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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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참판 조복양이 재차 소를 올려 죄를 주라고 청하면서 사직하니, 상이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죄를 받고 안 받고는, 스스로 청한다고 죄를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청한다고 죄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속히 나와 도목 정사를 열라."

 

장선징(張善澂)을 도승지로, 이정(李程)을 승지로,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홍주삼(洪桂三)을 부수찬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정치화가 네 차례 소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런 때에 대신이 한결같이 인피만 하고 들어가서는 아니되니, 굳이 사양하지 말고 빨리 사양하는 소를 그만 올리고 속히 나와 치도를 논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지평 이숙달이, 장령 권두추를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일 병오

대사헌 정지화가 인피하기를,
"본부의 논계는 대체로 대신에게 죄를 주자고 청한 것인데, 신의 집안 형인 정태화가 가장 심하게 배척을 받았으므로 신이 감히 가타부타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체차되었다.

 

전 집의 김익렴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그의 공초에,
"신이 춘방(春坊)에 숙직하는 밤에 승지 김우석·이익은 정원에서 숙직하면서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요구하였기 때문에 신이 하번인 설서와 같이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번은 즉시 낭청으로 가고 신은 두 승지와 같이 방에 앉아 있었는데, 이는 합계가 제기되려고 할 때입니다.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하다가 합계의 논의에 대해 언급했더니, 우석이 새로 수정한 일기를 펴놓고 신하들을 인견하여 이야기를 나눈 대목을 읽었습니다. 신이 영상이 아뢴 말을 듣고 이익에게 ‘앞으로 합계는 사세상 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러한 의리로 탑전에서 자세히 아뢴 다음에 논계해야 옳을 것 같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위아래가 막혀 걱정스러운 일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였더니, 이익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대각에 들어가면 필시 잘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대간의 직책은 임의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누가 대각에 들어가든지 자세히 살펴서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이어서 일어나 나왔습니다. 그뒤 인견할 때 합계의 논의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성상께서 묻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 말씀드렸었습니다. 이번에 일기의 일로 이미 엄한 문책을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숨기겠습니까. 한 방 안에서 글 읽는 것을 직접 들었고 또 말을 주고받았으니 사실 목격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마는, 이미 손수 그 책을 펼쳐보지 않았고 보면 인피한 말에 듣기만 하였다고 언급하였던 것은 그날 밤 실지의 상황입니다.
그때 비록 일기 가운데의 이야기들을 알았으나 이후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던 것은, 막중한 의논을 감히 사적으로 들은 것을 가지고 가볍게 발의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이후가 한 말이 이 한 건만이 아니고 보면 사세상 간통으로 정원에 모두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석주는 내막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신을 너무나 각박하게 논핵하였으니, 이게 신이 매우 억울해 하고 몹시 통분해 하는 점입니다. 대체로 이 말이 정원에서 나왔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아는 바인데, 이제 와서 승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신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처음 사헌부의 직책에 제수되었을 때 승지에게 들은 것으로 한두 동료들에게 말하였는데, 그때에 어떻게 이러한 사실 조사가 있을 줄을 미리 알아 우석과 이익이 숙직하였을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였겠습니까? 신이 이익을 보고 이 일을 말한 것도 석주가 상소하기 전이었고 보면 신이 또한 어떻게 석주가 소를 올려 이 일을 논할 줄을 미리 알아 그들이 숙직할 때 일기를 보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이익에게 하였겠습니까? 신이 하옥된 그 다음 날 이익과 우석이 신에게 재삼 간곡히 말하면서 공초의 초안을 고쳐 달라고 청하면서도 여전히 ‘그들이 숙직했을 때 과연 들은 바가 있다는 것으로 써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도가 비록 확실히 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있었으나 그 실상의 대의는 역시 자연히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이익 등이 또 ‘당초 일기는 해방 승지 이원정이 독촉해 받아들여 방 가운데다 두었다.’고 하였는데, 이익 등이 왜 이러한 일을 성상께서 물으실 때 대답하지 않고 신의 공초에서 말하게 하려 한단 말입니까?
대체로 정원일기는 으레 본원의 문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니, 그 가운데 기록된 이야기는 직접 정원에 가서 승지와 접촉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절친하게 지낸 사람은 이익과 우석밖에 없는데 신이 다른 곳에서 듣고 친우에게 들었다고 미룬다는 것은 인정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의금부에 하교하기를,
"이 공초를 보니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김우석·이익 등을 똑같이 잡아다 문초한 뒤에 여쭈어 처리하라."
하고는, 전 승지 김우석과 이익을 의금부에 하옥하였다. 우석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정월 25일 밤에 신이 이익과 같이 정원에 숙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시켜 춘방 상하번이 누구인가 물어보고 나서 그들을 보자고 하였더니, 필선 김익렴과 설서 윤지선이 왔습니다. 신이 이익과 같이 등불 밑에 앉아 판부(判付)된 공사 문건을 쓰면서 한담설화를 나누고 파하였으나, 일기에 대해서는 원래 가져다 보지도 않았고 언급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익렴의 공초 가운데 신이 읽을 때에 들었다고 말하였으니 익렴이 무엇을 근거로 이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장황하게 거짓으로 꾸며 마치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합계의 일에 대해 문답하면서 일부러 펼쳐 읽어 그로 하여금 듣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의 의도를 더욱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승지가 일기를 가져다 보는 것은 원래 으레 있는 일입니다. 만약 가져다 본 일이 있었다면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지마는 어떻게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이익은 익렴과 시종 나란히 앉아 있었으며 윤지선은 먼저 나가고 익렴 역시 뒤따라 나갔습니다. 신이 만약 일기를 펼쳐 읽었다면 같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들었을 것입니다. 어찌 익렴만 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정원은 많은 관원이 있는 곳이니 그때 과연 일기를 상고한 일이 있었다면 숙직한 낭청이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사대부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당초에 익렴이 일기를 보았다고 친지에게 말을 전했기 때문에 이후가 이를 가지고 증거를 삼아 영상에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기하였다 합니다. 익렴이 어찌 떠도는 말로 이의를 제기하여 인피하였겠습니까. 그뒤 익렴이 인피한 말 가운데 ‘외간에 떠도는 말은 이미 귀로 직접 들은 말이 아니니 믿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으며, 또 ‘처음에는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가 이 말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심스러웠고 매우 놀랐다.’고 하더니, 김석주가 소를 올려 그가 처음에는 증거를 대다가 결국 변한 상태에 대해 배척하자 그가 인피하는 말에 ‘마침 정원에 갔다가 일기 가운데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였고 또 ‘비록 사대부 사이에서 사적으로 듣기는 하였으나 이미 귀로 직접 들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고 보면 신이 이른바 믿기가 어렵다고 한 말은 실로 실지의 상황이다.’고 하면서 세 차례나 인피한 말이 마디마디가 서로 어긋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신이 읽을 때에 들었다고 핑계를 대었는데, 그가 만약 읽을 때에 직접 들었다면 어떻게 떠도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감히 귀로 직접 듣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엊그제 갇혀 있을 때 들었는데, 익렴이 이후와 뜻이 엇갈린 뒤로 전후로 다른 말을 한 것을 엄폐하고자 이익을 찾아가 자기와 신 그리고 이익이 서로 일기를 보았다고 하였답니다. 그뒤 이익이 신에게 보낸 서신에 ‘방금 김익렴이 편지를 보내 물었는데 그 말뜻을 보니 또 전에 한 말을 바꾸어 그대로 함답(緘答)에서 증거로 내세운 듯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매우 이상히 여겨 편지로 익렴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매우 어렵다면서 ‘사세상 일기를 수납할 때에 우연히 도착하여 우연히 들었다고 해야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과연 일기를 읽을 때에 들었다면 사실대로 바로 대답할 일이지 하필이면 매우 어렵다고 말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때 합계가 제기되리라는 이유 때문에 일기를 꺼내 문답하는 말까지 있었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일기를 수납할 때 우연히 도착하여 우연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익렴이 하옥된 뒤에 이익이 찾아가서 위문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익렴이 또 말을 바꾸어 ‘그때 서로 일기를 가져다 본 뒤에 서리(書吏)에게 도로 주었다.’고 하자, 이익이 ‘그대는 왜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가? 그렇다면 그 서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고 하니, 익렴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익렴에게 ‘일기 가운데 이야기를 만약 그보다 앞서 들었다면 승정원의 사람들이 오래 전에 가져다 보았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대가 오기를 기다려 비로소 열람하였겠는가? 그대가 필시 들은 곳이 있을 것인데 도리어 승정원으로 증거를 대려고 한 것은 무슨 의도인가?’ 하니, 익렴이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익렴이 도리어 ‘신이 재삼 간청하여 반드시 정원에 도착하여 들었다고 공초 가운데 쓰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정원의 물음에 대해 이미 익렴과 서로 만났을 때 일기를 가져다 본 일이 없다고 사실대로 대답을 하였고 보면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비록 오척의 동자라도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몸가짐을 보잘것없이 하여 사람의 증인이 되었으나 엄히 물으시므로 곡절을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익이 공초하기를,
"신이 김우석과 같이 승정원에서 숙직하면서 김익렴과 윤지선을 불러다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신은 우석과 같이 등불 밑에 앉아 각각 판부된 공사 문건을 쓰면서 한담설화를 나눈 이외에는 원래 일기를 상고해 본 일이 없었고 또 언급한 일도 없었습니다. 익렴과 이후가 이의를 제기한 뒤로 익렴이 신에게 와서 갑자기 일기를 가져다 본 일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대가 어느 때에 가져다 보았는가?’ 하고 묻자, 익렴이 ‘김우석과 신이 숙직할 때의 일이다.’고 대답하기에 신이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그때 판부된 공사 문건을 쓸 일이 많아서 그대가 가져다 보았으나 모른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문답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뒤 우석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역시 원래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였기 때문에 대궐에서 하문하실 때에 사실대로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그때 어떻게 오늘날 질문할 일이 있을 것을 알아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미리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당초에 일기의 이야기를 익렴이 어떤 사람에게 들었기에 그 말이 나온 곳을 숨기고자 거짓으로 정원에 가서 보았다고 한단 말입니까. 또 이 말을 들은 동료가 그때 승지에게 질문을 할 경우 그가 말한 것과 서로 틀릴까 봐서 신을 찾아와 허튼 말을 하여 시험해 놓고 후일 증거를 댈 소지로 삼으려는 심산이었으므로 신이 대답한 말을 듣고 말없이 일어나 가버리고 나서 다시 신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는 말로 두세 명의 친구들에게 말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익렴이 엊그제 양주에 갔을 때에 신이 대궐에서 대답한 것을 써서 익렴에게 알렸는데, 익렴이 집에 돌아온 뒤에 신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에 ‘그날 언제 일기를 상고한 적이 있었는가? 김우석이 일기를 읽을 때에 범연히 듣기만 하고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하였고, 또 ‘승지가 원래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나 역시 상고해 본 일이 없으며 우연히 들었다.’ 하였으며, 또 ‘이튿날 일기가 수정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이유로 주서를 추고하자고 청하였는데, 일기를 열람한 것은 필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즉시 와주라고 청하였는데, 친구가 하옥되었으니 만큼 한번 위문하는 것은 본디 인정상 아니할 수 없는 일이고 익렴이 또 보자고 청하였기 때문에 하옥된 뒤에 신이 문밖에 가서 위문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익렴이 공초를 내보이면서 ‘우석이 장정하지 않은 일기를 가지고 등불을 대하여 보고 있었다.’라고 말하기에 신이 익렴에게 ‘그 때 김 승지가 일기를 본 일이 원래 없었으며, 또 일기를 수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서를 추고하자고 하였던 주서는 예방 승지 이원정이었는데, 김 승지라고 하였으니, 이 역시 사실과 틀리고 말았다. 그대는 어찌하여 어떤 사람에게 들었다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거짓으로 꾸며 말하는가?’ 하였습니다. 대체로 그날 익렴이 보여준 공초에 다만 우석이 등불을 마주 대하여 보았다는 것만 말하고 신은 전혀 거론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뜻에 신이 말하면 혹시라도 공론이 될 것으로 여겨 그때의 곡절을 자세히 말하면서 깊이 책망하였는데 익렴이 부끄러운 빛이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원에서 들었다는 말을 이미 인피한 내용 가운데 언급하였기 때문에 지금 와서 말을 바꾸기가 어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신이, 익렴이 의도적으로 한 흔적과 우석이 무함을 당한 실상을 깊이 알고 있으므로 찾아와 물어본 친구가 있을 경우에는 전후의 실태를 감히 숨기지 않고 있으므로 익렴이 이 때문에 마지 않고 하다가 또 전에 한 말을 바꾸었고 심지어는 공초를 여러 차례 고쳐 가면서 꼭 신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지금 익렴이 공초 중에 한 말을 보면 처음에는 마치 합계가 제기될 무렵에 일기에 대해 언급된 것처럼 하였고 이어서 우석이 꺼내 읽었다고 하여 현혹시키려고 꾀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신과 우석이 재삼 간청하여 공초를 다시 쓰게 한 것처럼 하였는데, 신과 우석이 그전에 상께서 하문하실 때에 익렴이 일기를 가져다 보지 않았다고 대답하였고 보면 지금 와서 도리어 이 말로 다시 고쳐 쓰라고 할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신이 익렴에게 ‘그대가 반드시 먼저 들었을 것인데, 그대는 누구에게 들었는가?’ 하고 물으니, 익렴이 ‘이 말이 외간에 떠돌아다니기에 들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왜 외간에서 들은 것을 바로 고하지 않고 도리어 정원에게로 떠넘기려고 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익렴이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익렴이 인피한 말로 보면 전후로 말을 바꾸어 마치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이 하니, 종종 변환하는 말에서 스스로 그 정상을 엄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몸가짐을 보잘것없이 하여 뜻밖에 무함을 받아 조정 벼슬아치들 사이에 치욕의 일이 있게 되었으므로 정말 하나하나 그와 대하여 변론하고 싶지 않으나 역시 감히 숨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 사이의 곡절은 이러한 데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우석 등에게 다시 물어볼 일이 없으니 지금 잠시 방면하라. 이 공초의 내용을 보니 익렴이 한 짓이 하나하나 감추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써 다시 공초를 받아 아뢰라."
하였다. 익렴이 다시 공초하기를,
"우석과 이익이 공초한 말은 모두가 거짓말로 꾸며서 성상을 속이는 것이니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익이 그날 밤 신을 오라고 할 때 보낸 편지에 ‘지금 의논할 일이 있는데 만나서 자세히 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거기에 간 뒤에 이익 등이 신과 상대하여 합계의 일에 대해 매우 명백하게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엊그제 이익이 어떤 사람에게 ‘그날 밤에 과연 합계의 일을 논했었다.’고 말하기에 내가 이익에게 농담으로 ‘그대가 입시하면 필시 잘 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전혀 이런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굳게 숨기고 흔적을 가리었으니, 전후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마치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임금에게 어떻게 감히 이와 같이 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석이 등불 밑에서 일기를 펼쳐 읽을 때 손가락으로 글줄을 짚어가면서 읽었으며, 이익 역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심지어 ‘합계할 때 아울러 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해 놓고 이제 와서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여 굳게 숨기고 있으니, 하나하나 간교한 그 정상을 부득불 통렬히 분변해야겠습니다. 신이 막 사헌부의 관직에 제수되었을 때에 우석 등에게 들었다고 한두 친구들에게 말하였는데 그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다.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후 역시 신이 정원에서 들은 연유를 알고 석상에서 말하였던 것인데, 이후가 그때 어찌 신을 위하여 계교를 부릴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신 역시 정원에서 들었다고 이후에게 바로 말하였는데, 신이 그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줄을 미리 알고 생각하여 꾸밀 리가 있겠습니까. 이후가 한 말이 한 가지 뿐만이 아니고 보면 신이 떠도는 말이라고 대답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다만 그때 우석과 이익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우석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한 것과 이익을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신이 차마 곧바로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친구에게 사정을 두어 사실을 곧이 곧대로 말하지 않은 것으로 신의 죄목을 삼는다면 물론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인피한 내용 가운데 근래에 떠도는 말이 이왕 귀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은 여러 말을 다 싸잡아 말한 것뿐만이 아니며, 귀로 듣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대신이 아뢸 때에 신이 귀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석과 이익 등이 이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억지로 조종하고 있으니, 왜 이다지도 심하게 죄인단 말입니까.
신이 이익을 찾아가 보았을 때에 이익이 먼저 신과 이후가 문답한 일을 묻기에 신이 ‘그날 밤 그대와 우석이 숙직할 때에 우석이 일기를 가져다 보아 내가 들었기 때문에 이후에게 그 일을 숨기지 않았다.’고 하였을 뿐입니다. 무슨 허튼 말을 하여 시험해 보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이익이 장황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신이 돌아가 이익이 한 말을 한두 친구에게 말하였다는 것은 원래 맹랑한 말입니다. 신이 함문하라는 분부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양주에서 돌아오는 날에 이익이 먼저 편지를 보냈고 신 역시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익이 늘 신이 일기를 보았다고 하라고 권하기에 신이 ‘그날 언제 내가 일기를 보았는가? 우석이 읽을 때에 들었다.’고 답하였습니다. 만약 피차의 서찰을 상고해 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우석이 또 신에게 보낸 서찰에 ‘잘 말하여 점점 확대되지 않도록 하였으면 한다.’고 하였기에 신이 ‘내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할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기란 어렵다.’고 답하였습니다. 옥문(獄門)에서 서로 마주 대하였을 때에는 이익이 먼저 신에게 ‘그 말이 어찌 이처럼 퍼졌는가?’ 하기에 신이 큰소리로 질책하기를 ‘그대들은 이해에 마음이 움직여 지금까지 굳게 숨기고 있는데 결코 사대부의 마음이 아니다. 상께서 하문하실 때에 어째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는가?’ 하니, 이익이 말하기를 ‘나는 정신이 어리둥절하여 사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꾸짖기를 ‘내가 그대를 석주가 소를 올리기 전에 보았는데 어찌하여 석주의 소가 나온 뒤에 보았다고 대답하였는가?’ 하니, 이익이 웃으면서 ‘선후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또 석주에게 ‘그대가 손으로 일기를 뒤적이며 입으로 그 이야기를 읽어놓고 지금 왜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그날 밤에 내가 어떤 사람이 수정하였느냐고 묻자 그대가 이제가 수정하였다고 대답해 놓고 지금은 어찌하여 모른다고 말하는가?’ 하였더니,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신이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간교하게 빚어낸 것이 어쩌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이 자세하게 말하고 배척하니, 우석이 말하기를 ‘그때의 일은 말하지 말고 공초한 것을 고치는 것을 의논하는 게 좋을 듯하다.’ 하고, 이익은 공초한 것을 보자고 재삼 간청하였으므로 신이 꺼내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익이 펼쳐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쓸 수가 없으니 고쳐야 한다.’고 하고는 두 사람이 사람들을 물리치고 작은 소리로 말하기를 ‘그대와 나처럼 친절한 사이에 말이 서로 틀리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어찌 대간의 체통에 근거하여 거듭 사체를 손상한다고 대답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임금께서 물으시는데 어떻게 감히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익이 말하기를 ‘그대가 세자를 책봉하는 날 정원에 갔을 때에 이원정이 예방 승지로 일기를 거두어 모으고 있었으니 그대가 그날 보았다고 대답하면 좋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어찌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익이 또 말하기를 ‘엊그제 이제가 나를 보고 그때 일기는 수정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그대가 그날 밤에 보았다고 말한다면 결국 크게 패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그날 분명히 정원에 있을 때 그대들이 상고해 보았는데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익이 처음에 22일 책봉할 때 와서 보고 신에게 말씀드리라고 권하였고 또 25일에 일기를 원래 수정하지 않았다는 말로 신을 위협하였는데, 이게 어찌 사람으로서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우석이 사람을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더니 스스로 말을 만들면서 고치자고 간청하였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전혀 고치자고 청한 일이 없다고 대답하고 있으니 그들의 무상함이란 차마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옥문에서 사적으로 부탁한 것이 죄를 면하기 위한 꾀에 불과한 것이었고 보면 이 한 건만 가지고도 임금을 속인 실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이 처음 집의에 제수되었을 때에 우석과 이익이 숙직할 때에 이 말을 들었다는 사유를 이민서와 원만리 등에게 확실히 말하였으며, 신이 하옥된 뒤에 원만리 역시 ‘이익 등이 숙직할 때 들은 말이라고 그때 들었으니 비록 나를 공초 가운데 증인으로 내세워도 나는 사양하지 않겠다.’ 하고 이어서 이러한 뜻으로 어떤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지금 신의 손에 있으니 당장에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판결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뒤에 한재로 인하여 죄수를 관대하게 처결하면서 관작을 삭탈하고 방면하였다. 익렴 등이 하옥되어 공초를 낸 뒤에 시비가 일치하지 않았다. 혹은 이익이 강개하고 지조가 있어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의 평생 동안 한 일을 고찰해 볼 때 결코 속이거나 무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혹은 익렴이 비록 경솔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지만 대간의 직책에 제수되기 전에 이미 한두 동료들에게 언급했고 보면 인피한 말이 비록 모순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그의 죄안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하는 등 서로가 두둔하면서 말들이 많았는데, 그 사이의 사실은 외인들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대부들 사이에 서로가 핑계대며 사실을 분변하는 일은 사실 국조 이래로 있지 않았던 것으로서 벼슬아치들의 수치가 여기에서 심해졌다.

 

4월 3일 정미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숙달(李叔達)을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이정영(李正英)을 병조 참판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지평으로, 오정위(吳挺緯)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지평 홍주국이, 마관으로 임명한 명을 도로 거두자는 논의에 혐의가 있어 감히 가타부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홍주국은 즉 홍만용의 숙부이다.

 

함경도 유생 주여두(朱汝斗) 등이 소를 올려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정치화가 출사하니,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꿈에도 전혀 생각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특별히 제수하시니,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기에 누차 사정을 말씀드렸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고, 온천에 거둥하실 날짜도 이미 바싹 다가왔기 때문에 부득이 나와서 사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이런 임무를 신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더구나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잇따라 정승의 자리에 들어갔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사람을 쓰는 도리로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원근에서 듣고 필시 조정을 경시할 것이니, 신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논할 겨를도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재간과 덕이 이 직임에 정말 합당하다. 내가 특별히 제수한 것은 우연한 뜻이 아닌데 경은 왜 이토록 지나치게 혐의하는가?"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이번 거둥하실 때에 대신 중에 누가 어가를 수행하고 누가 유도(留都)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영부사와 정 판부사는 유도하고 경과 홍 판부사는 어가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근일에 일어난 일은 애초 신의 형에서 말미암았으므로 신이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이왕 소회가 있으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익렴을 잡아다 문초하라고 하신 명은 이미 온당함을 잃었거니와 김우석과 이익도 모두 하옥되었습니다. 시비와 곡직은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대각의 신하와 측근의 신하가 일시에 의금부에서 대질심문을 벌였으니, 나라의 체통을 크게 손상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익렴이 과연 일기를 보았다면 사실대로 대답했어야 되는데 관례에 따라 고증했다고 핑계대면서 끝내 바른 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벌금을 내는 욕이 상의 몸에 돌아갔으니 만약 그 허물을 따진다면 대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대각의 의논이 비록 과격하였으나 일을 말하다가 전후로 잇따라 귀양갔으니, 조정의 조치가 잘못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대신 역시 어떻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최일은 참판을 거치지 않았고 판서도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곧바로 승지에 의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을 등용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당상에게 달려 있지 낭청은 원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직에 임명하시니 사람들이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4월 4일 무신

공조 참판 임의백이 죽었다.

 

4월 5일 기유

김만중(金萬重)을 지평으로, 이준구(李俊耉)를 예조 참의로, 이단하(李端夏)를 부교리로, 정재숭(鄭載嵩)을 문학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부제학으로, 이세장(李世長)을 사서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거둥하신 뒤에는 왕세자와 유도하는 백관이 군복차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왕세자는 관례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서연(書筵)의 옷차림으로 신료들을 접견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4월 6일 경술

상이 행 판중추 정태화와 홍명하에게 사관을 보내어 들어오라고 전유하였다. 태화가 소를 올려 병이 중한 실태를 말하고 이어 유도한 대신의 반열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해 주고 본직 및 겸직을 모두 체차해 주라고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병이 비록 이와 같은 상태이기는 하나 유도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리야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홍명하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지금 자전을 모시고 또 온천에 거둥하시게 되었는데 구구한 우려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사경에 놓였으나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병을 견디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수행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궐로 다시 들어간다는 희망은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의 좁은 성질은 끝내 고치기 어려우며 필부의 뜻은 빼앗길 수 없기에 성상의 분부를 따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고, 체직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저번에 전유할 때에 다 말하였다. 굳이 사양하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사간 여성제는, 추함(推緘)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지평 김만중은 황연에 대한 의논에 혐의가 있어서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차되었다. 김만중은 김만기의 아우이다.

 

밤에 유성이 직녀 성좌의 위에서 나왔다. 길이가 10여 척이나 되었고 소리가 났으며 흰색이었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4월 7일 신해

달이 동정(東井) 성좌로 들어갔다.

 

4월 8일 임자

박세견(朴世堅)을 사간으로, 이흥발(李興浡)을 장령으로, 이세장(李世長)을 지평으로, 유명윤(兪命胤)을 이조 정랑으로, 여성제(呂聖齊)를 응교로, 홍만형(洪萬衡)을 사서로 삼았다.

 

사간 박세견이, 산의 송사 문제로 남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간쟁한 일곱 신하들이 논한 바는 비록 과격한 듯하지만 진실로 공공의 의논이었는데, 일시에 귀양보내니 분위기가 쓸쓸합니다. 성스런 조정의 지나친 조치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신은 그지없이 딱하고 답답합니다. 지금 절기가 초여름에 이르렀는데 서리가 눈오듯 내리니, 절기의 차례가 어긋났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자전을 모시고 온천으로 거둥하려 하시는데, 이는 진실로 효성의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만약 이때에 중화(中和)의 덕을 크게 펴시어 용서해 주는 은전을 베푸신다면 은택이 미치는 곳마다 중외가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옛날 당 헌종(唐憲宗) 때에 유우석(劉禹錫)이 파주(播州)로 좌천되게 되었는데, 파주는 멀고 풍토가 나쁜 곳이었습니다. 배도(裵度)가 그에게 늙은 어미가 있는 것을 딱하게 여겨 헌종에게 말하니 결국 연주(連州)로 바꾸어 임명했습니다. 우석은 왕숙문(王叔文)의 당으로 지은 죄가 매우 큰데도 헌종이 배도의 말을 듣고 오히려 측은히 여겨 따라 주었습니다. 지금 귀양간 여러 신하들도 대부분 늙은 어버이가 있는데 신이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어찌 헌종보다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성에서 나왔지만 쉽게 풀어주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경석이 또 누누이 진달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조용히 생각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경석이 또 아뢰기를,
"신이 여러 차례 전형의 관원이 되었기 때문에 인사 행정의 체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승지에 의망하고 안 하고는 본디 낭관이 간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일이 의망되지 못한 것은 인사 행정의 체통으로 보아 당연한 것인데 갑자기 낭관들이 이 때문에 외직에 임명되었으니,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엊그제 우상도 이 일에 대해 말하였으나 분란 속에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경이 또 이렇게 말하니, 홍만용과 남이성을 마관(馬官)으로 제수한 명을 도로 거두겠다."
하였다.

 

4월 9일 계축

이규진(李奎鎭)을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사간으로, 신정(申晸)을 검열로 삼았다.

 

우윤 이상진이 소를 올려 병이 있다는 이유로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황연이 올린 소를 보건대, 유신을 극도로 비방하여 화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불측한데 도리어 신의 이름을 거론하여 그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밖에서 병으로 폐인이 된 몸에 불과한데 무슨 용납한다느니 용납하지 못한다느니 하고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죄안의 가운데다 죽 세어 넣어 하나의 구실거리를 더 만든단 말입니까. 신은 괴이하게 여기고 또한 매우 부끄럽게 여깁니다.
만약 황연이 한 말대로라면 신이 어떤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였고 어떤 사람에게 어여쁨을 받았으며 신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후세의 공론이 정말 두렵지 어찌 일시만 용납받지 못하겠습니까. 이는 필시 신이 평소 처신을 보잘것없이 하여 초래한 것이고 보면 그 죄 황연과 똑같습니다. 맑은 조정의 견책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사경에 놓여 있으므로 온갖 생각이 모두 사라졌으나 꼬장꼬장한 성질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 신의 몸에 악한 말이 씌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감히 이렇게 함부로 말씀드립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양하지 말고 올라오라고 답하였다.

 

정언 이익상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근래에 대각의 의논이 설사 중도에 지나치더라도 공적인 시비에 불과한 것이니, 전하께서는 오직 용납하고 봐주시어 따를 만하면 따르시고 따를 수 없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어찌 점점 노여움을 옮겨 어느 곳이나 의심하다가 성상의 마음을 조금만 거슬리면 대뜸 억측의 분부를 하신단 말입니까? 무심코 한 일을 일부러 하였다 하고 이치에 맞는 논의를 이름을 구한 것이라며 배척하는 등 미세한 일까지 끄집어내어 자주 실정에 벗어난 분부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남쪽과 북쪽 변방으로 잇따라 귀양을 갔으며 혹은 파직하고 혹은 가두어 벌을 거듭 주신 바람에 전하의 조정이 거의 텅 비어버렸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조의 관리 임명은 한결같이 공론을 따르고 있습니다. 최일은 명망이 본디 가볍고 또 중한 논박을 받았고 보면 승정원에 의망하지 못한 것은 사체나 관례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반드시 억지로 의망에 넣게 하여 끝내 낙점을 하셨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조의 낭관을 외직에 임명하셨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최일에게 취할 점이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 전에 없는 지나친 일을 하신단 말입니까?
장령 권두추는 엄한 위엄을 겁내지 않고 일에 따라 즉시 논하였으니, 그의 기개가 숭상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의 기를 너무나 심하게 꺾어 특별히 체차하기까지 하였으니, 전하께서 대각을 너무나 박하게 대우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다스리는 도구는 오직 상벌에 있으므로 반드시 대중의 의사와 같이 하여 자기 한 사람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엊그제 책봉의 예를 치르고 상을 줄 때 똑같은 일을 하였는데도 상이 다른 경우가 많았습니다. 혹시라도 성상의 마음에 치우치게 사랑하고 미워하여 취사선택을 하셨다면 안팎에서 전하 마음의 얕고 깊은 것을 엿볼까 염려됩니다."
하고, 병이 든 상황에 대하여 아뢰면서 사직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고 그의 직책을 체차하였다.

 

영남의 동래(東萊)·밀양(密陽)·창원(昌原)·칠원(柒原)·웅천(熊川)·연일(延日)·거제(巨濟)·양산(梁山)·장기(長鬐)·언양(彦陽)·울산(蔚山)·경주(慶州)·기장(機張)·대구(大邱)·김해(金海)·고성(固城)·합천(陜川) 등의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집들이 흔들렸다.

 

4월 10일 갑인

관동의 통천(通川)·흡곡(歙谷)·평강(平康)·금화(金化) 등의 지역에 겨울처럼 눈이 내렸다.

 

우찬성 송시열이 소를 올리기를,
"신이 일찍이 신의 죄상에 대한 소를 올린 다음 오직 귀양보내는 처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남 사람 황연이 소를 올려 8, 9인의 죄상을 논하면서 신이 우두머리라고 꾸짖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앞에 올린 소에 대한 비답을 때마침 이때에 내리면서 특별히 형벌을 관대하게 하여 봐주셨습니다. 신이 전에 범한 죄를 비록 용서해 주었으나 뒤에 진 죄가 더더욱 큽니다.
대체로 신이 유세철이 소를 올린 뒤로 임금을 무시하고 부도하다는 견책이 일신에게 집중되었으므로 마땅히 입을 세 겹으로 주워 메고 가만히 스스로의 죄를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쪽 청나라의 일에 대해 우려를 견디다 못해 조금 경계를 깨고 말하였다가 결국 큰 죄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말한 바를 궁구해 본다면 모두 사실을 고찰해 낸 것으로서 무함이 아니고 신이 스스로 지은 과실이고 보면 곧 사형을 받더라도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 날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았지만 조정의 분부를 듣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성명께서 특별히 옛 물건이라 하여 다해가는 목숨을 온전히 해주고자 다시 깊은 자비심을 베풀어 억지로 여론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다면 큰 은혜는 비록 망극합니다마는 천한 종적은 갈수록 곤란해지기만 합니다. 직책을 삭탈하고 법대로 죄를 다스리시어 나라 사람들의 말에 사과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전에 올린 상소의 비답에서 다 말하였다. 다시 많은 말을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행궁(行宮)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경은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서 대면하여 말할 수 있도록 한다면 나의 기쁜 마음이 한이 있겠는가. 경은 지극한 소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찬선 송준길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소를 올린 황가가 만일 청색과 황색도 모르는 시골의 비루한 선비로 허튼 말과 욕설을 한 것이라면 신이 웃고 넘겨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렇지 않아 그가 조정의 의논을 환히 알고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너무나도 참혹하게 이리저리 엮었으니, 후일 큰 화의 근본입니다. 이는 신이 지난날 올린 소가 실로 빌미가 된 것이니, 신이 어떻게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임금의 마음이 흔들리고 의혹되어 시비가 전도되었으며 곧은 선비가 다 쫓겨나고 참소하는 무리들이 뜻을 이루었으니 국사가 정말 통곡할 일입니다. 이제부터 신의 종적은 감히 다시 대궐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상소도 다시는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여전히 신의 이름을 조정의 사적에다 두고 계시니,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고, 이어 관작을 삭제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답하면서 빨리 올라오라고 하였다.

 

4월 11일 을묘

상이 대비를 모시고 온양 온천으로 거둥하였다. 이때 비가 내려 사시에 비로소 어가가 출발하였다. 도총관 예조 판서 홍중보, 【겸 판의금.】  부총관 박세모·김여수·영신군 이형·신유·이은상과 병조 판서 김좌명, 참판 이정영, 별운검판윤 오정일, 【겸 지의금.】 낭선군  이우, 익평위 홍득기, 복평군 이인은 미리 보냈다. 호조 판서 김수흥, 【겸 정리사.】  도승지 장선징, 좌승지 민점, 우부승지 심재, 동부승지 이정, 가주서 유상운·윤연, 사관 홍만종·신정, 우의정 정치화, 이조 참판 조복양, 정랑 남이성, 형조 판서 정지화, 대사헌 박장원, 지평 이세장, 대사간 강백년, 정언 윤진, 교리 이유상, 부교리 이단하, 숭선군 이징·낙선군 이숙·복녕군 이유·복창군 이정, 청평위 심익현, 의관 유후성·이동형·윤후익·최유태 및 위장·선전관·병조·도총부·호조·예조·형조의 낭청과 상서원·승문원·통례원·사옹원·상의원·사복시·군기시·사도시·관상감·양의사관(兩醫司官) 중에 한 명이나 두 명이 어가를 수행하였다. 어영 대장 유혁연은 보군 1천 3백 65명과 각 차비군 3백 14명과 별초무사 41명과 별마대 55명과 별파진 20명을 거느리고, 훈련 천총 이두진은 연을 호위하는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마병 별장 김경·이상경 등은 마병 5백 명과 잡색군 1백 74명과 복직군 1백 97명을 거느리고, 금군 별장 이동현 등은 금군 5백 명과 잡색군 45명을 거느리고 전후에서 호위하였다. 유도 대신 영중추부사 이경석, 훈련 대장 이완, 수궁대장 김우명은 숙직과 호위의 일을 모두 지난해의 관례대로 하였다. 이날 저녁에 상이 과천에서 머물렀다.

 

판중추 홍명하가 강변 마을 집에서 나와 길 옆에서 맞이하고 과천까지 뒤따라와 소를 올려 병이 든 상황에 대하여 아뢰니, 상이 관대하게 답하고 이어 본도로 하여금 가마를 지급하여 수행하도록 하였다.

 

함경도 길주 이북 삼수(三水)·갑산(甲山) 등의 지역에 눈이 내렸는데 한 자가 쌓였다.

 

4월 12일 병진

상이 수원에서 머물렀다.

 

4월 13일 정사

상이 진위에서 머물렀다.

 

4월 14일 무오

상이 직산에서 머물렀다. 충청 감사 이민적이 지경에서 맞이하였다.

 

4월 15일 기미

상이 온천 행궁에 머물렀다.

 

4월 16일 경신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상이 우의정 정치화를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전에부터 충청 병사가 머물러 대기하고 있으면 폐단이 있기 때문에 진(鎭)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거느릴 일도 없는데 지금 머물러 대기하고 있으니, 지난해의 예에 따라 진으로 돌아가게 하고 각종 사무를 보는 차사원도 긴요한 업무를 보는 자 이외에는 역시 되돌려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거둥하실 때 차비군을 병조에서 1백 11명으로 나누어 정하였는데, 본도에서 더 정한 인원수가 무려 5백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양식을 싸가지고 왕래하는 폐단이 적지 않으니, 충청 병사 이원로(李元老)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7일 신유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이때에 연일 추워서 사람들이 모두 솜옷을 입었다.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이상(李翔)을 지평으로, 한석(韓奭)을 부산 첨사로 삼았다.

 

4월 18일 임술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행 판중추 홍명하가 뒤따라 행궁의 밖에 와서 소를 올려 그의 병 상태를 말하고 직책을 체차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경이 여기에 왔다는 말을 듣고 내 매우 기뻐하였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 조리하라."

 

4월 19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서리가 내렸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의관 윤후익이 중신을 면전에서 욕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너나없이 놀랐습니다. 이는 모두가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명분이 엄하지 않은 소치인데, 이를 그냥 놔두면 후일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상의 건강이 좋지 않은 이후로 조금 의술을 아는 자는 대부분 연줄을 타고 소개되었는데, 조금만 효과를 보면 자주 은혜를 베풀고 품계가 뛰어올라 금관자나 옥관자가 누구에게나 돌아갔다. 이 때문에 이 무리들이 교만해져 사대부를 마치 자신들의 또래로 보았다. 후익은 경망하고 품행이 좋지 않아 여러 사람이 앉은 좌석에서 중신을 대놓고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이 계사가 있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6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상의 건강이 좋지 않은 이후로 조금 의술을 아는 자는 대부분 연줄을 타고 소개되었는데, 조금만 효과를 보면 자주 은혜를 베풀고 품계가 뛰어올라 금관자나 옥관자가 누구에게나 돌아갔다. 이 때문에 이 무리들이 교만해져 사대부를 마치 자신들의 또래로 보았다. 후익은 경망하고 품행이 좋지 않아 여러 사람이 앉은 좌석에서 중신을 대놓고 모욕을 주었기 때문에 이 계사가 있었던 것이다.

 

4월 20일 갑자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행 지중추 허적이 소를 올려 본직과 겸직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였다.
"나의 뜻은 간곡한데도 경이 이렇게까지 사양하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아, 고인의 이른바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다.’라고 한 말이 과연 이러한 것이란 말인가. 경이 비록 만부득이해서 굳이 사양하였겠으나 끝내 올라오지 않는다면 실로 천리와 인정에 벗어난 일이니, 경은 굳이 사양하지 말고 빨리 와서 나의 소망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라."

 

4월 21일 을축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행 지중추 허적이 올린 소에 대해 비답을 이미 내렸으니, 별도로 부르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빨리 행궁으로 나와 나의 뜻에 부응하라는 뜻으로 승지는 가서 전유하라."
하고, 또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사관을 보내어 올라오라고 타일렀다.

 

평안도 양덕(陽德)·덕천(德川) 등의 지역에 눈이 내렸다.

 

4월 22일 병인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소두산(蘇斗山)을 장령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윤심(尹深)을 수찬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보덕으로 삼았다.

 

도내에 80세 이상된 노인에게 품계를 올려주고 옷감과 음식물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상평청의 곡식을 풀어 의지할 데 없이 빌어먹고 다니는 자들을 구제하였다. 이때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들이 어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축하여 이끌고 떼를 지어 행궁의 밖으로 모여들었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측은히 여겨 이 명을 내린 것이다.

 

4월 23일 정묘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함경도 문천(文川)·고원(高原) 등의 지역에 우박이 내리고 함흥(咸興)에는 우박과 눈이 번갈아 내렸는데, 거의 반 자나 쌓였다.

 

찬선 이유태와 집의 윤선거에게 하유하여 올라오도록 하였다.

 

호군 윤문거가 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상이 약방 제조와 판중추 홍명하를 인견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신은 정태화의 죄와 다름이 없는데, 신만 벌을 면하였으므로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일을 논한 대각의 신하가 일시에 귀양갔으니, 그들이 용서를 받기 전에는 신이 어떻게 스스로 편안히 여겨 조정에 다시 설 수 있겠습니까. 만약 관대한 은전을 시행하여 특별히 용서해 돌아오도록 명하신다면 신과 태화의 마음이 조금은 놓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소에 이 일을 누차 언급하였고 이 영부사도 일찍이 누누이 말하였다. 그러나 나의 마음에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점이 있어서 애써 따라주지 못하였다."
하자,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의 형이 처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신은 이 일에 대해 정말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습니다마는, 대신의 반열에 있으므로 역시 끝끝내 침묵만 지킬 수도 없습니다. 이번 명하의 말은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옛날 선조조(宣祖朝)에 대관 박근원(朴謹元) 등이 선정(先正)신 이이(李珥)를 논핵하자, 선조께서 크게 노하시어 박근원 등을 모두 귀양보냈는데, 그뒤에 이이가, 용서하여 돌아오게 해줄 것을 누차 청하였습니다. 이번 성상의 앞에서 어떻게 감히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멀리한 채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각의 계사가 비록 과격하였으나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것은 사실 성덕(聖德)의 일이 아닙니다. 양사의 합계가 이미 제기된 뒤에 태화의 죄가 한층 더 중해졌으므로 그의 정세가 신에 비해 더욱 위태로왔습니다. 그가 끝내 인피하고 들어가 죄인으로 자처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대간이 만약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신들의 죄를 논한다면 신들은 물론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신들의 죄를 성상에게 떠넘겼다고 하는 데에 있어서는 실로 신들이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임금을 높이고 의리를 밝히자는 의논이었는데 어떻게 이처럼 기를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귀양간 여러 신하들 중에 대부분이 죽음에 다다른 노모가 있으니 또한 매우 측은합니다. 효도로 다스리는 데 있어서 애긍히 여겨 용서해 주는 도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명하가 말씀드린 것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대신을 위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비록 완전히 용서해 주기는 어렵지만 감등하여 내지로 옮겨 주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두 유신도 종적이 불안하여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기타 지난해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도 아울러 하유하여 불러들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유신에게는 이미 사관을 보냈다. 이유태와 윤선거에게도 정원으로 하여금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4일 무진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양사가 귀양간 신하들을 완전히 용서해 주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찬선  송시열, 찬선 송준길, 행지중추 허적이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4월 25일 기사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최관(崔寬)을 지평으로, 신유(申瀏)를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4월 26일 경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행 판중추 홍명하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번에 거둥하신 것은 만부득한 것이었는데, 신기한 샘물의 효과가 전에 비해 더욱 크게 났으니 신민의 경사와 다행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백성을 돌보아주는 정사와 비상한 일은 반드시 전후로 끊임이 없어야 민심을 크게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조성하는 방법은 성인을 존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로부터 제왕들이 순행하면서 도착한 곳마다 성인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게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나라 고사로 말하건대, 성종 대왕께서 영릉에 거둥하시면서 여주에 어가를 멈추고 향교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어가가 세 번이나 임하였는데도 이 예를 거행하지 않았으니 속히 거행하셔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십실(十室)의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009)  고 들었습니다. 행궁과 가까운 고을 가운데도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어가가 도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찾아서 등용하게 한다면 넉넉히 고무시키는 하나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후로 거둥하시면서 부세를 견감해 주셨으니, 베푼 덕택이 지극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역하는 백성은 실지의 혜택을 입지 못하여 균등하지 못하다고 탄식하고 있으므로 별도로 돌보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유사로 하여금 도신과 상의하여 제일 좋은 방안을 따라 처리하게끔 하여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참으로 사리에 맞으니 유사로 하여금 이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집의 윤선거가 소를 올려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고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빨리 올라오라고 하였다.

 

평안도 영변(寧邊)·성천(成川)·평양(平壤)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전라도 전주(全州)·남원(南原)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새알이나 오리알만큼이나 컸다.

 

4월 27일 신미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4월 28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4월 29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상이 판중추 홍명하, 우의정 정치화, 병조 판서 김좌명, 호조 판서 김수흥, 대사헌 박장원, 도승지 장선징, 충청 감사 이민적을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해마다 거둥하시면서 부세를 견감해 주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견감해 주지 않으신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서운해 할 것입니다."
하자, 민적이 아뢰기를,
"해마다 두 말씩 견감해 주었으므로 지금 이 수량보다 덜 감해 줄 경우 백성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군과 천안·직산은 지난해의 예에 의하여 두 말을 견감해 주고 그 나머지 역(役)에 나온 고을은 한 말을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널리 견감해 주는 은전을 시행하니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신과 유신이 불러도 나오지 않으므로 행조(行朝)의 기상이 매우 쓸쓸하니, 불가불 다시 하유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 지부사(許知府事)에게는 그의 소가 올라오기를 기다려 다시 하유하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두 유신은 황연의 상소 때문에 정세가 불안하여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상께서 하유하여 성의를 보이시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세가 불편하기는 그전과 다름없는데, 지난해에는 와서 보고 올해에는 어찌 끝내 오지 않는가?"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귀양간 신하들이 비록 내지로 옮겨졌으나 끝내 완전히 풀어주라는 명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신의 정세도 여전히 매우 불안합니다. 다시 더 깊이 생각하시어 특별히 용서하여 돌아오도록 해 주시면 신의 마음이 조금 편할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극력 간쟁하였기 때문에 내지로 옮기게끔 이미 명하였으니, 지금 다시 의논할 수는 없다."
하였다. 박장원이, 안숙을 외직에 임명한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거듭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외직에 임명하는 것은 오늘날 처음으로 한 일이 아닌데도 이상한 일로 여겨 여러 달 간쟁하니, 이는 그를 위해 조용히 행장을 꾸리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서 매우 외람된 일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장원이,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갔고, 지평 이세장, 대사간 강백년, 정언 윤진도 이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4월 30일 갑술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평안도 덕천(德川)에 우박이 내렸다.

 

전 참의 김시진이 죽었다. 그의 사람됨이 민첩하고 재주가 있었으나 언론이 상당히 괴벽하여 번번이 사론(士論)과 엇갈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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