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18권, 현종 8년 1667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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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신축

이유상(李有相)을 겸보덕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사서로, 박이명(朴而昭)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 등이 아뢰기를,
"순릉(順陵)의 제기(祭器)를 도둑맞은 변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도적들이 칼을 뽑아들고 크게 소리치자 적은 수의 번을 서던 군졸들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이의 사세는 헤아려 알지 못하겠으나, 시끄럽게 떠들어댈 즈음에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또 온 힘을 다해 맞서 싸우지도 못하여 제기 등의 물품을 모두 도둑들의 손에 넘겨 주었으니, 일이 뜻밖에 터졌다는 핑계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참봉은 잡아다 추문하고 입직하였던 서원(書員)과 수호군(守護軍)은 모두 잡아 가둔 다음 분명하게 조사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경기 안에 좌·우토포사(左右討捕使)가 있는데, 근래에는 연해의 고을에 도적이 치성하여 좌·우토포사가 두루 살피기 어렵습니다. 수원 부사(水原府使)도 토포사를 겸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조 판서 이완이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시장(柴場)을 낭천(狼川)에다 옮겨 설치하고자 해서 본국의 낭관을 보내어 합당한 곳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방에 사는 자 10여 명이 밤을 틈타 포를 쏘면서 위협하여 몰아내려고 꾀하였으며, 다른 곳으로 가자 다시 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에 본국의 낭관이 놀라움을 금치 못해 본고을의 수령에게 말하였는데, 수령은 마땅히 엄히 조사해 통렬하게 징계해야 하는데도 한 사람을 잡았다가 곧바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관원을 협박하였으니 그런 습관을 자라나게 해서는 안되는데, 수령으로 있는 자가 잡아 치죄할 뜻이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이 몹시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한 뒤폐단에 관계가 된다. 낭천 현감을 잡아다 캐물어 처리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이경억이 아뢰기를,
"호적이 누락된 사람들을 일체 사목에 의거해서 전가 정배(全家定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여인과 나이 70 이상인 자에게는 정배하는 법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참작하여 규례를 정해야만 중외에서 통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인과 나이 70 이상인 자는 비록 정배하는 법조문은 없으나, 이미 자신이 범법하였을 경우에는 그 죄를 전부 풀어주어서는 안된다. 지금 이후로는 데리고 갈만한 자식이 있는 여인은 그 자식으로 하여금 어미를 데리고 배소(配所)로 가게 하고, 70세 이상으로서 자식이 있는 자는 그 자식도 아울러 정배하고 자식이 없는 자는 모두 속바치게 하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내사(內司)의 노비 공포(奴婢貢布)를 이미 반 필로 감하였으니 공미(貢米)도 마땅히 헤아려 감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의 미공(米貢)은 다른 것에 비하여 아주 헐하다."
하자, 우상 정치화가 아뢰기를,
"비록 아주 헐하다고는 하나, 이미 공포를 감하고서 공미를 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균등치 않다는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사에 분부하여 똑같이 헤아려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일 임인

동지 정사(冬至正使) 정치화(鄭致和)와 부사 이익한(李翊漢), 서장관 이세익(李世翊)이 청나라로 갔다.

 

대사간 윤집이 직책을 띤 채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11월 3일 계묘

홍처량(洪處亮)을 대사간으로, 정륜(鄭錀)을 승지로, 조복양(趙復陽)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우의정 정치화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국경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갔다오라고 답하였다.

 

11월 5일 을사

병조 판서 홍중보가 상소하여 판의금부사를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죄인의 아비가 날조해낸 말을 가지고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인혐하는가. 사체에 손상됨이 있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이때 최세경(崔世慶)과 윤씨(尹氏)의 옥사가 있었는데, 윤씨의 아비 윤국경(尹國卿)이 홍중보가 최세경을 편든다는 이유로 격쟁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므로 사직한 것이다. 뒤에 끝내 체차되었다.

 

11월 7일 정미

지평 이익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올해의 흉년은 전고에 없던 바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때에 민간에 식량이 부족한 걱정이 있으니 앞으로 살아갈 길이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6월 이후로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탓으로 밭이랑에 가을보리를 심은 곳이 전혀 없으니 설령 내년에 풍년이 든다 하더라도 이미 보리가 없어서 백성들이 장차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래에 우레가 치는 변고가 참혹하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듣건대, 우레가 순음(純陰)의 달에 발하는 것은 내년의 걱정이 된다고 합니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 경우 백성들이 반드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국가가 장차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과 사람은 서로 더불어서 간격이 없이 한 이치여서 감통(感通)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반응이 있는 것이니,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까닭을 찾아보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마음이 밝지 못하여 물욕이 솟구치는가, 편안함에 젖어 뭇 공적이 무너졌는가,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공도가 폐해졌는가, 사치 풍조가 없어지지 않아 재력이 고갈되었는가, 궁궐 안이 엄하지 않아 아첨꾼이 극성한가, 중한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하지 않아 법이 문란한가, 의옥(疑獄)을 용서해 주지 않아 원통함을 품은 자가 많은가?’ 하는 등의 몇 가지 조항으로 자신에게 돌이켜 보고 일에 징험해 보아, 깊이 스스로를 반성하여 거조를 마땅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이며 하늘의 마음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깨우쳐 줌이 몹시 간절하고 말뜻이 실로 절실하여 내가 거듭거듭 읽으면서 가상하게 여기었다.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하였다.

 

11월 8일 무신

김익경(金益炅)을 형조 참의로, 권두추(權斗樞)를 정언으로 삼았다.

 

사간 여성제 등이 아뢰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박유동(朴由東)은 도임한 이래로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이 많이 있었는데, 규정 이외에 더 징수하여서 백성들이 몹시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모를 아내(衙內)에서 데리고 있어 이미 함부로 거느리고 가지 못하는 금법을 범하였는데, 장모가 죽은 후 부의금이라 칭하면서 마을에서 억지로 쌀을 내도록 명하여 수십 석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듣기에 놀라우니, 이와 같은 사람은 하루도 관직에 있게 해서는 안됩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정원이, 서로 제수한 간관을 서경(署經)하는 일로 양사 성상소(城上所)를 패초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간원이 성원을 갖추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이런 아룀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본부에는 이때 성원을 갖추지 못한 일이 없었는데 뒤섞어 패초하기를 청하였으니, 일이 몹시 타당치 않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9일 기유

정원이 아뢰기를,
"양사의 서경하지 않은 관원에 대해서는 사은 숙배한 후 즉시 개좌(開坐)하여 서경하기를 계청하고, 이어 새로 대간이 된 자와 함께 모여 논사(論事)하기를 청하는 것이 바로 대각의 옛 규례입니다. 그저께 간원에서 말을 전해오기를 ‘본원에 서경하지 않은 관원이 있으니 지금 마땅히 서경하여야 한다. 정원에서 계달하여 패초하는 말을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간의 잘못된 규례인 듯합니다. 그런데 신들이 미처 널리 전례를 상고해보지 않고서 단지 대간이 보내온 말에만 의거하여 곧바로 계달하여 양사를 한꺼번에 패초하도록 청하였습니다. 신들은 전례를 어그러뜨린 잘못을 면할 수 없으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간관이 사은 숙배한 지 한 달 만에야 비로소 서경하기를 청하였으며, 이미 서경이 나갔는데도 또 같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두가 본원과 대간이 모두 옛 규례를 잘 모른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전의 일을 신명하여 대각의 체모를 보존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헌납 권격, 정언 여성제가, 정원으로부터 지적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11월 10일 경술

정언 오시복이, 이미 서경이 나갔는데 즉시 같이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11월 11일 신해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신은 본부가 다함께 모이던 날 정원이 뒤섞어서 양사를 패초하기를 청하였던 일을 가지고 추고를 청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에 ‘정원의 잘못만 논계할 만한 것이 아니라 대관이 말을 전해 대신 품하게 한 것도 대각의 체모를 무너뜨린 것이니 또한 논계 중에서 아울러 거론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으로 발언하자, 동료가 ‘우리들은 마침 대청(臺廳)에서 회좌하였을 때 간관이 말을 전해보내는 일에 대해 참견하여 대략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미 이 의논에 대해 들었으니 지금 와서 계사에 동참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시끄러움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중지하였습니다. 지금 간관이 정원에게 지적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고 있으니, 신이 마땅히 처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은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지키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고, 집의 오두인, 장령 윤형성·이숙달, 지평 정재희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장관이 석상에서 발언하였을 때 신들이 ‘이 일은 곡절이 있는 것이니 아울러 논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장관 역시 그렇다고 하고는 끝내 거론하여 논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관이 ‘발언하자마자 바로 정지해버렸으니 혐의가 있어 처치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습니다. 그러니 신들은 감히 편안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집상전(集祥殿)을 짓도록 명하였다. 이때 왕대비전(王大妃殿)에 이변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자전께서 정전(正殿)에 임어하시지 못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으니 사체에 있어서 아주 온당치 못하다. 이제 별도로 한 전(殿)을 세워 편안하게 계실 곳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흉년에 백성들을 부역시키는 것 또한 몹시 온당치 않으니, 옛궁의 한 전(殿)을 헐어서 그 재목으로 전 동쪽의 옛터에다 짓되, 호조 판서와 병조 판서가 함께 관장하여 새해가 되기 전에 완성시키라."

 

11월 12일 임자

홍문관이 양사를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대관이 정원에 말을 전한 것은 분명 잘못된 규례를 따른 것이지만, 정원에서는 쓸데없는 말을 끼워 넣어 대각을 지휘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대각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사체가 자별한 것이니, 정원이 어찌 규검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잗단 일이긴 하나 실로 뒤폐단에 관계됩니다. 해당 승지를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고, 승지는 단지 추고만 하도록 명하였다.

 

11월 13일 계축

형조가 아뢰기를,
"호적에서 누락된 여인에 대해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로 하여금 어미를 모시고 배소(配所)로 가게 하도록 일찍이 탑전에서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나이 70 이상으로 호적에 누락된 자의 경우, 비록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이 호적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부모가 호적에 누락되었다는 이유로 정배까지 하는 것은 몹시 원통할 듯합니다. 그러니 마땅히 다시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부모가 비록 호적에 누락되었더라도 그 자식이 호적에 올라 있으면 모두 수속(收贖)하고 그 자식을 정배하지 말라."
고 명하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전 교관 이상익(李商翼)이 최세경의 친우로서 사간인(事干人)이 되어 옥에 갇혀서는 사사로이 열쇠를 만들어 외인을 출입하게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 옥졸의 공사(供辭)로 인하여 상이 특별히 엄하게 형문하라고 명하였다. 영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상익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실정을 숨긴 일이 없는데 옥졸이 공초로 인하여 엄히 형신하기까지 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사로이 열쇠를 만든 것은 죄가 가볍지 않다."
하였다. 지중추부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관대함과 어짊은 남음이 있으나 강건한 덕이 부족하십니다. 이에 기강이 해이되어 수습할 수도 없게 되어가니 여러 신하들은 전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야지 남는 점을 도와서는 안됩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김좌명의 말이 비록 이와 같으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국가가 지금까지 부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인후함으로 다스린 소치입니다. 강건한 덕이 비록 아름다운 일이라고는 하나 임금으로 하여금 엄준한 형벌을 쓰도록 권장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관대함과 어짊이 참으로 임금의 아름다운 덕이니, 어찌 엄하게 하도록 권장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자,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상은 이상익이 형신을 받다가 죽을 것을 염려하고 있는데, 이상익이 만약 죽는다면 오히려 나라에는 기강이 있는 것이 됩니다. 무릇 하늘의 도는 지극히 어질지만 봄에 소생시키고 가을에 죽이는 것을 함께 행하여 어그러뜨리지 않는 법입니다. 임금이 하늘의 도를 본받아 시행하는 데 어찌 오로지 관대하고 부드럽게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겨울 안개가 사방에 꽉 끼고 기후가 절조를 잃은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았을 것입니다. 삼대(三代) 이후로 어질기로는 송 인종(宋仁宗)만한 임금이 없었으나,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시들하고 무기력해졌다는 기롱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한 광무(漢光武)는 현명한 임금이었는데도 오한(吳漢)은 오히려 ‘신중히 하여 사면시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임금의 도는 마땅히 양강(陽剛)을 귀한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인(仁)·명(明)·무(武) 세 자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폐해서는 안됩니다만, 형법(刑法)에 무(武)를 쓰면 도리어 치우치게 가혹한 일이 됩니다. 옛날 세종조때 어떤 선비가 죄를 지어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의 종이 옥졸에게 뇌물을 주면서 여주인이 밤중에 들어가 서로 만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자 옥졸이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한밤중에 종이 여자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들어가 그 주인으로 하여금 몰래 옷을 바꿔 입고 옥에서 나가게 하고 자신이 대신 옥에 갇혔습니다. 그 뒤 그에게 형벌을 가하려고 끌어내 보니, 바로 그 종이었습니다. 옥관이 이 사실을 아뢰자 세종께서 의롭게 여겨 이르기를, ‘만약 이 종을 죽이면 충성으로 권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즉시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후에 선비가 과거에 급제, 청현직을 역임하여 지금까지 미담이 되고 있습니다. 어짊과 관대함이 어찌 아름다운 덕이 아니겠습니까."
하자, 부교리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강건하게 해야 될 때 강건하게 하고 부드럽게 해야 할 때 부드럽게 하여야지, 편중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상익의 일에 대해서, 처음에는 형추(刑推)하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추고하지 말라고 하고, 끝내는 엄하게 형신하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또 형신하지 말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조정의 거조가 어찌 이와 같이 흔들려 일정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다.

 

11월 14일 갑인

의금부의 죄수 최세경과 여자 단일(但一)을 원도(遠道)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고 현감 이유청(李惟淸)이 자식이 없어서 그의 조카 정(楨)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정은 성품이 흐릿하였다. 이정의 아내는 이름이 단일(但一)로 바로 진사 윤국경(尹國卿)의 딸이었다. 유청의 외손인 최세경이란 자가 이정과 유청의 집에서 같이 살았는데, 몰래 이정의 아내와 간통하였다는 설이 경외에 전파되었다. 이에 유청이 이정의 처만을 쫓아내고 덮어둔 지 20여 년이나 되었는데,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두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일은 말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최세경이 밤을 틈타 내 방에 들어와 겁간하려고 하였는데, 항거하여 면하였다."고 하고, 최세경은 말하기를 "단일이 외간 남자와 통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나를 얽어넣은 것이다."하여, 옥정(獄情)이 몹시 의심스러워 오랫동안 결단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대신들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헌의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상이 판결하기를 "두 사람이 공초한 말이 모두 의심스러운 정적이 없지 않은데, 형신하지 않으면 실정을 알아낼 수가 없고, 형신하다가 지레 죽으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원통하게 될 것이다. 영부사가 말한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율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말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풍교(風敎)에 관계되므로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죄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다." 하고, 모두 정배하도록 명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89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윤리(倫理) / 역사(歷史)
사신은 논한다. 고 현감 이유청(李惟淸)이 자식이 없어서 그의 조카 정(楨)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정은 성품이 흐릿하였다. 이정의 아내는 이름이 단일(但一)로 바로 진사 윤국경(尹國卿)의 딸이었다. 유청의 외손인 최세경이란 자가 이정과 유청의 집에서 같이 살았는데, 몰래 이정의 아내와 간통하였다는 설이 경외에 전파되었다. 이에 유청이 이정의 처만을 쫓아내고 덮어둔 지 20여 년이나 되었는데,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두 사람을 잡아다 국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일은 말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최세경이 밤을 틈타 내 방에 들어와 겁간하려고 하였는데, 항거하여 면하였다."고 하고, 최세경은 말하기를 "단일이 외간 남자와 통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나를 얽어넣은 것이다."하여, 옥정(獄情)이 몹시 의심스러워 오랫동안 결단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대신들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였으며, 영중추부사 이경석은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헌의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상이 판결하기를 "두 사람이 공초한 말이 모두 의심스러운 정적이 없지 않은데, 형신하지 않으면 실정을 알아낼 수가 없고, 형신하다가 지레 죽으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원통하게 될 것이다. 영부사가 말한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율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말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풍교(風敎)에 관계되므로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죄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다." 하고, 모두 정배하도록 명한 것이다.

 

11월 16일 병진

심재(沈梓)를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윤집(尹鏶)을 대사간으로, 이유상(李有相)을 집의로, 최관(崔寬)을 사간으로, 이세장(李世長)을 헌납으로, 심유(沈攸)·최문식(崔文湜)을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강여호(姜汝㦿)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9일 기미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현재 천재가 거듭 나타나고 기근이 연이어 들이닥쳐 백성들이 잇따라 유리하고 있는데 팔도가 모두 그러하니 군신 상하가 참으로 여기게 온 마음을 쏟아야만 합니다. 견감해 주고 진구해 주는 모든 정사에 대해 급급히 강구하여 모든 방도를 다하더라도 오히려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키고 민심을 위무하기에 부족할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또 때아닌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진구하면서 한편으로는 토목 공사를 하는 것은 더욱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별전(別殿)을 짓는 역사를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 이 역사는 자성(慈聖)을 위한 것으로 참으로 만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좋아서 하겠는가. 그대들은 다시는 이 일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11월 20일 경신

응교 남이성 등이 차자를 올려 별전 짓는 역사를 정지시키도록 청하니, 이미 헌부에 내린 비답에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11월 23일 계해

헌부가 별전 짓는 역사를 그치도록 청하는 아룀을 정지하였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살인한 죄인과 강상죄(綱常罪)를 지은 죄인이 물고된 뒤에 검시(檢屍)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당초에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 거짓으로 죽는 변고를 일으키게 한단 말입니까. 지금 비록 잡기는 하였으나 내버려 둔 채 논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고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24일 갑자

이익(李翼)·홍처후(洪處厚)를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헌납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수찬으로 삼았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이섬(李暹)에게 율을 적용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11월 25일 을축

남이성(南二星)을 사인으로, 이단하(李端夏)를 헌납으로, 권격(權格)을 필선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수찬으로 삼고, 특별히 구인기(具仁墍)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28일 무진

윤비경·남구만을 승지로, 민유중을 이조 참의로, 오두인을 사간으로, 이규령을 지평으로, 정재숭을 교리로, 이세장을 이조 정랑으로, 박장원을 좌참찬으로, 여성제를 부응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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