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4권, 현종 12년 1671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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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경진

집의 이단석(李端錫)과 지평 정적(鄭樻)이 일을 논하며 실상을 놓쳤다고 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가 위태롭고 백성이 구덩이에 굴러 죽는 이때를 당하여 비록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도 중지하여야 할 것인데 더구나 낭비이겠는가. 주방(酒房)에서 일차(日次)로 바치는 술은 낭비가 적지 않으니 중지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대신이 탑전에서 청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온갖 것들을 재량하여 줄인 것은 다 근년에 흉작이 된 때의 전례에 따라 특별히 줄였을 뿐이다. 오늘날의 민사는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담당관을 시켜 대신에게 의논하여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뒷날 허적 등이 탑전에서 품의하여 선혜청(宣惠廳)에서 받아들이는 물선(物膳)은 두 자전께 진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임시로 5분의 4를 줄였는데, 줄인 가미(價米)가 5백 10여 석이나 되었다. 그 밖에 어공하는 각종 진헌, 상방(尙方)에서 받아들이는 향초피(鄕貂皮), 반사(頒賜)에 쓰는 초서피(貂鼠皮), 제용감(濟用監)의 수화주(水禾紬), 내수사(內需司)의 생포(生布), 내궁방(內弓房)·군기시(軍器寺)에 들이는 궁전(弓箭), 공조(工曹)의 기인(其人) 소목(燒木), 여러 상사(上司)의 진배(進排)하는 잡물(雜物), 종친부(宗親府)의 전약(煎藥)·납약(臘藥) 값, 도감(都監) 군사의 중순 시재(中旬試才) 때의 상격(賞格), 동지 사신(冬至使臣)의 반전(盤纏) 등을 모두 이듬해 가을까지 혹 전량 감하기도 하고 반을 감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각사(各司)에서 재량하여 감한 물건도 많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뜸을 마친 후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정승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주방(酒房)을 파하라는 분부를 엎드려 뵈옵건대, 근심하고 힘쓰며 불쌍히 여기시는 정성이 말 밖에 넘치니, 하늘의 뜻도 또한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의 어공(御供)을 이미 모두 감하셨는데 신료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 평상의 녹을 유독 향유하겠습니까. 지금의 나랏일은 난리 때와 다름이 없으니, 백관의 녹봉을 모두 산료(散料)로써 지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시기에 어찌 조정 관리들의 박한 녹봉을 또 감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예조 참판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지금의 나랏일은 파천할 때와 다름이 없으니, 만약 병자·정묘(丙丁) 이후의 급료 전례와 같이 한다면 또한 신하로서의 의리로 보아 편안하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정축년 이후의 급료 등록을 상고해 본 이후에 결정짓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암행 어사에게 내어주는 봉서(封書)는 형식에 가깝습니다. 입직한 사람을 뜻밖에 출송시키되, 마패는 병조에서 지급하고, 양식거리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지금 우선 할 바는 전야가 잘 일구어지고 있는지 어떤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니, 만약 치적이 드러나는 자가 있으면 푸짐한 상을 베풀고 직책을 잘 수행하지 못한 자는 중한 죄로 다스리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안팎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 국가의 위급한 형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외간에서는 조곡(糶穀)을 청하자는 의논이 많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허적(許積)에게 물었다. 허적이 대답하기를,
"지난해 겨울부터 이 의논이 있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이미 청한 뒤에 저들이 배로 실어나르기 어려운 곳의 곡식을 허락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설사 우리 나라에서 가깝고 편리한 곳의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 뒤에 저들이 기근이 들었다고 핑계대면서 실어나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결코 감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곡을 청하자는 의논이 옳은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도 매우 불가하다 하였으므로 서필원의 의논이 드디어 행해지지 않았다.

 

6월 2일 신사

이은상(李殷相)을 공조 참판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집의로, 김만균(金萬均)을 사인으로, 유하익(兪夏益)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근래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에 병막(病幕)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숨이 거의 끊어져 가는 허다한 자들이 또 날마다 비가 내리는 때를 만났으니, 특별히 구제하지 않으면 앞날의 염려가 반드시 지난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한성부를 시켜 낱낱이 적간(摘奸)하여 마음을 다해서 구완하고 치료하게 하되 게을리하여 직분을 다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죄주게 하소서.
원주(原州) 사람 원인득(元仁得) 등이 목사를 유임시키고자 상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수령이 정말로 치적이 있다면 본도에서 글을 올려서 조정에 아뢰게 하는 것이 법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대궐에 곧바로 호소하였으니 이것만도 이미 매우 외람된 짓이었는데 기각을 당한 뒤에는 도리어 정원이 막고 가린다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진(秦)나라 조정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한 것처럼 한다는 따위의 말까지 하며 마음대로 배척하였는데 문관·무관·음관(蔭官)의 전조 관원도 그 가운데에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생(儒生)과는 차이가 있으니 어찌 감히 도리에 어긋난 언사로 이처럼 조정을 깔볼 수 있겠습니까. 정원의 도리로서는 곧바로 물리쳐야 할 것인데 유생이라 일컫고 침범한 것이라 핑계대면서 장황하게 말을 하며 번거롭게 여쭈었으니, 사체를 크게 잃었고 연약한 것이 심합니다. 상소에 앞장선 사람은 본도로 하여금 적발하여 죄주고 당해 승지는 무겁게 추고하소서.
전 부사 유정(柳檉)은 요사한 첩에게 혹하여 본 아내를 원수처럼 여겼으며 그 첩은 적자손을 죄다 없애려고 방자하게 저주하여 그의 큰 손자가 먼저 병을 앓아 죽었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공모한 여종이 매를 치지 않아도 스스로 자복하였으므로 위문하러 온 손님과 이웃 사람이 다 들어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정도 감히 엄폐할 수 없어서 처음에는 모두 다스리려 하였으나 곧 그 첩의 달콤한 말에 빠져 그 종을 산 채로 묻어서 증거를 없애려 하였습니다. 실로 사람으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므로 누구나 다 놀라서 분개하고 있습니다. 유정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고 그 첩을 엄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율문을 상고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유정의 첩 순업(順業)은 한 해를 넘게 옥에 갇혀 있으면서 형신을 받고도 자복하지 않은 채 형장을 맞다가 죽었고, 유정은 그 여종을 산 채로 묻고 그 첩을 구제하려고 한 죄로 형장을 맞고 정배되었다.

 

6월 3일 임오

부교리 신후재(申厚載)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정관(正官) 평성태(平成太) 등을 시켜 예조에 글을 바쳐 왜관(倭館)을 웅포(熊浦)로 옮겨 주기를 요구하였는데, 묘당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신후재가 동래(東萊)에 갔으나, 평성태는 맡은 일이 아직 강정(講定)되지 않았다 하여 예단(禮單)을 받지 않고 또 음악을 들을 겨를이 없다 하여 여기(女妓)·악공(樂工)을 물리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이는 접위관이 마음대로 결단할 일이 아니니 내가 곧바로 상경하여 조정에 고하겠다. 조정에서 끝내 허가하지 않는다면 곧 강호(江戶)에 알릴 것이니, 그렇게 하면 두 나라가 어찌 서로 좋게 지내던 관계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후재가 계문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차왜(差倭)가 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예단을 받지 않은 것은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가 운운한 것도 다 공갈하여 시험해 보려는 뜻이니, 의리로 꾸짖어 그 간사한 계책을 막아야 합니다. 그래도 만일 듣지 않고 끝내 그대로 나간다면 조약을 위반한 잘못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날뛰더라도 결코 들어줄 만한 사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계품하지 말게 하여 그들이 바라는 것을 단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비국이 아뢰었다.
"동·서활인서에 지난 달 이후로 전염병이 더욱 번져 성 밖으로 나간 병자 움막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별도로 구제하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그 때문에 낭청을 나누어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한 후, 지난 달 17일 이후로 매일 양식미를 나누어 주어 29일에 이르러 주기를 끝마쳤습니다. 두 활인서에서 관할하는 대상과 동서 성밖의 사막(私幕)의 병자들이 어른 아이 합하여 1만 9천 5백 28명입니다. 진휼청의 쌀을 가지고 어른은 두 되, 아이는 한 되씩 쌀과 좁쌀을 나누어 주니, 도합 2백여 석이었습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뜬 후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지난달 17일부터 비국 낭청을 내보내어 진휼청의 쌀을 가지고 주리고 병든 백성들에게 양식미를 내주었는데, 움막으로 나간 병자들이 2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계속하여 지급할 방법이 전혀 없고, 대간이 아뢴 병자 움막을 뒤집어 씌울 물건이란 것도 두루 지급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고, 대사간 남용익이 아뢰기를,
"신들이 사세가 이러한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폭우가 쏟아질 때는 병자들이 죽음에 이르기가 더욱 쉬운지라 특히 심한 자를 잘 살펴서 나누어 주려고 하였기 때문에 논계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연신(筵臣)들은 대부분 기강이 해이하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근래에 체통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모든 구실아치들이 관에서 나태하고, 각사의 관원들은 평상시 관부를 출입할 때 모두 일상복을 입고 출입하니 매우 한심한 일입니다. 법부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6월 4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뜬 후 대신과 비국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에게 이르기를,
"모든 관리들의 녹봉을 어떻게 정하였는가? 전례를 자세히 상고하였는가?"
하니, 대운이 마련한 단자를 올렸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금년의 가을걷이를 미리 알 수는 없지만, 우선 산료(散料)로 제급(題給)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7월 녹은 그대로 녹봉으로써 감하여 주고 사세를 관망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산료로 마련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산료조차 잇대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더욱 계책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래 박한 녹봉을 산료로 제급해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머뭇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경들이 진달한 것과 같이 앞으로 잇대기 어려운 것이 걱정이라면 우선 산료로 지급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때에 방백 수령을 바꾸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경상 감사 민시중은 임기가 찼으니 바꾸어야 하나 금년까지 유임시키소서. 여러 도에서 임기가 찬 수령을 또한 일체 유임시킴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또 아뢰기를,
"경기도 안의 진휼 정사는 금천(衿川)이 가장 잘하였습니다. 듣건대, 현감 이보(李葆)는 소금·간장·채소 따위 물건을 미리 비축해 두었다가 섞어서 죽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먹이고 병을 앓는 사람을 따로 유치해 정성껏 구완하여 치료하였기 때문에 금천 백성은 한 사람도 죽은 자가 없다 하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이보의 치적은 한 도내에서 으뜸가니 진휼의 정사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도 그가 진휼을 잘하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죄인을 놓쳤으므로 장차 파직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이연년(李延年) 등도 다 칭찬하였다. 정치화는 아뢰기를,
"신들의 말이 어사가 칭찬해 올린 장계보다 더 낫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드디어 파직하지 말고 특별히 당상으로 품계를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보는 과연 진휼을 잘하였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마침내 실효를 보지 못해 거주해 사는 백성이 또한 많이 굶어 죽었는데, 대신이 아뢰어 현저한 상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더러 지나쳤다고 평하는 자도 있었다.

 

황해도 해주(海州) 등 열여섯 고을에서 누리가 크게 치성하여 온 들판에 가득차 온갖 곡식의 줄기와 잎이 다 없어지고 삼이나 채소까지도 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윤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휼을 멈춘 뒤에 밀 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어 여기저기서 굶어 죽은 주검이 전일보다 심합니다. 해서(海西)는 재력이 본디 넉넉하므로 도신(道臣)을 시켜 나름대로 감영(監營)의 저축된 것을 풀어서 없는 데로 옮기게 하면 혹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겠으나, 경기는 수천 석의 쌀을 얻지 못하면 실로 삶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묘당을 시켜 빨리 헤아려 처치하게 하여 피폐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소 끝에서 말한 일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등대하였을 때 허적은 남한산성의 쌀 3천 석으로 소속된 각 고을을 구제하고 또 강도(江都)의 쌀 4천 석과 경청(京廳)의 쌀 3천 석을 내어다 그 나머지 여러 고을을 진구하기를 바랐고, 정치화는 두 곳의 군향(軍餉)을 결코 모조리 써서는 안 되며 또 진휼청에도 저축한 것이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세 곳의 쌀을 합하여 7천 6백 석을 진휼의 용도로 대여해 주기를 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형세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전일에 낭비를 한 탓이다. 많이 내어 구제하고 싶지만 저축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치화의 의논을 따랐다.

 

대사헌 장선징 등이 상차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3백 년간 돌보아 주던 인자한 하늘에게 노여움을 받으시고 아래로는 3백 년간 길러온 백성들을 죽이게 되어, 3백 년의 힘쓰고 고생한 대업이 전하의 몸에 이르러 망하는 결과를 장차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궁하면 근본으로 되돌아가니,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나라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른 이유를 두려워하고 깨우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들이 본디 알기로는, 전하께서 안으로 성색(聲色)을 즐기며 가까이 하시는 잘못이 없고, 밖으로 사냥하는 개, 말의 기호물이 없으십니다. 움직이고 말하는 사이에 법칙을 지키려 애쓰시니, 전하의 성대한 절도를 또한 뵐 수가 있습니다. 다만, 성상께 한스러운 것은 뜻을 수립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무릇 마음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공부를 할 만한 바탕이 조금도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그 병통의 근원을 몸으로 느껴 보셨습니까? 뜻이라는 것은 일신의 주재이고 만사의 근본입니다. 전하의 다소간의 병통이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지기가 매일 낮고 미약해지며, 일의 결과가 끝내는 모이는 데가 없습니다. 유유하고 범범하여 데면데면하게 좋은 기회를 놓쳐서 자연 위험한 조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개연히 눈물을 떨굽니다.
아아, 오늘날은 과연 어떠한 상황입니까. 조종의 은택이 이미 멀어졌으니, 뜻을 이어 사업을 계승하고 이 나라를 유신해야 할 그러한 시대가 아닙니까. 온갖 사물이 질서를 잃고 모든 궤도가 제자리에서 벗어났으니, 인하여 개혁하고 정돈하여 나라의 모습을 다시 온전히 해야 할 그런 시대가 아닙니까. 시기적으로는 다잡아야 하고 의리상으로는 펼쳐내야 하는데 한결같이 시들하고 오직 형식적인 것만 일삼으니, 밝디 밝은 상제께서 우리 전하를 경계시키고자 일월 성신의 이변을 보이시고 인간 윤리의 변고를 겹치게 하십니다. 한 해가 한 해보다 더하여 거의 ‘다달이 더해간다.’[式月斯生]는 지경에002)   이르렀으니, 간곡히 경계하여 타이르는 것으로 보면 우리 전하를 돌보아 사랑하고 깨달아 고치기를 바람이 그 또한 지극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몸을 삼가서 수행하심이 위로 천심에 합하지 않기 때문에 밝으신 상제께서 발끈 화를 내시고 동녘 땅 수천 리에 참혹함을 내리시어 반드시 백만의 생령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시는 것입니다.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와 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늘이 실로 하는 일이니, 말한들 무엇하겠습니까마는 모름지기 인군의 마음을 크게 경계하고 크게 진작시켜 천도를 받들어 순종하여 게으르고 거친 행동이 없으면 나라의 명을 이어나가고 끝없는 사업을 영원히 보존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 자리를 보존하기 어렵고 돌보아 주는 천명도 믿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어리석음과 비루함을 다시 바치려한들 또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실지의 덕을 닦으시어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리고 나라의 운명을 영구히 하는 바탕을 만드소서. 지금의 나라 형편은 전쟁보다 참혹한데 상하가 데면데면 평상시와 다름 없으니, 이것이 신들이 알지 못할 바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각고 면려하여 전쟁 중에 있을 때 분연히 발분하는 것처럼 하시어 무엇을 하겠다는 뜻을 이룩해 내십시오. 모든 관부에서 공사 간에 일상적으로 쓰는 용도와 수요를 일체 줄이고 혁파하여 윗물을 먼저 맑게 하며 뭇 신하들을 이끌고 인도하시어 맡을 일을 힘쓰게 하되 잘잘못을 가려 상벌을 분명히 하소서. 이와 같이 하는데도 대소 신료들이 다시금 대충대충하며 직임을 수행치 못하는 자가 감히 있거든 벌을 주어 물러나게 하여 그 불충한 죄를 드러내소서. 그렇다면 살아서 혈기를 지닌 자 치고 누군들 감동하여 분기하지 않겠습니까. 아, 나라의 원기가 가물가물하여 마치 노인이 숨져가는 형상인데 설사약을 함부로 투여하여 이미 바닥난 원기를 해친 것은 바로 훈련 도감의 별초(別抄)와 병조의 정초(精抄)일 것입니다. 신들이 그 대강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훈련 도감을 설치하여 왕궁을 호위함은 과연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다만 그 정원이 해마다 증가하여 지금은 만 명에 가까운 군대를 항상 서울에 두고 있습니다. 불쌍한 백성들에게 긁어내어 그 결원을 채우고 가난한 백성을 벗겨내어 그 의식을 충당합니다. 나라의 계책이 궁핍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고생스러워짐은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으니 끝내는 지탱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별초의 논의가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 부족한 것은 인심을 모으고 재물과 곡식을 저축하는 것뿐이지, 군병 같은 것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정초청(精抄廳)은 또 무엇 때문에 설치합니까? 기병(騎兵)이 장부상으로는 비록 십수만이지만 도망하거나 죽은 자와 지방에 남아 주둔한 자와 여러 가지 탈이 있는 자를 제외하면 실 수는 10만이 안 됩니다. 보병(步兵)은 비록 6만이라 일컫지만, 실 정원은 또한 결원이 많습니다. 명실이 다른 데다 근년에 연이어 흉년이 들어 신포(身布)를 규정대로 내지 못했기 때문에 병조의 용도는 항상 넉넉치 못한 것이 걱정입니다. 일단 정초에다 군사를 더 뽑아들이면 기병의 신포가 모두 정초청에 소속되고 병조가 관할하는 것은 단지 보병이 있게 될 뿐이니, 병조는 어떻게 지탱을 하겠습니까. 병조가 지탱을 할 수 없다면 무릇 군사 수요에 관계된 경비를 또한 어떻게 꾸려나가겠습니까. 국가의 재용이 고갈된 것은 헤아리지 않고 한갓 서울의 군대를 늘려서 배치하는 것만 힘쓰니, 단속하지 않으면 제몸을 태운다003)  는 것은 옛 사람들이 경계했던 바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정초의 가설을 그만두고 병조로 그것을 돌리며, 정초청의 지위를 덜어내어 옛 제도를 살리신다면 재물을 상하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 도리가 이것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국가의 전제(田制)는 본디 공평치 못하다는 탄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난해와 같은 큰 흉년이 오지 않고, 농민을 구휼할 줄 알아 농사철을 빼앗지 않으며 할 일을 놓치지 않게 한다면, 부역이 비록 무겁더라도 백성은 오히려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지탱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도 신역일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명목이 거의 수십 종을 넘고 각읍의 군보(軍保) 수가 또한 수십만 이상이니, 사람이 자식을 많이 낳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부역의 명목을 다 채우겠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해마다 세초(歲抄)할 때면 충원을 독려하는 각 아문의 관문이 바람과 벼락처럼 급하게 열읍으로 날아가 뒤섞이고, 수령된 자들은 오직 죄를 얻을까 두려워 민간을 끝까지 뒤지고 낭자하게 두들깁니다. 비록 강보에 싸인 벌거숭이라도 창을 지고 포를 내야 하는 역을 면치 못합니다. 그 어미는 관리 앞에서 가슴을 두들기며 피울음을 울고 그 아기는 어미 품안에서 빽빽 울어대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정령(政令)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병조에 자세히 하문하시어 여러 명목의 군보를 조종조의 실역 45년의 제도004)  에 한결같이 의거하소서. 이미 연한을 마친 자는 구애받지 말고 대신 군보를 정하며 모두 원안을 대조하여 줄여가게 하여, 오래 누적된 고질적인 폐단을 씻어내소서.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민정을 크게 위로할 것입니다.
근래 국가가 흉년을 진휼하는 것으로 인하여 각종 명목의 군포(軍布)를 미납한 것, 각사(各司)·내사(內司)의 신공(身貢)을 미납한 것, 관아 대출미를 미납한 것 중에 수를 감하여 받아야 할 것도 있고 햇수를 기다려 받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흉년을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 없던 일이니, 지난해에 받지 못한 것을 올해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설령 농사가 조금 되는 해가 있다손 치더라도 종전에 쌓인 빚을 한꺼번에 겹치기로 받아낸다면 백성들의 힘이 고갈될 것입니다. 올해에 기근과 역질로 태반이 사망하였으니, 빚을 진 백성들은 필시 대부분 귀신 명부에 올랐을 것입니다. 이왕에 그 당사자에게 책임지고 거두지 못한 것을 일가 이웃에게 침징(侵徵)한다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백성들을 죽은 자와 함께 버리는 것이니, 더욱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거둘 수 없다면 차라리 흔쾌하게 탕척을 시행하여 인심을 수습함이 나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경술년005)   이전의 제도(諸道) 각종 군보(軍保)와 노비 제반 신역(身役) 및 관아 대출미 미납 등의 항목을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셔서 일체 탕척하고 이어 윤음을 내리시어 위로하고 구휼하는 덕을 선포하소서. 이 밖에 군덕(君德)에 관계되는 일과 정령(政令) 간에 말할 만한 단서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음을 신들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지를 세우시고 실덕을 닦으시며 크게 경계하고 크게 진작함이 오늘날 하늘에 응하는 가장 중요한 의리이며, 쓸데없는 병사를 제거하고 허비를 줄이며 포흠을 견감하고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목전의 어려운 시기를 구해내는 첫번째 일임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선 그 본원과 급무를 말하고 그 나머지는 뒤로 돌렸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망극한 재변을 당하여 백성이 장차 죄다 죽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라리 내 몸이 그 재앙을 대신 받고 말지언정 백성이 그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이제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모두가 격언이니,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 끝에 말한 일은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였다.

 

6월 5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례(嘉禮) 때의 여러 집사(執事)와 도감(都監)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에 대해 상을 논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정사(正使)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과 부사(副使) 판서 김수항(金壽恒)과 도제조 우의정 홍중보(洪重普)에게는 각각 안구마(鞍具馬)를 내리고, 제조 김수항·권대운(權大運)·조형(趙珩)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한 필을 내리고, 도청 사인(都廳舍人) 이단하(李端夏), 정(正) 홍주삼(洪柱三)과 전교관(傳敎官) 우승지 김우형(金宇亨), 보덕(輔德) 김만균(金萬均), 필선(弼善) 이익상(李翊相)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 여러 집사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평안도 각 고을에 누리가 더욱 치성하였다. 도신(道臣)이 이를 아뢰니, 본도를 시켜 도내의 중앙에서 포제(酺祭)를 지내어 물리치게 하였다.

 

6월 6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장선징, 장령 이섬(李暹)·박지(朴贄), 지평 조위봉(趙威鳳) 등이 아뢰기를,
"기근과 여역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백성이 많이 죽기는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경기와 호서에서 굶어 죽는 자가 잇달았는데 도신이 아뢴 것은 열 가운데에서 한둘일 뿐입니다. 수령의 보고만을 근거로 삼고 더 유의하여 깊이 살피지 않았으니,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와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무신인 곤수(閫帥)가 총애받는 환관과 결탁하여 뇌물을 쓰고 아첨하는 것은 예전 일에서 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통제사 유여량(柳汝𣛀)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며 간사하고 교활한 짓을 하였습니다. 전후에 번진(藩鎭)을 맡았을 때 조금도 명성과 공적이 없고 오로지 잘 섬기려고만 힘썼으니, 한낱 채수(債帥)006)  일 뿐입니다.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고치려고 생각지 않고 절선(節扇)이라고 하면서 벼슬이 높은 내관(內官)에게 보냈으니, 이것은 실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고 법률에 해당되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충청도 홍산현(鴻山縣)에서 사납게 천둥이 쳐서 벼락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7일 병술

집의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군정(軍政)을 변통하여 나라의 저축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에게 곡식을 심도록 권장하여 개인의 저축을 늘리게 하기를 청하고, 농사를 힘써 주린 이를 구제하는 방책을 진달하니, 구구절절 이어져 천 마디에 이르렀다. 상이 우대하여 비답하고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행 지중추 송시열·좌참찬 송준길·호군 이유태가 상소하여 물건을 하사하며 어려움을 돌보게 한 분부를 사양하니, 상이 우대하여 비답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소가 들어간 지 달을 넘겼는데, 비로소 비답을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사급(賜給)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6월 8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단석(李端錫)을 집의로, 윤가적(尹嘉績)을 정언으로, 신정(申晸)을 응교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조근(趙根)을 문학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9일 무자

함경도 안변(安邊) 등 다섯 고을에서 누리가 각종 곡식을 크게 손상시켰다. 날마다 잇따라 큰비가 내려 냇물이 크게 넘쳤으나 누리가 줄곧 치열하게 일어났다.

 

대사헌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서 감사와 수령으로서 도내와 경내에 산을 사서 간계를 부려 해를 끼치는 것이 일세(一世)의 바로잡기 어려운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공산 판관(公山判官) 정시형(鄭時亨)은 고을 땅에 풍수쟁이가 일컫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익으로 꾀어 그 가운데에서 긴요한 한 군데를 먼저 사놓고, 시기를 타서 점점 잠식하여 1백 호에 가까운 촌락을 반이 넘게 강제로 차지하였습니다. 대대로 전해 온 양민(良民)의 물건을 꾀어내어 자기 묘역의 전장(田庄)으로 만들었으니, 그 방자하고 법을 업신여기는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장선징과 장령 이섬·박지가 일을 논한 것이 엉성하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11일 경인

경상도 안동(安東) 등 고을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단하(李端夏)의 소장 중에서 소나무 잎으로 구황한다는 일은 마땅히 급급하게 분부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는 영상이 출사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이 속히 거행하셔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예조 참판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솔잎뿐만 아니라, 《구황방(救荒方)》에 실려 있는 시행할 만한 일도 역시 이단하가 말한 것에 의거해 한결같이 경외에 분부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수어사(守禦使) 이완이 아뢰기를,
"올해의 재난은 백 년 이래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인데 보리 밀이 또 흉년이니, 이는 실로 하늘이 망하게 하는 시기입니다. 설사 올 가을에 곡식이 익는다 해도 각종 요역을 징수한다면 인민들이 사망하는 걱정은 반드시 배가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통곡을 할 만합니다. 성상께서 크게 진작하고 크게 변통하시는 조처를 하여야 위로 천심을 위로하고 밑으로 민정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거친 관사를 가지고 말해 보건대, 어영·훈국의 몇 만 군보(軍保)가 납부하는 군포(軍布)를 만약 다 징수한다면 민생의 곤궁함은 어떻겠습니까. 여러 궁가에 떼어주어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것, 각종 쓸데없는 군졸이 나라 곡식을 허비하는 것을 혹 혁파하기도 하고 혹 감하기도 하는 것이 진정 크게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조처입니다."
하였는데, 치화가 아뢰기를,
"이 말은 정말 절실하니 체득하여 기억하셔야 할 바입니다. 이단하의 소장 중에 또한 아뢰기를 ‘국가의 일년 경비 12만 석 중에 군졸을 기르는 비용이 8만 석에 이른다. 이것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다. 서울의 군대를 반드시 3천 명으로 줄여 정한 다음에야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변통이지만 오늘의 경비와 물력이 이미 마지막 지경에까지 이르러 겨우 날짜를 넘기고 있습니다. 올해는 그래도 혹 해 나갈 수 있어도 내년은 필시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또 밀 보리가 이미 실패하여 씨앗이 전혀 없으니, 내년의 밀 보리 흉년을 알 수 있습니다. 보리가 없으면 거듭 주리게 되고 사망이 잇달을 것입니다. 나랏일이 한결같이 이러한 극한에 이르니, 신들은 오직 일찍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할 뿐입니다."
하였다. 이완이 아뢰기를,
"정초(精抄)를 파하지 않으면 나라를 경영할 방법이 없습니다. 병조가 해마다 저축한 군포(軍布)를 정초에다 모두 소비하였으니, 만약 급한 일이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또 병조 속오(束伍)의 규례는 상번(上番)의 경우 경군(京軍)이 되고 하번(下番)의 경우 향군(鄕軍)이 되니, 이는 좋은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속오를 모두 감하여 정초에 채워 넣어, 유용하고 비용도 안 드는 병사를 쓸모없이 비용만 드는 군대로 만듭니다. 이것이 군사 행정으로 잘하는 것입니까. 훈국(訓局)의 군대에 대하여 선조(先朝)께서 일찍이 신에게 ‘반드시 만 명을 한계로 잡으라.’ 하교하시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식량이 있은 다음에 군대를 둘 수 있다. 지금도 식량이 나올 곳이 없으니 결코 명을 받들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식량의 부족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파하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전부를 파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중에서 혹 파하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궐원이 있으면 혹 보충하지 않기도 하고 다른 역으로 옮겨 정하기도 하는 것이 또한 한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중 용잡한 자를 도태하면 될 듯하다."
하였다.

 

6월 13일 임진

김수흥(金壽興)을 호조 판서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이상(李翔)·강여호(姜汝㦿)를 장령으로 삼았다.

 

6월 14일 계사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권상구(權尙矩)는 남한(南漢)의 꾸어주는 곡식을 받아 가라고 민간에 영을 내려 온 고을의 백성을 일제히 모이게 하고는 시기가 지나도 오지 않아서 굶어 죽은 자까지 있었습니다. 닷새가 지난 뒤에야 술에 취한 몸을 싣고 비로소 왔으나 혼미하여 정신을 못 차려서 나누어 줄 때에 허술한 것이 많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홍남립(洪南立)은 사람됨이 용렬한데다 나이도 늙어서 진휼하는 일에 전혀 유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굶어 죽은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도 서서 보기만 한 채 구제하지 않았으며 아전이 이를 틈타 농간을 부려 나라의 곡물을 훔쳤습니다. 하루라도 관적에 두어 민폐를 거듭 끼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모두 특별히 명하여 나문하게 하였다. 그 뒤에 금부의 조율(照律)에 따라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경성[서울]에 기근이 심하여 은 8냥으로 겨우 한 섬의 쌀을 바꾸었다. 사대부의 집에서 앞다투어 비단 옷가지를 가지고 저자에 가서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았고 금은의 그릇과 노리개로 두어 되의 쌀을 바꾸려 하여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어쩔 줄을 모르고 얼마 안 가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파는 쌀은 많아야 십여 말에 지나지 않았고 적으면 단지 한 말의 쌀뿐이었다. 사대부로서 벼슬이 낮아 봉록이 박한 자는 태반이나 굶주렸고 각사(各司)의 원역(員役)들도 거의 다 굶어서 낯빛이 누렇게 떠서 장차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병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은 사람됨이 기개를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였으며, 집에서는 검약하고 벼슬살이에는 근신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거칠고 조급하며 또 고집하는 병통이 있어서 일할 때에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예법을 따르지 않아 명교(名敎)에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이때 돌림병에 걸려 죽은 사대부가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았고, 지난 겨울부터 죽은 재상이 또한 십여 명에 이르렀으니 현달한 관리들의 재앙이 극에 달했다.


【태백산사고본】 24책 24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7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은 사람됨이 기개를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였으며, 집에서는 검약하고 벼슬살이에는 근신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거칠고 조급하며 또 고집하는 병통이 있어서 일할 때에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예법을 따르지 않아 명교(名敎)에 어긋나는 점이 많았다. 이때 돌림병에 걸려 죽은 사대부가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았고, 지난 겨울부터 죽은 재상이 또한 십여 명에 이르렀으니 현달한 관리들의 재앙이 극에 달했다.

 

6월 15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士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등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으로 죽는 것만 보고 말게 되었습니다.
역로(驛路)가 모두 비어서 장차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고 관속(官屬)이 흩어져서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죽은 자는 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었는데, 근일 길에 쓰러진 주검은 모두 본토박이 양민입니다. 그러므로 각 아문에서 진휼에 쓰고 남은 곡물과 여러 산성(山城)의 군향(軍餉) 관조(官糶)로 창고에 약간 남은 것을 털어서 나누어 주면 만분의 일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급히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세로 받은 콩과 쌀 또한 1백여 석을 남겨 둔 고을도 있을 것이니, 굶주린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고 의지할 데 없어서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는 무리에게 이것으로 죽을 쑤어 먹이게 하였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다 윤허하였다.

 

6월 16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7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이합(李柙), 정언 윤가적(尹嘉績)이 일을 논하면서 실상을 놓쳤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이완(李浣)을 병조 판서로, 신여철(申汝哲)을 통제사로, 이단하(李端夏)를 동부승지로, 민희(閔熙)를 강화 유수로, 윤증(尹拯)을 진선으로 삼았다.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보고하였는데, 음죽 현감 이명빈(李明彬)에게는 숙마(熟馬)를, 포천 현감 이형식(李馨植)에게는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김포 군수 강욱(姜頊)에게는 준직(准職)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강욱은 이미 준직을 거쳤으므로 별도로 상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허적이 아뢰니, 상이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정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경기 감사 오정위가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 이외에 굶어서 도로에 쓰러져 죽은 주검을 묻도록 신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굶어서 지친 백성이 실로 거두어 묻기 어려웠으므로 길에서 썩게 되었습니다. 또, 흙을 덮더라도 소나기가 한번 지나가면 곧 드러나고 있으니 보기에 참혹한 정상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습니다."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살펴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 주게 하였다. 좌상 정치화(鄭致和)가 무더운 여름철에 죄수를 지체시키는 폐단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소 잡는 금령을 늦추도록 명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소 잡는 것을 금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데에 뜻이 있었는데, 지금 굶주린 백성에게 혹 송아지가 있어도 나라에서 매우 엄하게 금하고 있으므로 사는 자가 전혀 없어서 소를 가지고도 굶어 죽을 형세에 놓여 있습니다. 또, 금령을 범한 사람은 속(贖)을 거두고 형벌을 받는데, 죽지 않으면 몸을 상합니다. 흉년에는 금령을 늦춘다는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를 잡지 못하게 금령을 더욱 밝힌 것은 실로 농사를 위한 것인데, 사세가 전과 달라서 백성이 다 죽게 되었으니 어찌 이 금령을 부질없이 지켜서야 되겠는가. 이제부터 금령을 범한 자에게는 형벌을 주지 말고 속만 거두게 하라."
하였다.

 

수령의 나이 제한에 대한 법을 다시 밝혔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무릇 사람은 혈기가 쇠퇴하고 나면 지기(志氣)도 쇠퇴합니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는 청렴 결백하던 자가 늙어서는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더구나 고령이 된 뒤에는 정신이 흐려지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수령의 나이를 제한하는 법은 그 뜻이 있으니, 해조를 시켜 이 법을 더욱 밝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9일 무술

정언 윤계(尹堦)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언로가 통하고 막힘은 흥망과 관계가 됩니다. 자고로 간언을 물리치고 뭇 사람과 어긋나면서 흥한 자가 있습니까. 또한 간언을 따르고 취하기를 좋아하면서 망한 자가 있습니까. 몇 년 이래로 조신이 진언할 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이면 혹 채납되었으나, 조금이라도 날카롭고 곧은 감이 있으면 으레 뜻에 거슬려 가벼울 경우 수용되지 않고 무거우면 별수없이 죄를 얻게 됩니다. 이 때문에 뭇 신하들은 은미한 뜻을 엿보다 빙빙돌고 우회하면서 ‘이 일은 상이 듣기 싫어하는 것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이 일은 대신이 주장한 것이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말해도 이익이 없고 다만 거슬리게만 되니, 꿋꿋한 논이 성상의 귀에 이르지 않고 아첨하는 풍습이 날로 조정 구석에서 자라납니다. 올곧아 흔들리지 않으면 과격하다는 비난을 반드시 얻고, 기대고 아부하여 비위를 맞추면 오히려 순후한 복을 누립니다. 정사의 명령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되고, 뭇 공적들이 어떻게 이지러지지 않겠습니까. 인군이 간쟁하는 신하를 두고 이목의 책임을 맡겨서, 온 천하의 일을 내가 보고 듣는 중에서 비추어 관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인의 눈을 밝히고 귀를 밝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어리석은 임금은 반드시 사사로운 사람을 두어 이목으로 삼습니다. 이른바 사사로운 사람이란 가까이 두는 심부름꾼과 총애하는 자가 아니면 귀척과 권력을 잡은 신하입니다. 저 사사로운 자들은 반드시 먼저 본뜻을 탐색하고 남의 시비를 살펴 그 임금의 애증과 호오를 알아 냅니다. 처음에는 아첨으로 임금에게 잘보여서 그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가 공손하다고 여겨 친하게 만들고, 중간에는 기욕(嗜慾)으로 임금을 겨냥하여 그 임금으로 하여금 자기가 충순하다고 여겨 기뻐하게 만들고, 끝으로는 조정 신하를 위협하여 그 임금의 보고 들음을 엄폐하여 그 기세를 확장하고 못 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 임금된 자는 처음에 그를 가까이하고 신임하며, 중간에 국정을 위임하고 권병(權柄)을 빌려주며, 결국에는 파란 것을 가리켜 희다 하고 뿔을 갈기로 뒤바꾸게 됩니다. 그 몸을 망치고 그 사직을 집터로 만들어도 오히려 깨닫지 못하니, 크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 원하건대, 이 점에 대하여 경계하시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말고 왕도의 의리를 따르소서. 말이 거슬리든 겸손하든 반드시 도에 비추어 옳은 것을 구하고, 친애하는 자라고 하여 편벽되게 하지 마소서.
신이 이전 역사 중에서 보건대, 한 성제(漢成帝)가 유흠(劉歆)에게 관직을 주려하자 좌우에서 대장군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상이 말하기를 ‘작은 일은 대장군에게 알릴 필요가 없다.’하니 좌우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간쟁하였습니다. 상이 이에 대장군 왕봉(王鳳)에게 말하니 봉이 불가하다 하여 곧 그만두었습니다. 신이 이것을 읽을 적에 그 인약(仁弱)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통탄하곤 하였습니다. 다만 오늘날 조정에 전권을 휘두르는 신하가 없어 작위와 상을 내리고 형벌을 가하는 것이 인주의 큰 권한이며 나라의 흥망을 성상께서 판단하신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쓰거나 죄주는 것은 반드시 대신을 거칩니다. 이는 본디 위임하는 뜻에서 비롯되었지만, 총괄하는 권한에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선악과 일의 시비가 본래 관작 지위의 고하와 상관없는데, 전하께서는 공과 사의 타당성 여부를 살피지 않으시고, 소원한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면 좋은 말이라도 홀대하고 높고 가까운 사람에게서 말이 나오면 좋지 않아도 따릅니다. 혹 어떤 사람을 논하되 대각에서 비롯되었으면 거부하고 중신에게서 비롯되었으면 윤허하기도 하며, 혹 어떤 일을 간하되 삼사가 하였으면 내버려 두고 재상이 하였으면 행합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치우쳐 말을 들으면 간악한 자가 생기고 전권으로 임명하면 난세가 된다.’고 한 것과 가깝지 않습니까. 성스런 왕이 천하를 다스림은 인명(仁明)함으로써 시작하지 않는 경우가 없지만 착실하게 일을 하려면 반드시 강의(剛毅)함이 필요합니다. 전하의 인명하신 자질은 부드러움으로 다스리는 도리[柔克]에 있어 지나치시니, 일에 임하였을 때 과감히 결단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한 원제(漢元帝)와 당 문종(唐文宗)의 인자하고 공검함은 현주(賢主)의 자질이지만 쇠란한 시절을 만나 시들시들 떨치지 못한 까닭은 ‘어물어물 결단하지 못한다.[優遊不斷]’는 것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삼왕(三王)의 명철함을 품부받으시고도 두 임금의 나약함을 경계하지 못하시니, 신은 남몰래 통탄합니다. 아아, 지금의 나랏일은 마치 죽을 병을 지닌 사람 같습니다. 안으로 심복(心腹)에서부터 밖으로 사지(四肢)에 이르기까지 병에 걸리지 않은 곳이 없는 자는 반드시 가장 심하게 병이 걸린 곳을 먼저 치료하여 고질이 된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고질이 된 것은 양병(養兵)이 그것입니다.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신비로운 무예로 용처럼 일어나시어 오위(五衛)의 좋은 제도를 창설하였으니, 대개 주례(周禮)의 남긴 뜻을 따른 것입니다. 병조가 주관하고 오위 도총부가 거느리면서 한 차례 번을 드는 것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선묘조에는 진휼을 받으러 나온 자들 중에서 장정을 뽑아 서울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 당시는 적과 대치해 있었으므로 병사 모으기를 힘썼을 법한데도 3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대개 양식을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불어난 수가 배를 넘고 기타 어영(御營)의 정원이 늘어 2만에 이르며 금군(禁軍)의 수가 늘어 천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또 호위하는 수백 명의 군관, 훈국(訓局)·어국(御局)의 두 국과 수어(守禦)·총융(摠戎)·정초(精抄)의 여러 청의 표하 장령(標下將領), 국출신(局出身)·별군직(別軍職) 등의 호칭은 모두 예전에는 없던 것으로 후에 가설된 것입니다. 나라에 입을 벌려 먹고 사는 자들이 이처럼 많아졌습니다. 태평 시절에는 세입이 보통 30여만 석에 이르렀는데도 백관의 녹봉만을 나누어 주고 양병의 비용은 하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창고가 넘치고 퇴적가리가 뜨고 부패할 지경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년 세입이 10만에 불과한데 태반이 장교와 군졸의 급료로 들어갑니다. 비록 수재 한재가 아니더라도 지탱할 형편이 아닙니다. 더구나 근래 해마다 연이어 흉년이 들어 그 수입이 점점 줄고 그 비용은 점점 느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닌 지경에 어찌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올해 죽은 자와 이후 사망한 자는 모두 대역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또 늙어 쇠잔한 자에 대해서는 본토로 귀환함을 허락하고 3천 명을 한도로 삼아 조금씩 재손(裁損)하소서. 군졸이 없는 장관(將官)의 숫자도 또한 많아 급료만 헛되이 소비하니, 어찌 사리에 합당하겠습니까. 수어청을 설치한 것은 전적으로 남한산성 때문이고, 총융청에 부(府)를 둔 것은 본래 경기도를 관장하려 함입니다. 그런데 서울에 장관을 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각 아문의 둔전(屯田)에서 들어오는 것이 얼마이고 소용처가 어디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간악하고 참람된 무뢰배들이 둔전을 설치할 곳을 다투어 말하여 백성의 전답을 약탈합니다. 오직 뜻한 바 욕심대로 하고 한 치의 땅도 남기지 않으면서 자기 사사로움을 성사시킵니다. 공가(公家)에 들어오는 것은 터럭만큼도 안 되고 사문(私門)으로 빠져 나가는 것은 밑빠진 독이라더니,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입니다. 만약 둔전의 명색을 혁파하여 그 전답에 세금을 매기고 그 사람에게 부역을 시키지 않는다면 크나큰 폐해가 제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복시(太僕寺)의 물력은 호조에 다음갑니다. 목장과 둔전이 없는 곳이 없고 일년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대개 몇 만 정도로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그 소비하는 것이 하인 약간의 급료에 불과할 뿐이니 대출미를 내고 들여 이식을 늘리는 것이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여러 궁가에 떼어준 염분(鹽盆), 어전(漁箭), 목장(牧場), 시장(柴場), 화전(火田)은 산을 둘러싸고 바다에 널려 있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남의 생업을 빼앗아 남의 목줄을 끊어 그 폐해가 각 아문의 둔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쾌히 혁파의 명을 내리시어 선조의 일을 따르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호조와 사복시(司僕寺) 각 아문은 으레 수결(手決)하는 일이 있습니다. 물건의 싸고 비쌉에 따라 시기적으로 이해를 따져서 물가가 적당히 내려갔을 때 가까운 사람에게 내어 주면, 서쪽으로 북경(北京)에 들어가고 남쪽으로 동래(東萊)에 달려가 공물이라 칭하고 그 이익을 차지하고자 도모합니다. 또 가까운 사람을 위해 사채를 협박하여 징수하고 그 재화를 빼앗아 그 사업을 파산시키니 가슴을 치고 눈물을 훔치며 하소연할 데도 없이 오열하는 자가 또한 적지 않습니다. 곡물을 주어 그 이익을 독점하였으니 가까운 사람을 봐준 것이 지극하다 할 것인데, 또 그 사채를 징수하여 남의 원한을 겹겹으로 취하니, 너무도 한심스러워집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지금부터 공가의 크고 작은 매매물은 모두 시인(市人)에게 주어 사사로이 주는 것을 금단하는 일로 영갑(令甲)을 삼아 수결의 폐해를 막으소서. 그러면 이익을 독점하는 헛점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엎드려 생각건대, 세자께서 이미 장성하시어 옥같은 자질이 일찍 이루어졌으니, 지금이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을 때입니다. 이는 기회가 있는 법이니 어찌 이보다 중한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매일 하는 서연(書筵)은 짧은 시간에 외우는 수업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어찌하여 세자로 하여금 밖에 항처(恒處)하여 항상 빈료들을 접하고 의리를 강론하며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과거 출신은 학문의 힘이 있는 경우가 드물고 산야의 유일(遺逸) 중에는 필시 이치를 궁구한 선비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널리 수소문하고 춘방에서 근무하게 하여, 훈도하고 절차탁마하여 임금의 자질에 도움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억만 년 무궁한 아름다움이 오로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폐습은 사치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나쁜 풍속이 다 여기에서 말미암습니다. 높은 상투와 비단 피륙이 궁중에서 시작되었으니 그것에 감동하여 본을 뜨는 자들이 어찌 유래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근래에 가례(嘉禮) 때 주옥을 부수어 구슬가루를 만들고 은을 녹여 그릇을 주조하였다는 말이 외간에 퍼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같은 그릇들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퍼진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것은 나라를 잃기에 족한 물건입니다. 비록 이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 말이 외간에 전파된 것은 역시 전하의 검덕(儉德)이 미진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며 더욱 경계하시고 검약함으로 솔선하십시오.
환시들이 멋대로 구는 습관이 있다는 것과 귀척들이 친압한다는 말은 외간에 퍼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왕자와 왕손이 알현하는 데 때가 없고 출입에 일정함이 없다면, 이것이 전하가 친한 이를 친하게 여겨준다는 성한 덕이라 하더라도 군신의 예는 사사로이 친한 것과 다르고 궁궐의 은밀함은 여염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한번이라도 한계를 넘어서면 그 걱정거리가 적지 않습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능원 대군(綾原大君)이 인조(仁祖)를 뵈올 때 감히 밖의 말을 진달하지 못했고 인조 대왕도 밖의 일을 묻지 않으시고 가까이 사랑하셨을 뿐이라 하여 진신(搢紳)들 사이에 지금까지 전파되어 칭송된다고 합니다. 어찌 전하께서 우러러 본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누누이 이어지는 경계와 가르침의 말을 내 가상히 여기노라. 마음에 두고 삼가 기억할 것이다. 상소 중에 변통할 만한 것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허적과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은 배척을 받아 직위가 거북하다고 하여 인혐하고 들어앉았다. 허적이 면직을 비는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듣기로는, 간관(諫官)이 봉사(封事)하였으되 대신의 권한이 중한 것을 배척하고 태복시의 재물 늘린 것을 죄주는 것이 전편의 주된 뜻이라 하니, 신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른바 올곧은 논의가 미치지 못하고 아첨하는 풍습이 날로 자라나며, 살리고 죽이는 것이 성상의 판단에서 말미암지 않고, 사람에게 관작을 주거나 죄를 주는 것이 반드시 대신을 거친다는 말은 비록 어떠한 일을 가리켜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또한 반드시 신 자신만을 전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지난날 줄곧 재상의 자리에 있었던 자는 신 한 사람뿐이니, 죄책을 당할 즈음에 어찌 감히 나는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신은 실로 늙고 사리에 어두워, 어떠한 직신(直臣)이 올곧은 말을 올렸는데 대신(大臣)으로 인하여 성상의 귀에 미치지 못하였고, 어떠한 간신(奸臣)이 아첨의 말을 아뢰었는데 대신에 의지하여 성상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는지 살피지 못하겠습니다. 사형수를 결정할 때는 여러 신하가 소견을 각자 진달하여 성상의 결단을 우러러 여쭙고, 재신(宰臣)을 뽑을 때면 묘당에서 조정의 의논을 가지고 감히 갖추어 의망합니다. 그래도 형벌과 포상의 권한은 임금이 쥐어야 하고 사람을 취하고 버릴 때에는 시기와 혐의가 쉽게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일일이 하문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경연 중에 여러 번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치우쳐 듣고 전임시켜 난세가 된다는 것을 걱정하기까지 하니, 대신된 자가 누군들 마음이 싸늘해지고 간담이 놀래지 않겠으며 누가 감히 계책을 내려고 하겠습니까. 간신(諫臣)이 들은 것이 과연 논한 바와 같다면 부지런히 잘못을 공격함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일이니, 어찌 이 때문에 물러나기를 빌겠습니까. 다만 신의 병세가 조석지간에 버티지 못하겠기에 위태롭고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감히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요즈음 말하는 자들은 ‘인군의 과실을 말하기는 쉬워도 대신의 잘못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기 어려운 것은 오로지 당론(黨論)을 일삼는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이다. 당론을 일삼는 이상 말한 것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겠는가. 경의 인혐은 너무 지나쳐 오히려 일의 모양을 해치는 것은 아닌가. 나랏일이 날로 급해지니 경은 인혐하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임하지 말아서 나의 희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정언 윤계가 인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치란의 근본은 군덕(君德)과 연관되고 안위의 책임은 대신에게 달려 있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천시(天時)가 이와 같고 민사(民事)가 이와 같으며 국세(國勢)가 이와 같으니, 우리에 있어야 할 맹수가 우리를 벗어나고 귀중하게 간수해야 할 보석이 궤짝에서 훼손되는 것은 누구의 잘못007)  입니까. 비록 성상 자신을 오로지 책하려 해도 크게 말할 만한 잘못이 없다면 장차 하늘을 책하겠습니까, 백성을 책하겠습니까. 신은 어리석어 알지 못합니다만, 우리 재상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않게 이것 때문에 대신이 불안해 하여 차차를 올리기까지 하였고, 비답 중에 또 ‘말하기 어려운 것은 오로지 당론을 일삼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하교가 있었으니, 신은 지극히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대신이 차자로 진달한 일을 감히 조목 조목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근래 올곧은 논의가 조정에서 행해져 정령(政令)에 채용된 것이 몇 건이나 됩니까. 채용되지 않아 위축되는 것이 그 형세이고, 올곧은 소리가 위축되면 아첨하는 풍습이 자라는 것은 또한 그 형세입니다. 상신의 뜻으로는 근래에 올곧은 소리가 일어나고 아첨하는 풍습이 잠잠하다고 과연 생각하는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신은 어리석고 망녕되게 생각하기를, 꿋꿋하고 엄격하지 못한 것이 성덕(聖德)의 병근(病根)이라 여깁니다. 그러므로 권한과 기강을 총괄하라는 뜻을 상소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에게 위임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어찌 감히 옳지 않다고 여기겠습니까. 다만 그 위임하는 방법이 어떠한지를 살펴 볼 뿐입니다. 대신의 도모를 신이 어찌 감히 불가하다 여기겠습니까. 다만 그 도모의 득실 여부를 살펴 볼 뿐입니다. 오늘날 성상께서 위임하신 것이 과연 모두 타당하고 대신의 도모가 과연 모두 흡족한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신이 상소 중에서 진달한 말은 죄줄 만한 것이 아닐 듯합니다. 저 태복시의 일은 내외 곡물의 모곡(耗穀)이 다 없어지고 은화로 이자를 거두어들인 것의 반이 줄었다고 여항간에 분분하게 말이 퍼졌습니다. 이같은 좀벌레 같은 일을 어찌 대신이 모두 알겠으며, 또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사채를 징수하는 일이 만약 인삼 장수의 밀매와 관계된다면 나라에는 효시하는 법이 있으니, 마땅히 묘당에서 그 법령을 다시 엄하게 시행하면 될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태복시가 관장하는 일이어서 죄를 징계할 것을 가지고 채무를 징수합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 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성상의 하교 중에 이른바 붕당은 바로 조정 백년의 고질적인 습관입니다. 지금의 조정 신하들은 비록 색목(色目)을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편당의 죄에 스스로 빠지겠습니까. 지금 만약 사리의 옳고 그름은 살피지 않고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지나치게 곧은 데만 힘쓴다면 자기와 같은 의견이 옳아도 감히 옳다 하지 못할 것이니 당동(黨同)이라 할까봐 두려워서이고, 자기와 다른 의견이 그릇되어도 감히 그르다 하지 못할 것이니 벌이(伐異)라 할까봐 두려워서입니다. 그렇게 되면 틈을 엿보는 자들이 그 교묘함을 멋대로 펼치고 임금 뜻에 영합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함을 추구할 것이니 심히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지난번 상소 중의 말은 단지 나라 사람들의 말을 모은 것이지 신의 말이 아닙니다. 망녕되이 한 봉사(封事)를 올려 임금과 상신의 실수를 보충하려 했는데 말이 조잡하고 성의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상신이 이미 불안하다고 차자를 올린 데다가 성명께서도 또 당론이라 의심하시니, 신의 죄가 큽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헌납 정화제(鄭華齊) 등이 처치하기를,
"윤계의 소는 당면한 어려움을 개탄하여 들은 바를 모두 아뢴 것입니다. 성상께서 경계와 가르침이라고 치켜 세우신 데다가 상신 또한 과감히 말한 것을 장려하였습니다. 말을 올린 신하에게 혐의할 것이 별로 없으니,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1일 경자

이정영(李正英)을 형조 판서로, 신정(申晸)을 사간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참의로, 이유태(李惟泰)를 찬선으로 삼았다.

 

6월 22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3일 임인

상이 하교하기를,
"이런 흉년을 당하여 백성이 다 구덩이에 굴러 죽고 있으니, 음식을 대하면 두렵고 자나깨나 놀라고 있다. 서울 안의 물건은 이미 줄였으나 각도에서 진상하는 것도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두 대비전(大妃殿) 이외의 각전(各殿)에 바치는 것은 모두 내년 가을까지 특별히 멈추게 하라."
하자, 좌상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위에 바치는 약간의 물건까지 모두 멈출 수는 없으니 적당히 줄이소서."
하니, 드디어 별도로 기록하여 바치게 하여 매월마다 3분의 2를 줄였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민폐 때문에 각도의 삭선(朔膳)을 폐지하셨으니 무릇 보고 듣는 자이면 누구인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상방(尙方)에서 베를 짜는 것과 궐내에서 남색을 물들이는 일 같은 것은 모두 긴요하지 않은 것이니 폐지하더라도 어찌 옷이 부족할 걱정이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장에게 별로 시킨 일이 없다."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비록 이러한 일이 없더라도 이는 성상께서 더욱 힘쓰셔야 할 곳입니다. 또 죽은 백성들을 도성과 각도에서 매달 초 보고하는 수가 있으나, 그 수 이외에 나라에서 모르는 자가 몇 천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좌참찬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용산(龍山)의 진소(賑所)에 흘러 들어온 주린 백성의 수가 매우 많아 물리쳐 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선 죽을 먹이지만 그 주려서 걸린 병 때문에 머지않아 모두 죽을 형편입니다. 상방(尙方)에서 남색물을 들이는 것과 옷감을 짜는 일은 대신들이 이미 진달하였거니와, 이외에 공역(工役)의 일을 또한 멈추도록 조처해야 합니다."
하였다. 동부승지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지금 국내의 미곡이 이미 다 떨어져 오곡 이외에는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것으로 솔잎만한 것이 없습니다. 민간에서 먹도록 권하는 뜻으로 이미 각도에 명령을 반포하였는데, 사방 산의 솔잎을 채취하도록 허락하는 명령은 현재 없으니, 비록 먹으려는 자가 있어도 감히 따서 취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즉시 분부하여 채취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또 듣건대, 명종조(明宗朝)에서 진휼청의 계목(啓目)으로 인하여 솔잎을 먹는 방법에 대하여 서울에서는 한성부와 오부(五部)가 외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민간에 널리 물어 복용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차관(敬差官)과 도사(都事)가 사람을 만나 자세히 물으니 잘 알지 못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색리(色吏)와 권농(勸農)은 논죄하고 수령은 인사 고과에 적용하였다 합니다. 지금 또한 이에 의거해 거행함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죄할 필요는 없고, 단지 착실하게 깨우쳐 주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단하가 또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의 어미와 처에게 조정에서 급료를 준 조처가 있었는데 어미가 죽은 후 3년 동안 그대로 주도록 하였다 합니다. 오달제의 처상(妻喪)에도 그 어미 상의 예에 의거해 3년 동안 그대로 급료를 지급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6월 24일 계묘

상이 하교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흉년을 당하였는데, 상방의 여러 가지 사역과 베를 짜는 등의 일만 존속시킬 수 없으니, 수 년 동안 폐지하여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역관 정신남(鄭信男)의 딸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정신남의 딸은 처녀로서 정축년008)   병란을 피할 때에 나룻배가 나루를 막 떠나 그녀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손을 잡아 당기려 하자 정신남의 딸이 말하기를
"내가 손을 너에게 준다면 피난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좌상 정치화(鄭致和) 등이 그 두려움 없이 죽은 절의가 가상하다 하여 정문을 세워 표창하자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6월 25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이성(南二星)을 예조 참의로, 박장원(朴長遠)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박장원은 집이 가난한데 늙은 어미가 있으므로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한 것이다.

 

임시로 백관의 반록(頒祿)을 폐지하고 달마다 산료(散料)를 주는 제도로 개정하고 아래로는 잡직(雜職)·군사 등의 월름(月稟)까지도 모두 줄였으니, 대신의 청을 따른 것이다. 정상적인 녹에 비해 줄인 것이 쌀 6백 6석과 콩 1천 8백 84석이었고, 잡직 이하 및 군사 등에게 줄인 쌀이 또한 2백 80여 석이었다.

 

호조가 아뢰기를,
"백관 이하의 산료(散料)는 이미 마련하였지만, 지금 사대부의 어려움과 궁핍함은 눈썹이 타는 듯합니다. 만약 내달 초를 기다린다면 박절한 상황은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됩니다. 날짜를 조정하여 창고를 열고 우선 산료를 지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이완이 병을 이유로 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6월 26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8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고 정승 홍중보(洪重普)에게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무신

벼락이 후원(後苑)의 고목을 쳐서 조각조각 쪼개졌고, 또 신문(新門) 밖의 해묵은 홰나무와 왕십리(往十里)의 밤나무에 벼락이 쳤다.

 

민정중(閔鼎重)을 병조 판서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30일 기유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신정,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윤계가 아뢰기를,
"접때 인대했을 때에 묘당이 나라의 곡식을 내어 놓되 값을 줄여 발매하기를 청하였으므로 화급한 백성이 날로 손꼽으며 고대하였습니다. 지금 해청이 줄인 값을 보면 한두 푼에 지나지 않아서 당초 급한 것을 구제하려던 뜻과 크게 다르니,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도성 백성들은 재산이 이미 다하여 그 형세가 참으로 급합니다. 거저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그 값의 많고 적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해청을 시켜 다시 값을 줄여서 굶주린 백성이 실망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달에 도성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가 1천 4백 6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수가 1만 7천 4백 90여 인이었다. 그 밖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범에게 물렸다는 보고가 잇따랐으며, 도둑이 살해하고 약탈하는 우환이 없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하였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가축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윤선도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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