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3권, 현종 12년 1671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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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계미

강화부에 해일이 있었는데 바닷물이 들이치는 것이 석 자쯤이나 되기도 하였고 각처의 둑도 많이 무너졌다.

 

2월 2일 갑신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대비전과 세자도 같은 날에 옮겼다. 궁중이 정결하지 못하고 재변이 많다는 말이 외간에 나돌았다.

 

밤에 유성이 북극성 위에서 나왔는데 흰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집의 이합, 장령 김상, 지평 윤계가 아뢰기를,
"접때 경릉 참봉(敬陵參奉)이,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을 능침의 안산(案山) 금지 구역에다 장사지낸 일을 논하여 예조에 보고하였는데, 예조가 낭청을 시켜 적간하게 하였더니, 낭관이 본릉의 참봉과 함께 적간한 뒤에 형상을 그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 전의 그림을 무시하고 고쳐 그려서 바쳤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신들이 참봉이 보고한 서장과 낭관이 그린 산의 그림을 가져다 보니 차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무릇 능침에 관계되는 일은 더없이 엄하고 중대하므로 실상을 명백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당해 참봉·낭청을 모두 나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고, 따로 예관을 보내어 다시 금지 구역의 한계를 살피게 하고, 또한 본도의 도사를 시켜 지방관과 함께 그 묻은 곳을 조사하게 하여 법대로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일 을유

간원이, 전에 아뢰던 시관 강백년(姜栢年) 이하를 파직하는 일을 정계하였다.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2만 3천 5백 53명이고 함경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4천 8백 69명이었다. 전라도에서 정월 이후로 굶주린 백성 가운데 얼고 굶어 죽은 자가 2백 39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52명이었다. 평안도는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6백 48명이었다. 경기는 정월부터 여역으로 죽은 자가 1백여 명이었다.

 

경상 감사 민시중이 치계하여, ‘진구할 곡식을 장만해 낼 수가 없으니, 도내의 태복시, 훈국, 호조, 상평청 각 아문 소관의 곡물을 모두 빌려다가 사용하고 가을이 되거든 다시 받아서 갚도록 해주소서.’ 하였는데, 진휼청의 회계를 인하여, 태복시 이외의 각 아문의 잡곡에 대해서 모두 허락하였다.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여, ‘소금을 얻어서, 죽을 쑤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진휼청이, 관향염(管餉鹽) 50석을 옮겨 지급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당시에 서울이나 외방이나 기근이 아주 심하여 공사간에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났기 때문에 곡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강구치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노직(老職)의 가선·통정, 증직(贈職)의 지사(知事)·우윤·판결사·통례·좌랑, 그리고 영직(影職)의 판관·주부에서부터 서얼 허통(庶孽許通), 교생 면강(校生免講), 보충대(補充隊) 등의 첩문(帖文)을 만들어 각도에 보내어 곡식을 모집하게 하였다.

 

제주(濟州)에 지난 12월 2일 큰 바람과 많은 눈이 한꺼번에 닥쳐서 쌓인 눈이 1 장(丈)이나 되었다.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던 기민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길이 막혀 얼어 죽은 자가 91명이었다. 기근 중에 여역이 많이 발생하여 죽은 자가 또한 많았다.

 

2월 4일 병술

대왕 대비전과 중전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주의 세 고을의 기민을 구제하는 일이 하루가 급한데, 상세히 들으니, 제주도의 형세는, 주(州)에 저축된 진구할 곡물이 세전(歲前)에 바닥이 나게 생겼는데 곡식을 운송할 배는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며 석 달이나 되도록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전라도는 섬에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아직도 수송을 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수만 명의 백성들의 목숨이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각 고을의 곡물이 다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배를 출발시킨다면 그 형세가 필시 너무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통신(統臣) 및 두 수사(水使)로 하여금 곡식을 옮겨 싣는 대로 바로바로 들어가서 죽음에 임박한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만약 지체하게 되면 해당 수사가 책임을 면키 어렵다는 뜻으로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정기, 장령 김상, 지평 윤계가 아뢰기를,
"양산 군수(梁山郡守) 안후창(安後昌)은 전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있을 때, 김해(金海)·영암(靈巖)의 세금을 운반하는 배가 본읍의 포구에 와서 물이 얕아 기울어진 일이 있었는데, 원래 침몰한 것이 아닌데도 이에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혔다고 도신(道臣)에게 허위로 보고하였습니다. 도신이 이를 조사하여 실상을 알아 낸 다음 계문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하옥된 뒤에 교묘하게 말을 꾸며서 단지 도배(徒配)만 당하였습니다. 세금을 운반하는 배가 처음 닿았을 때에 뱃사람을 공갈 협박하여 달아나 흩어지게 하고는 간사한 서리(胥吏)와 짜고 몰래 1천여 석의 나라 곡식을 훔쳤는데 끝내 둔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보령 백성에게 해마다 거두고 있지만 아직도 그 수량을 채우지 못하고 있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살을 씹어 먹으려 하니, 지나간 일이라 하여 그냥 둘 수 없습니다. 그를 잡아다 추문하고, 또한 도신을 시켜 엄히 사실을 조사하여 율문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평안 병사 성익(成釴)은 전에 황해 병사로 있을 때, 정방 산성(正方山城)에서 오래 양성한 나무를, 성첩(城堞)에 바싹 붙어 있다고 핑계대고 마음대로 베어 팔아서 이익을 꾀하였습니다. 그 당시 산성 별장(別將)은 죄를 받기까지 하였으나 성익은 홀로 면하였습니다. 평안 병사에 제수된 뒤에는, 묘당에서 분부하여 벽돌을 많이 장만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성익이 이를 빙자하여 재력(財力)을 모아 사사로이 기와를 굽고 은화를 많이 받아서 죄다 사사로운 용도에 돌려 쓰고 벽돌에 있어서는 약간으로 책임만 메꾸었으니, 그 간사하고 방자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지난 겨울에 사은사가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안주(安州)에 들러 장막(帳幕)을 요구하였는데 반드시 남색 명주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병사가 처음에는 어렵게 여겼으나 마침내 그의 청에 따라 만들어서 뒤따라 보냈습니다. 이처럼 피폐한 때에 값이 비싼 물건을 억지로 정하여 요구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명주 장막은 상방(尙方)에도 없는 것인데, 상사(上使)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토록 참람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모두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상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과 평안 병사 성익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좌도(左道)의 해방(海防)에 종사하는 토졸(土卒)들에게 이미 번포(番布)를 줄였으므로 의지해 살아갈 길이 없어서 구덩이에 굴러 죽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다 하여, 월과미(月課米)를 덜어내 나누어 주어 진구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여, 월과미 5백 석을 덜어내어 영하(營下)와 소속의 열 군데 진(鎭)에 고루 나누어 주어 죽을 쑤어 구제하게 하였다.

 

2월 5일 정해

영부사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 구황할 방책을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주례(周禮)》의 완형(緩刑)을 써서 그 경중에 따라 대신에게 명하여 소결하여 처리하게 하면 해묵은 억울한 원통함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조세환(趙世煥)과 윤경교(尹敬敎)·신명규(申命圭) 등을 힘써 구원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세환은 하는 짓이 변변치 못한데 오히려 강개하다고 하였다. 사실을 조사하여 처결하지 않는다면 필시 불량배의 구실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 경솔하게 처결할 수가 있겠는가. 금부 추고를 하게 한 것은 그 방자한 버릇이 매우 가증스럽기 때문이다. 완형에 관한 일은 대신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2월 6일 무자

간원이, 박천영(朴千榮)을 발방(拔榜)할 일을 연계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어, 박천영을 이미 발방하게 하였으니 그가 받은 홍패(紅牌)에 대해서 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헌부가, 안후창(安後昌)을 나문하는 일을 연계하니, 상이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나주(羅州)의 사인(士人) 임상유(林相儒) 등이 본부에 정장(呈狀)하기를 ‘본주 비금도(飛禽島)에 여러 대 동안 전해온 전장(田庄)을 궁가(宮家)에게 빼앗겼다.’고 하였는데, 대개 궁가가 해숭위(海嵩尉)의 집에서 사들인 것으로서 내사(內司)에서 측량할 때에 백성의 전토가 그 가운데에 섞여들어 갔다고 합니다. 궁가에서 일보는 사람이 제 능력을 뽐내려고 많은 것을 탐내는 일이 있으면 먼 지방 백성이 국가를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도를 시켜 십분 명백히 살펴서 공정하게 가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7일 기축

이만영(李晩榮)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박천영이 받은 홍패를 품지하여 처치할 일로 명을 내리셨습니다. 박천영의 홍패는 가져다가 본조 낭청으로 하여금 정원(政院)에 가서 태워버리게 하고, 본조에 저장한 방목(榜目) 가운데에서 박천영의 성명을 효주(爻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대사헌 이정기, 지평 윤계가 상차하여 진구할 방책을 아뢰었다. 전세를 감면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어사를 보내어 진휼의 정사를 살피고, 마른 양식을 헤아려 지급하여 농사를 폐지하지 않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아, 지난해의 흉년은 실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불쌍한 우리 백성을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절로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프다. 이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절실하므로 내가 매우 감탄하였다. 묘당과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헌부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이 1천여 석의 곡물을 내다 팔고 어영청이 판 것도 수백 석이 넘는데 혹 아문 소속에게 주거나 혹 이익을 꾀하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여 사사로이 매매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며, 수어청과 총융청 및 사복시도 곡물을 판 일이 있습니다. 간사한 무리가 한 사람이 수백 석이나 받기도 하고 혹 1천 곡(斛)에 가까운 자도 있다 합니다. 각 아문을 시켜 많이 받은 자를 엄히 살펴서 무겁게 죄주게 하고, 이 뒤로 파는 곡물이 있으면 모두 진휼청의 예(例)에 따라서 하여 서울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각 아문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2월 8일 경인

대사헌 이정기와 지평 윤계가, 입계 공사(入啓公事)에 두사(頭辭)를 빠뜨렸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9일 신묘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헌부의 차자를 좌의정 허적(許積)에게 내어 보이자 허적이 받아서 읽고 나서 아뢰기를,
"백성의 일이 급급하여 이 차자가 급박함을 구제하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이것은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어사를 내보내는 일은 위에서 참작하여 처치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경교(尹敬敎) 등이 명을 기다린 지 이미 30여 일이 지났으니, 이것은 실로 하옥한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은 처음부터 그 차자를 그르게 여겼으므로 본디 해명하여 줄 생각이 없습니다마는, 일이 확대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성상의 덕에 흠이 될까 염려합니다."
하니, 상이 곧 정원에 명하여 그 전지를 다시 품신하게 하였다. 교리 김만중(金萬重)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세환(趙世煥)이 허황한 이야기를 상소 가운데에 끼워 넣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끝까지 캐묻더라도 보탬은 없고 일의 체모만 손상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그에 해당된 법으로 죄주고 빨리 끝을 맺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금부를 시켜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당초의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뭇 신하가 다 지나치게 여겼는데, 이번 정배하는 율(律)은 다시 한층 더한 것이니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이전 의논대로 삭출로 시행하고 뒷날 수용(收用)하느냐 수용하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위에서 헤아려 처치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전대로 삭출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각 아문에서 곡식을 팔았다고 극언하고 있는데, 이것은 군향(軍餉)이니 계품을 한 뒤에 발매하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일찍이 이런 거조가 없었다.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니, 수어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신이 겸하여 관장하고 있는 청(廳)에는 곡식을 발매한 일이 없는데도, 또한 대각의 논계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시장 사람들 가운데 많이 받은 자가 있다면 형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조에서 어떻게 조사를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일이다."
하였다. 총융사 서필원이 아뢰기를,
"대신이 조사하여 처리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만, 조사를 하게 되면 필시 시장 사람들을 추문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실로 일의 체모에 손상이 있는 일이며 또한 적발해 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조사해서 다스리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이 판윤 민정중에게 이르기를,
"굶주리는 백성의 숫자가 지금 얼마나 되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2만 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2만 명에게 먹일 수 있는 죽은 얼마인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30부(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굶주리는 백성 가운데 사망자가 있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잇달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자기 집에서 죽은 자는 그 숫자가 얼마인지 모르고, 오부(五部)의 첩정을 보면 길가에 시체들이 연이어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장령 이휴징(李休徵)은 크게 풍병(風病)에 걸려 말도 통하지 못하고 증세가 위독하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옥당의 관원을 금부에서 추고하는 일에 대해서 정치화가 차자를 올린 뒤에 상께서 헤아려 처리하겠다는 분부를 내리셨는데, 그 당시에 신도 진달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금부에서 추고하는 일에 대해서는 정계하고 파직을 환수하는 일을 연계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방자한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도, 금부에서 추고하는 일은 빼버리고 파직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청한 것은 그르게 여깁니다만, 점점 여기에 이르러 성상의 거조가 또한 이기기 좋아하는 것에 가까우니, 성덕에 해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저들의 하고자 하는 바대로 따르겠는가. 대간이 정계하기를 기다려서 처리하고자 한다."
하였다. 지평 김세행(金世行)이, 간사하다는 공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탑전에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그 뒤에 장령 김상(金鋿)도 또한 이것으로 인피하였다.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2월 10일 임진

성후설(成後卨)과 박세견(朴世堅)을 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윤리(尹理)를 장령으로, 이합과 민종도(閔宗道)를 수찬으로 삼았다.

 

이때 국가의 재정이 바닥이 났다. 호조의 삼창(三倉)에 저축된 것이 4만 석도 채 못 되어 두어 달도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강도(江都)의 군향미(軍餉米) 3만 석과 관서(關西)의 쌀 3만 9천 5백 석을 가져다 경비를 보충하고, 또 강도의 쌀 2만 4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5백 석을 가져오고 또 어영청의 보미(保米) 5천 석을 대여하여 진휼의 밑거리를 채웠다.
경성[서울]의 기근이 날로 심하여 한 곡(斛)의 쌀 값이 은으로 3냥이었으므로 진휼청이 쌀 8천 3백여 석을 내되 한 섬의 값을 1냥 8전으로 정하였다. 또 목포(木布)로 계산하여 바치는 것을 허용하여 백성을 편리하게 하되 한 사람이 1냥을 넘지 못하게 하여 때를 타서 이익을 노리는 폐단을 막았다. 또 쌀 1만 2천 8백여 석을 내어 서울 백성에게 대여하되 호수(戶數)를 계산하고 등급을 나누어, 대호(大戶)는 1석, 중호는 10두, 소호는 5두, 독호(獨戶)는 2두를 주고, 봉료(俸料)를 받는 군사는 대호·중호·소호를 막론하고 모두 3두를 주었다. 이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자못 구제되었다.

 

2월 11일 계사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전에 아뢰었던 일을 연이어 아뢰기를,
"조세환(趙世煥)은 한 말이 경망하기는 하였으나 직책이 대간입니다. 경망한 말은 용서할 수 있고 대간은 죄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가 잘못 듣고서 한 말과 실상이 아닌 그 일은, 반드시 죄를 준 뒤에야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하교하기를,
"대간이 죄가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죄가 있는데도 죄주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2월 13일 을미

평안도는 여역으로 죽은 자가 59명이었고, 경상도는 전후의 굶주린 백성이 3만 8천 9백 67 명이었는데 굶주려서 죽거나 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다. 충청도는 옥천(沃川) 등의 고을에 굶어죽은 자가 69명이었고 여역도 점점 심해졌다.

 

2월 14일 병신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좌윤으로, 이익(李翊)을 병조 참지로, 안진(安縝)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집의 이익상(李翊相)이, 자신이 추감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15일 정유

월식이 있었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지금 섬이 온통 굶주리고 있는 백성으로 가득하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여역으로 죽은 자가 이미 4백 37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서 구제하여 살릴 방책이 없으니, 이전하는 미곡이 때에 미쳐 빨리 들어오지 않으면 수만의 죽어가는 목숨이 장차 눈앞에서 숨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근심되고 몹시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 기근이 특히 심하여 민간의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있었다. 노정이 날마다 조천관(朝天館)에 나와 곡물을 날라 오는 배를 기다렸고 굶주린 백성도 뒤를 따랐다. 배 하나가 멀리서 다가오자 급히 가서 보았는데 곡물을 실은 배가 아니었다. 노정이 통곡하면서 돌아왔으며 굶주린 백성들도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2월 16일 무술

경상도에 2월 초부터 비가 내려 열흘 동안 개지 않자, 강물이 불어 넘쳐서 강가 일대의 밀보리가 모두 침수되었다.

 

2월 17일 기해

장령 김상(金鋿)이, 전에 평안 병사 성익(成釴)을 나문하기를 청하는 논의를 제기했는데, ‘상신 허적(許積)이 탑전에서 「정방 산성(正方山城)에서 나무를 벤 것은 별장(別將)에게 죄가 있고 안주(安州)에서 기와를 구운 것도 묘당이 분부하였기 때문이었다.」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드디어 일을 잘 살피지 못하고 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가례 도감(嘉禮都監)에서 아뢰기를,
"납채(納采)와 납징(納徵) 등의 예를 행할 때에 정사(正使) 이하의 여러 집사(執事), 주인(主人), 빈자(儐者)가 입을 공복(公服) 및 왕세자가 친영(親迎)을 할 때에 궁관(宮官)들이 입을 공복을 모두 도감에서 조치하여 준비할 일로, 예조에서 마련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무인년 가례 때의 등록(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단지 정사, 부사, 주인, 빈자만 공복을 입고 그 나머지는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습니다. 신묘년에는 ‘흑단령은 구차하고 간략하니 한결같이 예문(禮文)대로 공복을 조치하여 준비할 일’로 계품하였더니, ‘많은 비용을 염려치 않을 수 없으니 흑단령을 대신 사용토록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래서 정사, 부사, 주인, 빈자 이외의 여러 집사들은 모두 흑단령으로 예를 행하였습니다. 궁관들의 공복에 대해서는, 등록 가운데 거론한 일이 없는데 그 까닭은 모르겠으나, 복색이 여러 집사들과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이번에도 신묘년의 예대로 행합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고시(考試)가 엄하지 않았다는 일로 전후로 열 차례나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도내 각 고을에서 정월 스무날 이후 혹은 2월 초부터 모두 죽소(粥所)를 설치하고 구휼하고 있습니다만 얼굴이 누렇게 뜬 무리는 죽을 먹여도 살릴 수가 없어 진소(賑所)에서 잇따라 죽고 있습니다. 2월 초에 날마다 크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자 굶주린 백성이 모여서 추위와 굶주림에 울부짖고 있는데 그 소리가 몇 리 밖에까지 들리고 있으니, 비참한 꼴을 말하자니 목이 메입니다. 죽을 먹는 수는 큰 고을이면 1만여 명이고 작은 고을도 수천 명에 밑돌지 않으니, 한 도에서 받아들인 것을 다 쓰더라도 결코 보리가 나기 전까지 이어서 진구할 수 없습니다. 민간의 형세를 상세히 살펴보면 종자를 비축하여 둔 집이 열 가운데에서 한둘도 안 되고 모두 관가의 대출을 바라고 있는데, 약간 받아들여 놓은 것도 종자로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조정에 보고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통곡도 부족합니다."
하였다. 묘당의 여러 신하들이 이 장계를 보고 눈물이 고인 자가 많았다.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종자로 쓸 벼와 진구에 쓸 곡물을 얻어 각 고을에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강도(江都)의 벼 7천 6백 석과 쌀 8천 석 및 남한(南漢)의 쌀 6천 석을 떼어 지급하였다. 또 그 계청에 따라 남한의 쌀 8천 석과 강도의 쌀 6천 석을 더 주어 백성을 진구하게 하였다.

 

2월 18일 경자

밤에 달이 저수(氐宿)의 둘째 별을 범하였다.

 

간원이, 조세환(趙世煥)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논계를 여러 달 동안 멈추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전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열흘 동안에 80여 명이었는데,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원양도에 죽을 받아 먹으러 나온 기민이 9천 4백 90명이었으며 여역으로 인해 죽은 자가 1백 19명이었다. 강화부(江華府)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0명이었다.

 

충청도 보은현(報恩縣)의 향교에서 증자(曾子)의 위판을 잃어버렸다가 하루가 지나서 도로 찾았다. 이 일을 아뢰자, 태상(太常)에 명하여 위판을 다시 만들어 보내게 하고 본도를 시켜 그날 수직한 교생(校生)과 전복(典僕)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인심이 거칠고 사나워져서 수령을 원망하는 간사한 백성과, 교생에게 죄를 받은 전복이 빈번이 이러한 변을 일으키니, 사람들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겼다.

 

2월 19일 신축

이합(李柙)을 집의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여, 강가 일대의 조금 곡식이 잘된 고을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게 재해를 입은 곳은 그 부역을 감면해 주자고 청하였다. 이때 다른 도에서도 이런 청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구별하여 부역을 감면하는 것은 일이 불편하다 하여 다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강변 고을들이 재해를 입은 것이 가장 심하다 하여 특별히 허가하였다.

 

예조 참판 이만영(李晩榮)을 보내어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의 장지(葬地)와 경릉(敬陵) 안산(案山) 금지 구역의 한계를 간심하게 하였다.

 

2월 20일 임인

경기에서 정월 16일 이후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이 10만 67명이었다.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부사 정익(鄭榏) 등이 돌아오다가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치계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청나라 황제가 성황사(城隍祠)에 가서 분향하려 할 때에 동·서반(東西班)이 오문(午門) 밖에 늘어섰는데 신들도 하반(賀班)에 참여하였습니다. 예(禮)가 끝나자 도로 들어가고 뭇 관원들은 다 파하여 나갔습니다. 신들도 나오려고 하는데 예부 랑(禮部郞) 한 사람이 황제의 명으로 신들을 불렀습니다. 서둘러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가니, 청나라 황제가 문의 한중앙 평상에 앉아서 신들을 계단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였습니다. 평상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청나라 황제가 먼저 신 남의 나이를 묻고 다음에 국왕과 몇 촌의 친척인지를 묻고 다음에 길을 떠날 날짜를 묻고 다음에 글을 읽었는지를 묻고 다음에 이름 자를 묻고, 또 신 정익의 성명을 물었는데, 묻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 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황제가 곧 빙그레 웃고 시랑 중 한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고 또 말을 전하기를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물러가게 하므로 신들이 이일선(李一善)을 따라 나오는데 그 시랑도 나오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일선이 말하기를 ‘황제의 물음에 사신이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시랑이 말하더라.’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 사신을 불러보면서 본국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그가 신들을 불러보고 위로한 것이 있으니 우대하는 뜻인 듯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말을 백성이 빈궁하다는 말 아래에다 붙였다가 신들이 해명한 말을 듣고 또 웃고는 돌아가 고하라고만 하였으니, 깊은 뜻이 없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 관외(關外)에 이르러 한 한인(漢人)을 만나 청나라 임금이 너그러운지 사나운지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한인 관원들은 매우 두려워한다.’ 하였고, 또 ‘관외의 부역이 무겁고 좋은 전지는 다 고산(高山)에게 점유당하였다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역관이 얻은 통보(通報)에 ‘지난해의 수재는 백수십 년 동안 없던 재난이었다.’ 하였고, 또 ‘상으로 쓸 비단과 어의(御衣)의 밑천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으며, ‘한 해의 군량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이 모자라고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문화의 정치를 해보려고 하여, 운남(雲南) 사람이 70세 된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가 봉양하겠다고 청하자 허가하였고, 또 상중(喪中)에 있는 자에 대해 윤달을 계산에 넣지 않고 스물넉 달이 되어서 복관(復官)하자는 의논이 있었고, 또 만주위(滿州衛)의 삼년상(三年喪) 논의가 있어, ‘사람들이 다 삼년의 제도를 행하고 있는데 그들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면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하가 강하다는 이야기가 복선군(福善君) 남(柟)의 이번 행차에서 비로소 시발되었는데, 갑인년에 조제(弔祭)하기 위한 칙사가 나왔을 때에 복선군 남의 표형(表兄)인 오시수(吳始壽)가 빈사(儐使)로서 서로(西路)에 갔다가 통관(通官)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거짓으로 인용하여 복선군 남이 한 말을 증거하였다. 그 뒤에 복선군 남은 그의 내구(內舅) 정창(挺昌)과 모역(謀逆)을 하여 복주되었는데, 오시수를 잡아다가 이전에 했던 말을 끝까지 캐물으니, 거짓으로 꾸민 자취가 모두 드러났다. 오시수도 이것으로 사형되었다.

 

2월 21일 계묘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지사의 장계 안에 있는 이른바 ‘신하가 강하다.’는 말은 참으로 괴이하다. 전에는 조참(朝參)을 할 때에 다례(茶禮)만을 행하고 파하였었는데, 지금은 이에 가까이 불러들였으니 우대하는 뜻이 있는 듯하나, ‘돌아가서 국왕에게 말하라.’고 하였고, 사신이 하는 말을 듣고서는 웃으면서 즉시 나가게 했으니, 이것은 필시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불러보았던 것이다. 혹 뒷날의 근심이 없지 않을 것이니, 그 참으로 음흉한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겠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을 듣고는 신하들은 모두들 우연히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만, 신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필시 무심히 한 말이 아니라, 들은 바가 있어서 발언한 것인 듯합니다. 우리 나라의 일을 저들이 어떻게 잘 알 수가 있겠습니까. 필시 말이 나가는 길이 있을 터이니, 또한 크게 근심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은, 단서만 꺼내놓고는 말을 다하지 않은 듯한데, 사신이 온 뒤에는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사신을 불러보고 ‘왕실의 지친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고 하였으니 은근한 뜻인 듯하기는 합니다만, 신하가 강하다는 말에 어찌 깊이 우려할 점이 없겠습니까. 황제의 나이가 지금 17세인데, 외국의 일을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사신을 불러서 말해주었으니, 그 의도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지중추 유혁연이 아뢰기를,
"신하가 강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오래되었습니다. 이전에 칙사가 나왔을 때에도 ‘주상은 어질고 훌륭한데 신하가 선량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너희 나라에 가서 고하라.’는 말을 이미 사신에게 하였으니, 만약 뒷날 힐문하는 일이 있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변명을 하고자 하면 필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결말을 짓기가 어렵다. 변백하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 말이 깊은 뜻이 있는 듯하나 겉으로는 짐짓 후하게 접대하는 듯이 하였으니, 참으로 그 의도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변명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사은하는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들이 밖에 나가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찬 비가 연일 계속 내리고 안개가 개이지 않는데, 진휼하는 장소에 나가는 백성들이 비를 맞고 가서 죽을 먹고는 한데서 지내기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사망한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비록 그 숫자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다고 합니다. 성 안에 진장(賑場)을 세 곳에 설치하였는데, 훈련원에는 임시로 지은 집이 많이 있고 한성부에도 공공 건물이 있기 때문에 죽을 얻어먹으러 가는 백성들이 이곳에 의지할 수가 있습니다만, 선혜청에는 들어갈 장소가 없기 때문에 태평관에 들어가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에 굶주린 백성이 수십 만 명이라고 하니 듣기에 놀라운데, 나라의 저축이 이미 바닥이 났으니 어떻게 진휼을 계속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오래도록 슬픈 기색을 짓고 있었는데, 신하들이 폐단을 구제할 계책을 내지 못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제주에 보내는 진휼 곡식은 이미 들여보냈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가 이제 겨우 독촉하여 보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주에 오고가는 데에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서 이와 같이 늦어진 것인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 뒤로는 여기에서 색리(色吏)를 별도로 정해서 들여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진휼청이 갖다가 사용한 어영청의 쌀이 5천 석인데, 일찍이 ‘등대할 때에 품지하여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량미는 다시 갚지 않아서는 안 된다. 갖다 쓰고 나서 뒤에 그 숫자를 갚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정지화가 품고 있는 생각을 아뢰기를,
"도성 안에 시체가 잇달았으니 기근의 참혹함이 통곡할 만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만, 지금의 농사일은 늦출 수가 없습니다. 옛날 제 위왕(齊威王)도 사람을 시켜서 논밭이 잘 정리되었는지를 살피게 하였으니 근본을 힘쓰는 뜻이 지극하였습니다. 하물며 성스럽고 밝은 시대에 어찌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농사를 권장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신들이 밖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이미 논하였었습니다. 오직 합당한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된 자가 착실히 행하면 이 일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다만 조목(條目)을 명시한 뒤라야 봉행할 수가 있을 것이니, 정원에서 각도의 방백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심재(沈梓)가 아뢰기를,
"휼전을 거행하는 것이 비록 성세의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자, 물을 건너다가 빠져 죽은 자, 깔려 죽은 자, 불에 타서 죽은 자를 일일이 계문하여 모두 휼전을 받게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고 난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옛날의 휼전은 모두 공적인 일을 하다가 죽은 자에게 내렸는데, 오늘날의 휼전은 공과 사를 가리지 않고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바로 3석(石)의 곡식을 지급하니, 이서(吏胥)들이 농간을 부리는 일도 또한 염려치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휼전을 몇 되나 몇 말로 지급을 하였는데, 지금은 매양 3석(石)으로 전례를 따라 서계한다. 옛날에 어찌 이와 같았겠는가.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팔도의 관찰사와 개성(開城)·강화(江華) 두 부(府)의 유수에게 하유하였다.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하늘처럼 우러르는 것은 먹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참혹한 기근을 여러 번 만나 공사 간에 텅텅 비어서 굶어 죽는 자가 줄짓고 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장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밤중에 생각하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아아, 가뭄과 홍수가 재해를 가져오는 것은 농사의 운세가 불행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도랑이 수리되지 않은 것은 또한 사람의 힘을 다 들이지 않아서이니, 식량을 넉넉히 할 방법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날씨가 점점 풀려서 봄 농사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이때가 바로 온갖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사방을 순행하면서 들판을 살펴보되 종자와 식량이 있는가 묻고 경운(耕耘)과 파종이 늦지 않은가를 살피라. 그리하여 무릇 백성의 힘이 모자라는 것이 있거나 묵정밭이 일구어지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들의 궁핍을 도와 주고 그들의 경운을 권해야 할 것이다. 그 책임이 경에게 있으니, 경은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도내에 알리라. 그리고 수령도 반드시 하인을 간단히 거느리고 친히 다니며 살펴 종자와 식량을 도와 주고 경작과 개간을 권하여 파종이 시기를 잃어 농토가 황폐해지지 않게 하고 인사가 미진한 것이 없도록 힘써서 농사일이 제대로 되도록 노력하게 하라."

 

2월 22일 갑진

경상도에서 여역이 점점 치열해져 죽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2월 23일 을사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가지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형제에게 가서 의논하였더니, 태화가 매우 걱정을 하면서, 이미 자기의 동생 정치화와 상의를 하였는데 사은(謝恩)을 하거나 변무(辨誣)를 하는 것은 모두가 그냥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며 비록 뒷날 묻는 일이 있더라도 대답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뒷날 저쪽에서 만약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태화가 말하기를 ‘「오직 두려운 마음으로 걱정을 할 뿐이고, 대답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면 좋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우의정 홍중보에게 가서 만나보았더니, 또한 말하기를 ‘사은하는 일과 변무하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 다만 황제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재자관(䝴咨官)을 보내지 않을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자관을 속히 차임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헌부의 위차(位次)가 고르지 못하여 추감(推勘)하는 일과 서경(署經)하는 일이 많이 적체되어 있습니다. 지평 윤진(尹搢)은 이미 상피(相避)로 응당 체직되어야 할 사람이고 보면 굳이 그가 올라오기를 기다릴 것이 없으니, 변통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경릉(敬陵)을 간심하는 일을 이미 예관으로 하여금 하게 하였고 보면, 또 도사(都事)와 지방관을 시켜 적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대각이 논계한 뜻을 내가 알 수가 없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예관이 이미 간심하고 그림을 그려왔으니, 적간을 다시 하는 일은 없어야 할 듯합니다."
하고, 대사헌 정지화가 아뢰기를,
"예관이 간심한 뒤에 또 도사를 시켜 적간하게 하는 것은 일의 체모에 합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간을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윤계(尹堦)와 김수오(金粹五)를 지평으로 삼았다.

 

북평사(北評事)를 임시로 폐지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 등이 아뢰기를,
"북평사는 반드시 이조의 낭관을 차출하여 보내는데, 북관(北關)의 수령은 다 무인(武人)이므로 분주히 접대하는 것이 감사나 병사를 접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북로(北路)에 흉년이 든 이때에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4일 병오

간원이, 이원정(李元禎) 부자의 일과 민점(閔點)을 파직하는 일을 연계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하교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매우 놀랍다. 나에게도 지각이 있는데, 어찌 틈을 타서 아뢰는 말에 흔들려 안 따르기로 마음먹은 것이겠는가. 나를 능멸하여 마치 전혀 지식이 없는 자처럼 여기고 있으니, 이게 무슨 뜻인가?"
하였다. 대개 대간의 계사 가운데에 ‘지금 구원하는 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하다고 하면서 틈을 타서 위로 성상의 마음을 현혹하여, 과방(科榜)에서 빼자는 논의를 마치 과격한 것인 양 말하고 있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이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서 줄곧 굳게 거절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2월 25일 정미

승지를 전옥(典獄)에 보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황해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치계하여, 굶주리는 백성은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보릿가을은 아직도 멀었으니 진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곡물을 보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본도는 고을 수가 가장 적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처음에 4천 석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진구하고 남은 첩가(帖價)와 월과 군기(月課軍器)를 쌀로 바꾼 것 등의 곡물 수천 석을 잇대어 쓰도록 또 허가하였다.

 

황해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5천 5백여 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40여 명이었다. 굶거나 얼어 죽은 자도 많았다.

 

2월 26일 무신

함경도에서 여역이 더욱 치열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았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매음(煤音)·자연(紫燕) 두 섬의 목장(牧場)을 폐지하고 백성을 모아서 경작하기를 청하니, 상이 도타이 비답하고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이원정(李元禎) 부자에 대한 논계에서 멋대로 말을 산삭하였다가 물의에 비난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28일 경술

예조가 아뢰기를,
"한성부 노인 계목(老人啓目)의 후록(後錄)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니, 그 가운데 나이 80 이상인 사람으로서 혹 이미 노직(老職)에 제수된 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번번이 자급을 더해 주는 것은 부당할 듯한데, 일찍이 인조조(仁祖朝) 경오년 및 선조(先朝) 경인년에도 특명으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여, 노직을 받아 자급이 오른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모두 또 한 자급을 더해주는 것을 허락했었습니다. 이것은 한때의 격외(格外)의 은전인지라, 비록 이미 행한 전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결단할 수가 없어서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두 조정에서 행했던 고사가 있으니,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9일 신해

이익상(李翊相)을 응교로, 강석창(姜碩昌)을 정언으로, 이훤(李藼)을 이조 좌랑으로, 윤진(尹搢)을 수찬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기근이 이미 극에 달하여 살해하고 약탈하는 변이 없는 곳이 없으나, 무덤 도둑에 있어서는 전에 듣지 못하던 일인데, 보성군(寶城郡)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사노(寺奴) 최일(崔日)과 남원부(南原府)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과 사노(私奴) 철석(哲石) 등이 남의 고장(藁葬)을 파 옷을 모두 벗겨서 버젓이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어, 추위에 다급하였기 때문이라 하며 군말없이 자복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계본(啓本)을 형조에 내렸다. 형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다들 ‘추위에 다급하여 그랬다 하더라도 그 정상을 따져 보면 강도보다 더 심하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고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진휼청에서 2월 달에 돌본 굶주린 백성이 2만 명이었고 죽은 자가 60명이었다. 그들에게 먹일 죽을 30, 40가마를 쑤어서 썼는데 닭이 울 때 시작하여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한낮부터 다시 쑤어서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너무나도 붐벼서 혹 먹지 못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거듭 먹는 자도 있었다.

 

경상도에 전후로 죽을 먹는 곳에 나온 굶주린 백성이 7만 4천 8백 50여 명이었고 죽은 자가 90여 명이었다.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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