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인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무지개 같은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와서 구불구불 북쪽을 향하였는데 길이가 10여 장(丈)쯤 되었다.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구음(具崟)을 정언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수찬으로, 정적(鄭樍)을 지평으로, 조형(趙珩)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별시 문과의 초시에 입격한 거자 이가적(李嘉迪)을, 호적에 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방목에서 삭제하였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여 구황의 방책을 조목조목 아뢰었다. 비국이 회계하여 그 가운데 아홉 조항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 내용은, 1. 격포(格浦) 등의 적곡을 특별히 모곡을 감면하도록 하여서 작으나마 은혜를 베풀 것, 2. 산성의 적곡을 각기 그 성 아래의 창고로 받아들이게 하고, 각종 곡식으로 대신 올리는 것을 허락할 것, 3. 각 관사의 노비에게 면천을 허가하고, 받은 돈으로 진휼의 비용에 보태 쓸 것, 4. 본도의 전결을 중중(中中) 이하로부터 하상(下上)까지 3등급은 모두 하중(下中)에다 넣고 하중의 전결은 하하(下下)에다 넣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 5. 속오군의 각종 병기는 관비나 자비를 막론하고 관가에서 거두어 모아 내년 가을에 다시 지급하게 하고, 전선(戰船)의 군기도 소속 본관 및 각 진포에 옮겨두도록 할 것, 6. 진장(賑場)을 설치할 때 필요한 장을 담글 콩은 통영(統營)과 각 아문의 회부(會付) 가운데서 3천 섬을 지급할 수 있게 할 것, 7. 가뭄이 든 밭의 목면 가운데 특히 부실한 곳도 급재(給災)를 허락할 것, 8. 호조 소관의 염세 목면을 본영의 은화와 바꾸어 진휼에 보태 쓰게 할 것, 9. 사망한 군사는 내년 가을까지 대정하지 않은 기간 동안은 그 번포를 감할 것 등이었는데,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선혜청이 또, 그 장계 가운데 각종 복호(復戶)에 결수를 양감하는 일은 역의 완급에 따라 차례로 감하기를 청하고, 인하여 경기·호서도 함께 시행하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자, 충신, 열녀에 내린 복호는 감하지 말라."
하였다. 전에 허적이 오시수의 장계를 상 앞에서 조목조목 아뢸 때 노비의 속량에 관한 내용에 이르자 상이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1백 구를 속량하면 겨우 5천 섬을 얻으니 소득이 많지 않은데, 길을 열면 뒤에 매우 곤란해질 것이니,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홍중보가 아뢰기를,
"이러한 길이 일단 열리게 되면 서울의 사람들이 싼 값으로 관비(官婢)를 속량하려 하여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니 절대로 가볍게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진실로 중보의 말과 같습니다. 지금은 외방 각사의 노비만 허락을 하되, 영남에서도 일찍 이러한 청이 있었으니 함께 허락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인하여 다른 도도 아울러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오시수가 치계한 많은 조목들은 모두 10월 초에 직접 아뢴 것이다. 민생이 구렁에 떨어지는 때를 맞아 진휼하는 정사에 관한 모든 것은 의당 빨리 강구해야 하는데, 한 번 회계한 뒤에는 덮어두고 세월만 보냈다. 이 때문에 일이 미리 정해지는 것이 없고 명령은 대부분 때를 놓치니, 묘당의 신료들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8면
【분류】재정-전세(田稅) / 재정-국용(國用) / 재정-잡세(雜稅) / 재정-역(役) / 구휼(救恤)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사신은 논한다. 오시수가 치계한 많은 조목들은 모두 10월 초에 직접 아뢴 것이다. 민생이 구렁에 떨어지는 때를 맞아 진휼하는 정사에 관한 모든 것은 의당 빨리 강구해야 하는데, 한 번 회계한 뒤에는 덮어두고 세월만 보냈다. 이 때문에 일이 미리 정해지는 것이 없고 명령은 대부분 때를 놓치니, 묘당의 신료들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11월 2일 을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무지개 같은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와서 구불구불 북쪽을 향하였는데 길이가 10여 장쯤 되었다.
11월 4일 정사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11월 5일 무오
사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 부사 정익(鄭榏), 서장관 정화제(鄭華齊)가 청나라에 갔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사신이 하직할 때 서장관에게 금물(禁物)을 조사 점검하라는 뜻을 본원에서 엄격하게 신칙하여 보낼 일에 대하여 일찍이 전교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사은사가 하직할 때에, 서장관이 대직을 겸하고 있다고 칭하면서 한결같이 평상시에 대관을 대하는 예에 따라 승지와 사관으로 하여금 대청에 나가 기다리게 하려고 하니, 이는 전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일의 체모에 있어서도 매우 옳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서장관이 정원에 들어와 전교를 직접 듣게 하는 일을 법식으로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문과(文科) 전시(殿試) 시관(試官)이 아뢰기를,
"시권(試券) 가운데 장자축(張字軸) 제6장(第六丈) 주초(朱草)에, 한 곳은 넉 자(字)를, 한 곳은 두 자를 주필(朱筆)로 뭉개 지우고 다른 글자로 고친 곳이 있다고 하기에, 시권을 가져다가 살펴 보니, 넉 자는 칼로 긁어내고 고쳤으며 두 자는 먹으로 지우고 사이에다 썼습니다. 역서리(易書吏) 및 지동관(枝同官)·사동관(査同官)·하인들이 다들, 봉미관(封彌官) 정기태(鄭期泰)가 한 짓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정기태를 유사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별시(別試) 전시(殿試)에서 문과에 정도성(鄭道成) 등 10명을 뽑고 무과에 김충석(金忠錫) 등 3백 65명을 뽑았다.
11월 6일 기미
이경억(李慶億)을 공조 판서로, 안후태(安後泰)를 주서로, 이하(李夏)를 부교리로, 이수언(李秀彦)을 대교로,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김흥운(金興運)을 전라 좌수사로 삼았다.
11월 7일 경신
사간 심유(沈攸) 등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진구하는 정책을 모두 강구하여 여러 가지 신포(身布)도 또한 차등을 두어 견감하였는데, 별대(別隊) 보인(保人)의 신역(身役)은 각도로 하여금 절반을 감하고 받아들여 그 고을에 유치해 두고 그들을 진구하는 바탕을 삼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징수하였다가 다시 진구한다고 돌려 주면 도리어 일만 많아지게 됩니다. 호수(戶首)가 으레 대부분 그 어린 아들이나 연약한 동생을 자기의 보인으로 정하니, 명분은 비록 보인에게서 징수하는 것이나 실제는 그 호수를 독책하여 거두는 것입니다. 새로 설치한 군대가 아직 완전히 편성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신역을 징수하면, 원망하며 흩어져버리는 일이 형세로 보아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품정하게 하여 내년 가을까지 기한을 물려서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에 허적이 상에게 아뢰기를,
"훈국 별대에 새로 편입된 자들에 대해서, 마침 흉년을 당하였는데 만약 그 역을 징수하면 틀림없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니, 내년 가을까지 물려서 그 신역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읍에 받아두게 했다가 그것으로 저들을 구제하면 매우 편리할 터이니, 이렇게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허적이 아뢰기를,
"별대의 일은 일찍이 상의 하교로 인해 이미 알렸는데, 지금 대간의 계사대로 다시 분부한다면 몹시 번잡할 듯하니, 그냥 두소서."
하니, 상이 또 따랐다.
봉미관(封彌官) 정기태(鄭期泰)를 금부에 하옥시켰다. 기태가 고친 것은 거자 권규(權珪)의 시권(試券)이었다. 옥에 갇히자, ‘술을 마신 뒤에 경망스러워져, 전편이 매우 좋은데 한두 문자가 미진한 듯하여, 망령되이 지우고 고쳤다.’고 진술하였다. 상이 형을 쓰지 말고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승지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만약 기태의 간악한 죄를 술 탓으로만 돌리면 앞으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하고, 우상 홍중보도 아뢰기를,
"신이 시권 안의 고친 곳을 보았는데 모두 정밀하게 지우고 써 넣었습니다. 결코 술기운에 저지른 실수가 아닙니다. 일이 매우 간교합니다."
하였다. 상이 다시 형벌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그 후에 중보가 또 아뢰기를,
"기태의 정상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에 따라 형추만 한다면 실토할 날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이에 엄히 문초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명하였는데, 기태가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후에 해남현(海南縣)에 충군되었다.
지평 이우정(李宇鼎)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지난번에 본부가 좌기(坐起)하니, 남부(南部)에서, ‘포수(砲手) 박숙(朴肅)과 박예명(朴禮明) 등이 자식으로서 효도를 하지 아니하고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능멸한 죄가 있다.’고 첩정(牒呈)을 하였습니다. 죄명이 매우 중대하고 풍교에 관계되는 일이라 추고 조사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즉시 잡아 가두게 하였는데, 동료들이 다 나오지 않아서 오래도록 실상을 조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전옥을 적간한 승지의 아룀을 인하여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시고, 죄명이 분명치 않다는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법부(法府)가 조사하여 처결하기도 전에 해조로 이송시켜 마치 법부를 믿지 못하는 듯이 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뒤에 출사시켰다.
11월 8일 신유
지평 정적(鄭樍)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형옥이 엄하지 않아서, 승지가 적간을 할 때 옥졸들이 모두 수직하지 않았고 중죄인이 옥쇄를 풀고 있었으니,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전옥서의 해당관을 체포 심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이번 전시(殿試) 때에 이름을 끼워넣은 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바로 초시(初試)에 참여치 않은 자였습니다. 명지(名紙)에 또한 사조(四祖)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간교한 무리가 허명을 적어 넣어 검인을 받아서 간악한 계책을 쓰려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막중한 국가 시험에 이처럼 놀라운 일이 있었으니 주관한 관원은 잘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정원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해당관의 죄를 청하고 철저히 규명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예삿일로 보아 덮어 두었으니 해당 승지 역시 일을 흐릿하게 처리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추고하소서.
백성의 풍속과 국가의 기강에 관한 모든 일을 그때그때 바로잡는 것은 본디 법부의 직무입니다. 조사하여 판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조에 이송하는 것은 법관을 신임하는 도리에 크게 어긋하는 것이니, 죄인 박숙(朴肅) 등을 해조로 하여금 조사 처리하게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해방 승지는 법에 의거하여 끝까지 논계하지 않아 일의 체모를 크게 손상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조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는 일은 그후 다시 아뢰자 본부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후에 등청하여 대면하니 상이 정적에게 이르기를,
"헌부는 모두 모인 다음에 비로소 조사하여 보고할 수가 있는데 모두 모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해조로 하여금 속히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 뜻은 법부를 불신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는, 그 죄명의 경중을 물으니, 정적이, 사대부를 능욕하였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니 곧 이것이 조사해서 아뢴 것이다."
하고, 드디어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집의 신명규가, 무과 참시 대관으로서 낙서(落書)를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9일 임술
영릉(寧陵) 수복방(守僕房)에 불이 났다. 예조가, ‘입직(入直) 수호군(守護軍)을 치죄하고 그 참봉을 추고할 것’을 아뢰었다.
대사간 심재가, 무과 참시 대관으로서 낙서(落書)를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김덕원(金德遠)은, 배표(拜表)하는 날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추감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11월 10일 계해
남이성(南二星)을 대사간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정언으로, 이원정(李元禎)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상소하여, 대간에게 공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또 납육(臘肉)을 진상하는 폐단에 대해서 극력 진달하기를,
"한 도에서 가장 큰 신역은 납육을 진어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한 고을의 민력을 동원하여 한 마리의 짐승을 잡는 것이니 어려움이 없을 듯하지만, 한 번 조총(鳥銃)이 퍼져 사용된 뒤로는 숲이나 늪이나 바닷속 섬이나 짐승들이 남은 것이 없어서, 한 경내의 군중을 다 동원하여 먼 산속이나 바다까지 찾아다니며 날짜를 기한하지 않고 짐승을 잡기만을 기대하는데, 만약 잡지 못하면 민력만 허비하며 수십 일이나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고, 결국 몇 배의 값을 쳐주고 사서 바치게 됩니다. 사서 바치는 짐승은 색과 맛이 이미 변하여 실로 쓸모가 없는 것인데, 봉진할 때에 말썽이 생기느냐 생기지 않느냐 하는 것은 모두가 옹인(饔人)이 받는 뇌물의 다소에 달려 있습니다. 집집마다 장정을 조발하여 산을 둘러싸고 들판을 뒤덮으며 눈 서리를 무릅쓰고 짐승을 뒤쫓는데 얼고 굶주려서 엎어져 죽는 자가 열에 아홉입니다. 그리고 촌려(村閭)와 점찰(店刹)이 가장 혹심하게 피해를 입습니다. 밥 등의 먹을 것을 토색질하여 멋대로 침해하며 해독을 끼칩니다. 그래서 닭과 개가 한 마리도 남지 않아 마치 병란을 겪은 것과 같습니다. 꿩, 토끼, 노루[牙獐]는 비록 사슴이나 멧돼지만큼 잡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연군(烟軍)을 조발하지 않으면 달리 사로잡을 방도가 없습니다. 만약 이러한 정상을 상께 진달하면 성상께서는 필시 수저를 던져버릴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보고 하교하기를,
"지금 전라 감사 오시수의 상소를 보건대, 납육을 봉진하는 것이 한 도의 커다란 폐단이니, 헤아려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올해의 납육은 두 대비전 이외에는 봉진하지 말라."
하였다.
11월 11일 갑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우상 홍중보, 판윤 서필원, 사간 심유도 입시하였다. 시독관 김석주(金錫胄)가 《강목(綱目)》을 진강하였는데, 이를 마치고 아뢰기를,
"소대를 아주 오랜 만에 하였으니, 뭇사람들이 누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강목》은 너무나 분량이 많아 끝까지 마치기가 어려운데, 만약 중간에 뛰엄뛰엄 하게 되면 공부를 마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날마다 강연을 열어 늘 쉬지 않고 공부를 해야만 역대의 치란(治亂)을 조감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홍중보가 아뢰기를,
"소대는 조강이나 주강과는 달라서 편전에 나아가 수시로 진강을 하는 것입니다. 비국을 인견하는 날에 먼저 진강을 하게 하여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서필원이 아뢰기를,
"외방 사람들이 소대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천한 아랫사람들까지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여론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상께서 만약 이번부터 시작하여 폐하지 않고 자주 소대하여 강론하신다면 또한 여항의 사정을 알 수가 있을 것이며 정치를 하는 데에도 어찌 도움됨이 적겠습니까."
하였다. 심유가 아뢰기를,
"영동(嶺東)에 요망한 무당이 하나 있는데, 환술(幻術)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백성들이 신령(神靈)이라고 일컬으며 다투어 모여들어 음사(淫祠)를 많이 지었습니다. 예로부터 풍각(風角) 황건(黃巾)의 변고가 꼭 이런 무리들에게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들으니, 회양 부사(淮陽府使) 임규(任奎)가 지금 바야흐로 잡아가두고 치죄하고 있다고 하는데, 본도 감사로 하여금 엄하게 국문하여 ‘요망한 말로 군중을 현혹한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신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임규가 이미 장살(杖殺)을 해버렸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이조 판서 조복양이, 사람을 공정하게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대각의 논평을 받아, 감히 출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체직을 허락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서필원이 아뢰기를,
"우상이 이판의 체직을 청한 것은 국가의 체모를 크게 손상한 것입니다. 또한 장관(將官)들이, 조복양이 오래 열심히 일한 무사(武士)를 조천(調遷)하였는데 대각이 논핵을 하였기 때문에, 모두들 낙망을 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가 지나치기는 하나, 그 장관이 바로 그의 족속이라면 염치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하였다. 심유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은 조원양(趙元陽)을 도태시키자는 논계에 동참하였는데, 전조(銓曹)의 규례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래 열심히 일한 자를 승천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신이 ‘대각의 논계가 지나쳤다.’라고 말하였으니, 신이 일을 논할 때에 잘 살피지 못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조복양이 ‘장관을 조천하는 사목’을 의탁하여, 외방 천총으로서 처음으로 사과첩(司果帖)을 받은 자를 갑자기 찰방에 의망하였으니, 과연 정체(政體)의 합당한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척속이었다. 간원이 도태시켜야 한다고 아뢴 것은 잘못한 것이 아니다. 필원이, ‘무사들이 낙망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오로지 복양을 위해서 유세를 한 것이니, 그 마음이 아주 공정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서필원을 두고 간사함이 많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 때문이다.
11월 12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들도 입시하게 하였다. 지평 정적도 입시하였다. 시독관 김석주(金錫胄)가 《강목》을 진강하였다. ‘맹자(孟子)가 제(齊)나라를 떠나다.’에 이르러 석주가 아뢰기를,
"맹자가 위(魏)나라로 갈 때부터 제나라를 떠날 때까지 그 사이가 20여 년인데 만약 맹자를 등용한 자가 있었다면 천하가 거의 태평 시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위나라의 양왕(襄王)과 제나라의 선왕(宣王)이 모두 함께 일을 해볼 만한 인물이 못 되었기 때문에 맹자가 떠나버려 왕도(王道)가 결국 다시 행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잘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워지느냐를 가름하는 하나의 큰 분기점입니다. 주자(朱子)가 그것을 특별히 적은 것은 그 뜻이 깊습니다."
하였다. 강론이 끝나자 상이 병판 김좌명에게 이르기를,
"충청 감사가, 임기가 찬 변장(邊將)들을 보리 가을까지 잉임시키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좌명이 아뢰기를,
"비록 황정(荒政)을 구획하는 일은 없더라도 맞이하고 보내는 데에 폐단이 있으니, 잉임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병조로 하여금 이러한 뜻으로 복계하게 하였다. 정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연석(筵席)이 엄하지 않아서 언어(言語)나 예모(禮貌)에 있어서도 더러 기강이 풀어져 데면데면한 일이 있으니, 참으로 매우 한심합니다. 지사(知事) 유혁연(柳赫然)은 일을 상주(上奏)할 때에 기강이 없이 태만하여 예모를 잃었으니, 경계하고 나무라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3일 병인
전에 지평 이우정(李宇鼎)이, ‘영광 군수(靈光郡守) 심구(沈玖)가 술을 좋아하여 직무를 폐하였다.’고 논계하여 파직시키기를 청하여, 상이 잡아다 추고하여 죄를 정하라고 하였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이우정이, ‘심구가 공술한 말에 공척하는 말이 많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체직을 청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뒤에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회인(走回人)에 대한 일을 경들과 함께 의논하고자 한다."
하니,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이 사람은 후춘(厚春)에서 도망해 돌아온 자가 아니라 바로 심양(瀋陽) 사람입니다. 그가 도망을 나온 것도 또한 본정이 아닙니다. 강변(江邊)에서 삼(蔘)을 캐다가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부득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으로서, 그가 살던 고향의 부모와 가족들은 모두가 알지 못합니다. 그가 붙잡힌 곳에서 곧바로 평안도로 이송하여 저쪽 나라로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당시에 소의 역질이 극성을 부려 도살을 금지하는 금법을 거듭 신칙하였다. 형조, 한성부, 사헌부 등 여러 관사에서 아전[人吏]들의 봉록[抄食] 문제에 대해서 변통할 것을 건의하니, 그 일을 진휼청에 내렸는데, 해청이 지급을 할 수가 없었다. 진휼청 당상 김좌명이, ‘호적 작목(戶籍作木)을 한성부에 꾸어주고, 호조에 있는 삼남(三南) 재상 속목(災傷贖木)을 형조와 사헌부에 지급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신역을 견감시키는 일은 이미 모두 결정을 내렸습니다만,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가 ‘재난을 당한 곳은 혹 전체를 감하기도 하고 혹 절반을 감하기도 하였으나, 조금 여물었다고 이름을 붙인 곳은 실제로는 재난을 당한 곳과 차이가 없는데도 신역 3필을 하나도 감하지 않았으니, 조금 견감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조금 여문 고을에서 3필을 거두는 것도 1필을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신출신(新出身)을 부방시키는 일은, 이러한 큰 흉년에 그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니,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해를 기다려 부방을 보내고자 합니다만, 김좌명은 남방(南方)의 주사(舟師)에 입방을 시키려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좋습니다. 다만, 남방은 수토(水土)가 매우 나쁘니, 만약 토질(土疾)에 걸리게 되면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에서 수토가 다소 좋은 지역을 골라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병판 김좌명이 아뢰기를,
"민정중은 진휼청 당상으로서, 소명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끝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추고하고, 재촉하여 올라오게 하소서."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겨우 며칠 전에 이미 특별 유지를 내렸는데 지금 또 추고를 하면,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특별 유지를 받은 뒤에 스스로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보고 추고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판윤 서필원이 아뢰기를,
"강도(江都)는 국가가 믿고 있는 곳인데, 만약 얼음 조각이 떠내려와 강을 막게 되면 길이 통하기 어렵습니다. 국가가 이것을 염려하여 자연도(紫燕島)로 길을 통하게 하여 그곳에 궁궐을 설치하고 양식을 갖추어 두고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데, 자연도는 토지가 비록 비옥하나 목장 때문에 개간을 할 수가 없어서 주민들이 살아가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말들을 몰아내고 전사(戰士)들에게 나누어주어 그 목장을 혁파하고 내년부터 둔전을 설치하여 곡식을 저축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지금 그곳에 나가게 되었으니 다시 형세를 살피게 한 뒤에 그 계청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이 사직 상소를 인하여, 과거 시험의 공정하지 못한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다. 그 내용에,
"이번 전시의 합격자 이담명(李聃命)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중두(中頭)와 당금(當今), 편종(篇終)의 세 곳의 ‘성책(聖策)’ 위에 모두 ‘복독(伏讀)’ 두 자를 빠뜨렸습니다. 여러 시관이 그 문장을 취하려 하다가 규격에 어긋나서 망설이던 차에 시관 이원정(李元禎)이 자기가 과거를 볼 때의 일로 증명하자 여러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어 담명이 마침내 합격하였습니다. 설령 이담명이 격식을 어긴 것이 실로 우연한 실수에서 나왔고 이원정이 증거하여 도운 것 역시 별 사심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합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때에 아버지가 간여한 일이 있으면 인정과 물의가 놀라고 분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이 듣기로는, 선대의 조정에서는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벌하고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벌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담명 부자는 국법에 있어서 모두 유죄임이 마땅하여 결코 합격자 명단에 둘 수 없는데, 여러 날을 귀를 기울이고 들어도 아직까지 말을 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또,
"봉미관 정기태는 여러 지동관(枝同官)·사동관(査同官)과는 각기 맡은 것이 달라서 본래 서로 간여할 일이 아닌데 그 직분을 넘어 침범하였으니 그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을 도와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형세가 있는 집안과 교제를 갖고자 하여서일 것입니다. 과거 시험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엄하고 중하여 한 줄기 공도가 여기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인데, 지금 간사한 자에 의해서 농간을 당해 무너져버렸으니, 참으로 통분스럽습니다. 더구나 그 시권은 중신 집안 자제의 글이라 하니, 만약 엄히 문책하고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일반 백성들이 틀림없이 강좌(江左)의 법이 우족(右族)에게는 시행되지 않는다고 말들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니, 더욱 애통합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기태를 엄하게 심문하여 실상을 밝혀내고 그 응시자와 함께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성상께서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하시는 것을 밝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도록 답이 없었다. 승지 최일(崔逸)이 ‘간언하는 신하는 일반 신하와 다른데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여러 날이 지나서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사간 심유가, 조원양의 일을 논할 때에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14일 정묘
우의정 홍중보, 부호군 김우형(金宇亨)·이단하(李端夏), 교리 김석주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대사간 남이성이, 이원정이 자기 아들의 시책을 고시하는 일에 간여하였다는 일로 장계를 올려 논열하면서, 심지어는 이담명의 시권이 실로 크게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시관이 경솔히 수취한 것은 결국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니, 신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담명의 대책 가운데 세 곳의 ‘성책’ 위에 과연 ‘복독’이라는 두 자를 쓰지 않았는데, 신 중보가 말하기를 ‘성책 위에 어찌 복독 두 자가 없는가?’ 하니, 신 우형·단하·석주 등이 말하기를 ‘성책 밑에 쌍경궤독(雙擎詭讀)이라는 넉 자가 있는데, 성책 위에 또 독 자가 있으면 독(讀) 자가 중복된다. 이전에 이미 고과한 답안에도 이러한 형식이 있었다. 만약 한 사람만이 이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표식을 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다른 글에서도 이미 사용하였으니 별로 의심할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또 문장이 우등에 들기 때문에 등급을 쓰지 않고 따로 두었습니다. 한 축(軸)의 고과를 다 마친 뒤에 원정이 밖에서 들어왔는데, 중보가 묻기를 ‘이러한 형식의 답안이 하나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원정이 ‘내가 등제할 때의 글도 역시 이러한 형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또 한 답안이 역시 ‘복독’ 두 자를 쓰지 않아 담명의 답안 형식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그러한 문제에 더 이상 의문을 두지 않았습니다. 합고(合考)할 때에 많은 의견이 담명의 것을 제일에 두고자 하였으나 그 첫머리 말이 온당치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제이에 두었습니다. 그간의 곡절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담명의 글이 크게 격식에서 벗어나고 좌중에서 논의한 것에 모순되는 것이 있었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억지로 취하여 상위에 두었겠습니까. 또 신들이 물러나서 들으니 《진영수어(震英粹語)》의 간행은 오로지 과장(科場)의 정식(程式)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김홍도(金弘度)의 두 책문과 남근(南瑾)의 한 책문에 모두 ‘신복독(臣伏讀)’ 세 자가 없고 성책의 아래에 비로소 ‘봉독(奉讀)’ 두 자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으로 보아도 그것이 격식을 어긴 것이 아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신들은 명을 받아 고시하면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는 간신의 비난하는 상소까지 있었으니 어찌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겨 태연히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대궐 아래에 나와 엎드려 벌을 기다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경들의 계사를 보고 그동안의 전말을 내 이미 다 알았다. 사직할 게 뭐가 있는가. 안심하고 벌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지평 정적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의 상소에, 신방(新榜)이 공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극언하였습니다. 정기태(鄭期泰)에 대한 한 가지 일 이외에도 또 ‘이담명(李聃命)이 시관(試官)의 아들로서 사사로움을 부려 참방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에 ‘여러 날을 귀기울이고 있어도 논핵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논핵하는 말이 없었다.’는 공척은 신이 실로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체직을 명하소서."
하고, 집의 이익상도 또한 이 일로 인피하였다. 그 뒤에 지평 이우정도 인피하였다. 옥당이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11월 15일 무진
경기 적성현(積城縣)에서 무뢰배 십여 명이 밤에 떼를 지어 옥문을 부수고 살인한 중죄수를 탈취하여 달아났다. 도신이 아뢰었다.
11월 16일 기사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하(李夏)를 사간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이 계청하기를,
"본도의 전결을 한결같이 호남의 예에 따라 그 등수를 내려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본도는 호남과 다르니 지금 만약에 모두 하중(下中)에 넣는다면 실로 너무 지나칩니다. 청컨대 하상(下上) 이상은 한 등급을 낮추고 하중(下中) 이하는 그대로 본 등급을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7일 경오
영의정 정태화가 37차에 걸쳐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였다.
11월 18일 신미
조근(趙根)을 정언으로, 정태화를 판중추로 삼았다.
부교리 최후상(崔後尙) 등이, 대간을 처치하는 일을 인하여, 정언 구음(具崟)의 실책을 논핵하기를,
"구음은 일찍이 사헌부의 관직에 있을 때에 거조가 전도되었고 본직에 제수됨에 미쳐서도 이미 물의가 있었습니다. 일전에 정언 오두헌(吳斗憲)이 인피할 때에 ‘추함(推緘) 이외에 또 함묵(緘默)하였다는 기롱이 있었다.’고 말하였으니, 오두헌이 인혐한 바는 구음에게도 역시 있는 것인데, 스스로 인피하지 않고 태연하게 처치하였다가 헌부가 처치할 때에 미쳐서 비로소 사촌간이라고 인혐하였습니다. 전후로 한 소행이 모두 매우 형편이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9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우상 홍중보, 이조 참의 김만기도 입시하였다. 시독관 이혜(李嵆)가 《강목》을 진강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판윤 서필원이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총융사는 떠나는 날짜가 언제이며 관장하는 여러 고을 가운데 어느 고을을 먼저 가볼 것인가?"
하니, 서필원이 아뢰기를,
"금천(衿川), 양천(陽川), 안산(安山), 인천(仁川), 자연도(紫燕島)에 마땅히 먼저 가서 군기(軍器)를 점검해 볼 것입니다. 각읍의 군기가 수선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전일에 전죽(箭竹) 3만 6천 개를 계청하였었는데, 지금 바야흐로 화살[箭]을 제조하고 있으니 마땅히 나누어 지급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집의 이익상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형조 참판 이원정(李元禎)은 자신은 시관이 되고 아들은 거자가 되었는데도 말을 삼가지 않고 혐의를 생각하지 않고서, 대신의 질문에 대해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 아들의 당락이 비록 여기에서 반드시 말미암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사람들의 말이 얽혀 시끄러운데도 전혀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니 그의 진퇴가 또한 방자합니다.
정기태(鄭期泰)는 장옥(場屋)에서 사심을 부려 시권을 고쳐 썼고 등록관(謄錄官) 이태서(李台瑞)는 부화뇌동해서 간사한 짓을 하여 오로지 거자를 위해서 일을 했고 보면 거자도 아마 몰랐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옥정(獄情)으로 보건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신이 오늘, 이원정을 파직하고 이태서와 해당 응시자 및 정기태를 모두 구금하여 엄하게 조사하고 처리해야 한다는 뜻을 좌중에서 발언하였더니, 지평 이우정이 처음에는 따르는 척하다가 끝에 가서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경시당해서 일어난 일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지평 이우정이 아뢰기를,
"이원정은 대신의 질문에 비록 경솔하게 대답한 잘못은 있으나 이미 고시에 간여한 사실이 없으니, 단지 말을 잘못한 작은 허물을 가지고 재신을 논핵하는 것은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정기태가 시권을 고쳐 쓴 일은 너나없이 통분해 하는 것으로서 의금부에서 죄상을 아뢸 때 틀림없이 그 실상이 밝혀질 것이니, 미리 논계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 선비에게는 본래 서로 통한 증거가 없는데 기태의 함부로 행동한 죄를 선비에게 억지로 씌우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의견이 달라 끝내 합의에 이르지를 못하였습니다. 이태서에 이르러서는 단지 등록관이 부화뇌동해 간사한 짓을 하였다는 말만 하고 따로 논한 일은 없었습니다. 동료가 인피한 말에, 이것을 가지고 소란을 일으킨 것처럼 한 말이 있으니, 신이 경시를 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고, 지평 정적도 인피하였는데 인피한 말이 이익상과 같았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익상과 정적은 출사시키고 우정은 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계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여 《강목》을 강하였다.
강원 감사 김익경(金益炅)의 장계에 따라 춘천(春川)·횡성(橫城)·낭천(狼川)·원주(原州) 등 4개 읍의 콩 1백 73석과 양구(楊口)·인제(麟蹄)·홍천(洪川)·정선(旌善)·평해(平海)·울진(蔚珍)·고성(高城) 등 7개 읍의 세포(稅布) 3동(同) 30필을 본도에 지급하여 진휼할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11월 21일 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집의 이익상이 아뢰기를,
"형조 참판 이원정은, 전시 시관이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이 거자가 되었으니, 매우 말조심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대신이 격식을 어겼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물었을 때에, 아주 혐의쩍은 것임을 생각지 않고 이에 자신의 견해를 말하였으니, 경솔하고 망령되게 처신한 실책을 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말이 있은 이후에도 나와 신명(新命)에 사은하여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전후로 한 소행은 실로 방자한 것이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때 말을 망령되이 한 잘못을 가지고 재신(宰臣)을 파직하는 것은 매우 과중한 것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기태를 형추하라는 명을 이미 내렸습니다만, 기태가 등록관(謄錄官) 이태서(李台瑞)와 함께 모의하여 간사한 짓을 저지른 것은 전파된 말이 매우 자자합니다. 그리고 기태가 간사함을 부려 지우고 고쳐 쓴 것은 오로지 거자를 위해서 한 짓입니다. 이태서 및 해당 거자를 일체로 잡아가두고 엄하게 조사하여 실상을 알아내서 율대로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른바 거자라는 것은 바로 호조 판서 권대운의 아들 권규(權珪)이다. 이태서와 권규가 하옥되어 공술하기를 ‘기태와는 평소 아는 사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해부의 주당(奏當)을 인하여 이태서와 권규가 모두 석방되었다.
유헌(兪櫶)을 정언으로, 윤경교(尹敬敎)를 문학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삼았다.
11월 22일 을해
이조 판서 조복양이 잇달아 글을 올려 체직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복양은 조원양의 일 때문에 불안하여 누차 사직하였는데, 상이 체차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복양이 당한 일은 염치에 크게 관련됩니다. 본직을 체직시켜 진휼의 정무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의 사직 상소를 인하여 비로소 허락하였다.
통제사 김경(金鏡)이 감독하여 만들어 진상한 조총(鳥銃)에 대해서, 상이 정교하지 못하다고 화를 내어 체포 심문하도록 특명을 내려, 변방 충군(充軍)의 율로 논하여 남해현에 유배하였다.
11월 23일 병자
사간 이하, 정언 조근 등이 아뢰기를,
"과장(科場)의 일은 매우 엄중한 것인데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공정하게 인재를 취한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로이 급제한 이담명은 시관 이원정의 아들입니다. 담명의 대책에 ‘신복독(臣伏讀)’ 세 자를 쓰지 않았으니 격식에 매우 어긋나고 표식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시관들이 의문을 품고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원정은 자신이 등제하였을 때의 글을 가지고 감히 증명하여 자신의 아들을 마침내 합격자 속에 들게 하였습니다. 탁호(拆號)한 뒤에는 ‘시권을 처음 읽었을 때 이미 우리 아이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물러나 피하고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원정이 모르고 증거댔다면 혹시 용서할 수도 있지만 이미 알고 피하고 나갔으면서 또 어찌 매우 혐의쩍음을 피하지 않고 몸소 당락의 사이에 말을 하였단 말입니까. 격식을 어긴 것이 발각된 후에는 내용의 좋고 나쁨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 아비의 말로 인하여 결정을 하였으니 더욱이 혐의쩍은 일인 듯합니다. 시관 이원정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시고 급제한 이담명을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하소서.
시권에 보(寶)를 찍는 것은 간사한 짓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한 자 반획이라도 고친 곳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하나 보를 찍는 것이 실로 바꿀 수 없는 규식입니다. 이번에 전시의 시권 가운데 한두 자 고친 곳에 모두 보를 찍지 않아서 차비관들로 하여금 그 간세한 술수를 부릴 수 있게 하였으니, 해당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함창 현감(咸昌縣監) 한공필(韓公佖)은 잡기 출신으로 본래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향시(鄕試) 때에, 본현의 유생 권황(權榥)이, 평소에 문장을 잘한다고 소문은 났으나, 그 형의 상을 당하여 졸곡(卒哭)도 마치지 않았고 또 유벌(儒罰)을 받고 있는 중이었는데, 공필이 그로 하여금 이름을 고치게 하고는 몰래 과거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갔다가 여러 선비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공필은 태연하고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이처럼 염치없는 자를 벼슬아치의 대열에 있게 할 수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정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을 과거 시험장의 체모 문제를 칭탁하여 이제 와서 꼭 소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의도가 아름답지 못하며 논리가 서지 않는다. 내 몹시 놀랍다.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한공필의 일은 다시 자세하게 살펴서 처리하라."
하였다. 정언 조근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아뢰기를,
"이원정은, 그 아들의 시권을 처음 읽을 때에는 일어나 피하고 참여하지 않았고, 격식을 어겼는지의 여부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가 지었던 대책(對策)으로 증명을 해 주었으며, 시권을 이미 탁호(拆號)한 뒤에는 ‘당초에 내가 이미 내 아들의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그 당시의 참고관(參考官)이었던 김석주(金錫胄)가 전한 것입니다. ‘성책(聖策)’ 위에 ‘신복독(臣伏讀)’이라는 석 자를 반드시 쓰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규(定規)입니다. 국조 이래로 이것을 쓰지 않는 규정을 이용하여 과거에 오른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원정 부자가 유독 이 규정을 이용하였으니, 격식을 어긴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표식을 한 것입니다. 격식을 어겨 표식을 해둔 글을, 아비가 아들을 위해서 증명을 하였으니, 오늘날의 시장(試場)을 엄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도리어 신들의 의향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심하시니, 신들은 삼가 서글픔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피혐하는 글을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다음날 사간 이하(李夏)도, 엄한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11월 24일 정축
부교리 최후상이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아서, 금부에 내려져 추고를 받았다.
정언 유헌이, 관직을 띤 채 하향한 잘못을 이유로 인피하였으나, 정원이 올리지 않았다. 유헌이 인피의 초고를 고쳐 써서 정원을 비판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이 셋으로 나뉘어 이미 고질화되어 치료할 수가 없을 정도인데, 지금은 셋 이외에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뉘어 각기 문호를 세우고 서로 반목하여 나랏일은 아예 잊어버리고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의 근본을 논의해야 할 곳이 단지 문서 장부나 처리하는 장소가 되었고 공정해야 할 두 전조(銓曹)의 인재 선발이 반은 친구가 청탁하는 사사로운 것으로 되어버렸는가 하면 척리(戚里)가 행세하는 조짐이 있고 환관에게 교만한 풍습이 있습니다. 망해가는 조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각에는 한 사람도 소리 높여 논열하는 자가 없고 단지 같은 조정 사람들의 잗단 일들이나 주워모아 책임을 때우려 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대간은 참으로 불쌍하고 또한 그 사정을 이해할 만합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못하시고 미리 지나치게 추측을 하여 거만하게 남의 말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정원은 대각을 깔볼 줄만 알고, 전례를 따라 피혐하는 것은 또한 봉입하지도 않습니다. 신이 이토록 경시당하였으니, 신을 삭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인피하는 말을 보니, 정말로 가소롭다. 생각이 있다면 상소로써 생각을 진달하면 될 일인데, 억지로 부당한 혐의를 끌어다가 쓸데없는 말을 어지럽게 늘어놓아 정원을 공격 비난하여, 반드시 받아들이게 한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으니, 그 행동이 매우 괴이하고 망령스럽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유헌은 생각이 난잡스러웠는데, 그것이 갑자기 인피하는 말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받들어 아뢰지 않은 것에 노하여 오로지 정원을 공격하였으나 말이 귀추가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
11월 25일 무인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판서로,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판서로, 민희(閔熙)를 공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지평 정적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이원정이 비록 경솔히 망령된 대답을 한 잘못이 있으나 그 아들의 입격 여부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인하여 방에서 뽑아버리는 것은 실로 지나친 일이기 때문에, 동료들과 상의하여 단지 이원정의 파직만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간원의 논계가 다시 준열하게 발의되었으니, 신이 어찌 태연하게 처치하겠습니까. 하물며 정언 유헌이 또 대각을 침척하였으니, 더욱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이익상도 인피하기를,
"신들이 이원정을 논핵할 때에, 단지 고관(考官)의 계사를 근거하여, 이원정이 말을 망령되이 한 일과 진퇴를 멋대로한 실책을 가지고 참작하여 파직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혹 ‘이담명이 참방을 한 것은 의심할 만한 자취가 많은데 방목에서 제외하기를 청하지 않았으니 일을 논하는 체모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하고, 간원의 논계도 말이 엄절하여 방목에서 제외시키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이 느슨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1월 26일 기묘
교리 김석주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외람되게도 대독(對讀)의 끝줄에 서게 되어, 처음에는 정식(程式)에 어둡고 또 어묵(語默)을 잘못하였으며 끝내는 사람들의 말이 시끄럽게 일어나고 간관들이 소를 올리게끔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담명을 낙방시켜야 한다는 논계는, 첫째는 격식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표식을 썼다고 했으며 셋째는 그 아비의 한 마디 말에서 결정하였으니 더욱 혐의쩍은 듯하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세 가지 문제만으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인데 정언 조근의 인피하는 말에서는 또 신 한 사람만을 들어 증인을 삼았습니다. 대체로 이것들은 모두 신이 승지 이익과 주고받은 말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이 이익에게 말할 때는 ‘담명의 시권을 처음 읽을 때에 이원정이 즉시 일어나 나갔다.’라고 했을 뿐인데, 지금 떠도는 소문을 듣고 낙방시켜야 한다고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원정이 잠깐 피하였다.’고 합니다. 그 잠깐 피하였다는 말은 대개 반드시 원정이 곧 돌아와 고과에 참여하였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또 신이 이익에게 말할 때는 ‘담명의 대책문을 다른 곳에 둔 것은 우등이라고 적으려던 것이며 원정이 들어와 이야기할 때에 이르러서는 그 글이 눈앞에 있지 아니한 지 이미 오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떠도는 소문을 듣고 낙방시켜야 한다고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논란하는 때였다.’고 하고, 또 반드시 ‘당락의 관건이 달려 있었다.’고 하고, 또 반드시 ‘격식을 어긴 것의 여부가 정해지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논란하는 때였다느니, 관건이 달려 있었다느니, 정해지지 않았었다느니 하는 것은 반드시 담명을 사사로운 과정으로 급제한 자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들이 서둘러 큰 꼬투리로 삼는 것은, 원정이 ‘내 우리 아이의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 한 마디의 말입니다. 이는 전시의 탁호(拆號)하는 날에 저와 여러 사람이 원정에게 축하하면서 ‘공께서는 어찌 아드님의 글인 것을 알아보셨습니까?’ 하니, 원정이 ‘아들의 글은 아버지가 평상시에 가르치는 것인데 어찌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처음에 그대들이 몇 줄 읽었을 때 나는 일어나 나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원정은 자신이 그의 아들의 당락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어렵지 않게 한 것이었고, 신들 역시 그 아버지의 말이 있어서 그 아들을 뽑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인데, 실로 사람들이 원정을 의심하기를 마치 쇠를 잃은 자가 이웃을 의심하는 것처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은 단지 자취에 집착하는 의견만 고수하고 본정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논하고 있으니 신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사세에 구애되었다는 등의 말은, 생각하건대 신이 원정을 비호하였던 것으로 의심하는 것인데, 이는 실로 매우 부끄러운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체직하고 신의 죄를 밝게 논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심이 좋지 않음을 내 이미 알고 있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상차하기를,
"신이 엊그제 간관들의 상소로 인하여 과거 시험의 일에 대한 전말을 대략 말씀드렸는데, 논의가 더욱 격하게 일어나고 대간이 다투어 아뢰어, 심지어는 격식을 어기고 표식이 있었다는 등의 말로 의논거리를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미 격식을 어겼거나 표식을 했다고 한다면 당시의 시관을 모두 논죄해야 옳습니다. 어찌 이원정 한 사람만 파직하자고 청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독(讀)’자는 성책의 위에 쓰기도 하고 성책의 아래에 쓰기도 하여 그 규식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근래의 과거보는 선비가 보통으로 호용(互用)하여 왔습니다. 만약에 담명이 처음으로 이러한 규식을 사용하였다면 규식을 어겼다느니 표식을 하였다느니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날의 시책 가운데 이러한 유형이 또한 많았기 때문에 의심을 하지 않았고 보면, 표식을 했다고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인심이 점차 투박해지고 습속이 불미하여져 길에서 전해들은 말은 믿으면서 시험장에서 목격한 말은 믿지 않으니, 지금의 세도가 또한 어렵다 하겠습니다. 대관이 이미 낙방시켜야 한다고 논계하였으니 시관으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죄는 당연히 홀로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의 직명을 파하여 들뜬 의논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인심을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입참하였던 여러 시험관의 말은 범연히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라 하며 믿지를 아니하고, 들은 말을 잘못 전한 사람의 얘기는 믿어 의심치 않아 사람을 들어 증거대는데, 그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 남이성의 상소를 풍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원정의 부자에게 참으로 사사로이 한 실상이 있다면 논죄함에 있어 어찌 파직하고 낙방시키는 것으로만 책임을 메꾸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아, 같은 무리끼리 붕당을 맺어 다른 무리를 비난하는 것이 이미 고질처럼 되어 오늘날의 간원의 계사는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니 경에게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지나치게 혐의치 말고 체통을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7일 경진
대사간 남이성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저번날 여러 시관들이 올린 장계에 대하여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까이 과거 시험장에서 지켜야 할 규정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멀리 백년 전 김홍도의 일과 임진년 이전 남근의 일을 인용하여 억지로 예를 삼으려고 하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하고, 또,
"김석주가 상소하여 극력 해명을 하였는데, 김석주의 의도를 생각하건대, 이미 일을 담당하였던 신하로서 또 대죄의 장계에 참여하였으니 지금의 말은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므로 신은 깊이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옥당이 헌관을 처치한 말에 이르러서는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신의 상소가 막 들어가 비답을 미처 받지 않은 때이므로 옥당의 신료들은 볼 길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떠도는 소문을 근거로 한 잘못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사실과 어긋난다는 비판을 억지로 뒤집어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공론의 마당에 이처럼 남의 말을 견제하는 풍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번의 대간의 계사는 단지 낙방시키자고만 청하였으니 대개 말감(末減)하자는 주장인데, 비답이 매우 엄하여 심지어 아름답지 않다느니 근거가 없다느니 하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신의 상소와 대간의 계사가 비록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는 있으나 대의는 같은데 어찌 홀로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정언 유헌의 인피한 말을 보니 언관이 입을 닫고 있었던 잘못을 크게 비판하였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사실 신이 받아야 합니다. 신을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인피한 상소를 보니 정말로 애석하다. 대간이 풍문을 듣고 소를 올리는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간의 시비는 자연히 공론에 맡겨야 하는데, 어찌 이처럼 이기려고 애를 쓴단 말인가. 오늘날의 일은 한 마디로 판가름낼 수 있다. 담명이 지은 글의 형식이 사실 우리 조정의 수백 년 동안에 없었던 일이라면 원정이 사사로움에 따랐든가 그렇지 않았든가를 막론하고 표식을 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엄한 벌을 가하여 장래 과거 시험장의 폐단을 막는 것이 진실로 옳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백년이니 임진이니 하는 말이라든지 깊이 따지고 싶지 않다는 등의 말은 또 무슨 말인가? 빈청에서 대죄하는 장계에서 이미 그대의 상소를 들어 상세하게 설파하였는데, 도리어 어떻게 잘못 전해 들은 것임을 미리 알았겠느냐는 말로 옥당을 비판하였으니 나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각의 신하들이 사사로이 이기기에만 힘쓰고 교묘한 말로 잘못을 얼버무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몹시 놀랍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비답을 그대로 되돌려 ‘교묘한 말로 잘못을 얼버무렸다.’는 등의 문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응교 홍주삼(洪柱三)이, 양사의 전후로 인피한 관원들을 처치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비답이 엄하여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에 자못 흠이 될 정도였는데도, 선동하는 뜬소문에만 의거해, 혐의쩍은 점이 있다고 의심하였으며, 정식(程式)의 유무를 알지 못하고서, 격식을 어겼다고 단정하여, 심지어는 낙방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일을 전도시킨 책임을 면키 어렵습니다. 조근과 이하를 체차하소서. 일을 앞에 두고서는 인피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정식인데 억지로 인피하였으니 이미 구차함을 범하였고, 언관의 지위에 있으므로 일에 따라 논할 수 있는데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씌웠으니 또 대간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유헌을 체차하소서. 낙방시키자는 논의는 실로 근거가 없으며,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이 있으므로 구차히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관의 인피는 전혀 근거가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비난도 자신에게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이익상과 정적을 출사시키소서. 처음 말을 전해 듣고 실상이라고 여겼다면 소를 올리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으나, 격식을 어겼다는 의논이 이미 거짓임이 드러났는데 억지로 사설을 늘어놓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동료의 비난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이성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이익(李翊)이, 김석주의 상소 안에 자신을 끌어대어 증명을 한 것을 가지고, 상소하기를,
"지난번 전시를 출방한 둘째 날에 석주가 마침 본원에 와서 시원(試院) 안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 언급하였는데, 말하기를 ‘거자 이담명의 작품이 자못 좋았는데, 단지 신복독(臣伏讀)이라는 석 자를 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 글을 따로 빼두고 등제시키지 않고 있었다. 이원정이 밖에서 들어오자, 대신이 그 글이 격식을 어겼는지의 여부를 물었는데, 이원정이 대답하기를 「내가 대책을 지을 때에도 이 규례를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탁호(拆號)한 뒤에 석주가 또 말하기를 「공께서는 아드님의 작품인 줄을 과연 알았습니까?」 하니, 이원정이 답하기를 「그 책문을 고시할 때에 내가 피해나갔는데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석주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본원에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언급하였는데 신도 그 자리에서 들었으며, 대략 몇 마디 주고받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석주의 상소에 유독 신의 이름만을 거론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입니까. 이것은 신이 말을 삼가지 않아서 남의 의심을 일으킨 것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하였다.
11월 30일 계미
돌아 내려갈 차사원(差使員) 정선 군수(旌善郡守) 윤익형(尹益亨), 금성 현령(金城縣令) 박빈(朴鑌) 등을 인견하고, 본읍의 폐단에 대해서 하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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