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계유
정언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회답하지 않고 그의 직을 체직하였다.
상이 눈병으로 인하여 침을 맞았다.
8월 2일 갑술
묘시에 목성(木星)이 나타났다.
송시철(宋時喆)·이정(李程)을 승지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이훤(李藼)을 검열로, 권대운(權大運)을 함경 감사로 삼았다.
8월 3일 을해
병조 판서 김좌명이 다시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바라니, 상이 몸을 조리하고서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신축년020) 에 재생(裁省)한 문서를 상달하니, 경비를 줄이는 것을 의논해 정하게 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올해 가뭄이 이토록 심하게 들었는데, 경기 지방의 흉년이 다른 도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만약 특별히 견감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지탱할 수 없습니다.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전부 견감하고 매 1결당 관수미(官需米) 8승만 거두고서 각 고을로 하여금 이것으로 지용(支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그렇게 한다면 어찌 큰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단지 8승만 거둔다면 세전(歲前)에는 겨우겨우 지용할 수 있으나 세후에는 계속 쓰기가 어렵습니다. 1두 6승을 거두어서 관수(官需)로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쓰고 남은 것이 있을 경우에는 진휼하는 밑천에 보태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의 병이 가볍지 않다고 한다. 본직을 지금 우선 체차하고 오늘 정사에서 대임자를 차출하라."
하였다.
홍중보(洪重普)를 병조 판서로, 오두인(吳斗寅)을 사간으로, 이동명(李東溟)을 헌납으로 삼았다.
좌의정 허적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병들었다고 진달하고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보내어 올라오라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다시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5일 정축
묘시에 목성이 나타났다.
8월 6일 무인
배천군(白川郡)에서 개가 강아지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체가 둘이었다.
유학(幼學) 이태양(李泰陽)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예전의 사실을 두루 살펴 이를 오늘날의 일에다 비기어보니, 1년 안에 두 번 가뭄이 드는 것은 전고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그 까닭을 조정에서 찾아보니 비루한 자가 권세를 탐하는 습속이 극에 이르렀고, 사대부들에게서 구해보니 동경(東京) 당고(黨錮)의 화021) 가 싹텄습니다. 하늘은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같은 하늘이니 어찌 오늘날에 재앙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일 중에는 통곡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를 읽어보니, 서로 협동하는 아름다움이 없는 데 대해서 개탄하시었습니다. 그러니 거룩하고 현명하신 전하께서 붕당을 맺고 간악한 짓을 하는 정상을 통촉하신 것으로, 어질고 재주있는 이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혹 이로 인하여 두려워 움추러들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뜻이 참으로 참되고도 아름답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오늘날 조정에는 일종의 비뚤어지고 과격한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당파를 심어 뿌리를 굳게 맺고 있는데, 크고 작은 일을 가릴 것 없이 걸핏하면 실없는 의논을 내고, 임금을 협박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뒤흔드는 것이 그들의 능사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스스로 분발하시어 그들 가운데서 특히 심한 자를 제거해 여러 신하들을 경계시켜 가다듬게 하여 전날의 못된 습관을 뜯어고치게 한다면 그래도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시고 오히려 예전 그대로 따르면서 혹 시끄러움이 일어날까 염려해 몇 줄의 서로 협심하라는 말로써 병의 뿌리가 이미 고질화된 습속을 개혁시키고자 하십니까. 역시 지나치게 구구하다 하겠습니다.
아, 사(邪)와 정(正)이 뒤섞여 있는 것은 국가의 불행입니다. 그런데 정이 사를 이기는 경우는 예로부터 항상 드물었고 사가 정을 이기는 경우가 예로부터 항상 많았습니다. 적(赤)과 백(白)이 서로 공격하고 있는데, 신은 어느 쪽이 정이고 어느 쪽이 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로를 차지하고 있고 청반(淸班)을 출입하는 자들은 거의 모두가 적(赤)을 공격하는 무리들이고, 조정의 기강을 마구 뒤흔들고 전하의 총명을 가리우는 자들도 역시 백(白)을 편드는 무리들입니다. 그러니 백이 적을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실정에 맞는 말입니다만, 그것을 일러 적과 백이 서로 공격한다고 하는 것은, 신은 그것이 옳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한갓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공격한다는 이름을 어거지로 가하여서, 자신과 같은 당파의 사람은 추켜 세우고 다른 사람은 공격하면서 반드시 국가에 화를 끼치는 무리들이라고 일률적으로 논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조정에다 함정을 파놓고 시의(時議)에 붙좇지 않는 자를 몰아 넣고, 대각에다 쇠뇌를 설치해 놓고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르는 자를 따라가면서 쏘고 있습니다. 옥당에서 들이치는 것은 호랑이면서 날개가 달린 격이고, 정원에서 전하를 속이는 것은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 격으로, 이구동성으로 전하를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파만을 일삼는 자를 전하께서 여러 사람과 함께 치고자 하더라도 누가 치겠으며, 서로 협심하기를 생각지 않는 자에 대해 국가에 비록 떳떳한 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형벌을 주겠습니까. 사와 정이 나뉘어짐을 이에 근거하여 알 수 있으니, 재이가 일어나는 것이 어찌 공연히 그런 것이겠습니까.
인심이 막혀서 답답하면 위로 천변을 부르고 하늘의 노여움이 심하면 아래로 견고(譴告)를 보이는 법으로,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통하며 아래 위가 한가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여기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꾸지람에 응답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전하의 총명함은 간사함을 밝게 살피는 바가 있으나 굳건한 덕이 부족하고, 지혜는 간특함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나 유순한 면이 지나치게 많아, 한결같이 잘 조화시키고 화해시키는 데에만 마음을 쓰십니다. 이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일정치 않고 옳고 그름이 뒤바뀌어, 지나치게 과격하고 멋대로 떠들어대는 무리들이 움추러들지 않고 충직하고 강개한 사람들이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아서 여럿이 떼를 지어 배격하여 도리어 해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일찍이 총애하여 이끌어주지 않은 채 한결같이 구렁에 내버려 두고 있으며 그들이 해침을 당해도 앉아서 보기만 한 채 그들을 격려시키지 않고 계십니다. 아, 간신의 목을 칠 상방검(尙方劎)이 전하에게 없단 말입니까.
옛날에 노종도(魯宗道)·사마광(司馬光)·구양수(歐陽脩)·여회(呂誨) 등이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간관이 되었는데, 적봉(赤棒)이 가리키는 바에 존귀함과 비천함을 가리지 않았고 탄핵장을 올림에 간신의 기세가 위축되어 언론과 풍채가 한 세상을 진동하였습니다. 그러자 어진이를 미워하는 간사한 자들도 그들을 칠 수가 없었고, 밝고 어진 인종(仁宗)께서는 그들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등용시켰습니다. 이 몇몇 어진 사람들이 인종같은 어진 임금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한 시대에 함께 나와서 한 시대의 성대함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유언충(劉彦沖)이 말하기를 ‘그 당시에 공자(孔子)가 없었다면 안연(顔淵)은 시골 구석에서 썩고 소정묘(少正卯)가 어질다고 소문났을 것이며, 그 당시에 맹자가 없었으면 광장(匡章)이 불효한 사람으로, 진중자(陳仲子)가 청렴한 선비로 되어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아, 참으로 전하의 밝음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착한 사람들이 어찌 폐고(廢錮)만 되고 말았겠습니까."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상소는 답할 만한 상소가 아니니 기각시키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전 이조 판서 윤강(尹絳)이 죽었다.
윤강의 자(字)는 자준(子駿)이다. 성품이 순후하고 신중하며, 돈후하고 확고하였다. 조정에 들어온 지 40년에 관직이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며, 검약으로 스스로를 견지해 집이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말년에는 시골로 물러나 있으면서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그의 염퇴(恬退)의 절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8월 7일 기묘
원만리(元萬里)를 정언으로,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판서로, 이상일(李尙逸)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삼았다.
집의 여민제(呂閔齊)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내탕고에 쌓아두는 것은 사재(私財)를 전혀 축적하지 않는 왕자의 도가 아니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혼자만 부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내사(內司) 및 수진궁(壽進宮)·명례궁(明禮宮)에 쌓아둔 재물과 곡식을 덜어내어 가난한 백성들을 진휼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왕제자의 탄신일을 9월 15일로 고쳐 정하였다. 이에 앞서 관상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탄생이 신축년 8월 15일에 있었는데, 《대통력(大統曆)》의 역법으로 보면 이 해에는 윤달이 10월에 있으니, 《시헌력(時憲曆)》의 신축년 윤7월은 8월이 되며 8월은 9월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달이 크고 작음을 따져 보면 《시헌력》의 윤7월과 《대통력》의 8월은 모두 작으며, 15일은 간지(干支)가 모두 계유(癸酉)입니다. 나라에서 지금 《대통력》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왕세자의 탄생한 날짜는 9월 15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니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대통력》으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대전(大典)》에 실린 ‘개가한 자의 자손은 동서반의 정직(正職)에 서용하지 않는다.’ 한 것은, 대개 예의로 풍속을 교화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간 것은 개가한 것과 똑같이 커다란 허물인데, 자손을 벼슬길에 허통시킴에 있어 하나는 허락하고 하나는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혼하고 다시 장가드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허통시키는 것은 또 옛 법전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곧장 해당 부서에 분부하여 정식으로 삼아 거행하게 한다면, 비록 청현직에는 허통시키지 않는다고 하지만 듣고 보는 사람들이 반드시 의아해 할 것입니다. 하교한 내용으로 다시 대신들에게 물어서 가부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임진년 이후 선조조에서 시행한 규례가 있으니 이것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대들의 아룀이 이와 같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의해 처리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아뢰기를,
"포로로 잡혀간 것은 개가한 것과 차이가 있으므로, 임진년과 병자년 난리 뒤에 별도로 법을 세워 금고시킨 일이 없었습니다. 대간이 논한 바는 지나치게 과격한 듯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정태화는 아뢰기를,
"포로로 잡혀간 부녀는 그 본정을 따져보면 개가한 자와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절개를 잃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이미 출처(出妻)를 하여 그 자식이 계모를 어미로 삼고 있는 경우에는 허물이 미치는 경중이 혹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로 삼을 만한 예율(禮律)에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신이 감히 억측하여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영의정 홍명하는 아뢰기를,
"포로로 잡혀간 것이 개가한 것과 차이가 있는 듯하나 오십보 백보에 불과하니, 그 자손들이 허물을 지고 있음은 이를 미루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다만 포로로 잡혀갔던 여자들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정의 금령(禁令)이 없는데, 음사(蔭仕)에 대해서만 유독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정치화는 아뢰기를,
"포로로 잡혀간 것은 개가한 것과 똑같이 절개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나 출모(出母)022) 의 자식으로서 계모를 어미로 삼고 있는 경우에는 허물이 미쳐감에 있어서 구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경석의 의논에 의거해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행 호군 김좌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현재 경기 지방의 흉년은 사람들이 모두 신축년023) 과 차이가 없다고 하니 농사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망극합니다. 조정에서 특별히 관대한 정사를 베풀어 재실(災實)을 조사하지 않고서 조세를 모두 면제해 주기로 하였으니, 백성들이 반드시 풍년이 든 해와 마찬가지로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좋은 땅을 가진 호강한 자들만 그 즐거움을 누리고 척박한 땅을 부치는 가난한 백성들은 여전히 그 쌀 몇 되 내는 것도 괴롭게 여기고 있으니, 바로 ‘천지(天地)의 큼에도 백성들 가운데 오히려 섭섭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을 가뭄이 이와 같아서 가을 보리를 갈지 못하고 있으니, 내년의 걱정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듣건대, ‘진휼청에서 조처한 것은 약간의 요미와 녹봉을 감하고 약간의 상공(常供)을 줄이며 약간의 은과 포를 취용(取用)한 데 불과하여, 모두 통틀어 계산해도 쌀은 1만 석이 못 되고 포는 1천 몇백 동에 불과하며 은은 겨우 1만냥을 넘는다. 그리고 이외에 고신첩(告身帖)을 팔아서 또 몇 석의 쌀과 몇 동의 포와 몇 근의 금을 더 얻을지 모른다. 그런데 경기 이외에도 재결(災結)을 보고한 도가 있어서 앞으로 또 신역(身役)에 대해 감포(減布)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이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 보건대, 세입(稅入)이 세출보다 부족합니다. 더구나 경기 고을에는 관수(官需) 외에도 폐지할 수 없는 것으로 크고 작은 사전(祀典)과 각종 부마(夫馬)와 아전들의 복호(復戶)가 있으며, 기타 불시에 해야 할 도내의 부역은 낱낱이 거론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과 포를 가지고는 두루두루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2, 3년간 흉년이 계속 들 경우, 나라는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경비를 쓰겠습니까. 당국의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이 점에 대해 염려하여 일에 앞서서 경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병으로 집에 누워 있어서 의논하는 자리에 참석치 못하여 한갓 걱정스런 마음만 더해 갑니다."
하고, 이어 진휼청·비국·선혜청 당상의 직을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 8일 경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경기의 공물을 줄여주는 일에 대해 품의해 정하고자 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경기의 공물을 한결같이 신축년 예에 의거해 마련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마련한 별단(別單)을 올리면서 아뢰기를,
"매일 어공(御供)으로 올리는 생선은 원수가 3마리인데, 신축년에 줄일 때에는 1마리를 줄이고 2마리에 대해서는 가미(價米) 8두로 마련하여 들였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하였는데 매 마리당 가미 4두는 지나치게 많은 듯하니, 각각 1두씩 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겨울이 되면 값이 싸질 것이니 지금은 우선 감하지 말고 겨울이 된 후에 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에 의거하여 정하되 2마리 중 1마리도 임시로 감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각종의 경비 가운데에서 감할 만한 것은 모두 헤아려 감하도록 명하였다. 공조 판서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이번의 이 재감은 실로 기민을 진휼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조정의 덕스런 뜻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듣건대, 금년에는 복심(覆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읍이 조금 낫고 어떤 고을이 더욱 심한지 모르고서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모두 한결같이 견감한다면 무슨 곡식으로 온 도의 백성들을 두루 구제하겠습니까."
하고,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완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올해 경기의 흉년은 대부분 모두 같아 조금 낫다고 하는 곳도 모두 참혹스러워서 결단코 복심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복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기 백성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바꾼다면 크게 백성들의 마음을 잃을 것입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세와 신역을 모두 견감한다면 진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하게 기근이 든 곳은 역시 죽을 쑤는 곳을 설치하여 진구하여야 합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금년의 환자곡은 결단코 다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하니 조정에서 명백하게 한계를 정해야 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3분의 1로 한계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쌀은 형세상 거두어들이기 어려우니 벼로 대신 거두어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벼로 대신 거두어들였다가 내년 봄에 나누어주어 종자곡으로 삼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9일 신사
사관을 보내어 좌의정 허적에게 전유(傳諭)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올라오지 않았다.
좌찬성 송시열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8월 10일 임오
묘시에 목성이 나타났다.
간원이 황연(黃壖)을 유배보내라는 것과 이석복(李碩馥)을 조사하라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헌납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사설이 벌떼처럼 일어나 음흉하고 위태로운 상황을 조성해 놓고는 임금의 마음을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려 하고 있는데, 그 형세가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른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지난번에 황연과 이석복 등이 틈을 엿보아서 참소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눈치만 살피는 조짐인 것으로 한 칼에 짤라내어 그 습속을 통렬히 끊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조정 사람들이 모두 간쟁하니 공의가 어떠한지 엿볼 수 있는데도 반년이 지나도록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태양(李泰陽)의 상소가 또 계속해서 들어와 성상께 들인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참소하는 말을 미워하는 거조가 없는바,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혹하는 바이며 여러 사람들이 아주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신이 듣건대, 머뭇거리는 마음을 지닌 자는 참소하는 말을 이르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자는 삿된 자들에게 문을 열어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속히 그의 죄를 결단하여 인심을 안정시키고 조정이 존엄해지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이태양의 상소는 한 번 보고서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를 죄주지 않는 것이 어찌 그 시비(是非)에 전혀 어두워서이겠으며, 또한 어찌 구언(求言)한 데 구애되어서 그러겠는가."
하였다.
8월 11일 계미
묘시에 목성이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경기 지방의 각종 신역(身役)을 지금 견감하여야만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반만 감하였으면 하는데, 조복양은 3분의 2를 감하고자 합니다."
하니, 조복양이 아뢰기를,
"감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감할 것 같으면 많이 감하여서 실제의 혜택을 베풀어 주는 편이 낫습니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조정에서 복심하지 않고 특별히 전세를 감해 준다 하여 경기 백성들이 모두들 감격하고 있는데, 지금 또 신역을 많이 감해 준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사세상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만 감해주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김좌명의 상소는 큰 뜻은 모두 옳습니다. 다만 재결과 실결을 복심한 다음에라야 대동 제역(大同諸役)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이처럼 백성들이 황급해 하는 때를 당하여서는 결단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김좌명의 상소에서 ‘경기 지방에 복심을 하지 않는다면 호서에는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경기 지방은 흉년이 심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역이므로 특별히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호서 지방은 비록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지만 경기 지방처럼 심하지는 않으니, 재결과 실결을 답험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김좌명의 병이 대단치 않은데도 병조 판서 직을 체직한 것은, 그로 하여금 선혜청의 직임을 전담해 살피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그의 상소 중에 ‘당국의 여러 신하들도 또한 이 점에 대해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란 말이 있는데, 그가 만약 출사한다면 그 자신이 당국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즉시 패초(牌招)해서 직임을 살피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구언할 때, 구언 전지에 응한다는 핑계로 감히 사설(邪說)을 늘어놓는 자가 있으면 내가 통렬히 징계하겠다는 뜻으로 하교 안에 언급했었다. 지금 이 이태양의 상소는 그 뜻은 불미스러우나 범범하게 붕당의 폐단에 대해 말한 것이니, 내가 말한 사설은 아니다. 그런데도 대관(臺官)들은 나의 하교를 빙자해 반드시 죄주려고 하고 있다. 경들이 보기에 이 상소에 반드시 죄줄 만한 일이 있는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그 내용은 사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깊이 죄주려고 하는 것은, 신으로서는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이 소를 보건대 깊이 배척할 것은 없습니다. 대간이 이를 이유로 죄주기를 청하는 것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은 어찌하여 율을 적용해 죄주기를 청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속히 처단하게 하는가? 전부터 상소한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교가 있은 다음에 정원이 그로 하여금 상소를 읽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하교를 기다리지 않고 정원에서 먼저 그로 하여금 상소를 읽게 하였으니, 몹시 부당하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비록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상소라도 정원은 받아들여서 성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몹시 불가합니다."
하였다.
홍문관 교리 이단하(李端夏), 수찬 박세당(朴世堂)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이태양이란 자가 상소를 올려 헐뜯었는데, 말이 대부분 말머리를 숨겼으나 뜻은 흉억을 펴는 데 있다고 합니다. 신들이 들은 바가 비록 상세하지는 못하나 요점은 황연과 이석복의 주장을 답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상소 가운데 ‘옥당에서 들이치는 것은 호랑이에게 날개가 달린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신들이 처음에 듣고는 두려워 떨었으며, 오래될수록 더욱더 의아스러웠습니다. 그의 뜻을 헤아려보면 신들이 근일에 논한 이석복 등에 대한 한두 가지 일 때문에 발론한 것일 뿐입니다. 이태양은 이석복 등과 생각이 같고 얼굴만 달리한 자이니, 그가 말한 것 역시 어찌 깊이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헐뜯음을 당하고는 참으로 감히 편안히 있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신들은 모두 형편없는 자질로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상의 총명을 열어드려 일찌감치 사정(邪正)의 구분에 대해 엄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음험하고 흉측한 자들로 하여금 조정을 깔보아 넘겨다보는 계책을 부리는데 조금도 꺼려할 줄 모르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하고, 이어 직명을 깎아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8월 13일 을유
평안 감사가 청나라 사신이 나왔다고 보고하였다. 우참찬 조형(趙珩)을 원접사로 차임해 보내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신이 몹시 급작스럽게 나왔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니,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양서(兩西) 지방이 이처럼 기근이 들었는데 갑자기 청나라 사신이 나오게 되었으니 책응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경기 지방의 참(站)에서의 부역이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정치화가 또 아뢰기를,
"신축년에 진휼할 때에는 삼남과 함경도 지방의 삼명일방물(三名日方物)을 모두 임시로 감하고 그 가미(價米) 1천 4백 96석 남짓을 진휼청에서 가져다가 썼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해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아뢰기를,
"영남의 유군포(留軍布) 1백 동은 전부터 하삼도에 나누어주어 군병들에게 상을 주는 자본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올해는 각도의 군사 훈련을 모두 정지하고 영장(營將)으로 하여금 한 차례 순심(巡審)만 하게 하였으니, 우선 30동으로 각도에 나누어 보내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이태양의 위험하고도 틈을 엿보는 건방진 정상에 대해 거듭 아뢰면서 멀리 내쫓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이 사람의 상소가 어찌 바르다고 하겠는가마는, 그를 죄주지 않은 것은 언로에 방해가 될까 염려해서이다."
8월 14일 병술
지평 신경윤(愼景尹)이 아뢰기를,
"신이 일에 대해 논하는 글을 한 장 올렸다가 여러 집안의 화를 돋구어, 한 목소리로 한꺼번에 일어나 독기를 품고 모해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의 죄상을 얽어내고자 하면서는 전직에 있을 때의 일을 조사해 찾아내었으며, 신의 아비의 허물을 캐내고자 하면서는 의금부의 문서를 들추어보고 있으니, 그들의 음험한 생각과 참혹스런 계책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김익훈(金益勳)의 행실이 거칠고 패려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들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있는데도 단지 명문 거족이라서 그 기세가 두려워 아무도 감히 무어라고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이 항상 이를 통분히 여겨 그의 잘못된 행실 가운데 하나를 들어 논박하였습니다. 그런데 위태로운 기미가 밀어닥치고 욕설과 비방이 쏟아져 들어오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최세경(崔世慶) 및 윤씨(尹氏)의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15년 전에 이미 그 말을 들었는바, 최세경이 발장(發狀)하지 않으면 반드시 윤씨가 발장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쪽과 저쪽 양쪽 다 발장하지 않은 채 17년이나 지난 것은 유독 무슨 뜻입니까. 윤씨의 남편이야 비록 어리석은 탓에 알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아비인 최유청(崔惟淸)은 사대부입니다. 외아들의 처에 대해서, 그가 실행(失行)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경우에는 관가에 고해 죄를 다스린 다음 아들을 새로 장가들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으로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집에 머물려두었다가 그의 친정으로 내쫓기만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최세경이 명사들과 교유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다는 것을 신이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명예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논핵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최세경이 과연 원통하다면 지금의 이 조사해보자는 논계가 바로 그가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언과 비방으로 서로 원망하며 욕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신의 아비가 처음 벼슬한 것이 마침 혼조(昏朝) 때였는데, 본디 흉론(凶論)에 물들어 벼슬을 얻은 것이 아니며, 인조조 때 의망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 당시의 조정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교묘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떠벌리면서 신을 중상모략하고 지하에 있는 신의 아비까지 무함하려고 하니 참으로 참혹합니다. 그지없이 욕을 당하고 있으니, 아무말 않은 채 재직할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거상(居喪)하고 있는 신하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여 상수(喪需)를 제급해 주도록 한 명을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은 찬성을 지낸 유종(儒宗)이었는데도 오히려 자손들에게 자기가 죽은 뒤에 내리는 은전을 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으레 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지금 신이 흉복(凶服)에 스스로 구애되어서 아무 말없이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범연한 뜻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니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
고 답하였다.
8월 15일 정해
묘시에 목성이 나타났다.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최유지(崔攸之)를 교리로, 이유상(李有相)을 부교리로, 이익상(李翊相)·오시복(吳始復)을 부수찬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홍만형(洪萬衡)을 문학으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 등이 아뢰기를,
"금년의 재변과 흉년은 근래에 없던 것으로 민사(民事)가 망극스러워 나랏일을 어떻게 해볼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청나라 사신이 나왔다는 보고가 바로 이럴 때 이르렀는바, 삼로(三路)에서 참역(站役)을 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듣건대, 양서 지방의 기근이 다른 도에 비해서 더욱 심하다고 합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관향 미곡(管餉米穀)과 재화(財貨)가 관서 지방이 가장 넉넉하며, 해서 지방이 그 다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묘당으로 하여금 속히 두 도의 감사에게 분부해서 적당히 헤아려서 덜어내어 참역을 돕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관향의 모곡(耗穀) 2만 석을 막 관서 지방의 열읍에 나누어주어 칙사 대접하는데 쓰게 하였으며, 해서 지방에는 모곡으로 바꾼 포 3백 69동을 역시 나누어주었으니, 지금 더 줄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8월 16일 무자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진퇴는 다른 일반 관원과는 달라서 고식적이고 구차스럽게 하여 직무가 폐기되는 폐단이 있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집의 여민제(呂閔齊)는 본직에 제수된 지 이미 보름이 지났으며 폐단을 진달한 소에 대해 너그러운 비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물러나 움추리고 있으면서 나와 사례할 뜻이 없습니다. 물정이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처음으로 삼사(三司)의 직에 제수된 나이 어린 신진의 무리가 소를 올려 사면되는 것은 몹시 번거롭고 외람될 뿐만 아니라 또한 고사(古事)도 아닙니다. 더구나 패초를 받고 대궐에 나와서도 감히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끝내 들어와 숙배하지 않고 물러가니, 법이 몹시 해이되었습니다. 어제 옥당에 새로 제수된 관원으로서 패를 받고도 숙배하지 않은 관원을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어린 아이를 군역에 충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커다란 폐단입니다. 대개 양민 가운데 조금이라도 재산이 있는 자는 모두 헐한 역에 투속되어서 다시는 남아 있는 여정(餘丁)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들이 찾아낼 길이 없어서 부득이 어린 아이로 충정하고는 포를 거둡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떠돌아 흩어지고 인족(隣族)이 보전되지 못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각 아문의 군관(軍官)이나 각 영에서 변란에 대비하고 있는 군관(軍官)·군뢰(軍牢)·아병(牙兵) 등의 역(役)은 비록 폐할 수는 없더라도 인원수를 정해두는 것이 마땅한바, 마음대로 충정해 가난한 백성들만 고통받게 해서는 안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8월 17일 기축
비국이, 각 고을에 이전한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의 군향곡(軍餉穀)을 금년에 도로 받아들일 때 그대로 각 고을에 머물려 두어 진휼할 밑천으로 삼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밤에 달무리가 목성을 감쌌다.
8월 18일 경인
최관(崔寬)을 집의로, 이단하(李端夏)를 이조 정랑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교리로, 이동명(李東溟)을 장령으로, 이세장(李世長)을 부수찬으로, 박세당(朴世堂)을 부교리로 삼았다.
장령 송창(宋昌),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여민제를 논핵한 계사는 말이 범범하고 옥당을 추고하기를 청한 계사는 말뜻이 너무 중하여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8월 19일 신묘
상이 침을 맞았다.
8월 20일 임진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장령으로, 홍만형(洪萬衡)을 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원만리(元萬里)가 아뢰었다.
"신이 동료들과 함께 본원에서 제좌(齊坐)하여서 ‘전 집의 여민제가 아비 상을 당하여 오랫동안 상차(喪次)에서 떠나 있었던 것이 비록 병이 중한 탓이라고는 하지만 예법을 무너뜨린 잘못을 면할 수 없으며, 헌부의 논핵은 대개 물의에 따라서 하는데 조어(措語)가 모호하고 율을 적용한 것이 지나치게 가벼우니 끝내 체직만 하고 말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원양 도사(原襄都事) 정중휘(鄭重徽)는 일찍이 언관 자리에 있으면서 마음씀이 불미스럽고 직무를 잘못 처리해 대간의 탄핵이 거듭 발하여 정상이 더욱 드러났다. 이 일로 인하여 폐기된 채 오랫동안 청현직에 들어 오지 못하였으니, 공의의 엄함을 알 수 있는데, 갑자기 홍문록(弘文錄)에 참여되었으므로 물정이 모두 해괴하게 여긴다. 여민제는 삭직하고 정중휘는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으로 석상에서 발론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은 끝까지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유독 아장(亞長)만이 중휘에게 사정을 두어서 논란하며 따지는 즈음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것은 곤란하다.’고만 하였습니다. 이에 반나절 동안이나 서로 버티다가 끝내는 소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평소에 신이 경시당한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사간 오두인이 아뢰기를,
"원만리가 정중휘를 홍문록에서 삭제하자는 뜻으로 발론하였는데, 신의 생각에는 ‘대각에 있으면서 한때 잘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이를 이유로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신이 이런 내용으로 반복해서 상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만리가 끝끝내 고집을 부리다가 지레 먼저 인피하였으며, 사정을 두었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드러내놓고 헐뜯으니, 신은 실로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어렵게 여긴 것은 자세하고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뜻이었는데, 동료의 배척을 중하게 받았습니다.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으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다. 헌납 권격(權格)은 아뢰기를,
"본원이 다함께 모였을 때 동료가 정중휘를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일을 가지고 석상에서 발론하였습니다. 신은 정중휘의 일에 대하여 당초의 곡절을 잘 몰랐으므로,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것은 한때 서로 바로잡아주는 정도에 비할 것이 아니니 너무 과중한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가 발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심지어 ‘홍문록에 대하여 사람들의 말이 많았는데, 이미 도당의 선발까지 거쳤으므로 물의가 더욱 놀라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일이 과연 그렇다면 자세히 알아보고 나서 해도 안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료들이 이를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고 있으니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였다.
지난 갑진년에 집의 민유중(閔維重)이 서필원(徐必遠)을 중하게 탄핵하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라."
고 하였는데, 상이 엄한 비답을 내려 민유중을 특별히 체직하였다. 그러자 다음날 정중휘가 지평으로 있으면서 인피하기를
"신은 서필원의 일에 대해서 견해가 서로 어긋나므로 연계(連啓)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규례가 있는 일이어서 혼자 정계(停啓)할 수도 없습니다."
고 하였다. 이에 옥당이 처치하기를 "
동료가 특별히 체직당한 뒤에 드러나게 회피한 자취가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다. 원만리가, 정중휘의 마음씀이 불미스럽다고 한 것은 이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8월 21일 계사
대사간 이시술(李時術)이 처치하기를,
"직무상의 잘못으로 인하여 폐기되었다면 그 홍문록을 쓰지 않으면 충분히 공의(公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삭제하고자 하였으니, 역시 지나치게 과격한 것입니다. 논한 바가 중한 일이어서 자세하고 신중하게 하자는 뜻이었으니, 실정을 벗어나는 배척은 혐의롭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일이 지나친 듯하다.’고 하고서, 또 ‘상의하여 하도록 하자.’고 하였으니, 끝내 구차하게 휩쓸림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원만리·권격은 체차하고 오두인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3일 을미
박장원(朴長遠)을 형조 판서로, 심유(沈攸)를 헌납으로, 강여호(姜汝㦿)를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 오두인이 아뢰기를,
"정언 원만리가 지난번에 ‘여민제(呂閔齊)는 부상(父喪)을 당하여 오랫동안 상차(喪次)를 떠나 있어서 물의가 있게 하였으니, 논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으로 석상에서 발론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여민제가 오랫동안 고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니, 참으로 상도(常道)로 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었으니 논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정을 참작해서 말을 만들어 논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으로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원만리 역시 그렇다고 하였으므로 신은 신의 견해를 고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동료와 더불어 상의해 보니, 동료가 ‘이미 병이 중하게 든 실상을 알았으면, 어찌 갑자기 중하게 논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끝내 곤란하게 여겼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경솔하게 논의한 잘못은 면하기 어려우니,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다. 정언 경최가 아뢰기를,
"동료가 여민제의 일에 대해 발론하기에, 신은 ‘여민제가 부상(父喪)을 당하였을 때 고질병이 몹시 위독해져 조석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런데 예를 무너뜨렸다고 하면서 갑자기 중하게 논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져 재삼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전에 이미 논의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기까지 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이미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지 못하였다.’ 하고, 또 ‘경솔하게 논의하였다.’ 하였으니, 전후의 지론이 구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병이 중한 실상을 비록 상세히 알았다고는 하지만 많은 말을 허비해 인피하였으니, 자취가 신구(伸救)하는 듯합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영상 홍명하에게 이르기를,
"원만리가 정중휘를 홍문록에서 삭제하라고 논핵한 일에 대해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것은 몹시 중대한 일로, 일찍이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몇 년 전에 한 가지 일을 실수한 것을 가지고 어찌 홍문록에서 삭제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원만리의 이번 논핵은 반드시 의도를 가지고 발한 것이다. 이런 습관은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대간의 논계가 비록 혹 과격하더라도 논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아뢰기를,
"원만리가 논한 바가 비록 지나치게 과격한 듯하지만 그가 맡고 있는 직책이 언관입니다. 정중휘의 마음씀이 불미스러움은 그 당시에 옥당의 처치에 모두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공의가 지금까지 허물을 추궁하고 있으니, 원만리가 논한 바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연 신하들이 모두 과중하다고 극력 말하자, 상이 노하여 이르기를,
"여러 사람들이 아무리 분분하게 쟁변하더라도 중휘에 대해 어찌 그의 앞길을 영구히 막을 수 있겠는가."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말한 것은 언관을 죄주는 것 때문에 말한 데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이시술(李時術)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면서, 재변을 만나 구언하고서 하나도 채용하지 않은 잘못을 갖추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에 송 영종(宋寧宗)이 뇌우(雷雨)의 이변으로 인해 조서를 내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말하자, 시강 주희(朱熹)가 면대하여 상주하기를 ‘폐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이미 분명한 조서를 내려서, 말을 올린 자가 몹시 많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라도 시행한 것이 있다고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구언하더라도 빈말이 될 듯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후성관(後省官)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묵혀 있는 모든 상소들을 살펴서 그 가운데에서 좋은 내용을 조목별로 아뢴 다음 전지를 받아서 차례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영종이 즉시 심유개(沈有開)·유광조(劉光祖) 등을 차임하여 10일 동안 상세히 살펴 아뢰게 하였는바, 주희가 대답한 것은 그 뜻이 아주 깊고도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도 역시 이 전례에 의거하여 근신으로 하여금 전후로 올린 상소장들을 조목별로 적어 아뢰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성상께 허물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본원(本源)을 단정히 하고, 궁중이 엄하지 않다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삿된 길을 막고, 공도(公道)를 넓히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사사로운 뜻을 끊으며, 사치를 금지시키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경연을 열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성심으로 하시고, 정무를 부지런히 살피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게으른 습관을 없애며, 언로를 넓히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성상의 도량을 넓히고, 유현(儒賢)에게 정무를 맡기라고 말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참소하는 말을 미워하여 멀리하소서. 그리고 제거할 만한 묵은 폐단과 없앨 만한 잘못된 정사는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된다.’느니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느니 하지 마시고 속히 처분을 내려 다시는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지 마소서. 그러면 구언한 실상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8월 25일 정유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사면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랏일과 백성들에 대한 걱정이 참으로 어떠한 때인가. 재주와 덕을 지닌 경이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시골 사람이 되어 지낸 지가 지금 몇 달째인가. 모름지기 고사하지 말고 속히 마음을 돌려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이동명(李東溟)을 사간으로, 정재숭(鄭載嵩)을 정언으로, 윤진(尹搢)을 사서로 삼았다.
헌납 심유(沈攸)가 추감(推勘)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8월 26일 무술
지평 신경윤(愼景尹)이 아뢰기를,
"원만리가 정중휘를 홍문록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것이, 어찌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정중휘는 일찍이 직무에 임하여 교묘히 회피하고 구차스럽게 인혐하여 공의가 크게 그르게 여겼으며, 그 뒤 성랑(省郞)024) 에 제수되어서는 중하게 논박을 받아 아직까지 청망(淸望)에 다시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홍문록은 청망 가운데서도 극선(極選)이니, 한때의 잘못으로 영원히 막아서는 안되지만, 청선의 차례는 등급을 뛰어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정이 흡족해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당연합니다. 홍문록에서 삭제하는 일이 비록 근래에 없던 바라고는 하지만, 단지 도리로써 말한다면 언책을 맡은 신하는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합당하지 않은 일을 보았을 경우에 어찌 근례(近例)라고 핑계대면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른바 ‘그 홍문록을 쓰지 않으면 된다.’고 한 것은, 쓰고 안 쓰는 것은 물론 전조의 일로 대신(臺臣)이 간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대신은 마땅히 자기의 소견을 진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 전조에서 반드시 쓰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무 말없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일에 대해 말한 신하를 특별히 죄주는 것은 결단코 성스러운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9일 신축
오정위(吳挺緯)를 도승지로, 이유상(李有相)을 헌납으로 삼았다.
평안도 이산(理山)·창성(昌城) 등지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여 새들이 맞아 죽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이 쳐 나무가 뽑히고 돌멩이가 날아갔다.
대사간 이시술이 아뢰기를,
"신이 원만리를 처치하면서 ‘홍문록에서 삭제하려고까지 한 것은 실로 지나친 듯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체직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물의가 그르게 여긴다고 하며, 헌부가 환수하라고 아뢰면서 신의 계사 가운데 있는 말을 끄집어 내어 드러내놓고 배척하는 뜻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공도(公道)가 이미 쇠해져 사의(私意)가 크게 행해지고 있다. 이미 4년이나 지났는데도 도로 청현직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니, 이 역시 공정치 못한 일이다. 어찌 이것으로 혐의를 삼아서야 되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신이, 원만리를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환수하라고 한 논계에서 말을 첨가해 넣은 것은, 대개 신이 정중휘의 지난날의 잘못을 영원히 폐기할 만한 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아직 청현직에도 통망(通望)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홍문록에 참여시키는 것은 홍문록의 선발을 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장(諫長)이 피혐한 계사에 ‘말을 끄집어 내어 드러내놓고 배척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다. 사간 이동명이 처치하기를,
"그 홍문록을 쓰지 않으면 된다는 등의 말은 자못 구차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별로 체차할 만한 잘못이 없는데, 반드시 신구(伸救)하고자 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하니, 몹시 형편없다. 이시술을 특별히 출사시켜라."
하였다. 이동명이 엄한 비답이 내렸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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