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6권, 현종 8년 1667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5.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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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자

박장원을 형조 판서로, 조복양을 이조 참판으로, 강백년을 대사간으로, 윤강을 공조 판서로, 이민채를 봉교로, 이경휘를 병조 참판으로, 이경억을 대사헌으로, 윤문거를 좌부빈객으로, 이시술을 병조 참지로, 이익을 겸보덕으로, 심재를 겸필선으로, 이유상을 겸사서로, 홍만종을 겸설서로, 윤지선을 설서로, 김징을 장령으로, 오두인을 부교리로 삼고, 도승지 장선징을 특별히 가선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이때 좌승지 김만기가 온양에서 상을 수행한 노고로 가선의 품계에 올랐는데, 장선징은 통정의 품계이므로 응당 그의 밑에 있어야 했으나, 승정원의 관례에 이미 도승지를 거쳤을 경우에는 좌·우 승지로 강등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조가 그 뜻으로 여쭙자, 상이 명하여 특별히 장선징의 품계를 올려 준 것이다.

 

집의 이정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통제사 박경지에 대한 추함(推緘)을 보니, 청탁한 사람의 이름을 말을 꾸며 숨기고 끝내 불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하옥하여 엄히 문초하지 않으면 필시 자복할 리가 없을 것이니, 잡아다 문초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가 재차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일 정축

대사간 강백년이 앞서 서전(西銓)을 맡았을 때 정사 규칙에 어긋나게 한 잘못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가 세 번째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갑진년 여름에 민정중과 같이 정석(政席)에 있을 때 똑같이 엄한 분부를 받았습니다. 그뒤에 정중은 북쪽의 안찰사로 나가 과만이 지났으나 그대로 유임되었는데 신은 곧바로 옛 직책을 제수받아 요로에서 드날리고 있습니다. 신의 사적인 분수로 볼 때 어떻게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3일 무인

집의 이정 등이 아뢰기를,
"온천에 수행했던 문관이나 무관의 신하들과 의관·내관 중 상으로 가자된 자가 무려 10명이나 되는데, 관작을 참람하게 상으로 주는 것이 어찌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약방의 신하는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직책이므로 상을 주는 전례가 물론 있습니다마는, 이외에 여러 신하들은 노고에 보답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환(醫宦)의 유에 있어서는 설사 기록할 만한 조그만 노고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상으로 논해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뜸 덕이 있는 이에게 주는 관작을 마구 이런 무리에게 베풀었으니, 신들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승지 장선징은 아랫사람이 승진하여 서열에 불편한 점이 있다는 이유로 갑자기 품계를 올려 주라고 명하셨는데 이는 명분으로 보나 의리로 보나 근거할 데가 더욱 없습니다. 그러니 약방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여러 신하에게 상으로 가자한 것과 장선징에게 특별히 제수한 품계를 모두 도로 거두라고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4일 기묘

이경휘를 경기 감사로, 강백년을 우윤으로, 홍처량을 대사간으로, 최유지를 수찬으로, 이익을 사간으로 삼았다. 서원현(西原縣)을 청주목으로 회복하였는데, 읍호를 강등한 기한이 찼기 때문이었다. 현감 이섬이 일찍이 4품을 지냈기 때문에 그대로 목사에 제수하였다.

 

이조 참판 조복양이 소를 올려 병을 앓고 있는 상황을 아뢰면서 본직과 겸직의 여러 임무를 체차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몸조리를 하고 직무를 살피라 답하고 내의를 보내 간병하게 하였다. 참판으로 의원을 보내는 은명을 입은 것은 대체로 특별한 예우이다.

 

찬선 이유태가 어머니의 병이 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직임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였다.
"그대의 마음은 비록 간절하지만 책봉의 예를 치를 날이 머지 않았는데, 한결같이 사정에만 핑계대고 나의 바람에 부응해 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빨리 올라오라."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들의 사정이 몹시 급박한데 여론이 놀라고 분개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만 있으니, 이러한 죄를 지고 어떻게 감히 직책에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 차례 소를 올렸으나 파직되지 않으니 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아뢰기를,
"나라가 벌금을 내는 모욕을 받았는데 신하가 아직도 작록(爵祿)을 보존하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이 일에 실로 간섭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처럼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하였다. 훈련 대장 이완이 아뢰기를,
"몇 해 전에 각 아문의 둔전(屯田)을 혁파하라는 의논이 있었는데, 다른 아문은 사세에 구애되어 모두 혁파하지 못하고 단지 훈국(訓局) 화약색(火藥色)의 둔전만 혁파하여 호조에 귀속시키고 그곳에서 거두어 낸 곡물은 전에 거두었던 숫자에 따라 본국으로 이송하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후 판서의 의견은 모두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의 얕은 소견에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각종 둔전을 모두 혁파하여 호조로 귀속시킬 경우 본조에서 맡아 관리해야 하겠습니다만, 둔전의 이름을 그대로 놔둔 채 본조로 하여금 맡아 관리하게 할 경우 사체에 맞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둔전 중에 민전(民田)이 섞여 들어간 것도 있고, 주인 없는 곳에 개간한 곳도 있으며, 관청에 적몰(籍沒)된 곳도 있으니, 마땅히 먼저 주인이 있는 토지를 조사해 내어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기타는 훈국에다 예속시켜 양향색(粮餉色)으로 하여금 그 곡물을 거두게 하여 화약색의 비용으로 조달해 사용하게 한다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장수의 임무를 맡은 지 지금 15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날이 더욱 쇠하고 병들어 귀가 먹고 눈이 어두어서 문을 닫고 들어앉아 군사들의 얼굴을 접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렇게 병이 든 상태로 헛되이 직책의 이름만 갖고 있으니, 매우 황공하고 민망합니다."
하고, 이어 면직해 줄 것을 누누이 청하자, 명하가 아뢰기를,
"대장의 임무에 맞을 만한 사람을 얻기 매우 어려우니, 경솔하게 체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좌상의 말이 옳으니, 경은 굳이 사양해서는 아니 된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근일 대간의 계사에 논핵을 당한 오정위(吳挺緯)의 일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하는데 대관은 인피하지 않으니, 괴이합니다. 오정위가 박경지를 비록 가서 보았더라도 이게 어찌 신상의 누가 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때 오정위는 모친의 병환 때문에 사실 찾아갈 틈이 없었다 합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실상이 이와 같은데도 대간은 인피하지 않고 근시(近侍)는 진달하지 않으니, 만일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앞으로 임금의 총명을 가리는 조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오정위가 파직당한 것은 억울하다 하겠다."
하자,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사대부들 사이에 그가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결말이 나기 전에 대관이 어떻게 인피할 수 있으며 근시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월 5일 경진

사간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사헌부의 직책에 있을 때에 오정위가 박경지를 찾아가 본 일을 논하고 파직할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경연에서 대신이 오정위를 신구하면서 심지어 대관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인피하지 않고 있으니 그르다 하였다 하니, 신은 몹시 놀랍습니다. 오정위가 찾아가 보았다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분분하고, 유철이 목격했다는 말을 사석에서 했기 때문에 신이 이 일만 들어 논핵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정위가 자신을 해명하는 함사를 미처 입계하지도 않았고, 유철이 잘못을 시인하는 글에서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신이 무엇에다 근거를 두고 인피하겠습니까. 신이 이로 인해 마음에 개연한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대각의 직책은 임금의 이목이 맡겨졌고 일시의 공론을 맡고 있으니 그 책임이 또한 중합니다. 그런데 대간이 한 마디 말만 하면 대신은 사정을 둔 것인가 의심하여 기세를 꺾어가며 공격하여 기필코 공정하지 않다는 쪽으로 귀결시키고 있으니, 말류의 폐단이 어찌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공정한 논의를 말살시키는 데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대신들이 이런 점에서 실언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대신의 배척을 받았으니 구차히 염치를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승지 민유중도 근시가 말하지 않았다고 한 대신의 말을 이유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근래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못하여 사사로운 논의가 점점 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장(臺章)에서 거론하는 바와 정위(廷尉)가 안핵하는 바에 대해 그것이 철저히 규명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대소 신료들이 서둘러 해석하고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문제로 여겨 왔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미 막고 가린 죄가 있으니, 태연히 자리에 있기 어렵습니다. 체차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는 혐의할 것이 없으니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1월 6일 신사

헌납 이동로 등이,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에 수행한 사람들에게 상으로 품계를 올려준 것과 장선징에게 특별히 품계를 올려준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홍명하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의 사정은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나올 수 있는 형세가 만무한데, 여러 차례 사정을 말씀드렸으나 끝내 체차를 받지 못하니, 신은 정말로 몹시 두려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사간 이익이 피혐한 글에, 하나는 ‘대관이 한 말에 대해 대신들은 그것이 사정을 둔 것인가 의심하여 기를 꺾고 공격한다.’ 하였고, 하나는 ‘임금의 이목을 가리고 공론을 경시한다.’ 하였으니, 어찌 살피지 못함이 이렇게도 심하단 말입니까. 이익이 직접 유철의 말을 듣고 곧바로 논핵하였으니 이는 근거한 바가 없지 않다고 하겠습니다마는, 오정위가 논핵을 당한 뒤에 사대부 가운데 원통한 일이라고 말하는 자가 많았으니, 비록 일반 관원일지라도 논핵당한 일이 사실과 다르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데 더구나 재신의 경우이겠습니까. 신이 이로써 말씀드린 것은 오정위 한 사람의 입장만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익이 이와 같이 말하고 있으니, 신은 사실 이해가 안 갑니다.
또 민유중의 상소는 더욱 이상합니다. 그날 ‘임금의 이목을 가린다.’라고 했던 말은 범범하게 논한 것이었는데 민유중이 스스로 떠맡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신이 비록 힘없고 나약하나 서로 따져서 사체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신이 버티고 있기 어려운 정황이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파직시켜서 공의(公議)에 사례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엊그저께 탑전에 입시하였을 때 감히 오정위가 파직된 것에 대해 억울하게 되었다고 말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지금 사간 이익이 인피한 말을 보고 그지없이 부끄럽고 죄송하게 여깁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대관(臺官)이, 재신이 목격하고 한 말을 직접 들었을 경우 곧바로 논핵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일이 없는데 억울하게 죄를 입었다면 신들이 아뢰는 것 역시 못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신과 동료 정승이 아뢴 말이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는 있더라도 그를 구원한 것은 똑같습니다. 어떻게 감히 태연히 직책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인혐한 것이 사체를 손상하지 않겠는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청나라에서 새로 반포한 역서를 이미 인쇄하여 진상하고 그 나머지 본감에 소장된 것이 1백 권밖에 안 됩니다. 더 인쇄하여 서울의 아문과 여러 도에 널리 반포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월 7일 임오

사간 이익이 또 대신이 상소하여 배척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헌납 이동로 등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전 참판 오정위를 추감하였는데 오정위가 세 번이나 항거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입증(立證)한 글은 분명하지 않고 문비(問備)한 말은 분명하여 별로 죄를 줄 만한 일이 없으니 용서하고 파직하지 말라."

 

1월 8일 계미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이정영(李正英)을 도승지로, 이경억(李慶億)을 이조 참판으로, 윤심(尹深)을 교리로,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집의로, 심유(沈攸)를 장령으로, 조복양(趙復陽)을 행 대사성으로 삼고, 장선징(張善澂)을 특별히 제수하여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양사가, 장선징에게 특별히 품계를 올려준 명을 거두라고 청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차자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0일 을유

민유중(閔維重)을 이조 참의로, 이시술(李時術)을 병조 참의로, 김익경(金益炅)을 참지로, 오정위(吳挺緯)를 형조 참판으로, 이익(李翊)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제수하고, 이정(李程)을 사간으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이지형(李枝馨)을 통제사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을유년001)   책례(冊禮)할 당시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영녕전(永寧殿)에도 고유제를 행하였습니다. 신묘년002)  에는 단지 묘사(廟社)에만 행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을유년과 기묘년에 시행했던 예가 있으니, 영녕전에도 똑같이 고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1월 11일 병술

흰무지개가 달을 가로질렀다.

 

장령 박증휘가 아뢰기를,
"병조 참판 장선징이 앞서 도승지로 있을 때 문득 격식 외의 자급을 받았으므로 신들이 환수하기를 청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 정사에서 또 병조 참판으로 옮겨 제수하셨습니다. 신들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특별히 발탁하는 전례가 없지 않고 또 서열로 인해 품계를 올려 준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에 상의하여 정계(停啓)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물의가 그르게 여기고 있다 하니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헌납 이동로, 정언 어진익, 사간 이정도 논계를 중지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였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책례할 때에 세자가 쓸 관(冠)을 의논하여 결정하고자 경들을 인견한 것이다. 경들은 예조의 초기(草記)를 보았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면복(冕服)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른바 면복이란 평천관(平天冠)이 아니다. 평천관은 관례를 치루기 전에 쓸 수 없으므로 책례 때는 공정책(空頂幘)을 쓰기로 일찍이 의논하여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지 쌍동계(雙童髻)만으로 정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위에 쓰는 것이 없어서 타당하지 않을 듯하다. 공정책에 대해서는 어찌 거론하지 않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예조가 면복(冕服)이 면(冕)과 복(服)인 줄을 모르고 의복이라고 오인하였으니, 살피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평천관은 체모가 중하므로 공정책이 편리할 듯합니다.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제도를 널리 상고하여 속히 정밀하게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옷은 칠장복(七章服)을 쓰고 관은 공정책을 쓰도록 해조에 말하여 거행하게 하고, 적말(赤襪)과 적석(赤舃)도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만들어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수원 사람이, 자기 아들이 구문치(具文治)에게 피살되자, 이일선(李一善)에게 글을 보내어 원수를 갚으려고 모의했다가 발각되어 도망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부사 김시진(金始振)이 그 사람을 잡아다가 조정에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죽였다 합니다. 대개 그의 뜻은 뒷날 일이 생기면 잘못을 국가에 돌리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먼저 처참하고 뒤에 아뢴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그것이 온당한 처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역시 나름대로의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혁연이 이미 언문 서찰을 써 준 사람을 가두어 놓았는데, 이는 비록 반드시 죽여야 할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글 내용이 몹시 흉칙합니다. 절도에 정배하여 후일을 징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2일 정해

진주사 허적, 부사 남용익, 서장관 맹주서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상이 안질 때문에 침을 맞고 난 후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진주 정사 허적, 부사 남용익을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조사한 일이 마침내 순조롭게 끝나고 경도 잘 돌아왔으니 정말 기쁘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비록 성은을 입어 살아서 돌아오기는 했습니다마는, 신이 사신의 임무를 형편없이 하여 전에 없던 모욕이 국가에 미치게 하였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미 스스로 감당하였으니 벌금을 물리는 모욕이 이른 것은 이치상 당연하다. 내가 스스로 감당하려고 할 때에 경이 이미 이러한 우환이 있을 것으로 염려하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경이 과연 고려한 바가 있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저 나라의 규례는 비록 존귀한 황제라 하더라도 잘못이 있으면 벌금을 내는데 이번에 벌금을 물게 하는 것은 대체로 관대하게 법을 적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자,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일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사실 신들의 죄입니다. 사신은 참으로 힘을 써볼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남용익이 아뢰기를,
"저들 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논의가 정해지지 않아 두세 번 상의한 후에야 결정했다 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처음에 저들의 말을 들어 보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책임지려 하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또 보정 대신(輔政大臣)이 의관 김만직(金萬直)에게 말하기를 ‘조사의 건은 반드시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니 돌아가 너의 사신에게 말해주어 안심하고 잠자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의 생각에 끝내 무사하리라 여기었는데, 떠날 무렵에 임박하여 자문을 보고 나서 비로소 이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사세상 미급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들어갈 때에 상께서 정문(呈文)하지 말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에 신들이 따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젯밤 별의 변괴는 정말 매우 놀라웠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흰무지개가 달을 가로지른 변괴는 근래에 없었습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변이 있고 없고는 말할 것도 못 됩니다. 안일에 빠져 세월만 보내면 재변이 없어도 위태로울 것이며, 재변을 만나도 조심하면 그 재변이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근래에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기강과 법률이 날로 무너져 가고 있으니, 이렇게 가다가는 비록 좋은 징조가 날마다 이른다 하더라도 망하지 않을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공경하고 서로 돕는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풍습이 점점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군신 상하가 모두 면려해야 할 부분이다."
하였다. 허적이 또 사신의 임무 수행을 형편없이 하여 임금에게 모욕을 미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인책하고 죄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스스로 감당한 것은 경들이 권해서 한 것이 아니므로 정문(呈文)하지 말라고 한 것이고 또 떠날 때 분부한 바가 있는데 경이 불안해 할 것이 뭐가 있는가."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우상이 처음에 번신(藩臣)으로 하여금 책임지게 하고자 했던 것은, 대개 대신은 임금과 가깝고 또 의외의 환란이 생길까봐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우상의 말을 상당히 그르게 여기더니 지금 와서는 도리어 우상에게 잘못을 돌리니 매우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를 죽을 죄로 논한다면 임금된 자가 어찌 그 신하에게만 떠맡기고 말겠는가. 비록 벌금보다 더한 모욕을 당하더라도 의리상 경들에게 떠넘길 수 없다. 경들은 이 뜻을 몸받아 다시는 인책하지 말라."
하였다.

 

1월 13일 무자

홍문관이 아뢰기를,
"《두씨통전(杜氏通典)》 및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책을 상고해 보니, 황태자가 관례(冠禮)를 치르기 전에는 쌍동계·공정흑개책(空頂黑介幘)·쌍옥도(雙玉導)에 보석 장식을 한다고 하였는데, 그 제도는 이미 도형(圖形)이 없고 주소(註疏)에도 명백하게 나타난 곳이 없었습니다. 또 《당서(唐書)》 거복지(車服志)를 상고해 보니 ‘흑개책의 청수분(靑綬粉)은 길이가 6척 4촌이며, 너비가 4촌으로 색깔은 그 끈과 같은데, 3품(品) 이상은 3양(梁), 5품 이상은 2양, 9품 이상은 1양으로 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경사(卿士)들이 착용했던 것으로 양(梁)이 있는 책(幘)입니다. 《진서(晋書)》에 ‘동자책(童子幘)은 옥(屋)이 없다.’ 하였는데, 옥은 곧 양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책은 동일한데 양이 있으면 흑개책이 되고 양이 없으면 공정흑개책이 됩니다. 그렇다면 《문헌통고》에 이른바 태자가 관례를 치르기 전에 착용한다는 공정책은 양이 없는 흑개책인 듯합니다. 그 제도는 오늘날의 양관(梁冠)을 모방하되 옥이 없게 하면 되겠습니다. 이 밖에는 다시 상고할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원이 이를 아뢰어 여쭙자,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이 제도를 모방하여 만들게 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잘못 사신의 임무를 띠고 가서 전에 없던 수모를 조정에 미치게 하였으니, 전후의 곡절과 그곳의 사세가 어떠했는지는 논할 것도 없이 첫째도 신의 죄이고 둘째도 신의 죄입니다. 신의 관직을 삭탈하여 빨리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재변이 겹쳐 나타나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데 인심이 예스럽지 않고 논의가 분열되어 조정에서 공경하고 서로 돕는다는 말을 들을 수 없고 사대부들 사이에는 서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으니, 이때가 진실로 어떠한 때인가. 경이 비록 한직(閑職)으로 나가고 싶다 하더라도 선조(先朝)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어찌 차마 나를 버리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불행히 생긴 것이다. 이게 어찌 경이 잘 주선하지 못한 소치이겠는가. 다소의 할 말은 면대했을 때 이미 다 말하였는데 다시금 여러 말을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빨리 나와 치도를 논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1월 15일 경인

박장원(朴長遠)을 예조 판서로, 이준구(李俊耉)를 승지로, 이후(李垕)를 사간으로, 민광소(閔光熽)를 장령으로, 안숙(安塾)·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이정(李程)을 수찬으로,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김징(金澄)을 헌납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삼았다.

 

장령 심유(沈攸)가 아뢰기를,
"작(爵)과 상(賞)은 국가의 공정한 기구이므로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억지로 공론을 어겨가며 헛되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병조 참판 장선징은 정원의 관원으로서 차서에 장애가 있음으로 인하여 처음에 새로운 자급을 제수하더니 곧 또 승직시켜 재차 잘못된 은전을 내리셨습니다. 명분 없는 상과 차서를 잃은 은총이 귀척(貴戚)에게 미쳤으니, 청명한 정치에 크게 누가 되었습니다. 장선징에게 새로 준 가자(加資) 및 본직에 제수하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 일마다 의심하는 것은 요컨대 임금을 섬기는 사체가 아니다. 진실로 몹시 온당치 못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심유가 엄한 전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기를,
"장선징은 귀척의 신하로, 전후에 걸쳐 특은으로 벼슬을 받고 또 재차 제수하는 명을 받았으니 여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가자를 환수하라는 계사를 선뜻 정지하였다는 것으로 양사의 많은 관원이 인피하여 체차되기까지 하였으니, 오늘날 청하는 것은 사실 공론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이 너무 지나쳤다고 의심하시어 이 엄한 분부를 내리시니, 신이 어찌 감히 직책에 태연히 있겠습니까. 신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인피하는 글을 보니 더욱 놀랍다. ‘벼슬을 받고 또 재차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一命二命]’라는 말은 진실로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지평 원만리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우의정 허적이 다시 차자를 올려 자책하고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통제사 이지형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영은 중요한 곳인데 근래에 주장(主將)이 자주 바뀌니, 본영(本營)의 일이 정말 염려스럽다."
하고, 이어 해안 방어의 형편에 대해 물으니, 지형이 아뢰기를,
"신이 그전에 좌수사로 있을 때 어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바다의 수세가 갑자기 달라져, 그전에는 대마도와 통영이 직로가 되었는데 지금은 수영이 직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좌병영의 진을 울산에 설치한 것은 애당초 여러 섬의 왜인이 번갈아 나와 노략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육군의 장수가 한쪽 모퉁이에 있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니, 영천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좌수영을 부산의 감안(甘安)에서 배를 정박하는 옛터로 옮겨 설치한다면 상당히 편리하고 좋겠으나, 조수가 빠지는 상현과 하현 때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할 터이니, 울산의 해포(醢浦)에다 옮겨 설치하는 것보다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동래의 금정 산성(金井山城)은 형세가 매우 좋고 옛터가 완연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 수축하여 모여 살게 한다면 요새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배의 제도가 너무나 높아 개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아뢰니, 상이 부임한 뒤에 자세하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1월 16일 신묘

동지 남용익이, 명을 받들고 외국에 나가 국가에 치욕을 끼쳤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죄를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정언 안숙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병조 참판 장선징을 당초 품계를 올려 발탁한 것은 정원의 서열에 구애가 되어서 한 것이었고 보면 양사가 논한 것은 사실 공론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윤허하지 않고 뒤이어 또 옮겨 제수하여 마치 호승(好勝)한 자처럼 하시니, 여론이 갈수록 격렬해져 너나없이 놀라고 의혹해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품계를 올려 준 것과 새로 제수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말을 보건대,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미 옮겨 제수하였다고 말해 놓고 호승한다는 말은 또한 무슨 뜻에서 하였는가? 내가 보기에는 네가 호승한 것을 면하기 어렵다 하겠다. 어떻게 너의 호승한 것으로 임금에게 호승한다고 억지로 뒤집어씌울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너무나 터무니없다."
하자, 안숙이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장령 민광소 등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상이 사알(司謁)을 시켜서 정원에 묻기를,
"무릇 대간을 처치할 때 ‘체척신직(遞斥臣職)’이란 네 글자 외에 인피한 글의 전문(全文)을 다 쓰는 것이 규례인데, 지금 심유를 처치한 계사를 보니 피혐한 문자를 대부분 빼버렸는데 옮겨 적을 때 빠뜨린 것은 아닌가?"
하니, 승지 이익이 대답하기를,
"피혐한 글 중에 번잡한 말을 빼버리는 일은 전에도 더러 있었습니다마는, 이번 처치 계사는 너무 지나치게 뺐기에 베껴 쓸 때 해방 승지가 주서(注書)로 하여금 대신(臺臣)에게 서간을 통해 묻게 하였더니, 단지 몇 구절의 말만 넣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따라 써서 들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대간이 인피하는 말은 바로 임금에게 고하는 말인데, 본문과 베껴 쓴 글이 서로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다. 처치한 대관이 어떻게 감히 이처럼 마음대로 고칠 수 있겠는가. 이는 편리함을 취하려는 계획에 불과하다. 승지는 이미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도 그대로 봉입한 것은 어째서인가? 받아들였다가 그대로 내려보내니 내가 살피지 못했다고 여기는가? 이미 하문한 후에도 이처럼 소홀하게 회계하니 정말 놀랍다."
하자, 이익이 대답하기를,
"해방 승지 김우형(金宇亨)이 이미 물러갔으므로 그 전말을 주서(注書)에게 물어보았는데, 회계할 즈음에 재촉하는 전교가 재차 이르렀기에 황급히 써서 들이느라 또 하문하시게 하였으니, 신은 매우 황송합니다. 주서에게 연유를 자세히 물어 보았더니 당초 전계(傳啓)할 때 승지가 발견하지 못했는데 정서하다가 비로소 삭제한 것을 알고 서간으로 물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답하기를 ‘다 쓸 것 없다. 일명이명(一命二命) 네 글자만 써 넣으면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써서 들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인피하는 문자를 절반이 넘게 삭제해 버렸다. 만약 글쓰기가 고역스러워 그랬다면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이처럼 마음대로 고쳐서는 안 되는 법이고 만약 근래의 법규라고 핑계댄다면 ‘일명이명’ 네 글자를 뒤미처 생각하여 기어이 첨가한 것은 유독 무슨 의도인가? 임의대로 삭제한 작태가 이미 드러났는데 승지도 어찌 감히 하는 대로 맡겨두고 한 마디도 봉입(捧入)하지 않았는가? 모두 매우 놀랍다. 원만리와 김우형은 모두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승지 이원정·이익 등이 환수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17일 임진

조복양을 이조 참판으로, 이정기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공조 참판 이시매가 죽었다. 시매는 첨정 춘영(春英)의 아들인데 그 역시 시를 짓는 재주가 있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1월 18일 계사

가주서 이윤조(李潤朝)가 명을 받들고 세자 이사(世子貳師) 송시열과 찬선 송준길에게 가서 책봉할 때 조정에 나오라고 전유하였는데,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장령 심유가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홍주삼 등이, 소명에 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세 때문이었으나 이미 잘못한 바가 없으니 인혐할 필요가 없다며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대간을 처치할 즈음에 인피한 글의 내용 중에 너절한 말은 삭제하고 긴요한 말만 남겨 두는 것은 바로 근래의 규례입니다. 그러므로 대관이 여기에 의거하여 삭제한 것이지 본래 다른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승지도 이미 간통을 왕복하고 나서 규례에 따라 봉입한 것이니, 어찌 잘못한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분부가 매우 엄하시어 파직 추고하라는 명까지 내리시니, 본 계사의 내용 가운데 성상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 이렇듯 격노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나의 소소한 일로 인하여 지나친 거조를 하시니, 이것이 어찌 성상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원만리와 김우형에게 내린 파추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납 김징이 아뢰기를,
"대간이 인피한 글에 만일 지리한 말이 있으면 간추려서 문안을 작성하는 것은 이미 근래의 규례가 되어 있으므로, 원만리가 전문을 다 쓰지 않은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삭제한 부분은 주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의심하지 않을 곳을 의심하시고 잘못이 없는 곳에서 잘못을 찾으시며 노여움을 가중시키고 분부를 엄하게 하셔서 이렇게 중도에 벗어난 거조를 하시니 이것이 어찌 신하들이 성상께 바라는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작태가 이미 드러났다.’라고 하신 분부는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끝내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소인의 마음으로 대성인의 마음을 엿보아 ‘환수하라는 논의를 불쾌하게 여겨 잗단 일을 들추어 내어 죄안을 삼았다.’라고 한다면 성덕에 얼마나 누가 되겠습니까. 김우형의 경우도 이미 대청과 간통(簡通)을 왕복하였고 규례에 따라 봉입하였으니, 더욱 잘못이 없습니다. 원만리와 김우형을 파직하고 추고하라 하신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안숙이, 엄한 비답을 받은데다 또 소명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차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처치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체차로 허락하신 것은 대각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재차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침을 맞았는데, 약방 도제조 홍명하, 제조 박장원, 부제조 이정영이 입시하였다. 상이 영상 정태화도 부르라 명하고 이르기를,
"세자가 책례(冊禮)를 마친 후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대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外庭)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이게 염려스럽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만일 염려되시면 내정에서 행하시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고, 박장원이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그렇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문을 올리는 일은 큰 예이고 또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進賀)하는 일에 비교될 바가 아닙니다. 단지 동궁의 소속 관원만 재계하고 참석하게 한다면 잠시 동안 예를 행할 것인데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내정에서 예를 행하는 것은 구차하고 소략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정말 옳다. 외정에서 예를 행하기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번 진전과 진하는 막중한 예이니 만큼 전하께서 친히 납시어 받으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홍명하가 이어 원만리와 김우형을 특명으로 파직 추고한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자세히 진달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월 19일 갑오

정계주(鄭繼胄)를 승지로, 조성(趙䃏)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홍주삼, 장령 민광소, 지평 이단석이 인피하기를,
"국가가 대신(臺臣)을 대우하는 것은 체모가 특별합니다. 그런데 안숙이 인책하고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자, 처치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체직을 허락해 버렸으니, 실로 너그러이 포용하는 도량에 흠이 됩니다. 신들이 환수하기를 청하고자 간통을 주고받는 사이에 정관(政官)이 이미 그의 대임자를 차출하였습니다. 신들이 일처리를 더디게 하여 성조의 지나친 거조를 즉시 회수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한창 승지를 파추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는 계문을 올리고 있는데, 전하께서 특명으로 그 대임자를 차출하게 하셨으니, 대관이 논의를 한창 펴고 있는 때에 이런 전에 없던 지나친 분부를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들이 있으나마나 하기 때문입니다. 체직해 주소서."
하고, 헌납 김징과 장령 심유도 이러한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하였다.

 

응교 심재가 차자를 올려 원만리와 김우형을 파직 추고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21일 병신

헌납 김징이 아뢰기를,
"무릇 대관과 승지가 파직 또는 체차되었을 때 삼사가 쟁집할 경우, 해조가 그 대임자를 뽑아 품달할 수 없는 것은 사체를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해조는 곧바로 그 대임자를 뽑아 품달하였고 정원은 멍청하게 계달하였습니다. 이는 이미 전례를 어긴 것이며 또 뒤 폐단을 열어 놓았으니, 이조 당상 낭청 및 해방 승지를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거듭 이르고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아 잔치를 베푸는 예마저도 정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은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인하여 축하하는 자리를 크게 열고 음악을 성대하게 베풀었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오시에 상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였는데, 종친과 문무 백관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차례로 섰다. 왕세자는 쌍동계(雙童髻)에다 공정책(空頂幘)을 쓰고 칠장복(七章服)을 입고서 막차로 나아가니 상례(相禮)가 인도하여 인정문 동협문(東夾門)을 거쳐 동쪽 뜰에 이르러 자리로 나아갔는데, 궁관(宮官)이 수행하였다. 왕세자가 네 번 절하니, 전책관(傳冊官)이 【예방 승지.】  상의 앞에 나아가서 엎드려 꿇어앉아 전교하라고 아뢴 다음 전(殿)의 동문을 거쳐 나가자, 집사가 교명책인안(敎命冊印案)을 마주 들고 따라갔다. 전책관이 왕세자가 있는 동북쪽으로 내려가 서쪽을 향하여 서니, 집사가 안(案)을 마주들고 전책관의 남쪽에 섰다가 조금 물러나 서쪽을 향하였다. 전책관이 교명이 있을 것이라고 하니, 왕세자가 꿇어 앉았다. 전책관이 함을 열어 책문을 꺼내 소리내어 교명을 읽었다. 그 교명은 다음과 같다.
"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원량이 바르게 길러지기 위해서는 일찍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글을 《예기(禮記)》에서 상고할 수 있고 종묘가 존엄해지려면 세자를 일찍 세워야 한다는 의논을 한사(漢史)에서 전하고 있다. 이는 하(夏)·상(商)·주(周) 삼대 때 오래도록 치세가 유지되었던 방법이었고, 또한 열성조(列聖朝)에서 모두 따라오던 교훈이었다. 이에 떳떳한 법에 따라 책명(策命)을 선포하노라. 오, 원자 돈(焞)아! 너는 모습이 수려하고 기질이 청명하다. 궁안에서 사랑과 공경을 스스로 도타이 펴 타고난 자품이 애연히 드러나고, 영특한 슬기가 어려서부터 드러나 엄연히 날마다 진취하였다. 옷을 가눌 무렵에 절하고 나아가는 예절을 익히었고, 보양관을 두어 가르치자 《효경(孝經)》을 이미 통달하였다. 어찌 등을 어루만지는 나의 사적인 마음뿐이겠는가. 사실 목을 늘여 고대하는 백성들의 희망이 달려 있었다. 지난해부터 뭇 사람들의 마음에 세자로 세우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이 좋은 때에 이르러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성대한 법전을 거행하노라. 세자의 자리에 올려 만세의 터전을 부탁하기 위해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지금 어렸을 때 큰 뜻을 세워야 할 것이다. 도의(道義)를 위주로 하면 저절로 그르고 편벽된 싹이 트지 않을 것이며, 학문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먼저 깊은 성리(性理)를 밝히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미 스승의 손에서 떠났으니 오직 힘써 어진이를 가까이 하며, 어렸을 때의 마음을 잃지 말고 덕을 성취하기에 더욱 힘쓰라. 익힘과 아울러 지혜가 발달하는 법이고 인(仁)은 효도로 드러나는 법이니라. 서책에 모두 남아 있으니 문왕이 세자로 있을 때의 일을 본받아 행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기에 배울 수 없겠는가.’라고 하라. 부모가 기대하는 정성을 몸받아 새벽부터 밤까지 게을리 하지 말며, 조종께서 이룬 어렵고도 큰 유업을 생각하여 시종 허물이 없게 하라."
죽책문(竹冊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나는 생각건대, 세자를 세워 적통을 수립하는 것은 종조(宗祖)를 계승하기 위함이요, 지위를 정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은 백성들의 기대를 묶어 놓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대대로 중하게 여겼던 일이니 어찌 어리다고 해서 늦출 수 있겠는가. 이에 옛법을 따라 삼가 아름다운 식전을 펼친다. 아, 너 원자 돈(焞)은 나면서부터 효경(孝敬)을 알았고 자질도 총명하여 행동거지가 자연히 절도에 맞았으며 단정하고 영특한 모습은 마치 성인(成人)과 같이 늠름하였다. 학업이 이미 상당한 문리에 이르렀으며 덕성과 국량은 스승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주(周)나라의 교육은 반드시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법을 먼저 했는데, 한(漢)나라의 빈틈없는 의절에 어찌 세자를 미리 세우는 것을 늦추었겠는가. 이미 훌륭한 소문이 일찍 전파되었으니 마땅히 책호를 하루빨리 정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따라 이에 세자를 정하고 이제 너를 왕세자로 명한다.
아, 너의 어린 뜻을 버리고 나의 훈계하는 말을 공경히 받들라. 인·의·예·지의 떳떳함은 본래 천성이며, 요·순·우·탕의 도는 인륜을 벗어나지 않았다. 몸을 성실하게 하려면 훌륭한 사람을 친히 하는 것만한 일이 없으며, 이치를 밝히려면 학문을 강론하는 것만한 일이 없다. 혹시라도 완호(玩好)를 일삼지 말며 혹시라도 주색에 빠져들어 즐기는 일을 따르지 말라. 날로 달로 진보하여 시종 학문을 생각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태만함을 경계하라. 공경히 도심을 지키면 거의 우리 조상께 욕됨이 없을 것이고, 밝으신 명을 주심이 그 처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다."
선포가 끝나고 왕세자가 네 번 절하고 꿇어 앉자, 집사가 교명책인안을 마주 들고 차례로 전책관의 앞에다 놓았다. 전책관이 교명함을 받들어 왕세자에게 주니 왕세자가 규(圭)를 꽂고 함을 받아서 보덕(輔德)에게 주자 보덕이 왕세자의 왼쪽에 꿇어 앉아 받았다. 전책관이 또 책함(冊函)을 받들어 왕세자에게 주니 왕세자가 받아 필선(弼善)에게 주었다. 전책관이 또 인수(印綬)를 받들어 왕세자에게 주니 왕세자가 이를 받아서 익찬(翊贊)에게 주었다. 보덕·필선·익찬은 왕세자의 뒤에 서고 전책관은 모시는 자리로 돌아왔다. 집사가 각각 들고 있는 안(案)을 익위사의 관원에게 주자 익위사의 관원이 보덕·필선·익찬의 뒤에 섰다. 왕세자가 네 번 절하자, 상례(相禮)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문을 거쳐 나왔다. 예가 끝나자 상이 안으로 돌아왔다. 이때 세자의 나이 겨우 7세였는데도 움직이는 모습과 도는 동작이 모두 예절에 맞았으며 뛰어난 자품과 덕있는 용모가 엄연히 성인과 같았으므로 뜰에 가득찬 신료들이 모두 탄식하며 목을 늘여 보았다.

 

1월 23일 무술

진시에 상이 면복을 갖추어 입고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은 다음 사면령의 교서를 반포하였다. 신시에 왕세자가 쌍동계에다 공정책을 쓰고 칠장복을 입고서 자리로 나아가자, 승전(承傳)이 왕세자가 있는 자리의 북쪽으로 나아가 동쪽에 가깝게 서쪽으로 향해 섰다. 왕세자가 네 번 절하고 꿇어 앉아 규를 꽂았다. 예조 정랑이 전(箋)을 받들고 꿇어 앉아 궁관(宮官)에게 주니 궁관이 이를 받아 꿇어 앉아서 왕세자에게 주었다. 왕세자가 함을 받아 승전에게 주니 승전이 꿇어 앉아 받아서 내시에게 주었다. 제용감의 관원이 표리함(表裏函)을 받들고 꿇어 앉아 궁관에게 주자 궁관이 이를 받아 꿇어 앉아서 왕세자에게 주었다. 왕세자가 함을 받아서 승전에게 주니, 승전이 이를 받아 내시에게 주자 내시가 받아서 가지고 들어갔다. 왕세자가 규를 잡자 승전이 나와 제자리로 돌아왔다. 왕세자가 네 번 절하니, 상례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동협문으로 거쳐 나갔다. 예가 끝나자 상이 안으로 돌아왔다.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한 사람의 원량(元良)을 얻으니 나라의 근본이 되었고 세자의 호칭을 정하니 백성의 마음이 굳어졌다. 이에 팔도가 다같이 기뻐하는 때를 당하여 열줄의 글로 크게 알리노라. 생각건대, 나라에 세자를 일찍 정한 것은 곧 제왕의 대통을 계승하는 원대한 계획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방도에 대해 《주례(周禮)》에 중시하였고 미리 세자를 세워야 한다는 계획에 대해 한사(漢史)에 말하였다. 생각건대, 과인이 어렵고도 큰 유업을 지키게 되었다. 영고(寧考)의 훌륭한 교훈을 이어받아 자손에게 물려 주게 되었고 묵묵히 도와주는 하늘의 인(仁)에 힘입어 아들을 두게 되었다. 오, 너 원자는 좋은 자질을 지니고 태어나 특출한 인품이 천연으로 이루어졌다.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알면서부터 학문이 날로 진취되어 스승의 공력을 들이지 않고도 《효경》에 통달하였고 행동할 때마다 예절에 따라 하였다. 종묘 제사의 중책을 맡은 것은 어질다는 소문이 일찍 드러난 데에 바탕한 것이고 겨우 옷을 가눌 나이인데도 사랑스럽게 덕기(德器)가 엄연하였다. 이미 신민이 추대하기를 원하였으니 책봉의 예가 융숭할 만하도다. 이에 대통을 계승할 높은 자리를 주어 목을 늘여 기다리는 바람에 부응한다. 구가(謳歌)가 돌아갈 데가 있으니003)   별이 거듭 밝은 상서에 들어 맞았고 왕업을 부탁할 것이 걱정 없으니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예를 즐거이 보게 되었다. 이는 정말 종묘의 큰 경사이다. 어찌 부자 간의 사정뿐이겠는가. 하(夏)·상(商)·주(周) 삼대의 장구한 도가 실로 여기에 바탕을 두었고 만세토록 끝없는 복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좋은 후사가 있어서 전대를 빛나게 하니 태양이 잇따라 비추는 것을 우러러보고 이를 미루어서 저쪽에 베푸는데 어찌 큰 은택을 널리 베푸는 것을 아끼겠는가.
이에 이달 23일 새벽 이전에 있었던 갖가지 범법자와 죽을 죄를 진 자들을 모두 용서하며, 관직에 있는 자에게는 각각 한 품계씩 올려 주되, 품계를 더 이상 올려 줄 수 없는 자에게는 다른 사람으로 대신 올려 주게 하라. 아, 조상의 훌륭한 모의를 계승하여 감히 조상을 더럽히지 말라는 경계를 잊을 수 있겠는가. 같이 삶을 누리고 죄를 모두 용서하니 어린이를 사랑하는 자애심을 미루어 베풀게 되었도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가 사직소를 올려 인피하고 들어가니,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도목대정(都目大政)을 열었다. 홍주삼(洪柱三)·김석주(金錫胄)를 수찬으로, 이숙(李䎘)을 집의 겸 보덕으로, 최유지(崔攸之)를 보덕으로, 홍만형(洪萬衡)을 문학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지경연으로 삼았다.

 

1월 25일 경자

간원이, 장선징에게 특별히 가자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던 계사를 중지하였다.

 

유성이 구진(勾陳) 성좌 아래서 나와 화개(華盖) 성좌로 들어갔다.

 

1월 26일 신축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를 책봉하는 예를 이미 거행하였으니 이는 종사와 신민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아 사방의 사람들과 같이 경사를 누리는 것인데, 이는 조종조에서 이미 거행해온 일입니다. 등록을 상고해 보니 을유년에 실시한 별시는 시험 장소를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서 6백 명을 뽑았는데, 초장에는 부(賦)와 표(表)를, 종장에는 책문(策問)을 시험보이고 경을 강하는 것은 뺐으며, 신묘년에 실시한 별시는 모두 서울로 집합시킨 다음 시험 장소를 삼소(三所)로 나누어 각각 2백 명을 뽑았는데, 초장에는 논(論)과 표를, 종장에는 책문을 시험보였으며, 을유년에는 두 가지 경사를 합해 과거를 보였고, 신묘년에는 일곱 가지 경사를 합해 과거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별시는 두 해와 비교해 볼 때 차이가 있으니 어느 해의 예를 따라 시행할 것입니까? 과거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해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정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는데, 영중추 이경석은 신묘년의 예에 따라 거행해야 한다고 의논을 드리고,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 우상 허적은 병이 있어서 의논을 수렴하지 못하였다. 상이 의논에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민광소, 지평 이단석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병조 참판 장선징에게 올려준 새 품계와 본직을 도로 거두자고 잇따라 청하면서 앞서 올린 계사의 말을 조금 삭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론을 들어보건대, 의논을 제기한 동료가 현재 그 직책에 있는데 같이 의논하여 삭감하지 않았다고 그르게 여긴다 하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집의 이숙이 처치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1월 27일 임인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승지로, 신명규(申命圭)·박증휘(朴增輝)를 장령으로, 유헌(兪櫶)·이하(李夏)를 지평으로, 조성보(趙聖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헌부가, 장선징에게 특별히 품계를 올려준 명을 도로 거두라고 한 계사를 중지하였다.

 

세자 빈객 윤문거(尹文擧)와 진선 윤선거(尹宣擧)가 소를 올리고 나오지 않았다.

 

원양도(原襄道) 유생 최심(崔淰)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28일 계묘

시강원이 아뢰기를,
"세자가 비록 어리기는 하나 책봉을 받고 전(箋)을 올리는 등의 예를 이미 대정(大庭)에서 거행하였으니, 불가불 태묘에 참배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여염간에 나도는 질병이 깨끗이 가시지 않아 염려가 되신다면 궐내에서 태묘(太廟)의 북신문(北神門)으로 통하는 길을 이용했던 일이 또한 전례가 있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상소하여 구양수·범진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치사(致仕)를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우찬성 송시열이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새해가 되었으니 성상의 마음속에 비색함도 사라질 것입니다. 더구나 임금께서 세자를 내시어 성대한 의식을 장차 거행하려 하시니 온 나라 신민이 힘차게 나아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세자의 진학 문제는 늦추어서는 안 되니 속히 도술(道術)을 지닌 사람을 널리 뽑아서 보·부(保傅)의 직임에 충당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죄명이 몹시 무거워 여러 사람의 눈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 외람되이 그 사이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삼가 듣건대, 먼 곳의 소식이 먼저 들려오자 대소 신료가 서로 경하하며 모두들 눈앞의 분란이 해소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삼가 한심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통곡하고 있습니다. 신이 이미 바다에 빠져 죽지 못했으니, 오직 이 몸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나무를 안고 말라 죽는다면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옛날 주자(朱子)가 경원(慶元)004)   말에 지은 시에 ‘이 도가 끝내 비색하지만은 않으리니, 내년의 태세가 또 다시 군탄이구나.[極知此道無終否 明年太歲又涒灘]’ 하였습니다. 대개 군탄은 옛날 진법(辰法)에 신(申)을 이름한 것인데, 송 태조가 개국한 해가 바로 경신년이었으므로 주자가 이 시를 지어 몹시 상심하며 눈물지었던 것입니다. 우리 홍무(洪武)무신년005)  이 또 내년이어서 군탄이란 이름이 또 마침 서로 부합하게 되었으니, 무릇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를 흠뻑 입은 신하들은 누구나 옛날을 생각하여 슬피 사모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왕통을 이어받으시고 명나라 섬기려는 뜻을 이으셨으니 분발하셔서 큰일을 해보시려는 생각을 반드시 그만두지 못하실 것이고 보면, 지모와 재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조정에 나오기를 원치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신 같이 늙어버린 자는 더욱 물러가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유시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할 것이 있겠는가. 봄날이 점점 풀리고 있으니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어서 돌려 서둘러 올라오라."
하였다.

 

1월 29일 갑진

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삼았다.

 

집의 이숙, 장령 박증휘·신명규, 지평 유헌·이하, 헌납 김징, 정언 조성보가 합계하기를,
"지난해 사문(査問)할 때 전하께서 스스로 책임지셨던 것은 실로 대신을 염려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마는, 대신의 도리로 보면 자신의 죄로 돌리고 직접 감당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등은 성상이 스스로 책임지신다고 할 때 힘껏 쟁집하지 못하여 벌책이 임금에게만 돌아가게 하였으니, 신하된 분의로 헤아려 볼 때 감히 스스로 편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체차하소서.
이번에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왔을 때, 대신의 죄는 비록 면하였으나 벌금을 내는 일이 도리어 성상께 돌아갔습니다.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사신의 임무를 띠고 간 신하가 마땅히 힘껏 쟁변하여 이로 인해 우리 임금에게 누가 되지 않게 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였다면 설혹 구제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또한 직책은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주사 허적 등은 단지 대신이 죄를 면한 것만 다행으로 알았을 뿐, 임금이 벌을 받는 것이 원통한 것인 줄은 모르고서 장황하게 치계하여 공을 통역배에게 돌렸으니, 이것이 과연 무슨 의리입니까? 신하의 죄를 임금에게로 돌렸으니 얼마나 명분이 어긋나고 의리가 손상되었습니까.
이 일이 있고부터 위로 사대부와 아래로 무명인사들, 그리고 민간의 백성들까지 모두 국가를 위하여 분개하면서 사신들을 탓하고 있으니, 천리와 인심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만약 그대로 두고 죄주지 않으면 나라의 체모를 높이지 못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허적·남용익·맹주서를 아울러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사알(司謁)로 하여금 정원에 묻기를,
"대간이 패초(牌招)를 받고도 나오지 아니한 뒤에 인피한 자도 있고 인피하지 아니한 자도 있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니, 승지 정계주(鄭繼胄)가 대답하기를,
"근래에는 패초에 나오지 않아도 응당 체차하는 사례가 없기 때문에 혹 인피하기도 하고 인피하지 않기도 하는 등 그 규례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정언 조성보가 즉시 나와 숙배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는 뜻이 있었으며, 심지어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뭇 의논이 들끓어 일을 회피한다는 것으로 논핵하려 하자, 성보가 부득이 출사하여 합계에 참여하였다. 이번 성상의 분부는 대개 성보로 인하여 나온 것이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양사가 대신을 논핵하는 계사에 단지 체차하기만을 청하는 것이 전례가 있는가?"
하니, 승지 정계주가 대답하기를,
"양사가 대신을 추고할 수는 없으나 논핵하여 체차할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옛 사례에 대해 어찌 정확히 지적하여 말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느 때 어느 정승을 논핵해 체차하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창졸간이라 기억해 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익을 형방 승지로 바꾸어 차임하라 명하고서 이어 하교하기를,
"체차한 옛 예가 있는지 없는지 빨리 회계하라."
하니, 이익이 대답하기를,
"신이 대간과 상피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만, 성상께서 물으시니 알고 있는 바가 있으면 하나하나 자세히 아뢰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떠도는 말을 들어보니 더러 대신을 논박하여 체차시킨 적이 있었으나 어느 때 어느 정승의 일이었는지는 끝내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이미 떠도는 말이 있었으면 말하기 어렵지 않을 터인데, 내가 묻기 때문에 사실 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니 정말 통분하다. 내 꼭 알고 싶으니 빨리 사실대로 회계하라."
하자, 대답하기를,
"신이 만약 알고 있다면 어떻게 감히 누구라고 지적하여 대답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떠도는 말만 들어서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비록 여러 차례 하문하셨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또 하교하기를,
"승지가 만약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의논을 제기한 대간에게 물어서 아뢰어라."
하였다. 그때 2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났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궁정에다 횃불을 환하게 밝히니, 대소 신하들이 허둥지둥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근일 우상이 실정을 털어놓지 않고 또 공무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정원에 물었는데, 그때 어떤 승지가 회계하였는가?"
하니, 정계주가 대답하기를,
"신과 김우석(金禹錫)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무릇 대소의 관원들이 이미 공무를 집행하지 못하고 또 실정을 진달하지 못하는 것은 필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제 예조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비로소 우상에게 이런 정세가 있다는 것이 의심이 가서 정원에 물었던 것인데 ‘감히 실정을 진달하지 못하겠다.’는 등의 말로 모호하게 회계하였다. 우상이 스스로 처신한 것이 어찌 분명치 않아 알기 어려운 일이겠는가. 임금을 속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승지 김우석·정계주를 잡아다가 엄하게 문초하라."
하고, 또 비망기를 내리기를,
"오늘날 일의 시종과 전말이 모두 모호하지 않으니 비록 두 정승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힘껏 간쟁한다고 나의 뜻을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지금 힘껏 간쟁했어야 한다고 말하고들 있으나 힘껏 간쟁하여 돌이킬 수 있었다면 이는 내가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말이 결국 허위적인 겉치레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왜 이다지도 신료들이 임금을 믿지 않는단 말인가? 이 일은 외정(外庭)의 신하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인데 감히 힘껏 간쟁했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하여 마치 나를 마음에 줏대가 없는 자처럼 보고 있으니 이게 정말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아, 신하로서 불충 불효한 것은 막대한 죄이니, 한(漢)나라 법으로 논한다면 대불경(大不敬)에 속한다. 여느 관리에게도 실정이 아닌 일로 죄명을 가할 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대신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간의 실태가 더더욱 가리기 어려운 점이 있다. 서로 다르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영상과 좌상을 체차해야 한다고 논핵한 일이 있었는데, 종적을 엄폐하여 구실거리를 삼으려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우상의 일에 있어서는 더더욱 곡절이 있다. 당초에 나보고 스스로 감당하지 말라고 한 것은 대체로 오늘날의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래서 그가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는 날에 내 다시 별도로 하유한 것인데, 이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세도가 날로 낮아지고 습속이 날로 야박해져서 순후한 예의의 풍속은 비로 쓸듯이 없어지고 이의를 달거나 오활하고 괴이한 의논들이 성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의 잘못을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기풍을 이러한 무리들에게 요구할 것조차도 없으나, 떼로 모여 횡행하는 무리들을 어떻게 그냥 조정에 놔두어 기세를 돋우어 줄 수 있겠는가. 성보의 일은 더욱 놀랍다. 이미 구애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나가 피하여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은 채 계속 사직 단자를 올렸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은 짧은 시간인데 어쩌면 그렇게도 급급하게 출사하여 이 일에 용감하게 나간단 말인가? 이는 이른바 갑옷을 입고 창칼을 든 무리이니, 별도의 처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숙·박증휘·신명규·김징·유헌·이하는 모두 변방으로 귀양보내고 조성보는 먼 변방에다 안치하라."
하였다. 상이 또 하교하기를,
"대신을 체차로 논의한 옛 규례가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야만 되겠으니 즉시 대간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이익이 대답하기를,
"비록 전교이긴 합니다마는 일찍이 대간에게 직접 묻는 규례가 없었으니 사체상 미안합니다. 또 뒤 폐단에 관계되므로 물어서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곧바로 묻기가 어려우면 승지나 사신이 나가서 자세히 물어서 아뢰라."
하니, 이익이 아뢰기를,
"이 역시 일찍이 그런 규례가 없었으므로 감히 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이미 체차되었으니 대간으로서 대접할 것 없다. 속히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하자, 이익이 엄명에 부대껴 대간에게 물었다. 당시에 양사의 관원이 이미 귀양보내라는 명을 듣고 뜰에서 석고대죄하고 있었다. 대답하기를,
"대간이 그 죄의 경중에 따라 파직할 만하면 파직을 청하고 체직시킬 만하면 체직시키기를 청할 뿐이니, 옛 규례가 있는지 없는지는 대간의 신하가 알 바가 아닙니다."
하자, 이익이 그들이 말한 것으로 서계하였다. 이윽고 상이 또 하교하기를,
"귀양보내는 전지를 어찌하여 아직도 봉입(捧入)하지 않는가?"
하니, 이익이 대답하기를,
"정청에 신과 정계주만 있습니다. 계주는 잡아들이라는 명을 받고 즉시 나갔고, 신은 이숙과 법규상 마땅히 상피해야 하므로 봉입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피에 구애받지 말고 속히 봉입하라."
하니, 이익이 아뢰기를,
"하교가 비록 엄하오나 뒤 폐단에 관계되는 일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득이하다면 밖에 있는 승지를 패초하여 전지를 받들게 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또 하교하기를,
"이숙은 비록 상피할 바가 있더라도 그 밖의 사람에 대한 전지는 어찌 봉입하지 않는가? 그대의 뜻을 내가 진실로 알겠다. 다른 승지를 패초하도록 청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역하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매우 놀랍다. 속히 봉입하라."
하니, 이익이 아뢰기를,
"엄한 분부가 비록 이렇다 하더라도 똑같은 죄명일 경우에는 일찍이 두 전지로 나누어 봉입하는 규례가 없으므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그대가 봉입하고 싶지 않다면 그대의 뜻대로 하라. 그대가 감히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익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비록 몹시 엄준하나 감히 봉입할 수 없습니다. 밖에 있는 승지를 지금 패초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익이 아뢰기를,
"김우석과 정계주가 갑자기 하문을 받고 자세히 진달하지 못한 것은, 비록 이러저러하다는 말이 있긴 하나 단지 전해 들은 말만으로 경솔하게 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임금을 속이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임금을 속였다는 죄를 내리는 것은 실정에 맞는 율이 아닌 듯합니다. 신이 성상의 지나친 거조를 목격하고 감히 소회를 진달하는 바이니,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비록 낱낱이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가 어찌 감히 ‘감히 실정을 진달할 수 없다.’는 등의 말로 기꺼이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면서도 감히 ‘지나친 거조’라고 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익이 또 복역하려는 즈음에, 상이 입직한 위장(衛將) 이시성(李時省)을 가승지(假承旨)로 차출하고 가승지는 서둘러 입직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때 오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났고 닭도 이미 울었는데 상이 그대로 외전(外殿)으로 나갔다. 성상의 노기가 대단하자 중관(中官)과 사약(司鑰)은 사색이 되었고 이익은 가승지를 차출하는 명이 있었음을 듣고 이미 벌을 면하지 못할 줄을 알았으나 여전히 복역하는 계사를 올리려 하니, 사알이 말하기를,
"장차 비망기를 내릴텐데 다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자, 이익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나의 직명이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어찌 장차 중죄를 받을 것이라 하여 복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정색을 하며 꾸짖어 내보내고 이어 중관을 재촉하여 재계(再啓)를 전하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그대가 벗어부치고 나서서 구호하고자 하나 되겠는가."
하고, 즉시 가승지에게 비망기를 내리기를,
"이익이 당(黨)을 비호하는 마음과 사정을 따르는 뜻만을 지키고 감히 임금의 명을 어겼으니,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여 다른 사람들을 징계하라."
하였다. 가승지 이시성이 전지(傳旨)를 받들고 들어오니, 상이 하교하기를,
"정배 단자(定配單子)를 금부로 하여금 즉시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부교리 오두인(吳斗寅)이 상차하여, 이숙 등 7인을 정배 또는 안치하도록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월 30일 을사

이숙을 갑산(甲山)에, 박증휘를 해남(海南)에, 신명규를 남해(南海)에, 유헌을 부령(富寧)에, 이하를 이산(理山)에, 김징을 벽동(碧潼)에 귀양보내고, 조성보는 경흥(慶興)에 안치시켰다.

 

대사헌 박장원, 도승지 오정위, 우승지 이원정, 좌부승지 심세정, 응교 심재, 교리 오두인·윤심, 부교리 홍만용, 수찬 이정, 부수찬 홍주삼, 정언 이단석 등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養心閤)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성난 목소리로 묻기를,
"무슨 일로 보자고 하였는가?"
하니, 박장원이 아뢰기를,
"여러 신하를 귀양보내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소회를 진달하고자 해서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적(情跡)이 불안하다고 하면서 여러 날 동안 인혐하고 들어가 있다가 지금에야 나온단 말인가."
하니, 장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과연 불안한 사정이 있어서 오랫동안 사은 숙배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번에 성상의 기거(起居)를 살피는 반열에 참여하게 되어서 애써 나왔습니다. 이미 나왔으니 본직이 헌관인 이상 임금의 지나친 거조를 목격하고 감히 뵙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감히 이렇게 당돌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즉시 체차하라 명하니, 박장원이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이단석이 나아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벌이 성상께 미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합계하는 것은 실로 공공(公共)한 의논인데, 성상께서 거듭 노하시어 조금도 가차없이 양사의 여러 관원을 일시에 귀양보내니 듣기에 놀랍고도 의혹됩니다. 언로(言路)에 관계되니 이숙 등에게 귀양 또는 안치하라고 내린 명을 환수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승지 김우석·정계주가 하문을 받고 경솔하게 대답하긴 했습니다마는, 어찌 털끝만치라도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를 갑자기 잡아다 문초하라 하시니 사체를 적지 않게 손상하였습니다. 김우석 등에게 내린 잡아다 문초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익은 승지로 있으면서 왕명의 출납을 맡고 있으니, 임금의 지나친 거조를 보면 일에 따라 복역하는 것이 직책입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성상께서 특명으로 파직하고 추고하시니 거조가 타당치 않은 듯합니다. 이익에게 내린 파직 추고의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또 답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박장원은 소회를 진달하고자 한 것인데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체차하라고 명하시니, 결코 대간을 우대하는 뜻이 아닙니다. 박장원을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단석이 사사로움을 따라 변명하여 구원하려 하니 몹시 놀랍다. 체차하라."
하자, 심재가 아뢰기를,
"병자년 이후 30년 동안 군주에게 치욕이 되지 않았던 날이 없어서 사람들의 마음에는 벌써 익숙해져 부끄럽고 욕되는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에 벌금을 내는 일은 실로 병자년 이후 처음 보는 일이기 때문에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시골에 이르기까지 누군들 소매를 걷어붙이고 분개해 하지 않겠습니까. 공의가 격렬하여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의견들이 같으니, 대신(臺臣)들의 의견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초 조사받았을 때의 일을 비록 전적으로 대신(大臣)에게 책임지울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일이 결국 이 지경이 되었으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합계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렇게 확대되어 가다가는 먼 곳에까지 알려져서 후일의 걱정을 불러오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멀리 누설될 우려에 대해 나도 염려하고 있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대신의 사체는 여느 관원과 달라 예로부터 논핵하여 체차한 예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아하니 대신을 장차 태거(汰去)시키려 하고 있다."
하였다. 윤심이 아뢰기를,
"합계하여 논핵한 것은 실로 충성심이 북받쳐 그런 것으로, 임금을 높이고 의리를 밝히자는 논의입니다. 비록 임금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를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오두인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을 보면 공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사관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한 말들을 기록하지 말라."
하니, 주서(注書) 안후태(安後泰)가 붓을 놓고 기록하지 않았다. 검열(檢閱) 조사석(趙師錫)이 아뢰기를,
"한림과 주서는 차이가 있으므로 비록 기록하지 말라는 분부를 받았으나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일을 기록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대 조정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을 경우 한림과 주서로 하여금 기록하지 못하게 하였다.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내 명을 어기는가."
하고, 이어 그의 직책을 파하라고 명하니, 조사석이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상이 대교(待敎) 홍만종에게 이르기를,
"하번(下番)의 임무를 그대가 대신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원정이 아뢰기를,
"합계할 때 논의가 너무 격렬하여 대신(大臣)의 자리가 한꺼번에 비게 하였으니 매우 타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언관에게 죄를 주기까지 하신 것은 아무래도 알맞지 못한 듯합니다."
하고, 오정위가 아뢰기를,
"합계의 논의가 잘못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직책이 대관(臺官)이며 언로에도 관계가 있으므로 갑작스레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되며 성상이 전후로 내린 분부도 화평한 감이 부족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점점 확대되고 서로 격렬해져 일이 수습될 기약이 없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하는 말들을 나는 듣고 싶지 않다. 신하들은 모두 다 물러가라."
하였다. 홍만종이 나아가 아뢰기를,
"사관의 직책은 바로 붓을 잡는 것이므로 비록 기록하지 말라는 하교는 있었으나, 신과 조사석은 똑같이 일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석이 파직되었으니 신만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균등하게 받도록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간 다음 소를 올린다면 혹 모르거니와 어찌 감히 탑전에서 버젓이 죄주기를 청한단 말인가. 몹시 외람스럽다.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정원이, 대관의 기를 꺾어 언로를 방해함이 있다는 것으로 연명하여 복역하고, 박장원·이단석에게 내린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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