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윤4월

싸라리리 2025. 12. 5.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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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4월 1일 을해

상이 온천(溫泉)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향축(香祝)을 내려 도내(道內)의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기우제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행 지중추 허적(許積)이 상소하여, 실정을 진달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 대략에,
"신의 아주 위급한 형편을 전하께서 이미 통촉하시고,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상께서 보신 것이 매우 밝아 신은 감히 더 말씀드릴 것이 없으나, 전하께서 잘 알고 계신 것 외에 또 죽어도 할 수 없는 까닭이 있습니다. 바로 더러운 몸으로 다시 성상을 가까이하는 것이니, 의리상 감히 나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마다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성상께서도 천하게 여기고 미워할 것입니다. 이런 얼굴을 들고 다시 세상에 서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삭탈 관직하여 신의 어그러지고 거만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지금 이곳에 있어 도로가 매우 가까우니 경이 오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 첫째 이유요, 경이 비록 불안하다고 하지만 내 뜻이 간절한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 둘째이며, 선조(先朝)께서 은혜로써 대우하였고 나 또한 경을 의지하고 있으니, 개의치 않아서는 안되는 것이 셋째이다. 이같은데도 끝내 와서 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이 비록 자신을 깎아내리고 사양하지만 세상을 잊고 도피하는 선비와는 크게 다르니, 어찌 끝내 나를 싹 잊어버린 듯이 저버릴 수 있겠는가. 경이 만약 오지 않는다면,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하다는 말이 이로부터 빈말이 될 것이니 경은 이 점을 생각하여, 실정에 벗어나는 일을 하는 세상 사람들을 본받지 말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교리 이유상(李有相)과 부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오늘날 급한 것은 무엇보다 유현(儒賢)을 불러들여 치도(治道)를 강하는 일인데, 지난번 돈독하게 유시하는 말씀을 내렸는데도 교지를 받들어 나오는 뜻이 없는 것은 대개 참소하는 말이 망극하여 정세상 나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영남 사람이 올린 상소는 거짓을 꾸민 것이 또한 참혹했는데도, 전하께서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하게 보여 처분을 잘 하셨고, 행재(行在)에서 유현을 맞이하고 부르는 일도 지성으로 하셨기 때문에 마침내 모두 줄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작년에 견줄 수 있지만, 그 진지한 뜻은 혹 처음과 같지 못하다는 탄식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8, 9인의 간쟁한 신하들을 귀양보낸 것은 참으로 전고에 없던 조처입니다. 양사(兩司)가 간쟁한 지가 벌써 여러 달이 되었으나, 성상께서는 들은 척도 아니하여 여전히 윤허하지 않다가 엊그제서야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비로소 감등(減等)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신 훌륭한 점을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생각건대 전하께서 당초에 여러 신하들에게 무거운 죄를 주셨던 것이 어찌 참으로 죄를 줄 만한 일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이것은 대개 당인(黨人)들의 논란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됩니다.
아, 군부(君父)를 높이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본성에서 나온 공변된 마음입니다. 나라의 언론이 그치지 않고 있고 정당한 의론은 막기 어려우니, 언론의 책임을 진 몸으로서 어찌 묵묵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만일 한때만을 구차히 안정시켜 대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자 한 일이라면, 신들은 더욱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논박을 입은 대신이 잘못을 꾸미어 스스로 옳다고 한다면, 전하의 이번 조처는 오히려 위안의 소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그렇지 아니하여, 자기의 잘못을 공격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잘못을 꾸짖으며 공변된 논의에 굴복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있으니, 일을 말한 여러 신하로서 아직껏 귀양에서 미처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어찌 스스로 그 마음에 편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 황연(黃壖)의 상소는 마음씀씀이가 매우 참혹했는데 성상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악을 징계하는 것이 엄하지 못하여 아직까지 도성 아래에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흉악한 화란의 조짐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자연의 이변이 근년처럼 거듭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오늘에 이르러서는 바로 초여름이 닥쳤는데도 날씨가 몹시 차가워 깊은 가을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많은 서리가 이미 내렸고 싸락눈과 눈이 교대로 내려 원근의 사람들이 보고 듣고서 놀라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음도(陰道)가 장차 성하고 양도(陽道)가 장차 쇠하려는 기상을 환히 볼 수 있는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삼가 두려운 마음으로 인사(人事)의 잘못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변화시키고 해소할 계책으로 삼고 있지 않으니 신들은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기를,
"유현(儒賢)을 불러들이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비록 성의가 부족하였지만, 마음에 잊지 않고 있다. 어찌 그대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하겠는가."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대정 현감(大靜縣監) 안숙(安塾)이 해남(海南)에 도착한 날짜를 본도 감사로 하여금 치계하도록 하라."

 

윤4월 2일 병자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윤4월 3일 정축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태뢰(太牢)로써 온양(溫陽) 향교에 제사하였다.

 

찬선 이유태(李惟泰), 집의 윤선거(尹宣擧)가 모두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자,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고 답하였다.

 

지평 최관(崔寬)이 상소하여, 이후(李垕)와 친척이 되는 혐의가 있어 계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다. 또한 덕을 닦고,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백성을 구휼하라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여,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도록 하였다.

 

윤4월 4일 무인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 우참찬 송준길(宋浚吉)이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윤4월 5일 기묘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재신(宰臣)을 보내어 풍운 뇌우(風雲雷雨)·산천 우사(山川雩祀)·삼각(三角)·목멱(木覓)·한강(漢江)에 기우제를 지냈다.

 

윤4월 6일 경진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윤4월 7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상이 승지 심재(沈梓)를 행지중추 허적(許積)이 있는 곳에 보내어, 환궁하기 전에 속히 달려와서 나의 뜻을 위안하라고 유시하였다. 또 심재로 하여금 각별하게 말을 잘하여 일어나도록 권해서 반드시 함께 오도록 하였다.

 

윤4월 8일 임오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조이중(趙爾重)·신인립(愼仁立)·박효상(朴孝相)·권회(權誨)에게 직책을 제수하였는데, 모두 도내의 사람들이었다.

 

우참찬 송준길이 상소를 올려 사직했는데, 상이 부드럽게 비답을 내리면서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올라오라고 하였다.

 

전 판부사 신계영(辛啓榮)이 예산(禮山)으로부터 와서 알현했는데, 상이 인견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아흔이었으므로 상이 젊은 환관으로 하여금 부축하여 들어오게 했는데, 계영은 무리없이 절하고 무릎을 꿇었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렇게 늙은 나이로 어렵고 먼 길을 오다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신이 곧 죽을 나이로 이런 대면하는 은혜를 받았으니,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노신이 시골에 물러나 있고 이미 망령이 들었으니, 무슨 진달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8명의 간쟁하던 신하가 양이해주는 조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매우 은덕있는 일입니다. 신이 성상을 위하여 바라는 바는 이들을 완전히 풀어주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경의 뜻을 모두 알았다.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
하니, 계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매우 황감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일어나 앉아서 나를 보도록 하라."
하니, 계영이 머리를 들고서 자세히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계영은 인조조의 시종신이었는데, 연로하여 시골에 물러나 살고 있었다.

 

윤4월 9일 계미

상이 온천 행궁에서 목욕하였다.

 

상이 대신과 형관(刑官)을 인견하고 도내의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다. 판중추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지금의 이 소결은 대개 비를 걱정하고 재앙을 그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훌륭한 조처입니다. 다만 듣건대, 도내의 사족(士族) 중에 매우 빈한한 자들은 간혹 나이 삼십이 지났어도 아직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원한 맺힌 기운이 또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할 수 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혼수를 마련하여 그들이 즉시 혼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감사 이민적(李敏迪)에게 이르기를,
"각 고을에 신칙하여, 혼수를 마련해 주어 즉시 혼인하게 한 뒤에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지금 소결(疏決)한 것을 인하여 신 또한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근일 김익렴(金益廉)·이익(李翊) 등의 일은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대간이 풍문으로 일을 논하는 것은 본래 상례입니다. 더구나 《일기(日記)》에 이미 그 말이 있으니 본래 언관들이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상께서 잡아다가 심문한 것은 참으로 마땅함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끝까지 캐물었더라도 익렴이 또한 어찌 감히 증거를 끌어다 대어 대각의 체면을 손상시킨단 말입니까. 옛날 송나라  팽사영(彭思永)은 죽으면서도 그 말을 들은 곳을 감히 고하지 않았는데, 선유들이 옳게 여겼습니다. 익렴이 이런 의리를 잃은 것이 이미 매우 놀라운데, 이익 등이 《일기》를 보여준 일이 없었고 보면, 그 사이의 곡절을 비록 변별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스스로 변명한 말 또한 사대부의 기상에 어긋나니 진신(搢紳)에게 끼친 수치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익렴을 국문한다면 이는 대각에 형벌을 주는 것이니, 고금에 없었던 일입니다. 익렴이 감옥에 갇힌 지 몇 달이 되었고 앞으로 처분할 때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나, 일을 오랫동안 결정하지 않으면 국가의 체모가 나날이 손상될 것이니, 속히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더 캐묻기도 전에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자연 조용히 결말이 지어질 것이다."
하였다.

 

윤4월 10일 갑신

상이 온천 행궁에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 단천(端川)·삼수(三水)·갑산(甲山) 등지에 서리와 눈이 내렸다.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묘와 사직, 북쪽 교외에 기우제를 지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환궁할 때에 홍 판부사는 노쇠하고 병든 사람으로서 어가를 따르기가 어려울 듯하니, 내려올 때의 관례대로 말을 지급하여 뒤따라 들어오도록 하라."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삼았다.

 

도내의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 가운데 지목하여 받아들일 곳이 없는 것들을 탕감하였는데, 이는 감사 이민적(李敏迪)의 청을 따른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주 부윤 이연년(李延年)은 감히 감사가 머무르는 곳에 말을 탄 채 섬돌 앞으로 곧장 들어갔는데, 문을 지키는 병졸을 마구 때리며 꾸짖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상관을 능멸한 방자하고 기탄없는 정상이 참으로 매우 해괴합니다. 우선 파직한 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감사 홍처후(洪處厚)는 도신의 몸으로서 이미 부하에게 모욕을 받았다면, 계문하여 죄를 청하는 것이 일의 체모상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소를 올리고는 체직을 바랐으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기롱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연년은 평소 속병이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미친병이 크게 발작하여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승지 심재(沈梓)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행 지중추 허적이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았으나, 마땅히 수원(水原)에 뒤미처 따라올 것이라 하였습니다."

 

윤4월 11일 을유

상이 어가를 돌렸다. 저물자 직산(稷山)에 머물렀다.

 

윤4월 12일 병술

상이 수원에 머물렀다.

 

양사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말을 너무 빨리 달려 역참을 지나쳐 가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바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이 행차에서 상이 말을 매우 빨리 몰아서 예정 시각을 넘기기도 전에 번번이 하나의 역참을 지났으므로, 어가를 수행하는 백관들이 쫓아갈 수가 없었으며 길에서 넘어져 죽는 호위 군졸들도 있었다. 그래서 차자를 올려 경계했던 것인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말을 빨리 달리자, 양사가 모두 인피했다.

 

행 지중추 허적이 어가가 수원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에 와서 알현하자, 상이 장전(帳殿)에서 인견하였다. 허적이 부복한 채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갖추어 진달하기를,
"신이 행차를 보고자 하여 이곳에 와서 삼가 문후합니다만, 정세가 위태로우므로 감히 사은 숙배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면을 하게 해주시니, 다만 송구스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한결같이 인혐하나, 일의 체모로 보아 부당하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반드시 행궁에서 만나고 싶었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 지금 다행히 와서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에 매우 위안이 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변변치 못함으로 인하여 동료 재상이 낭패를 보았으니 신이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언관이 귀양간 일에 대해서 신이 감히 전후의 소장(疏章)에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대개 죄를 짊어진 사람으로서 감히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여 아는 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입대(入對)하여 또한 끝까지 묵묵히 있을 수만은 없기에,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수상의 일에 있어서는 명백하게 증거 삼을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 당시 빈신(儐臣)의 장본(狀本)을 지금 만약 가져다 본다면 환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장본에 있지도 않은 일을 사관이 기사를 잘못 씀으로써 중하게 죄를 얻게 했고, 이로 인하여 성상이 격노하여 중도에 어그러지는 조처를 많이 내리게 했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사명 받든 일을 형편없이 한 소치입니다. 신이 범한 바는 죽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계사가 근거 없기 때문에 시비를 밝히고자 한 것인데,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허물을 인책하는가."
하였다. 허적이 울면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이별했다가 잠깐이나마 이렇게 상봉했는데, 경은 어찌 차마 갑자기 물러나려 하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선조(先朝)의 깊은 은혜는 죽어도 잊기 어렵고, 깊이 보살펴 주신 성상의 뜻도 매우 각별하였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머무를 수 있는 형세가 있다면, 그때에는 어찌 감히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의 실정으로는 참으로 어가를 따를 면목이 없습니다. 만약 국가에 불행한 일이 생겨 신을 쓸 때가 있다면 신이 어려움을 핑계대지 않고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손꼽을 수 있는 노성한 구신(舊臣)은 경 등 몇 사람뿐이다. 어찌 일시의 불안으로 인하여 물러나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이런 형편 외에도 다시 질병이 있어 결코 어가를 호종하여 갈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경이 수레를 따라오기를 바라겠는가. 내려갈 때에 홍 판부사가 또한 뒤미처 따라 왔었으니, 경 또한 일수를 헤아리지 말고 서서히 길을 와 마침내 올라오게 되면 다행이다. 무릇 사람이 병을 조리하는 방법은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 귀하다. 경이 만약 오지 않으면 나는 사모하는 생각이 간절하여 마음을 안정시켜 병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애초에 이곳에서 물러가고자 하였으나 성상의 분부가 이처럼 간절하니, 신이 어가를 따라가다가 중도에서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을 건너는 것이 무슨 혐의가 된다고 굳이 중도에서 물러가려고 하는가? 경이 강을 건너 도성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면 잠시 도성 밖에 머물면서 한번 면대한 뒤에 거취를 결정해도 될 듯한데, 이것도 하기 싫은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이 간절하니, 신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 이정(李程)에게 이르기를,
"허 지사가 올라올 때 말을 제공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4월 13일 정해

어가가 서빙고 너머 모래사장에 머물렀는데, 별군직 무사(別軍職武士)로 하여금 일자진(一字陣)을 이루게 한 뒤 일시에 돌격하게 하여 구경하고는, 초저녁에 환궁했다.
대개 별군직이라는 것은, 효종 즉위 초에 중외의 무사 가운데 용기와 힘이 뛰어난 자들을 모집해서 군직을 제수한 것으로, 번을 나누어 궐내에 직숙하게 하였으며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수레를 에워싸고 가게 했다. 그리고 때때로 후원에 불러 모아 재능을 시험하고는 상을 후하게 내렸고, 간혹 변방의 장수나 수령으로 제수하기도 했다. 늙은 자는 비록 퇴직시켰지만 모집해서 대신 채웠는데, 이때까지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다.

 

윤4월 14일 무자

동래부(東萊府)의 왜관(倭館)에 불이 나서 모두 탔는데 왜인들이 몸만 빠져 나와 죽음을 면했다. 부사가 치계하여 상황을 알리고, 이어서 신유년 화재때의 전례대로 동서방(東西房) 및 좌우의 행랑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함경도에 큰 기근이 들어 관서의 영원(寧遠)·맹산(孟山)·양덕(陽德) 등 세 고을의 향곡(餉穀) 1만여 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윤4월 15일 기축

밤에 월식이 있었는데, 《대통력법(大統曆法)》에 맞았다.

 

윤4월 16일 경인

중신을 보내어 풍운 뇌우(風雲雷雨)·산천 우사(山川雩祀)·삼각(三角)·목멱(木覓)·한강(漢江)에 기우제를 지냈다.

 

행 판중추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본직과 겸직의 여러 직임을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4월 17일 신묘

가뭄으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내리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 연주를 그쳤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금부·형조·삼사의 관원을 인견하고 중외의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판의금 홍중보(洪重普)가 나아가 윤선도(尹善道)의 죄안을 읽었는데,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니, 다 읽을 필요 없다."
하였다. 이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각자의 소견을 말하도록 하였다. 우상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죄목이 비록 중하기는 하나 귀양간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나이도 늙어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도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렇지만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니, 삼사에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모두 석방하는 것은 안된다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죄가 비록 무겁다 하나 나이가 이미 늙었으니, 지금 석방해서 집에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옳겠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석방한 뒤에 만약 시끄러운 의논이 있게 된다면, 애초에 거론하지 않은 것만도 못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무죄라고 여겨 석방한다면 대간이 간쟁하는 것이 옳겠지만, 나이가 늙어 곧 죽으려 하기 때문에 석방하는 것이니, 어찌 다시 시끄러운 의논이 있겠는가."
하였다. 홍중보 및 지의금 이경억(李慶億)도 석방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중보가 또 이숙(李䎘) 등의 죄목을 읽으니, 상이 ‘이들은 어떠한가’ 하고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석방시키라고 청하여, 마침내 이숙 등을 석방하였다.

 

윤4월 18일 임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다시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죄인들을 소결하였는데, 판중추부사 정태화·홍명하도 입시하였다.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근래 궁중에 귀신의 변괴가 많았는데 자전께서 계시는 곳이 더욱 불안했으므로 지난번 경덕궁(慶德宮)으로 받들어 옮겼다. 그러나 자전께서 옛 궁을 계속 버려둘 수 없다고 여겨 지금 다시 돌아오셨는데, 변괴가 여전하다. 변통하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되겠기에 경복궁의 옛 터에 간단하게 새로 궁을 지으려 하는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비록 절박한 데서 나왔다 하나 이 일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양(陽)의 덕이 성하면 음(陰)의 사특함은 저절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어떻게 갑자기 토목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매우 절박하셔서 이런 분부를 하셨을 터이니, 유사에게 물어 건물의 제도를 잘 헤아려 너무 사치한 데 이르지 않으신다면 또한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안된다고 힘껏 말하면서,
"가뭄이 이렇게 참혹하니, 비록 일심으로 하늘을 대하고 안정하면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하늘의 견책에 답하기에 부족할 텐데, 이런 시기에 만약 역사를 일으킨다면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전하께서 기어이 이번 일을 하신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할 것입니다. 어떻게 나라가 망했는데 자전께서 홀로 안락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묵묵히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나도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형세가 매우 절박하기 때문에 대신들과 더불어 상의하는 것이다. 만약 안된다고 한다면, 어찌 억지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어기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애당초 지극한 심정에서 나왔는데 뭇 아랫사람의 말을 듣고 문득 받아들이시니, 이는 참으로 성덕의 일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목욕한 뒤에 상의 병세가 완전히 회복된 것이 지난번보다 더 낫습니다. 이는 신민(臣民)이 크게 경축할 일이니, 대신에게 물어 빨리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는 예를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작년에 고묘를 했는데 금년에도 고묘를 하는 것은 번잡스러울 듯합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진하만 하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묘를 하지 않고 진하만 하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으니, 모두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윤4월 21일 을미

중신을 보내어 덕진(德津)·양진(楊津)·오관(五冠)·감악(紺岳)·송악(松岳)에 기우제를 지냈다.

 

원양도 평창(平昌)·정선(旌善) 등지에 서리가 내렸다.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홍주삼(洪柱三)을 부수찬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부교리로 삼았다.

 

윤4월 22일 병신

영녕전(永寧殿)의 신위를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겨 안치했는데, 이는 다시 건축하려고 한 것이다. 상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대문 안에서 신주를 옮기는 수레를 공경히 전송했는데, 신주를 옮기는 수레가 작문(作門) 밖에 이르렀을 때 긴 손잡이가 부러져버렸다. 이에 도감의 해당 낭청들은 법을 맡은 관리에게 회부하고 당상은 추고하였다. 도제조 정치화(鄭致和)는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였다.

 

윤4월 23일 정유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유명윤(兪命胤)을 이조 정랑으로, 남노성(南老星)을 공조 참판으로, 이익상(李翊相)을 문학으로 삼았다.

 

한성부로 하여금 서울의 안팎으로 모여드는 굶주린 백성들을 조사하여 그중에 병든 자들은 동·서활인서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고 병을 치료해 주도록 하였다.
당시에 잇따라 흉년이 들어 관동과 관서의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뒤를 이어 모여 들었는데, 굶주리면서 한데서 지냄에 따라 전염병이 크게 번져, 병자가 거의 수천에 이르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측은히 여겨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양사가 대정 현감(大靜縣監) 안숙(安塾)에 대한 계사를 정지하였다.

 

대신을 보내어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냈다.

 

윤4월 26일 경자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윤선거(尹宣擧)를 집의로, 김우형(金宇亨)을 황해 감사로, 이시술(李時術)을 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판서로, 이만영(李晩榮)을 북병사로 삼았다.

 

윤4월 27일 신축

홍명하(洪命夏)를 영의정으로, 허적(許積)을 좌의정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접위관(接慰官) 김석주(金錫胄)가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이 어의를 보내어 약물을 가지고 일마(馹馬)를 타고 내려가서 간호하도록 하였다. 이는 도승지 장선징이 김석주에게 평소 질병이 있다고 진달했기 때문이다.

 

윤4월 28일 임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행 지중추 허적이 진위(振威)에 이르러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지금 이 상소를 보고 마음을 아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더욱 탄식한다. 이제 막 의정에 제배했으니 굳이 사직하지 말고 즉시 올라와서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한다."

 

윤4월 29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감악산에 기우제를 지낼 때 액정 별감(掖庭別監)이 감히 남여(藍與)를 타고 산에 올라와서 곧바로 제단의 아래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 놀라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별감이 제 신분에 어긋난 짓을 한 죄는 자연 해당 법률이 있고, 중사(中使)와 사관(史官)이 그 일을 눈으로 보고도 단속하여 삼가하게 하지 못한 상황은 더욱 해괴합니다. 그 당시 중사와 사관을 파직하고 별감은 유사로 하여금 옥에 가두고 죄를 매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중사와 사관은 추고만 하도록 하였으므로,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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