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기유
우레가 치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3일 경술
이단하·신후재를 지평으로, 송규렴을 정언으로, 심세정을 예조 참의로, 이정을 동래 부사로 삼고, 예빈정 오시수는 중시에 합격하여 통정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겨울철에 우레가 친 변고로 인해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재이가 일어나지 않는 해가 없었지만, 오늘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하겠다. 사임하겠다는 말 또한 상례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부터 군신 상하가 힘써 삼가고 협력한다면, 화를 돌려 상서가 되기는 바랄 수 없더라도 재앙을 없애는 데 한 가지 도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사간 강백년이 아뢰기를,
"근래에 기율이 엄하지 않아 사치하는 풍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절약하는 방안을 여러모로 다 써 보았으나 여염에서 여전히 사치를 숭상하고 있으니, 성상께서 힘써 검소한 덕을 닦으시어 몸소 솔선하신다면 자연히 보고 느껴 감화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10월 4일 신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8일 을묘
김좌명(金佐明)을 형조 판서로, 이원정(李元禎)을 충청 감사로,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김익경(金益炅)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0일 정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다리 부분에 종기가 나서 침을 맞았다.
10월 11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좌상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원자가 현재 강독하고 있는 책을 다 마치면 《소학》을 강독해야 하는데, 언해에 잘못된 곳이 꽤 있으니 지금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고(故) 상신 이항복이 일찍이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지은 《집주》 한 질을 올렸는데, 훈국(訓局)에 보내어 약간 부를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하였습니다. 대개 그 책의 규례는, 《논어》·《맹자》에서 나온 정문(正文)은 모두 주자의 본주(本註)만을 따르고, 그 밖에는 여러 설을 참고하여 단점은 버리고 장점은 취하여 매우 정밀하게 가늠하였습니다. 다만 그 언해에 있어서는 여전히 구본(舊本)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구본은 오로지 정유(程愈)의 주에 따라 언해한 것이므로 이 《집주》와 크게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예조로 하여금 유신에게 물어보고 《집주》에 의거하여 언해를 찬정하도록 하여 주와 언해가 서로 어긋나는 곳이 없게 하소서."
하고, 대사헌 송준길도 명하의 차자와 같은 내용으로 헌의하니, 상이 홍문관으로 하여금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10월 12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 수행한 약방의 관원과 유도(留都)한 신하들에게 상을 주었다.
10월 14일 신유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5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6일 계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방금 사은사의 장계를 보니 ‘청나라 형부 낭중 1명이 김거군(金巨軍)·김대헌(金大憲)과 함께 자문(咨文)을 가지고 봉황성으로 나와 염초를 판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을 체포해 가고자 하는데 이름을 알지 못하니, 금령을 범한 최선일(崔善一)을 압송하여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선전관으로 하여금 선일을 잡아가지고 가서 봉황성에 넘겨주게 하고, 또 괴원으로 하여금 회답의 자문을 만들게 하여 급히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7일 갑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18일 을축
우레가 쳤다.
10월 19일 병인
여성제를 집의로, 신명규를 정언으로, 유철을 좌윤으로, 홍만종을 검열로, 이지형을 통제사로 삼았다. 그런데 이지형은 일찍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썼으므로 관찰사와 의주 부윤의 죄와 다름이 없다는 이유로 간원이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정원이 겨울에 우레가 쳤다는 이유로 경계의 말씀을 드리면서 수성(修省)의 방도를 논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밤에 달이 동정 성좌로 들어갔다.
10월 20일 정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0월 21일 무진
간원이 장흥 부사 한공신(韓公信)의 탐욕스럽고 불법을 저지른 실상에 대해 논핵하고 나문하여 죄를 주자고 청하니, 따랐다.
10월 22일 기사
부교리 홍만용(洪萬容)·심재(沈梓), 수찬 김석주(金錫胄) 등이 재이로 인하여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처음 보위에 오르시던 때에 슬기로운 자질이 일찍부터 뛰어나 아름다운 명성이 드러났고 보면 처음부터 전대보다 훌륭하였으니, 이는 정말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 기회는 이미 잃고 말았습니다. 지난해에 요망한 혜성이 경고의 뜻을 보이자 전하의 마음이 경동되어 뭇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대적으로 방도를 물으셨고 보면 재앙을 돌려 상서로 만들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였는데 이 기회도 이미 잃고 말았습니다. 지난 여름 온천에서 돌아오시던 때에 숙환(宿患)이 이미 나았고 여러 유신들도 다시 나와서 뜻과 기상을 가다듬을 수 있고 덕과 지혜를 정진할 수 있었고 보면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질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였는데 그 기회 또한 잃고 말았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기회는 다가오자마자 지나가 버리고 쓰러지기 쉬운 정치는 움직일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지기만 하니, 때문에 신들이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 힘써서 뭇 벼슬아치들을 면려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마음에 맹세하기를 ‘병은 반드시 놀면서 편하게 지내는 데에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니, 먼저 기욕(嗜欲)을 물리치고 나태함을 징계하여 내 몸부터 과실이 없는 경지에 서게 할 것이며, 백성의 괴로움을 살피어 막히고 가려진 일을 해결하여 사방이 내 집안과 다름이 없게 하리라.’라고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서 자주 경연을 열어 강구하고 연마하는 자료로 삼고 큰 강령을 장악하시어 쓰러져가는 기강을 진작시킴으로써 재상을 면려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고 천명을 이어가는 대책에 힘쓰게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신다면 오늘의 위태로움이 안정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천재지변과 물괴인이(物怪人異)가 달마다 생기니, 가만히 반성해 보건대 그것은 오로지 내가 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심스럽고 두렵고 부끄러워서 진실로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말뜻이 절실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성이 말속에 넘치니, 내 비록 불민하나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라도 암행 어사 신명규(申命圭)가 서계(書啓)하기를,
"호남의 대동법은 산간 고을에 불편하다고 하여 혁파하였는데, 신이 염문하느라고 촌락에 드나들다가 비로소 물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력있는 집안은 혁파한 것을 편리하게 여기고, 가난한 집은 모두 다시 시행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충분히 검토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등대할 때에 여쭈어 처리하겠다고 회계하니, 상이 사안을 비국에 하달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10월 23일 경오
동래 부사 안진(安縝)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 등이 역관들에게 말하기를 ‘10여 년 전에 아란타(阿蘭陀) 군민(郡民)이 물화를 싣고 표류하여 탐라에 닿았는데, 탐라인이 그 물건을 전부 빼앗고 그 사람들을 전라도 내에 흩어 놓았다. 그 가운데 8명이 금년 여름에 배를 타고 몰래 도망와서 강호(江戶)에 정박했다. 그래서 강호에서 그 사건의 본말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서계(書契)를 예조에 보내려 한다. 아란타는 바로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물화를 빼앗고 그 사람들을 억류해 두었으니 이게 과연 성실하고 미더운 도리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차왜가 나왔을 때 본부(本府)와 접위관(接慰官)의 문답이 예조가 답한 서계와 다르지 않아야 될 것이다. 또 도주(島主)와 강호의 집정자 사이에 크게 틈이 났는데, 만약 서로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도주가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회계하기를,
"이른바 아란타 사람이란 몇 년 전에 표류해 온 남만인(南蠻人)을 말하는 듯한데, 이들의 복색이 왜인과 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았으므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 무슨 근거로 일본으로 들여보내겠습니까. 당초에 파손된 배와 물건을 표류해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우리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숨길 만한 일도 없습니다. 차왜가 오면 그대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역관을 시켜 그들의 복장과 말이 왜인과 같았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그들의 답을 들은 다음에 만인이 표류해 온 실상을 갖추어 말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공문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4일 신미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이하(李夏)를 정언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박경지(朴敬祉)를 평안 병사로, 민진익(閔震益)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10월 25일 임신
대사헌 김수항이 재이로 인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타고난 자품이 인후하고 도량이 깊고 크신데도 일이 혹 비위에 거슬리면 우레와 같은 위엄을 갑자기 내시어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 항상 작고 혈기의 사심이 늘 이김으로써 점차 확대되어 호승하고 편벽된 병통이 되고 발로되어 정사를 해치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의 말이 혹 성상의 뜻을 거슬릴 경우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배척하며 간교하다고 지목하시는데, 가사 조정의 신하가 이러한 점이 있다고 할 경우 귀양을 보내야 할 것이며, 사형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본정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큰 죄를 가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심장이 떨어지고 기운을 상실하게 만들어 명분과 의리를 돌아볼 틈이 없게 하시니, 이게 어찌 성의로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도리이겠습니까.
기억하기로는, 옛날 무술년 겨울에 신이 옥당의 장관으로 경연에 입시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심경(心經)》을 강하시다가 하교하시기를 ‘나의 병통은 내가 스스로 알고 있다. 노여움이 폭발할 때 매양 억누르지 못하여 근심해 왔는데, 근래에 한 가지 법을 얻었다. 노여울 때 노여움을 잊었다가 오랜 뒤에 생각해 보면 비로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부하면 거의 잘못이 없을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지금까지도 소리내어 외우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격이 되어 눈물이 나오고 있는데, 전하께 선왕의 바른 심법(心法)을 본받으시길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도리는 다른 게 아니라 그 요점이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있는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경연을 열 때가 매우 드물었습니다. 이는 비록 성상께서 건강이 편찮은 때가 많아서 접견하시는 데 방해가 되어서 그런 것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정자(程子)가 논한 것처럼 편안히 접견할 수 있는 맑고 한가로운 여가가 없기야 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대궐의 안을 바르게 다스리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궁금이 엄하지 않으면 뭇 사사로운 것을 막아 교화의 근본을 맑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궁금의 안에서는 은혜와 사랑에 가리어 예절이 무시되기도 하며 한계가 이미 해이해져 사사로이 청탁하는 샛길이 쉽게 열리고 있어서 안에서 한 말이 밖으로 나오고 있고 보면 바깥의 말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어떻게 꼭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궁가에 여악(女樂)이 드나든 일에 있어서는 여염의 사이에 자자하게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길거리의 말을 꼭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모두가 궁금이 엄하지 않은 소치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금중(禁中)의 일은 비밀이 철저히 지켜지는데 바깥 사람들이 어디에서 듣겠느냐고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10월 26일 계유
박경지를 통제사로, 이도빈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표류해 온 남만인(南蠻人)에 대해 답할 서계의 일을 물으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난해 청나라 사신이 나올 때에 남만인들이 갑자기 홍제교의 주변에 나와 갖가지로 호소하였기 때문에 전라도에 나누어 두었는데, 왜국으로 도망쳐 들어간 자들은 필시 이 무리일 것입니다."
하고,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호남에 있을 때에 보았는데, 이 무리들이 연로에서 구걸하다가 신에게 호소하기를 ‘만약 저희들을 왜국으로 보내준다면 저희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도망쳐 왜국으로 들어간 것이 의심할 게 없습니다."
하자,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남만인이 타국으로 도주하였는데도 지방 관원이 아직까지 보고하지 않았으니, 정말 한심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본도에 명해 조사하여 아뢴 다음에 치죄하라고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각 관서에서 노비를 허명으로 기록하는 폐단을 한 번 정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대 조정에서 일찍이 조사하여 정리한 적이 있었으니, 지금 도감이 또한 이에 따라 국(局)을 설치하여 그 일을 맡아 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별도로 청 하나를 설치할 것 없이 본도로 하여금 문안을 수정하여 비국에 보내게 한 다음 비국의 당상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되, 비국의 당상 이외에도 이 직임에 합당한 사람이 있으면 별도로 임명하시어 그들과 상의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 산간 고을에 끼치는 대동법의 폐단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말하였기 때문에 막 폐지하였다. 그런데 지금 어사 신명규가 올린 서계(書啓)를 보니, ‘백성들이 다시 시행하였으면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일의 이해가 어떠한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산간 고을에 대동법을 폐지한 뒤로 호남 사람이 심지어 신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편지를 보내 책망하였는데, 대체로 당초에 폐지하기를 원한 고을은 다만 두서너 개의 큰 읍뿐이었고 그 나머지 작은 읍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뜻에는 폐지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었는데, 삼사의 신하가 서로 앞을 다투어 불편하다고 하였고 관찰사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폐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민유중은 그 당시 감사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도 전일에 경솔하게 폐지하자고 청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서울에 있을 때에 이미 산간 고을에는 대동법이 불편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본도에 안찰사로 나가 죽 고을들을 돌아볼 때에 곳곳마다 하소연하는 글을 올려 모두 폐지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대동법의 편리 여부에 대해 물을 때에 민정을 자세히 열거한 다음 치계하여 폐지하자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폐지한 뒤에 또 들으니, 민간에서 도리어 불편하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폐지하기 전에 크고 작은 고을들이 모두 일시에 쌀을 많이 내는 것과 목면으로 바꾸기 어려운 것을 큰 폐단으로 여기었는데, 폐지한 뒤에는 경각사(京各司)가 상납하는 공물의 값을 모두 면포로 준비하였기 때문에 상납할 때 뇌물로 쓰는 것과 툇자받는 폐단은 대동법에 없었고 공물로 바치는 베 품질이 전보다 더 정밀하고 좋아야 했으므로 사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불편하다고 한 것이며, 경각사 주인 무리들도 공물의 가격이 대동법을 시행할 때보다 못하다고 원망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백성의 소원에 따라 다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유중이 또 아뢰기를,
"단 본도의 대동법에 매긴 1결에 납부하는 13두를 올봄부터 영원히 1두를 감해 줄 것입니다마는, 12두도 여전히 너무 많다고 봅니다. 지금 1결에 11두의 제도로 정한다면 크고 작은 고을을 막론하고 백성들이 반드시 편리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12두의 제도는 처음에 비해 감해졌는데 지금 또 1두를 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필시 용도에 부족한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남은 쌀을 모아 두어 불시의 수용으로 삼되, 만일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한 차례 거두어들일 쌀을 감해줌으로써 백성의 힘을 덜어 주도록 한 것은 선대 조정에서 대동법을 시행할 때의 본 의도였으니, 지금 다시 더 감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산간 고을에 대동법을 다시 시행하기로 의논해 정하였으니, 명년 봄부터 시작할 것입니까, 아니면 명년 가을까지 기다릴 것입니까?"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명년 목화가 나오기 전에는 결코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니, 가을이 된 뒤에 받기로 기한을 물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대동의 쌀을 춘추로 나누어서 받아들이는 것은 사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호서는 이에 따라 나누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편리하다고 하나, 호남은 구결은 줄어들고 신결이 늘어남으로 인해 해당 관청에서 신결에 따라 두 분기에 낼 쌀을 춘궁기에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괴롭게 여긴 것입니다. 지금 호서의 예에 의하여 가을의 쌀은 구결의 수로, 봄의 쌀은 신결의 수로 나누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각사가 공물을 상정(詳定)한 원래 수량 이외에 모두 더 적용하는 수량이 있으므로 사실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공물 주인 무리들이 날마다 하소연하자, 할 수 없어서 삼분의 일을 주기도 하고 사분의 일을 주기도 하는데, 일이 매우 구차하고 소략합니다. 대체로 그 값을 베로 계산하면 3백여 동이나 되고 쌀로 계산하더라도 5천여 석에 밑돌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이것을 백성에게 더 부과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데서 재물이 생길 길도 없습니다. 삼가 보건대, 평안도의 전세는 으레 받아서 각 고을에다 놔두고 회록(會錄)하고 있으므로 본도에서 곡식이 많아 늘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본도의 전세로 연도를 한정하여 가져다 사용한다면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 일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안도 전세는 연해안과 강변 그리고 직로(直路)를 제외한 그 나머지 고을들은 2년을 한도로 가져다 쓰도록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후릉 수개 도감 당상 김수항·이시매·남노성이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이시매가 아뢰기를,
"신이 후릉(厚陵)061) 을 봉심하였는데, 사대석(莎臺石)·병풍석(屛風石)은 모두 잡석(雜石)을 사용하였고, 망주석(望柱石)과 양·마(羊馬)는 체제가 단소(短小)하고 조각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개수하려면 반드시 이런 석물을 전부 고쳐야만 미진한 점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당시에 일을 맡았던 신하가 이처럼 신중히 하지 않지는 않았을 것이니, 혹시 유명(遺命)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실록에 그런 사실이 있는지 상고해내라고 명하였는데, 유명이 뚜렷이 드러난 곳이 없다고 하였다.
대사헌 김수항이 아뢰기를,
"유혁연은 품계가 높은 무신으로 지식도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입는 옷차림으로 대신을 찾아가 보았는데, 사체로 보아 어찌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대사헌 강백년이, 유혁연이 대신을 찾아가 보았을 때 우연히 목격하였는데, 즉시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0월 28일 을해
이익을 응교로, 이은상을 대사간으로, 이단하를 부수찬으로, 오정위를 형조 참판으로, 조성보를 지평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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