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경술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등이 아뢰기를,
"외방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많고 적은 것과 들판이 황폐하거나 경작되는 것은 비록 재해를 입은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진휼의 정사를 어떻게 했는가에도 달려 있습니다. 소문에 각 고을 가운데에는 미리 헤아려서 곡물을 저축해 놓았다가 종자와 양식을 대여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본디 힘써 장만한 것도 없는 데다 또 민생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아 넘겨 전혀 돕지 않는 자도 있으며, 심한 자는 진휼의 곡식을 나눠줄 때에 틈을 타 깎아내어 굶주린 백성이 실망하고 원망이 퍼지게 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신들은 듣는 대로 탄핵해야 하겠으나 먼 외방에서 전하는 말이 다 진실하지는 못할 듯하니, 각도의 감사를 시켜 사실을 살펴서 아뢰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여 진구한 자는 각별히 논하여 상을 주고 가장 심하게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한 자와 외람되고 교활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주소서. 또 각도에서 진휼을 파한 뒤에 경기에서는 성적에 대해 치계하였으나 다른 도에서는 아직 아뢴 일이 없으니, 모두 일체 아뢰게 하여 죄는 같은데 벌을 다르게 주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3일 임자
윤가적(尹嘉績)을 지평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이런 때에 영상이 나오지 않아서 적체된 일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니, 상께서 권면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미곡을 발매하는 일은 값을 얼마로 정하였기에 간원이 논계하였는가?"
하자, 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시장 가격으로는 쌀 한 섬에 은(銀) 여섯 냥을 치고 콩의 경우 세 냥을 치는데, 각각 한 냥씩 감하였습니다. 그래도 간원은 감한 수가 시장 가격에 비해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말을 하였으므로, 다시 상의하여 시장 가격의 절반으로 발매하겠습니다. 대개 쌀과 콩의 수가 매우 부족하여 백성에게 균등하게 혜택을 주기 어려운 상황이라, 호조 판서와 상의하여 호조의 묵은 콩 2천 석을 더 내어 발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영청의 쌀 2천 석을 발매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결정을 보았습니다만, 진휼청 초기(草記)의 비답에서 우선 5백 석을 줄이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어영청에서 비축한 것에는 아직 여분이 있고, 또 지금 발매하는 수의 곡식으로는 백성들의 집에 두루 미치지도 못합니다. 2천 석 중 5백 석을 덜어내지 말고 아울러 발매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한성부에서 아뢰기를,
"근래 도성 내외에서 시체를 수습하는 역(役)은 전적으로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민이 굶주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러한 커다란 역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또 전염병으로 죽은 그 시신을 직접 옮기기가 싫어 그 동네에서 사람을 고용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느라 방민들이 소비하는 것이 적지 않습니다. 유독 고통을 받아 견뎌내기 어려운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갈무리하여 장사지내는 것도 착실하지 않아 부관(部官)이 잇달아 죄를 입게 됩니다. 만약 각부(各部)로 하여금 시체를 수습하는 사람 5, 6명을 각기 모집하여 요포(料布)를 넉넉하게 지급하고, 부를 맡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집한 사람을 거느리고 일에 따라 즉시 수습하여 장사지내게 한다면 방민들의 견디기 힘든 상황이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것이고, 방치된 시체를 수습하는 정사 또한 소루한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소를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처신이 형편없어 오욕을 당한 것이 이미 많고 나라의 법을 저촉하여 공안(公案)에 이름이 걸려 있습니다. 죄가 크고 부끄러움이 깊어 씻어 내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은혜로운 용서를 입어 비록 형벌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명예를 모조리 잃어 청의(淸議)에 용납되기가 어렵습니다. 명예가 혹 훼손되고 욕을 당했다면, 단지 한사람이 욕을 당한 것에 그치지 않고 바로 조정이 욕을 당한 것이 됩니다. 신 같은 이는 중한 허물을 졌으니, 내몸 하나를 훼손하고 욕되게 한 것일 뿐만 아니라 조정에 욕을 끼친 것입니다. 내리신 명을 철회하시어 저의 하찮은 분수를 편안케 하소서."
하니, 상이 우대하여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7월 4일 계축
영의정 허적(許積)이 또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천재 시변으로 나라의 근심과 백성의 위태함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고, 인심과 당론이 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한심해진다. 경은 나라의 일에 정성껏 몸과 마음을 다하다 병이 들었으니, 이것은 내가 일찍이 염려해 온 바이나 조그만 병이 있다한들 어찌 사직하는가.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다시는 젊은 무리의 당론에 개의하지 말고 빨리 나와서 도(道)를 논하여 내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 타일렀다.
7월 5일 갑인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우도(右道)의 각 고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닭·개를 죄다 잡아 먹고 나자 또 마소까지 잡아 먹고 있는데 사람마다 도살장이 필요없이 직접 도살하고 있습니다. 형세의 급함이 서로 잡아 먹기 직전이고 심지어는 굶주린 창자에 고기를 먹자 설사병이 갑자기 일어나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애초에 마소가 없는 자는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장의 가격은 겉보리 한 말로 거친 무명 너댓 단(端)과 바꾸기까지 합니다만, 보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좌도(左道)의 각 고을은 우역(牛疫)이 크게 치열하여 병으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또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거리가 이미 떨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으므로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다 여역·이질이 전염되면 즉시 죽습니다. 게다가 한재와 황재(蝗災)가 매우 참혹하니, 앞날의 농사에는 다시 바랄 만한 것이 없습니다."
7월 6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7일 병진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홍주삼(洪柱三)을 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병조 참의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삼았다.
7월 8일 정사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나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경에게 이 직임을 제수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는가. 이런 때에 보필하는 직임을 경 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경은 선조(先祖)에서 인정해 준 은혜를 받았는데, 나라의 일을 어찌해볼 수 없는 이때에 예사로 보아 넘기고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을철도 가까워졌으니 바로 뜻을 바꾸어 나오기에 적당하다. 반드시 내 뜻을 몸받아 위태로운 나라의 형세를 구제하여 내 희망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전유하게 하였다.
7월 9일 무오
경상도 하동현(河東縣)에 지진이 있었고, 영산현(靈山縣)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7월 11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강화부(江華府)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경기 고을에서 좀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 날이 저문 뒤에 서넛이 떼 지어 다녔다. 수직(守直)하는 자가 꾸짖어 금지하면 대뜸 낫으로 찌르니 즉시 죽기도 하고 매우 다치기도 하였다. 도신(道臣)이 이를 아뢰었다.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벼락이 성문루(城門樓)를 치고, 평산(平山)·연안(延安) 등 고을의 사람과 가축도 벼락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 문화(文化) 등 스물아홉 고을에 우박이 내리고, 곡산(谷山) 등 여섯 고을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7월 12일 신유
경기도 남양(南陽)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전라도 임피(臨陂) 사람과 남원(南原)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고 정읍(井邑) 등 고을에서 지진이 있었다.
7월 13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신정이 길에서 어패(御牌)를 범했다고 인피하였다. 헌납 정화제(鄭華齊)가 처치하여 출사하게 하였는데, 신정이 출사하도록 한 처치가 의외라고 하여 다시 인피하였다. 화제도 처치가 타당함에서 벗어났다고 또한 인피하니, 간원이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헌부의 차자와 이단하·윤계 등의 소 가운데에 있는 군사에 관한 일을 임금 앞에 여쭈어 정하였다. 허적은 훈국의 군사 한 부(部)를 줄이며 별대(別隊)의 상번(上番)을 잠시 중지하고 정초 도제조(精抄都提調)를 폐지하여 병조가 주관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의 농사를 미리 알 수 없기는 하나, 경작하지 못하고 포기한 것이 반이 넘으므로 내년 봄의 염려가 또한 지난날보다 훨씬 더할 것이니, 폐단을 줄여서 어루만져 돌보는 도리를 먼저 강구하여 정해야 한다. 각도의 수륙 조련(水陸操鍊)과 병사·영장이 순회하여 사방(射放)을 시험하는 일을 모두 내년 가을까지 멈추라. 제색 군병(諸色軍兵)의 결원을 세초(歲抄) 때 채워 정하지 말고 각영(各營)과 각읍(各邑)의 월과(月課)하는 군기(軍器)·군량(軍糧)과 각도의 교생(校生)에게 연례(年例)로 보이는 고강(考講)도 내년 가을까지 멈추라. 상방(尙方)의 설면자(雪綿子)와 중면자(中綿子)를 아울러 5백 근 중에서 특별히 3백 근을 줄여서 조금이라도 폐단을 줄이라. 또 상방이 연례로 연경(燕京)에서 무역하는 물건을 지난해에 이미 그 반을 줄였으니 올해에는 특별히 전부를 줄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올해는 영남의 한재가 특히 심합니다. 옛날에 한 아낙이 원한을 품어도 3년의 가뭄을 불러온 일이 있었습니다. 도내(道內)에 혹 의심쩍은 옥사로서 억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옥중에 정범(情犯)이 의심스러운 자는 도신(道臣)을 시켜 물정을 참작하여 심사해서 아뢰게 하여 소결(疏決)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이단하(李端夏)의 상소 중에 아뢰기를 ‘전일에는 외방에 부민(富民)들이 많이 있었기에 재앙과 흉년을 만나도 백성들이 개인 저축에 힘입어 살아났다. 그런데 십수 년 이래로 민간의 개인 저축을 관에서 무조건 빼앗아 백성들에게 흩어주었고, 가을걷이 후에 다시 거두어 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치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곡식을 저축하지 않았다. 지금은 온 나라에 곡식을 저축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즉시 팔방에 알리어 곡식을 저축하게 하되, 무조건 빼앗는 폐단을 금하고 곡식을 많이 저축하는 사람은 자급을 올려주어 권장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백성에게 부(富)를 간직하게 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단하의 상소 내용은 진실로 옳으니 이것에 의거해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계의 상소 중에서 ‘어영청에 군졸 없는 장관(將官)의 수가 매우 많아 한갓 나라 곡식만을 소비하니 사체에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수어(守禦)·총융(摠戎)의 두 청(廳)에서 장관을 서울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모두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수어청 아병(牙兵)과 총융청 장초군(壯抄軍)이 서울에서 번을 서기 때문에 장관을 두는 일이 있었습니다만, 과연 불편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각 해당 청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토록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계가 상소 중에서 둔전의 폐해를 극언하였습니다. 둔전에 대해서 이미 자세히 조사하는 조처가 있었고 각도의 보고도 이미 올라와 있는데 아직까지 아뢰어 처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치화가 아뢰기를,
"둔전의 폐해는 진실로 윤계가 진달한 바와 같으니 즉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둔전에 대해 조사하여 아뢴 것이 이미 올라와 있다면 그 중 파하여야 할 곳을 먼저 혁파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계 상소 중에서 지부(地部)와 사복시(司僕寺) 각 아문의 크고 작은 매매물에 대해 수결(手決)을 금단하고 모두 시인(市人)에게 주도록 법으로 만들라고 하였는데, 이것에 의거해 시행함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계가 상소에서 양서(兩西) 관향곡(管餉穀)을 나누어 두지 않는 폐해를 두루 아뢰고 심지어 백성이 크게 고통받는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였는데, 치화가 아뢰기를,
"양서에서 나누어 관리하면 해서 지방이 도리어 견디기 어려운 폐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나누지 못한 것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한번 두 도 감사에게 편리한지 여부를 물은 후에 품처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계가 상소에서 아뢰기를 ‘여러 관청의 집사와 크고 작은 고을의 원은 반드시 서울의 큰 집안에서 뽑아 쓴다. 지방에 재주가 있어도 알려지지 못한 자들이 수도 없고 뽑아 쓰지 못한 경우도 매우 많다. 서울에서는 서료(庶僚)에, 지방에는 주현(州縣)에 결원이 생기는 대로 채워 넣는다면 원망을 없애는 방법에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실로 옳습니다."
하고, 치화가 아뢰기를,
"이는 전조(銓曹)가 그 재주와 그릇에 따라 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말하여 재주에 따라 뽑아 쓰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김만기가 아뢰기를,
"나라의 대계가 위태로운 이러한 시기에 올 농사가 또 이와 같으니 반드시 변통의 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번다한 비용을 줄여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大臣)이 대간의 상소를 가지고 탑전에서 종일 결정한 것이 도감(都監) 군사(軍士)의 일부를 줄인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변통하는 방법이 될 만하겠습니까. 정초 별대(精抄別隊)에 무슨 중시할 것이 있다고 여전히 존속시키십니까. 오늘 입시한 여러 신하 중 한 마디 앙달하는 자가 없으니, 신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신의 뜻도 역시 정초 별대를 혁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입시해 보니 성상께서 이미 재단하셨기에 신이 다시 번거롭게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만기의 말을 듣고 보니 송구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초 별대의 폐해 때문에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를 것이다.’라고 하니, 백성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신은 전에 변통을 대략 실시하여 번다한 비용을 줄이라고 이미 앙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별도로 다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만기의 말은 극히 옳습니다. 국가에 정초 별대가 없었을 때도 여전히 나라가 되었으니, 지금 무슨 혁파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겠습니까."
하고, 교리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모든 사람이 혁파해야 옳다고 한 목소리로 말하니 그 폐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때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정초 별대에 대하여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인대(引對)함에 미쳐서 군신 상하가 종일토록 논란하여도 별로 변통한 일이 없었으니, 식자들이 개탄하였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을 유임시켰다. 이때 내외의 저축이 모두 비었으나 관서북의 지역이 조금 나았고 민유중이 여러모로 힘썼으므로 국가의 일상적인 경비를 오로지 관서에 힘입었다. 또 밀 보리는 여러 도가 똑같이 큰 흉작이었는데 민유중이 보리 종자가 없을 것을 미리 근심하여 천류고(泉流庫)에 남겨 둔 쌀을 내어 5천여 석을 사서 배로 경창(京倉)에 날라 보내어 종자가 없는 다른 도에 보내게 하였다. 그가 사전에 일을 처리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민유중의 임기가 찼으므로 갈아야 할 것인데 조정에서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어려워하였다. 이에 허적(許積)·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민유중은 마음을 다하여 직무에 봉사하였으므로 본도의 일이 그 때문에 잘 거행되었을 뿐더러 세상을 함께 구제하려는 뜻도 있습니다. 앞으로 농사가 어떨지 알 수는 없으나, 모든 일을 요리하여 잘 처리하는 것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니, 유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바로 그러하다."
하고, 드디어 올해 동안만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7월 14일 계해
훈국군(訓局軍)의 전부(前部)를 폐지하여 늠양(稟養)의 폐단을 줄였다. 한 부(部)에서 한 해 동안에 줄이는 비용이 쌀 1만 석과 무명 2백 동(同)이나 되고 그 시사(試射)의 상격(賞格)에 드는 것을 아울러 셈하면 줄이는 것이 더욱 많았다.
7월 15일 갑자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장선징을 병조 참판으로, 김우형(金宇亨)을 공조 참판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박지(朴贄)를 사간으로, 이하(李夏)를 집의로, 신정을 응교로, 이혜를 부응교로, 민종도(閔宗道)를 헌납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수찬으로, 이여발(李汝發)을 총융사(摠戎使)로 삼고, 남구만(南九萬)을 발탁하여 함경 감사로 삼았다.
새벽부터 큰비가 사납게 쏟아지다가 아침이 넘어서야 그쳤다. 성안의 크고 작은 도랑이 모두 불어 넘쳐서 다리가 무너지고 거리가 내를 이루어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인경궁(仁慶宮) 앞의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 죽은 자가 네 사람이나 되었다. 성안의 수재의 참상은 근고에 없던 것이었다.
7월 16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대신·훈련 대장·비국의 유사 당상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도감(都監) 군병의 한 부(部)를 줄였는데 그중 곡절이 있는 경우가 많아 아뢰어 결정하고자 합니다."
하고, 지사(知事)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한 부(部)를 줄여 네 부의 궐원을 메웠습니다. 그중 늙고 병들거나 좀도둑질로 조행이 나빠 대열에 편입할 수 없는 자들은 모두 방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흉년에 돌아가 기댈 곳이 없으니 진실로 불쌍합니다. 또 관의 대출 곡식을 받아 먹은 자들에 대해 내려간 후에는 거두어들일 수 있는 근거가 없으므로 8월의 급료를 각 9두씩 나누어 주면서 6두는 돌아갈 식량으로 삼고 3두는 대출 쌀을 상환할 거리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로하여 감원된 자 중 더욱 심히 의지할 데 없는 경우 그 자식이 대신하고자 원한다면 그 소청을 들어 주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 감원된 자에게 베필을 보내 주어 위로할 거리로 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접위관(接慰官) 신후재(申厚載)의 장계를 꺼내어 아뢰기를,
"왜인이 성악(聲樂)을 듣지 않고 예단(禮單)을 받지 않는 등의 일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데 불과하지만, 아무 때나 접위관을 보자고 청하는 것은 사리에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반드시 보려고 한다면 거절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장계의 회답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으로써 말한다면, 마땅히 많은 날짜가 지나가야 하니 저들의 말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뜻으로 접위관에게 통지함이 옳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또 아뢰기를,
"왜인이 반드시 올라오려고 한답니다. 겁주려고 하는 말인 듯한데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곧바로 올라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저들이 비록 올라오려 해도 무기를 가지고 일을 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충분히 타일러 끝내 따르지 않는다면 동래(東萊)에 왔을 때, 부사(府使)와 접위관이 나가 볼 수는 있지만 사람과 말은 대주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7월 17일 병인
집의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근래 간신(諫臣)이 상소 중에 궁궐 출입이 엄격하지 않은 폐단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이는 상례에 따라 경계의 말씀을 아뢴 것에 불과하니, 종척(宗戚)의 도리로는 조심하여 자신을 단속하고 공경으로 처신하여 해당되는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은 감히 소장을 올려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장황히 기세를 올리고 깔보기를 버젓이 하여 마치 대각(臺閣)과 승부를 다투는 듯하였습니다. 일의 모양으로 보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 ‘귀함을 믿고서 기염을 떨치며 대각을 깔고 뭉개는 조짐을 길러주어서는 안 된다.’ 등의 말을 보태어 넣어 논하였다. 세 차례 아뢰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참자를 간택함은 사체가 매우 중하니 회합을 파하지 말라는 전교가 이미 있었으니, 취사 선택할 때 한결같이 공의를 따라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요번 괴원(槐院)의 회합에서 논의가 들쑥날쑥이어서 결론이 나지 않아 3일이나 서로 버티다가 결국 회의를 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정의 영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의견에 집착하는 습속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의 수석 담당관[行首掌務官]을 먼저 파직한 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8일 정묘
집의 이하가 아뢰기를,
"양주 목사(楊州牧使) 목내선(睦來善)은 부임한 이후 한갓 무섭게만 굴고 진휼의 정사는 포기하였습니다. 백성이 구덩이에 굴러 죽는 이 시절에 비록 한마음으로 어루만져도 오히려 구제할 수 없을까 두려운데, 더구나 또 멋대로 형장을 가하고 끝없이 침학을 하는 데이겠습니까. 온 경내의 백성이 기가 질려 숨을 죽이거나 왁자지껄 원망하고 욕하여 물불 속에 있는 듯합니다. 또 이장의 정처(正妻)는 천인(賤人)과 구별이 있는데 주린 백성을 성책(成冊)에 올려 기록한 수가 많다는 이유로 체포하도록 차사를 보내 결국 목을 매어 죽게 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일에 의거하여 나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자세히 살펴 조처토록 하였다. 두 차례 아뢰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접때 괴원(槐院)의 관리들에 대해 인사고과를 매길 때, 저작(著作) 권환(權瑍)이 강하는 자리에 나온 후 받아야 할 죄가 있다고 하면서 강을 해야하는지의 여부를 대신(大臣) 앞에서 물었습니다. 만약 권환이 과연 인피할 혐의가 있었다면, 당초에 강에 나오지 말았어야 합니다. 이미 책을 끼고 자리에 나왔다면 대신과 여러 재상들이 회합한 자리에서 어찌 감히 자기의 강하고 안하는 것을 품의합니까. 행동에 근거가 없어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랐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9일 무진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이합(李柙)을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0일 기사
어영청이 아뢰기를,
"본청의 군졸없는 장관(將官)의 수가 매우 많아 한갓 나라 곡식만을 소비하고 있다 하여 해청으로 하여금 품처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상경하여 돌아가며 번을 서는 수를 1천 수백 명으로 정하였는데 이 군졸을 거느리는 이 외에 두 부(部)의 장관을 50명 설치하였으니, 과연 남는 정원인 듯합니다. 그러나 당초 정할 때는 만일 본청의 군병을 징발하여 쓸 경우 임시로 마련해 갖춘 장관으로는 필시 궁색할 염려가 있을까봐 다섯 부의 초관(哨官)을 비록 다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그중 두 부는 정제하여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경비를 잇댈 수가 없을 것을 염려하여 단지 보군(步軍) 초관 10명과 마병(馬兵) 초관 1명에 대해서만 호조에서 급료를 주고 그 나머지는 본청에서 달마다 요포(料布)를 줍니다. 군졸이 없는 초관의 설치에는 실로 의도가 있는 것이고 또 탁지(度支)의 경비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루 아침에 전부 줄여버린다면 환란을 염려하는 도리에 또한 어긋납니다. 한 부의 장관은 지금 우선 궐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말다가 군병의 상번(上番)이 복구된 후 다시 품처하기로 하고, 한 부의 초관은 그대로 요포를 지급하여 예기치 않은 쓰임새에 대비하게 하는 정도는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훈련 도감에서 아뢰었다.
"성상께서 군졸들을 매우 생각하시어 응당 혁파해 보낼 부류에 대해서 요포(料布)를 주어 보내시기까지 하였으니, 저 무리들이 감읍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돌아가기를 자원한 자가 2백 48명, 그대로 남기를 원한 자가 43명이었고, 합하여 계산해서 줄어든 수가 천총(千摠) 이하 장관(將官)이 13명, 군병(軍兵)이 8백 78명입니다."
사간 박지(朴贄),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기아의 급함은 보릿고개 이후에 더욱 심하였는데 경기 백성 중에 그래도 살아남은 자가 있는 것은 실로 접때 7천 석의 곡물을 나누어 준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덕의(德意)가 미친 바에 누군들 감복하여 떠받들고 송축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추수가 멀지 않아서 수수·조가 점점 익어가므로 산골짜기 백성은 이삭을 따고 나락을 훑어 혹 죽을 쑬 밑거리로 삼을 수 있으나, 바닷가 여러 고을에는 수수·조도 없는데다가 벼가 익을 때도 아직 멀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굶주림에 괴로워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한 해를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때에 다시 몇 말이나 몇 되의 곡물을 얻는다면 가을 곡식이 익을 때를 기다릴 수 있고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호조의 콩 수천 석을 내어 구제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분부하더라도 필시 이달 안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고 내달이 되면 온갖 곡식이 속속 익어갈 것입니다. 8월 초기에 나누어 주는 것은 급한 것을 구제하는 방도가 아닐 듯하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임기가 찬 수령을 올해에 한하여 유임시킨다는 것은 대개 각 고을에서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는 폐단을 염려해서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내년 봄 진휼의 정사는 예년에 비해 더욱 심할 것인데, 올 겨울에 갈릴 관원은 필시 내년 봄 일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고 내년 봄에 부임할 관원은 새로 도임하여 손이 뜰 것이므로 형편상 일을 처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 곡식이 성숙한 뒤에는,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는 데 대한 폐단도 봄·여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니, 임기가 찬 수령은 모두 가을 곡식이 성숙한 뒤에 교체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유임시킨 자는 교체하고, 올 가을에 임기가 차는 자는 모두 내년 보릿가을까지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궁금(宮禁)을 수직(守直)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므로 도망간 군사에 대한 처벌의 법이 매우 엄한데도 불구하고 올 7, 8월 두 달에 대궐을 수직하는 군사로 도망간 수가 거의 1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다 외방에서 상번한 자인데, 남의 집에 기숙하다가 양식이 떨어져 스스로 살아갈 수 없게 되자, 심지어 이런 죽을 생각을 하고 달아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정상을 논하면 매우 불쌍하기는 하나, 굶주림을 핑계로 제멋대로 달아나게 버려둔다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해조를 시켜 조사해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에 달아난 군사들은 매우 어리석기는 하나, 달아난 군사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그들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이 짓을 어찌 즐거워서 하였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보면 기숙하며 굶주리는 정상은 모두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달아나지 않으면 형세상 반드시 굶어 죽게 되어 있으니 그 가엾은 것이 어찌 일반 백성뿐이겠습니까. 당초에 향군(鄕軍)으로서 입번(立番)을 자원한 자가 2백 명에 가까웠는데 도망가거나 죽은 자를 제외하면 지금 남아 있는 자가 40명도 채 못됩니다. 진휼청을 시켜 날마다 됫쌀을 주어 연명하여 번 서는 기한을 마칠 수 있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 인사들의 삭료(朔料)를 시기에 앞서 나누어 준 것은 실로 가난한 걱정을 염려하신 것입니다마는, 약간의 무록관(無祿官)에게는 두어 필의 무명만 주었을 뿐입니다. 여느 때에는 녹과(祿科)에 한정이 있어 녹을 줄 수는 없었지만 이번에 봉료(俸料)를 준 뒤에는 이서(吏胥)와 같은 천한 자도 봉료를 받았는데, 관직이 있는 사람이 봉료를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해조를 시켜 일체로 봉료를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대신이 무록관에게 봉료를 주는 것은 조종조에서 행하지 않은 법이므로 이제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그 일이 중지되고 말았다. 또 아뢰기를,
"충청 병사 이필(李泌)은 일찍이 기해년009) 국상 3년 동안에 해미영장(海美營將)으로서 순행 차 아산현(牙山縣)에 이르러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였는데 그 기생은 본현의 사인(士人) 신인립(愼仁立)의 여종이었습니다. 신인립이 놀라움과 분함을 금치 못하여 그 여종을 매우 치고 악기(樂器)를 부숴버렸기에 도리에 어긋난 이필의 행실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벼슬길을 타고 병마 절도사의 직임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그 뒤에 탑전에서 연이어 아뢰니, 특별히 명하여 나문하게 하였는데 형을 받고 정배(定配)되었다.
7월 21일 경오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에서 벼락이 객사(客舍)의 기둥을 쳤다.
경상도 경주(慶州) 등 십여 고을이 가물었다.
사간 박지(朴贄) 등이 아뢰기를,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정완(李挺完)은 조곡(糶穀)을 많이 내어 사사로이 은(銀)을 사서 이웃 고을에다 전장(田庄)을 샀고, 선혜청(宣惠廳)에서 지급한 쇄마 가미(刷馬價米)를 다 사적인 용도로 돌려 쓰고 여러 가지 쇄마를 백성에게 내라고 요구하였으므로 온 경내가 원망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2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3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일찍이 성상의 분부로 인하여 무릇 줄일 수 있는 물건들을 신들이 상의하여 별단(別單)으로 기록하여 올립니다. 살펴 보신 후 적당히 조처하소서."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각기 줄일 내용을 가지고 품의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줄인 물건의 종류도 아울러 그대로 줄이라. 이외에 줄일 만한 물건을 다시 기록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제향 때에 비단과 모시로 만든 꽃[床花]은 비록 처음 시작할 때의 본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불가(佛家)의 공양과 비슷하니 예전(禮典)에 실릴 대상도 아니고 사치한 비용도 적지 않습니다. 보통 때라고 하더라도 없애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응당 감하는 대상에 들어가야 한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성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릇 줄일 수 있는 방법이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 한다. 각도에서 내궁방(內弓房)에 들이는 소심줄의 활시위줄 등과 호랑이 표범 가죽을 내년까지 임시로 감하라. 양 자전(慈殿)에 올리는 종이는 지난해의 예에 따라 품목을 줄이고, 대전과 세자궁은 전액 감하며, 상방(尙房)의 초피(貂皮) 또한 전액 감하라. 줄일 내용 중 종친부의 납약(臘藥)은 품계가 높은 종재(宗宰)는 이것이 아니면 얻어 쓸 수 없으니 그 반만 감하고, 사도시(司䆃寺) 어공(御供) 중 쌀 10석과 멥쌀 5석은 모두 감하라. 양 자전에 진상하는 여러 명절의 각종 떡은 진어(進御)의 물건이 아니고 형식적인 조항 같으니, 내년 가을까지 임시로 줄이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서울 에 있는 대신은 비록 숙사(肅謝)하지 않았더라도 만약 녹을 받지 않았다면 창고 관리가 본조에 보고하여 수송하기를 알리는 것이 하나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우의정 송시열은 외방에 있기 때문에 본조에서 미처 품달하지 못했으니 사체가 미안합니다. 예전에는 외방에 있는 대신에게 본도의 전세(田稅)를 가지고 녹봉을 계산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수송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경상 병사 정영(鄭韺)은 사람됨이 용렬하므로 본디 군사를 거느릴 재목이 아닙니다. 도임한 뒤로는 정사를 하급 관리에게 맡겼고 도내의 보고서는 대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의례적으로 쓰는 것이라 하여 병영의 구실아치가 뜻대로 써보냅니다. 성질도 탐욕스러워서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였습니다. 군졸을 수탈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차고 집이 관아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어 짐바리가 이어지고 있다 합니다. 그대로 두어 군사의 마음을 거듭 잃어서는 안 되겠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석성 현감(石城縣監) 이진(李晋)이 행한 더럽고 잗단 일들은 하나 뿐만이 아닙니다. 아동(衙童) 두어 사람이 각각 푸주를 세워 장사하여 이익을 꾀하고 모두 관아로 들여옵니다.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소문을 들은 자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토산 현감(免山縣監) 임가재(林可材)는 임소에 도착한 이후 오로지 탐오를 일삼고 경내에 굶어 죽은 시체가 많은데도 진휼하여 살릴 줄을 모릅니다. 관속(官屬)의 이름을 빌려 꾸어주는 쌀을 많이 내어 관아 안으로 들였다가 비싼 때를 타서 팔기 때문에 관아에 시장처럼 사람이 모입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경원(慶源) 등 고을에서 소와 가축이 벼락에 맞아 많이 죽었다.
도성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가 5백 5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자를 보고한 것이 도합 6천 4백여 인이며, 경상도에서 조사한 것에 따라 아뢴 수가 또한 3천 6백 50여 인이었다.
7월 24일 계유
이연년(李延年)·김만균(金萬均)을 승지로, 윤진(尹搢)을 수찬으로, 민점(閔點)을 발탁하여 평안 병사로, 유비연(柳斐然)을 충청 병사로, 이시정(李時挺)을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승지 이단하(李端夏)가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에게 가서 전유하였는데 송시열이 또 병이 위독하다 하고 오지 않았다.
7월 25일 갑술
전라도에서 6월 초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3천 5백 34명이었고 굶주려 죽은 백성이 7백 25명이었고, 함평(咸平) 등 고을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1백 47두였다.
진선 윤증(尹拯)이 상소한 대략에,
"신이 부상(父喪) 중에 있던 처음에 도신이 전지를 받들어 상수(喪需)를 실어보냈고, 해조는 전례대로 아뢰어 부포(賻布)를 별도로 보내왔습니다. 심지어 애도하는 하교를 탑전에서 여러 차례 내리시었고 특별히 장사 전에 시호의 은전을 내려주셨습니다. 신의 아비는 뜻을 지키는 것으로 몸을 마쳤는데 성스런 조정에서는 변함없이 예우하니, 슬픔과 영광이 함께 이르른 것이 고금에 드문 일입니다. 하찮은 목숨이 구차히 연명한다고 생각지 않으시어 다시금 거두어 쓰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마땅히 서울로 급히 달려가 신하의 정성을 조금이라도 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애도하며 생각건대, 신이 종전에 당한 아비 상은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반평생을 은거하여 사류에 감히 끼지 못하고 재주 없고 쓸모없는 실상을 스스로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기에 당세에 대한 생각을 끊고 묻혀사는 것을 달게 여겼습니다. 지난해 봄 덕음(德音)을 거듭 받잡고 감히 상소 하나로 외람되게 신의 정을 진달하였으니, 천감(天鑑)이 매우 밝으신 터에 통촉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고, 이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상이 허락하지 않고 되도록 빨리 올라와 직무를 보도록 하였다.
7월 26일 을해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부교리로 삼았다.
제주로 들여보낸 종자용 곡식을 실은 배 15척이 한꺼번에 풍랑에 표류하였다. 그 뒤에 11척은 표류하여 바닷가 여러 고을에 닿았고 2척은 제주에 도달하였으나, 2척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다시 신칙하여 찾게 하였다.
우부승지 이단하(李端夏)가 연로(沿路)에서 본 바에 따라 상소하여 폐단을 아뢰고, 지평 윤가적(尹嘉績)도 시폐(時弊)에 대해 소를 올리니, 상이 모두 도타이 답하고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사간 박지(朴贄), 헌납 민종도(閔宗道),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사복시의 마초가(馬草價)가 너무 지나치니, 본시와 해청을 시켜 내년 가을까지 적당히 줄이게 하소서. 그 밖에 각사의 공물 가미(貢物價米)가 지나치게 많은 곳도 마찬가지로 변통하소서."
하였다. 또 각사의 관원이 공물 하인(貢物下人)을 부리는 폐단을 논하여 공물 각사(貢物各司)의 제조와 당상을 시켜 엄히 금단하게 하되 만일 예전 버릇을 그대로 계속할 경우에는 낱낱이 적발하여 논죄하기를 청하니, 상이 다 따랐다.
경상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2천 6백 92명이었다.
장령 정화제(鄭華齊)가 외방에서 병으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7월 27일 병자
집의 이하(李夏), 지평 유하익(兪夏益)이 아뢰기를,
"전 해운 판관(海運判官) 이광적(李光迪)은 각창(各倉)에서 으레 바치는 구가(丘價)에 대해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한 단(端)의 무명을 쌀 두 섬으로 쳐 놓고는 미처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그 직임에서 체차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친하고 믿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을 보내어 각창에서 거두어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징할 즈음에 정도에 지나친 일이 많이 있었으며, 가난한 조졸(漕卒)이 한꺼번에 장만하여 바치지 못하자 도리어 김씨가 훔쳐 먹었는가 의심하고 형조에 정장(呈狀)하여 그 수량을 독촉해 거두어들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깨끗하고 밝은 조정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시종(侍從)으로 출입한 신하가 이런 놀라운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아산(牙山)에 정배된 죄인 박형(朴泂)은 큰 장죄를 범하였으므로 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데도 서쪽 변방에서 가까운 내지(內地)로 유배지를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악행을 고치지 않고 방자하게 의롭지 못한 짓을 하였습니다. 마음대로 유배지를 떠나 안성(安城)에 오래 있으면서 전장(田庄)을 장만하고 집을 짓고 주민을 부렸으니, 국법을 업신여기고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정상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법에 따라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박형은 그때 마침 죽었으므로 벌을 받지 않았다.
강화부에서 이달 20일에 큰바람이 불어 곡식을 손상하였다.
원양도(原襄道)에 장마가 져서 곡식을 손상하였다.
평안도에 풍재(風災)가 있었다.
충청도에 큰물이 져서 부여 등 고을에서 빠져 죽고 눌려 죽은 자가 38인이었다.
7월 28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에 장마가 져서 곡식을 손상하였다.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이 13만 2천 8백 97인이었고 죽은 자가 3백 72인이었다.
장령 강여호(姜汝㦿)가 외방에 있으면서 병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7월 29일 무인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이합(李柙)을 겸사서로, 이숙(李䎘)을 승지로, 신정을 집의로, 이하(李夏)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지평 유하익(兪夏益)이 법을 적용하는 공사에 잘 살피지 못한 실수가 있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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