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2년 1671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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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무신

충청도 어사 조위봉(趙威鳳)이 서계(書啓)하기를,
"목천 현감(木川縣監) 황휘(黃暉)는 유임한 뒤로 점점 처음보다 못하고, 평택 현감(平澤縣監) 이행하(李行夏)는 진휼의 정사에 마음을 다하고 자봉(自奉)은 간소하게 하였으며, 전 감사 이홍연(李弘淵)은 집이 청주(淸州)에 있는데 왕래하면서 폐단을 끼쳤습니다."
하니, 상이 황휘는 국가에서 유임시킨 뜻을 전혀 무시하였다 하여 특별히 나문하게 하고 이홍연은 추고하게 하고 이행하에게는 표리(表裏) 한 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경기 어사 김만중(金萬重)이 서계하기를,
"전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건(李騫), 전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무(洪茂) 등은 진휼의 정사를 신중히 보지 않았고,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원로(李元老)는 청렴하지 않다는 비방이 많이 있었습니다. 파주 목사 이보(李葆)는 직무를 신중히 보아서 칭찬이 높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 윤홍거(尹鴻擧)는 진휼의 정사와 치적이 모두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하니, 상이 이보는 진휼의 정사를 잘하여 자급(資級)을 높여 준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윤홍거에게만 표리 한 벌을 내렸다. 이건·홍무는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이원로도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김만중이 또 양천 현령(陽川縣令) 여안제(呂顔齊), 장단 부사(長湍府使) 정한기(鄭漢驥), 연서 찰방(延曙察訪) 안명로(安命老)가 원망을 사고 법을 어긴 정상에 대해 아뢰니, 상이 여안제 등은 추생(抽栍)된 지역이 아니므로 똑같이 죄를 논할 수 없다 하여 본도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사간 이합이 아뢰어 여안제 등 세 사람을 모두 나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자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일 기유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예조 참판 이만영(李晩榮), 사예 정적(鄭樻)을 청나라에 보내어 동지(冬至)·정조(正朝)를 축하하고 아울러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청나라 임금이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에게 사사로이 말한 일 때문이다. 상이 전송하느라 인견하였는데, 정치화가 아뢰기를,
"신이 지금 멀리 떠남에 걱정스러운 나랏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앞으로의 진휼 정사가 가장 급합니다. 그런데 들으니 근래 남쪽 소식 때문에 도성이 소란스러워 각 부류의 인심을 진정시킬 수 없을 것 같고, 그 사이에는 혹 난리를 생각하는 무리가 없지 않아 헛소문으로 선동하고 있다 합니다. 또 북도(北道)는 흉년이 더욱 심하여 진휼하여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혹 영남으로 옮겨갈 조를 옮기고 영동에 있는 것을 옮겨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적은 양이어서 두루 구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흩어지도록 내버려 둔다면 변경은 장차 텅비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고, 만약 금법을 엄히 세운다면 굶어 죽을 형편입니다. 이 일이 극히 난처하니, 성상께서 가장 진념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정치화가 또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옥후가 늘상 편치 않은 중에 계시므로 공사가 적체됨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인군이란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니 하루에도 만 가지 기미를 주관합니다. 진실로 정사에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데, 형옥 등의 일은 더욱 중요한 데 속합니다. 지금부터는 옥후가 조금 안정될 때에 무릇 공사에 관계된 것을 예전처럼 오래 적체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깊이 새겨두겠다."
하였다.

 

11월 4일 신해

민시중(閔蓍重)을 대사간으로, 이섬(李暹)을 헌납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총융사로 삼았다.

 

11월 5일 임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11월 6일 계축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에서 살구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11월 7일 갑인

날씨가 음침하여 대낮이 마치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사간 이혜가 박지(朴贄)를 잘못 논한 일을 가지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괴산 군수(槐山郡守) 김해(金垓)는 나이가 이미 늙었고 성정도 어리석어서 부임이래로 정사를 하급 관리에게 맡기어 날마다 쓰는 관청의 필수품을 받아들이는 대로 잃어버리는가 하면 또 진휼한 재물을 갈라다가 본군에서 토지를 널리 샀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9일 병진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윤계(尹堦)를 장령으로 삼았다. 홍처대(洪處大)를 발탁하여 호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특명으로 제수한 것이다.

 

충청도 대흥(大興) 땅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다 다리는027)   여덟이었으며 허리 아래부터는 몸이 둘이고 꼬리가 둘이었다.

 

11월 10일 정사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도내 수령 중에서 진휼을 잘한 자와 별도로 장만한 곡식이 많은 자들을 등급을 나누어 아뢰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조성(趙䃏)은 진휼을 잘한 자의 으뜸이었고 또 특별히 장만한 곡물이 무려 3천 40여 석이나 되었는데 가자(加資)하라 명하고 또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 다음은 진보 현감(眞寶縣監) 윤명우(尹明遇), 청도 군수(淸道郡守) 유비(兪柲), 영천 군수(永川郡守) 이휘조(李徽祚), 비안 현감(比安縣監) 이민도(李敏道)였는데 모두 가자하였고, 그 다음은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상정(李象鼎), 함양 군수(咸陽郡守) 남몽뢰(南夢賚)였는데 준직(準職)을 제수하였고, 그 다음은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관(李慣) 등 30명이었는데 승서(陞敍)하고, 각각 차등을 두어 말과 표리(表裏)를 내렸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경상도 예순아홉 고을을 반이 넘게 죽 적어서 상을 주기를 바랐으니 상세히 살펴서 분별하는 뜻이 자못 없습니다. 감사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곡물을 장만하고 진휼을 잘한 수령에게 넉넉히 포상하는 것은 본디 격려하려는 지극한 뜻입니다마는, 경상도 한 도내에서 상받은 수가 37명이나 되니, 너무나 지나칩니다. 일컬을 만하게 뚜렷이 나타난 자 이외는 상을 주라는 명을 모두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별도로 장만한 곡식의 수량이 적은 경우만을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청송 부사(靑松府使) 김정하(金鼎夏) 등 8명은 별도로 장만한 것이 5백 석이 못되었으므로 상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었다. 그 뒤에 장령 윤개(尹堦)와 지평 김환(金奐)·권기(權愭) 등이 굶주려 죽은 참상은 영남이 더욱 심하였는데 옥관자(玉貫子)의 상을 받은 자가 가장 많으므로 남녘의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다 하여 본도로 하여금 명백하게 다시 살피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휘조·이민도는 이 때문에 가자를 도로 거두었다.

 

11월 11일 무오

서흥(瑞興) 사람 조대립(趙大立)이 그의 고을 부사 이우주(李宇柱)를 죽였다. 조대립은 면서원(面書員)이었는데 전결(田結)을 훔쳐서 숨겼다가 일이 발각되자 이우주가 죽이려 하니 조대립이 달아났다. 이달 7일에 이우주가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봉산(鳳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유령(車踰嶺)에 이르렀을 때에 조대립이 총을 쏘아 급소를 맞히고 달아났고, 이우주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과 재야가 놀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흥부에서 관장을 죽인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본부를 강등하여 현(縣)으로 만들고 또 온 고을 사람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를 붙잡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준다는 뜻을 각도에 분부하여 잘 찾아서 기어코 잡게 하라. 부사가 변을 당할 때에 거느렸던 하인은 병영(兵營)에 옮겨 가두어 엄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당초 이우주의 하인들은 다 조대립인 줄을 알면서도 그 즉시 쫓아가 잡지 않았고 관노(官奴) 태일(太一) 등은 그 곳에서 달아나 버렸다. 태일의 일가붙이 김호선(金好善) 등 다섯 사람은 본관이 심하게 닥달하자 조대립이 달아나 숨은 곳을 은밀히 염탐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덮쳐 붙잡아 압송하다가 관문(官門)에서 5리가 좀 못된 곳에서 김호선이 패도(佩刀)를 뽑아 그의 포박한 줄을 끊고는 큰소리로 ‘죄인이 달아난다.’고 외쳤는데 그 통에 조대립이 달아나고 말았다. 대개 김호선이 조대립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조대립이 공갈하는 말을 듣고 그의 자취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일부러 풀어준 것이다. 드디어 다 엄히 형신하여 끝까지 추궁해 보았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았고 혹 지레 죽은 자도 있었다.
비국이 김호선의 자취는 조대립과 다를 것이 없다 하여 곧바로 처참하기를 청하자, 경상(境上)에서 처참하여 뭇사람을 경계하고, 이우주가 거느렸던 하인 10여 명도 모두 엄히 형신하라고 명하였다. 또 본부의 향소(鄕所) 등이 그 즉시 감영(監營)에 알리지 않았고 또 부사의 상(喪)을 치를 때에 와보지 않았으므로 또한 엄히 형신하게 하였다. 병사 구일(具鎰)은 이런 큰 변을 당하였는데도 능히 기찰하여 붙잡지 못하였다고 여러 번 추고하고, 겸관(兼官)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홍진(金弘振)은 오로지 향소에다 맡기고 지레 본현으로 돌아갔다 하여 금부에 내리고 그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조대립은 끝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정언 김환(金奐)·정유악(鄭維岳)이 수원 부사 성후설(成後卨)은 유약한 병통이 있어 나라를 위해 변방을 지킬 재목이 결코 아니라고 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12일 기미

사간 이합(李柙)이 성후설을 체직하라고 청한 계에 의견이 다르다고 인피하였고, 정언 정유악·김환은 논계한 사람으로서 태연히 있을 수 없다고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이합은 나오게 하고 정유악·김환은 체직시켰다.

 

윤경교(尹敬敎)를 헌납으로, 이수만(李壽曼)·조원기(趙遠期)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한 후 비국 제신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내년에 또 진휼을 할 것인데 나라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마땅히 관서 지방에서 취하여 써야겠습니다. 섬[石] 수를 미리 정하고 그들이 주선하여 수송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쌀과 좁쌀을 합하여 3만 석을 진휼청으로 수송하라."
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진휼을 베풀 곳도 미리 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 여역이 치성하였던 것은 대개 전염이 되어 그런 것이다. 내년에는 동서로 나누어 성밖 가까운 곳에서 각기 진휼을 베풀고, 병에 걸린 자나 유랑하는 거지들은 먼 교외로 인솔하여 나가 진휼함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주인 없는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유혁연이 주관하였는데, 승인배(僧人輩)로 하여금 그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논상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두머리 영장(領將) 1명과 일을 나누어 맡은 자 8명에게 모두 가자(加資)·체문(帖文)을 주어 포상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공조 판서 유혁연이 아뢰기를,
"염초 감관(監官) 전만유(全萬裕)는 지난해 재목을 운송하기 위해 울도(鬱島)에 내려 갔었는데, 3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보고는 기계를 모두 버리고 배를 대어 건져서 살려내었습니다. 진실로 가상합니다."
하니, 상이 가자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두 자전께서 이런 때에 방물(方物)·물선(物膳)을 줄이지 않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고 계시니 내년 정조(正朝)부터 계축년028)   정조까지 각도의 방물을 임시 중지하도록 하라. 그리고 경상·함경 두 도는 흉년이 특별히 심하게 들었으니, 물선도 적당히 줄이라."

 

금산(錦山)의 도둑 이광성(李光星)을 경상(境上)에서 처형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였다. 이광성은 좌수(座首)였는데 그의 아우 문성(文星)·두성(斗星) 및 교생(校生) 우명침(禹明侵), 장관(將官) 김영일(金英逸) 등과 함께 도둑질하기로 모의하고 50여 명의 무리를 모아 여러 곳에서 겁탈하였다. 이광성이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무리를 모으는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그의 무리들에게 일체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경계하고, 드디어 용담현(龍潭縣)의 군기(軍器)와 무주(茂朱) 적상 산성(赤裳山城) 서창(西倉)의 향곡(餉穀)을 겁탈하고자 덕유산(德裕山)의 깊은 골짜기 속에다 진을 치고 웅거하면서, 근처에서 산으로 다니며 사냥하는 포수 및 건장한 중들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폈다. 금산 고을의 아전인 황우룡(黃雨龍)이 그의 사위 권립(權立)을 통하여 적의 동태를 알아내 관가에 고하였는데, 대개 권립이 도둑에게 협박을 당하여 그들에게 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그 모의를 은밀히 탐지하여 황우룡에게 말한 것이다. 군수 이정(李晸)이 여러모로 책략을 써서 50여 명을 붙잡았는데, 자복한 자가 42명이나 되었다. 이정이 또 권립을 시켜 달아난 도둑을 정탐하게 하였으나, 권립이 곧 도둑의 무리에게 살해되었다.
또 명화적(明火賊) 1백여 명이 징을 두드리고 뿔피리를 불면서 관문(官門)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겁탈하였다. 이때부터 밤 사이에 읍리(邑里)가 자주 놀랐고 본군의 계엄이 거의 대여섯 달에 이르렀다. 조정의 의논은 다들
"이 도둑은 보통 강도가 아니므로 우두머리와 졸개를 구별해서는 안 된다."
고 하였는데, 허적(許積)·김만기(金萬基)·유혁연(柳赫然) 등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이 도둑은 실로 보통 강도가 아니므로 그 계책이 흉악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사형해야 할 자가 무려 40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당초 굶주림에서 목숨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한 것인데, 이제 즐비하게 처형된다면 이것이 어찌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스러운 조정의 덕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흉악한 역적으로는 이괄(李适)만한 자가 없었으나, 고 상신 윤방(尹昉)이 도둑과 서로 주고받은 이서(吏胥)들의 글을 가져다가 죄다 불살랐는데, 인심이 저절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잘 처리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계복(啓覆)할 적에 한 죄수라고 혹 무고한 자가 있을까봐서 번번이 염려하시고, 《서경(書經)》에 ‘협박받아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형조는 이미 자복한 도둑은 효시하자고 청하자,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일죄(一罪)029)  에 대하여 반드시 합동 추고하고 고복(考覆)하고 친히 심문하는 등의 절차가 있는 것은 대개 사형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단지 큰 무리에게는 이 법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40여 명을 한꺼번에 효시한다면 이것이 어찌 형벌을 삼가는 도리이겠는가. 그 중에도 혹 미처 정상을 모르고 협박당하여 따른 자가 있을 것이고, 또 권립이 살해된 것을 보면 흉악한 무리들이 필시 많이 누락되었을 것이다. 도둑의 괴수 이광성·이문성·이두성·우명침·김영일 등은 처형하되, 같은 무리로서 누락된 자와 협박당하여 따른 무리는 다시 더 형신한 뒤에 경상에서 효시하라. 그 나머지는 본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충분히 잘 살펴서 그 정상이 용서해줄 만한 자가 있으면 구별하여 아뢰고, 달아난 자와 누락된 자를 또한 모두 기찰하여 붙잡게 하라. 권두견(權斗堅)은 당초에 협박당하여 따른 일이 있더라도, 정상을 알고 관가에 고하였으니 협박받아 따른 것이라 하여 단지 사형만 감면해 주고 말면 자못 권장하는 도리가 없으니 분간하여 죄를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권두견은 권립의 종제(從弟)인데 권립과 함께 적의 상황을 탐지한 자이다.】  감사 오시수(吳始壽)와 병사 이집(李集)이 먼저 본군으로 가 모여서 함께 다스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석 등 5명을 처참하고 다시 그 무리를 다스려 구별해 아뢰었다. 형조가 묘당을 시켜 품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적 등의 의논을 써서 또 34명을 처참하니 이광성 등까지 합하면 39명이었다.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한 자는 11명이고 완전히 방면한 자는 2명이었다. 이정·황우룡은 공으로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그 뒤에 오시수가 제원(濟源)의 역졸 3백여 명이 다 도둑의 무리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심복으로 하여금 그 무리 속에 들어가 적의 동태를 염탐하게 하고 이어서 그의 부모와 처자를 가두어 도둑들의 의심을 끊어버렸는데 끝내 그 실상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11월 13일 경신

경상도의 올해 바칠 풀솜[雪綿子]을 감면해 주고 본도로 하여금 그 값을 가지고 진휼의 자금에 보태어 쓰도록 명하였다.

 

정언 조원기(趙遠期)가 추감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1월 14일 신유

전라도 만경(萬頃) 등 아홉 고을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쳤다.

 

11월 15일 임술

진휼을 잘한 황해도의 수령을 논상하였다. 서흥 부사(瑞興府使) 이우주(李宇柱)가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고, 연안 현감(延安縣監) 이민장(李敏章),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홍진(金弘振) 등은 모두 승서(陞敍)하고, 평산 부사(平山府使) 조성보(趙聖輔)에게는 숙마(熟馬)를 내렸다. 이때 이우주는 이미 죽었으므로 벼슬을 추증하였다.

 

11월 17일 갑자

전라도 부안(扶安) 등 고을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크게 끼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평안도 강계(江界) 등 여섯 고을에서 올해 거두어들일 쌀에 대해 1결(結)마다 각각 4두(斗)를, 상원(祥原) 등 열여덟 고을은 각각 1두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을 따른 것이다.

 

11월 18일 을축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암행 어사의 사찰은 사체가 막중함으로, 수령의 범죄가 뚜렷하여 이미 장계에 실렸으면 추생(抽栍)된 곳이든 아니든 막론하고 일체로 엄히 살펴서 징계할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사의 장계를 보면 장단(長湍)·양천(陽川)·연서(延曙) 등의 관원이 혹 불법을 자행하거나 진휼을 게을리하였는데도 추생된 곳이 아니라고 하여 유사(有司)의 품처(稟處)를 윤허하지 않고 먼저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셨습니다. 공초를 받지 않고 지레 조사한 것은 이미 법례를 어긴 것이고 관차(官次)에 그대로 있으면서 한편으로 조사하는 것도 반드시 방해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 나문하소서."
하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11월 19일 병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밤에 화성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11월 20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상이 일렀다.
"암행 어사가 탐문할 때 추생된 지방 이외에는 들은 것이 있어도 복명한 후 진달할 기회가 나름대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체로 서계(書啓)하니 일의 모양이 타당하지 못하다. 지금 이후로는 어사를 파견할 때 정원에서 이러한 뜻을 분부하라."

 

주인을 살해한 죄인인 사노(私奴) 송남(松男)이 복주되었다. 영흥(永興)은 송남이 태어난 곳이어서 강호(降號)에 해당되었지만, 준원전(濬源殿)이 있는 곳이라 단지 당시 부사        김중명(金重明)만을 파직하였다. 살던 집을 파헤쳐 못을 만들고 친족들을 노비로 삼는 등의 일은 전례대로 실시하였다.

 

11월 21일 무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뜬 후, 교리 이혜를 불러 암행할 때에 연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물었다. 이혜가 아뢰기를,
"나주(羅州)·무안(務安)·해남(海南)·진도(珍島) 등의 지역이 재해를 더욱 혹독하게 입었습니다. 굶주린 백성이 야생한 기장을 훑어다가 껍질 채 죽을 쑤어 끊어져가는 목숨을 구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목화가 아주 귀하여 사람들이 몸을 가리지 못하므로 보기에 참혹하고 가여웠습니다. 경유한 촌락마다 태반이 비어 있었으니, 참혹하게 죽은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남원 같은 곳은 속오(束伍) 12초(哨) 중에서 6초가 죽었습니다. 또 바닷가 고기잡는 백성은 거의 남은 자가 없습니다. 대개 이들은 고기 잡고 채취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흉년이라 팔리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이들은 다 능로군(能櫓軍)의 무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수군을 가장 중히 여기고 있는데 노군(櫓軍)의 죽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니, 작은 근심이 아니다."
하였다.

 

11월 22일 기사

무지개가 동북쪽에 나타났다. 날씨가 음침하여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경상도 대구(大丘) 등 고을에서 짙은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11월 23일 경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뜬 후 대신과 비국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황해 도사(黃海都事) 조창기(趙昌期)가 상소하여 뵙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보았다. 조창기의 말은 대개 규모를 정하는 것으로 정치의 체제를 세우는 근본으로 삼고 실정을 궁구하는 것으로 규모를 정하는 요체로 삼았다.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에 대해 논하기를,
"곡물을 모집하는 길을 더욱 넓히어 곡물을 많이 바친 자에게는 실직(實職)으로 상을 주고 큰 장사꾼이나 역관 가운데에 혹 많은 재물을 쌓아 둔 자가 있으면 서반(西班) 당상(堂上) 이상의 실직으로 은화(銀貨)를 모집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소서. 또 지난해 이전의 것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대동(大同)·관적(官糴)과 노비 신공(奴婢身貢)·군병 수포(軍兵收布)를 탕감하소서. 또 각 고을의 크고 작은 폐단을 수령이 상소하여 죄다 아뢰게 하고 감사가 편리 여부를 헤아려 조정에 올리게 한 다음 묘당에서 강구하여 시행하소서."
하였고, 또 사전(祀典)이 폐지되고 해이해진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의문(儀文)의 도수(度數)에 관한 절차로 말하면 오로지 수복(守僕)의 말에 의지하고 있고 더구나 제공한 제물이 대부분 정결하지 않습니다. 신은 신명이 흠향하지 않을까 염려되고 재앙이 일어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네가 아뢴 것은 다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아름답다."
하였다. 조창기는 언변에는 여유가 있으나 시국의 병폐에 대해서는 절실하게 지적하지 못하였다. 그가 소를 올려 뵙기를 청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이 다 반드시 곧고 예리한 말을 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상의 앞에 이르러서는 말한 것이 이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실직은 공명첩과 비할 바가 아니고 당상 이상은 또한 덕이 있는 자에게 주는 벼슬인데, 이것으로 은을 모집한다면 후한(後漢) 때에 벼슬을 판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비웃어서 시행할 만한 일까지도 전혀 시행되지 않았으니 애석하도다.

 

11월 24일 신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지평 윤가적(尹嘉績)이 아뢰기를,
"암행 어사의 사찰은 임무가 막중하므로, 암행이라 한 바에는 참으로 누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 조위봉(趙威鳳)은 접때 탐문할 때에 친구의 집마다 죽 들러 심지어 누구는 포상할 만하고 누구는 파직할 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이 퍼지자, 혹 수령이 지레 동요할까 염려하여 다시 친척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안심하도록 권하였는데, 그의 처사는 이미 매우 말할 거리도 못됩니다. 더구나 추생(抽栍)에 든 고을 중에도 죄다 살피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허술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기근과 여역이 마음에 놀랍고 보기에 참담하며, 천재와 괴물이 거듭 나타나는 것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위태로움과 멸망이 박두하였으므로 상하가 근심하고 황급하여 경비를 줄이는 방도라면 여러모로 힘을 다 기울였으며, 심지어는 상방(尙方)에서 베를 짜는 것이나 장인들이 물건을 만드는 일까지도 특별히 명하여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차비문(差備門)에 대령하는 각종 장인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하니 이는 필시 내관(內官)들이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일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엄히 살펴서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상방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장인을 곧바로 차비문에서 불러들이고 다시금 확인해 보는 일이 없으면 반드시 빙자하는 폐단이 많을 것이니, 상방으로 하여금 정간(井間)에 써 넣어서 아뢰게 하여 그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인을 월말에 써서 아뢰게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지 않은가?"
하자, 이은상이 아뢰기를,
"정원의 계청에 대하여 엄히 금하겠다는 뜻으로 답하신다면, 이것은 또한 대계(臺啓)를 윤허하시는 셈입니다."
하였는데, 이날 저녁에 상이 정원에 답하기를,
"이미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정간에 써서 아뢰게 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터무니없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에 없던 이러한 기근을 당하여 두 자전을 제외하고는 삭선(朔膳)을 이미 다 줄였으나, 명일(名日)의 물선(物膳)은 미처 줄이지 못했다. 대전(大殿)·중전(中殿)에게 삼명일(三名日)에 육조(六曹)에서 바치는 물선과 표리(表裏)는 모두 임자년030)   동지(冬至)까지 임시로 줄여야 할 것이다."

 

경기도 풍덕(豊德) 등 고을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11월 25일 임신

정유악(鄭維岳)을 지평으로, 이선(李選)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 등 고을에 검은 안개가 닷새 동안 짙게 끼었다.

 

왜관(倭館)에 불이 났다. 이달 16일에 왜관에서 실수로 불을 내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연정(李延禎)이 토병(土兵)을 거느리고 가 구제하였으나, 바람이 거세고 왜관이 모두 초가 지붕이어서 연향 대청(宴享大廳)을 제외하고는 모두 번져 타버리고 왜선(倭船) 7척과 의복·기구도 남김없이 없어졌으며 왜인들은 맨몸으로 탈출하였다. 상이 본도에 명하여 쌀 2백 석과 무명 10동을 주게 하였다. 왜관의 왜인이 하사한 물품을 받고 바라던 것보다 많아서인지 매우 기뻐하였다.

 

11월 26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문무과 정시를 시행하여, 문과에서는 박태상(朴泰尙) 등 8명을 뽑고 무과에서는 이필화(李必華) 등 1백 74명을 뽑았다.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해일이 일어 민가 1백여 채가 빠졌다.

 

11월 27일 갑술

영중추부사 정태화(鄭太和)가 병을 핑계로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원로 대신으로는 경과 이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다.】 뿐이었는데, 영부사가 불행히 죽었으므로 내 매우 슬퍼하고 있다. 이제 내가 믿는 바는 오직 경뿐이거늘 경은 어찌하여 이해하지 않고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가. 지극한 뜻을 몸받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상이 하교하기를,
"정 영부사가 다리의 병 때문에 사은 숙배하지 못해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하니, 마음에 섭섭하다. 오늘 사은 숙배의 예는 생략하고 들어오게 하라."
하자, 정태화가 대궐 아래로 나왔다. 상이 하교하기를,
"영부사는 다리에 병이 있으니, 견여(肩輿)를 타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대궐의 뜰 안에 이르자, 내시에게 명하여 부축하여 나오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해 보지 못하였다. 근래 기력은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근력이 이미 없어지고 주어진 목숨도 다하였는데, 반신 불수의 증세를 거듭 얻었으니 필시 죽을 운명이었는데 돌보아주시는 은혜를 특별히 입어 침과 약이 시기 적절하여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다시 입시하니 꿈만 같습니다. 오늘 소대(召對)하시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신하된 도리상 물러나 있을 수만은 없어 대궐 문 밖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마를 타고 입시하라는 명까지 있어 부득이 부축으로 몸을 끌며 들어 왔습니다만, 남들 보기에 매우 이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이미 많으니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나랏일이 어렵고 근심되어 만나보고 일을 의논하고 싶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국가의 옛 신하가 죽고 백성이 거의 다 구덩이에서 굴러 죽었으니, 나라의 운수가 이와 같다면 진실로 불행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은 정신이 흐릿하여 어찌 해야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로를 새로 잃어 내 비탄스럽다. 경의 기력이 직무를 보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혹 빈청(賓廳)에 나오고 인하여 부액하여 들어와 함께 군국(軍國)의 대사를 도모한다면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후로 정태화는 병 때문에 나오지 못했고, 상 또한 다시 불러 보지 않았다.

 

전 이조 판서 이시술(李時術)이 죽었다.
시술은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손자이다. 늦게 과거에 합격하여서는 화현(華顯)의 직책을 두루 거쳤다. 사람됨이 선량하고 근신함을 스스로 지켜나가 관직에 임하고 사물을 접할 때 잘못한 적이 없더니,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11월 28일 을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11월 29일 병자

밤에 목성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11월 30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의정 송시열이 우레의 변고로 인하여 상소하였다. 병을 진달하여 사직하고 또 녹봉을 환수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 경술년031)  에 병 때문에 부르심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무신·기유 두 해의 달포 사이에 국사를 망령되이 논하여 위로 공가에 끼친 피해와 아래로 신의 몸에 이르게 한 비방이 적지 않습니다. 비록 후회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죄를 따지는 상소를 삼가 갖추어 면류관 앞에 올리고자 하였으나, 마침 이세직(李世直)의 변을 만나 두려움에 떨며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두 가지 일은 나라 계획의 득실과 관련되는 것이 있어 끝내 성상께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병 때문에 극도로 혼미하여 글씨를 정사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단지 당시의 초본을 올릴 뿐이니, 여가에 한번 살펴보아 주신다면 재량하여 따를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이 두 조정의 은혜를 입다가 늙어 병들어 죽으니, 신음하고 쑤시는 가운데에서도 위로 나랏일을 생각하느라 걱정이 만 갈래입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때로는 일어나 앉기도 하였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한번 지척에서 어리석은 마음을 다 쏟아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 또 매우 놀랐습니다. 신은 아뜩히 놀라고 두려워 살고 싶지가 않았지만,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서둘러 벼루 먹을 가져다가 삼가 다음과 같이 어리석은 견해를 갖추어 이것으로 성은의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하고 지하에 가서 성고(聖考)를 뵙고자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말에 아뢰기를,
"금년 농사는 곡식이 된 곳은 되었지만 땅을 묵혀 폐농된 곳이 실로 많고 밭의 경우는 전혀 수확이 없습니다. 대개 자연 조건이 자못 순조로웠어도 사람의 힘이 부쳤으므로 빈민들은 대개가 농사를 폐하고 부자들은 혹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곡식이 된 곳은 모두가 가난한 자의 논이 아니어서 곡식이 익는 이 시기에 먹을 것이 부족한 가난한 자들의 상황은 봄 여름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반드시 서둘러 처리하여 진구할 계책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이 보존할 가망이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이 근심 걱정 없이 자기 전리(田里)에 안주함은 재실(災實)에 대한 판정이 억울하지 않은 데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구실아치들의 농간은 더욱 심해지는데,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들은 두루 돌아다니지 못합니다. 또한 국법에 재해를 입었다는 판정이 사실과 다른 경우 그 수령을 파직하는 예가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수령에 대해서는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들이 조사해 아뢸 마음을 감히 먹지 않습니다. 또한 고을을 잘 다스린 자에게는 이로 인해 파직되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역시 전혀 캐묻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구실아치들의 농간에 맡기는 것입니다. 뇌물로 모면하는 자는 모두가 세력있고 부유한 백성들이고 억울하게 당하는 자는 모두가 못살고 잔약한 백성들입니다. 옛 현인들의 이른바 ‘우리 나라가 필시 서리들에 의해 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여기에서 더욱 징험할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우선 수령을 파직하는 법을 바꾸고, 또 답사하여 검사하는 관리를 많이 내보내어 그 구역을 줄여주고,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한 구실아치가 주관하는 곳에 대하여 반드시 한두 곳을 추생하여 그 작간하는 것을 일체 무겁게 따지도록 한다면 아마도 꺼리는 바가 있어서 속이고 숨기는 짓을 감히 멋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듣건대, 조정에서 금년 부세는 기유년032)  의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사용한다 하니, 이는 비록 예년에 비추어 보아 당연한 것이지만 올해는 보통 해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토착민의 전결이 많이 묵고 재해를 입은데다 그 묵고 재해를 입은 것이 또한 모두 가난한 하호(下戶)들입니다. 만약 기유년의 조금 잘된 결수를 금년 재해를 입은 백성에게 적용하여 세금을 거둔다면 그 부르짖고 원망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해 경술년에는 기유년의 기준[年分]을 사용함이 마땅했었는데 전 충청 감사 신 이홍연(李弘淵)이 이유를 갖추어 계청하여 그해 결수(結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고 지금까지 성덕을 칭송합니다. 만약 금년의 부역을 또 금년의 결수를 기준으로 하되 기유년에 채 받지 못한 결수는 임시로 보류하고 조금 풍작이 되기를 기다려 추가로 징수한다면 아마도 잔민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금년에 여러 가지 군보(軍保) 중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만약 보통 때와 같이 반드시 대신 정하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 징포(徵布)를 면제한다면, 이웃과 족속이 결코 지탱하여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드시 덕음을 빨리 내리시어 뭇 고을로 하여금 대신 정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그 징포를 면제하고 단지 살아남는 자에게만 징수한다면, 잔민들이 실제로 깊은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산 자의 허실을 조사해 내는 것도 전적으로 구실아치들이 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흩어져 다니다 죽은 자가 매우 많아 그 허실을 조사함이 진실로 마땅하지만, 집에서 죽은 자라 하더라도 또한 검시하여 증서를 만든 조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실아치들의 속임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어사를 별도로 보내어 자세히 조사하여 만약 죽은 자를 살았다고 하거나 산 자를 죽었다고 하는 자에 대해 일체 군율로 처리한다면, 관리들은 두려워 꺼리는 바가 혹 있을 것이고 백성들은 부르짖어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도적들이 가득 차서 죽이고 빼앗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관리들은 한결같이 덮어두어서 제몸 보호만을 일삼고 어쩌다가 알리기라도 하면 좋아하지 않는 얼굴을 보입니다. 오직 자기 경내에 도적이 없다는 소리만 듣고 싶어합니다. 이 때문에 사나운 무리들은 마치 믿는 바가 있는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힐난조로 말을 하여 양민들이 감히 누구냐고 묻지도 못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어찌 키울 수 있겠습니까.
옛날 한 무제(漢武帝) 말년에 도적들이 부쩍 일어나 금할 수 없자 드디어 ‘침명법(沈命法)’033)  을 만들었는데, 도적이 일어나도 발각되지 않고 관리와 백성들이 서로 감추어 주어 도적들이 점점 많아졌으니, 망한 진 나라의 전철을 거의 밟을 뻔하였습니다. 대저 담을 넘거나 뚫는 좀도둑들은 도적을 다스리는 율로 본디 다스릴 수 없는 법이지만, 인물을 살상하는 경우야 어찌 내버려 두고 묻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는 일찍이 ‘환자(還上)를 중지하는 자는 유배하고 벼를 털어가는 자는 참한다.[閉糴者配 劫禾者斬]’는 여덟 자로 구황의 최선책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부자들이 감히 환자를 중지하지 않는다면 이웃 사람들이 의지할 바가 있게 되는데도, 오히려 벼를 털어간다면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의지할 만한 부자가 없고 단지 관가에서 죽을 마련한 곳이 있을 뿐이니, 벼를 겁탈해가는 걱정은 진실로 막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를 하는대로 맡기고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 만연되는 형세가 심히 두렵습니다.
지금 금산(錦山)의 도적들은 단지 보통 사내들이 아니고 보면 그 형세가 단순히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잡힌 자가 매우 많은데도 오히려 놀라 흩어지지 않고 감히 백주에 고발한 자를 쳐죽였습니다. 또 그 뒤에 도적떼를 만들어 사람에게 잔인한 짓을 예전처럼 하니 무슨 수를 써보기 어려운 형세를 이미 알 수 있습니다. 공초한 말에 이르기를 ‘호남·영남 사이의 큰 산 긴 계곡에다 관아의 곡식을 약탈하여 쌓아두고 산으로 다니는 포수와 승려 무리를 많아 모아 그 세력을 확장하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와 같다면 그 뜻이 작은 데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중에 황소(黃巢)034)  나 방납(方臘)035)   같이 흉포 괴려한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옛날 인조 말년에 유탁(柳濯)의 무리가 호서에서 일어나036)   수령 감사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고,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금병(禁兵)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가는 지경에 이르자 다행히 그 무리들이 수가 적고 힘이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 곧 해산하였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또 지난날과 다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백성이 배불리 먹고 편안히 거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찌 저자거리에 몰리듯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서둘러서 어루만져 안집시키고,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흔연히 소문을 듣고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체포와 주벌을 엄히 행하여 그 싹을 끊는다면 국가가 아마 유지되고 편안해질 것입니다. 또 지금 호랑이에게 잡혀 먹힌 자가 무수한데도 수령과 장령들은 잡거나 쫓을 마음이 없으니 또한 상벌을 밝히시어 이러한 우환을 조금이라도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어루만지고 안집시키는 책임은 전적으로 수령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반드시 충직하고 동정심이 많으면서 일을 소신있게 처리하며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자애로운 자여야 효과를 볼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전에 치적이 드러났던 자는 연한과 품계, 추감과 견책에 구애되지 말고 일체로 뽑아 파견하여 그가 주청하는 여러 일들을 안에서 막거나 물리치지 말도록 하고, 만약 일을 게을리하고 자기를 살찌우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엄히 따지고, 감사가 일을 제대로 살펴 수행하지 못하면 함께 죄를 받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아마도 느껴 격려되고 두려워하여 일과 공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송 효종(宋孝宗)이 일찍이 이르기를 ‘진휼의 정사는 실상을 파악하여 일찍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성인의 말씀이라고 매우 칭송하였습니다. 지난번 진휼 정사는 그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한이 없고 늦어져 일에 대지 못한 것이 또 많았습니다.
몇 가지를 한번 말해 보겠습니다. 죽을 진설할 때 작은 고을은 수령이 직접 살펴 보았기 때문에 남발하거나 속이는 일이 혹 적었지만, 큰 읍에서 먼 외방에 나누어 진설한 경우는 그 감색(監色)이 주린 백성의 수를 허위로 불리고 그 수대로 쌀을 받아내어 자기를 살찌웠습니다. 그래서 진설한 죽은 낱알이 매우 드물었고, 게다가 양이 부족하면 물을 보탰는데, 그 죽을 먹고 오히려 죽는 것은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이것은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폐해입니다. 또 감사 수령이 청하는 일을 조정은 으레 늦추어 그 가부간의 결정을 모두 제때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가부를 결정해서는 이미 상황이 바뀌어 일을 맞추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일찍 행하지 못한 폐해입니다. 반드시 허위로 기재하는 외방의 폐단을 통징하고 외방의 소청을 조정에서는 신속히 응해 주어야 도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린 백성이 비록 죽을 먹는다 하더라도 땅에서 노숙을 하므로 열흘이 못되어 쓰러지고 마니, 반드시 흙집을 미리 짓고 땔감을 갖추어 추위에 떠는 폐단이 없게 하여야 온전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올해는 가난한 집의 전역(田役)과 신역(身役)을 결코 전례대로 다 받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전액을 임시 감하여 나라의 쓰임이 부족하더라도 곧 여러 각사(各司)와 각아문(各衙門)에 비축된 것을 가져다 써야 합니다. 이것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은 것을 합하면 많은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반 쓸데없는 비용을 일체 제거하고 오직 근근히 버텨간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살아 남은 백성에게 내려주는 것이 있고 나라의 쓰임도 또한 뚝 끊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위로는 성상과 아래로는 여러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검약한 데 처하여 마음을 간직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을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내탕의 재물을 풀었습니다. 무릇 내탕의 재물이란 그것으로 두루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백성이 이로써 군상(君上)의 덕의(德意)를 우러러 느끼게 된다면 구덩이에 굴러 죽어도 원한이 없게 됩니다. 한번 흉년의 험한 경험을 겪고 나면 풍속이 문득 바뀝니다. 부모가 죽어도 덤덤히 곡읍할 줄을 모르며 혹 시신을 전혀 수습하지 않는 자도 있고, 혹은 끌어다 은밀한 곳에 버려두면서 술과 고기를 먹고 마시기는 흐드러지게 합니다. 혹은 부모 형제가 어떤 사람에게 피살되었는지 뻔히 알면서 그 당사자와 웃고 이야기하며 상대합니다. 부모 형제가 피살된 데에 약간의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제된 자가 어찌 차마 이러합니까. 이는 비록 흉년에 본성을 잃어 그런 것이지만, 또한 정교(政敎)가 시행되지 않아 그런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정에서 거듭 밝혀 타이르고 뭇 읍에 반포하여 미처 장사지내지 못한 자는 장사지내고 복을 입지 못한 자는 뒤미처 복을 입게 하여 함께 다시금 시작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장사지내지 않고 복을 입지 않으면서 술과 고기를 마시고 먹는 자는 형법을 엄히 행하여 두려워할 바를 알게 합니다. 그런 뒤에야 거의 인륜이 밝혀지고 국가가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유탁(柳濯)의 변으로 보건대, 숙위(宿衛)는 결코 단촐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가 정초군(精抄軍)의 상번(上番)하는 군졸을 파하고자 한다고 신은 들었습니다. 이는 군사로써 군사를 기르는 것이어서 경비와 관계가 없으니, 의논하는 자의 말을 좇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지난해에 추수가 없었고 올 여름에 보리가 없었으니 실로 국가가 기울어져 엎어질 운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겨울 우레가 일어나니 이어지는 해가 걱정입니다. 전하께서 이전의 옛일을 죽 살펴 보시건대 오늘날과 같으면서 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오늘의 형세는 흡사 큰 난리 끝에 상채기가 아물지 않고 신음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보호하는 방도는 반드시 숨이 끊어지려는 사람이 한 숨을 겨우 이어가는 경우처럼 해야 합니다. 베게와 자리로 편안하게 만들고 자양분으로 보양하며, 집사람들을 금하여 떠들거나 놀래키지 않도록 하며, 내외가 안정되어 그가 소생하는 것을 주시하여야 그 만분의 일의 희망을 바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하와 조신들이 급급황황하게 조석으로 강구하여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해지는 말을 듣건대, 그렇지 못한 바가 크게 있으니 어떻게 된 까닭입니까. 해이해지거나 마구 즐기는 것은 인군에게 지극한 경계인데, 신이 듣기로는 전하께서 여느 공사(公事)에서 늘 시일을 끄는 것이 보통이고, 인명이 관계된 형옥(刑獄) 같은 일에서도 오히려 한 달이 넘도록 시일을 끌고 그 죄가 매우 경미한데 수 개월을 갇혀 있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보면 그 나머지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성상의 몸이 편찮으시어 수작하기가 피곤하시다면, 편전에 누우시어 해당 관리를 자주 부르거나 혹은 비변사·승정원과 어찌 처결을 상의하시지 않으십니까. 궁궐에 깊이 거하면서 군신들을 접견하지 않는 것은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그르치게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세 때에는 비록 베개를 높이 베고 뜻을 멋대로 부리는 것을 일삼아도 조고가 오히려 아뢰기를 ‘폐하가 신 및 법을 익힌 시중과 함께 일을 기다리다가 일이 닥치면 헤아리도록 하자.’037)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뢰는 일이 오히려 오늘과 같이 적체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일은 어느 시대와 비교해야 합니까. 이런 까닭에 대소 관료가 서로 본받고 중외에서 관직을 게을리 수행합니다. 단지 고상한 이야기와 술을 즐기면서 나라의 근심과 백성의 고통은 망각의 영역에 내버려두는데, 전하께서는 비록 부지런하지 않아도 심히 해될 것이 없다고 여기시기에 금일의 해가 이와 같은 데 이르렀습니다. 경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신이 먼 옛날을 끌어들일 것도 없습니다. 우리 조정의 성조(聖祖)께서는 무척 추운 밤에 죄수들이 불쌍하여, 와내(臥內)로 승지를 자주 불러 그 숫자를 물으셨습니다. 승지 가 일일이 꼽아 아뢰니 내전(內殿)을 돌아보고 ‘이는 나의 보배스러운 신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열성조께서 정사를 부지런히 하시느라 처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시 신하가 이와 같이 직임을 맡은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은 실로 사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듣기로는 일전 가례(嘉禮) 때에 헛된 비용이 엄청나 탁지(度支)에서 쓴 은화가 여러 만 냥에 이른다고 합니다. 기억하건대 예전 성고(聖考)께서 전하의 가례 때 그 절약한 것을 등록(謄錄)에 갖추어 놓았으니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나라의 빈부가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농사의 흉년 풍년이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시사의 안위가 또한 지금과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전하께서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도 당시의 절약은 오히려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외에서 서로 바라보며 이르기를 ‘오늘날은 반드시 감하고 또 감하여 의례만을 이룰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전하께서는 성고(聖考)께서 감하신 것 말고는 더이상 다시 감한 것이 없어서 그 소비한 양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들 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나머지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생령(生靈)의 기름을 짜서 궁액(宮掖)의 한때 보고 들을 거리를 공급하시지만, 자손에게 계책을 전해주어 편안케 하는 방법으로는 또 이처럼 좋지 못하였으니, 신은 남몰래 개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더구나 입과 배를 보양함이란 더욱 말단의 일이라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도 없지만, 근래에 간신이 아뢰기를 ‘인척의 신하가 생복어[生鰒]를 변방 절도사에게 사사로이 징수하여 대궐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인척의 신하는 이 일을 두고 법석대며 스스로를 옳다고 하였지만 듣는 자들은 전혀 옳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뒤 이 일이 그쳤는지 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올여름 통영(統營)에서 다시 인척의 분부로 사사로이 헌상한 것이 두 차례 있었다 합니다. 신이 들은 것이 이와 같다면 듣지 못한 것이 또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뭇 읍에 해를 끼치는 것은 놓아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그 체통을 손상시키는 것은 또 어찌하겠습니까. 옛날 성종 대왕께서 병환이 나셨을 때 의원이 ‘붕어로 고칠 수 있다.’ 하였는데, 상께서 측근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지금 바야흐로 장마가 졌으니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먹는 것 때문에 남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하셨습니다. 또 신이 기억하건대, 옛날 무술년038)   가을에 성고(聖考)께서 편찮으실 때 조신들이 주사(廚司)에 별미가 없다고 민망해하며 경기도 읍에 웃돈[行下]을 주어 메추리를 바치게 하였고, 또 해서 지방에 웃돈을 주어 생선알을 바치게 하였더니, 성고께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치도록 서둘러 명하시었습니다. 이것들은 성명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인척 신하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충성을 행한 방법이 실로 아낙과 심부름꾼에 가까우며 진짜 충성은 아닙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임금 섬기기를 좌우에서 하고 보양하기를 일정한 방도가 있게 한다.’ 하고, 고인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의 부족함이 어찌 이 물건 때문이겠는가. 구체(口體)를 봉양하니 얼마나 비루한 것인가.’ 하였으니, 이는 신하된 자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인척의 신하가 바친 것이 실제로 진어(進御)에 쓰기 위한 것은 반드시 아닐 것이고 단지 사치한 습관을 없애지 못해 굳이 먼 지방의 진기한 것을 숭상하였기 때문일 뿐이니, 신이 남몰래 한탄하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의 상황은 바로 크게 엎어지고 크게 무너져 어찌해 볼 수 없는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크게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크게 떨쳐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 거처와 음식, 부지런함과 공경 절약함을 바로 선조(宣祖)의 용만(龍灣), 인조(仁祖)의 남한(南漢) 시절과 같이 해야 합니다. 조그만한 일이라도 화합하고 민간에서 감히 소요를 일으키지 않으며 신공(臣工)을 책려하여 감히 일을 폐하지 못하게 하되, 자기 죄를 따지는 말을 자주 내리며 기왕의 잘못을 깊이 진술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백성들이 덕의(德意)의 실상을 알고, 원망 저주하여 멋대로 배반하는 마음을 감히 지니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또 인군의 직임 중 정승을 논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승을 논하여 적임자를 얻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망할 것을 보존시킬 수 있지만, 진실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안정이 필시 위험해지고 융성이 필시 쇠퇴해질 것입니다. 전하와 같은 명성(明聖)으로 어찌 이것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또한 신 같은 자를 그 사이에 충당하셨습니다. 신은 그 적임자가 결코 아니며 또 조석간에 쓰러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진용할 기회가 없고 나라 상황은 불 속에서 구하고 물 속에서 건지듯 급해질 것입니다. 모름지기 신의 직을 빨리 갈고 그 적임자를 빨리 구하여 그 지위에 놓는다면 나라의 상황이 가망있게 될 것입니다. 주자께서 일찍이 인군논상(人君論相)의 설을 가지고 그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승을 논해야 할 사람이 자기에게 맞는 자를 구할 뿐 자기를 바루는 자를 구하지 않으며, 사랑할 만한 자를 취할 뿐 두려워 할 만한 자를 취하지 않는다면, 임금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을 바루어야할 사람이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는 것으로 일을 삼지 않고 부합하여 뜻을 받드는 것으로 능사를 삼으며, 세상을 경영하며 사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지 않고 자신을 용납받고 총애를 굳히는 것으로 기술을 삼는다면, 재상은 그 직임을 잃은 것이다. 자기를 바루고 두려워할 만한 자를 뽑는다면 반드시 자중하는 사람을 얻게 될 것이고, 내가 그에게 맡기는 것도 부득불 무겁게 될 것이다. 맡기는 것이 무거우면 그가 옳은 일을 건의하고 안 될 일을 폐기하려는 뜻을 다할 것이며, 세상을 경영하고 사물을 주관하려는 그 마음을 행할 것이다. 또 곧고 우직하며 과감히 말하는 천하의 선비를 공정히 뽑아 대간을 삼고 관사를 주어 의론에 참여케 할 것이다. 내 복심이목(腹心耳目)의 임무 부여가 항상 어진 사대부에게 있고 군소배들에게 있지 않게 하며, 옳고 그름을 상벌하는 권한이 항상 낭묘(廊廟)에 있게 하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 설은 실로 인군이 정승을 논하는 핵심적인 방법입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이렇게 정승을 구하신다면 반드시 그 적임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또 신이 듣건대, 근일 대간이 죄가 두려워 구차히 용납되기를 일삼고 있다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거슬려 꺾어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윤개(尹堦)와 윤가적(尹嘉績)이 대신을 언급하였고 그래서 대신이 불안해하였기 때문에 두 신하가 감히 재직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이 그 참모에게 이르기를 ‘조그만 혐의를 멀리하느라 서로들 거슬려 말해주기를 어려워 한다면 손해이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나라에 충성하고 걱정하는 자들이 나의 잘못을 부지런히 공격한다면 적을 멸할 수 있고 공을 이룰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위급한 상황이 결단난 촉(蜀)나라보다 심하니, 더욱 제갈량 같은 마음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두 신하의 말에 대해 유감이 있습니다. 주공(周公)이 노공(魯公)에게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였는데, 주자(朱子)께서 해석하기를 ‘대신이 그 적임자가 아니면 떠나보내고 그 지위에 있다면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또 《중용(中庸)》의 ‘구경(九經)’ 중에 대신을 공경하라는[敬大臣] 훈계가 있는데, 혹자가 묻기를 ‘만약 대신으로서 현명하다면 괜찮겠지만, 혹 불행하여 어진 이를 시기하고 능력자를 질시하며 아래를 막고 위를 가로막아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루되 임금이 깨닫지 못할 경우에도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주자께서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어진 이를 높이는 것으로 우선을 삼았다면 대신의 자리에 둔 자 중에 반드시 이같은 사람이 섞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행하게 혹 실수를 하였다면 또한 빨리 그 적임자를 구하여 바꿀 뿐이다. 필시 간사한 짓을 행하여 나라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대신의 지위에 두고 우선 문서를 바치는 것으로 직임을 삼게 하는 경우가 어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주공의 말씀과 《중용》의 훈계를 가지고 주자께서 해석하신 글을 살펴보며, 또 주자께서 그 임금에게 아뢴 것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오직 인군에게 걱정할 것은 재상의 임명이 신중치 못하고 재상의 자임함이 혹 가벼운 경우입니다. 그러나 뭇 관리를 진퇴시키는 것이 재상의 직책이니, 어진 이나 재주있는 자를 버려두었으면 정관(政官)을 불러다 그 버려둔 것을 책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무슨 병통으로 여길 것이 있어 말을 하겠습니까. 만약 임금의 맡긴 것이 무거운데 대신의 책임진 것이 사사롭고 정관을 불러다 말하는 것이 또한 어진 이와 재주있는 자가 아니라면, 이 재상은 그 적임자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분명히 말하여 지척하고 그 적임자로 바꾸라고 청하지 않고 다만 아교칠을 한 듯 입을 다물고 마치 사흘된 새색시의 모습처럼 말을 할 듯하다 말을 하지 않습니까. 저들이 구차하게 용납되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논할 것도 못되지만, 능히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도 또한 이와 같으니 신은 남몰래 애석히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완벽한 것을 따져 말한 일반론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재상과 대간이 또 다시 불안해 한다면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한 책자를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10여 조는 다 스스로를 탓한 것이었다. 거기에 아뢰기를,
"원로 대신을 함부로 저촉하였으며, 부마(駙馬)의 저택을 옮기고, 정초(精抄)를 설치하고, 추직(騶直)을 폐지하고, 안민창(安民倉)을 설치하고, 공상(供上)을 변통하고, 서얼(庶孽)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중들을 몰아내어 환속(還俗)시키고, 동성(同性) 사이에 혼인하지 말게 하고, 사민(士民)에게서 베를 거두는 등등의 일을 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함부로 말한 잘못을 스스로 뉘우쳐도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정릉(貞陵)을 부묘(祔廟)할 때에 눈썹을 치켜 올리고 팔을 휘두르며 탑전에서 크게 배척하려 한 자까지 있었는데 신이 그 일을 논하는 말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처럼 심하게 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또 김징(金澄)의 옥사 때에 신이 장편의 소를 지어 구하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은 본디 흠이 많아서 여전히 비방의 꼬투리가 있는데 영남 선비들의 비방을 받은 뒤로부터 황인(黃壖)·이석복(李碩馥)·이태양(李泰陽)의 소가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천 사람이 손가락질하면 병을 앓지 않아도 죽는다고 한 말과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아, 오늘날의 나라 형편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러 천지 산천의 변고와 인물의 요괴가 거듭 보이고 일어나니, 매우 놀라고 경악할 만한 것이 아닌 게 없다. 기근과 여역의 경우에는 이전에 없던 것이어서 사망한 백성이 몇천 몇만 명인지 알 수 없으니, 걱정과 두려움이 지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지난번에 또 겨울 우레의 변고 때문에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관을 곧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유하였다. 지금 상소의 글을 보건대 나라를 위하는 은근한 뜻과 경계시키는 애틋한 정성이 글 밖에 넘친다. 나를 사랑함이 성실하고 충성스러우니 내 심히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또 책자를 보건대 더욱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경이 지난해 서울에 왔을 때, 생각한 것을 모두 진달하였던 것은 공연한 뜻이 아니었는데 근일에 운운한 것이 혹 이와 같다면 매우 놀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소책(疏冊) 중에 의논하여 처리할 만한 일은 즉시 의논해 처리할 것이고 과인에게 책려한 일은 깊이 기억해 둘 것이다.
아아,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내 재상을 임명함은 실로 괜한 것이 아니다. 전날에는 질병이 한창 심하여 내 굳이 청하지 못하였지만 지금은 옛 병이 나았을 법하다. 나랏일의 위태로움이 하루하루 더해가니, 경이 한결같이 고사하여 나랏일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아 두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마음이 남몰래 한탄스럽다. 소위 운운한 말은 모두가 근거없는 말이니 경은 어찌 개의하는가.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되도록 속히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서 위태로운 나라의 상황을 건지고 곤고한 생령들을 구제하여 과인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상이 뒷날 연중(筵中)에서 그 책자를 대신에게 내어 보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모두 스스로를 탓한 것입니다. 동성과 혼인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대하여 사대부로서 누가 감히 비방하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잘못 들은 성싶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정릉에 대한 의논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말하여 이의가 없었습니다. 연중에서 배척하려 하였다는 말은 더욱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징의 일의 경우, 상소가 도착하기 전에야 장차 구원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은 본디 이이(李珥)가 주장한 의논으로서 송시열이 제창한 일이 아니었으니, 또한 어찌 욕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그때 의논한 일에 대해 다 비방받았다고 여겨 스스로를 탓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원소(原疏) 가운데에 정승을 논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하게 여겨 오랫동안 의논해 처리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상이 비로소 그 소에 대해 대신에게 명하여 어전에서 품정(稟定)하게 하였는데 실행한 것도 있고 시행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영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믿고 있는 것은 오직 경들 두어 대신이다. 그런데 경이 지금 병을 핑계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그전에 앓았던 병이 잠깐 도져서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에 불안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자상으로 보면 경이 불안한 것은 그럴 만한 형편이지만, 끝에 말한 뜻으로 보면 과격한 듯하다. 이미 말한 바가 있는데 경이 줄곧 병만 핑계대고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도 같다. 경의 관대한 도량으로 어찌하여 나라의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을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빨리 나와서 정사의 도리를 논하여 지극한 희망에 부응해야 한다."
하였다. 【송시열의 소 가운데에 비평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인피하고 물러갔으므로 비답이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9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박지(朴贄)를 장령으로 삼았다.

 

이달에 염병으로 죽었다고 각도에서 보고한 수가 모두 1천 4백 70여 명이었다. 삼남(三南)과 원양·함경 등의 도는 우역이 더욱 치열하여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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