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도 암행 어사 이혜의 서계(書啓)에 따라 남원 부사 나만엽(羅萬葉), 무안 현감 김성구(金聲久)를 파면하고, 진안 현감 윤매(尹梅)를 금부에 내려 고신(告身)을 박탈하였다. 불법적인 일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과 현감 정수석(鄭洙碩)이 진휼의 정사를 가장 잘하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준직(準職)을 제수하게 하였다.
전라도에서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무안(務安) 등 열두 고을에 대해 제반 신역(身役)의 3분의 1을 감면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일 기묘
관서 지방의 원회미(元會米) 3만 석과, 회미 이외에 남은 쌀 8천 석을 내년 봄까지 서울로 운반하여 진휼하는 데 쓰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진휼 당상(賑恤堂上) 민정중(閔鼎重)이 별도로 진구해야 한다는 뜻을 탑전에서 아뢰어 이때에 이 명이 있었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별도로 비축한 은이 거의 만 냥에 이르는데 평안도에서는 긴히 쓸 데가 없습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갖다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그것을 공물가(貢物價)가 필요한 관청에 나누어 주고 그 가격에 상응하는 쌀을 진구하는 데 옮겨 썼다.
12월 3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호조가 아뢰기를,
"우의정 송시열의 녹봉을 본읍에서 전세(田稅)의 쌀과 콩으로 수송하는 일은 상의 하교에 의거해 본도에 분부하였습니다. 그런데 본가에서 바야흐로 사면소를 진달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작 거행하지 못하고 이제 여러 달에 이르렀으니 일의 모양이 미안합니다. 다시 본도로 하여금 수송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하유하기를,
"참혹한 기근을 잇따라 당한 끝에 또 섬 오랑캐가 지나친 청을 하고 있다. 무릇 수응과 관계된 것은 조금도 지체됨이 없어야만 백성을 구제하고 변방 신하를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정승 자리가 거의 비게 되어 좌상은 강역을 나가게 되었고 우상은 지방에 있는데, 경이 또 물러가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평소에 경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나의 뜻은 저번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경이 지극한 뜻을 헤아렸을 것으로 여겼었는데, 이제 또 직임을 사양하려고 하니 성의가 미덥지 못하였음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경과 의논하여 처치할 긴급한 사무가 매우 많다. 내 뜻을 몸받아 사직소 보내기를 빨리 그만두고 내일 일찍 들어와 만나서 의논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4일 신사
민종도(閔宗道)를 부교리로 삼았다.
12월 5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윤경교(尹敬敎)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엎드려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액운이 들은 시절을 만나 수재와 한재가 재앙이 되고 해마다 흉년이 져서 주려 사망하는 참상이 지난해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거기다 여역이 크게 돌아 쪽박을 들고 구걸하며 죽소(粥所)에 의지하여 얻어먹던 저 무리들은 진휼을 그친 후에 남김없이 죽었습니다. 기근·여역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비록 임진·계사년 전란의 참혹함이라도 거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의 죽음이 이와 같은데 수령에게는 오히려 진휼을 잘했다고 금관·옥관의 자급을 주기도 하고 옥새가 찍힌 교지로 포상을 더해주기도 합니다. 만약 백성을 기르기를 적절히 하여 온통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사망이 매우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흩어진 자가 되돌아 오지 못하고 사망한 자는 이미 구제받지 못하였는데, 단지 글로 된 보고에만 의거하여 포상하는 은전을 지나치게 베풀고 있습니다. 저 받는 자가 어찌 마음 속으로 부끄럽지 않으며, 조정의 거조는 장차 어떻게 어리석은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고 복종시킬 것입니까. 신이 듣기는 금천 현감(衿川縣監) 이보(李葆)의 자급을 올려줄 때 대신이 이르기를 ‘진심으로 진휼의 정사를 펴 경내에서 한 사람도 굶어 죽은 자가 없다.’고까지 하면서 이로써 상달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어 듣기로는 금천 땅에 유리걸식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토착민 중에 한 부락이 전부 죽은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니, 이는 심하게 앞에 대놓고 속인 것이 아닙니까. 위아래가 속이는 것이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고 백성이 대부분 수척하여도 달려가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신의 뜻으로는 금번 포상한 것을 다시 일일이 조사하여 바로잡은 연후에야 관리의 규율이 바르고 허위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몇 해 사이로 인심이 크게 변하여 백성이 본성을 잃었습니다. 부자 형제와 같은 살붙이의 친함으로도 오히려 서로를 보존해주지 못한다면, 군신 상하가 명분으로 유지하는 것을 또 어찌 믿겠습니까. 지금 이 서흥(瑞興)의 변고는 또한 일조 일석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위로하고 결속을 굳건히 하는 조치가 없다면 신은 구구한 형벌과 법률로는 그 역란(逆亂)의 조짐을 막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아아, 국가의 화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일이 이르지 않고 화가 싹트지 않아도 지혜로운 자는 오히려 미리 알고 걱정을 하는데, 더구나 지금 위망의 형세는 이미 눈섭을 태우듯 박두하였는데도 군신 상하가 그러려니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저 묘당의 제신들은 부귀에 빠지고 작록을 애석하게 여겨 다만 보신할 마음만 먹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돌보지 않으니 진실로 책할 것도 못 되지만, 우리 국가의 삼백 년 빛나는 기업이 전하의 몸에 이르러 하루 아침에 엎어지는데도 보존을 도모할 방도를 생각지 않으시니, 이것이 어찌 전하의 가업이 아니길래 차마 스스로 무너뜨리십니까. 전하께서 신의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한 번 오늘날의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를 가지고 미루어 보십시오.
겨울 우레가 매번 10월에 일어나고, 태백성이 항상 정오 방향에서 보이며, 혹성, 흰무지개, 지진, 돌이 옮겨가는 변고가 없는 해가 없습니다. 겨울이 봄날처럼 따뜻하여 복사 살구꽃이 다시 피며, 도성 안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낍니다. 이밖에도 인물 요괴가 거듭 나타나서 가종(街鍾)에 진액이 흐르고 토상(土像)에서 피가 나오며 성문이 저절로 닫힙니다. 이와 같이 도리를 잃은 잘못에서 연유한 놀랄 만한 변고들을 이루 다 손꼽을 수 없습니다. 민생(民生)들은 근심하고 원망하며 윗사람을 질시하여 함께 망하자고 하는 탄식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도적들이 남몰래 일어나 곳곳마다 불러 모아 장차 흙이 무너질 듯한 형세입니다. 서울에서는 와전된 말이 날마다 일어나고 소요가 날로 더해가 사람들이 모두 담봇짐을 싸고 조석간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구중 궁궐에 익명의 투서를 하니, 이에 천시(天時)는 희망할 수 없고 인심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 나라가 대단치는 않아도 조종조의 깊고 두터운 인택(仁澤)에 힘입어 굳은 결속이 흐트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번 화란을 겪었어도 오늘날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인심이 이미 떠나 다시 믿을 것이 없으니, 비유컨대 죽어가는 병자가 단지 한 가닥 원기(元氣)에 의지해 겨우 부지하고 있다가 원기가 이미 끊어진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저절로 눈물과 통곡이 나옵니다.
신이 전하께서 즉위한 이후를 엎드려 뵙건대, 정사를 펼칠 때 대단한 잘못이 없었고 백성에게 세금을 거둘 때 멋대로 포악하게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랏일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민생은 날로 더욱 곤궁해지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대개 전하께서 시들하여 떨치지 못하고 어물어물 결단하지 못하며, 뜻을 단련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쳐진 대로 맡겨두어 수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옥후가 편찮아 깊은 궁궐에 거하시며 군신을 드물게 접견하고, 군국사무를 모두 수상에게서 처리하게 하여 스스로 주장할 수가 없고 오직 그 말을 따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신이 옛 대신과 같을 수 있다면 나랏일이 어찌 이 극한까지 이르렀겠습니까. 그런데 나라의 계책을 돌보지 않고 생민의 걱정을 생각지 않으면서, 오직 몸을 편안히 할 계책을 힘쓰며 자리를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만을 품을 뿐입니다. 안에 들어가 고할 때는 뜻에 영합하여 따르기만 하여 총애를 굳히고, 밖으로 나다닐 때는 둘러 막고 엄호하여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룹니다. 그러나 외방 주군(州郡)의 득실, 민생의 질고, 부역의 과중함은 망각의 영역에 놓아둡니다. 도신 읍재(道臣邑宰)가 만약 보고하는 바가 있으면 일체 물리치고 오직 반대하는 계사를 능사로 삼아 전하의 백성 사랑하는 은택이 밑으로 다하지 못하고, 사방의 원망이 모두 전하의 몸에 모이게 합니다. 대신의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근자에 평안 감사를 의논하여 천거할 때 해조에서 이것을 가지고 이미 정사(政事)를 품의하였고 전하께서 이미 정사를 열도록 명하셨는데, 대신은 대각의 논에 노기를 품고 영의정의 신분으로 동료 재상을 핑계대어 끝내 갖추어 의망하지 않고, 심지어 그날의 정사에서 차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대신이 비록 높기는 하더라도 나름대로 남의 신하입니다. 만약 나라에 체통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같이 거만하겠습니까. 또 소결청(疏決廳)의 설치는 성상의 의도가 실로 공연한 것이 아니니 수상에게 부탁한 것은 또한 돈독하게 위임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오히려 시일을 끌어 이미 여러 해가 지났어도 아직도 품결하는 조치가 없습니다. 단지 이 두 가지로도 지위와 총애를 믿고 멋대로 전횡하여 다시는 조정이 있는 줄 알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책려하지 않고 그 뜻을 따르려고 힘쓰시면서 오히려 충성스러워 의지할 만하다고 하시어 깨닫지 못하십니다. 식견있는 선비들은 누구라도 남몰래 탄식하며 세상에 주운(朱雲)039) 같은 사람이 없다고 모두 말합니다. 이같은데도, 엎어짐과 위태로움을 붙들어 유지하며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는 사직의 신하가 될 것을 아직도 바랄 수 있습니까.
신이 듣건대, 우의정 송시열이 근래 봉사(封事)를 올려 민간의 질고를 두루 아뢰고 아울러 백성 구제의 계책을 진달하되 상세히 조목조목 열거하여 대단히 길게 이어졌다 합니다. 상상컨대 전야에 있는 몸으로 실상을 목도하고 이와 같이 충성으로 아뢰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시 시행하게 하리라 신은 여겼는데 상소가 들어간 지 누순(累旬)이 지난 뒤에 비로소 품처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백성을 괴롭히는 현 재상의 말에 대해서는 모두 굽혀 따르시면서 백성을 편안케하려는 유현(儒賢)의 아룀에 대해서는 어찌 한결같이 이처럼 머뭇거리고 어렵게 여기십니까. 전하의 좋아하고 싫어함과 취하고 버림이 이처럼 뒤집혔으니 나랏일을 구제하기 어려움도 괴이할 게 없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스스로 결단하여 행하지는 않고 현 재상과 상의한다면 대신의 반대하는 계사가 그 사이에서 흔들어 방해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어 한 조목씩 시행하시고 시속의 견해가 옆에서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를 신은 절실히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에 어찌 적은 보탬이 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는 다만 그 말을 채용할 뿐만이 아니라 다시 더욱 정성과 예의를 차려서 한 번 불러 오지 않으면 두 번에 이르고, 두 번 불러 오지 않으면 세 번에 이르러 은근함과 간절함이 반드시 이르게 한 연후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저가 이미 나라와 휴척(休戚)을 함께 하는 의리가 있으며, 과감히 세상을 잊고 멀리 떠나는 선비가 애초에 아니니, 어찌 선왕을 섬기는 마음으로 전하를 섬기려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에 어진 재상이 있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장자(長者)를 청하여 나를 돕게끔 하는 도리는 생각지 않으시고 유독 수상에게 정사를 전담하게 하여 나랏일을 날로 망가지게 하시니, 신은 남몰래 걱정입니다.
또 백성을 위해 역을 감하는 정사는 실로 당면한 급선무입니다. 만약 크게 탕감해주는 은전을 베풀지 않고 단지 조그만 혜택을 행할 뿐이라면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풀고 이미 흩어진 인심을 합할 길이 없습니다. 전일 입시한 자리에서 탕감을 아울러 행할 것을 감히 청하였었는데 대신이 끝내 완악한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안에서부터 저지되었으니, 신은 한탄하였습니다. 신은 시골에서 자라 백성들의 사정을 익숙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완악한 백성이란 백 중에 한둘도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백성들입니다. 지금 몇 안 되는 완민(頑民)에 다 섞어 넣어 그 해를 모두 입게 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국가가 완민에게 속더라도 속는 것은 지극히 작고 혜택을 입는 것이 지극히 크다면 어찌 한 푼 한 오라기를 따져서 이 잔인한 정사를 행하겠습니까. 지금 외방의 주군(州郡)은 조정의 엄한 영에 쫓겨 가을걷이 후에 곧바로 독촉하여 형벌에 얽어매는 것이 성화보다 급합니다. 불쌍한 우리 백성은 봄·여름의 기근과 여역에서 겨우 벗어난 끝에 겨우 숨이 붙어 있어 오로지 추수만을 바라는 자들인데 이같은 억울함을 당해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눈앞의 괴로움을 면하고자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여가가 없이 약간의 수확을 모두 관에 바치고, 스스로 죽을 수는 없어 흩어져 도적이 됩니다. 원래 부세에 응할 한 척의 포, 한 말의 곡식도 없으면, 흘러다니다 강한 자는 도적이 되고 약한 자는 구덩이에서 굴러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호남·영남 내륙의 산골짜기에 가득차서 세력을 제어할 수 없다 합니다. 이들이 무리를 지어 겁탈을 하다가 점차 강해진다면 그 세력이 반드시 관고를 털며 수령을 죽이게 되고,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면 또 서울에 올라올 것입니다. 적미(赤眉)·황건(黃巾)의 무리와 명나라 유적(流賊)의 화가 지나간 일의 분명한 경계가 아닙니까.
근래 대신(臺臣)이 올해 환자 중에 온 집안이 사망하였거나 도망한 경우를 조사해 내어 모두 탕감토록 청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묘당이 조사하도록 문서를 보내면서, 반드시 온 집안이 사망한 자로서 인족이 없고 전토가 없는 자만을 뽑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한 주(州), 한 군(郡)의 많은 인원이라도 해당되는 수가 극히 적었다고 합니다. 조정의 일이 이토록 자잘하니 탄식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당초 국가에서 진휼을 베풀어 백성에게 주는 것은 본디 죽음을 구제하려 한 것인데, 구제하지도 못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렀으면, 애통하고 측은해 하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어찌 차마 이미 죽은 사람에게 다시 거두어냅니까. 인족에게 미치는 폐해는 보통 해에도 백성을 크게 병들게 하는 것인데, 더구나 이 위급한 시절에 어찌 차마 다시 이 조치를 취해 백성을 물과 불 속으로 내몰고는 전혀 구해내지 않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금년에 쌀을 꾸어간 사람으로서 자신이 죽거나 도망한 자는 다른 것을 계산하지 않고 곧바로 조사해 탕감해야 성인의 정사를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민역을 감할 수는 있지만 경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신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국가가 재물 사용하는 방법은 단지 절용에 있을 뿐이지 백성을 괴롭히는 데 있지 않고,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원인은 재물을 사용하는 데 있지 않고 오로지 인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당 덕종(唐德宗)은 애당초 경림고(瓊林庫)와 대영고(大盈庫)의 재물을 가졌어도 마침내 봉천(奉天)의 화를 초래하였고, 봉천에서 돌아와서는 창고 안에 단지 현미 한 섬이 있었을 뿐인데 흥원(興元)의 조서(詔書)가040) 일단 내려지자 인심이 화합하여 마침내 국세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임진·병자의 전쟁 후 국가의 재력이 남김없이 탕갈되었는데 단지 인심이 이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잿더미를 수습하고 마침내 재건을 이룩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나라의 오늘날 상황은 마치 큰 난리 끝과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위 문공(衛文公)041) ,월 구천(越句踐)042) 이 처신했던 것과 같이 자처하고 무릇 모든 행사를 한결같이 그 법을 따른 다음에야 나라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안위와 이해에 대해서 대충대충 세월만 보내고, 단지 지금의 대신과 함께 날마다 백성을 학대하는 정사를 편다면 어찌 망해가는 화를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후회한들 또한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전하께서 어공(御供)과 각전(各殿)의 방물(方物)을 특별히 감하였다 하니 매우 성대한 조처입니다. 다시 전하께 바라건대, 이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마시고 이 마음을 더욱 미루어 궁중의 용도를 감하고 또 감하여 십분 검약하게 하도록 힘쓰십시오. 아직 감하지 않은 공물도 일을 주관하는 신하에게 일일이 대조하여 상세히 깎아 정하게 하고 무릇 백성의 힘을 늦추어줄 수 있는 것은 터럭 하나라도 대소를 헤아리지 말고 반드시 행하도록 하십시오. 여러 관청의 마부 값과 기타 갖가지 사치한 비용도 모두 감하도록 하십시오. 군신 각자가 서로를 면려하여 마음과 생각을 씻어내고 죽을 마음을 먹고 사는 즐거움이 없게 된 후에야 죽음에서 나와 삶에 들어가고 화가 바뀌어 복이 되며 혹 천명을 연장시키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또 언로의 개폐는 국가의 흥망과 관련됩니다. 몇 년 이래로 언로가 막히어 상하가 자기 잘못을 듣지 못하여 위(衛)나라의 군신(君臣)043) 과 똑같아졌으니, 이는 모두 전하께서 간언을 매우 심하게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나라가 망하게 되는 까닭을 한마디로 말씀하신 것과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전하께서 정사에 임하신 이후 말 한 마디를 상주고 착한 것 하나를 따른 적이 있으 십니까. 말이 비록 따를 만하더라도 대각에서 나왔으면 배척하고, 일이 비록 행할 만해도 대각에서 비롯되었으면 머뭇거리십니다. 일의 시비와 이치의 타당성은 살피지 않고 번번이 거만한 낯빛을 지으며 제까지것 하는 마음을 먼저 지니십니다. 또 그에 따라 배척하여 꺾고 욕을 보여 크게는 귀양보내고 작게는 견책하여 파직시킵니다. 이러한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경계하여 임금과 재상의 잘못은 아예 감히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또한 신이 가만히 전하를 보건대, 몇 해 이전에는 혹 천재를 만나면 곧 간언을 구하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비록 형식적인 하찮은 행동이고 끝내 실효가 없는 것으로 귀결되었어도 자기를 책하고 도움을 구하는 뜻은 그래도 있었는데, 몇 년 이후로는 이 조처마저 아울러 폐하였습니다. 하교에 응하여 진언하는 저들이 비록 성상의 마음을 조금도 감동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사방 사람들은 이것으로 성인의 얕고 깊음을 측량하고는 ‘우리 임금이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해 천리 밖에서 내친다.’고 합니다. 그 관계된 것이 어찌 적은 일이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후로 이전 습관을 통렬히 고치시고, 항상 허물 듣기를 좋아하는 마음을 위주로 하여 안으로 잘못을 부지런히 닦는 의리로 제신들을 면려시키며, 사방의 말을 유도하여 뭇 사람의 장점을 모으소서."
하였다. 소가 들어가니, 상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헌납 윤경교는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었던 날이 많았고 간관의 직책에 제수된지 오래되었는데도 입시하였을 적에나 등대하였을 때에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여러 날 동안 인피하고 들어가 좌우로 관망하다가 당류를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하여 기세를 올리며 팔을 걷어붙이고 몸을 곧추세워 앞장섰다. 아, 인심이 흉악하고 교활하기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 단 말인가.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닌데 어떻게 일마다 모두 잘할 수 있겠는가. 그 단점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그런데 억지로 헛말을 만들어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고 감히 말하였으니, 나라의 체통으로 헤아려 보건대 그대로 두어 간교한 꾀를 키울 수 없다. 윤경교를 우선 체차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가서 전유하게 하기를,
"나라의 일이 망극할 뿐만 아니라 사체로 헤아려 봐도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크다. 괴상하고 흉측한 사람이 억지로 만든 변변치 못한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야 한다."
하였다. 【허적이 윤경교의 소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곧 도성밖으로 나갔다.】 정원이 【도승지 이은상(李殷相), 좌승지 이연년(李延年),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 동부승지 여성제(呂聖齊).】 하교를 돌려보내며 아뢰기를, "비망기를 엎드려 보건대, 헌납 윤경교를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말씀이 극히 엄하여 매우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경교의 상소 내용이 비록 극히 광망하고 경솔하더라도 직책이 대간인지라 너그럽게 포용하는 성상의 도리로는 차마 듣지 못할 비답을 선뜻 가해서는 본디 안 됩니다. 지금 이 진노하시는 하교는 실로 경교의 본 마음과는 다릅니다. 중외에서 보고 듣는 사람에게 놀라고 의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대각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리에 흠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비망기를 되돌립니다." 하고, 세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9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과학-천기(天氣) / 과학-생물(生物)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司法) / 왕실-국왕(國王)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註 039] 주운(朱雲) : 한 성제(漢成帝) 때의 직신(直臣). 황제의 사부(師傅) 장우(張禹)가 승상이 되어서는 별로 하는 일이 없자, 주운이 상서를 올려 "신에게 상방(尙方)에 소장된 참마검(斬馬劍)을 내려주시면 영신(佞臣) 한 사람을 베어 여타 사람을 면려시키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주운에게 벌을 주려하자 주운이 전각의 난간을 당겨 부러뜨렸다. 황제가 뒤에 화가 풀려 원난간을 보존시키고 단지 보수하게만 하여 주운의 직간(直諫)이 드러나게 해주었다. 《한서(漢書)》 권67(卷六十七) 주운전(朱雲傳).[註 040] 봉천(奉天)의 화를 초래하였고, 봉천에서 돌아와서는 창고 안에 단지 현미 한 섬이 있었을 뿐인데 흥원(興元)의 조서(詔書)가 : 봉천은 당 덕종이 주자(朱泚)의 반란에 쫓기어 파천한 곳이다. 흥원은 당나라 장수 이성(李晟)에 의해 장안(長安)이 수복된 후 개정 반포한 덕종의 연호이다. 《신당서(新唐書)》 권225(卷二百二十五) 주자전(朱泚傳).[註 041] 위 문공(衛文公) : 춘추 전국 시절 위나라 임금. 적(狄)에게 패한 후 제 환공(齊桓公)의 도움으로 수도를 초구(楚丘)로 옮긴 뒤 백성과 노고를 같이하며 나라를 흥하게 하였다.《사기(史記)》 권37(卷三十七) 위 세가(衛世家).[註 042] 월 구천(越句踐) : 춘추 전국 시절 월나라의 임금. 회계(會稽)에서 오왕(吳王) 합려(闔廬)에게 패한 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치욕을 갚았다. 《사기(史記)》 권41(卷四十一) 월 세가(越世家).[註 043] 위(衛)나라의 군신(君臣) : 전국(戰國) 시대 때 위후(衛侯)가 잘못된 계책을 말했는데도 뭇 신하들이 호응한 것을 두고 자사(子思)가 비판한 군신관계를 지칭함.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卷一) 주기(周紀).
정원이 【도승지 이은상(李殷相), 좌승지 이연년(李延年),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 동부승지 여성제(呂聖齊).】 하교를 돌려보내며 아뢰기를,
"비망기를 엎드려 보건대, 헌납 윤경교를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말씀이 극히 엄하여 매우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경교의 상소 내용이 비록 극히 광망하고 경솔하더라도 직책이 대간인지라 너그럽게 포용하는 성상의 도리로는 차마 듣지 못할 비답을 선뜻 가해서는 본디 안 됩니다. 지금 이 진노하시는 하교는 실로 경교의 본 마음과는 다릅니다. 중외에서 보고 듣는 사람에게 놀라고 의혹스러울 뿐만 아니라 대각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리에 흠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비망기를 되돌립니다."
하고, 세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가 성상의 뜻을 허적(許積)에게 전유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적이 아뢰기를 ‘신이 형편없이 임금을 섬겨 거듭 대간 신하의 배척을 입고는 허겁지겁 도성을 나와 바야흐로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다가 뜻밖에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멀리 와 따뜻한 말씀을 전하니, 성은이 융숭할수록 신의 죄가 커진다.’ 하였습니다."
12월 6일 계미
집의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흉칙 교활하다는 등의 말씀을 갑자기 대각의 신하에게 하시고 심지어는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 윤경교는 언론의 자리에 있는 신분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목격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일어나 상소하여 아뢰었습니다. 대개 국가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고락이란 의지하고 믿는 대신에게 전적으로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그 폐단의 근원을 궁구하여 잘잘못에 대해 말한다면 대신을 책망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책망하겠습니까. 그 본심을 살펴보면 결코 다른 마음이 없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관망하거나 부합할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말을 들으실 때에 화평한 마음으로 찬찬히 살피지 못하시고, 상소 중 논한 것이 대신이나 중신에 관계되면 옳고 그른 말이나 곧고 굽은 일을 막론하고 대뜸 진노하여 일체 물리치십니다. 이것은 언로를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신은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여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여러 날 동안 다시(茶時)에 회좌하는 것은 모두 대행하도록 청하다가 갑자기 오늘에 와서야 서둘러 출사하였다. 어찌하여 공과 사를 분별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 매우 놀랍다."
하였다. 신정이 ‘지나친 거조를 보고 감히 병을 핑계대고만 있을 수 없었으므로 억지로 일어나 대청(臺廳)에 나가 생각한 바를 대략 아뢰었는데 엄준한 비답이 뜻밖에 나왔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지평 윤가적(尹嘉績), 장령 윤계(尹堦)도 송시열의 소 가운데에 풍자한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처치하기를,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로잡으려는 뜻이 간절한 나머지 애써 일어나 일을 논하였으니 대간의 체례에 매우 맞았습니다. 그런데 엄한 비답으로 물리치셨으니 실로 실정에 벗어난 일입니다. 언론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대신에게 배척받았으니, 소의 본의가 완전해지기를 요구하는 데에 있었다 하더라도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끝내 모른 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정은 출사시키고 윤가적·윤계(尹堦) 등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윤경교는 언론의 자리에 있으면서 과감히 말하여 숨기지 않았는데, 그 뜻은 다만 현재의 어려운 일을 개연히 생각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스스로 실천해 보려고 한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교를 보건대, 말씀이 엄준하여 심지어는 괴상하고 흉칙하다 하여 특별히 그의 벼슬을 체차하셨습니다. 대신도 물론 우대해야 하겠습니다만 대각도 배식(培植)해야 하니, 윤경교를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삼았다. 윤경교(尹敬敎)를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특별히 제수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윤경교는 오늘 안으로 하직하게 하고 말을 주어 보내라."
하였다. 이튿날 양사(兩司)가 윤경교를 외직(外職)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2월 7일 갑신
승지 여성제(呂聖齊)를 보내 영의정 허적(許積)에게 돈유하여 들어오게 하였는데, 허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가 과분한 자리에 오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묵은 허물을 뒤미처 생각하면 부끄럽고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는데, 더구나 더럽혀진 몸으로 이미 그르친 나라의 일을 거듭 그르칠 수야 있겠습니까."
부응교 이해(李嵆) 부교리 김만중(金萬重) 수찬 최후상(崔後尙)·홍주국(洪柱國)도 상차하여 윤경교를 힘껏 구제하고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빨리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8일 을유
비국의 유사 당상에게 명하여 긴급한 사무는 영의정 허적에게 가 의논한 뒤에 탑전에서 품정하게 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이날 밤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전유하기를,
"아, 오늘날 나라의 일은 참으로 너무나 위태로워서 풍랑이 거센데 물이 새는 배를 타고 있는 상황으로도 그 급함을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이게 참으로 무슨 까닭에서인가. 오로지 내가 덕이 박하여 신명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 간사한 사람이 때를 틈타 저격하였으니, 말이 매우 괴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없는 것을 있다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하였다. 이게 참으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사람의 도리를 가지고는 책망할 수 없다. 경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스스로 인책하는가. 충심으로 왕실을 위해 근로한 것이 경의 죄란 말인가.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닌 이상 참으로 일마다 모두 잘할 수는 없는 법이므로 만약 이 일은 옳지 않고 이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감히 기세를 돋구어 팔을 걷어붙이고 거짓을 꾸미고 없는 일을 만들어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는 말을 해댈 수 있단 말인가. 흉칙하고 간사한 꼴은 마치 속이 환히 보이는 듯한데, 경은 어찌하여 혐의하는가. 오늘날 묘당이 텅 비었다. 이때가 참으로 어떠한 때인데 경은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경이 줄곧 굳이 사직하여 짐을 벗고자 기필하지만, 내 뜻이 굳게 정해졌는데 어찌하겠는가. 반드시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서 내 바람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 이연년(李延年)·여성제(呂聖齊)가 ‘간사한 사람이 때를 틈타 저격한다느니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 없다느니 흉칙하고 간사한 꼴은 속이 환히 보이는 듯하다느니 한 분부가 미안하다.’는 이유로 하교를 돌려보냈다. 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힐문하기를,
"어느 승지가 이 의논을 먼저 내어 이 계사를 만들었는가?"
하자, 이연년 등이 ‘합의하여 초안을 꾸몄으므로 실로 먼저 발의한 자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또 사알을 시켜 힐문하기를,
"반드시 먼저 발의한 자가 있었을 것인데 이처럼 미루어 핑계대니, 매우 간교하다."
하였으나, 이연년 등이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알이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이윽고 승전색(承傳色)이 나와 상의 분부를 전하기를,
"너희들이 끝까지 미루어 핑계대는 것은 사알이 상세히 전하지 못한 탓인가? 이 계사는 누가 지은 것인가? 숨김없이 그대로 아뢰라."
하였다. 승전색이 이어서 말하기를,
"상께서 바야흐로 진노하고 계시니, 이름을 들어 대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자, 여성제는 아뢰기를,
"붓을 잡은 자는 신이었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하고, 이연년이 아뢰기를,
"상의하여 초안을 꾸몄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여성제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정원이 아뢴 것은 매우 터무니없으니, 좌승지 이연년을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한 뒤에 또 이연년에게 하교하기를,
"윤경교의 간사한 꼴은 말하자니 놀랍고 분하다. 그의 죄가 어찌 체차에 그치겠으며, 그에 대한 벌이 어찌 외직에 보임하는 데 그치겠는가. 실로 의도가 있었는데 정원이 아뢴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어 임금을 무시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놀라웠다. 두세 번 물어보았는데도 끝내 속이고 있으니,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어찌 이러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당류에게 편을 든 자취를 끝내 스스로 엄폐할 수 없으며 임금을 속인 죄는 조금도 용서할 수 없으니, 동부승지 여성제를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이연년이 불안하여 소를 올리고 나가니, 밤이 이미 삼경이었다.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와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를 패초하여 입직하게 하였는데, 이지무가 먼저 들어와서 ‘동료가 죄받는 전지는 결코 요행히 면하였다 하여 봉입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아뢰니, 답하기를,
"말이 매우 놀랍다.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이튿날 정원이 두 신하를 추고하고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엄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또 도로 거두기를 청하기를,
"두 신하는 임금의 지나친 하교를 목격하고서 엄한 위엄을 무릅쓰고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관례에 따라 복역(覆逆)한 것을 깔보았다 하고 사실대로 대답한 것을 속였다 하시며, 일을 같이 한 사람을 구별하여 같은 당류에게 편을 들었다고 유독 죄를 주시니, 또한 하찮은 것까지 포용하는 도량에 흠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처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모두 견제하고 막으려는 뜻이니, 참으로 매우 통탄스럽다.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를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 전유하여 즉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의 신하가 외직에 보임되는 것은 성세의 일이 이미 아닌데 왕명 출납의 신하가 형관에게 내려졌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졌습니다."
하니, 상이 또 좌부승지 맹주서를 보내어 하유하기를,
"내 뜻은 이미 전에 다 말하였거니와, 경은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소망에 부응해야 한다."
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하루 동안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가 두 번이나 왔으니 이것은 실로 천고에 없던 특별한 예우입니다. 은혜가 더욱 융숭해질수록 두려움만 더욱 깊어집니다."
하였다.
왜차(倭差) 평성태(平成太)가 죽었다. 평성태가 나올 때에 왜관(倭館) 옮기는 일을 반드시 허락받을 것으로 여기고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맹서하였는데, 전후에 억지를 부린 일이 다 평성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조정에서 굳게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평성태가 분노하여 병이 나 동래부에서 죽었다. 역관(譯官)들은 혹 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었다고도 한다. 왜인이 그 주검을 궤에다 담고 그 가운데에 소금을 넣어 채웠는데 도중(島中)으로 주검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동래 부사 정석(鄭晳)이 치계하여 아뢰니, 상이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에게 이르기를,
"악당의 우두머리인 왜인이 이제 스스로 죽었으니, 진정될 가망이 있으려는가?"
하니, 정지화가 아뢰기를,
"일의 형편이 전과 다른데 부관(副官) 무리들이 어떻게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이전에 왜관의 왜인이 죽었을 때에는 비록 돌본 일이 없었습니다만 이 왜인은 차사(差使)의 이름을 띠고 왔으니 상을 치르고 제사 지내는 데 드는 물품을 주어 먼 데에서 온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대신의 뜻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드디어 본도에 명하여 쌀 10석과 명주 5필과 무명 15필과 유둔(油芚) 3부(部)와 납촉(蠟燭) 10쌍(雙)과 과실 3종(種)을 주게 하고, 또 내국(內局)의 부용향(赴蓉香) 10개를 보냈다.
가주서 박치도(朴致道)가 우의정 송시열에게 가 전유하고 돌아와 시열의 말을 아뢰었다.
"신은 근래 면직을 바라는 글로 인하여 외람되게 시사의 한둘을 언급하였습니다. 대저 사람이 궁하거나 근본으로 되돌아갈 때는 그 말이 선한 법인데 신은 심지가 혼란하고 정신이 혼미하여 이치에 벗어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바야흐로 견책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 사관을 멀리 보내시어 따뜻한 비답을 내려주시니 신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대저 신의 말이 잘못되었는데 성명께서 그래도 포상하여 용납하시니 누군들 생각한 것을 즐거이 고하지 않겠습니까. 장차 천하의 선함이 다 귀의할 것입니다. 나라의 사정이 비록 매우 위태롭다 하더라도 아직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신은 형편없음을 스스로 알기에 오랜 동안 물러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해진 목숨이 다하여 조석으로 스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구한 정성을 다시는 펼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깊이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성덕을 더욱 진전시키시고 백성의 아픔을 더욱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 조정의 천명을 보존하소서."
경상도 암행 어사 신정(申晸)이 서계하여 고령 현감(高靈縣監) 이중휘(李重輝), 함창 현감(咸昌縣監) 조지강(趙持綱),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상정(李象鼎), 남해 현령(南海縣令) 임식(任湜)을 파직하니, 잘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시현(李時顯)에게 준직(准職)을 제수하라고 명하니, 진휼의 정사가 한 도에서 으뜸이기 때문이었다.
12월 9일 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지난밤 승지를 나문하여 추고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신은 외방에 있어 환수하시라고 아뢰는 데 동참하지 못했습니다만, 무슨 캐낼 일이 있다고 이같이 지나친 행동을 하십니까. 성상의 유지 중에 실정과 다른 하교가 있으면 으레 반드시 봉환(封還)하는 것이 오늘날 비로소 있게 된 규례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의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상 무릇 묻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아뢰고 숨기지 않는 것이 옳다. 내가 물은 것은 단지 먼저 이야기를 꺼낸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지 애초부터 죄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처음 물어도 곧바로 고하지 않고 두번 세번 물어도 시종여일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남의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숨김 없는 도리이겠는가."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두 신하가 성상의 유지 중에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하교가 있는 것을 직접 보고 함께 복역(覆逆)한 것은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문하셨을 때 각자 당사자로 나선 것은 이것도 사실대로 고한 것이지 어찌 숨기고 피하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 일은 원래 성상께서 물을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이 있었다면 마땅히 진달했을 내용이지만 지금 대신의 자리가 모두 비었습니다. 또 국기(國忌) 때문에 삼사에서도 논집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승지가 진달하지 않으면 누가 다시 언급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소리를 지르며 이르기를,
"그렇다면 장차 삼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인가. 어젯밤에 명한 일을 지금까지 지연하니, 그 의도를 알겠다."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을 죄주시고 싶으시다면 죄를 주시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하교는 매우 거북하지 않습니까. 신이 비록 형편없지만 평소의 소원은 오직 임금을 속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상의 금일 거조가 불가하다는 것을 결단코 알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12월 10일 정해
김만기(金萬基)를 대사성으로, 원만리(元萬里)를 병조 참의로,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관(內官)이 말미를 받아 내려갔을 때에 폐단을 저지른 일이 있다 하니, 매우 놀랍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 내관이 폐단을 저질렀으면 감사가 아뢰어서 뒷날에 징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도 장계로 알린 일이 없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경기 감사를 추고하라."
12월 11일 무자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신은 본디 인원 수만 채우는 신하일 뿐입니다.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여 일에 맞닥뜨리면 그르쳐서 나랏일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이 마땅히 물러나야 함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접때 탑전에서 동료 정승이 상소한 가운데 정승에 대해 논한 것을 보건대, ‘가부를 아뢰어 보좌하고 세상을 다스린다.’는 일이 이미 신에게 근사하지도 않고 보면 물리치고 바꾸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격언이었으므로 곧이어 상소하여 물리쳐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간의 신하가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간절하여 소를 올려 극열히 논하고 신의 죄를 열거하면서 예로부터 비루한 자의 정태와 소인의 죄목을 모두 신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심지어 주운(朱雲)과 같이 기개가 곧은 사람이 세상에 없는 것을 한탄하였으므로 신은 심장이 놀라고 가슴이 떨려서 황급히 도성을 나가 여항에 물러가 엎드려 있으면서 날마다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명께서 공의를 억지로 거스리고 소청을 윤허하지 않으신 데다가 뒤따라서 외직에 보임하시고, 또 이어서 나라를 그르친 신을 극진히 감싸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를 잇따라 보내어 사흘 동안에 네 번이나 왔는데 심지어는 글을 내려 간곡히 타이르셨습니다. 신을 나오게 하시느라 도타이 다그치심이 지극하셨으니, 이는 실로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특별한 예우입니다. 허물을 지닌 신이 무슨 터럭 하나라도 아까워할 것이 있어 융숭한 은혜가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뭇 사람이 놀라고 의혹하며, 혹 신이 총애를 굳히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성명께서 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신에게 화를 주는 것 밖에는 안 됩니다. 신의 한 몸은 돌아볼 것도 없다고 치더라도 어찌 성상의 깨끗한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천지간에 웅크리고 있으며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옛사람의 이른바 천지가 비록 커도 일신을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신의 오늘날 상황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신이 지금 밤낮으로 피어린 축수를 하며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빨리 귀양보내도록 명하시어 말한 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물의를 펼 수 있게 하여 국가가 다시 편안해지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 하찮은 신의 사사로운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신이 거적에 앉아 벌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므로 감히 군말을 아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는, 변변치 못한 신으로 인하 여 자주 성상이 노하셨습니다. 삼사의 관원과 승지가 논집(論執)하고 복역(覆逆)하는 것은 그들의 직분인데, 혹 엄준한 비답을 내리시기도 하고 혹 금부에 죄를 묻게 하였으니, 신의 두려움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깊어집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모두 양찰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기회를 타고 때를 엿보는 무리와 사람 얼굴에 귀신 마음을 가진 무리가 간교한 뜻을 은밀히 품어 마음 쓰는 꼴을 엄폐하기 어려웠다. 아,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간사한 자가 제딴에는 꾀가 치밀하다고 여겼기에 그 말이 흉악 참혹하고 거짓을 꾸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어찌 이것을 깊이 개의해서야 되겠는가. 동료 정승의 상소 말에 대해서는 전에 비답할 때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마는,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 조석을 보전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경은 필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이 인피하고 들어간 지 이제 이미 반 달이 되었으니 적체된 급한 사무가 어떠하겠는가. 도리에 어그러지기 짝이 없는 말은 맹자(孟子)가 이른바 ‘금수(禽獸)에게 또한 무엇을 비난하겠느냐.’라고 한 뜻과 꼭 들어맞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토록 자기를 허물하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빨리 들어와서 상하의 희망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윤경교를 외직에다 보임하는 것으로 그친 것은 실로 경의 처지를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어찌 여기에만 그치겠는가. 가까이 있는 신하가 속이는 버릇은 가증스러우므로 국가가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 우승지 정륜(鄭錀),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가 아뢰기를,
"금수 두 자는 경전(經傳)에 있는 말일지라도 대뜸 신하에게 할 수 없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데, 이번 하교는 말뜻이 박절하여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계사의 뜻이 내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우승지 정륜이 드디어 가서 전유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건대, 경계하고 가르치심이 지극하셨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또한 미안한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변변치 못한 신으로 인하여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습니다."
하였다. 또 정륜을 보내어 하유하기를,
"근심거리는 매우 많고 믿을 만한 것은 조금도 없는데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갑자기 닥치니,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이 만일 여기까지 생각해 보았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경은 반드시 생각을 고쳤을 것이다. 가까이 있는 신하를 다시 보내어 지극한 뜻을 이르니, 빨리 들어와서 애타는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정륜이 돌아와 아뢰기를,
"허적이 아뢰기를 ‘이미 한밤중이 되어가는데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다시 와서 성유(聖諭)를 받았습니다. 받들어 읽고 나니 속이 탑니다마는, 신의 죄명이 매우 무겁고 공론이 몹시 엄하므로 대궐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실로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땅에 박고 빨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기근이 참혹하여 재력이 바닥났는데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갑자기 닥치니, 민사를 생각하면 어찌할지 모르겠다. 접대하는 예(禮)는 조금도 늦출 수 없고 원접사(遠接使)의 차출은 더욱 긴급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곧 차출하라."
이정영(李正英)을 원접사로, 이경억(李慶億)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전라도 영암(靈巖) 땅에서 가을갈이를 한 보리가 이삭이 패어서 익고 진달래·복숭아·살구가 곳곳에서 꽃이 피었는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2월 12일 기축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전유하기를,
"나라 사정과 백성들의 일이 위태로워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같다. 경이 이것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장차 어쩌겠는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하여 되도록 빨리 들어오라."
하니, 지무가 복명하기를,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죄명이 극히 무거우니 법률상 용서할 수 없다. 천지 사이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은 신이 사리에 어둡고 완악함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지만, 또한 비와 이슬같은 은혜 덕분 아닌 것이 없다. 다시금 대궐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도리가 아니다.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오직 신의 직을 속히 깎아내어 고향에 돌아가서 죽을 수 있게 해주시는 것뿐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다시 전유하기를,
"경이 굳이 사양하여도 내 윤허해 줄 리 없다. 한결같이 허물하여 물러남은 다만 일의 모양만 해쳐서 나라 일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경은 어찌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가. 다시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되도록 빨리 들어오라."
하니, 주서가 복명하기를,
"허적이 아뢰기를 ‘신은 도망할 데도 없고 죽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 성상의 하유를 받들 때마다 죄가 산과 같아 하늘과 땅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어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좌승지 정륜(鄭錀)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전유하기를,
"백성에 대한 근심거리와 나라의 일이 이미 이러한 극점에 이르렀다. 또 북사(北使)가 갑자기 닥친 상황을 맞아 허둥대는 내 마음을 형언할 길이 없다. 이러한 때에 상신의 자리가 한결같이 비었다. 백성들의 부역을 감해주는 등 크고 작은 사무 중에서 경을 기다려 처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지경이다. 경은 어찌하여 한결같이 절실히 사양하는가. 아, 붕당을 끌어들이는 인면 귀심(人面鬼心)의 무리들은 경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제일 특별한 공을 삼는다. 단지 간악한 계책만을 유쾌하도록 하여주고 위망한 나라 형편은 돌보지 않아서야 어찌 되겠는가. 내가 경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목마른 자가 마시기를 생각함과 같으니, 되도록 빨리 들어와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니, 정륜이 복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자고로 인군이 그 신하가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굴며 조정을 무시하는 줄을 알면서도 처형해서 전시하지 않은 경우가 있었는가. 남의 신하가 이러한 죄명을 받았으면서 천지 사이에서 목숨을 붙여두는 경우가 또한 있었는가. 신이 명에 달려갈 수 없는 것은 공의를 두려워 해서이고, 국법을 엄히 여겨서이다. 신은 나아가 이미 나랏일을 망가뜨리고 물러나서는 성상의 덕에 누를 끼쳤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커졌다.’ 하였습니다."
옥당(玉堂)이 또 상차하여 이연년(李延年)을 추고하고 여성제(呂聖齊)를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13일 경인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므로 명령이 내려왔을 때에 혹 지나친 것이 있으면 봉환(封還)하고 복역(覆逆)하는데, 이는 나름대로 출납을 성심껏 하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좌승지 이연년, 동부승지 여성제 등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분이므로, 지나친 거조를 보면 시비를 개진하여 상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직책입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헤아리지 않고 두번 세번 꼬치꼬치 캐물어 잘못한 자를 억지로 구별해내고서 하나는 추고하고 하나는 나문하시니, 보고 들을 때 누군들 놀라고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성스러운 조정의 거조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여성제를 나문하고 이연년을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임금은 한 마디 말이라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전하께서는 윤경교의 일에 대해 너무나 갑작스레 노하고 너무나 심하게 미워하여 비유하신 뜻이 의리를 상실하였고 말씀이 지나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승지가 제몸을 돌아보지 않고 봉환하고 복역한 것은 그들의 직분일 뿐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슨 죄이기에 하옥하기도 하고 특별히 추고하기도 한단 말입니까. 순(舜) 같은 성인으로서도 납언(納言)하는 관원에게 경계하기를 ‘아침 저녁으로 내 명을 출납하되 성심껏 하라.’ 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는 ‘네가 어찌 감히 내 전교를 봉환하느냐.’ 하면서 배척하고 죄주어 마치 임금의 명에 대하여 공손하지 않은 자처럼 하시니, 전하께서 신하에게 책임지워 바라는 것이 어찌하여 그리도 순임금과 다르단 말입니까. 이연년을 추고하고 여성제를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양사(兩司)가 여러 번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14일 신묘
장령 오두인(吳斗寅)이 같은 대각의 상피 관계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가서 진찰하였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근래 밤에 복역(覆逆)한 승지가 누군지 물으실 때, 여성제(呂聖齊)가 당사자라고 먼저 말하였다고 하는데, 성상께서는 서로들 나서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는다고 하여 나문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 명을 받들어 전하는 내관이 잘못 아뢰었기 때문은 아닙니까. 이연년(李延年)은 일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더욱 거북해 하고 있습니다. 나랏일이 망극하고 또 사신이 나오는 이때에 대신은 외방에 있고 뭇 사무들은 적체되어 있으니, 성상의 심려가 평안하지 못함은 열심히 정무를 보실 때보다 필시 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을 위로하는 방법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어제 비망기와 전하는 유시를 보니, 거북한 하교가 갈수록 심해지니, 성상의 덕에 누가 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즉시 봉환(封還)할 줄을 모르지는 않지만 성상께서 매양 복역(覆逆)을 그르다고 여기시므로, 지금 감히 말로써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 에게 이제 다시 전유해야 하겠다. 경이 가서 전하되 문자외에도, 백성의 근심과 나라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되도록 속히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을 만들어 돈독하게 전유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은상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간절하시니 신이 받들어 가야하겠습니다만, 성상의 말씀 중에 이전과 같이 차마 듣지 못할 하교가 혹 다시 있다면 신은 결코 받들어 전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연년(李延年), 여성제(呂聖齊)의 일은 대신이 마음으로 더욱 불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대신을 위안하고 싶으시다면 먼저 두 신하의 심적(心迹)을 헤아려 용서해 주시는 은전을 빨리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은상이 영의정 허적에게 전유한 후 복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왕명 출납을 맡은 우두머리를 특별히 보내시어 따뜻한 전유가 더욱 간절하였고, 입으로 성상의 뜻을 펴내니 간곡하여 감격할 뿐만이 아니라 황공하고 민망함이 더욱 심하다.’ 하였습니다."
12월 15일 임진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를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어 전유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하가 윤경교의 말처럼 총애를 빙자해 교만하고 방자하다면, 임금은 반드시 매우 미워하여 몹시 배척할 것이다. 어떻게 가식적으로 우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실로 경을 모함하고자 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것이다.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세상에 주운(朱雲)과 같이 기개가 곧은 사람이 없다고 하기도 하였다.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모두가 때를 틈타 저격하여 경으로 하여금 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간사한 정상이 이러한데 경은 인책하여 마치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자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가 내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경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때문이다. 부끄러운 마음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아, 오늘의 나랏일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는데, 평소에 나라를 근심하던 경의 마음으로 끝내 대수롭지 않게 보고 나라의 일을 잊어버린단 말인가. 말이 막히고 뜻이 다하여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다. 경은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의 뜻을 체득하고 빨리 들어와서 애타는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유가 근실하고 간절하여 돈독히 권면하심이 지극하였습니다.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하교를 받들어 읽으니 마음이 무너지고 눈물이 솟아나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지평 임상원(任相元)이 같은 대각의 상피 관계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16일 계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비국의 여러 재상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영의정 허적이 외방에 있어 적체된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같이 인견하여 허적에게 가 의논한 일을 탑전에서 품의하여 정하려 한 것이다. 신하들이 한 가지 일을 아뢸 때마다 상이 번번이 영상과 상의하였는지를 묻고 미처 의논하지 못한 것은 또 뒷날을 기다리게 하고, 이미 의논한 것도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므로, 이날은 의논하여 정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지나친 것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대신을 위안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전부터 말씀하시는 사이에 혹 지나칠 때가 있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더욱 심하셨습니다. 금수(禽獸)라는 등의 하교는 크게 거북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에게 대뜸 할 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수라는 등의 말이 거북하다면 내 마땅히 고치겠다."
하였다.
경기도 안산(安山)에 지진이 있었다. 장단(長湍)에서 날마다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12월 17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여성제(呂聖齊)는 당초 내가 물었을 때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버릇이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나문하였으나, 대신이 이것을 더욱 거북하게 여기므로 위안하는 도리에 있어서 참작하여 조처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동부승지 여성제를 풀어주라."
상이 도승지 이은상을 불러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망극한데다 칙사의 행차도 임박하였으니 영상이 반드시 빨리 들어와야 접대하는 모든 일들을 미리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안한 정세가 있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나오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번에 전유한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니다마는, 글로는 혹 다하지 못한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다. 도승지가 또 가서 애써 일러서 반드시 들어오겠다는 승낙을 받되 서계(書啓)하지 말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오게 하라. 내 마땅히 앉아서 기다리겠다."
하자, 이은상이 아뢰기를,
"이번에 성상께서 간절히 전유하신 것은 실로 국조(國朝) 이래로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대신이 불안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나오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반복하여 타이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은상이 돌아오니, 상이 곧 불러들였다. 이은상이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분부를 말로 전하였더니, 허적이 감동해 울며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가 와서 돈유한 것이 이미 열한 번이나 되었으니, 실로 예전에 듣지 못한 성전(盛典)입니다. 그런데도 신이 끝내 공경히 받들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구한 염치 때문뿐 아니라 참으로 이미 그르친 나라의 일을 다시 또 그르칠까 염려해서입니다. 이제 승정원의 장관이 직접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전유한 것이 정성스러웠으며 심지어는 앉아서 기다리겠다는 하교까지 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망극하여 감당할 수 없는 특이한 예우를 받는단 말입니까. 신이 정세를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들어가 사례하여 신하의 분의(分義)를 조금이라도 펴야 할 것입니다마는, 미천한 신의 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곧 명을 받들어 달려가지 못하겠으니, 병이 뜸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무릅쓰고 나아가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돌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상께서 상규(常規)를 벗어 버리고 마루에 나아가 재촉하여 부르시되 하루에 열 번 사자를 보내신다면, 의리상 나라와 고락을 같이 하는 저 대신이 어찌 감히 이처럼 예사로 보아넘기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전에 없던 특이한 예우가 있었다. 주서가 일찍이 서장관이 되어 허적과 함께 연경에 갔었기 때문에 정의가 매우 친밀하였다. 마루에 나아가 사자를 보내라는 청은 대개 허적에게 잘 보이려는 계책에서 비롯되었으니, 청의(淸議)가 병통으로 여겼다.
12월 18일 을미
김환(金奐)을 지평으로, 윤개(尹堦)를 장령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예조 참판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죽은 포보(砲保)를 대신 정하지 못한 경우, 올해 거두어들일 베를 특별히 감면하였다. 상이 대장 유혁연(柳赫然)에게 묻기를,
"포보에게 거두어들일 베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죽은 자에 대해 대신 정하기 전에는 전례대로 거두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전에 없던 큰 기근을 당하였으니, 죽은 자에게 거두어들일 베는 특별히 감면해 주되 훗날에는 예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20일 정유
정언 이수만(李壽曼)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생각하는 바를 아뢰었다. 거기에,
"요즈음 정시(庭試)를 시행하기 전에 조제(詔制)를 출제할 것이라는 말이 이미 과거를 볼 선비들 간에 서로 전파되어 다들 옛날에 익혀오던 학업을 버리고 앞다투어 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 듣고서 의심하다가 다시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신이 등대하였을 때 아뢰었다 합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또 들으니, 대신이 심지어 선비들이 다 조제를 짓고 있다고 다시 아뢰었다 합니다. 애석하게도 어찌 깊이 생각지 않고 이토록 거리낌 없이 번거롭게 아뢰었단 말입니까. 전후에 말한 것이 다 공심(公心)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장(科場)에 임하여 글의 제목을 명하는 것은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있고 보면, 누누이 아뢴 일이 옳은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말세의 천박한 습속을 진정시킬 수 없고 뒷날의 폐단을 열어놓을까 참으로 염려됩니다.
또,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잇따라 재상을 잃어 육경을 주의(注擬)할 때에 인재가 부족하다고 한탄하고 있으니 특별한 글을 내려 발탁하신 것에는 물론 성상의 의도가 있는지 알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고난 재질이 만 가지로 다르고 글솜씨와 문법은 그 쓰임새가 각각 다른데, 어찌 다만 문예(文藝)의 명망이 한때 있다는 것으로 대뜸 옥사를 처결하는 직임을 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새 형판 남용익(南龍翼)을 말하는 것이다.】 성상의 현명하신 발탁이 삼가는 도리에 있어 도리어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백성을 기르는 직책을 맡은 자가 관청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그들의 직분이므로 진휼을 잘하였다는 칭찬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포상의 은전을 주는 것은 너무나도 혼잡스러운 것인데, 한 주(州)를 맡은 지 수 년 사이에 당하관에서 차서를 뛰어넘어 2품의 벼슬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원주 목사(原州牧使) 허질(許秩)을 가르킨다.】 조정에서 덕있는 사람에게 명하는 관직을 어찌 이처럼 쉽사리 준단 말입니까."
하였다. 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계(啓)자를 찍어서 내렸다. 이에 앞서 허적이 아뢰기를,
"정시(庭試)의 글 제목을 사륙문(四六文)으로 내면 시골 선비는 붓을 놓을 것이고, 사륙문으로 내지 않으면 서울 선비는 낙망할 것입니다. 보통 쓰는 문체와 사륙문을 아울러 쓸 수 있는 것으로는 조제(詔制)만한 것이 없으니, 조제 가운데에서 글 제목을 명한다면 서울과 시골의 선비가 다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그 뒤에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접때 신이 아뢴 말이 곧 퍼져서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앞다투어 조제를 익히고 있답니다. 신의 경망한 말 때문에 막중한 과거의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상께서 미리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수만이 언급한 것이다.
집의 신정(申晸)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며 아뢰기를,
"신이 병 때문에 물러나 있다가 승지 여성제를 나문하라는 하교를 듣고는 지극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윤경교가 당면한 어려움을 목격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당로 대신에 대해 퍼부었으니, 진실로 옛 쟁신의 유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망기가 내려올 때 연이어 거북한 하교가 있었고, 노여움이 점점 격렬해지고 분위기가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제가 근밀한 위치에 있는 신분으로 걱정 근심을 금하지 못해 조명(詔命)을 재고하도록 되돌리는 옛사람의 의리를 따랐으니,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심사를 헤아리지 않으시고 대뜸 위엄과 노여움을 가하시고 한밤중에 대궐에서 조정 관리를 옥리에게 내리시니, 이 무슨 광경입니까.
아, 오늘날의 나라 사정이 위태로워 이미 극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못가에 임하듯 얼음을 밟듯 경계하는 마음을 지니시고 꼴베고 나무하는 자들에게까지 널리 자문하신다 하더라도 오히려 천심을 되돌려 생령들을 구제하리라 바라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 가지 일을 거슬렸다고 도리어 벌컥 화를 내시었습니다. 의심하고 노여워할 단서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지나친 조처가 갈수록 증가합니다. 심지어 ‘귀심 금수(鬼心禽獸)’ 등의 말을 비답의 말씀 중에 언급하셨습니다. 마구 욕하시고 꺾어 욕보이심이 노예와 같았으니, ‘위대하시도다. 왕의 말씀[大哉王言]’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백규(白圭)의 하자는 그래도 갈아낼 수 있거니와 이 말의 하자는 어쩔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하찮은 필부라도 추기(樞機)가 되는 말을 낼 때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지존의 지위에 계시고 억조창생 위에 임하시는 전하이겠습니까. 한 마디의 득실이 흥쇠의 갈림길이 되는데 뜻한 대로 말을 내어 조금도 살피고 삼가지 않으시니, 마치 승부에서 이기거나 도박에서 유쾌해 하는 자와 같습니다. 중외에 전파되어 듣는 자들이 모두 의혹스럽게 여기니 성덕에 누가 됨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신이 걱정하는 바가 어찌 단지 언로가 막히는 데에만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말을 들으실 때마다 미리 먼저 억측을 하십니다. 시정을 논할 때에는 거슬리는 것이라 여겨 배척하시고, 공경(公卿)에 말이 관계되면 이간질하는 것이라 여겨 꺾어 버리십니다. 같은 무리를 편들고 다른 자를 내치는 것이라 의심하기도 하고, 일 만들기를 좋아하고 곧음을 파는 것이라 지척하기도 하십니다. 의심받지 않는 말이 없고 믿을 만한 일이 없어 반드시 일체 거부하여 마지 않으시니, 이것이 전하 본래의 병근(病根)입니다. 이 뒤로는 사람들이 함구하고 조신하게 굴며 아첨하여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러도 한 마디 위에 아뢰는 자가 없을까 신은 걱정입니다. 신이 이 때문에 남몰래 천장을 쳐다보며 근심하고 이어 장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계(啓)자를 찍어 정원에 내렸다. 정원이 아뢰기를,
"두 신하는 【이수만과 신정을 가리킨 것이다.】 언론의 책임을 맡고 있는 몸이므로 각각 생각하는 바를 아뢰었는데, 사직하는 상소로 인하여 대뜸 그 벼슬을 갈았습니다. 대각을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듯하므로,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갈 만하면 갈고, 그대로 둘 만하면 그대로 두는 것이다. 계사의 뜻은 이해하지 못 하겠다."
하였다.
12월 21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병을 이유로 파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열두 번의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 나라의 일이 위태롭고 내 마음 이 다급함을 경이 반드시 헤아렸을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토록 사양하는가. 경의 병을 내 매우 염려하거니와 시골은 황량하고 의약이 갖추어져 있지 않을 것이니, 여러 번 하유한 비답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들어와 내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12월 22일 기해
원양 감사(原襄監司) 안진(安縝), 전라 수사(全羅水使) 민섬(閔暹)이 조정을 하직하니, 대면하여 하유하고 보냈다.
승지 맹주서(孟胄瑞)를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어 전유하기를,
"아,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경이 이미 조정에 나오겠다고 허락하였는데 요즈음 신병으로 인하여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내 근심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이제 사신이 강을 건넜으므로 모든 일도 반드시 세밑 전에 의논하여 정해놓아야 눈앞의 급한 것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인데, 오늘 내일 점점 지체하게 되면 일을 반드시 시기에 대지 못할 것이니, 장차 어찌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놀라고 기가 막힌다. 경은 애타게 기다리는 뜻을 체득하여 내일 일찍 들어와 나라의 일을 구제하라."
하였는데, 이튿날 허적이 들어왔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이혜(李嵆)를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는데, 아장(亞長)의 예로 인하여 의망한 것이다. 이유상(李有相)을 응교로, 임규(任奎)를 정언으로, 이하(李夏)를 교리로, 윤증(尹拯)을 진선으로, 이숙(李䎘)을 경상 감사로 삼고, 금산 군수(錦山郡守) 이정(李晸)을 옮겨 능주 목사(綾州牧使)로 삼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금산 도둑의 남은 무리 중에 수령을 살해하여 원한을 갚으려는 자가 있다 합니다. 다른 고을로 옮겨 제수하는 것이 옳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도 그렇게 말하니, 상이 옳게 여겨 이 벼슬로 옮겨 제수하였다.
12월 23일 경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인심이 착하지 않아 나라의 형세가 위급한 이때에 경으로 하여금 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의 일을 생각할 때 매우 답답하기만 하였는데 경이 이제 들어오니 병중의 마음이 크게 위안된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보잘것 없으나 원하는 것은 오직 정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데에 있는데, 재주가 미치지 못하여 간관의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일찍 물리치어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하셔야 마땅한데, 이번 잘못 내린 은혜는 실로 예전에 없던 것이므로 신하된 도리에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변변치 못한 신으로 인하여 성상의 덕에 누를 끼쳤습니다. 간관을 외직에다 보임한 것만도 이미 지나쳤는데 금수(禽獸)라는 등의 말씀에 있어서는 더욱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간관이 논한 것이 혹 사실과 어긋났다 하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됩니다. 벌을 주신다면 만약 신이 참으로 범한 것이 있더라도 필시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언로에 방해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경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제주 유생 김여진(金麗珍) 등의 연명 상소를 보니, 아뢰기를 ‘섬 안의 유생의 수가 거의 4백 명에 이르는데, 무사는 식년 초시(式年初試)에서 세 명을 뽑는 규례가 있으나 유생은 유독 거기에 끼지 못하니, 또한 무과의 예에 의거해 한두 명의 정원을 얻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하자,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전라도 향시의 정원 중에서 한두 명을 주도록 허락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정원을 나누어 주는 것은 타당치 못할 듯하니, 상고한 후에 다시 아뢰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이하(李夏)의 말을 들으니, 활과 말에 재주가 있는 제주(濟州) 사람이 서울 사람보다 못하지 않고 무과에 합격한 사람의 수도 적은 것이 아닌데, 바다 밖에서 늙어 죽고 변장(邊將) 하나 되지 못하여 그 무리들이 자못 낙담하고 있다 합니다. 변통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온 가족이 죽어서 휼전(恤典)을 거행한 무리를 조사해내어 올해에 준 적곡(糴穀)을 특별히 감면해 주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조정에서 서울이나 지방에 온 가족이 모두 죽은 자를 뽑아내어 휼전을 베풀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묘당의 의논들이 온 가족이 죽은 자 가운데에도 이웃이나 겨레붙이나 전토가 있는 자가 있으므로 그들이 먹은 적곡은 탕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날 인견 때에 사간 이합이 일체 감면해 주자고 청하고,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이미 휼전을 베푼 무리를 살펴 조사해 내어 탕감해 주자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영남에 기근이 심하여 어영군(御營軍)으로서 뿔뿔이 흩어진 자가 많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입번(立番)하기 원하는 자를 받아들였다. 영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영남 좌도(左道)는 기근이 더욱 심하므로 어영군 중에서 굶주리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입번하기를 바랄 것이니, 이제 올라오도록 허락하여 봉료(俸料)를 주어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구제하려면 어찌 좌·우도를 구별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영남 좌·우도에 아울러 분부하고, 또 호남의 군사도 혹 소문을 듣고 올라오는 자가 있으면 일체로 받아들여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연해안 고을의 수미(收米) 2천 석으로 제주(濟州)의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하(李夏)가 본도(本島)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나올 때에 온 섬의 백성이 통곡하며 전송하기를 ‘우리들이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두가 국가의 혜택 때문인데, 이제는 국가에서도 우리들을 살릴 힘이 없으니, 우리들은 장차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영상 허적이 이 말을 상에게 보고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제주 백성의 형세는 한 시각이 급하니, 쌀을 빨리 실어보내야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은 호남에 있는 훈국(訓局)의 둔전(屯田)과 태복(太僕)의 목장(牧場) 등 여러 곳의 겉곡식으로 진구하기를 바라고, 병조 판서 민정중은 연해안 각 고을의 수미를 덜어서 구제하기를 청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먼저 수미를 보내어 서둘러 구제하고 이어서 겉곡식을 실어보내 씨앗 거리를 도와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양서(兩西)의 쌀과 콩 모두 2만 석을 배로 실어다가 경비에 보태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경비가 바닥이 났으므로 반드시 미리 요리해야만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海西)의 쌀과 콩 각각 5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석을 얻어서 보태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24일 신축
제주 선유 어사(濟州宣諭御史) 이하(李夏)의 서계(書啓)에 따라 특별히 명하여 목사 노정(盧錠)에게 가자(加資)하고, 전 판관(判官) 최진남(崔鎭南)에게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노정은 정성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최진남은 백성에게 은택을 끼쳤기 때문이다. 정의 현감(旌義縣監) 이송로(李松老)에게도 진휼을 잘하였기 때문에 아마(兒馬)를 내렸다. 전 대정 현감(大靜縣監) 정태주(鄭台周)는 진휼의 정사를 간사한 아전에게 일임하였으며 또 탐욕을 부려 법을 어긴 죄가 많았으므로 금부에 내려 30여 차례 형추하고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였다. 이하가 또 본도의 갖가지 폐단과 내사 노비의 신역(身役)이 무거워서 지탱하기 어려운 정상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변통하고 감면한 일이 자못 많았다.
12월 27일 갑진
이민적(李敏迪)을 도승지로, 권기(權愭)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부교리로 삼고, 맹만택(孟萬澤)에게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내렸다. 맹만택은 맹주서(孟胄瑞)의 아들인데, 장차 상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뒤에 공주가 미처 시집가기 전에 죽었는데 상이 차마 그 작호를 파하지 못하였다. 대간이 육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여 도로 그 작호를 거두도록 청하여 여러 번 아뢰니 따랐다.
12월 29일 병오
이때 겨울철이 이미 다가고 날씨가 여전히 따뜻하여 강의 얼음이 얼려다가 도로 풀렸다.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을 다 강의 북쪽 기슭으로 배를 가져가 채취해왔다.
장령 박지(朴贄)가 동료들이 논핵하고자 한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30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장선징(張善瀓)을 도승지로, 김우형(金宇亨)을 예조 참판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삼았다.
제주 유생 김계융(金繼隆), 김계창(金繼敞)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를 내려 주니, 어사 이하(李夏)가 시험보여 뽑아 온 자이다.
이 해 진구(賑救)에 소용된 것은 쌀 4만 2천 4백 석, 콩 6천 5백 70석, 좁쌀 1만 1천 2백 석, 보리 9천 8백 석, 밀 9백 석, 은 6만 6천 8백 냥, 무명 45동, 포 2백 80동, 소금 5백 석이었다. 【외방에서 쓰느라 내려보낸 것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96면
【분류】구휼(救恤)
이 달에 각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의 수가 모두 1천 1백 60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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