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묘
경기 포천현(抱川縣)에서 벼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3명이었으며,황해도 배천군(白川郡)에서 어선이 뒤집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0여 명이었다. 상이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첫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판중추 정치화가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형조의 공사를 보건대, 도적 조기련(趙起連)을 부대시참으로 조율하여 계하 받았습니다. 조기련은 공전(空殿)에 있던 주홍함(朱紅函) 한 개와 목면갑장(木綿甲帳) 3폭(幅)을 훔쳤는데, 이것을 어용(御用)이라고 하여 부대시참으로 조율한 것은 과중한 듯합니다. 무릇 죄수 가운데 법률로는 의당 사형을 해야 하나 정상이 의논할 만한 자는, 반드시 삼복(三覆)을 하여 처단을 하는데, 이것은 바로 성주(聖主)가 사람의 목숨을 사랑하는 뜻입니다. 재변이 극도에 이른 오늘날에는 더욱 형벌을 삼가야 마땅합니다. 조기련은 우선 형 집행을 정지하고 계복(啓覆)하여 처결하는 것이 잘 살펴서 다스리는 도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우선 형 집행을 정지하고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9월 2일 병진
권상구(權尙矩)를 승지로 삼았다.
경상도에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나, 각읍의 세폐(歲幣) 방물(方物)과 군포(軍布)를 싣고 오던 것이 도적에게 겁탈당하기도 하였다. 여염에는 명화적이 날뛰고 도로에는 살인을 하는 변고가 즐비하게 일어났다. 도신이 이 사실을 계문하였다. 상이, 토포사(討捕使)들을 신칙하여 특별히 기찰을 엄하게 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9월 3일 정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올해의 큰 흉년으로 어영군을 이미 상번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장초군(壯抄軍)도 어영군의 예대로 하여 내년 가을까지 번(番)을 물리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지금 팔도에 흉년이 들어 참혹함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군신 상하가 힘을 다하여 백성 구제하는 일을 한다면 거의 만에 하나라도 구제하여 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릇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온갖 일들은 모두 철저하게 줄여야 합니다. 장차 거행할 세자의 가례(嘉禮) 때에 더욱 각종 비용을 줄여서, 절약하고 검소하게 하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왕세자가 이제 장성하였으니, 또한 검소와 절약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하고, 허적이 또 아뢰기를,
"여러 의논들이 다들 각도에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수령들이 진구하는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를 염찰하게 하고자 합니다만, 비록 암행 어사를 내려보내더라도 많이 보낼 것은 없습니다. 조종조에서는 혹 입직한 시종신을 보내어 몇몇 고을을 염찰하게 하되 연속해서 내보냈습니다. 이것을 본받을 만합니다. 상께서 비국으로 하여금 어사에 합당한 자를 뽑아들이게 하셨으니 형세를 보아가며 내려보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이처럼 재변이 극도에 이른 날에 인재를 거두어 모으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데, 신이 재주도 없으면서 외람되이 전형(銓衡)을 맡고 있습니다. 신은 식견이 고루하니, 2품 이상과 현임 삼사의 관원으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해서(海西) 백성은 신역이 가장 고통스러워 원망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지금 만약 전부 감해 준다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재실(災實)을 조사한 계문이 올라오기를 기다려 처리한다면 형세상 지연될 터이니, 이것이 염려스럽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해서의 베 징수를 평년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재실을 조사한 보고가 있을 때까지는 받아들이는 것을 독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명하여, 평안도 강변 여섯 고을의 각사 노비 신공을 감하게 하고, 기유년 이전의 받지 못한 것도 연기해 받도록 하였다. 이는 감사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9월 4일 무오
경상도 대구(大丘) 등 27읍에 지진이 있었다.
9월 5일 기미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이유태(李惟泰)를 겸찬선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김석주(金錫胄)를 겸문학으로 삼았다.
승지를 전옥(典獄)에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9월 6일 경신
서필원(徐必遠)을 총융사로 삼았다.
9월 7일 신유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함경도 경성부(鏡城府)에서 8월 24일 햇빛이 청명하고 구름도 끼지 않았는데 우레가 쳤다. 소리가 대포소리 같았고 한참만에 그쳤다.
어영청이 아뢰기를,
"대신의 아룀으로 인하여, 본청의 군병들을 10월부터 내년 9월까지 번(番)을 정지하였습니다만, 황해도와 경기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오가는 데에 양식을 싸가지고 가는 폐단이 없고, 입번(立番)할 때에 급료를 주는 것도 또한 진휼하는 뜻입니다. 이전대로 입번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9월 8일 임술
함경북도 무산진(茂山鎭) 사람 이귀생(李貴生)이 금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었는데, 첨사 박필성(朴弼星)이 화약을 갖추어 주며 강을 건너 사냥하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도신이 계문하였다. 귀생은 국경에서 효시하고, 필성은 금부에 내려 여러 차례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뒤에 심리(審理)를 인하여 삭직을 하고 석방하니, 북도의 사람들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겼다.
별시 무과(別試武科)를 실시할 때에, 외방의 거자들이 응시하는 것을 차비관이 ‘서울과 외방을 나누어 시취한다.’고 말하면서 응시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비국이 전례가 아니라는 이유로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다스릴 것을 계청하였다.
9월 9일 계해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였다.
"7월 27일 강풍과 폭우가 일시에 닥쳐, 하룻밤 사이에 큰물이 갑자기 불어나 수구(水口)의 홍성(虹城)과 누각까지 아울러 무너져 바다 속으로 떠내려갔으며, 침수된 민가가 아주 많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명입니다. 밝은 대낮이 컴컴해졌고 성난 파도가 눈처럼 흩날려 소금비가 되어 온 산과 들에 가득하였으며, 사람이 그 기운을 호흡하면 꼭 짠물을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초목은 소금에 절인 것 같고 귤·유자·소나무·대나무 등이 마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종 나무 열매는 거의 다 떨어지고 기장·조·콩 등은 줄기와 잎이 모두 말랐습니다. 농민들이 서로 모여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섬안에 인간이 앞으로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만고에 없었던 참혹한 재변입니다."
9월 10일 갑자
군현(郡縣)에 곡식을 바칠 백성을 모집하여 영직(影職)·노직(老職)·증직(贈職) 및 각종 첩문을 주었는데, 양남(兩南) 감사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이때 민간에 크게 기근이 들어 값을 감하여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자가 아주 적었다.
제주 목사 노정이, 세 고을에 유치해 둔 적곡(糴穀)이 8천 석에 불과한데 인민의 숫자는 무려 4만 2천 7백여 명이므로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결코 구제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연해의 곡물을 얻어 한 섬의 다 죽게 된 목숨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제주 흉년의 참혹함은 옛날에도 듣지 못한 일입니다. 목사 노정이 촌가를 출입하며 백성이 먹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친히 살피고 기근이 더욱 심한 자는 지성으로 구제하고 있습니다만, 관에 있는 곡식이 매우 적어 이렇게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통영(統營)곡(穀)으로서 호남 연해의 각 고을에 있는 것을 보내준다면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사 노비 신공도 완전히 감해 주어 진념하여 구휼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쌀 2천 석, 조(租) 3천 석을 배로 실어다 구제하였다.
9월 11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가 국경을 넘은 사람의 일을 치계하여 변경에서 효시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가 비록 굶주림과 추위에 절박하여 저지른 일이라고 말하기는 하나 국경을 넘는 것은 본래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고 또한 저쪽에서 일을 많이 일으켰으니, 굶주림과 추위 때문이라고 하여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 앞장선 자만 죽이고 그 나머지는 형추하여 정배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지금 별천(別薦)을 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신들도 마땅히 천거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신들은 정승의 자리에 있으니 본디 전관(銓官)을 가려 임명하여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할 책임을 맡길 따름입니다. 처음 입사(入仕)를 시키는 일은 신들이 선발하여 시킬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전조(銓曹)가 정밀하게 잘 가려 선발한다면 비록 별천이 없더라도 무슨 인재가 모자라는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소신이 영(令)을 듣고 그 일을 정지하도록 빨리 아뢰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조복양이 청하기를,
"지난해 별천의 규례대로, 이미 천거된 자들을 묘당에 문의하여 그중 쓸 만한 자를 가려 쓰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때 제주 등 세 고을에 크게 기근이 들어 다투어 말을 잡아 먹었는데, 백성들이 모두들, ‘말을 잡아 먹느니 차라리 국가의 둔전에 바치고 국가 곡식을 받아먹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이를 목사 노정이 보고하고 상경한 제주 사람들도 이를 비국에 호소하였으므로, 허적이 상께 아뢰어, 태복시 소속의 양남 둔전의 곡식으로 값을 계산해 주고 사들여 연해의 목장에 두도록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홍중보(洪重普)를 가례도감 도제조 로,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판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참의로, 유헌(兪櫶)을 장령으로, 이우정(李宇鼎)을 지평으로, 김익경(金益炅)을 호조 참의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유여량(柳汝糧)을 통제사로 삼았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근래 조정에는 공도가 완전히 소멸되고 사대부들 사이에는 사사로움이 횡행합니다. 전에 별천을 할 때에 서로 손을 바꾸기도 하고 청탁을 하기도 하여, 목마르게 인재를 구하는 아름다운 뜻을 사사로움을 도모하는 사잇길로 삼았습니다. 공론이 간혹 발론되어 여러 차례 정지하기를 청했습니다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말들이 많습니다. 명을 내린 지 며칠 만에 분주하게 청탁을 한다는 이야기가 자자하게 전파되어 듣는 사람들이 놀라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천거도 하기 전에 사람들의 말이 이러하다면 천거를 한 뒤에는 얼마나 어지러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신은 참으로 안타까워 즉시 혁파하기를 청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기한이 갑자기 지나가, 본의가 이러하면서도 끝내 정지하기를 계청하지 못하였고, 이에 도리어 응당 천거를 해야 하는데도 천거도 하지 못했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고, 대사간 심재, 정언 홍만종, 장령 박지, 사간 이익상, 헌납 이하, 지평 홍수하 등이 모두, 응당 천거해야 하는데 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뒤에 모두 출사시켰다. 당시의 별천에 분경이 많아서 식견이 있는 자들까지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세도와 습속에 대해서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할 수가 없음을 알았다. 별천을 하라는 명이 내린 뒤에 말들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명규가 이렇게 인피한 것이다.
9월 12일 병인
홍수하(洪受河)를 장령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지평으로 삼았다.
제주에 전가 사변(全家徙邊)한 죄인을 다른 고을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판 조복양이 상에게 아뢰기를,
"제주에 정배된 죄인은 모두 적도들로서 습성을 고치지 않아, 늘 도둑질하는 피해가 많았습니다. 이런 흉년을 만나서는 그 피해가 더욱 심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 다른 데로 옮긴다면 온 섬의 사람들이 지탱하여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이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9월 15일 기사
이세직(李世直)이란 자는 공산(公山) 사람인데, 이달 7일 종각(鍾閣)에 난입하여 발로 종을 찼다. 수직(守直)하던 자가 잡아서 형조로 이송하여, 치죄하니, 세직이 이에 역변을 고하는 말을 하였다. 형조가 보고하였는데, 드디어 대신과 원임 대신, 의금부 당상, 양사의 장관을 명패로 부르고, 이날 밤 내병조(內兵曹)에서 국문하였다. 세직이 공초하기를,
"본래 풍수(風水)를 업으로 삼았는데 청주(淸州) 남면(南面) 주성(酒城) 근처에 좋은 집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8월 15일 청주의 가암곡(加巖谷)에 도착하여, 그 마을에 사는 배상준(裵尙俊)·배상율(裵尙栗) 등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때 상준이 자기 집터를 보아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 상준이 ‘연속해서 흉년이 들어 앞으로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면서 무도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만약 몇 년이 지나면 초목만 남을 것인데 이와 같은 때에 지리(地理)를 해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였습니다.
또 8월 10일 송 정승(宋政丞)의 집에 갔더니, 그곳에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 충청 병사 서 감사(徐監司), 통제사 구씨(具氏)가 와서 모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마루 밑에 엎드려 들으니, 9월 27일 아침에 모여 서울로 들어가자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홍연이 말하기를 ‘9월 25일 새로 번 서는 어영군을 직산현(稷山縣)에서 점고할 때에, 이들을 수합하여 상경하게 되면 군병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서 감사는 꼭 금천(衿川)에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홍연이 또 말하기를 ‘기상을 두고 말한다면 송 정승을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나 후사가 없고 양손(養孫)이 있을 뿐이며, 송 판서는 친손자가 많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고, 또 도읍을 신도(新都)로 옮길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일의 낌새가 급박하였으므로 올라와서 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이, 그의 말이 혼란하여 문자로서는 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직접 뵙도록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불러 보고 물었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국문할 때에 말이 매우 조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긋나는 단서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공초한 내용 중에 말한 송 정승 집에 모여 의논하였다는 말은 더욱 혼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이 일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한심스러웠다. 인심이 이 지경까지 나빠졌단 말인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의 말에, 송시열(宋時烈) 집에 모였던 날 몰래 마루 밑에서 들었다고 하였는데, 들으니 송시열 집에는 마루가 없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허망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투를 살펴보건대 혹시 사주한 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인사(人事)를 아는 사람이 시킨 것이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는 공을 바라고 갑자기 한 말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집의 신명규가 아뢰기를,
"그의 말을 들어 보건대 필시 실성한 사람입니다. 발로 종을 찬 것만 보아도 그가 정신나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혹 배가(裵哥)와 본래부터 원한이 있어, 종을 친 김에 모함하는 꾀를 부리려고 했다가 일이 중대해지자 갑자기 이 한 가지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자, 허적 등이 모두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였다. 상준 등을 잡아왔는데 이세직과는 본래부터 모르는 사람이라고 공초하였다. 국청이 먼저 세직에게 상준의 용모와 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는데, 이세직의 대답이 과연 다 틀렸다. 드디어 얼굴이 비슷한 대여섯 명으로 시험해 보았는데 세직이 그중 한 명을 가리키면서 상준이라고 하였다. 상준과 대면시키기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진짜가 아니라고 하였다. 상준이 이에 그가 한 말이 구구절절 사실에 어긋남을 힐난하니, 세직이 기운없이 머리만 숙인 채 묵묵히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여덟 번째 형신을 받은 뒤에야 실토하기를,
"당초에는 상준의 일 때문에 올라왔는데, 옥에 갇히던 날 죄수 조동지(曺冬之)가 말하기를 ‘이럴 때 역적이라도 일어나면 다행이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네가 이같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와서 고발하고 죽고 싶으냐. 차라리 대관(大官)을 끌어들여 고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수 중에 언서(諺書)를 아는 자가 양송(兩宋) 및 이홍연 등을 끌어들일 것을 권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럴 마음이 생겨 이런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8월 10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였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배상준의 일에 있어서는, 8월 16일 청주를 지나갈 때에 평소 안면이 없는 연주로(延柱路)의 집에 마침 들어갔는데, 주로가 말하기를 ‘배상준이 임금께 부도한 말을 했으니, 네가 만약 고변(告變)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와서 고발한 것이지 사실 상준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무고죄로 논하였는데 미처 사형에 처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조동지는 다섯 번 형신을 받고 김백추(金白秋)는 한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모두 바른 대로 말하지 않았다. 백추는 곧 세직이 끌어들인 언문을 안다는 자이다. 상이, 동지 등에게는 사주한 흔적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꼭 깊이 캐보려고 하였으나 세직이 이미 죽었고 달리 대면시켜 변증할 사람도 없으므로, 모두 형조에 되돌려 보내 각기 그 해당 죄목으로 죄주라고 명하였다. 상준 등은 모두 풀려났고 연주로에게도 묻지 않았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인재를 천거하는 것은 다스려진 조정의 성대한 일인데, 사대부들 간에 공도(公道)가 없어져 어지럽게 부탁하고 다닌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천거를 받은 사람도 합당하지 못한 자가 많다고 하니, 이 같은 천거는 결코 쓸 수가 없습니다. 이번 별천을 모두 삭파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신미
전라도 고산(高山) 등 30여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광주(光州)·강진(康津)·운봉(雲峰)·순창(淳昌) 등 네 고을이 더욱 심하였는데, 집이 흔들려 무너질 듯했고 담장이 무너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떨어졌다. 이런 참혹한 지진은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여러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상이 승지 권상구를 보내어, 가서 판중추 송시열과 좌참찬 송준길을 효유하여 위안하게 하였다. 대개 이세직(李世直)의 무고를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은 ‘신이 삼가 길에서 떠도는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하고 혼이 달아나 바야흐로 죄인의 복장을 갖추고 주옥(州獄)으로 나가던 참에 길에서 근시(近侍)를 만나 성상의 분부를 외람되이 전유받았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여 주저앉는 이외에 다시 진달할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송준길도 역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뜻을 진달하였다.
원양도 평해(平海) 등의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큰 비가 내려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도로가 시내가 되었으며 벼곡식이 모두 물에 떠내려가 손실되었다. 고성(高城)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이달 1일에 금강산에 눈이 한 자나 쌓였다.
9월 18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제주(濟州)에 기근이 아주 심하기 때문에 이미 쌀 3천 석을 지급하였습니다만, 지금 진구를 받으러 나온 백성이 2천 명이라고 하니, 이전에 보낸 곡물로는 형세상 다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영의 쌀과 벼 도합 2천 석을 다시 이송하여 지급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양전(量田)은 국가의 대사이니 한번 잘못되면 그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전 목사 이하악(李河岳)이 일찍이 충주 목사로 있을 때 향소(鄕所)의 이만재(李萬栽)를 신임하여 양전을 위임한 채 그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만재는 자기와 친한지 소원한지를 따져 마음대로 등급을 높이고 내렸으므로 온 고을 백성이 모두들 통분스럽게 여겨서 감사에게 가 호소하였습니다. 감사가 조사하도록 하자 하악은 또 심리(審理)하지 않아, 충주의 백성이 앞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하악과 만재를 모두 잡아다 문초한 다음 죄를 결정하시고 양전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명하여, 하악은 나문하고 만재는 그 도로 하여금 잡아가두고 치죄하도록 하고, 양전을 다시하는 일은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명규가 또 양전을 다시하는 일로 탑전에서 거듭 아뢰니, 상이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좌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충청도의 양전은 모두 형편없는데, 청주(淸州)가 더욱 심합니다. 충주만 다시 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명규가 인하여 청주 및 기타 균등치 않게 된 곳을 다시 측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하라고 명했다. 하악에 대해서는 의금부의 조율(照律)에 의거하여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어선이 뒤집혀, 죽은 자가 12명이었다.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9월 21일 을해
영상 정태화가 열한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국세와 인심이 물이 점점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 해마다 물난리를 겪고 올해에는 팔도가 온통 흉년이 들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모두가 죽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이러한 때에 내가 의지하는 자는 오직 경인데, 경이 만약 나오지 않으면 내가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대궐에 나와 누워서라도 정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태화가 풍질(風疾)에 걸려 나올 수가 없었는데, 상은 그래도 그가 혹시라도 나오기를 바랐다.
신후재(申厚載)를 부수찬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사서로 삼았다.
9월 22일 병자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억울하게 무고를 당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오늘날 신이 당한 것 같은 일이야 어찌 있었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일월처럼 지극히 밝고 천지처럼 지극히 인자하시어, 이미 너그러운 용서를 내렸고 다시 위로의 덕스러운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일족이 몰락하더라도 씻을 수 없는 죄목을 진 신이 오히려 뼈가 가루가 되어도 갚기 어려운 은총을 받았으므로 북쪽 대궐을 바라보며 스스로 슬피 울부짖을 뿐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필시 온 중외에 소문이 그치지 않고 있을 것인데, 신이 집집마다 가서 말할 수는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유사의 신료에게 명하여 신으로 하여금 옥리(獄吏)를 대면하여 변명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나의 정성과 예우가 세상의 신임을 받았더라면 흉한 말을 하는 무리들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흉인이 승복하여 간사한 흔적을 숨김이 없었으니, 경에게 무슨 해명해야 할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상소의 첫머리 말이 이러하니 내가 경에게 더욱 신임받지 못한 것이다. 듣건대, 경이 이미 백 리 안에 들어와 있다 하니 어찌 차마 훌쩍 돌아가겠는가. 속히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경을 볼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른바 상소 첫머리의 말이라는 것은, 그의 상소에서, 죄진 신하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대사헌 송준길도 상소하여 사은하고, 일찌감치 형법대로 벌을 받아 국민에게 사죄함으로써 신하로서 불충하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답한 것으로 답하였다.
9월 23일 정축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에워쌌다.
9월 24일 무인
평안도에서 어선이 뒤집혀, 죽은 자가 7명이었다.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9월 25일 기묘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기를,
"본도에 정배된 죄인이 그 가속을 합하면 무려 2천 50여 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없던 이런 큰 흉년을 당하여, 정배된 죄인들이 잇따라 도망하고 보수(保受) 토졸(土卒)들도 죄받을까 두려워 흩어지고 있습니다. 전가도류 죄인(全家徒流罪人)을 모두 함흥(咸興) 이남으로 옮겨서 주객이 다 도망하는 근심을 면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평안도의 전례대로 죄명이 조금 가벼운 자를 옮기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강계부(江界府)의 백성 하득명(河得明) 등 6명이 금법을 어기고 강을 건너갔는데, 경내에서 효시하라고 명하였다. 따라갔던 30여 명도 모두 본도로 하여금 정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포 첨사(滿浦僉使) 윤창형(尹昌亨)을 파직시켰는데, 잘 검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월 28일 임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황해 감사 맹주서(孟胄瑞)를 인견하였다. 병판 김좌명도 입시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각도에 역(役)을 견감시켜 주는 일은 마땅히 재실(災實)을 계문한 뒤에 의논해 정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각도의 계문은 오지 않았고 대동미를 거둘 기한은 이미 지나갔으니, 더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양호 및 경기의 가을 대동수미(大同收米)를 먼저 2두(斗)를 감하고, 장차 그 재실의 경중을 살펴서 다시 춘등(春等)의 수미(收米)를 감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좌명이 또 ‘경기 및 양호의 영수(營需)와 관수(官需)를 신축년의 예에 의하여 헤아려 줄일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수령을 맞이하고 보낼 때에 굶주린 백성들이 그 폐해를 많이 받고, 진구하는 책임을 또한 신참 수령에게 맡길 수가 없습니다. 각도의 임기가 찬 수령들을 내년 보리 가을까지 그대로 잉임시켜 진구하는 일을 책임지우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맹주서가 아뢰기를,
"신역(身役)의 징봉을 묘당에서 바야흐로 견감시킬 것을 의논하고 있습니다만, 한결같이 각읍의 재실(災實)만을 따라서 하고 그 사람이 가난한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균등치 못한 근심이 있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재난을 아주 심하게 당한 고을에도 혹 농사가 잘된 백성이 있고 농사가 어느 정도 잘된 고을에도 또한 완전히 농사를 망친 사람이 있을 것이니, 형세상 일체로 징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일을 맡은 사람이 요량하여 잘 처리하기에 달린 것이다."
하였다. 맹주서가 또 아뢰기를,
"본도의 창고에 유치시킬 곡식은 그 많고 적음을 알 수가 없는데, 필시 진구하는 바탕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산성(山城)에 저축한 곡식을 일체 갖다가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또 ‘강도(江都)의 쌀을 옮겨다가 진구하는 일을 돕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려간 뒤에 형세를 보아서 다시 계청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군포(軍布)를 이미 줄여서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고군(雇軍)도 역시 숫자를 줄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긴요한 정도를 보아가며 다시 품의하여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신명규가 아뢰기를,
"감찰이 비록 관질은 낮으나 일반 관료들과는 체모가 절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시소(試所) 감찰에게 만약 죄가 있을 경우, 별도로 계품을 하는 것이 본디 마땅합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무과 이소(二所)에서 차비관의 죄를 청하는 논계에 감찰을 죄주는 일도 섞어서 함께 청하였습니다. 일이 뒤폐단에 관계되니, 무과 이소(二所)의 해당 시관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김덕원(金德遠)과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감찰에게 죄줄 것을 계청할 때 동참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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