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도 내에서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형이 아우를 죽인 자가 다섯 사람이나 되어 윤기(倫紀)가 끊어지고 있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다.
9월 3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하(李夏)를 부교리로, 이상경(李尙敬)을 북병사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서울 안에 나누어 준 대출미의 수가 2만여 석입니다. 지금의 형세로는 모두 받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은과 베로 대신 납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 도성의 전후 대출미를 거두어 들이는 조처는 비록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기근 끝이라 모곡(耗穀)까지 아울러 징수하기는 결단코 어렵다. 그 모곡을 특별히 감하여 도성 백성들의 조그마한 혜택이 되도록 하라. 또 기전(畿甸)의 대출미 또한 원수대로 받기 어렵다. 신구를 막론하고, 나누어 준 원장부 상의 곡식과 이전해온 각종 곡식 중 원수 내에서 모두 절반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조정에서 이와 같이 작정한 후 수령이 만약 절반의 수치에 준하지 않는 경우 중한 견책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별도 엄칙하라. 또 납부를 마친 후 경관(京官)을 보내 적간하여 허위로 기록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기읍(畿邑)의 이전한 곡식에 대해서는 비록 절반으로 거두어 들인다 하더라도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경우 토착민이 받은 것은 원수대로 걷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후 지평 정유악이 아뢰기를,
"경기 내의 여러 종류 국곡(國穀)에 대해서는 이미 모두 절반으로 거두어 들이면서 유독 광주(廣州)와 강화(江華)에 대해서만 원수대로 납부하게 하니, 한 가지로 돌보는 정사에 있어서 이미 공평하게 하는 도리를 잃었습니다. 또 이 두 곳은 모두 나라를 막아주는 중요한 지역입니다. 만약 그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하지 못한다면 깊이 생각해주고 후하게 돌보아주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청컨대 일체 절반으로 거두어들이소서."
하며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강도와 남한은 형세가 같지 않습니다. 강도에 나누어 준 수는 2만 석에 불과합니다. 지난해 납부케 한 것도 오히려 3분의 2를 넘었습니다. 강도의 대출미는 결코 절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남한에서 납부해야 할 쌀은 6만 7천여 석입니다. 지금 둘레에 있는 이웃의 모든 마을은 절반으로 하는데 유독 광주에서만 원수대로 납부케 한다면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반드시 닥칠 형편입니다."
하고, 정치화도 아뢰기를 ‘광주에서 원수대로 납부하기가 과연 어렵다.’고 하면서 이어 남한의 대출미 중 신구를 합하여 절반으로 거두어 들이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4일 임자
영의정 허적이 사직하는 글을 일곱 번이나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출사토록 전유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9월 6일 갑인
헌부가 사족(士族)인 홍씨(洪氏) 집에서 시체 7구를 묻지 못하였는데 부관(部官)이 해부에 보고하지 않아 휼전(恤典) 가운데에서 누락되게 하였다 하여 당해 부관을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고 이어서 해조에 명하여 특별히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9월 7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전후의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 경이 이토록 사양하니, 내 매우 부끄럽다. 아아, 지금이 정말 어떤 때인가. 구덩이에 굴러 죽은 백성이 몇천 몇만 명인지 모르니, 마음이 매우 슬퍼서 참으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다. 논밭에 벼나 곡식을 심지 못하고 갈지도 못하고 있으니 장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형편에 놓여 있다. 믿는 것은 오직 경뿐인데, 경은 어찌 차마 한가로이 살려고 한단 말인가. 더구나 내가 걱정으로 애태우다가 병이 났으니, 정기(精氣)나 심신(心神)이 어찌 평소와 같겠는가. 믿는 것은 오직 경인데, 경은 어찌하여 헤아리지 못하는가. 좌상은 머지 않아 국외로 나갈 것이고, 경은 조섭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나와서 정치의 방도를 논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큰 우레와 같아 담벽과 집이 무너질 듯하였다. 면천(沔川) 등 열여덟 고을에서 같은 날에 지진이 있었다.
9월 8일 병진
도성 안 여염집의 살구나무에 꽃이 많이 피어 찬란하였는데 마치 봄과 같았다.
우의정 송시열이 병이 있어 체직을 비는 상소를 고향에서 진달하고, 월름을 사양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올라 오도록 전유하고 어의를 보내 간병하게 하였으며, 월름은 다시 수송하도록 하였다.
9월 9일 정사
홍주국(洪柱國)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집의 신정(申晸),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헌(吳斗憲)·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광릉 참봉(光陵參奉) 황숙구(黃淑龜)는 자기 누이동생과 자그마한 일을 가지고 점점 틈이 벌어져 자기 동기간 보기를 길가는 사람과 다름 없이 하였습니다. 그간 의를 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심지어는 그 어미로 하여금 모녀의 정을 펼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패륜한 사람을 사대부 반열에 놔둘 수 없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지금 가을 농사는 이미 끝났으나 도성의 굶주림은 갈수록 더욱 심하여 여염의 백성들이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대여한 곡식을 이제 한꺼번에 거두어들이려 하고, 또 진휼청에서는 한결같이 본색(本色)으로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시장 쌀값이 갑자기 올라서 백성들이 황급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합니다. 국가가 염려하고 돌보는 도리에 있어서 변통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해청(該廳)을 시켜 녹을 먹는 조정 인사의 집 이외는 모두 경기의 환자(還上) 예에 따라 반만 거두어들이게 하거나 은(銀)이나 베로 값을 쳐서 장만하여 바치게 하여 매우 다급한 도성 백성들의 형편을 늦추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에게 전후로 대여한 국곡이 무려 2만 6천 5백여 석이나 되는데 만일 빨리 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도리어 포흠이 되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또 모곡(耗穀) 2천 6백 50여 석을 특별히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입은 혜택이 또한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반만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일의 형세상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끝내 쌀로 장만하여 바치기 어려운 자는 혹 은과 베로 값을 쳐서 대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다가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 팔도 가운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여 살아남은 백성이 의지하여 살아갈 수 없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제때에 어루만져 주더라도 부지하기를 바라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여러 가지 역(役)이 여느 해에 비해 준 것이 없고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아울러 거두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조는 이미 백성의 신망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여했던 곡식을 이제 또 줄이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고혈(膏血)이 이미 다하여 살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경기도에 대여해 준 곡식을 이미 반으로 감해 주었으니 삼남만 달리하는 것은,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아닙니다. 삼남의 환자(還上)도 한결같이 경기의 예에 따라 절반만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상이 또 묘당을 시켜 품처하라고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에 나누어 준 것은 무려 22만여 석이나 되어 원수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절반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만, 다른 도는 이에 비추어 예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나 삼남은 재난을 입은 고을이 또한 없지 않으니, 구별하여 헤아려 감하는 일이 설혹 있다면 반드시 도신이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한 다음에야 헤아려 조처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9월 11일 기미
평안도 영원(寧遠) 등의 고을에 8월 27일에 눈이 내리고 가산(嘉山) 등의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다.
9월 12일 경신
경기·삼남(三南)·원양(原襄) 등 도의 지난해 전세(田稅)의 반은 시기를 뒤로 물려서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의논이 전에 없던 큰 기근 끝에 두 해의 전세를 아울러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감면하자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지금 민간의 형세로는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받아들이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지난해의 전세중 반을 물려서 받아들이게 하면 백성의 힘을 조금이나마 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상의 뜻도 이것을 옳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바로 그러하다."
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렸다.
영의정 허적이 열한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인심과 세도가 이미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박한 의논을 어찌 마음에 둘 것이 있겠는가.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바라는 나의 희망은 마치 목마른 자가 마시고 싶어하는 것과 같다. 경은 어찌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가. 속히 나와 도를 논하여 상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좌의정 정치화, 병조 판서 민정중, 훈련대장 유혁연이 청대하니,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치화가 아뢰기를,
"제주 어사(濟州御史)가 지금 내려가려 합니다. 본 제주의 공부(貢賦), 요역을 모두 견감하고 면포와 보리 씨앗도 특별히 나누어 주도록 하였으니, 이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만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다른 조처가 있은 다음에야 인심을 부추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무과 과거 응시자들을 모두 시재(試才)하여 오도록 하되, 어사가 조정을 떠나는 날 대제학을 명초하여 시험 제목을 써넣도록 하며, 무과 응시자의 시재 방법은 병조로 하여금 써넣도록 하라."
하였다. 치화가 또 아뢰기를,
"올해에 기근과 여역으로 사망한 자가 여기저기 쌓였습니다. 수레에 실어 내갔으나 멀리 묻을 수가 없어 도성 사방 십리 내에 풀무덤이 널려 있습니다. 해골에 주인이 없고 끌어다 묻을 사람도 없습니다. 먼 곳으로 파서 옮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을 승인(僧人) 중에 혹 담당하기를 자원하는 자가 있다면 불과 승인 2백여 명의 열흘치 일거리라 합니다. 이장할 만한 일가붙이가 있는 자는 표를 세우게 하고, 그 이외에 주인이 없는 시체에 대해서는 경기 지방의 승인 2백 명을 뽑아 모두 파 옮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치화가 또 아뢰기를,
"차왜(差倭)가 억지를 부릴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바입니다. 앞에 온 자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는데 뒤에 올 자가 또 잇댄다면 왕래하는 사이에 감당키 어려운 폐단이 많을 것입니다. 왜관을 옮기는 청에 대해 만약 사정이 어려워진 다음에 허락한다면 폐단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하고, 정중이 아뢰기를,
"왜관을 옮기는 일로 인해 반드시 양국이 틈이 생기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들어준다면 약함을 보이는 것에 가까우니, 가벼이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치화가 또 아뢰기를,
"전라 감사의 장계를 얻어 보니, 금산(錦山)의 도적은 42명이고, 전주(全州)의 도적은 18명입니다. 인명을 살상한 일은 없고 한 되 한 말의 밀 보리를 훔쳐 먹은 것에 불과한데, 주륙하기를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만약 모두 주륙한다면 살리기를 좋아하는 도리에 손상되어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한 후 단지 그 두목만 주륙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9월 13일 신유
원양 감사(原襄監司) 김익경(金益炅)이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허질(許秩)이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加資)하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박재(朴材), 홍천 현감(洪川縣監) 황윤(黃玧), 평강 현감(平康縣監) 조이후(趙爾後), 횡성 현감(橫城縣監) 송광순(宋光洵) 등에게는 모두 표리(表裏)를 내렸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홍처후(洪處厚)도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였다. 정평 부사(定平府使) 권숙(權諔)이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고, 북청 판관(北靑判官) 이순선(李循先)에게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면직을 비는 차자를 아뢰니,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하였다.
9월 14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암행 어사 김만중(金萬重)·신정·이혜·조위봉(趙威鳳) 등을 나누어 보내 경기·삼남의 진휼의 잘잘못을 염찰하게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의 병이 위독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돌보게 하고 이어서 약물을 내렸다.
9월 15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헌(吳斗憲)·이수만(李壽曼)이 공사 문건을 입계하는 중에 일을 잘 살피지 못해 성상의 하교가 있게 되었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16일 갑자
부교리 이하(李夏)를 제주로 보내어 선유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제주 세 고을이 가장 심하게 기근이 들어 백성이 많이 죽었으므로 위로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이하를 선유 어사(宣諭御史)로 삼아 가서 선유하게 하였다. 그 선유하는 글의 대략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저 세 읍은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민중이 만여 호 살고 있으되 지역이 좁은 데다가, 푸른 파도 넘어 천리 길인데 배가 근근히 통할 뿐이다. 살아가기가 어렵고 정리가 막히는 것이 천하 백성 중 제일 심할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이러한 흉년을 만나 팔도의 민생이 살아 남은 자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섬 안의 지역은 또 전고에 없던 재난을 입었다. 태풍이 바다를 뒤집어 엎고 이어 짠 비를 만들어 풀 하나 나무 하나 말라 시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통 때 남해에는 눈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한 길이나 되는 눈은 또 어쩌자고 재앙을 만드는가. 온 섬의 생령들이 조석으로 죽어간다는 장계가 잇따라 들리니, 참혹함을 차마 듣지 못하겠다. 내 이를 불행히 여겨 아픔이 내 안에 있는 듯하다. 즉시 유사로 하여금 곡식을 재촉하여 배로 운반하고, 씨앗 곡식을 잇달아 수송하여 위급함에 달려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온 나라의 백성이 모두 진휼을 바라 보며 살아 가는데, 저축한 곡식이 이미 떨어지고 힘이 충분치 못하여 약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어찌 세 읍의 4만여 무리의 목숨을 두루 구제할 수 있겠는가. 내가 오직 덕이 없어 하늘에 죄를 얻어 재앙을 불러 와서 수많은 백성에 미치게 하였다. 수많은 백성 중 누군들 적자(赤字)가 아니리오마는, 오직 너희 해도(海島)의 백성들은 더욱 마음 아픈 자들이다.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다가, 지금에 이르러 곤고함이 여느 백성들보다 더하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이 매우 많아서 살 방도가 조금밖에 없는 자에 대해서는 그래도 근심을 잊지만 기댈 곳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마음에 더욱 연연하여 잊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차자로 진달하기를, 그 조부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신축년016) 에 어사로 본도(本島)에 가서 선유할 때에 선묘(宣廟)가 특별히 명하여 한라산(漢拏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따로 사목을 만들어 보냈으니 전례에 따라 그것을 행하라고 하였다. 이 일을 비국에 내려서 응당 거행해야 할 절목 17조(條)를 작정하였다. 세 고을 백성에게 무명 4천 필과 보리 종자 2천 섬을 내리고, 진상하는 토산물과 제사(諸司)의 상공(常貢)과 내사(內司) 및 각사(各司)의 노비신공(奴婢身貢)도 감면해주고, 또 유생·무사를 모아 시재(試才)하여 급제를 내려 고무하였다. 이어서 백성의 죽음을 위문하고 백성의 고통을 묻고 아울러 민간에서 효우(孝友)·절행(節行)이 특별히 나타난 자를 찾아서 정표(旌表)하고 발탁하여 임용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고, 또 바닷가 고을에 쌀 30석을 주어 노인에게 잔치를 베풀 거리로 삼게 하였다.
홍처대(洪處大)를 예조 참의로, 정적(鄭樻)을 장령으로, 정유악(鄭維岳)·윤가적(尹嘉績)을 지평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정언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수찬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사서로, 이훤(李藼)을 겸사서로, 남이성(南二星)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9월 17일 을축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생각하는 바를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명을 대하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고, 애통하게 여기는 교서를 빨리 내려 민심을 위로하며, 무릇 사랑하고 돌보는 정사를 행하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소서. 이욕(理欲)의 큰 한계를 밝히고 인심의 향배(向背)를 알고 자신의 공사(公私)를 가리고 뭇 신하의 사정(邪正)을 살펴서, 한결같은 뜻으로 오래 지속하여 게을리하지 않으신다면, 상제와 귀신이 위엄과 노여움을 도로 거두어 뭇 백성이 다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봄 여름 사이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올해의 농사는 갈지도 못하고 김매지도 못하였으니, 내년 봄의 걱정거리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오직 경들이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있는데, 성의가 천박하여 멀리 떨어진 마음을 돌리지 못하니, 참으로 매우 부끄러워서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소 가운데 나라를 위하는 데 애쓰는 뜻과 구구절절 경계를 아뢴 말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온 지극한 정성이니 매우 감복한다. 반드시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올라와야 한다. 본직의 사양에 대해서는 이제 우선 애써 따르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9월 18일 병인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교리 윤경교(尹敬敎), 부수찬 홍주국(洪柱國) 등이 상차하여 경술년017) 의 전세와 각년(各年)의 못 거둔 군포(軍布)·신공(身貢)을 죄다 감면하고, 또 도성 백성에게 대여한 곡식을 반으로 줄여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옛사람이 학문을 논할 적에 다만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말미암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덕성을 높이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기르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고, 학문을 말미암는 것은 학문을 강론하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에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움직임에 법이 있고 말에 가르침이 있고 낮에 하는 것이 있고, 밤에 얻는 것이 있고, 숨쉴 때에 기르는 것이 있고 눈깜짝할 때에도 지키는 것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덕성을 높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이(程頣)가 말하기를 ‘오늘 한 가지 일을 연구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연구하여 오래도록 쌓아 익히면 자연히 도리를 잘 알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학문을 말미암은 공효입니다. 또한 성인018) 의 지기(志氣)를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 없지마는, 조섭하다 무료할 때에 이목을 즐겁게 하고 심지를 기쁘게 하는 것을 들이게 하신다면, 이는 마음을 갉아 먹는 나방 벌레이니, 더욱 깊이 경계할 부분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여 말을 다하는 정성을 내 매우 감탄하였다. 차자 가운데에 말한 일은 묘당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끝에 경계한 말은 더욱 아름답게 여겼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9월 19일 정묘
좌부승지 이숙(李䎘)이 아뢰었다.
"신이 명을 받들고 우의정 송시열에게 가 전유하였더니, 아뢰기를 ‘신이 죽고 사는 것이 눈앞에 있으니 떠나고 나아가는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외람되게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대하니 땅에 엎드려 목소리를 삼킬 뿐이다. 신이 바야흐로 내려 보내주신 의약품을 가지고 날마다 달여먹고 있으니 성은의 덕택으로 생의를 회복할 수 있다면, 비록 나아가 융숭한 은혜에 감사드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글로써 두려워하는 충정을 모조리 드러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9월 20일 무진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장선징을 대사헌으로, 이지무(李枝茂)·최관(崔寬)을 승지로, 이훤을 부교리로 삼았다.
9월 21일 기사
영의정 허적이 15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 전유하였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최상익(崔商翼)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역사에 없던 것으로 팔도의 백성이 뿔뿔이 흩어져 죽은 자가 몇천 몇만 사람인지 모릅니다. 올해 각도의 농사는 혹 조금 여문 곳이 있으나 기근과 여역 때문에 갈지도 못하고 김매지도 못한 데가 대부분입니다. 밭곡식에 있어서는 대부분 여물지 않아 통틀어 말하더라도 다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삼남이 더욱 심합니다. 지난해의 전세는 반을 물려서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 밖의 요역도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백성의 힘이 결코 원수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나라의 저축이 바닥이 나서 경비가 절박하다는 것을 신들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민간에서는 다들 흩어지려고 하니, 흩어져서 끝내 거두어들이지 못할 바에야 일찌감치 은혜로운 뜻을 펴서 너그러이 돌보는 정사를 쾌히 베푸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또 신역(身役)의 명단만 있고 죽은 무리의 수가 매우 많으니, 이웃이나 겨레붙이에게 대신 징수하여 원망을 더 사게 해서는 더욱 안 되겠습니다. 삼남의 지난해 전세와 각종 군병(軍兵)과 각사(各司)의 노비와 장인 등에게 못 거둔 각해의 신역은 특별히 감면해 주고, 각도에 신역의 명단만 있는 죽은 무리에 대해서도 도신(道臣)을 시켜 분명히 살펴서 아뢰게 하여 낱낱이 감면해 주어서 이웃이나 겨레붙이에게 대신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익상 등이 경기·원양(原襄)을 계사 중에서 거론하지 않았다고 인피한 후에 그 내용을 더 넣어서 연이어 아뢰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그 뒤 등대할 때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왕에 못 거둔 것은 지난해에 이미 받아들이지 말게 하였거니와, 신역의 명단만 있는 죽은 자를 살펴내어 신역을 감면해주자는 것은 그 말이 참으로 옳으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기유년019) 이전의 것은 다 탕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올해 진휼할 때 죽소(粥所)에 나온 주린 백성들에게 농절기에 양식미를 보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상 지급한 것으로 계산하여 감해주기도 하고 혹은 대출미로 장부에 올리기도 하였으니, 공평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많습니다. 경외에서 대출미를 지급한 집 중에는 전 집안이 사망한 경우도 또한 많습니다. 지금에 와서 반납할 때 보통 해에 의거하여 인족(隣族)을 침징한다면 겨우 살아남은 빈털털이 백성들이 결코 지탱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가긍하고 불쌍합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경외에 분부하여 양식으로 준 것과 대출미를 일일이 조사해 내어 무상 지급한 것으로 일체 시행하고, 전 집안이 사망한 경우 집집마다 지급한 대출미에 대해서도 모두 탕감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당 청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후일 등대할 때 양식을 받아 먹는 자에 대해 모두 무상으로 지급하는 일은 대신이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전 집안이 사망한 경우 대출미를 탕감하는 일은 대계(臺啓)에 의거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신이 진달하여, 상이 명하기를, 경외에서 사실대로 조사한 후 일체 탕감하여 인족을 침해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9월 23일 신미
영중추부사 이경석이 죽었다.
경석의 자는 상보(尙輔)이다. 집안에서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렴 검소하였다. 아랫관리에게 겸공하였고 옛 친구들에게 돈독하였다. 문형(文衡)을 잡고 태사(台司)020) 에 올라서는 나랏일을 근심하고 공무를 받드는 마음이 늙도록 해이해지지 않았다. 경인년021) 청나라가 성을 내어 말할 때에 수상으로서 앞장서서 일을 맡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 조정의 대신으로서 은혜와 예우가 시종 바뀌지 않았고 궤장 등 늙은 신하를 우대하는 은전을 입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겸손 순종함이 지나쳐 기풍과 절개에 흠이 있었으니, 이 때문에 하찮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9월 24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등이 아뢰기를,
"고을에서 소를 잡아 파는 것은 법에 어긋난 짓인데다 더구나 지금 우역으로 소가 거의 다 죽었으니, 기근 끝에 백성이 경작할 희망이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계청(啓請)하여 점포를 설치한 것은 본디 진휼거리를 위해서이지만, 폐단이 점점 더 퍼져 도살을 마구 하고 있으므로 남아 있는 소도 다 푸주로 끌려 갑니다. 사소한 이익은 한갓 아전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그 미치는 해악은 비루하고 잗달은 것뿐만이 아니니 경기 각 고을의 점포를 낱낱이 금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허적이 네 번째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병을 내가 모르지 않지만 줄곧 도타이 권면하는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는가. 지금 정승 자리가 빈 것은 참으로 경의 말과 같거니와, 걱정스럽고 경황이 없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부사는 【이경석(李景奭)이다.】 원로 대신으로서 국가에서 중시하고 있는데 뜻밖에 상을 당했으니, 내 매우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아, 국운이 불행하여 원로 대신과 재상을 몇 사람 잃었으니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면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경은 내 뜻을 몸받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허적이 정고(呈告)한 뒤로 상이 여러 번 승지를 보내어 출사하도록 돈유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또 사관을 시켜 전유하니, 허적이 드디어 출사하였다.
9월 25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목성을 범하였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무릇 바깥에 있는 대간(臺諫)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유하기를 청하여 감히 하루도 지체하지 않는 것은 사체를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접때 지평 윤가적(尹嘉績)에게 하유하기를 청한 계본(啓本)을 헌납 최상익(崔商翼)이 대궐에 나아가기 귀찮아 나흘 동안 그대로 두어 같은 관료들이 출사하고 다른 계사(啓辭)가 있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비로소 편의에 따라 계청하였으니, 사체를 업신여기고 대각의 규례를 어지럽힌 것이 심합니다. 체차하소서.
근일 관리가 국법을 따르지 않은 채 자기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가두거나 벌주고 있으니 법관은 이런 것들을 엄히 금하여 국가에서 돌보는 뜻을 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령 정적(鄭樻)은 출사하기도 전에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가두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죄가 있고 없고는 차치하고라도 아직 출사하지도 않은 법관이 사사로이 사람을 가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차왜(差倭)가 동래로 온 뒤로는 왜관(倭館)의 왜인이 줄지어 오가며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다. 혹 문을 지키는 병졸이 꾸짖어 금한다고 노하기도 하고 찬거리가 약소하다고 노하기도 하여, 손으로 때리지 않으면 대뜸 칼을 뽑기까지 하였다. 이달 17일에 왜관의 한 왜인이 어가미(漁價米)가 좋지 않은 것에 성을 내어 좌자촌(左自村) 앞까지 창고지기를 쫓아가서 칼을 뽑아 머리를 쳤다. 이에 부산 첨사 이연정(李延禎)이 곧 군관을 보내어 칼을 빼앗고 묶어서 왜관으로 보내고, 부사 정석(鄭晳)이 엄중히 처단하여 징계하라는 뜻으로 왜관의 왜인에게 말을 전하였더니, 답하기를 ‘자기의 일 때문에 칼을 뽑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가 물론 무겁겠으나, 이번에는 잡물(雜物)을 즉시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툰 것이었으니, 창고지기가 죽지 않았으면 실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 없다.’ 하였는데, 정석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창고지기가 죽지 않았더라도 칼을 뽑아 쳐서 상처를 입힌 죄는 마땅히 다스려야 하는데 다스리려 하지 않으니 정상이 매우 밉고 또한 뒤폐단에 관계됩니다. 차역(差譯)이 갈 때에 도주(島主)에게 말하여 엄중히 처단할 근거를 만드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6일 갑술
전라도 함열(咸悅) 등 스물여덟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9월 27일 을해
허적(許積)을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로, 홍처대(洪處大)를 승지로, 윤계·이상(李翔)을 장령으로, 이훤을 헌납으로, 김휘(金徽)를 황해 감사로 삼았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관아의 돈과 곡식을 장사치들에게 대여하여 이자를 받는 것으로 이득을 삼게 허락한 것은 국가에서 재물을 만드는 방법이 이미 아닙니다. 그런데 관리가 친한 사람이라는 사사로운 정에 끌리기도 하고, 간사하고 잗달은 무리들의 아첨에 유혹되기도 하여 저축한 것을 다 쓰면서도 조금도 아낀 적이 없습니다. 대여한 후에는 당사자가 도주하여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재산을 모두 날려 인족을 침해하면서까지 징수하지만 배상을 끝내 받아내지 못하기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보는 자들은 이익을 나누어 먹는가 의심하기도 합니다. 이는 비록 인정에 가깝지는 않지만 또한 관리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군사용으로 쓰이는 것을 가벼이 사용할 수 없음은 다른 아문의 돈과 곡식에 비해 더욱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훈련도감 제조였을 적에 양향은(糧餉銀) 3천 냥을 대여하라고 허락하였는데 대여한 지 1주년이 되었으나 조금도 갚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송사를 일으키고 의혹과 비방을 불러오고야 말았습니다. 벼슬살이를 삼가서 수행하는 경계를 따르지 못했음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설사 이익이 있고 손실이 없더라도,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저자거리에서나 하는 일을 하여 작은 이익을 꾀하는 것도 오히려 부끄러운 일인데, 하물며 손실이 있고 이익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각 아문에서 대여하고 이식을 얻는 일을 일체 금지하여, 백성에게서 이익을 꾀하다가 도리어 국가의 재정에 손해를 끼치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고 세 번 아뢰니,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뒷날 상이 허적에게 이 일에 대해 묻자 허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군문(軍門)은 달리 재물을 만들 방도가 없으므로 대여하여 이식을 얻는 방도는 전부터 있었습니다. 대여할 때에는 반드시 갚을 수 있는 사람을 고릅니다만, 인심이 간사하여 혹 거두어들이기 어려운 폐단이 있으니, 대신(臺臣)의 말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국가가 재물을 만드는 도리가 아니라고 한 말에 있어서는 신이 그 말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의 복계(覆啓)에 따라 모두 금지하게 하였으나, 군기시(軍器寺)에 대해서만은 본디 재물이 모자라고 이것에 의지하여 보태어 쓰는 것이 없지 않다 하여 그냥 두었다.
9월 30일 무인
고 정승 이경석(李景奭)에게 3년 동안 녹봉을 내리라고 명하고 또 해조를 시켜 제수(祭需)를 넉넉히 주게 하였다. 상이 일찍이 경연 중에서 하교하기를,
"당면한 일이 이와 같은데 원로 대신의 상을 또 만났으니, 그 놀랍고 애도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국가가 대단히 불행합니다. 듣건대, 그 집이 궁핍하다고 하니, 돌보아 주는 은전이 있어야 합당합니다."
하고,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경석은 살았을 때 지독히 청렴하였습니다. 죽은 후에 들으니 제사에 갖출 것도 마련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측은히 여겨 감동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었다.
도성 근처에 주인 없이 볏짚으로 장사지낸 주검을 교외 십리 밖에다 수습하여 묻게 하고, 측근의 신하를 보내 제단을 설치하고 아울러 제사하게 하였다.
이때 주리고 병들어 사망한 무리를 경성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다 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좌의정 정치화가 옮겨 묻자는 뜻을 일찍이 탑전에서 진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훈련 대장 유혁연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값을 받고 시체를 묻는 자 수십 명을 모집하여 관에서 대주는 승군(僧軍) 2백 명과 함께 힘을 합하여 옮겨 묻게 하며, 또 호조에서 저축한 망가진 면포를 가져다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쓰게 하니, 드디어 동·서·남 교외의 세 곳에서 수습하여 묻었다. 그 주인이 없는 주검이 모두 6천 9백 69구이고, 이외에 구덩이에 메꾸어져 있는 해골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또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이훤이 아뢰기를,
"중신(重臣)이 직접 성상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시신을 거두어 묻는 일을 맡아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자가 있고 없는 것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파내었기 때문에 아들이 아비의 주검을 잃어버리고 아내가 지아비의 주검을 잃어버린 것이 또한 많아서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비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파낼 즈음에 너무나 급하게 했기 때문에 시신의 친척이 갖가지로 애걸하였는데 역부(役夫)들이 뇌물을 받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하였다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일을 맡아서 한 신하는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으니 무겁게 추고하고, 그 가운데에서 친척이 있는 주검은 기한을 늦추어주어 거두어 묻게 함으로써 뒤섞여져 원한을 품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온성(穩城) 등 고을에 큰바람이 불고, 길주(吉州)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이달에 서울에서 병을 앓아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굶고 돌림병을 앓아 죽은 수를 보고한 것이 모두 1천 8백 4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범에게 물리거나 물에 빠지거나 도둑에게 살해되어 죽은 자도 많았다. 삼남(三南)과 경기·원양·황해 등 도에서 우역이 크게 치열하였는데 전염되어 죽은 소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백성이 경작할 기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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