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4권, 현종 12년 167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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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신사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올해 부역은 혹 올해 전결(田結)에서 책임지워 내게 할 수도 있지만, 지난해 이전에 받지 못한 것은 반드시 모두 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백성들의 위급함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지금 기근 끝이라 인심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상복을 입을 줄 모르는 자까지 있습니다. 부자 간에 서로 유기하 고 형제 간에 서로 도적질합니다. 훔치는 것이 습속을 이루어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으니,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지난해의 전세와 각종 신역을 모두 탕감해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유신(儒臣)의 진달한 말이 진실로 좋습니다만, 국가의 경비를 무엇으로도 마련할 수 없으니 전부 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차왜(差倭)가 와서는 오늘날과 같이 늦게까지 머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 사람을 칼로 상하게 하고 왜관을 함부로 나가 폐단을 일으키고는 관으로 돌아갈 뜻이 없으니, 큰 변고에 해당됩니다. 도주(島主)에게 글을 보내 책임을 지워야 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 이전에 관왜(館倭)가 폐단을 일으킬 때 본도에 글을 보내겠다고 하면 또한 자못 움찔하며 그쳤었습니다. 지금 마땅히 본도에 글을 지어 보내되 미리 차왜에게 알도록 한다면 혹 꺼리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인하여 그 기색을 관찰해서 처리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왜인들에게 이와 같이 놀랄 만한 일이 있는데도 동래 부사(東萊府使)와 부산 첨사(釜山僉使)가 금단하지 못하였으니 모두 논죄해야 합니다."
하고, 치화가 아뢰기를,
"영남 백성들은 너나 없이 흉흉하여 두려워하며 짐을 싸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하고,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도주에게 서계(書契)를 보내 차왜가 오래 머무르는 이유를 힐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먼저 서계를 보낸 연후에, 다음으로 동래부사와 부산 첨사의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전 승지 박세성(朴世城)이 그 아비 환(煥)과 함께 여역으로 인하여 모두 죽었습니다. 지금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려 하는데 운구할 것이 없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상사에 필요한 물건과 상여꾼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영남의 전조(田租)의 반을 시일을 늦추어 납부하도록 명하였다. 도신이 치계하기를,
"왜료(倭料)·공작(公作) 등의 쌀을 원수대로 왜인에게 주었기 때문에, 지난해 전세에 대해 반을 늦추어 납부케 하라는 명이 있더라도 모든 읍이 균등하게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올해 전세에 대해서도 그 반을 내년 가을까지 늦추어 납부케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밤에 천둥 번개가 쳤다.

 

10월 4일 임오

정태화(鄭太和)를 영중추로, 홍처후(洪處厚)를 공조 참판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이상진(李尙眞)을 경상 감사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이훤을 이조 좌랑으로 삼고,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을 형조 판서로 발탁하였다. 유중이 자못 치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도성 가운데의 종루, 경복궁 문앞, 동대문 안의 세 곳의 대종(大鐘)이 동시에 진액이 흘렀다. 그 색은 담황이고 그 맛은 조금 짰다.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니 약방(藥房)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문무 참하관(參下官)은 근래 더욱 사람이 부족한데도 이미 경과(慶科)022)  를 늦추었습니다. 예전부터 매년 봄 가을로 으레 정시(庭試)를 베풀었는데 오랫동안 설행하지 않았으니, 사람을 뽑는 조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이러한 뜻이 있었는데 근래 농사가 흉년이 들었기에 설행할 겨를이 없었다."
하고, 이어 정시를 별도로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도적을 체포한 수령은 다섯 명이 차야 비로소 논상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그 일로 인하여 입시해서 아뢰기를,
"강도 세 명을 체포한 자는 곧 가자(加資)를 받았는데 지금의 사정은 전날과 다릅니다. 양민도 장차 도적이 되어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강도로써 논하고 상전(賞典)을 더해주기까지 하니, 그 수를 늘려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 이에 다시 5명을 한계로 삼고 항식(恒式)으로 정하였다.

 

밤에 크게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왔다.

 

10월 5일 계미

가주서 문헌징(文獻徵)이 행 대사헌 송준길에게 전유하고 왔다. 준길은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배천 군수(白川郡守) 최상익(崔商翼)은 성미가 급하고 경박하여 본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논의에 맞장구를 치고 벗들에게 빌붙어 구차하고 요행히도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의 반열에 외람되게 끼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명관(名官)임을 믿고 교만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관서(關西)로 명을 받들고 나갔을 때와 호남의 부관으로 있을 때에는 전도되고 경망하여 우스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됨이 이러하니 청현(淸顯)의 직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직임일지라도 맡길 수 없습니다. 또 배천은 본디 이름난 고을이고, 더구나 이런 흉년 끝에는 수령의 직임을 더욱 잘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되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교리 윤경교(尹敬敎), 수찬 최후상(崔後尙), 부수찬 홍주국(洪柱國) 등이 우레의 변고를 인해 차자를 올렸다. 대략에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나는 사람은 묘당의 4, 5인과 삼사의 신하들에 불과합니다. 대궐 밖 천리 안에서 원망 근심하고 한탄하며 상께 아뢰기를 원하는 자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천하의 의리는 무궁하고 일시적인 변통은 여러 가지입니다. 성명께서 만약 여러 말을 살펴 받아들이고 눈과 귀를 널리 열어놓으신다면 좋은 말과 좋은 계책이 어찌 오늘날 묘당과 삼사가 진달하는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신들의 소견으로는 두 해의 세(稅)를 올해 모두 징수해서는 안 되는데, 조정에서는 거두어들인 자가 이미 많아서 균등하게 시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동법(大同法)을 시험하고자 하고 성상의 뜻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을 맡은 관리가 경비를 아까워하여서 형편상 간섭하고 구애되는 바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끝내 시행하기를 바라실진대 얽매는 잗달은 말에 흔들리지 마소서.
신역(身役)과 징포(徵布)를 지난해 이래 거두지 못한 경우 탕척하기를 청하였는데 묘당이 어려워하였습니다. 올해의 흉년은 전쟁과 다름이 없습니다. 국가가 병자·정축년 이후라면 포흠을 납부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망하거나 죽은 자에 대하여 징수할 수가 있겠습니까. 올해 농사가 덜 된 것을 지난해에 비교한다면 차이가 있지만, 여느 해에 비교한다면 역시 흉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느 해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견감해주는 조치가 있을 것인데, 올해는 대흉년의 뒤를 이은지라 경비가 크게 부족하고 변통할 형편이 못되어 해마다 거두지 못한 포역(布役)을 탕척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명께서 하기 원하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이 듣건대, 정축년 초에 호조에서는 단지 수십 필의 포목을 나라의 저축으로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에 재물이 없어 나라꼴이 안 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비록 재력이 크게 부족하지만 그래도 정축년 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성명께서 만약 백성 구제할 마음을 지니시고 일 맡은 신하가 정성을 다하여 움직이도록 책려하신다면 결단코 크게 부족함은 없을 줄을 신들은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한 배를 탄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군신 상하가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고 당면한 어려움을 구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우대하여 비답하였다.

 

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 등이 수행 왜인 50여 명을 거느리고 동래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였다. 신후재(申厚載)·정석(鄭晳)이 역관(譯官)을 시켜 타일러 말렸더니, 답하기를 ‘병을 빨리 치료해야겠다.’ 하고는 잇따라 닷새 동안 가서 목욕하였는데 신후재 등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이때 왜인이 날로 더욱 횡포를 부렸다. 평성태가 번번이 이곳에서 늙어 죽겠다고 말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고, 또 도중(島中)에서 말을 가져와 상경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평성태가 또 역관에게 말하기를,
"차왜가 장차 강호(江戶)에서 나올 것인데 그의 호칭은 손우위문(孫右衛門)이라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녹이 4, 5십만 석이고 관작(官爵)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비전(肥前)·살마(薩摩)·축전(筑前)의 태수(太守) 같은 이도 조만간에 나올 것인데, 귀국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른바 살마(薩摩)는 왜인 중에서 별다른 종족인데, 그 성질이 가장 독하다고 한다.】  그들이 강호를 빙자하여 협박하고 공갈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기 때문에 영남에 소요가 일어나 사람들이 다 봇짐을 싸놓고 있었으며 서울의 인심도 어수선하여 다들 변이 조석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정치화가 상에게 아뢰기를,
"차왜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또 나온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 사이의 정상이 참으로 매우 괴이합니다. 어찌 그 협박으로 인하여 따를 수 없는 청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왕래가 잇따라서 제공할 것이 떨어져가고, 더구나 인심이 어수선하여 심지어는 임진년에 이미 경험한 변과 같다고 증거대고 있으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하였다.

 

10월 6일 갑신

판의금 김수항이 청대하여 상이 인견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김덕원(金德遠)·박천영(朴千榮) 등의 일은 다른 옥사와 다릅니다. 당초 대간이 아뢸 때 단지 나문만을 청하고 죄를 정하자고는 청하지 않았으니, 의금부로서 곧장 법률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상의 결정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아뢴 중에 천영 며느리의 장계 내용에서는 전적으로 옥사 때문이었고, 천영의 공초에서는 과거 합격자 발표의 일에 비중을 두었다. 그 주안점이 차이가 난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양편의 원정(原情)을 이미 받들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 사람을 보내 적선(謫仙)을 만류하였던 일에 대해서 오시복(吳始復)과 유하익(兪夏益)은 자기들이 하였다고 하고 천영은 덕원(德遠)의 짓이라고 합니다. 누가 그 일을 하였는지 비록 모르기는 하지만, 언문 편지를 하여 가는 것을 만류한 일이 있었으니 천영의 마음에 어찌 의심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부탁하기를 꾀하였다는 말을 시복 등이 숨길 수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대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도승지 이은상이 아뢰기를,
"근래 겨울 우레의 변고가 해마다 있었는데, 어젯밤 천둥 번개가 친 것은 그 중 심한 것이었습니다. 번쩍번쩍하는 빛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여름철과 같았습니다. 재이가 겹쳐 일어나는 이때에 군신 상하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이전부터 이러한 때에는 2품 이상 삼사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기 생각한 바를 진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여러 신하를 부르시어 재앙을 그치게 할 계책을 하문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겨울 우레의 변고가 매년 이와 같으니, 장래에 무슨 화가 있을 조짐인지 모르겠다. 내 마음이 놀랍고 두려워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천변이 자주 일어나면 인심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쉽습니다. 성상께서 걱정하고 두려워하시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중도에서 끊어질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만약 옥후가 조금 편안하실 때 제신들을 불러들여 당면 정사의 궐실을 물으신다면 또한 어찌 이익되는 바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빈청으로 와 모이게 하고 그날 삼사의 제신들을 아울러 불러 입대(入對)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주목(州牧)에 합당한 사람이 근래 더욱 부족하여 전일 뽑힌 자가 매우 적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뽑아 아뢰어 등용할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7일 을유

김환(金奐)을 정언으로 삼고, 홍처대(洪處大)를 발탁하여 평안 감사로 삼고, 김익훈(金益勳)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비국이 천거한 사람을 쓴 것이다.

 

10월 8일 병술

상이 우레의 변고로 대신 및 육경과 삼사의 제신들을 인견하고 각자 소견을 진술하게 하니, 제신들이 차례로 일을 주달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변이 이미 신으로부터 말미암았으니, 어찌 감히 별도로 다른 말을 하면서 어떤 변고가 어떠한 실수의 반응이라고 지척하겠습니까. 다만, 근래 상하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폐단은 중외에서 함께 걱정한 바였습니다. 반드시 성경(誠敬)을 다하여야 이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재앙을 만나면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조금 시일이 지나가면 곧 해이해집니다. 이러하고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삼백 년 부탁의 중임을 항상 생각하시어 못과 골짜기에 임한 듯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은 다음 또 뭇 신하를 면려시켜야 합니다. 신들에게 죄가 있다면 또한 죄로써 죄를 주어야 하지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는 죄가 고관에게 미치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걱정스럽습니다."
하고, 좌의정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신 같은 자가 외람되게 섭리(燮理)의 책임023)  을 맡았으니 어찌 천변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적임자를 얻어야 함께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상(右相)에게 성심껏 돈유하여 면려한다면 어찌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 이 어려운 시기를 당해 신 또한 심부름하여 나갈 것입니다. 다만 신과 같은 자를 책망하여 면직시키시고 어질고 덕있는 자를 다시 뽑기를 원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경계를 보이심은 모두 과인의 몸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 경들의 허물이겠는가. 우상에게도 또한 돈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지금 나라 사정의 위태로움은 다시 아뢸 필요도 없습니다만, 해마다 계속 기황이 들어 팔도가 고달픕니다. 이 때를 당하여 비록 상서로운 별과 구름이 있다 한들 어찌 즐거워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올 겨울 우레는 전에 비해 더욱 심한데 재앙을 만나 하문하심이 단지 형식적이니 어찌 재앙을 멈추게 할 만하겠습니까. 상께서 항상 이러한 때의 근신하심과 같이 행동하신다면 어찌 재앙을 상서로움으로 전환시키기에 어렵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한 달 동안 마음을 지킬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성상의 마음은 혹 중단됨이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께서 실덕(失德)이 없으시고 조정에 권력자와 간신이 없으니, 재앙을 초래한 이유를 말하려 해도 실로 지적할 곳이 없습니다. 병자에 비유하자면 그 증세를 모르고 어디에 약을 쓰겠습니까. 다만 진작시키지 못하고 정령이 해이해졌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근일의 한두 가지 일로 말해보겠습니다. 암행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려한 지 오래 되었으나 아직 출송하지 못하였으니, 밖에서는 백성을 위하는 뜻이 조금 느슨해졌다고도 생각합니다. 송준길의 상소가 들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도 비답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밖에서는 현자를 대하는 도리가 조금 줄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일을 성상의 마음에 두십시오. 자신을 닦고 반성하는 도리가 중도에 끊어짐이 없고, 정사의 명령을 내리는 사이에 조금도 해이함이 없다면 저절로 재앙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매년 큰 흉년이 드는 것은 근고에 없던 일입니다. 군신 상하가 장래를 경계할 수 있습니다만, 재이가 이제 극에 이르고 매년 겨울 우레가 있으니 매우 두렵습니다. 변고는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기 유(類)로 응하는 법입니다. 대저 우레는 하늘의 호령이니, 상께서는 진작시킬 수 없음을 항상 걱정하셨습니다. 만약 이러한 변고로 인해 우레처럼 빠르고 바람처럼 드날리어 모든 일에 있어 진작시키시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항상 처음 재변을 만났을 때처럼 하신다면, 어떤 재앙인들 그치게 할 수 없겠습니까. 우레의 변고가 생겼던 애초에 즉시 궐실을 하문하셔야 했는데, 청한 후에 비로소 하문하는 분부가 있으시니 또한 진작시키는 도리가 아닙니다. 항상 전전긍긍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으시어 조금도 해이함이 없어야 천심을 감동시켜 되돌릴 수 있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지금 재앙을 초래하는 이유는 꼬집어 내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자신을 닦고 반성하는 도리로는 진작만한 것이 없습니다. 옥후가 편찮으시니 비록 매일매일 힘쓰기가 어려우시겠지만, 신린(臣隣)을 자주 접하셔야 합니다. 또 백성들이 바야흐로 정이 막히고 굶주렸으며 왜인의 사정도 예측할 수 없으니, 또한 근신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비록 천재가 없었더라도 나라의 일이 망극합니다. 해마다 기황이 들었는데 올해의 기근은 실로 예전에 없던 것입니다. 사망한 민생이 반이 넘고 나라의 저축은 이미 떨어졌습니다. 병조 호조의 경비로는 겨우 몇 달을 버틸 뿐입니다. 백성을 구제할 방도가 진실로 없습니다. 그런데 천재가 또 이 지경에 이르니 나랏일에 생각이 미치면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성상께 원하건대, 전전긍긍 두려워하는 마음을 깊이 더하시되 마치 병란 중에 있는 것처럼 하시고,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되돌리고 나라의 계책을 이을 방법만을 생각하십시오."
하고, 공조 판서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천도는 지극히 공정하여 군신상하가 만약 ‘사(私)’ 자 하나를 제거한다면 하늘의 뜻을 감동시켜 되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사사로움을 일체 제거하기가 쉽겠습니까. 원컨대, 성상께서는 일에 있어 모두 공정함을 다하고 견고하게 뜻을 세우십시오. 사사로움 때문에 공정함을 해치는 조정의 신하를 죄주어 용서치 않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판윤 이경억(李慶億)이 아뢰기를,
"지금 나라 일은 이미 망해가는 형세입니다. 성상께서는 산과 들에 처하신 때와 같이 하신다면 떨쳐 일어남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공사(公事)를 출입할 때 번번이 지체될까 걱정이니, 이는 떨쳐 일어나지 못한 소치입니다. 오늘날 상황은 병란보다 심한데 사치의 풍조가 날로 심합니다. 이러한 흉년을 만났으니 더욱 폐단을 혁파해야 합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몸으로 솔선하시어 뭇 아랫사람들을 이끄십시오. 이것이 실로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하고, 대사헌 장선징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어려운 상황은 이미 갈 데까지 가 있는데, 지난번 우레의 변고는 이 또 무슨 상(象)입니까. 군신 상하가 바로 두려워하며 몸을 닦아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재앙을 맞은 처음에는 경계하고 근신하지 않으신 것이 아닌데, 조금 시일이 지나가자 곧 해이해져 데면데면해졌습니다. 이러고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성상의 몸이 늘 조섭 중에 있으시어 경연을 자주 열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정령을 내리시는 사이에 진작시키는 조처가 전혀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이러한 흉년을 만나 백성이 모두 구덩이에 굴러 죽어도 구제할 방도를 모르고, 다만 상례에 따라 몸을 닦아 반성하는 도리만을 상달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오직 성상의 입장에서 생각을 가다듬어 새로움을 도모하고 뭇 신하들을 면려시키는 것뿐입니다."
하고, 병조 참판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제신들이 진달한 바, 진작시키지 못했다는 말은 진실로 옳습니다.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고명(高明)함을 부드러움으로 다스리고 침잠(沈潛)함을 강단으로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기질의 치우침은 큰 현인이라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성상의 자질로서 이와 같은 공부에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모든 조화의 근원입니다. 상께서 강단으로 다스리지 못하신다면 신하들이 장차 본받을 것이니, 이것이 걱정입니다. 근일 제신들이 진달한 바가 있어도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니, 이와 같고서도 신료들의 해이함을 책망하시겠습니까. 겨울이 따뜻한 변고는 실로 여기에 연유합니다. 옥당의 제신을 인접하여 다스리는 요체를 논하신다면 반드시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공사(公事)를 간혹 승지를 불러 결정하신다면 뭇 신하들을 접하는 때가 많아지고 아름다운 소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우상(右相)을 초치하신 분부는 또한 좋습니다만, 송준길(宋浚吉)과 이유태(李惟泰)에게도 하유하셔야 합니다. 만약 올라오게 할 수 없다면 송조(宋朝)의 고사에 의거해 봉사(封事)를 올려 대답하게 해야 합니다."
하고,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예전에 주자(朱子)께서 겨울 우레로 인해 상차하시되 ‘감히 멋대로 편안하게 굴지 못하고[不敢荒寧], 엄숙히 공경하며 삼가 두려워하는 것[嚴恭寅畏]으로 답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윗말은 수성(修省)이고 아랫말은 진작(振作)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차자 중에서 우러러 아뢰었던 것입니다. 성상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니 어찌 각고의 공부를 견뎌내시겠습니까. 상제(上帝)를 공경히 대하는 마음을 항상 간직하시면 되지, 또한 어찌 우레처럼 빠르고 바람처럼 드날리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하여 그 이치를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인군(人君)의 덕은 공정함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반드시 이치를 밝힌 다음에야 공정할 수 있으니, 또한 체득하여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 신의 뜻으로는 정시(庭試)를 설행하는 일은 부당합니다. 인재가 부족하니 과거를 설행하여야 본디 마땅하지만, 옛부터 경과(慶科)도 흉년에는 파하였습니다. 이러한 큰 흉년을 만나 어찌 이와 같이 명목없는 과거를 설행해야 합니까. 고요하면 길하고 움직이면 흉한 것이 오늘날의 형세입니다. 마땅히 고요해야 합니다."
하고,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제신들이 모두 진작시킬 것으로 말을 합니다. 이는 필시 성상께서 병통이 난 곳이니 뭇 사람들의 심정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이 듣기로는 사치의 해가 천재보다 심한데 근래 옥장(玉匠)·은장(銀匠)의 무리들이 궁궐 안에 출입한다 하니, 이같은 흉년을 만나 반드시 낭비가 있을까 근심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직접 검소함으로 솔선하여 그것을 금하십시오. 또 밖에 전해지는 말을 듣건대, 나인과 내시가 기도하는 일로 사찰을 드나든다 합니다. 성상께서 이미 니원(尼院)을 혁파하셨는데도 오히려 이러한 폐단이 있으니 매우 놀랍고 한탄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성상께서도 모두 알고 계십니까? 궁중에서 혹 이와 같음을 면치 못한다면 별도로 더 신칙하셔서 이러한 일이 없게 하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장령 윤계가 아뢰기를,
"근일 재력이 떨어진 것은 모두가 각 아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옛날 감사와 병사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었는데, 지금 병조와 호조의 경비가 이미 떨어졌는데도 양서(兩西)의 감사 병사 및 각 아문의 사사로운 저축은 매우 많습니다. 모두 옮겨서 나라의 용도에 보충하여야 합니다."
하고,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군신 상하가 힘이 빠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화가 날 지경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른바 ‘자강(自强)’이란 바로 스스로를 면려함입니다. 근일 일을 맡은 자 중 직임을 다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진실로 군신들의 죄입니다만, 상의 입장에서 솔선하려고 애쓰는 것은 그래도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시대가 평안하고 일이 없어도 해이해져서는 오히려 안 되거늘 더구나 재이가 거듭 나타나는 때를 당하여 데면데면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교리 윤경교(尹敬敎)가 아뢰기를,
"하늘의 재앙은 백성의 원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경계시키되, 경덕(敬德)으로써 소민(小民)을 화합시키는 근본으로 삼고, 소민을 화합시킴으로써 나라의 명을 존속시키는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지금의 나랏일은 새로 큰 난리를 겪은 것 같습니다. 백성의 역을 감해야 하는데도 매양 경비를 걱정하여 널리 탕감하는 은전을 시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백성은 은혜를 모르고 나랏일은 망극하게 됩니다. 시기를 늦추어 신역을 바치게 함은 임시방편의 계책에서 비롯된 것이니, 뒤미쳐 바치게 할 때에는 백성들이 거듭 곤고하게 됩니다. 경술년024)   이후 제반 신역을 일체 모두 탕감하고, 내수사(內需司)에서 저축한 것을 모두 내어 경비로 지급한다면 실질적인 혜택으로 장차 저절로 믿음이 갈 것입니다."
하고, 교리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허다한 백성의 폐해를 모조리 진달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신이 외방관에 있을 때 본 것으로 말하면, 양민들은 강보에 싸인 아기도 모두 세초(歲抄)의 대상이 되어 즉각 포(布)를 거둡니다. 백성의 폐해 중 이것이 가장 가련하고 조화로운 기운을 해칠 만하니, 별도로 변통하셔야 합니다."
하고, 정언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제신들이 진달한 ‘자강(自强)’하지 못하다는 말은 모두 옳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 쉬임 없는 공부를 더하신다면 해이해진 정령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수찬 최후상(崔後尙)이 아뢰기를,
"해마다 기근이 들고 우레가 또 경계를 보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호령이 그 마땅함을 잃으면 때가 아닌데 우레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래 형정(刑政)이 마땅함을 잃어 옥사가 지체되어 이러한 재앙이 초래되었을까 신은 저어됩니다. 또 쓸데없는 병사를 길러 나라의 계책을 허비하고 세초(歲抄)를 일단 그만두게 하였는데 속오군(束伍軍)의 결원은 오히려 충원하니, 다시금 정파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신들의 진달한 바가 모두 과인 자신을 경계하고 가르치는 말이며, 그 중 조처해야 할 일도 없지 않다."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제반 신역을 늦추어 거두는 일은 신의 뜻도 경교(敬敎)와 같습니다. 기유년 【1669 현종 10년.】  이전에 거두지 못한 각종 포(布)에 대해 모두 시기를 늦추어 거두도록 이미 결정하였지만, 진실로 지금의 경비에 쓰이는 것이 아니면 특별히 전액 탕감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모든 관리와 군사를 혁파하여 나라에 비용 드는 일이 없다면 전세와 신역을 비록 탕감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도 않으면서 용도가 이미 떨어진다면 나라를 어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 납부하지 않은 자는 대부분이 완악한 백성입니다. 만약 감해 준다면 양민 중 먼저 납부한 자는 홀로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이니, 균등치 못함이 큽니다. 더구나 신역은 경술년 조목에서조차 세 등급으로 나누어, 면제하거나 감하거나 납부하였으니, 어찌 뒤섞어 똑같이 감해 줍니까. 지난해 이전의 것으로 징수할 데가 없는 부류에 있어서는 조사하여 탕감함이 과연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적이 또 아뢰기를,
"신은 사람이 없기에 정시를 설행하자 청하였었습니다. 지금 민적(敏迪)의 말을 듣건대 ‘흉년에는 과거를 설행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니, 제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는데, 제신들이 모두 이미 정해진 과거를 중지할 수 없다고 말하여 상이 그대로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금부의 옥수(獄囚)가 대부분 지체되어 상이 친림하여 소결(疏決)하였다. 이날 도배(徒配)된 자가 2명, 삭직된 자가 8명, 파직된 자가 2명, 완전 석방된 자가 1명이었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도적을 잡아 자급이 올라간 수령의 수가 너무 많아 남잡함이 심합니다. 대개 올해의 기근이 예전에 없었던 것이었으니, 이른바 도적이라 하는 자가 대개 양민으로서 주림과 추위에 급박해져 한 되 한 말의 쌀을 훔쳐 눈앞의 위급함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체포한 후에 대당(大黨)이라 칭하고 자급을 올리기까지 하니, 일이 매우 한심합니다. 《대전(大典)》에서 보건대 ‘경내의 사나운 대당에 대해 조치를 적절히 하고 기회를 포착하여 체포하는 등 드러나게 공력을 들인 수령에게 가자한다.’고 하였습니다. 법문의 본의는 결코 주린 백성들의 좀도적 몇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듣건대, 근래 인대(引對)할 때 가자할 수 있는 도적의 수를 정하였다 하니 지금부터는 남잡한 폐단이 없겠지만 이전에 뒤섞어 시행한 부류를 구차하게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올봄 이후 도적을 잡아 자급이 올라간 자는 다시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체포한 수를 아뢰게 하소서. 만약 정한 수에 차지 못하는 자와, 비록 정수에 찬다 하더라도 사나운 대당을 기회를 잡아 체포한 것이 아닌 경우는 일일이 바로잡아 상전(賞典)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익상이 그후 또 탑전에서 연계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각도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각 진보(鎭堡)의 방위군은 당초 설립한 의도가 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를 납부하기를 자원하는 자 이외에는 번을 서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런데 매월 각읍에 점고하여 군인을 보낼 적에 병사, 수사, 변장(邊將)의 무리들이 반드시 베를 거두고자 하여 번을 서지 못하게 하면서 한결같이 도로 보내고 억지로 베를 납부하게 한 다음에야 그칩니다. 이같이 목면이 희귀한 때에 빈털털이의 잔약한 나졸들이 부르짖고 원망함이 더욱 심하니 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각도 감사로 하여금 도내를 엄격히 단속하여 베를 내기를 자원하는 자 이외에는 반드시 당사자가 번을 서게 하소서. 만약 전습을 다시 밟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아뢰고 죄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각도에서 조사 보고하고 변통하도록 명하였다.

 

전 사간 박지(朴贄)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영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필(李泌)이 국상이 났을 때에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인 죄는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정(原情) 중에 그럴싸하지도 않은 다른 말을 인용하여 논핵한 대관을 배척하였습니다. 헌부가 그 원정에 따라 지레 죄를 논한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고 또 뒤폐단에 관계됩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10월 11일 기축

김덕원(金德遠)·박천영(朴千榮)·오시복(吳始復)·유하익(兪夏益) 등의 벼슬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김덕원 등이 일찍이 헌부의 계사로 인하여 하옥되었는데, 그들이 공초에서 서로 변명해주고 조정 신하들도 옹호하는 소를 서로 올렸다. 금부가 아뢰어 위에서 재결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에 대해 판부(判付)하였다.
"이 사람들이 제각기 공초한 것을 보면 김덕원은 옥사를 번복하려 한 일이 없으니, 본디 물어볼 만한 꼬투리가 없다. 그러므로 옥사(獄事)의 체례로 논한다면 분간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을 듯하나 그가 사대부의 신분으로서 일개 기생으로 인하여 거조가 전도되고 경망하였으니 이것만도 매우 놀라운 일인데, 더구나 촉탁한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어지러이 서간(書簡)을 보내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더더욱 터무니없는 짓이라 장래의 일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김덕원·오시복·유하익 등은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내보내라. 박천영은 아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지극한 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뺏다는 말을 보태어 넣었으므로 말뜻이 바르지 못하다. 이 때문에 그 정상을 용서하여 뒷날의 그지없는 폐단의 길을 크게 열어놓을 수 없다. 또한 관직을 삭탈하여 내보내라."

 

지평 윤가적(尹嘉績)·정유악(鄭維岳)이 사헌부 서리를 사환으로 보낸 일 때문에 서로간에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10월 13일 신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10월 14일 임진

상이 뜸을 떴다.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이숙(李䎘)을 우승지로, 강시경(姜時儆)·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6일 갑오

관학 유생(館學儒生)을 인정전에서 시강하고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대사헌 장선징, 장령 윤계가 아뢰기를,
"삼가 김덕원(金德遠)·오시복(吳始復)·유하익(劉夏益)·박천영(朴千榮)에 대한 판부(判付)를 보니, 특별히 성상께서 판단을 내리시고 말의 취지가 엄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만 정상을 따지지 못하고 한 법률로 죄를 과하였으니, 이 때문에 신들에게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개 현규(玄圭)의 처가 억울함을 송사한 문서의 내용에 속인 부분이 있으니 가장(家長)이 된 자가 어찌 감히 모른다고 하겠습니까마는, 합격자 발표에 관한 이야기를 삽입한 것을 그 죄안(罪案)으로 삼는다면 정상을 참작하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덕원 등의 처리에 있어서는, 서찰을 부리나케 주고받았던 일은 이미 남김없이 드러나서 숨길 수가 없는데 요로에 청탁함을 금하는 것은 나라에 분명한 법령이 있으니, 파직시키는 벌이 어찌 성조(聖祖)가 법을 제정한 의도에 위배되지 않겠습니까. 서울과 지방에서 청탁하는 것이 이미 고질이 되었으니, 지금 만약 사람의 지위 고하에 따라 한번이라도 흔들린다면 나라꼴이 안 되는 지경에 장차 이를 것입니다. 덕원·시복·하익 등을 인조조(仁祖朝)의 성헌(成憲)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였다. 다섯 번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홍처대(洪處大)는 본디 번잡하고 어려운 일을 처리할 만한 재목이 아닙니다.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 대신이 심지어 적합하지 않다고 아뢰어 체직시켰었는데, 지금에 와서 발탁해 직임을 주고 있으니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는데, 세 번 아뢰자 체직시켰다. 또 아뢰기를,
"수원 부사 김익훈(金益勳)은 음관(蔭官)으로 발신하여 별로 특이한 성적이 없는데 갑자기 중임에 발탁되었으므로 여론이 흡족해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또 직임을 바꾸어 제수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말이 퍼졌습니다. 조정의 정사가 이와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다. 네 번 아뢰어서야 따랐다. 이조가 홍처대는 이미 그 벼슬에서 갈렸다 하여 가자(加資)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그대로 주게 하였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등이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홍처대에게 그대로 자급(資級)을 주라고 하신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신은 알겠습니다마는, 대간(臺諫)이 반드시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도 법을 지키고자 하는 말입니다. 지금 그들의 청을 따라 주면 후일 발탁하여 올려줄 길이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마침내 간원의 계청을 따랐다.

 

10월 17일 을미

관왕묘(關王廟)의 소상(塑像)에 물기가 젖어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서울 백성이 피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앞다투어 전하였다.

 

성균관의 구일 제술(九日製述)에서 으뜸을 차지한 진사 이만봉(李萬封)에게 바로 전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내리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점수를 주었다.

 

상이 양십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장계를 보니 청나라 임금이 6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심양(瀋陽)을 나와 북쪽 변방의 굴혈(堀穴)을 순수(巡狩)한다고 합니다. 이곳은 창성(昌城) 너머의 변방입니다. 황제가 멀지 않은 지역에 나온다는 것을 들은 이상 문안사(問安使)를 보내야 합니다. 일찍이 갑오년025)  에는 칙사가 와서 황제가 나와 순수한다고 하였기에 문안사를 보내고자 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을 문안사로 삼고 또 서장관을 두었습니다. 지금은 대신을 파견하여야 하는데 대신 중에는 갈 만한 사람이 없으니 종반(宗班)을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즉일 정사(政事)를 열어 종반을 차출하고, 서장관도 차출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상하가 걱정하며 황급해 하는 이러한 때를 당하여 원임 대신이라고는 단지 정태화(鄭太和)가 있을 뿐인데 병으로 절하고 꿇어앉기가 어려워 아직 숙배(肅拜)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정신은 아직 무슨 일을 꾀할 수 있습니다. 노병(老病)한 대신에게 반드시 절하고 꿇어앉으라고 책할 필요는 없으니 묘당의 의논에 들어와 참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매양 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질병을 염려하여 직사(職事)로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후로는 비국(備局)에 와서 참석하게 하라."
하였다.

 

10월 18일 병신

개성 유수 박장원(朴長遠)이 죽었다. 박장원은 어미를 효성으로 섬겼다. 일찍이 월과(月課)로 인하여 까마귀가 어미에게 먹이를 먹인다[反哺烏]는 시를 지었다. "선비에게 어머니가 살아 계시나, 가난하여 맛진 음식 해드리지 못하네. 하찮은 저 새도 사람을 감동시키니, 까마귀의 효도에 눈물을 흘렸네.[士有親在堂 貧無甘旨具 微禽亦動人 淚落林烏哺]"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인조 대왕이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이 절구(絶句)를 보건대 효성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어 봉양하지 못하는 것은 옛사람이 상심하는 바이었다. 쌀과 베를 넉넉히 주라."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겼다. 전형(銓衡)을 두 번 맡았는데 정사에 혐의스럽거나 사사로운 것이 없었고, 지위가 판서에 이르렀으나 집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근신하여 남을 움직일 만한 힘이 드러나지 않았고 일을 할 만한 재능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10월 19일 정유

천둥이 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큰 콩만하였다.

 

이준구(李俊耉)를 개성 유수로, 안진(安縝)을 병조 참의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삼았다.

 

종루(鍾樓)의 큰 종에 또 진액이 흘렀다.

 

전라도 전주 등의 고을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쳤으며 충청·원양 등의 도에도 우레가 친 변이 있었는데, 세 도의 도신(道臣)이 잇따라 아뢰었다.

 

대마도(對馬島)에서 또 차왜(差倭) 평성지(平成之)를 보내어 예조에 글을 바쳐 왜관(倭館)을 옮기는 일에 대해 거듭 여쭈었는데, 조정에서 또 참판의 이름으로 된 글로 답하였다.
"서신이 잇따라 이르니 깊이 위안이 됩니다만 왜관을 옮기겠다는 청에 대해서는 저번에 답한 글에 매우 상세하게 다 말하였는데, 첫 사자가 돌아가기도 전에 또 이렇게 애써 서신을 보내니 마치 강박하는 듯합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에서 혹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0월 21일 기해

장령 윤계(尹堦)가 입계하는 공사 문건을 잘못 썼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22일 경자

영의정 허적(許積)이 재이로 인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그 끝에 아뢰기를,
"또한 신의 마음에 불안한 것이 있습니다. 헌부의 계사는 오로지 신이 사람을 잘못 등용한 과실을 배척한 것입니다. 홍처대(洪處大)를 논한 데서는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에 대신이 아뢰어 갈았었는데 이제 와서 발탁하여 맡긴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하였고, 김익훈(金益勳)을 논한 데서는 ‘체차하고 제수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말이 이미 퍼졌다.’ 하였습니다. 방악(方岳)026)  ·기진(畿鎭)은 얼마나 큰 직책입니까. 그런데 사사로운 뜻으로 체차하고 제수를 공평한 도리로 하지 않은 것이니, 신하에게 이런 일이 있다면 중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바라건대, 빨리 면직을 허락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천재와 시변이 거듭 이르고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절로 마음이 싸늘하고 뼛속까지 놀란다. 아아, 이러한 재이를 불러온 것은 실로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인데, 경은 어찌 그리도 굳이 사양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한 말은 실없는 것인데 또한 깊이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개의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도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또 마음을 가라앉혀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낭선군(郞善君) 이우(李俣)를 문안사(問案使)로 차출하여 심양(瀋陽)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려 문안하게 하고 또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청나라 임금이 바야흐로 성묘를 하러 간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경내에 이르렀을 때에 청나라 임금이 이미 돌아갔으므로 우가 연경(燕京)으로 들어갔다.

 

10월 23일 신축

대사헌 장선징이 병을 이유로 소장을 진달하여 체직되었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박지(朴贄)를 정언으로, 성후설(成後卨)을 수원 부사로 삼고, 참판 남용익(南龍翼)을 특별히 제수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는 적임자를 얻기가 제일 어려우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형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은 평안 감사에 유임시킨 후 또 임기가 찼습니다. 신의 뜻은 혼자만 고생시켜서는 안 되기에 오랫동안 변방에 두지 않으려 하는 것인데, 좌상의 뜻은 반드시 또 유임시키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 나라에서 자원을 취하는 데는 오직 관서(關西) 뿐이다.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는 자가 아니면 진실로 임명할 수가 없다."
하였다. 허적이 육경(六卿) 중에서 차출하여 보내자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새로 차출하여 보낼 필요는 없다. 형조 판서 민유중을 내년 봄 진구(賑救)하는 동안까지 평안 감사에 도로 유임시키고, 수여한 가자(加資)는 그대로 주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정후량(鄭后亮)은 평소 물망이 가벼웠는데, 포도 대장의 후보에 구차하게 비의(備擬)하였습니다. 포도 대장의 임무는 매우 중요한 것인데 어찌 후량과 같은 자로 의망할 수 있겠습니까. 해조에서 한 일이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실제로 합당하지는 않지만 인물이 부족하여 그랬습니다."
하자, 대사간 이익상이 아뢰기를,
"지금 정치화의 말을 들으니 후량은 전혀 이력이 없고 인망도 평소 가벼웠습니다. 포도 대장은 무변(武弁)을 정밀하게 선택할 자리인데, 해조에서 대뜸 의망하였으니 과연 매우 부당합니다. 병조 판서 민정중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당초 조정에서 간원의 계사에 따라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그 도내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부지런히 하였는지 게을리 하였는지에 대해 살펴서 아뢰게 하였는데, 이홍연이 끝내 살펴서 아뢰려고 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홍연을 이미 추고하고 다시 살펴서 아뢰게 하였는데도 끝내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 번번이 추고할 수도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매우 놀라운 일이라 하여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0월 24일 임인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이 임지로 떠나면서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았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본도가 올해에 입은 재해는 남쪽이나 북쪽이나 다 같아서 도리어 지난해보다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으로 말하면 본디 중요한 지역이니, 더욱 진구에 유념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원양도의 곡물 8천 석을 영남에다 갚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북방의 백성을 먼저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마는 이것 또한 적습니다. 그러니 북로(北路)와 접한 관서의 산간 고을 중 혹 관에서 대여했던 곡물을 원수(元數)대로 받아들인 고을이 있을 것이니, 이 곡물을 옮겨서 진구하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남구만이 이어서 북로의 변방 방비가 허술한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북로는 서관(西關)처럼 소문이 나는 곳이 아닌데 성지(城池)·군기(軍器)를 전연 보수하지 않았으니, 신이 형세를 보아 점차로 보수하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역 시장을 여는 근처는 필시 소문이 날 것이다만 그 나머지 각처는 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허적이 각 군문(軍門)에서 만든 조총(鳥銃)과 활을 본도에 내려보내어 변진(邊鎭)의 병기를 보충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어제 탑전에서 민유중(閔維重)의 가자(加資)를 그대로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지 않아 물의에 비난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처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출사시켰으나, 이익상이 다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정언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명철한 임금이 삼가고 아끼는 것으로는 벼슬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을 자헌(資憲)의 품계로 높여 제수한 것은 형조의 장관을 삼기 위한 것인데 이미 전직에 유임시켜 놓고 그대로 새 자급을 지니게 하는 것은 실로 명분이 없습니다.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민유중의 일은 다른 일과 같지 않으니, 한가지로 도로 거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5일 계묘

이여발(李汝發)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대장은 다른 벼슬과 다르니, 성상의 의중으로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어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10월 26일 갑진

장선징을 대사간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예조 참의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29일 정미

상이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하여 상번군(上番軍)에게 솜옷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죄수를 살펴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게 하였다.

 

이달에 서울과 지방에서 여역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러나 각도의 우역(牛役)은 점점 치성해지고 있었는데, 양남(兩南)과 원양도(原襄道)가 더욱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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