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을묘
함경도에 큰물이 졌다.
7월 2일 병진
헌납 이하(李夏) 등이 아뢰기를,
"사옹원 직장 임진화(任震和)가 감어관(監漁官)으로서 중관(中官)에게 글을 보내고 생선을 실어 보냈는데, 그 편지가 잘못 본원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비굴하여 꼭 천인이 존귀한 자에게 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환관에게 아첨함으로써 조정 신료를 욕되게 한 일은, 낮은 벼슬아치라 하여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연해에 사는 백성들은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고 있는데, 연변의 각읍에서 어호(漁戶)를 수탈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값을 대략 지급하다가 세월이 점점 오래되자 그대로 잘못된 규례로 굳어져 혹 사수(斜水)라고 핑계대기도 하고 일차(日次)를 정해주기도 하면서 갖다 바치기를 독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구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성과 고통이 막심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엄중하게 금지시키도록 하여, 이 뒤로 만약 이전의 습속을 그대로 따르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황해도에 큰물이 졌다. 산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무오
중일(中日) 시재(試才)에서 조총(鳥銃)을 세 발 명중시킨 겸사복 심진(沈眞)에게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7월 5일 기미
이규령(李奎齡)을 사간으로 삼았다.
7월 6일 경신
헌납 이하(李夏) 등이 아뢰기를,
"사부(士夫)의 처신에 있어서는 염치를 중하게 여기는데, 우윤 조한영(曺漢英)이 이옥(李沃)에게 탄핵을 당할 때에, 앞에서는 피혐을 하고 뒤에는 상소를 올려 극도로 추악하게 헐뜯었습니다. 비록 그 말이 너무 각박하여 공론이 비난을 하였습니다만, 조한영에게 있어서는 아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나와서 숙배를 하였으니, 진퇴하는 것이 형편이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라 감사 오시수가 도내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다고 아뢰자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7일 신유
사간 이규령(李圭齡) 등이 아뢰기를,
"선천(宣川)은 관서의 중요한 곳입니다. 부사 경일회(慶一會)는 사람됨이 경솔하고 행동거지가 망령스러워, 일찍이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있을 때에 한 마리의 매[鷹] 때문에 사람을 곤장을 쳐서 죽게 하였으며, 기타의 정령(政令)도 해괴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그가 변방 수령의 직임에 합당치 않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체차하였다.
7월 8일 임술
유철(兪㯙)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수흥(金壽興)이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관직이 1품이기 때문에 수어사(守禦使)와 그 체모를 같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육조(六曹)와는 관문(關文)을 통하게 하되, 병조는 본병(本兵)이니 첩정(牒呈)을 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고,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훈국(訓局)과 어영(御營)은 도제조가 있기 때문에 병조에 관문을 행합니다만, 기타 장병자(將兵者)는 비록 도원수(都元帥)라 하더라도 역시 첩정을 합니다. 총융사를 본병과 대등한 예를 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살피건대, 당시에 군문(軍門)이 많았는데, 그중에 어영과 훈국은 대신이 겸하여 거느렸고 수어사는 또한 도원수 사목으로 종사를 하였기 때문에 팔도의 감사와 병사들이 통제를 아울러 받았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난리를 당하여 군대를 출동시킴에 있어서 각도가 통제를 받아야 하는 곳이 여러 곳이니, 이와 같으면 어느 곳의 명령을 따른단 말인가. 총융사가 또 관질이 높다는 이유로 이러한 아문들을 모방하려고 하니, 더욱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수어사가 단지 남한 산성을 지키는 일을 하면서 이미 원수(元帥)의 사목을 사용하였으니, 총융청이 그보다 아래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또한 마땅한 일이다. 대개 국가가 고려 시대의 가병(家兵)의 화에 징계되어, 조종조 수백년 동안 비록 나라를 담당한 권력이 있는 자이더라도 병권을 넘겨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인조 반정을 하고 나서 훈신들이 모두 무신들이었고 또 마침 변방에 근심거리가 많아서 군사를 널리 모아 각각 문호(門戶)를 세우고 각각 군대를 담당하게 되어, 6, 7개의 군문이 도성에 생기게 되었다. 권력이 있는 재상들은 하나의 군문을 얻지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집에 앉아서 군대를 통솔하여 옛날의 가병(家兵) 제도를 모두 회복하였다. 역모를 꾀하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싹트게 되었으니,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金自點) 등의 사건에서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참으로 뒷날 나라를 망칠 칼자루인데, 심지어 재화를 증식하고 장정을 끌어모으고 둔전을 설치하여 세금을 축내어서, 국력을 날로 곤궁하게 하고 국세를 날로 위축되게 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떼 지어 일어나고 쌓인 폐단이 더욱 불어났다. 나라가 일을 할 수가 없고 백성들이 보호되지 못하는 것이 모두가 여러 군문 탓이었다.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병판 김좌명이 아뢰기를,
"일찍이 북도(北道)의 무사(武士)를 내삼청(內三廳)에 소속시킬 일에 대해서, 등대했을 때에 품정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청(三廳)에 합당한 자를 본도로 하여금 매 식년마다 뽑아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는데, 홍중보가 아뢰기를,
"삼청에는 모두 스스로 하는 천거가 있습니다. 만약 본도에서 뽑아올리는 사람들로 곧바로 제수한다면 뒤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정태화는 식년마다 뽑아올리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상이 그렇다고 하면서 이르기를,
"세 사람을 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1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대개 교외에 나가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일을 의논해 정하기 위해서였다. 좌상 허적이 홍제원으로부터 청나라 사신을 만나보고 와서 아뢰기를,
"신이, 상께서 편찮으시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누차 저들에게 말하니, 상사는 몽고 사람으로 사람됨이 아주 완악하여 끝내 허락을 하지 않고 말하기를 ‘편전(便殿)은 바로 국왕의 사실(私室)인데, 사실에서 칙서를 전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국왕이 교외에 나와서 맞이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통관(通官) 가운데 우리 나라를 위하여 주선하는 자가 있었는데, 상사가 더욱 화를 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동국(東國)은 예의의 나라라고 하였는데 이제와서 보니 전에 들은 것과 다르다. 오늘 이 요청이 놀라운 일일 뿐만 아니라 오는 길에 접대하는 것도 모두 공경하고 삼가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미 요청을 허락받지 못했으니, 형세상 장차 교외로 나가야 합니다. 중신(重臣) 한 사람을 먼저 보내어 성상의 뜻으로 효유를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병조 판서 김좌명을 보냈는데, 김좌명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는 일을 정지할 것으로 허락을 받아 돌아왔다.
7월 12일 병인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비밀히 치계하기를,
"5월 25일 표류한 한인(漢人) 심삼(沈三)·곽십(郭十)·채룡(蔡龍)·양인(楊仁) 등 머리를 깎은 자 22명과 머리를 깎지 않은 자 43명이, 중국 옷을 입거나 혹은 오랑캐 옷, 혹은 왜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정의현(旌義縣) 경내에 도착하여 배가 파손되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명나라 광동(廣東)·복건(福建)·절강(浙江) 등지의 사람들로, 청나라가 남경(南京)을 차지한 뒤에 광동 등 여러 성(省)이 청나라에 복속되었으므로 바다 밖 향산도(香山島)에 도망나와 장사하면서 살아왔다. 5월 1일 향산도에서 배를 출발시켜 일본의 장기(長崎)로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되어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향산도가 지금 어느 성(省)에 속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향오(香澳)는 광동의 바다 밖 큰 산인데 청려국(靑黎國)에 인접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관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남만(南蠻)의 땅으로 남만 사람 갑필단(甲必丹)이 주관하였다. 그 뒤 점점 약해졌으므로 명나라의 유민들이 많이 들어가 살았는데, 대번국(大樊國)에서 유격(游擊) 가귀(柯貴)를 보내어 주관하게 하였다. 대번국은 정금사(鄭錦舍)가 주관하는 곳이다. 융무(隆武) 때에 정성공(鄭成功)이라는 자에게 국성(國姓)을 하사하고 진국 대장군(鎭國大將軍)에 봉하여 청나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청인이 여러 번 패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가 죽자 그의 아들 금사(錦舍)가 계승하여 인덕 장군(仁德將軍)에 봉해졌는데, 대번국에 도망해 들어갔다. 그 무리가 수십만 명이 있었다. 그 땅은 복건성(福建省) 바다 밖 천여 리에 있다. 영력군(永曆君)은 지금 귀주(貴州)에 있는데 귀주는 옛 촉(蜀) 땅이다.’ 하고, 또 ‘우리들은 여러 나라로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으므로 머리를 깎기도 하고 혹은 깎지 않기도 한다.’ 하였습니다. 이어 장기로 가기를 원하였으므로, 신이 배를 차비시켜 돌려보냈습니다."
하였다.
평안도에 큰물이 졌다.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렸다.
함경도 삼수(三水)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 알만하였고, 황충(蝗虫)이 온 들판에 퍼져 각종 곡식을 먹었다.
7월 13일 정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핵환(核患)으로 침을 맞았다.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동지사(冬至使) 민정중(閔鼎重)이 귀환하였다. 이때 동지사를 따라갔던 양정찬(梁廷燦)이 서책(書冊)에 대한 금법을 범하였는데, 청나라가 일이 사면령 이전에 있었다는 이유로 불문에 부쳤다. 비국이 아뢰어, 사은사를 보내고 그 문서(文書)와 방물(方物)을 사신의 행차에 부쳐 보내기를 청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우상 홍중보가 현관례(見官禮)에 참여치 않은 일 및 전후로 홍중보를 사신으로 차송하지 않은 일’로 도감(都監)에게 물었는데, 도감이 역관(譯官)들로 하여금 말을 꾸며서 대답하게 하였다. 홍중보는 그의 아비 홍명구(洪命耉)가 병자년의 일에 죽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일에 대해서는 모두 피하고 참여하지 않았는데, 통관들이 모두 우리 나라의 일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었다.
7월 15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정기(李廷夔)를 공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우윤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김우형(金宇亨)을 호조 참의로,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7월 16일 경오
전에 장령 이후(李煦)가, 형조 정랑 양현망(楊顯望)을 파직시키기를 논계하면서, ‘문벌이 한미하고 본조의 서리와 한 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그의 사사로운 청탁을 들어주었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다들 억울한 일이라고 하자, 이에 이후가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지평 김덕원(金德遠)도 인피하며 아뢰기를,
"양현망이 미천하다고 한 말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라고 하며, 서리와 함께 산다는 것도 실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이 일을 논함에 사실을 잃은 것은 동료와 다름없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체직하였다.
경상도 동래(東萊)에 지진이 있었다.
전 감사 김징(金澄)을 배천(白川) 금곡역(金谷驛)에 도배(徒配)하였다. 김징이 수연(壽宴)을 열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탐장죄로 논의되기에까지 이른 것은 원수를 갚으려는 자들의 모함에서 나온 것으로서 공론이 모두들 억울한 일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성상도 효리(孝理)에 손상이 있을까를 염려하여, 이에 공술한 말이 부실하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아 이렇게 편배(編配)한 것이다.
판윤 서필원(徐必遠)이 누차 진소하여 사직하며, ‘사람들은 모두들 신을 총애받는 자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나이가 60에 들어섰고 벼슬이 경(卿)의 반열에 이르렀는데, 어찌 총애받는 자라는 이름을 무릅쓰고 다시 맑은 조정을 욕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7일 신미
헌납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흥운(金興運)은 일찍이 정주(定州)의 수령이 되어 자신을 살찌우기만 일삼았습니다. 근읍의 창기(娼妓)를 첩으로 삼고는 그 족속들을 관아에 출입시켜 뇌물을 공공연히 행하게 하였고, 큰 장사꾼과 체결하여 이익을 챙겼으며 송사를 불법으로 결단해 주고 이익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뒤 경주 영장(慶州營將)이 되어서는, 남의 청탁을 받고 빚을 받아 주면서 명분이 없는 것을 꺼린 나머지 몰래 도적의 명단에 기록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내쫓겼습니다. 이같이 탐욕스런 사람에게 다시 중진(重鎭)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김명열(金命說)은, 집이 남원 가까이 있고 본디 인망이 가벼운데, 일찍이 이 고을에 제수되었다가 논핵을 당하여 체직되었습니다.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김흥운만 체직시켰다. 그뒤에 김명열도 체차하였다.
7월 18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숙(李䎘)을 승지로, 김휘(金徽)를 병조 참판으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지평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사간 이규령(李奎齡) 등이 아뢰기를,
"둔전을 설치하여 백성을 모집하는 것은 근래 외방의 고질적인 폐단인데 여러 도 가운데 해서(海西)가 더욱 심합니다. 토산(兎山)과 신계(新溪) 등 두 고을로 말씀드리자면, 모두 지극히 쇠잔한 고을이지만 토산은 아홉 군데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신계도 그 숫자가 또한 많습니다. 부역을 회피하는 백성들이 거의 다 관가에 투속하여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고을과 도내의 각 고을에 설치되어 있는 둔전의 다소를 모두 조사한 다음 보고하게 해서,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19일 계유
경상도에 큰 기근이 들어 함양군(咸陽郡)에서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는데,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권대운이 ‘청나라 사신이 요구하는 것이 전에 비하여 배나 더 많은 일’로 상 앞에서 품정하였다.
7월 21일 을해
호조 판서 권대운이 또 면대를 청하였다. 저녁에 또 면대를 청하였다. 모두가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는 일 때문이었다.
7월 22일 병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편전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사간 이규령(李奎齡) 등이 아뢰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는 수령에게 있고 한 도를 보살피는 책임은 감사에게 있는데, 이렇게 전례없는 가뭄과 물난리를 당하여 구제할 방책을 생각지 않아서 참혹하게도 굶어죽는 일이 있게 되었다면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겠습니까. 소문에 들으니, 호남의 남원(南原)과 영남의 함양(咸陽)에서 백성이 굶어죽었다는 보고가 잇달아 올라왔다고 합니다. 일이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 두 고을의 수령은 파직하고 두 도의 감사는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감사와 수령을 일체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7월 23일 정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목성과 금성이 궤도를 같이 하여 아주 가까이 있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진료를 마치고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올해의 흉황은 팔도가 다 마찬가지인데, 각읍에 절반씩 창고에 남겨두었던 곡식마저 모두 백성들에게 꾸어주어 남은 것이 없으니, 앞으로 진휼할 자본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온갖 일들을 정지시키고 번잡한 비용을 줄여서 오로지 구황 정책에 뜻을 두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진휼청 당상 가운데 민정중이 외방에 있으니 재촉하여 들어오게 하고 조복양을 또 더 차임하여 진휼하는 정책을 함께 주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전일에 백관들에게 녹봉을 더해줄 때에 밖의 의논이 이미 계속 주기가 어려울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올해는 재난이 이와 같으니 줄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 신료들에게 자문하여 미리 강구해 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10월부터는 도로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흰옷[白衣] 입기를 좋아하니 금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가난한 선비들이 이러한 흉황을 당하여 갑자기 바꾸어 입기는 어렵습니다. 시한을 늦추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정태화가 또 ‘사대부들이 여염집을 빼앗는 폐단’에 대해서 진달하고 더욱 금단할 것을 청하였다. 사간 이규령(李奎齡)이 금법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24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만영(李晩榮)을 좌윤으로, 이익상(李翊相)을 겸보덕으로, 최관(崔寬)을 승지로 삼았다.
부제학 김만기(金萬基)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기근과 여역이 없는 해가 없다가 금년의 가뭄과 물난리의 재앙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 도를 잃은 일이 무엇이 있기에 하늘이 재해를 내리는 것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입니까. 지금은 마땅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안일하게 지낼 겨를이 없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는 방도를 강구해야 하는데도, 묘당은 느긋하게 평소와 다름이 없고 전하께서도 여러 재신들을 자주 만나 분명하게 전교를 내리시어 그들의 투박하고 나태한 습속을 경계하지 않으십니다. 인견하는 일이 매우 드물고 임금 앞에서 묻고 아뢰는 것이 병정(兵丁)을 보충하는 일이거나 기계(器械)를 수선하는 일에 불과하며, 군덕(君德)의 궐실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임금 곁에서 경계시키는 자가 없으니, 본말 경중의 차서가 이와 같이 어그러져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에 호남 관찰사가 장계를 올린 일은 참으로 급박한 근심에서 나온 것인데, 묘당에서는 실상에 지나쳤다고 하며 말꼬투리를 트집잡아 추고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해마다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먹고 살 것이 없어 살인과 도둑질이 잇달아 발생하고 서울에서조차 금지할 수가 없으니, 장래에 장리(長吏)를 죽이고 관고(官庫)를 터는 변고가 꼭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도신(道臣)의 장계를 허물하여,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하니, 그렇다면 옛사람이 굶주리면 도적이 될 근심을 논하면서 적미(赤眉)와 황건(黃巾)의 일을 인용한 것도 역시 죄를 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부세를 줄이고 기근을 진구하는 정치는 더욱 우선으로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대신과 회계를 맡은 신하에게 오로지 책임을 맡겨, 각종 세금 및 경상 비용의 액수에 대해서 면제하거나 줄일 만한 것을 헤아려 계산하게 하고 또 각도와 각 아문의 저축에 대해서 옮겨서 사용하거나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만한 것을 요량하게 하여, 전체의 계산을 맞추어 두었다가 군읍에서 점검하여 아뢰기를 기다려 그 분수(分數)에 따라 들어다 쓰게 한다면, 일이 미리 확립되어서 백성들이 실제적인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들은 강독(講讀)을 명분으로 삼고 있으나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쓸데 없는 관원이 됨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어찌 안타까운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해를 편찮으시어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으시니 경연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것은 형세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만, 옥체가 조금 편안한 때에 번잡한 형식은 생략하고 편전에 나아가 강관(講官)으로 하여금 경사(經史)를 강독하고 훈의(訓義)를 논란하게 하시고 궤안에 기대어 들으신다면, 조섭하시는 데에 방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막힌 기운을 트이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자질이 훌륭하시어 아랫사람들을 대하실 때에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는데, 유독 대각의 신하가 쟁론하는 데에 대해서는 누차 억눌러 기를 꺾으며, ‘무상하다.’느니 ‘해괴하다.’느니 하시며, 노여운 기운을 띠고 싫어 박대하는 뜻을 보이시니, 포용하여 받아들이는 도리에 크게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근래에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은, 한편에서는 논집을 하는데 한편에서는 공사를 계속하여, 대간의 논계가 바야흐로 한창인데 갑자기 눈앞에 우뚝하게 집이 완성되었으니, 이것은 조종조에 없었던 일입니다.
신들이 이미 경연에서 조정 계책이 본말을 잃은 것에 대해서 진달하였습니다만, 병정(兵政)이 타당함을 잃은 것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설치한 것은 경포수(京砲手) 가운데 군량만 축내는 용렬한 자들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본래의 의도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일을 제대로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하여, 일을 맡은 신하가 단지 기꺼이 신군(新軍)에 나가도록 하고자 하여 별도로 명목을 만들어 그 신역을 줄여주고 농사철에는 번(番)을 면제시켜 주었습니다. 이것은 어영(御營)의 군사들에게는 없는 혜택입니다. 신들은 구군(舊軍)들이 그 균등치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별대를 단속하여 만든 뒤에도 경포수 가운데 늙거나 죽어서 빈자리가 나면 이전대로 뽑아서 보충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별대는 아무 이유없이 더 설치한 군대가 되니, 당초에 폐단을 바루고자 했던 의도와는 어그러지게 됩니다.
서북(西北)의 백성들을 쇄환하는 것은 조종조에 이미 이루어진 법인데, 지금 신군을 모집하기 위해 서로(西路)의 유민(流民)들에게 쇄환을 면제시킬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강변의 일곱 읍이 북로(北路)와 무엇이 다르길래 가벼이 옛법을 바꾼단 말입니까. 이로부터 변방의 백성으로서 내지(內地)로 유입해 들어오는 자들이 기탄하는 바가 더욱 없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 가뭄에 백성들이 ‘별대를 혁파해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불편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느 군문이든지 간에 모두가 균등하게 한 나라의 군대이니, 그 제도를 달리해서는 안 됩니다. 어영군(御營軍)도 3보(保)이고 정초군(精抄軍)도 3보인데, 그들이 내는 쌀은 어영은 12두(斗)이고 정초는 15두여서, 균등치 못함에 대해서 원망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본청에서 얻는 것이 얼마이기에 민심을 이토록 잃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한결같이 어영군의 예대로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녹강(綠江)의 시장(柴場)은 각 아문과 여러 궁가에서 절수하는 것이 달마다 증가하고 해마다 불어납니다. 그 가운데 군기시(軍器寺)는 사부(士夫)의 분산(墳山)까지도 모두 타량(打量)하여 숯을 징수하여, 시장의 폐해가 이미 죽은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진계한 말이, 뜻이 매우 절실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조용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김만기 등이 진언한 것은 모두가 당시의 폐단 가운데 큰 것들이었고 별대의 일을 논계한 것은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대장(大將)이 됨에 미쳐서는 도리어 붙들어 세우고 두루 비호하여, 비록 쓸데없는 군대를 줄이고 별대를 혁파하자고 청하기를 차자의 뜻과 같이 하는 자가 있어도 여러 방면으로 거절하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니, 어찌 그의 소견이 앞뒤로 다른가. 옛말에 이른바 ‘시대를 경영하는 것이 시대를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이 어찌 맞는 말이 아닌가.
7월 25일 기묘
밤에 화성이 남두성(南斗星) 네 번째 별을 범하였다.
평안도 용강(龍岡) 등 바닷가 여섯 고을에 큰 바람이 불어 배가 뒤집혀, 타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빠져죽었다.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26일 경진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여염집 차입을 금지하는 법을 범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27일 신사
이익상(李翊相)을 사간으로, 조근(趙根)을 정언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삼남(三南)의 수군(水軍)의 조련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7월 28일 임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옥당이 올린 차자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 품의하였는데, ‘별대의 군사들에게 농사철에 번을 면제시키는 일’에 이르자,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이 일은 애초에 대장 유혁연의 뜻에서 나온 것인데, 별대를 단속한 뒤에는 마땅히 원군(元軍) 1부(部)를 없애야 하는데, 만약 농사철에 번을 줄여준다면 장차 어떻게 그 숫자를 채우겠습니까."
하였다. ‘유민으로 부대를 만드는 일’에 이르자, 유혁연이 아뢰기를,
"이 일은 대개 유민들을 안집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가 옳습니다. 강변 일곱 고을의 백성들은, 군대에 소속시켜 쇄환하는 길을 끊는 것은 합당치 않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군기시 시장 안에 산소가 있는 곳에 대해서 숯을 징수하는 일’에 이르자, 허적이 아뢰기를,
"제조 이완(李浣)이 계청하여 실시한 것입니다. 전부터 산 아래 백성들이 사는 곳에는 호탄(戶炭)을 징수하고 화전(火田)에는 화전탄(火田炭)을 징수해 왔기 때문에 장사를 지낸 곳에도 숯을 징수했던 것인데 사람들이 ‘썩은 해골에게도 숯을 징수한다.’고 하니, 그 말이 매우 안 좋습니다. 이 일은 정지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병판 김좌명이 진휼청의 별단을 가지고 품의하기를,
"어영미(御營米) 5천 석은 취해 사용하되, 이것은 군량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발매하여 이식을 취하고 다시 갚아야 합니다. 각 아문 및 외방의 은(銀)과 포(布)를 갖다 쓸 것을 총계하면, 사복시 은 5천 냥, 사옹원 은 5백 냥, 양향청(糧餉廳) 은 1천 냥, 충익부(忠翊府) 포(布) 20동, 평안 병영 포 1백 50동, 평안 감영 포 3백 동, 통영 포 3백 동, 경상 감영 포 1백 동이고, 경상 좌·우병영 및 좌수영은 유치해 놓은 저축이 얼마인지 물어서 요량하여 사용하고, 충청 감영 포 20동, 전라 감영 포 40동, 병영 포 10동, 함경 감영 은 6백 냥, 황해 감영 포 20동이며, 어영미 5천 석, 경상 감영의 쌀 8천 5백 석, 전라 감영의 쌀 7천 3백 석, 충청 감영의 쌀 2천 2백 석, 통영의 쌀 7천 석, 벼 1만 석인데, 도합 은이 7천 1백 냥이고 포가 9백 60동이고 쌀이 3만 석이고 벼가 1만 석입니다. 각사의 공물가미(貢物價米)로서 줄여야 할 것은, 전생서 1천 7백 6석, 풍저창 4백 33석, 장흥고 2백 석, 교서관 21석, 관상감 1백 50석, 예빈시 6백 73석, 제용감 2천 9백 석, 공조 3백 86석, 선공감 9백 64석, 조지서 3백 40석, 사도시 2백 46석, 상의원 1백 93석, 의영고 1백 12석, 내섬시 3백 43석, 사재감 6백 88석, 사섬시 1백 70석, 와서 5백 6석, 귀후서 1백 7석, 장원서 3백 86석, 예조 38석, 전의감 7백 7석, 혜민서 1천 3백 98석, 군기시 4천 92석, 내의원 7백 20석, 훈련 도감 22석, 의금부 10석이며, 양호(兩湖)의 저치미(儲置米) 3천 1백 88석 및 임시로 줄일 녹봉까지 합쳐서 도합 쌀이 3만 6천 7백 60석입니다. 그리고 군기시의 활과 갑옷을 헌납하는 것을 정지하고, 어용(御用) 및 대궐에 진배하는 잡물의 값으로 내는 쌀과 콩 4천 6백 30석을 줄일 것이며, 아울러 각도의 수군과 육군의 조련을 정지해야 합니다."
하였다. 신축년과 정미년의 전례를 준용한 것이다. 간원이 해서(海西) 둔전의 폐단에 대해서 연계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둔전을 설치한 폐단은 해서 지방에만 그럴 뿐이 아니다. 다른 도에도 필시 이런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신이 이어서 훈국, 수어청, 총융청의 둔전 몇 곳을 혁파하여 도로 본읍에다 소속시키기를 청하였는데, 태복(太僕)의 둔전은 대신이 직접 관할하였고 여러 궁가가 소유한 둔전에 대해서는 상이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혁파한 곳은 몇 곳에 불과하여 형식만 갖춘 것일 뿐이었다.
7월 29일 계미
황해도 서흥(瑞興) 등 여덟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강화에서는 고깃배가 전복되어 어부 14명이 죽었는데,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 30일 갑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화성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평안도 창성(昌成)에 우박이 크게 내렸고,충청도 대흥(大興)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고, 원양도(原襄道) 영서(嶺西)의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렸으며 원주(原州)에는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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