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3권, 현종 11년 1670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6.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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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유

궐내(闕內) 및 외각사(外各司)의 수직(守直) 군사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자 1백 53명을 내년까지를 기한으로 임시로 감하였다. 남아 있는 자가 1천 98명이었다.

 

10월 2일 병술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본도에서 금년에 진헌할 호표피(虎豹皮)의 값을 진휼하는 데 보태 쓰게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0월 3일 정해

제주에 지진이 있었다.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나고 많은 민가의 담벽이 무너지거나 기울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올해 대동추등수미(大同秋等收米)를 2두(斗) 감면하여 백성들은 실제적인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만, 올해는 비록 흉년이라고는 하나 추등(秋等)은 혹 갖추어 납부할 수가 있는데, 내년 춘등(春等)은 결코 징봉(徵捧)하기가 어렵습니다. 추등은 감면하지 말고 춘등을 모두 감면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신역의 감면을 계청하였습니다. 지금 줄여서 정해야 하겠는데, 격포(格浦)와 검모포(黔毛浦)는 비록 군향이라고는 하나 이와 같은 대흉년에는 열읍의 기민들이 결코 본창(本倉)과 여러 산성(山城)에 실어다 납부하기가 어렵습니다. 환자곡[還上穀]을 일체 본읍에 받아서 유치해 두되, 6월 이후에 나누어 준 것은 특별히 이자곡[耗穀]을 면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오시수가 노비들에게 ‘쌀을 납부하고 면천(免賤)하는 일’을 허락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 일은 이미 전례가 있는데, 남녀(男女) 장약(壯弱)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마다 쌀 50석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일의 합당 여부를 여러 신료들에게 물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백성들은 바야흐로 굶어죽어가고 있는데 진구할 방책이 없습니다. 이 일이 참으로 구차스럽다는 것은 압니다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정과 노약자를 같은 값으로 해도 되겠는가?"
하니,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장정과 노약자를 나누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고, 우상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10세 이전은 30석을 바치게 하고 10세 이후는 모두 50석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도망간 기민(飢民) 가운데에 절반이 군병(軍兵)입니다. 관에서 갖추어 주었던 조총(鳥銃) 및 각종 군장(軍裝)들을 관가에서 거두어 모아 내년 가을까지 관고(官庫)에 저장하고, 전선(戰船)의 군기(軍器)들도 일체 관가에 갖다가 저장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청하기를 ‘올해는 이토록 큰 흉년이니 한전(旱田)이라도 으레 급재(給災)를 하지 않습니다만, 목면전(木綿田)은 급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또 아뢰기를,
"호서의 내포(內浦)와 영남의 우도(右道) 바닷가는 쌀값이 점점 오릅니다. 본도 감영에 전부터 물려 내려오는 은(銀) 3백 냥과 염작목(鹽作木) 1백 5, 6십 동으로 쌀을 사서 진구해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군사(軍士)로서 도망갔거나 죽었는데 대신 충정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그 번포(番布)를 감면하지 않는 것이 정해진 제도인데, 올해는 상규(常規)를 고집스럽게 지켜서는 안 된다. 죽은 자의 번포는 내년 가을까지 대신 충정하는 동안 특별히 감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충주(忠州)의 양전(量田)을 봄을 기다려 다시 할 것’을 연계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정(田政)이 균평하지 않으면 양전을 다시 하는 것이 옳겠으나, 한 고을에 허락을 하면 다른 고을들이 필시 모두 양전을 다시하기를 청할 것이다. 이 때문에 허락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명규가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 충주의 양전이 공정하지 못한 폐단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여러 날을 논계하였는데, 지금 대신의 말을 들으니, 충청도의 양전이 거의 모두가 균평하지 못한데 그 중에 청주(淸州)가 충주보다도 심하다고 합니다. 신이 애당초 양전을 다시할 것을 아울러 청하지 아니한 실수는 면책받기 어렵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명규가 이어서 ‘청주도 일체로 양전을 다시 하고 기타의 균등치 못한 고을도 모두 호조 판서에게 담당시켜 일일이 바로잡도록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를 기다려 양전을 다시 하도록 하되, 기타 균등치 못한 고을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4일 무자

제주 세 고을에서 내는, 월령에 봉진하는 각종 물품 및 진헌마, 그리고 경각사(京各司)에 해마다 으레 전례대로 납입해야 할 물품을 특별히 감면하였다.

 

10월 6일 경인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송광연(宋光淵)을 주서로 삼았다.

 

찬선 이유태가 상소를 올려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상이 너그러이 비답을 내려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10월 7일 신묘

집의 신명규(申命圭) 등이 아뢰기를,
"영남 진주(晉州)의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의 서원에 조식의 문집이 있는데, 문집 속의 부록은 모두 적신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비방하거나 혼조(昏朝) 때의 흉적들이 인홍을 숭상하는 내용입니다. 수십 년 전에 한 선비가 이를 분하게 여겨 그 문집의 판본을 가져다가 쪼개버렸는데, 이에 이의를 품은 하명(河洺)·하달원(河達源)·윤승경(尹承慶) 등이 판본이 훼손된 데에 대해 깊이 원망을 품고 즉시 서원 안에 들어가 공인(工人)을 불러 다시 새기고 또 그 판본을 훼손한 선비를 벌하였습니다. 먼 지방의 인심이 진실로 지극히 한심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조식의 문집 가운데 인홍 등 여러 역적들의 패악한 내용을 모두 속히 잘라내고 아울러 흉적을 받든 하명 등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의 요역 가운데 백면지(白綿紙) 등이 가장 무거운데, 각읍에서는 모두 승사(僧寺)에 책임지워 마련케 하고 있습니다. 중들의 능력도 한계가 있으니 그들만 고생시켜 침탈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전라 감영이 전례에 따라 바치는 종이도 적지 않은데 근래에 또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일년에 올리는 것이 큰 절은 80여 권, 작은 절은 60여 권이 되므로 중들이 도피하여 여러 절이 텅 비었습니다. 이런데도 혁파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장차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각절에서 이중으로 올리는 폐단을 속히 없애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경상도 합천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10월 8일 임진

평시서 제조 서필원(徐必遠)이, 각전(廛)의 시민(市民)들의 견디기 어려운 폐단에 대해 조목별로 진달하기를,
"국가의 필요한 물건은 으레 모두 시장의 백성들에게서 취하여 마련하니, 나라의 근본을 보휼하는 이런 모든 조치들을 서울과 외방에 일체 같이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외방의 민생은 이미 역을 면제받았으나 오직 이 시장 백성들만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절대로 잡역을 지워 독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9일 계사

김익경(金益炅)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남이성(南二星)을 승지로 삼았다.

 

10월 10일 갑오

서울의 서학동(西學洞)에서 강도가 의원 변영희(邊永熙)의 집에 뛰어들었는데, 변영희의 아내가 칼을 맞고 즉사하였고, 그 나머지 칼에 부상을 당한 자가 4명이었다. 한성부가 보고하니, 상이 포도청으로 하여금 엄히 체포하라고 하였다. 집의 신명규 등이, 포도청이 도성 안의 도적을 금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해 대장을 추고하고 종사관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후 포도청이 이 도적들을 잡고 보니 일당 네 명이 모두 도감의 포수였다. 상이, 마땅히 경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습진(習陣)하는 날에 군중에서 조리돌리고 베도록 명하였다.

 

10월 12일 병신

쌍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최일(崔逸)을 승지로, 이숙(李䎘)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3일 정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이 아뢰기를,
"가을 석 달 동안에 사용한 쌀이 이미 3만 석을 넘었는데, 과외의 용도가 많아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저축이 바닥이 날 판이어서, 백관의 봉록도 지급치 못하게 되었고, 군병의 급료는 더욱 잇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나라 일이 참으로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고, 교리 김석주가 아뢰기를,
"석 달 동안 사용한 쌀이 이미 3만 석을 넘어섰다면, 이것은 상께서 절약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만약 궐내에서 먼저 검소한 생활을 하시어 비용을 힘써 줄이시고 지성으로 백성을 구제한다면 나라의 비용을 혹 잇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기근이 극심하였는데도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이 그치지 않아 공력과 비용이 수만 금이 들었기 때문에 신료들의 말이 이와 같았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한 일은 신역을 감면하는 일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신료들의 의견이 각기 다릅니다. 조복양(趙復陽)은, 재해의 경중을 막론하고 일체의 역을 모두 감해야 하며 앞으로 용도를 잇댈 수 있는가의 여부는 논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해의 경비에는 반드시 7, 8천 동의 목면이 있어야 용도에 잇댈 수 있는데, 지금 만약 한꺼번에 이를 감한다면 나라의 계책이 또한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히 심한 읍은 전부 감하고 그 다음은 반만 감한다면 혹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도 처음에는 복양의 말이 옳다고 여겼습니다만, 나라의 재정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등급을 나누자는 좌상의 말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호조와 병조는 재정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아주 심하게 재난을 당한 고을이라 하더라도 완전히 감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하고, 권대운이 아뢰기를,
"조복양은 호조의 저축 가운데 면포 8천 동이 있다는 것을 듣고 이렇게 완전히 감하자는 의논을 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면포는 품질이 거칠어 병조에서 쓰는 것만도 못합니다. 이것을 믿고 완전히 감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심재(沈梓)가 아뢰기를,
"경각사(京各司)의 봉부동(封不動)과 외방 각처의 은포(銀布)를 덜어내어 경상 비용에 보탠다면 신역을 전부 감하더라도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여러 신료들의 말이 모두 백성을 구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1년의 경비가 7, 8천 동인데, 경각사는 태복시의 비축이 가장 많은데도 1천 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5천 동은 어떻게 마련해 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 굶주려 죽을 지경이니 구별해서 역을 면제하여 이들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다. 재난 피해가 특히 심한 읍은 전부 감하고 그 다음은 반을 감하여 조정의 진휼하는 뜻을 보임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노비 신공을 한 필만 바치는 자도 있는데 이 또한 반을 감해줘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재난 피해의 경중에 따라 전부 감하든지 반만 감하든지 하여 제반 신역과 똑같이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뒤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의 말에 따라, 응당 세 필을 납부해야 하는, 다소 곡식이 여문 읍도 한 필을 감해주었다. 팔도 전체에서 특히 심한 곳이 1백 3읍, 그 다음이 1백 56읍이었고, 나머지 읍들도 명목은 다소 여물었다고 하나 보통의 해에 비하면 역시 큰 흉년의 재난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긴요치 않은 영선(營繕)을 정파할 일에 대해서 일찍이 품의하여 결정을 하였는데도 곳곳에서 수리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일체 정파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판윤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총융청의 아병(牙兵)은 오로지 수위(守衛)가 단약해서 설치한 것입니다. 장초군(壯抄軍)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장초군을 혁파하여 모두 속오군에 소속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물으니, 허적이 아뢰기를,
"그 생각이 좋을 듯합니다만, 장초군을 설치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인데 지금에 와서 혁파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유혁연에게 물으니, 혁연이 아뢰기를,
"아병은 바로 총융사의 친병(親兵)입니다. 장초군으로 숫자를 채우려고 입번을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서필원이 남양(南陽) 영장(營將)을 인천(仁川)으로 반드시 옮기려 하는데, 또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형세를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경상도 초계(草溪) 등 다섯 고을의 패선 미두(敗船米豆) 1천 3백 석은 본조의 복계(覆啓)로 탕척을 하였습니다. 기타 오래도록 바치지 못한, 영덕(盈德)의 갑신조(甲申條) 삼수량미(三手粮米), 연일(延日)·장기(長鬐)의 계사조 세미(稅米), 밀양(密陽)의 기유조 세미, 함안(咸安)의 정유 이후 5년 동안의 세미, 현풍(玄風)의 기해조 세미두(稅米豆), 광양(光陽)의 신축과 임인 두 해의 노비 신공미 및 위 일곱 고을의 패선 미두로서 아직 바치지 못한 것을 일체 탕척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가 오래되도록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전에 없던 흉년을 만난 이러한 때에 거두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또한 탕척하라. 사격(沙格) 등도 아울러 석방하여 용서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5일 기해

복영군(福寧君) 이유(李栯)가 죽었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복녕군의 상을 당했으니 놀라움과 슬픈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선대께서 총애하시며 친하게 지내라고 하신 전교를 회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 격외(格外)의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예장(禮葬) 등의 일을 전례를 떠나 거행하고, 미포(米布)와 상수(喪需)를 넉넉하게 제급하라."
하였다. 인평(麟坪)의 여러 아들들에 대해서 선조(先朝) 때부터 총애가 특별하였고, 상은 또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며 성장하여 매우 친밀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분부를 내린 것이니, 대개 아름다운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무뢰한 자들로서 총애를 믿고 멋대로 못된 짓을 하였고 밤낮없이 드나들어 궁금을 난잡하게 만들었다. 또한 외친(外親)인 오정일(吳挺一)의 형제와 숙질들이 무리들의 종주가 되어 극성을 부리며 안팎으로 친분을 맺어, 뒷날 흉역의 싹이 되어 거의 화란이 일어날 뻔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눈을 흘기며 이를 갈았다.

 

10월 16일 경자

집의 신명규 등이 아뢰기를,
"기내(畿內)를 복심한 것이 재(災)와 실(實)이 뒤섞였습니다. 경차관 및 각도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재와 실을 분명하게 조사하게 하여 미진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올해 관에서 빌려준 곡식에 대해서 다 봉납하기가 실로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만, 선뜻 먼저 수량을 정하면, 혹 조금 곡식이 여문 고을과 조금은 넉넉한 백성들까지 빌려간 곡식을 갚지 않는 경우가 섞여 있게 될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숫자를 정해서 징봉을 감면시키게 하지 않았던 것인데, 비록 그렇더라도, 애당초 이 얼고 굶주린 백성들을 독촉하여 잡아가두고 매질을 해 가면서 징봉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외방의 관리들이 조정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나약한 자는 죄책을 두려워하고 능력있는 자는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고자 하여, 각박하게 독촉을 하여 징봉하기를 평년과 같이 한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잘 헤아려 숫자를 정하게 해서 때맞춰 외방에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8일 임인

교리 김석주(金錫胄), 교리 최후상(崔後尙), 부수찬 이훤(李藼)과 신후재(申厚載)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일전에 빈청의 신료들을 인접하실 때에 백성들의 신역을 견감시킬 일을 의논하여, 거행 조건(擧行條件)을 어제 이미 계하하였습니다. 성상의 분부가 애절하여, 이미 금년 팔도의 제반 신포(身布)를 모두 등차를 두어 아울러 감하게 하고, 또 양호(兩湖)에는 가을에 사용한 구결(舊結)의 예를 우선 버려두고 모두 올해 실전(實田)으로 답험된 전결로 그 세역(稅役)을 거둘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이 두 가지 일은 오늘날 백성을 구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 오늘날 백성들이 어느 누가 기뻐 뛰면서 성덕을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들은 여기에서 다시 마음에 의혹되는 바가 있습니다. 대저 국가가 이미 세입(歲入)의 액수를 크게 견감하였다면 또 반드시 세출(歲出)의 액수를 크게 절약해야만 거두어들이는 것과 쓰는 것이 거의 서로 맞게 되어 경비가 모자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해부(該部)의 침탈에 대해서 금지할 것을 허락한 것은 각처의 소소한 영선(營繕)의 일에 불과하고, 그 신역이 이보다 큰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지시키지 못한 것이 있으며, 해부에 신칙하여 재감하도록 한 것은 각사에서 기일 이전에 진배하는 약간의 물품에 불과하고, 비용이 이보다 큰 것에 대해서는 재감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옛날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흉년에 예를 줄이는 일을 논하였는데, 그의 말에 ‘비록 남교(南郊)에서 하늘을 제사하는 것이 제왕(帝王)의 성대한 예이기는 하나, 생백(牲帛) 이외의 의장(儀仗)은 모두 줄이는 것이 옳습니다. 위로 수레와 의복에서부터 아래로 친왕(親王)과 공주의 혼인 물품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모두 줄이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중국과 같은 부유한 나라가 천하의 재력(財力)을 가지고서도 한번 몇 지방의 수재와 한재를 만나자 절약하고 줄이는 것이 오히려 이러하였습니다. 하물며 지금 곡식을 심은 들판은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모여 있는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되었는데, 만약 중지해도 될 만한 역사에 도리어 많은 비용을 들이고 심하게는 혹 이전 풍요롭던 시절에 하던 일을 그대로 거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모이는 것은 연적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은데 새나가는 것은 큰 구멍으로 나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 장차 구제할 수 없는 큰 난리가 일어나고 큰 패망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상방(尙方)이 청나라에서 무역하는 물종들은, 비록 절약하여 감했다고는 하나, 하나의 물건만 가지고 말해 보건대, 초피(貂皮)가 50장을 밑돌지 않는데 한 장의 초피 값이 10여 금(金)에 이릅니다.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집을 지금 바야흐로 수선을 하고 있는데, 1백 명에 가까운 공장(工匠)들과 들어가는 많은 물건들이 이미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중에 당주(唐硃) 두 근(斤)은 바로 진채(眞彩)의 용도로 쓰이는 것인데 이것도 역시 절약하는 일이 전혀 아닙니다. 신들이 특별히 이 두 가지 일을 들어 말한 것은, 오늘날 절약해서 줄일 것이 단지 이 두 가지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다른 의당 절약해야 할 것으로서 절약치 않은 것들은 모두 미루어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고, 초피 무역을 완전히 감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9일 계묘

달무리가 목성을 둘렀다. 유성이 군시성(軍市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붉은 색이었고 우레 같은 소리가 있었으며 빛이 땅을 비추었다.

 

김덕원(金德遠)을 정언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사인으로 삼고, 영양도정(靈陽都正) 익준(翼俊)과 영봉 부령(靈峰副令) 익량(翼亮)과 봉강 령(蓬江令) 형급(炯伋)이 시예(試藝)에 입격하였는데 모두 차례대로 자급을 더해 주었다.

 

집의 신명규 등이 아뢰기를,
"기근이 든 뒤에 소의 역질이 크게 번졌는데, 다행히 살아남은 몇 마리를 모두 도살장으로 몰아가버리면 결코 내년 봄에 경작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 이후로는 경외의 도살장에 도살을 일체 금지하고 만약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하나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였다. 그 뒤 등대를 함에 미쳐서 허적이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가 매우 옳습니다만, 다만 조복양이 차자를 올린 뒤에 금방 법을 풀어 주었는데 지금 대각의 논계로 인하여 또다시 엄하게 금지시킨다면 나라의 체모에 있어서 일이 번잡하게 됩니다. "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금지하기를 청하고, 홍중보(洪重普)는 법을 풀어주기를 청하여, 신료들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신칙을 하여 지나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 심재(沈梓), 사간 심유(沈攸), 정언 오두헌(吳斗憲) 등이 아뢰기를,
"근래 역로(驛路)가 조폐하여 노비 공포(奴婢貢布)가 대부분 찰방(察訪)의 손으로 들어가고 각역의 중기(重記)도 영문(營門)에서 점검하는 일이 없어서 찰방 가운데 탐욕스럽고 비루한 자들이 징계되는 바가 더욱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찰방이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 한결같이 각읍의 예에 의거하여 역중(驛中)의 중기를 감사에게 실어 보내는 것을 영구한 정식으로 삼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인 찰방(利仁察訪) 조원양(趙元陽)은 광주(廣州)의 백도(白徒)로서 장관(將官)의 사만(仕滿)을 인하여 동반(東班) 정직(正職)에 제수되었습니다. 사람과 벼슬이 맞지 않아 관직이 어지러워졌으니, 도태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조원양이 광주의 천총(千摠)으로서 열심히 일하여, 비록 오래도록 근실하게 일을 한 자를 조용(調用)하는 예에 따라 조용한 것이기는 하나, 외방의 장관을 조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조원양은 바로 이조 판서 조복양의 친척이기 때문에 심재 등이, 복양이 사사로움을 따라 외람되이 의망을 한 것이라고 의심을 하여, 이렇게 논계한 것이다. 그 뒤에 조복양이 진소하여 스스로를 논열하였는데, 심재가 ‘복양에게 분소(分疏)를 당하여 대각의 체모를 크게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심유도 그 논계에 동참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오두헌은 ‘광주의 장관의 직임은 오래도록 근실하게 일한 자를 조용하는 사목이 이미 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여, 논계를 함에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결함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김덕원이, 심재와 심유는 출사시키고 오두헌은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조복양이 스스로 불안하여 또 잇달아 글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0일 갑진

사은사 정재륜(鄭載崙), 부사 이원정(李元禎), 서장관 조세환(趙世煥)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10월 22일 병오

집의 신명규 등이, ‘연이어 큰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복녕군 이유를 예장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인견하여 면대하였을 때에 명규가 다시 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고, 허적도 ‘밖의 의논이 다들 옳지 않게 여긴다.’고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올해는 평년과 다르니, 정부(丁夫)는 내가 마땅히 들어갈 만한 숫자를 헤아려 간략하게 제급하겠다. 기타 백성을 사역시키는 일도 마땅히 줄이도록 하겠다."
하였다. 대각의 논계가 드디어 멈추었다.

 

10월 23일 정미

이익(李翊)을 승지로, 이후(李煦)를 장령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지평으로, 이민서(李敏敍)를 고양 군수(高陽郡守)로 삼았다. 이민서는 옥당에 있을 때에 여러 날 동안 술을 마시고 숙직을 하다가 갑자기 미치광이 병이 발작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해괴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나가 외직을 맡게 된 것이다.

 

명하여, 고려 태조의 능을 보수하고 제사를 올려 고유한 뒤 수직군(守直軍) 3명을 두고 수직관(守直官)의 월급을 지급하게 하였다. 수직관은 곧 왕씨(王氏)의 후예였다. 그 나머지 능들에 대해서도 능이 있는 고을로 하여금 각각 3명씩 정해서 능을 지키도록 하게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홍처량(洪處亮)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

 

애초에 상이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청나라에서 무역하는 당초(唐貂)를 감하였었는데, 상방(尙方)이, ‘자전의 옷을 짓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다.’고 하자, 상이 두 대비전에 쓰일 물건은 그대로 무역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이 조적을 등급을 나누어 수량을 정할 일로 논계를 하였습니다. 한결같이 그 고을의 재난을 당한 경중을 따라, 아주 심하게 재난을 당한 곳은 3분의 1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 다음은 절반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지평 이우정(李宇鼎)이, ‘기전(畿甸)의 재상(災傷)을 논계할 때에 때맞춰 하지도 못했고 상세히 살피지도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0월 24일 무신

밤에 화성과 토성이 같은 궤도에 있었는데, 거리가 7, 8촌(寸)쯤 되었다.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김우명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이 나라의 은혜를 입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의 직임을 제수받았을 때에, 대간이 호위 군관의 숫자를 줄이기를 청했었습니다. 영상이 지금 바야흐로 대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소신에게 소견이 있는데 어찌 감히 우러러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평상시에는 군관들이 별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 군사를 배양하는 것은 뒷날의 긴급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정축년에 이시백(李時白)이 호위 대장으로 있었는데, 당시 호위 군관들이 성을 지킨 공로는 월급을 많이 받는 군졸(軍卒)들보다 도리어 많았습니다. 지금 만약 도태하여 줄인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이 무리들을 어느 곳에다 둔단 말입니까. 다시 뽑아 군병(軍兵)을 삼는 데에 불과한 것이라면, 군관(軍官)과 군병은 명칭은 비록 다르나 그 쓰임은 다르지 않은데, 먼저 그들에게 인심만 잃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 및 대간은 일찍이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지금 의심을 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삼청(三廳)을 합하여 2천여 명을 아깝게 혁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두어서 원망이 없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만약 이들을 혁파하여 바로잡으려고 하신다면 소신을 먼저 도태시키소서. 바로잡기도 전에 군관들이 스스로 파하고 떠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무리들을 처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뒷날 의논해 정할 때에 좋은 쪽으로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김우명이 또 아뢰기를,
"당초(唐貂)를 무역하기 위해 상방(尙方)에서 값을 지급하는 것은, 모두가 지존(至尊)의 관복(冠服)에 쓰이는 것이 다른 복식과는 다르기 때문인데, 지금 옥당의 차자를 인하여 완전히 줄이라고 특별히 명하여 일이 매우 매몰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상의 뜻이 실로 재변을 당하여 폐단을 줄이려는 데에서 나왔으니, 신은 감히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내전(內殿)에 쓰이는 물건은 줄이는 명목에 들어 있지 않으니, 시정(市井)에 값을 지급하여 이전대로 무역해 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다시 변통해서 하게 하라."
하였다. 우명이 또 아뢰기를,
"얼음을 저장할 시절이 멀지 않았으니 빙고(氷庫)를 미리 수리해야 하는데, 전에는 도방군(到防軍)으로 개초(蓋草)를 엮게 하였으나 올해에는 방군(防軍)이 없습니다. 그래서 병조에서는 방민(坊民)을 조용하여 쓰기를 청하고 한성부에서는 ‘방민은 신역이 과중하니, 전에 없던 규례를 새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병조로 하여금 값을 지급하고 사람을 사서 쓰게 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빙고의 일이 점점 늦어지니 일이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들으니, 지난날 돌을 나를 때에 부역하지 않은 방민이 아직 많다고 합니다. 한성부로 하여금 이 군사들을 조발하여 보내게 해서 빙고의 사역을 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우역(牛疫)이 극성을 부린다.’는 이유로, 도살장을 혁파하고 엄하게 더욱 금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속전(贖錢)을 징수하지 말고 엄하게 3차 형신을 하여 전가 사변시키기를 한결같이 율문대로 할 것’을 청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3차를 엄하게 형신하면 목숨을 잃을까 염려됩니다. 1차 형신을 하여 금법을 어긴 죄를 징계하고 또 속전을 받아 전가 사변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5일 기유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이토록 추우니 옷이 얇은 군사(軍士)들에게 유의(襦衣)를 제급하라."

 

사간 심유(沈攸)가 호남 경시관(湖南京試官)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오가는 길에 듣고 본 것을 아뢰기를,
"신이 시험을 감독할 때에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고하기를 ‘국가에서 비록 민사를 진념하여 여러 신역들을 견감시켰으나 굶어 죽거나 흩어져 떠돌 상황이 겨울 이전에 박두하였다. 대동수미(大同收米)와 제반 군포와 각양 조적 등을 완전히 감면시키지 않으면 거의 죽음을 눈앞에 둔 백성들이 어디서 판출해 내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호남 각 고을의 전재(全災)와 초실(稍實)에 대해서는 도신이 필시 일일이 구별하여 계문하였을 것이고 묘당에서도 필시 품의하여 재결하였겠습니다만, 신이 이미 도내 사람들의 말을 들었으니, 또 오가는 길에 본 바로써 몽매함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성상께서는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 실제적인 은혜를 베풀기를 힘쓰고 각종 신역을 견감하여 특별히 민정을 따르소서."
하니, 상이 신역을 견감하는 등의 일을 묘당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였다. 그 뒤에 심유 등이, 말한 것이 채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조정에서는 끝내 줄이지 않았다.

 

10월 27일 신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죄수들을 소결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외에 옥수(獄囚)가 많이 적체되었고 결론이 나지 않은 의옥(疑獄)도 많았다. 그래서 상이 명하여 소결청을 설치하게 하여 허적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고, 당상 네 사람을 뽑아서 문안(文案)을 가져다가 그 죄상의 경중을 고열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탑전에서 품의하여 소결하였는데, 소결청 당상 김좌명이 문안을 가지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옥사의 실정은 자세히 알기가 가장 어려우니 쉽게 처결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 사람의 죄를 상주할 때마다 대신과 본청의 당상, 양사, 옥당에 자문하여 각각 소견을 말하게 한 뒤에 상이 직접 결정하였다. 죄인 70여 명 가운데 강상(綱常)에 관계된 죄, 강도, 강간, 인신(印信) 위조, 사리에 맞지 않은 일로 소송을 좋아하는 경우,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경우를 제외하고,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케 한 자가 5명, 등급을 감한 자가 2명, 완전히 풀어준 자가 29명이었다.

 

정초군과 도감 포수 각 10명으로 하여금 매일 밤 성안을 특별히 순찰하여 도적에 대비하게 하였다. 당시 도적의 환난이 도성 안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포도군이 금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 홍중보의 청을 따라 특별 순찰을 시킨 것이다.

 

10월 28일 임자

상이 다시 소결에 친히 임하여,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도록 한 자가 6명, 감등한 자가 4명, 완전히 풀어준 자가 20명이었다. 병판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완(李浣)은 재신(宰臣)으로서, 병 때문에, 제수하는 명에 사은을 하지 못하여, 봉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병이 이러하다면 사은을 하지 않았더라도 특별히 녹봉을 지급하라."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이, 현도 정장(縣道呈狀)010)  을 올려, 병을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10월 29일 계축

좌상 허적, 형판 정지화 등이, 경성 안에 도로에서 얼어죽은 자가 많다고 상께 아뢰니, 상이 하교하였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몹시 참담하다. 큰 기근 뒤에 추운 절기를 만났으니, 얼어죽는 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해조와 해청으로 하여금 한성부에 분부하여 그중 의지할 데가 전혀 없어 얼어 죽게 된 자에게는 유의(襦衣)을 주거나 옷감을 지급하게 하라."

 

우참찬 박장원이 전시 독권관(殿試讀券官)에 의망되어 패(牌)를 받고 대궐 밖에 이르러서는, 그의 노복이 상스럽지 못한 병에 걸렸다 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정원이 계청하여 재차 불렀으나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상이, 장원이 추운 겨울에 독권하는 일을 면하려 한다고 여겨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문케 하여 다른 사람의 경계가 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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