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계묘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전형(銓衡)의 우두머리로 있은 지 모두 5년이 되었는데, 모두 일곱 차례의 도목 대정(都目大政)을 겪었습니다. 지금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눈과 귀로 접하여 기억하는 바로도 일찍이 신과 같이 오랫동안 인사권을 차지한 자는 없었습니다. 신의 사사로운 마음에 항상 적임자가 아니면서 자리에 있다는 두려움이 절실할 뿐만 아니라, 조정의 인사 정책의 체모가 어찌 이처럼 사사로이 치우쳐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또 병을 진달하고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랏일이 어려운데 어찌 옛날의 관례를 변통없이 지킬 수 있겠는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속히 공무를 보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일 갑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강화 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본부의 백성들을 양맥(兩麥)이 모두 떨어진 때를 당하여 진휼하여 구할 수가 없습니다. 본부에 비축해 놓은 몇 석의 군량을 얻어서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게 하소서."
하니,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경기 백성의 진휼을 전적으로 강도(江都)의 곡식에 의지하고 있는데, 지레 먼저 다 흩어주면 뒷날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많이 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5백 석을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7월 3일 을사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변황(卞榥)을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김우석(金禹錫)·이익(李翊)·김익렴(金益廉)의 죄상을 깊이 캐물어 밝히라는 계사를 정지하였다.
7월 5일 정미
영의정 홍명하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7월 6일 무신
조주(祧主)를 영녕전에 도로 봉안하였다. 상이 먼저 종묘에 나아가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인하여 신전(新殿)을 봉심한 뒤 막차(幕次)로 물러나왔다. 영녕전의 각실 신위를 경덕궁(慶德宮)으로부터 차례로 받들어 모셔왔는데 상이 대문 안에서 공경히 맞이하고, 봉안하는 예를 마치고 망전례(望殿禮)를 행한 뒤 환궁하였다. 상이 종묘에 나아갈 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가 환궁할 때 비로소 동쪽 협문(夾門)을 통하여 나갔으므로 여론이 모두 예관을 허물하였다.
정언 이선(李選)이 아뢰기를,
"돈녕 참봉(敦寧參奉) 장훤(張楦)은 중한 허물이 있어서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워 줄 수 없으니 도태시키소서. 그리고 장훤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데도, 전조(銓曹)에서 천거하여 주의(注擬)하였으니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해당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훤은 장선징의 아들로, 그의 어미가 병자 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갔었기 때문에 이러한 의논이 있게 된 것이다.
부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병을 진술하고 면직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왕의 치도(治道)는 반드시 경학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이것을 도외시하고 다스리는 것은 모두 구차할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성품이 고명하고 신령스러운 지혜가 두루 미쳐서, 정령을 베풀 때에는 도리에 맞도록 힘쓰셨습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큰 일을 하여 훌륭한 정치를 일르키지 못하신 것은 참으로 성상께서 학문을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하루에 매우 많은 정무를 처리해야 하므로 의당 학문할 겨를이 없을 것인데도 경연의 제도에서는 곧 하루에 세 번 강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학문에 힘쓰면 지기(志氣)가 날로 강해지고 덕업(德業)이 날로 진보하여 온갖 정무에 대응하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며, 날마다 신하들과 서로 접하여 치도를 강론하면서 뭇 정사를 처리하도록 하려는 것이니, 그 글뜻을 강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왕세자가 학문을 막 시작하여 총명과 예지가 점점 자라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솔선수범하여 권면하고 지도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셔서 본받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은 무더위가 조금 물러가고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이미 생겨났으니 이때에 미쳐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시고, 유현(儒賢)을 초빙하되 정성과 예의를 극진히 하여 반드시 나오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대신에게 명하여 속히 도당 신록(都堂新錄)을 행하여 경학에 능통한 선비를 널리 뽑아서 진강에 대비하도록 하소서. 또 유사(儒士) 중에 경전에 밝고 행실이 닦인 자를 택하여 자문의 결원을 채우고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넓힌다면, 성상의 학문을 강구하여 밝히고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는 계책에 있어서 둘 다 그 방도를 극진히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7월 8일 경술
재신(宰臣)을 보내어 풍운뇌우단과 산천·우사와 삼각산·목멱산 및 한강에 기우제를 지냈다.
함경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도내의 전결(田結) 총수를 죽 적어서 아뢰었는데, 모두 6만 5천 6백 결이었다. 북쪽 변방은 땅은 넓으나 사람이 적어서 대부분 개간하지 않았으며, 전정(田政)을 치지도외한 지 오래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민정중이 비로소 전결을 측량하였다.
대사헌 정지화, 장령 최관 등이 탄핵하기를,
"지평 변황은 명망이 가벼워 본직에 제수되자 물의가 있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박세견이 아뢰었다.
"지난번에 김우석·이익·김익렴 등의 일에 대해 조정에서 이미 처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대부들 사이에 의논이 크게 서로 달라 확정되지 않고 있기에 신이 일찍이 본직에 있으면서 다시 조사하기를 청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입시한 자리에서 성상의 간절한 유시를 우러러 받들고 신은 감히 스스로의 견해가 옳다고 하지 못할 점이 있었으므로 상의하여 정계했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신이 갑자기 정계한 것을 물의가 그르다고 합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정언 이선(李選)이 아뢰었다.
"지난번의 김우석·이익·김익렴 등의 일은 실로 사대부들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이고 공의가 그르게 여기는 바이니, 만약 실정을 알아내어 그 죄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어찌 명쾌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김우석 등은 모두 승정원과 대각의 신하이니, 당초에 관리에게 내려 추문한 것도 이미 대단히 타당치 못한 일이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제기하는 것이 실로 온당한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아전들의 말을 가지고 판결하려고 한 것은 더욱 조정의 사체를 손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동료와 더불어 상의하고 정계하였습니다. 지금 동료가,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7월 9일 신해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허물을 인책하고 체직시켜 주기를 바라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강명(剛明)함과 재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 내가 경에 대해 주석(柱石)이나 동량(棟樑)보다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한때의 과격한 논의로 인해 이렇게 겸양하면서 고사하는 일을 한단 말인가. 지금 경의 상소를 보건대, 병이 이와 같으니 내가 몹시 염려된다. 다만 경은 나이가 많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니, 신명(神明)이 도와서 곧바로 나을 것이다. 즉시 올라와서 조용히 조리하고 정청에 누워 치도를 논하라."
하고, 이어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7월 10일 임자
달이 남두성(南斗星) 제5성을 범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영의정 홍명하에게 도타이 타이르며 다시 나오도록 권하였으나, 홍명하가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유학(幼學) 성지선(成至善) 등 8인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제주도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이 있는데, 묘당의 의논이 장차 청나라로 압송할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런 계책을 세웠습니까. 신은 너무 놀라워 통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략 듣건대, 그 사람들은 복건성(福建省)에서 왔으며 영력 군왕(永曆君王)이 남쪽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주씨(朱氏)의 자손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며, 이들은 우리의 부모 나라 사람들인 것입니다. 명나라가 이미 망한 줄 알았는데 지금 망하지 않은 것을 알았으니, 나라에서 비록 일개 사신을 보내어 한 귀퉁이에서 왕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위로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을 잘 보살펴 주고 몰래 배편을 마련하여 보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혹 불편할 경우에는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다른 나라로 보내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거조는 무슨 뜻이며, 또한 어찌 차마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부모와 헤어져 있어서 부모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부모가 계신 곳으로부터 와서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할 경우, 뛸듯이 놀라고 기뻐하면서 소식을 전해준 사람을 후하게 대우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잡아서 호랑이 굴에다 던져넣어 반드시 죽이고자 하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으로는 차마 못할 바이며, 참으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천하 사람들이 그를 죄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이미 청나라를 섬기고 있으므로 주씨(朱氏)가 비록 건재해 있더라도 다시 부모의 나라로 대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참으로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짝할 만한 자 없는 손적(孫覿)과 같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차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인의(仁義)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인의의 마음이 없다면 오랑캐나 짐승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명나라에 대해서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모의 은혜가 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배은 망덕하고 있으니, 오랑캐나 짐승이라는 이름을 얻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또 지난 일은 혹 나라의 형세가 약해서 그랬다고 핑계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눈앞에 부득이한 형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면서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대저 이런 따위의 논의는 매번 이해 관계를 따지는 데에서 나오고 있고, ‘의리(義理)’ 두 자에 대해서는 번번이 초야(草野)의 큰소리일 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눈앞의 고식적인 계책은 될 것입니다만, 전하께서는 일찍이 의리가 꽉 막히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상실되었는데도 나라에 이익이 되는 것을 보셨습니까. 혹시 대신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그랬다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스스로 감당할 것을 자임하지 않으십니까? 비록 이 일로 말미암아서 다시 지난날과 같은 치욕을 당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이며,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나라의 한 백성이 도망해 돌아옴으로 인해서 신하의 죄를 대신 받는 것과 같겠습니까. 만일 영력 군왕이 사신을 보내 조서를 선포하면서 교통(交通)하는 일이 있을 경우, 나라에서는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지금의 일로 본다면 역시 사신을 잡아 가두고서 원수에게 아첨하며 섬기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왕씨(王氏)가 인종(仁宗) 3년부터 오랑캐인 금나라를 신하로서 섬기었는데, 이때는 바로 송나라 정강(靖康)015) 초년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송나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는데, 건염(建炎)016) 이후에 송나라 황제인 고종(高宗)이 양응성(楊應誠) 등을 파견하여 조서를 내려 유시하면서 우리 나라에 길을 빌려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모셔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의 왕도 사신을 보내어 회보하고 많은 관원을 보내어 문안하면서 조금도 두려워서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밖으로는 오랑캐인 금나라가 강성해져 위세로 핍박해 옴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심했으며, 안으로는 척준경(拓俊京)과 묘청(妙淸)의 무리가 전횡을 부리고 정사를 어지럽혔으니, 국세가 매우 약하였고 조정도 심히 혼란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예의를 지키고 자강(自强)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니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어찌 고려 때보다 못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여러 날을 귀 기울여 들었으나 여러 신하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그에 대해 간쟁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니면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전하께서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까?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열성들이 명나라를 섬기던 정성을 추모하고 선왕들이 중국 황제를 받들던 뜻을 이어, 항상 이를 염두에 두고 은인자중해 온 지가 꽤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은 이번 일에 대하여 전하의 본심이 이와 같지 않은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모사(謀事)는 여러 사람과 같이 하고자 하며, 결단은 혼자서 내리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전하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결단하시되 조금도 의심하여 머뭇거리지 마시고,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시어 배를 다시 수리하고 양식을 넉넉하게 준 다음 그들을 데리고 국경 밖까지 인도해 가게 하는 한편, 청나라에 보고해 아뢰기를 ‘지난날 신하로서 섬기던 의리를 생각함에 참으로 차마 그 사람들을 잡아보낼 수 없다. 죄벌이 아무리 중하다 하더라도 감히 못하겠다.’ 하소서. 그러면 청나라가 비록 오랑캐라고는 하나 역시 아는 것이 있으니 벌금을 내라고 하는 외에 어떻게 더 죄를 주겠습니까. 그럴 경우 우리 나라의 의로운 소문은 천하를 감복시킬 수 있을 것이며,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 역시 끝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안에 머물려두고 계하하지 않았다. 성지선은 바로 성혼(成渾)의 현손이다.
7월 11일 계축
장령 최관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지평 변황(卞榥)의 체직을 청하였는데, 신이 동료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고 논계한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변황이 논하고자 하는 바가 있었는데 갑자기 탄핵하였으니, 그르다.’고 합니다. 그러니 영격(迎擊)하였다는 비난을 신이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행 대사헌 정지화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7월 12일 갑인
중신을 보내어 종묘·사직과 북교(北郊)에 기우제를 지냈다.
지평 홍만형이 아뢰었다.
"신이 앞장서서 변황을 탄핵하는 논의를 내었는데,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하나, 결단코 그가 대간의 직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변황이 본직에 제수되자 사람들이 대부분 깔보면서 맞지 않는 것에 대해 비웃었으니, 공의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에 의거하여 상상할 수 있으며, 명성이 본디 가볍다는 것이 실로 헛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뒤에 듣건대, 신이 놀랍고 이상한 거조를 주창하였다고 하면서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지니, 신은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어제 동료가 인피한 말을 보니, 심지어는 ‘영격(迎擊)’이니 하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영격’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은미한 뜻을 미리 알아채고서 일에 앞서서 들이쳐 그 논의를 막는 것을 말합니다. 신이 어떻게 변황이 논계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서 먼저 들이칠 수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동료 또한 변황을 옹호하는 논의에 동요되어 갑자기 먼저 인피하였습니다. 신이 세상 물정에 어두워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논계하였다가 이러 소요를 야기시켰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정언 이선이 아뢰었다.
"헌부의 많은 관원이 변황의 일로 인해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으니, 신이 마땅히 처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핏 듣건대, ‘변황이 「박세견(朴世堅)이 김우석(金禹錫) 등을 조사하라고 청하는 아룀을 갑자기 정지한 것은 크게 그르다.」는 내용으로 논계하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신이 비록 처음 아뢸 때에는 참가하지 않았었지만 논계를 정지할 때에는 동참하였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감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우의정 정치화가 성지선(成至善)의 상소를 이유로 들어가버리고 정고(呈告)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허물을 인책하고 사직하니, 상이 부드러운 비답으로 답하면서 올라오라고 하였다.
영의정 홍명하(洪命夏)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나랏일은 전혀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마치 하나의 작은 조각배를 저어가다가 노를 버리고 파도 속에 들어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끝이 없어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지금 내가 경을 바라는 것은 참으로 배를 움직이는 노와 같은데도 경이 이토록 굳이 사양하니, 내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것이 파도 사이에 있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경은 속히 나와서 나랏일이 날로 낭패하게 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가뭄이 매우 혹독하여 6월부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여러 차례 기우제를 지냈으나, 끝내 비가 오지 않았다. 조야(朝野)가 어쩔 줄 몰라 기상이 참담하였기 때문에 상이 이같이 비답한 것이다.
옥당이 처치하여 최관·정지화·홍만형·이선을 출사시키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6승지 또한 면대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출사하면 표류해 온 사람들에 대한 일을 함께 의논하여 정하려고 하였는데, 잇따라 사직장을 올리고 있으니, 진실로 우려스럽다. 제주도에서 장계가 올라온 지 이미 오래되어 필시 누설될 우려가 있으니, 속히 의논해 정하느니만 못하다. 저들에게로 압송하는 것이 차마 못할 일임을 아나, 실로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좋은 계책이 없다."
하니,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이 되어 처리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이것은 아주 중대한 일인데 대신들의 논의가 서로 크게 다르니,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됩니다."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애초에 번거롭게 치보하지 말고 스스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그만이었을 것인데, 벌써 누설된 뒤여서 선처할 길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의 논의가 서로 크게 다르니 내가 마땅히 참작하여 정할 것이다. 내 생각을 네 대신에게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재변을 당하면 상하가 모두 공구 수성하는 뜻을 갖는데, 날짜가 오래 지나면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집니다. 지난해 겨울 우레의 변이 있자 상께서 여러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각자가 신칙하여 혹시라도 태만하게 하지 말라.’ 하시었으니,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는 실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재이가 이처럼 거듭 밀어닥치니, 신은 두려워 조심하는 마음이 혹시라도 조금 느슨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수성하는 도리를 다하면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인데, 하늘이 나를 경계시키기를 이처럼 극도로 하니, 어찌 수성하는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승지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지난해에는 온천에서 돌아오신 뒤에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고 승지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들어오게도 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온천에서 환궁하신 지 오래인데도 한 번도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신은 성상의 옥후가 전보다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성상의 뜻이 점차 해이해져 덕을 닦는 공력이 부족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문서를 가지고 입시하는 일은 정원에서 마땅히 계품해야 할 것인데, 지금 어째서 하지 않았는가?"
하자, 김만기가 아뢰기를,
"장선징이 일찍이 계품하였는데 끝내 성상의 분부가 없었기 때문에 그 후에는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날씨가 점차 서늘해지니 전례에 의거해서 계품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은 척리(戚里)로서 자리가 육경의 반열에 올랐는데 지금 병이 중하여 죽음이 임박하였으니, 한 말씀 올리고서 죽고자 합니다. 신하들을 인견하여 경전을 강론하는 것은 참으로 임금의 아름다운 일이니, 민유중과 김만기의 말이 참으로 좋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두 신하는 모두 명문가 출신인데다 인망도 있어서 조정 신하들이 추중하는 바이나 사적인 일에 치우치는 것이 그들의 병통으로, 자신들과 의견이 같은 자는 진출시키고 다른 자는 배척합니다. 이에 그들이 한마디 하면 누구도 감히 무어라고 하지 못하고, 나이 어린 무리들이 앞다투어 맞장구치면서 모두들 붙좇으며, 전관(銓官)조차도 오직 그들의 말만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그냥 두면 조정의 일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가령 두 신하가 국사를 경영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런 태도를 없애서 공도(公道)를 넓히고 서로 화합할 마음을 가져 어그러지고 과격한 논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경연을 열기를 청하여 매일 훌륭한 말을 해드려도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니, 김만기·민유중 등이 일제히 변명하기를,
"김좌명이 스스로는 공언(公言)을 진달한다고 여기고 있으나, 신들은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 생각과 뜻이 서로 막혀 이렇게까지 의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이 어찌 조정 신하들 사이에서 추중을 받겠으며, 전관들 가운데 어찌 고분고분 명에 따를 자가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논의가 부박함이 요즈음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 이번에 우상이 정고(呈告)한 것은 필시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에 대한 일 때문이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나이 어린 사람들의 논의가 준열하게 발하면 아무리 대신이라도 잘 조절하지 못하여 끝내는 그 자신조차도 편안치 못하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힘을 다하고자 해도 형세상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에 대한 일은 내 스스로 결단하고자 한다. 만약 대신들로 하여금 참작하여 정하게 하면 반드시 부박한 의논에 거슬릴 것이니, 이는 대신을 버리는 것이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경억 역시 합계한 것을 정지하였다는 이유로 헌장(憲長)의 후보에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만기나 민유중 등이 만약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했다면 어찌 헌장의 후보에 올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김만기가 대정 현감(大靜縣監) 안숙(安塾)을 소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14일 병진
상이 하교하였다.
"잇따라 기우제를 거행하였으나 비 올 낌새가 전혀 없으니, 농삿일을 생각함에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친히 기우제를 지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하니, 유사로 하여금 날짜를 정하여 거행하게 하라."
예조가 친히 기우제를 지낼 곳을 계품하니, 상이 사직단(社稷壇)에서 행하라고 하였다. 예조가 오는 17일이 길하다고 아뢰니, 상이 일렀다.
"일이 너무 급박하니 18일로 정하여 거행하라."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친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하지만, 잠깐만 불빛이 비추어도 흐르는 눈물이 눈에 가득하여 눈을 뜰 수가 없다. 지엄한 곳에서 의례대로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할 듯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하니, 병조 판서 김좌명(金左明)이 아뢰기를,
"제사지내는 날 밤에 날씨가 흐리지만 않는다면 응당 달빛이 있을 것이니 궁중의 뜰에 횃불을 설치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뜰의 횃불은 제거할 수 있지만, 촛불은 제거할 수 없다."
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눈병이 이같으면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없으니, 또한 매우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온당치 않다면, 상께서 제단 아래에서 친히 술잔을 올리시고 근시(近侍)로 하여금 대신 신위(神位)에 전하게 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승지 민점(閔點)으로 하여금 여러 대신들에게 묻도록 하였다. 이에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은 아뢰기를,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사가(私家)의 예이니, 국가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옛날 관례대로 하되 대신으로 하여금 제물을 대신 올리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영상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제물을 대신 올리는 것과 이른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모두 변례(變禮)이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 정태화, 우상 정치화는 아뢰기를,
"어떤 시각에 지내건 간에 친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영중추부사 이경석의 의논이 가장 내 뜻과 맞으니, 이에 따라 행하겠다."
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좌상 허적(許積)에게 올라오도록 권유하는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적(積)이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병조 판서 김좌명, 형조 판서 이경억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인견하고 이르기를,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에 대한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해 보았는가?"
하자, 김좌명이 대답하기를,
"정태화는 ‘오늘날의 이 일은 민간에 전파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몹시 염려스럽다. 지금 듣건대, 성상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다고 하니 몹시 다행이다.’ 하고, 우상 정치화는 ‘전일 진달한 이외에 다른 의견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이경억은 대답하기를,
"이경석은 ‘스스로 영력왕(永曆王)의 사람이라고 하니 마음이 저절로 감동되어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청나라로 압송하는 것은 차마 못할 바이나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성상의 계책이 정해졌으니, 「눈물을 흘리면서 오(吳)나라에 시집보낸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고, 홍명하는 ‘이미 진달한 소회 외에 다른 의논은 없다. 그러나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인데 성상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끝내 나의 견해를 고집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으로서는 다른 계책이 없다. 압송해 갈 비국의 낭관은 떠나갈 때 대신들의 분부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다시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였다.
승지 김만기·민유중이 김좌명에게 논박을 당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7월 15일 정사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정랑으로, 신경윤(愼景尹)을 지평으로 삼았다.
충청 감사가 보고하기를,
"보은(報恩)에 사는 사족(士族)의 여인이 여종의 남편과 간통하고 몰래 자신의 남편을 죽였으며, 이산(尼山)에 사는 사노(私奴) 만세(萬世)는 칼로 자기 아비를 죽였습니다."
하니, 모두 국문으로 다스려 처형되었다. 또 보고하기를,
"전의(全義) 사람 신상윤(愼相尹)은 후처에게 빠져 전처의 딸을 발로 차 죽였습니다."
하니, 또한 법률에 비추어 치죄하였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죽인 변고가 한 도에서 한꺼번에 일어났으니, 참으로 전고에 없던 일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가뭄을 이유로 허물을 인책하면서 사직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은 나의 덕이 부족해서이다. 경이 어찌하여 사직하는가. 위아래가 서로 덕을 닦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훤(張楦)의 일로 인해서 대간이 이조의 관원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규례를 정해야 한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예절로, 실행(失行)한 자의 자손은 모두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는 것이 이미 풍속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병자 호란 때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의 자손은 사로(仕路)에 허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인조조의 규례에는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으니, 어찌 사로에 허통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승지 민유중이 아뢰기를,
"병란 초기에는 그 당시 상신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의 말로 인해서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대각의 신하가, 잡혀갔던 아내와 이혼하고 다시 다른 아내를 맞게해 달라고 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므로 다시 혼인한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그 자손을 사로에 허통시키지 않는 것은 그것이 예절에 해가 될까 해서인 것으로, 성상의 분부가 비록 이와 같으나 식자들의 의논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장훤의 일은 개가한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장훤의 생모는 당초에 이미 이혼하였으므로 장훤은 계모의 자식이 되었으며, 또한 계모의 아버지를 외할아버지로 써넣었으니 생모의 허물이 장훤에게는 미치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 경우는 개가한 자의 자손과는 다르니, 청현직에는 허통시키지 않더라도 일반 관직에까지 허통시키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내용으로 규례를 만들어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옥당의 관원인 이유상·남이성·이단하·박세당 등이 청대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유상이 아뢰기를,
"신들은 표류해 온 사람들의 일에 대해 듣고 경악스러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과연 한인(漢人)이라면 의리상 차마 잡아보낼 수 없는 것이며, 만약 한인(漢人)이 아니라면 비록 잡아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저들의 힐책이 있겠습니까. 우선 그들로 하여금 섬에 머물러 있게 하고서 청나라의 조사가 있을 경우 ‘한인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여 지금까지 머물려 두고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변에 대처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고, 박세당이 아뢰기를,
"저들도 역시 사람이니 이치로써 말한다면 어찌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만약 ‘예전에 우리 나라가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겼으므로 그 사람들을 차마 잡아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면 저들이 비록 노여워한다 해도 어찌 거병(擧兵)까지야 하겠습니까."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박세당 등의 말은 몹시 사정에 어둡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뒷날 나랏일을 맡게 될 경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섬에 머물려두었다가 지난번의 남만인(南蠻人)들처럼 도망이라도 가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잡아보내자고 하고 잡아보내지 말자고 하는 것은 모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나라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오직 내가 참작하여 처리하기에 달렸다."
하였다. 남이성이 아뢰기를,
"엊그제 경연 석상에서 중신이 ‘경연을 열고 소대하기를 청하는 것이 모두 형식적인 것이다.’고 하였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는 사이에 어쩌다 언급된 것으로, 경연을 열고 소대하기를 청하는 것이 형식적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자, 남이성이 아뢰기를,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고, 이단하가 아뢰기를,
"경연 석상의 대화 내용을 상세히 알지 못하나, 민유중 등의 상소로 보면 중신이 ‘권세를 잡고 지휘하였다.’는 등의 말로 두 신하를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이 두 신하가 비록 조정 신하들의 추중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러 권세를 잡은 것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좌명의 서로 화합하라는 말은 역시 좋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좌명의 말이 너무 날카로웠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상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좌명도 그렇게 심하게 논척하지는 않았었다."
하니, 남이성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전조(銓曹)가 비록 제대로 일을 해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또한 어찌 두 신하에게서 명령을 듣겠습니까."
하였다.
7월 16일 무오
상이 하교하였다.
"모든 제향(祭享)에 정성과 공경을 다해야 하나, 기우제에 이르러서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으면 신명을 감동시킬 수 없다. 모든 대소 집사(執事)들은 각자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서 기어코 비가 내리게 하라. 맹자가 말한 바 ‘못난 사람도 목욕 재계하면 상제(上帝)에게 제사도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지극한 말이 아니겠는가."
지평 신경윤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성상께서 가뭄을 걱정하시어 친히 기도를 행하시게 되었으니, 모든 의식(儀式)에 있어서 친히 제사지내는 예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축문(祝文)에 섭행으로 써넣고 폐작(幣爵)을 대신으로 하여금 바치게 하니, 이는 예에 있어서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공경을 다하는 것과 예를 다하는 것이 본래 서로 다른 일이 아닌 것으로, 예를 다한 다음에야 공경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대신에게 상의하여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대신들에게 말하여서 이미 탑전에서 의논해 정하였으니, 지금 와서 다시 개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7월 17일 기미
유시(酉時)에 상이 친히 사직단의 막차에 나아갔다. 교리 이단하, 수찬 박세당이 면대를 청하고 입시하여 신경윤의 상소대로 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즉시 승지 민희(閔熙)로 하여금 대신에게 가서 묻도록 하였다.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의 의논이,
"이미 정한 예를 하룻밤 지나서 다시 고치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의논한 대로 예를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불빛을 보는 것이 눈병에 크게 해롭지 않다면 마땅히 친히 기우제를 지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형세상 섭행하게 할 수 밖에 없다."
하였다.
7월 18일 경신
3경 3점에 상이 명하여 친히 제사지내는 것으로 전향(傳香)하게 하였다. 상이 제단에 나아가 몸소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다. 초헌례(初獻禮)를 행한 뒤에 예의사(禮儀使)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예를 마치기까지 기다리자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니, 막차에 들어가 잠시 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상이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진시(辰時)에 환궁하였다. 이날 먹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올듯올듯하다가 끝내 비가 내리지 않자 신민들이 모두 실망하였다.
7월 19일 신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심리(審理)하는 일을 올 여름에 시행하였는데도 가뭄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유사로 하여금 대신에게 가서 의논한 다음 억울한 자와 외방의 죄인 중 누락된 자를 살펴서 한꺼번에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심리하는 막중한 일을 신이 감히 혼자서 결정할 수가 없으니, 여러 대신들과 함께 입시하여 품의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영상 홍명하(洪命夏)에게 돈독하게 유시하기를,
"앞으로 심리를 행하고자 하니, 지금은 대신이 한결같이 병을 이유로 나랏일을 무관심하게 볼 때가 아니다. 즉시 출사하여 나의 소망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니, 명하가 대답하기를,
"상께서 몹시 편찮은 중에도 친히 사직단에 기도하였으니, 이 어떠한 때입니까. 그러나 신의 병세가 깊어서 빨리 조정에 달려갈 수 없으므로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근시(近侍)를 보내어 출사하도록 재촉하시니, 신은 참으로 황감하여 죽고자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목과 배의 통증이 아직도 매우 심하여 아마도 전하께 신명을 바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부드럽게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게 하였다.
7월 20일 임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이처럼 혹독한 가뭄을 당하였으니, 이는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다. 조용히 생각건대, 죄가 실로 나에게 있는데,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나의 재앙을 대신 받아서 굶주려 떠돌며 보전하지 못하고 죽어간단 말인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차라리 당장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으면 한다. 또 생각건대, 재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상하간에 서로 가다듬는 도리가 없으니, 구구한 말단적인 일로 천심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불민하기는 하나 마땅히 더욱더 공경하는 도리를 더하여 자신을 책하고 허물을 반성하여서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겠다. 승지는 이런 뜻으로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을 구하여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게 하라.
다만 생각건대, 세도(世道)가 쇠퇴하여 사설(邪說)이 횡행하고, 인심이 나빠져 사의(私意)만을 따르고 있다. 이에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름다운 뜻은 모두 없어지고, 각박하게 따지고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폐습만 자라났다. 붕당의 해는 예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었지만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 예전에는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으로 나뉘어졌으나 지금은 적당(赤黨)과 백당(白黨)으로 변하여 적당은 백당을 공격하고 백당은 적당을 공격하고 있는데, 병이 골수에 스며들어 치료하기가 어렵다. 이런데 능히 국사에 전념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후로 대소 신료들이 전의 습관을 고친다면 서로 가다듬는데 일조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으니 결단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전에 구언한 뒤에는 반드시 부정(不正)한 말이 있었는데, 죄를 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기도 속이 아팠다. 지금 이후로 전지에 응한다는 핑계로 감히 삿된 말을 하는 자는 내가 엄하게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왕언(王言)으로 중외에 포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우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심리하는 일 때문에 대궐에 나아왔는데, 영상이 아직까지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원임 대신의 경우, 전에는 심리할 때 반드시 명초한 뒤에 와서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이를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이 아직도 아프다 하니, 사관을 보내어 사은 숙배하지 말고 와서 참여하라고 유시하라. 원임 대신 역시 모두 명초하라."
하였다.
지평 홍만형이 복제 단자(服制單子)가 규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지평 홍만형이 인피하여 지금 처치해야 하는데, 동료 두 명이 소단(疏單)을 들이지 않고 장관(長官)에게 책임을 미루고 있으니 이는 전례가 아닙니다. 신은 이미 경시당하였으니 편안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다. 이에 장령 최관(崔寬)과 지평 신경윤(愼景尹)이 장관에게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홍만형·정지화·신경윤은 출사시키고, 최관은 체직시켰는데, 최관은 성상소(城上所)로서 마땅히 전계(傳啓)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유생 박상일(朴尙一) 등 5인이 상소하여, 표류해서 온 한인을 청나라로 잡아보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군신의 의는 잊어서는 안 되고 부자의 은혜는 배반해서는 안된다고 극언하였으며, 묘당의 여러 신하들에 대해서는, 의리에 어둡고 화환(禍患)을 두려워한다고 공격하였다. 상이 안에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7월 21일 계해
영의정 홍명하가 출사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원임 대신 및 형관(刑官)들과 함께 심리하였다. 윤선도(尹善道)의 일에 이르러서 상이 영부사 이경석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연로한 데다가 선조(先朝)의 사부(師傅)였던 구은(舊恩)이 있습니다. 송준길(宋浚吉)도 일찍이 이런 뜻으로 진달한 바 있는데, 신의 생각으로도 석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여러 대신에게 물으니, 판중추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신의 뜻도 이경석과 같습니다."
하고, 영상 홍명하는 아뢰기를,
"이번 심리하는 날을 당하여, 이 사람이 억울할 것이라고 여기어 석방한다면 법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다만 성상께서 그의 연로함을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해 준다면 괜찮을 듯합니다."
하고, 좌상 정치화는 아뢰기를,
"신은 전에 이미 석방할 만하다고 진달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사간 오두인, 응교 이유상에게 묻기를,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윤선도의 죄는 종묘 사직에 관계되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하다는 이유로 석방하자는 것이지, 죄가 없으므로 심리하는 데 거론하자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이어 무릅쓰고 나아갈 수 없는 형세임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신의 죄목은 중국 조정에서라면 죽어도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누누이 사면(辭免)하니, 상이 위로하고 타일렀다.
7월 22일 갑자
중신을 보내어 양진(楊津)·덕진(德津)·오관(五冠)·감악(紺岳)에 기우제를 지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외방 죄수 20여 인을 소결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편치 않으신 중에도 연일 친히 소결하시어 사면을 받은 자가 몹시 많습니다. 지성이 이와 같으니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법도 한데, 저 푸른 하늘은 막막하기만 하여 끝내 비를 내리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기 지방 안에 혹시 비가 온 곳이 있는가?"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간혹 있기는 하지만 흡족하지는 못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이어서 안숙(安塾)을 소환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숙의 일에 대해서 내가 몹시 미워하고 있으나, 대신이 여러 차례 진달하고, 또 그의 부모가 늙었다고 하니, 안숙을 개차하라."
하였다.
여성제(呂聖齊)를 집의로, 이동로(李東老)를 장령으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7월 23일 을축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사도시 정 김익훈(金益勳)은 어려서부터 마구 행동하여 전혀 행실을 검속하지 않았으며, 또 역적 이형장(李馨長)의 아들 정윤(廷胤)이 첩을 얻어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재화(財貨)를 실어와 채웠는데, 정윤이 사형된 뒤 그 첩을 자신이 차지하여 첩으로 삼고는 몇 년 동안이나 데리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대부로서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그 추하고 더러운 행실이 이와 같으니, 결코 의관의 반열에 끼이게 할 수 없습니다. 전라 감사 민점(閔點)은 요즈음 가뭄을 걱정하는 때를 당하여 그의 동생 집에 모여 술을 마셨는데, 노랫소리가 온 동리에 들렸습니다. 게다가 그 다음날은 바로 국기일(國忌日)이었습니다. 그의 무식하고 방자한 실상은 규정(糾正)하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김익훈의 일과 더불어 한 간통(簡筒)에다 발의하였는데, 종일토록 왕복해도 끝내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신이 동료에게 경시당한 소치이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지평 홍만형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김익훈의 일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 상세하게는 알지 못하나, 대개 듣건대, 그가 창녀(娼女)를 데리고 살았다고 하니, 이것을 이유로 그르다고 한다면 김익훈 역시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의 간통에는 그 재화(財貨)까지 아울러 차지한 것처럼 말을 하였는데, 그가 데리고 산 것이 정윤이 사형당한 수년 뒤이니 정윤이 실어다준 재화를 어찌 익훈이 알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그 첩은 이미 죽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갑자기 무겁게 논핵하여 이처럼 마구 헐뜯으니,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민점의 일은, 신이 일찍이 듣건대, 민점의 시골 친구 중에 마침 서울로 올라가는 자가 있어서 몇 가지 안주를 장만하고는 전별연이라고 하므로 그의 동생 집에 모여 대화하였으며, 당시 참석하였던 손님도 모두 한집안 사람들로 외인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크게 잔치판을 벌려 풍악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고 하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국기의 재계(齋戒)하는 기간은 정일(正日)017) 과는 차이가 있으니, 이것으로 논열하는 것은 혹 지나친 듯합니다. 신의 의견이 이와 같아서 끝내는 서로 어긋나게 되어 동료로 하여금 인피하게 하고 말았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행 대사헌 정지화 역시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장령 이동로가 처치하면서
"일에 따라 탄핵하여 바로잡는 것은 논사(論事)하는 체모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상의하려는 것은 참으로 신중히 하는 도리에 합당하다."
하였으므로, 신경윤과 홍만형·정지화를 모두 출사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였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고 농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큰 강을 건너는데 나루터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말로도 그 급함을 제대로 표현하기 부족하다. 경이 이미 출사하여 의논할 만한 일이 많은데 또 병을 핑계로 사면하니, 지금이 어찌 대신으로서 나오자마자 물러갈 때이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하도록 하라."
관학 유생 이위장(李緯長) 등이 상소하여, 표류해 온 중국인을 잡아보내서는 안된다고 극언하면서 묘당을 공격하였는데, 상이 안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7월 24일 병인
이조 판서 김수항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개가한 자의 자손은 사판(仕版)에 끼워주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국법에 분명하게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난리 중에 잡혀간 자는 개가한 자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며, 또 조정에 금고(禁錮)한다는 영이 없어 이러한 자들로서 사로(仕路)에 출입한 자들도 있습니다. 더구나 장훤의 어미는 이혼당하였으니, 예에 이른바 이혼한 어미의 자식일 뿐입니다. 예율(禮律)로 따져 볼 때 영구히 벼슬 길을 막을 이치는 없는 듯합니다. 전 참봉 최선(崔宣)도 이러한 하자가 있었는데, 신이 평소 그의 경학(經學)과 행의(行誼)가 실로 속유(俗儒)가 아니어서 버리기가 아깝다는 것을 알았고, 또 이미 벼슬길에 들어왔으므로 전후로 천거하여 주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그 잘못을 논한다면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해조에서 규례를 정하라고 분부하셨고 정원이 또 대신에게 물어보도록 청하였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규례를 정하기도 전에 감히 경솔하게 망령된 짓을 하였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습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다. 이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최선이 입사(入仕)한 것이 어느 해였으며, 그때의 전관(銓官)은 누구였는가? 정원은 살펴서 아뢰라."
하였는데, 그 당시의 전관은 바로 판서 이후원(李厚源)이었다. 상이 김수항의 상소에 대해 답하기를,
"예율과 국법이 반드시 이렇지 않을 것인데 이선(李選)이 전관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우고 응당 피혐해야 하는 혐의도 돌아보지 않으니, 어찌 입에 올릴 것까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호서(湖西) 사람 박승후(朴承後)가 상소하여 붕당의 폐단을 극력 진술하니, 상이 답하기를,
"매우 간절한 말들이 오늘날의 병통을 바로 지적하였으니,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를 걱정하는 정성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이에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지금 사람들이 말하기 꺼려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온 조정의 고치기 어려운 병을 말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거두어 써서 내가 가상히 여기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 승지 김만기(金萬基)·민유중(閔維重)이 모두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7월 25일 정묘
지평 홍만형이, 또 출사시키라는 처치가 뜻밖에 나왔고, 견해가 서로 어긋나 끝내 다시 고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체직을 청하였다. 지평 신경윤도 인피하기를,
"대각에서는 소견이 서로 다른 경우, 한쪽은 그르고 한쪽은 옳은 것일텐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라고 하니 실로 뜻밖입니다. 그리고 동료가 피혐한 말 중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형장(李馨長)은 북경의 세력을 믿고 우리 나라에서 못된 짓을 하였으니, 먼 곳의 은미한 무리가 아니라면 그 집에서 하는 일을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이 역적의 자식인 이정윤(李廷胤)은 처를 박대하고 첩에게 집안 일을 맡겨 재산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형장이 처형된 것은 국옥(鞫獄)이 완전히 끝난 뒤였으므로 역적 집안의 금백(金帛)을 대부분 그 첩의 집으로 실어갔습니다.
김익훈이 첩으로 삼은 것은 정윤이 처형된 해로부터 불과 삼 년밖에 되지 않는데, 삼 년 동안에 어찌 그 많은 재화를 다 썼을 리가 있겠습니까. 가령 익훈이 애당초 알지 못하였더라도 첩으로 얻어 동거한 것이 거의 십 년이나 되니, 과연 그 집의 소유물에 대해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은장도(銀粧刀)와 만호영(曼胡纓)에 대한 얘기가 한 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었고 보면, 역시 어찌 아무 근거도 없는데 그렇게들 하였겠습니까.
민점(閔點)에 대한 일은, 그 당시에 비록 금주령(禁酒令)은 없었으나 가뭄이 몹시 심하였으니 어찌 사대부가 모여서 술마실 때였겠습니까. 동료가 그릇의 수효는 알고 있으면서 멀리까지 들린 노랫소리는 모르고 있으니, 어찌 이다지도 자세하고 소략함이 서로 동떨어진단 말입니까. 더구나 국기일(國忌日)에 재계하는 것은 법조문에 실려 있는 것인데이겠습니까. 신이 들은 바가 이미 자세하여 어리석은 저의 의견을 바꿀 수가 없었는데, 동료들로 하여금 구차스럽게 같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게까지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얼굴을 들고 그대로 눌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정언 이선(李選)이 아뢰기를,
"장훤은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서 사판에 외람되이 끼었으니, 어찌 탄핵하여 그 사람을 도태시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아울러 정관(政官)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관의 상소에 대한 비답 내용이 매우 엄하고, 정관의 상소 내용도 대부분 평온하지 않으니, 신은 참으로 두렵고 또 의아스럽기도 합니다.
무릇 실행(失行)한 여자의 자손은 사람들이 함께 있기를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동서반의 정직(正職)에 허락하지 않는 것이 국법에 정해져 있습니다. 개가한 것과 잡혀간 것은 실행하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관이 이른바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혼한 어미의 아들이니, 예율로 헤아려 볼 때 영원히 벼슬길을 막을 이치는 없을 듯하다.’고 말한 데에 이르러서는, 실로 예가(禮家)의 무궁한 수치를 열어 놓는 것입니다. 무릇 이혼한 어미는 복(服)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모자간의 의를 끊을 수 있겠으며, 다시는 허물이 미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억지로 예경의 뜻을 끌어와 맞추고 힘을 다해 분소(分疏)하였으니, 어찌 다만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병통만 되고 말겠습니까.
그리고 성상의 비답에, 최선이 처음 벼슬한 것이 신의 아비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였는데도 신이 피혐하지 않았다고 하시었는데, 신은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최선에게 하자가 있는 것은 근래에 그의 집에서 신주(神主)를 합독(合櫝)할 때 비로소 드러났는데, 그의 어미가 죽었을 때 최선의 전모(前母)가 낳은 형 최관(崔寬)이 실제로 삼년복을 입었었기 때문에 그의 친한 사람들도 대부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의 아비는 최선과 본디 전혀 몰랐었으니,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때에 먼저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그가 관직에 제수된 것은 강경(講經)에서 잇따라 통과되어 전례에 따라 주의한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비록 최선이 처음 벼슬한 것이 신의 아비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정관을 추고하기를 청하는 논계를 함에 있어서 무슨 피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서 성상의 노여움을 촉발시켜 드러내놓고 꾸짖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망령되이 척완(戚畹)을 논계한 탓이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인피하는 말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어제 상소에 대해 비답한 것에는 별로 노여워한 말이 없는데도 너는 감히 성상의 노여움을 촉발시켰다고 하니, 이는 필시 요즘에 제도를 정한 일을 지적해서 한 말일 것이다. 이 일은 나라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에 관계가 된다. 더구나 정사 훈신(靖社勳臣)인 사람의 집안 일이니, 조정에서 변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당초에 장훤의 일로 너를 나무라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척완’ 두 자로 이토록 사람의 입을 틀어막는가. 참으로 몹시 놀랍다. 아, 하늘과 땅이 뒤집혀 지난날의 변란이 일어났었으니, 이는 집안에서 몰래 간통하여 실행한 자와는 크게 경우가 다른 것인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한단 말인가. 비록 아비가 몰랐었다고 하더라도 자식이 이미 아비가 한 일인지 알았다면 피혐해야 하겠는가, 피혐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그리고 아비가 한 일도 모르면서 어찌 감히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조정에서 정한 제도에 대해 논한단 말인가. 내가 이에 몹시 놀랍고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시임·원임 대신 및 형관들과 함께 외방의 죄수들을 소결(疎決)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금 시사(時事)가 이와 같아 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성상께서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데, 단지 맥이 풀리고 나약해져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나이 어린 무리들의 논의가 지나치게 과격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모두 인혐하여 들어가 버려서 해볼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변황(卞榥)을 논핵한 일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자, 대답하기를,
"변황이 왜소하고 추하게 생겨서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격(迎擊)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변황이 김익렴을 논핵하고자 하였는데 피혐하느라 실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대개 이익(李翊)을 옳다고 여기는 자는 반드시 다시 조사하고자 하고, 김익렴을 옳다고 여기는 자는 조사하지 않고자 하는데, 이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둘로 갈라져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김익렴 때문에 전조(銓曹)에서 이익까지 아울러 거두어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의 처치에는 이익이 옳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 어찌 다시 조사할 수 있겠는가. 홍만형이 장황하게 인피하는 말을 늘어놓은 것은 모두가 자신을 해명하는 말이기에 내가 똑바로 보고 싶지 않다. 변황이 비록 왜소하고 추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외모만 가지고 사람을 취할 수 있겠는가."
하자, 부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신은 변황과 일찍이 조금도 교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물의가 자못 원통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영격’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심하게 따진 말입니다. 홍만형과는 진실로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데 어찌 영격하기까지 하였겠습니까."
하니,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어제 헌부의 처치는 구별이 있었어야 마땅합니다. 어찌 아울러서 출사시키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삼사(三司)가 현재 입시하고 있는데 끝내 한마디 말도 없으니, 어째서인가?"
하니,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대신이, 처치하여 아울러 출사시킨 것은 그르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처치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변황을 논함에 있어서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국사에 간여하는 자들이 젊은 명관(名官)들 뿐만이 아니고 젖내나는 유생도 모두 함께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 이 유생들의 상소는 일이 전혀 근거가 없어서 답하기조차 번거롭다. 현재 안에 머물려 둔 것이 이미 한 축(軸)이나 된다. 정원에서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상소를 바치면 반드시 봉입하니, 또한 매우 부당하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형편없으나 이미 대신의 반열에 참여해 있으니 어찌 매번 유생들의 공격 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사람들은 비록 연로한 자라도 자제들을 꾀어 부박한 논의를 격렬히 일으켜 떼 지어 일어나 떠들어대니, 신은 들추어내어 말하고 싶지 않으나, 국사를 여기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소위 사론(士論)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다 옳겠는가."
하였다. 사간 오두인(吳斗寅)이 아뢰기를,
"어제 처치한 것이 참으로 그르다는 것을 신은 알았습니다만, 미처 논계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삼사가 한마디 말도 없다는 전교를 받들었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태연스럽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양사의 여러 관원을 그가 마땅히 처치했어야 하는데 억지로 인피하였으니, 이 또한 일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옥당으로 하여금 즉시 오두인을 처치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단하가 아뢰기를,
"대관(臺官)들이 미세한 잘못을 이유로 분분하게 인피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상세하게 논하였습니다. 자그마한 일로 언관을 가볍게 체직할 수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이동로(李東老)가 신경윤 등을 처치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다.
7월 26일 무진
중신을 보내어 저자도(楮子島)·용산강(龍山江)·관악산(冠岳山)에 기우제를 지냈다.
여민제(呂閔齊)를 집의로 삼았다.
사간 오두인이 처치하기를.
"정지화는, 남에 대해 논할 때 비록 자세히 살피고서 하지는 못하였으나 지난일을 가지고 피혐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근래의 예가 있습니다. 신경윤은, 아울러 출사시킨 데 따른 책임은 자연 돌아갈 데가 있고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혐의스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이선은, 응당 피혐해야 할 혐의를 돌아다보지 않았다는 것은 원래 그의 본뜻이 아닌데 실로 뜻밖에 엄한 비답으로 꾸짖어 기를 꺾었으니 아울러 출사시키소서. 홍만형은, 뒤섞어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이미 구차스럽습니다. 스스로 편안치 못한 것은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동로는, 처치한 것이 흐릿하여 도무지 분별이 없으니 대간의 사체로 헤아려 볼 때 그대로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이선에게 논척당하였다는 이유로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뜻밖의 어이없는 일이 닥친 것을 가지고 혐의할 필요없다.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속히 출사하도록 하라."
상이 희정당에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기근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나라의 저축도 거의 바닥이 났습니다. 경비를 절약하고 줄이는 외에 달리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탁지(度支)의 비축량이 얼마쯤 되는가?"
하니,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1년 세미(稅米)는 11만 석이지만 경상 비용이 12만 석이나 되어, 1만 석은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잡곡까지 아울러 계산하면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그래도 20만 석은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년 봄까지 지탱할 수 있겠는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보통 때의 경상 비용을 절반으로 감하면 근근이 지탱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각 군문(軍門)의 편비(褊裨)의 급료를 헤아려 감할 만합니다만, 이들도 급료를 감하게 되면 또한 굶주린 백성이 될 것이니,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이들의 급료는 감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임금에게 바치는 물건도 오히려 감하는데, 더구나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받는 급료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공조 판서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부료(付料)에 있어 차등이 있기 때문에 혹은 9말, 혹은 5, 6말이며, 겸 사복(兼司僕)은 12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2말을 받는 무리는 급료를 감할 만하다."
하니, 이완이 아뢰기를,
"12말과 9말에 대해 각각 1말을 감하면, 감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2말의 경우 2말을 감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고르지 못할 것 같으니, 각각 1말을 감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경비를 헤아려 줄이는 일은 마땅히 신축년018) 의 예대로 해야 합니다만, 군문의 급료는 백관의 녹봉 및 모든 쓸데없는 비용을 다 감한 뒤에 감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번의 책봉에 따른 과거(科擧)는, 비록 경사(慶事)는 해를 넘기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외방의 유생이 식량을 준비해 오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또 서울에 모이게 되면 필시 주인과 손님이 모두 곤란해질 근심이 있으니, 내년 가을로 물려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지사(知事)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각 도의 수륙(水陸)에서의 군사 훈련도 정지해야 합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한 번의 군사 훈련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병사(兵使)가 군사를 조련하는 것은 우선 정지하고,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데리고 갈 자를 뽑아서 여러 고을을 오가면서 재주있는 자를 시험하여 뽑도록 하라."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근래 하늘의 변이 너무 참혹하여 28수가 모두 상도(常度)를 잃었습니다. 이번 22일에 또 지진의 변이 있었으나, 관상감이 아뢰지 않았다고 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미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형세인데, 비국의 당상이 한 때의 조그만 혐의 때문에 모두 들어가버리고, 심지어 이조·형조 판서도 또한 출사하지 않으니, 매우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가 참으로 병이 있는가?"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지난번 경연 석상의 대화 내용을 신이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김만기 등과 더불어 각자가 의심해서 서로 격앙되어 이렇게 확대된 것인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선(李選)의 피혐한 말이 비록 부당한 듯하지만, 상께서 너무 심하게 기를 꺾었기 때문에 정관(政官) 또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니, 기색이 매우 아름답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약 이선에게 화를 냈다면, 이선이 인피하는 것은 참으로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같이 한 적이 없었는데 감히 ‘거듭 임금의 노여움을 격동시켰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비지(批旨)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최선(崔宣)에게 직책을 제수할 때에 비록 그 아비는 미처 알지 못했더라도 이선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마땅히 피혐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응당 피혐했어야 한다는 교지 때문에 노기 품은 기색을 장황히 늘어놓아 변별하고자 하였으니, 요사이 허물을 그럴듯하게 꾸며 감추는 습속이 매우 가증스럽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함경 감사 이상진(李尙眞)은 제배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올라오지 않고 또한 상소하는 일도 없습니다. 먼 도의 사람과 말이 서울에 머문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참으로 매우 염려됩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이상진은 원래 산림의 선비가 아닌데 연소한 무리에게 배척당했다는 이유로 시골 구석에 물러나 있으므로, 이 직책을 제수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어도 와서 사은할 뜻이 없는 것입니다. 비록 질병이 있다 하더라도 상소 한 번 올리는 것을 어찌 하지 못하겠습니까. 지금의 기강으로는 끝내 일으켜 보내기 어려우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보내는 것만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다시 다른 사람을 제수한다면 나라의 체모가 상하게 된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물러나 있는 것을 편히 여기는 사람을 억지로 부임하게 할 수 없으니, 우선 고쳐서 차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금년 농사가 이와 같아 도적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니, 장차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니, 혁연이 아뢰기를,
"전에는 명화 강도(明火强盜)가 반드시 부잣집에만 들어갔는데, 금년에는 베 한 필, 쌀 몇 말만 보아도 오히려 그 마을에서 횃불을 들고 공격합니다. 이에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하게 여기고 있는데, 장래에 반드시 확산될 근심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서울과 지방에 방비를 엄하게 하도록 하였다.
7월 27일 기사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상이 조리하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정언 이선이 또 인피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망령되이 탄핵하자 성상께서 거듭 진노하시고 정관(政官)이 성을 내어, 준엄한 비답을 내리시고 급박하게 상소하여 배척하였는바, 모두 감히 스스로 편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무릇 최선이 처음 벼슬한 것은 어미의 하자가 드러나기 전에 있었으니, 분명하게 드러난 뒤에 주의한 정관과는 함께 나란히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비답에는 ‘억지로 전관(銓官)에게 죄를 씌웠고 응당 피혐해야 할 혐의를 피하지 않았다.’고 하시었으며, 이어 또 ‘참으로 몹시 놀랍다.’고 하시었습니다. 말뜻이 엄하기가 이와 같은데, 어떻게 성상께서 노하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반드시 규례를 정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고 하신 분부는, 신의 본뜻이 아닙니다. 그저께 내리신 비답은 이것보다도 더 준엄하였으며, 심지어는 신이 군부의 입을 틀어막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신이 논핵한 것이 과연 망령되었다면 그에 해당되는 죄로 벌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크게 노여워하는 기색을 보이시면서 짓눌러서 대간을 대우하는 체모를 손상시키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정관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신은 실로 의아스럽습니다. 장훤이 사판에 끼일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억지로 예경의 뜻을 끌어다 맞추면서 자신의 잘못을 가리우니, 이미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고 공의(公議)를 신장시키는 옛사람의 의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최선의 하자는 근래에 비로소 드러났으니 정관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상소 속에 끼워넣어 은연중에 증거로 삼은 것은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불평스런 뜻이 없고 침해하는 말이 없었다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 올린 상소에 있어서는 종이에 가득한 말이 모두가 성을 내는 데서 나온 것이며,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는 등의 말은 실로 성상의 유시를 빙자하여 공격하는 바탕으로 삼은 것입니다. 말을 이렇게까지 마구하니, 그가 대관을 경시하는 것은 논할 것조차 못 됩니다. 아, 한번 정사(政事)를 잘못한 것이 정관에게 있어서 무슨 손상이 된다고 스스로를 해명하기에 급급하여 점차 헤어나기 어려운 지경으로 빠져들면서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신은 실로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이 한마디 말을 망령스럽게 하였다가 위로는 임금에게 거슬림을 받고 아래로는 재상의 노여움을 촉발시켰으니, 형세를 돌아보건대 어찌 감히 무릅쓰고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는 어제 말한 것을 가지고 지금 스스로 해명하고자 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우고자 하는 것인가? 참으로 가소롭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다시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이선이 인피한 말은 바로 남을 책하는 데에는 밝으나 자신을 책하는 데에는 어두운 그런 경우이다. 이와 같은 말을 어찌 깊이 혐의하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동몽 교관(童蒙敎官) 이상익(李商翼)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의 국사는, 말하자니 통곡스럽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한갓 이해관계의 소재만을 알고 구제하는 방도에 대해서는 모르니, 역시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며 일을 처리해 나가는 도리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신에게 직함 하나를 주어 제주도로 달려가서 압송해 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면 어찌 별도로 잘 처리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신이 그들을 놓쳐버렸다고 청나라에 보고하면 신에게만 화가 닥칠 것이고, 필시 나라에까지 미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미천한 신 하나를 아껴 의리상 차마 하지 못할 짓을 차마 하여 스스로 천하 후세에 기롱을 받으시려 하십니까. 더구나 신의 아비 이흘(李忔)이 지난 숭정(崇禎)기사년019) 에 중국에 갔다가 불행히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사하였는데, 상구(喪柩)가 돌아올 때 특별히 황조(皇朝)에서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은전을 입었으므로, 그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하늘처럼 가이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신종 황제(神宗皇帝)께서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주신 그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이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청을 허락하시어 속히 결단을 내리소서. 아, 나라의 길고 짧음은 하늘에 달렸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습니다. 앞으로의 화복은 미리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오직 눈앞의 조처를 의리에 맞게 하면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안에 머물려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7월 28일 경오
묘시에 목성이 나타났다.
7월 29일 신미
대신을 보내어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지냈다.
묘시에 목성이 나타났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사간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수찬으로, 최관(崔寬)을 장령으로, 변황(卞榥)을 지평으로 삼았다.
지평 신경윤(愼景尹)이 아뢰기를,
"사도 정 김익훈은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고 염치를 모두 잃어 집에 있을 때나 관직에 있을 때나 어그러진 행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중에 가장 드러난 일 하나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적 이형장(李馨長)의 아들 이정윤(李廷胤)이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은 뒤에, 익훈이 정윤의 첩을 빼앗아 첩으로 삼고서 데리고 함께 산 것이 거의 십 년이나 됩니다. 역적 집안의 더러운 여자는 이미 사대부로서 가까이할 바가 아니며, 또한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천금(千金)은 바로 역적 집안의 남은 재물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난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벼슬자리에 끼어 있고, 심지어 외람되이 한 관청의 우두머리로 있으니 세도(世道)의 한심함이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금년의 가뭄으로 인한 재앙은 예전에 없었던 것으로 지금은 바로 상하가 놀라고 당황하여 불안한 때인데도, 전라 감사 민점(閔點)은 동생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그 노래부르는 소리가 온 고을에 다 들렸습니다. 게다가 그 다음날은 바로 국기(國忌)였으니, 그 무식한 형상은 너무도 놀랍습니다.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소서.
전 현감 최세경(崔世慶)은 바로 이유청(李惟淸)의 외손입니다. 유청이 살아 있을 때에 양자(養子)를 장가들여 윤씨를 며느리로 삼았는데, 데려온 지 겨우 몇 달 지났을 때 마침 유청의 집안에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청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어떤 사내가 밤을 틈타 윤씨의 방에 들어가 몰래 간통하려 하였습니다. 이에 윤씨가 남편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어 물어보니, 대답하는 목소리가 바로 최세경이었습니다. 윤씨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놀랐는데, 윤씨의 본가에서 데려온 여종과 제사 준비로 잠을 자지 않고 있던 이유청 집의 여종들이 사내가 침입했던 곳에서 도망가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고 합니다. 윤씨의 이 말이 혹 세경을 무함한 것이라면 윤씨는 당연히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세경이 만약 남몰래 들어간 일이 있다면 세경도 자연 거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피차의 정적(情迹)이 아직까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세경이 벼슬길에 올랐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윤씨와 세경을 똑같이 잡아다가 심문하여 옥사의 실정을 캐내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전 부솔(副率) 이지렴(李之濂)이 상소하여 한인을 압송하지 말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안에 머물려 두고 회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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