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8권, 현종 8년 1667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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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신

부제학 민정중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본디 학술에 어두운데다가 근래에는 또 사무처리에 골몰하여 예전에 배운 것조차 모두 희미해졌습니다. 이에 자신을 돌아다보고 반성함에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아는데, 앞으로 무슨 얼굴로 감히 유신(儒臣)들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아 경연 석상에서 학술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은 죄를 짓고 황공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불안해지는데, 또한 어찌 세월이 조금 흘렀다고해서 청선(淸選)의 자리에 무릅쓰고 나가 거듭 조정 사대부들의 수치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겨우 대궐문 밖에 도착하자마자 두려움에 몸 둘 바를 몰라서 끝내 아무 말없이 곧장 나아가 구차히 염치의 도리를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죽음을 무릅쓰고 글을 올려 간절한 심정을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표류해 온 중국인을 제주에서 홍제원(弘濟院)으로 압송해 왔다.

 

10월 2일 계유

우의정 정치화가 면대를 청하자, 상이 인견하고, 묻기를,
"표류해 온 중국인이 이미 도착하였는가?"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이미 홍제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북경으로 들여보낼 것이라고 듣고는 모두 죽어도 가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는 목매어 죽으려고 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유독 증승(曾勝)이라고 하는 자만은 조금도 마음의 동요없이 태연 자약하였다고 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개유하게 하되, 끝까지 가려고 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미 전례가 있으니, 그에 의거해서 처리하여야 할 형세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의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경진년에 중국인을 쇄송할 때에는 죄인과 마찬가지로 차꼬를 채워서 들여보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장차 그렇게 될 형세이다."
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표류해 온 사람들이 말하는 사이에 반드시 정성공(鄭成功)의 형세가 성대함을 말하는데, 대개 정성공은 명나라 때부터 또한 귀순하지 않고 섬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들은 필시 그의 관하(管下)이지 영력 군왕(永曆君王)의 관하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이 ‘영력 군왕이 뇌주(雷州)에 있으며 3성(省)을 점거하고 있다.’고 한다는데, 3성은 천하의 4분의 1이다. 과연 그것을 소유하였다면 천하가 진동할 것이지, 어찌 잠잠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표류해온 한인들을 압송하는 일은 조정에서 이미 의정하였으니 아무나 여기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의 논의가 시끄러우니, 몹시 놀랍습니다. 또 듣건대, 표류해온 한인들이 올라올 때 긴 글을 주거나 시구를 써서 준 자들이 있는데 심지어는 기휘(忌諱)를 범하는 말을 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의 짐꾸러미를 수색하여 가지고 있는 글을 모두 찾아낸 다음에야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김수항의 일로 인해 미안스런 전교가 많이 있어서 신이 영상과 함께 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꺼번에 차자를 올리는 것은 번거로울 듯하기에 입시하기를 기다려서 진달하는 것입니다. 김수항은 정세가 불안해서 전례에 따라서 사면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임금은 한마디 말도 살피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사책(史冊)에 쓰여져서 후세에 전해지니, 스스로 가벼이해서야 되겠습니까. 경최가 아뢴 것은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고 말에도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어째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셨습니까. 아마도 성상의 덕에 흠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어찌 아주 미워하는 뜻이 있었겠는가. 내가 참으로 아주 미워하였다면 또한 어찌 체직하지 않았겠는가. 당초에 더 의망하라고 명한 뒤에 정관(政官)이 외방에 나가 있는 세 사람으로 책임을 때우듯이 의망한 것은 이미 매우 부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더 의망하라고 명하자 단지 두 사람만 의망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와 같이 무엄하단 말인가. 이 때문에 추고한 것으로, 원래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간들은 이상한 일로 여기고 있으니, 내가 몹시 괴이하게 여긴다."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은 김수항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감히 지위가 높음을 믿고 시끄럽게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힐책하시었는바, 다른 사람이 듣더라도 몹시 위축될 것인데, 더구나 김수항의 마음이겠습니까. 군신 사이는 예의와 염치로 서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우함에 있어서 예의로 하지 않고 또 그를 부림에 있어서 염치를 잊고 고분고분 따르게만 하였으니, 임금은 어떻게 임금다울 수 있겠으며 신하는 어떻게 신하다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대간에게는 이미 풍문으로써 아뢰는 것을 인정하였으니, 사실에 벗어나는 일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홍중보와 김좌명이 논박을 당한 것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좌명의 일은 임상원(任相元)의 계사를 보니 사실이 아닌 듯하다. 그리고 선전관을 곤장칠 때 마침 인견(引見)이 있어서, 다른 때에는 으레 곤장칠 횟수를 품정하는 일이 있지만 이날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적간하게 한 것이다. 홍중보의 일이 과연 대간이 아뢴 것과 같다면 그 당시에 내가 어찌 몰랐겠는가."
하였다.

 

지중추부사 김좌명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간이 아뢰면서, 낙강한 자를 선전관과 수문장에 제수한 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내삼청(內三廳) 소속으로서 천거받은 자는 시재(詩才)에 입격하였을 경우, 즉시 금위(禁衛)에 소속시키고 정사 때 의망하는 것이 근래의 규정이며, 강서(講書)는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여 정해진 규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임인년027)  에 처음으로 병조를 맡았었는데, 천거된 신진 출신(新進出身)들에 대해 현우와 장단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익힌 글을 강(講)하게 하고, 또 그들로 하여금 과거에 급제한 해와 나이, 성명을 쓰게 하고는, 인하여 그들의 용모와 행동 거지를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다섯 차례 대정(大政)을 거치면서 이를 폐한 적이 없었으며, 다시 병조 판서가 되어서도 또다시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삼청의 빈 자리는 항상 부족하고 천거된 자는 항상 많았으므로 모두 다 제수하지 못하였는 바, 제수된 자는 덕보았다고 여기고 제수되지 못한 자는 곧 나를 젖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정을 아는 자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사세에 있어서 당연한 일로 여길 것이고, 모르는 자가 들으면 의심 쩍어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비방하는 의논이 생겨난 것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대간들이 지적한 선전관은 바로 허재(許榟)라고 합니다. 허재는 오랫동안 금군(禁軍)으로 있었던 자인데, 급제하기 전에는 남행(南行)으로 천거되었으며 시재(試才)에 입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도시(都試)를 치룬 금군은 곧장 내삼청에 제수하라는 것이 선조(先朝)의 수교(受敎)입니다. 만약 신이 참으로 사사로움을 따르려고 하였다면 곧바로 제수해서 안될 것이 뭐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다시 강하게 하고 또 다시 낮추어 의망하겠습니까. 수문장 홍여도(洪汝燾)를 제수한 일의 경우는 신이 이미 체직된 후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문서를 살펴보니 실상이 분명하다.’고 하였는 바, 어쩌면 그리도 어긋났단 말입니까. 이미 잘못된 것을 깨닫고서도 오히려 버티고 있으니, 더욱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번거롭게 일일이 지적하면서 아뢰어 시끄럽게 스스로 해명하는 듯이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조정에서는 끝내 어떤 사람에게 사심을 써서 어느 직에 제수하였는지 모를 것이고, 외방에서 듣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논계가 어떻게 해서 발론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정지되었는지 모를 것입니다. 이에 부득불 그 대강을 간략히 진달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실에서 벗어난 일을 어찌 혐의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10월 3일 갑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번 대간의 아룀에서 ‘각 아문이 둔전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도 민결(民結)에 의거해서 견감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이것은 실로 곡절을 상세히 몰라서 한 말입니다."
하고,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른바 둔전에는 공한지를 개간한 곳도 있으며 역적 집의 전지를 속공한 곳도 있으며 민전을 입속(入屬)하여 세금을 거두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개간한 곳과 속공한 곳은 모두 병작(竝作)하여 반분하니 어찌 민결에서 세금을 거두는 것과 같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김수항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차자를 올려 진달하였습니다. 총재의 직은 임무가 막중하니 그에게 계속해서 맡겨두고 싶으시면 어찌 이와 같이 대우해서야 되겠습니까. 스스로 지위가 높음을 믿고 시끄럽게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것은 신하에게 있어서는 극죄인데, 어찌 추고하라는 전교에 쓸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말은 이와 같아서는 안됩니다. 사방에 퍼져나가면 반드시 듣는 사람들이 놀라워할 것이니, 추고의 명을 환수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깊은 뜻이 없었는데 경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추고의 명을 환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호서에 도적이 날로 치성해지는데 병사 이원로(李元老)는 나이들어 쇠약하여 엄히 신칙해서 잡아 다스리지 못합니다. 이를 감당할 만한 젊은 사람을 뽑아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원로는 체차하고 오늘 정사를 열어 즉시 대임자를 차출하라."
하였다.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승지로,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이세장(李世長)을 교리로, 홍만형(洪萬衡)을 부교리로, 이규령(李奎齡)을 정언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주서로, 정익(鄭榏)을 형조 참의로, 유비연(柳斐然)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표류해 온 중국인 95명을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이에 앞서 표류해 온 중국인 임인관(林寅觀) 등이 전하에게 상계(上啓)하였는데, 그 대략에,
"표류해 온 이래로 천은(天恩)을 내려 주시어 극진히 주선해 주시었습니다. 예전의 우의를 생각하심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중국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저희들에게까지 미치었으니, 신들의 분수로 헤아려 볼 때 어찌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이에 삼가 하찮은 물품을 관가에 바치어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합니다. 저희들은 지금 반년을 넘게 지냈지만 언제 돌아갈지 모르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시름에 겨워 거의 숨이 끊어져가고 처자식은 슬피 울부짖으며 반드시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고향 생각에 아침저녁으로 울부짖음을 그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후덕을 베푸시고 명나라와 대대로 친하게 지내었던 것을 생각하여 하찮은 저희들에게도 이를 내려 주소서. 그러면 인관(寅觀) 등의 목숨이야 어찌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만, 전하의 높은 의리는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본으로 칙사를 보내어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거나, 혹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특별히 배 한 척을 내주어 저희들이 직접 몰고 본토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소서. 그러면 그 은혜가 가이없을 것으로, 온 나라 모든 백성들이 영원토록 떠받들 뿐만 아니라 저희들의 국군(國君)과 번왕(藩王) 또한 어찌 감히 뒷날 잘 대우해 준 데 대한 보답을 잊겠습니까."
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미 청나라에 통보하여 다시는 변통할 뜻이 없다."
고 하자, 인관 등이 모두 울부짖으며 죽어도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그들을 내몰아 압송해 가니, 연도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비분강개하였다.
표류한 중국인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조정에서 역관으로 하여금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묻게 하였다. 이에 표류해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주(泉州) 사람으로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동녕(東寧)으로 피해 들어갔다."
고 하였는데, 동녕은 바로 남해에 있는 섬으로 복건성(福建省)에 속한 곳이다. 역관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가지고 온 관화(官貨)는 어느 관원의 물건인지 모르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번왕(藩王)이 정경(鄭經)에게 준 물건이다."
하였는데, 이른바 번왕은 바로 영력 황제(永曆皇帝)의 동생으로 서북 방면의 군무(軍務)를 관할하는 임무를 받고 복건성 등의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는 자이며, 정경이란 자는 정성공(鄭成功)의 아들로, 정성공이 죽자 영력 황제가 습봉(襲封)하여 왕으로 삼았는데, 전공(戰功)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스스로 ‘사봉 세자(嗣封世子)’라고 칭하고 동남쪽의 섬으로 들어가 있으면서 영력 황제를 섬기는 자였다. 또 묻기를,
"영력 황제는 지금 어디에 도읍해 있으며, 차지하고 있는 군현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뇌주(雷州)에 도읍해 있으며, 복건·광동(廣東)·광서(廣西)·사천(泗川) 등 네 성을 차지하고 있다."
하였다. 이에 묻기를,
"복건·광동·광서 세 성은 지역이 서로 잇닿아 있으나 사천성은 동서간에 만리도 더 떨어져 있는데 어찌 명나라가 차지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인관 등이 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역관이 또 묻기를,
"뇌주에 황제가 도읍하였다고 하였는데, 너희들은 항상 그곳에 왕래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동녕에서 뇌주까지는 수로(水路)로 만 리 가까이 되므로 왕래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너희들은 정경의 관하(管下)가 아닌가?"
하니, 인관 등이 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응교 남이성(南二星), 이조 정랑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기를,
"듣건대, 표류해 온 중국인들이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울부짖으며 갖은 모습으로 애걸하였다고 합니다. 백 명이나 되는 목숨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을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로 인해서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몹시도 참혹하고 비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힘써볼 만한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만약 자문에다 그들의 사정에 대해 언급하기를 ‘그 사람들은 바로 섬에 살다가 도망한 백성들로, 스스로 상국(上國)에서 용서하지 않을 줄 알고 모두 중도에서 자살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방에서 갖가지 말로 달래면서 「너희들이 비록 죄를 지었으나 상국의 어짊이 천하를 뒤덮으니, 반드시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다.」고 하여 우선 그들이 마음놓게 하고 인하여 들여보낸다. 상국에서 특별히 용서한다면 이 뒤로 소방에서 다시 표류해 온 사람들을 압송하는 일이 있을 때에 폐단이 없을 것이다.’고 한다면, 저들이 허락하여서 그들을 살려줄지 누가 압니까. 설령 따라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일은 없을 것인데, 조정에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10월 5일 병자

김응조(金應祖)를 우윤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수찬으로, 변황(卞榥)을 정언으로, 이시술(李時術)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8일 기묘

삼성 죄인(三省罪人) 김선립(金先立)이 복주되었다.
당초에 김선립이 명화적(明火賊)으로서 그의 아비를 끌어들여 같은 무리라고 하였다. 이에 형조가 아뢰기를,
"김선립이 그의 아비를 기필코 사지에 빠뜨리려고 하니, 몹시도 흉악합니다. 강상죄(綱常罪)에 관계가 되니 단지 자식으로서 아비를 고발한 율로만 조율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근거로 삼을 만한 전례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의논드리기를,
"이것은 천지간에 없었던 크나큰 변고로 강상 대죄임이 분명한바, 다시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법에 의거해 참형에 처하고, 그가 태어난 고을이라는 이유로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원정(李元禎)을 파직하였다.

 

상이 내관(內官)의 아룀으로 인하여 정원에 하교하였다.
"공상(供上)하는 여종을 병조에서 금지해 내쫓아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니, 일의 체계에 있어서 몹시 놀랍다. 당해 관원을 추고하라."

 

지평 이명익이 인피하기를,
"요즈음 여인들이 대궐문을 함부로 드나들어 몹시 분잡스럽기에 신이 지난번에 병조 낭관으로서 내사(內司)에 입직하였을 때 신칙하여 금지시켜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공상을 올리는 사람이 저지당하였다는 이유로 당해 관원을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초에 엄하게 금한 잘못은 실로 신이 감당할 일입니다. 추고당할 대상에 포함되는바 태연스레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장령 권격이 처치하여 추고 대상이라는 이유로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상소를 올려 병을 이유로 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10월 9일 경진

장령 권격이 아뢰기를,
"충의위(忠義衛) 이운식(李雲植)이 정장(呈狀)하기를 ‘서종조(庶從祖)인 덕령감(德寧監) 이지(李墀)와 덕창감(德昌監) 이게(李垍)가 지난해 호적을 올릴 때 거짓으로 적형(嫡兄)의 외조(外祖)를 써넣었는데, 지는 적족(嫡族) 측에서 글을 올려 따지려 한다고 듣고는 경조리(京兆吏)와 짜고서 정안(正案)을 지우고 그의 외조로 고쳐 써넣었으나, 게는 포천(抱川)에 살고 있어서 본 고을에 입적(入籍)되었으므로 고쳐 써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외조를 바꿔 써넣은 것은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잡아다가 조사해서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0일 신사

이은상(李殷相)을 대사간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이익한(李翊漢)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10월 11일 임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남이성 등이 올린 상소를 내보이면서 이르기를,
"상소 가운데 이른바 ‘자문을 보내어 풀어주기를 구하라.’고 한 것은 아주 오활한 것이다. 우리가 풀어주기를 청한다 하더라도 저들이 들어주려 하겠는가."
하니,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표류해 온 한인들의 일에 대해 누군들 측은해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참으로 선처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 민정중이 아뢰기를,
"지난 임진년에 신이 표류해 온 한인에 대한 일로 선왕에게 진달하자, 하교하시기를 ‘이 일은 비단 의리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허다한 인명을 사지로 몰아 보내는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다만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이 으레 대부분 누설되니 청나라에 고하지 않으면 후환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또 ‘이 다음부터는 표류해 올 경우 배가 부서지지 않았으면 도로 돌려보내고 배가 부서졌으면 그 지역에 머물려두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분부가 이처럼 정녕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은 끝내 압송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고 필선 정뇌경(鄭雷卿)은 청나라에 있다가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선왕께서 그의 어미에게 늠료를 주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그의 어미가 죽어 장사를 지낼 것이라고 하니, 의당 돌보아주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은 혼조(昏朝) 때 절개를 지켰는데, 그가 죽고 나서는 그의 아내가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 듣건대, 상이 났는데 장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하니, 몹시 측은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장례 물품을 지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각종의 조적곡을 조사해 보니 포흠(逋欠)이 5천 8백여 석이나 되었는데, 결단코 받아들일 만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만약 특별히 탕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크게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하고,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한갓 빈 장부만 끌어안고 있느니보다는 탕감해 주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니, 상이 탕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북관에는 노인들이 아주 많아 백 세가 넘은 사람까지도 있으므로 세시(歲時)에는 열읍에 으레 음식물을 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순시하다가 영흥(永興)에 도착해 보니 1백 3세 된 노파가 있어 그 자식을 가자해 주도록 청했는데, 그 자식의 나이도 80세로, 아주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만약 나이가 많은 자를 뽑아서 특별히 은전을 베푼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90세 이상된 사람을 뽑아서 아뢰게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어제 병조 낭관을 특별히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병조가 여인이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킨 것은 직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내관이 아뢴 바로 인하여 심지어 특별히 추고하게까지 하였으니, 일이 몹시 온당치 못합니다. 오늘 입시한 여러 신하들 중 그 누가 전하의 이 거조가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에서 이미 잘못한 바가 있으니 한 번 추고하는 것이 어찌 대단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전 전적 송상주(宋尙周)의 상소를 가지고 영상에게 묻기를,
"제주(濟州)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의 부모에게 송상주가 쌀을 하사해 장려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것은 법 밖의 일이긴 합니다만, 먼 외방의 자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니, 오로지 성상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푸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쌀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밤에 화성이 태미(太微)의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10월 13일 갑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은 후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관원은 임무가 가장 무거운데, 요즈음은 전관(銓官)이 잘 가려서 보내지 않고 또 대간들도 탄핵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몹시 그른 일입니다. 하직 인사를 하는 수령들을 인견하시면 어진 사람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도승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수령의 차사원(差使員)으로 올라오는 자들도 인견하여 백성들의 질고에 대해 물어보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장령 윤형성과 정언 경최가 대신의 지적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경최는 또 외임(外任)으로 있을 때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이지 못하였으니 응당 추감(推勘)받아야 할 대상에 속한다고 피혐하는 말 중에 언급하고, 체직을 청하였다.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어제 경연 석상에서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정뇌경의 어미상과 정홍익의 처상에 모두 장례 물품을 지급해 주었으니 이것은 실로 성덕의 일입니다. 전 판서 윤강(尹絳)은 중신(重臣)으로서 나이들어 물러나 만절(晩節)을 능히 보전하여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작고하여 장례 날짜가 박두하였으니 마땅히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2품 이상은 예장(禮葬)하는 규정이 있으니, 예장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자,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장례 날짜가 이미 박두하여 형세상 마련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장례 물품과 조묘군(造墓軍)을 특별히 넉넉하게 주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한 후 각 고을에서 획급(劃給)해 준 수량을 다 써버리고 대동미를 끌어다 쓴 자가 아주 많다고 한다. 10석 이상을 남용한 수령은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해서 잡아다 캐묻고 그 이하는 추고하라. 관수용(官需用)으로 획급해 준 쌀은 수령이 응당 써야 할 물품인데, 요즈음 획급해 준 것을 다 쓴 수령을 혹 남용한 것으로 논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규례를 정한 뜻이겠는가. 이후로는 다른 달 치를 끌어다 쓴 자만 사목에 의거해서 죄를 논하도록 하라."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 전교로 선혜청과 의금부에 내려보내 벽에 붙여놓고 준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0월 14일 을유

상이 침을 맞았다.

 

헌납 심유도 역시 대신의 지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윤형성과 심유는 출사시키고 경최는 체차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숙달(李叔達)을 장령으로, 조수익(趙壽益)을 형조 참판으로,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10월 15일 병술

밤에 월식이 있었다.

 

10월 16일 정해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의로, 정재희(鄭載禧)를 지평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동지(同知) 남노성(南老星)이 졸하였다.
남노성은 고 상신 김상용(金尙容)의 외손이다. 어려서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급제함에 미쳐서는 화현직(華顯職)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사람됨이 경솔하고 희학을 좋아하였으며 주견이 없었다. 이 때문에 사론이 몹시 가볍게 여겨 끝내 청로(淸路)에는 나가지 못한 채 졸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헌납 심유 등이 아뢰기를,
"요즈음 작상(爵賞)이 참람되어 조정의 상전(常典)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민간에 흩어져 있는 열성(列聖)들의 어필(御筆)을 아래에서 올리면 문득 상을 내려 직을 제수하라고 명하거나 자급을 더 주라고 명합니다. 이 때문에 은상을 바라는 자들이 몹시 교활하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완평 부수(完平副守) 홍(洪)은 고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선조(宣祖)께서 그린 대나무 병풍을 어떤 선비 집에서 빌려다 놓았다고 듣고는 속임수를 써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다음 화가를 시켜서 모사하게 하였는데, 화본(畵本)에 오래된 것처럼 색을 물들여서 비슷하게 하여 병풍에 있는 것을 바꾸어 붙여 본주인에게 돌려주고, 진적(眞跡)은 위에 올렸습니다. 감히 도둑질을 하여 작상(爵賞)의 은혜를 바랐는 바, 군부를 속인 정상이 몹시 놀랍습니다. 완평 부수 홍에게 새로 내린 가자를 도로 거두고,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8일 기축

상이 침을 맞았다.

 

헌납 심유가 아뢰기를,
"요즈음 계속 흉년이 들어 법망이 허술해진 탓으로 도적이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사인(士人) 박자삼(朴自三)의 집에 명화적(明火賊)이 한밤중에 돌입하였습니다. 이에 박자삼 모자가 도망쳐 나와 울타리 사이에 숨어 있으면서 불빛 사이로 도적을 살펴보니, 그 가운데 한 명은 바로 그 집에서 새로 속(贖)한 종이었는데, 그 종은 수백 금으로 그의 몸을 속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문서를 만들어 준 뒤 겨우 4, 5일이 지나 명화적이 나타나 다른 물건에는 손도 안 댄 채 단지 그 은(銀)만 빼앗아 간 것입니다. 이에 박자삼이 포도청에 고하여 그 도적종을 체포하였는데 가둔 지 며칠 만에 포도 대장 유여량(柳汝𣛀)이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고 캐묻지도 않은 채 곧바로 석방하였습니다. 명화적이 도성 안에 출몰하였으니 포도 대장으로 있는 자는 평상시에 엄금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윤기(倫紀)에 관련된 도적을 체포하였다가 곧바로 석방한단 말입니까. 이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고 분해 하고 있습니다. 유여량을 파직한 다음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우선 중한 쪽으로 추고하도록 하였다.

 

10월 19일 경인

상이 침을 맞았다.

 

10월 20일 신묘

상이 침을 맞았다.

 

이익(李翊)을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사간으로, 김만기(金萬基)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은상이, 일찍이 형조의 관원으로 있었을 적에 살인에 관계된 중대한 옥사를 상세히 심리하지 못하여 다시 심리하라는 전교가 있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0월 22일 계사

상이 침을 맞았다.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황해 병사 성익(成釴)은 비석을 끌어내느라 벼를 손상시켰습니다. 근시(近侍)하는 신하가 눈으로 보고서 진달하였으면 실로 범범하게 소문이 퍼진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익은 추고 함사에서 많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해명하여, 마치 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였으니, 몹시 놀랍습니다. 지금 이 성익에 대한 일은, 근시하는 신하가 눈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서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사삿일을 하느라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곡식을 손상시킨 정상이 분명하여 가리울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흉년이 든 뒤라 도적이 일어날 걱정이 곳곳마다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도적을 체포하는 책임은 오로지 영장(營將)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나주 영장 홍유량(洪有量)은 사람됨이 느슨하고 어리석어 군정(軍政)을 모두 내버려두었으며 도적을 다스리는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아랫사람들의 손에 맡겨두었습니다. 이에 속읍(屬邑)에서 체포해 온 도적을 날짜만 지체시키고 즉시 캐묻지 않아서 잔당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모두들 놀라워하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현재 농사가 크게 흉년이니 백성들이 곤궁하여 모두 도둑이 되는 것은 형세상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니 진휼하여 안집시키는 계책을 조정에서는 뜻을 다해 강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책을 세워 체포해 그들로 하여금 점점 더 치성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경기좌·우도에 명화적이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일이 곳곳마다 있다고 하는데도, 어느 한 현, 한 군에서도 그 즉시 체포하였다고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도적들로 하여금 거리낌없이 횡행하게 하였으니,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좌·우토포사(左右討捕使)를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3일 갑오

상이 침을 맞았다.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10월 24일 을미

상이 침을 맞았다.

 

10월 25일 병신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권격(權格)을 헌납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이혜(李嵆)를 부수찬으로, 이유상(李有相)을 부응교로 삼았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왕옥(王獄)은 중요한 곳이라 엄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본부가 개좌(開坐)할 때 항상 신칙을 가합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본부의 수인(囚人)이 방자하게 술에 취해 놀라운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하니, 입직한 도사가 검칙하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본부의 낭청이 ‘본부의 협문(挾門)을 출입할 때 문판(門板)의 나무 지도리에 기름을 칠해 둔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는 하인들이 몰래 문을 여닫는가 의심이 들었다. 이에 나졸들에게 캐물을 즈음, 마침 외직 나장(外直羅將) 이충익(李忠益)이 사사로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즉시 협문의 자물쇠를 열어보게 하였더니, 열쇠가 들어가자마자 즉시 열렸다. 이에 그도 두말없이 자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사사로이 여닫은 상황이 분명하여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죄인의 족속들이 밤을 틈타 출입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인바, 그 실로 드러난 자취가 몹시 얄밉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이 몹시 놀라우니 입직한 도사는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고, 나장은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왕옥이 이 어떠한 곳인데 근래에 엄하지 못하다고 사람들이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삼가 금부의 초기(草記)를 보니, 모두가 몹시 한심스러운바, 당해 도사는 죄가 응당 파직하고 추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인이 방자하게 술에 취하여 놀라운 일이 많이 있었다.’고 한 것은 어찌 수인이 범한 바라고 핑계대고 내버려둔 채 추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수인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계달하게 해서 율에 의거해 처리할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또 이르기를,
"한 부의 잘못에 대해 당상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26일 정유

의금부가 아뢰기를,
"하교에 의거하여 그날 입직한 본부의 도사에게 물어보니 ‘이달 15일에 수인 이상익(李商翼)이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해 문금(門禁)이 엄하다는 이유로 본부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거명하면서 욕하였다.’고 합니다. 그 놀라운 정상은 일찍이 없었던 바이니, 이것으로 우선 공초(供招)를 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단 일이 몹시 놀라울 뿐만 아니라 반드시 바깥 사람과 서로 내통한 자취가 있을 것이니, 특별히 엄하게 국문을 가하라."
하였다.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요즈음 도성에는 도적에 대한 걱정이 전에 비하여 더욱 심하고, 심지어 무뢰배들이 밤을 틈타 횡행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야금(夜禁)이 엄하지 못하고 규사(窺伺)가 치밀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좌·우포도 대장을 모두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이태연이 아뢰기를,
"이상익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린 정상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초에 자신이 범법한 일이 없이 단지 최세경(崔世慶)의 사간인(事干人)으로서 수금된 지 오래되어 두세 번 납초(納招)하여 옥사가 끝나가고 있었으니, 외부 사람과 통하는 것은 본래 이로울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엄하게 국문하여 캐물으면 정상과 법을 서로 참작하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으므로, 감히 이렇게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상익이 한 짓은 몹시 패만스러우며 바깥 사람이 출입한 정상도 그 꼬투리가 드러났으니, 신문하고 조사하여 한편으로는 지엄한 왕옥의 체모를 보존하고 한편으로는 뒷날 어지럽게 되는 폐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그대가 운운한 것은 몹시 온당치 않다."
하였다.

 

10월 29일 경자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윤심(尹深)을 부교리로, 경최(慶㝡)를 문학으로, 이집(李鏶)을 경상 병사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조금 전에 순릉 참봉(順陵參奉)이 보고한 바를 보니 ‘이달 28일 한밤중에 적당(賊黨) 10여 명이 몽둥이와 칼을 가지고 크게 소리지르면서 들어오자, 적은 수의 번군(番軍)이 감히 맞서지 못하고 산위로 도망갔다가 공릉(恭陵)의 하인과 주위 절의 승도를 불러오자 적당이 비로소 물러갔다. 내가 몸소 제기고(祭器庫)에 가보니 은수저와 유기(鍮器) 등을 모두 훔쳐갔다.’고 하였습니다. 능침의 제기고에 적당이 들어와 훔쳐가는 변이 있었는바, 이는 참으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본도 및 좌·우포도청으로 하여금 적당을 수색해 체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예조의 초기(草記)를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중지인 능침에 감히 무리를 모아 도적질해 제기를 훔쳐가기까지 했으니, 이는 일찍이 없었던 큰 변고입니다. 당해 지방관과 토포사가 평소에 엄히 토벌하지 못한 정상을 이에 의거해 알 수 있습니다. 중한 쪽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일이 몹시 놀라우니 모두 중하게 책하여야 한다. 그러나 뒤폐단이 염려되니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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