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3권, 현종 11년 1670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6. 14:10
반응형

8월 1일 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경기 장단(長湍)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제주에 윤2월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5월 그믐께에 와서야 비가 내렸는데, 퍼붓는 듯한 빗발이 여러 달 개이지 않아 높고 낮은 전답이 침수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바람의 재난이 참혹하였다. 목사가 계문하였다.

 

8월 2일 병술

영중추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재난을 만나 수성(修省)할 도리를 진달하고, 각 아문과 병영, 수영의 토목 공사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또 부마들은 우선 살고 있는 집에 거처하다가 풍년 들기를 기다려 옮겨 짓도록 하며, 강도(江都)의 곡물을 방출하여 기민을 구제하며, 내탕고의 저장 물품과 감영과 병영의 비축을 꺼내어 구제할 밑천에 보충하며, 쓸데없는 군병을 돌려보내 백성의 원망을 받지 말며, 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정치를 살피고 백성의 병폐를 찾아서 고치도록 하며, 또 감사로 하여금 종자(種子)를 힘써 구하여 기민을 구제할 터전이 되도록 하라고 청하였다. 상이 부드럽게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였다. 그후 여쭈어 결정하는 때에 이르러 좌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경석의 차자 내용은 별로 여쭙고 결정할 일이 없습니다. 내수사의 비축은 상께서 이미 진휼청에 주었고, 그 나머지의 여러 일도 이미 시행한 것이 많습니다. 어사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파견하지 않아 수령들이 대부분 방자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진휼하는 일이 완전히 끝나거든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3일 정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호판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각사 노비의 신구(新舊) 공포(貢布)에 대하여 바친 것과 바치지 않은 것의 숫자를 조사하여 3동을 바치지 않은 자는 1등(等)을 월록(越祿)하고 3등 월록에 이르러 그칩니다. 그중에 작은 읍으로서 노비의 원수(元數)가 3동에 차지 않는 곳은, 수령이 비록 바치기를 독촉하지 않더라도 해유(解由)에 구애되지 않고 또한 월등(越等)의 벌을 면하게 되니, 법의 본의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큰 읍이거나 작은 읍이거나를 막론하고 원수(元數)를 6등분으로 나누어 매 1등분을 바치지 않을 때마다 1등을 월록하고 3등 월록에 이르러 그치되, 3등분을 넘으면 해유를 내주지 말라. 내년부터 거행하라."
하였다. 대사간 심재가 아뢰기를,
"이토록 기근이 든 해를 만나 어찌 경솔히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궁가에 지금 또 일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재변을 만나 두려워하는 뜻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간이 몰라서 하는 말인가? 올해가 길하기 때문에 일을 시작한 것일 따름이다."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신이 참으로 성상의 뜻을 압니다만, 어제 궁기(宮基)를 타량할 때에 공기(公基)로서 들어간 것 50여 호와 사기(私基) 16호를 일시에 철거하였습니다. 만약 단지 일을 시작만 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굳이 먼저 철거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합니까."
하고, 병판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러한 흉년에 공주를 위하여 집을 지으면서 많은 민가를 철거하였으니, 뒷날 역사책에 쓸 때에 성상을 어떠한 임금이라고 기록하겠습니까."
하고, 이판 조복양도 아뢰기를,
"어찌 공주의 집 짓는 일 때문에 70여 호를 철거할 수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주의 집은 선대에서 이미 지어주었으나 그곳에서 편히 거처하게 해주지를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새로 지으려는 것인데, 또 70여 호를 철거하는 것으로 탈을 잡으니,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두 차례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본디 알고 있었다."
하였다. 권대운이 또, ‘일체의 안으로 들이는 물건들은 반드시 관문(關文)을 정원에 경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그 일을 말하였고, 그 뒤에 대관도 힘껏 쟁론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형조에 명하여, 살인을 한 도적들을 엄하게 다스려서 형추 10차례 이내에 반드시 자백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대개 본조의 형추가 가장 가벼워서, 포도청에서 자백을 했던 도적들이 형조에 와서는 말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8월 5일 기축

정언 조근(趙根)이, ‘딸이 처녀 간택(處女揀擇)에 들었으나 병으로 입참하지 않았는데, 가장을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8월 6일 경인

도망나온 말 한 마리가 금호문(金虎門)으로부터 진선문(進善門), 숙장문(肅章門), 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내반원(內班院) 소문(小門)으로 뛰어들었다. 간원이, 문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문장을 잡아다 추고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고, 검칙을 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조의 입직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시재(試才) 때에 편전(片箭) 세 발을 명중시킨 어영군 홍귀성(洪貴成)을 전시에 직부하였다.

 

8월 7일 신묘

장선징을 도승지로, 윤계(尹堦)를 지평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이익형(李益亨)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8월 9일 계사

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팔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보고가 잇달아 들어오니, 진구하는 정치를 마땅히 불에 타는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듯이 해야 합니다. 각도 감사로 하여금 각읍에 분부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뽑아 기록하여 우선적으로 진구하게 하소서. 그리고 올해는 서리가 매우 일찍 내려 가을 일이 이미 끝났으니, 경차관과 도사(都事)를 때맞춰 내려 보내어 속히 연분(年分)을 완결짓고 서둘러 진구하는 정치를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 남·북도에 여러 달 큰 비가 내려 곳곳에 전답이 모래로 뒤덮였고 남은 곡식은 또 충재(虫災)를 당하였다. 갑산(甲山), 삼수(三水) 등의 고을에 7월 16일 서리가 내렸는데, 눈이 온 것과 같았다. 함흥부(咸興府)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달걀만하기도 하고 새알만하기도 하였으며 각종 곡식이 쓰러지고 부러졌다. 또 누런 기운과 흰 기운이 일시에 뒤덮였고 그 기운이 덮였던 곳에는 싹이 말라 죽었는데 흰 기운이 누런 기운보다 손상이 심하였다.충청도 태안(泰安) 등 연해의 네 고을에 모진 바람으로 배가 침몰하여 죽은 자가 90여 명이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는데,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헌납 이하(李夏)가, 집의 최유지(崔攸之)가 고향에 있을 때 삼가지 못한 실상과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언책(言責)의 직임에 합당치 못함을 논핵하려고 하였는데, 대사간 심재(沈梓)가 정창도의 일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 이하가 이것을 이유로 인피하였다. 심재도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뢰어 심재는 체차하고 이하는 출사시키기를 청하였다.

 

8월 10일 갑오

사간 이익상과 헌납 이하가 아뢰기를,
"집의 최유지(崔攸之)는 유식한 사부로서 고향에 있을 때 삼가지 않았다는 비방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에 복심(覆審)할 때에 고을 하리가 자신의 누락시킨 전결(田結)을 많이 적발한 것에 화를 내어, 본직에 제수되자 그 관사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그때의 하리를 자기 집에 잡아다 놓고 형신을 마구 가하였습니다. 임금의 소명(召命)을 빙자하여 자기 사욕을 이루려고 도모하였으니,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매우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법을 업신여기고 방종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유지를 우선 체차하고 본도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하게 하여 무겁게 죄를 주소서.
정언 정창도는 사람됨이 단정치 못하고 명망이 평소 가벼우며, 구차하고 용렬한 행동거지에 대해서 해괴하게 여기고 비웃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찍이 삼척 부사로 있을 때에 마침 경내의 첨사(僉使)가 교체되어, 장수의 직임을 겸임하였는데, 군포(軍布)를 독촉해 받아 본 고을에 실어 들이면서 공용에 보충한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자기 사용으로 돌렸습니다. 사대부에게 욕을 끼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정창도를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그 뒤 최유지를 본도의 조사 보고로 인해 의금부에 가두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는데, 좌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유지의 범죄는 호강(豪强)에 관계되는데, 호강을 다스리는 율은 바로 온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시종에 있는 사람을 이 율로 처단할 수는 없겠으나 고신을 빼앗은 것으로는 너무 가볍습니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도배하도록 명하였다.

 

전라도 용담(龍潭)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큰 비가 내렸으며 또 서리가 일찍 내렸다. 영하(嶺下)의 여러 고을에 찬 비가 물을 퍼붓듯 하였고 큰 바람이 불어 지붕을 날렸으며, 벼가 모두 쓰러졌다가 햇볕을 보자 곧 말라 버렸다.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죽은 시체가 길에 널렸는데, 무리를 지어 겁탈하기까지 하였다. 혹 전답의 주인을 묶어 놓고 그 화곡을 베어갔으며, 들판에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먹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8월 11일 을미

김우형(金宇亨)을 승지로, 남이성(南二星)을 대사간으로, 정치화(鄭致和)를 내의원 도제조로, 이규령(李奎齡)을 집의로, 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도에 큰물이 졌는데 낙동강 일대가 더욱 심하게 침수되었다.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아래 백 년된 큰 나무들이 거의 다 떠내려갔으며, 언양(彦陽) 등 여섯 고을은 수백여 집이 침수되어 무너졌는데 빠져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으며, 남해(南海), 양산(梁山) 등지에는 언덕이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7명이었다. 상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북도(北道) 행영(行營) 추방(秋防)의 역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당시에 함경남도 홍원(洪原) 등 여섯 고을에 큰물이 져서 빠져죽은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고, 북청부(北靑府)에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어나고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바리만 하고 작은 것도 주먹만하였다.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논밭이 일시에 폐허가 되었다. 맞아서 다친 사람들이 많았고 열두 살짜리 아이가 우박을 맞아 죽었으며, 새와 짐승과 하천의 물고기들까지 맞아죽은 것이 많았다. 7월 30일에 갑산(甲山), 단천(端川) 등지에 눈이 내렸다. 남북의 각읍이 모두 가뭄, 물난리, 바람, 우박의 재난을 당하여 각종 곡식은 전혀 거둔 것이 없었고 도토리까지도 익지를 않았다. 농민들이 모여서 통곡을 하는 소리가 들판을 진동하였다. 부방(赴防)나갈 군인들이 모두 감영에 와서 호소하였는데, 감사가 이를 계문하고 이어 부방을 정지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8월 14일 무술

여러 도에 금년 가을 합동 조련과 영장(營將)이 순찰하는 등의 일을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경상 감사 민시중의 계청으로 인하여, 각도에도 아울러 정지시키게 하였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강변의 각 고을이 더욱 심하게 재난을 당하였는데 다른 도의 죄인들을 또 정배시킨다면 주객이 함께 곤궁할 것입니다. 내년 가을까지는 강변 고을에 정배시키지 말게 하시고 또 아직 배소(配所)에 이르지 아니한 자들도 본도에서 다른 고을로 고쳐 보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치계의 내용대로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조근(趙根)을 문학으로, 박세견(朴世堅)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8월 15일 기해

전강(殿講)한 유생 가운데 장원인 유학(幼學) 유정교(柳廷喬)는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고, 그 다음은 각각 1분(分)씩을 주었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여 연분(年分)의 현장 조사를 그만두어 민폐를 없애기를, 한결같이 정미년 경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대로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경기 각 고을에 된 서리가 연일 내려 익지 않은 벼가 모두 말라 죽었다. 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거의 남은 종자가 없었다. 가을갈이를 사람이 소 대신 하였는데, 9명의 힘으로 겨우 소 한 마리의 일을 해낼 수 있었으므로 농사일을 포기하는 백성이 많았다.

 

8월 16일 경자

이지무(李枝茂)를 승지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이간(李旰)을 장단 부사로 삼았다. 장단은 경기에 있었는데, 토포사와 방어사를 겸하였기 때문에 그 선발을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문관과 무관을 교대로 차임하였다.

 

약방 도제조 허적에게 안구마를 내리고, 자질(子姪) 중의 한 사람에게 직책을 제수하게 하고, 아다개 하나를 내렸다. 제조 홍중보에게는 숙마 한 필과 아다개 하나를 내리고, 제조 김좌명과 부제조 권대운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부제조 강백년과 장선징에게는 각각 숙마 한 필과 표범 가죽 한 장을 내렸다. 의관 이동형(李東馨)·윤후익(尹後益)·김유현(金有鉉)·이후담(李後聃)·백광현(白光玹)에게는 모두 가자하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성상의 병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삼성 죄인(三省罪人) 도치(都致)가 자복을 하고 사형되었다. 고공(雇工)의 신분으로 주인집 딸을 간음하여 강상죄에 관계되었다. 금부가, 고공은 자신의 노비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당사자만 주벌하고 수령은 파직하지 말고 그가 살던 고을도 혁파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집의 이규령 등이, ‘함안 군수(咸安郡守) 김진원(金振元)이 서울 사람에게 방납을 허락하고 창고의 곡식을 함부로 내준 잘못’을 논핵하여 잡아다 추고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고, 또 ‘감찰 김성일(金誠一)이 상중(喪中)에 창기(娼妓)를 끼고 놀아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음’을 논핵하여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7일 신축

상이, 재이가 매우 극성스럽다는 이유로 우찬성 송시열(宋時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 찬선 이유태(李惟泰)를 불렀는데, 모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백성을 모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길러 노비로 삼게 하였다. 이때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였고 어린 아이들을 길가에 버리는 일이 잇따랐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신축년의 전례대로 백성을 모집하여 거두어 기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내년 보리 추수 때까지 거두어 기를 것을 허락하고, 또한 자세히 허실을 조사하여 간사한 짓을 막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을 아울러 각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진선 윤원거(尹元擧)가 진소하여 사직하고, 또 ‘세자를 보도하는 일은 마땅히 사람을 잘 선택하여 오래도록 임무를 맡겨야 함’을 논하며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작위의 고하로써 하지 마시고 오직 덕행의 우열만을 보시어, 학문이 바르고 덕이 높은 자를 가려서 사부(師傅)를 삼으시고 경학에 밝고 행실이 훌륭한 자를 가려서 요속(僚屬)을 삼으소서. 혹 부름에 나오지 않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공경과 예우를 극진하게 하여 불러 오소서. 그리고 세자로 하여금 한(漢)나라 혜제(惠帝)가 사호(四皓)를 섬겼듯이 하게 하소서. 사부와 시강하는 관원은 큰 탈이 있지 않으면 바꾸지 마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지내며 조용히 가르치게 하시되, 그 직분을 분명히 하여 공효를 책임지우시면, 필시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또 듣건대, 융성했던 삼대(三代) 때에는 15세가 되면 천자(天子)의 원자(元子)·중자(衆子)에서 공경(公卿)·대부(大夫)·원사(元士)의 맏아들과 일반 백성 가운데 준수(俊秀)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학에 입학시켜 가르쳤다고 합니다. 천자의 아들을 반드시 일반 백성 가운데 준수한 자와 함께 지내며 함께 공부를 하게 한 것은, 서로 선행을 본받게 하거나 외톨이가 되어 견문이 좁아지게 되는 근심을 면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재(人才)를 잘 사귀고 장점과 단점을 헤아려서 뒷날 임용할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대의 걱정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답하고, 올라와서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천자의 원자와 평민의 준수한 자가 함께 국학에 입학하는 것은 그 뜻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윤원거가 이른바, 인재를 익히 알아서 뒷날 임용할 바탕을 마련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은,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말이다.

 

팔도에 소의 역질이 모두 크게 번졌는데, 황해도가 더욱 심하였다.

 

장령 정화제(鄭華齊)가, 장관이 처치할 때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이규령(李奎齡), 지평 오두헌(吳斗憲)·윤계(尹堦)가, 간통(簡通)에 글자를 빠뜨려 동료를 불안케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8월 18일 임인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에 큰 바람이 불어 오래된 큰 나무가 모두 뽑혔다. 칠원현(柒原縣)에 큰 비가 내려 집이 침수되어 무너졌으며 산기슭이 무너져 사람이 많이 깔려 죽었다.전라도 곡성현(谷城縣)에 폭우가 내려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 상이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집의로, 유헌(兪櫶)과 김세행(金世行)을 지평으로 삼았다.

 

8월 19일 계묘

사간 이익상(李翊相) 등이 아뢰기를,
"올해 재변이 거듭되고 농사가 흉년이 든 것은 근고에 없던 바이고, 백성들이 죽었다는 보고가 잇달아 올라옵니다. 이러한 때에는 군신 상하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한결같이 백성을 돌보고 불쌍한 사람을 보살펴 주기에 힘써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긴요치 않은 일에 급급하여 풍년이 든 넉넉한 시절과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공주의 집을 고쳐 짓는 일은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나, 두 공주의 집짓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또 두 공주의 집을 지으라는 명을 내리시어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미포(米布)를 많이 꺼내어 쓰며 기한을 정해 놓고 독책을 하시니, 비용을 줄여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숙휘 공주(淑徽公主)와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집을 짓는 일을 중지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숙경 공주의 집은 지금 바야흐로 여염 가운데에 터를 잡았는데, 철거한 인가의 숫자가 30여 호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뛰며 울부짖으니, 기상이 참담합니다. 또 듣건대, 고 왕자 완원군(完原君) 이수(李燧)와 선정신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을 봉사(奉祀)하는 집도 그 안에 있다고 하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숙경 공주의 집터를 강제로 사들이는 폐단을 금단하소서. 그리고 경외의 연례 세초(歲抄) 및 각 아문의 제색 군병(諸色軍兵)을 초정(抄定)하는 등의 일을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모두 정지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세초 군병에 대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경상도 울산부(蔚山府)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자가 10여 명이었다. 상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울산의 사비(私婢) 향춘(香春)이 평소에 시어머니 봉양에 효성을 다하였는데, 홍수가 났을 때에 온 마을이 침수되자 향춘이 그의 시어머니 및 두 아들과 함께 지붕에 올라가 물을 피하였다. 이윽고 집이 무너져 동시에 물에 빠졌는데, 자기 두 아들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구출하여, 효성이 가상하였다. 감사가 계문하니, 상이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8월 20일 갑진

경상 감사 민시중이, 호조에서 관할하는 본도의 세염(稅鹽)과 화전미(火田米)를 얻어 구제할 밑천에 보충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중풍과 유사한 증세가 있어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의원을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였다.

 

8월 21일 을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금년의 흉황은 신축년에 비하여 배나 심합니다. 신축년에는 양남(兩南)이 큰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전남좌도는 완전히 흉년이 들지는 않았고 양서(兩西)는 자못 농사가 되었기 때문에 관서(關西)의 곡식 10여 만 석을 운송하여 다른 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팔도가 모두 흉년이 들어 다시 옮길 곡식이 없습니다. 신들은 재주와 지혜가 짧아 구제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상께서야 또한 어찌 백성들이 다 굶주려 죽게 되었음을 아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인후하시니 결코 나라를 망칠 임금은 아니시며, 신들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또한 어찌 어쩔 수가 없다고 내버려 두고서 망해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한두 가지 앙품하여 변통할 일이 있는데,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을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먼저 진달하겠습니다. 근래에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이 매우 제도를 벗어나는데, 전일에 지은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겠으나, 숙경 공주의 집은 이러한 시기에 새로 짓는 것이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병조의 역포(役布)가 이미 30여 동에 이르렀고 호조의 쌀도 그만큼 들여갔습니다. 이것으로 진구를 한다면 백성들이 받는 혜택이 어찌 적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왕께서는 자문(紫門)의 터에 만수전(萬壽殿)의 담장을 물려 쌓으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어렵게 여겨 조정 신하들에게 물어서 모두가 가하다고 한 뒤에야 넓혔는데, 하물며 공주의 집이겠습니까. 숙휘 공주의 집터가 비록 공기(公基)라고는 하나 그래도 근처의 집을 많이 철거하였고, 숙경 공주의 집터는 바로 여염입니다. 서로 약정하여 매매를 하지 아니하고 아무의 집에서 아무의 집까지 널리 점유하여 강제로 사들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사우(祠宇)의 앞이 아주 좁았는데, 근처에 감종친(監宗親) 집의 빈터가 있어 선조(宣祖)께서 5, 6칸의 땅을 사들이고자 하여 누차 별감을 보내어 타일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우는 아주 중요한 것이고 그 땅은 아주 작은 것이었는데도 선조께서는 강제로 사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안위(晉安尉)의 집을 짓기 위하여 사대부의 집터를 사들이려고 하다가, 예로부터 물려내려오는 집터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자, 드디어 사헌부의 옛터에 집을 지었는데, 앞에 상놈의 집이 하나 있자 그 시끄러움을 막기 위해 앞 담장을 높게 쌓았습니다. 인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옹주(翁主)에게 인사를 갔다가 그 집이 좁은 것을 민망히 여겨, 즉위한 뒤에 배로 공기(公基)를 지급하고 바꾸어서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근대의 일입니다. 오늘날 공주의 집터에 대해서 상께서 혹 형세를 자세히 모르셔서 이렇게 강제로 사들이는 일이 있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여 네 궁(宮)을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지어주었으나 편안히 살 수가 없어서 또 이번 일이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집을 다시 짓는 폐단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완원군과 한산백의 사우에 대한 말은 대간의 논계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인경궁의 옛터가 이미 편히 살 수 없는 곳이라면 성상의 동기에 대한 정리로 볼 때 어찌 다시 지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숙경 공주의 집터를 강제로 사들이는 일은 듣는 자들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으며 모두들 나라를 망하게 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완원군은 바로 선조(宣祖)의 왕자입니다. 어찌 지금 공주의 집을 지으려고 옛 왕자의 사우를 철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산백 이색은 태조 대왕의 친구로서 은혜와 대우를 아주 많이 받았는데, 지금 그의 화상(畵像)과 사우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인목(仁穆), 인열(仁烈) 두 왕후 및 왕대비가 모두 한산백의 외손인데, 어찌 공주의 집을 짓기 위하여 그 사우를 철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어찌 굳이 그 터에다가 짓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비록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이미 그 곡절을 자세히 아신 뒤에 그곳을 그대로 쓰지 않으신다면 이것 또한 성덕의 일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형혹성이 남두성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입니다. 일찍이 계미년·갑신년에 이 재변이 있었는데 심기원(沈器遠)이 원훈(元勳)으로서 반역을 하였습니다. 중국의 일로 말하더라도 나라가 망하는 것이 모두 그 응험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에 또 이런 재변이 일어나 어좌(御座)를 범하였으니, 더욱 놀랍고 해괴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백성들이 수없이 죽는데, 얼핏 들으니 연천(漣川) 아문 안에서 강도의 재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장리(長吏)를 죽이고 관고(官庫)를 터는 일이 일어날 조짐입니다. 서울의 백성들도 허둥지둥 겨를이 없어 아침 저녁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강도(江都)의 쌀을 어찌 군향이라고 하여 아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수상을 만나 상의를 하였더니, 그도 ‘공물주인(貢物主人)에게 단지 은포(銀布)만 지급하고 미곡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들 원망한다. 지금 만약 강도의 쌀을 옮겨다 지급하고 그 은포는 각 아문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풍년이 들면 곡식으로 바꾸어서 그 원래의 쌀을 보상한다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하다. 그리고 1만 석을 값을 낮추어 서울에서 팔되 호(戶)의 대소를 나누어 차등을 두면 도성 안의 굶주린 백성들이 조금은 구제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의 군량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나, 달리 어떻게 해볼 방책이 없는데, 어찌 이러한 때에 도리어 아깝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강화 유수        이완(李浣)은 병으로 부임하기 어려우니 체직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간(李旰)은 집이 경내에 있으니 또한 부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체직을 허락하였다.

 

간원이 ‘풍문을 듣고 아뢴 대관을 조사하여 추고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라는 일’로 여러 달 동안 쟁집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상이 비로소 조사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각의 논계가 비로소 정지되었다.

 

장령 정화제가 ‘논사에 잘못이 있었는데, 피혐을 한 뒤에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아 물의에 비난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8월 22일 병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강변의 각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니 먼저 죽을 끓여 주어야 하겠는데, 정배된 죄인들은 모두 청천강 남북의 어염(魚鹽)이 나는 곳으로 옮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이전에 상이, 진휼청 당상의 직함으로 민정중을 불렀으나, 민정중은 김징에게서 표피 갖옷을 받은 일 때문에 불안하여 물러가 고향에서 지내면서 누차 불러도 오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조복양이 또 재촉하여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김징이 일찍이 솜옷을 이유로 권집(權諿)을 탄핵했으면서 자신은 표피 갖옷을 남에게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김징의 형편없는 점입니다. 정중에게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길떠나는 자에게는 반드시 선물을 줍니다. 서로(西路)에는 은(銀)과 삼(蔘)을 전별 선물로 삼기도 합니다. 신들도 일찍이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여 별도로 효유하였으나, 정중이 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8월 23일 정미

상이 또 뜸을 맞았다.

 

민점(閔點)을 승지로, 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참판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좌랑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예조 참판으로, 박지(朴贄)를 장령으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최후상(崔後尙)을 부교리로, 김수흥(金壽興)을 강화 유수로, 이간(李旰)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증직한 영의정 이정립(李廷立)에게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리고, 증직한 병조 판서 김응하(金應河)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간 이익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들으니, 별궁(別宮)을 수리할 때에 상께서 ‘호조와 병조의 당상은 내관(內官)의 말을 듣고 하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모든 건축의 일은 유사의 신하가 스스로 봉행해야 합니다. 어찌 내관으로 하여금 해조에 분부하도록 하여, 마치 지시하여 부리는 것처럼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로서 후일의 폐단을 크게 여는 것입니다. 전교의 문자는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니 그대로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출납을 맡고 있는 정원의 신하는 이치를 근거로 복역(覆逆)하여 임금에게 잘못된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입다물고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봉행하기에만 급급하였으니, 진실되게 출납한다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교를 도로 거두시고, 승지는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뒷날 허적이 또한 상에게 극력 아뢰기를,
"중관(中官)이 비록 상의 명령을 받든 자이더라도, 호조와 병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어찌 중관의 분부를 듣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상의 하교는 체통의 상실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더구나 들으니 중관이 참의를 물리쳐 보내고 꼭 판서가 와서 분부를 듣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더욱 한심스런 일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간원이 누차 아뢰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고 이르기를,
"내관에게 전교를 전하게 한 것일 뿐이지 애초부터 지휘 통솔시키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각의 계사가 이러하기 때문에 모두 따른다."
하였다.

 

경기 교동진(喬桐津)에 배가 뒤집혀, 죽은 자가 36명이었다. 휼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평안도 의주(義州) 등 여섯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진휼청에 명하여, 강도(江都)의 미곡 3만 석을 배로 운반해다가 용도에 보충하게 하였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경상도에 5명, 전라도에 20명, 함경도에 4명이었는데, 감사들이 계문하였는데, 모두 휼전을 베풀었다.

 

8월 25일 기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진료를 마치고 도제조 정치화가 아뢰기를,
"불행히도 기근이 참혹한데 나라의 저축이 이미 바닥이 나서 진구할 길이 없습니다. 단지 신역을 줄여주어 굶주린 백성들을 침탈하지만 않게 한다면 각자 생계를 도모하여 거의 구활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상께서 덕을 잃은 일이 없는데 하늘이 돕지 않으심이 이러하여, 굶어죽는 사람 이외에도 물난리에 휩쓸려 죽거나 벼락을 맞고 죽은 사람도 많으니, 더욱 참혹합니다."
하였다.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신역을 완전히 감면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은혜는 크겠습니다만 나라의 저축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완전히 감면해 줄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사관에게 이르기를,
"패초를 내어 좌상과 우상을 부르라."
하였다. 허적과 홍중보가 입시하였다. 허적이 전라 감사의 장계를 가지고 조목별로 품의하기를,
"감사가, 호조에 소속된 염분세목(鹽盆稅木) 24동 및 나주(羅州)와 영광(靈光)의 염철목(鹽鐵木) 70여 동으로 진구할 자료를 삼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허락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매작(賣爵)은 일이 비록 구차하나 도신이 이미 청하였으니, 신축년의 예에 의거하여, 영직(影職) 당상(堂上)·가선(嘉善), 허통(許通), 보충대(補充隊) 첩문(帖文) 각 3백 장 및 승통정첩(僧通政帖) 수백 장을 허락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노비 면천(奴婢免賤) 및 교생 면강(校生免講)에 대한 일’을 품의하니, 상이 역시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어영군의 상번(上番)을 면제하면 진구하는 데에 그 보미(保米)를 쓸 수가 있습니다. 5, 6개월 동안 번을 면제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정치화도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또한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도망한 공천에 대해서 징수할 곳이 없는 자는 이웃에게 징수하고 있는데, 이 때에 징수하는 포를 감면시켜 줄 것’에 대해서 품의하니, 상이 내년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징수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인견할 때에는 삼사가 으레 모두 입시하는 것인데, 근래에는 입시하라는 명이 단지 유대 당상(留待堂上)에게만 내려지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차(日次) 이외의 삼사 관원은 굳이 입시할 것이 없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외간에서, 한두 내관이 자못 방자하게 구는 조짐이 있다고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자들은 필시 상께서 신임하는 환관들일 것입니다."
하고,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옛사람의 글을 읽은 사대부들이더라도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되면 대부분 교만 방자해지게 되는데, 하물며 이런 무리들이겠습니까. 이것은 상께서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8월 26일 경술

상이 뜸을 맞았다.

 

하흥군(夏興君) 조한영(曺漢英)이 죽었다. 조한영은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청현직을 두루 거쳐 공경의 반열에까지 이르렀다. 그 당시 동료들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 관직을 지냈다. 다만 성품이 곱지 못하여 한때의 사론과 어긋나는 주장을 좋아하여 이 때문에 액운을 당해 누차 탄핵을 받았는데, 전조에 있을 때에 윤휴를 진선에 의망하는 것을 막아, 공론이 옳게 여겼다.

 

8월 27일 신해

전라도 화순현(和順縣)에 큰 바람이 불었다. 아홉 살 난 아이가 바람에 날려 떨어져 죽었다. 노인들은, 을해년 이후로는 없던 악풍(惡風)이라고 하였다. 부안(扶安) 등의 읍에도 큰 바람이 불었다. 변산(邊山)의 금송(禁松) 수백 그루가 일시에 부러지고 뽑혔다.

 

전 판서 오정일(吳挺一)이 죽었다. 오정일은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고왔으나 주색을 좋아하고 행실이 좋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다. 대군(大君)의 처형(妻兄)으로서 한 집안이 모두 내전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당류가 매우 많아서 순조롭게 공경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8월 28일 임자

이 당시에 팔도에 기근이 들어 사망의 보고가 잇달아 이르렀다. 서울에도 굶어 죽은 백성이 많았다. 상이 진휼청으로 하여금 양식을 내어 구활하게 했는데도 모두다 구제할 수가 없었다.

 

황해도에 죽은 소가 8천여 마리였다. 큰 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서리가 잇달아 내려 폐허가 되어 화곡이 남은 것이 없었다.

 

8월 29일 계축

상이 또 뜸을 맞았다.

 

맹주서(孟胄瑞)를 황해 감사로, 윤비경(尹飛卿)을 공조 참의로, 김석주(金錫胄)를 교리로, 임유후(任有後)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대사간 심재 등이 아뢰기를,
"각 아문의 군관이 정해진 수효가 없어서, 신역을 모면하려는 한정(閑丁)들이 모두 이곳에 투속하여 한 장의 공문(公文)을 받아내서 평생을 편하게 지낼 자료로 삼습니다. 군액(軍額)을 채우기 어려운 것은 다만 이 때문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특별히 바로잡도록 하여 그 수효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그 뒤 등대했을 때, 좌의정 허적(許積)이 상 앞에서 수효를 여쭙고 결정하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그 폐단이 늘 천천히 하는 데에 있는데 결국엔 시일을 끌다가 대부분 폐지되고 맙니다. 의당 상의 뜻이 굳게 결정되었을 때 속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내년 가을을 기다렸으면 한다고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이 그 말이 옳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뵙기를 청하고 이 일의 불가함을 힘써 말하니, 상의 뜻이 마침내 변하여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각청 군관의 폐단은 참으로 간원의 계사와 같다. 허적이 기어이 제때에 바로잡으려고 했던 것은 대체로 상의 뜻이 혹 변할까 염려해서였는데, 우선 천천히 하자는 의논이 또 뒤따라 일어났다. 김만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내년을 기다리자고 청하였으나, 이는 끝내 바로잡을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뒤에 이 의논이 누차 발론되고 누차 저지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3면
【분류】군사-군역(軍役) / 정론-간쟁(諫諍)
사신은 논한다. 각청 군관의 폐단은 참으로 간원의 계사와 같다. 허적이 기어이 제때에 바로잡으려고 했던 것은 대체로 상의 뜻이 혹 변할까 염려해서였는데, 우선 천천히 하자는 의논이 또 뒤따라 일어났다. 김만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내년을 기다리자고 청하였으나, 이는 끝내 바로잡을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뒤에 이 의논이 누차 발론되고 누차 저지되었다.

 

내수사의 면포(綿布) 1천 필과 마포(麻布) 5백 필을 내어다가 구제할 밑천에 보충하였다.

 

호군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여 소명을 간절히 사양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속히 올라오도록 하였다.

 

8월 30일 갑인

상이 뜸을 맞았다.

 

명하여, 작고한 공신 이시백(李時白)·이후원(李厚源)·이해(李澥)의 집에 월름(月廩)을 주게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이, ‘인조(仁祖) 때에 흉년으로 인해, 작고한 공신의 처자를 걱정하여 다달이 늠료를 주도록 명령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 세 공신의 집은 본래 가난한데 이런 흉년을 당했으니, 의당 돌보아주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경상 감사 민시중이 치계하기를,
"다른 도의 유민들이 진주(晉州)·함양(咸陽) 등 10여 고을에 가득하여 도둑질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노약자는 구렁에 엎어져 죽을 것이며 건장한 자는 도적이 될 것이니, 제때에 구제해서 다른 근심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조금이나마 농사가 된 영남 고을에 나누어 보내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하되, 특히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은 현재의 그곳에서 죽을 끓여 진구하여 몸을 의지하고 살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