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3권, 현종 12년 1671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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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임자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박문도(朴文道)를 진해(鎭海)에 충군(充軍)하고, 이태서(李台瑞)·이수경(李壽慶)·박천영(朴千榮)을 옥에서 내보냈다.
박천영의 시권(試券)을 지우고 고친 일에 대하여, 이태서·이수경은 ‘박문도가 점검한 시권인데, 칼로 긁어내고 끼워 써 넣은 것은 아는 바가 아니다.’고 하며 모두 스스로 변명하였고, 박문도는 ‘박천영과 혼인의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조사하여 맞추어 볼 때에 시권 한 장이 분명히 박천영의 필적이었는데 초승(超乘)의 「초」 자를 반쪽을 잘못 쓰고 상배(相背) 두 자 아래에 「어(於)」 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 빠뜨렸으므로, 경망한 생각에, 한 자 반쪽의 잘못된 것을 고치거나 어조사 하나를 더 써서 넣더라도 크게 지장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 깊이 생각지 않고 경솔하게 조금 고쳤다. 당초에 사심을 가지고 간사한 짓을 할 생각이 아니었으며, 스스로 그것이 죄를 범하는 것인 줄 깨닫지 못했다.’ 하고, 박천영은 ‘어 자를 빠뜨리고 반쪽을 잘못 쓴 것은 다 합격의 여부에 관계되지 않으니 의도적으로 지우고 고쳤을 리가 만무하다.’ 하였다. 상이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박천영은 과거 시험의 법이 엄중함으로 인해 과방(科榜)에서 빼냈으나 서로 내통한 자취는 없는 듯하니 반드시 죄줄 것은 없다."
하였다. 금오(金吾)가, 박문도가 이미 솔직하게 공초하였으므로 이태서·이수경에게는 모두 물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드디어 모두 석방하였다. 박문도는, 과장(科場)에서 사정을 쓴 데 대한 법으로 논하면 먼 변방에다 충군해야 하나, 어머니의 복을 입고 있는 중이고 그 일은 상을 당하기 전에 있었다 하여 속(贖)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대로 유배지로 보내게 하였다.

 

3월 2일 계축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헌납 박지(朴贄)는, 간원이 방목에서 빼기를 청한 논계가 전에 자기가 논계한 것과 법 적용은 같지만 내용이 다르니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윤계(尹堦)는,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의 장지(葬地)에 예관과 경기 도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자고 청하였다가 미안한 하교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장선징(張善澂)은, 병 때문에 부르는 명에 응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이합(李柙)은, 윤계와 함께 당초 논계에 참여하였으니 혐의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사간 이단석은,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박지·윤계·이합·이단석은 출사시키고 장선징은 체차하였다. 박지는 또, 전계의 조어에 대해서 서로 상의하였으나 끝내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3일 갑인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진료가 끝나자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납채(納采) 등의 예를 장차 연 3일 동안 행할 터인데, 이렇게 상께서 편찮으시니, 일일이 친림하시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기(告期)하는 예는 신묘년에도 친림하였던가?"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납채는 첫날이고 납징을 하는 예도 또한 중대하니, 모두 친림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김수항은 아뢰기를,
"납징에는 보내는 물품이 있으니 예로 보아 마땅히 친림을 해야 하겠습니다만, 납채에는 보내는 물품이 없습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빈(嬪)의 습의(習儀)는 당연히 별궁(別宮)에서 행해야 하겠습니다만, 조현례(朝見禮)는 같은 날 대내(大內)에서 행한다고 하는데, 의장(儀仗) 등의 물품을 갖추는 데에 필시 군색하고 급박하여 준비를 못할 걱정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궁(中宮)과 대전(大殿)의 의장을 이미 감하게 하였으니, 빈궁(嬪宮)의 의장도 마땅히 없애야 한다. 두 대비전(大妃殿)의 의장은 한 곳으로 합쳐서 하라는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가례(嘉禮)가 더없이 큰 경사인데도 성상께서 민폐를 특별히 염두에 두시어 모든 일은 줄여 간략하게 하도록 하셨으니, 일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에 수식(首飾)하는 도구들은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려운데 대례(大禮)가 눈앞에 닥쳤으니 어떻게 초치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부표(付標)를 해서 내렸는데,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의 거행 조목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한 때의 거행할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실로 뒷날 준용할 바탕이 되는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유사의 신하가 마땅히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만,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년이더라도 검소하게 해야 마땅할 터인데 하물며 올해이겠습니까. 주선(珠扇) 등의 물품도 줄이고 생략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지평 윤계가 전계를 거듭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각 아문의 곡물을 많이 매매한 자를 조사할 때에 시장 사람들을 불러 물어 보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보아 부당하다.’는 뜻으로 탑전에서 진달하여, 마침내 조사하여 죄를 주는 일이 정지되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짐짓 거짓말을 하여 조사 계문하는 일을 정지시키고자 한 것이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에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그가 겸하여 맡고 있는 아문이 또한 대각의 논계 가운데에 들어 있다면, 두루 막으면서 덮어두려고 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서필원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아직 품지하여 처리하지 않은 아문으로 하여금 이전에 계하한 대로 속히 계품하게 하여 근거삼아 처리할 바탕을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장 사람들을 불러 물어보는 것이 일의 체모로 보아 부당하다는 말은 바로 내가 한 말이지 필원의 말이 아니다. 당초 대각의 논계가 이미 시장 사람들의 정소(呈訴)로 인한 것이니, 형조에서 조사를 할 때에 만약 또 시장 사람들을 불러서 물어 본다면 일의 체모에 있어서 매우 부당한 것이다."
하였다. 윤계가, 일을 논하면서 깊이 살피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갔다. 그뒤에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교리 김만중이 아뢰기를,
"근일 간원에 내린 비답에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하로서는 극악한 죄인데, 밝으신 성상께서 어찌 이것으로 그 죄안을 단정하고자 하신 것이겠습니까. 실로 격노하시어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개 발방(撥榜)의 의논은 혹 소견이 다른 자도 있고 혹 의도가 영구(營救)하는 데에 있는 자도 있는데, ‘기회를 타고 틈을 엿보았다.’는 등의 말은 준열하고 과격한 듯은 하나, 한쪽 말만을 들으실까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치우치게 듣는 것을 경계삼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지언(知言)의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둔사(遁辭)와 피사(詖辭)를 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고명하신 성상의 학문이 맹자와 같아진 뒤라야 치우치게 듣는 근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성상의 이번 거조는 언로에 크게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성학의 공부에 있어서도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회를 타고 틈을 엿보았다는 등의 말은 당초의 계사 가운데에 없던 말일 뿐만 아니라 입시하여 논계할 때에도 또한 이런 말은 없었다. 내가 그날에 오래 앉아 있느라 매우 피곤하여, 생각한 바가 있었는데도 말을 하면 길어질 것같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파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날의 논계에 갑자기 이 말을 첨가하여, 나를 마치 애당초 분명한 소견이 없어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인가? 그날의 비답에 미안한 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였다. 기회를 타고 틈을 엿보았다는 말을 가지고 화를 낸 것이 아니다. 평상시 예사롭게 논하는 일이라면 비록 화를 낼 만한 말이 있더라도 또한 개의치 않는 경우가 많다."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지금 해명해 주시는 분부를 듣고 보니 참으로 속시원히 알겠습니다. 다만 임금이 아랫사람들을 문책하는 말씀은 참으로 그 죄에 타당하지 않으면 비록 엄한 말로 준열하게 문책을 하더라도 그 마음속으로는 승복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 주부 정언형(丁彦珩)은 지난 겨울에 굶어죽었는데 그의 손녀가 지금 또 굶어죽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많이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참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사람들에게 각별히 쌀을 제급하라."
하였다.

 

왕세자의 가례 때에 경외(京外)에서 진전(進箋)하여 진하(陳賀)를 하고 방물 물선(方物物膳)을 봉진하는 규례가 있는데, 예조가 전례에 의거하여 계품하니, 상이 진전(進箋)만 하라고 명하고 방물 물선은 봉진하지 말게 하였다.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3월 4일 을묘

경상도에 굶주린 백성으로서 죽을 나누어 주는 곳에 나온 사람이 9만 8천 3백 60여 명이었고, 죽은 자가 1백 40여 명이었다.

 

3월 6일 정사

상평청의 진소(賑所)에 월초에 진구받으러 나온 자가 6천 70여 명이었고, 1월 20일 이후로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좌의정 허적이 면대를 청하여 입시하여 아뢰기를,
"이렇게 성상께서 뜸을 맞으시는 날에 우상이 아직 출사하지 않아서 약방에 도제조가 없으니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그리고 가례 날짜가 또 눈앞에 닥쳤는데 역시 도제조가 없으니 참으로 매우 민망하고 염려스럽습니다. 조세환(趙世煥)의 일은 이미 결말이 났으니, 대각의 논계에 비록 편치 못한 바가 있더라도, 어찌 이것을 이유로 매양 인피하고 들어간단 말입니까. 마땅히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효유해야 합니다. 만약 들어오지 않을 경우, 하루 안에 두 번 세 번 따뜻하게 효유하면 어찌 끝내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3월 7일 무오

민정중(閔鼎重)을 좌참찬으로,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최관(崔寬)을 승지로, 이단하(李端夏)를 사인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홍중보(洪重普)에게 하유하여 빨리 들어오게 하였는데, 홍중보가 도성 밖에 도착하여, 차자를 올려 사정을 진달하였다. 상이 다시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하유하였는데, 말이 간곡하였다. 중보가 비로소 들어왔다.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아뢰기를,
"스승의 직책은 이끌고 돕는 데에 있는데, 직강 이태서(李台瑞)는 대대로 악행을 해왔으므로 사람 축에 끼지 못합니다. 그가 차비관이었을 때의 음험하고 사악한 자취와 간사하고 외람된 일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이 되어 꾸민 것인데, 두 번 나문하였으나 끝내 요행히 죄를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자자하게 말하고 있으며 공론이 분개하고 있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태서의 아버지 이취인(李就仁)이 광해 때에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죄악이 낭자하였으므로, 대간의 계사에서 대대로 악행을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좌우에 서로 등진 머리가 있어 각각 눈 둘, 입 하나, 코 둘, 뿔 둘이 있었다.

 

3월 8일 기미

왕세자의 납폐례(納幣禮)를 행하였다.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을 정사(正使)로,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상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백관이 예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우승지 김우형(金宇亨)이 교지를 선포하고 사자(使者)가 명을 받아 빈(嬪)의 집에 가서 예를 행하였는데 모두 《오례의(五禮儀)》대로 하였다.

 

헌부가, 전계(前啓)인 윤경교(尹敬敎)·신명규(申命圭) 등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일을 정계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죽었다. 김좌명은 자(字)가 일정(一正)이고, 영의정 김육(金堉)의 아들이며 왕비의 백부(伯父)이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능이 많았으며 용의(容儀)가 아름다웠다.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어서 중시(重試)에 발탁되었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행실이 훌륭하였고 직무에 종사할 때에는 부지런하였다. 사람됨이 분명하고 빈틈이 없어서, 전후로 호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지내면서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간소하고 고집스러워 논의가 편협하여 사류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사치스러운 습성을 벗어버리지 못하여, 일찍이 아비의 초상을 당했을 때에 수선(隧羨)의 제도를 사용하여 간관 민유중(閔維重)에게 탄핵을 받았다. 또한 기해년에 복제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에, 자신의 소견을 치우치게 고집하며 윤선도(尹善道)의 말을 옳다고 하여, 청론에 크게 비난을 받았다. 을묘 간당(乙卯奸黨)들이, 예론(禮論)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3월 9일 경신

왕세자의 납징례(納徵禮)를 행하였다. 상이 안질이 있어서 친히 참석하지 못하였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비로소 출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범상한 자질인데다 깨끗한 지조도 모자랐다. 병조를 오래 맡고 있으면서 자못 뇌물을 받았고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라서는 아부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5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범상한 자질인데다 깨끗한 지조도 모자랐다. 병조를 오래 맡고 있으면서 자못 뇌물을 받았고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라서는 아부만 하였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3월 10일 신유

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명이었고, 2월 27일 이후로 비와 눈이 잇따라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밭이 얼어붙어 쟁기질을 할 수가 없었다.

 

전라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30여 명이었고 굶주리는 백성이 13만 2천 5백 90여 명이었으며, 죽을 먹이는 곳에서나 도로에서 죽은 자가 1백 40여 명이었고 지난해 10월 이후로 각 고을의 죄수 중에 얼고 굶어 죽은 자가 1백 30명이었다.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온 도내가 똑같습니다. 조금 곡식이 여물었다는 고을도 평년에 재해를 당했던 고을에 비하여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므로 올 봄의 굶주리는 것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전세로 낼 쌀·콩과 각사(各司)의 공물 가포(貢物價布)와 각읍의 공미(貢米) 등의 신역을 일체 감면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조의 물력으로는 옮겨 채울 길이 없습니다."
하니, 전세로 낼 쌀·콩만 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3월 11일 임술

왕세자의 고기례(告期禮)를 납채의(納采儀)와 같이 행하였다. 상이 안질이 있어서 친히 참석하지 못하였다.

 

경기 양주(楊州) 등 네 고을에 비가 조금 내렸는데 산꼭대기에는 눈이 내려 눈 깊이가 두세 치였다. 수원(水原) 등 스무 고을에 된서리가 잇따라 내리고 서풍이 날마다 불어서 밀보리가 모두 손상되었다.

 

3월 12일 계해

이완(李浣)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이완은 매우 엄격하고 교만한 병통이 있기는 하나,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고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무인이라고 깔볼 수 없었다. 일찍이 쇠약하고 병들었다고 하면서 병권(兵權)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다시 쓰고자 이 벼슬을 제수하였다.

 

지평 윤계(尹堦)가, 연계(連啓)할 때에 휴가 중인 동료를 잘못 연명(聯名)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사간 이단석(李端錫)이, 상회례(相會禮)를 즉시 행하지 않아서 동료들에게 공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3월 13일 갑자

동지정사(冬至正使)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부사(副使) 동지(同知) 정익(鄭榏), 서장관(書狀官) 정화제(鄭華齊)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이 아뢰기를,
"중신이 잇달아 세상을 떠나니 국가의 불행이 어떠하겠습니까. 조복양(趙復陽)에게 이미 치부(致賻)를 하였으니, 김좌명에게도 이와 다름없이 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좌명에게도 조복양에게 주었던 전례대로 상수(喪需)를 제급하라."
하였다.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전계를 거듭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태서(李台瑞)의 일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만약 누(累)가 있다고 한다면 사판에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고, 만약 차비관일 때의 일을 논한다면 나문을 청하는 것이 마땅한데, 구별하지 않고 이와 같이 아울러 논했으니, 일의 체모로 보나 대각의 체모로 보나 모두 타당치 않다."
하였다. 강석창이 또 아뢰기를,
"근래 체통이 엄하지 않아서 환관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식견있는 자들이 근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가례의 내외(內外) 습의(習儀) 때에 내관(內官)이 사자(使者)를 급히 불러 예(禮)를 행하게 하였는데, 도감 당상과 사자가 다 말하기를 ‘외습의(外習儀) 전에 먼저 행하는 것은 부당하고, 또한 사자가 내습의(內習儀)에 가서 참여하는 규례가 없다.’고 하면서 심지어 낭청을 보내어 두세 번이나 중관(中官)에게 말하게 하였으나, 중관이 기를 돋구어 성을 내며 불손한 말로 더욱 독촉하였으므로 사자가 마지못하여 달려가 예를 행하였습니다. 외조(外朝)의 사체는 지극히 중한데 하찮은 일개 환관이 어찌 감히 이처럼 방자하게 부르거나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조는 처음부터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거니와 사자도 예절을 잃은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모두 추고하고, 차지 내관(次知內官) 윤완(尹完)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여 그 방자한 버릇을 징계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사·부사는 추고할 만한 일이 없을 듯하다. 예조 당상 및 내관을 먼저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이미 외습의 날짜를 물렸는데 예조가 내습의를 아울러 물리기를 청하지 않았으므로, 강석창이 이와 같이 논한 것이다. 강석창이, 이태서(李台瑞)의 일로 성상으로 하여금 수고롭게 분부를 내리시게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갔는데, 처치하여 출사시켰다.

 

3월 14일 을축

충청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6만 6천 4백 20명이었다.

 

집의 이합(李柙)이, 조율 공사에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썼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15일 병인

2월 보름 이후로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

 

3월 16일 정묘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이삼석(李三錫)을 지평으로, 이합(李柙)을 수찬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삼았다.

 

장령 윤리(尹理)가 아뢰기를,
"부역을 고르게 매겨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급선무이므로 한 도내에 전세가 가벼운 데와 무거운 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경상도의 강에 인접한 20고을이 공목미(公木米)를 홀로 담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유독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산간 고을의 작목(作木)에 견주어 보면 상납하는 수량에 있어서 가볍고 무거운 것이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이 때문에 원망이 하늘에 사무치고 포탈하는 집이 반을 넘습니다. 상납과 왜공(倭貢)을 막론하고 통틀어 합계하여 피차를 비교하여 옮겨서 고루 정하면 치우치게 괴로움을 겪는 걱정이 없을 것이니, 묘당을 시켜 좋은 방법에 따라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관청에서 물건을 매매하면 반드시 폐단이 있습니다. 근래 영남의 각영(各營)에서 소금을 사서 파는 일이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바닷가에 소금을 굽는 가구가 모두 생업을 잃었습니다. 각영에서 해마다 판매하여 얻은 재물이 엄청나게 많지만 공공의 용도에 보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민간의 원망을 초래하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니 본도의 감사를 시켜 일체 스스로 범하지 말도록 각영에 공문을 보내 알려서 그 폐단을 고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도 양근(楊根) 땅에서 어느 사비(私婢)가 한 배에 2남 1녀를 낳았다.

 

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도에서 전후에 굶주리는 백성이 11만 5천 6백 70여 명이었으며, 여역이 매우 치열하였고, 밀보리도 모두 시들어 손상되었다.

 

3월 17일 무진

평안도에 봄보리의 파종이 비 때문에 시기를 넘겼고 씨뿌린 뒤에 또 많이 썩었다. 밤마다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웠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경기도에서 2월 보름날 이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천 6백여 명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고 불에 타죽은 자가 6명이었다.

 

집의 이익상(李翊相)이, 추함(推緘)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18일 기사

전라도에 2월 6일 이후로 큰 비가 잇따라 내려 밀보리가 손상되었다.

 

원양도(原襄道)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70여 명이었다.

 

이때 굶주린 백성들이 도성으로 모여들어 모두들 죽소(粥所)에 나갔다가 밤에는 거리에서 자므로 나쁜 기운이 찌는 듯하여 서로 전염되어 며칠 동안 신음을 하다가 번번이 죽어나갔다. 그리하여 문밖으로 실어내는 수레가 날마다 잇따랐는데, 그중에는 혹 귀신처럼 됐으나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섞여서 쌓인 시체 가운데에 들어갔다. 귀한 집이건 천한 집이건 독한 여역이 두루 차서 마치 불이 치솟듯 하였으므로 일단 여역이 걸린 자는 열에 하나도 낫는 자가 없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몰살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라고 경황없이 허둥대는 것이 마치 병화(兵火)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 경황의 비참함이 이러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당초 도성 안에 진장(賑場)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어지러이 모여서 이런 우환을 빚어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는 법을 마련하였다. 이때 굶주린 백성이 쪼들린 나머지 그들의 골육을 보전하지 못하고 길에 버리거나 도랑에 던지는 일이 빈번하였다. 어느 날 임금 앞에서 이 일을 말한 자가 있자, 상이 듣고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드디어 이 영을 내렸는데, 한성부에 정장(呈狀)하여 공문을 받아서 거두어 기르되 아들을 삼든지 종을 삼든지 그들이 하는 대로 하게 하였다.

 

3월 19일 경오

이경억(李慶億)을 우부빈객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집의로, 이익상(李翊相)을 필선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료하였다.

 

3월 20일 신미

평양 교수(平壤敎授)의 직책을 임시로 폐지하였다.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3월 21일 임신

헌납 정화제(鄭華齊)가 인피하기를,
"직강 이태서(李台瑞)를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논계에 있는 ‘죄를 지어 버림받았고 행실이 형편없다.’는 따위 말은 신이 들은 바와 매우 다르므로, 구차하게 논계에 같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고, 정언 강석창도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태서가 일찍이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있을 때에, 어버이의 회갑에 쓸 것이라고 칭탁하고 사사로이 소 두 마리를 마련하여 고향 농장으로 가지고 가서는 끝내 회갑연을 열지 않아서, 고향 사람들 모두가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쁘고 괴상한 인간에 대해서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것은, 그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징계되는 바가 있게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동료가 결국 이것으로 논란을 일으켰으니, 모두가 신이 가볍게 보여 일어난 일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사간 심유(沈攸)가 처치하여, 정화제는 체차하고 강석창은 출사시켰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추함(推緘)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기를,
"연산(連山)에 사는 사비(私婢) 순례(順禮)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다섯 살된 딸과 세 살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소문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하여 얼굴 생김새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미친 귀신 같은 꼴이었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해조를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연산 사람이 아들과 딸을 삶아 먹은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 자애로운 성품은 천부적으로 다같이 타고나는 것인데 그가 흉측하고 완고하더라도 어찌 지각이 없겠습니까. 심한 굶주림에 부대껴서 이토록 악한 짓을 하였으니, 이것은 교화가 크게 무너진 데에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 도신(道臣)은 먼저 수령의 죄를 거론해야 할 것인데 면의 책임자들만 다스리고 말았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와
수령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이어서 생각건대, 국가에서 구황 정책에 대한 강구를 여러모로 극진히 하고 있으나 부고(府庫)는 다 비고 관리는 지쳐서,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들이 붕어처럼 입만 벌리고 갈망하다가 장차 다 죽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봄가뭄의 조짐이 이미 나타나 밀보리가 점점 말라가고 있으므로 무너지고 흩어져버릴 화가 눈앞에 닥쳤습니다. 서울 안 진소를 설치한 곳에 다시 더 주의시키고 각도의 감사에게 글을 지어 하유하여, 진휼의 정사가 미진함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침에 장계를 보고 놀랍고 슬퍼서 차마 말할 수도 없었으나 말이 명백하지 않아서 상세히 알기 어려웠다. 해조에 계하한 것은 뜻이 있었는데 범연히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니 착실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계사가 이러하니 우선 추고하라. 마지막에 경계한 뜻은 참으로 절실하므로 매우 감탄하였다.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3월 22일 계유

이하(李夏)를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정언으로 삼았다. 김수항(金壽恒)을 판의금에 초배(超拜)하였다.

 

상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삼았다. 그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세자를 미리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였고, 또한 정숙하고 현명한 숙녀를 널리 구해서 세자의 배필을 삼아 부인의 일을 잇게 하였다. 이는 인륜의 시작이요 왕화의 바탕이니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왕의 큰 명을 이어받아, 가르침을 받들어 따르고 아름다운 법을 살피고 삼가서, 신명과 백성들의 뜻에 맞기를 바란다.
아, 우리 세자는 총명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중책을 받아 백성들이 이름을 우러러보고 있으니, 좋은 배필을 구하여, 그 미덕을 짝지워주고 가장의 법도를 행사하게 해야 하겠다. 아, 너 김씨는 덕스러운 성품을 하늘에서 받아 유순한 여인의 법도가 어려서부터 드러났다. 네 조상 때로부터 대대로 덕을 쌓아 교화가 집에서 이루어지고 은택이 후손에게까지 미쳤다. 이에 아름다운 여인을 길러, 나의 밤낮없는 소망에 응하여 주었다. 이에 두루 간택을 거쳤는데 내 마음에 꼭 맞았다. 말과 행실을 보고는 궁궐 사람들이 모두 경하했고, 점을 쳐보니 거북점과 시초점이 모두 길하게 나왔으며, 외조(外朝)에 물어보니 공경 대부들이 모두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그러니 휘장(徽章)을 더해주는 것이 예로 보아 실로 합당하다.
이에 정사 심익현(沈益顯)과 부사 김수항(金壽恒)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서 너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게 한다.
내 듣건대, 양(陽)의 덕은 음(陰)의 공이 아니면 펴지지 못하고 남자의 가르침은 여자의 순종함이 없으면 드러나지 못한다고 하니, 이 예복에 어울리게 하는 것은 모두 너에게 달려 있다. 우리 종사(宗事)를 이어받고 우리 원량(元良)을 돕는 것은 효도하고 공경하고 화목하고 순종하는 데에 있다. 너는 성심으로 이것을 생각하여, 사치로써 의(義)를 잃지 말고 나태로써 예(禮)를 손상시키지 말라.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하여 끝까지 한결같아야 한다. 그리하여 상제의 누이에 비견할 만한 아름다움이 주(周)나라에만 있게 하지 말라.
아, 공경하고 사랑받아 끝없이 칭송이 퍼지는 것은 네가 어질기에 달려 있고, 자손 백세토록 우리 국가가 이어지는 것도 네가 몸받기에 달려 있다. 밤낮으로 공경하여 나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세자의 자리에 오르니 나라의 근본이 이에 융성해졌고, 대혼(大婚)은 만복의 근원이 되니 인륜이 시작되는 바이다. 오직 덕을 보고 간택을 하는 것은 예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다. 누가 세자를 도울 것인가? 참으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배필이어야 한다.
너 김씨는 정숙하고 아름다우며, 법도있는 명문에서 태어났다. 충성과 효도를 전해온 집안이라 늘 듣는 것은 좋은 말과 좋은 행실이었고, 유순하고 법도있는 규방의 예절이 모든 행동 사이에서 드러났다. 자전께서 특별히 사랑하여 이미 간택을 하셨고, 모든 사람들의 의논도 내 뜻과 일치하였으며, 거북점과 시초점도 모두 길하게 나왔기에, 이 예복을 예의에 맞게 준비하였다.
이에 정사 심익현과 부사 김수항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게 한다. 집안을 잘 화목케 하면 부모의 뜻이 즐거울 것이고, 천지에 밝게 드러나게 되면 군자의 도가 보존될 것이다. 순한 덕을 온화하게 지니고 몸단속을 검소하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고 조심하여 게을리하지 않으면 끝없는 복록이 거듭 내릴 것이다.
아, 네 선조의 가르침이 엄하였다는 것을 알기에 참으로 다시 권면할 필요가 없겠으나, 나의 종사(宗嗣)의 중대함을 생각건대 더욱 공경하기를 깊이 바라 마지않는다. 공경하고 삼가서 어기는 일이 없게 하고,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게 하라."
하였다.
빈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4대손이다. 예법 있는 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참하고 얌전한 여자의 덕이 드러났는데 때마침 세가(世家)의 처녀를 뽑는 데에 들어 궁중에 들어갔다. 빈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는데도 행동 거지가 예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으므로 사전(四殿)이 모두 사랑하여, 드디어 세자빈으로 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책례(冊禮)를 행하게 되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다가 행사할 때가 되자 비로소 맑아지니 사람들이 다 서로 축하하였다.

 

3월 23일 갑술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전후 굶주린 백성을 합하여 셈하면 17만 2천 2백여 명입니다. 3월부터는 죽을 먹는 가운데에서 농민을 뽑아 양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는 읍에 있는 죽소(粥所)에 가서 먹게 하였습니다만, 너무나 얼고 굶주려서 얼굴 가득히 누렇게 뜬 무리는 날씨가 따뜻해진 뒤에 죽은 자가 더욱 많습니다. 토착민은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는 외에 채소도 아울러 먹으므로 다들 소생하는 기운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굽거나 고기잡이 하는 가구가 생업을 구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다들 죽소로 나가니 어염세(魚鹽稅)를 크게 감면하는 조치가 없으면 앞날의 근심이 매우 절박할 것입니다. 포구나 섬에 사는 백성들은 대체로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집을 못 잊어서 죽을 먹으러 가지 않기 때문에 온 가족이 죽게 되는 경우가 육지 백성보다 훨씬 많습니다. 고을의 중심지와 큰 도회지에는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으므로 쓰러져 죽은 시체가 매우 많습니다. 흉년의 여역(癘疫)은 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모든 마을에 전염이 안 된 곳이 하나도 없어 불처럼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므로 편히 쉬게 될 날이 언제 있을지 막막합니다. 죽을 장만하는 것을 감독하는 자 중에 전염되어 앓는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고 각 고을의 수령과 아속(衙屬)으로서 전염되어 앓는 자도 많습니다. 혹 관아 사람 전부가 전염되어 앓으면 그 관아의 노비에게 관속(官屬)의 일을 대행시키기도 합니다. 병을 앓는 백성을 위해 장막을 따로 설치하여 전염될 걱정을 방지하고 있습니다마는, 대엿새 분의 마른 식량을 나누어 주면 한꺼번에 죄다 먹고는 지팡이를 짚고 무릎으로 기어 들어와 입을 벌리고 먹여 주기를 바라는데, 쫓아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됩니다. 비참한 꼴을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습니다."

 

3월 24일 을해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 어떤 소가 낳은 송아지가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둘이 달렸는데 눈이 넷이고 코가 둘이고 귀가 둘이고 입이 둘이었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에서 3월 11일에 큰 눈이 내렸는데 그 두께가 거의 두 치나 되어 산과 들이 모두 하얗게 변하였다.

 

황해도에서 3월 안에 잇따라 된서리가 내리고 11일에는 눈이 내려 산들이 다 희어졌는데 종일 녹지 않아 기장과 조가 얼어 상하였다. 2월에는 비가 잇따라 내려 봄갈이의 때를 잃었는데, 이 달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날로 심하고 사나운 바람이 땅을 휩쓸어 밀보리가 점점 말라갔다.

 

3월 25일 병자

이단하(李端夏)를 겸보덕으로, 박지(朴贄)를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병조의 용도가 다 비어서 봉부동(封不動) 목면(木綿)을 쓰게 되었는데 남은 것이 많지 않으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좌의정 허적(許積)이, 진휼청으로 하여금 4월, 5월의 한 당번(當番)을 계산하여 지급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나아가 아뢰기를,
"진소(賑所)에서 굶주린 백성의 주검을 수레로 실어내는 일이 잇따라, 보기에 참혹한데, 그 가운데는 혹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싸잡아 실어내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화기(和氣)를 상할 만하니, 진휼청과 각부의 관리를 엄히 경계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이런 폐단이 다시 있으면 진휼청의 당상·낭청과 각부의 관리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각별히 엄하게 경계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 주검을 염하여 깊이 묻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드러나고야 말 것이니, 더욱 불쌍하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이미 진휼청에서 면포를 주어 몸을 가리고 단단히 묻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곧 파내어 염한 것을 벗겨 간다 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만,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접때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의 발에 줄을 묶어 놓은 것을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네 사람이 나중에 끌어내기 위해 미리 만든 도구인데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였다. 승지 성후설(成後卨)이, 한성부의 죽소(粥所)가 시어소(時御所)와 자못 가까운데 여역의 기세가 더욱 성하다고 하여 옮겨 설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운반할 즈음에 반드시 끼니를 잃을 걱정이 있을 것인데, 굶주린 백성이 혹 이 때문에 죽게 된다면 또한 매우 불쌍하다."
하였다.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가, 세자의 가례(嘉禮) 사흘 전에 잠시 부근의 진소에다 합하여 설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단석이 이원정(李元禎) 부자의 일을 연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얼마 안 가서 정계하였다. 이단석이 또 각영(各營)에서 무역하여 판매하는 일을 폐지할 것을 연계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병영·수영은 무역하여 판매하는 일을 완전히 폐지할 수 없습니다만, 감사에 있어서는 은택을 받아 교화만 펴면 되는데, 먼저 스스로 재리에 간여한다면 또한 어떻게 남을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폐단은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의 회계에 따라 감영의 무역 판매만 폐지하였다.

 

경상·원양(原襄)·함경(咸鏡) 세 도의 올 신해년 조로 상반기에 납부할 세폐(歲幣)를 특별히 감면하고, 진휼청에 명하여 그 값을 요리하여 호조로 보내게 하였다.

 

3월 26일 정축

교리 신정(申晸)·민종도(閔宗道), 부수찬 이합(李柙) 등이 상차하여, 진구하는 정사에 대해 극구 말하고 이어서 책례(冊禮) 때에 낭비를 줄이고 감옥에 지체되어 있는 죄수를 빨리 처결할 것 등을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황급하기가 마치 강 가운데에서 노(櫓)를 잃어 어떻게 건너야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아, 허물이 실로 내게 있다.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음식을 대하여도 입맛이 없고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않다. 더구나 연산(連山)의 일은 말하기도 참혹하다. 교화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 매우 부끄러워서 내 절박한 마음이 병중에 더욱 간절하다. 예를 행할 일이 있더라도 어찌 호화롭게 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제 상차한 내용을 보건대, 경계한 것이 매우 절실하니, 가까이 두고 보며 경계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3월 27일 무인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패초를 받고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전시(殿試) 때의 당해 승지를 파직할 것과 직강(直講) 이태서(李台瑞)를 사판에서 삭제할 것과 가례(嘉禮) 때의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파직할 것 등등의 일을 연계하였으나, 상이 다 따르지 않자, 차례로 정계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일 도성 안에는 혹독한 여역이 치열하게 일어나 서로 전염되어 죽은 자가 날마다 잇따르고 있으며, 외방에서 모여든 굶주린 백성은 오로지 진휼의 죽을 먹기 위해 온 것인데 겨울부터 봄까지 뼈에 사무치도록 얼고 굶주린 데다가 밤낮으로 한데에 거처하다 보니 바람과 서리에 시달려서 조금만 건드려도 곧 넘어져 죽고 말므로 시체가 줄을 잇고 도랑이 다 찼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절로 마음이 놀라고 눈물이 글썽입니다. 해부(該府)와 진휼청은 이러한 상황을 빨리 아뢰어야 할 것인데도 여전히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성부와 진휼청의 당상·낭청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또 진휼하는 죽소를 문밖의 적당한 곳으로 옮기고 그 가운데에서 병이 전염된 무리 또한 구별하여 거처하게 한 다음 각별히 구완하고 치료할 것에 대해 유사를 시켜 여쭈어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행 판중추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였는데, 나이가 일흔에 찼기 때문이다. 상이 도타이 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8일 기묘

박장원(朴長遠)을 판윤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홍문관 제학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의 망(望)으로 의망을 더하라고 명하여, 서필원(徐必遠)에게 제수하였다.

 

평안도 이산(理山) 등 네 고을과황해도 수안(遂安)과 경상도 창녕(昌寧)과 원양도 원주(原州)와충청도 영춘(永春)과전라도 운봉(雲峰) 등 고을에 모두 눈이 내렸는데, 서너 치 또는 한두 치씩 땅에 쌓여 녹지 않았다. 여섯 도의 감사가 잇따라 아뢰었다.

 

3월 30일 신사

이달에 서울에서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숫자가 1백 50여 명이었다.

 

전라 감사 오시수가 아뢰기를,
"도내에 여역이 날로 치성하여 그칠 기약이 없으니, 향축(香祝)을 얻어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도내의 중앙에서 제사를 지내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대사헌 이정기(李廷夔)가 바야흐로 추함(推緘)을 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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