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6권, 현종 7년 1666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4. 13:23
반응형

8월 1일 기유

도승지 김수흥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근래에 묘당이 비어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를 회계하지 못한 것이 매우 많으니 무척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급하지 않은 일은 잠시 대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렸다가 회계하고, 급한 일은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회계하라."
하였다. 지평 홍수하(洪受河)가 계사를 전하고 비답을 받을 때에 불찰한 잘못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8월 2일 경술

상이 대왕 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8월 3일 신해

김만기(金萬基)를 대사간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삼았다.

 

평안도 의주(義州)와 철산(鐵山) 등의 고을에 극심한 황재(蝗災)가 발생하였다.

 

8월 4일 임자

집의 김익렴이 아뢰기를,
"남원 부사 김명열(金命說)은 직책에 걸맞지 않는 데다가 그의 집이 또 가까이 있으니, 절대로 백성을 바로잡고 제어하지 못할 것입니다. 순천 부사 한정일(韓井一)은 평소 지위와 명망이 없고 치적(治績)도 없었으니, 절대로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킬 가망이 없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5일 계축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근래에 가뭄이 극심하고 폭풍이 연이어 불어와 벼가 심하게 손상되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백성들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한심스럽다. 가을이 지났지만 상규(常規)에 얽매여서는 안 되겠으니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라."

 

헌부가, 경자년059)   이전에 개간한 땅을 백성에게 돌려주라는 전계(前啓)를 중지하였다.

 

8월 6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8일 병진

조복양(趙復陽)을 대사성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김만기(金萬基)를 승지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가뭄이 이렇게 혹심하여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므로 심리(審理)를 행하고자 한다. 유사에게 말하여 거행하게 하라."

 

정원이 가뭄으로 인하여 경계의 말을 진달하면서 수성에 더욱 힘쓰고 크게 진작하되, 재이를 만났을 때 거행해야 할 사안들을 유사로 하여금 차근차근 거행하게 하라고 청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8월 9일 정사

부응교 김만균(金萬均), 부교리 홍만용(洪萬容), 수찬 윤심(尹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가뭄이 이렇게 극심한 데다 태백성이 또 나타나니, 두려워하며 수성하는 도리에는 필시 적절한 대책이 있을 것입니다. 자주 경연에 납시어 성심으로 학문에 힘쓴다면 어찌 성덕에 보탬이 없겠습니까."
하고, 윤심도 학문에 힘쓰고 신하를 자주 접하라는 뜻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이처럼 심하여 백성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절박한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경연을 열어 신하를 접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나, 눈병이 아무때나 발작하여 신하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있으니 진실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사치의 해는 천재(天災)보다 심하다.’라고 했는데, 근래에 여염에 사치가 극심하니, 성상께서 몸소 검소한 덕을 닦는 것만이 인도할 수 있는 방도가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치가 극성하면 백성의 재산이 고갈되는 법인데, 그 해가 천재보다 심하다고 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만균이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내관이 상의 분부를 받아 무소뿔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만약 쓰실 데가 있으시면 상방이나 호조가 있는데 하필이면 상의 분부로 여염에서 사들이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래 이런 일이 없었으니 필시 와전일 것으로 여긴다마는, 지금 이 말을 들으니 나의 마음에 불안하다."
하자, 만균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온당치 않은 일이 여염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성상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신의 마음이 석연히 풀렸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엊그제 사옹원에서 바치고 있는 자기(磁器)가 옛날의 제도가 아니라고 하여 다시 만들라고 명하셨다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옛날 와신상담(臥薪嘗膽)하였던 임금은 필시 이러한 일을 생각조차도 못했을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궐에서 사용하는 자기는 여염에서 사용하는 그릇과는 제도가 같지 않다. 그런데 4, 5년 이래로 점차 옛날의 모양을 상실해 혼잡되어 구분이 없기 때문에 도로 내려보낸 일이 있었다마는, 사실 사치에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자, 만균이 아뢰기를,
"이는 비록 사소한 일이나 물건에 완미하지 않아야 한다는 고인의 경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옳은 말이라고 하였다.

 

8월 10일 무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금부·형조 당상, 삼사의 신하들과 더불어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심리하였다. 상이 묻기를,
"박형(朴泂)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하니,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박형은 심양에서 세운 공로가 있으니, 사형을 면해 줄 만도 합니다."
하고, 대사헌 이경휘가 또 박형이 홍명구의 군관으로 있을 때에 대장에게 충성한 상황을 아뢰며 특별히 방면해 주어 다른 사람을 권장하자고 청하니, 상이 명하여 사형을 감해 먼 변방으로 정배하라고 하였다. 그 나머지는 모두 경중을 나누어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대사헌 이경휘가 아뢰기를,
"의주 부윤 정륜(鄭錀)은 국경 지역을 지킨 신하로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을 금하지 못하여 끝내 일이 생기게 하였고, 또 조정의 지시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먼저 사적으로 뇌물을 주었는데, 그 뇌물로 들어갈 물건을 민결(民結)에서 징수함으로써 크게 변신의 도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은 묘당이 스스로 감당할 것임을 알면서도 제멋대로 공물(公物)을 가지고 통관의 무리에게 뇌물을 주었으니, 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 수원 부사 구문치(具文治)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겁을 먹고 역관의 집으로 달려가 사사로이 뇌물을 주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들을 모두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조사를 받을 때에 역관의 무리가 그때그때 들은 바를 즉시 통보하지 않아 끝내 나라의 일이 전도되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나랏일을 망각하고 저들을 위하였으니 너무나 한심한 일입니다. 만약 중한 법률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훗날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서효남(徐孝男)·현덕우(玄德宇)·장현(張炫) 등을 법률대로 처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나문하여 정죄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신하들의 상가(賞加)를 환수하라는 계사를 정지하였다.

 

상이 일렀다.
"호판 정치화의 병이 차도가 없다고 하는데, 세폐(歲幣)와 연분(年分) 등의 일은 모두 긴급한 일이고 금오(金吾)의 직책 또한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치화의 본직 및 겸임한 판의금을 개차하라."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오늘날 인재가 귀한데, 윤강(尹絳)·조복양(趙復陽)·이상진(李尙眞)·이정기(李廷夔) 같은 사람은 모두 쓸만한 재목인데 오랫동안 시골에 있었으니 모두 거두어 써야 하겠습니다."
하고, 김만균은 아뢰기를,
"밖에 있는 유신(儒臣)을 제때에 불러들여 재앙에 대응하는 방도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히 올라와야 한다는 뜻으로 정원이 말을 만들어 하유하라."
하였다.

 

8월 11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맹주서(孟胄瑞)·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장선징(張善澂)을 우승지로, 유심(柳淰)을 병조 참판으로, 이완(李浣)을 판의금으로 삼고, 김수흥(金壽興)을 발탁하여 호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한재가 이 지경에 이르러 민생의 목숨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 지금 비록 가망은 없지만 어찌할 수 없다고 버려두고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번 병에 걸려 오래도록 끌어온 끝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희생(犧牲)을 바치는 예를 대신 행하게 하였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차라리 죽고만 싶다. 헌관을 뽑아 보내 다시 한껏 정성을 다하여 기우제를 지내게 하라."

 

집의 김익렴이 아뢰기를,
"장령 이광적은 그의 죽은 처의 장지를 놓고 어떤 사람과 다투었는데, 그 사람이 본부(本府)에 정장(呈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광적은 대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끝내 인혐하여 스스로 논열하지 않고 있으니 이보다 더 염치없는 일이 없습니다. 결코 이 사람으로 하여금 본부의 직책을 다시 맡게 할 수 없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함경도 경흥인(慶興人)인 역리 유대영(兪大英)이 병으로 죽었는데, 그의 처가 관(棺) 앞에서 목매어 죽었다. 본도 감사가 그 일을 장계로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정표하여 북방의 거칠고 비속한 풍속을 진작시키도록 하였다.

 

8월 12일 경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가 임금의 재목이 못되면서 외람되이 큰 유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조종(祖宗)이 물려준 중대한 유업을 실추시킬까 염려하였다. 그런데 7년 사이에 비와 햇볕이 시절에 맞지 않고 바람과 서리의 피해가 뒤를 이어 닥쳐오니, 가련한 우리 백성들이 곤궁을 당하여 죽은 자가 얼마나 되었는가? 더구나 올 한 해는 장마가 졌다가는 또 극심한 가뭄이 닥쳐와 들판이 텅 비어 결실을 거둘 희망이 끊어졌으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말이 이에 미치니 심장이 끊어지는 듯하다.
아, 하늘은 어찌하여 나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백성들이 구덩이에 쓰러져 뒹굴면서 살려달라고 애처로이 호소하는데도 모른 체 한단 말인가. 백성의 부모된 입장으로서 내 몸에 고통이 있는 것과 같고 등에 가시나무가 있는 것과 같은데, 감히 내게는 재앙이 없다 하여 소홀히 하겠는가.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요,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은 양식이다. 나라에 백성이 없고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는데도 나라를 다스린 자는 있지 않았다. 나는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경외하는 도리에 힘써 기왕의 허물들을 반성할 터이니 해조로 하여금 반찬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는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게 하라. 또 생각하건대, 죄는 실로 내게 있으니 어찌 남을 책망하겠는가. 그러나 오늘의 대소 신료 또한 마음을 합해 조심하고 공경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각자의 직책을 다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아, 전에 말을 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직 그 실효를 보지 못하였으니, 내가 일을 해내기에 부족한 자라고 여겨서인가? 허물이 실로 내게 있으니 다시 누구를 탓하겠는가. 말이 사리에 맞지 않더라도 내가 죄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만, 근래에 인심이 순후하지 않아 명에 응하여 말을 드릴 때 간혹 간사한 말과 파당을 지은 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만은 내 용서하지 않겠다. 승지는 나를 대신해 교지를 초안하여 널리 바른말을 구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돕게 하라."
하니, 정원이, 상이 말한 그대로 안팎에 포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도에 7월 6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11일에 그쳤는데, 하천과 도랑이 넘쳐 흘러 물가에 인접한 논밭 중에 새로 내가 생기거나 모래에 뒤덮인 곳이 많았다.

 

8월 13일 신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재가 이와 같으니 농사가 이미 가망이 없다. 상강이 지나 결실한 정도를 알아야만 백성을 구제하는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국가 경비에 쓰고 남은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겨우 명년 7월이나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판윤 김좌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호서와 호남 농사는 그래도 가망이 있으나 목화는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포목의 징수는 더욱더 감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자, 좌명이 아뢰기를,
"베로 바치는 백성에게 쌀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한다면 백성들이 마련해 바치기에 편리할 것이고, 그 쌀로 구황하는 데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목화의 농사가 부실한 곳은 쌀로 대신 납부하게 하되, 베는 서울의 각 관서에 비축된 것으로 대용하고 강도의 베로 잇대어 쓴다면 백성들이 입는 혜택이 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먼 지방에서 과거보는 자들이 지금 와 모이고 있기 때문에 서울의 쌀값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그러니 상평청의 쌀 4, 5백 석을 시장에 내주면 시장의 쌀값이 폭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따라 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소결청의 문서는 거의 마무리되어 갑니다마는, 내사의 죄인은 원통한 경우가 있더라도 외정(外廷)에서는 알 수 없으니, 그 문서를 소결청에 내주거나 상께서 친히 소결하시어 판결이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의 죄인은 두세 사람이 있을 뿐이고 심적(沈賊)의 첩은 이미 정배하였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강씨의 내인이 강씨의 유서에 관한 일로 여러 번 무거운 형벌을 받았고, 그 친족 중 판결이 지체되고 있는 자가 많습니다. 외정에서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으나 내옥에 관계된 일이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김시진이 아뢰기를,
"이러한 유들을 특별히 풀어주시면 이렇게 가뭄이 들어 애타고 있는 때에 하늘을 감동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8월 14일 임술

김우석(金禹錫)을 병조 참지로, 민광소(閔光熽)를 장령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수찬으로, 성후설(成後卨)을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검열 이민채(李敏采)가 상소하기를,
"사관이 맡은 일은 당시의 기록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기밀에 관계되는 보고라 할지라도 사관이 알도록 한 것은 그 뜻이 매우 깊고 그 법이 매우 엄합니다. 그러나 근래에 사서(私書)가 반입되는 것이나 밀계(密啓)가 올려지는 것에 대해 사관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니, 왜 이다지도 방비를 너무 심하게 하고 일을 너무 지나치게 처리하여 이 지경으로 경솔히 나라의 제도를 무너뜨린단 말입니까. 한 명의 하찮은 신하가 무시당함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사국(史局)의 규례를 무너뜨렸으니, 어찌 감히 하루라도 직책을 맡고 있겠습니까. 신을 물리쳐서 사관의 소임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검열 이민채가, 관반(館伴)의 사서와 신이 승지로 있을 때에 올린 밀계(密啓)를 사관에게 먼저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엊그제 소를 올려 공박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심각하였다 하니, 신은 그지없이 두렵습니다. 모든 소차(疏箚) 및 장계는 반드시 먼저 사관에게 보이지만, 제도(諸道)의 계본(啓本)·계목(啓目) 공사(公事)와 각사의 초기(草記)와 본원(本院)의 계사는 본래 사관에게 먼저 보이는 규례가 없고 비답이 내려진 뒤에 사관에게 보이는 법이니, 이것은 실로 승정원의 구례(舊例)입니다. 반신(伴臣)의 별지(別紙) 및 신의 계사는 비국의 초기(草記)와 본원의 계사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그것을 사관에게 먼저 보이지 않은 것은 숨길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례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사관은 단지 그 글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가 일기(日記)에 기록하면 그만이며, 혹 안에 두고 내려 보내지 않을 경우에는 내려주도록 품의하는 것 역시 전례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민채가 상소한 뜻에는 마치 신이 새로운 규례를 만든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아, 이상도 합니다. 그러나 사관의 말은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태연히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8월 20일 무진

송시철(宋時喆)을 승지로, 강백년(姜栢年)을 좌윤으로, 이숙(李䎘)을 응교로, 이정(李程)을 부수찬으로, 남이성(南二星)을 교리로, 이만영(李晩榮)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좌의정 홍명하가 차자를 올려 면직해 주기를 청하고, 아뢰기를,
"옛날에 양만리(楊萬里)가 그의 임금에게 고하기를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의 뜻은 날카로운 데 천하의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고, 일을 하지 않는 임금의 뜻은 더딘데 천하의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전후로 재이를 만나 두려워하고는 계시지만 정치를 잘해 보겠다는 마음이 늘 병환으로 저지되거나 흔들리고 재앙이 지나간 뒤에는 성상의 생각도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지금 안팎에서 성상의 잘못을 말할 때 모두가 분발의 뜻이 없다고 합니다. 이로 볼 때에 성상의 덕에 비록 하자가 없으나, 밖으로 드러난 것이 더디다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고인이 이른바 ‘일을 하지 않은 임금과 같은 길을 걷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마음에 불쾌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사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현재 수재를 겪고 난 끝에 또 한재가 혹독하게 들었으므로 지금 비록 비가 오더라도 이미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 도에서 입은 재해는 연분(年分)을 실시한 뒤에 그 실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마는, 경기는 막 사신의 행차를 치르고 나서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으니 올 가을에 보통 때처럼 세금을 받아들인다면 필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해조에서 논농사에 입은 재해만 감해주고 밭농사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에는, 세입은 논과 밭을 구별하여 각각 거기에서 나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끝내 밭농사의 재해를 감해 주지 않을 경우 세금으로 낼 콩을 어디에서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불가불 변통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대동미는 논과 밭을 따지지 않고 결수에 따라 받아들이기 때문에 해당 관청에서 앞으로 사목을 마련하여 경기의 고을에 알릴 것이니, 지금 특별히 명하여 참작해 견감해 주게 하신다면 재해를 입은 전답이 혜택을 입을 것인데, 이는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사가 불행하여 재이가 번갈아 생기고 수재와 한재가 잇따르고 있으므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편안한 날이 없었는데,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니 경계와 훈계가 자못 절실하였으므로 내 매우 감탄하였다. 사양하지 말고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끝에 말한 일은 후일 등대하였을 때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8월 21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3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나고, 밤에 달이 동정 성좌로 들어갔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원양 감사의 장계를 보니, 본도에 가장 심하게 흉년이 들어 세금을 견감하고 구제하는 일을 실질적으로 헤아려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국의 당상 중 판윤 김좌명은 선혜청 당상으로 원양청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도의 구황 정책을 그로 하여금 전부 관장하게 하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이 휴가를 받아 시골로 내려갈 때에 보았는데, 경기의 백성들이 성상의 간절한 하교를 보고 감동한 나머지 기대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올해에는 콩과 팥이 특히 여물지 않았기 때문에 밭만 있는 백성들도 모두 쌀로 마련하여 선혜청에 납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1결에 대해 받는 수량 중 춘추로 각각 두 말을 감해준다면 백성들이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가을에 받을 쌀은 새 곡식을 거두고 있으므로 춘등(春等) 때처럼 곤란하지는 않을 것이니 한 말만 감해주고 춘등에는 두 말을 감해주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콩은 반절을 감해주고 밭에 대해 받는 쌀에 있어서는, 올 추등에는 한 말을 감해주고 내년 춘등에는 두 말을 감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민유중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에 도망가 받을 곳이 없는 노비 신공의 유들을 뽑아서 장계로 아뢰면서 10년 동안 신공을 면제해 주어 도로 모여 살게 하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도에서 깨끗이 면제해 준 갑진년 이전의 수가 거의 5천 명이나 되는데 이번 작성한 문안에는 천여 명밖에 되지 않으니 조사해서 뽑은 것이 정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신공을 면제해 주는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가볍게 허락해 줄 수는 없습니다마는, 이처럼 목화가 크게 흉작이 된 해에 이 무리에게 베를 받아내기란 사세상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갑진년 이전은 이미 면제 대상에 들어갔지만 을사·병오 두 해의 신공도 불가불 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해의 신공을 특별히 감해주어 다시 모여 사는가의 여부를 보아가며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올해의 목화 작황은 팔도가 똑같이 부실하니, 신역 가포의 유를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전량을 견감해 줄 수는 없더라도 반절만 감해주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반드시 먼저 호조·병조에 남아있는 수량이 얼마이며, 써야 할 수량이 얼마이며, 감해주어야 할 수량이 얼마인가를 알아야만 변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본조에서 1년에 받아들인 수량이 불과 1천 1백 동인데, 지난해 사용한 수량이 1천 1백여 동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더 감해 받아들인다면 정말 잇대어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감해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용도를 감해야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사용하는 수량이 해마다 늘어나 인조조 때와 비교하면 몇 배 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호조 판서 김수흥에게 묻기를,
"본조가 1년에 받아들여야 할 수량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새로 이 직임을 제수받아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마는, 지금 창고에 있는 것과 강도에 비축된 것이 겨우 8천여 동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한번 절사(節使)로 갈 때 드는 방물이 3백여 동이나 되고 별사(別使)가 있을 경우에는 그 수량이 배나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인조조 병술년 이후로 해마다 쓴 가포의 수량을 상고하여 써서 들이라."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대신이 올린 차자로 인해 어린아이에게 받는 군포를 뽑아 감해주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각도에서 작성한 문안이 지금에야 올라왔는데, 합계를 내보니 10세 이하에게 받은 각종 군포가 3천여 명이었고 수군은 5백 명이었습니다. 만약 변통하려 한다면 불가불 그 연한을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에는 6세 이하로 한정하여 면제해 주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6세 이하를 뽑아 문안을 작성하되, 후일 등대할 때 다시 품의하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수비하는 아병(牙兵) 3천 5백 명을 각각 초관(哨官)을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청에서 급료로 줄 베가 없어서 다만 열 군데 둔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요량해 나누어 주게 함으로써 춘추로 훈련할 밑천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아병이 거기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가 상당히 많은데 장관(將官)은 둔전 감관으로 차출될 뿐이지 다른 데로 갈 길이 없으니, 설사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둔감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억울하다고 합니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그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는 타청(他廳)의 예에 따라 오래 근무하였을 경우 옮겨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 따라 하라."
하였다. 헌납  김징이 아뢰기를,
"경기 고을의 역포(役布)를 지금 변통하려고 하면 불가불 다른 도도 일체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남이성이 아뢰기를,
"공구 수성하는 도리는 반드시 실지로 한 일이 있어야만 위로 하늘에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들으니, 어떤 공주의 집을 지을 때 병조에서 쓴 가포가 수백 동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에 크게 절약하지 않으면 국가의 저축이나 백성의 힘이 어떻게 견디어 내겠습니까. 지금 만약 목면을 내는 역을 전부 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실지의 혜택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경비는 먼 날까지 생각해야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계산해서는 아니 된다."
하였다. 이성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위 문후(衛文候)처럼 거친 베로 만든 옷과 거친 베로 만든 관(冠) 차림을 하신다면 재물의 용도가 부족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천천히 보아가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래에 불법 행위를 하는 수령이 많다고 하니 염문(廉問)하는 조처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로 보낼 만한 자를 뽑아 아뢰라."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문종 대왕의 행장을 보건대, 안질로 인하여 대신이 경연을 열지 말도록 청하였는데도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비록 환후가 있으시더라도 선조(先祖)의 고사를 본받아 침실 안으로 유신을 불러 들여 수시로 진강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대(召對)라면 경연과는 차이가 있으니, 비록 친히 스스로 읽지는 못하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일찍이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별일이 없는 날에는 취품하게 하되, 옥당으로 하여금 동참하여 진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8월 24일 임신

홍중보(洪重普)를 숭록에, 김좌명(金佐明)을 숭정에, 유혁연(柳嚇然)을 자헌에, 장선징(張善澂)을 가선에 가자(加資)하였는데, 모두 온천에 배종한 공로로 인한 것이었다.

 

8월 25일 계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원양 감사 이후산도 입시하였다. 후산이 아뢰기를,
"본도에 든 흉년은 근고에도 없는 흉년이어서 간성에는 이미 굶어 죽은 백성이 있습니다. 지금 비록 다른 데 곡식을 옮겨다 구제하고 있으나, 명년에 계속해 생활할 계책은 보리와 밀에 달려 있는데 가을보리는 절서가 늦어서 이미 소용이 없으니, 봄보리 종자를 불가불 빨리 옮겨다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영남 연해안의 각 고을 쌀 5, 6천 석을 배로 실어다 구제하자고 청하고, 또 본도 부근에 비축된 봄보리 종자 상당량을 옮겨다 주어서 명년에 파종하게 하자고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8월 26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옥당으로 하여금 《통감(通鑑)》의 당 태종기(唐太宗紀)를 강하게 하였는데, 승지도 승정원에 밀린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간성(杆城) 백성이 13명이나 굶어 죽었다고 하여,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8월 27일 을해

어사 이익·이세장·오시수·남이성·신명규·신후재·김징·심재·이하 등을 각도에 파견하여 수령의 치적을 염문하게 하였다.

 

의주 부윤 성후설이 부임에 앞서 하직 인사를 하였다. 상이 인견하고 수비를 엄중히 하라는 뜻으로 힘써 하유하여 보냈다.

 

8월 28일 병자

우찬성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에게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였으나, 모두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평안 병영에 비축된 면포 15동(同)을 함경도로 수송하여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군사를 구휼하라고 명하였는데, 감사 민정중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8월 29일 정축

유창(兪瑒)을 수원 부사로, 민점(閔點)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옥당의 관원이 《통감(通鑑)》을 강하였는데,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북로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본도의 백성 중 타도로 가 사는 자를 쇄환하는 일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