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갑술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마음을 편안히 하고 조리하라고 답하였다.
교리 이유상(李有相), 부교리 이단하(李端夏) 등이 차자를 올렸다. 그 대략에,
"지난번 나랏일이 불행하여 풍랑이 크게 일어나니, 간사한 자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그 술수를 제멋대로 부렸는데도, 전하께서는 그들을 깊이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음흉하고 간특한 자들의 분수에 넘치는 일을 바라는 마음이 날로 자라나서 지금 이석복(李碩馥)의 상소가 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의 말이 먼저 전관(銓官)을 지척하게 된 것은 대개 김수항(金壽恒)·조복양(趙復陽)이 누차 전선(銓選)을 맡아 사론(士論)의 추중을 받고 있었기에, 만약 먼저 이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면 조정의 선류(善類)들을 차례로 다 쫓아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서 없는 말과 망극한 참소로써 추잡하게 욕하고 없는 사실을 얽어 조금도 돌아보고 꺼려함이 없으니, 그밖의 흉악하고 교활한 말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8인의 간쟁한 신하들을 석방한 것은 나약함을 보인 결과이며 윤선도(尹善道)를 석방하지 않은 것이 재앙을 부른 연유가 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다만 이 몇 가지 조목만 보더라도 그 말이 매우 패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한 통의 상소의 뜻이 오로지 당비(黨比)만을 가지고 말을 하여, 심지어 군부(君父)를 우롱한다느니 임금의 형세가 외롭고 약하다느니 하는 말들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는 계책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여 해를 입힐 때 항상 하는 말입니다. 신 등은 참으로 전하께서 그 도깨비 같은 작태를 통촉하시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분이 분명하지 못하고 악을 징계함이 엄하지 않으면 흉악한 무리들이 장차 반드시 계속해 일어나서, 선류들로 하여금 다시는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잘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 하는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환관의 직책은 다만 명령을 전하고 물 뿌리고 소제하는 일을 잘 해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이들이 수리하는 일을 감독했던 고사(故事)가 있는지의 여부를 신 등은 감히 알 수 없지만, 대개 일의 체모를 가지고 말한다면 묘우(廟宇)를 중건하는 역사는 대신과 중신들이 이미 전적으로 맡고 있으니, 별도로 중관(中官)을 보내는 것은 참으로 온당한 거조가 아닙니다. 대신(臺臣)이 애당초 간쟁하지 않다가 이제와서 비로소 말한 것은 비록 뒤늦게야 한 잘못을 면할 수 없지만, 또한 그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바야 무슨 공정하지 못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하의 의혹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평소 대각(臺閣)의 날카로운 논계를 싫도록 들었기 때문에, 생각이 화평치 못하여 이처럼 억측으로 느닷없이 분부를 내리시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옛날 당(唐)나라 헌종(憲宗)이 환관으로 하여금 관역(館驛)을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니, 좌보궐(左補闕) 배린(裵潾)이 간언하기를, ‘내신(內臣)과 외사(外事)를 맡은 신하는 직분이 각기 다르니, 벼슬을 침해하는 근원을 막고 자신의 지위를 벗어나는 조짐을 끊어야 합니다. 일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처음에 경계해야 하니, 지금 혹 방해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그 일이 커지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역을 자세히 조사하는 것은 자잘한 일인데도 옛사람이 간언하기를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묘우를 중건하는 역사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하필 환관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 참여하여 검사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6월 2일 을해
평안도에 비가 많이 내려 벼가 손상을 입었다.
정언 권격(權格)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앞 시대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니, 나라가 어지럽고 망하게 되는 징조가 환관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예로부터 총명한 임금과 의로운 임금은 절대 환관이 외조(外朝)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궁정에서 물 뿌리고 소제하는 일에 충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성스러운 조정에 이르러서는 그들을 더욱 엄하게 대우하였으니, 원대한 계획을 물려주고 뒷날의 폐단을 막을 수 있는 그 훌륭한 법제는 지극하고도 극진한 것입니다. 어찌 오늘날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이번 영녕전을 수개하는 일은 이미 궁궐을 수리하는 것과는 일의 체모가 다른데이겠습니까. 그리고 대소 신료들로 하여금 살피고 감독하게 했으니, 환관이 함께 참여하게 되면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전날 헌부가 청한 것은 일의 체모상 온당치 않다는 뜻으로 논한 것에 불과합니다. 애당초 성낼 만한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엄한 비답을 내려 너무 심하게 기를 꺾고, 심지어 그것이 고의적이었다는 등의 말로써 억지로 죄안(罪案)을 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아, 대신과 중신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대각에 대해 의심하시는 것이 날마다 한층 더해지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신임을 하는 자가 환관들뿐 아닙니까. 위대하신 임금의 말씀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한마디 말로써 나라를 잃는다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이로인하여 마음이 격동되어 또 해가 저문 뒤에 적간하도록 하여 도청의 낭청들을 한밤중에 불러오게 하고 다음날 늦게야 잡아다가 심문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러한 거조가 비록 태만함을 미워하여 징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만일 원근에 전파되기를, ‘전하께서 환관이 한 일만을 믿어 대각과 도감이 모두 죄를 얻었다.’고 한다면,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침이 어떠하겠습니까.
무릇 적간할 때에는 중사(中使)가 왕명을 선포하고 정원(政院)과 사관이 역마를 타고 함께 가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 의도한 바가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닌데, 지난번 도감을 적간할 때에는 정원이 알지 못하고 사관도 가지 않은 채 중사가 혼자 내구마(內廐馬)를 타고 지름길로 갔다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전하께서 한때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일을 처리하여 전해내려온 국가의 제도를 준수하지 않으신다면, 이에 따른 뒷날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지금 만약 뜻을 따라 준다면 바로 간사한 자들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니, 조정의 처치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6월 3일 병자
헌납 이동로(李東老)가 아뢰기를,
"이석복에 대해 죄를 청한 논계에서 애당초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라는 것으로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물의가 ‘석복이 상소를 올린 날에 정원이 그로 하여금 그 상소를 읽게 하자 겨우겨우 구두를 떼고 글뜻은 분명히 알지 못하였으니, 남의 사주를 받고서 사류(士類)를 모함하려 한 정상을 숨길 수 없고 보면, 먼저 사실을 조사하여 밝힌 연후에 차차 논죄하는 것이 일의 체모상 당연하다.’고 합니다. 신이 애당초 의율(擬律)할 때 마땅함을 잃은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정언 권격이 처치하여 출사시키도록 청하자, 따랐다.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로서 사림에 화를 전가하고자 하는 자들은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민간에 묻혀 사는 사람을 사주하여 이름을 빌려 상소를 올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금 이석복의 상소를 보니, 의도가 아주 간특하여 내용이 참혹하며, 틈을 노려 무함하여 구구절절이 위험하니, 그 미리 헤아려 준비한 작태는 진실로 구언(求言)이 내리자 일시에 갑자기 발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 정원에서 그로 하여금 그 상소를 읽게 하자 구두를 겨우겨우 떼고 글뜻은 알지 못했다고 하니, 스스로 작성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흉악한 상소를 지어 주고 상소를 올리도록 꾀인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상소를 받들어 들인 승지도 이미 품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으니, 대신 흉악한 상소를 올린 석복의 죄는 왕법에 있어서 조사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소를 진달한 이석복을 유사로 하여금 가두게 하고 엄하고 분명하게 조사한 뒤에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6월 5일 무인
남구만(南九萬)을 승지로 삼았다.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이석복이 구언 교지에 응한다는 핑계로 감히 흉악한 상소를 올려, 심지어 권세가 아래로 옮겨갔다느니, 임금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하다느니 하는 말들로 성상의 귀를 현혹시키고 조정의 신하들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여 너무도 과격하고 놀랍게 날조하였습니다. 더구나 정원에서 상소를 읽게 했을 때 겨우겨우 구두를 떼고 글뜻을 알지 못했으니, 그가 남의 사주를 받아 대신 상소한 작태가 분명합니다. 인조조에 김원(金垣)을 다스린 고사에 의해서 엄하고 분명하게 죄상을 규명하여 처치의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8일 신사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권대운(權大運)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승지 장선징, 병조 참판 이정영 등이 상소하여,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이 역적 누명을 썼으니 원통함을 풀어주기 바란다고 진달하고, 천안(天安)에 사는 진사 이중명(李重明)이 상소하여, 명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사당을 세우고 양호(楊鎬)와 이여송(李如松)을 배향하여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준 고마움에 보답하기를 청하였는데, 오랫동안 회보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두 상소에 대하여 가부를 물으니, 우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덕인이 역모에 참여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혹 억울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추대(推戴)했다는 말이 역적 괴수의 공초에서 나왔습니다. 신원해 주는 것에 대해 지금 와서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됩니다. 황제의 사당을 외국에서 창건하는 것은 전고에 없던 일이며, 지금은 시기도 적당치 못하니, 그의 말을 따라 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6월 10일 계미
영의정 홍명하가 또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빌었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3일 병술
고양(高陽)에 사는 어미를 죽인 죄인인 수남(守男)을 처형하였다. 수남은 본래 서울에 살던 자였기 때문에 읍호(邑號)를 강등하거나 수령을 파직하는 등의 일이 없었다.
영의정 홍명하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 14일 정해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유철(兪㯙)을 개성 유수로, 남이성(南二星)을 부교리로 삼았다.
영유(永柔)에 있는 제갈 무후(諸葛武候)의 묘호(廟號)를 와룡(臥龍)으로, 강계(江界)에 있는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원호(院號)를 계몽(啓蒙)으로, 철원(鐵原)에 있는 김응하(金應河)의 묘호를 포충(褒忠)으로, 경성(鏡城)에 있는 정문부(鄭文孚)의 묘호를 창렬(彰烈)로 내렸다.
제갈 무후의 사당은 만력을사012) 에 창건되었는데, 오래되어 중간에 폐해졌다가 이 때에 이르러 연신(筵臣) 이민서(李敏敍)가 중건할 것을 진달하였다. 문원공 이언적은 을사년 사화에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013) , 김응하는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무오년에 심하(深河)의 전쟁에서 절사(節死) 했는데014) 집이 철원에 있었다. 정문부는 북평사로서 임진년 난리를 당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북로(北路)를 수복하였다. 때문에 모두 사당을 세워 향사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이들 각처의 사민(士民)들이 사액하기를 청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다시 병을 핑계로 면직을 청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을 내려 답하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도록 하였다.
6월 15일 무자
상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우의정 정치화, 예조 판서 홍중보, 호조 판서 김수흥을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추향 대제(秋享大祭) 날짜가 다가오니, 영녕전(永寧殿)을 반드시 그전에 도로 봉안하여야만 군색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중보가 아뢰기를,
"일관(日官)에게 물어 보니 7월 6일이 길하다고 합니다. 이날 도로 봉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관동 지방에 가서, 유리걸식하는 굶주린 백성들이 어린아이를 업고 도로에 연이어, 경기와 호서·영남 지방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는 자가 매우 많은 것을 눈으로 보았는데, 보기에도 참혹하였습니다. 현재 보릿가을은 비록 지났지만 추수는 아직도 멀었습니다. 이처럼 굶주린 무리들은 만약 여러 도(道)에 분부하여 그들이 있는 곳에서 구휼해 주지 않는다면, 필시 굶어 죽게 되는 근심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북로의 유민으로서 양서(兩西)에 흘러들어 온 자에게는 일찍이 이미 필요한 물건을 대어주어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도록 분부하였으나, 관동의 굶주린 백성에 대해서는 다만 본도로 하여금 별도로 구휼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민유중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런 뜻으로 경기와 호서·영남 3도의 감사에게 하유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삼성 추국을 할 때 지평 조원기(趙遠期)는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다가 다시 패초한 뒤에야 나와 참여했습니다. 조정에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렇게 하겠습니까. 신이 고사를 듣건대, 비록 연로한 높은 관직의 인물이라도 패초를 받으면 반드시 나와야 하고, 다시 패초하는 규례가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관원들이 태만하여 패초에 나오지 않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니, 진실로 놀랍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하번 한림 홍만종(洪萬鍾)은 직소(直所)에서 병을 이유로 마음대로 나가 세 번 패초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았으며, 봉교 윤경교(尹敬敎)는 고풍(古風)을 떨어뜨렸다고 하면서 소를 올리고 나가더니 역시 세 번 패초하였는데도 나오지 않아 네 번째 패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기강이 해이해지고 국사가 느슨해진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만종을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고, 이어 윤경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저 한림(翰林)도 몹시 온당치 못하였다."
하니, 경교가 황송하여 어쩔줄을 몰라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염치를 갈고 닦는 것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요즈음 조정의 신하들은 염치만을 일삼아 때때로 동료들 간의 말로 인해 정사(呈辭)하거나 소를 올리고는 자리를 비우고 직무를 폐기하여, 서로 화합하기를 바랄 수가 없으며 부지런히 직무에 종사하는 것조차 안되고 있습니다. 대간이 만약 신의 말을 듣는다면 반드시 한바탕 피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품은 생각이 있으니 어찌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의 선비들이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혹 고신(告身)을 빼앗기기까지 하는 자들이 매우 많은데도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도 징계함이 없습니다. 특히 주의(注擬)할 즈음에는 더할 나위 없이 구차하고 간략하여, 비록 수령 자리 하나에도 장부를 들춰가면서 하나하나 꼽아보아도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끝내는 구차하게 채워 보냄을 면치 못합니다. 한 고을을 다스리는 임무가 비록 작지만 참으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온 경내의 백성들이 적지 않게 피해를 받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전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어미의 상을 당하였는데, 집이 매우 가난하니 은전을 내려 보살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본도에 명하여 장례 물품을 주게 하였다.
6월 16일 기축
지평 조원기(趙遠期)가 대신에게 배척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체직하였다.
6월 18일 신묘
상이 도로 정전(正殿)에 거처하고, 평소의 반찬 가짓수를 회복하였다. 이는 가을철이 이미 이르렀기 때문이다.
6월 20일 계사
영의정 홍명하가 열 여섯 번째 정사(呈辭)하니, 상이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시사(時事)가 어렵고 근심스러운 것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경은 반드시 알 것이다. 한번 강촌(江村)에 눕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않는 듯하니, 이 무슨 일인가. 나라를 위하는 도리가 어찌 구구한 말단적인 일에만 달려 있단 말인가. 성의와 예의가 얕아 떠나려는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없으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경이 비록 나를 염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유독 양조(兩朝)께서 알아주고 대우해준 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무익한 말을 일삼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하여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사간 박세견(朴世堅), 헌납 이동로(李東老), 정언 권격(權格)이 아뢰기를,
"김우석(金禹錫)·이익(李翊)·김익렴(金益廉) 등의 일은 실로 세도(世道)의 큰 변고이고 사대부들의 큰 수치입니다. 그런데 조정의 처분이 끝내 명쾌하게 되지 못해 시비가 엇갈려 옳으니 그르니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국가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다시 끝까지 따져서 임금을 속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사로 하여금 피차의 공사(供辭)와 편지를 가져다 상고해서 이쪽과 저쪽을 참고하여 엄명하게 조사해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별로 물을 만한 일이 없다. 계사가 온당한 것인지 내 모르겠다."
하였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북병사 이만영(李晩榮)을 인견하였다. 상이 묻기를,
"경은 일찍이 북관(北關)에 가본 적이 있는가?"
하니, 만영이 아뢰기를,
"일찍이 본도 도사(都事)로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관방(關防)의 형세와 육진(六鎭)의 풍습 그리고 관시(關市)와 채삼(採蔘)의 폐단에 대해 묻고서 위로하고 타일러서 보내었다.
6월 21일 갑오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본직의 체직을 허락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민주면(閔周冕)을 승지로, 정화제(鄭華齊)를 지평으로, 김세행(金世行)을 정언으로, 이상진(李尙眞)을 함경 감사로, 남용익(南龍翼)을 경상 감사로, 민점(閔點)을 전라 감사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이유(李秞)를 보덕으로, 이단하(李端夏)를 겸문학으로,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홍처량(洪處亮)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6월 22일 을미
영의정 홍명하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어제 내리신 사직 단자에 대한 비답에서는 성상의 유시가 더욱 간절하여, 신에게 양조(兩朝)께서 알아주고 대우해준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더욱 두렵고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오늘날 나랏일의 어려움과 근심은 한 두 가지로 세기 어렵습니다. 안으로는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말하기도 어려운 근심이 있고, 밖으로는 민심이 원망하며 등져 땅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형세가 있으니,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근심하고 있습니다.
신이 비록 강교(江郊)에 물러나 있지만 늘 나라를 근심하는 그 생각이야 어찌 조금이라도 해이해진 적이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대궐을 향하여 빌고 또 축원했던 것은 다만 전하께서 해와 달같은 밝음을 키워 소장(消長)의 기미를 살피고, 어진 덕행을 가진 이를 다시 가려 뽑아 더불어 임금의 자리를 함께 하며, 공도(公道)를 넓혀서 분열된 조정의 의논을 조정하고, 절약과 검소를 힘써 행하여 원망하며 등진 민심을 수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신같이 이미 한번 일을 그르쳐 실패한 자를 빨리 배척해버리도록 허락하여 늘그막의 절개를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도 또한 성스러운 조정이 사풍(士風)을 진작하고 염치를 기르는 하나의 방도입니다. 신이 비록 산지(散地)에 있지만 성상의 은택을 흡족히 입고 있으니, 국가에 급한 일이 있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한다면 조정에서 알아주고 대우해준 은혜를 저버림이 없고, 또한 사대부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뜻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구구하나마 지극한 바람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소원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은 옛날에도 같지 않았다. 나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나랏일이 우선이고 아랫사람의 뜻을 체득하는 것은 그 다음이며, 경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고 일시의 혐의는 말단적인 것이다. 경은 일시의 혐의를 가지고 굳게 누워 움직이지 않으면서 나에게 아랫사람의 뜻을 체득하는 도리를 바랄 수 있는 것인가. 나의 뜻은 바꾸기 어렵고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어가는데도, 경은 끝내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단 말인가.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하여 위급한 나랏일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전라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제주 목사 홍우량(洪宇亮)의 첩보로 인하여 치계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제주 목사가 ‘당선(唐船) 1척이 본주로 표류해 왔는데, 그들이 타고온 배는 조각조각 부서졌으며, 배 안에 싣고 있던 물건은 모두 물에 잠겨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표류해 온 95명을 이제 막 육지로 올라오게 하였는데, 모두 머리를 깎지 않았고 입은 옷을 보고 말을 들어 보니, 중국 사람임이 분명하였다. 그들 중 우두머리인 임인관(林寅觀) 등을 불러 사는 곳과 표류해 온 사연을 쓰게 하니, 「명나라 복건성(福建省)의 관상인(官商人)으로서 장사하는 일로 일본에 가다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이곳에 표류해 왔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소서."
6월 23일 병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묻기를,
"지금 이 표류해 온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니,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끝까지 비밀로 하기 어려운 일이니, 북경으로 압송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모두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는데, 청나라에 귀속하지 않은 자들인가?"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명나라 때에는 표류해 온 사람을 혹 사신이 가는 편에 부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미세한 일이라도 번번이 질책하니, 반드시 재자관(齎咨官)을 별도로 정해 압송한 뒤에야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민유중이 이르기를,
"북경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참으로 차마 못할 일입니다. 듣건대, 이들은 일본으로 가고자 했다 하니, 예수교도[耶蘇敎徒]라고 하면서 일본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혹 가할 듯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수교도라고 했던 일을 저들이 만약 듣는다면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문서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질책을 가하니, 만약 변읍(邊邑)에서 곧바로 일본으로 보낸다면 뒷날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더라도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들이 머리를 깎지 않았으니, 명나라 사람이 분명한데, 청나라로 압송한다면 실로 불쌍할 것입니다."
하니, 치화가 일어나 절하면서 아뢰기를,
"남한 산성의 일은 참으로 차마 말할 수 없거니와, 군사를 조발해 보낸 일도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로서는 오직 모든 일을 반드시 삼가해야 합니다. 지금 만약 차마 못 보내었다가 일이 누설되어 버린다면 또한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신의 소견은 이와 같습니다.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어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차마 못할 점이 있으나, 후환이 있으면 어쩌겠는가."
하니,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가령 변신(邊臣)이 애당초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곧장 지휘하여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일이 지금 이 지경이 되었으니, 몹시 불행합니다."
하고, 지사 유혁연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힘이 약하여 이미 저들을 섬기고 있으니, 일에 따라 곡진히 삼가하여 저들로 하여금 질책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들여보내지 않았다가 혹시라도 간사한 소인들이 저들에게 몰래 일러바쳐서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게 될 경우에는 끝까지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형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지금 들여보내지 않았다가 뒤에 사문하는 일이 있을 경우, 저들은 반드시 도망한 백성[逃民]을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으로 질책하지, 한인(漢人)으로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들이 이미 명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차마 들여보낼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민유중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차마 못하였다가는 큰 걱정이 생길 것이니, 그럴 경우 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판윤 오정일(吳挺一)이 아뢰기를,
"이 무리들을 지금 압송한다고 해도 저들이 반드시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끝내 압송하는 것으로 의논이 정해졌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이석복(李碩馥)의 일에 대해 거듭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그 소장을 퇴각시킬 때 이미 하교한 바 있고, 또 김원(金垣)의 고사와는 다르니, 따르지 않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석복의 일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당초에 상소문을 읽었을 때 글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즉시 계달했어야 마땅한데, 그 당시 정원의 계사에는 이런 말이 없다가 요즈음의 대간 계사에서 비로소 나오고 있으니, 이것이 괴이쩍다."
하니, 유중이 아뢰기를,
"그 당시 승지가 서툰 데다가 날이 저물어 경황없어 계달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사간 박세견(朴世堅)이 김우석·이익·김익렴의 일에 대해 거듭 아뢰고, 또 당시 원리(院吏)와 방직(房直) 등을 추문(推問)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당초에 잡아다 추문할 때에는 여러 사람의 의논이, 추문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는데, 몇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끝까지 캐물어 실정을 알아내라는 청이 있으니, 내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만약 끝까지 밝히고자 한다면 잡아다 가두고서 추문하라고 청하는 것이 사체에 있어서 당연하다. 그런데 공사(供辭)와 서찰을 가져다 대조하여 밝히고자 하며, 또 원리와 방직을 추문하고자 하니, 일을 논하는 체모가 어찌 이같을 수 있으며, 조정에서의 처치 역시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윤허하지 않는 것이다."
하자, 박세견이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오직 한때의 공의(公議)를 아뢴다는 마음에서 감히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당초에 잡아다 추문할 때에는 곡직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였는데, 성상의 전교에, 이익과 김우석 등은 별로 물을 만한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풀어주고 김익렴에 대해서는 특명으로 삭직하여, 한쪽은 억울함을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억울하게 만드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조정에서의 처치가 명백하지 못하여서 지금까지 시비가 정해지지 않아 뭇 의논이 시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동료와 서로 의논하고 논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전교에서는 사체에 있어서 타당치 않다고 거듭 유시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초사(招辭)로 본다면 이 일의 시비는 본래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다시 실정을 조사해 내고자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허물을 없애주고자 하는 듯이 하니, 대간의 체모에 있어서 매우 타당치 않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헌납 이동로(李東老), 정언 권격(權格)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차자를 올리기를,
"표류한 사람들에 대한 일은 뜻밖에 나온 것이니, 그 처치가 매우 어렵습니다만, 그 문답한 말을 보니, 참으로 측은하여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말의 사실 여부는 논하지 않더라도 이미 아무 나라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대의(大義)로 논하건대 잘 처리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청나라로 붙잡아 보낸다면, 어찌 다만 한때의 차마 하지 못할 짓일 뿐이겠습니까. 오늘 등대(登對)에서 성상께서 분부하여 언급한 것도 또한 이점에 있었습니다만,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그 어디에서건 다 누설되어 뒷날 뜻밖의 화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려우니, 조정의 계책은 참으로 이것을 대단히 우려할 만한 것으로 여겨 그 처치의 방책을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 또한 급작스럽게 질문을 받게 되어 명백하게 지적하여 진달 드리지 못하고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일은 약한 나라의 형편상 참으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듣게 하더라도 반드시 가엾이 여겨 용서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의리의 소재(所在)는 사람들의 의견과 사려에 따라 각기 같지 않으니, 편의에 따라 잘 처리할 방도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한때 경솔히 하여 무궁한 후회가 있도록 하면 안될 듯합니다. 수상(首相)이 비록 아직 출사하지 않고 있지만, 나라의 큰일에 대해 수상으로서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다시 수상 및 여러 대신에게 묻고, 반복하여 익숙하게 강구하여 처리하면 거의 뒷날의 의론이 없을 것이며, 또한 일의 체모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신은 물러나간 뒤에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고 염려가 되어 감히 이처럼 참람되게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안에 머물려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6월 24일 정유
지평 홍주국(洪柱國)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어제 인대(引對)할 때, 이석복이 상소를 잘못 읽은 일을 정원이 당초에 계달하지 않았는데 대간의 논계에서 비로소 나온 것으로, 성상의 전교가 내렸다고 하니, 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 때 석복이 겨우겨우 구두를 떼고 글뜻은 이해하지 못하였던 상황을 정원이 비록 사실을 들어 계달하지는 않았었으나, 그 후 이정(李程)의 소에서 황급한 사이에 미처 첨가해 넣지 못하였다는 내용으로 말을 하였으니, 그것이 사실임은 다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양사(兩司)에서 논계한 것은 대개 여기에 근거해서 말한 것입니다. 지금 하교하신 것을 듣건대, 실로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으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대사헌 박장원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행 대사간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당초의 처치가 이미 명백하지 못하였다면 다시 시비를 따지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인을 추문하여 실상을 알아내려고 하였으니 대간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 몹시 구차합니다. 그리고 말이 비록 광망(狂妄)하였지만 이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였으니, 오늘날 대간의 아룀은 정도에 지나친 것임을 면치 못하는바, 그 나머지 곡절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미 연계(連啓)에 참여했으니 서로 다름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박세견(朴世堅)·이동로(李東老)·권격(權格)·홍주국(洪柱國)·박장원(朴長遠)을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5일 무술
지평 정화제(鄭華齊)가 소패(召牌)에 나아가지 않아 대신에게 배척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지평으로, 여민제(呂閔齊)를 헌납으로, 이선(李選)을 정언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삼았다.
경창(京倉)의 미(米) 3백 석, 전미(田米) 4백 석을 내어 경기 지역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영녕전 수개 도감(永寧殿修改都監)이 아뢰기를,
"지관(地官) 반호의(潘好義)와 함께 종묘의 뒤편 지맥이 파손된 곳을 간심(看審)해 보니, 흙을 채워넣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다음달에 번드는 도방군(到防軍)을 부역시켜 파손된 곳을 보수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사간 오두인(吳斗寅)이 아뢰었다.
"신은 지난번에 갑자기 장인의 상(喪)을 당하여서 물러나 상차(喪次)로 돌아가 있었는데, 이 일로 엄한 비답을 받고는 황공하여 어찌할 줄 몰랐으나 끝내 예율(禮律)을 범한 채 억지로 공무를 봄을 면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사방에서 비방이 몰려들고 마침내는 대신의 상소로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제수하는 명이 또 뜻밖에 나왔으니, 어찌 뻔뻔스런 얼굴로 대간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헌납 여민제가 아뢰었다.
"본원에서 현재 김익렴에 대해 논계하고 있는데, 익렴은 바로 신의 매부입니다. 혐의가 있어서 가부를 논할 수 없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영의정 홍명하가 다시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여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6월 26일 기해
지평 홍만형이 아뢰었다.
"사간 오두인이 피혐한 계사 중에 ‘대신(臺臣)의 상소를 통한 배척을 받기까지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른바 대신은 바로 신의 숙부인 홍주국입니다.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지평 정화제가 처치하여 여민제와 홍만형은 출사시키고 오두인은 체차하도록 하였다.
6월 27일 경자
유시(酉時)에 유성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서 남방의 하늘 끝으로 들어갔다. 꼬리의 길이는 5, 6 척이며, 빛깔은 창백(蒼白)하고 소리가 있었다.
영의정 홍명하가 비밀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제주에 표류한 사람들을 장차 경관(京官)을 보내어 압래(押來)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모르겠지만 압래해 온 뒤에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경연 석상의 대화 내용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묘당이 작년의 일을 경계로 삼아 이런 부득이한 거조가 있게 된 듯합니다. 지금 이 장사꾼들은 우연히 표류하였으니, 주회인(走回人)과는 크게 다르므로 우리가 편의대로 잘 처리하면 흔적이 없을 듯합니다. 단지 우리 나라의 기밀한 일은 전부터도 그 비밀이 잘 지켜지지 않았었으니 비록 뒷날 누설될 걱정이 없진 않지만, 이미 문서에 나타난 것이 없으면 나라에 화를 끼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이해(利害)는 논할 것 없이 인정으로 미루어 보고 의리로 결단해도 측은할 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생각건대, 일본이 만약 듣고 예수교[耶蘇敎]의 무리라는 데 의심을 두어 공갈(恐喝)의 자료로 삼는다면, 어떻게 해명하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 1백 명이나 되는 표류인이 경관(京官)을 보고 이런 일이 있을 것임을 안다면, 반드시 죽을 각오를 하고 온갖 계책을 낼 것입니다. 혹은 칼로 자결하거나, 배를 타고 도망친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안에 머물려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6월 28일 신축
교리 남이성(南二星), 수찬 박세당(朴世堂) 등이 상차하기를,
"권대운(權大運)이 헌부를 처치하면서 피혐한 계사의 본뜻에 의거하지 않고 관계 없는 말을 새로 창출하여, 첫 번째는 ‘전지에 응하였다.’고 하고, 두 번째에는 ‘정도에 지나치다.’고 하였으며, 끝내는 ‘그 나머지 곡절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억지로 처치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입니까. 설령 권대운의 뜻이 이석복을 깊이 죄주고 싶지 않았다면 전례에 의거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한 뒤에 마땅히 동료들과 더불어 상의하고, 논의가 서로 어긋날 경우에는 별도로 의견을 진달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처치하는 틈을 타서 단숨에 제거하기를 급급히 들이치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아, 구언한 뒤에 상소한 자를 죄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곧 초야에 살면서 조금도 꺼림없이 말하는 꼿꼿한 자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석복의 상소는 초야에 있는 꼿꼿한 자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죄를 바루고자 하면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지금 석복에 대해서는 전지에 응하였다고 비호하고 대간의 계사에 대해서는 정도에 지나치다고 배척하니, 공을 저버리고 사를 따르면서 방자하여 거리낌없음이 역시 심합니다.
그리고 ‘광망(狂妄)’ 두 자는 신하된 자들의 좋은 제목(題目)이니, 이를테면 한(漢)나라의 주운(朱雲)이 참마검(斬馬劒)을 청한 것과 당(唐)나라의 한유(韓愈)가 불골(佛骨)을 논한 표(表)에 있어서 그 본심을 따져 보면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여서 말이 과격함을 면치 못하였던 것으로, 이를 바로 ‘광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흉악한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에게 억지로 꿰맞추고자 하니,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어쩌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석복의 정상을 전하께서 통촉하시어 전하께서는 사특하다고 배척하시는데 권대운은 광망하다고 칭찬하고 있으며, 전하께서는 부정하다고 하시는데 권대운은 전지에 응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대간의 논계가 정도에 지나쳤다고 권대운에게 공격당한 것이 당연합니다. 대사간 권대운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정언 권격(權格)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삼가 듣건대, 중국 배가 제주에 표류해 왔는데 그 문답한 말과 정문(呈文)한 말뜻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막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도록 하는데, 조정에서 그들을 장차 청나라에 압송할 것이라 하니, 아, 이 무슨 거조입니까. 명나라의 후예들이 천자의 업(業)을 보존하였고 이 사람들이 이것을 매우 자세히 전하였으니, 중국을 생각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마땅히 일개 사자(使者)를 보내어 명나라의 관리들에게 빨리 알려 마치 고려(高麗)가 송나라 말엽에 했던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사람들을 원수처럼 보아 속박하고 욕을 보인 뒤, 굶주린 호랑이 입에 던져 넣어 기꺼이 천하 후세에 죄를 얻으려고 하니, 신은 삼가 통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안에 머물려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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