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6권, 현종 8년 1667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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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병오

이때 세 정승이 모두 도성 밖에 나가 있었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권유하였다. 영상 정태화, 좌상 홍명하에게 유시하기를,
"아, 몸을 다한 충성심으로 말하면 경은 실로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고 의지하고 믿는 정성으로 말하면 나는 훌륭했던 임금들에게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정의 풍습은 날로 낮아지고 세도는 날이 갈수록 흐려져서 나이 젊은 대간들이 서로 과격한 것만 힘쓰면서 우상에게 죄를 만들고는 같은 당을 편들고 다른 당을 배척하는 자취를 엄폐하려고, 두 경들까지 아울러 거론하여 현혹시키는 계교를 부리고자 한 바람에 정승 자리가 텅텅 비게 되었다. 이에 분위기가 쓸쓸한데도 마치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고 전혀 개의하지 않으니, 이는 진실로 어떤 조짐이며 어떤 사기(事機)란 말인가. 당시의 일을 내가 감당했던 것은 혼자서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지 남과 도모한 것이 아니었으니 경들이 쟁집한다고 해서 흔들릴 수 있었겠는가. 그 말에 대해서는 비록 많이 쟁변할 것은 없지만 그 조짐은 막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이미 부박한 무리들을 잡아다가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였다. 경들이 만일 이 일로 기분 나쁘게 여겨 선뜻 마음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세 조정에서 특별히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가 될 터인데 어찌하겠으며, 국가를 위한 큰 계획에 오점을 남길 터인데 어찌하겠는가.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서 지극한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이원정이 지어 올린 것이다.】  우상 허적에게 유시하기를,
"아, 오늘날의 일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사문하는 일로 떠들썩하던 당시 경은 나에게 감당하지 말라고 권하였는데, 경의 말이 아직도 나의 귓가에 맴돈다. 경이 사신으로 떠날 때 내가 별도로 유시한 바가 있었으니, 경도 반드시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것인데, 어찌 한때의 부박한 말 때문에 의심하여 멀리해서야 되겠는가. 대간이,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힘껏 쟁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는데, 이는 내 뜻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저쪽의 형편도 모르고 한 말이다. 또 장황한 치계로 통역한 무리들에게 공을 돌렸다는 것으로 말들을 하는데, 이는 더욱 경의 본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경의 마음을 내 이미 통촉하였는데 나의 성의를 경은 어찌 알아주지 않는가. 시비를 내 마음으로부터 판단하여 경망한 무리들을 이미 먼 곳으로 귀양보냈으니, 경에게 무슨 혐의할 일이 있겠는가. 속히 조정으로 돌아와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승지 심세정이 지어 올린 것이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양사가 함께 논핵한다는 말을 듣고 몸을 이끌고 도성을 나가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곧바로 들으니 양사의 관원이 모두 귀양갔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진 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일이 생겼으므로 곧바로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지만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진 죄의 경중과 염치의 유무는 놔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이미 몹시 늙고 병들어서 다시 일어나 사람 노릇을 할 가망이 없습니다. 자리에 쓰러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으므로 대궐을 바라보며 혼자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공론이 거세게 일어나 감히 도성에 편안히 있을 수 없기에 병든 몸을 이끌고 도성을 나가 마냥 황공하여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죄를 진 신에게 엄한 벌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양사의 관원에게 엄한 벌을 내리셨으니, 신의 죄가 더더욱 무거워져서 부지할 곳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간의 의논은 지극히 엄하고 병든 목숨은 실낱과 같으므로 대궐을 바라볼 때 스스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신의 여러가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으므로 성 밖에 짚자리를 깔고 앉아 무거운 벌이 내리기만을 날마다 기다려 왔는데, 뜻밖에도 측근의 신하가 이때에 하교를 전하였습니다. 성상의 은혜는 높아지기만 하고 신의 죄는 갈수록 커지고 있으므로 놀랍고 황공하여 오장이 내려앉습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속히 죽어서 여론을 위로하는 것뿐입니다."
하였다.

 

2월 2일 정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양사의 관원이 모두 귀양가고 승지도 잡아다 국문하게 하였는데 관대하게 용서해 주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문관이 상차하기를,
"양사의 의논이 군주가 모욕을 당하는 통탄스러움에 격분한 나머지 점점 확대되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인데, 사세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일로 갑자기 귀양을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승지의 경우도 갑자기 하문을 받고 당황하여 대답을 잘못하기는 하였으나 그 본정을 따져보면 전혀 다른 뜻은 없었고 형제의 혐의가 있어서 전지를 받들지 못한 것이니, 임금의 명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박장원·이단석이 소회를 말씀드리려다가 말을 다하기도 전에 엄한 분부를 내려 기를 꺾고 특별히 파직하라 명하셨으니, 모두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긴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여움을 거두시고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3일 무신

정사를 열 때 이조 판서 김수항이 사직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참판 조복양, 참의 민유중이 정청(政廳)에 나아가 아뢰기를,
"양사를 귀양보내라는 명이 내리던 날 옥당이 그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본조에서는 품정(稟政)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정원이 말하기를 ‘옥당의 차자에 귀양보낸 사람의 직명(職名) 위에다가 전(前) 자를 썼으니 속히 품정해야 한다.’라고 했고, 또 하리가 와서 말하기를 ‘전지가 이미 본조에 내렸다.’ 하므로 전례대로 품정하였습니다. 방금 신들이 정청에 나와서 비로소 들으니 귀양보낼 사람에 대한 전지(傳旨)는 단지 금부에만 내렸으며 본조에서는 현재 전지를 받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정규(政規)에는 비록 보통 관리라 하더라도 반드시 체차하라는 전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대임자를 낼 수 있는데, 더구나 대간은 사체가 특별하므로 전지가 없이 곧바로 그 대임자를 차출할 수 없습니다. 보통 규례와는 다른 일이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귀양가라는 명을 받았으면 응당 고신(告身)을 빼앗길 것인데, 체직하지도 않고 파직하지도 않았다고 해서야 되겠는가. 말썽을 피하려고 감히 이것으로 아뢰었으니 의도가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중하게 추고하고, 잡혀가 있는 승지까지도 아울러 일시에 그 대임자를 차출하라."
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김익렴(金益廉)을 집의로, 심유(沈攸)·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안숙(安塾)·박순(朴純)을 지평으로, 이숙달(李叔達)·권두추(權斗樞)를 정언으로, 최일(崔逸)을 헌납으로, 강유(姜瑜)·송시철(宋時喆)·이시술(李時術)을 승지로 삼았다.

 

2월 4일 기유

정언 이숙달(李叔達)이 송사 문제로 인해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헌납 최일(崔逸)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번 합계에 ‘대신(大臣)이 힘껏 쟁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신은 이 점에 대해 두렵습니다. 사문(査問)을 당할 당시에 신은 본직에 있으면서 성상이 스스로 감당하시는 것을 목격하고도 끝내 구원하여 바루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장차 남에게 규정을 받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대관의 자리에 앉아 대신의 죄를 논열하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대사헌 이경억은 현재 추감(推勘)을 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피하고, 정언 권두추, 장령 이동로는 합계에서 언급된 사람 중에 상피할 사람이 있어서 감히 가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는데, 체차되었다.

 

집의 김익렴(金益廉) 등이 계사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 성상께서 당한 일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양사의 의논은 사실 인심의 공감하는 바이고 떳떳한 천성에서 발로된 것이니, 밝고 슬기로운 전하께서 어찌 이 점을 통찰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언로의 관원에게 죄를 주신 것은, 대체로 그들이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신 일을 대신의 죄로 돌렸다고 미워하셔서 그런 것입니다마는, 임금을 높이고 나라의 맥을 북돋우는 신하들의 뜻은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국조 이래로 양사가 대신을 논핵한 일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근래의 예로 말하더라도 지난 갑신년 사이에 양사가 영상 김류를 체차해야 한다고 논핵하였으나 인조 대왕께서 관대하게 답하고 언로의 관원을 죄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어찌 성상께서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전하께서는 양사의 관원을 모두 쫓아내어 사기를 꺾어 버리시니, 처치가 잘못되어 여론이 울분을 품음으로써 앞으로 바른 말을 아뢸 사람이 없기라도 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그러니 성상의 노여움을 조금 거두시고 전 집의 이숙, 전 장령 박증휘·신명규, 전 지평 유헌·이하, 전 헌납 김징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과 전 정언 조성보를 안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엊그제 예조의 초기(草記) 건으로 인해 승정원에 하문하실 때에 승지가 비록 우상이 불안해 하는 이유를 알았더라도 어떻게 감히 미처 제기되지 않은 일을 확실하게 이렇고 저렇다며 회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사정을 살펴보면 사실 용서해 줄 만합니다. 전 승지 김우석·정계주를 잡아다 엄히 국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익이 당초 상피해야 한다고 인혐한 것은 사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각각 전지(傳旨)를 받드는 것은 새로운 규례이므로 새로 만들기가 어려워 그랬던 것이지, 그가 절대로 몇 시각을 더 지체하여 사심을 펴려고 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파직·추고하라고 하신 명은 억측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 승지 이익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거동과 말씀을 기록하는 임무는 주서가 하는 일과는 다르니, 조사석이 말씀드린 것은 그의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파직하라는 명이 사실 뜻밖에 나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거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 검열 조사석을 파직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2월 6일 신해

정사를 열 때 이판 김수항은 소를 올려 사직하였고, 참판 조복양, 참의 민유중은 모두 식가(式暇)로 나오지 않았다. 정원이 참판과 참의를 패초할 것을 청하니, 상이, 수항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을 내리고 이어 패초하여 정사를 열게 하였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근래에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여 체통이 크게 무너졌다. 전조(銓曹)의 당상이 식가를 핑계대고 모두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만약 기공복(朞功服)에 성복(成服)을 하기 전인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참의는 직책상 하관이므로 더욱 핑계댈 것이 없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교만스럽고 자존하는 모습이 참으로 놀랍다. 조복양은 우선 중하게 추고하고, 민유중은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패초를 받고 들어왔다. 이준구(李俊耉)·박정(朴烶)을 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을 헌납으로, 소두산(蘇斗山)을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교리로, 윤강(尹絳)을 예조 판서로, 이경억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집의 김익렴(金益廉), 장령 심유(沈攸), 사간 이후(李垕), 지평 안숙(安塾)이 합동으로 아뢰기를,
"지난해에 청나라 사신이 일을 조사하러 나왔을 때 전하께서 스스로 감당하신 것은 사실 대신을 걱정하셔서 그런 것이었으나, 대신의 도리로 보면 자신들의 죄라고 하면서 몸소 떠맡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태화·홍명하 등은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실 때에 극력 간쟁하지 못함으로써 임금만 벌을 받게 하고 말았으니, 그들의 분수로 볼 때 감히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를 체차하소서.
그리고 진주사가 돌아올 때에 대신의 죄는 면했습니다마는 벌금을 무는 죄가 도리어 성상께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사실 옛날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사신으로 간 신하는 마땅히 힘을 다해 변론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 또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허적 등은 대신이 죄를 면한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임금께서 벌을 받은 아픔은 생각지도 않은 채, 길고 긴 내용으로 치계하면서 역관의 무리들에게 그 공을 돌렸으니, 이게 과연 무슨 의리란 말입니까?
사세의 어렵고 쉬움이나 성공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신하의 죄가 임금에게로 돌아갔는데 사신으로 간 자가 끝내 말 한 마디도 없이 돌아오고 말았으니, 얼마나 명분이 뒤틀리고 의리가 손상되었겠습니까. 그리고 천하의 일은 어느 곳에서나 생기는 법이니, 오늘날 간쟁하지 않은 시초가 후일의 끝없는 우환거리가 되지 않을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일이 있은 뒤에 위로는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는 선비와 여염의 백성들까지 모두 분개하고 있으니 또한 천리와 인심이 똑같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만약 덮어두고 죄를 주지 않는다면 나라의 체통이 존엄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주사  허적, 부사 남용익, 서장관 맹주서를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승정원에 하교하였다.
"진주사의 선래(先來) 역관 이름을 써서 아뢰라."

 

함경도에 소의 역질이 크게 번졌다.

 

평안도 양덕(陽德)·맹산(孟山)·영변(寧邊) 등의 고을에 눈이 많이 내려, 촌락의 백성 17명이 깔려 죽었다.

 

2월 7일 임자

전라도 유생 윤제민(尹濟民) 등이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8일 계축

정언 신후재(申厚載)가, 허적의 생질이므로 양사의 합계(合啓)에 참여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2월 9일 갑인

선혜청이 아뢰기를,
"지난해 온천에 거둥하신 뒤로 본도의 역(役)을 견감해 주기 위해 온 도내의 받아들일 대동미에 대해 1결당 2두를 감해 주었으며, 부근의 14개 고을은 1결당 3두를 감해 주기도 하고 2결당 2두 5승을 감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모두 합계하면 1만 8천 2백 18석인데, 두 해에 감해 준 것이 무려 3만 6천 4백여 석이나 됩니다. 본청의 수용이 형편이 없는데다 지금 각사(各司)에 줄 공물가(貢物價)의 수량이 매우 많으나 다른 데서 가져다 쓸 길도 없습니다. 호조에서 세금으로 받아놓은 콩 8천 2백 63석을 가져다 사용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이 되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사직서를 올려 면직되었다. 이원정이 영상과 좌상에게 내린 돈유문(敦諭文)을 대신 지을 적에 대관(臺官)을 배척한 말이 있었는데, 당시의 논의가 그르게 여겼기 때문에 스스로 편치 못하여 사면한 것이었다.

 

사간 이후(李垕)가 아뢰기를,
"지금 사문할 당시의 얘기를 듣건대 합계의 내용이 크게 사실과 맞지 않았다고 하니, 신이 모호하게 연계(連啓)한 잘못이 큽니다. 지난날의 일을 듣자니 저도 모르게 놀랍고 뼈에 사무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천지 사이에 하늘의 이치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로 가장 큰 것은 군신 간의 의리입니다. 그런데 영상 정태화는 심지어 통역한 자가 말한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시면 잘 될 것이다.’는 말을 감히 성상께 말씀드려 은연중 자기의 죄를 지존에게 돌리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우상 허적의 경우도 전례를 끌어다 상의 앞에서 말하였는데 자기의 죄를 상에게 돌리려 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이 역시 어찌 감히 신하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또한 사신으로 가서 진주(陳奏)할 때 제대로 주선하지 못한 것은 공죄(公罪)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대신이 죄를 벗어난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임금이 벌금을 내는 것이 통탄스러운 것인 줄은 모른 채 장황하게 치계하여 먼저 역관의 공을 논하였습니다. 임금이 벌금을 무는 일은 전에 없던 치욕이므로 당연히 대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공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의리의 천성이 매우 막혔다 하겠습니다.
좌의정 홍명하는 자기가 죄를 자인하는 뜻으로 누차 탑전에서 간쟁하였으며, 성상께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역관의 말이 나왔을 때 ‘이 일은 선대 조정의 전례가 있으나 지금은 선대 조정의 일과 다른데 어찌 신들을 위하여 이런 거조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니, 이 말은 전하께서 직접 들으신 것이며 그 당시 입시했던 신하들이 목격했던 일인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뭇 의논이 ‘영상과 우상의 죄는 모두 율을 잘못 적용했으며, 좌상의 경우는 끝까지 힘껏 쟁집하지 않은 죄가 있으나 그렇다고 똑같은 죄로 처리한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는가.’ 하기에 신이 곧 이러한 뜻을 헌부의 여러 관원과 상의하였으나 의견이 엇갈려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정계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계초(啓草)를 옷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날마다 번독스럽게 하였으니,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인심이 바르지 못한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 일은 전파된 지 이미 오래이니, 그가 어찌 최근에서야 들어서 알았겠는가. 나의 뜻을 엿보아 교묘한 꾀로 농락하려는 작태를 가리고자 하나 가리기 어렵게 되었으니 정말 매우 놀랍다. 이후를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이후가, 정태화가 역관이 한 말을 전달했다는 것으로 정태화의 죄목을 삼은 것은, 정원일기 가운데 태화가 역관의 말을 전달하기를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시면 신하들의 죄가 필시 가벼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은 태화가 아뢴 것이 아니고 그때 주서가 잘못 쓴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태화의 사람됨이 자상하여 보통 말할 때 헛점이 없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역관의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필시 이와 같이 아뢰지는 않았을 것이니, 주서가 잘못 기록했다는 말도 근리할 것도 같다.

 

승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망기에 ‘사간 이후를 우선 파직하라.’라고 하신 명을 보고 그지없이 놀랐습니다. 이후가 오랫동안 외직에 있어서 그때 돌아가는 일의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에 떠도는 말을 듣고서 이처럼 과격한 논의를 하였습니다마는, 그의 마음은 임금을 존중하고 의리를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간교와 농간을 부리려고 한다는 등등의 분부를 하시니, 이게 어찌 성상께서 대각을 관대하게 포용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가라앉혀 천천히 따져보신 다음 이후를 파직하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의 죄는 파직 정도로 그치고 말아서는 안 된다. 이는 먼저 시행하는 벌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김익렴, 장령 심유, 지평 안숙이 아뢰기를,
"신들이 합계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간원의 관원과 한 자리에 모였는데, 사간 이후가, 영상 정태화에게 적용한 법이 너무나 가볍다고 그 자리에서 말하였습니다. 신들의 뜻에는 합계에서 논하는 바는 다만 큰 의리를 중요시한 것인데 갑자기 떠돌아다니는 말을 가지고 이제 와서 구분짓는다는 것은 거북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논의가 엇갈려 끝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고, 정언 이단석 역시 자신의 의견도 헌부의 관원과 다름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체차해 주라고 청하였다.

 

영남 신영(新寧)·의흥(義興) 등의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다.

 

2월 10일 을묘

강유(姜瑜)·이상일(李相逸)을 승지로, 윤집(尹鏶)을 이조 참의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정랑으로, 조성(趙䃏)을 정언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신하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어제 전 사간 이후가 피혐한 말을 보니 의리에다 가탁하여 부정한 의도가 끼어 있었는데, 이러한 사람은 내 차마 바로 볼 수가 없다. 임금의 의도를 엿보고 간사한 꾀를 부렸으니 그 죄가 이숙보다 크므로 파직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겠다. 이후를 먼 변방에다 귀양보내어 후일 마음을 바르게 쓰지 않는 자의 경계로 삼으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후를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신 뒤로 신하들이 몹시 놀라며 의혹해 하고 있는데 방금 또 천만 뜻밖에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을 내리시니, 신들은 깜짝 놀라 개연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후가 이때 마침 부름을 받고 올라와 떠도는 말을 듣고는 이처럼 과격한 논의를 하였습니다마는, 그의 본심이야 어찌 다른 데다 가탁하여 심술을 부릴 뜻이 있었겠습니까. 임금의 의도를 엿보고 간계를 부리는 것은 매우 간특한 사람이나 하는 짓인데, 성명께서는 어찌하여 일을 말하는 신하에게 갑자기 이런 말로 뒤집어씌워 귀양보내는 법까지 시행한단 말입니까. 신들이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지나친 조처를 목격하고 구구한 소회나마 감히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후를 멀리 귀양보내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교리 윤심 등이 처치하여 양사를 모두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의 일은 기밀에 관계된 일이었으므로 그때 한 말들을 모두 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사람마다 죄다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 이후가 피혐한 말은 무슨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하였는지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은 채 갑자기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기했으니, 신들도 물론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만 성명께서 이미 그를 파직해 놓고 지금 또 멀리 귀양보내는 벌을 주셨으니 너무나 지나치지 않습니까. 대각의 신하가 서로 잇따라 먼 곳으로 귀양가는 것은 결코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이후를 멀리 귀양보내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후를 온성(穩城)으로 귀양보냈다.

 

2월 11일 병진

집의 김익렴, 장령 심유, 지평 안숙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합계한 의논을 잇따라 아뢴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밖에서 떠도는 말은 직접 귀로 들은 말이 아니므로 믿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에 대해 죄를 청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떠도는 말을 가지고 경솔하게 고쳐서는 안 됩니다. 신들이 이후의 말에 이견을 내세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이미 대간의 신하들이 인피한 글에 나왔으니 덮어두어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만 가중시킬 수 없으므로 신들이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고증해 보았더니, 지난해 10월 8일에 모화관 막차에서 인견할 때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삼달(金三達)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거짓으로 정성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하기를 「서백(西伯)이 묘당과 더불어 감당하게 되면 사세가 고단하겠지만 만약 주상이 스스로 감당하시면 신하의 죄는 필시 가벼워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사람의 말을 빌어 감히 성상에게 스스로 감당하라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가 감히 할 말이겠습니까.
우상 허적이 예(例)를 끌어대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비록 미처 상고해 내지 못했지만, 복명으로 인대하던 날에 ‘황제도 벌금을 내는 규례가 있다.’ 하였습니다. 아, 설령 청나라에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혐의로워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인데, 사신으로 가서 임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해명하고자 하여 은연중에 벌금 내는 일을 치욕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신들은 당초 이런 사실이 있는지도 모르고 단지 큰 의리로 범범하게 죄를 청했었는데, 지금 이 말을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싹해지고 매우 놀랐습니다. 신들이 분명한 증거를 상고하지 못하여 임금을 높이고 명분을 바로잡으려는 논의로 하여금 사실과 어긋난다는 추궁을 면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파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이단석도 자세히 살피지 못한 죄를 신도 면하기 어렵다 하면서 체차해 주기를 청하였다. 양사가 인피한 계사가 들어간 뒤에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초저녁에 양심합에서 김익렴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승지 심세정에게 이르기를,
"주서가 사건을 기록할 때 탑전에서 죄다 기록하는가, 아니면 나가서 기록하기도 하는가?"
하니, 세정이 아뢰기를,
"탑전에서 자세히 기록하지 못할 경우에는 나가서 기록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 대간이 피혐한 말에 증거로 댄 일기의 말들을 보니, 나는 태반이나 듣지 못한 것들이다."
하니, 익렴이 아뢰기를,
"신들이 떠돌아다니는 말을 다 믿기 어렵다고 여겼기 때문에 대청(臺廳)으로 들어가 승정원에 간통을 보내 알아본 다음에 비로소 그때 불러보시고 나눈 말들임을 알고 그지없이 놀라 감히 인피하였던 것입니다. 이후가 피혐한 말이 이미 저렇고 일기의 명확한 증거가 또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결말을 지을 것입니까? 상께서 반드시 선처하셔야만 이 일을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때 이러쿵저러쿵한 말은 있었지만 ‘상이 스스로 감당하면’이라는 말은 나는 듣지 못했다. 영상이 어찌 이런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했겠는가. 저들이 벌금을 내게 한 일에 있어서는 우상이 등대했을 때에 인책하고 대죄하기에, 내가 위로하고 이어 그곳 사정을 물으니, 우상이 그곳 사정을 갖추어 진달하고 이어 서로 벌금을 무는 풍습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그 사이의 얘기는 이 정도에 불과했었다. 지금 와서 비록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그 말하던 형세로 미루어 볼 때 말을 구사하는 사이에 우연히 나온 말인 듯하다."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신도 들었는데, 우상이 좌상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심양에 있을 때 황제와 여러 왕이 잘못이 있으면 벌금을 내는데 짐승 같은 것들의 소행이 정말 놀랍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상이 탑전에서 진달한 것이 혹시 이런 것이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이 과연 그러했다."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신들은 현재 인피 중에 있습니다만 이미 사대(賜對)를 받았으니, 감히 소회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을 고수하는 것이 비록 대간의 책임이기는 하나 점차로 시끄러워지니, 어찌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영상이 비록 역관의 말로 인하여 진달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임금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으니, 공론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한때의 시비는 덮어두기가 어렵고 사람들의 답답해 하는 심정이 풀리지 않고 있으니, 성명께서는 속히 처치를 내리셔서 국가를 다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글을 보는 법은 반드시 위아래를 전체적으로 본 후에야 글뜻을 알 수 있다. 만약 위아래 말을 잘라버리고 그 가운데 몇 마디 말만 가지고 본다면 본뜻을 잃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금 만약 ‘신하의 죄가 필시 가벼워질 것이다.’라고 한 말로 영상의 죄안을 삼고 ‘황제도 벌금을 낸다.’라고 한 말로 우상의 죄안을 삼는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이 비록 당초에 힘껏 간쟁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말을 하지만 내가 이미 스스로 책임질 뜻을 정해 놓고 있었는데, 어찌 극력 간쟁한다고 해서 그 뜻을 갑자기 바꿀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두 정승의 말이 또한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니, 신들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은 그때 역관의 말이라고 전한 자가 있었으나 과연 영상이 말했는지는 역시 기억할 수 없다. 우상의 말은 이야기하는 사이에 우연히 언급된 것에 불과하니, 이는 이른바 망발의 종류이다. 실정을 따져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과연 이런 말을 하였다면 이는 망발 중에서도 큰 망발입니다만 어찌 망발이라고 핑계대고 논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경우라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그 혐의를 안고 있는 당사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단석이 아뢰기를,
"비록 혐의가 없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가 어찌 차마 이런 말을 임금 앞에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결코 실정이 아니다. 죄명이 가볍다면 대관의 합계를 오히려 따를 수 있겠지만 죄가 실정에 맞지 않으니, 결코 윤허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익렴이 아뢰기를,
"이 의논이 이미 제기되었으니 사세상 중도에서 철회하기가 어려운데 우레와 같은 위엄을 그치지 않고 계시므로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 신들은 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엊그제 올린 소에 또한 이러한 뜻을 말씀드렸으므로 【익렴이 일찍이 비밀리에 소를 올렸는데 안에 두고 하달하지 않았다.】  성상께서도 필시 양찰하셨을 것입니다. 성상께서 늘 이 일에 대해 비밀에 부쳐 누설하지 말라는 분부가 계셨고 저들 역시 예의가 있는 나라로 우리 나라를 대하고 있으므로 비록 이 일을 듣더라도 필시 성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만약 저들이 사실대로 들었을 경우에는 성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간사한 자가 그 사이에서 수작이라도 부린다면 어찌 후일의 우려가 없겠는가."
하자, 익렴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들은 이미 인피하는 글을 올렸으니, 비답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김익렴이 아뢰기를,
"영상·우상은 이미 ‘성상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벌금을 낸다.’는 등의 말을 하였으므로 그 죄가 좌상과 같지 않으니, 형벌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고, 이어 심유·안숙·이단석 등과 더불어 합계하기를,
"영상  정태화는 비단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려 하실 때 끝내 힘껏 간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감히 역관이 말한 ‘성상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이다.’는 말로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니, 신하의 분의(分義)로 볼 때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소루하게 일을 기록한 데서 나온 것이지 실정을 따져본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이번에 파직하자는 논의는 내 이해가 안 가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좌상 홍명하는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실 때에 극력 간쟁하지 못함으로써 임금에게만 견책과 벌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분의로 볼 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주상사(陳奏上使) 허적은 이미 사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있고, 또 복명하기 위해 등대하던 날에 감히 ‘황제도 벌금을 낸다.’는 말로 주달하여 마치 수치로 여길 만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말이겠습니까. 관직을 삭탈하고 성 밖으로 내치소서."
하고, 남용익과 맹주서도 아울러 아뢰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김익렴·이단석 등이 인피하기를,
"남용익·맹주서 등은 대신과 차이가 있는데, 신들이 범범하게 합계 가운데 아울러 논하였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익렴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는 않고 이어 이숙 등의 일과 김우석 등의 일, 그리고 조사석의 일을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사간 이후는 지방에서 새로 들어와 그가 들은 바를 숨김없이 말하였는데, 실로 강개하고 분이 터져 그러한 것입니다. 어찌 성상의 의도를 엿보고 농간을 부릴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쫓겨난 뒤로 분위기가 참담한데 이번에 간관이 서로 잇따라 귀양갔으니, 어찌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 이처럼 지나친 일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후를 멀리 귀양보내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단석이 전에 아뢰었던 일을 거듭 아뢰고 또 이후를 멀리 귀양보내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승지 심세정에게 이르기를,
"대간이 피혐한 말 가운데 이른바 ‘신하의 죄가 반드시 가벼워질 것이다.’라고 한 말과 ‘황제 역시 벌금을 문다. [皇帝亦有罰金]’라고 한 역(亦) 자는 내가 듣지 못하였는데, 일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매우 놀랍다. 그때의 주서를 파직하라."
하니, 김익렴 등이 아뢰기를,
"주서가 일기를 쓰면서 비록 잘못 쓴 곳이 있으나 이미 요점이 되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지금 양사가 고출(考出)한 것으로 인하여 파직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시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주서를 파직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김익렴 등을 사대한 것은 대개 실정을 유시하여 들뜬 의논을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익렴이 때를 틈타 들어가 아뢰면서 상의 뜻을 헤아려 비위를 맞춰가며 기교를 부리다가 결국 형벌을 더하고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스스로 우레와 같은 성상의 위엄을 풀고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운 것으로 여겨 합문을 나오자마자 자랑하는 말을 하였다.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에 ‘임금의 뜻을 엿보아 농간을 부리는 작태이다.’라고 한 말이 참으로 익렴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44면
【분류】정론(政論) / 사법(司法)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상이 김익렴 등을 사대한 것은 대개 실정을 유시하여 들뜬 의논을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익렴이 때를 틈타 들어가 아뢰면서 상의 뜻을 헤아려 비위를 맞춰가며 기교를 부리다가 결국 형벌을 더하고 물러나왔다. 그리고는 스스로 우레와 같은 성상의 위엄을 풀고 세상에 드문 공을 세운 것으로 여겨 합문을 나오자마자 자랑하는 말을 하였다. 지난번에 성상의 하교에 ‘임금의 뜻을 엿보아 농간을 부리는 작태이다.’라고 한 말이 참으로 익렴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하겠다.

 

2월 12일 정사

교리 윤심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엊그저께 올린 차자에 전 사간 이후를 멀리 귀양보내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시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초 사건을 조사할 때에 나온 이야기를 신들이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피혐한 말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한 것으로 여기고 ‘어디서 확실한 근거를 얻었기에 이러한 말을 하는가.’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사가 인피한 말에 정원일기를 상고해 내어 증거로 삼은 것을 보고 신들이 그지없이 놀랐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2월 13일 무오

양사가 거듭 합계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미 내 뜻을 다 말하였는데, 이렇게 번독스럽게 하는 것은 무슨 의도란 말인가. 천하의 일은 단지 성(誠)이란 한 글자에 있다. 만일 내 말을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여 논쟁한다면 이는 지난번 만난 자리에서 면유한 것이 헛된 투식이 되어 버리게 하는 것이며, 만일 내 말이 비록 성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선뜻 논의를 정지할 수 없다고 한다면 더욱이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아끼는 뜻이 아니다. 아, 대관(臺官)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같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인데, 한갓 마음만 쾌하게 하는 논의를 고집하고 나랏일을 이렇게까지 도외시한단 말인가. 내 말이 우연한 것이 아니니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하지 말라."

 

부교리 홍만용 등이 차자를 올려 합계의 청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상차하여, 죄를 받은 여러 사람들을 힘껏 신구하면서 관대한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괴이하고 망령스런 무리를 내 몹시 미워한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2월 14일 기미

헌부가, 전 승지 김우석·정계주를 잡아다 문초하라고 한 명과 이익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계사를 중지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양사의 많은 관원이 영상·좌상과 사신으로 갔던 신하들을 논핵한 것으로 인하여 크게 성상의 노여움을 사서 7명의 간신(諫臣)이 귀양가고, 2명의 승선(承宣)이 하옥되었으며, 도헌(都憲) 이하 여러 관원이 대부분 지척을 받고 물러갔다 합니다. 신이 병중에 놀라 일어나 목이 메이도록 길게 탄식하다가 기가 막혀서 오래도록 안정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아, 성상께서는 필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실 텐데, 아마도 하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뒤엎고자 하여 성상의 마음을 야유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사를 당하던 처음에 전하께서 대신을 온전하게 살리기에 급급하셔서 제후의 존엄을 굽히시고 귀하신 몸을 가볍게 여기시어 이런 전에 없던 거조를 하셨으니, 이것이 실로 온 나라 신민이 원통해서 죽고 싶어하는 바입니다. 당시에 두 대신이 비록 자신의 잘못이라고 대답하였다고는 하나, 끝내 조사받던 뜰 아래서 머리를 부수고 피를 흘렸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의 형편은 진실로 밖에 있는 신하가 자세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마는 중외의 여론은 자연 편하게 여기지를 못할 것입니다.
대신이 그 곳에 갔을 때 그들은 전적으로 성상을 견책하고 결국은 편복(鞭扑)의 형벌에 적용된 것으로 가하였으니 이게 어떤 치욕입니까. 그들이 갈 때에는 단지 두 신하의 죄만 해명하려 하였고 그들이 돌아올 때에는 치욕을 군부에게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마음에 편하게 여길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사신으로 간 입장에서는 마땅히 가슴을 두드리며 목숨을 걸고 힘껏 쟁집하여 서로 형벌을 무릅써 가며 자기가 대신 벌을 받겠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물이 신하에게 있는데 이제 그것을 임금에게 떠넘긴다면 내가 비록 이것을 받아가지고 돌아가고 싶어도 우리의 유사(有司)가 반드시 우리 나라의 대대로 내려오는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이다. 내가 돌아가서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대로 여기에서 죽겠다.’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뜰에 버티고 서서 하루를 기다려도 허락하지 않으면 이틀을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려도 허락하지 않으면 한 달을 기한으로 하고 한 달을 기다려도 허락하지 않으면 연산(燕山)에다 뼈를 묻을 계획을 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저들이 비록 어리석다 하더라도 역시 군신의 의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니 필시 의롭게 여겨 허락했을 것입니다. 비록 이로 인하여 우여곡절 끝에 다시 두 신하에게로 죄가 돌아가서 두 신하가 끝내 보존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는 명분이 정당하고 말이 순리적이어서 이치에 타당하고 마음에 편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아니하고 어리석게 받들고 돌아와서 또 반대로 그 겸종(傔從)의 노고를 과시하고 마치 이것을 자신의 공인 양하여 은전을 바라는 자처럼 하고 있으니, 너무도 옳지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귀양간 신하들이 먼 변방에서 죽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청아한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니 무엇이 한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만 홀로 남을 대신해서 기세를 높여 후세 사람들의 기롱을 감수하시면서도 깨닫지 못하시니, 신이 통탄하는 바이며, 상심하는 바입니다."
하고, 이어 치사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에게 경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내가 어찌 차마 경을 놓아 두겠으며 경이 어찌 차마 나를 버리겠는가. 더구나 경의 나이는 옛사람이 치사하던 나이에 차지 않았다. 경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찬선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듣건대, 조정의 신하가 일을 논하다가 대부분 무거운 견책을 받았다 합니다. 신도 일찍이 망령스레 그 일을 말하였으니, 국법으로 헤아려 보면 마땅히 함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죄를 소급해 의논하여 귀양가는 형벌을 똑같이 받게 하셔서 공평하고 밝은 정치를 밝혀 주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당초 면직을 청했을 때 마침 그 일을 듣고 망령되게 우려하기를 ‘옛날 고려 때 원(元)나라의 위엄에 눌려 고유한 예의(禮義)를 지키지 못하여 마침내 원나라로 하여금 부자 간의 송사를 처리하게 하고 군신 간의 옥사를 결정하게 한 결과 비우(妃耦)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그 남편을 참소하게 한 일까지 있었으니, 진실로 차마 말 못할 일이었다. 지금은 반드시 갑작스레 이런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겠지만 억세고 간악한 저들의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는데 구습에 젖어 길들여진다면 어찌 오랜 뒤에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나친 염려를 견디지 못하여 성상의 마음에 경각심을 일으켜 속히 우리의 일을 스스로 강인하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구구한 이 마음이 슬프다고 하겠습니다."
하고,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인혐할 일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2월 15일 경신

동지사 정지화, 부사 민점 등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2월 17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다시 상차하여 귀양간 신하들을 신구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뜻은 이미 앞서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2월 18일 계해

상이 침을 맞았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판서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정랑으로, 이한(李閑)을 수원 부사로, 민점(閔點)·심재(沈梓)를 승지로 삼았다. 심재는 이때 응교로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았는데, 특별히 의망하라 명하여 제수한 것이다.

 

수찬 김석주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이숙 등 7인 및 이후의 일을 논하면서 매우 강력하게 신구하고, 다시 김익렴의 일에 대해 언급하기를,
"익렴은 연달아 합계할 때에 모든 논의할 일을 한꺼번에 계사에 언급해도 안될 것이 없는데도 별도의 소를 구비하여 결국 동석했던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고 기밀인양 가탁하여 편법으로 전달되기를 급히 요구하였으니, 괴상한 그 행위가 이미 광명하고 준걸한 자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후와 함께 조당(朝堂)에서 상의할 때 이후가 말한 것을 모두 수긍하고 심지어 ‘나도 일찍이 이 말을 정원일기에서 보았다.’라고 하며 그 증명한 것이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계교심이 생겨 이랬다저랬다 쓸데없는 말을 하였는데, 그 사이의 실정을 상께 다 진달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후가 드디어 격분하여 먼저 인피하니, 익렴이 이어 인피한 계사에 다시 근거없이 떠도는 말이라고 하며 마치 캄캄하여 전혀 들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후가 죄를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잘못을 지적하니, 익렴이 재차 인피할 즈음에 일부러 정원에 간통하고서는 마치 처음으로 확실한 증거를 잡아서 부득이 논하는 것처럼 하였는데, 그 말에 ‘이미 직접 들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믿기 어려울 듯하였습니다. 신이 부득불 서로 버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처음에는 이런 증거가 있는지 몰랐었는데 지금 이 말을 보니 저도 모르게 한심하고 놀라웠습니다.’ 하였습니다. 아, 대각이 일을 논할 때는 이치상 마땅히 밝고 바르게 해야 할 텐데, 처음에는 증명을 했다가 끝에 가서는 말을 바꾸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근거없는 말이라고 둘러댔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발설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면하고 나서는 간통에 가탁하여 끝내 목격한 자취를 숨겼으니, 이 사람의 마음 씀씀이가 바르지 못하고 일에 교묘한 것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밝고도 밝은 성상의 조정이 끝내 먼 변방에서 간관의 신하들을 죽일 리는 없을 것이니, 만일 이후가 훗날 다시 대궐 문으로 들어선다면,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이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이후를 보겠습니까. 대체로 사람을 격동시켜 먼저 시험해 본 것은 도리어 자세한 축에 들고, 증거를 가지고 즉시 논핵한 것 역시 정직한 데 가까우며, 이랬다저랬다 기교를 부려 늦추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는 말은 또 정성스러운 충성에 가까운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애석하게 전하와 같은 밝고 슬기로운 분이 여전히 이러한 사람들의 정상을 통촉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계책은 다만 전하께서 깊이 유념하시고 영구한 계획을 생각하신 다음 천지와 같은 도량으로 포용하고 우레를 치며 비오듯이 시원스럽게 해결하여 전후의 여덟 간관들을 모두 소환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대신을 위안할 수 있을 것이고 언로를 크게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2월 19일 갑자

집의 김익렴이 인피하기를,
"김석주가 상소하여 있는 힘을 다해 신을 배척하였으니, 신은 그지없이 놀랍고 황송합니다. 신이 이달 10일에 양사가 회의할 때 이후가 문득 석상에서 발언하기를 ‘영상이 역관 무리의 말을 빌어다가 감히 성상이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진달하였으니, 지난번의 합계에서 의율한 것을 지금 그대로 쓸 수 없다.’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런 말이 과연 있으나 막중한 논의이니 분명한 증거를 얻은 연후에야 말을 덧붙여 형벌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후가 묻기를 ‘요사이 듣건대 집의가 일기를 직접 보았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지난번 춘방(春坊)에서 숙직할 때 정원에 가서 일기 안에 이러이러한 내용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매우 비밀스러운 얘기인데 어찌 감히 이것을 임금에게 진달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신이 인피한 글 중에 이른바 ‘어찌 근거없이 떠도는 말로 인하여 경솔히 고칠 수 있겠는가.’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후가 홍명하를 억울하다고 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임금께서 스스로 감당하려 하실 때 힘써 간쟁하지 못했고 보면 대대적인 논의가 나온 후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는 어려울 듯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인피한 글에 이른바 ‘지금 와서 구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 동참했던 양사의 신하들이, 신이 이후에게 답하는 말을 직접 들었고 신이 이후를 만류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도 석주가 ‘사람을 격동시켜 먼저 시험해 본다.’라고 하였으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필시 공정하게 논의하는 자가 분변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시끄럽게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에게 무함의 비방을 받았으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장령 심유, 지평 안숙이 인피하기를,
"양사가 회의할 때 이후가 영상과 좌상을 구별하여 논죄해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발언하고 이어 들은 바를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의견에는, 대신을 논핵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므로 비록 이러저러하다는 말이 있으나 이미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닌 이상 분명한 증거를 찾아내어 다시 더 상의하여 확정하자고 했더니, 이후가 그렇게 여기지를 않고 지레 먼저 인피하였습니다. 대개 이후가 먼저 피혐한 것은 들은 바를 자신한 것이고 신들이 어렵게 여긴 것은 또한 신중히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정원일기를 상고해 보고서 비로소 이후가 들은 것을 믿게 되어 신들도 즉시 인피하였습니다. 그날 있었던 일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때 익렴의 생각과 태도가 과연 김석주가 말한 대로였다면 신들도 분하게 여겨 미워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텐데 어찌 그와 같이 연명(聯名)하려 했겠습니까. 익렴이 배척받은 말이 모두 실정 밖의 일이고 보면 익렴의 마음에도 부끄러운 바가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같은 자리에서 직접 들은 사람으로서 어찌 익렴만 공격받도록 두고 스스로 배척받는 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정언 이단석도 이 일로 인피하고 체차해 주기를 청하였다.

 

2월 20일 을축

상이 침을 맞았다.

 

교리 윤심, 오두인 등이, 인피한 양사의 관원을 처치하기를,
"인피한 말에서 자신을 해명한 것이 상세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이후가 발언할 때 김익렴이 이미 ‘이런 말이 과연 있으나 분명한 증거를 얻어야만 한다.’라고 했고, 또 ‘마침 정원에 가서 일기 안에 이러저러한 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즉시 일기를 상고해 보지 않고 끝내 이견을 내세우다가 직차에 나아간 후에야 비로소 이후의 말을 끝내 덮어두기 어렵다고 하고 전례에 의거하여 간통으로 물어 본단 말입니까. 이 한 조항은 남의 말을 초래할 만한 것이고 또 비밀히 상소한 거조는 더욱 부당한 일인 듯합니다. 전후의 인피한 사람들도 이미 더불어 같이 일을 하였으니, 형편상 그대로 있기 어렵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1일 병인

상이 침을 맞았다.

 

2월 22일 정묘

상이 침을 맞았다.

 

이흥발(李興浡)을 장령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지평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집의로 삼았다.

 

헌부가, 온천에 거둥하였을 때 수행한 신하들에게 품계를 올려준 명을 도로 거두라고 거듭 아뢰니, 따랐다.

 

왕세자가 비로소 서연(書筵)을 열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강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3일 무진

지평 박순이 인피하기를,
"이번에 양사가 합계한 논의는 사실 나라를 위한 통분한 뜻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사(副使) 이하에 대한 의논도 이미 연이어 아뢰었습니다마는, 수상의 죄를 논하자는 말에 대해서만은 신의 의견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점이 있습니다. 대답한 말이 비록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하더라도 이 역시 언어상의 과실이고 더구나 그가 증거로 댄 것도 착오가 없지 않고 보면 이로써 죄안을 삼는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지 않습니까? 사신으로 간 대신이 말씀드린 것에 있어서는 역시 거기서 듣고 본 것을 말씀드린 것뿐이고 보면 자신의 죄의 유무가 여기에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일부러 말하려고 하였겠습니까. 오늘날 논한 바는 다만 대신에게 더 잘하기를 요구하고 임금을 높이며 의리를 밝히는 데에 있고 보면 어찌 언어의 실수를 가지고 갑자기 죄를 주어서야 되겠습니까. 좌상을 체차하자는 의논을 지금까지 중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신은 더욱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에 이르러선 의논을 고집한 지 이미 오래되어서 의리가 이미 밝혀졌는데도 위아래가 서로 버티고 있어 끝날 기약이 없으니, 국가의 어려움을 더더욱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오늘날 석상에서 발언하여 논의를 중지시키려고 한 것인데 동료와 간관의 의견이 같지 않았으니, 신이 어떻게 구차히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고, 지평 이단석이 인피하기를,
"지평 박순이, 세 대신의 죄를 논하는 것이 모두 합당하지 않다는 뜻으로 석상에서 발언하여 오늘 안으로 세 가지 논계를 모두 중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대신에 대해 논계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므로 물론 한결같이 논쟁만 할 필요는 없으나, 애당초 법 적용이 이미 경중의 차이가 있었고 보면 차례로 논계를 중지하는 것이 본래 대간의 체통에 맞는 것이니 하루 안에 모두 중지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순이 갑자기 소요를 일으켜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으면서 인피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국사의 어려움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습니다만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이 어찌 다른 사람보다 못하겠습니까. 대체로 일기에 기록된 영상의 말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또 더러 착오된 곳도 있어서 비록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전혀 증거할 만한 것이 없지도 않고 보면 오늘날 다투는 것이 지나치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우상의 일에 대해 대각의 논의가 제기된 것이 어찌 등대했을 때 말한 한 마디 말만 가지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말씀드린 것도 과연 전혀 잘못이 없다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치계한 것에 대하여 박순도 그르게 여기었고 부사 이하에게 죄주자는 논의에 대해서도 박순이 또 잇따라 아뢰어 놓고 이제 와서 이의를 내세우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이란 말입니까.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사세상 구차히 동의할 수 없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고, 정언 홍만형도 이 이유로 인피하였다.

 

2월 24일 기사

교리 오두인, 수찬 이정 등이 처치하여, 이단석과 홍만형은 출사시키고 박순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고, 이르기를,
"만약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말할 것이 없지만 국가의 형편이 이러하고 변방의 일이 저러하니, 국사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어찌 작은 일에 구애받겠는가. 옛사람이 이른바 ‘어찌 내년까지 기다리겠는가.’ 한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 한 말이다. 박순은 별로 잘못한 일이 없으니 역시 출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윤심은 의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처치하는 차자에 끼지 않았다.

 

2월 25일 경오

상이 침을 맞았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정치화(鄭致和)를 판의금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예조 참의로, 강유(姜瑜)를 호조 참의로, 이정(李程)을 보덕으로, 유철(兪㯙)을 좌윤으로 삼았다.

 

지평 박순이 출사한 뒤에 인피하기를,
"신이 양사의 합계에 대해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즉시 중지시키려고 서로 논란하였으나 끝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인피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상께서 내린 비답에 지나치게 권장하셨고 이번에 또 규정을 벗어나 특별히 출사하라고 명하시니, 신은 정말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동료와 간원의 관원이 인피한 말 가운데도 차례로 중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그르다고 하였는데, 논한 일이 중지하여도 괜찮다는 것을 안 이상 일부러 쟁집하여 마치 겉치레나 하는 것처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부사와 서장관의 논핵은 합계를 중지하기 이전에는 지레 중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잠시 잇따라 아뢴 것인데 이를 가지고 탓하고 있으니, 신은 실로 이해가 안 갑니다. 신의 소견이 이와 같음으로 인해 전도되었다는 비난을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체차되어야 하는데 특별히 출사하라 하시니, 정세가 더욱 군색해져서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지평 이단석이 아뢰기를,
"이번에 합계한 의논은 위아래가 서로 버티어 수습될 가망이 없으니, 비록 끝내 윤허를 얻지 못하더라도 민망한 마음만 품고 말아야지 일시에 모두 중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평 박순은 억지로 자기의 소견을 주장하다가 끝내 소요를 일으키고 말았으니, 신은 사실 이해가 안 갑니다. 전일 인피할 때는 ‘이 논의는 오직 임금을 높이고 의리를 밝히는 데에 있다.’ 하고, 오늘날 인피할 때에는 ‘신이 합계한 의논에 대해 의견이 다른 점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한 사람의 말이 왜 전후가 상반된단 말입니까. 박순이, 부사 이하를 논의한 것에 대해 이미 독자적으로 잇따라 아뢰어 동료가 출사하기를 기다렸으며, 합계한 의논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자 상의할 도리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한 사람의 소행이 어찌하여 전후가 서로 어긋난단 말입니까?
신이 엊그저께 갑작스럽게 인피하느라 말을 만들면서 허술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차례로 의논을 중지하자는 말이 본뜻에 어긋났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대간의 체통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박순이 신의 잘못을 꼬투리잡아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물론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마는, 신 역시 엄한 공론에 대해 스스로 해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출사하도록 처치하였고 더구나 옥당에 내린 비답에 박순을 특별히 출사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이는 성명께서 박순이 한 말을 그르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박순이 한 말을 그르게 여기지 않았고 보면 신은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고 출사할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정언 홍만형이 아뢰기를,
"신이 지평 박순의 의견과 맞지 않았으므로 부득불 인피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치에 대한 비답을 보니, 특별히 출사시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아, 박순이 합계를 잇따라 아뢸 때 전후로 변동한 작태가 이미 드러났는데 애석하게도 성명께서는 여전히 그의 정상을 통촉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대하고 권장하는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합계의 의논은 사체가 중대하므로 가사 끝끝내 서로 버티고 있지 못하더라도 법은 경중이 있으므로 또한 일시에 모두 중지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회의할 때에 이로써 논란하였던 것입니다. 신의 본뜻을 박순이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지금 박순이 말하기를 ‘일부러 쟁집하여 마치 겉치레만 하는 자와 같다.’라고 하면서 은연중 성상의 비답 가운데 ‘왜 조그만 지조에 구애를 받는가.’라는 분부에 스스로 기대고 있는데, 박순이 어찌 차마 이렇게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부사 이하에 대한 논의를 혼자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동료가 출사하기를 기다려 놓고, 합계에 대해서만은 상의할 것을 생각지도 않은 채 억지로 이의를 제기하여 가로막으려고 꾀했으니 그의 의도가 매우 불미스럽습니다. 헌부의 관원이 지금 또 인피하였는데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혐의는 신 역시 똑같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2월 26일 신미

상이 침을 맞았다.

 

정언 조성이 패(牌)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아뢰기를,
"대각의 의논이 비록 지나쳤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포용하는 도리로 볼 때 참으로 크게 노하여 기를 꺾으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귀양보내어 분위기가 쓸쓸하게 되었으니, 이게 어찌 성명에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애당초 전하께서 스스로 감당하실 때에 대신이 끝내 극력 간쟁하지 못한 점은 그래도 나무랄 수 있는 핑계라도 있습니다마는, 자신의 죄를 성상께 떠넘겼다는 것은 결코 본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신 간 신하들이 치계한 내용에 잘못된 말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탑전에서 상의하여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을 올리기로 결정하였으니 거기서 무슨 말로 다시 변론할 것입니까? 요컨대 모두가 사세의 부득이한 데서 생긴 것으로 똑같이 공적인 죄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관이 쓴 일기가 착오되었다는 이야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자자하였으나 그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크게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의 잘못된 의견으로는, 여러 신하를 귀양보내라고 하신 명을 도로 거두자는 청을 그만두지 않고 합계한 의논을 한결같이 쟁집만 하는 게 옳은 일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신의 의견이 이러하므로 결코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교리 윤심(尹深)이 처치하기를,
"박순은 당초 처치할 때 이미 체차되었으니 지금 비록 특별히 출사시키더라도 사세상 그냥 있기 어려우며, 이단석은 차례로 논의를 중지하는 것이 참으로 본뜻이 아니었다면 인피하는 말에 끄집어내는 것은 매우 부당합니다. 지금 비록 스스로 해명하지만 갈수록 구차하기만 합니다. 홍만형은 그저께 인피하는 말에 이미 실상을 들어 말해 놓고 이제와서 장황하게 말하면서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고 핑계대고 있으니 전후가 다릅니다. 조성은 이미 의견을 말해 놓고 억지로 인피하였는데, 언로의 책임을 맡은 관원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수찬 김석주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차출해 보냈다. 일찍이 갑오년에 남만인(南蠻人)의 배가 표류해 대정(大靜)의 해변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탄 배가 죄다 파손되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제주 목사가 치계하여 여쭙자 그들을 그냥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병오년 가을에 그중 8명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표류해 일본 오도(五島)에 도착하였다. 오도에서 이들을 붙잡아 장기(長碕)로 보내니 장기 태수가 그들의 거주지를 물어보았는데 아란타(阿蘭陀)의 사람들이었다. 아란타는 곧 일본에 속한 군(郡)이었다. 그 사람들을 강호(江戶)로 들여보냈는데 관백(關白)이 대마 도주(對馬島主)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묻기를,
"해변에 왕래하는 야소종문(耶蘇宗門)의 잔당들을 일일이 기찰하여 통보해 주기로 일찍이 귀국과 약조를 했었다. 그런데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귀국에 도착했을 때 귀국이 통보하지 않았다. 표류해 돌아온 8명은 비록 아란타 사람이지마는 그 나머지 귀국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필시 야소의 잔당일 것이다."
하면서 여러모로 공갈하였다. 대개 야소는 즉 서양에 있는 별도의 종자인데 요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사람을 미혹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일찍이 일본과 상통하였는데 뒤에 틈이 생겨 관백이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매양 우리 나라에게 붙잡아 보내주라고 요청하였다. 이번에 아란타 사람들이 표류해 일본에 도착했을 때 관백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야소가 아닌 줄을 알고도 이를 트집잡아 권현당(權現堂)에 쓸 향화(香火)를 요구할 구실거리로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차왜(差倭)가 나와 관(館)에 40일을 머물러 있었으나 조정에서 일부러 응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석주를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낸 것이다.

 

2월 27일 임신

상이 침을 맞았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관학 유생 홍천서(洪天叙) 등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근일에 양사가 논계한 것은 조정의 기밀에 관계된 일이라서 비록 애초의 사세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으나, 큰 중점을 논한다면 신하의 죄를 임금께서 대신 모욕으로 받은 것이니 이는 정말 전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이 일을 당한 뒤로 위로는 경사 대부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통분해하고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며 서로 위로하였으니, 이로써 여론이 똑같고 온 나라의 언론을 막기 어렵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각의 신하가 고집하는 것은 공론이고 간쟁하는 것은 의리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관대하게 용납하고 권장하여 일맥의 공론을 부추켜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우레와 같은 위엄을 가하여 전후로 간관의 신하들을 모두 먼 변방 밖으로 내쫓으셨습니다. 성명께서 위에 계시는데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이 일이 관계된 바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찮은 일이라서 국가에 아무런 손상이 없으리라고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대신을 함부로 논핵한 것을 그르게 여겨 대신을 위안하는 소지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까?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천지 사이에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밝혀지지 않으면 명분이 무너져 끝내 어지럽고 망하는 데에 이르고야 말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론을 굽어 살피시어 한편으로는 명분을 바로잡고 한편으로는 국시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조정의 시비는 사람마다 알 바가 아니니 이 소를 도로 내주라."
하고, 이어 비망기를 내리기를,
"합계가 제기된 지 지금 이미 두 달이 되었으니 의리가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이번에 성균관 유생들이 감히 장황하게 소를 올려 명분은 의리에다 두고 있으나, 마음은 사실 불미스럽다. 유생이 대신을 소로 배척하는 데 있어서 큰 권간(權奸)이 나라를 농락하는 경우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매우 한심스럽다. 앞장서서 선동한 유생과 상소의 첫머리에 이름이 적힌 유생을 모두 과거를 못 보게 함으로써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유생들이 입을 모아 아뢴 것은 사실 임금을 높이고 의리를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 말이 비록 지나치더라도 포용하여 그대로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는 끝내 한 자의 비답도 없이 갑자기 우레와 같은 위엄을 보이신 바람에 사론(士論)이 꺾이어 분위기가 암담하니, 이는 결코 국가가 사기를 배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앞장선 유생과 소의 맨 처음에 이름이 적힌 유생에게 과거를 못 보게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재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앞장서서 주동한 생원 이희택(李喜澤)과 소의 맨 처음에 이름이 적힌 진사 홍천서(洪天叙)가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2월 28일 계유

상이 침을 맞았다.

 

신후재(申厚載)·이숙달(李叔達)를 지평으로, 심유(沈攸)·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헌 정지화가 인피하기를,
"신이 사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나라에 치욕을 끼친 죄가 있으니, 【지화가 청나라에 갔을 때 백면지(白綿紙)의 품질이 나쁘다고 예부에게 힐책을 받았다.】  비록 예부의 자문(咨文)이 없으나 조정의 책망과 벌을 받아야 하고 더구나 지금 죄를 결정하여 주문(奏文)을 올릴 판인데 그대로 관함을 띠고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신의 형 영상 정태화가 죄주자는 합계의 대상 중에 들어 있으니 더더욱 염치를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체차하였다.

 

2월 29일 갑술

예조가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들이 대궐에서 곧장 문묘의 신문(神門) 밖으로 가서 절하고 하직한 뒤에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 버렸으며, 본관의 당상도 모두 소를 올려 사직하고 단지 낭관만 모두 모여 재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분향(焚香)할 때 집사를 할 유생이 없다며 본관이 본조에 보고하였습니다. 본조에서 전례를 상고해 보았더니, 전부터 성균관을 비웠을 때 먼저 예관을 보낸 다음 승지를 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갑진년에 성균관을 비웠을 때도 본조의 판서 홍중보가 명을 받들고 달려가 유생을 불러 타일러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판서를 차출하지 않은 데다가 참의 김만기는 승지로 옮겨 제수되었으며 신 세모(世模)는 【참판 박세모.】  종묘의 헌관으로 차출되어 이미 향을 받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성묘(聖廟)의 중한 곳을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는데다가 분향의 예를 거행할 날도 하룻밤 밖에 안 남았으니 더더욱 빨리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막중한 성묘를 하루라도 숙직하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성균관 지사 김수항과 대사성 조복양 등이 올린 소에 대해 비답을 이미 내렸으니, 그들로 하여금 빨리 가서 숙직하게 하라. 그리고 본조에서 갈 만한 다른 관원이 없으면 먼저 예관을 보내고 유생들을 불러 타이르는 일은 성균관 지사로 하여금 잠시 대행하게 하되, 유생들이 끝내 들어오지 않을 경우에는 분향의 예를 폐지할 수 없으니 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을 속히 불러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유학 황연(黃壖)이 상소하기를,
"아, 하늘과 사람은 똑같은 하나의 기운입니다. 그러므로 잘잘못의 기미와 길흉의 조짐이 여기에서 꿈틀거리자마자 저기에 나타나고 상하에 통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임금은 또 만물 중에서 우뚝 뛰어나 만백성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하늘이 의지하여 아들로 여기는 자는 임금이고 임금이 우러러 아버지로 삼는 자는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밑에서 아들의 책임을 하나라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위의 자애로운 하늘이 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왕도(王道)가 펴지지 못하여 황극(皇極)006)  이 건립되지 못하거나 공론이 펴지지 않아 등용하고 버리는 것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 모두가 아들의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겹쳐 나타나는 재이와 거듭 나타나는 변괴가 모두 전복의 상징이고 어지럽고 망하려는 조짐들입니다. 겨울에 우레가 치고 달에 무지개가 꿰뚫은 것들은 지나간 경험 중에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입니다. 바야흐로 봄이 되었는데도 한 겨울과 다름없이 추우며, 음산한 구름이 꽉 끼어 여러 달이나 걷히지 않으며, 눈에 눌려 사람이 죽는 등 옛날을 통틀어 봐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며 놀라운 요인(妖人)과 괴물(怪物)이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고인이 이른바 ‘꼭 죽을 병은 치료하기 어렵고 반드시 망할 나라는 구제하기 어렵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지난 가을에 도움되는 말을 구하는 분부가 자상하고 정성스러워 사실 도움을 요청하는 훌륭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사람치고 그 누가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방금 위에서는 임금의 위엄이 떨어지고 밑에서는 당파가 조성됨으로써 야박한 연소배들은 의기 양양하여 횡횡하고 있으나 충후한 노성인들은 실의하여 초췌해진 바람에 그들의 기염은 치솟고 분위기는 가라앉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인사들이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물 뿐만 아니라 유생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위엄에 겁이 나 휩쓸리는 바람에 초야에 있는 한가닥 공론마저도 집안에서 말하는 사담으로 그친 채 아직까지도 칼날을 무릅쓰고 말씀을 드려 급한 국가의 일에 몸을 바치려는 자가 없으니, 이게 어찌 통곡하여 눈물만 흘리고 말 정도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시골에서 났으나 인재를 배양하는 가운데서 난 하나의 선비입니다. 차마 머뭇거리면서 녹을 먹는 자들이 걱정해야 한다고 미룰 수야 있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유신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초야에 묻혀 살면서 기풍을 가다듬어 일찍부터 동산(東山)의 여망007)  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나가 세상의 쓰임이 되자 안팎 사람들의 기대가 모아져 경륜과 사업을 단시일 내에 이룩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처음부터 한 일이 여론의 기대에 맞지 않아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대부분 한쪽으로 치우치고 쓰고 버리는 것도 공론을 거치치 않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논의가 맞지 않거나 당파가 같지 않을 경우에는 어리석거나 어진 것을 불문하고 일체 내쫓아 조정에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주 왕래하느라 서울에 오랫동안 머문 적은 없으나, 위로는 임금의 명령과 아래로는 묘당의 기획, 인재의 등용, 대간의 시비를 모두 그들의 자문을 거쳐야 하므로 기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화복과 영욕을 한결같이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 조정의 오래된 명망을 지닌 조경과 같은 사람이나 사림의 모범이 되는 허목과 같은 사람이나 학문과 재국이 있는 윤휴와 같은 사람이나 깨끗한 이름과 곧은 지조가 있는 홍우원과 같은 사람도 조금 그들의 뜻을 어기자 대부분 세상의 버려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권시와 같은 사람은 뜻이 맞아 그 결속의 날카로움이 쇠라도 끊을 수 있었으며 출처와 거취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같이 하였는데 말 한 마디가 맞지 않자 평생토록 영원히 폐고시켜 버렸고 보면 김시진(金始振)·서필원(徐必遠)·이상진(李尙眞)이 시의(時議)에 용납받지 못한 것은 다만 미세한 일입니다. 몸을 아끼는 생각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으므로 본디 앙화나 미친 것을 좋아한 사람이나 제몸을 잊고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아닐 경우에는 누가 감히 경솔하게 그들의 칼날을 범하여 스스로 함정과 덫에 빠지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인심이 답답해 한 지 지금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론한 것은 《춘추》의 의리이고 고수하는 것은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명분이고 스스로 책임진 것은 천하의 대계이기 때문에 그들의 뜻을 인정하고 그들의 허물은 기억하지 않은 채 성공의 기대 속에 그들의 뜻이 저지되거나 흔들릴까 염려하면서 만에 하나라도 이룩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5년이 가고 7년이 갔지만 그 사이에 하나의 일을 건의하고 하나의 기특한 것을 기획한 것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의(遺意)에 비슷한 것이라곤 보지 못하였으며, 큰 글에 큰 의논이란 것들은 이름을 낚고 당류를 심는 자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의리에다 가탁하고는 앞장서서 소를 올려 묘당의 죄안을 만들어 대각의 성세를 협조하고 있습니다.
아, 문명의 문화로 미개한 풍속을 바꾸는 공과 위태한 국면을 돌이킬 만한 위대한 사업을 과연 이러한 길로 가서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로부터 임금을 높이고 의리를 밝혀 천하에 큰 이름을 취한 자는 오자서(吳子胥)나 대부종(大夫種)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 세상에 처하게 한다면 지금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원망을 만들어 화를 재촉하는 때로 보겠습니까? 아니면 은밀히 계획을 세워 놓고 수치와 아픔을 참을 때로 보겠습니까? 여기에서 찾아본다면 그들이 일신의 허명만 구하고 종사가 실지로 화를 입는다는 것은 생각지 않아 다시금 일을 해보려는 뜻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무슨 사업을 이 사람에게 기대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체로 채택(蔡澤)이 범수(范睢)를 공박하여 물리친 것과 장준(張浚)이 이강(李綱)을 극력 배척한 것을 군자들이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혐의에 처하는 사세 때문입니다. 의논한 자들은 ‘지금 만약 삼공(三公)을 바꾼다고 할 경우 장차 어떤 사람으로 대신할 것인가? 삼공을 배척하기 위해 두 신하의 힘을 빌린 자는 두 신하를 아끼는 도리가 전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두 신하가 깊이 생각지 않아 후배들에게 팔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대신이 비록 옛날의 대신에게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일시의 재간과 충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그릇된 의논이 날로 성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너나없이 집에서 탄식하고 있으나 감히 임금에게 고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지내다가 필경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대체로 풍채와 역량이 진압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이는 마치 남의 소와 말을 먹여주기로 하고서 받아놓고 가만히 서서 죽는 것만 보고 있는 자와 같은 자입니다. 어떻게 그 책임을 회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로써 죄주자고 성토한다면 의당 스스로 해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나라에 발생한 일로 인하여 때를 틈타 서로 알력을 부린 것으로서 같은 당은 비호하고 다른 편은 공격한다는 자취를 자연 가릴 수 없기 때문에 삼공을 모두 논핵하여 성상을 현혹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늘의 태양과 같은 성상께 속셈이 죄다 드러나자 점차로 호승하다가 영상에게 죄를 주고 말았으니, 그들이 두루 막고 감추려는 꾀를 볼 때 기교를 부리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처음 사건이 생겼을 때 온 조정이 입을 모아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시는 것이 성대한 일이라고 하면서 청의(淸議)가 높아져 허적이 상의 뜻을 받들지 않는다며 심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벌금을 물게 된 것이 실로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인데, 결국에는 도리어 사신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었으니, 이 모두가 전일에 청의를 주장한 사람이 한 것입니다. 이게 정말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저쪽의 규례를 우연히 듣고 성상께서 물으시자 사실대로 말씀드린 것인데 이게 또한 무슨 죄란 말입니까? 그리고 정태화와 홍명하가 맨 먼저 묘당에서 감당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자신들이 죄를 면하기 위하여 임금에게 떠넘겼다.’라고 하고 있으니, 이게 어떠한 죄명인데 지금 억지로 대신에게 뒤집어씌운단 말입니까? 양사가 합계한 논의가 과연 공평한 마음에서 나왔다면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말고 들은 대로 의논을 제기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 날을 끌어오면서 마음의 기교를 다 부려 이처럼 교묘하게 약속과 포석을 한단 말입니까? 조복양·김만기·민유중·원만리·이민서 등이 방법을 나누어 가르치거나 지시하고 있는데, 이숙의 무리들이 귀양가는 것을 보고도 같이 죄를 받겠다고 청한 자가 없었으니, 역시 그들의 의기를 볼 수 있습니다. 뱀 같은 성질과 금수와 같은 행실을 가진 김익렴과 같은 자도 이미 일시의 표방에 들어갔고 보면 지금 그가 태도를 변화하는 짓을 입에 담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애석한 바는, 이조 판서 김수항이 그의 형 김수흥과 같이 조사의 건에 시종 참여하여 대신의 실정을 자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주의(注擬)와 출척(黜陟)을 모두 주장한 자의 말대로 따라 전형의 권한이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지나 않을까 염려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매우 친한 사람을 사간원의 장관에다 맨 먼저 의망하여 대관에게 아첨하고 임금을 견제하는 기화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데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일이 의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그 마음이 임금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다투는 것이 공평한 것이니 공공연하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외척의 힘을 빌려 우레와 같은 성상의 위엄을 막고자 하였으니 이게 어찌 신하로서 감히 계교를 부릴 것이겠습니까. 예로부터 강한 신하가 나라의 권한을 잡을 때 반드시 먼저 흑백을 현란시켜 임금의 마음을 좀먹은 다음에야 때를 틈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명께서 통촉하시어 간사한 형태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반드시 임금으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따르게 하고자 하는데 더구나 조정의 신하가 누가 감히 그 사이에서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아, 임금이 세상을 권면하는 정사 중 정명(正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만 명분을 위해 죽은 열사가 어찌 이름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먼저 실상을 수립해야만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위해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강의 실지가 없고, 밖으로는 곧다는 이름을 빌려 자기 몸에 아름다움만 취하고 나라에 화를 끼친다는 것은 생각지 않는 자들이 임금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의리를 밝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직 이 하나의 이름 명(名) 자가 일세를 농락하는 큰 권병으로서 화와 복으로 충동하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고 성세가 떨치는 데에 전도되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울분을 품은 사람과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두려워서 말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데 더구나 신은 한낱 사정에 어두운 선비로 전하와의 교분도 얕은데다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가까이 모시는 귀한 사람의 일이니 누가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짓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돌아보건대, 임금을 사랑하는 일념을 본성으로 타고났으니, 임금께서는 위에 고립되어 있어 아래 사람들에게 제재를 받고 있으므로 위로는 조정의 인사들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분개해 하며 종사가 망할 날이 조석에 닥쳤다고 하면서도 기염에 눌려 전하를 위해 말해 주는 사람이 없음을 목격하고 통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지만 역시 대대로 녹을 먹어온 집안의 후예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았다가 망국의 천한 포로가 되느니보다는 차라리 아침에 말하고 저녁에 죽어서 지하에 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춘추》의 전(傳)에 ‘임금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는 자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귀한 신하의 비위를 건드리면 화를 예측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이 참으로 감히 피하지 않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을 보고 말까지 버리지 마소서. 그러면 나라의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황연의 상소 가운데 위험한 속셈과 불미스러운 태도는 물론 성상의 식감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선비의 상소라고 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 소를 보니, 범연히 보면 상당히 곧은 것 같지만 자세히 궁구해 보면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엄폐하기 어렵다. 아, 요즈음 인심이 부정하다는 것을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으니 정말 한심스럽다. 조정의 처리에 있어 후일을 징계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소를 올린 황연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 이처럼 위험한 소에 어찌 비답을 내릴 수 있겠는가. 기각하라."
하였다. 황연은 영남 사람이다. 사람됨이 어리석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데 이원정과 친히 지냈다. 7명의 간신(諫臣)이 귀양간 뒤로 이원정의 패거리가 상이 사류들의 의논을 싫어하는 것을 보고 사이를 벌려놓고자 황연으로 하여금 소를 올리게 하여 헛소리를 꾸며 상이 놀라 동요하게 하였으나 다행히 상이 통촉하여 엄한 말로 기각하였다. 이 뒤로 사특한 의논이 벌떼처럼 시끄럽게 일어나게 된 것이 사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균관 유생 권회 등이, 소의 첫머리에 이름이 적힌 자 및 상소를 올리도록 주동한 자와 똑같이 처벌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모두 다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여도 안 될 게 없으나, 조정에서 구별하는 의도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또 소를 올렸으니 더더욱 터무니없다. 이 소를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의 첫머리에 이름이 적힌 자와 상소의 주동자가 이미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권회 등이 똑같이 처벌해 주기를 청한 것은 사리상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소를 도로 내주며 터무니없다고 배척하는 것은 성스러운 조정에서 선비들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혀 살펴보시고 너그럽게 용납하여 진정시킬 방법을 다하시도록 힘쓰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정말로 일시의 시비를 면하려는 꾀에서 나왔는데 사체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해당 승지를 우선 중하게 추고하라."
하였다.

 

정언 이단석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이처럼 전에 없던 일을 만나 온 조정이 통분해하고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고 있으니, 비록 초야에 있는 하찮은 사람이지마는 어떻게 끝내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곁에서 보고만 있겠습니까. 이번에 성균관 선비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대궐에 호소하였는데, 가사 그들의 의논이 혹 과격한 점이 있더라도 성상께서 선비를 대하는 도리에 있어서 참으로 그 기를 꺾어 싫어하는 뜻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들의 논한 바가 의리를 밝히고 명분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께서 크게 노하시어 특별히 벌을 주라고 명하시니, 국가에서 수백 년 동안 배양해 오던 사기가 오늘날에 이르러 시들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상소의 주동 유생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소에 참여한 유생을 여러 차례 도타이 권유하였으나 끝내 명에 따르지 않기에 부득이 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비록 일이 있어서 소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의견은 같다. 소를 올리기 위해 앞장선 유생이 이미 벌을 받아 많은 선비들이 권당하고 나갔으니, 결코 소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재(齋)에 들어갈 수는 없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미 밤이 깊었으나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습니다. 내일이면 분향할 것인데 달리 변통할 길이 없어서 본관의 낭청을 임시 집사로 차출하여 예를 거행한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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