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해
비변사가 일찍이, 강도(江都)의 해묵은 콩 1만 섬을 경기 고을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지급하고 또 6백 섬을 수원의 군병들에게 나누어 지급할 것을 청했었는데, 강도의 저축이 부족하여 숫자에 맞추어 지급하기에 어려움이 있자, 원수(元數) 안의 1천 6백 섬은 경창(京倉)의 콩으로 나누어 지급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경창으로 받아들이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행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헌납 정화제, 정언 윤계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스럽고 우애있고 어질고 자애로우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관대하고 포용력이 있으며 나라를 맡아 다스리신 지 13년 동안에 한 번도 덕을 잃은 일이 없는데, 다만 분발하는 의지가 확립되지 않아서 나날이 새로워지는 공효가 적게 나타나고 흐지부지 처리해버리는 습성이 점점 이루어져 고식적으로 하는 정치가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리들이 나태하고 모든 일들이 제대로 되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일을 다잡아 하지를 않고 그저 대충 세월만 보내는 풍조가 이루어져 장차 수습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길이 탄식하고 깊이 애석하게 여기는 까닭입니다.
올해의 진구하는 정치의 어려움은 실로 전에 없던 바로서 조정에서 모든 정책을 강구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당초에 시행한 일들이 합당치 못한 것들이 많아서 결국 은택이 아랫백성들에게까지 다 이르지 못하고 끝에 가서는 서울과 외방이 모두 텅 비어서 시체가 즐비하게 쌓이게 되었습니다. 쪽박을 든 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이 실어내는 수레 안에서 죽어가고, 옷깃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던 아이가 길가에 버려져서, 보는 자들이 탄식을 하며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백성의 부모이신 성상께서는 의당 어떠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이러한 때에 슬프게 근심걱정하는 마음을 지니고 떨쳐 진작시키는 일을 하시어, 덕을 닦고 허물을 반성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분부를 내려 자신을 죄책해야 합니다.
또 진소(賑所)를 처음 설치했을 때부터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불쌍히 여기는 뜻으로 효유하고 건져 구제하는 뜻을 보이며, 진구하는 관원들의 근만(勤慢)을 조사하여 잘하는 자는 상을 주고 못하는 자에게는 위엄을 보여서, 허위로 하여 사실과 다르게 되거나 잡스럽게 섞여 고르지 못하게 되는 폐단을 없도록 하였다면, 백성들이 비록 저녁에 죽더라도 필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귀신이 될 것인데, 적간하는 일을 너무 늦게 시작하였고 몇 차례 한 뒤에는 곧바로 또 정지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바로 서울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외방의 진구하는 정치는 서울에 견주어 더욱 허술합니다. 대개 수령들의 인품과 재능이 만 가지로 서로 달라서, 혹 마음과 힘을 다하여 온갖 방도를 써서 구활을 하는 자도 있고, 혹 힘이 없고 저축이 바닥나서 뜻은 있으나 실행을 못하는 자도 있고, 혹 이때를 틈타 자신만을 살찌우며 전혀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구별하여 권징하는 일은 평년보다 아주 서둘러 해야 할 일입니다. 어사를 보내 살피게 하는 일이 비록 소요를 일으킬 염려가 있기는 하나, 만약 편의에 따라 수시로 출몰하며 진구하는 일을 살피게 하면, 탐관오리들은 징계되는 바가 있게 될 것이고 굶주린 백성들은 의지하여 호소할 데가 있게 될 것이어서 필시 조금이나마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는 재난을 아주 혹심하게 당하여 사람이나 가축이나 모두가 다 죽게 되었다고 하니,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섬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마땅하고, 이어 인호(人戶)와 마안(馬案)을 점검하여 존망의 실제 숫자를 알아보는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들이 지금 때가 늦었으니, 이것이 바로 외방의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미 지난 일이야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만 앞으로의 일이 더욱 염려가 됩니다. 일찍이 진휼청의 계사에는 진소(賑所)를 정폐할 기일이 멀지 않았었는데 상께서 특별히 5일을 더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백성들이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였고 잠시나마 목숨이 연장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이밖에는 더해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미 해산시켜 보낸 뒤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어디 호소할 곳도 없을 터이니, 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갈망하는 많은 백성들이 한꺼번에 모두 죽을 형편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자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막힙니다. 만약 혹 특별히 근신을 보내어 그 숫자를 헤아려서 다시 며칠 치의 쌀을 지급하고 효유하여 해산시켜 보낸다면, 그뒤에 조금 연장되는 목숨은 모두가 성상께서 내리신 것이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그리고 보릿가을이 다가오더라도 보리를 파종한 것이 아주 적고 삼남 지방은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아 보리가 모두 말라죽었다고 하니, 올해에도 또 보리 수확이 없게 되었습니다. 7월에 이르면 서울이나 외방의 백성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이니만큼 만약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비용이 있다면 백성들 구제하는 정책을 속히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선 한두 가지 일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쓸데없는 병사들을 많이 양성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백성들을 해치는 것은 옛사람들이 깊이 경계하였던 일입니다. 지금 도성의 친병(親兵)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또 정초청(精抄廳)을 더 설치하여 여덟 차례의 번(番)에 뽑는 숫자가 이미 4천 명이 넘습니다. 이것은 기병(騎兵)의 원액(元額) 가운데에서 취하기 때문에 비록 새로 뽑는 소요스러움은 없습니다만, 관에서 보포(保布)를 징수하는 폐단은 참으로 다른 기병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올해에는 본청이 어영청에서 쌀을 꾸어다 힘들게 겨우 군량은 채웠습니다만, 이밖에 많은 장관들의 여러 표하(標下)들에게 지급할 요포(料布)가 비용이 많이 듭니다. 눈앞에 닥친 긴급히 대비할 일이 무엇이 있길래, 이런 군량도 준비되지 않은 신병을 모아서, 거의 바닥이 난 군량의 저축을 소모한단 말입니까. 오늘날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혁파해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금방 설치했다가 금방 혁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곡식이 조금 여물 때까지를 기한으로, 더 뽑은 군사들을 상번(上番)시키지 말고, 장관들의 표하 군사들을 줄여 없애도록 하여, 그 비용을 절약하소서. 그러면 혹 구황 정치에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금군, 별군직, 훈국, 어영의 마군(馬軍)들의 마료(馬料)를 해조에서 그 비용을 갖다가 쓰는데 한 달치를 통계하면 9백여 섬이나 된다고 하니, 그 비용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풀이 넉넉하게 자랐으니 방목을 하기에 아주 좋은 때입니다. 이달부터 9월달 풀이 마르기 이전까지 모두 전교(箭郊)에 방목을 하면, 다섯 달 동안에 절약할 수 있는 것이 거의 5천 섬이나 됩니다. 이것을 옮겨 사람의 식량을 삼으면 거의 1천 명의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흉년에 말먹이를 줄인 것은 예전에도 이렇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이런 백성들의 근심 이외에 또 크게 민망한 일이 있습니다. 문서가 적체되는 폐단에 대해서 전후로 신료들이 번갈아 거듭 진달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끝내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성상께서 편찮으시고 눈병이 때때로 발병을 하여 많은 문안(文案)들을 직접 보시기가 어렵다는 것을 신들이 참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만, 대단히 시급한 초기(草記)와 으레 계하할 공사와 같은 것들도 오래도록 지체시키고 있으며, 심지어 제관(祭官)을 개표(改標)한 단자도 때로 지체시키고 중임인 장수의 의망에 대한 일도 아직 궐내에 두고 있으니, 밖에서는 의혹스럽습니다. 혹 일을 담당한 중관(中官)이 때맞춰 아뢰지 않아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듯한데, 그렇다면 정원에서 조용히 여쭈어야 하는데도 전혀 소식이 없으니, 신들은 삼가 탄식스럽습니다.
신 용익(龍翼)이 경기 지방을 안찰할 때에, 옥에 갇힌 죄수를 염려하시는 특별 유지를 받고, 도내에서 여러 해 동안 옥에 적체되어 있던 자를 뽑아내어 아뢰었더니, 형조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문건을 만들어 결말을 지어서, 일찍이 지난해 6월에 입계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계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옥당의 차자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였는데 여전히 판하되지 않고 있습니다. 죄수에 대해서 아뢴 일이 만약 합당하지 않다면 다시 내리면서 고치라고 명하시는 것이 옳은데, 전혀 결정을 내리지 않고 완전히 잊고 있는 듯이 하니 신들은 실로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올리는 글이 성상의 뜻에 맞지 않으면 반드시 여러 날을 궐내에 두시어 미안한 뜻을 보이시고, 대간의 논계가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윤허치 않는다는 말씀으로 끝까지 거절을 하십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들이 비록 말을 실수하였더라도 아비는 마땅히 질책하여 가르쳐야 하고 분명하게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어찌 즉시 응답하지 않고 깨우쳐 주지 않고서 마치 노여움을 품고 있는 자처럼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지난번에 내사(內司)가 배천(白川)의 공미(貢米)를 농간한 일에 대해서 헌부가 죄를 청하였더니, 전하께서 그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시고 즉시 담당자를 하옥하였습니다. 그런데 내당(內璫)에 대해서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죄가 같은데 벌이 다르니 법을 적용하는 도리에 어그러질 뿐만 아니라, 이미 발론해 놓고는 추문하지 않았으니 어찌 방자한 습성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습니다.
신들이 또 들으니, 근래에 궁궐이 엄하지 않아서 내외의 여인들이 멋대로 드나든다고 합니다. 가례 때에는 더욱 절도가 없어서 매우 난잡하였으며, 매우 엄해야 할 궐내에 여역의 기운이 또한 전염되어 죽은 내인(內人)이 한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항에 전해지는 말을 비록 다 믿을 수는 없겠으나 그 말을 듣고는 놀랍고 두려워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립니다. 보통 사람들도 집안을 바루는 방도를 반드시 내외의 구별에서부터 먼저 합니다. 더구나 궁궐에 있어서는 더욱 엄격해야 마땅한데, 방금(防禁)이 한번 해이해져서 사잇길이 점점 열리게 되면, 그 우려됨이 어찌 다만 여기에서 그치고 말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더욱 경계하고 신칙하여 미세한 조짐을 막도록 하소서. 아, 노여워하는 하늘의 마음을 즉시 돌릴 수 없고 죽어가는 백성들의 목숨을 다 살릴 수는 없더라도, 이와 같은 일들은 오직 전하께서 마음 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무엇을 망설여 시행치 않으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 나라의 형세가 황급하고 형편없어 기근과 여역으로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데 백성이 그 재앙을 받고 있으니,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가 막힌다. 차자 가운데의 이야기는 뜻이 매우 절실하여 내 감탄하였다. 마음에 두고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가운데 의논하여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뒤 등대하였을 적에 상이, 진구하는 일이 한창인데 수령을 교체하면 역시 폐단이 크다 하여 염탐하는 일을 잠시 보류하라 하였다. 제주 어사에 있어서는 묘당의 의논이 다들 보내야 한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더 뽑은 정초청 군사의 상번을 멈추는 일에 있어서는,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햇곡식이 조금 여물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더 뽑은 군사들을 상번시키지 말자고 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옳습니다. 차자의 말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전마(戰馬)를 방목하는 일에 대해서는, 허적이 그 편리 여부에 대해 신하들에게 묻기를 청하였는데, 서필원은 그 불가함을 극구 아뢰면서 마료를 조금 줄이기를 청하였고, 유혁연(柳赫然)은 쓸모없는 말을 가려서 방목하고 그 마료는 줄이지 말자고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그 가운데에서 쓸모없는 말을 추려서 방목하고 그 나머지는 마료를 줄이자고 청하였다. 허적이 김수항의 의논이 가장 적절하다고 찬성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쳐서 벼락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5월 2일 임자
경기도 양주(楊州) 등 고을에 우박이 내리고, 양천(陽川) 등 고을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5월 3일 계축
사족의 여인 영선(英善)을 간통한 전 군수 유휘(柳徽)는 죄가 의심스럽다 하여 대신의 의논을 받아들여 참작하여 정배하였고, 이신구(李藎耉)는 형수를 무함한 죄로 특별히 형추하고 유배하게 하였다.
경상도 고령현(高靈縣)에 우박이 내렸다.
5월 4일 갑인
밤에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황해도 금천(金川)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5월 6일 병진
평안도 순천(順川)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였다.함경도 삼수(三水) 등 고을에 눈이 내려 보리가 태반이나 얼어 죽었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듣건대, 진소(賑所)에서 죽을 먹이는 일을 이달 15일에 중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세 곳에서 죽을 먹던 백성들이 결국 갈 곳이 없어 죽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유사(有司)에 명하여 잠시 동안 홍제원(弘濟院)의 진소 한 곳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가을까지 죽을 쑤어 주어 혜택을 끝까지 베푸소서. 그리고 삼남(三南)의 민사도 매우 염려스러우니, 보릿가을이라고 하여 진휼의 정사를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고을은 빨리 방백(方伯)을 시켜 요리하여 끝까지 구제하게 하는 것이, 가까운 데를 미루어 먼 데에 미치고 한결같이 보아서 차별없이 사랑하는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여 말해 준 정성을 내 아름답게 여긴다.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뒤 인견할 때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진소를 정파하는 여부는 구애되는 점이 많이 있는데, 정유악이 이른바 한 곳만을 남겨 둔다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정유악이 아뢴 바는 대체로 좋으나, 국가의 형세가 결코 지탱할 수 없을 뿐더러 한 곳만 남겨 두는 것도 과연 폐단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지금 밀과 보리가 전부 흉작이어서 결코 끝까지 구제할 희망이 없으니 반드시 살릴 수 없을 사람에게 헛되이 쓰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저축을 남겨 두어 토착민을 구제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다 폐지해야 한다고 하니, 정유악이 드디어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각종 마료(馬料)가 한 달에 1천 석에 가깝고 정초청(精抄廳)의 마병(馬兵)은 그리 긴요할 것이 없는데도, 일체 폐지하여 진휼에 옮겨 썼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하고도 백성을 진구할 곡식이 없다고 한다면 백성들이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설사 둔위(屯衛)가 성대하고 말이 살쪘다 하더라도 백성이 다 죽어가 나라의 근본이 거꾸러진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그것을 장차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신이 어리석은 소견을 함부로 아뢰어 채용되지 못하였고, 또한 거둥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추감을 받고 있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추함(推緘)이 마감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직하였다.
이때에 진소(賑所)를 설치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저축이 바닥이 났으며 사망자는 날로 늘어나고 구제할 방책이 없었다. 날마다 밀과 보리가 익기를 기다렸으나, 밀과 보리가 처음에는 매우 무성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시들어서 줄기와 잎이 모두 누렇게 되어 한꺼번에 말라죽었는데 온 들판이 모두 그러하였다. 밀과 보리가 이로 말미암아 큰 흉년이 들었다. 공사간에 희망이 끊어지고 인심이 크게 무너져 아침 저녁도 보전치 못하게 되었다.
5월 8일 무오
원양도(原襄道) 평강(平康)·철원(鐵原)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철원의 우박은 크기가 바리만하였다.
5월 9일 기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는데, 응어리가 곪았기 때문이다. 정치화(鄭致和)가 약방 도제조로서 입시하였다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이미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강도(江都)·남한(南漢)에 저축된 것이 하나도 없이 바닥이 났고 백관의 녹봉을 오로지 관서(關西)에 의지하고 있는데 또한 잇대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또 듣건대, 영남의 역졸(驛卒)이 거의 다 굶어 죽어서 국가의 명령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합니다. 더구나 지금 보리가 누렇게 말라 죽는 재해는 예전에 없던 것인데 거기다 누리까지 또 뒤따라 치열하게 일었으니, 앞날의 그지없는 염려가 지난날보다 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을 뿐인데, 삼가 조정이 하는 일을 보면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저 국가에서 대간을 두는 것은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인데, 대각의 신하가 논쟁한 것을 시행한 것이 아주 적습니다. 근일 내사(內司)와 내관(內官)의 일에 대해 논한 것이 곧 그 한 가지 일입니다. 전하께서 따르지는 못하시더라도 때때로 또 기를 꺾으시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언로(言路)의 막힘이 근일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보면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된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또, 삼남(三南)은 본디 국가의 근본이라 하는데 사망하는 우환이 다른 도보다 더욱 심한 데다가 밀과 보리가 또 여물지 않아서 실로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간신히 살아 남은 가엾은 백성도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시므로 필시 그 위급한 정상을 모두 통촉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흉년의 참혹함은 삼남이 더욱 심한데 앞날의 일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근년에 혜성(彗星)의 변이 있었을 때 다들 병화가 있을까 근심하였는데, 그 때 천문[星象]을 잘 아는 자가 ‘아무 해에 반드시 기근과 여역이 있어서 주검이 쌓이는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존망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전하께서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 분발하여 일으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천심(天心)을 돌려서 대명(大命)을 잇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치화가 또 아뢰기를,
"우윤 이지온(李之馧)은 북도(北道) 사람으로서 자신을 잘 단속하고 청렴하고 고결하였고 또 글을 잘 지어 재주가 있었는데, 여역에 걸려 여저(旅邸)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아직 빈렴(殯斂)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딱하다. 관재(棺材)와 상수(喪需)를 지급하고, 발인을 할 때에 또한 담군(擔軍)을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1일 신유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판서로, 이하(李夏)를 교리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출막(出幕)하는 병인(病人)에 대해서 본사의 낭청을 나누어 보내 적간하고 양식을 지급하라는 명이 일찍이 있었습니다. 동·서도(東西道)에 지금 이미 모두 양식을 지급하였습니다. 두 활인서(活人署)에서 관리하는 1천여 명 이외에도 사막(私幕)에 있는 자가 7천 8백 60여 명인데, 이들에게 진휼청의 쌀로 양식을 계산하여 지급하였습니다만, 필시 빠진 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시방 잇달아 출막하는 자도 그 숫자를 알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는 이것을 미루어 알수 있습니다. 일이 매우 딱합니다. 그 가운데 출막하여 죽어서, 그 가족이 이미 초빈(草殯)을 마쳤거나 혹 덮어묻을 도구를 장만하는 자가 매우 많은데, 이것은 거론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시체가 길위에 놓여 있어도 거두어 묻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혹 이미 부패하기도 하였고 혹 날짐승이 쪼아먹기도 하는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대개 해당 관원이 직무를 제대로 거행하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우선 무겁게 추고를 하여 앞으로의 일을 경계시키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삼성 죄인(三省罪人)인 가산(嘉山)의 사노(私奴) 김돌(金突)과 양녀(良女) 옥장(玉將)이 처형되었다. 김돌은 옥장의 집 종으로서 옥장과 간통하였는데, 감사의 계문에 따라 삼성에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더니, 모두 자복하였다.
5월 12일 임술
대사헌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접때 홍제원 진소에서 굶주린 백성이 고한 바에 따라 도둑 여섯 명을 잡았는데, 흉악한 무기와 훔친 물건이 많았습니다. 포도청에 넘겨주어 엄하게 조사하게 하였더니, 포도 군관(捕盜軍官)이 곧 잡아가지 않고 군졸만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 사나운 자 5명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자 진휼청에 문서로 알릴 때에는 모르는 자 두 사람을 마음대로 채워넣었습니다. 전후 농간하고 조종한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또 대장은 엄숙 명료하게 호령하지 못하여 도둑이 방자한 짓을 하도록 버려두었고 진휼청에서 잡은 도둑마저도 놓쳐 막관(幕官)이 마음대로 농간을 부리게 하였으니, 평소에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포도 대장을 무겁게 추고하고 종사관(從事官)을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전 찰방 임홍망(任弘望)은 사람됨이 치우치고 막혀서 하는 일이 괴이한 것이 많습니다. 일찍이 우승(郵丞)을 맡았다가 이 때문에 파출되었고, 도감의 감조관(監造官)이 되어서는 또 상관과 더불어, 하인이 서로 다툰 일을 가지고 논란했는데 말한 것이 더럽고 도리에 어긋났으며 거조가 전도되고 광망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놀라고 웃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찌 주서(注書)의 청선(淸選)에 맞겠습니까. 주서로 천거된 가운데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계해
좌의정 허적(許積)을 명초하여 정승을 뽑았다.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고, 허적을 승진시켜 영의정으로 삼았다. 민희(閔熙)를 형조 판서로 삼고, 이민적(李敏迪)을 우윤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신정(申晸)을 이조 좌랑으로, 이필(李泌)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판부사 송시열이, 이민적은 문학으로 보나 재주와 명망으로 보나 발탁하여 등용하기에 합당하다고 누차 진달하였기 때문에 이 제수가 있었던 것이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올해에 죽은 수를 각도에서 대부분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사람들이 장차 다 죽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도 오히려 두루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외방이겠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경기 의 보리가 처음에는 무성하게 되는 듯하다가 누렇게 말라죽는 병이 들어 성숙하기를 바라기 어렵습니다. 지금 군신 상하가 다시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책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망하는 것은 혹 말을 달려 사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치하며 놀고 즐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신은 전하께서 결코 이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다만 생각건대, 임금의 한 마음은 하늘과 한가지가 되어야 하는데, 전하께서는 강건(剛健)한 덕이 부족하여 분발하고 가다듬어 과단성을 발휘하신 적이 없고, 또 대간의 계사가 본디 반드시 모두 옳은 말인 것은 아니나, 따를 만한 말이 있더라도 번번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시니, 이것이 또한 신들이 답답하게 여겨 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전하께서는 늘 스스로 책려하시되 ‘우리 조종께서 부탁하신 나라가 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 백성이 다 죽으면 나라를 어떻게 보존하겠는가.’ 하시어 한결같이 근심하고 위태롭게 생각하기를 마치 난리 가운데에 있는 듯이 하신다면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지금이 바로 쉽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하였다. 좌참찬 민정중이 아뢰기를,
"한성 참군(漢城參軍) 정수선(鄭壽先)은 진휼청 낭청으로서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여역에 걸려 죽었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초기(草記)로 우러러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장례 물품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양국(兩局)의 습조(習操)와 문신(文臣)의 시사(試射)와 월과 삭서(月課朔書), 춘첩(春帖) 등의 일을 멈추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도성의 군사가 병을 앓아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초가을까지 습조를 멈추게 하여 소생할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 문신 시사·월과 및 춘첩은 모두 겉치레이니 모두 멈추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삼남(三南)의 감사·수령은 모두 가을 곡식이 성숙할 때까지 바꾸지 말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각도의 수령은, 이미 보릿가을이 지났고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지만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것이 본디 사람이면 누구나 같은 것인데 또 잉임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차례로 차출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삼남은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으므로 교체하면 폐단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이 명을 내린 것이다.
고 교리 오달제(吳達濟)의 처자에게 장례 물품을 내렸다. 오달제의 처자가 여역으로 열흘 안에 잇따라 죽었는데,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오달제의 어미와 처자는 일찍이 인조 때에 늠료를 지급받는 은혜를 받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그의 처자가 한꺼번에 모두 죽었으니 매우 가엾은 일입니다. 돌봐주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그 뒤에 이단하(李端夏)의 계청으로 인하여, 3년 동안 늠료를 지급하게 하였다.
5월 14일 갑자
전라도 무주(茂朱)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사관을 우의정 송시열에게 보내어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경은 선대에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제때에 올라와 위급한 시국을 구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하유하니, 송시열이, ‘집안에 구기(拘忌)하는 병이 있으니 조금 낫기를 기다렸다가 미미하나마 충심을 아뢰겠습니다.’ 하고, 끝내 오지 않았다.
5월 15일 을축
호남 태인현(泰仁縣) 사람 이규(李逵)가 갑자기 미친 병을 앓아 스스로 호랑이 귀신이라고 하며 제 아들을 물어 죽였다.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평안도 정주(定州) 등 고을에서 바닷물이 넘쳐서 연변의 둑이 터지고 밭이 망가져 벼곡식이 손상을 많이 입었다.
좌의정 정치화가 상차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르렀고 경은 두 조정에서 은혜를 받았으니 남의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서 나와서 공무를 행하여 내 소망에 부응해야 한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였다.
각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세 군데 진소(賑所)의 굶주린 백성이 모두 3만 2천 40여 인이었다. 서울 백성 1만 9천 5백 70여 인을 제외하고, 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는 외방의 굶주린 백성에게 각자의 거리를 셈하여 돌아갈 때에 먹을 양식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자에게는 15일분의 죽거리를 주었다. 병에 전염된 자에게는 각각 양식을 주고 활인서(活人署)를 시켜 치료하게 하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 무리에게는 따로 양식거리를 지급하되 진소를 설치하였을 때의 감관(監官)에게 주어 그 친속을 찾게 하고 만약 데려다 기를 사람이 있으면 조치해 주도록 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외방에는 혹 보리가 익지 않아서 기한이 지나도록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있고 서울에는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세 군데나 되고 또 중신(重臣)을 가려서 감독하게 하였으니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진구를 한창 하고 있을 때에도 죽는 자가 잇따랐을 뿐이 아니었고, 더구나 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반드시 죽게 될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텐데, 또 죽을 쑤어 구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는 비록 국가의 재정이 다 비었기 때문이겠지만, 각 아문에 저축한 것으로 말하면 남은 것이 있으니,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지극한 정성으로 처리하게 하였다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석 달 동안 어렵게 부지런히 구제한 끝이라 다시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먹여 주기를 바라는 저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운수와 관계된 것인가. 비통하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2면
【분류】구휼(救恤)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외방에는 혹 보리가 익지 않아서 기한이 지나도록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있고 서울에는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세 군데나 되고 또 중신(重臣)을 가려서 감독하게 하였으니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진구를 한창 하고 있을 때에도 죽는 자가 잇따랐을 뿐이 아니었고, 더구나 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반드시 죽게 될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텐데, 또 죽을 쑤어 구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는 비록 국가의 재정이 다 비었기 때문이겠지만, 각 아문에 저축한 것으로 말하면 남은 것이 있으니,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지극한 정성으로 처리하게 하였다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석 달 동안 어렵게 부지런히 구제한 끝이라 다시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먹여 주기를 바라는 저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운수와 관계된 것인가. 비통하다.
5월 16일 병인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함경도 각 고을에서 마소의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개 돼지까지도 전염되어 죽었다. 함흥(咸興)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쳐서 벼락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5월 17일 정묘
도성에 기근이 심하기 때문에 민호(民戶)의 대소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곡식을 나누어 꾸어주었다. 강도(江都)·관서(關西)의 쌀과 좁쌀을 전후로 나누어 준 것을 아울러 2만 6천 5백여 석이었다.
행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정언 윤계가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이 진소(賑所)에서 얻어먹던 백성들이 일단 해산한 뒤에는 모두 굶어죽게 되었는데, 일찍이 이러한 뜻으로 차자 가운데에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만, 나라의 저축이 이미 바닥이 나서 묘당에서도 달리 도리가 없으며 앞으로 추가로 구제할 방책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마른 양식을 지급하고 위로하여 돌려보내자는 뜻으로 감히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정유악(鄭維岳)이 피혐한 말을 보니, 갑자기 진휼을 정지한 일을 그르다고 하였는데 말이 엄정하였습니다. 신들이 전일에 올린 계청이 구차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헌납 정화제도 또한 이 일로 인피하였다. 대사헌 장선징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수많은 굶주린 백성들을 하루아침에 진휼을 정지하면 형세가 장차 다 죽게 될 것이고, 차마 이렇게 하지 못하여 진휼을 더 하고자 하면 국가의 여러 해 저축이 전에 이미 바닥이 났고 지금은 남은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지경이 되어 묘당에서도 또한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진휼을 그만두는 일은 실로 만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저께 신이 입시하였을 때에 직접 성상의 하문을 받고 감히 진휼을 정지하는 수밖에 별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고 우러러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어제 정유악의 인피한 말을 보았더니, 갑자기 진휼을 정지한 일을 실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백성을 근심하는 뜻이어서 신은 속으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사간원의 관원들이 이것으로 인피하여 신이 마땅히 처치를 해야 하겠는데, 이미 혐의가 있는데 어찌 감히 가타부타 하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이단석, 장령 박지, 지평 정적이 처치하기를,
"차자에서 진달한 것이나 탑전에서 대답한 것은 실로 참작하여 헤아린 뜻에서 나온 것이니, 모두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남용익, 이합, 윤계, 정화제, 장선징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8일 무진
이경억(李慶億)을 판윤으로 삼고, 김만기(金萬基)를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홍만용(洪萬容)을 예조 참의로, 유하익(兪夏益)을 문학으로, 윤진(尹搢)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19일 기사
행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정언 윤계 등이 아뢰기를,
"올해에 굶주리거나 병을 앓아 죽은 참상은 실로 만고에 없던 것인데, 양남(兩南)에서 계문한 숫자는, 경상도는 굶주린 백성이 24만 2천 5백여 인이고 병으로 죽은 자가 5백 90인이었으며 전라도는 굶주린 백성이 21만 2천 3백여 인이고 병으로 죽은 자가 2천 80인이었습니다. 진소에 나아간 기민의 숫자가 이처럼 많다면 죽은 자가 이것뿐일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이 수령의 보고만을 따라 범연히 치계하였으니,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과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를 모두 무겁게 추고하고 각 고을의 사망자 숫자를 다시 조사해 아뢰게 하여 수령을 논죄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0일 경오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쓰러져 있는 주검을 묻는 일에 대해 국가에서 신칙을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어제 낭청을 보내어 적간하게 하였더니, 남부(南部)에 속한 경내에 쓰러져 있는 주검이 더욱 많아서 성안과 성밖에 있는 것이 77구나 되었는데 혹 머리뼈만 남은 것도 있었습니다. 해부의 관원이 즉시 묻지 않았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잡아다 추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내간(內間)의 궁인(宮人) 중에서 역질에 걸려 질병가(疾病家)에 내보냈던 자가 잇따라 죽었고, 도성의 사대부로서 전후로 죽은 자도 수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온 집안이 모두 전염되어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낫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 및 각처의 사막(私幕)에서 병을 앓다가 죽은 자와 길에 쓰러진 주검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각부(各部)에서 모두 거두어 묻지 못하고 구덩이에 가져다 두는데, 동서교(東西郊) 10리 안에 쌓인 주검이 언덕을 이루었고, 빗물이 도랑에서 넘칠 때에는 주검이 잇따라 떠내려갔다. 도성에서 이처럼 사람이 죽는 참상은 예전에 없었다.
5월 21일 신미
박장원(朴長遠)을 공조 판서로,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이유태(李維泰)를 이조 참의로, 정유악(鄭維岳)을 사서로, 이선(李選)을 교리로 삼았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연이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드디어 출사하였다.
원양도 이천(伊川) 등 고을에 크게 바람이 불고 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달걀만하고 작은 것은 새알만하여 하루가 지나도 녹지 않았다.
양서(兩西)의 감사에게 명하여, 평안 감영에 저축되어 있는 군목(軍木) 2백 동(同)으로 보리를 사서 관향 조맥(管餉糶麥) 4천 석과 함께 배로 서울로 실어나르게 하였다. 경기 안에 보리가 없기 때문에 백성에게 종자로 주기 위한 것이었다.
5월 22일 임신
이완(李浣)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 포민(浦民)의 어염세(魚鹽稅) 3분의 1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여러 가지 신역은 다 감면하였는데 포민만이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하여 그 세를 줄이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5월 24일 갑술
진휼청이 아뢰기를,
"서울 에서 진소(賑所)를 파한 뒤에 의지할 데 없이 빌어먹는 무리에게는 각소(各所)에서 혹 양식을 주기도 하고 죽을 먹이기도 하면서, 그 친족 및 데려다 기를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일 진소를 파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굶주린 백성이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항간에서 빌어먹다가 굶고 병을 앓아서 장차 죽게 된 자가 자못 많습니다. 듣건대, 홍제원(弘濟院)에는 아직도 병을 앓는 백성을 머물려 두고 먹이고 있으므로 또 다시 슬피 부르짖으며 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 수가 이미 2백을 넘었습니다. 이제 진소를 파하였다 하여 일체 물리친다면 물러가도 돌아갈 곳이 없어서 반드시 다들 구덩이에 굴러 죽을 것이니 이들을 잘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본청에서 세 곳에 남아 있는 굶주린 백성을 거두어 모은 다음 따로 강창(江倉)에 두고 이어서 죽을 먹이다가 다시 사세를 보아 파하여 보내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25일 을해
경기도 수원(水原) 등 고을에서 지진이 있었다.
5월 26일 병자
단천감(丹川監) 양헌(良憲) 등 네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내렸다. 양헌 등은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녹(祿)을 잃고 진소에 죽을 먹으러 나아가 목숨을 이어가다가 진휼을 멈춘 뒤에는 빌어먹게 되었는데, 종친부(宗親府)의 계사로 인하여 상이 하교하였다.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해조를 시켜 먹을 것을 지급하여 굶어 죽을 걱정이 없게 하라."
5월 28일 무인
경상도 대구(大丘)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술잔만하기도 하고 큰 주먹만하기도 하여 농민이 맞아 중상을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한 노파가 이 때문에 죽었으며 까마귀·까치·꿩·비둘기 등이 맞아서 무수하게 죽었고 나무가 부러졌으며 우박이 지나간 밭은 모두 황폐되었다.
경기도 양천(陽川) 등 고을에서 검정색 누리가 비 때문에 번성하여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서 갖가지 곡식을 크게 손상시켰다.
구문치(具文治)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5월 29일 기묘
임유후(任有後)를 도승지로,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최관(崔寬)을 판결사로, 이선(李選)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정치화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근래 오래도록 편찮으시어 인견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뜸을 맞으신 뒤에 품정할 일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과 비국 당상 한 사람도 와서 기다리라."
하였다. 뜸을 맞은 뒤에 영의정 허적과 이조 판서 김수항이 입시하였다. 허적이 왜인의 서계(書契)를 꺼내어 읽고 나서 아뢰기를,
"왜관(倭館)을 옮기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품정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웅포(熊浦)에서 통영(統營)까지는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만약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웅포로 옮기게 해 달라고 요청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만, 신은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밖의 의논은 혹 ‘그들이 웅포로 곧바로 도달하게 되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끝까지 거절을 하면 아마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은 이런 것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별도로 차견되어 온 왜인에게 3일만 지공을 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1년을 머물러 있더라도 모두 지공을 하기 때문에 지공에 소용되는 쌀이 수천 섬이나 되어, 남쪽 지방의 물력이 모두 여기에 들어갑니다. 밖의 의논이 혹 차라리 허락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 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왜관을 옮겨 달라는 요청을 결코 허락하기 어렵다면 다만 내지(內地)로 옮겨들일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을 하여 거절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아무 곳에 선창(船倉)을 짓게 해 달라고 청한다면 모르겠으나, 웅포는 내지에 가까우니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미 밀과 보리를 실농하였으니, 농민들이 양식을 마련하기가 필시 어려울 것이다.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오늘 소신이 들어올 때에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가며 길을 메우고 호소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절박함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내년에는 백성들의 죽는 숫자가 필시 올해의 두 배가 될 것이니, 백성들을 살리는 대책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성상께서 만약 인조 대왕께서 남한 산성에서 포위당했을 때의 마음을 성상의 마음으로 삼으시고 종묘 제사 이외에는 모든 일들을 정파하신다면 거의 다 죽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임진년 난리 후에는 종묘의 제사를 단지 분향만 하였습니다. 제사가 비록 중대한 일이기는 하나 어찌 변통하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흉년이 들어 곡식이 익지 않으면 제사에 음악을 연주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흉년이라고 하는 것은 필시 오늘날과 같은 데에 이른 경우는 아닐 것인데도 종묘의 음악도 연주치 않았다면, 오늘날 온갖 일들을 정파하는 것을 또한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임금은 구중궁궐에 거처하시니, 어찌 외간의 질고를 알겠습니까. 올해의 기근은 전고에 없던 바입니다. 계갑년(癸甲年)의 흉황도 또한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쪽 지방이 임진년 이후로 병화(兵火)를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물이 매우 번성하였는데, 지금 전고에 없던 재난을 당하여 삼남 지방에 사망자가 더욱 많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주방(酒房)의 일을 가지고 진달하고자 합니다. 세종조에는 재난을 만나 주방을 혁파하고 심지어 약방에서 사용할 술까지도 혁파하였기 때문에 7일 내에 혜성이 없어졌습니다. 상께서도 평소에 술을 드시지 않는데, 한 해의 술빚는 쌀이 5백여 섬이고 그 외에 기타 진배하는 물품도 그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만약에 주방을 특별히 먼저 혁파한다면 원근에서 들음에 실로 성덕에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과 자전에게 공상하는 물품에 대해서 성상께서는 줄이는 것을 어렵게 여기니 신이 또한 받들어 따르겠습니다만, 주방은 상께서 마땅히 참작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특별히 백성을 근심하는 뜻으로 애통해 하는 분부를 내리신다면 백성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고 하늘의 뜻도 돌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의 나라의 형세는 아주 위태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오직 훌륭한 성상께서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조종조가 부탁한 바의 중대함과 억만 백성들의 소망을 마땅히 마음 깊이 유념하여 조금도 나태함이 없어야 합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바깥 조정을 보니, 안일하게 전혀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하고 분발하여 항상 전쟁중에 있는 것처럼 하시어 존망이 달린 위급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소서. 그렇게 하면 이것이 바로 재변을 없애는 방도가 됩니다."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병없는 백성은 굶어서 죽는데 어찌 하늘과 성상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비록 예전에도 어찌 여역이 없었겠습니까만,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근래에 여역으로 죽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한성부 서윤(庶尹) 이징후(李徵厚)도 어제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홍수하(洪受河) 부부도 여역으로 죽었습니다. 홍수하의 딸이 처녀의 몸으로 어미가 죽던 날에 단지(斷指)를 했는데도 구하지 못하였고 수하가 죽자 또한 함께 죽으려고 스스로 목을 찔렀는데 다행히 죽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측은해 하였다. 한참 있다가 정치화가 아뢰기를,
"민정중은 재능도 있고 정성도 있어서 진휼하는 임무를 오로지 담당하였는데, 바야흐로 목욕을 하기 위하여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병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지금은 목욕을 할 때가 아니니,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올해의 사망한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는데, 서울의 사대부 가운데 혹 온 가족이 전염되어 모두 죽어서 시신을 거둘 사람이 없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마땅히 특별한 은전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놀랍고 측은하다. 이러한 자들에게 해조로 하여금 휼전을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함경도 경성(鏡城) 장백산(長白山) 아래에 눈이 한 자쯤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 농사를 크게 손상하였다. 남도(南道) 각 고을의 보리가 또 누렇게 마르는 병에 걸려 모두 말라 죽었다.
이달에 굶주리고 병을 앓아 죽은 사람이 서울은 3천 1백 20여 인이었고 팔도에서 보고한 것은 모두 1만 3천 4백 20여 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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