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6권, 현종 7년 1666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5.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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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김징 등이 전라 좌수사 유성을 탄핵하여, 위인이 어리석은 데다 술병까지 있어서 일찍이 곤수가 되었을 때 한 일들이 뒤죽박죽이었으니 체직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3일 기유

박정(朴烶)을 승지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유철(兪㯙)을 좌윤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원만리(元萬里)를 부수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좌랑으로, 조형(趙珩)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유창을 철원(鐵原)의 풍전역(豊田驛)에 정배하였다. 유창이 형리에게 내려진 뒤에 그의 가까운 일가 두세 사람이 혼례와 상례로 요구한 일로만 말을 꾸며 공초를 내니, 상이 미워하여 형추하여 실정을 캐내도록 금부에 명하였다. 이에 좌상 홍명하가 상차하기를,
"유창의 일은 급작스럽게 발생한 것이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는다면 법률대로 결단하여 삭출하거나 유배를 보내도 되는데, 어찌 무거운 형벌을 적용하여 갑자기 고문을 가해서 조정의 대체를 손상시킨단 말입니까."
하고, 영중추 이경석도 이 일에 대해 말하자, 상이 따라 다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12월 4일 경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단하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정원이, 곤수의 자리가 비어 있다며 병조 판서 이완을 명초하여 정사를 열어 차출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완이, 대간이 논핵하고자 하는 뜻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세 차례나 불렀으나 결국 나오지 않았다.

 

이때 참하 문관 중 적체된 자가 많았으므로 대신이 6품으로 승진시켜 등용할 소지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별도로 추천해 뽑아 아뢴 자가 10여 인이나 되었는데, 대간이 난잡하다며 개정하자고 청하니, 상이, 대신이 추천한 자만 남겨두고 그 나머지 비국의 재신들이 추천하였던 자들은 모두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대로 남은 자는 승문원 정자 오시복·윤지선·신익상·홍억 등 네 명뿐이었다.

 

12월 5일 신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심재(沈梓)를 교리로, 이민서(李敏敍)·여성제(呂聖齊)를 사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검열로, 이익형(李益亨)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곤수의 자리가 비었는데 병조 판서 이완이 굳이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자, 비국이 계청하여 차관(次官)으로 하여금 차출하도록 하였다.

 

집의 이익, 장령 김징 등이 아뢰기를,
"북변에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 삼(蔘)과 사냥의 폐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엄중히 금지하고 있으나 끊이지 않고 범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의 가노(家奴)가 국경을 넘어 사냥한 일에 대해 이제 막 처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익평위 홍득기와 정재륜 두 집의 궁노와 포수 4명이 삼수 갑산 등지에 들어가 사냥을 하여 피물(皮物)을 많이 싣고 사잇길로 몰래 돌아오다가 감사에게 잡히어 현재 안변(安邊)에 갇혀 있다 합니다. 그중에는 병조의 공문을 가진 자도 있었는데, 그 공문에 ‘포수 아무개 등이 지나는 곳의 각 관아는 금지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홍득기와 정재륜 등이 변방의 금지령을 함부로 범하여 백성들이 잘못을 본받게 하는데, 병조에서 공문을 만들어 주어 금하지 않도록 하였으니 이는 모두 전에 없던 것으로서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득기·재륜 및 병조 당해 당상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추고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김수익(金壽翼)은 일찍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어사의 안찰로 인해 폐고된 지 수십 년이 되었고 지금은 늙어서 더욱 취할 것이 없는데, 다시 자목(字牧)의 임무를 맡기는 것은 정사의 법도에 크게 위배됩니다. 이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김수익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수익은 체차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겸 내승(兼內乘) 유흡(柳潝)은 그의 첩에게서 난 자식을 박씨 성을 가진 부자 상인의 아들로 삼아주고 이름을 이박(以朴)이라 하였으니, 이끗을 노리고 인륜에 어긋난 짓을 한 소행이 선비의 반열에 끼일 수가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호조 참판 남노성이 자기 첩에게서 난 아들로 그의 먼 일가인 남두병(南斗柄)의 양자로 만들었다가 남두병이 죽은 뒤에 그를 위해 관청에 보고하여 입안(立案)을 만들었습니다. 남노성이 재신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염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재리로 꾀이는 남두병 첩의 유혹을 달게 여겨 일가의 촌수도 계산해 보지 않고 그의 아들로 무부(武夫)의 후사를 삼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가산을 전적으로 맡게 하고 그의 주모(主母)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함으로써 본부에 소장을 내게 하였으니, 벼슬아치들에게 끼친 수치가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중하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가 세 번 아뢰자, 따랐다.

 

12월 6일 임자

집의 이익, 장령 김징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익평과 동평 두 집의 일을 논핵했었는데, 오늘 들으니 청평위 심익현(沈益顯)과 흥평위 원몽린(元夢鱗)의 종도 그 가운데 들었다 합니다.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똑같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12월 7일 계축

관학 유생 권상하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에 여역이 크게 성하고 우역도 발생하여,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이 죽었다.

 

12월 8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0일 병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삼사·금부·형조의 당상 2품 이상과 더불어 초복(初覆)을 거행하여 경외의 사형수를 논죄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각각 의견을 아뢰고 나자, 상이 이르기를,
"후일에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변읍(邊邑)에 제수되었을 경우 비록 늙은 부모가 있더라도 감히 체직을 청하지 않는 것이 법례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한두 변방 관리가 어버이가 늙었다는 것으로 체직되자 이후부터 늙은 부모가 있는 무신들은 변읍에 제수되기만 하면 벗어나려고 도모하곤 합니다. 이번에 부령 부사(富寧府使) 신한주(申翰周)와 경흥 부사(慶興府使) 정후량(鄭后亮)이 어버이에게 병환이 있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사직소를 올렸으니, 이런 습성을 막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그들의 처지를 고려하여 체직시켜 주는 것은 몰라도 그들이 어찌 감히 직접 사직소를 올린단 말인가. 비록 늙은 어버이가 있더라도 그의 어버이가 조석 간에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대중이 모를 경우에는 체차를 허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날 갑산 부사(甲山府使) 양식(梁侙)은 늙은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우상이 진달하여 체직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한주는 노모만 있고 다른 형제가 없으며, 정후량은 영남 사람으로 노모를 모시고 서울로 왔는데, 갑자기 변읍에 제수되자 기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두 사람은 양식의 예에 따라 체차하고, 이 뒤로는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변읍에 제수된 뒤에는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지 못하게 하여 뒤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변읍뿐만 아니라 내지(內地)의 수령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원하는 바가 아니면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피하여 반드시 면직되고야 맙니다. 게다가 해조에서는 의망하여 제수하자마자 곧바로 또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이런 습성도 매우 좋지 않으니, 일체로 거듭 금지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정태화에게 이르기를,
"이번에 가져온 청나라 역서(曆書)가 그전 것과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중국은 역법(曆法)에 대한 논의가 여러 가지입니다. 숭정(崇禎) 연간에 탕약망(湯若望)이 역법을 개정할 때에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논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명나라가 망하도록까지 반포해 시행하질 못하였습니다. 지금의 역법이 그전의 것과 다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탕약망의 역법이 착오가 났기 때문에 다시 대통역법(大統曆法)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새로 온 역법을 위주로 하고 시헌역법(時憲曆法)은 사용하지 않아야 하겠는데, 관상감이 이미 시헌역법을 안팎에 반포해 버렸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미 구력(舊曆)을 반포하였고 신력(新曆)은 미처 인쇄해내지 못하였으므로 서울이나 지방의 크고 작은 제사에는 마땅히 신역을 채택하겠지만 여염에서는 구력을 그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하자, 승지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한 나라에서 어찌 두 가지 역을 쓴단 말입니까. 신역을 신속하게 인쇄하여 8도에 반포해야 합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말이야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형편상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단역(單曆) 한 장을 급히 인쇄하여 서둘러 반포하고 전에 쓰던 시헌력은 지금 비록 사용하지 않더라도 역시 해마다 인쇄해 두되, 그 전에 대통력을 해마다 써서 넣은 규식처럼 하여 후일에 상고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이익이 아뢰기를,
"무신(武臣)의 집에 문관(文官)이 드나들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명절(名節)을 가다듬고 혐의를 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통제사 박경지(朴敬祉)가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때에 재신 중에 직접 그 집에 간 자도 있고 문밖에서 전송한 자도 있다고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그지없이 파다합니다. 지금까지 떠도는 시끄러운 말은 이와 같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사대부의 치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조사하여 다스려서 사대부의 풍습을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먼저 박경지를 함문(緘問)하여 그로 하여금 사실대로 지명하여 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유학 권계흥(權啓興)은 위인이 용렬하고 나이도 많은데 외람되게 특별히 천거한 속에 들어 있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으니, 그를 빼버리고 그를 천거한 병조 참판 유심(柳淰)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1일 정사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는 정미년의 역서는 시헌역법을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들여온 청나라 새 역법을 대조하여 살펴보니, 병오년 이전에 사용하던 서양의 역법을 모두 버리고 다시 대통역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절후가 드는 날이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이 있었으나 진상한 대통력 사본과는 서로 딱 맞았습니다. 만일 경칩(驚蟄)·상강(霜降) 등 응당 실행해야 하는 절제(節祭)를 이번에 들여온 청나라 역법에 따라 시행하려면 명령을 내리셔야만 안팎에서 봉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통력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이익, 장령 김징 등이 아뢰기를,
"공산 판관 권대재는 송사를 낸 어떤 사람의 문서 중에 지운 흔적이 있다 하여 한 차례 엄히 문초한 다음 형벌을 주려고 하자 송사를 낸 사람이 억울하다며 감사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감사가 그 문서를 보고는 지운 것은 송사를 낸 자가 한 소행이 아니라고 여겨 방면하라는 뜻을 써서 보냈는데, 권대재가 상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서둘러 형벌을 가하다가 결국 그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망령스럽고 형벌을 남용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잡아다 문초하여 치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경기 수사 이준한은 사람됨이 교활한데 재차 곤수가 되자 재물에 탐욕을 부리고 백성들을 수탈하여 짐바리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내수의 노비 1인에 대한 원래의 신공은 10두밖에 안되니, 본디 그렇게 중한 신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사의 임무를 맡은 무리들이 중간에 온갖 방법으로 수탈하여 10두 이외에 더 받아들여 거의 30두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가구 안에 여러 명의 식구가 동거하는 자들은 어떻게 이 수량을 마련해 낼 수 있겠습니까. 쌀을 받아들이는 이 한 가지 일도 이런 지경이고 보면 그 이외의 것들은 이를 미루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내사의 노비가 신공의 쌀을 납부할 때 호조 낭관과 대감(臺監)으로 하여금 같이 참여해 받아들이는 것을 감독한 다음 내사로 보내게 하여 중간에서 마구 수탈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헌 이상진이 재이로 상소하였는데, 맨 먼저 기강을 세우고 사사로운 뜻을 버려야 한다 말하고, 끝에 가서는 죽은 군정(軍丁)과 허위로 기록된 노비에게 베를 징수하는 폐단에 대해 말하였다.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12월 12일 무오

집의 이익, 장령 김징 등이 아뢰기를,
"청나라 차사가 경원(慶源)에 와서 개시(開市)할 때에는 으레 후춘(厚春)에 사는 청나라 사람을 길잡이로 데리고 오고 파하고 돌아갈 때에도 데리고 가 심양길을 안내받고 나서 중로에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중로에서 후춘까지 가려면 길이 멀고 험하지만 우리 국경을 거쳐서 나가면 지름길이 되므로 후춘 사람들이 지방관에게 뇌물을 주고 우리 국경의 길을 빌려 가기를 청하는데, 지방관이 대부분 이를 허락합니다. 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상경(李尙敬)과 노즙(盧濈)과 겸임(兼任) 박희민(朴希閔) 등이 재임 당시에 후춘 사람들을 본부에 유숙하게 하고 음식을 제공한 다음 호송해 주었다고 합니다. 신 징이 지난번 안찰할 때에 이러한 사실을 조사해 내어 서계(書啓)에 써 넣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비국이 회계한 것을 보니, 단지 추고만 하라고 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변방을 지키는 일은 국법이 지극히 엄격한데 상경 등의 죄범이 어찌 추고만 하고 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당시 도신(道臣)과 병사(兵使)도 검칙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상경 등을 모두 잡아다가 문초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고, 감사와 병사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이완이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이완은 선조(先朝) 때부터 여러 번 병조에 의망되었기 때문에 이번에 제수한 것에 대해 조금도 사양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상소한 내용을 보니 병든 상황에 대해 진달하고 나서 또 병조와 훈국의 관직을 아울러 겸대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영화를 멀리하는 것은 옛사람도 어렵게 여겼던 바인데, 이완은 무부(武夫)이면서 능히 해냈으니, 권세를 탐하여 무릅쓰고 나아가는 문사(文士)에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32면
【분류】인사(人事)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영화를 멀리하는 것은 옛사람도 어렵게 여겼던 바인데, 이완은 무부(武夫)이면서 능히 해냈으니, 권세를 탐하여 무릅쓰고 나아가는 문사(文士)에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

 

어진익(魚震翼)을 정언으로, 이단하(李端夏)를 부교리로,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김좌명을 병조 판서로, 오정일(吳挺一)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3일 기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 대사간 김응조(金應祖)는 지금 80이 되었으니 마땅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자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형조 판서 오정일은 일찍이 이 관직을 맡았다가 물의로 인하여 체직된 바 있습니다. 지금 또 다시 제수하였으나 패초에 나오지 않고 있는데, 육경은 일반 관원과 다르므로 억지로 나오라고 독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또 삼복(三覆)이 이미 임박하였으니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면 체차하라고 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형조 판서를 마땅히 차출해야 하는데 의망할 사람이 적습니다. 김수항 같은 사람은 연소하여 이 직임에 합당합니다만 현재 사재(四宰)062)  로 있으니 낮추어 의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잠시 변통하여 비의(備擬)하고 뒤에는 규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홍명하가 또 아뢰기를,
"근래에 들으니, 여염 사이에 조혼하는 폐단이 있다고 하기에 괴이하여 물어보았더니 시녀를 뽑아들이는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그 말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궁중의 시녀도 한계를 정해 놓아 여염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조혼을 한 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역관과 상인의 무리라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애당초 뽑아들일 대상 속에 들어 있지도 않으니, 조혼을 한다는 말을 알 수가 없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어쩌면 대궐 안에서 조종한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상세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대간의 계사에 이상경을 잡아오도록 청하였는데, 그 안에 비국의 회계를 보았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 회계는 나도 미처 보지 못했는데 대간이 어떻게 먼저 알았는가?"
하자,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에 이상경을 추고하도록 초안을 잡았다가 이윽고 파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를 아직도 입계(入啓)하지 않았는데 대간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필시 당초 고치지 않은 초본을 보고 그런 것일 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비국이 공사를 엄밀하게 취급하지 않은 잘못 때문이다."
하니, 집의 이익이 아뢰기를,
"장령 김징이 북도를 염문할 때에 이상경의 일을 서계에 기록해 넣었기 때문에 비국이 회계를 어떻게 하였는지 알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 알아본 후에 그대로 간통을 보내 상의하여 논열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아직도 회계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니, 경솔하게 논계한 실책이 드러났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김징·이합, 지평 이익상도 회계가 미처 들어가기 전에 논계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4일 경신

김우석(金禹錫)을 승지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조형(趙珩)을 좌참찬으로, 박정(朴烶)을 참지로, 오정일(吳挺一)을 판윤으로, 김수항(金壽恒)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에게 정효(貞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돈녕 조창원(趙昌遠)에게 혜목(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회계를 올리기 전에 대간이 앞질러 본 일에 대해 신들이 본사에게 따져 물어보니 유사 당상이 계초를 구비한 뒤 개좌(開坐)할 적에 신들에게 의논해 정하려고 봉표(封標)하여 해당 관리에게 부쳤는데 사무 담당 관리가 대관이 보자고 하자 해당 관리에게 말하지도 않고 멋대로 즉시 보냈다고 합니다. 이는 뒤 폐단이 생길 수 있는 일이므로 엄하게 징계해야 하니, 유사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중히 추궁하게 하소서. 또 앞으로 본사의 계하공사(啓下公事)에 대해서는 이미 회계했는지의 여부를 막론하고 삼사라도 반드시 공문을 가지고 와서 보도록 하되 확실하게 법으로 정해 놓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앞으로 다시 이런 폐단이 있을 경우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을 똑같이 처벌할 것이다. 이러한 뜻도 신칙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15일 신유

집의 이익, 장령 김징·이합, 지평 이익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국이 올린 계사를 보고 매우 두려웠습니다. 그 당시에 회계를 들이지 않은 상태였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례에 따라 베껴다 보고 다시 자세히 묻지 않았으니 이것은 신들의 잘못입니다. 비국의 관리도 미처 들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곧바로 내주었으니 이는 하리(下吏)의 잘못이긴 합니다만, 하리만 벌을 받는 것은 정당한 도리가 아닙니다. 비국이 평소에 엄격하게 단속했다면 대관이 제 아무리 보려고 해도 어찌 볼 수 있었겠으며, 하리가 비록 내주고 싶어도 어찌 감히 마음대로 내줄 수 있었겠습니까. 하리가 제멋대로 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신중히 하지 않고 삼사가 가져다 보는 절차에 대해서만 신중히 하려고 하니, 이 점에 대해 신들이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또 뒤따라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에게 똑같이 벌을 주겠다고 하교하시니, 신들은 존비의 분별이 없어서 사령에 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리가 이미 옥에 갇혀 벌을 받고 있는데 대관(臺官)이 어찌 그대로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잘못이 없다며 출사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동래 부사 이지익(李之翼)을 인견하였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듣자니, 왜관의 왜인이 여염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숙할 때도 있다고 하는데, 이 폐단을 일체 엄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여염에 드나들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과 간음까지 하고 있으나 풍속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조그만 이익을 탐내 도리어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유들은 발각된 즉시 통렬히 다스려서 그 습관을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지익에게 이르기를,
"왜인을 상대하는 방법은 다그치면 일이 생기고 늦추어 주면 점점 해이해지니, 반드시 너그러움과 맹렬함을 적절히 응용하고 강경함과 유순함을 알맞게 적용해야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부사가 된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을 단속해야만 저들이 조심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왜인이 지금까지 일컬어온 사람은 오직 오윤겸(吳允謙)·송상현(宋象賢) 등 몇 명뿐입니다. 이는 모두가 자기 몸을 단속했던 효과입니다."
하니, 상이 경의 말이 정말 옳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대사헌 이상진(李尙眞)의 상소 중에 해유(解由)와 월등(越等)에 대해 탕척하자는 청이 있었는데, 신의 의견에는 분양마(分養馬)가 죽었거나 말라서 월등된 자는 별도로 기록해 들이게 하여 모두 탕척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원공(元貢)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노비공(奴婢貢)을 거두지 않아서 해유에 구애받은 유들도 모두 그들의 이름 아래에다 기록하여 성상께서 보시게 대비하되, 탕척의 여부는 상께서 하셨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치적이 있는 자를 가려서 탕척시켜 임용코자 하는 것이니, 이런 자를 뽑아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만약 호조 판서 김수흥으로 하여금 전후의 치적을 고찰한 다음 그 중에서 특히 드러난 자를 뽑아 아뢰게 한다면 안 들어가야 할 사람이 들어가거나 들어가야 할 사람이 빠지는 우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 판서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여 뽑아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튿날 태화가 아뢰기를,
"월등(越等)한 것이 본디 중한 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분별하여 선택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있으니, 모두 깨끗이 면제해 주소서."
하니, 따랐다.

 

12월 16일 임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형관·삼사의 신하들과 더불어 삼복을 행하였다. 경외의 사형수 20명을 논하여, 사형을 감하여 정배한 자가 5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율대로 따랐다. 집의 이익이 아뢰기를,
"좌윤 유철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혐의로운 행위를 피하지 아니하고 곤수를 찾아가서 보았으니 실로 사대부의 수치입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형조 참판 오정위 도 통제사 박경지를 찾아가서 문밖에서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이를 목격하고 말하는 자가 많은데도 오정위는 그 사실을 숨기려고 끝까지 자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대부로서 어찌 이처럼 염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담양(潭陽) 사람 이운정(李雲挺)은 자기 아비가 형벌을 받고 죽자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는 부민(部民)이 고소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닌데 전가 사변의 죄까지 받았으니, 인정과 법으로 볼 때 용서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석방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문관과 무신이 길은 다르다 하더라도 만일 서로 알고 지내는 친분이 있다면 한번 정도 찾아가 보는 것은 무방할 듯하며 간청한 일도 없었는데 파직까지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찾아가 보았더라도 요구한 바가 없었다면 무엇이 나쁘겠는가마는, 비록 찾아가 보지 않았더라도 서신을 보내 요구했다면 매우 안 될 일이다. 나는 찾아가 본 것을 가지고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대관이 아뢴 글에 ‘끝내 자수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므로 윤허한 것이다."
하였다.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어제 비국의 공사(公事)를 미처 입계하기 전에 먼저 누설한 일로 담당 관리를 추고 치죄하였습니다만, 신에게도 이러한 잘못이 있는데 어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유창을 형추하라고 판하(判下)하신 뒤에 신이 복역(覆逆)하여 아뢰려고 이미 계사의 초안을 작성해 놓고 미처 올리지 않았을 때 대신의 차자가 때마침 도착하는 바람에 그 공사를 미처 해부에 내려보내지 못했습니다. 신도 먼저 누설한 일이 없는데 밖에 있는 대신이 먼저 알고 있기에 신도 사실 의아해 했으나, 대신의 차자이므로 감히 입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직책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신의 잘못이 드러났기에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는 신의 일입니다. 지금 승지의 말을 들으니 신 역시 황공합니다. 유창의 공사를 당초에 돌려보내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혹시 과중한 분부가 있을까 염려되어 신이 서면으로 도승지 장선징에게 물었더니, 형추하라 하였다고 답하였기 때문에 신이 알 수 있었습니다. 지레 먼저 차자를 올린 것은 경솔한 처사였습니다만 이미 듣고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신은 진실로 잘못하였고 승지 역시 잘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복역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달된 공사인데 어찌 해당 부(府)에 내릴 수 없단 말입니까."
하니, 승지 김만기가 아뢰기를,
"대신의 말에는 뒤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정원이 이미 복역하였으면 윤허하기 전에는 완결된 명이 아닌데, 한편으로는 환수하기를 청하고 한편으로는 공사를 내리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이 드린 말씀도 실언한 것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정원이 복역하였다 하더라도 그대로 공사를 하달한다고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날이 저문 뒤에도 여전히 하달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하니, 김만기가 아뢰기를,
"이 일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원이 복역하는 것은 삼사와 다르므로 결코 먼저 공사를 하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미 신의 차자로 인하여 먼저 환수하기를 허락하였으므로, 김만기 등이 불만족스럽게 여겨 여러 말을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신에게 말하기에 그때는 믿지 않았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하니, 김만기가 아뢰기를,
"복역의 계사에 대하여 미처 비답도 내리기 전에 대신의 차자가 외부로부터 먼저 입계되었으니, 신은 그 일의 체모가 과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홍명하가 발끈 성을 내며 아뢰기를,
"만기도 이처럼 말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이 무능력하지만 이미 대신의 서열에 끼어 있는데 사체에 있어서 어찌 이처럼 배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정원이 복역한 계사에 대하여 미처 비답을 내리기도 전에 상신의 구원하는 차자가 밖으로부터 먼저 이르렀으니, 일반적인 사례로 비추어 보면 경솔한 듯하다. 그러나 대신이 이미 들은 바가 있다면 어찌 정원이 쟁집하는 데에만 맡겨 두고 진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비변사의 계초(啓草)를 누설한 것과 서로 다른데도 민유중은 짐짓 이 일을 끌어대어 억지로 자기 잘못이라 하고 마음속으로는 불평스럽게 여겨 현저하게 비난하며 배척하였으니, 꽉 막혀 있는 그의 소견은 깊이 책망할 것도 없다. 그러나 대신의 도리도 마땅히 수용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썼어야 할 텐데 도리어 성을 내며 떠들어 스스로 체면을 손상시켰다. 처음에는 민유중이 즉시 계하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타당성을 잃었다 하고, 끝에 가서는 김만기가 자기의 말을 공박한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여 지나치게 소리치고 말도 조리를 잃어 문비(問備)를 청하기까지 하면서 그릇된 행위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부족한 점이 있을 때 애써 말해 주라는 고인의 의리로 비추어 볼 때 과연 어떠한가.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33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행정(行政) / 정론-간쟁(諫諍) / 인사(人事)
사신은 논한다. 정원이 복역한 계사에 대하여 미처 비답을 내리기도 전에 상신의 구원하는 차자가 밖으로부터 먼저 이르렀으니, 일반적인 사례로 비추어 보면 경솔한 듯하다. 그러나 대신이 이미 들은 바가 있다면 어찌 정원이 쟁집하는 데에만 맡겨 두고 진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비변사의 계초(啓草)를 누설한 것과 서로 다른데도 민유중은 짐짓 이 일을 끌어대어 억지로 자기 잘못이라 하고 마음속으로는 불평스럽게 여겨 현저하게 비난하며 배척하였으니, 꽉 막혀 있는 그의 소견은 깊이 책망할 것도 없다. 그러나 대신의 도리도 마땅히 수용하여 대체를 보존하기에 힘썼어야 할 텐데 도리어 성을 내며 떠들어 스스로 체면을 손상시켰다. 처음에는 민유중이 즉시 계하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타당성을 잃었다 하고, 끝에 가서는 김만기가 자기의 말을 공박한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하여 지나치게 소리치고 말도 조리를 잃어 문비(問備)를 청하기까지 하면서 그릇된 행위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부족한 점이 있을 때 애써 말해 주라는 고인의 의리로 비추어 볼 때 과연 어떠한가.

 

12월 17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박일성을 승지로, 이정기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18일 갑자

장령 김징이 아뢰기를,
"신이 궁가의 종이 법을 어기고 사냥한 일에 대해 거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동평위 정재륜은 아예 종을 보내지 않았고 감사가 조사하여 보고한 장계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신이 사실과 다르게 일을 논하였는데,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 이익, 장령 이합, 지평 이익상도 사실과 다르게 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차되었다.

 

밤에 달이 헌원 성좌의 넷째 별을 범하였다.

 

12월 19일 을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원만리를 지평으로, 강백년을 병조 참판으로, 구문치를 경기 수사로, 성익을 황해 병사로 삼았다.

 

좌의정 홍명하가 탑전에서 김만기를 추고하자고 청한 일로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자책하는 내용의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깊이 인혐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지 않는가. 그때 한 말들은 전혀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내 이미 알고 있으니,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12월 20일 병인

이정을 집의로, 박증휘·민광소를 장령으로, 조성보를 지평으로, 이익을 부응교로 삼았다.

 

대사간 이은상과 정언 정재숭이 논핵하기를,
"동부승지 박일성은 평소에 인망을 받지 못했고 나이도 많습니다. 체직시키소서. 종성 부사(鍾城府使) 이지온(李之馧)은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였으니 상을 주고 장려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자급을 올려주기까지 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모두 따르지 않다가 뒤에 박일성의 일만 따랐다.

 

지평 원만리가 아뢰기를,
"경연의 책임은 오로지 보도관에게 있으므로 최고의 인망을 지니지 않은 자이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지경연 이은상은 문장력과 재주는 넉넉하다 하더라도 명망이 평소에 가벼우니 체직시키소서. 근래에 전조(銓曹)에서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사람들의 기대에 차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은대(銀臺)의 청선(淸選)은 조정에서 중히 여기는 바인데, 박일성(朴日省)과 윤개(尹塏)가 의망에 들어 있으니 모두 사람들의 기대 밖에서 나왔습니다. 오빈(吳䎙)과 김수익(金壽翼)도 모두 선조(先朝) 때 폐고(廢錮)된 사람인데 전후 잇따라 수령에 제수되었고 청망(淸望)의 길이 도로 트였으므로 공론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상경(上卿)의 주의(注擬)가 간혹 노직(老職)에 있는 자에게 돌아가도록 하여 그 사이에 인척을 넣었다고 하는 의심도 있고 보면 밀어닥치는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조에서 이 일을 담당했던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소서.
좌승지 김만기가 추고받은 것에 대하여 물의가 모두 미안하다고 하며 대신도 이미 차자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으니, 만기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고, 이은상의 일은 따르지 않았다.

 

12월 22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민광소가 아뢰기를,
"영평 현령(永平縣令) 권연(權衍)은 고 서윤(庶尹) 권오(權澳)의 조카입니다. 권오가 죽자 그의 첩에게서 난 아들이 제사를 받들고 권오의 처가 집안 살림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권오의 처가 죽자 권연이 그의 숙부가 수십 년 전에 보냈다는 한쪽의 편지를 내놓으면서, 권오가 생전에 자기의 아들로 시양자를 삼고자 했다고 하고, 이어 권오의 재산을 봉쇄하여 제사를 받든 아들은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권오가 생전에 어찌 예조에 신청한 일이 없겠으며, 권오의 처도 어찌 자기 남편의 뜻을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부자 간의 윤리는 남이 파괴할 수 없는 것인데, 그의 혈속이 제사를 모셔온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권연이 감히 믿을 수 없는 문자를 내놓고 차지해서는 안 될 전토와 사람을 점거하려 하였으니, 사대부가 어찌 차마 이런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자세히 더 살펴보고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번 아뢴 뒤에 따랐다.

 

이사 송시열과 행찬성 송준길이 상소하여 병이 있다며 나오지 않자,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찬선 이유태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조사받는 일로 몸을 굽히고 체면을 손상시켜 적지 않은 수모를 겪자 중외의 백성들이 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는데, 신처럼 보잘것없는 것이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을 보게 되니 역시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이러한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에 예의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선왕(先王)이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아 준 공로가 세월이 갈수록 스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시 전하의 마음에 대신을 한몸처럼 보고 다급한 상황이 닥치자 스스로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이런 전에 없던 거조를 하신 것입니까? 이 말이 비록 저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나 우리 쪽에서 한 마디로 끊어버리지 못하였으니 나라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통탄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한때 굴욕을 당하더라도 두 신하를 보전하는 것을 스스로 다행이라고 여기셨습니까? 이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그들 나름대로 기율(紀律)과 형법(刑法)이 있으므로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필시 미리 결정해 놓고 짐짓 전하를 시험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어찌 우리가 애걸한다고 그 처벌의 경중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전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스스로 욕되게만 하였을 뿐입니다. 송나라 신하 호전(胡銓)의 말에 ‘어린아이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을 전하께서 차마 하시려 합니까.’ 하였는데,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전하를 송 고종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려 하니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 오늘날의 나랏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우리가 심히 나약한 것을 보고 요구만 하면 들어주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 하루아침에 입을 열어 두 신하를 해치겠다는 뜻으로 시험하면서 꺼리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선조(先朝) 때라면 필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고,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대응하는 자들이 반드시 오늘날 한 것처럼 하기까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은 삼가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혼령이 몹시 걱정하고 계시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자애로운 하늘이 어찌 재이를 보여서 우리 전하를 경동시키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번에 있었던 겨울 우레의 변으로 인하여 크게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크게 분발하신다면 쇠퇴한 기강을 흥기하고 난리를 뿌리뽑아 국가를 재정비하게 될 전환점이 바로 오늘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원자께서는 덕성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학문이 한창 진전을 보이고 있으므로 보양하는 도구를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오늘날 관속을 가려 뽑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책임을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데, 신처럼 용렬한 자가 어떻게 이 임무를 감당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이때 승지의 자리가 비었는데 이조의 당상이 대간의 논박으로 인해 사직소를 올리기도 하고 사직 단자를 올리기도 하여 도목 정사를 열지 못하자, 참의 이시술을 명패로 불렀다. 그래도 이시술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으니, 비국이 다시 차출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23일 기사

정원이 아뢰기를,
"이조 참의 이시술이 이미 체차되었으니 그의 대임자를 차출해야 할 것인데 정관(政官)들이 모두 인피하고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대신이 말을 전하기를 ‘그전에 이러한 경우를 당하였을 때에는 비국에서 정관을 차출한 관례가 있기는 하였으나, 상규와 다른 일이어서 감히 곧바로 의망할 수 없으니 정원으로 하여금 여쭈어 보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망하도록 하였다.

 

윤집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2월 24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25일 신미

김우형을 승지로, 오정원을 병조 참의로, 심재를 응교로, 홍주삼을 수찬으로, 이정영을 형조 참판으로, 이준구를 형조 참의로 삼았다.

 

집의 이정영, 장령 민광소 등이 아뢰기를,
"부사과 송명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인데 별도로 천거한 가운데 들었으므로 여론이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그를 천거의 목록에서 빼버리고 천거한 장본인 능풍군 구인기를 추고하소서. 그리고 부사정 이삼석은 시골에 있으면서 재물을 거두어들여 추한 말이 많이 떠돌아다닙니다. 또 그의 부형이 잘못을 저질러 세상에서 천히 여기며 미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당후(堂後)063)  로 추천을 받았으니, 관작에 끼친 누가 이보다도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를 천거의 명단에서 삭제하고 천거한 사람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진주사 허적이 돌아오다가 중도에서 사신 간 상황에 대해 치계하였는데, 벌금을 무는 치욕이 상에게 미치었는데도 두 신하가 죄를 면하게 된 것이 자기들의 공인 양 여기는 뜻이 있었으므로 안팎에서 이를 듣고 너나없이 놀라고 분개해 하였다.

 

12월 26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시강관 이익 등이 《중용》을 강하였다. 끝나자 영상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날 조사를 실시할 때 성상께서 신들을 그처럼 극진히 생각해 주셨으므로, 극변에 정배되는 것은 진실로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면직에 있어서는 저쪽에서 관대한 법을 적용해야 될 것으로 여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먼저 보내온 장계를 보니, 신들의 죄는 논하지 아니하고 벌금의 명목을 국가에다 붙이고 말았으니 신이 무슨 얼굴로 다시 천지 사이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되어서 국가의 일을 도모하는 데 충성을 다하지 못해 결국 국가로 하여금 이러한 전에 없던 모욕을 받게 하였는데, 어떻게 녹위(祿位)를 편안히 보전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속히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이 말은 실로 속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경들의 본뜻이 아니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경들의 실정을 내가 자세히 알고 있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은을 내는 벌이 상에게까지 미쳤는데 요행히 죄를 면한 신이 그대로 재상의 자리에 버티고 있다면 그 누가 듣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들어도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입니다. 이 점 역시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으니, 저들 나라에서는 신하들에게 이 벌을 자주 써 왔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 이 벌을 시행하는 것은 필시 우리를 우대하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때 상께서 자리를 옮겨 북쪽을 향하여 예를 행하신 일을 밖의 사람들이 듣고 분통해 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니, 이는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하고,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외부의 사람은 그 곡절을 상세히 몰라 북쪽을 향하여 예를 행하였던 일을 칙사에게 행한 것으로 오인하였기 때문에 인심이 더욱 분통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북쪽을 향해 거행하는 예는 대정(大庭)에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유태의 상소에도 이 말을 언급했기에 내 매우 의아했었다. 이는 필시 전달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비록 와전된 것이긴 하나 신들의 죄를 어찌 공론을 들어보아야만 알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맡고 있는 직책이 일반 관직에 비할 바가 아니니 체직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사신을 보낼 때 필시 난처한 일이 많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예판 정치화가 아뢰기를,
"남병사 이두진(李斗鎭)의 원정(原情) 공사에 대해 등대했을 때 품처하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유중의 말에 어사로 하여금 감사와 병사를 염문(廉問)하게 하고 인하여 논상하는 것은 사체로 보아 부당한 일이며 또 뒤 폐단을 열어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진실로 옳다. 상주는 일을 실시하지 않았으면 벌주는 일만 행할 수 없으나, 이두진은 이미 잡아다가 문초하였으니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다. 파직하여 놓아 보내라."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방백(方伯)과 곤수(閫帥)에게는 한쪽 지방을 맡기므로 책임이 매우 중요하니, 어사가 비록 임금의 명을 받은 관원이지만 결코 안찰(按察)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로 하여금 안찰하게 하는 것은 공봉(供奉)과 추종(騶從) 등등의 일에 불과한데 어사 중 신진들이 많아서 대체로 봉서(封書)의 뜻을 모르고 있다."
하였다. 선징이 아뢰기를,
"혼조(昏朝) 때 원통하게 죽은 자가 많았으나 그중에 목사 최기(崔沂)의 죽음이 가장 원통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부류에게는 일찍이 관직을 추증해 주고 제사를 내려주는 은전이 있었는데, 최기의 아들 최유석(崔有石)이 함께 옥중에서 죽었으나 아직까지 포상이나 돌봐주는 은전이 없었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병진년 옥사가 지극히 원통했습니다. 그 당시에 백대형(白大珩)이 황해 감사로 있으면서 요리하여 옥사를 이루었는데, 최기의 부자가 옥중에서 함께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너나없이 원통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추증하라고 하였다. 이익이 아뢰기를,
"조직(趙溭)은 혼조 때 절의를 세운 사람으로 이미 포증(褒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고(故) 정(正) 조경기(趙慶起)도 혼조 때 앞장서서 충언의 상소를 올려 폐모(廢母)해서는 안 된다는 의리를 극력 진달하였으니, 인륜을 붙들어 세움이 이보다 더 나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포증의 은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 흠전입니다."
하니, 상이 또한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이익이 아뢰기를,
"요즈음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않고 계시므로 신 등은 혹시나 성상께서 편찮으신가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대하시니 이보다 큰 다행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중용》을 강하고 계시니 성(誠) 자에다 더욱 뜻을 기울이시어 앞으로는 간단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조 참의 윤집(尹鏶)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헌관(憲官)이, 주의(注擬)한 일이 타당성을 잃었다는 것으로 전관(銓官)을 추고하기를 청하면서 오빈·김수익 등을 들어 말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김수익이 부하에게 적발당하여 15년 동안이나 폐고되었으나 그 당시의 조사에서 끝내 그런 사실이 없었으니 청명한 세상에서 영원히 버려져서는 안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오빈의 경우도 관직에 있은 지 3개월도 채 안 되었고 또 삼을 캘 때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본도의 조사와 해부의 논의도 모두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 외에 귀양간 몇 명의 인사들도 원통하다고 합니다. 어찌 실상을 조사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떠도는 말만을 듣고 끝내 버려두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부제학 조복양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건강이 자주 좋지 않아 경연을 거의 폐지하다시피 했는데, 성명께서도 필시 여의치 않다고 탄식하셨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혼자 계시는 곳에서나 한가하실 때 무슨 일에 유의하고 계신지 신이 감히 모릅니다마는, 근일 여염에 떠도는 말에 ‘종실과 부마들이 제한이 없이 금중을 드나들면서 항상 활쏘기와 같은 일로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조금이라도 근사한 단서가 있다면 성상의 큰 덕에 끼칠 누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생각건대, 원자가 강을 중지한 지 또한 4개월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으로 그랬지만 또 추운 날씨를 만났으므로 물론 사세상 그렇게 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삼왕(三王)이 ‘일찍이 가르쳐야 한다.’라고 한 도리로 말한다면 역시 소홀하다 하겠습니다. 보양의 관원은 그 책임이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무릇 원자의 거처와 행동을 모두 듣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비록 병을 앓고 계시는 때라고 하지만 막연히 모르고 있으니, 옛날 조석으로 함께 거처하게 하였던 제도와 비교해 볼 때 또한 차이가 너무나 나지 않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비록 강연을 열지 않는 날이더라도 보양관으로 하여금 출입하여 건강을 살피면서 전에 배운 글을 강론하게 하거나 경계의 말씀을 드리게도 하고, 만약 질환의 증세가 있을 경우에는 의관과 함께 들어가 진찰하게 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이조 판서 박장원이 상소하여 체차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대개 그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좌의정 홍명하가, 임금에게 벌이 미쳤는데 자신은 작록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고, 영의정 정태화도 소를 올려 탑전에서 청하였던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27일 계유

김수항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는데, 시독관 이익 등이 《중용》을 진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대간이, 공산 현감(公山縣監) 권대재(權大載)가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였다는 것으로 잡아다가 추문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혐의로 인하여 사람을 죽인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처음에 권대재가 감사에게 보고하자 형벌을 가하라는 엄한 지시를 하였다가 죄인이 정장(呈狀)하자 방면하라고 하였으니, 권대재가 잘못한 것은 다시 물어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권대재의 치적이 가장 현저하여 사대부들 사이에도 말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 일로 인하여 체직을 시킨다면 백성들이 필시 섭섭하게 여길 것입니다. 지의금 김좌명(金佐明)이 현재 입시 중이니 하문해 보시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그의 원정(原情)을 보니, 대개 두 차례 송사에 진 자는 법적으로는 귀양을 보내야 하지만 이는 두 차례가 아니었으므로 형벌을 가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자, 이익이 아뢰기를,
"권대재가 형벌을 가한 것은 물론 잘못입니다마는, 만일 그가 정치를 잘했다는 것으로 특별히 전임(前任)으로 되돌아가게 명한다면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하니, 정언 어진익이 아뢰기를,
"이미 잘못한 일이 있는데 정치를 잘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방면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었다.
"서목(書目)은 공적인 것이고 정장(呈狀)은 사적인 것인데, 이미 서목에 대한 답변에서는 형벌을 주라고 하고서 또 다시 정장에 대한 답에서는 말을 바꾸었으니, 이는 감사의 잘못이므로 권대재만 잘못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령 민광소가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 주서(注書)의 천주(薦主)를 파직하기를 청하는 일로 상의하여 논계하였으나, 성상의 비답은 단지 추고하라고만 허락하셨습니다. 이에 신의 생각에는 이런 박한 벌에 대해서는 굳이 쟁집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논계를 중지하자는 뜻으로 동료들에게 간통을 보내고 뒤이어 논의를 제기한 동료들과 정부(政府)의 습의(習儀)하는 곳에서 만났는데, 안 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간통(簡通)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상의하려 했었는데 간통이 돌아오기 전에 신이 마침 입시하게 되었으므로 부득불 파직하자고 연계(連啓)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물러나온 뒤에 즉시 이러한 뜻으로 동료에게 알렸더니 동료들이 미처 다시 통보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원만리(元萬里)가 아뢰기를,
"신은 이조 참의 윤집의 상소를 보고 몹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오빈과 김수익이 불법을 행한 진상이 해부의 문안(文案)에 아직도 있으며 선조(先朝)에서 내린 분부가 지극히 엄격하였습니다. 대체로 오빈은 강계 부사로 있을 때에 삼세(蔘稅)를 너무 많이 거두어 원망을 매우 많이 사고 있다는 이유로 형리에게 내려 조사하게 하였는데 결국 형벌을 받고 귀양갔으며, 김수익은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말[馬]을 바꿔 사고 진주를 징수하며 국상중에 등불을 밝혀 놓고 첩을 데리고 가서 멋대로 즐겼다는 등의 말로 인해 별도로 어사를 파견하여 실상을 조사해 내기 위해 누차 형신을 받았는데 결국 먼 곳으로 귀양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윤집은 허튼 말을 만들어 변명하기에 매우 힘쓰고 있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이상하단 말입니까. 신은 전조(銓曹)가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한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다가 도리어 뜻밖의 배척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어떻게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동료가 입시하여 연계할 때에 즉시 간통을 발송해 알리지 않음으로써 소요를 야기시켰으니, 또한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 이정, 지평 조성보 역시 민광소가 즉시 간통을 발송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원만리·이정·조성보는 출사하게 하고 민광소는 체차하자고 청하니, 따랐다.

 

당초 호남의 산간 고을에 대동법을 다시 시행할 때에 승지 민유중의 말에 따라 가을에는 그전의 결수를 적용하여 목면으로 바꾸어 내게 하고 봄에는 새로 정한 결수를 적용하여 쌀로 받아들이기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전라 감사 홍처후가 치계하기를,
"근년 이래로 농사가 잘 되지 않은데다가 매년 전결의 수가 신결과 구결이 똑같지 않아서 이 법은 사세상 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올봄에는 이미 을사년의 전결 수량에 의하여 춘추 두 분기의 것을 쌀 12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병오년 가을에 받아들일 쌀 6두를 또 전결로 정해 내라고 한다면 이는 1년에 받아들이는 쌀이 통합 18두이므로 본도의 백성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합니다. 춘추로 받아들일 쌀을 모두 신결에 의해 봄에 합쳐서 받아들이게 해주소서."
하였다. 뒤에 해당 관청에서도 홍처후의 말이 옳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9일 을해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내릴 상을 논하였다. 내의 도제조 허적에게는 안구마(鞍具馬)와 아다개(阿多介)를 하사하고 그의 자제에게는 직책을 제수하였다. 제조 홍중보, 부제조 김수흥은 모두 가자하고, 어가를 수행했던 신하들 중에 정리사 정치화, 어영 대장 유혁연, 우승지 김만기에게 모두 가자하고, 유도(留都)한 백관 가운데 낙선군 이숙에게는 안구마를 하사하고, 영중추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청풍 부원군 김우명에게는 각각 안구마를 하사하고 그의 자제들에게는 직책을 제수하였다. 그 나머지는 차등있게 논상하였으며 의관과 내관에게도 가자하고 말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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