종에게 받은 공초와 그 집안 어른에게 받은 함문(緘問) 외에는 확인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뜻으로 참석한 동료들을 따라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자한 말을 신만 듣지 못한 채 범연히 계사에 참여하였으니,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홍수하가 처치하기를,
"김징은 일에 따라 과감하게 말하여 풍체가 볼 만하니 출사하게 하고, 강백년은 억지로 인혐하여 말이 몹시 구차스러우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애초에 임씨와 조씨의 일로 대신에게 수의한 일이 있었는데, 영부사 이경석의 의논에 대간의 계사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기 때문에 김징이 이처럼 인피하였던 것이다.

 

7월 29일 무신

헌납 김징 등이 아뢰기를,
"대각의 체면은 엄중하고 대신(大臣)의 분의는 준절하므로 대신(臺臣)이 일을 논할 때 대신(大臣)에게 글로 알려주는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전 사성 이유(李秞)는 간관으로 민점의 파직을 의논하는 때에 대청(臺廳)에 앉아 있으면서 한편으로 대신에게 글로 알려주었습니다. 대간의 체면을 손상시킨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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