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계축
조관(朝官)과 사인(士人)으로 하여금 검은 옷을 입게 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동방 사람은 예로부터 흰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기는 하나 그대로 습속이 이루어져서 바꾸지 못하였는데, 상이 바꾸고자 하여 이 제도를 정한 것이다.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명이었다.
1월 2일 갑인
김상(金鋿)을 헌납으로, 이광적(李光迪)·박지(朴贄)를 장령으로, 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삼았다.
황해도에 여역과 우역(牛疫)이 모두 많이 번졌다.
천안현(天安縣)과 진도현(珍島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천안은 조모(祖母)를 시해한 변고가 있었다는 이유로, 진도는 전패(殿牌)를 분실한 변고가 있었다는 이유로 모두 현으로 강호(降號)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10년의 기한이 찼기 때문에 다시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다.
1월 3일 을묘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5천 1백여 명이었는데 여역이 잇달아 번져서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소의 역질도 계속 심하게 번졌다.
1월 5일 정사
송광연(宋光淵)을 정언으로 삼았다.
종부시가 아뢰기를,
"시예(試藝)에서 1등을 차지한 종실에게 잔치를 하사하는 것은 법전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이 사연 절목(賜宴節目)은 근거가 없지 않으니, 통상 행하던 의식을 지금 마땅히 본받아 행해야 하겠습니다만, 지금은 흉황이 한창 급박하여 온갖 일들을 재량하여 줄이고 있습니다. 시예에 잔치를 하사하는 것이 비록 친족을 돈독하게 하고 권장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또한 평상시 넉넉하던 때에나 하던 일입니다. 지금은 우선 정지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차자를 올려 허물을 끌어대어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나랏일은 참으로 위태하다. 백성들이 몹시 곤궁하여 굶고 얼어서 죽었다는 계문이 잇달아 올라온다. 내 놀라고 슬픈 마음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먹고 지내는 것이 편치 않아서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쳤다면 반드시 서둘러 오리라고 여겼는데, 이제 해가 이미 바뀌었는데도 줄곧 물러가 있으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빨리 들어와 상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효유하게 하였다.
집의 심유(沈攸)가, 감히 간원을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월 7일 기미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의 녹봉을 3년을 기한으로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아뢰기를,
"접때 전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인하여 진달한 바가 있었는데, 전하께서 이미 너그러이 받아들이지도 않으시고 또 뒤이어 계(啓) 자를 찍어 내리셨으니, 언로를 넓히고 유신(儒臣)을 예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흠이 큽니다. 그런데 정원이 끝내 복역(覆逆)한 말이 한 마디도 없었으니, 그 직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당해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고, 또 집의 심유(沈攸)에 대해 처치하기를,
"상신(相臣)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미안한 하교가 있긴 했어도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은 대간의 체모에 있어서 당연한 일입니다. 출사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하교하기를,
"심유가 굳이 병을 핑계하여 여러 날 소를 올렸으니 규피하는 형적이 있다. 체차하라."
하였다.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추감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설서 정유악(鄭維岳)이 상소하여 원자(元子)를 보양(輔養)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궁료(宮僚)를 불러 볼 적에 예절을 간략하게 하여 조용히 자문하고 마음을 비워 경청하게 하소서. 그리고 경서(經書)에 밝고 학식이 넓으며 단정하고 선량한 선비를 극진히 가려서 세자와 조석으로 함께 지내게 하소서. 그러면 반드시 도움이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였다.
1월 8일 경신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다시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따뜻한 말로 효유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이유(李秞)를 집의로, 김수오(金粹五)를 지평으로, 강석창(姜碩昌)을 정언으로, 이하(李夏)를 수찬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사간으로, 오정위(吳挺緯)를 경기 관찰사로, 오정창(吳挺昌)을 설서로,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김만균(金萬均)을 보덕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사서로, 민점(閔點)을 판결사로, 이선(李選)을 겸문학으로 삼았다.
예조 판서 조복양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선이 접때 등대하였을 때에 양호(兩湖)의 전세는 혹 감면해 주거나 혹 유치해 두었다가 진휼하는 데 쓰게 하고 관서(關西)의 쌀을 가져와서 대신 채우자는 뜻으로 누누이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외방의 말을 들으면 민간에 굶어 죽는 무리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날마다 들리는 것이 모두 놀랍고 슬픈 일들입니다. 이런 때에 굶주린 백성에게서 전세를 독촉해 받아 수송해 온다는 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제 수량을 모두 남겨 두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긴다면, 양호의 연해안 고을만 상납하게 하되 쌀과 콩의 두수(斗數)를 적당히 줄여 주게 하고, 산간 고을은 모두 받아서 본도에 두었다가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하게 하소서. 이 일은 결코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조복양이 민정중(閔鼎重)·김만기(金萬基) 등과 함께 입시하였을 때에 삼남(三南)의 전세를 감면해 주자고 청하였는데, 허적(許積)·김좌명(金佐明)·권대운(權大運)이 다들 ‘경비가 염려되므로 전세는 결코 줄일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의논이 결정되지 않았었는데, 조복양이 또 상차하고 며칠이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상이 차자의 사연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물어보고는 마침내 전세를 받아서 남겨 두었다가 진휼하는 데 보태 쓰라는 명을 내렸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인피하기를,
"신이 심유(沈攸)를 처치할 때에 그가 논계한 것은 대간의 체모에 있어서 당연하다고 여겼으므로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니, 거조와 태도가 놀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은 참으로 황공하여 한 시각도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명하여 체차하게 하고 이르기를,
"이광적이 비답을 받은 날에 밤이 깊지 않았는데도 인피하지 않고 나갔고, 이튿날 아침에는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고 있다가 한낮이 지난 뒤에야 말을 장황하게 하며 태연히 와서 인피하였으니, 그의 소행을 헤아려 보면 매우 해괴하다. 이처럼 분주한 대관(臺官)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하였다.
1월 9일 신유
어제에 이어 도목정을 하였다. 신정(申晸)을 교리로, 이유태(李惟泰)를 찬선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수찬으로 삼았다.
이유태는 아들과 조카들이 자못 재산 증식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므로 비방이 또한 이유태에게도 미쳤다. 사람들이 이것을 흠으로 여겼다. 민종도는 전에 북관(北關)으로 사신의 명을 받들고 나갔을 때 중한 복(服)을 입고 있던 중인데도 기악(妓樂)을 크게 벌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비난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상차하여 사직하고 녹봉을 보내주라고 한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니, 상이 도타이 비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효유하게 하였다.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병이 위독해지자 상이 수원 부사 원만리(元萬里)를 급히 불러 병을 구완하게 하였다. 만리는 곧 공주의 시아버지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숙경 공주가 죽었다. 공주가 대내(大內)에 나아가 알현을 하고 갑자기 두역(痘疫)에 걸렸는데, 나와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숙경 공주의 초상에 장생전(長生殿)의 관판(棺板)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숭문당(崇文堂)에서 거애(擧哀)하였다. 공주의 초상에는 으레 거애하는 의절이 있는데, 정전(正殿)에서 거애를 하면 백관이 외정(外庭)에서 조애(助哀)하고 만약 내간(內間)에서 거애를 하면 조애하는 예절이 없다. 일찍이 숙정 공주(淑靜公主)의 초상에 희정당에서 거애를 하고 백관은 차비문 밖에서 조애를 하였는데, 그 당시의 대신이, 예가 아니라고 하여 예관을 추고하기를 청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관이 사유를 갖추어 품의하니, 상이 숭문당에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또, 숭문당은 정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조애 절목을 거행치 말 것을 청하니, 상이 이 당은 내간이 아니라는 것으로 마련하여 봉입하게 하였다. 당시에 상께서 편찮으시어 약방이 세 번이나 아뢰어 거애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숙경 공주의 초상에 왕대비전(王大妃殿)도 거애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할 듯한데, 《오례의》에는 이 절목이 없습니다. 일찍이 숙정 공주의 초상에도 거애를 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이 예를 준용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의주(儀註) 가운데 왕세자도 거애하는 절차가 있는데, 지금 세자의 나이가 어리니 굳이 예를 행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1월 10일 임술
예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죽었다. 복양은 자가 중초(仲初)이며 좌의정 조익(趙翼)의 아들이다. 법도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여 일찍 명성이 있었고 벼슬에 오른 이래로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전부(銓部)의 장관과 문형(文衡)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사론(士論)을 힘껏 받쳐주어 여러 동료들에게 중망을 얻었다. 오래도록 추밀(樞密)에 있으면서 시설한 바가 많았고 누차 진휼청 당상이 되어 마음을 다해 진구하여 전후로 백성들을 살려낸 것이 매우 많았다. 이 해에 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자, 복양이 전세(田稅)를 감면하여 조금이나마 백성들의 힘을 펴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다가 대신과 탁지(度支)의 반대에 부딪쳐 탄식해 마지 않았으며, 병이 위독해짐에 이르러서도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상소를 하여 그 이해득실을 진달하여 상께서 깨달으시기를 바랐으니, 그가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을 사랑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가 죽자 상이 그가 아뢴 말을 생각하고 묘당에 의논하여 시행하였다. 뒤에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월 11일 계해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이 숙경 공주의 초상에 숙정 공주 초상 때의 전례를 따라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수송하라."
경기 부평(富平)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갑자기 돌풍을 만났는데 남녀 50여 명이 빠져 죽었다. 상이 휼전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 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뻐개고 고장(藁葬)을 파내어 염의(斂衣)를 훔치기도 합니다. 빌어먹는 무리들은 다 짚을 엮어 배와 등을 가리고 있으니 실오라기 같은 목숨은 남아 있지만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버렸는데, 여기저기 다 그러하므로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감영(監營)에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백 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죄가 있는 자는 흉년이라 하여 용서해 주지 않는데 한번 옥에 들어가면 죄가 크건 작건 잇따라 얼어 죽고 있어서 그 수를 셀 수 없고, 돌림병이 또 치열하여 죽은 자가 이미 6백 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1월 12일 갑자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아뢰기를,
"과장(科場)은 체모가 지극히 엄하므로 난잡한 일은 용납할 수 없는데, 이번 전시(殿試)의 시권(試券) 가운데에서 박천영(朴千榮)의 시초(試草)에는 칼로 긁어내고 글자를 첨가한 자취가 뚜렷이 있다 하니, 듣고 놀랐습니다. 근일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고 나라의 기강은 해이해져서 도깨비 같은 무리가 간계를 부리려고 힘쓰기만 하고 법금(法禁)이 두려운 줄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매우 마음 아픕니다. 그 시권은 이미 성상의 열람을 거쳤는데, 전하께서는 빈번한 정무를 보시느라고 제대로 살필 수 없었습니까, 아니면 두어 자 정도 잘못된 것은 혹 괜찮다고 여기신 것입니까? 방금(防禁)은 엄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뒤폐단은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박천영은 방목(榜目)에서 빼고, 차비관 및 거자는 모두 잡아다 추문하여 엄중히 처치하소서. 이번 박천영의 시권에 글자를 지우고 고친 자취가 뚜렷이 있었는데도 흐리멍덩하게 살피지 못하고 한꺼번에 섞어 입계(入啓)하였으니,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시관 강백년(姜栢年) 이하를 파직하소서. 전시의 장옥에 관한 일은 승지가 전적으로 관할하고 있는데 시권 가운데 지우고 고친 곳을 흐리멍덩하게 살피지 못하였으니, 승지 민점(閔點)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다 따르지 않고, 정원에 명하여 박천영의 시권을 도로 들여오게 하였다.
1월 13일 을축
예조 참판 유철(兪㯙)이 죽었다.
유철은 어릴 적에 과거에 올라 청현직을 두루 거쳤다. 강씨(姜氏)의 옥사 때에 형방 승지 정치화(鄭致和)가 병을 칭탁하고 면직되자 유철이 그 임무를 대신 맡아, 추국에 참여한 공로로 자급이 오르니, 공론이 하찮게 여겨 유 추국(兪推鞫)이라고 비난하는 말까지 있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유도삼(柳道三)과 인평(麟坪)이 만나 술을 마신 죄를 논하였다가, 옥에 내려져 형추를 당하고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갔다.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다시 조정에 서서 끝내 사퇴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1월 14일 병인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진휼에 필요한 물자를 청하니, 조정이 강도의 쌀 1천 5백 석을 떼어서 지급하였다.
1월 15일 정묘
민정중(閔鼎重)을 예조 판서로, 이후(李煦)를 장령으로, 조위명(趙威明)을 정언으로 삼았다.
간원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시권에다 보(寶)를 찍는 일은 승지가 전적으로 관장하는데,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이 따라가서 보를 찍는 것이 그들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막중한 전시의 시권 가운데 석 자를 지우고 고친 곳에 전혀 보를 찍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삼가지 않은 소치입니다. 당해 상서원의 관원을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강백년 등과 민점을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잡아다 추문하는 일은 따르고, 방목에서 빼는 일은 따르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12월 29일 이전에 굶주리고 얼어서 죽은 자가 2백 50여 명이었다.
평안도 벽동군(碧潼郡)에서 곰처럼 생긴 짐승이 사람을 물어 죽였다. 그 몸이 매우 크고 그 색은 반은 잿빛이고 반은 검고 혹 붉기도 하고 혹 희기도 하였으며, 곰과 비슷하나 곰이 아니었다.
경기에서 12월 보름 이후로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 70여 명이었다.
상이 숭문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가 장계한 진구 절목(賑救節目)의 조목이 매우 상세하였는데, 호구(戶口)가 없는 기민(飢民)에 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상께서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이런 무리들에게는 진구하여 먹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만, 당초에 호적에서 빠진 것은 비록 매우 미워할 만한 일이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 죽(粥)을 나눠주는 곳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또한 차마 못할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만 명의 기민들에게 죽을 나눠먹일 때에 호구가 있는지 없는지를 상고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일체 죽을 나눠먹이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가 상이 따르지 않자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대신의 말을 들으니, 대신도 역시 파직을 청하는 논계 속에 들어 있다는 문제를 가지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신이 올린 계사의 본의가 아닌 듯합니다. 대신은 명을 받고 총괄적으로 담당하는 자일 뿐이니, 서관들의 일로 문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시권의 본초에 농간을 부린 일에 대해서는 시관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고 하는데, 가령 시권 가운데 농간을 부린 곳이 많이 있을 경우 까맣게 살피지 못하고 있다가 일이 발각된 뒤에 감히,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시권을 이미 대내로 들인 뒤에 만약 난잡한 일이 있다면 장차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까. 그리고 승지는 시권을 고열하여 취하는 일에는 본래 간여치 않으나, 상서원 관원과 함께 앉아서 보(寶)를 찍는데, 이번 시권 가운데 너댓 자를 지우고 고친 곳에도 전혀 보를 찍지 않아서 간사한 무리들로 하여금 교묘한 계책을 부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간사한 짓을 한 원인을 따져보면 책임이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인데, 어찌 추고만 하고 그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소견은 이와 같은데, 대신으로부터 공척을 당하였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1월 16일 무진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나이 80인 자에게 사부(士夫)이거나 상한(常漢)이거나를 따지지 말고 관직이 있거나 없거나를 가리지 말고 특별히 자급을 더해주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보이도록 하였다.
명하여, 서울에서 선혜청, 한성부, 훈련원 등 세 곳에 비로소 죽을 나눠먹이는 장소를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진구하게 하였다. 첫날에 죽을 먹으러 온 자가 6천여 명이었고 다음날에는 1만 명을 훨씬 넘었는데, 죽을 끓여서 나누어 주었다. 사족의 부녀자로서 죽을 나눠주는 곳에 나오기 어려운 자와 죽을 먹고 지내던 자 가운데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짓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모두 마른 양식을 지급하였다. 빌어먹는 무리들이 이미 귀신의 형상이 되어 길에서 엎어져 죽어갔으니 기상이 참담하였다.
부응교 홍주국이 상소하여, 복색에 있어서 흰색을 물들여 변화시키는 폐단을 극력 말하였는데, 3개월이 지난 뒤에 비로소 답을 내려, 뒷날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1월 17일 기사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김덕원(金德遠)과 윤가적(尹嘉績)을 지평으로 삼았다.
원양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67명이었고, 소의 역질도 계속 번졌다.
헌납 김상(金鋿)이, 일찍이 명칭이 맞지 않아서 대참(臺參)을 무겁게 입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지평 윤가적이 문과의 전시를 모두 삭방(削榜)할 뜻으로 발론하였으나 동료의 의논이 합치되지 않자 인피하기를,
"국조에서 인재를 뽑는 것은 오로지 과거에다 맡기고 있으니, 대개 그 설치한 뜻이 지극히 공정하고 간사한 짓을 막는 법이 지극히 엄한 것인데, 이번 문과의 전시는 난잡하고 공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담명(李聃命)의 일이 전에 이미 일어났고 박천영(朴千榮)의 시권을 지우고 고친 것이 또 이처럼 명백한데, 이러한 것을 내버려두고 있으니, 신은 그로 인해 앞으로 과거를 시행하여 인재를 뽑을 수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신이 오늘 모인 자리에서 말을 꺼냈으나 의논이 여러 갈래여서 끝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한 탓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장령 이후(李煦), 지평 김덕원도 인피하기를,
"이원정(李元禎)의 죄목은 다만 자기의 일을 가지고 제 아들의 일을 변증한 데에 있고 이담명에 대한 단안(斷案)은 그 아비 덕으로 위격(違格)을 면케 된 데에 지나지 않는데, 이원정이 들어가기 전에 합격 여부가 이미 판정되었으며 그 글이 눈앞에 있지 않았으니, 주고받은 말은 그저 별다른 뜻이 없이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로 증거댔기 때문에 자식이 위격을 면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원래 실상이 아니고 또한 법을 심하게 적용하는 것이 됩니다. 그 아비가 무심코 한 말 때문에 이미 합격한 그 아들을 과방(科榜)에서 빼낸다는 것은 인정이나 법으로 헤아려 봐도 너무 심하다 하겠습니다.
박천영의 시권이 고쳐진 일에 있어서는 그 사이의 허실(虛實)을 상세히 조사해 밝히라고 이미 명하셨습니다만, 이 때문에 일이 확대되어 한 과방을 전부 삭제하는 것은 실로 뜻밖의 일입니다. 아, 지난해에 한 과방을 파했는데 올해에도 한 과방을 삭제하면 이 뒤로는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을 수 없게 될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적겠습니까. 신들의 의견은 이러한데 미처 상의하기도 전에 동료가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조위명(趙威明)이 처치하여 윤가적은 체차하고, 이후와 김덕원은 출사시켰다.
등록관(謄錄官) 이태서(李台瑞), 지동관(枝同官) 이수경(李壽慶), 사동관(査同官) 박문도(朴文道), 거자 박천영(朴千榮)을 금부에 내렸다. 당초 박천영의 시권 가운데에 한 자의 반쪽을 고친 곳이 있었는데, 다 주묵(朱墨)으로 썼고 필획이 미세하여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합격할 수 있었고 임금의 열람에 들기까지 하였다. 도로 내려오자 정원에서 다시 가져다 보다가 비로소 그 부정한 짓을 발견하였는데, 대간이 이를 논계하여 그 음험한 짓을 추궁하자고 청하였으므로, 이에 모두 하옥하라고 명한 것이다.
1월 19일 신미
경상도에서 전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1만 1천 5백 53명이었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의 상소에 따라, 통영(統營)의 벼 4천 석을 덜어 내어 좌·우도(左右道) 각 진포(鎭浦)의 토졸(土卒)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 그 생활을 도우라고 명하였다.
사관을 보내어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찬선 송준길(宋浚吉), 행 호군 이유태(李惟泰)에게 가서 전유하여, 올라와서 어려운 시국을 함께 구제하게 하였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1월 20일 임신
상이 숭문당(崇文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전세(田稅)를 줄여야 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장하는 자는 민정중(閔鼎重)이고, 줄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는 권대운(權大運)입니다. 신은 호조의 경비가 모자라는 것을 익히 압니다마는, ‘백성이 바야흐로 굶어 죽고 있는데 어떻게 구제할 것이냐.’는 분부를 듣고부터는 성상의 훌륭하신 뜻에 감격해 이제는 감히 처음의 소견을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본디 전량을 감해 주고 싶었습니다마는, 만일 할 수 없으면 받아서 본관(本官)에다 두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토록 전에 없이 큰 흉년이 든 해에는 각도의 전세를 실어나르는 데에 민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삼남(三南) 및 원양(原襄)·황해·경기 등 여섯 도의 전세는 받아서 모두 본도에 두어 구휼할 밑거리로 삼으라."
하였다. 민정중이 또 아뢰기를,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身貢) 중에서 확실히 지목하여 거둘 곳이 없는 것들은 탕감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권대운이 아뢰기를,
"번번이 탕감해 주면 필시 뒤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술년001) 조(條) 가운데 확실히 지목하여 거둘 곳이 없는 것은 탕감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민정중의 본직을 체직하여 진휼하는 일을 오로지 담당케 하라고 명하였다.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장선징을 대사간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수원 부사로, 송광연(宋光淵)을 지평으로, 박지(朴贄)를 헌납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정기와 이상진은 다 벼슬을 그만두고 나오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담담하게 겸양하며 물러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자못 인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까닭없이 다시 벼슬길에 나서자 식자들이 비웃었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4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이정기와 이상진은 다 벼슬을 그만두고 나오지 않은 지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담담하게 겸양하며 물러가 있는 것을 사람들이 자못 인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까닭없이 다시 벼슬길에 나서자 식자들이 비웃었다.
정언 조위명(趙威明)이 인피하기를,
"요즈음 과거 시험의 일 때문에 대간의 논의가 날로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당초에 이원정(李元禎)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지 않았으므로 파직시키자고 청하였으나 이담명(李聃命)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담명에게 죄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중간에 파직을 논하면서 서용하지 말 것까지 추가하였고 또 이담명을 방목에서 뺄 것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논의에 한 가지를 더한 것이고, 시관이 시험지의 본초와 맞추어 보지 않았다 하여 파직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또 한 가지를 더한 것인데, 이제 또 문득 삭방(削榜)하자는 의논을 제기했으니 참으로 너무 격렬해지고 말았습니다. 헌부의 이의는 대개 선조(先朝)의 수교(受敎)를 지키려는 것이므로 처치할 때에 이로써 결정한 것이었는데, 지금 물의를 들으니 그르다 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장령 이후(李煦), 지평 김덕원(金德遠)도 인피하기를,
"처치한 관원이 바야흐로 시비 중에 들어 있으니, 신들이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형세는 이제 판가름이 났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위명은 별로 체차할 만한 일이 없으니 출사시키라."
하였다.
1월 21일 계유
충청도 정산(定山) 등 고을에서 굶주림과 추위와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43명이었다.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본원의 전계(前啓)인 이담명에 대한 논계에 대해서,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초 빈청의 논계와 고시관의 상소에서 이미 그 실상을 다 말하였으니, 신이 반복하여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한갓 그 아비가 별 뜻없이 주고받은 말을 가지고 사사로운 혐의가 있다고 결단을 내려 발방(拔榜)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화평한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이 이와 같기 때문에 전계를 그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그대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송광연(宋光淵)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원정이 사사로운 혐의를 피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으로 증거를 대주었고, 이담명은 정식(程式)을 버려두고 특별히 표식이 나는 규례를 사용하였으며, 박천영은 시권을 지우고 고쳐 썼으니,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난잡한 과거는 그대로 둘 수가 없기 때문에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전시를 파방해야 한다는 뜻으로 발론을 하였는데, 장관이 파방하는 일을 중대하게 여겨 끝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이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헌 이정기(李廷夔)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평 송광연이 전체를 파방(罷榜)해야 한다는 뜻으로 대석에서 발언하였는데 이 의논도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한두 사람의 죄로 한 방(榜)의 문·무과 죄없는 사람들을 모두 파방한다면 일이 매우 억울할 듯합니다. 뒤폐단이 장차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염려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대의 수교(受敎)에,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고 죄가 거자에게 있으면 거자를 죄주게 하여 영구한 법식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범법한 바를 따라 두세 사람 정도 빼버려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발방(拔榜)하는 규례가 없다면 모르겠거니와, 있고 보면 어찌 범법한 자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파방을 하기도 하고 발방을 하기도 해서 다르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죄가 있다면 그 아홉 사람을 발방하더라도 죄없는 사람은 남게 됩니다. 파방을 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러한데, 끝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말이 체통이 있는 말이다. 나이 어린 부박한 무리들의 의논에 대해서 무슨 혐의할 게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정기도 또한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기를,
"자신의 소견을 굳이 고집하며 공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홍만종을 체차하소서. 하나의 과거를 완전히 삭방(削榜)하는 것은 너무 지나침을 면치 못합니다. 송광연을 체차하소서. 전계를 그대로 전한 것은 뜻이 중도를 얻으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정기는 출사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월 22일 갑술
남부(南部)에 사는 고(故) 진사 신빈(申彬)의 아내 김씨가 신빈의 전처 소생인 셋째 아들 신유정(申有楨)과 몰래 간통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동시에 목을 매어 죽었다. 어미와 아들이 서로 간통한 것은 강상의 막대한 변고인데 남녀 두 사람이 다 이미 스스로 죽어서 정형(正刑)을 시행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들 통분스럽게 여겼다.
1월 23일 을해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판서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참판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병조 참판으로, 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윤계(尹堦)를 지평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홍처량은 젊어서부터 청현(淸顯)의 직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사람됨이 별로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산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아경(亞卿) 반열에 오르게 되자 다시 나와서 벼슬하니, 그의 거취가 터무니없는 것을 식견있는 자들이 비난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0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4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홍처량은 젊어서부터 청현(淸顯)의 직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사람됨이 별로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산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아경(亞卿) 반열에 오르게 되자 다시 나와서 벼슬하니, 그의 거취가 터무니없는 것을 식견있는 자들이 비난하였다.
상이 숭문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때에 나라에 저축된 것이 있다면 백성의 부역을 줄여 주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저축된 것이 전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하자, 지사(知事)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지난해에 조금 풍년이 들어 쌀값이 자못 싸지자 공사간에 함부로 쓰고 아낄 줄을 몰랐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하고, 부사직(副司直)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모든 일에서 적당히 줄여써야 하겠습니다만 군사에게 드는 것이 가장 많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때 도성에다 군사를 많이 양성하다가 나라의 저축이 헛되이 소비되고 말았습니다. 중국도 이러한데 더구나 우리 나라이겠습니까."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경외(京外)에 진제장(賑濟場)을 이미 설행하였습니다만, 반드시 어사를 보내어 민간의 고통과 원망이나 구황 정책의 잘잘못을 탐문하여 아뢰게 한 다음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로 외방의 백성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각도에 두루 보내지 않더라도 경계하는 효과가 저절로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제주에서 식년(式年)에 으레 공납하는 말 5백 필이 이제 올라올 때인데, 굶주린 백성을 시켜서 뒤져 붙잡아 오게 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몰고 올 때에도 필시 일로(一路)에 폐단을 끼칠 것이니, 올해에는 우선 바치지 말게 하라."
밤에 유성이 태미원(太微垣)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흰색이었다.
1월 24일 병자
귀인(貴人) 장씨(張氏)가 죽었다. 장 귀인은 인조 대왕의 후궁이다. 상이 예장(禮葬)하라고 명하였다.
1월 25일 정축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을 대제학으로, 민정중(閔鼎重)을 판윤으로, 김상(金鋿)을 장령으로, 김세행(金世行)을 지평으로 삼았다.
흉년이라는 이유로, 새로 수령에 제수되어 부임하는 자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게 하도록 명하였다.
각도의 효행이 있는 자에 대해서 등급을 나누어 상전(賞典)을 베풀었다. 이보다 앞서 감사가 사유를 갖추어 계문하였는데, 예조가 등급을 나누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그 다음은 벼슬을 추증하거나 관직을 제수하고 그 다음은 급복(給復)해 주었다. 미처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죽은 자는 벼슬을 추증하고 미처 급복해 주기 전에 죽은 자도 3년을 기한으로 급복해 주었다.
밤에 달이 남두성(南斗星) 괴중(魁中)으로 들어갔다.
1월 27일 기묘
햇무리가 지고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관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빛은 다 안이 붉고 밖이 파랬다. 우박이 내렸다.
집의 이익상(李翊相)이, 패초(牌招)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으레 추감(推勘)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28일 경진
정언 조위명(趙威明)이, 특별히 출사하라는 명이 있었더라도 감히 부름에 응하여 나아갈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29일 신사
최관(崔寬)을 승지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이삼석(李三錫)을 정언으로, 유하익(兪夏益)을 사서로 삼았다.
행 판중추 송시열(宋時烈)이 회덕(懷德)에서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변고를 당하고부터 부끄럽고 두렵고 분하고 원통하여, 비록 정신을 차려 조금 평상을 회복하고 싶었지만 한번 그 마음을 상하자 오성(五性)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에 사무치는 이러한 악명을 받았으니 감히 하늘의 태양 아래에서 낯을 들 수 없습니다. 신의 직책이 서추(西樞)의 한산직이기는 하나 이 추하고 욕된 몸으로 스스로 원보(元輔)가 으레 받는 반열에 같이 있는 것은 참으로 외람된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송시열이, 이세직(李世直)에게 무고의 변을 당한 적이 있었으므로 상소한 말이 이러하였는데, 상이 도타이 비답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1월 30일 임오
충청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백 54명이었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본도(本島) 세 고을 민생의 일은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는데 나무 열매가 이미 다하였고 내려가 풀부리를 캐는데 풀부리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마소를 죽여서 배를 채우고 있으며, 무뢰한 자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공사간의 마소를 훔쳐서 잡아먹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람들끼리 잡아먹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으니 비참한 모양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8월부터 죽을 장만하여 구제하고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이미 다하여 4만여 명의 굶주린 백성을 다시금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해안 고을의 소금을 넉넉히 들여 보내소서. 전일 옮겨 온 5천 석의 곡식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1, 2월 두 달의 진휼할 거리도 모자라므로 3, 4월에는 한 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서 진구할 방책을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전라도에 있는 호조 소금 5백 석과 상평청(常平廳)·통영(統營) 및 양남(兩南)의 사복시 목장 등의 곡식 7천 석을 떼어 지급하여 전라 수영의 병선(兵船)으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바닷길이 멀고 풍파에 막혀서 지난해 초겨울에 부친 장계가 이제야 도착했고 전후로 곡식을 나르는 배도 제때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섬 백성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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