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 1672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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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무신

정언 임상원(任相元)이 아뢰기를,
"음관(蔭官)으로서 주부(州府)의 수령이 되는데 있어서는, 시험을 거쳐 청렴함과 능력이 뚜렷하게 드러난 자가 아닐 경우, 함부로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회양 부사(淮陽府使) 권세경(權世經)은 처음 낭관(郞官)에서 곧바로 군수에 임명되었고 별다른 치적이 없는데도 이름난 고을로 옮겨 제수되었습니다. 또 밀양 부사(密陽府使) 임윤석(任允錫)은 성품이 본디 자잘하고 교묘하며 글이나 글씨에도 모두 보잘것이 없는데, 발탁하여 큰 고을에 제수하였으므로 여론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권세경과 임윤석을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임윤석만 체차하라."
하였는데, 그 이튿날에 권세경에 대한 계청도 따랐다.

 

종성(鍾城)의 방원보 발군(防垣堡撥軍) 강계한(姜戒汗)이 밤길을 무릅쓰고 가다가 못된 범에게 물렸는데 범이 물어 뜯을 즈음에 열세살난 그의 아들 해언(海言)이 호미를 휘두르며 큰소리를 질러, 그 아비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감사 남구만이 이 일을 치계하면서 표창하는 은전을 시행하자고 청하였다. 일이 해조에 내려져 해조가 복계하니, 특별히 정문을 세워 표창하라고 명하였다.

 

1월 2일 기유

약방(藥房)에게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북부(北部)에 있는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망원정(望遠亭) 께[契]에 본래 배를 매어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 큰 바위는 애초 강변의 조수(潮水)가 들락거리는 지점에 있어 육지로부터 15보쯤 떨어져 있었는데, 이날 밤에 갑자기 물 아래쪽으로 70보쯤 옮겨 갔고, 작은 바위는 애초 큰 바위 옆에 있었는데, 물 아래쪽으로 30보쯤 옮겨졌다. 또 애초에는 어느 곳에 있었는지 모르는 바위 하나가 물가의 다른 바위 근처로 나와 있었는데, 그 크기가 항아리 만하였다.

 

1월 3일 경술

이민적(李敏迪)을 예조 참판으로, 이은상(李殷相)을 우윤으로, 최관(崔寬)을 참지로, 박지(朴贄)를 사간으로, 이합을 수찬으로, 이지원(李枝遠)을 통제사로 각각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우의정 송시열의 상소를 여쭈어 정하여, 상소 가운데 진달한 10여 가지 사항이 대부분 시행을 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한 조항은 ‘재해로 피해를 본 현지를 직접 살필 때, 수령을 파면하는 법을 잠시 바꾸어 복심(覆審)하는 관원을 많이 파견하되, 한두 곳을 뽑아 살피게 합니다. 그리하여 간사한 짓을 저지른 곳은 일체 무겁게 추궁하여 아전들이 뇌물을 받고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막으소서.’라고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그의 소에 의해, 각도의 대소에 따라 경차관(敬差官)을 세 명이나 네 명을 차출하여 자세히 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수령에게 벌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수령들이 더욱 재해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유의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경차관으로 하여금 빠진 것의 다소대로 죽 기록하여 아뢰도록 한 다음, 본조에서 그 경중을 참작하여 성상께 여쭈어 논죄를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이르기를,
"수령은 경차관이 직접 파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한 조항에 ‘대동미(大同米)는 기유년의 결수에 따라 받아들이지 말고 금년의 결수에 따라 받아들이되, 기유년의 결수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나중에 징수하소서.’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신과 정태화(鄭太和)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소의 말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고, 또 한 조항에 ‘한번 흉년을 겪고나자 풍속이 점차 변하여, 부모가 죽었는데도 태연히 곡할 줄도 모르는가 하면 혹은 아예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는 자도 있으며, 혹은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는 자도 있으니, 조정에서 잘 일깨우고 거듭 밝혀서 여러 고을에 반포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아직 장사지내지 않은 자는 장사를 지내게 하고, 복(服)을 입지 않은 자는 소급해 복을 입도록 하여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랬어도 여전히 장사를 지내지 않거나 복을 입지 않거나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자는 엄히 형법을 시행하여 두려운 바를 알게 함으로써 인륜을 밝히소서.’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기근이 인심을 무너뜨리고 천리(天理)를 상실하게 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니 이 상소의 말에 따라서 각도에 알리어 착실히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승지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엊그제 하교에 윤경교(尹敬敎)를 ‘금수(禽獸)’라 하고, 여성제(呂聖齊)를 ‘기망(欺罔)했다’고 하신 말씀은 너무 지나치신 듯합니다. 전에 인조께서도 정원에 하교하시기를 ‘자기에게 동조하는 자는 행실이 개나 돼지 같아도 등용한다.’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뒤 경연에서 ‘아랫사람을 접할 때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라.[接下思恭]’는 구절001)  을 강하는 데 이르자, 후회하시며 이르기를 ‘내가 실언을 했다.’ 하시고는 즉시 고치라고 명하였습니다. 대성인(大聖人)께서 잘못을 고치는 일에 인색하지 않는 훌륭한 덕이 이와 같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제에 대해서 상께서는 기망한다고 의심하십니다만, 만약 성제가 애초 기망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이런 죄명을 받았다면, 어찌 매우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던 신하는 진실로 가긍히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망기 가운데 ‘금수’ 두 글자는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등이 아뢰기를,
"통영(統營)은 풍토가 좋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가자마자 곧바로 돌아오기를 마치 역사(驛舍)처럼 여기고 있으므로 해안 방어의 중요한 곳이 나날이 허술해지고 있습니다. 통제사 신여철(申汝哲)은 임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체직되었으니, 오래 맡겨서 효과를 책임지운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대로 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싫어서 피하였다면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어찌 그대로 맡기는 것으로 끝낼 일이겠는가. 만약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면 임소(任所)에서 죽게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민정중이 "여철이 풍토병을 매우 심하게 앓고 있으니 젊은 무신(武臣)이 정말 애석하다." 하였고, 허적 역시 변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상이 그의 직책을 갈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헌부가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끝까지 따르지 않은 것이다.

 

강도(强盜) 세 명 이상을 잡은 자에게는 자급(資級)을 올려주되, 조대립(趙大立)과 같이 큰 죄를 지은 자를 잡았을 경우에는 숫자에 구애받지 말고 올려주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는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의 말에 따른 것이다.

 

1월 4일 신해

상이 뜸을 떴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서 올봄에 거둘 쌀에 대해 1결당 2말씩을 줄이고, 올해에는 식년(式年)마다 거행하는 각사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일을 정지하였는데, 흉년이 크게 들었기 때문이다.

 

1월 5일 임자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 조서(詔書)를 반포하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상이 편찮았기 때문에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사(勅使)를 영접하는 일과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서를 받는 등등의 예절을 친히 거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상 허적을 홍제원(弘濟院)에 보내 대통관(大通官)을 통해 편전(便殿)에서 칙서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허락하였다.

 

상이 청나라 사신을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다. 다례(茶禮)를 행한 뒤에 파하였다.

 

1월 6일 계축

상이 뜸을 떴다.

 

청나라에서 조서를 반포한 일로 교서를 반포하였다.

 

경상도가 낼 신해년조의 공물 50여 가지를 감하도록 하였다. 이는 본도가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었기 때문이다.

 

민종도(閔宗道)를 헌납으로 삼았다.

 

1월 7일 갑인

청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의 오래된 명필(名筆)을 얻고자 하였는데, 도감(都監)이 ‘있는 게 없다’고 답하자, 또 고 판서 오준(吳竣)의 글씨와 현재 조정 인사들 가운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의 필적을 요구하였다. 이에 오준이 쓴 글씨 몇 장을 얻어서 주고 또 조정 인사 가운데 글씨를 잘 쓰는 8명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해서 주었다.

 

원양도의 강릉(江陵) 등 세 고을의 각종 곡물 5천 7백 70여 석으로 영남(嶺南)의 이전곡(移轉穀)을 되갚음으로써 좌도(左道)의 재해 당한 고을을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영상 허적의 말을 따른 것이다.

 

1월 8일 을묘

이익상(李翊相)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1월 9일 병진

사간 박지(朴贄)와 정언 임상원(任相元) 등이 아뢰기를,
"진휼 정사는 반드시 먼저 계획을 짜서 두서가 있게 해야만, 때가 닥쳤을 때 궁색하게 서두르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기가 다 된 수령들을 내년 가을까지 그대로 유임시키게 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혹 내직(內職)에 제수되거나 혹 타도(他道)로 옮기고 있으므로 구휼을 처리하는 계획이 중도에 그쳐버리고, 질병과 기근에 시달린 백성들이 다시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수령으로서 타직(他職)에 옮겨 제수된 자를 모두 유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월(年月)을 가리지 않고 모두 유임하라고 청하다니, 그 뜻을 모르겠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박지 등이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체차하였다.

 

장령 윤계, 지평 김환 등이 아뢰기를,
"지난해 기근에 백성들이 죽은 참상은 팔도가 모두 같지만, 그중에서도 삼남(三南)이 더욱 심했는데 영남이 가장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해 올린 장계에 의하여 혹은 구휼을 잘했다는 것으로, 혹은 별도로 곡물을 마련하였다는 것으로써 옥관자의 상까지 받은 자가 타도에 비해 많습니다. 구휼을 잘하고 별도로 준비한 곡물이 과연 장계와 같다면, 영남 백성들의 죽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급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는데도 수령들이 그 실정을 살피지 않고 감사들이 기만을 당한 데 대해 남녘의 백성이면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뒷날의 폐단이 상을 주는 것이 지나친 정도로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다시 실적을 조사해서 아뢰게 한 다음 그중에서 뚜렷이 드러난 한두 사람만 가자(加資)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1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고(故) 청도 군수(淸道郡守) 유비(兪柲)에게 통정 품계를 증직하라고 명하였다.
암행 어사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유비의 진휼 정사가 도내에서 가장 나았는데 얼마 전에 죽었다."
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三田渡)의 비각(碑閣)을 보자고 청하자, 조정에서 삼전도가 남한산성과 멀지 않기 때문에 혹 말타고 가서 남한산성을 보게 될까 우려하여, 대통관을 시켜 중지하도록 타이르기를,
"얼음이 풀려서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니, 청나라 사신이 성내며 말하기를,
"강의 얼음이 단단하지 않다면 나루터에서 바라보겠으니, 나루터에다 대략 조촐한 음식을 차려야겠고, 또 소 한 마리만 주면 요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마군(馬軍) 1백 명을 정비하도록 한 다음 말타고 가서 비각을 보고서 돌아왔다.

 

1월 12일 기미

지평 김환(金奐)과 장령 윤계(尹堦) 등이 황해 병사 구일(具鎰), 내승 유흡(柳潝), 안성 군수 김하현(金夏鉉), 전 장단 부사 정한기(鄭漢驥) 등을 논핵하고자 연명(聯名)으로 간통(簡通)을 내고 초안을 엮어 대사헌 강백년에게 보내면서 "이것으로 전계(傳啓)를 하려고 한다." 하였는데, 강백년이 아뢰기를,
"관리의 부정한 짓을 규찰, 논핵하려는 것은, 대각으로서의 체모를 얻은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체례(體例)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공적으로 모인 자리가 아니고 사적인 곳에서 연명하여 간통을 내는 것은 이미 떳떳한 규정이 아닐 뿐더러 ‘전계를 하려고 한다.’는 뜻으로 분명하지 않게 간통을 내는 일은, 신이 50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고 있으면서 이러한 규례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대각의 오랜 규례가 신 때문에 실추되고 말았으니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김환이 아뢰기를,
"간통 가운데 ‘논계(論啓)’의 ‘논(論)’자를 ‘전(傳)’자로 잘못 썼습니다. 비록 무심코 한 일이기는 해도 경솔하게 처리한 잘못을 면할 수 없는 처지이고, 또 연명으로 간통을 낸 것을 떳떳한 규정이 아니라고 하였으니만큼, 이로써나 저로써나 모두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윤계는 아뢰기를,
"간통을 써서 보낸 것이 비록 동료의 손에서 나온 일이기는 하나, 연명을 한 잘못은 신 역시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면서 함께 인피하였다. 장령 정화제(鄭華齊)도 유흡과 상피의 혐의가 있어서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옥당이 처치하여 강백년·정화제는 출사시키고 김환·윤계 등은 체직시켰다.

 

상이 의관에게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1월 14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 내에 재해를 당한 각 고을의 전세와 공물 및 노비의 신공을 면제하였고, 황해도 내에 재해 상황이 유난히 심한 산군(山郡)의 갖가지 신역을 줄여주고, 해주(海州) 등 다섯 고을에 대해서는 3분의 1을 줄여주도록 명하였다.

 

1월 15일 임술

상이 희정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1월 16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경억을 대사헌으로, 여성제를 호조 참의로, 이연년을 예조 참의로, 이합을 사간으로, 오두헌을 장령으로, 이옥을 지평으로, 이인환을 정언으로, 임상원을 사서로, 민진익을 경기수사로 각각 삼았다.

 

대사헌 강백년이 신병 때문에 소명에 나아가지 못하여 추함(推緘)을 받아야 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고, 그 이튿날에 장령 오두헌도 겸 장령 정적이 생질(甥姪)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월 17일 갑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1월 18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전에는 영동에 영장이 없는 까닭에 군정이 허술하였습니다. 감사 김익경(金益炅)이 이제 영장을 창설하여 두려고 하는데 물력이 쇠잔하여 지공(支供)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삼척 첨사로 하여금 영장을 겸임시켜 이름과 위엄을 높여주고 군병 훈련의 책임을 전담토록 하소서.
왜국의 한 쪽 땅이 영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예전에는 왜구들이 대부분 영동을 통해 쳐들어 오곤 하였습니다. 그들을 대비하여 막는 방도 또한 미리 계획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하니, 공조 판서 유혁연이 아뢰기를,
"삼척 첨사에게 영장을 겸임시키면 군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비국의 회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안동 부사 이규령(李奎齡)을 교리에 옮겨 제수하였는데, 대간이 진휼 정사가 급하다는 이유를 들어 재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내·외직에 옮겨 제수된 자들을 잉임시키자고 하였습니다. 안동은 비록 더욱 심하게 흉년이 든 고을은 아니더라도 진휼하는 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니, 마땅히 딴 데와 마찬가지로 잉임시켜야 하나, 이미 논사(論思)하는 직임에 제수되었으므로 아래에서 아무래도 섣불리 청하기가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잉임시키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듣건대, 안흥 첨사 이정완(李挺完)이 전에 양지(陽智)를 다스렸는데 아직껏 해유(解由)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유를 내지 않으면 후보에 주의(注擬)할 수 없는 것이 정해진 법이나, 변방 장수의 경우는 이 법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의망(擬望)에 넣어 차송(差送)하는 것도 근래의 규례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근래의 규례는 오랜 법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민정중이 지금 정식을 삼으려고 이렇게 말씀드린 것이나, 오랜 법전은 고쳐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정완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우승지 맹주서가 아뢰기를,
"비국의 회계에 대해 판부(判付)하신 것을 보니, 금산(錦山)의 적인(賊人) 우준생(禹俊生) 등 18명과 김예운(金禮云) 등 8명은 마땅히 법에 따라 처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준생 등은 이미 여러 곳에서 도적질을 하였고 또 함께 용담(龍潭)에서 변고를 일으킬 모의를 했으니, 전형(典刑)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법에 있어서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운 등 8명에 있어서는, 함께 용담에 가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어떤 일로 가는 것인지 모르고 갔으니 우준생 등과는 실정이 다르며, 박윤산(朴允山) 등과 비교하면 서로가 터럭만큼의 차이가 날 뿐입니다. 그런데 윤산은 정배되고 예운 등은 효시를 당하게 되었으니, 당초 성상의 분부에 이른바 ‘혹 실정을 미처 알지 못하고 협박을 받아 따른 무리가 없지 않을 것이니, 구별해서 아뢰라.’ 하신 뜻과 크게 어긋난 바가 있습니다. 본도가 등급을 나누어 아뢰고, 해조가 엄한 형벌만 주자고 청한 것이 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이 해방(該房)에 있기에 감히 생각을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께 간 것과 가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크다. 윤산 등과의 차이가 터럭만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1월 19일 병인

큰눈이 내렸는데 한 자 남짓 쌓였다. 서울의 산과 각릉(各陵)의 소나무가 눌려 부러진 것이 매우 많았다.

 

영의정 허적이 병으로 차자를 올려, 내국(內局)을 뺀 제사(諸司) 제조(提調)의겸대직을 우선 한꺼번에 면직해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상이 따스한 말로 위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0일 정묘

상이 뜸을 떴다.

 

왕세자 가례(嘉禮)에 따른 별시(別試)의 규정은 정묘년의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초장(初場)에서는 논(論)·부(賦)로 편을 갖추고, 종장(終場)에서는 책문(策問)과 강경(講經)을 시험 보이되, 강경은 사서(四書) 가운데 일서(一書)을 뽑아 시험보이고, 삼경(三經) 중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일경(一經)을 시험보여 6백 명을 뽑기로 하였다.

 

장령 정화제가 아뢰기를,
"본부의 금리(禁吏)가 금육(禁肉)002)  과 잔치상에 음식을 늘어놓은 것을 한꺼번에 포착하여 잡았는데 정과(呈課)하여 잡힌 자가 바로 훈국의 마병이었습니다. 추문(推問)을 했더니 ‘마병청(馬兵廳)이 외임(外任)을 전별(餞別)하였는데 본청에서 가포(價布)를 조금 대주고 군사들이 염출해서 마련한 자리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본청의 잘못된 관례인데, 이렇게 흉년이 든 때에 장령(將領)으로 있는 자가 군사들이 먹을 것을 깎아 내고 예전처럼 마련을 하도록 다그치면서 조금도 거리끼는 눈치가 없었으니, 해당 훈국 마병의 장령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그리고 도감으로 하여금 군졸이 염출하여 마련해주는 폐단을 통렬히 금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은 도감으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였다. 【별장(別將) 정후량(鄭后亮)에게 15도(度) 곤장을 쳤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9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역(軍役)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註 002] 금육(禁肉) : 쇠고기를 가리킴.

 

경상 감사 이숙이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인견하고 교시하기를,
"하고픈 말이 있는가?"
하니, 이숙이 대답하기를,
"연이어 흉년이 들어서 공사간에 모두 바닥이 났으므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정말 처리할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양호(兩湖) 산군(山郡)의 대동미를 목면으로 환산하여 상납하는 규정이 있는데, 본영에 도임한 뒤 영중(營中)에 비축된 것으로 나름대로 긁어모아 목면으로 환산하여 해청에 상납함으로써 본도의 접계(接界) 지역인 17고을에서 목면으로 환산하는 쌀과 바꾸면 만분의 일이나마 진휼에 보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좋은 일이다. 해청에 말하여 바꿔주도록 하라."
하였다. 【호서(湖西) 7개 고을의 쌀 3천 5백여 석을 목면 2백 12동으로 바꾸고 호남(湖南) 9개 고을의 쌀 4천 5백여 석을 목면 1백 69동과 바꿨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영남 일로(一路)에 해마다 가뭄이 드니 억울함을 품은 채 신원되지 못한 자가 없겠는가. 경이 찾아다니며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1일 무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어영청이 아뢰기를,
"본청에서 쓰는 철물(鐵物)을 실어 나르는 배가 장연(長淵)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들으니, 본 고을에서 소금을 구울 나무를 베어오기 위해 해도(海島)에 들여 보냈다가 바람을 만나 부서지는 바람에 사공 13명이 한꺼번에 물에 빠져 죽고 배 역시 간 곳을 모른다 합니다. 신이 본 고을에 공문을 보내 그 뱃사람을 보내라고 하였더니, 죽은 사람의 형을 대신 보내어 살아 남았다고 거짓으로 꾸며 죄를 면하려고 꾀하였습니다. 앞뒤로 속이려드는 정상이 구구절절 놀랍습니다. 장연 부사 권론(權碖)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론을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1월 22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떴다.

 

영의정 허적이 또 상차하여 겸대직을 면직시켜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로부터 연이어 사직을 청했으나, 상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조원기(趙遠期)를 장령으로 삼았다.

 

1월 23일 경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신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면서 겸대직인 소결청 당상과 총융사까지 아울러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4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대간(臺諫)이 매양 ‘전하께서 대신을 신임하여 대신의 자임(自任)이 무겁다.’고 한다는데, 이는 성현(聖賢)의 교훈을 강구하지 않고 한갓 세속의 견해에만 이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상소에서 이른바 ‘그 잘못을 똑바로 말해야 한다.’고 하고 그 아래에 ‘대신을 바꾸어야 한다.’고 운운하였는데 이는 가설적인 말로서, 대개 대신이 적임자가 아닐 경우 대간이 왜 곧바로 배척하여 바꾸자고 청하지 않고 도리어 말할 듯하다가 말하지 않으면서 마치 입에 아교나 옻을 머금은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간신(諫臣)의 대체를 개략적으로 말한 것이지, 대신이 꼭 적임자가 아니라고 여겨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가설적인 말이라 하더라도 역시 말할 수는 없을 성싶은데, 끝내 감히 말을 꺼낸 데에는 연유가 있었습니다. 고 판서 서필원(徐必遠)은 지금 상신(相臣)의 지기지우(知己之友)입니다. 【상신은 곧 허적을 지목한 것이다.】  그가 빨리 닮기를 원하는 마음을 심지어 도부(桃符)003)  의 축문에 드러내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의(義)를 사모함이 무궁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불충하다고 상소를 올려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대체로 불충이란 신하의 큰 죄입니다. 보통 인정으로 말한다면, 지기지우가 이런 말로 뒤집어 씌웠을 경우 그 유감스러움이 필시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할 것인데, 상신(相臣)은 침착한 얼굴빛과 태연한 마음으로 조금도 개의치 않고 편안히 받아들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여 대신의 체통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감히 상소 끝에 언급하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비록 내가 그의 결점을 곧장 공박하더라도 필시 그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이 ‘운운’한 말은 그리 크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솔직하게 써서 올렸던 것입니다.
신의 상소가 들어갔다고 들은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과연 아무 말이 없기에 신은 스스로 예상했던 바가 빗나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들으니, 그가 인피하고 들어간 일이 있었고 성상께서 이는 사실 신이 망령된 말을 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니, 신의 죄는 이미 말할 수 없이 크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윤경교(尹敬敎)의 상소가 불쑥 나와 그를 한껏 공격하고 배척하였는데, 이는 실로 신이 아는 바가 아니었고 또 신이 예상한 바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또 그 말이 신의 뜻과 부합한다고 여기시고, 신이 ‘입에 아교나 옻을 머금은 것처럼 우물쭈물한다.’고 비난한 데서 격발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경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기실 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성상의 말씀을 빌미삼아 고슴도치 털이 곤두서듯 비난하면서 신은 부리이고 경교는 가지라고 하는데, 그 형적을 따져 보면 진실로 누가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성상의 분부에 이른바 ‘경교는 흉악하고 교활하다.’는 것은 바로 신이 흉악하고 교활하다는 것이고, ‘경교는 간사하다.’는 것은 바로 신이 간사하다는 것이고, ‘경교는 금수(禽獸)와 같다.’한 것은 바로 신이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을 욕하는 자들은 심지어 신이 은밀히 경기도 부근에 와서 경교와 서로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였다면 이는 신이 경교와 함께 귀신이나 물여우 같은 짓을 한 것이니, 실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의 말이 과연 어리석고 망령되어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분란만을 일으킬 뿐이라면, 성상께서는 마땅히 불가하다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짐짓 너그럽게 총애를 해주시니, 대성인(大聖人)이라면 아랫사람을 이와 같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빨리 신을 체직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려 편안한 마음으로 죽게 하는 것이 시종 생성(生成)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3월 갑자일에야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9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왕실-사급(賜給)


[註 003] 도부(桃符) : 입춘날 문이나 기둥에 써서 붙이는 글.

 

전 우윤 권시(權諰)가 졸하였다. 권시는 고 좌랑 권득기(權得己)의 아들이다. 소시적부터 또래들 사이에 유명하였고, 정축년 이후 식구가 모두 문경(聞慶)의 산속에 들어가 살다가 나중에 공주(公州)로 돌아가니, 이유태가 그를 보고 나서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칭찬을 하였다. 송시열이 드디어 그와 더불어 서로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고 이어 자기 딸을 권시의 아들에게 혼인시켰다. 사류(士類) 가운데 송시열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너나없이 권시를 조정에 추천하여, 기축년부터 누차 현직에 제수하여 불렀고 예우까지 덧붙였다.
정유년에는 송준길과 함께 잇따라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여 몇년 안되는 사이에 대뜸 재신의 반열에 뛰어올랐다. 그러나 학술이 허술하고 문사가 난잡하였으며, 그저 술이나 좋아하고 사람들과 농담이나 즐길 따름이었다.
급기야 경자년에 소를 올려 윤선도를 두둔할 때 그 내세운 논의에 더욱 조리가 없어, 마침내 청의(淸議)에 욕을 먹고 여러 해 동안 이름이 조적(朝籍)에 끊겼다가 만년에 송준길의 말로 인해 다시 기용되어 우윤에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이때 와서 졸하였다.
권시가 재학(才學)과 견식(見識)에 있어서는 비록 입에 올릴 만한 것이 없었으나, 불우하게 지낼 때에도 끝까지 그 일로 유감을 품거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의 성품이 무던하고 모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1월 25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진정(賑政)의 편리 여부에 대해 저마다 소견을 아뢰었다. 혹은 죽을 쑤어 주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고, 혹은 마른 양식을 나눠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죽을 쑤어주기로 결정을 보았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들을 제고장으로 찾아보낼 일에 대해서도 의논하여 결정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 은 지방하고 다르다. 어찌 그들의 본고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제로 돌려 보내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고, 허적이 아뢰기를,
"젊은 사람은 본고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고 노약자와 병자들은 그대로 머물려두어 끼니를 대주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전 승지 강호(姜鎬) 부부(夫婦)·부자(父子)가 잇따라 전염병으로 죽었고, 얼마 전에는 박세성(朴世城) 부자도 한꺼번에 모두 죽었는데, 박세성은 근시를 지낸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특별히 보살펴주는 은전을 입었으나, 강호는 청빈하게 살아 집안이 몹시 가난하므로 장차 장례조차 치를 수가 없는 형편이니, 더욱 불쌍하고 가엾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담군(擔軍)과 장례 물품을 해조더러 박세성 예(例)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지난해 진정(賑政)을 설행할 때에 이환(李煥)이라는 자가 서압(署押)을 위조하여 식량을 받아낸 죄를 저질러 형조에 이송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이환이 그의 삼촌 숙모(三寸叔母)의 남편되는 이세붕(李世鵬)을 핑계대며 눙을 친 까닭에 끝내는 요행으로 벌을 면하게 되었고, 세붕은 무죄한 사람으로서 엉뚱하게 중죄를 받아 원지에 유배를 당했다고 하니, 몹시 놀랍습니다. 형조로 하여금 다시 조사토록 하여, 죄를 진 자가 요행수로 빠져나가고 죄없는 자가 원통함을 당하는 폐해가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세화(李世華)를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세화는 낭료(郞僚)로 있을 때부터 일처리에 능하다는 평이 있었는데, 이때 와서 발탁 제수된 것이다.

 

서·북 변경에 명하여, 범월인(犯越人)004)  을 따라 행동을 같이 한 자들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본영(本營)에 잡아다가 세 차례 엄히 형신하고, 재범한 자는 다섯 차례 엄히 형신한 뒤 그대로 본진(本鎭)에 두고, 삼범(三犯)한 자는 효시하도록 하는 일을, 규식으로 정하라고 하였다.
이전에는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자에 대해 수창(首倡)인 자는 효시를 하고 수종(隨從)인 자는 충군을 하였는데, 강변의 토졸들이 줄을 이어 이 일로 충군되었다가 그길로 달아나 흩어져 버려서, 진보(鎭堡)가 나날이 허술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 와서 평안 감사 민유중이 아뢰어 수종인 자는 형추만 가하고 타도에 충군하지 말도록 하자고 청하였다. 그래서 비국이 의논해 아뢰어, 이 정식(定式)이 있게 되었다.

 

1월 26일 계유

나주 목사 소두산(蘇斗山), 태인 현감 김수일(金壽一), 광주 목사(光州牧使) 오두인(吳斗寅), 장성 부사 김세정(金世鼎)에게 자급을 높여주었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이들이 진정(賑政)을 잘하였다고 알려왔기 때문이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은전을 마구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계문을 하도록 하여, 가장 진정을 잘한 자 1명을 제외한 그 나머지 수령들은 일체 진정의 우열에 따라 각각 그에 맞는 상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누차 아뢴 뒤에야 경상도에 시행한 전례대로 분명하게 조사하여 계문한 뒤 처리하라고 명하였고, 나중에는 김수일·오두인만 자급을 높여 주었다.

 

1월 27일 갑술

정언 임규(任奎)가 전임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로 추고를 받고 있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형조 판서 민유중이 임소인 평안 감영에 있으면서 누차 소를 올려 새로 제수한 명을 극력 사양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 회원군(檜原君) 이윤(李倫),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이 아뢰기를,
"요즈음 공족(公族) 가운데 살림이 가난하여 어렵게 살아가는 자들이 매우 많은데 당하(堂下) 종실들이 유난히 심한 형편입니다. 제관(祭官)으로 차출이 될 때마다 아예 진참(進參)조차 못하는 자도 있고, 타고갈 말이 없어 걸어서 가는 자도 있습니다. 이는 체면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정말 불쌍하고 가엾은 일입니다.
일찍이 인조조 때 왕자의 계달로 인해 제관에 차출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폐기한 채 따르지 않은 지가 오래입니다. 신 등이 유사 반열에 몸담고 있어서 부득불 진계를 하였으나, 후사(喉司)005)                  의 신하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같잖은 신 등이 그 자리에 외람스레 있으면서 스스로 경모(輕侮)를 자초한 것이기에, 감히 와서 귀찮게 아뢰는 것이오니, 한시바삐 유사의 직임을 갈아주시고 아울러 해조에 명하여, 모든 제향에 헌관(獻官)을 제외하고는 종실로 집사(執事)를 때워 차출하지 말 것을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위로하는 뜻으로 타이르고 계사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승지        이익상(李翊相)에 대해 ‘소를 올려 논변을 함에 서로 겨루려는 뜻이 있었음은 부당한 짓이다.’는 이유로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대체로 이전에는 종실에 대해서도 외조(外朝)와 마찬가지로 제관에 차출을 하였는데, 인조조 때 차출을 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다. 그러므로 임인년에 해조가 제관에 차출할 사람이 모자라는 이유에서 다시 계품을 하여 각 능(陵)의 절제(節祭)에만 차출을 하였는데, 이징 등이 그것까지도 차출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렇게 진계를 한 것이었다. 이에 대간이 다시 따지고 들었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8일 을해

박지(朴贄)를 집의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오정창(吳挺昌)을 정언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필선으로, 이하(李夏)를 동래 부사로 각각 삼았다. 이하는 미처 부임을 하기에 앞서 전임 부사 정석(鄭晳)과 혼인을 맺었으므로 법으로 따지면 체직이 될 입장이었는데, 상이 특별히 명하여 파격적으로 부임을 시켰다.

 

1월 29일 병자

각 도에 전염병이 몹시 들끓어, 죽었다고 보고된 자가 2천 9백여 명이나 되었다.

 

문안사(問安使)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청나라에서 환국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淸主)가 심양(瀋陽)에 와서 그 할아버지의 능묘(陵墓)를 배알하였기 때문에 낭선군 우를 보내 문안을 한 것인데, 청주가 벌써 돌아가고 없었다. 이에 이우가 북경(北京)까지 뒤쫓아 갔다가 환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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