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일 을사
권격(權格)을 정언으로, 유정(兪椗)을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이원정(李元禎)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송시철(宋時喆)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비록 보잘것 없지만 또한 약간의 염치는 있으니, 어찌 감히 이런 죄를 짓고서, 낯을 들고 다시 대신의 반열에 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신으로 하여금 영화와 총애를 탐내어 유면화(劉綿花)010) 같이 탄핵을 견디어내는 자가 되게 한다면, 신의 염치는 우선 차치하고 논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수치와 욕됨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절대 무릅쓰고 나올 형편이 아닙니다. 공손히 여론을 기다린 지 며칠이 지났으나 아직도 이처럼 적막하니, 머리를 들고 애처롭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기를,
"아, 지금이 어떤 때인가. 가뭄이 이처럼 참혹하니 농사가 망극하다. 경의 몸에 나라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니 의리상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야 한다. 어찌 한 때의 과격한 논의로 인하여 지나치게 겸양하면서 어려운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도를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찬 박세당(朴世堂)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진술하면서, 내사(內司)를 혁파하여 군수(軍需)를 보충하고 사족(士族)에게 포(布)를 거두어 백성의 부역을 균등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팔도의 정병(正兵)과 훈련 도감의 포수(砲手)를 합하여 어영군(御營軍)의 제도를 만들 것을 청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이 자세하여 수천 언이나 되었다. 상이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렸으나, 모두 방계(防啓)하니, 따르지 않았다.
5월 5일 무신
헌부가 교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서 몸을 닦고 반성하는 방도를 진술하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였다.
5월 6일 기유
중신을 보내어 풍운(風雲)·뇌우(雷雨)·산천(山川)·우사(雩祀)·삼각(三角)·목멱(木覓)·한강(漢江)에 기우제를 지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 끝에 비가 오니 참으로 크게 다행이지만, 잠깐 비가 왔다가 곧바로 개어 한번이라도 통쾌하게 퍼붓지 않으니, 논밭을 두루 적시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니, 우상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극심한 가뭄 뒤에 조금 비가 내렸지만 시들어버린 각종 곡식은 이미 다시 소생하기 어렵습니다. 바닷가의 경우는 소금기가 배어들어 볏모가 다 말라버렸으니 가울에 추수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관동의 기근은 다른 도의 배가 되어 백성들이 칡뿌리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진휼하는 계책이 가장 긴급한 것이니, 속히 경창(京倉)의 대두(大豆) 1천 5백 석과 전미(田米) 5백 석을 흥원창(興元倉)으로 운반하여,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주어 진휼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우물물도 말라버려 사람들이 장차 목말라 죽게 되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이는 범연히 유행하는 재앙이 아닙니다. 신이 공무를 본 이래로 일찍이 이같은 가뭄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이어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신 같이 참으로 못난 자가 외람되이 이런 직임을 맡고 있으니 재앙과 이변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분수와 역량을 헤아려 보건대, 결코 담당하고 있기 어려우니 어질고 덕있는 분으로 다시 정하여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탓으로 이런 재앙과 허물을 초래하였으니, 경의 이 말을 들음에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백성 또한 매우 굶주린다고 하니,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의 곡식을 나누어서 진휼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앞으로 경기를 진휼할 재물은 오로지 이것만을 믿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도민(都民) 중에 받기를 원하는 자가 많지만 허락하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대전(大典)》의 노비 신공조에, 각사 노비의 공포(貢布) 각 1필 외에 노(奴)에게는 저화(楮貨) 20장을 더 거두고 비(婢)에게는 15장을 더 거두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화를 거두지 않기 때문에 노(奴)에게는 포(布) 1필을 더 거두고 비(婢)에게는 반 필을 더 거두고 있어, 노비의 무리들이 지탱하여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자들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일을 마땅히 참작 견감해서 실제적인 혜택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노비의 공포를 각각 반 필을 감해 주고 이를 길이 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7일 경술
영의정 홍명하가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내 뜻을 지난번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다 밝혔는데도, 경이 어찌 이토록 이해하지 못하는가. 오늘날의 나랏일을 한번 보라. 이 참으로 어떤 때인가? 하늘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여 재변이 더욱 참혹해지고 있는데, 경은 한갓 이미 지난 일을 끌어다가 허물을 삼고 나랏일을 도와 이루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옛사람이 그 돌아가신 임금에게 보답하려 한 뜻과 어떠한가. 당초에 사직을 허락했던 것은 진실로 경의 처지를 위한 것이었으니, 이제 경은 속히 출사하여 공무를 보아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강촌(江村)에 물러나 있는다고 걱정이 없겠는가. 경이 아무리 간절히 사직하더라도 내가 윤허할 리가 없으니, 의당 혐의스럽게 여기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5월 8일 신해
영의정 홍명하가 세 번째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도록 하였다.
5월 11일 갑인
중신을 보내어 양진(楊津)·덕진(德津)·감악(紺岳)·송악(松岳)·오관산(五冠山) 등에 기우제를 지냈다.
헌부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봉사(奉使)하는 신하가 비록 먼 길에서 분상(奔喪)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래에서 의관을 보내어 구호(救護)하라고 계청하는 것은 아직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지난번 정원이 일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규례 밖의 일을 진계하여 김석주(金錫胄)를 구호하게 했으니, 여론이 매우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해당 승지를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언 윤진(尹搢)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대관(臺官)의 기를 꺾어버려 언로가 막히게 된 근심을 진달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민간의 굶주림과 고달픔의 실상을 진달하여, 어영(御營)·훈국(訓局) 및 남한(南漢)·강도(江都)의 쌀과 포(布)를 내어 당장의 위급함을 구하도록 청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상소를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우선 앞으로의 형세를 살펴서 이대로 시행하도록 회계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어진이를 가까이 하고, 간언을 따르는 도리에 대해 자세하게 진술하였다. 또 아뢰기를,
"성상의 자질이 비록 뛰어나나 학문의 힘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는데, 영재를 맞이하여 강론하는 일을 혹 일 년이 지나도록 폐지하기도 하십니다. 또 비록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어찌 고요하고 한가한 겨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논사(論思)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는 경우가 드물고, 항상 깊은 궁에 거처하면서 편안함에 익숙해진 채 세월을 헛되게 보내니 앞으로의 진보를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의 학문하심을 성실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근본인 마음을 함양(涵養)함이 적어서 말을 할 때는 대부분 절도에 맞지 않으며, 갑자기 성이 나면 관계없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옮기기도 하고, 깊이 마음에 쏠리는 바가 있으면 사사로움이 혹 공의를 해치기도 합니다. 또 많은 의심이 억측에서 생겨나고, 자신만이 옳고 지혜롭다는 의식이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에서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것들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격동되어 마음을 병들게 하는 뿌리가 점차로 고질화되고 있으니, 전하의 마음 다스림을 성실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현(儒賢)이 나날이 멀어지니 깨우쳐 훈계하는 말들을 들을 수 없으며, 예절을 갖춘 모습이 쇠퇴하니 이간하는 해로운 말들이 쉽게 틈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려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한 상소에 대해서도 끝내 한 글자의 비답도 없고, 으쓱거리며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거절하는 안색이 이미 천리 밖에까지 드러나 사류(士類)들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여 오히려 물러나 숨는 것이 치밀하지 못할까 염려하게 만드셨습니다. 때문에 어진이를 초치하는 거조가 한갓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으니, 전하의 어진이 좋아하는 것을 성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간언을 받아들임이 넓지 않아 언로(言路)가 점점 막히고 있습니다. 대각들이 논하는 바는 큰일 작은일 할 것 없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견책이 잇따르고, 자잘한 일을 들춰내어 너무 심하게 기를 꺽어 버리십니다. 이에 곧은 기운은 시들하고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이 풍조를 이루게 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세상이 크게 꺼려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몸을 굽혀 삼가 나왔다가 혀를 깨물며 물러나오니, 유식한 선비들이 깊이 걱정하며 탄식하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이를 바야흐로 진정(鎭靜)시키는 좋은 계책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내가 말을 하매 어기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놓고 성인은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신은 나랏일이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독 요즘의 상황을 살피지 못하셨습니까? 구언(求言)하는 교지가 지극히 간절한데도 삼사(三司)에서 으레 올리는 차자는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있으며, 전계(前啓)를 대강 다시 얽어 책임만 메꾸려 하고 있으니, 참으로 풍채가 다 사라져 버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전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드신 점이 있는 듯하니, 전하의 간언 들으심을 성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총명과 예지로 전대(前代)의 잘잘못을 본보기로 상고해보면, 어찌 일찍이 제왕의 학문을 닦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며, 어진이를 등용하지 않고 간언을 따르지 않으며, 거만하게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는데도 어지러워 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이점에 대해서 어찌 자신을 반성하여 고치려 하지 않으십니까.
신은 또 들으니, 군도(君道)는 비유하면 건도(乾道)와 같습니다. 하늘의 도가 너무 지나치면 땅의 기운과 사귀지 못하여 이슬과 비의 은택이 어렵고, 임금의 도가 너무 지나치면 백성의 뜻이 위에 미치지 못하여 정령(政令)이 막히게 됩니다. 옛날 송나라 신하 부필(富弼)은 백성의 뜻이 위에 통하게 하는 것을 하늘의 변고에 응하는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지금의 이 가뭄이 혹 하늘이 이로써 우리 성상을 경계하는 것이라면 이에 응하는 방법도 진실로 여기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부드럽게 답하였다.
평안도 평양(平壤) 등지에 충재(虫災)가 있었다.
유학(幼學) 이석복(李碩馥)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전하의 슬기로움과 너그러움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지만 건강(乾剛)이 부족하고 곤유(坤柔)가 지나치므로, 위복이 위에서 제어되지 않고 정치의 권한도 아래에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혹 약석과 같은 충언이 한번 전하에게 진달되면 진실과 거짓을 현혹시켜 전하를 장황하게 속이는 한편, 관학의 유생들을 선동해서 돕게 하고 지방에 바람을 넣어 끌어들여 스스로 공공의 의논이라고 하면서 협박을 하므로, 그들의 세력이 미침에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고금 천하에 군주의 군위가 상실되고 정치의 권한이 아래에 있는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간혹 한두 대신이나 서너 중신들이, 나랏일이 나날이 잘못되어가고 횡의가 나날이 커지는 상황을 목격하고는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고 시대를 바로잡고자 하는 뜻을 간절히 지니고 있지만 머리와 꼬리를 움츠린 채 말하고자 하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전하께서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정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몇몇 연소배들이 세력을 믿고 기세를 올리면서 공격을 일삼으며, 편벽되고 사악한 젖비린내 나는 자들이 인사권을 오랫동안 도둑질하고 있는데, 옛사람이 이른바 나라를 해치고 임금을 좀먹는다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신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지난번 일월 같은 밝으심으로 음흉한 정상을 통촉하시어, 명을 한번 내리자 그들의 간담이 써늘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즉시 또 전부 석방하셨으니, 이는 비록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었지만 끝내 전하의 나약함만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하에게 죄를 받은 자들에 대해서는, 떼 지어 일어나 해명하고 무리지어 화합하여 구원하게 해서 명예와 지위가 나날이 커지고 빛나게 하셨으며, 시의(時議)에 죄를 얻은 자들에 대해서는, 같은 목소리로 공격하고 서로 꾸짖으며 배척하여 온 세상이 흉악한 무리로 지목해서 권간이 나날이 성해지고 국세가 나날이 그릇되게 하셨으니, 신은 매우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아, 지난번 관학 유생들이 과거를 정지시킨 명에 대해 화를 내어 권당(捲堂)하는 짓을 하여 드디어 성묘(聖廟)를 며칠간 텅 비게 했으니, 임금을 협박하고 임금을 무시한 그들의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상소에 참여하지 않은 유생들을 타일러 모으라는 성상의 분부는 참으로 성인을 존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성상의 은혜를 받아 육성된 인재들이 진실로 성상의 분부를 들었다면 누가 감히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지관사(知館事) 김수항(金壽恒)과 대사성 조복양(趙復陽) 등은, 많은 유생들이 일제히 들어가면 군상을 위협하려는 자신들의 계책이 깨질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성상의 분부를 감추고 선포하지 않은 채 한두 친밀한 자들에게만 몰래 통보해서, 겉으로는 불러 모으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사실상 들어가지 못하게 지휘하여 지존을 속이고는, 끝내 정거를 풀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저보(邸報) 가운데 성상의 분부를 내었습니다. 그들이 군부를 우롱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여긴 정상은 길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입니다. 신하가 되어 이런 짓을 차마 할 수 있다면 앞으로 무슨 짓인들 않겠습니까. 아, 이 무리들은 한갓 당파가 있다는 것만 알고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여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데도 이렇게까지 속였고 보면, 여러 해 동안 인사권을 장악하여 선발을 치우치게 하면서 자신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했을 것이니, 조정에 한 사람도 논란하는 자가 없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습니까.
지난번 크게 사면하는 은전을 내려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재범자들까지도 모두 용서받았는데, 아직도 윤선도(尹善道) 한 사람은 남겨두고 계시니, 전하께서는 선도가 나라에 죄를 얻었기 때문에 석방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는 용서할 만하지만 시의(時議)를 어기기를 곤란하게 여겨 석방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선도는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망령되게 전례(典禮)를 논했으니, 그가 쫓겨난 것은 진실로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만, 지금 선도는 나이가 팔십이 넘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남북으로 옮겨다니면서 안치된 지가 10년이 되었습니다.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벌이 이미 행해진 것입니다. 선왕의 사부에 대한 은혜를 미루어 생각하고 지금 대사면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어서 그로 하여금 고향에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주신다면 어찌 전하의 덕을 성대하게 베푸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죄수들을 심리한 지가 지금 며칠이 지났는데도, 하늘의 뜻은 막연하여 붉은 구름만 짙게 낀 채 가뭄이 혹심하여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어서, 길에서 서로들 걱정하며 말하기를, ‘선도가 석방되지 않았는데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들에서는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기를, ‘선도가 석방되어야 하늘이 비를 내릴 터인데.’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비를 내리는 여부가 반드시 선도의 석방 여부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정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좌승지 송시철(宋時喆), 좌부승지 윤비경(尹飛卿), 우부승지 심재(沈梓), 동부승지 이정(李程)이 아뢰었다.
"방금 전에 유학 이석복(李碩馥)이 와서 한 상소를 올렸는데, 그 주된 뜻을 살펴보니 황연(黃壖)의 찌꺼기 의논을 주워모아 상소 가득 장황하게 벌려놓으며 사설(邪說)을 부르짖어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고 조정에 알력을 일으키는 계책을 부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쟁하던 신하들을 완전히 석방한 일을 상의 나약함을 보여준 것으로 말하기까지 하고, 또 선도(善道)를 석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한재가 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음험하고 흉악한 작태를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으니, 성명의 세상에 다시 이런 황당무계한 무리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위험하고 바르지 못한 상소는 출납을 진실하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진실로 물리쳐야 했습니다만, 그가 일단 유생이라는 이름을 빌려 교지에 응한다고 핑계한 데다가 또 그의 간악한 정상은 반드시 성상의 눈에서 도망하기 어려울 것이었기 때문에 봉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양도 평해군(平海郡)에 검은 안개가 끼었는데, 바다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에 천지가 어두컴컴하여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다.
5월 13일 병진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 심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 상황이니, 진구할 방책을 미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저축해 놓은 곡식이 다 떨어졌으니, 백관들의 녹봉을 감해서 진구할 밑천에 보태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사대부는 녹봉이 매우 적어서 참으로 감하기 어렵지만, 진휼 정책이 한창 급한데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니, 5품 이상에 대해서는 대미(大米) 1석(石)을 감하고 대신 전미(田米)를 지급하고, 6품 이하는 감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이동로(李東老)가 아뢰기를,
"형조 죄인 이세공(李世恭)이 범한 죄는 이온(李溫)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온 등은 등급을 감하여 유배되는 은전을 받았지만, 세공은 아비 상을 당했어도 그대로 옥중에 있습니다. 그 정상이 처참할 뿐만 아니라 죄는 같은데 벌이 다르니 실로 억울한 듯합니다. 그리고 유배된 죄인 강석규(姜錫圭)는 귀양간 지 여러 해 되었는데 그 어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직 분상(奔喪)하지 못했습니다. 효(孝)로 다스리는 아래에서는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은전이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석규는 이미 감형하여 정배(定配)된 것이니 본죄(本罪)로 정배된 자와는 차이가 있고, 세공은 옥사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으니 모두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부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유학(幼學) 이석복(李碩馥)이 흉악한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이 음험했다고 들었습니다. 조정에 알력을 일으키고 사림에 화를 전가하려는 계책이 황연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양(陰陽)의 성쇠 여부는 국가 존망의 갈림길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으레 내리는 비답처럼 비답을 내린다면 더욱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의 마음을 열어주게 되어 앞으로 나라의 화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용안(龍安)의 현감을 맡았을 때, 듣건대 ‘경내의 부사(府使)였던 오응정(吳應鼎)이 임진년 왜란에 절개를 세우고 죽어 증직하고 정표했다. 그의 아들 욱(稶)은 아비를 따라 함께 죽었고 욱의 아우 직(稷)은 무오년011) 에 심하(深河)의 전쟁에서 또한 힘껏 싸우다가 죽었는데 조정에서 단지 증직만 했다.’ 하였습니다. 자손들이 미약해서 호소할 곳이 없어 아직도 정려(旌閭)하는 조치가 없으니,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고 거행하도록 하였다.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윤성거(尹聖擧)는 사람됨이 경망스러워 일찍이 북관(北關)의 변장(邊將)을 맡았을 때 직무 수행이 형편없었으며, 호서(湖西)의 영장(營將)이 되어서는 괴이하고 놀랄 만한 일이 많았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화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의 재앙이 이와 같은데, 성상께서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은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같이 못난 자가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일개 수령을 논핵하는데도 오히려 윤허를 얻지 못했으니, 어찌 성상의 다스림에 보탬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천제(天帝)를 기쁘게 하지 못하여 재앙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대간의 논핵에 있어서는 으레 진실이 아닌 풍문(風聞)이 많기 때문에 혹 따르지 않는 때도 있는 것이다. 어찌 성거(聖擧)에 대한 논핵을 따르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하늘의 재앙을 불러온 이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지화가 엄한 분부를 입은 것 때문에 인피하고 물러갔다.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처치하여 출사하도록 하였다.
5월 15일 무오
원양도(原襄道)의 강릉(江陵)과 평해(平海)에 대낮이 어두컴컴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보니, 대사헌 정지화의 피혐한 글 중에 더 들어간 말이 많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니, 승지 이정(李程)이 대답하기를,
"주서(注書)가 지화에게 서간을 통해 물어, 그가 보여준 대로 써서 들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자, 상이 또 하교하기를,
"이미 정해진 규례가 있는데도 규례대로 행하지 않고, 임의로 서간을 통해 물은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고, 주서는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그 계사(啓辭)는 고쳐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민희(閔熙)를 승지로, 민유중(閔維重)을 형조 참의로, 홍만용(洪萬容)을 부응교로 삼았다.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사람을 죽인 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왕법(王法) 가운데서도 지극히 엄한 법입니다. 죄인 이온(李溫)이 사람을 죽인 정상은 환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아직도 형벌을 지체하여 이미 국법을 어겼으니, 어찌 심리하는 일로 인하여 갑자기 가장 가벼운 벌을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감정대로 참혹하게 사람을 죽인 자는 몸을 보존할 수 있고, 무고하게 피살된 자는 지하에서 원통함을 품고 있으니, 이것을 일러 죄인을 심리하는 것이라 하여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곧 장관과 더불어 서로 만나서 논계하려고 했는데, 장관이 어렵게 여기는 바가 있어 시종 일관 굳게 거절하였으니, 신이 경시당한 소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죄가 의심스러울 때에 법률을 가벼운 쪽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본래 형벌을 신중히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온(李溫)의 일은 여러 차례 대사(大赦)를 거쳤을 뿐만 아니라, 상이 친히 심리(審理)를 다시하여 이미 참작하여 등급을 감하였으니, 정배한 뒤에 추후로 꼭 논계하려고 하는 것은 혹 지나친 듯합니다. 저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구차히 같이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정언 윤진(尹搢)은 아뢰기를,
"이온을 감등한 일에 대해서 여론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는데도, 신은 외람되이 대각에 있으면서 끝내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편안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헌납 이동로(李東老)는 아뢰기를,
"동료들이 이온의 일을 이유로 계속하여 인피했으니, 신이 마땅히 처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직에 있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니, 마땅히 논해야 하는데 논하지 않은 잘못은 신 또한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5월 16일 기미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전날의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매우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신이 그날 물러나간 뒤에 주서(注書)가 서간을 통해 신의 피혐한 글을 물어왔기에 신이 즉시 답하여 보여주었는데, 글을 다듬어 연결하면서 대략 말을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전례(前例)만을 그대로 따르고 신식(新式)을 알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리고 신이 잘못하여 탑전에서 아뢰지 않은 말을 글로 써서 보낸 것 때문에 다시 고쳐 들이라는 조처가 내리게끔 하였고, 승지와 주서가 혹은 추고되고 혹은 파직되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무겁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신식을 알지 못하여 전례대로 써서 보냈으니, 비록 보탠 말이 있지만 원래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말하지 않았던 것을 첨가해 쓴 것이 과연 진실로써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에 합당한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지평 조원기가 아뢰기를,
"대사헌 정지화가 비록 전례를 그대로 따른 잘못은 있지만, 경솔하게 체직하여 언로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는데, 엄한 분부가 있게 하였으니 결코 편안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지평 신후재(申厚載)가 아뢰기를,
"양사가 인피했으니 신이 처치해야 마땅합니다만, 신이 본부의 전계(前啓)에 대해서 감히 가부를 논할 수 없는 입장이니, 단지 처치만 하고 전계를 전하지 않는 것은 대각의 체모에 어긋납니다. 신의 사정이 참으로 곤란합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5월 17일 경신
홍문관이 양사를 처치하여 권격(權格)·윤진(尹搢)·이동로(李東老)를 출사시키고, 강백년(姜栢年)·정지화(鄭知和)·조원기(趙遠期)·신후재(申厚載)를 체직시켰다.
상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궁인이 마마를 앓았기 때문이었다.
5월 18일 신유
헌납 이동로(李東老) 등이 아뢰기를,
"목숨으로 변상시키는 사형의 제도는 법률상 지극히 엄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죄인 이온을 감형하여 정배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로가 일찍이 탑전에서 이세공(李世恭)과 이온(李溫)이 죄는 같은데 벌이 달라 참으로 억울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은전을 베풀도록 청하였는데, 겨우 며칠이 지난 뒤에 갑자기 이런 계청을 했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지론(持論)이 전도된 것을 비웃었다.
함경도 감사가 치계하였다.
"도내의 굶주린 백성의 수효는 1만 1천 3백여 인이니, 마른 양식을 주어 진휼하도록 명하소서."
5월 19일 임술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간으로, 최관(崔寬)·이세장(李世長)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향(京鄕)의 사대부들이 나주(羅州) 경내에 제방을 쌓는데, 목사 이준악(李峻岳)이 그 역사를 도와 완공하였습니다. 심지어 수개 도감(修改都監)이 정한 승군(僧軍)을, 제방 주인의 노복들로 하여금 도감에서 대신 복무하게 하고 그 승군이 왕래하며 일했을 경우의 날짜를 계산해서 몇 배나 더 조발(調發)하여 주었는데, 그 수가 수천에 이릅니다. 도감의 일이 관계된 것이 어떠한데 수령된 자가 조정의 분부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대신 복무하도록 하고, 빙자하여 조발하기를 이같이 지나치게 한단 말입니까. 이를 들은 자들 가운데 놀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고, 제방을 쌓은 자들은 본도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게 하여 무거운 쪽으로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준악을 잡아다가 심문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좌의정 허적(許積)에게 유시를 전하였으나, 허적이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5월 20일 계해
궁녀 귀열(貴烈)이 복주되었다. 이에 앞서 귀열이 자전의 시녀로서 자기 형부인 서리(書吏) 이흥윤(李興允)과 몰래 간통하여 임신했는데, 일이 발각되자 상이 내옥(內獄)에 가두라고 명했다. 이때 이르러 옥중에서 아들을 낳고 나자 상이 형조에 회부하고는 법률을 적용하게 했다. 형조가 교수형에 처해야 된다고 아뢰자, 상이 등급을 높여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해조가 법을 인용하여 간쟁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즉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정원도 역시, 법이 한번 잘못 시행되면 뒤폐단이 적지 않으니 해조가 조율하여 아뢴 대로 행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또 듣지 않아 드디어 참수했다. 그녀의 부모 역시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울러 형신을 받고 정배되었다. 흥윤은 도망했는데, 수색했으나 잡지 못했다.
5월 21일 갑자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정고(呈告)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타일렀다.
헌부가 아뢰기를,
"영녕전(永寧殿)을 수리하는 역사는 상신(相臣)이 맡고 중신(重臣)이 검사했으니, 그 역사를 중히 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습니다. 듣건대, 상께서 또 중사(中使)를 별도로 보내어 감독하게 했다고 하는데,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종묘의 사체는 지극히 엄하고도 중하여 다른 건축에 비길 바가 아니니, 내관(內官)이 감독하는 것은 더욱 불안합니다. 별도로 중사를 보내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엄한 내용으로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또 이르기를,
"영녕전을 수리할 때 별도로 중사를 보낸 것은 일찍이 고사(故事)가 있었고, 이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너희들의 말은 매우 근거가 없다."
하였다. 장령 이숙달이 엄한 교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피혐하는 글을 보니, 내용이 뒤섞이고 복잡하여 말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망언은 말할 가치도 없다. 다만 대각에 공정한 의논이 하나도 없는 것을 미워한다."
하였다. 장령 소두산(蘇斗山)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면서, 중사(中使)가 공사를 감독할 수 없다는 것과 잘못된 전례를 준수할 수 없다는 것을 갖추어 진달하고, 또 상의 마음이 치우쳐 가리운 바가 있으며 말씨가 화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언급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아, 근래 일처리가 잘못되었는데도 교묘하게 꾸미는 일이 풍조를 이루었구나. 비답을 조용히 살펴보며 일처리를 소급해서 반성해본다면 전도되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온천에서 돌아와 직책을 오랫동안 띠고 있었고 전(殿)의 수리가 또한 두 달이 넘었으니, 만약 온당치 못하다고 여겼다면 왜 언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일찍이 일언반구도 없다가 이제야 운운한단 말인가. 문을 막아놓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귀를 틀어막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내가 알 수가 없구나. 이로써 본다면 불공정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릴 수 있겠는가. 이 일이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대각에서 이런 바르지 못한 마음을 싹틔우다니, 풍조가 좋지 못하다. 이것이 내가 깊게 미워하며 통렬하게 배척하는 이유이다."
하고, 인하여 사직하지 말라고 명했다. 헌납 이동로, 정언 권격 등이 처치하기를,
"대신과 중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으니 환시(宦寺)가 간여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품은 생각이 있어 바로 진달함은 대각의 체모를 깊이 터득한 것입니다. 숙달과 두산을 아울러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헌부의 계사는 말뜻이 전도되어 있었는데, 이번 처치는 도리어 더 전도되어 있다. 내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권격·이동로가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고, 이숙달·소두산이 재차 피혐하자,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도록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유학 이석복(李碩馥)의 상소는 오로지 신만을 공격하였는데, 그 얽어 날조한 것이 인신(人臣)으로서의 지극한 죄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원래의 상소가 아직 내려오기 전이라 신이 감히 곧바로 진달할 수 없어, 삼가 성상께서 결단하여 빨리 국법을 거행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얼핏 듣건대, 열흘이 지나도 지시하는 바가 없으니 신은 두렵고 떨려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돌아 보건대 신은 더러운 모욕을 심하게 받았으니 이미 하루도 직책에 있을 수 없습니다. 제사(諸司)의 긴급한 일 또한 한결같이 비워둘 수 없고, 영녕전을 수리하는 일이 지금 한창인데 도감 당상이 근래 매우 들쑥날쑥하여 심지어 상량(上樑)하는 날에도 인원을 갖추지 못했으니, 일의 체모상 매우 거칠고 소략합니다. 직명을 깎아 고치고, 이어 형조에 내려서 신의 죄를 법에 따라 논죄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2일 을축
상이 중사(中使)를 몰래 보내어 영녕전 수개 도감을 적간(嫡奸)하게 했는데, 이때 시각이 이미 유시(酉時)였다. 당상과 낭관들이 모두 업무를 마감하고 귀가했었기 때문에 중사가 이를 꼬투리로 잡아 보고했다. 상이 도청(都廳)인 홍만용(洪萬容)·오두인(吳斗寅)을 명초하여 정원에서 유문 입대(留門入待)하게 해놓고 밤새도록 묻는 말이 없었다. 무릇 적간할 때는 반드시 사관(史官)과 중사(中使)가 함께 나가는 것이 관례인데 단지 중사만을 보낸 것은, 상의 뜻이 외조(外朝)에 비밀로 한 채 부정의 유무를 탐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5월 23일 병인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유시 말엽에 도감을 적간했더니 도청 두 명 중 한 사람도 남아 있는 자가 없었다. 무릇 도감의 규정은 오후에 마감하고 귀가하는 것이 관례인가?"
하니, 홍만용이 대답하기를,
"어제 일제히 모여야 할 일로 곧장 옥당에 갔다가 미처 도감에 정상 근무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오두인이 대답하기를,
"어제 오후에 장인의 상(喪)이 났다는 말을 듣고 황급하게 나갔기 때문에 적간에 꼬투리를 잡혔습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정원에 하교하기를,
"중사가 적간할 때, 당상과 도청이 한 명도 역소에 머물러 감독하는 자가 없었으며 낭청도 인원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대각의 계사와 어찌 그리도 서로 어긋나는가.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은 비록 불안한 일이 있다 하나 한결같이 인혐하면서 나오지 않으니, 도감의 사체상 온당하지 못하다.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고 즉시 나아와서 직무를 살피게 하라.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은 홀로 도감의 자리에 참여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적간할 때에 벌써 도청에 남아 있지 아니했으며, 오두인은 비록 절박한 상(喪)을 당했다 하나 조정에서 응당 휴가를 지급해야 할 규정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모두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우선 추고하라. 도청 홍만용은 어찌 감히 본관의 일을 핑계대면서 이렇게까지 홀만하게 군단 말인가. 또 낭청 김우경(金宇慶)은 이유도 없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들을 아울러 나문 정죄하라."
하였다.
함경도 안변(安邊) 등 10고을에 황충이 심하게 발생하였다.
5월 24일 정묘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내 뜻을 이미 다 말했으나, 경은 사직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마음이 참으로 황급하여 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지금이 참으로 어떤 때인가.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백성의 일도 매우 어려우니, 큰 강을 건너는 데 나룻터가 없는 것으로도 그 위급함을 비유할 수 없다. 오직 경은 오래된 덕망과 두터운 명망을 지녀 그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니, 이치상 무관심하게 볼 수도, 의리상 한가롭기를 바랄 수도 없다. 비록 불안하여 사직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때에 따라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옛사람도 귀하게 여겼는데, 어찌 잗단 일로 인하여 시종일관 허물을 인책하는가. 더구나 재상의 자리가 비어 있는 지 거의 일 년이나 되니, 고금(古今)에 이와 같으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나는 참으로 한심스럽게 여긴다. 경이 아무리 간절히 사직하더라도 내가 윤허할 리가 없으니, 경은 모름지기 더욱 안심하고 굳이 사직하지 말라. 들어와 병을 조리하면서 대궐에 누워서라도 도를 논하여 나랏일을 도와 이루어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정언 윤진(尹搢)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은 병들어 누워 있는 중에 삼가 ‘중관(中官)이 영녕전의 역사를 감독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헌부의 계사를 보았습니다. 대개 중관이 바깥 일을 간여한 데 따른 폐해는 역대의 분명한 증거가 모두 남아 있고 고인이 누누이 경계시켰으니, 전례(前例)의 유무는 논할 것도 없습니다. 직접 일의 체모를 진술하여 간쟁하는 것은 뜻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말이 참으로 이치에 합당한데도 전하께서는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공변되지 않고 바르지 않다고 배척하시니, 신은 너무나도 의아스러웠습니다. 한밤중에 조용히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어제 내리신 비망기를 받든 연후에야 깜짝 놀라고서 비로소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대론(臺論)이 나오게 된 것이 곧 도감(都監)의 신하들이 임의대로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해주려고 그렇게 하였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과연 그렇다면 전하께서 대각을 의심하는 것이 슬프게도 또한 너무 심합니다. 설령 대각의 마음씀이 실로 전하께서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형편없다고 하더라도 성상의 포용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그 말의 시비와 가부를 살펴야 할 뿐이지 그 마음씀이 어떠한가를 미리 헤아려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이처럼 전하께서 미리 헤아리시는 것이 실정을 벗어난 지나친 의심인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아무리 간사하고 불충한 자라도 진실로 대단히 자기에게 절실한 이해(利害)가 아니라면, 오히려 감히 도에 어긋나는 것으로 임금을 속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도감 신하들의 근무상의 문제가 대각의 일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감히 사사로운 뜻을 가지고 기꺼이 임금을 속여 간사한 자들도 범하지 않는 죄에 스스로 빠지겠습니까. 전하께서 혹시 이로써 마음을 평온히 하고 서서히 궁구하시면, 자연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의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의 총명한 임금은 미리 억측하는 것을 지혜로 여기지 않고, 너무 세밀히 살피는 것을 총명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스스로 어둡고 불분명한 것을 편안히 여겨 흐지부지하게 깨달아 살피는 것이 없고자 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천지의 도량을 넓히고 임금의 도량을 키우고자 한 것입니다. 도감의 여러 신하들은 역사를 감독하는 직책에 있으면서도 날이 저물기도 전에 퇴근하여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았으니, 혹 추고하거나 혹 나문하는 것은 진실로 합당한 죄입니다. 다만 이번 적간(嫡奸)의 조치가 마침 대론(臺論)이 성상의 뜻을 거스른 즈음에 실시되었으니, 만약 전하께서 혹 뜻이 있어 일을 벌이셨다면 신은 삼가 성인의 중화(中和)의 덕에 손상됨이 있고, 뭇 신하들도 전하의 깊이를 엿보게 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또한 이조 판서 김수항의 경우, 거듭 흉인(凶人)의 낭자한 무함을 받아 한번 진정(陳情)하였는데, 소비(疏批)를 내리긴 하였지만 흉인의 소를 아직까지 안에 머물려 두고 계십니다. 이에 처분이 분명하지 않고 실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도감의 역사(役事)가 아무리 중하더라도 감히 갑자기 나올 수 없는 것은 염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인혐하고 들어가버리기만 한다고 책망하고 추고하라는 명까지 내리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중신(重臣)을 대우하는데 염치로써 하지 않고 한갓 강제로 핍박하여 몰아가는 것입니다. 신하를 예(禮)로써 부리는 도는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5월 25일 무진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남구만(南九萬)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5월 26일 기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요즘은 인심이 옛스럽지 못하여 사사로운 뜻이 횡행하고 있다. 지금 이 이석복(李碩馥)의 상소는 매우 바르지 못하다. 죄를 주자니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막 내린 상황이고, 주지 않자니 나의 마음이 유쾌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죄를 주는 것도 옳지 않고, 답하는 것도 옳지 않다. 이 상소는 물리치도록 하라."
상이 숭문전(崇文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우상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곧 듣건대, 이석복의 소 때문에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통렬히 배척하고 분명하게 분별하셨다 하니 참으로 매우 다행입니다. 김수항의 정세가 비록 불안하지만 도감의 일은 매우 긴급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미 통렬하게 분별하였으니 한결같이 인혐하고 들어가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석복의 상소는 옛날 권세를 가진 간신들의 일을 낱낱이 들어 사류(士類)를 일망 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말과 뜻이 너무나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김수항이 이미 배척을 받았으니 염치에 관계된 바로 형세상 공무를 보기가 어려운데, 지난번 엄한 교지를 내려 특별히 추고하라고 명하기까지 하여 강제로 핍박하여 출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중신을 대우하는 도리는 이와 같아서는 안될 듯합니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헌부의 계사는 이제 와서 추후로 논계하는 것이니, 비록 아무 의미가 없다고는 하겠으나 이로 인하여 사태가 악화되어 누차 엄한 비답이 내렸으니 미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계사를 보니 처음에, 이미 상신(相臣)에게 검사하도록 명하고 또 중신(重臣)에게 명하여 맡도록 하고는 별도로 중사(中使)를 보냈으니 대신(大臣)에게 맡기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겠다 하고, 또 묘우(廟宇)는 지극히 엄한 곳이므로 내관으로 하여금 맡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묘우가 지극히 엄한 곳이라고 한다면 어찌 이것을 가지고 곧바로 논계하지 않고 상신이니 중신이니 하는 말을 먼저 그 위에 넣어서 의견을 주장하는 자료로 삼는단 말인가. 또한 도감이 역사(役事)를 시작한 지 이미 두 달이 되었는데, 외조(外朝)에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별도로 중사를 보낸 것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애당초 한마디 말도 없다가 지금 와서 논계하여 마치 처음 들은 것처럼 하니, 그 전도되고 근거 없음이 이보다 심한 경우가 없다. 따라서 내가 이런 뜻으로 비답을 했더니,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 도리어 나를 그르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놀랄 만하다. 그리고 선묘조(宣廟朝)에도 내관을 보내어 감독했으니, 어찌 전례가 없단 말인가."
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사관을 보내지 않은 채 중사만을 보내어 적간한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며, 또한 후일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하니, 상이 이것도 전례가 있다고 하였다. 상이 선징에게 이르기를,
"‘위태로움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러 모든 근심이 한꺼번에 모여드니, 지금은 대신이 오랫동안 물러나 있을 때가 아니다. 정세가 편치 못하다는 이유로 끝내 나랏일을 저버려서는 안 되니, 속히 올라오라.’는 뜻으로 좌의정이 있는 곳에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간사한 소인의 말은 개의할 것이 못 되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인혐하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 것이며, 속히 직무를 보도록 하라."
5월 27일 경오
김만기(金萬基)를 승지로, 박세견(朴世堅)을 사간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지평으로 삼았다.
장령 이숙달(李叔達)·소두산(蘇斗山)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재차 피혐하니,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다.
헌납 이동로가 아뢰기를,
"이석복이 황연을 이어 일어나 구언 교지에 응한다고 칭탁하고는 앞장서서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 임금을 위태롭게 하고 조정의 인사들을 모욕한 정상은 참으로 황연과 안팎으로 호응하였으나, 근거 없는 말을 하고 추측하며 농간을 부리고 시험한 작태는 황연보다 심한 점이 있습니다.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28일 신미
장령 이숙달·소두산이 패초(牌招)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헌납 이동로가 아뢰기를,
"지난번 이석복이 소를 올린 날에 정원이 그에게 그 상소를 읽게 하자, 구절도 이을 줄 모르고 글뜻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끝내 계품한 일이 없었으니, 출납을 성실히 해야 하는 도리로는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해당 승지를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9일 임신
영상 홍명하(洪命夏)가 열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을 이미 전후 비답에서 다 말했는데도 경이 여전히 사직서를 올리니 부끄럽고 부끄럽다. 성의(誠意)가 미덥지 않은 것을 깊이 탄식한다. 내 뜻은 확고히 정해져 있으니 결코 뜻을 따라주기는 어렵다. 빨리 사직 상소는 그만 올리고 즉시 나와서 도를 논하여, 갈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승지를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5월 30일 계유
이단하(李端夏)를 겸보덕으로, 최관(崔寬)·송창(宋昌)을 장령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겸설서로 삼았다.
금부가 홍만용(洪萬容)과 김우경(金宇慶)의 원정(元情)을 가지고 조율하여, 장 팔십(杖八十)을 속(贖)하고 탈고신삼등(奪告身三等)하는 데 해당한다고 아뢰었는데, 상이 장을 집행한 뒤 풀어주라고 명했다. 정원이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재차 복역(覆逆)하면서 간쟁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간원이 또 벌을 시행하는 것이 중도를 잃었다는 이유로 굳게 간쟁하니, 따랐다.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이석복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7월 (0) | 2025.12.05 |
|---|---|
|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6월 (0) | 2025.12.05 |
|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윤4월 (0) | 2025.12.05 |
|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4월 (0) | 2025.12.05 |
| 현종개수실록17권, 현종 8년 1667년 3월 (0) | 2025.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