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임인
상이 침을 맞았다.
정언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심리(審理)할 때 신의 아비가 이온(李溫)을 감사 정배(減死定配)시키도록 탑전에서 대답하였으니, 신은 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는 데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체직시키도록 하였다.
대사헌 이경억이 신경윤에 대해 처치하기를,
"도리를 가지고 공정하게 말한 것이지 배척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간장(諫長)이 인피한 것이 자신에게 아무 거리낄 게 없습니다. 그가 주장한 말은 근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성상의 비답이 내렸다 하여 인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일 계묘
상이 침을 맞았다.
대사간 이시술(李時術)이, 이미 체직되었는데 특별히 출사하게 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9월 3일 갑진
상이 침을 맞았다. 이때 청나라 사신이 우리 국경에 들어왔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나온 청나라 사신은 황제가 친정(親政)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왔으니 반드시 사문(赦文)을 반포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경석(李景奭)을 탕척해 수용하게 해달라는 뜻을 주문하여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문을 보낸 뒤에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 난처하게 된다. 청나라 사신이 들어온 뒤 그들의 뜻을 잘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그 뒤에 이 의논은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사관을 보내어 좌의정 허적에게 전유하였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올라오지 않았다.
9월 4일 을사
상이 침을 맞았다.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 경최(慶㝡)를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이세장(李世長)을 이조 좌랑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여성제(呂聖齊)를 부응교로, 남구만(南九萬)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밤에 우레가 쳤다.
9월 5일 병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올해의 가뭄은 전고에 없던 참혹한 가뭄이었으며 지난밤의 맹렬한 우레는 또 비상한 변고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화의 기미가 아득한 가운데 숨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과 같이 형편없는 자가 수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는데, 또 국사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을 체직시키고 다시 어진 덕을 갖춘 자를 뽑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사직이 비록 불안해 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오로지 상하가 서로 도와 심력을 다해야 할 뿐이다. 어찌 지나치게 혐의롭게 여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양서 지방의 흉년이 특히 심한데다가 또 청나라 사신이 나오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일이 참으로 염려됩니다. 두 도의 금년 수미(收米)를 특별히 견감시켜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경기 지방에 세금을 감면해 주기로 한 뒤 사람들이 모두들 기뻐하면서 송축함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양서 지방의 수미(收米)를 또다시 감면해 준다면 어찌 크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태연(李泰淵)이 막 경상도 관찰사로 있다가 체직되어 올라왔는데, 그의 말을 듣건대 영남의 풍속이 아주 못되어 명령하는 것들을 공공연히 따르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에는 영남의 인심이 본디 돈후하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토호들이 무단(武斷)하는 습속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국곡(國穀)을 많이 받아 먹고서 환상(還償)하지 않아 열읍의 포흠이 2만여 석이나 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영남은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일컬어졌으니 지금이 비록 습속이 나쁜 말세라고는 하지만 어찌 쓸만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근래에 조정에서 거두어 쓰지 않았는바, 이 때문에 백성들이 수심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재주에 따라 거두어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정경세(鄭經世)와 이준(李埈) 이후에, 남아 있는 유풍(遺風)과 선속(善俗)이 없습니다. 전조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에는 한때의 인재를 뽑아서 쓰므로 영남 사람들 가운데 거두어 쓰이는 자가 드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소명(召命)이 조령(鳥領)을 넘어오지 않은 지 30년이 다되어 간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원통해 한다고 하니, 온 도의 인정이 어떠한지 대강 알 수가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재주에 따라 등용하는 일을 전조로 하여금 착실하게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박장원이 아뢰기를,
"송사를 처리할 즈음에 반드시 호구 장적(戶口帳籍)을 바치게 하는데, 누락된 자가 몹시 많아 경중을 분간하여 죄를 다스리면 시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누락된 자를 경중을 나누어 죄를 다스리는 것은 몹시 불가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형조 판서의 말은 옳지 않다. 모두 율에 의거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북쪽 지방이 텅 비었으니 법을 어긴 백성들을 변방으로 옮겨 채워야 하는바, 이 법은 결단코 느슨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예조 판서 정지화가 아뢰기를,
"가뭄으로 인하여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폐하는 거조가 있었는데, 이제 가을철이 다 지나가려 하니 다시 평소대로 회복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0월부터 평소대로 회복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9월 6일 정미
이태양(李泰陽)을 멀리 유배보내라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9월 9일 경술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서를 맞이한 다음 막차(幕次)로 들어가 원접사 조형(趙珩)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듣건대, 청나라에서 보정 대신(輔政大臣)을 주살하였는데, 이번에 나온 청나라 사신이 몹시 두려워하고 숨기는 기색이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정 대신을 주살한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자, 조형이 아뢰기를,
"주살된 자는 바로 제2보정(第二輔政)인데, 7년 동안 전권을 휘둘렀으며, 또 일곱 아들과 세 손자가 모두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산천의 이름을 칙사가 알려고 한다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조형이 아뢰기를,
"부사가 글을 조금 알아 일로(一路)에서 매번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았습니다. 우리 나라 산천의 이름을 알아 일기에 적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요구하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조형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비하여 반으로 줄었습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연로의 각 고을에서 모두 연향(宴享)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뜻이 값을 받자는 데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서야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0일 신해
청나라 임금이 친히 정사를 보게 되었다는 이유로 국내에 사면을 반포하였다.
9월 11일 임자
남이성(南二星)을 응교로, 이유상(李有相)을 이조 정랑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제학으로, 정재숭(鄭載嵩)을 부수찬으로, 심유(沈攸)를 헌납으로, 이인환(李寅煥)을 검열로 삼았다.
9월 13일 갑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신이 아직도 돌아갈 날짜를 말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초8일에 돌아가려고 한답니다."
하였다.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번에 나온 청나라 사신은 폐단을 제거한 것이 몹시 많으니, 떠날 때쯤 해서 상께서 한 차례 관소에 가셔야만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무동(舞童)을 보고는 역관에게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팔일무(八佾舞)를 쓰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팔일무는 천자가 쓰는 예이니 어찌 쓸 수 있겠는가.’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그렇다. 성왕(成王)이 내려준 것이나 백금(伯禽)이 받은 것에 대해 성인(聖人)들이 모두 그르게 여겼으니 과연 쓸 수 없는 것이다. 육일무에 이르러서는 너희 나라에서 어찌 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전의 글뜻을 이와 같이 잘 알고 있으니 그가 비록 오랑캐라고는 하지만 멸시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접사 조형이 아뢰기를,
"요즈음 황주(黃州)에 풍토병이 있어서 판관(判官)들이 부임하기를 싫어해 자주 체직되고 있으니 앞으로 버려진 지역이 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청나라 사신이 나올 때에도 관고가 텅 비어 모든 물품을 빌려서 썼으니 일이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 고을은 본디 웅부(雄府)라고 일컬어져 관수(官需)로 받아들이는 것이 쌀이나 참깨 등의 경우에는 몇백 섬으로 헤아렸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결단났으니, 이는 대개 적임자가 아닌 사람들이 잇따라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매년 받아들이는 수량과 전후의 관원이 쓴 공사(公私)의 용도를 본도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과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리고 또 지금부터는 판관을 아주 신중히 뽑아 보내도록 하였다.
장령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원양도(原襄道) 영서(嶺西) 지방 열 고을이 더욱 참혹하게 재변을 당하여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으니, 경기 지방의 예에 의거하여 모든 잡역(雜役)을 견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금년의 봄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어서 내년 봄의 종자를 마련할 길이 없으니, 또한 전에 영동 지방에서 실시한 예에 의거해서 봄보리를 나누어 주어 파종할 종자곡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제반 신역(身役)을 모두 반으로 감하도록 하였으니, 조정에서 베푼 덕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포보(砲保)와 수군(水軍) 및 기타 다른 신역포(身役布) 3필과 같은 것은 비록 반으로 감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1필 반을 거두어들이니 단지 1필만 납부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역시 편중되지 않습니까.
신이 이상과 같은 몇 가지 일을 가지고 논계하고자 해서 동료에게 간통(簡通)을 보내 물어보니, 의견이 서로 달라 끝내 귀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이 무시당한 탓이니, 체차해 주소서."
하고, 지평 신경윤은 아뢰기를,
"지금 이단석이 피혐한 내용을 보니 신은 실로 경악스럽습니다. 일이 백성을 구제하는데 관계되는데 어떻게 소홀히 보고자 하겠습니까. 이른바 의견이 서로 달랐다고 하는 것은 빨리 할 것이냐 천천히 할 것이냐를 기다려보자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상의하는 것을 용납치 않고 지레 먼저 인피하며 심지어 무시당하였다고까지 하니, 신이 어찌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우승지 이정(李程)을 파직하였다. 의금부 문서의 출납을 지체시켰기 때문이다.
9월 14일 을묘
대사헌 이경억이 아뢰었다.
"이단석이 세 가지 일로써 신에게 간통을 보내어 물어왔는데, 신은 ‘영서 지방의 흉년은 묘당에서 알고 있어서 이미 본도로 하여금 구별해서 계문하도록 하였으니 계문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등급을 나누어서 견감해 줄 것이다. 그러니 대간이 지레 논계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종자로 쓸 보리에 대해서는, 본도에서 계청하면 해당 관서에서 거행하는 전례가 있으니 대간이 번거롭게 아뢸 만하지 못하다. 그리고 경기 백성들의 신역포(身役布)에 있어서는, 당초에도 단지 1필만 받아들이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사세상 곤란한 점이 있어서 끝내 반만 감한 것이니 지금 논계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이런 내용으로 답해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다시 간통을 보내지 않은 채 지레 먼저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대사간 김익경(金益炅) 등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부역을 견감하고자 한 것은 뜻이 골고루 은혜를 베푸는 데 있었으며, 구황하는 데 급한데 어찌 천천히 할지 빨리 할지를 논하겠습니까. 이미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원래 이론을 제기한 것이 아니며, 잠시 기다리자고 한 것은 자세히 상의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포를 징수하는 것이 편중된 것은 모든 백성을 똑같이 대하는 도리에 어긋나는데도, 곤란한 점이 있다고 핑계대었으니 구차함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이단석·신경윤은 출사시키고 이경억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익경(金益炅)·이익(李翊)을 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민유중(閔維重)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날 정사에서 상이 승지를 더 의망하라고 명하였는데, 전조가 홍처량(洪處亮)과 이시술(李時術)·민유중(閔維重)으로 의망하였다. 그러자 상이 또 더 의망하라고 명하니, 비로소 김우석(金禹錫)과 이익을 더 의망하였는데 상이 이익을 낙점하였다. 그러고는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 승지를 더 의망하라고 명을 내린 뒤에 정관(政官)이 하는 짓을 보니 몹시 놀랍다. 의당 중한 벌을 내려 다른 사람을 경계시켜야겠으나 우선은 관대한 벌을 내린다. 당상과 낭청을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여 두고 보자."
하였다. 정원이, 죄명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로 분명한 전지를 내려줄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정관 자신이 곡절을 알고 있을 것이므로 죄명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계사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하였다.
밤에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을 감쌌다.
9월 15일 병진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 참판 조복양(趙復陽), 참의 윤집(尹鏶)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김우석과 이익 등을 당초에 의망하지 않은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에 치대(置對)하였을 때 시비의 분간에 대해 자연 공의가 있었으며 두 사람이 처신한 바에 대해 물정이 석연치 못하게 여기고 있어서 청선(淸選)인 승지의 직에 갑자기 도로 의망하는 것은 차례에 따라 점차적으로 의망하는 도리가 아닌 듯해서였습니다. 신들은 단지 정사의 체모에 따라 하였는데 극히 엄한 내용의 분부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신들의 직을 파직하여 신하된 자들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벌의 경중은 스스로 구한다고 해서 면할 수도, 스스로 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밤에 달무리가 졌는데, 목성을 감쌌다.
9월 16일 정사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이태연(李泰淵)을 승지로 삼았다.
장령 이단석,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영서 지방 열 고을이 참혹하게 재변을 당한 것은 경기 지방보다 더 심한데, 관찰사의 재결과 실결에 대한 계문이 올라오면 묘당에서 반드시 조처하는 거조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고사로써 말하면 한 선제(漢宣帝) 때 홍수와 가뭄 등의 재앙이 있었으나 군국(郡國)에서 그때 그때 알려오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러데도 승상인 위상(魏相)이 그때마다 번번이 아뢰어 조처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백성을 구하는데 급급해 보고를 기다릴 수 없어서였습니다. 지금 열 고을의 재변은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바로써 굶주린 백성들이 떠돌아다닐 걱정이 조석간으로 박두했습니다. 한결같이 경기 지방의 예에 의거하여 모든 잡역을 다 탕감해주고 봄보리 종자도 전에 영동 지방에서 한 예에 따라 미리 마련하여 나누어주며, 각종의 신역포(身役布)로 받는 3필의 경우에도 특별히 2필을 감하여 균등하게 혜택을 베풀어주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7일 무오
장령 이단석,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근래 나라의 기강이 해이되어 수습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각자 사사로움을 따르고 공도(公道)가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폐단이 생긴 근원을 따져보면 참으로 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무너뜨려서입니다. 내삼청(內三廳)으로 천거를 받은 자는 강(講)과 사(射)로 시재(試才)한 후 등용시키는 것이 바로 법례입니다. 그런데 행 호군 김좌명(金佐明)은 일찍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강(講)에서 불통(不通)한 자 두 사람을 취하여 한 사람은 선전관에 의망하고 한 사람은 수문장에 의망하여 낙점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등용되지 못하여 원통하게 여기고 있는 자가 한둘이 아닌데도 낙강(落講)한 자를 먼저 의망하였으니, 어떻게 사사로움을 따른 자취를 면할 수 있겠으며, 무사들의 마음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지난해 상께서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 선전관을 곤장치라고 명하셨는데 곤장을 치는 시늉만 해 곤장을 맞은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에 승지(承旨)가 조사해 살펴보는 일이 있게 되어서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돌조각으로 선전관의 궁둥이를 문질러서 피가 나게 했습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처사가 이와 같으니 어떻게 뭇 관원과 하리들의 간사한 짓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김좌명과 홍중보를 모두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홍중보를 논한 일은 몹시 근거가 없다."
하였다.
9월 18일 기미
지평 신경윤이 아뢰기를,
"어제 논계에 대한 비답에 홍중보의 일은 몹시 근거가 없다고 하교하시었습니다. 신들이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계속해서 생각하건대, 이미 신들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반드시 신들의 논계가 근거가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대간이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아무리 소문을 듣고 논하는 것을 용인한다고는 하지만, 만약 널리 물어보아서 실상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어떻게 감히 함부로 중하게 논계하겠습니까.
선전관에게 곤장을 칠 때 전혀 곤장을 친 흔적이 없었는데, 얼마 후 ‘승지가 조사해 살펴보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병조의 하인이 여럿이 모인 가운데서 판서에게 바삐 고하기를 ‘개 피를 궁둥이에 발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홍중보로서는 하인을 꾸짖어 물리치고 그 죄를 다스렸어야만 했는데, 끝내 한마디 말도 없이 있다가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숙소로 나갔습니다. 계속해서 ‘중사(中使)가 간심하라.’는 전교가 있자, 이에 돌조각으로 궁둥이를 문질러 피부가 벗겨져서 피가 나오게 한 후 들여보내어 간심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궁둥이를 문지른 일이 혹 홍중보의 눈앞에서 한 일이 아닐 수도 있으나 만약 홍중보의 뜻이 아니었다면 하인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하였겠습니까. 신이 한두 사람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니고, 행재소(行在所)는 여러 사람이 주시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나라의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는 것이 탄식스러워 망령되이 논한 것입니다. 이제 근거가 없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잠시라도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직해 주소서."
하고, 장령 이단석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심이 좋지 않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당초에 적간한 것이 이미 곤장을 친 경중을 조사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나왔다면 숨겼을 리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말을 오늘날에 발하다니, 이것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응교 남이성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드물게 경연을 여는 폐단에 대해 갖추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무릇 사람의 성품은 참으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무리 고생되더라도 저절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신이 열성(列聖)들의 행장(行狀)을 보건대, 문종 대왕께서는 평소에 눈병이 있었는데도 날마다 경연을 열어 지나치게 무리하자, 대신들이 격일로 시사(視事)할 것을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으며, 시신(侍臣)들도 글보는 것을 중지하여 눈을 보호할 것을 청하자 답하기를 ‘나는 원래 글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아픔이 잠깐 멎으면 저절로 책을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아마도 전하께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에 있어서 부족함이 있는 듯싶습니다.
전하께서 일념으로 과연 학문에 부지런히 하실 수 있다면, 비록 눈병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잠시 멈추는 때가 있을 것이니, 그때 형식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자주 신하들을 인견하시되, 전하께서 친히 책을 펼쳐서 읽을 필요 없이 강하는 신하로 하여금 경전을 외우거나 문사(文史)를 읊게 해서 그 속에 푹 젖어들어 자연스럽게 성심껏 가르치도록 한 다음, 전하께서는 안석에 기대어 들으소서. 그러면 정신을 안정시키고 성품을 기르며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공효가 반드시 뜸을 뜨고 침을 놓거나 약을 먹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기근이 거듭 닥쳐 사무가 번잡하고 청나라 사신이 잇달아 나와 접대하는 일이 많아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마할 겨를이 없다.’고 하신다면, 한 광무(漢光武)가 창을 놓아두고서 학문을 강하고025) 육수부(陸秀夫)가 피난가는 배 안에서도 강학한 것026) 이 어찌 태평무사할 때였습니까. 그러저럭 지내면서 오늘 내일 하다가는 성상의 뜻이 더욱 풀어지고 덕을 진보시킬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주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말하기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아서 한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참으로 절실하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재삼 반복하면서 개탄하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함경 감사 권대운(權大運)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방은 본디 무향(武鄕)이라고 불리워져 예로부터 사람들이 대부분 용감하고 굳세었는데, 지금 그렇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비록 고금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또한 어찌 용감하고 굳센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인정은 격려되는 바가 없으면 재주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듣는 대로 거두어 쓴다면 저절로 흥기되어 무재(武才)가 반드시 다른 곳보다 나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태연(李泰淵)이 아뢰기를,
"인재가 점점 적어지는 것은 도처마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영남과 같은 곳은 예전에 인재의 부고라고 칭해졌었는데 지금은 비단 인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심이 좋지 않고 풍습이 점차 나빠졌습니다. 토호들이 무단하는 습속은 참으로 극히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습속이 어떠한가?"
하자, 이태연이 아뢰기를,
"시험삼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천(永川)에서 행회(行會)한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오랫동안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순시하다가 본군에 도착해 물어보니 향론(鄕論)이 미처 귀일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얼마 후 고을 사람들이 이런 내용으로 정장(呈狀)하여 수령을 헐뜯었습니다. 신이 그들의 소행을 놀랍게 여겨 체포하게 하자 정장한 무리들이 기와와 돌을 마구 던지면서 도망갔습니다. 신이 수모자(首謀者)를 적발하여 먼 곳으로 정배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경중에 따라 치죄하였습니다. 인심이 몹시 나빠 도신(道臣)도 오히려 이와 같이 보는데, 하물며 수령들이겠습니까."
하고, 권대운이 아뢰기를,
"이 어찌 영남만이 그렇겠습니까. 말세가 되어 풍습이 나빠졌으므로 인심이 점차 이와 같이 된 것입니다."
하자, 이태연이 아뢰기를,
"풍습이 다른 도에 비해 더욱 나쁘므로 선비들 중에도 여러 차례 흉측한 상소를 올린 자가 있습니다. 이 자들은 참으로 취할 만한 점이 없으나, 만약 거두어 쓰지 않는다면 그 자들도 반드시 원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밤에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9월 19일 경신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모화관에 나아가 친히 전송하였다.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었다.
"신이 엊그제 동료와 더불어 어제 상회례(相會禮)를 거행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서로 잇달아 인피했습니다. 대각의 규례에는 비록 응당 피혐할 관원이라도 먼저 다시(茶時)를 행한 후에 인피하므로, 하리가 두세 번 왕복하였으나 끝내 다시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린 뒤에 미쳐서 신이 부득이 대신 행하였습니다. 신이 무시당한 것은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나 대각의 체모가 무너짐이 실로 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을 논핵하는 것은 예전에 들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급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잠시 기다리지도 않은 채 지레 먼저 진계하였습니다. 신이 무시당하였음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감히 동료를 처치하지 못하겠으니, 체차해 주소서."
헌납 심유(沈攸)가 아뢰기를,
"들은 바대로 논핵하는 것은 그 직분일 뿐이며 미안(未安)한 하교는 혐의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회례를 하기로 약속하고서 장관을 기다리지 않은 채 지레 먼저 논계한 것은 경솔함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잠시 기다리지 않은 것은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으며, 혐의가 있어서 처치하지 못하는 것은 형세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신경윤·이단석은 체차하고 박장원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0일 신유
이조 판서 김수항이 정고(呈告)하니,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김수항이 직무를 제대로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벼운 벌을 내렸다. 그랬으면 그가 처신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고 성실하게 봉직하는 것이 마땅한 바이다. 그런데 감히 지위가 높음을 믿고 시끄럽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지금 이에 정고 단자를 들이다니, 그 방자함이 몹시 심하다. 그러나 만약 중한 벌을 내린다면 그의 계책대로 해 주는 것이니, 우선은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정원도 어찌 감히 그런 단자를 받아들인단 말인가. 해당 승지도 역시 추고하라."
집의 최관(崔寬)이 아뢰기를,
"신은 집안이 화를 당한 뒤에 살아남아 심사가 망극하고 온 몸에 허물이 쌓인 천지간의 한 죄인입니다. 신의 죄가 이와 같은데, 신의 집안에 대한 말이 전하께까지 아뢰어졌는바, 신의 허물에 대해서는 성상께서도 통촉하실 것입니다. 신은 허물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논핵하면서 죄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무릅쓰고 있어서 청반(淸班)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성은이 하늘과 같아서 몹시 감격스럽기는 하나, 신의 사정이 더욱더 궁박스러워 자리를 깔고 명을 기다릴 뿐 감히 나아가서 숙배하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소패(召牌)가 내렸을 때에도 감히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명을 어긴 죄를 실로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직명을 삭제해 주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최관의 계모인 권씨(權氏)는 병자 호란을 당하여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구차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참으로 허물이 있다. 당시에 권씨의 시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으며, 최관 역시 성인이었다. 만약 최관의 할아버지가 대의(大義)로 책하여 절연(絶緣)하고서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권씨가 죽은 뒤에는 가묘(家廟)에 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명백하게 유언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그르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권씨가 살아 돌아오자 총부(冢婦)로 대우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섬기게 하였으며, 최관의 숙부인 계웅(繼雄)이 형수로 섬긴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리고 권씨가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나 시어머니가 살아 있으면서 장부(長婦)의 복(服)을 입었고, 최관은 3년복을 입어 조금도 낮추는 예가 없었다. 그러다가 장례를 마치고 관을 묻는 날에야 계웅이 비로소 그의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면서 "권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가묘(家廟)에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관이 드디어 그 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방제(傍題)에서 삭제하였으며, 권씨의 신주를 권씨가 낳은 아들인 최선(崔宣)의 집으로 내보내버렸다. 아, 모자간의 천륜과 삼년상의 제도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전후의 처사가 이와 같이 어그러졌단 말인가. 설령 최관이 그 사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러운 집안의 자식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각에 출입하다니, 외람되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84면
【분류】인사(人事) / 사법(司法) / 풍속-예속(禮俗) / 가족(家族)
사신은 논한다. 최관의 계모인 권씨(權氏)는 병자 호란을 당하여 청나라 사람에게 잡혀갔다가 구차하게 살아 돌아왔으니, 참으로 허물이 있다. 당시에 권씨의 시부모가 모두 살아 있었으며, 최관 역시 성인이었다. 만약 최관의 할아버지가 대의(大義)로 책하여 절연(絶緣)하고서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대하지 못하게 하고, 또 권씨가 죽은 뒤에는 가묘(家廟)에 들이지 말라는 뜻으로 명백하게 유언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남겨주었다면, 누가 감히 그것을 그르다고 하였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권씨가 살아 돌아오자 총부(冢婦)로 대우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최관으로 하여금 어머니로 섬기게 하였으며, 최관의 숙부인 계웅(繼雄)이 형수로 섬긴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리고 권씨가 죽었을 때에는 시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나 시어머니가 살아 있으면서 장부(長婦)의 복(服)을 입었고, 최관은 3년복을 입어 조금도 낮추는 예가 없었다. 그러다가 장례를 마치고 관을 묻는 날에야 계웅이 비로소 그의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면서 "권씨의 신주를 우리 집안의 가묘(家廟)에 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최관이 드디어 그 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방제(傍題)에서 삭제하였으며, 권씨의 신주를 권씨가 낳은 아들인 최선(崔宣)의 집으로 내보내버렸다. 아, 모자간의 천륜과 삼년상의 제도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전후의 처사가 이와 같이 어그러졌단 말인가. 설령 최관이 그 사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러운 집안의 자식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대각에 출입하다니, 외람되다.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9월 21일 임술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권격(權格)을 장령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이 처치를 묵혔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직하였다.
헌납 심유 등이 아뢰기를,
"각 아문의 둔전(屯田)의 폐단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있어서도 식자들이 이미 염려해왔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크게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민사(民事)에 진념하여 부역을 견감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경기 지방의 둔전에서 각 아문이 세금으로 거두는 숫자는 민전(民田)에 비해 더 많아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아문에 신칙하여 세금으로 거두는 숫자를 한결같이 민전의 예에 의거해 견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말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경우에는 글을 올려 간절하게 진달하고 정고(呈告)하여 책면시키기를 청하지 않을 수 없는 법으로, 이는 실로 황공하여 어쩔 줄 모르고 감히 스스로 편안히 있지 못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방자한 마음이 있어 그런 것이겠습니까. 지금 김수항이 정고한 것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이며, 승지가 봉입한 것도 그의 정세를 헤아린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갑자기 실정 밖의 전교를 내리셨는데, 말뜻이 매우 엄준하여 듣고 보는 모든 사람들이 놀라 황송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대성인이 신하를 부림에 있어서 예로써 부리는 도리이겠습니까. 김수항 및 받아들인 승지를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직무에 충실치 못한 한 관원을 죄준 것에 대하여, 죄를 준 것도 가벼운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장황하게 떠벌리니 참으로 놀랍고 이상하다."
하였다.
헌납 심유, 정언 경최가, 엄한 전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부응교 여성제(呂聖齊), 교리 이익상(李翊相), 수찬 김만중(金萬重)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김수항에게 실제로 죄줄 만한 일이 있으면 참으로 죄명을 곧바로 들어 분명하게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리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죄를 받은 자가 마땅히 그 일을 알 것이다.’느니, ‘만약 중한 벌을 내린다면 그의 계책대로 해 주는 것이다.’느니 한는 전교를 내려서, 노여움을 쌓고 분을 쌓아 장차 극죄(極罪)를 줄 것이되, 우선은 참는 바가 있어서 죄주지 않는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지금 이조의 관원이 죄를 받은 것은 실로 한두 명의 승지를 의망하면서 조금 착오가 있었던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이것이 무슨 큰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이 정세(情勢)를 이유로 인혐하고 들어갔으면 승지가 정고 단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노여워해서는 안될 부분에 대해서까지 노여워하시며 추고의 벌을 아울러 내리셨으니, 어찌 이치를 따져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뜻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공평한 마음으로 천천히 살피고 나서 속히 취소한다는 명을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차자의 내용을 보니 가소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내가 비록 어리석기는 하나 어찌 너희들의 조소거리가 되겠는가."
하였다.
9월 22일 계해
정원이 아뢰기를,
"어제 차자를 올린 옥당의 여러 관원들이 엄한 비답을 받은 후 부응교 여성제, 교리 이익상, 수찬 김만중이 상소를 올리고 대궐 밖으로 나가 모두 물러갔으며, 응교 남이성, 수찬 홍만형, 부수찬 정재숭은, 비록 차자에 이름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미 함께 상의하였으니 감히 태연스레 예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또 상소를 올렸습니다. 본원에서 그들의 상소를 모두 기각하였으나 각자가 인혐하면서 행공할 뜻이 없습니다. 본관의 입직 및 대간에 대한 처치가 모두 염려됩니다. 부교리 박세당을 우선 패초하고, 이익상·김만중은 함부로 직소(直所)를 떠난 잘못이 있으니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9월 23일 갑자
지평 임상원(任相元)이 아뢰기를,
"본부에서 전 병조 판서 김좌명의 일에 대하여 현재 논계하고 있는데, 신은 그 당시의 정사를 담당한 낭관으로서 평소에 알고 있었던 바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삼청(內三廳)에 비록 취재(取才)하는 규정이 있지만, 금군(禁軍)으로서 이미 도시(都試)를 치룬데다가 또 본청의 추천이 있을 경우에는 곧바로 의망하는 예전 규례가 있는바, 애당초 강에 통과하였느냐 못하였느냐는 고려치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런 일들을 주워모아서 그것을 일러 사정을 따랐다고 하니, 신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이미 붓을 잡고서 의논에 참여하였으니, 뒤미처 논핵해 죄를 논할 수 없으며, 또한 스스로 아는 바를 굽혀서 공론에 따를 수도 없습니다. 체차하여 주소서."
하고, 장령 권격은 아뢰기를,
"지난번에 동료가 정중휘를 홍문록에서 삭제하라고 청하였는데, 신의 의견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동료가 이미 파직되고 추고당하는 벌을 받았는데 신만 요행히 면하고서 태연스레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9월 24일 을축
좌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병을 이유로 사면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는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유시하기를,
"아, 한번 행재소에서 총총히 대면한 후 계절이 바뀌어 이미 반년이나 지나갔다. 내가 경을 생각하는 것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보다 더하다. 경이 병으로 인하여 즉시 올라오지 않고 있었으나, 신명께서 도우시어 예전의 병이 지금은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대의 사직소를 보니 병세가 또 심해졌는바, 나의 마음이 놀랍고 염려스러움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금 우선은 경의 뜻을 따름으로써 경이 서울로 올라와서 조리할 수 있게 하겠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고 얼음이 얼기 전에 곧바로 물길과 육로 두 길 중에서 편한 쪽을 택해 속히 올라와 안심하고 잘 조리하여 나의 바람을 위로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전 좌의정이 있는 곳에 물길과 육로 두 길 가운데서 편한 쪽을 택해 올라오라고 이미 전유하였다. 경기와 충청 두 도의 감사에게 부마(夫馬)와 선격(船格)을 마련해 놓고 기다렸다가 잘 호송해 보내라는 뜻으로 특별히 하유하라."
하였다.
응교 남이성, 수찬 홍만형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본관에서 올린 차자에 대해 비답하신 것을 보았는데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요즈음 전조(銓曹)의 일로 인해 점차 격앙되어 말뜻이 절박해져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습니다. 무릇 총재(冢宰)의 직은 뭇 관료와는 다른데, 한 가지 세세한 일로 인하여 욕하고 질책하면서 조금도 용서치 않는 것은, 실로 성상께서 아랫사람을 거느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죄명이 분명치 않아서 여러 사람들이 놀라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신들도 본관의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상의하고 차자를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거둥하였을 때 뒤에 처진 죄로 인해 글을 올려 사면을 청하였는데 그에 대한 비답이 아직 내리지 않았으므로, 차자에 이름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니, 성상의 노여움이 한층 더하여져 기롱하고 조소하였다는 전교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데서 전혀 뜻밖에 나왔습니다. 무릇 기롱하고 조소한다는 글자는 맞상대되는 이하의 사람에게도 감히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천지간에 도망할 수 없는 군신 부자의 의리에 있어서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기롱하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조소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죄입니까. 구구하게 충성을 바치려는 뜻을 품고 있다가 도리어 이런 죄명을 얻었으니, 지금 이후로는 조정의 잘못된 일이 이보다 큰 경우가 있더라도 그 누가 한마디 말을 하고 한 가지 일을 논하여서 이런 죄명을 차지하려고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 같은 벌을 받게 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홍명하가 차자를 올려 김수항을 신구(伸救)하고, 또 엄한 비답을 내린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니, 상이 답하였다.
"경이 그 전말에 대해 자세히 따져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부응교 여성제, 교리 이익상, 수찬 김만중 등이 상소하여 죄를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9월 25일 병인
지평 변황이 거둥하는 데 참가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체차하였다.
헌부가 김좌명과 홍중보를 파직하고 추고하라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장령 권격이 아뢰기를,
"부호군 민희(閔熙)는 일찍이 그의 동생 민점(閔點)이 회음(會飮)할 때 동참했습니다. 민점이 대간의 논핵을 받았으면 민희로서는 의당 상소를 올려 자신의 죄에 대해 말해 한 줄기 염치의 도리를 보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태연히 반열에 나가 끝내 한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회음한 장소가 민희의 종매(從妹)가 성빈(成殯)한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하는데, 여럿이 모여 풍악을 울리며 밤새도록 퍼마시면서 어찌 마음에 편안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국기(國忌)의 재계(齋戒)를 잊었느냐 안 잊었느냐는 논할 것도 없습니다. 예를 무시하고 무식한 짓을 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27일 무진
허적(許積)을 판중추부사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집의로, 강시경(姜時儆)을 정언으로, 이규령(李奎齡)·이상(李翔)을 지평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상소하기를,
"신은 처신이 형편없어 갖가지 허물을 지었으니 대간의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자초한 것으로, 그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다만 지난해 온천에 행행하셨을 때 남속(南涑)을 곤장친 일에 대해서는 거둥을 따라갔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알고 진중에 있었던 군졸들이 모두 보았습니다. 떠돌아다니는 말이 참으로 대간이 아뢴 바와 같다면 신이 비록 그 자취를 엄폐시키려 해도 형세상 가리울 수 없을 것입니다. 설령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낭료와 서리들이 반드시 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을 것이며, 신 역시 마음에 부끄러워서 어떻게 감히 조정 사대부들 사이에서 얼굴을 치켜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스스로 들추어낸다면 비단 나약한 짓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기에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의 허실을 막론하고 이미 논박을 받은 몸으로는 결단코 무거운 임무를 맡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직명을 삭제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대간의 논박이 부실한 것이 이번 일보다 심한 적이 없으니 어찌 이를 끌어대어 인혐할 필요가 있겠는가. 병조 판서는 일이 몹시 많은 자리이니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9월 29일 경오
헌부가 영서 지방 열 고을의 부역을 견감해 주라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표류한 한인(漢人)을 압송해오는 관원이 모래쯤이면 금천(衿川)에 당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 안을 통과하도록 길을 잡아 시끄러움을 일으킬 필요 없이 금천에서 곧장 서로(西路)로 들어가게 하되, 홍제원(弘濟院)을 통과할 때 해조로 하여금 옷가지를 주고 음식을 먹이게 하고, 또 별도로 일에 밝은 역관을 정하여서 그들의 사정을 자세히 묻고 이어 위로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심재(沈梓)가 전 좌의정 허적에게 도타이 유시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허적이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달려와 유시를 전하고 특별히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해직시켜 주어 편안히 눈을 감도록 해 주셨으니, 살아서는 그 은혜 갚을 길이 없고 죽어서도 영광이 빛납니다. 물길이나 육로 두 길 가운데서 편한 길을 택해 올라오라는 하교는 더욱이 곡진하게 생성시켜 주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니, 신이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찰을 부여안음에 간장이 끊어지는 듯합니다. 다만 신은 병마가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 목숨이 실낱같아 숨이 붙어 있는 것조차도 스스로 의아스럽습니다. 짧은 거리조차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데, 더구나 어찌 다 죽어가는 몸을 수레에 싣고 성상께서 계신 곳으로 한 발짝인들 갈 수 있겠습니까. 대궐이 있는 곳을 바라다 보면서 오로지 피눈물만 흘립니다.’고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다시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평 이규령이, 집의 오두인과 친척의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피혐하니, 체차하였다.
지중추부사 김좌명이 상소하기를,
"신이 육경의 반열에 재직해 있다가 갑자기 전주(銓注)가 공정치 않다는 지척을 받았으니, 일의 사실 여부는 다시 논할 필요 없이 응당 형벌을 받아 죄를 드러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대계(臺啓)가 발하자마자 곧바로 정지되었으니, 먼 외방에서 듣고는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성상께서는 신의 직명을 삭제하고 신을 법관에게 내려 분명한 문서를 상고하게 해서 나라의 법을 바루고 공론을 시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혐의할 필요 없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부교리 박세당, 부수찬 오시복 등이 상차하여, 요즈음 비답을 내릴 때 사기(辭氣)가 미안한 것에 대해 진계하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중신(重臣)을 몰아붙이기를 종 부리듯이 하고 대각을 어리숙하게 보기를 어린아이 보듯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듣기에 거북한 터무니없는 말을 경연의 신하에게 하시는데, 예전의 무도한 임금도 말이 신중하지 못하기가 아마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 이러한 거조를 하실 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은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알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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