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4권, 현종 12년 1671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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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오

집의 이단석(李端錫)과 장령 윤리(尹理) 등이 전계를 거듭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올해의 전삼세(田三稅)를 본읍에 받아 두었다가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성상께서 백성의 일을 염려하시는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령 가운데에는 혹 조정의 뜻에 따라 독촉하여 받는 자도 있고 백성의 소원을 들어주어 받지 않는 자도 있고 받아서 진구에 옮겨 쓰는 자도 있고 이미 받았어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해조를 시켜 다시 품지하여 명백히 지휘해서 각도에서 준행할 바탕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전세는 법적으로 정해진 세금인데 받아서 본읍에 두었다가 진구에 쓰도록 특별히 허가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시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습다. 봄에는 나누어 대여했다가 가을이 되면 상납하게 한 것은 강도(江都)의 쌀을 도로 채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령이 혹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며 이미 받았어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받지 않다가 이제 와서 굶어서 죽어가는 백성에게 독촉하여 받기도 한다고 합니다만, 그럴 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간의 계사는 반드시 들은 것이 있어서 한 것이니, 이왕에 받아들이지 않은 세금은 잠시 가을 곡식이 성숙하기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각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심유(沈攸), 헌납 박지(朴贄), 정언 강석창(姜碩昌) 등이 아뢰기를,
"올해 기근의 참혹함은 팔도가 다 같습니다만 함경도 육진(六鎭)이 더욱 심합니다. 심지어는 옥수수대를 가루로 만들어 푸성귀 음식에다 섞어 먹으면서 조석에 달린 목숨을 잠시나마 이어 가고 있으니,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장차 구덩이로 굴러 죽을 것입니다. 육진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각별히 어루만져 돌보아 국가의 은혜로운 뜻을 보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어사를 보내어 변방 백성을 위로하여 타이르게 하고 이어서 형편에 따라 일을 보게 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진구해 그들의 위급함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육진이 당한 기근의 정상은 전해 듣기에 매우 참혹합니다. 창고에 저축된 것이 있다면 도신(道臣)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도 곡식을 대여하는 것을 막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어사를 특별히 보내더라도 이미 본도에 곡식이 없고 또 곡식을 옮겨갈 형세가 못 되니, 헛되이 갔다가 헛되이 온다면 도리어 국가의 은혜로운 뜻을 펴는 일에 어긋날 것입니다. 우선 도신에게 창고의 곡식이 있는지 없는지와 옮겨서 구제할 형세가 되는지를 물어본 뒤에 다시 품지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곡식을 옮길 수 있는 형세가 되거든 계문하기 전에 곧 형편에 따라 즉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흥정당에서 인견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친영례(親迎禮)에, 별궁(別宮)의 중문(中門) 밖에 나아갔을 때에 기러기를 들고 문으로 들어가는 절차가 있는데, 보덕(輔德)이 마땅히 규(圭)를 받아들어야 하겠습니다만, 궁관은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왕세자가 안에 들어가 기러기를 올리고 배례를 행하고 나서, 다시 나올 때에는 면복(冕服)으로 예를 행하는데, 규를 잡지 않는 것은 타당치 않을 듯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가 중문으로 들어갈 때에 궁관이 규를 받아들고 가서 내시에게 전해 주어 그대로 안으로 받아들고 들어가게 할 일을 시강원에 말하라."
하였다. 중보가 또 아뢰기를,
"전일 송시열이 차자를 진달하여 올려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시열은 다른 재신과는 차이가 있는데 상소에 대한 비답을 아직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래지 않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중보가 아뢰기를,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는 모두 외방에 있는 유신으로서 이러한 때에 필시 궁핍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돌보아 진휼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본도 감사에게 명하여, 먹을거리를 제급하게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의 상소에 답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전에 없던 이런 흉년을 만나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 유리걸식을 하며 잇달아 죽어가고 있다. 참담하고 놀라운 장계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여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경은 큰 덕망을 갖춘 사람으로서 고향에 물러앉아 있어서는 안 되며 온 마음을 다하여 서둘러 오늘날의 이 위급함을 구제해야 한다. 그래서 사관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유하게 하였는데, 지금 상소한 글을 보니, 내가 그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생각한 바를 진달하는 것은 경의 직분인데, 주저하면서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바이겠는가. 아, 한번 든 병이 낫지를 않고 기력이 점점 없어져간다. 병중에 생각건대 더욱 그대가 보고 싶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헤아려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이전에 상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송시열에게 조정에 나오라는 뜻으로 전유하게 하였는데, 시열이 신병을 이유로 오지 않고 또한 글을 올려 대략 생각을 진달하였다. 그 상소에 대한 비답이 이때에 비로소 내려진 것이다.

 

4월 2일 계미

장선징을 대사헌으로, 유혁연(柳赫然)을 형조 판서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우윤으로, 이유(李濡)를 설서(說書)로 삼았다.

 

사간 심유, 헌납 박지, 정언 강석창 등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무릇 국릉(國陵)에 관계되는 일은 큰 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를 막론하고 반드시 급급히 거행하여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바로 그 일을 중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경릉(敬陵)의 금지 구역에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을 장사지낸 곳에 대해서 이미 예조에서 적간을 해 왔는데 지금까지 몇 달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덮어두기만 하고 아직도 처분이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품지 처리하여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풀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예조 참판 이만영(李晩榮)은 경릉을 적간하던 처음에 낭청(郞廳)을 보내기를 청하며 초기(草記)를 올리기까지 했다가 정원에서 퇴각을 당했으며, 가서 살펴보고 온 뒤에는 이미 원근의 형세를 자세히 알면서도 우물쭈물 망설이며 딴 소리를 하면서 남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빠지려고 하였으며, 또 인피하고 들어가 버려 자신은 반드시 그 일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두루 사심을 부린 정상이 참으로 해괴합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고 무겁게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대부들에게는 염치가 매우 중요하며 조정에서는 예의와 겸양이 중요한 것입니다. 승지 김우형(金宇亨)은 당초에 처신한 바가 이미 형편이 없었고 일이 지난 뒤에는 태연하게 상소하여 말이 매우 외람스러웠으니, 그 염치없이 구차스러운 정상이 매우 해괴합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뒤 한달 남짓 지나서 예조 판서 정지화, 참판 김만기가, 경릉(敬陵)의 금지 구역 문제를 가지고 비로소 회계하기를,
"이 도형을 보고 상세하게 참고해보니 경릉의 해자(垓子)에서 오정일의 장지(葬地)까지는 거리가 14보(步)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한계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해자와 가까이 있다고 하여 싸잡아 금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냥 두라고 명하였다.

 

집의 이단석과 장령 윤리가 전계를 거듭 아뢰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연산(連山) 땅에서 일어난 자녀를 삶아먹은 변고는 실로 고금에 없던 바로서 차마 들을 수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주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하늘에서 타고난 이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궁핍으로 인하여 극악한 죄를 저지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실로 절박한 기근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본현이 진구하는 정치를 착실히 하지 않았음을 이것을 근거로 알 수가 있습니다. 해당 수령은 절로 그 죄가 있는 것인데, 우선 해조의 회계와 조정의 처리를 기다리느라 아직 논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제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처분이 없으시어, 죄를 진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임지에 있게 하니, 나라에서 형법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곳의 진구하는 정치가 한결같이 방치되고 굶주린 백성들이 받는 피해가 날로 증가되고 있는 사실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연산 현감(連山縣監) 윤민도(尹敏道)를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전에 없던 변고가 도내에서 일어났다면 도신(道臣)이 된 자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허물을 가지고 인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마땅한데,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은 연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범연하게 장계하여, 마치 예사로운 일로 보아넘기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한 도의 진구하는 정치가 허술할 것이라는 것을 또한 이 일을 미루어 알 수가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우선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그뒤에 금부가 조율하여, 윤민도는 고신을 삭탈하였다. 【자녀를 삶아먹었던 사람도 곧 죽었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8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윤리(倫理) / 구휼(救恤)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4월 3일 갑신

대사헌 장선징과 대사간 홍만용이 모두, 추함(推緘)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사간 심유, 헌납 박지, 정언 강석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평 이삼석(李三錫)은 시골에 있을 때에는 재물을 긁어모아 많은 원성을 들었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세력있는 자에게 아첨하며 빌붙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습니다. 일찍이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있으면서, 김징(金澄)이 어버이의 회갑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앞장서서 마당에서 절하고 꿇어앉고서도 태연히 부끄러운 줄을 몰랐고, 그 일이 발론된 뒤에는 덮어주고 가려주며 드러나게 사설을 늘어놓으며 김징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사대부의 마음가짐이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허물을 다스리고 잘못을 바로잡는 직임을 결코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 도사(京畿都事) 조헌경(曺憲卿)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일찍이 대간으로 있을 때에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며 본직에 제수되어서는 열읍에게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지평 김수오(金粹五)는 인망도 없고 이력도 없는데 인재가 부족한 기회에 외람되이 제수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고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이삼석은 세 번 아뢰니, 체차하라고 명하였고, 조헌경은 두 번 아뢰었는데, 따르지 않았다. 드디어 모두 정계하였다. 김수오는 세 번 아뢰니, 이에 따랐다.

 

헌납 박지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김우형(金宇亨)의 일은, 동료가 ‘스스로 처신한 것이 형편없고 상소한 말이 외람하다.’는 뜻으로 간통을 보내왔기에, 신도 그가 염치를 손상시키는 바가 있을까 염려하여 함께 동참하였습니다. 지금 물의를 들으니, ‘전교관(傳敎官)의 직임은 일찍이 택차(擇差)한 규례가 없으니, 당초에 스스로 처신한 것이 논핵할 만한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상소한 것을 보아도 또한 크게 외람스러운 말은 없다. 그러니 염치 문제를 가지고 문책을 하는 것은 실상을 잃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사간 심유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가례(嘉禮) 때에 크고 작은 집사(執事)들을 모두 완복(完福)한 사람으로 택차하는 것은 예전에는 그러한 예가 없었으니, 이번 일이 비록 구구한 속절(俗節)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궁관(宮官)을 옮겨 차임한 뒤에는 승지 김우형은 마땅히 자신을 처치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즉시 사면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일은 염치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신도 논계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물의를 들으니, ‘김우형의 일은 실상이 그렇지 아니하여, 별로 논핵할 만한 잘못도 없고, 상소에서 허물을 끌어댄 말도 외람스럽기까지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대간의 논계를 너무 과중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언 강석창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가례(嘉禮) 때의 궁료(宮僚)를 반드시 완복(完福)한 자로 택차하는 것은 나라의 체모에 있어서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합니다만, 대신이 이미 발언하여 이조가 다시 차출하기까지 하였고 도감의 크고 작은 집사들을 이미 구별을 하였으니, 김우형의 도리로서는 서둘러 인피하고 들어가서 잠시 조정의 의논이 정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아가든지 물러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태연히 염치도 없이 스스로 처신할 도리를 생각지 않은 채, 혹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끝내 입을 닫고 있었고 공론이 매우 시끄러워도 못 들은 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지난 뒤에 오만하게 상소하여, 전교관(傳敎官)을 택차하는 규례가 없다고 핑계대며, 은연중에 자신의 잘못을 수식하고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하는 뜻이 있었으니, 그 전혀 염치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매우 외람스러운 자가 아니겠습니까. 염치문제를 가지고 살펴 보건대, 면려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신이 동료들과 상의하여 논핵했던 것입니다. 지금 물의를 들으니, 혹 ‘당초에 필선을 체차한 것은 일의 체모를 손상시킨 것인데, 인하여 죄안을 삼은 것은 도리어 외람스러운 일이다.’라고 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피혐하는 말이 전도되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으니, 나는 그 주장하는 뜻을 모르겠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이단석(李端錫)과 장령 이하(李夏)가 처치하기를,
"궁관을 택차한 것은 말단적인 풍속에 얽매인 것일 뿐이고, 승지가 스스로 처신한 일에 있어서는 염치를 잃은 실상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당초에 논계한 것은 이미 신중하게 하지 못한 흠이 있고, 끝에 가서 일을 확대시킨 것은 매우 각박한 것입니다. 박지, 심유, 강석창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우형의 일은, 간원이 다시 연계하여 세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계하였다. 이미 김우형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여 논계한 대관을 체직시켰고 보면, 그 뒤에 연계한 것은 대관의 체모에 어긋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였다.
"본도(本島)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 2백 60여 인이나 되고 살아 남은 자도 이미 귀신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 먹었기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 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들이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옷자락을 잡고 따라가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기도 하며,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묻어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진 것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4월 4일 을유

사시부터 유시까지 사방이 어두워 마치 먼지가 내리는 듯하였으며, 햇무리가 졌다.

 

세자빈이 사전(四殿)에 조현례(朝見禮)를 행하였다.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원량(元良)은 한 나라의 근본이니, 기쁘게도 이미 오래 전에 세자에 책봉을 하였고, 대혼(大昏)은 만세의 바탕이니, 이제 비로소 좋은 날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이에 왕은 고명(誥命)을 반포하여 기쁜 마음을 펴 보이고자 한다. 생각건대 우리 훌륭한 세자는 일찍부터 종묘 제사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자식을 혼인시키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고, 집안을 잘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고운 배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왕세자빈 김씨는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부여받았고 훌륭한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유순한 법도와 아름다운 계책은 세자의 짝이 되기에 마땅하였고 부드러운 음성과 법도있는 자태는 이미 육궁(六宮)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에 융성한 단면(端冕)의 예로 맞아들이고 상복(象服)의 의식을 갖추어 명하였다. 닭 우는 새벽에 오는 문안에서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보겠고, 자손을 위해 내는 계책에서 자손들이 번창하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찌 다만 나 한 사람만의 기쁨이겠는가. 너희 온 백성들과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다. 아, 관저(關雎)·인지(麟趾)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 종사를 부탁하는 데에 다시 무슨 걱정이 있으랴. 홍범 구주(洪範龜疇)의 복이 내리면, 모두가 생성(生成)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4월 5일 병술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집의 이단석(李端錫), 장령 이하(李夏)·윤리(尹理) 등이 아뢰기를,
"내사(內司)가 수탈하는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배천(白川)의 공미(貢米)가 올라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시간을 끌며 받아주지 않고 먼저 뇌물을 요구하며 원수의 공물[元貢]을 빼앗는다는 말이 자자하게 떠돌았습니다. 이에 본부에서 본군의 색리(色吏)를 추문하였더니 건건마다 승복하였습니다. 위로는 내관(內官)으로부터 아래로는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받는 쌀이 많으면 10여 섬이고 적어도 서너 섬에 밑돌지 않으며 은화(銀貨)의 갖가지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습니다. 정해진 수량 이외의 것을 요구하여 거두는 것은 본디 해당되는 죄가 있으니, 엄히 다스려서 뒤폐단을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당해 내관은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고, 별좌(別坐)와 관리도 모두 유사를 시켜 가두어 엄중히 다스리게 하되, 받았던 물건은 낱낱이 거두어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당해 별좌 이하의 관리를 모두 잡아가두고 엄히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라."
하였다. 헌부가, ‘별좌 이하가 이미 모두 사실대로 불었으니 차지 내관(次知內官)도 그 죄가 똑같다.’고 주장하며 한 달 동안 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서 큰 바람이 서남방으로부터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려 몇 리 사이에 산이 보이지 않고 일찍 파종한 갖가지 곡식이 날리는 모래에 죄다 손상되어 남아 있는 종자가 없었으며, 덕원(德源) 등 여남은 고을에서도 큰바람이 불었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에서는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粥所]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윤리가 완전히 끊겼으니,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4월 7일 무자

달이 헌원좌각성(軒轅左角星)을 범하였다.

 

4월 8일 기축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윤계(尹堦)를 정언으로 이혜(李嵆)를 부교리로 삼았다.

 

4월 10일 신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죄수를 즉시 처결하지 않기 때문에 여역이 치열하게 일어나 죄수가 잇따라 전염되어 앓고 있습니다. 형조의 좌이관(佐貳官)을 모두 추고하소서. 그리고 판서 유혁연(柳赫然)을 즉시 패초하여 소결(疏決)하도록 명하여 옥사가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한성부 좌윤 이정기(李廷夔)가 죽었다.
이정기는 자(字)가 일경(一卿)이고, 괴과(魁科)에 올라 명망이 있었으며 청현직을 두루 거쳤다. 사람됨이 선량하고 넉넉하게 도량이 넓어서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일찍이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있을 때에, 이정기를 좋아하지 않던 어떤 암행 어사가 ‘벼슬살이가 청렴치 못하고 산소 아래에다 집을 지었다.’라고 무함을 하기까지 하였는데, 이정기에게는 실로 이러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억울한 일이라고들 하였다.

 

4월 12일 계사

헌부가 아뢰기를,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두진(李斗鎭)은 사람됨이 탐오하여 가는 곳마다 실패를 보았는데 발탁하여 중진(重鎭)에 제수하였으니 이미 매우 분수에 넘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이후에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였습니다. 해마다 흉년이 들고 육진(六鎭)은 더욱 심한 이때에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는 책임을 결코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또 지난 겨울 무역 시장을 열었을 때에 장사꾼을 내쫓으며 잡인을 금한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청나라 차인(差人)을 몰래 끌어들여 사사로이 물화를 무역한 것이 매우 낭자하였습니다. 그래서 북방에서 오는 사람이면 다들 말하고 있습니다.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네 번 아뢰어서야 상이 따랐다. 이두진은 그 뒤에 본도에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따라 금부가 고신(告身)을 삭탈하는 것으로 의율(擬律)하였는데, 파직만 시키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대사간 남용익과 사간 이합이 아뢰기를,
"올해에는 진소(賑所)에서 떠돌이들의 주검이 날로 늘어나 도성 문 안팎에 주검을 나르는 수레가 잇따릅니다. 그런데 해청(該廳)에서는 으레 월말에 서계(書啓)하고 있으므로 날짜가 이미 오래 지나서 죽은 자의 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진소로 하여금 닷새에 한 번씩 아뢰도록 하여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해골을 묻어 주는 정사는 성스런 왕들이 중히 여기었습니다. 지금 길에서 굶어 죽은 사람들이 잇따라 널려 있으니 더욱 유념하여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신칙하였는데도 대부분 거두어 묻지 않아서 파리들이 빨아먹도록 버려두고 있으니, 보기에 처참합니다. 해부로 하여금 날마다 살펴보게 하여 혹 한데에 버려두고 즉시 묻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당해 부관(部官)을 잡아다 추문하여 죄주도록 하소서.
요즈음 팔도의 장계를 보면 굶거나 여역을 앓거나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거의 없는 날이 없는데, 겁탈하고 살상하는 강도 사건에 대해서만은 전혀 아뢰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도신(道臣)이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서, 본디 옛날에 홍수나 가뭄이나 도둑을 아울러 아뢰던 의의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제 살상하고 약탈하는 일이 곳곳에 일어나고 있어서 앞날의 염려를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각도의 감사를 시켜 열읍(列邑)에 신칙하여 곧 알리게 하고, 또 토포사(討捕使)를 엄히 주의시켜 각별히 계략을 써서 붙잡도록 하여 널리 퍼지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3일 갑오

장선징을 우윤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최후상(崔後尙)을 수찬으로, 정적(鄭樍)을 지평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6일 정유

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박지(朴贄)를 장령으로, 조위봉(趙威鳳)을 지평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인평위(寅平尉)의 장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예장(禮葬)으로 거행하고 묘막을 옮겨 지으라고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생각건대 장지를 옮길 때에 예장하는 것은 본디 법으로는 응당 거행할 일이 아니니, 인평위를 예장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연계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집에서 장지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이미 주간할 사람이 없어서 일을 시작하지 못하였는데, 만일 이런 특별한 은전을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대간이 계사를 정지하였다.

 

4월 17일 무술

연천(漣川)의 삼성 죄인(三省罪人) 이애립(李愛立)이 처형되었는데, 전패(殿牌)를 훔쳐내어 악역(惡逆)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연천은 죄인이 그때 살고 있던 곳이기 때문에 혁파에 해당되었다. 이에 대해 허적(許積)이 상에게 아뢰기를,
"고을을 혁파하는 폐단은 끝이 없습니다. 예전에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혁파하였던 고을을 회복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제는 혁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뒤로 이러한 변고가 있으면, 본도에서 잡아 다스려 그 죄를 주고, 아뢰지는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만기(金萬基)는 아뢰기를,
"본도에서 처단을 하는 것은 일의 체모로 보아 옳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혁파하지 말고, 이것으로 일정한 법식을 삼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서울 의 진죽(賑粥)을 임인년에는 3월 11일에 설치하였다가 5월 10일에 파하였으며 무신년에는 2월 2일에 설치하였다가 5월 25일에 파하였습니다. 금년에는 1월 16일에 처음 설치하였는데, 기근이 더욱 심하여 도성의 백성들 이외에도 외방에서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무리들도 많이들 와서 죽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만약 진소(賑所)를 파하는 기일을 미리 알려주고 고향에 돌아가서 살아갈 바탕을 미리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필시 굶주린 백성들이 그 때에 가서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임인년의 예에 따라 5월 10일에 진소를 파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죽을 얻어먹다가 진소를 파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4일 치의 양식을 헤아려 지급하라는 뜻으로 진소에 미리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15일에 진휼을 정지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4월 18일 기해

좌의정 허적이 신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이때에 경은 어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는가.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끝에 그 노고로 병이 되었으니, 내 염려가 또한 어떠하겠는가. 묘당의 긴급한 문서는 경에게 가서 의논하여 복계(覆啓)하게 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먼저 의원을 보내어 이미 병을 보살피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였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어미의 병을 구호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진소하여 체직되었다.

 

4월 19일 경자

장선징을 대사헌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예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정언 윤계 등이 아뢰기를,
"지금의 백성들의 일은 말하자면 참으로 참담합니다. 우선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기근과 여역이 함께 일어나 시체들이 서로 겹쳐 쌓였으며 찌는 듯한 나쁜 기운이 안팎으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진휼을 하던 대소 관원들까지 잇달아 전염이 되었습니다. 성안의 모든 집들이 귀천을 가릴 것없이 제대로 남아난 집이 없으며 황급하고 경황없는 것이 병화(兵火)보다도 심합니다. 서울이 이러하니, 외방은 알 만합니다. 예전에는 여역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어도 으레 서울과 외방에서 특별히 여제(癘祭)를 지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서둘러 먼저 서울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외방에는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낼 일도 또한 계품하게 하여 차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갑인년의 전례에 의하여, 날을 잡지 말고 산천제(山川祭)와 성황제(城隍祭)를 먼저 행하고 북교(北郊)의 여제에는 중신을 보내고 민충단(愍忠壇)에는 근신을 보내어 같은 날에 설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외방은, 험천(險川), 쌍령(雙嶺), 금화(金化), 토산(兎山), 강화(江華), 진주(晉州), 남원(南原), 금산(錦山), 달천(㺚川), 상주(尙州), 원주(原州), 울산(蔚山) 등 열두 곳은 모두 왕의 군대가 전사한 곳이기 때문에 경연 신하와 대간의 논계를 인하여 무신년과 경술년 두 해에 혹은 여역 때문에 혹은 가뭄 때문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 일이 이미 사전(祀典)에 들어 있습니다. 일체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4월 20일 신축

의정부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성품이 너그럽고 넓어서 남과 거슬리는 일이 없었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정승에 제수되어서는 시세에 맞추어 행동하였을 뿐이고 건의한 바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9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성품이 너그럽고 넓어서 남과 거슬리는 일이 없었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정승에 제수되어서는 시세에 맞추어 행동하였을 뿐이고 건의한 바가 없었다.

 

4월 21일 임인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정언 윤계가 아뢰기를,
"전에 헌부가, 각 아문에서 곡물을 팔 일이 있으면 혹 호구(戶口)에 따라서 주거나 또는 저자의 사람에게 주어 도성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을 베풀고 간사한 자가 이익을 독차지하는 폐단을 막을 것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접때 탑전에서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훈국의 곡물을 팔려 하는데 전에 대간의 계사가 있었으므로 여쭈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상께서 대간의 계사는 대개 이익을 탐내는 무리 때문에 나온 것인데 또 품지하여 알려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대간의 계사에 따라 저자에 내어 주어 값이 폭등하는 걱정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향청(粮餉廳) 곡물 6백여 석을 당상과 낭청이 나누어 매매하여 그 값을 반으로 줄여 한꺼번에 죄다 흩어 주어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대간의 계사는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을 뿐이었고 보면 탑전에서 다시 여쭌 것도 이미 매우 외람스러운 것이었고, 친히 성상의 분부를 받은 뒤에도 일의 체모를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예전의 버릇을 따랐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고, 다섯 번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4월 23일 갑진

조수익(趙壽益)을 좌윤으로, 이익(李翊)을 승지로, 심유(沈攸)를 필선으로, 오시복(吳始復)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4월 26일 정미

사간 이합, 헌납 정화제, 정언 윤계가 아뢰기를,
"경상 우병사 정영(鄭韺)은 본디 성품이 거칠고 야비하여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고 있는데 집이 가까운 곳에 있어 짐바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군포(軍布)를 여러 가지로 탈을 잡아 점퇴(點退)하고 반드시 베가 곱고 척수가 긴 것만을 받으며, 심지어는 제집 사람을 시켜 바쳐야 할 사람에게 되팔게 하고 있으므로 군졸들이 원근을 헤아리지 않고 가서 사는데 마치 시장터와 같습니다. 그 밖의 수탈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7일 무신

정원이, 승지가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구전 정사(口傳政事)를 계청하였다. 최일(崔逸)을 승지로 삼았다.

 

집의 이단석, 장령 이하·박지가 아뢰기를,
"충청도의 폐현(廢縣)인 청양(靑陽)에 사는 사노(私奴) 진웅(晉雄)이 본부에 정장(呈狀)하기를, ‘본현이 혁파된 지 이제 8년이 지났는데, 이러한 흉년에 이 고을에 진휼을 감독하는 관원이 없어서, 1백여 명의 백성들이 굶주림을 참고 올라와서 다시 현을 설치해 달라는 뜻으로 비국에 정장하였더니, 비국에서, 현을 다시 설치하는 일의 편리 여부는 본도에서 헤아려서 장계를 올려 결정받아야 할 것이라는 뜻으로 제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본도에다가 정장을 하려고 하였는데, 그 때에 정산 현감(定山縣監)이 자신에 대해서 만족스럽지 못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의심을 하고 현을 복구해 달라고 호소를 하는 일에 대해서 노여움을 품고서, 그때에 정장을 하였던 사람들을 끝까지 침학하여 살아갈 수 없게 하였습니다. 저의 동생 초웅(楚雄)을 주모자라고 지칭하고, 저의 아비 선익(善益) 및 제 형제 세 사람을 감사에게 보고도 없이 특별히 대장(大杖)을 만들어서 3일 동안 마구 구타를 하며 형신하였습니다. 3차 형신에 이르러서는 발가락과 다리 뼈가 부서져서 아비와 아들 합하여 네 사람이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정문(呈文)을 한 것이 온 고을 사람들의 소원에 관계된 것이지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한 행위가 아니었고 보면, 이토록 기근이 심하여 아침 저녁도 보전하지 못하는 때를 당하여 멋대로 잔혹하게 형신을 한 것은 일이 놀랍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본도로 하여금 실상을 엄하게 조사해 계문하게 하여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근래에 도성 백성들의 기근이 날로 심하여 시장의 쌀 한 섬 값이 은(銀) 닷 냥이나 되니, 그 급박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는데, 본청에 저축해 두었던 쌀과 콩은 이미 바닥이 나서 남은 것이 없고 달리 대책을 세울 길이 없습니다. 이번에 서쪽에서 운송해 오는 쌀은 비록 호조의 경비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의 형세에 완급의 차이가 없을 수 없으니, 그 가운데에서 전미(田米) 1만 석을 우선 덜어내어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민호(民戶)의 크기에 따라 나누어 지급하고 가을이 되거든 다시 받아들여 호조에 되갚으면 또한 손실되는 것도 없을 것이고, 도성 백성들의 위급을 구제하는 길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4월 28일 기유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부터 창덕궁(昌德宮)으로 다시 돌아왔다. 왕대비, 세자, 빈궁도 이날 다시 돌아왔다.

 

4월 29일 경술

대왕 대비와 중전이 또한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왔다.

 

행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헌납 정화제, 정언 윤계가 아뢰기를,
"어영 대장 이여발(李汝發)은, 병으로 융무(戎務)를 폐한 지가 거의 1년이 되는데도 할일없이 직책을 그대로 띠고 있게 내버려 두고 지금까지 처분이 없으니, 나라의 체모로 헤아려 볼 때에 참으로 한심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휴가를 얻어서 외방에 있은 지가 또 몇 달이 지나서, 더없이 중요한 금군(禁軍)들을 오래도록 장수가 없는 군졸이 되게 하였습니다. 일이 해괴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체차하소서."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은대(銀臺)의 직임은 중임(重任)이고 청선(淸選)입니다. 빈 자리가 있을 경우에는 정사(政事)를 하도록 품지해야 하는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이며, 원래 구전(口傳)으로 차출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연전에 마침 객사(客使)가 들어올 참인데 미처 정사를 하지 못하여 구차스럽고 간략하게 구전으로 차출을 했던 적이 있으나, 그것은 부득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에 잘못된 그 전례를 끌어다가 스스로 체면을 손상시켰으니, 매우 잘못한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서울 안에 진소(賑所)가 세 군데인데, 한 곳에 죽을 먹으러 가는 굶주린 백성이 혹 1만여 명, 혹 7, 8천 명, 혹 5, 6천 명이었다. 이달에 죽은 자가 무려 5백여 명이나 되었고 길에 쓰러져 죽은 무리도 매우 많았다. 한데에다 버려둔 채 거두지 않았다 하여, 비국의 계사에 따라 하옥되어 논죄받은 부관(部官)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으나, 죽은 자가 잇따라서 각부(各部)가 즉시 매장하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각도에서 굶주려 죽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에 대해 보고한 것도 1만여 명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각 고을에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의 수는 한 도를 합할 때 많으면 20여 만이었고 적어도 18, 19만에 밑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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