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정축
대사헌 김수항(金壽恒) 등이 아뢰기를,
"당상의 청망(淸望)을 통색시키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기 때문에 비록 일찍이 거쳤던 사람일지라도 잘못이 있어서 오랫동안 막힘을 당했을 경우, 다시 통하게 하려면 반드시 동료들의 논의가 하나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엊그제 간장(諫長)을 차출할 때에 막힘을 당한 사람을 동료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경솔하게 의망에 넣었으니, 규례를 어긴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시진(金始振)이 평소 사론(士論)의 인정을 받지 못해 오랫동안 청망에 비의되지 못했다가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대사간의 의망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러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무지개가 서고, 밤에는 크게 우레와 번개가 쳤다.
평안도 선천(宣川)·귀성(龜城) 등의 고을에 우레가 크게 쳤는데, 소와 개가 벼락을 맞아 죽었고, 낙뢰로 인한 불이 일어나 민가가 연이어 탔다.
11월 2일 무인
동지정사 정지화(鄭知和), 부사 민점(閔點), 서장관 조원기(趙遠期)가 청나라에 가는데,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근래 우리 나라가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저들의 모욕을 받았다. 경들은 일행을 엄하게 단속하고 잘 주선하여 말썽이 없도록 하라."
하니, 정지화가 대답하기를,
"신들이 감히 마음을 다해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각자에게 귀가리개를 하사하였다.
이조 정랑 남이성(南二星)과 이유상(李有相)이 병이 났다고 하기도 하고 인혐하기도 하며 정사에 참석하지 않자, 정원이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여 그 태만한 관습을 징계하라고 명하였다.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응교로 삼았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겨울에 우레가 친 변고로 인해 상차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면서 공구수성할 방도를 진달하고, 영의정 정태화도 인책하며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덕이 없고 어리석은 내가 큰 유업을 이어받아 하늘을 노하게 하였는데 오늘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어젯밤 일어난 우레와 천둥의 변괴는 보기에 참담하고 마음을 놀라게 하였으니,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이 마치 연못과 골짜기에 떨어진 것 같아 몸둘 바를 모르겠다. 아, 오늘날과 같은 나랏일에 대해 끝내 변통하는 방도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오늘날을 위한 대책을 세우자면, 형식적인 것을 버리고 성신(誠信)을 취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상하가 서로 가다듬어 공경과 화합으로 마음을 갖게 된다면 하늘의 꾸짖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이 시대의 어려움을 함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마땅히 경의 말을 마음에 새길 것이니, 경은 더욱 덕에 힘써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해야 할 것이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아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경계의 말씀을 드렸다. 김수항이 공경과 삼사를 빨리 불러 재이를 막을 방안을 널리 의논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관대하게 답하였다.
11월 3일 기묘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중용》을 강하였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와 삼사가 모두 입시하였다. 부제학 조복양과 부응교 이민적이 진강하였다.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안자와 맹자의 이름을 휘하고 읽지 않았는데 지금도 휘할 것입니까?"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정경세(鄭經世)가 인조조 때 글을 강하면서 역시 선현의 이름을 휘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자·맹자뿐만 아니라 정자나 주자 같은 이도 모두 휘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복양 등이 글뜻의 해석을 끝마치자, 영중추 이경석이 아뢰기를,
"사람치고 누가 함정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피할 줄을 모릅니다. 이는 바로 임금이 어지러움과 멸망을 싫어할 줄을 알면서도 끝내 스스로 경계하지 않아 멸망에 이르고야 만 것과 같습니다."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께서 재앙을 당하고 두려워하시어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고 계시니, 그 뜻이 매우 성대합니다. 그러나 만약 날짜가 오래 지나 이러한 마음이 점차로 해이해진다면 이는 《중용(中庸)》에 이른바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가 재이에 대한 대책으로 자신들을 면직시키어 하늘의 견책에 답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잘못은 실로 나에게 있는 것이니, 경들의 과실이 아니다. 국사가 날로 점점 글러지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일을 하는 사이에 겉치레만 숭상한 채 착실히 해보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반드시 겉치레를 말끔히 제거해야만 바야흐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제 내린 비답에도 말하였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만약 상께서 분발하시어 진작시킨다면 신하들이 누가 흥기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경들이 건의한 것들을 내가 따라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지금 각자가 재이를 막을 수 있는 대책을 말하여 착실히 거행할 자료로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식이 못 미쳐서 성상의 덕을 도울 수 있는 하나의 대책도 생각해 내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이 엊그제 옥당의 차자와 김수항의 차자를 보았는데, 그 말이 모두 절실하였으니, 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채택해 시행하소서."
하자, 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말씀드린 것은 모두 쓸모없는 말이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궁금이 엄하지 않다는 설은 여염에 전하는 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자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략이나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자와 왕손께서 더러 평상복으로 출입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금중(禁中)에서 유숙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윤리를 바르게 하는 것을 가인(家人)의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인정으로 말한다면 가인에게 대하는 도리는 은혜와 사랑보다 먼저 할 것이 없는 것 같지마는, 반드시 윤리를 바르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윤리가 바르지 못하면 은혜와 사랑도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외부 사람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상께서 불가불 유의하시고 엄히 금하여 통렬히 단절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수항이 말씀드린 궁금이 엄하지 않다고 한 일은, 그러한 사실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쓰시면 됩니다마는, 또한 불가불 사실을 털어놓아 신하들로 하여금 훤히 알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엊그제 여러 공주들이 자전께서 건강이 회복된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조그만 잔치를 열었는데, 그의 종들이 더러 들어온 자들이 있었고 왕자들도 날이 저물어 대궐문을 이미 닫았기 때문에 나가지 못한 것이다."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신도 병중에 들었는데, 여악(女樂)이 한두 번만 드나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제왕의 효도가 서민과는 다르다고 하나, 자전께서 건강이 회복된 데 대한 잔치를 이미 뒤로 물렸으니, 어찌 예를 펴는 일이 한 번도 없어서야 되겠습니까마는, 두세 번까지 이르면 불가합니다. 왕자와 왕손이 금중에 유숙한 것은 비록 성상께서 화목을 돈독히 하기 위해 한 것이겠습니다만, 지극히 엄한 곳에 어찌 이렇게까지 사적으로 친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앞으로는 궁금을 엄히 하고 사적으로 친압하는 것을 단절하심으로써 가정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되게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경연의 측근 신하가 혹시라도 성상의 비위를 거슬리면 너무나 미워하시어 관직을 제수할 때에 오래도록 낙점을 해주지 않고 계시므로 신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이민서를 오래도록 낙점해 주시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우상의 일로 인해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오늘날 첫째가는 일이 아니니, 잠시 이 일은 제쳐두고 각자 재이를 막는 대책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입시한 신하들은 각자 의견을 말하라. 내 마땅히 채용하겠다."
하였다. 병판 홍중보는 항상 오늘처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어 수성의 도리를 다할 것을 청하였고, 예판 정치화는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에 힘쓸 것을 청하였으며, 형판 김좌명은 인재를 수습하여 사람을 쓰는 길을 넓힐 것을 청하였고, 대사헌 김수항은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고 서책을 가까이 하며 탕감의 정사를 크게 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고, 세입을 헤아려 지출하여 절약하는 도리를 다할 것을 청하였다. 이판 박장원은 이러한 마음을 굳건히 유지하여 잠시라도 해이하지 말며 하위에 처진 인재를 발탁할 것을 청하였고, 판윤 오정일은 생각을 가다듬고 진작하여 신하들을 책려할 것을 청하였으며, 호판 김수흥은 ‘전하께서 모든 일을 처결하실 적에 자세히 살피시는 데 힘쓰시나 신하들이 늘 명확한 결단력이 부족한 것을 흠으로 여기니 불가불 깊이 생각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좌윤 유철은 신하들이 진달한 말에 대해 양단을 잡아서 중도를 쓰도록 청하고,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은 여악(女樂)이 궁중에 출입하는 일을 가지고 누누이 진계하고 또 이처럼 목면이 큰 흉년이 든 때에 신역의 유를 불가불 서둘러 변통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은 함경(咸鏡)·원양(原襄) 두 도의 내노비 및 여러 궁가 노비의 신공(身貢),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는 베 가운데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을 똑같이 탕감해 줄 것에 대해 말하고, 집의 여성제(呂聖齊)는 모든 역포(役布)를 참작하여 탕감해 주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을 말하였다. 사간 오두인(吳斗寅)은 잘못을 시정하고 착한 데로 나아갈 것을 말하고, 또 궁금이 엄하지 않다고 거듭 말하였다. 장령 최일(崔逸)은 마음에 인의(仁義)를 간직하여 정치를 하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말하고, 부응교 이민적은 절약해서 쓰고 백성을 사랑함으로써 국력을 점점 넉넉하게 하라고 말하고, 교리 홍만용(洪萬容)은 뜻을 분발하되 항상 재이를 만났을 때처럼 하라고 청하고, 교리 심재(沈梓)는 한정(閑丁)의 세초(歲抄)를 중지하여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할 것을 청하고, 지평 조성보(趙聖輔)는 오늘날의 민폐로는 노비의 신공과 어린아이에게 베를 받는 것이 가장 크니 2, 3년 동안 받지 말아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키라고 말하였다. 헌납 이동로(李東老)는 특별히 군포를 감하는 것으로 백성을 구제하는 선무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각 고을 조곡(糶穀)의 포흠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이니 10년 동안 수량을 알맞게 감해주어 조금이나마 혜택을 베풀기를 청하였으며, 정언 이하(李夏) 역시 포흠된 조곡을 감해주고 한정의 세초를 중지하라고 말하였고, 수찬 윤심(尹深)은 아뢰기를,
"근면하고 태만하지 말라는 말을 신하들이 이미 진달하였습니다만, 오늘날 시급한 일로서 무엇이 이것보다 더하겠습니까.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마음을 변치 마시고 줄곧 힘써 시행하소서."
하였다. 수찬 김석주(金錫胄)는 항상 격려의 뜻을 간직하여 《중용》에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을 교훈으로 삼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언로가 열리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큰 걱정 중에 큰 걱정거리인데, 여러 신하들이 이민서를 오래도록 서용하지 않는다는 이유에 대해 말하였으니, 이는 정말로 그렇습니다. 올가을에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으나, 이 분부에 응한 자는 두서너 수령에 불과하였고 그것도 백성들의 폐막에 대해서만 말하였을 뿐이지 조정의 헛점에 대해 언급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이는 도움되는 말을 구하는 전지(傳旨)의 끝에 간사하다느니, 파당을 세운다느니 하는 두 마디 말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간사하다는 말은 신하들이 유세철 등의 일이라는 것을 대략 알고 있으나, 세철이 무함하기 위해 소를 올렸다는 점에 대해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시고 금령을 지극히 엄하게 내리셨는데, 만약 또 그러한 말이 나올까 염려한다면 조정이 너무나 나약하지 않습니까? 서로 파당을 세운다는 설에 있어서는 조정 신하로서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물론 다 그릅니다. 그러나 이를 선처할 수 있는 법으로 제거하지 못하고 이 명목만 설치하여 금지한다면 필시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이민서가 우상을 배척한 것을 상께서는 필시 당이 달라서 그런 것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민서가 일찍이 탑전에서 좌상을 지척한 일도 있었는데, 이것도 어찌 당이 다른 데에서 나온 의논이겠습니까?
송 철종(宋哲宗) 때에 도움의 말을 구하면서 여섯 가지 금지 사항을 반포하자, 사마광(司馬光)이 ‘간하는 말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가 간하는 말을 거절하는 것으로 끝맺고 말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말 깊이 알고 한 말입니다. 신이 민간의 물정을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예를 들면 여성제의 군포를 감하자는 청이나 심재의 세초(歲抄)를 중지하자는 청이나 조성보의 노비의 신공을 감해 주자는 청들은 모두 채용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이 이미 다 말하였으니, 그 중에서 거행할 만한 것은 품정해야 할 것이다."
하자, 태화 등이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말씀드린 포흠된 조곡의 유는 사실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이니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내지 못한 곡식의 이자로 올해에 내야 할 것들은 모두 깨끗이 면제해 주도록 하고 한정의 세초도 금년까지 정지하도록 하라. 그리고 죽은 사람에게 받는 베는 대신의 역을 정할 때까지는 받지 말도록 하고 군포 세 필을 내야 할 자에게는 특별히 한 필을 감해 주도록 하라."
하고, 또 승지에게 이르기를,
"오늘 여러 신하들이 경계한 말을 보며 각성하고 싶으니, 주서로 하여금 정서하여 들여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4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옥당의 관원이 《중용》을 강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10세가 차지 않은 어린아이가 군역에 충정된 것들을 조사해내어 그 군역을 감해줄 것을 청하고 또 어린아이를 군역에 충정하지 말라는 금령을 거듭 밝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명하가 또 아뢰기를,
"윤강·이상진이 향리로 물러가 오래도록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으며, 이정기·이단상은 담담하게 물러가 있으니 가상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두 수용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강·이상진·이정기에게는 하유하라 명하고, 단상에게는 관직을 제수하였다.
11월 5일 신사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옥당의 관원이 《중용》을 강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포흠된 조곡에 대하여 특명으로 탕감시켜 주신 것은 사실 백성을 보살펴 주시는 지극한 뜻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허위적인 일이 갈수록 많아져서 가난한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선산(善山)에 사는 부호(富戶)는 허위로 기록하여 탕감받은 것이 1백 석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유는 불가불 조사하여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부호는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동명(李東溟)의 형 이동야(李東野)인데 동명은 시종으로 출입하던 자입니다. 그 당시의 수령도 죄를 주어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엊그제 경연에서도 이 일을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대간이 즉시 거론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정언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그저께 경연에 신도 입시했지만 동야(東野)의 일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없어서 곧바로 논열하지 않아 성상께서 하교하게 하였으니 신이 직책을 완수하지 못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대사간 이은상, 사간 오두인, 헌납 이동로, 대사헌 김수항, 집의 여성제, 장령 최일, 지평 조성보 등이 잇따라 인피하였다.
11월 6일 임오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처치하여, 인피한 양사의 관원을 모두 체직시키자고 청하니,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남양 현감(南陽縣監) 민시중(閔蓍重)의 상소에 ‘양민의 신역이 매우 중하여 견디어내지 못한다. 지금 호적이 새로 완성된 기회를 이용하여 상중하 세 등급으로 호구를 나누어 호마다 베를 내게 함으로써 경비를 충당하게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고 참판 유계가 올린 상소의 뜻과 대략 같으며, 옛 정승 김육도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신이 좌상 홍명하와 상의했더니, ‘호적이 막 완성되었는데 또 호구에 대한 베를 받아 들인다면 필시 백성의 원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모두 ‘그 법은 좋기는 하지만 경솔하게 변통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명년 가을을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민시중의 상소 끝에 ‘부사 윤계(尹棨)가 병자년의 난리에 순절하자 휘하의 병사와 장교들이 모두 무너져 흩어졌으나, 군관 송후경(宋後璟), 고을의 아전 김택(金澤)·홍언인(洪彦仁)·홍신(洪信), 관노(官奴) 명길(命吉)과 그의 집종 한 명이 끝까지 지키다가 순절하였고, 후경만 난도질을 당할 때 목숨이 끊기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포상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절의가 가상하니 증직·복호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송후경은 해조로 하여금 수용토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적당한 벼슬을 제수하여 격려하고 권면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원 부사 유창(兪瑒)의 상소에 ‘본부의 속오군은 누차 증가시켜서 현재 6천여 명이나 되지만 그 중에는 노약자나 도망간 사람, 죽은 사람도 많으니, 만일 수를 줄이고 가려 뽑는다면 정예병(精銳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부(府)에 병력이 6천 명을 초과하였으니 너무 많지 않은가. 병력은 정예롭게 만들어야지 숫자만 많이 늘리는 법이 아니니, 노약자는 모두 면제해 주고 정예하고 건장한 자만을 뽑아내도록 하라. 그리하여 마군(馬軍)은 10초(哨)로 한정하고 보군(步軍)은 30초로 한정하되, 영구히 확정된 액수로 삼아 늘리거나 줄이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내년 초봄에 세자의 책례(冊禮)를 거행해야 하므로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보게 하였더니, 정월 22일과 2월 4일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우선 정월 22일로 정해 놓고 그때 가서 형편에 따라 앞당기거나 늦추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단상(李端相)을 집의로,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신명규(申命圭)를 헌납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정언으로, 이상(李翔)을 지평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좌참찬으로, 이지원(李枝遠)을 남병사로, 민진익(閔震益)을 전라 병사로, 이준한(李俊漢)을 경기 수사로, 이지익(李之翼)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로 삼았다. 만중은 추고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로는 동료와 상피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1월 7일 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8일 갑신
이합(李柙)을 장령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정언으로, 이정(李程)을 부수찬으로, 오두인(吳斗寅)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9일 을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원의 군대를 4천 명으로 감하여 정하도록 하셨다는데, 민유중의 말을 들어보니, 그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4천 명 중에 또 도망갔거나 죽은 자가 있으면 감한 데다가 또 감할 수 없다.’라고 하니, 유창을 불러들여 상세히 물어본 뒤에 품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총융사 구인기에게도 물어보라고 하였다. 판윤 오정일이 아뢰기를,
"근래 경외(京外)의 백성들이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호적에서 누락된 자들이 매우 많은데, 대개 군역(軍役)을 피하기 위한 계책입니다. 그런데 발각된 뒤에 단지 군역만 부과하고 만다면 그 율(律)이 너무 가벼워서 징계하여 그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반인 경우엔 강등하여 군역에 배정하고 상놈인 경우엔 전가 사변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10일 병술
상이 왼쪽 눈이 빨갛고 껄끄러우며 가린 막이 있어서 침을 맞았다.
11월 12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고, 전라도 전주 등처에 지진이 일어났다.
11월 13일 기축
충청도 은진 등처에 지진이 일어났다.
11월 14일 경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5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16일 임진
밤에 달무리가 졌는데 흰무지개가 달무리를 꿰뚫었고 삼경에는 월식이 있었다.
11월 18일 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강(尹絳)을 공조 판서로, 김징(金澄)을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전 감사 이원정은 그가 전에 장성을 맡았을 때의 일에 대해 대간이 논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논핵이 중지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좌상 홍명하가 경연에서 아뢰어 체차시켰다.
11월 19일 을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총융사(摠戎使) 구인기와 수원 부사 유창도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후릉(厚陵)을 봉심하고 보니 배열된 석품(石品)이 좋지 않고 제조(製造)도 정밀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혼유석(魂遊石)은 갈지도 않은 데다가 역시 섬세하게 다듬지도 않았으며, 상석(裳石)도 다른 능의 상석 제도와는 달리 얇은 돌로 그 본체를 따라 펼쳐 놓아 마치 귀문(龜文)과 같았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기울어진 것이 많으니 이것은 다시 배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석물에 하자가 생긴 것 때문에 능을 개봉(改封)하기까지 하는 것은 매우 미안한 일이니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대석(莎臺石)은 그대로 두어 고치지 말고, 상석과 병풍석은 새로 만들어서 다시 배치하면 어떠하겠는가?"
하자, 예조 판서 정치화가 아뢰기를,
"그와 같이 하려면 흙을 파내는 역사가 너무 엄청나니 차라리 능을 개봉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난간석(欄干石)은 우선 옮겨 놓고 상석만 고쳐 다시 배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개봉을 하지 않는다면 별도로 도감(都監)을 설치할 필요도 없으니, 각능을 수리한 예에 따라 해조에서 담당하여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원 부사 유창이 본부의 속오군 원수(元數) 및 각종 군대의 숫자를 기록해 가지고 왔는데 속오군 6천여 명 중에 도망갔거나 죽은 자가 거의 1천여 명에 이르며, 각종의 군병도 그런 숫자가 매우 많아서 이미 충당할 길이 없고 또 요역이 겹칠 우려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유창의 뜻은, 원군(元軍)의 수를 감하고 각종 군병으로 충당할 것을 허락한다면 이로써 정예한 군사를 만들었으면 하는데, 구인기는 이 일을 상당히 어렵게 여깁니다."
하니, 인기가 아뢰기를,
"수원부의 제군(諸軍)은 모두 명목이 있으므로 지금 쉽사리 숫자를 감축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수원의 원 군사는 이미 마병 10초(哨)와 보군 30초로 인원수를 정하였으니, 수원의 호구로 편입된 백성들에 대해서는 각 아문에서 보충해 넣지 말고 긴요하지 않은 잡역 군관의 유들을 뽑아내어 빈 인원을 보충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세자를 책봉할 날짜를 이미 정하였으니, 춘방(春坊)의 관료들도 그 안에 차출해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달 그믐께 차출하도록 하라. 그리고 보양관 중에 서울에 있는 자가 세 사람밖에 없는데, 가선 가운데 적합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이정기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은상은 어떠한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문장으로 논하면 이정기가 이은상만 못하지만 경학(經學)으로 논하면 이은상이 또한 이정기보다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정기를 보양관으로 차출하라."
하였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이번 2품 이상으로 하여금 별천(別薦)하도록 한 거조는 진실로 좋은 뜻입니다만, 응당 천거해야 할 사람이 무려 90여 명이나 되므로 각자 두 사람씩 천거한다면 그 수가 거의 2백 명이나 됩니다. 이미 ‘별천’이라고 하였으니 숫자가 이렇게 많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외부의 논의를 듣건대, 높은 벼슬아치의 집을 드나들며 청탁하는 폐단이 상당히 있다고 하니, 끝내 실없는 일이 되어버릴까 염려됩니다. 안으로는 응당 천거해야 할 각사의 관원으로 하여금 여러 동료들과 공청(公廳)에서 다함께 모여 가부에 대하여 상의한 다음 1사(司)에서 천거하는 사람이 2, 3인이 넘지 않게 하고, 밖으로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고을을 방문해서 재주와 행실이 현저하게 드러난 사람을 가려서 천거하되, 그 역시 2, 3인을 넘지 않게 한다면 거조도 엄정하고 일도 착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한이 너무 촉박하면 군색해질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 기한을 넉넉하게 잡아서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품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2품 이상으로 응당 천거해야 될 자들에 대해 정원이 다시 뽑아 아뢰도록 하고, 기한도 조금 늦추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래에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있어 대간이 말한 높은 벼슬아치들의 집을 드나들며 청탁하는 폐단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난번에 유창의 말을 들으니 심지어 군병 탈하(軍兵頉下)로 청탁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과연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발각되는 대로 죄를 주어야 하겠으니, 유창으로 하여금 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유창이 아뢰기를,
"군병을 탈하할 때에 원래 청탁이 없었는데, 대신이 진달한 말은 신의 말뜻을 상세히 알지 못한 듯합니다. 혼인과 상례·제사의 물품을 요구한 일은 간혹 있었고, 지난날에는 병조 좌랑 유연(柳㝚)이 그의 노모를 위하여 반찬거리를 요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유연의 청탁에 대하여 유창이 이미 언급했는데도 대사간 강백년이 즉시 논열하지 않았는데 이는 필시 생각해 보지 않은 소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현저하게 드러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유연을 파직하라 명하였다. 강백년이, 사리를 빨리 판단하지 못하여 즉시 논핵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자, 헌납 신명규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1일 정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정을 응교로 삼았다.
장령 김징(金澄)이 아뢰기를,
"지난날 통제사(統制使) 박경지(朴敬祉)가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기 전에 목화(木花)를 요구하는 재신(宰臣)이 있었기 때문에 경지가 남에게 말을 하였는데, 다만 누구누구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조정 신하 중에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매우 비루하고 뻔뻔스러운 자입니다. 마땅히 적발하여 엄중하게 다스려서 다른 사람을 징계해야 하겠기에 신이 오늘 회의에서 발론하여 경지를 잡아다가 국문하기를 청하여 사실대로 확실히 고하게 하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말하기를 ‘나는 듣지 못하였으니 우선 하루 이틀 기다려 물어본 다음에 논핵해야 한다.’라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대각의 규례는 한 사람만 사건을 들었어도 자연히 따르기 마련인데 어찌하여 동료가 들은 말을 믿지 못하고 외부 사람의 말을 믿으려 하는가.’ 하니, 후재가 또 말하기를 ‘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범범하게 재신이라고 칭하였으니 역시 미안한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경지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의 성명을 알겠는가. 그래서 잡아다가 문초하여 확실하게 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반복하여 상의하였으나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가 신의 말이 신용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아뢰기를,
"재신이 무신에게 뇌물을 요구한 일이 과연 있었다면 논계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전파되고 있는 말에 대해 신은 전혀 들은 바도 없는데 범범하게 재신이라고 말한다면 싸잡아 배척하는 혐의까지 있게 되므로, 여러 곳에서 들어보고 정확하게 지명하여 죄를 청해야 된다고 여기었습니다. 그런데 동료의 의견은 반드시 곧바로 논열하려고 하였고 신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데 뜻이 있었으므로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어서 동료로 하여금 먼저 인피하도록 하고 말았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장령 이합 역시 아뢰기를,
"재신이 뇌물을 요구했던 일에 대해 신은 비록 듣지 못했습니다마는, 동료들과 만난 자리에서 발론된 것이 이미 범범하게 들은 것이 아니었다면 뒤따라 논열했어야 마땅한데 동료들의 의견이 엇갈려 끝내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신만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모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이합과 김징은 일에 따라 논핵하였으니 모두 풍채가 있으므로 출사하게 하고 후재는 너무나 자세히 살피려다 대간의 체통을 어겼으니 체차하자고 청하자, 상이 따랐다.
11월 22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김징·이합이, 뇌물을 요구한 재신의 이름을 통제사 박경지가 확실히 말하지 않았으니 불가불 적발하여 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면서 경지를 잡아다 심문하여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고하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지에게 우선 함문(緘問)한 후에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유창은 이미 청탁이 많다는 말을 대신에게 해 놓고 탑전에서 하문할 때에는 단지 유연이 어머니를 위하여 반찬거리를 요구했다는 말로 책임만 때웠고, 혼례나 상례 때 물품을 요구하였다는 말을 꺼냈다가 곧바로 얼버무려 버렸습니다. 상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경연 석상에서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잡아다 문초하여 하나하나 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3일 기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강백년이 탑전에서 곧바로 유창을 논핵하지 않아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근래에 영장(營將) 가운데 관직에 오래 있지 못하고 파직되는 자가 많습니다. 당하관으로서 승급 제수되었던 자 가운데 재임한 기간이 짧은 자에게는 그 자급을 환수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영장으로 발탁 제수된 자 가운데 직책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임기 전에 체직된 자는 모두 환수하고, 만약 전임 때의 일로 파직된 경우에는 환수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장령 김징이 아뢰기를,
"함경도의 굶주린 백성들은 이미 가을부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구휼하는 대책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금년 전세(田稅)를 모두 탕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하니,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북로가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여러 고을에서 재해를 입은 것이 경중의 차이가 없지 않을 터이니, 일률적으로 모두 탕감해 주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안변(安邊)·덕원(德源)·문천(文川)·고원(高原)·홍원(洪原)·이성(利城)·경성(鏡城)·부령(富寧)·경흥(慶興) 등 아홉 고을이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다 하니, 전세를 전부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구례에는 밀부(密符)를 받은 관원을 잡아올 때 반드시 선전관을 보내 부절을 합해 보게 하여 간사하고 허위적인 짓을 예방하였으니, 유서(諭書) 중에 이른바 ‘비상한 명이 있을 경우 부절을 합해 본 후에 명을 따르라.’라고 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의 규례는 선전관을 보내지 않고 금부 도사로 하여금 잡아오게끔 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한때 음식의 제공에 따르는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뜻밖의 간사한 짓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 일은 내 일찍이 말하려 했으나 아직 하지 못한 것이다. 부절이 일치하지 않으면 명에 따라서는 안 되니, 앞으로는 구례에 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부절을 합해본 뒤에 잡아오도록 하라. 그리고 이 뜻을 우선 제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관하의 밀부를 가지고 있는 관원에게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4일 경자
이익상(李翊相)을 지평으로,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원자(元子) 보양관(輔養官)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간이 박경지를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계사를 잠시 정지하였으니, 유사로 하여금 함장(緘章)을 발급하여 추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박경지를 함장으로 추문하였으나, 결국 사실을 캐내지 못하였다.
11월 26일 임인
비변사가 아뢰기를,
"엊그제 전라 감사의 장계로 인해 전라도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도망쳐 일본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본도에 공문을 보내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더니, 좌수영에 나누어 둔 남만인이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좌수사 정영(鄭韺)을 나문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학 유생(四學儒生) 및 충청·황해·원양·평안도 유생 심사징(沈思澂)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에 모실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유창이 하옥된 일로 소를 올려 스스로 논핵하기를,
"신의 집에 병을 앓는 사람이 있어 황계(黃鷄)를 약으로 써야 하는데 시장에서 구해 보았으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유창이 서울로 오기에 우연히 이러한 뜻을 알렸더니 유창이 갈 길에 쓸 찬거리 중에서 두어 마리를 보냈습니다. 유창의 일이 거론될 때에 신이 즉시 이 일을 자수하려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자잘한 일로 그럴 것이 없다며 말렸기 때문에 감히 대죄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창이 이미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여 하옥되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고 이어서 치죄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1월 27일 계묘
장령 김징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수원 부사 유창이 사대부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말하기를 ‘병조 판서 홍중보가 하인을 시켜 편지를 보내 닭을 요구하였는데 마침 그때 내가 서울에 가게 되었으므로 짐속에 있는 대여섯 마리를 보내주었다.’ 하였는데, 유창이 심리에 나아간 뒤에 홍중보가 금오(金吾)의 장관으로 규례에 따라 헌의하니 물정이 자못 괴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그가 자수한 상소를 읽어보니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모호하게 얼버무려 유창의 말과 큰 차이가 나고 말았으니,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대관(大官)이 이와 같은데 소관을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포도 대장 김여수(金汝水)는 일찍이 뇌물을 탐한 일로 버림을 당했으니 이 직임을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체차하라고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겸 세자사로, 좌의정 홍명하(洪命夏)를 겸 세자부로, 송시열(宋時烈)을 이사로,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를 찬선으로, 김수항(金壽恒)을 겸 좌빈객으로, 박장원(朴長遠)을 겸 우빈객으로, 조복양(趙復陽)을 겸 좌부빈객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좌윤 겸 우부빈객으로, 윤선거(尹善擧)를 진선으로, 이숙(李䎘)을 보덕으로, 이단상(李端相)을 겸보덕으로, 김익렴(金益廉)을 필선으로, 이익(李翊)을 집의 겸 필선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문학으로, 홍만용(洪萬容)을 겸문학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사서로, 이단하(李端夏)를 겸사서로, 신익상(申翼相)을 설서로, 윤경교(尹敬敎)를 겸설서로, 최일(崔逸)을 상례로, 송규렴(宋圭廉)을 부수찬으로, 유성(柳檉)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8일 갑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이 아뢰기를,
"수원은 서울에 가까운 중요한 진지이므로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는데 부사 유창이 현재 옥에 갇혀 있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 대임자를 뽑으라고 명하였다.
이완(李浣)을 병조 판서로, 정치화(鄭致和)를 판의금으로, 이원정(李元禎)을 승지로, 김시진(金始振)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를 조사해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도록 하였다.
부제학 조복양(趙復陽)이 재이로 인해 상소하여 《주역》 복괘(復卦)의 뜻을 반복 설명하고 경계하도록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11월 29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신명규(申命圭), 대사간 유철(兪㯙)이 모두 직책상 사람을 천거해야 하는데 이유없이 천거하지 않아 추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11월 30일 병오
각도 암행 어사의 서계로,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지온(李之馧), 영해 부사(寧海府使) 김옥현(金玉鉉), 전라 좌수사 이도빈(李道彬)에게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함양 군수 권숙(權諔), 금화 현감 이정악(李挺岳)에게는 준직을 제수하고, 또 그 다음 능주 목사(綾州牧使) 민여로(閔汝老), 나주 목사 이준악(李峻岳), 경원 부사 홍우익(洪宇翼), 전라 병사 유여량(柳汝𣛀), 좌수사 정영(鄭韺), 우수사 유비연(柳斐然), 기장 현감(機張縣監) 이일신(李一臣), 삼수 군수 박선흥(朴宣興), 홍천 현감 김세행(金世行), 상주 목사 이송령(李松齡), 홍원 현감 김광진(金光瑨)에게 모두 차등있게 상을 주도록 하였다. 김옥현에 대해서는 그 뒤에 대관의 계사로 인하여 그 가자를 환수하였다. 또 이도빈은 평안 병사로 발탁되자마자 또 가자하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정원이 환수하기를 청하니 따르고 말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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