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갑신
심재(沈梓)를 승지로,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박지(朴贄)·윤리(尹理)를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우윤으로 삼았다.
호군 민정중(閔鼎重)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소명(召命)을 누차 사양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소장을 올리고는 올라오지 않았다. 상이, ‘두 차례나 별도의 유지를 내린 것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닌데 한 번도 소명에 나오지 않으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하면서, 그로 하여금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여, ‘본도의 전결(田結)을 일체 최하의 등급에다 두어 모두 4두(斗)의 쌀을 거두는 가운데에 넣어줄 것’을 청하였다. 비국이 회계하여, ‘영남의 예에 의거하여 하상(下上) 이상은 한 등급씩 낮추고 하중(下中) 이하는 본래의 등급을 그대로 쓸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일 을유
사간 이합이 바야흐로 추감(推勘)을 당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3일 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병판 김좌명이, 비용을 줄이는 문제에 대한 문서를 가지고 품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년 탄일에 봉진할 방물을 봉진하지 말 일로 삼남의 감영과 병영 및 통영에 분부하라. 제주에서 올리는 궁대(弓帒)와 통개(筒箇)도 봉진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경기에서 봉진하는 호표피(虎豹皮)는, 흉년이 들어 특별히 감한 경우가 정미년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도 특별히 감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양도와 함경도도 일체로 감하게 하였다. 그리고 공조(工曹)의 단오(端午)에 올리는 부채 및 상의원(尙衣院)에서 쓰는 수주(水紬)와 설면자(雪綿子) 가미(價米) 2천 6백 70여 석을 감하였다. 궐내 및 여러 상사(上司)에 진배하는 잡물들도 헤아려 줄인 것이 많았다. 예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진휼은 으레 2월 초에 개설하는데 지금은 민간에 기근이 급박하니 정월부터 진장(賑場)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전화(錢貨)가 천하에 통행하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만 행해지지 않으니, 동전(銅錢)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문(軍門)에다 포자(鋪子)를 설치하고 우선 시험삼아 운용해 보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계복할 날짜가 이미 정해졌는데 형조의 당상들이 행공하지 않는 자가 많으니, 변통을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조 판서 정지화(鄭知和)를 체차하라."
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북평사(北評事)가 너무 자주 체차되기 때문에 과한(瓜限)을 정하여 구임(久任)하도록 하게 하려 합니다만, 도사(都事)는 12개월로 과한을 정했는데 평사는 2년으로 과한을 정했으니, 지나친 듯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참하(參下)는 24개월로 과한을 정하고 6품으로 승품한 참상(參上)은 12개월로 과한을 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아, 온 천하가 한가지로 재난을 당하여 공사간에 모두 재정이 바닥났습니다. 창고를 열어 곡식을 옮기려 해도 또한 베풀 곡식이 없습니다. 단지 씀씀이를 절약하는 한 가지 일만이 혹 조금이라도 구제할 수 있는 길일 뿐입니다. 적은 재물이나마 절약하는 것이 어찌 다소라도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씀씀이를 절약하는 일은 마땅히 대혼(大昏)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의장(儀章)이나 절문(節文)은 비록 큰 흉년을 당했더라도 또한 어찌 조금이라도 줄일 수가 있겠습니까만, 물려내려온 전례로서 지나친 것과 쓸데없는 비용으로서 재물을 손상하는 것이 또한 작지 않습니다. 수백 개의 과반(果盤)과 수백 가지 예폐(禮幣) 등에 대한 항목이 있기까지 한데, 대부분이 궁궐의 고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성상께서 일체 없애버려서 줄여 간략히 하기를 힘쓰신다면 실로 검소함을 숭상하는 성상의 덕에 빛이 있게 될 것이고 또한 성자(聖子)에게 가르침을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원근의 굶주린 백성들로 하여금 다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기뻐 감동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이미 대혼의 많은 비용을 줄이시고 나면, 무릇 재물을 사용하는 관사에서는 또한 마땅히 차례로 절약할 것이고, 여러 대소 관원들이 어찌 감히 다시 긴요치 않은 작은 비용이라고 하여 작은 재물이나마 허비하겠습니까.
그리고, 근래의 이담명의 일은, 빈청에서 논계한 말과 고관이 상소한 것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이원정이 자기 아들의 글인 줄을 알고 피해 나간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대신의 질문에 대해 자기의 작품으로 증거를 대준 것도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록 ‘복독(伏讀)’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이 근거가 있다고는 하나 백년 전후로 겨우 아무와 아무 몇 명이 있을 뿐이고 6백 명의 거자 가운데 겨우 너댓 개의 시권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일상적인 법규도 아니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례도 아니며 유독 다른 사람들의 작문과 다르게 했다는 것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일은 고의적으로 한 일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부자지간에 이미 그 글을 알았고 또 그 체제를 증거해 주었으니, 이와 같은데도 이담명을 그대로 둔다면, 실정을 따지는 논란이 기승을 부려 법을 지키는 뜻이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뒷날 조정에서 장차 다시 과장(科場)을 엄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그 실정에 대해서 혹 모르는 것이 있다고 여기시기 때문에 매양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일을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또한 자기와 다른 쪽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오늘날의 고질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에 매양 의심해서는 안 되는 일에 의심을 하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에는 억양이 너무 지나치고 대각의 말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꺾어버리시며 번번이 의견이 같으냐 다르냐를 가지고 먼저 아랫사람들을 의심하시니, 탁트인 마음으로 순리를 따르는 대성인의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의견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는 놓아두고 단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만을 살펴야 하는데,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오늘날 이원정은 부자간이기 때문에 이미 의심받는 것을 면할 수 없고, 국법으로 볼 때에 그대로 둘 수 없는 것은 일의 이치상 매우 분명하니, 공론이 발론된 것은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간원의 신하가 전에 아뢴 대로 하여 나라의 큰 법을 보존하고 뒤폐단을 막아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간 지 수십일 만에 계(啓) 자를 찍어서 내렸다. 그가 체직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12월 4일 정해
김세행(金世行)을 지평으로,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형조 판서로, 이준구(李俊耉)를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서필원은 자기의 견해를 편벽되게 고집하며 법례에 구애되지 않았고, 여러 해 묵은 의옥(疑獄) 송사를 혹 한 마디 말로 결단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송사에 진 자의 문권(文券)을 가져다가 태워버려, 이치에 맞지도 않게 송사를 좋아하는 폐단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하는 일이 대부분 이와 같이 별달랐다. 그러나 청탁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의 훌륭한 점이었다.
집의 이익상이, 전에 이담명의 일로 두 번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지 않았다. 다시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은 바로 지난번에 간원의 신하가 논핵하려고 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대헌(臺憲)은 일반 신료와는 같지 않은데, 간원의 신하가 대석(臺席)의 말을 범연한 말이라고 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또 들으니, 부제학 이민적의 상소 안에 ‘그 아비를 죄줄 것을 청하고 그 아들은 그대로 두었으니 이것이 무슨 법도인가.’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신들의 당초의 생각은 ‘이원정에게 비록 경솔하게 망령된 행동을 한 실책이 있으나 그 아들의 입격 여부는 반드시 이원정의 말 한 마디에 관계된 것은 아니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단지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준다.’는 뜻을 가지고 이원정의 파직을 청했던 것입니다. 일을 자세히 살펴서 논하지 못하여 이처럼 기롱당하고 공격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고, 지평 정적도 이것으로 인피하였다.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평 김세행이 아뢰어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특명으로 출사하게 하였다.
12월 5일 무자
정언 박지가, ‘이원정을 파직하고 그의 아들 이담명을 방(榜)에서 뽑아낼 것’을 연계하기를,
"이원정은 자기 아들의 시책(試策)을 고과할 때에 이미 스스로 피해나갔다가 곧이어 상신(相臣)의 문의를 받고는 이에 자신의 작품을 인용하여 경솔하게 증거를 댔습니다. 이담명이 ‘복독’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은 것은 비록 근거가 있더라도 이원정이 자신의 글을 가지고 증거를 삼은 것은 끝내 스스로 해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데도 그대로 둔다면 원근에서 듣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전계(前啓)를 조금 고쳐서 조어가 자못 가벼웠다.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이미 그것이 근거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조어를 고쳤다면, 근거없는 논의에서 무엇을 취할 게 있다고 굳이 고집하며 연계(連啓)하는가? 나는 실로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지평 김세행도 이원정과 이담명의 일을 연계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근거없는 논의를 주워모아 남이성(南二星)의 말을 도우려 하니, 내가 참으로 해괴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우상 홍중보가, 부제학 이민적의 상소 안에 ‘예로부터 장옥(場屋)의 일에 대해서 대간이 논핵을 했다는 말은 들었으나 시관이 변론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라고 하고 또 ‘이번에 여러 고관(考官)들의 분소(分疏)가 지나치게 많아 한 무리 송사를 이루었으니, 이것은 국가의 체모가 엄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민적의 상소는 오로지 남이성의 논계를 받쳐주려는 것으로서, 말을 올리고 내리는 사이에 스스로는 그것이 둘러대는 말이 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또한 선입견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선입견에 빠진 것은 깨닫지 못하였다."
하고, 또 이르기를,
"분소가 지나치게 많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당파를 옹호하는 그릇됨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다."
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대간이 담명을 방(榜)에서 뺄 것을 계청한 것은 대개 떠도는 말이 시끄러워 뒤폐단이 염려되었기 때문에 발본색원하여 그 조짐을 막기 위해서였다. 비록 이원정 부자에게 애당초 고의성이 없었더라도 또한 마땅히 법을 위해서 죄를 받아야 되는 것인데, 고관(考官)은 구차하게 미봉할 계책만을 하고 상께서도 당론(黨論)이라고 의심을 하였다. 하나의 조그만 일을 인하여 점점 화를 돋구어 성상의 분부가 상정(常情)을 벗어나는 것이 많으니, 애석하다.
12월 6일 기축
대사간 김휘가, 응당 추감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박지와 지평 김세행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이익상과 지평 정적이, 처치하여 체직을 청했는데 상께서 특별히 출사시켰기 때문에 형세가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김세행과 박지는 출사시키고 이익상과 정적은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서울과 외방의 사형수들을 초복(初覆)하였다. 대신 이하 입시한 자가 28 명이었다. 형관(刑官)이 나아가 추안(推案)을 읽으니, 상이 여러 신료들에게 두루 하문하여 각각의 소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지평 김세행과 정언 박지가, 이원정과 이담명의 일을 연계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일렀다.
"이미 격식을 어긴 것이 아니라면 발방(拔榜)을 청하기까지 하는 것은 뒤폐단에 관계된다."
이경억(李慶億)을 공조 판서로, 이하(李夏)를 부교리로,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삼았다.
명하여, 경상도에서 아직 거두지 않은 공물가포(貢物價布)를 감하게 하였다. 흉황이 아주 심한 고을은 3분의 2를 감하고, 그 다음은 절반을 감하고, 조금 여문 고을은 3분의 1을 감하게 하였는데, 모두 1백 90여 동이었다.
12월 7일 경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초복을 마치지 못했던 것을 끝마쳤다. 총융사 서필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병영(兵營)을 옮길 일로 우러러 품의했었습니다. 경기의 고을에 나가서 지형(地形)을 살펴 보았더니, 인천(仁川) 소래산(蘇來山) 아래가 교장(敎場)을 설치할 만하였는데, 들으니 인평위(寅平尉)와 해숭위(海嵩尉)의 둔장(屯庄)이 그곳에 있다고 합니다. 본영에서 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평(富平)에 또 병영을 설치할 만한 묵혀둔 지역이 있었습니다. 통진(通津)과 남양(南陽) 두 병영을 이 두 지역으로 옮겨 설치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서필원에게 이르기를,
"자연도(紫燕島)에 가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가서 보니, 그 지역은 둘레가 70 리이고 땅이 기름졌으며 사방이 험난하여, 강도(江都)보다 나았습니다."
하니, 상이 뒷날 도형을 그려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12월 10일 계사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조세환(趙世煥)을 장령으로, 이훤(李藼)을 지평으로,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합(李柙)을 보덕으로, 김휘(金徽)를 좌윤으로 삼았다.
12월 11일 갑오
전라도 순천(順川)의 민가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몸에 머리가 둘이었다.
당시에 기근을 치른 끝에 전염병까지 극성을 부렸으므로, 사망하였다는 각도의 보고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12월 12일 을미
충청도 비인(庇仁) 등의 읍에 지진이 있었다.
지평 이훤이, 삭시사(朔試射) 때에 추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13일 병신
장령 조세환이 소를 올려, 이원정 부자의 일을 극력 말하고, 아울러 시관(試官)들의 분소(分疏)한 실책을 공척하기를,
"아, 장시(掌試)는 중요한 임무이고 취인(取人)은 중대한 일입니다. 중요한 임무를 받아 중대한 일을 맡은 자는, 설령 자신에게 조금도 미진한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 세상 사람들이 의심을 하고 양사의 신하들이 또 논쟁을 하면, 우선 인혐하고 스스로 논열하여 한결같이 공론에 부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장황하게 말을 꾸며서 급급히 분소하였으니, 비록 일을 논하는 옥당의 신하도 본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대신이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연경(燕京)에서 들은 풍문에 의하면, 이일선(李一善)이 우리 나라에서 돌아와 관중(館中)의 아역(衙譯)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동쪽에 갔을 때에 우상을 협박하여 많은 은화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합니다. 아,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호조의 은을 가지고 일선의 입을 막았으니, 조정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것이 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대신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편치 않겠습니까? 저들이 오면 공용의 물건을 가지고 뇌물을 주고 저들이 가고 나면 태연히 말이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 사이에 도는 말이야 돌아볼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저놈들이 가서 뽐내며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은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근래에 나라가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좋지 못하여, 붕당의 사사로운 의논이 마구 나오고 이기기만을 위해 힘쓰는 폐단이 날로 심하다. 요즈음 이원정의 일로 대신을 공격하여 이미 그 지루함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이번 조세환의 상소는 억양하며 능멸한 외에 또 풍문으로 들은 말을 가지고 크게 비판하고 있으니, 아,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말인가. 우상에게 원한이 쌓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초 우상이 대죄하면서 실정을 진달한 것은 실로 부득이한 것이었다. 부정한 무리들이 이것를 가지고 노여워하며 지나친 생각으로 공격하여 끝이 없으니, 한갓 저들의 말이 귀한 줄만 알고 대신을 경멸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것이다. 그 생각이 지극히 가증스러우며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장령 조세환은 관작을 삭탈하고 궐문 밖으로 쫓아내 뒷날 저들의 말을 빌어 공경을 견제하는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세 번이나 아뢰어 하교를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 인대(引對)했을 때에 정언 박지가, 세환을 삭탈하여 내쫓는 것은 대관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환이 감히 일선의 말을 빌어다 상소에 인용하였으므로 그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다. 그래서 벌을 준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일선이 왔을 때 무슨 ‘우상을 위해 은을 준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세환이 저들의 말을 빌어 대신을 능욕하였으니, 마음 쓰는 것이 바르지 않다. 그 죄를 논하자면 삭출만 하고 그칠 일이 아닌데 정원이 세 번이나 복역(覆逆)하니 매우 놀랍다."
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설령 국가가 은을 뇌물로 준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선 역시 반드시 이를 굳게 숨길 것입니다. 어찌 자랑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필시 역관들이 빈말을 지어내 세환을 속인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 최후상이 아뢰기를,
"세환의 말이 비록 경솔하였다고는 하나 대각의 직책을 갖고 있는데 곧 삭출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화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대간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대단히 간악한 자라도 너그럽게 포용해야 된 다는 말인가? 또 국가가 대간을 둔 뜻이 어찌 이처럼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내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12월 14일 정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삼복(三覆)하였다. 이날 사형으로 결단한 자가 20명이었다. 수안(遂安) 사람 이지휼(李枝恤)이라는 자는 병신년 봄에 그의 처형 김애격(金愛格)의 집에 가서 물건을 추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도주하였는데, 그의 아비 이승립(李承立)이 ‘애격이 재리(財利)를 가지고 서로 다투다가 몰래 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는 말로 관에 고발하여 소송을 걸었다. 지휼의 숙부인 이호림(李豪林)과 지휼의 아내 선합(先合)이 또 그것을 증언하였다. 애격이 해명하지 못하고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애격의 아내 봉생(奉生)이 비명에 간 남편을 애통해 하여 원수를 갚고자 이리저리 종적을 찾기를 14년이나 하다가 비로소 지휼을 찾아내어 관가에 고소하였다. 지휼과 그의 아내 선합은 모두 살인 음모죄로 조율하여 결단할 참이었는데, 살인 음모죄는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죄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지휼이 무단 도주한 것이 이미 매우 의심스럽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선합은 애격과 친동기 간인데 다른 사람의 시신을 남편의 시신이라고 증언하였는가 하면 온갖 방법으로 술수를 부려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게 하였습니다. 선합의 속셈은 재물을 차지하려는 것으로서, 인정과 법으로 논해 보건대 절대로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사형으로 결단하였다. 죄인 이옥명(李玉明)이란 자는, 열세 살 된 아이로서 율옥(栗玉)이 남편을 죽일 때에 곁에서 돌멩이를 집어준 자이다. 처음에는 일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형에 의율했는데, 여러 신료들이 다들 억울한 일이라고 하였다. 계집종 연옥(然玉)이란 자는, 시집가기 전에 어떤 사람과 사통(私通)하였는데, 남편에게 시집간 뒤에 사통했던 자가 그 남편을 죽였다. 처음에는, 간부(奸夫)와 함께 본남편을 죽였다는 이유로 사형에 해당시켰는데, 사람들이 모두들, ‘사통한 일이 시집가기 전에 있었으니 간부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사정도 몰랐으니, 사형을 감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기명(起命)이란 자는, 광질(狂疾)이 있어서 까닭없이 칼을 뽑아들고 네 살 된 아이를 죽인 자이다. 여러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장난을 하다가 사람을 죽인 경우에 모두 사형을 시키니, 비록 미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을 죽인 죄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허적은, ‘미친 사람을 용서해준 것은 선조(先朝) 때에 이러한 전례가 있다.’ 하였다. 석종(石宗)과 말립(末立)은, 배를 만들 목재용 나무를 기르는 산에 불을 낸 자인데, 나라의 금법에 사형에 해당하였다. 여러 의논이, ‘법이 평소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 우선 죄를 견감시켜 주고, 지금부터는 거듭 밝혀서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한 뒤에 사형으로 처단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모두 감사(減死)로 논죄되었다.
12월 15일 무술
밤에 달무리가 목성을 감돌았다.
12월 16일 기해
밤에 달무리가 목성을 감돌았다.
부교리 윤경교(尹敬敎), 수찬 신명규(申命圭) 등이 상차하기를,
"조세환(趙世煥)은 대각의 직책을 띠고 있는 몸으로서 있는 생각을 반드시 아뢰어 스스로 숨김이 없는 의리를 실천하였으니,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전하께서 갑자기 화를 내시어 배척하여 멀리 내치신 것은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이원정에 대한 일을 가지고 중도에 맞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의 말은 곧 한 나라의 공론입니다. 그의 말이 대신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대신에게 실책이 있을 때에 대간이 말을 하는 것이 도리어 부당하단 말씀입니까?
이원정의 일은 실로 오이밭을 지나가다가 신발을 고쳐 신은 혐의가 있는 것입니다. 외방의 시끌시끌한 말들은 비록 다 믿을 수는 없겠으나, 단지 대신 및 고시관들의 스스로 해명한 상소만을 근거로 해도 또한 그 실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원정이 품질이 높은 시관으로서, 이미 그의 아들이 지은 글인 줄을 알고서도 이에 감히 격식을 어겼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때에 조언을 한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그 의심할 만한 정황이 이러하고 보면, 대각이 이원정의 죄를 청하고 그 아들을 발방(拔榜)할 것을 청한 것은 단지 과거(科擧)의 일을 엄하게 하고 뒤폐단을 막고자 한 것입니다. 애당초 고시관들을 두고 모두 사심을 부렸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고시관들이 빈청에서 아뢸 때에 이말 저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올바르지 못하게 변명을 하였고 곧바로 또 차자를 올려 극력 분소(分疏)하여, 성상의 의심을 불러일으켜 간하는 신하의 말을 누차 꺾어버리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신에게 있어서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세환이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진소한 것이니, 우직하다고 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쌓인 울분으로 공정치 못한 일을 한 것이 있겠습니까.
연경(燕京)의 일에 대한 이야기는 필시 저곳의 풍문일 터인데, 문득 스스로 통분스럽게 여겨 대신을 책망하며 비분강개하여 진언하였으니, 과연 허실을 끝까지 살피지 아니한 실책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대개 소활하고 우직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경솔하였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저쪽 나라의 말을 존중하였다고 한다면, 이것은 실정을 벗어난 과당한 분부가 아니겠습니까? 세환은 말할 것도 없이, 무릇 신하된 자로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라면, 어찌 차마 저들의 말을 빌려서 근거없는 말을 교묘하게 지어내어 공경들을 겸제할 바탕을 삼고자 하겠습니까. 전 장령 조세환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차자가 들어간 지 6일 만에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세환은 언로에 있는 몸이니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면 되는데 지금 그렇지 않고 대신을 공격 배척하면서 이미 저들의 말을 인용하였고 이어 길거리에서 떠도는 말을 끌어다가 마치 이러한 일이 정말로 있어 어지럽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하니,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작은 잘못을 과장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편안하게 있지 못하게 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니, 그 계책이 교묘하고 치밀하다고 하겠다. 지금 옥당의 차사를 보니, 세환을 죄준 본의는 전혀 모르고, 오직 원정의 일만을 들어 반복 억양하며 세환이 죄를 입은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았다고 여기니, 나는 실로 알지 못하겠다. 비록 붕당의 사사로움에 급급한다고 하여도 어찌 감히 군상을 멸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경교와 명규 등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다시 하교하기를,
"조세환은 대신을 공격 배척하면서 저들의 말을 빌어왔으므로 심술이 음흉하기 때문에 삭출의 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옥당 차사를 보니 진실로 놀랍다. 만약에 명백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이러한 폐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잡아다 추문하여 저들의 말의 실상을 캐내어 징계의 바탕으로 삼으라."
하고, 세환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정원이, 명규 등을 파직 추고하고 세환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모두가 성스러운 세상의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두어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상이, 정원이 즉시 전지를 받들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는 듯이 행동하였다 하여, 당해 승지를 추고케 하였다.
12월 17일 경자
장령 이하(李夏)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양사가 이원정 부자의 일을 논한 것은 공공의 의논을 엄하게 하고 과거의 체모를 중하게 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또 조세환의 일에 대해 극력 말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 신하들이 여러 차례 상에게 아뢰자, 비로소 답하기를,
"상소 가운데서 말한 것은 심히 근거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지평 민종도(閔宗道)가 ‘이원정의 파직을 청하는 논계에 감히 가타부타할 수 없는 혐의가 있다.’ 하고, 대사간 이익(李翊)은 ‘일찍이 정원에 있을 때에 이미 추감을 당하였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아울러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18일 신축
경기에 여역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소의 역질도 크게 번졌다.
우상 홍중보가, 옥당의 차자에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물러나 성밖으로 나갔다. 정원이 아뢰니, 상이 하교하였다.
"우상이 갑자기 근거도 없는 괴이하고 망령된 말을 인혐하여 이런 거조를 하게 되었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에 손상되는 바가 작지 않다. 속히 들어와서 체례를 보존하여 나의 마음을 편안케 하라는 뜻으로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효유토록 하라."
12월 19일 임인
장령 홍수하(洪受河)가, 피혐해서는 부당한 혐의를 억지로 끌어대었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집의 심유(沈攸)가 아뢰기를,
"전 장령 조세환이 이토록 공론이 떠들썩한 때를 당하여 과거 시험이 엄하지 않았던 것을 상소하여 진달한 것은 바로 그의 직분입니다. 다만 그 말단에 상신(相臣)을 지적하여 공척한 말이 오류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마땅히 그 공론을 미루어 짐작하여, 말이 채용할 수 없는 것이면 버려두면 될 뿐인데, 생각지도 않게 거듭 진노하시어 삭출하라는 벌을 내렸습니다. 말을 하다가 죄를 얻는 것은 성대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조세환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상도 사량진(蛇梁鎭)에 불이 나서 집 2백여 호가 불탔다.
12월 20일 계묘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정륜(鄭錀)을 승지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이하(李夏)를 사간으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윤리(尹理)를 지평으로, 이정영(李正英)을 개성 유수로, 이훤(李藼)을 이조 좌랑으로, 이선(李選)을 부수찬으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응교로, 김덕원(金德遠)을 문학으로, 장선징을 병조 참판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예조 참판으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이후(李煦)를 정언으로, 윤가적(尹嘉績)을 사서로, 이수언(李秀彦)과 윤치적(尹致績)을 대교로 삼았다.
정언 박지가, ‘장령 이하(李夏)의 상소에서 이하가, 이원정의 파직을 논한 계사에 있는 말에 대해 공척을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며 아뢰기를,
"이하의 상소에, ‘주장하는 바가 모호하고 말한 뜻이 분명치 않다.’고 하였고, 또 ‘겉으로는 신들의 논계를 편드는 듯하지만 긴요한 말은 모두 빼버렸고, 겉으로는 옥당의 논계를 억누르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 의도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고, 끝에 가서는 ‘머뭇거리며 구차스럽게 한 습속은 전하로 하여금 대간을 경시하고 공론을 무시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하가 신을 공격한 것이 아주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이하는 이원정이 사심을 부렸다는 곳으로 귀결시키려는 것이고, 신은 이원정이 망령되고 경솔하였다는 곳으로 귀결시키려는 것입니다. 죄를 조감하고 방(榜)에서 빼버리기를 청하는 논계는 비록 차이가 없으나, 실정을 따져 죄를 정하려는 의도는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니, 이하의 공척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하가 이원정을 사심을 부린 곳으로 귀결시키려는 것은 길에서 들은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고, 신이 망령되고 경솔하였다는 곳으로 귀결시키려는 것은 시관들의 상소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관들의 상소를 분소라고 하면서 믿지 않는다면, 길에서 들은 말은 유독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자연히 공론이 있을 것이므로 신이 굳이 많은 변론을 하지 않겠습니다만, 모두가 보잘것 없는 신이 외람되이 대각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체직하여 배척할 것을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우상 홍중보가, 교외에 있으면서 상소를 올려 대죄하니,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 인심과 세도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어찌 이토록에까지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조세환이 감히 전해들은 말을 가지고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옥당의 차자는 장황하게 이말 저말을 하여 말이 근거가 없고 이원정의 말을 빌어다가 중언부언하여 못하는 말이 없었다. 이것은 임금을 겸제하고 대신을 능욕할 계책에 불과하다. 일이 놀랍고 해괴하기가 이와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경은 교외로 나가 일의 체모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속히 들어오라."
12월 21일 갑진
집의 심유(沈攸)가 연계하여, 조세환(趙世煥)을 삭출하고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부교리 윤경교(尹敬敎)와 부수찬 신명규(申命圭) 등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또 하교하였다.
"이 계사를 보니, 죄줄 만한 일도 없고 문초할 만한 일도 없다는 등의 말로 몸을 던져 구해(救解)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통분스럽고 해괴하다."
12월 22일 을사
우의정 홍중보가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근래의 삼사의 신하들은 연배는 비록 다르나 모두가 평소 친애하는 사람들이고 이원정은 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그저 범범하게 사귀는 사람이니, 무슨 임금을 속여가며 동료들을 속여가며 그릇되이 비호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저쪽 나라 운운한 말은 일행들은 듣지 못한 말입니다. 애당초 뇌물을 준 일이 없는 것은 조정이 아는 바인데, 오히려 상소 안에다 삽입하여 신을 잡을 바탕을 삼았으니, 이 뒤로 만약 밝히기 어려운 일이거나 애매한 말로 죄목을 더한다면 성상께서 비록 신의 몸을 보전해 주시고자 하더라도 어찌 보전해 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을 내려 들어오게 하고, 이어 사관으로 하여금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윤경교와 신명규의 추고 전지를 의금부에 내렸다.
부응교 홍주국(洪柱國)이 차자를 올려, 윤경교와 신명규를 파직시켜 금부로 하여금 추고하게 한 일과 전 장령 조세환을 파직시켜 잡아다 추고하게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12월 23일 병오
행 판중추 정치화(鄭致和)가 차자를 올려 조세환 등의 일에 대해서 논하기를,
"세환이 감히 사실도 아닌 저쪽 나라에서 들은 말을 가지고 상소의 말단에 삽입하여 대신을 침해하여, 실책이 매우 심하였으니, 성상께서 그 실상을 끝까지 밝히려고 하시는 것도 마땅한 일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세환은 직책이 언지(言地)에 있어 자기의 생각을 진달한 것이니, 말이 비록 허망하더라도 마땅히 너그러이 용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삭출하라고 명한 뒤에, 옥당의 타당치 못한 차자를 인하여 성상의 노여움이 더욱 심해져,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습니다. 대간을 잡아다 추고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이것이 어찌 성스러운 시대의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옥당의 두 신하가, 차자를 올렸다는 이유로 금부에서 추고를 당하기까지 하는 것은 또한 성덕에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조세환의 일은 그 습속이 해괴하다. 어찌 언관이라고 해서 실상을 끝까지 밝히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장래의 이와 같은 폐단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인데, 어찌 그만 둘 수가 있겠는가. 금부에서 추고하게 한 일은 내가 마땅히 헤아려 처리하겠다."
하였다.
12월 24일 정미
달이 심성(心星) 큰 별을 범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고, 이어, ‘옥당의 두 신하를 파직하여 금부로 하여금 추고하게 한 일 및 조세환을 이전의 일을 인하여 잡아들인 일은 옳지 않다.’고 논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세환이 저쪽 나라의 말을 빌어 근거도 없는 말을 지어냈으니, 일이 통분스럽고 해괴하기가 어찌 이보다 심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만약 그 실상을 끝까지 조사해서 밝히지 않으면 장래의 폐단이 필시 오늘날보다 심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않은가. 그리고 윤경교 등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몸을 던져 구원하면서 임금을 멸시하고 반드시 겸제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씀이 너무나 경악스럽다. 파직 추고하는 벌도 또한 말감(末減)이라고 하겠는데, 무엇이 지나친 것이 있는가. 더구나 조세환 등이 죄를 입은 것은 모두가 자초한 것인데, 경에게 무슨 혐의할 바가 있기에 이렇게 불안해 하는가. 다시 사직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서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도제조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하나의 차자를 대략 올렸습니다만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불 또 이렇게 진달합니다. 조세환이 저쪽 나라의 허망한 말을 망령되이 진달하여, 잡아다 추문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만, 일찍이 인조(仁祖) 때에 조경(趙絅)이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고 공척하자 잡아다 추문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그 당시의 조정의 의논이 ‘대간을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잡아다 추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말의 뿌리를 끝까지 캐려고 하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겠습니다만,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환이 우상을 공격하려다가 단서를 얻지 못하자, 먼저 이일선(李一善)의 말로 발론을 하고 잇달아 여항에 떠도는 말로 뒤를 이었다. 일선의 말은 세환이 필시 직접 듣지는 않았을 것인데, 일행이었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듣지 못하였다. 오랑캐의 말을 빌어서 침해하며 공격할 계책을 삼았으니, 그 마음이 금수와 무엇이 다르랴. 이 뒤로 만약 없는 말을 지어내어 헤아릴 수 없이 남을 모함하려는 자가 있게 되면 그 폐단이 다시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미 통촉하시고 이렇게 처치를 하셨으니, 어찌 다시 세환을 본받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12월 25일 무신
평안도에 지진이 있었다.전라도 진산군(珍山郡)에 지진이 있었다.
황해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청하기를,
"도내 전세(田稅)의 쌀과 콩을 흉년이 들어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강도(江都)에서 우선 가져다 쓰게 하고 본도로 하여금 가을에 강도에 납부하여 채우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진휼할 곡식을 지급해 주소서."
하였는데, 진휼청이 회계하여, 그의 말대로 할 것을 윤허하고, 관향적곡 4천 석을 지급하여 진휼할 자본을 삼게 하였다.
12월 26일 기유
세자빈을 세 번째 간택한 후에 상이 빈청에 하교하기를,
"지금 참의 김만기(金萬基) 집 아이를 빈으로 정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허적, 행 판중추부사 정치화, 예조 판서 조복양, 참판 이정기, 참의 홍만용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아보건대 참으로 신민의 소망에 흡족하고 실로 종묘 사직의 무한한 복입니다. 신들은 큰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세자빈이 정하여지자 그날로 궁궐에서 나와 어의동(於義洞) 별궁으로 나가 거처하였다. 분병조(分兵曹) 당상과 낭청 및 위장(衛將)을 내보내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직숙하게 하였다. 가례 도감이 아뢰어, 빙재(聘財) 미두(米豆)와 면포(綿布)를 세자빈의 부모 집에 보냈다.
12월 27일 경술
민정중(閔鼎重)을 좌참찬으로, 윤가적(尹嘉績)을 정언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호조 참판으로, 이합(李柙)을 교리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설서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홍만종(洪萬鍾)을 사서로 삼았다.
제주에 세 읍이 또 기근을 보고하니, 조정에서 또 쌀과 벼 도합 5천 석을 이전하여 구제케 하고, 또 각종 씨앗 1천 5백 석을 주었다.
평안도 강계(江界)의 토병(土兵) 최연(崔連)이 물을 건너다가 얼음이 꺼져 빠지자, 그의 처 계생(界生)이 구하려다가 함께 빠져 죽었다. 이 일을 계문하니, 정려(旌閭)하도록 하였다.
12월 28일 신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은율현(殷栗縣)을 폐지한 지 이제 8년이 지났는데 아직 10년의 기한은 차지 않았습니다.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백성들의 소원을 인하여 곧바로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법으로는 허락해서는 안 되는데, 현(縣)을 복구하는 것이 진휼하는 정치를 하기에 편리하니 또한 마땅히 변통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에는 법을 지키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나, 일이 상규(常規)와는 다르니,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다시 설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진휼청 당상들이 지금 모두 입시하였으니, 각각 진휼할 방책에 대해서 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예판 조복양이 아뢰기를,
"국가의 경비가 이미 고갈되어 달리 손을 쓸 곳이 없는데, 다만 평안도에 있는 창고에 유치해둔 곡식 30여 만 석을 적당한 수량을 헤아려 가져다가 진휼할 자본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수(元數)가 얼마나 되는가?"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75만 석인데, 창고에 유치해둔 것이 30여 만 석입니다."
하였다. 참찬 민정중이 아뢰기를,
"타도의 세미(稅米)를 감면하고 관서(關西)의 곡식으로 그 숫자를 채우되, 남는 것은 진구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얼마를 사용해야 하겠는가?"
하였는데, 민정중이 아뢰기를,
"대미(大米) 2만 석, 전미(田米) 3만 석이면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미 1만 5천 석, 전미 3만 5천 석을 가져다가 사용하라."
하였다. 민정중이 또, 타도의 세미를 감면할 일을 거듭 청하니, 호판 권대운이 아뢰기를,
"민정중이 진달한 바는 참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진구하려는 데에서 나왔으나, 경비를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고, 병판 김좌명이 아뢰기를,
"올해의 상납은 평년에 비하여 10분의 1인데, 또 감면을 시킨다면, 나라의 비용을 의지할 곳이 없어집니다. 전세(田稅)는 결코 감면시킬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전세는 완전히 감면하기는 어려운 바가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일 만한 자에게는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에게는 받아들이지 말아서 참작하여 받아들여 본도에 유치해 두었다가 내년 봄에 가져다 쓸 자본을 삼는다면 실제적인 혜택이 될 듯하다."
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옳습니다. 거두어 받아들여 유치해 두었다가 뒷날의 용도에 대비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겠습니다. 만약 견감하여 면제한다는 의논이 먼저 있게 되면, 외방 사람들이 관망하며 납부치 않을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외방에서 얼어죽고 굶어죽은 일에 대한 장계가 끊임없이 올라오는데, 옥중에 적체되어 있는 죄수들도 필시 얼어죽을 염려가 많습니다. 참으로 중죄인이 아니라면 어찌 한결같이 적체시켜 둘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해도 바뀌게 되었으니, 특별히 각도에 하유하여 즉시 소결하여 석방하게 하소서. 서울의 옥중에 있는 죄수들도 중죄인이 아닌 자는 또한 속히 처결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원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각도에 하유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판중추 정치화가 차자를 올려 윤경교 등의 일을 진달하자, 잘 헤아려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정원이 품의하지 않았습니다. 대각의 논계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삼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정원의 과실이 아니다. 대간이 바야흐로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고 있기 때문에, 정원이 전례에 구애되어 아직 품의하지 않은 것이다. 정원이 만약 추고 전지를 봉입한다면 의당 사헌부에 고쳐서 내릴 것이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외방에 있는 유신들에게 유지를 내려 그들로 하여금 올라와서 함께 나라 일을 다스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하유하게 하였다.
팔도 감사에게 유시를 내렸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러한 큰 흉년을 만나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모두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슬퍼 밥상을 앞에 두고도 먹을 생각이 없다. 구제의 방법을 한껏 써보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해가 바뀌려는데 엄한 추위는 풀리지 않아 언 감옥의 적체된 죄수가 더욱 염려된다.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착실하게 진휼하는 외에, 죄수 가운데 죄가 무거운 자는 계문하여 재가를 받고 가벼운 자는 바로 소결하되, 속히 거행하여 감옥에서 적체되는 근심이 없게 하라."
사관(史官)을 보내 행 판중추 송시열, 세자 찬선 송준길·이유태에게 유시하여 올라 오게 하였다.
조정 신하로 휴가를 받아 하향한 자 가운데 대신 이외는 공궤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좌명의 말에 따른 것이다.
12월 29일 임자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본읍에 두었다가 진휼의 자본에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훈국 별대(訓局別隊)의 보인에게 미포를 징수하여 올리라는 명을 거두어서 그들에게 신의를 잃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속오군을 급복하는 일 외에는 모두 그 말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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