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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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을해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합계에 대해 감히 가부의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신후재는 허적의 생질이었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다시 성상께서 분부하신 대로 유생들을 불러 타일렀더니, 또 인혐하면서 끝내 명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주동자에게 벌을 준 것은 오늘날뿐만이 아니었으나, 유생들이 이 때문에 끝내 성묘를 버린 때가 있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다시 타일러 들어오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일 병자

성균관 지사 김수항과 예조 참판 박세모가 뵙기를 청하니, 상이, 국기(國忌)가 있다는 이유로 보지 않고 소회를 써서 들이게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성묘가 텅 빈 지 이미 3일이나 되었는데, 사체에 있어서 미안함과 분위기의 쓸쓸함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로 유생들이 불안해 하는 바는 오직 상소의 주동자들이 벌을 받았기 때문인데, 애초 이구 동성으로 소를 올렸으므로 지금 와서 조정이 구분하였다는 이유로 감히 버젓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유생들의 소행이 과격하여 중도에 지나친 잘못이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마는, 조종조로부터 선대 조정에 이르기까지 벌을 준 일은 없었습니다. 지난날 인조조에 성균관 유생들이 추숭(追崇)의 일로 상소하여 논하다가 엄한 분부를 받고 성균관을 비워버리기까지 하였으나, 특별히 예관과 측근의 신하를 보내 누차 도타이 타일러 다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선비를 대우하는 예가 이처럼 융숭했던 것은, 유생은 위엄으로 제압할 수 없고 사기는 꺾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근래의 일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갑진년에 상소의 주동자 윤헌(尹攇) 등이 벌을 받았을 때에도 성균관을 비운 일이 있었는데, 대신의 아룀으로 인하여 곧바로 벌주는 것을 취소한 다음에 다시 예관을 보내 도타이 타일러 들어오게 하였으니, 오늘날 처리하는 도리는 여기에 벗어나지 않을 듯합니다. 관례에 따라 타이른다고 해서 결코 도로 들어올 리가 없기 때문에 이 뜻으로 탑전에서 말씀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승지는 나가 말을 잘하여 들어오도록 타이르라."
하였다.

 

3월 3일 정축

눈이 뿌렸다.

 

승지 심재가 아뢰기를,
"신이 성균관으로 달려가 유생들을 불러 타일렀더니, 유생들이 ‘모두 다 죄를 지었으므로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명에 따르지 않고 물러갔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이익상(李翊相)을 지평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성묘(聖廟)가 지금 여러 날째 텅 비니 매우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유생들이 한 행위가 비록 지나치지만 상소의 주동자들에게 준 벌을 풀어주지 않으면 소에 참여한 유생들이 다시 재(齋)에 들어와 지키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 김수항도 반복하여 말씀드리면서 상소의 주동자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한 것을 풀어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상이 승지 심재에게 이르기를,
"대관이 일기를 고증하여 계사의 자료로 삼고 있으니,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뒤로는 대관이 비록 간통을 보내어 묻더라도 승정원에서는 절대로 고찰하여 보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경억, 정언 이단석이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를 체차하라는 계사를 중지하였다.

 

대사헌 이경억이 아뢰기를,
"영남 사람 황연은 이처럼 조정이 불안한 때에 기회를 틈타 상소를 올려 송시열과 송준길 등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느라 허튼 말로 모함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사림을 일망 타진하려는 그의 꾀가 매우 흉악합니다. 이는 실로 참소하는 자 중에서도 심한 자인데, 다행히도 해와 달 같이 밝으신 성상에 힘입어 그의 정상을 통촉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벌을 내리셨으나, 이것으로는 그의 악을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느슨하게 다스린다면 뒷날 참소하고 사특하고 귀신 같은 괴상한 무리가 필시 그뒤를 따라 일어날 것이니, 소를 올린 황연을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이단석이 아뢰기를,
"삼가 황연이 올린 소를 보니, 일편의 말들이 모두가 사류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 귀추를 따져 보면 밖에 있는 유신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모함하였으며 심지어는 채택과 장준의 일을 인용하여 은연중 두 신하의 상소가 의도가 있어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으니, 사람의 말이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 간특한 뜻과 미워하고 무함한 설은 반드시 나라를 텅 비우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만, 이는 성명께서 통촉하고 계시므로 신이 많이 변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황연의 소에 말한 것들은 조정의 시비일 뿐만이 아니라 일을 조사할 때의 기밀에도 관계된 것으로서 비록 벼슬아치들 사이에서도 몰랐던 것들이 있는데, 황연이 어디서 듣고 이처럼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군단 말입니까. 만일 은밀히 지령하는 음모의 주동자가 없다면 또한 어떻게 이처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의 모의에 반드시 ‘이 상소가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재야의 유현을 이간할 수 있을 것이며 한때의 조정 신하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니, 그 의도가 교묘하고 그 꾀가 참혹합니다. 이처럼 흉한 무리를 선비의 상소라 하여 선비에게 주는 벌만 줄 경우 후일 곁에서 엿보는 무리들이 필시 그들의 뒤를 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소를 올린 황연을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 판서 정치화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질병 외에도 또 불안한 사정이 있습니다. 지난해 일을 조사할 때 신이 비록 등대(登對)하는 신하들의 대열에 출입하기는 하였으나, 별다른 의견을 건의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엊그제 대관이, 그때 성상께서 스스로 감당하게 된 것은 신이 말씀드렸기 때문이라며 반드시 죄안을 성립시켜 논핵하려 하였으나, 그 대관이 마침 체차되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실상을 밝히기 어렵게 되었으니, 신이 보잘것은 없지만 어떻게 감히 태연히 공무를 수행하며 공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비난을 더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내 이미 알고 있는데 깊이 인혐할 게 뭐가 있는가. 사직하지 말고 빨리 공무를 보라."
하였다.

 

우승지 김만기가 황연에게 무함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병조 참판 장선징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황연의 상소에 신으로서 임금을 견제하는 기화로 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신이 혼백이 놀라고 털끝과 뼛속이 송연하였습니다. 아, 참혹도 합니다. 신의 타고난 성품이 소루하고 우직하여 시속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하여 거듭 덫을 건드린 바람에 조그만 충성을 바치려다가 도리어 오늘날 불측한 죄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의 일신이 넘어지는 것이야 말할 틈도 없거니와 국가에 끼친 욕과 벼슬아치들에게 끼친 치욕이 한강의 물을 가지고도 다 씻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신의 관작을 삭탈해 주시고 초야로 물러가게 하여 공격의 화살을 피하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에게 잘못이 없는데 어찌 이처럼 인혐하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3월 4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교리 이유상, 윤심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번 성균관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오로지 의리와 명분으로만 말하였으니, 사실 국사에 참여하고 조정의 일을 간여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성상께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참으로 관대하게 용납하고 봐주시어 사기를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우레와 같은 위엄을 보이고 실정에 벗어난 분부를 하시다가 갑자기 벌을 주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엄한 분부가 내리자 선비들이 기를 잃어 저마다 선비를 기르는 교화권에서 버림받은 것으로 포기하고 어진 선비들이 있는 곳에 감히 편안히 있지를 못해 허둥지둥 집을 비우고 말았는데, 성묘가 텅 빈 지 지금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아, 이게 무슨 모양이란 말입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한심스럽습니다.
아, 사기의 성하고 쇠함이 실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인데, 왜 전하께서는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도리어 기를 꺾어 수백 년 동안 배양해 온 사기를 하루아침에 시들어지게 하십니까? 지금 만약 그들에게 내린 벌을 풀어주지 않고 도로 들어오라고만 한다면 이는 이른바 들어오게 하면서 문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고, 또 황연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허튼 말을 꾸며 사람을 모함하는 상태를 논하면서 다시 통렬히 배척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경상도 유생 전유장(全有章) 등이 소를 올려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진사 심유(沈濡) 등이 소를 올려 청하기를,
"홍천서 등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신 명을 특별히 거두고 선비들을 따뜻한 말로 타일러 다시 들어오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들의 소를 다시 받아들인 다음 비답을 확실히 내리셔서 의리를 바로잡고 국시를 정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홍천서가 올린 소에는 동참하지 못하였으나 의견에 있어서는 똑같으니, 홍천서의 말이 바로 신들의 말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들의 말이 옳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홍천서와 같이 벌을 받게 해 주소서."
하였는데, 답이 없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시비를 밝히고자 상소의 맨 처음에 이름이 적힌 유생과 선동한 유생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게 벌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성묘가 오랫동안 비었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정거당한 유생들을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들어가서 성묘를 지키게 하라."
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도로 들어가서 재(齋)를 지켰다.

 

3월 5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승지 송시철(宋時喆)을 보내어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에게 유시를 전달하기를,
"아, 지난번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말을 하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 오늘날의 나랏일이 몹시 위태하다고 말할 만하다. 조정에는 공론이 없고 선비들은 순후한 풍조가 없으니, 세도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정승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묘당이 쓸쓸하니 좌우를 둘러보아도 노성한 덕과 중한 명망을 지닌 인사가 없다. 경들이 조정에 돌아와 정사를 의논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마치 큰 가뭄에 비내리기를 바라고 기갈에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즉시 들어와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해서 나의 희망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는데, 시철이 회계하기를,
"태화는 말하기를 ‘신은 죄명이 가장 컸는데도 오히려 법망을 벗어났습니다. 어제 듣자니 합계를 중지했다고 하는데 여론이 펴지지 못하고 공의가 날로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오직 바라는 바는 죽기 전에 신을 삭직시켜 주는 것입니다.’ 했고, 명하는 말하기를 ‘신이 지고 있는 바는 임금을 저버린 죄이고, 대간이 주장하는 바는 임금을 높이는 의리입니다.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아 대간의 논계가 정지되었으니, 의리가 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지 못하고 공의가 신으로 말미암아 펴지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대궐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했습니다."
하였다.

 

장령 소두산이 시골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아버지에게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또 귀양간 신하들을 구원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그의 직책을 체차하였다.

 

우승지 김만기가 재차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저 영남 사람의 소는 교묘하고 기이하게 비난하고 중상하여 마음대로 현란시켜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신이 만약 성상을 믿고 구차하게 염치를 무릅쓰고 나온다면 어찌 명예에 오점을 남기고 염치를 손상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대각이 있은 이후로 건의한 것이 있을 경우 시비를 막론하고 그때마다 반드시 비답을 내렸는데 비록 합계(合啓)가 아니더라도 비답을 내리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는 처음으로 합계하였었는데 끝내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숙직한 승지가 비록 꾸지람을 받고 물러갔으나, 이튿날 나온 승지도 감히 관례에 의거하여 여쭈어보지 못했으니, 이게 어찌 구례로 볼 때 당연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이는 정말 전하의 노여움에 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뒤로 풀이 죽어 말하려다가 말았으므로 진작시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균관 유생들이 같이 벌을 받겠다고 청할 때 전하께서 대하신 것이 관대하게 용납하는 도리를 크게 잃었습니다. 승정원이 소회를 말씀드리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고 또 그들의 말이 부드럽고 자세하여 성상의 마음을 격하게 하거나 거슬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크게 기를 돋구어 특별히 추고하여 죄를 정하라 명하심으로써 승정원으로 하여금 뜻에 순종만 하고 감히 다시는 충심을 펴고 올바른 계책을 말씀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전자와 같이 하면 지위를 보존할 수 있으나, 후자와 같이 하면 꾸지람을 면치 못하니, 전하께서 신하를 가르치시는 것이 제 방법을 얻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승정원의 직책이 비록 낮지만 그 책임은 바로 옛날의 상서(尙書)나 중서(中書)입니다. 어찌 문서만 받들어 이행하고 마는 직책이겠습니까. 책상을 밀치고 일어났던 고인이나 신 항(沆)이 불가하다고 말하였던 것처럼 하기는 기대할 수 없다 할지라도 관례에 따라 복역(覆逆)하는 일도 이제부터 폐지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신은 이미 혼란스러운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거기다 자취가 위험스러우니 어떻게 분발하여 능력을 바쳐 큰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직책을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그의 직책을 체차하였다.

 

상이 전 참의 민유중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승지로 삼았다.

 

3월 6일 경진

간원이, 전 승지 김우석·정계주를 잡아다 문초하라는 것과 이익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것과 전 검열 조사석을 파직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던 계사를 중지하였다.

 

예조 판서 정치화가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황연에게 무함을 받았다고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보잘것없는 신이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전후로 가장 오래 전형(銓衡)의 자리에 있었으니, 하는 일 없이 녹만 축내며 어진 사람의 길을 막은 죄를 신 역시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남의 말을 듣고서야 알겠습니까. 오직 의망에 넣고 승진시키거나 좌천시킬 때 한결같이 애써 공론에 따라 직책을 저버리지 않겠다는 굳은 일심만이 여기에 있었으므로 등용하고 좌천시키는 즈음에 원망이 모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물론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견해를 억지로 굽혀 사람의 말에 한결같이 따랐다는 데에 있어서는 신이 비록 보잘것이 없지마는 어찌 이런 일이야 하겠습니까. 조사할 때 신이 정말 시종 참여하였습니다마는, 이것이 의망할 때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것을 가지고 말한단 말입니까. 장선징이 강원의 장관이 된 것은 본디 그가 이미 거쳤던 직책이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의망한 것으로서 정사의 체통에 그렇게 하게끔 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무슨 계교가 있었겠습니까. 이것으로 임금을 견제하고 대각에 아부하였다고 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인정으로는 예상치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황연은 이를 죄안으로 얽어 만들어 마음대로 허튼 말을 하고 있으니 아아, 너무나도 심합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중도에 맞지 않게 노여워 할 경우에는 신하가 이치로 말씀드려 해소시키거나 정성으로 감동하게 하였는데, 이는 본디 올바르게 도와주는 도리인 것입니다. 어찌 외척의 힘을 빌려 임금의 노여움을 막은 자가 있었습니까. 신이 이러한 일이 있다면 그 죄는 참으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당당한 지존의 위엄으로 외척에게 저지를 당한다면 어떤 임금이 되겠습니까? 이는 황연이 신을 모함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임금을 업신여기고 농락하는 데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그가 이른바 ‘신하로서 감히 생각해내지 못할 계교이다.’라고 한 말은 바로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아, 재야의 어진 신하가 어찌 선왕과 뜻이 맞았고 전하께서 높이 예우하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황연이 거리낌없이 마음대로 무함하며 헐뜯고 있으니 미미한 신이 당한 것이야 물론 말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어찌 황연 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필시 어떤 일종의 의논을 주장한 자가 은밀히 선동하였을 것이고 황연과 같은 자는 이를 주워 모으고 변환시켰다가 틈을 타 시험해 보려고 꾀한 것입니다. 귀신 같은 간사한 꾀로 이랬다 저랬다 기교를 부리면서 성상의 마음을 현혹시킬 수 있으며 사림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으로 스스로 여겼겠으나, 손발이 죄다 드러나고 속셈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쓰고 있으니 앞으로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언다008)  .’라고 군자가 경계하였으니, 앞으로의 세도가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신처럼 도량이 좁아 남의 비위를 많이 거슬리는 자가 기미를 보아 일찍 물러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의 공격을 끝내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체직해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고 빨리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이조 참판 조복양과 우부승지 민유중도 황연에게 무함을 당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모두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나라를 욕되게 한 죄를 져서 앞으로 죄를 결정할 것인데 뜻밖에 새로 제수하는 명을 내리시니, 신은 정말 두려워 몸둘 곳이 없습니다. 종전에 사신이 갔을 때 몇 가지 방물(方物)을 가지고 트집잡은 일은 더러 있었으나 오늘날처럼 해부(該部)가 심하게 문책하고 독촉한 적은 없었습니다. 점차로 일이 불행하게 되어 재차 의논을 거치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지금 만약 가볍게 처리하였다가 저쪽에 도착하여 순조롭지 못한 우환이 있을 경우 일이 얼마나 난처하겠습니까. 이는 조정에서 깊이 생각하고 논의하여 정해야 할 점입니다. 더구나 아문(衙門)에서 공문을 보낸 뒤에 자주 제수하시면 사례하는 사신이 떠날 때에 매우 번거롭게 소문이 날 것이니, 당초에 일부러 말썽을 부린 자들이 이 일을 제기하여 일을 벌이지 않을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걱정하는 것은 사적인 것뿐만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3월 7일 신사

상이 침을 맞았다.

 

윤비경(尹飛卿)을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예조 참의로, 여성제(呂聖齊)를 응교로, 박세견(朴世堅)을 보덕으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이민구(李敏求)를 부호군으로 삼았다. 민구는 병자년 강도(江都)의 죄 때문에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별세초(別歲抄)로 인하여 서용하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이민구의 죄는 종사에 관련된 것으로 전후 대간의 계사에서 상세히 논했습니다. 아직까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것인데 어떻게 세월이 오래 되었다는 이유로 함께 서용할 수 있겠습니까.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가 여러 번 아뢰자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황헌(黃瀗)이 저지른 낭자한 탐장질은 실로 보통에 비길 바가 아니어서 법으로 논해 볼 때 진실로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법을 굽혀 은혜를 베풀어서 처형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벌써 다행한 일입니다. 서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 번 아뢰자 따랐다.

 

3월 8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기를,
"양사가 합계한 가운데 신의 죄가 가장 컸습니다. 일기에 전한 바가 과연 사실일 경우 보통의 법으로 논한다 해도 죽고도 남을 죄가 있습니다. 마음을 밝힐 길이 없기에 다만 엄한 벌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탄핵하는 글에 정한 율이 파직하자고 청한 데에 그치고 말았으나 성상께서 포용하시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심으로써 끝내 공론이 펴지지 못하고 말았으니, 신의 사정이 다시 더욱 곤란해졌습니다. 그런데다 심지어 측근의 신하가 멀리까지 와서 성상의 분부를 전유하여 잘못 은혜를 입으니 몸을 둘 곳이 없습니다. 신처럼 죄를 진 자가 어찌 그냥 벼슬과 녹을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관작을 삭탈하여 공론에 사과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라의 형편이 어지럽고 일 돌아가는 것이 우려가 많은데 경은 어떻게 차마 못 본 체할 수 있겠는가. 대신이 교외로 나가 있으니 정말로 매우 미안하다. 경이 비록 면직해 주기를 원하지만 들어와 글을 올려도 무엇이 안 될 게 있겠는가. 안심하여 사양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좌의정 홍명하가 과천에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날 임금께서 치욕을 당하던 때에 실로 신하는 이럴 때 죽어야 하는 의리에 어두워서 문을 열고 곧바로 들어가 머리가 부서져 죽도록 따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이 불충한 것이고, 저쪽의 소식이 먼저 전해졌을 때에는 또 심혈을 짜내 글을 올린 다음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이 염치가 없는 것입니다. 염치가 없는 자도 조정에 있을 수 없는 법인데 불충한 자는 어떠한 벌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지금 대간의 계사가 비록 중지되기는 하였으나 공론이 지극히 엄하므로 집에 있으면 형벌을 피한 사람이 되고 나라에 있으면 죄를 진 신하가 될 것이니, 그냥 직책을 띠고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하고, 이어 귀양보낸 신하들을 빨리 소환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히 비답하여 속히 올라오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끝에 말한 일은 경들을 위한 일일 뿐만 아니라 사실 괴상하고 부정한 그들의 작태가 미워서 한 것이므로 경의 뜻이 간절하지만 윤허할 수 없다."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병조 참판 장선징이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나의 뜻은 이미 앞서 내린 비답에서 말하였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3월 9일 계미

상이 침을 맞고 영녕전 수개 도감(永寧殿修改都監)의 당상관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조 판서 김수항에게 이르기를,
"온천에 가기로 이미 정하였으니, 영녕전 수리를 잠시 중지할 것인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는데 가서 물어 보았는가?"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영상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영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중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으나 거둥하시게 되면 잠시 중지하여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좌상과 우상의 의견도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하자,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어가가 궁을 떠난 뒤에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성안에서 일하게 하기는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둥하는 이유로 수리를 뒤로 미룬다는 것은 몹시 미안하나 거둥하는 일도 부득이하여 하는 것이니, 잠시 조금 뒤로 미루었다가 하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요즈음 국가의 기강이 해이하고 법령이 엄하지 못해서 은밀히 올린 상소라 하더라도 입계하기도 전에 먼저 전파되어 버리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자, 도승지 오정위가 아뢰기를,
"한림은 역사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니, 비록 밀소(密疏)라 하더라도 베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로 인해서 바깥에 전파된다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다. 매우 엄하게 신칙해서 누설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만약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사초(史草)를 누설한 죄로 벌을 주어야 한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유생 심유(沈濡)가 처음의 상소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대개 배회하면서 관망하려는 뜻이었으며 뒤미처 상소를 진달한 것은 한때의 시비를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아름답지 못한 작태를 내가 매우 미워한다.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그에 상당하는 벌을 시행하게 하라."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그들의 한 일이 비록 터무니없으나 이왕 선비의 상소라고 했으니 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비록 선비라고 하지마는 일시의 비난을 면하고자 추후에 소를 올렸으니 불가불 벌을 주어야 하겠다."
하고, 이어 그 소를 기각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물러가 여러 당상관들과 상의하여 벌을 주겠습니다."
하였다.

 

3월 10일 갑신

상이 침을 맞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상소를 올린 유생 심유 등에게 벌을 주라는 분부가 어제 내렸는데, 성균관 지사가 입시할 때에 그 상소를 도로 내주라는 명이 이어서 있었습니다. 관을 비웠던 유생들이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간 바에야 심유 등이 청한 바는 다시 시행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소가 성균관 유생들이 도로 들어가기 전에 들어왔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고 이유없이 물리친다면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손상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선비들의 풍조가 바르지 못한 실상을 여러 신하들이 등대했을 때 벌써 말했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우의정 허적을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자고 청한 합계의 의논을 중지하였다.

 

헌부가, 검열 조사석을 파직하라고 한 명을 환수할 것을 거듭 아뢰니, 상이 따랐다.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가 또 상소를 올려 직명을 삭제해달라고 청했는데, 명하는 상소 말미에서 귀양간 신하들을 또 언급하면서 매우 힘껏 구원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허락하였다. 그리고 사관을 보내어 아래와 같이 하유하였다.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고 시세가 매우 어려우니, 경들이 자리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좌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 억지로나마 따르는 것은 나랏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경들을 위해서다. 안심하고 들어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벌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일은 글로 말할 수 없으니 경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조용히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통진현(通津縣)의 사비(私婢)가 한 배에 세 명의 여아를 낳았다. 두 여아는 각각 얼굴과 팔다리가 있었지만 두 배가 하나로 합쳐졌는데 곧바로 다 죽었다.

 

3월 11일 을유

정태화(鄭太和)·홍명하(洪命夏)를 판중추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정랑으로, 심유(沈攸)를 헌납으로, 안숙(安塾)을 정언으로, 조성(趙䃏)을 고산 찰방으로 삼았다. 조성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합계할 때에 인피하고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직에 임명된 것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상이 도승지 오정위에게 이르기를,
"지난날 김익렴이 간통으로 정원에 물었을 적에 당시 일기를 미처 수정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주서가 어디에 근거해서 함부로 간통해 답했단 말인가. 일이 매우 놀랍다. 해당 주서 안후태를 파직하라."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일을 조사할 때 어떤 주서가 기록하였는가?"
하니, 오정위가 대답하기를
"가주서 이제(李璾)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되풀이해서 생각해도 끝내 영상이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해 낼 수 없다. 스스로 감당하려는 뜻이 이미 내 마음에 정해져 있었다. 신하가 어떻게 감히 임금에게 스스로 감당하라고 청할 수 있겠는가. 그때 역관배들이 전파한 말이 비록 경연 석상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원래 영상의 말이 아니었다. ‘상께서 감당하시면 신하의 죄가 가벼워진다.’는 등의 말에 있어서는 일을 조사해 온 이래로 전연 듣지 못하였는데, 영상이 말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인가? 그 기사가 의심할 여지없이 잘못된 것이니, 해당 주서 이제의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3월 12일 병술

우상 허적이 강가에서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의 죄악이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우므로 날마다 벌을 기다렸는데, 성상께서 은혜롭게도 힘껏 비호하시어 대간의 논계를 윤허하지 않으므로써 끝내 공론이 펴지지 않게 하고 많은 사람의 감정이 울적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악을 징계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단지 소원은 고향으로 돌아가 집에서 죽을 수 있게 되는 것뿐입니다. 신의 직책을 삭제하시고 이어서 죄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달래기를,
"아, 오늘날의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마음과 힘을 다하려 하다가 끝내는 뜻밖의 배척을 당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망극한 말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조용히 원인을 생각해 보니, 참으로 경이 조정을 하직하던 날 면대하여 유시한 데서 말미암은 소치이다. 내가 참으로 다시 경을 볼 낯이 없다. 아, 지금의 국사가 매우 위급하다 하겠다. 논의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며 조정에는 공정한 의논이 없고 선비들에게는 순후한 풍속이 없으니, 어찌 세도가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삼정승의 자리가 비었고 묘당이 고요하기만 하여 좌우를 돌아보아도 중한 덕망이 경보다 나은 자가 없다. 그대가 조정으로 돌아와 정사를 논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것과 기갈을 당하여 마실 것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다. 경은 어찌 차마 나를 버리려고 하는가. 황량한 촌락의 집에 봄 기온이 여전히 차기만 할 것이니 내 몹시 염려하고 있다. 속히 들어와서 당금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국사를 도와 나에게 실망을 주지 말라."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고 병조 판서 김좌명을 불러 보았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온양에서 과거를 실시한 것은 애초 본도의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만, 해마다 과거를 실시하기란 사체로 볼 때 거북스럽고 민간에 끼치는 폐단 역시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과거를 실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본도에서 제공하는 물품의 가짓수를 줄여서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끼치는 폐단을 없애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에서 나는 물품으로만 제공하게 하고, 양남(兩南)도 도내의 토산물로 한두 차례 자전께 봉진하게 하되, 절대로 많은 양을 마련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삼도(三道)의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승지 민점이 아뢰기를,
"어제 성상의 분부를 받았는데 이제(李璾)가 쓴 일기 가운데 착오된 곳을 삭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로 하여금 삭제하도록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로 하여금 삭제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자, 민점이 아뢰기를,
"일기를 삭제하면 후일의 폐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분부하신 말씀을 일기에다 기록하게 한다면 삭제하지 않더라도 잘못 기록한 실수가 자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삭제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민점(閔點)에게 묻기를,
"우상이 현재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강가에 있는데 오늘 뱃길을 따라 충주로 가려고 한답니다."
하였다. 상이 민점으로 하여금 가서 전유하게 하기를,
"지금 일의 기미를 헤아릴 수 없어 경이 조정을 불안하게 여기고 갑자기 이 걸음이 있게 된 것이지만, 어찌 차마 선왕께서 융숭하게 대우해 주던 것과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뜻을 저버리며 조금도 머무르려 하지 않아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나랏일이 어려운 상황이고 묘당이 텅 비었으니, 이 어찌 대신이 과감히 떠날 때이겠는가. 조정이 대신을 대우하는 것은 일의 체모가 특별하니,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 빨리 조정으로 돌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민점이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서빙고로 쫓아가서 성상의 분부를 우상 허적에게 전했더니, 허적이 말하기를 ‘신이 지은 무거운 죄와 위태로운 자취로 볼 때 감히 잠깐이라도 서울에 머물 수 없으니, 대궐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뱃길이 바빠서 다 진달할 겨를이 없으니, 짧은 상소로 저의 정성을 다시 드러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김익렴이 정원에 가서 일기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가 스스로 찾아서 본 것인가, 승지가 상고해 낼 때 본 것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현재 있는 관료들은 모두 그때의 승지가 아니므로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승지나 사관이 모두 다 생존해 있는데 어찌 물어볼 수 없단 말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번기(番記)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그때의 승지는 김우석(金禹錫)·심세정(沈世鼎)·정계주(鄭繼胄)·이익(李翊)이고, 사관은 가주서 안후태(安後泰)·유상운(柳尙運)·정유악(鄭維岳), 검열 조사석(趙師錫)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갇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우석·계주가 모두 갇혀 있었다.】  모두 불러 물어서 아뢰라."
하니, 회계하기를,
"하교하신 대로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니, 전 승지 심세정은 말하기를 ‘신이 정원에 있을 때 김익렴을 본 적이 없었다.’ 하였고, 이익은 말하기를 ‘얼마 전에 익렴의 피혐한 말 가운데 「마침 정원에 가서 일기의 내용을 들었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익렴이 어느 승지가 입직할 때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뒤 익렴이 신을 만나 말하기를 「김우석과 신이 입직했을 때 일기를 가져다 보았다.」라고 말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나는 기억할 수 없다. 그때 판부(判付)된 서역(書役)이 매우 많았는데, 그대가 비록 일기를 가져다 보았다 하더라도 바쁜 와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알지 못한 것인가.」 했다. 이와 같이 문답하고 헤어졌는데, 그 뒤 익렴의 말을 가지고 우석에게 물어보니, 우석도 말하기를 「그가 일기를 가져다 본 일은 나도 모른다.」 했다. 익렴이 춘방에 입직할 때 정말로 신들을 와서 보기는 했지만 그가 일기를 가져다 본 것은 신이나 우석 모두 알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다시 이익에게 묻기를 ‘익렴이 왔을 때 일기를 상고한 일은 없었다 하더라도 혹시 말로라도 언급한 일이 있는가?’ 했더니, 이익이 말하기를 ‘일기에 기록된 말을 애초 듣지 못했는데 어찌 언급한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고, 유상운·정유악·안후태·조사석 등도 모두 ‘익렴과 만나지 않아 그 사이의 내막을 전혀 듣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신들이 서찰로 김우석과 정계주에게 물어 보았더니, 우석은 ‘이익과 숙직할 때에 익렴이 와서 보았으나 한담설화를 나눈 이외에는 일기를 본 적이 없었고 또 언급한 일도 없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어찌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고, 계주는 ‘익렴과 원래 만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익렴이 인피한 말 가운데 보았다고 하지 않고 들었다고 하였는데, 유사로 하여금 그가 어디서 들었는지 함문(緘問)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민유중·심재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대답한 이야기가 익렴이 인피한 말과 다르니, 만약 그 이유를 깊이 따져 보려고 한다면 반드시 익렴에게 물어 보아야만 그 내막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성상께서 분부하신 뜻은 실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나, 조정에서 크고 작은 조치를 취할 적에 반드시 먼저 사체가 어떠한가 또는 규례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아 매우 올바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근래 이 하나의 일로 인하여 승지와 사관을 불러 힐문하고 있으니, 조정의 하는 일이 이미 정당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 만약 인피한 말 가운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대관에게 함문하여 들은 바를 모두 말하라고 할 경우 이는 말의 진원지를 조사하는 격입니다. 이런 일은 전례가 없고 또 후일의 폐단에 관계되니 사체의 손상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성명께서는 상량하여 처리하시어 정당하게 되도록 힘쓰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만약 함문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면 잡아다 문초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심재가 아뢰기를, 【민유중은 이미 물러갔다.】 "신들이 이른바 사체로 보아 미안하다고 한 것은, 익렴의 전후 소행이 비록 매우 의심쩍지만 그 일은 그가 대관으로 있을 때 있었던 일인데, 대관을 함문하면 사체를 손상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살피시지 않고 갑자기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위대한 성인께서 일을 화평하게 처리하는 도리에 있어서 아마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깁니다. 성명께서는 다시 살펴보시고 공평한 마음으로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였다.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52면
【분류】정론(政論) / 행정(行政) / 사법(司法) / 역사(歷史)
"신들이 이른바 사체로 보아 미안하다고 한 것은, 익렴의 전후 소행이 비록 매우 의심쩍지만 그 일은 그가 대관으로 있을 때 있었던 일인데, 대관을 함문하면 사체를 손상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살피시지 않고 갑자기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위대한 성인께서 일을 화평하게 처리하는 도리에 있어서 아마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깁니다. 성명께서는 다시 살펴보시고 공평한 마음으로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였다. 세 차례나 아뢰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 조상우(趙相愚) 등이 상소하기를,
"옛날 우리 선대왕의 큰 계획이 뭇 왕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어진 선비를 지성으로 좋아하여 좨주(祭主)의 신하 송시열과 송준길을 초야에서 발탁하여 재상의 자리에 두었는데, 서로 만남의 성대함과 빈틈없는 계획이 바람과 구름으로도 서로 감응하는 것을 비유할 수가 없고 고기가 물을 얻은 것으로도 서로의 뜻이 맞음을 비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연(胄筵)에 출입하여 성상의 덕에 도움을 주고 성균관의 사표(師表)가 되어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본받게 한 데 있어서는 후손에게 물려주는 좋은 계획에 정성을 쏟은 것이 더욱 성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 황연이 선비의 이름을 가탁하여 감히 흉측한 소를 올려 있는 힘을 다하여 두 신하를 모함하였습니다. 아, 성명께서 위에 계시어 양(陽)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인심이 좋지 않아 괴이한 것들이 갖가지로 나오고 있으니, 이게 어쩌면 세도가 미약해져 사특한 설들이 일어나 위험과 멸망의 기미가 바싹 다가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신들이 그지없이 놀라다 못해 크게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옛날 무술년에 시열과 준길 등이 비로소 전형에 제수하는 명을 받았으나 때마침 성상의 건강이 오래도록 좋지 않았던 중이었고 그뒤 시열 등도 조정에 1년도 채 못 있었기 때문에 미처 계획을 세우고 시행하여 조금이나마 그 뜻을 시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 선왕께서 크게 진작하여 큰 일을 해 보려는 뜻을 지혜있는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알고 있었으니, 한 집에서 정사를 토론하고 시행하였던 것들이 넉넉히 인심을 감동시킬 만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정의 신하들이 그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황연이 말한 권시·허목·윤휴와 같은 사람도 모두 발탁하여 언로의 자리에다 두기도 하였고 측근에다 두기도 하였으며, 홍우원에 있어서는 폐기된 데서 일으켜서 관각(館閣)에다 두었으니, 황연이 이른바 ‘처음부터 한 일이 사람들의 기대에 차지 않아 자기의 당이 아니면 일체 물리쳤다.’라고 한 말에 대해 신은 어떤 일을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신 뒤로 당시 의논이 점차로 엇갈려 망극한 유언비어가 떠돌았으므로 시열과 준길이 서로 잇따라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오직 예를 논하는 건이 거짓말을 하는 자들의 기화가 되었기 때문에 윤선도의 상소는 참으로 흉칙하였습니다만, 이를 뒤따라 조경(趙絅)의 상소가 있었고 홍우원·유세철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시열이 문을 닫고 사람들을 사절하면서 죄인으로 자처하여 사람을 대해도 시사에 언급하지 않은 지가 지금까지 오래되었습니다. 준길은 더러 억지로 부름에 응할 때가 있었으나 한두 번 상과 만나고 서연(書筵)에 출입하는 데 불과하였으며 역시 여러 달 머물러 있은 적이 없었으니, 나그네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두 신하의 전후 출처가 이와 같은 데 불과한데, 황연이 ‘조정의 모든 일은 모두 그들에게 물어서 그들의 마음에 따라 입김을 불면 펴지기도 하고 처참하게도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너무나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음흉한 선도가 형벌을 면한 것만도 다행인데 조경 등 여러 사람들이 감히 앞장서서 그를 구원하고자 시비를 현란시켰으니, 떼를 지어 나쁜 짓을 한 그들의 부정한 작태는 성상께서 통촉하시는 바이고 공론이 같이 미워하는 바입니다. 설사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초야에 물러가 세상과 떨어져 있는 저 두 신하가 그 사이에 무슨 간섭한 일이 있기에 감히 이 지경까지 모함한단 말입니까.
황연이 또 와신상담하는 뜻과 방불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그들의 죄목으로 삼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신들이 성명께 구구하게 변론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오르내리는 우리 선왕의 영혼도 필시 이 말에 대해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 신하가 조정에 나와 일을 해 보려고 하면 사세상 안 될 점이 있고, 세상을 완전히 잊으려고 하면 두 조정에서 입은 은혜를 또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나라에 큰일이 있을 경우에는 부득불 소를 올려 아뢰었던 것이니, 이번에 말씀드린 것 역시 의리를 밝히고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묘당을 모함하고 대각에 협조하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황연이 또 채택과 장준의 일로 두 신하에게 뒤집어 씌었는데 이는 다만 하나의 무식한 어린아이의 말입니다. 신들이 그들과 변명하자니 또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쟁점은 다만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일 뿐인데, 황연이 감히 때를 틈타 기교를 부리고 틈을 엿보아 간사한 꾀를 내어 두 신하가 강조하고 견지하는 의리를 마치 허위적으로 내세운 것인 양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원망을 만들어 화를 불러온다는 말로 우리 성상을 놀라게 하여 은연중 외부의 세력을 이용하여 견제하려는 수법이 있으니, 그들이 꾸민 꾀가 참으로 참혹합니다.
아,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해와 달 같이 밝으시고 천지의 덕과 같으시므로 사림이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구하게 지나친 염려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신들이 직접 본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중종처럼 밝고도 밝은 성덕을 지녔으며 누가 기묘(己卯)의 현인들처럼 임금과의 만남이 성대하였습니까? 그러나 남곤·심정의 무리가 올바른 의논에 용납받지 못하자 갖가지로 무함하다가 심지어는 유언비어를 대궐 안으로 퍼뜨려 놓고 위험한 말로 중종을 움직여 결국 서로의 만남을 끝마치지 못하게 하고 사림을 살육하고 말았으니, 참소하는 자들의 효력이 이처럼 두렵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참소하고 미워하는 무리들이 남곤과 심정보다 심하고 황연이 하는 말이 기묘의 놀라운 덫 정도뿐만이 아닌데 말할 것이 있습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모발이 모두 곤두섭니다. 임금은 이러한 흉측한 사람들을 반드시 엄히 다스리고 통렬히 배척해야만 화의 근본을 없앨 수 있고 간사한 꾀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참소하는 자들이 뒤따라 이르러 날마다 깊이 젖어들 것이니 그 해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황연에 대하여 비록 이미 그의 소를 기각하고 대략 벌을 주었습니다마는, 또 ‘자못 곧은 것 같다.’라고 분부하셨고 보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 뭐가 있으며 흉칙하고 간사한 것을 통렬히 배척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신들은 실로 큰 천지와 같고 밝은 해와 달 같은 성상께 유감이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조정의 시비가 이미 정해졌으니 너희들은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행 판중추 홍명하가 소를 올려 병이 있다면서 본직과 내국·훈국·무고의 도제조, 호위 대장 등의 직임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응교 여성제가 소를 올려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아뢰기를,
"신이 사경 중에 들으니, 성상께서 너무나 갑자기 노하시고 너무나 지나치게 언성과 안색을 변하시어 대간의 신하를 무려 8명이나 잇따라 귀양보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사가 이들에게 내린 명을 도로 거두시기를 두어 달이 넘도록 극력 청하였고 유현(儒賢)이 의리를 분석한 말이 믿을 만한데도 성상께서 들어주지 않아 위아래가 막혔다 하니, 이게 무슨 광경이며 이게 무슨 사리란 말입니까. 가사 대간의 신하가 거친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우레와 같은 위엄으로 짓눌러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그들의 뜻은 임금을 높이는 데에 있고 그들의 의논은 명분을 바로잡는 데에 있는데 전하께서는 본정은 따져 보지도 않은 채 일체 내쫓고 말았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전에 없던 일을 차마 하신단 말입니까. 여러 신하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과 사람들의 심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이숙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7명의 신하가 모두 병이 든 연로한 어버이가 있으며 그 가운데 조성보·유헌의 어머니는 모두 중한 병이 있어서 조석으로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만약 이 두어 신하로 하여금 효도로 다스리는 세상에서 결국 끝없는 아픔을 갖게 할 경우 전하께서는 위대한 성인의, 나의 노인을 대우하는 마음을 미루어 다른 사람의 노인에게까지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된다는 것은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대간의 계사에 비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는 자는 먼저 복역해야 하는 의리가 있으며 뒤에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출사하여도 끝내 말씀을 드리지 않고 있으므로 물의가 들끓은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왕명을 출납하는 신하들이 소를 올려 분변하여 배척한 것으로 볼 때 공론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하께서 가볍게 그들을 체차시켰으니 어찌하여 좌우의 신하들이 그렇게도 잘못하였단 말입니까. 그리고 당초 도타이 타이르실 때 대신 초안을 잡아 만든 말이 어찌 성상의 뜻에 벗어났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였으니, 때를 틈타 의도를 부린 작태를 엄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살피지 않으시고 관례에 따라 계하하셨으니, 신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아, 재야에 있는 두어 명의 신하는 선왕과 굳게 결합된 사이였으며 성상께서 예우해 주셨습니다. 어찌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세상을 잊으려는 마음을 가지겠습니까마는, 대체로 나오기가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만은 초야에 있는 몸이라고 하여 성스러운 조정을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었으므로 심혈을 짜서 소를 올려 말뜻이 간절하였으니, 전하께서 이 두 신하의 말에 선뜻 뉘우치지 않으신다면 종전에 글을 배웠던 빈사(賓師)의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황연이 선비의 이름을 빌려 올린 소가 과연 먼 영남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고 보십니까? 이리저리 얽고 빚어낸 것이 모두가 탑전에서 한 말들을 주워 모은 것이며, 꾸미고 과장한 것들도 모두 은밀히 말한 것을 엮은 것이니, 일망타진하려는 그들의 꾀가 참으로 참혹합니다. 헛된 이름만 나면 실지로 화를 받는다는 등의 말은 전국 시절에 종약과 연횡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강국의 세력을 이용하여 임금을 겁주는 것처럼 하는 작태가 현저하게 있으며, 위엄을 빼앗고 당을 조성한다는 등의 말은 또 고금의 사림들에게 화를 전가하는 기화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깜짝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못 곧은 것 같다.’는 말을 특별히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비답에다 쓰신단 말입니까.
아, 역대로 세운 나라들이 각각 그에 따른 규모가 있으며 자손들이 지켜온 가법이 모두 있는데, 우리 나라는 조종조 이래로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모두 언로를 붙들어 세우고 사기를 배양하는 것을 힘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귀에 거슬리는 말과 과격한 의논이 있더라도 조종께서는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장려하여 진출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어찌 언로의 개폐(開閉)가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너무나 심하게 싫어하고 너무나 심하게 쥐어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대의는 좋더라도 천천히 따져보지 않으며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죄목으로 삼는가 하면 매양 장단을 비교하고 곡직을 다투는 것으로 말하는 자들을 막는 도구로 삼고 있으니, 어떤 신하가 우레와 같은 위엄을 건드려 반드시 이르고야 마는 화를 스스로 취하려 하겠습니까. 임금에게 잘못이 있어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재상에게 과실이 있어도 감히 논하지 못한 채 입을 꽉 다물고 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국가의 흥망을 모른 채 버려둔다면 나라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성균관 유생이 올린 소에 있어서는 우리 성군들께서 늘 우대하고 장려하여 조금도 기를 꺾지 않았습니다. 신은 늘 선조 대왕께서 말씀하신 ‘태학은 선을 제일로 삼는 곳이고 공론이 있는 곳이니, 조정의 시비는 일시에 어지러워질 수도 있지만 태학의 공론이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씀을 외우면서 ‘위대하다 성인의 말씀이여,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성균관 유생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내린 명을 풀어주시자마자 곧바로 뒤에 올린 소에 대해 벌을 줄 것을 의논하여 연달아 엄한 분부만 내리고 끝내 한 자의 비답도 내리지 않으심으로써 선비들의 기를 잃게 하고 사람들의 심정을 우울하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한때 격노하여 가볍게 희로(喜怒)를 보이셨으나 성군들께서 선비를 대우하셨던 지극한 뜻은 생각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고 그의 직을 체차하였다.

 

3월 13일 정해

상이 침을 맞은 다음 병조 판서 김좌명을 인견하였다. 상이 우승지 민점(閔點)에게 이르기를,
"우상이 지금 이미 떠났다고 하는데 대신의 행차는 일의 체모가 특별하다. 두 도의 감사로 하여금 관례대로 호송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김좌명에게 이르기를,
"이번 온천 거둥시 도감의 포수를 8백 명으로 수효를 정하되, 6백 명은 어가를 호위하게 하고 2백 명은 자전을 호위하게 하라."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충청과 경기 두 도의 마군(馬軍)도 교대로 호위해야 하는데, 충청도 해미(海美)와 공산(公山)의 두 군영 소속 천여 명 가운데는 노약자가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경기는 총융사가 수원의 마군을 단속해서 호위하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충청도는 노약자를 제외하고 정예로운 자 4백 명을 뽑아서 호위하게 하고, 경기는 수원의 군사로 호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정언 안숙이 아뢰기를,
"합계의 논의로 간쟁한 지 이미 오래되어 공론이 펴졌으니 물론 한결같이 오래도록 버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듭 제기된 논의는 사체가 매우 엄하므로 참여하지 않은 다른 동료가 있을 경우에는 기다렸다가 계사를 중지하는 것이 본디 대각의 구례입니다. 그런데 대사헌 이경억이 새로 제수된 동료가 출사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해서 서둘러 계사를 중지했으니, 대각의 체모를 이보다 더 손상시킨 것이 없습니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은 경억과 의견이 서로 달랐는데도 끝내 뜻을 굽혀 따르고 말았으니, 매우 나약합니다. 아울러 체직하소서. 부사직 박순(朴純)은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적에 남용익(南龍翼)을 삭출하라는 논계에 대해서 자신이 혼자 아뢰기를 이틀 간이나 했으니, 그가 합계를 그르게 여기지 않은 것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합계를 연계할 때에 미쳐서 비로소 의견이 같지 않다고 핑계해서 끝내 분란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니, 그 작태가 가증스럽습니다. 파직하소서. 고산 찰방(高山察訪) 조성(趙䃏)은 그전에 대간으로 있을 때에 서성이며 관망하다가 박순이 매우 장려하는 비답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나와서 숙배를 하고는 앞장서서 구제했으니, 참으로 해괴합니다. 파직하소서. 해운 판관 최일(崔逸)은 일찍이 대간의 직책에 있으면서 엄한 위엄에 겁을 먹고는 인혐에 해당하지도 않는 것으로 인혐했으니, 일에 닥쳐서 구차하게 모면한 자취가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김익렴이 피혐한 내용 가운데 일기에 관한 말이 여러 신하들이 대답한 것과 서로 어긋나니, 전하께서 의심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대간으로 있을 때의 일에 대해서 말의 뿌리를 캐묻고자 이번에 나문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일의 체모에 손상되고 뒤 폐단과 매우 관계가 있습니다.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지평 이익상(李翊相)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이경억이 홀로 막중한 논계를 정지했는데 비록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더라도 신이 아직 나와서 숙배하지 못한 상태였던 바에야 이를 혐의로 삼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관례대로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이번 간원의 논계에, 진실로 다른 동료가 있으면 기다렸다가 계사를 중지하는 것이 본래 구례(舊例)라고 말했는데, 이른바 다른 동료란 바로 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나약함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헌납 심유(沈攸)가 인피하기를,
"본원의 새 논계는 상회례(相會禮)를 기다리지도 않고 지레 스스로 혼자 아뢴 것입니다. 신이 경시받음으로 인하여 대각의 체모가 온통 무너졌습니다. 또 신이 사은 숙배를 지체했기 때문에 합계를 중지하려던 대관으로 하여금 미처 상의하지 못하게 했으니,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안숙의 계사를 보건대, 의도를 지니고 근거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가리기 어렵다. 아, 인심의 좋지 않음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경억이 논계를 그친 것은 대체로 공의가 이미 펴졌고 국사가 염려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경억이 새로 제수된 동료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을 하면서 자신은 심유와 함께 의논하지 않았으니, 이 한가지 일로도 그의 마음씨와 태도가 벌써 드러났다. 또 그가 한편으로는 한결같이 오래 끌 필요가 없다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급급히 정계했다고 했으니, 앞뒤로 말을 한 것이 억양이 너무나 심하다. 그리고 의견이 같지 않은 것은 사람마다 면하기 어려운 것인데, 박순 등 세 사람에게 억지로 죄명을 뒤집어씌워 한번의 계사로 아울러 때려잡아 위협하고 속박하려 꾀했으니 참으로 놀랍다. 이와 같은 사람을 대각에 그대로 두어서 그 간악함을 키울 수 없다. 안숙을 우선 체차하라."

 

승지 민점(閔點)·심재(沈梓)가 아뢰기를,
"안숙이 이미 정계한 의논을 소급하여 허물함으로써 다시 분란의 단서를 야기했으며, 현재의 동료와도 가부를 의논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아직 숙배하지 않은 동료를 이경억이 기다리지 않았다고 꾸짖었으니, 신들도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책은 대관이고 그의 말은 대간의 의논입니다. 갑자기 특별히 체직시킨다면 뒤 폐단과 관련이 됩니다.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정상이 간악한데도 체직시키는 벌만을 특별히 준 것인데, 너희들이 감히 운운하다니, 김만기(金萬基)의 말에 어째서 이와 같이 겁을 먹는단 말인가. 참으로 근거가 없다."
하였다.

 

행 예조 판서 정치화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행 판중추부사 정태화가 소를 올려 병이 있다는 이유로 본직과 호위 대장, 제사(諸司)의 제조 등의 임무를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다 말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들어와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고, 어의를 보내어 간병하게 하였다.

 

3월 14일 무자

상이 침을 맞았다.

 

권두추(權斗樞)를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안숙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삼고, 이어서 서경(署經)을 거치지 말고 보내라 명했다.

 

의정 허적이 중도에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특별히 보낸 측근의 신하가 멀리 강외에까지 와서 성상의 비답을 전하고 또 성상의 뜻을 알리니, 신이 비록 우둔하고 완고하다 하나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아, 신이 누구이며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선왕이 죽은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신이 어찌 차마 잊겠으며, 나랏일의 어려운 상황을 신이 어찌 생각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의 죄명이 매우 무거워서 천지 간에 용납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미처 물러간다고 아뢰지도 못하고 한 범선으로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머리를 돌려 남산을 바라보니 성곽과 대궐이 점점 멀어지고, 영릉을 바라보니 소나무와 잣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신이 이에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습니까. 신의 정세는 또한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받았던 명부(命符)는 이제 감히 규례대로 정원에 봉환합니다. 빨리 신의 관작을 삭제하고 아울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달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니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근심되어 좌우의 손을 잃어버린 듯하다. 경의 이번 행동은 만부득이해서 나온 것이니, 내가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아, 삼공이 무함을 입고 당론이 자행되니 가만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한심한 생각이 든다. 경이 비록 자기 몸을 가벼이 하고 싶겠지만 나랏일은 장차 어느 지경에 두려 하는가. 나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즉시 노를 돌려 빨리 들어와서 시대의 여망에 부응하라."
하고, 또 선전관을 보내어 명부를 싸가지고 도달한 곳에 가서 전해 주게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지평 이익상, 헌납 심유를 처치하기를,
"익상이 처음에 인피하지 않은 것은 대간의 체통에 어긋나고, 심유가 여러 날 사은하지 않으면서 새로 올릴 계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모두 온당하지 않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김익렴을 잡아다 문초한 것과 안숙을 외직에 임명한 것은 대신(臺臣)을 관대히 용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너그럽게 용납하소서."
하니, 상이, 이익상과 심유는 별로 체차할 만한 잘못이 없으니 모두 출사하라고 답하고, 끝에 말한 일은 따르지 않았다.

 

3월 15일 기축

지평 이익상과 헌납 심유가, 이미 체차되었는데 특별히 출사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지평 이숙달이 아뢰기를,
"정언 안숙의 의논은 대각의 체례로 서로가 규계하는 것에 불과한 것뿐이지 이미 중지된 논의에 대해 소요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의 본심을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우레와 같은 위엄을 갑자기 내시어 해외의 외딴 곳으로 내쫓으셨습니다. 신은 전하의 조정에 다시는 말씀을 드릴 사람이 하나도 없어 언로가 막히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습으로 굳어질까 염려되는데, 그렇게 되면 절대로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외직에 제수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김익렴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한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경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 안숙을 구원하며 해명하니, 상이 일렀다.
"오늘날 세도(世道)가 참으로 해괴하다. 사를 따르며 공을 멸시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으니, 또한 매우 가슴 아프지 않은가. 안숙의 심보는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이다. 외직에 임명한 벌도 가볍다고 하겠는데 무슨 용서해 줄 만한 이치가 있겠는가."

 

3월 17일 신묘

정리사(整理使) 김수흥(金壽興)이 온천에서 들어와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온천을 왕래하다 백성들의 말을 들으니, 해마다 거둥하시어 원망과 고통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지나는 각읍에는 세미(稅米)를 견감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2두를 감해주라고 명하였다.

 

3월 18일 임진

찬선 송준길이 자신의 허물을 들면서 상소하기를,
"신이 너무나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만, 오직 임금을 사랑하는 단심이 가슴속에 사라지지 않고 있어 조정에서 정치의 명령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근심해 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여러 신하를 귀양보내고 잡아다 문초하라고 하였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 망령된 생각에 ‘성스러운 조정의 지나친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여겨져 외람되게도 변변치 않은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의에 따라 뜻이 격렬하였고 말이 곧았으므로 신이 스스로 기구한 화를 입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처분은 내리지 않고 놀라운 덫이 먼저 발동되어 안팎에서 전하는 말을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정말로 그들의 말과 같다면 신이 비록 온 집안이 도륙을 당하더라도 남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해가 있고 사람들에게는 공론이 있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변명하는 말을 많이 하여 스스로 입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신이 세상에 드문 여러 조정의 은혜를 입었으나 털끝만큼도 보답하지 못하였는데, 다 죽어가는 날에 참소와 비방이 집중되어 몸과 이름이 모두 욕되었으니, 살아서는 무슨 얼굴로 후일에 전하를 볼 수 있으며 죽어서는 무슨 얼굴로 지하에서 선왕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법관에게 회부하여 국법으로 논하게 함으로써, 불충하고 말을 함부로 하여 절의를 잃은 신하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세도와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말 한심스럽다. 미친 유생의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는가. 경의 소에 이렇게까지 하니 내 정말 부끄럽다. 경은 애써 마음을 넓게 가져 멀리하려는 마음을 빨리 되돌려 선뜻 마음을 바꿔먹고 올라온다면 하루살이 같은 무리들이 저절로 간담이 서늘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지평 이숙달이 계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사간 최유지가 시골에 어머니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사직하고 귀양간 여러 신하들을 구원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그의 직을 체차하였다.

 

우부승지 민유중이 상소하기를,
"신이 엊그제 부름을 받고 승정원에 나와, 김익렴에게 함문하라는 분부를 이미 유사에게 내렸다는 말을 듣고 어리석은 생각에 국가에서 대각을 여느 관원과 달리 대우하여 논핵하거나 아뢰는 말이 설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말의 진원지를 캔 적이 없었으며, 수백 년 이래로 이 직책에 있는 자의 말이 반드시 다 좋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너그러이 봐주었던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으니, 조종조의 가법이 아름답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기 가운데 운운한 말을 가지고 김익렴이 목격했는지의 여부를 알고자 처음에는 승지와 사관에게 따져 묻고 이어서 또 인피한 말 가운데, 들었다는 말을 끄집어내어 유사로 하여금 함문하게 하였는데, 이는 김익렴에게 함문한 게 아니라 대관에게 함문한 것이니, 전후의 내린 조치가 모두 옳지 못하였습니다. 계사의 초안을 잡아놓고 올리려는 중에 때마침 동부승지 심재가 밖에서 들어왔는데, 그의 뜻도 신과 같았으므로 연명하여 아뢰었으나 이 의견을 제기한 사람은 사실 신입니다.
신의 망령된 말로 말미암아 점차로 성상의 노기를 격발시킨 바람에 청한 바를 윤허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숙직한 동료가 간쟁하였으나 쓸데가 없어 결국 법관에게 나아가 심문을 받고 말았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몸둘 곳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에는 필시 계사를 올린 것은 말을 만들어 곡진히 감싸는 것으로 알고 그런 것이라고 여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신하로서 크나큰 죄악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지마는 결코 이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익렴을 사적으로 돕기 위해 차마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신이 매우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조정의 사체를 오늘날 한번 잃게 되면 끝없는 뒷날의 폐단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미약하고 말이 얕아서 상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함으로 인해 전에 없던 뜻밖의 일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사실 신의 죄입니다.
그리고 응교  여성제는 경연의 자리에 있으니 보좌하고 인도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잘못한 일을 목격하고 극력 간하는 말씀을 드렸으니,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그의 정성은 장려해야지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말이 조심성이 없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참으로 용납하여 받아들이셔야지 가볍게 싫어하시고 배척하여 끝내 비답도 없이 계(啓) 자만 찍어 내려보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유신을 대우하시는 것이 너무나 박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이 아뢴 말씀을 다시 살펴보시어 조정의 조치가 큰 잘못이나 후회가 없게 하시고 이어 신의 직을 체차한 다음 그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의 말을 범연히 보면 좋은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니, 내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너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대사간 강백년이 병이 있다며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강백년은 일찍이 과거에 올랐으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허물 때문에 하관(下官)에 머물러 있었는데, 고 판서 이명한(李明漢)이 그의 문재를 보고 조정에서 칭찬함으로 인해 벼슬길이 트이게 되었다. 사람됨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백하다고 소문이 났다. 다만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여 일을 잘 피하였다. 조정에 시비거리가 있을 때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가 병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들어갔으므로 선비들이 단점으로 여기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삼공이 자리를 채우지 못했으니 정승 뽑는 일을 늦출 수 없다. 일찍이 선묘(宣廟)께서 사관을 보내어 대신에게 의논했다 하고, 또 특별히 제수하는 규정도 있다고 들었다. 정원은 상고하여 아뢰라."
하니, 회계하기를,
"선묘조 때 승지를 우상 정지연(鄭芝衍)에게 보내어 천거하게 했는데, 지연이 이산해(李山海)를 천거했습니다. 명묘조 때 어비(御批)로 권철(權轍)을 우상으로 특배했고, 선묘조 때 한응인(韓應寅)을 특명으로 영상에 임명했습니다."
하자, 상이 알았다고 하였다.

 

교리 이유상 등이 차자를 올려, 김익렴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한 것과 안숙을 외직에 임명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9일 계사

상이 침을 맞았다.

 

홍주삼(洪柱三)을 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이규진(李奎鎭)·여경(呂儆)을 지평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동지춘추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특별히 우의정에 제수하였다.

 

3월 20일 갑오

상이 침을 맞았다.

 

간원이, 대사헌 이경억, 정언 이단석을 체차한 것과 사직 박순, 고산 찰방 조성,  해운판관 최일을 파직한 것과 김익렴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한 것을 도로 거두자고 한 논의를 거듭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정언  안숙이 여러 신하들이 귀양간 끝에 감히 논계한 것은 그 사이에 어찌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다만 대각의 고사에 따라 일시의 공론을 펴고자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살피지 않으시고 멀리 해안의 고을로 귀양보내면서 갑자기 실정에 맞지 않은 죄를 주시니, 보고 듣는 사방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위대한 성인의 포용하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언로가 막히게 되었으니 관계된 바가 작지 않습니다. 대정 현감 안숙을 외직에 임명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자를 책봉할 때 도감이 수고한 공로로, 도제조 정태화에게는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제조 박장원·이완·정치화·김수흥과 도청 이민서에게는 각각 말을 하사하고, 도청 이정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고, 감조관 조시원 등 7명에게는 6품으로 올려주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교명문제술관(敎命文製述官) 조복양, 서사관(書寫官) 김수항에게는 각각 말을 하사하고, 죽책서사관(竹冊書寫官) 유심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고, 옥인전문서사관(玉印篆文書寫官) 홍석귀에게는 말을 하사하고, 독책관(讀冊官) 이원정, 상례(相禮) 최일에게는 모두 품계를 올려 주고, 필선 김익렴에게는 준직(准職)을 제수하였다.

 

3월 21일 을미

상이 침을 맞았다.

 

좌의정 허적이 또 자신의 잘못을 들어 상소하면서 체차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사관을 보내 아래와 같이 전유하였다.
"국사가 어려움이 많고 시세가 매우 어려우니, 경은 벼슬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지금 애써 경의 소청을 따라 준 것은 나라의 계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경을 위해서이다. 그러니 경은 안심하고 빨리 올라와 나의 뜻에 부응하라. 경이 만약 끝끝내 오지 않을 경우 사체의 손상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고인이 이른바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다.’는 말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경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행 판중추 홍명하가 다시 소를 올려 본직과 겸임하고 있는 직책을 체차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강백년이, 휴가를 받아 시골에 내려가서 기한이 지나도록 올라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사간 홍주삼은 추고의 함문(緘問)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차되었다.

 

사은사 겸 진주정사(謝恩使兼陳奏正使)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 부사 호조 참판 김휘, 서장관 경최가 청나라에 갔다. 지난 겨울에 정지화가 동지사로 청나라에 갔었는데, 방물 가운데 색깔과 품질이 좋지 않은 백면지(白綿紙)가 있었다. 예부가 청나라 임금에게 고하여 벌금으로 은 1천 냥을 내게 되었는데, 청나라 임금이 특별히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본국에 공문을 보내 사신과 담당 관원의 죄명을 정하라고 하였으므로 사신과 호조 판서 김수흥, 참판 남노성 등을 모두 파직하고 사신을 보내어 벌금을 면해 준 것을 사례하면서 아울러 죄를 결정한 뜻을 아뢴 것이다.

 

3월 22일 병신

상이 침을 맞았다.

 

허적(許積)을 행 지중추부사로 삼고, 이경억(李慶億)을 특별히 제수하여 도승지로 삼았다. 그리고 홍중보(洪重普)를 예조 판서로, 이유상(李有相)을 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부교리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동로(李東老)를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정리사 김수흥의 아룀으로 인하여 연로의 각 고을 세미(稅米)를 특별히 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먼 고을의 백성들도 왕래하며 지공하느라 도로에서 고생하였는데 유독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사실 고르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저들과 똑같이 견감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훈련대장 이완이 아뢰기를,
"농사철이 이미 급박해졌으므로 외방의 군사를 징발하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도감의 군사 5백 명으로 어가를 호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3일 정유

상이 침을 맞았다.

 

행 판중추부사 정태화가 다시 소를 올려 병이 있다는 이유로 본직과 겸임한 직책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치화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번에 새로 특별히 제수하신 것은 보통의 일과 크게 다른 일이었으므로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삼공의 직책은 즉 사방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바이고 온갖 책임이 집중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국가의 안정과 위태로움, 흥기와 상실이 모두 정승이 어지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으니, 참으로 재간과 덕기가 평소부터 드러나고 지식과 도량이 모두 넉넉하여 일시의 기대에 차지 않는 자이면 감히 함부로 그 자리에 앉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지 않아 학술이 없으며 지식과 생각이 얕아 사무에도 어두운데 더구나 지금 매우 어려운 때에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음양을 다스리고 임금을 보필하는 책임을 감당할 리가 있겠습니까. 제수의 명단이 한번 내려지자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있으니, 맑은 조정의 치욕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말할 수도 없거니와 물의가 얼마나 비웃으며 손가락질을 하겠습니까? 여러 날 웅크리고 있었으나 바르게 탄핵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기대에 어긋나고 황공하여 몸둘 곳을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명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택하여 국사를 구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간과 덕기가 보필의 직책에 참으로 적합할 뿐만이 아닌데다가 지금 특별히 제수한 것은 국가의 어려움을 위한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빨리 치도를 논하여 당금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5일 기해

상이 침을 맞았다.

 

평안도 강계(江界)·선천(宣川) 등의 지방에 눈이 내렸다.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이익상(李翊相)을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간원이, 이경억·이단석을 체차하라는 것과 박순·조성·최일을 파직하라는 것과 김익렴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중지하였다.

 

3월 26일 경자

예조가 아뢰기를,
"온천에 거둥하실 때 경유하는 일로의 명산과 대천에 대해 어가가 그 지역에서 유숙하는 날 새벽에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향(香)과 축(祝)은 서울에서 내려 보내고 희생은 각 고을로 하여금 올리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장령 권두추(權斗樞)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탑전의 비밀스런 대화 및 아직 비답을 내리지 않은 상소에 대해서는 누설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성상의 의도가 참으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근래 조정의 기강이 엄하지 못해 기밀에 관련된 일들이 반드시 모두 먼저 누설되어 먼 곳이라 하더라도 전파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 폐단이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니 엄히 주의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정원의 신하가 전교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비밀스럽게 해야 할지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일체를 굳게 감춘 채 감히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추밀(樞密)에 참여한 직임이나 이목(耳目)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신하들까지도 끝내 들을 수가 없으며, 심지어는 경악의 유신들이 궐내에 숙직하면서도 조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만일에 물이 젖어드는 것처럼 점차로 참소하는 말이나 간사한 참소의 글이 틈을 타 일어나는데도 언책을 맡아 논계하는 신하들이 혹시라도 때미쳐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 환난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해방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기밀에 관련된 일 외에는 계하한 상소나 차자, 경연에서 주고받은 이야기 등을 모두 굳게 숨기지 말도록 하시어 중외에서도 들어 알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행 판중추 홍명하가 재차 소를 올려 직임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경억이 소를 올려 자책하고 사직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치화가 재차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빨리 나와 공무를 수행하여 위아래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하라고 답하였다.

 

3월 27일 신축

이숙달(李叔達)을 지평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우윤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수찬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승지 추천 단자를 정청(政廳)에 내리고 이르기를,
"새로 당상이 된 사람이 하나뿐만이 아닌데 이정(李程)만 의망에 넣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회계하기를,
"이정 외에 또 최일(崔逸)이 있었습니다만, 간원이 파직하라는 논계를 막 멈추었으므로 은대(銀臺)의 청선(淸選)에 가벼이 의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자, 답하기를,
"최일은 금고당하는 벌을 받은 적이 없다. 근래 정목(政目)간에 온당하지 못한 점이 많았지만 한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 일을 보니 매우 놀랍다.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고 망단자는 다시 써서 들이라."
하였다. 이조가 최일을 추가해서 의망하여 들이자 낙점하고, 또 하교하기를,
"고산 찰방(高山察訪) 조성(趙䃏)을 서울의 직임에 제수하고 그 자리를 이조 정랑 홍만용(洪萬容)으로 대신케 하라. 남이성(南二星)은 어천 찰방(魚川察訪)에 제수하라."
하였다. 의망할 때 만용 등이 최일은 의망에 넣을 자격이 못 된다고 난색을 표명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다.

 

대사간 강백년 등이 아뢰기를,
"삼가 정원에 내리신 교지를 보니, 말뜻이 매우 엄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조의 낭관을 서북의 마관(馬官)으로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 있었으므로 신들은 놀라움과 의혹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하교하신 가운데 인사 행정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셨는데, 신들이 어떤 일이 그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승지의 의망은 본디 관례에 따른 정사의 체통이니, 그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전조의 낭관 두 사람이 일시에 모두 변방의 역참 관원으로 제수되었으니, 정사의 체통으로 비추어 볼 때 화평의 도리에 어긋납니다. 홍만영 등을 특별히 찰방으로 제수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권두추가, 홍만영 등을 마관에 제수한 명을 도로 거두라고 아뢰고, 또 승지 최일을 탄핵하기를,
"승정원의 선임은 상의 곁에 있는 직책이므로 참으로 적임자가 아니면 결코 함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최일이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적에 엄한 위엄에 두려워서 일을 회피하였는데, 그 작태는 말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대간의 논계가 거듭 제기되어 탄핵한 소의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 취할 점이 있기에 갑자기 승지에 특별히 의망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까? 사람에게 벼슬을 줄 때 대중의 의견과 함께 해야 한다는 도리로 볼 때 이와 같이 해서는 아니됩니다. 승지 최일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엄한 비답을 내려 꾸짖었다.

 

우의정 정치화가 세 번째 소를 올려 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왜 이토록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이때의 국사를 생각해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공무를 수행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예조 판서 홍중보가 자신의 허물을 거론하면서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몸가짐을 잘못하여 죄가 산처럼 쌓였으므로 교외에 나가 있으면서 용납할 곳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서용하라는 명이 갑자기 내렸고 죄를 진 신에게 곧바로 예조의 장관과 의금부의 임무를 다시 지워주셨으므로 신은 정말 놀랍고 황공하여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대간의 탄핵한 글 가운데 이른바 북로(北路)의 공문(公文)이라는 말은 신 역시 괴이한 일로서 그 이유를 몰랐었는데, 비국에서 가져온 뒤에야 비로소 온천에 거둥하실 때 진중(陣中)에서 만들어 준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개 그때 행궁의 근처에다 복병을 두어 병기를 가지고 왕래하는 사람을 일체 금지하였기 때문에 동료와 같이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놈이 그대로 놔두었다가 행낭에 넣고 북로로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 날짜를 상고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일로 신을 논핵한다면 신은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북쪽에 사냥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 주었다고 신의 죄목을 삼았으니, 이는 모두가 신이 평소 조정의 동료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양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장령 권두추가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엄한 비답을 받아보니, 크게 견책하셨는가 하면 심지어는 동료들에게 명예를 구하고 임금을 견제하려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사대부의 부끄러운 행실이고 신하로서 큰 죄입니다. 신이 이미 이러한 이름을 지녔는데 무슨 얼굴로 다시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일을 회피하려는 한 사람을 논핵하다가 이처럼 우레와 같은 위엄을 촉발시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하께서는 과연 최일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없는 자라고 여기십니까? 일을 회피한 흔적이 뚜렷이 있는데 어떻게 목구멍과 혀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왕명 출납의 책임을 맡기를 바랄 수 있단 말입니까. 탄핵한 글에 먹물이 채 마르지 않았고 사람들의 기대에도 차지 않는데 갑자기 특별히 의망하라고 명하셨으니, 정사의 체통에 크게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부득불 체차해야 한다고 논핵할 수밖에 없었는데, 윤허하지 않으실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실정에 맞지 않는 비답을 내리셨으니, 이는 모두가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대각에 있으면서 일에 따라 잘 규계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소치입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피혐한 말을 보건대 정말 가소롭다. 내가 이른바 견제하려 한다는 말로 도리어 막고 억누른다는 말을 만들어 은연중 의도를 써서 마치 동료 간에 서로 따지는 일처럼 하였는데, 이게 과연 곧디곧은 기풍에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내 이해가 안 간다. 아, 당류를 비호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심해가고 있다는 것을 너의 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너와 같은 무리는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마는, 잠시 동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월 29일 계묘

전라도 담양 지역에 눈처럼 서리가 많이 내렸고 싸라기눈도 내렸다.

 

정원이 아뢰기를,
"듣자니, 전 우의정 허적이 받은 명부(命符)를 지금 올려보내야 하는데, 집안에 하인을 시켜 바칠 수도 없고 또 감영으로 보낼 수도 없어서 일이 매우 난처하다고 합니다. 명부를 되돌려보낼 때에 선전관으로 하여금 가서 전하도록 하였으니, 지금 역시 그 예에 따라 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에 따라 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직명을 띤 채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지평 이숙달(李叔達)이 권두추를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당파를 비호하는 사람을 그대로 대각에 두어 그 풍조를 키울 수 없다. 체차하라."
하니, 승정원이 아뢰기를,
"대각의 처치를 공의에 한결같이 맡긴 것은 그 의도가 있는 것인데, 문득 기를 꺾고서 특명으로 체직시키시니,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데다가 뒤 폐단에 관계됩니다. 장령 권두추를 특별히 체차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이숙달이 처치를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체차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3월 30일 갑진

정원이 아뢰기를,
"온천 거둥이 점점 다가오는데, 동부승지 최일(崔逸)을 아직도 대간이 논계하는 중이라서 궁전을 지키는 문제와 어가를 호위하는 문제를 모두 품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우선 체직시키라고 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판중추부사 정태화·홍명하에게 유시하였다.
"이번 거둥할 날짜가 열흘 밖에 안 남았는데 공무를 집행하고 있는 대신이 없으므로 어가의 수행과 서울에 머물러 지키는 일을 모두 품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의 체모에 있어 온당하지 못하다. 경들은 성밖에 물러가 있어서는 안 되니, 빨리 들어와서 모든 일을 의논해 정할 수 있도록 하라."
하고, 또 우의정 정치화에게 유시하기를,
"거둥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경은 한결같이 굳이 사양만 해서는 안 된다. 사양하지 말고 빨리 공무를 보라."
하였다.

 

행 판중추 홍명하가 소를 올려 병이 있다며 사직하였는데, 상이,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고 답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인피하고 여러 날 들어가 있자, 상이 패초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하교를 보고 황공하고 두려워서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에게 죄가 있으므로 감히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스스로 열거하겠습니다. 대체로 당상의 신성한 자리를 새로 의망할 때에 반드시 여러 당상이 익숙히 논의하여 하는데, 이는 정사의 체통을 중히 하는 것입니다. 오늘 승지를 의망할 때에 안진과 이정을 새로 의망하였는데, 안진은 당상에 오른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판서가 늘 ‘해유(解由)에 구애를 받아 의망하지 못한다.’라고 말해 오던 중 오늘 해유가 도착하였으며, 이정은 일찍이 삼사의 차관을 지냈으므로 그가 당하관으로 있을 적에 이미 승지에 여러 차례 의망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단독으로 인사 행정을 하면서도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고 모두 판서들에게 알려 물어보고 나서 의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일에 있어서는 이미 일찍이 차관을 거친 사람에게 비유할 수 없는데다가 새로 막 당상에 올랐으니, 신들이 인사 행정을 단독으로 하는 날에 갑자기 승지에다 의망한다는 것은 정사의 체모로 볼 때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간의 논핵이 막 중지되어 탄핵한 글의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아서 더욱 가벼이 의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의망의 대상으로 거론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는 사실 신들의 죄이지 본디 낭관이 막아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낭관을 이 일로 인해 외지의 관원으로 특별히 제수하라고 명하셨으니, 신이 어찌 태연히 있으면서 요행히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책을 삭탈하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도승지 이경억이 소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들면서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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