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2권, 현종 11년 1670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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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병술

정지화(鄭知和)를 판윤으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지평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이원로(李元老)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대사간 심재가 ‘전일 본원이 아뢴, 오상을 특별히 체직시킨 명을 환수하라고 한 논계는 비록 언로를 위하여 발론한 것이기는 하나 깊이 생각해보니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하겠으며, 또한 소명을 받고도 나가지 않았으니 회피하며 태만히 한 죄가 있습니다.’라고 하며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진료를 마치고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근래 김징의 일로 거듭 성상을 격노케 하여 조섭을 하시는 데에 방해됨이 있기에 신도 차자를 올렸습니다만, 이경억의 일은 신은 꼭 죄를 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왕옥이 엄하지 않은 것은 매우 한심한 일이기는 하나 이것은 바로 근래의 잘못된 습속입니다. 선조(先朝) 때에 박자한(朴自韓) 사건 이후로 법금이 매우 엄했었는데, 지금은 점점 예전만 못해져서, 죄수의 자제가 혹 문틈으로 서로 만나보기도 하고 혹 서찰을 주고받을 때도 있으니, 왕옥이 참으로 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경억의 죄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그 뒤에 이경억과 이단하가 잇달아 석방되었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임금을 속이는 것이 풍습이 되었습니다. 신명규(申命圭)의 일에서 또한 그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의 차자 가운데 ‘대간이 입을 닫고 있다.’고 했으면, 대간이 된 자는 마땅히 피혐을 해야 하는데, 명규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피혐하지 않고 있다가 이에 말하기를 ‘대신의 차자는 비록 보지 못했으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대간을 공척했다고 합니다.’ 하며, 환수하게 하는 데에 급급하여 신의 차자를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임금을 속였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하였다.

 

6월 2일 정해

지평 오두헌(吳斗憲)이, ‘지평 정적과 친혐(親嫌)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첫 번째 사직장을 올렸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6월 4일 기축

장령 이섬(李暹)이 아뢰기를,
"금오(金吾)의 관원을 특별히 파직시킨 것은 실로 지나친 거조이니, 환수하기를 계청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는데, 지평 정적이 동료들의 출사를 기다리지 않고 급급히 정계하였으니, 대각의 체모를 잃은 데다 또 뒤폐단에도 관계됩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근거도 없는 의논을 주워모아 날마다 번잡스럽게 계청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이섬이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또 교지에 응하여 시무(時務)를 진달하기를,
"전하께서는 안으로는 성색(聲色)이나 화리(貨利)에 유혹되지 않고 밖으로는 토목공사를 일으키거나 사냥을 즐기는 일이 없이,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며 유현을 예우하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모두 제왕(帝王)의 성대한 의절을 지니신 것인데, 다스린 지 1기(紀)에 다스림의 공효가 더욱 아득하여 하늘의 노여움은 날로 심해지고 백성들의 원망은 날로 증가되어, 날로 망해가는 길로 나아가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첫번째 일입니다.
대신이 직무를 부지런히 하여 날마다 아침에 일찍 들어왔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가며 온갖 관사의 사무를 겸하여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다스리며, 중외의 일을 맡은 신하들은 힘껏 기운을 내어 다투어 재능을 발휘하여 장부를 정리하는 등의 일을 느슨하게 하는 일이 없이 한결같이 단단히 단속하기를 힘쓰니, 주현의 관리들이 허물을 구제하기에도 여유가 없고 조정의 명령을 봉행하기에 날마다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강이 세워지고 공적이 이루어져 빛나는 것은 볼 수가 없고 한갓 체통은 날로 무너지게 하고 간사한 소행이 날로 자라나게 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입니다.
국가가 여러 번 흉년을 만나 절감하는 정책을 누차 행하여 관리들을 도태시키고 비용을 줄인 것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었으며, 각사에서 사용하는 물품들을 줄일 만큼 거의 다 줄여서 관부가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의 회계가 점점 바닥이 나고 재용이 증가되지를 않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입니다.
그 까닭을 찾아보면 또한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자질이 비록 고명하나 뜻이 확립되지 않았고, 행실이 비록 독실하나 사심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뜻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령을 내릴 때에 흐릿함을 면치 못하여,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봐주는 병통이 있고,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훌륭하게 성취되는 실상이 없습니다. 사심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뻐함과 노여워함에 화평을 잃는 일이 많아서 조종조로부터 내려오는 정해진 제도를 혹 친애하는 사람을 위해서 뒤흔들고 대각의 공론을 혹 귀하고 가까운 사람을 위해서 무시합니다. 심지어 한편에서는 논집을 하는데 한편에서는 공사를 그대로 계속하여 마치 위아래가 이기기를 다투는 듯하니, 이것은 실로 예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참으로 간하는 말을 거절하는 조짐이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서 결국 뒷날 이루 말하기 어려운 폐단이 될까 염려가 됩니다. 바른말을 구하고 죄수들을 염려하는 일은 단지 한때 형식적으로 하고, 재변에 대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반성하는 마음을 한 달도 지니고 있지를 못하니, 이것을 일러 하늘의 경계를 삼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은택이 아래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조그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쌓인 민폐를 없애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를 않고, 신의가 먼저 미덥게 되지를 않아서, 일을 하는 것이 번번이 뭇 사람들의 뜻을 어기게 되니, 이것을 일러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충성스러운 말과 곧은 의논은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고 융성한 예우와 후한 녹봉은 단지 헛되이 붙잡아 두는 도구일 뿐이니, 이것으로 현인을 대우한다면 또한 말단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묘당의 계획은 말단적인 일을 넘지 못하고 경연에서의 대화에는 임금의 말을 어기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경망하고 자잘한 것을 능력으로 삼고 잗단 일을 세밀히 살피는 것을 밝음으로 삼습니다. 윗사람은 의심하고 아랫사람은 태만하여 속임수가 자라나고, 한 눈금 한 치를 따져서 잗달기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옥송의 옳고 그름은 대부분 호오를 따라서 합니다. 더욱 엄하게 독책을 하여도 인심을 복종시킬 수가 없고 법이 비록 조밀하나 사사로운 뜻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으니, 기강이 무엇을 말미암아 신장되겠으며 체통이 무엇을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정직으로 아랫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고 공도로 외물을 응접하소서. 신료를 취할 때에는 강직함을 먼저 보고 말 잘하는 것은 따지지 말 것이며 사무를 재량할 때에는 대체(大體)를 보존하시고 소절(小節)은 생략하소서. 그리하여 올바른 임금을 본받아 아랫사람들이 다 바르게 되는 교화를 이루소서."
하고, 또 ‘훈국·금위에 용잡한 군사가 지나치게 많은 폐단’에 대해서 진달하고, 또 ‘김징이 어버이를 위해서 잔치를 열었으니 탐장으로 헤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상이 너그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고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교리 이합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이경억과 이단하를 하옥한 것은 과중하다고 진달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6월 6일 신묘

유철(兪㯙)을 예조 참판으로, 이하(李夏)를 헌납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신석번(申碩蕃)을 진선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심재(沈梓)를 승지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상소하기를,
"삼가 김징(金澄)이 스스로를 변명한 내용을 보니, 선배들의 말을 거짓으로 끌어들였으며 아울러 신의 조부와 아비에게까지 미쳤으니, 신이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까. 신의 조부는 인조(仁祖) 병자년에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제수받아 가을이 지난 후에 가족을 거느리고 갔습니다. 조모의 생신은 5월에 지나갔으며 조부의 생신은 이듬해 2월에 있었습니다. 겨우 전쟁이 그친 때이라 평소 공궤하는 것도 모두 감손시켰는데, 잘못된 전례를 따라 비용을 많이 들이는 것을 어느 겨를에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징이 교대할 때에 사실 고사를 물었는데 신이 대답한 것은 위에 진달한 바와 같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뒤집어 거짓말로 꾸며 속이면서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해전(海甸)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것은, 신의 숙부 정위(挺緯)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갈 때 마침 뱃길을 택했는데, 이때 신의 아비가 해서(海西)의 안찰사로서 수연을 베풀어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술상 외에는 애당초 폐물은 없었으며 자손 외에는 빈객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징이 은연 중에 비교하였으니 그의 마음씨가 음흉합니다. 아다개(阿多介)의 일에 있어서는, 하례드릴 방물(方物)을 분정한 관문(關文)이 도착했을 때 본영에 있는 표피(豹皮)를 갖다가 만들어 보내려고 하였더니, 그 전에 있던 표피 5령(領)은 김징이 사사로이 써버렸고 나머지는 오래되어 털이 적어 어공(御供)에 합당하지 않았으므로, 급히 서리 한 명을 서울의 저자에 보내 사다가 바쳤던 것입니다. 그가 이른바 전후가 일반이라고 한 말은 한 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신이 불초한 탓으로 죄수에게 욕된 말을 듣게 되었으니,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죄인이 꾸며댄 말을 혐의할 필요는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고, 그 상소를 금부에 내렸다.
당초 김징이 오시수와 전라 감사의 임무를 교대할 때에 시수가 문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징이 공술하면서 이것을 언급하였는데, 시수가 이것을 인하여 해명을 하면서, 김징이 꾸며댄 말이라고 하며 김징에게로 죄를 돌렸다. 민정중이 연경(燕京)에 갈 때에, 김징이 영중에 받아두었던 표피(豹皮)로 단의(短衣)를 만들어서 떠날 때 송별 선물로 주었는데, 오시수가 아다개(阿多介)라는 말을 하며 그 일을 발론하여 민정중까지 아울러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민정중이 또한 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하여 여러 차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사신가는 행차에 주는 송별 선물이 이보다 큰 것이 있었어도 전후로 사람들이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는 자가 없었는데, 오시수가 이것으로 두 사람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울 계책을 하였으니, 그의 마음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대사헌 김수항(金壽恒)이, 병으로 소명에 나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7일 임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 정재륜(鄭載崙), 부사 이원정(李元禎), 서장관 조세환(趙世煥)이 청나라로 갔다.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안흥창(安興倉)의 군량미가 모자라고 축난 일을 논계한 것이 사실과 어긋났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8일 계사

경상도에 큰물이 졌다. 산음(山陰) 교생 정이원(鄭以元)의 집이 폭우가 올 때 산사태에 깔려, 정이원 및 자녀 손자 남녀 6명이 모두 죽었다.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9일 갑오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예조 판서로, 김석주(金錫胄)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청나라 사신 두 사람이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나왔다. 김수항으로 원접사를 삼았다.

 

우의정 홍중보가 차자를 올려 ‘김징을 형추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김징이 구속된 것이 애초에 수연을 지나치게 벌인 이유에서이니, 먼 외방 사람들은 필시 이 일의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모두들 ‘어버이를 위해 수연을 베풀었다가 끝내 형신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단 한 때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의심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성대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도 아닙니다. 서찰이 오고간 것은, 바깥 사람들이 말을 전하기를 ‘친구 사이에 정이 두터워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고 하니, 지금 이것을 가지고 서로 내통했다는 명목으로 형신을 엄하게 가하여 점점 서로 고발하며 끌어들이게 되면, 조정의 체모에 어찌 크나큰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오시수의 소본(疏本)을 신이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전일 조사한 계본 가운데 말하지 않았던 일을, 이제 와서 비난을 당한 사람이 상소하여 진달한 말을 가지고 문목(問目)을 만든다면, 이것이 어찌 옥사를 다스리는 상법(常法)이겠습니까. 그리고 필시 뒷날의 폐단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이 차자는 잘못 듣고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다.

 

6월 10일 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농사철인데 청나라 사신이 또 나오니, 양서(兩西)의 백성들이 장차 감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계청에 따라 이미 관향 모미(管餉耗米) 2천 석을 지급했는데, 황해도에도 이 예에 의거하여 참수(站需)을 헤아려 지급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황해도에서 참(站)을 내는 읍이 몇 고을이나 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도는 참을 내는 곳이 30여 고을이고 황해도는 24고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에 견주어 절반으로 정하여 지급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원접사가 이제 떠날 참인데, ‘상이 편찮으시어 형세상 교외에 나아가 맞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청나라 사신에게 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이렇게 일이 많은 때에 영상은 병으로 인혐하고 들어갔고 우상도 차자의 비답 때문에 불안하여 아직 행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차자에 잘못 ‘김징을 형추하는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 차자에 대한 비답에 ‘잘못 들은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딴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아뢰기를,
"근래의 이단하와 이경억에 대한 일은 자못 지나치게 엄하고 급하여 아랫사람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경연의 임무를 맡고 있는데, 이러한 거조는 군덕(君德)에 손상이 있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하고 급하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 당시의 성상의 전교에 ‘나국(拿鞫)’이라는 두 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과중한 것입니다. 조복양이 이른바 ‘엄하고 급하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금부의 일이 늘어진 것이 많았었기 때문에 이러한 판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금부를 엄숙하게 할 수가 있었다."
하였다.

 

형조 판서 이완(李浣)이 병 때문에 임무를 보지 못하니, 우의정 허적이 아뢰어 체직시켰다.

 

6월 12일 정유

대사간 홍만용(洪萬容)이 또 ‘공주의 집짓는 일에 대한 논계를 정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남편을 죽인 죄인 진상(眞詳)이 승복하였다. 삼성 추국을 설치하여 계복하여 정형에 처하였다. 그가 태어난 숙천부(肅川府)를 현(縣)으로 강등시키고 그 수령 이형진(李衡鎭)을 파직하였다.

 

6월 13일 무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과거(科擧) 날짜가 객사(客使)가 오는 날과 같은 때에 있어서 일이 장애되는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또 물려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굳이 물려서 정할 것 없다. 시장(試場)을 설치할 때의 절목을 해조로 하여금 변통하게 하라."
하였다. 헌납 이하(李夏)가 물려서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4일 기해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이은상(李殷相)을 형조 참판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오두헌(吳斗憲)·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사인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사간으로, 이유태(李惟泰)를 겸찬선으로, 이옥(李沃)을 정언으로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일곱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효유하였다.

 

6월 16일 신축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가뭄과 물난리가 연이어 백성의 일이 망극하다. 이런 때에 또 사신의 행차를 만났으니, 나라 일이 어떠하겠는가. 부디 지극한 내 뜻을 체득하여 속히 나와 다스림을 논하라."
하였다.

 

간원이 또 과거 날짜를 물려 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6월 17일 임인

정언 이옥(李沃)이 상소하기를,
"신이 요전 본직에 있으면서 들으니, 우윤 조한영(曺漢英)이 일찍이 경기 감사로 있을 때 신씨(申氏)의 산(山)에 관한 송사를 결단해 주고는 바로 상중에 있던 계집을 첩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외밭에서 신을 신은 격이므로 남의 말을 초래할 만도 합니다. 그래서 상중의 계집을 받아들였다는 한 가지 일만을 들어서 이름난 재상이 스스로를 신칙하는 도리를 격려시키고자 했는데, 뜻밖에 공격하는 논란이 규례를 넘어서 일어났습니다. 지금 조한영의 이름이 한창 송장(訟狀)에 오르고 있어서 신료들 사이에 말이 퍼져 떠들썩합니다. 당초 신이 실상을 다 말하지 않은 것은 의도가 있었던 것인데, 신명규(申命圭)가 나서서 신을 공박했으니, 그 역시 너무나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구나 상중에 있는 사람은 혼인을 금하도록 예법에 매우 엄중히 되어 있는데, 소상이 이미 지났다느니 서얼은 사족과 차이가 있다느니 하면서 그를 변명해주려고 했으니, 어찌 구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가 신이 명망이 가벼워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해서 도리어 남을 공격하는 자료가 된 것입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대간의 자리를 다시 더럽혀서 청명한 조정에 욕을 끼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6월 18일 계묘

신명규(申命圭)를 사간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삼았다.

 

장령 이섬(李暹) 등이 아뢰기를,
"사대부의 행실은 겸양을 중하게 여깁니다. 정언 이옥(李沃)은 대간의 논평을 당하다가 다시 그 전 직임에 의망되었으니 의당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만하게 소장을 올려 쟁송하듯이 하였으니, 이옥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선산 부사(善山府使) 이면(李櫋)은 민간에서 응당 납부해야 할 세폐면포(歲幣綿布)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을 서울로 보내어 그 값을 강제로 책정하여 자신이 방납(防納)하였습니다. 파직하고 서용치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잡아다 문초하고 죄를 결정하라고 명하였다.

 

6월 20일 을사

경기에 큰물이 졌다. 당시 각도에 모두 큰 물난리가 났는데, 호남이 더욱 심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강백년(姜栢年)을 도승지로, 서필원(徐必遠)을 판윤으로, 윤경교(尹敬敎)와 홍주국(洪柱國)을 부교리로, 장선징을 병조 참판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정익(鄭榏)을 형조 참판으로, 안진(安縝)을 형조 참의로, 이혜(李嵆)를 교리로, 이완(李浣)을 강화 유수로, 김수흥(金壽興)을 총융사로 삼았다.

 

예조가, ‘가을 절기가 박두하였는데 음우(淫雨)가 지리하게 계속된다.’는 이유로 사문영제(四門禜祭)를 행하기를 청하였다. 영중추 이경석도 차자를 올려 기청제(祈晴祭)를 행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가뭄과 물난리는 그 참혹하기가 차이가 없는데, 가뭄을 인하여 죄수들을 소결하는 것은 으레 하는 일입니다만, 물난리를 만났을 때에 그렇게 한 일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일찍이 소결을 하였습니다만, 억울함을 품고서 아직 풀지 못한 자가 없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금부와 전옥서에 아직도 죄수들이 많으니, 경중간에 속히 죄상을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결하는 일은 근래에 내가 병이 있어서 하지 못하였다. 조금 차도가 있으면 장차 행하려고 한다. 기청제는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6월 21일 병오

김만기(金萬基)를 부제학으로, 이규령(李奎齡)을 부응교로, 안진(安縝)을 승지로 삼았다.

 

6월 22일 정미

장령 이섬(李暹)과 지평 오두헌(吳斗憲)이, 추고하라고 조율한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23일 무신

평안도 태천(泰川)에 큰 바람이 불고 우레가 쳤으며 우박이 내렸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승지 남이성(南二星)이 아뢰기를,
"남편을 죽인 죄인 진상(眞詳)은, 직접 남편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 남편을 모살(謀殺)한 것이니, 자기가 직접 죽인 자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지 처참(處斬)만 하고 능지(凌遲)의 형벌은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집을 파서 못을 만들고 수령을 파직시키는 등의 일도 마땅히 차례로 등급을 낮추어야 하는데, 금부에 명백한 정례가 없으니, 법식을 정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남편을 죽인 죄인은 이미 복주되었습니다만, 그 간부(奸夫) 두 사람이 현재 계복(啓覆) 중에 있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부대시참(不待時斬)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밤에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6월 24일 기유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25일 경술

장령 경최가, 격쟁인(擊錚人)의 말로 인하여 현재 조사받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헌납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격쟁인 검동(檢同)의 일로 대관을 조사하고 추문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조정의 체모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그가 금양위(錦陽尉) 집에서 복역한 지 이미 3대(代)가 되어 비록 공천(公賤)으로 다시 돌아온 뒤라고 하더라도 공공연히 멋대로 욕을 하는 것은 풍교를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니 법을 맡은 관리가 징계시키려고 했던 것은 역시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징을 친 자의 참소로 인해 별안간 조사하고 추문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풍문을 조사하는 것은 옛날에는 없던 일입니다. 대관을 조사하고 추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남편을 죽인 여자의 간부(奸夫)를 이미 부대시참에 처하게 하였습니다만, 그 중에 숙천(肅川) 죄인 이율옥(李栗玉)의 남동생 이옥명(李玉明)은 일을 도와 주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형에 해당되나, 나이가 겨우 13세이니 곧바로 처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계복을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과거(科擧)의 날짜를 비국의 복계로 인하여 이미 물려 행하라고 명하였습니다만,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은 번신(藩臣)의 신분으로 치계를 하여 물려 거행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과거는 중대한 일인데, 번신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승지가 추고를 청하지 않은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6월 26일 신해

장선징을 예조 참판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예조 참의로, 이후(李煦)를 장령으로, 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사서로 삼았다.

 

전에 간원이, ‘훈련 부정 민기(閔錡)는 난을 일으킨 집안의 아들로서 의관의 반열에 끼워두는 것은 합당치 않으며 또한 일찍이 이산 군수(理山郡守)로 있을 때에 경내의 백성들을 조발하여 금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가 산삼을 채취하게 하였고 산삼 상인들을 모아서 관청의 문앞에서 시장을 열게 하였다.’는 이유로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었다. 헌납 이하(李夏)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민기의 죄에 대해서 의율한 것이 마땅함을 잃어 물의에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한 전일 본원에 내린 비답에 ‘체차(遞差)’라는 두 글자를 고쳐서 내린 뒤에 정원은 끝내 계소(啓召)하여 다시 전해주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두 신이 있으나마나한 존재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었다. 이하가 인하여 아뢰기를,
"훈련 부정 민기는 세 번이나 국경을 넘어가서 삼을 채취하였고 산삼 상인들과 시장을 열고 판매를 하여 실어 나르는 짐바리가 낭자하였다고 합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지난번에 본원에 내린 비답 가운데 ‘체차’라는 두 자를 넣어 내린 뒤에 다시 ‘처치(處置)’로 고쳐서 내렸는데도 정원은 대관을 계소(啓召)하여 말을 다시 전해주지 않고 흐릿하게 그대로 덮어두었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지평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통제사 유비연(柳斐然)의 범죄는 본인도 감히 숨기지 않았으니 박이명에 비교하여 무슨 경중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박이명은 여러 달째 갇히어 있고 이미 조율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유비연은 요행으로 면죄되어 서용되는 은총을 받기까지 하였으니, 형벌의 적용이 어긋나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박이명과 마찬가지로 논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겨울에 사명을 받들고 서쪽으로 갈 때 전라 감사 김징(金澄)에게 표피로 만든 갖옷 한 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김징은 신이 젊었을 때부터 사귄 친우로서 본래 신에게 겨울 갖옷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신도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은 추워서 갖옷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사양해야 할 것인지 받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지도 않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근래 상소에서 김징이 사사로이 표피를 사용한 것을 거론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김징이 만약 써서는 안 되는 물건을 사사로이 썼다면, 신도 받아서는 안될 선물을 사사로이 받은 것이어서 그 죄는 마찬가지이니, 형법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것이 관청 창고의 물건인 줄 알고도 받았다면 불가한 일이지만, 모르고 받았다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죄를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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