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 1672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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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오른쪽 겨드랑이의 결핵(結核)이 곪았기 때문이다.

 

2월 3일 기묘

평안도의 평양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대사헌 이경억이 병이 있어 부름에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4일 경진

대사간 민시중(閔蓍重)이 추감(推勘)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2월 5일 신사

전라도 장흥부의 천관산(天冠山) 대장봉(大壯峯)이 갑자기 움직였다.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서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서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백여 차례나 반복했다. 대개 그 산에 세 개의 석봉(石峯)이 솥발처럼 서 있는데, 이른바 대장봉은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으로서 높이가 30장이나 되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목격하였고, 도신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매우 괴이하고 허망한 일입니다. 수십 장이나 되는 석봉이 어떻게 좌우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것이 기울어질 때 풀과 나무 그리고 돌들이 필시 모두 부서졌을텐데, 그 고을의 수령은 직접 현지를 살펴보지 않았고 감사는 서둘러 아뢰었으니, 매우 얼뜨고 치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만약 큰 변괴로 여기셔서 더욱 수성(修省)을 하신다면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2월 6일 임오

이경억을 우참찬으로, 이민적을 대사헌으로, 강백년을 예조 참판으로, 이상진을 대사간으로, 오두인을 필선으로, 김환을 지평으로, 신익상을 봉교로 각각 삼았다.

 

두꺼비들이 어영청(御營廳) 북쪽 담장 밖에서 수없이 나와 종묘(宗廟)의 서쪽 담장 가에 이르렀는데, 두셋씩 서로 업고 도로를 가득 메워 사람들이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전라도 부안현(扶安縣)에서 정월 9일에 흰무지개가 해의 곁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황색 구름이 해를 가려 마치 일식 때와 같았으며, 서북쪽에서 우레 소리가 크게 났다고 도신이 알려왔다.

 

2월 7일 계미

사간 이합, 정언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남해 현령 임식(任湜)과 경기 수사 이원로(李元老)의 죄상이 어사의 서계에 숱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문서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임식은 해사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지 않고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으며, 원로는 직책만 파면하였을 뿐 끝내 사실을 캐보지 않았으니, 탐욕스러운 곤수와 수령들을 장차 어떻게 징계하고 두렵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잡아다가 문초하여 처리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영중추부사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어 사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2월 8일 갑신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전 부사 정한기(鄭漢驥)는 일찍이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있을 때, 그 고을의 김씨 성을 가진 집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강화도의 적곡을 배로 실어 나를 때, 그 배를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 앞에 정박해 놓고는 밤에 사람으로 하여금 매 섬마다 쌀을 빼내 김씨 집에 들여다 놓은 다음, 5, 6일이 지난 뒤에 그 섬수 대로 고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그 쌀을 되어 보면 한 섬이 겨우 8, 9두에 불과하였는데, 가을에 17두를 받아들였고 또 받아들인 뒤에는 다시 관청의 곡(斛)006)  으로 양을 고쳐 나머지를 빼내 자기의 용도로 가져갔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 처리하라."
하였다. 이튿날 그대로 따랐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토록 한 뒤,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목내선(睦來善)이 새로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는데,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내선이 비록 까다롭지 않고 소탈한 성격이기는 하나 목민관으로 내세울 만한 인재는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러하니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신후재(申厚載)와 동래 부사 정석(鄭晳) 등을 잡아다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왜(倭)가 보낸 정관(正官) 평성태(平成太)가 병사(病死)하였으나 부관왜(副官倭) 등이 동래에 그대로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이에 조정의 의논이 모두 말하기를
"정관이 죽었으면 마땅히 접위관을 소환해야 한다"
고 하였으므로, 후재에게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여러 왜인이 자기들을 멸시한다고 여겨 성을 내면서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에워싸고는 못 가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후재가 이에 장계로 그 상황을 보고하였는데, 조정의 의논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소환의 명령을 받고서도 왜에게 붙들려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크게 사체를 손상시켰셨습니다. 잡아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정석의 죄도 후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둘 다 잡아오도록 명한 것이다.

 

2월 9일 을유

영천군(永川郡)에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정월 29일 오시에 하늘에 얇은 구름이 끼어 햇빛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처음에는 대포소리 같다가 나중에는 우레소리 같았다. 서북방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가더니, 얼마 뒤에 그쳤다. 본군의 촌 백성이 그때 마침 본군의 남쪽에 있는 자인현(慈仁縣) 경계에서 돌덩어리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땅에 떨어진 뒤에 소리가 그쳤으며, 떨어진 곳에는 땅이 한 자 남짓 패였다. 그 돌의 크기는 말[斗]만 하였고 무게는 서른 여섯 근이었으며, 색은 검푸렀고 형체는 거북이가 엎드린 것 같았는데, 그 위에 짐승의 발자국 같은 흔적이 있었다. 이 일을 도신이 알려왔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특별히 훈련 도감의 사망한 포보(砲保) 가포(價布)를 감해주라고 하셨습니다만, 이 덕음(德音)이 정월에 내렸고, 베를 거두는 기한은 으레 세전(歲前)에 맞춰 하였으므로 각 고을에는 이미 바친 자가 있습니다. 사망한 것은 똑같은데 만약 이미 납입을 하였다는 이유로 고루 베푸는 혜택을 입지 못하게 된다면 이미 바친 자의 자식이나 아내 그리고 이웃이나 일가붙이는 유독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이미 바친 것은 본 고을에 되돌려 보내 그 주인에게 나누어 주게 하여 똑같이 보살피는 덕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여러 번 아뢴 뒤에야 따랐다.

 

이우정(李宇鼎)을 지평으로 삼았다.

 

왕대비의 머리에 독한 종기가 나서 밤 3경에 약방 도제조 이하를 불러들였다. 4경에 뜸을 떴다.

 

2월 10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자전이 뜸을 떴다. 도제조 이하가 약방에서 숙직하였다.

 

평안도 양덕(陽德) 등 세 고을이 관리하는 각종 곡식 9천 3백 90석과 원양도 통천(通川) 등 세 고을의 각종 곡식 1천 5백 50여 석을, 재해를 당한 북도(北道)의 고을에 옮겨 백성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음죽(陰竹)에 정배된 죄인 김시현(金時鉉)이 제멋대로 그 형 김하현(金夏鉉)의 임소(任所)인 안성(安城)을 왕래하였습니다. 정배된 죄인이 멋대로 유배지를 떠난 것이나, 그 고을을 지키는 수령이 사사롭게 왕래하도록 허락한 것은 국법으로 보자면 모두 통렬히 금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아뢰게 한 뒤에 시현과 음죽 현감 이명로(李命老)를 법에 따라 죄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1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올해 영남의 호적(戶籍)을 도신이 아뢴 바로 인해 추수를 기다려 정서(正書)하라는 분부가 이미 내렸는데, 이는 대체로 흉년이 들어 경비를 염려하는 정책에서 나온 일입니다. 더구나 작년과 올해는 중앙과 외방이 모두 큰 흉년이 들어, 뒤져 찾아내는 데 따르는 소요의 폐단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런 때에 호적을 작성한다는 건 아무래도 백성의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금년 중외의 호적을 당분간 정지하여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영상 허적이 경연 중에 아뢰기를,
"서울 의 호적 단자가 거의 다 걷혀가고 있는데 중간에 그만 두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니,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단자는 계속해서 걷도록 하고, 가을이 되거든 정서(正書)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여, 상이 윤허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금 단자를 걷게 되면 그에 따른 폐단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됩니다."
하면서 또 가을에 가서 성적(成籍)하기를 누차에 걸쳐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2일 무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동래 부사        이하(李夏)가 하직 인사를 하니,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그를 인견하였는데, 영상        허적도 입시하였다. 상이 이하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부임한 뒤에 왜에게 ‘너희들이 비록 집을 천 칸을 짓고 10년을 머무른들 너희들이 바라는 바가 이로 인해 이루어질 리는 전혀 없다. 너희들의 요청이 허락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부산에 있더라도 허락할 수 있지만, 허락할 수 없는 것이라면 비록 동래에 있더라도 허락할 수 없다. 하물며 조정에서 만약 너희들이 여기에 왔다고 해서 허락을 한다면, 이것은 너희들에게 부대껴서 들어주는 것이 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빨리 물러나 조정의 조치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분명히 깨우치라. 다만 염려되는 것은 통역관이 자세히 전하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하니, 이하가 아뢰기를,
"동래부의 관속들은 왜의 심복이 아닌 자가 없어, 모든 움직임이 곧장 누설되어 알려집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절대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한 마디를 사사로이 알려주면 금 4백 냥을 상으로 주기 때문에 장사치들이 나라의 실정을 누설하면서 오직 늦을까 걱정하는 정도라고 들었으니, 진실로 통분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하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제주(濟州)에 봉명 사행(奉命使行)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서계(書啓)한 내용 이외에 달리 얘기할 사항은 없는가?"
하니, 이하가 대답하기를,
"그 지역의 폐막은 빠짐없이 서계를 하였고 비국이 이미 회계(回啓)를 하였는데, 관원의 체임시 진상(進上)은 곧 타도에는 없는 규정입니다. 그 가운데 통개(筒介)007)                  가 20부(部)·녹비(鹿皮)008)                  가 50령(令)이고 장식을 하는 데 쓰이는 놋쇠 등 물품을 모두 서울에서 무역하고 있으므로 그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삼명일(三名日) 진상에 통개가 들어 있으니, 체임시 진상에는 이 물품을 없애주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이 밖에 백납(白蠟)·무회목(無灰木) 따위들도 도중(島中)의 폐가 되고 있는데, 무회목은 애당초 본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결에 떠내려오는 것을 주은 것이므로 더욱 몹시 희귀합니다."
하였고, 허적이 아뢰기를,
"제주는 속국과 마찬가지여서 체임시의 진상을 마치 제후가 조공(朝貢)하는 법처럼 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갑자기 없앨 수는 없지만, 무회목처럼 쓸데없이 폐해만 있는 것은 줄여 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줄여 주라고 하였다.

 

2월 13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자전께서 침을 맞았다.

 

2월 14일 경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6일 임진

약방에 술을 내렸다. 자전의 환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2월 17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8일 갑오

김만균을 승지로, 신정을 부응교로, 윤심을 교리로, 박세당을 수찬으로, 송창을 보덕으로, 이상을 장령으로, 윤계를 제주 목사로 각각 삼았다. 정조(政曹)가 처음에 무신(武臣)을 제주 목사로 주의(注擬)하여 들이자, 상이 하교하기를,
"문신·무신을 따지지 말고 의망을 하라는 일을 일찍이 정탈(定奪)하였는데, 지금 이 삼망(三望)을 모두 무신으로 의망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자, 정조가 문신 당상에는 주의할 만한 자가 몹시 부족해서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이 또 당하관 가운데 성적(聲績)이 있는 자를 각별히 가리어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윤계가 종부시 정(正)으로서 의망이 되어 낙점을 받았고 전례에 따라 관질이 올라갔다. 이때 윤계가 사사건건 간섭하기를 좋아하므로 척리(戚里)009)  가 그를 유난히 밉게 보았는데, 얼마 안가서 이 제명이 있었다.

 

대사헌 이민적이 아뢰기를,
"흉년을 구휼하는 정사는 오직 실지에 힘써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해마다 죽을 쑤어 구휼하고 있으니 그 효과를 또한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서로 잇따라 죽은 수만의 굶주린 백성이 모두 죽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한데나 맨땅에서 살므로 쉽게 병에 걸리고, 또 아침 저녁으로 왕래할 때 비바람을 가리지 못해서, 태반이 길에서 쓰러져 죽습니다. 관청에 와서 밥을 얻어먹는 외방의 토착민 역시 농사를 지을 길이 없습니다. 간혹 한때의 죽음은 면하더라도 끝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백성이 되고야 마는데, 이는 실로 이미 경험해 본 분명한 현상입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에 지시하여 원래의 거주지에 살고 있는 호구(戶口) 가운데 특히 가난하고 병든 자를 골라서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고, 죽을 쑤어 주는 곳에서는 떠돌아다니는 걸인들만 와서 먹게 하소서.
지난해 농사가 흉년이 든 것은 일기가 불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사람의 힘이 제때에 미치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더구나 올해의 형세는 또 전과 달라서, 굶주림으로 죽고 난 끝에 향리에 살아남은 토착민은 열에 너댓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곡식을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야(田野)의 황폐가 필시 지난해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사목(事目)을 만들어 각도에 거듭 당부하여 그 수령들로 하여 금 직접 전야를 순행하면서 종자가 없는 자에게는 종자를 지급하고 식량이 없는 자에게는 식량을 지급하게 하소서. 그리고 가을의 추수를 조사할 때에도 경작의 다소를 가지고 수령의 상벌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신후재(申厚載)를 잡아오도록 명한 뒤에 그의 대임으로 사람을 뽑아 보낼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혹은 뽑아 보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불가하다고도 하여 결정이 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탑전에서 논란을 하다가 결국은 본도의 도사(都事)를 뽑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원주(原州)에서 수상한 자를 잡아 가두었는데, 오늘 청나라 사신이 이미 돌아갔으니 이제 여쭈어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성명을 보니 박기상(朴起相)이었습니다. 그의 아비 예남(禮南)은 내노(內奴)로 문천(文川)에 살고 있으며, 그는 갑산(甲山)에 있는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공문을 보내 물어 보았더니,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어미는 수월(受月)인데, 동래 사람으로서 서울 양반집의 비녀였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결코 외국인이 아니고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쳐서 돌아온 자입니다. 본토(本土)로 보내게 되면 도망쳐 숨을 걱정이 없지 않으며, 잡아서 청나라로 보내게 되면 도망쳐 돌아올 폐단 역시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니 제주와 같은 절도(絶島)에 보낸다면 적절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형조 낭관은 12삭(朔)으로 재임 기한을 정했기 때문에 준삭(准朔) 전에는 다른 직임에 주의(注擬)하지 못하고 있어서, 간혹 달수를 채우고 전직되기 전에 지레 체임되었다가 금세 다시 제수되는 자도 있습니다. 감찰이나 금부도사의 경우는 거듭 임명되어 오는 자이면 달수를 계산하지 않고 다른 직임에 주의를 하고 있으니, 형조 낭관에 대해서도 달수를 채우고 거듭 임명되어 오는 자이면 또한 이 예에 따라 주의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조 낭관이 달수를 채운 뒤 체차되자마자 곧바로 제수되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조가 사세를 살펴서 처리를 해주도록 하고 꼭 힘든 업무에다 오래 둘 필요는 없다."
하였다.

 

사간 이합, 헌납 민종도, 정언 이인환 등이 아뢰기를,
"제용감의 포대목(布帒木)이 남아도느냐 줄어드느냐는 일은 공물의 다소에 달린 것이니, 이번에 공물을 견감시킨 시기를 맞아 포대목이 감소되리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용감 정 조사기(趙嗣基)는 그것의 유무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아랫것에게 써버리고는 ‘끌어다 쓰는 것[引用]’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사람에게서 독촉 징수하면서 한 해 동안의 씀씀이에 절제하는 태도가 없으므로, 공물 주인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길가에 전파되고 ‘삼가지 않는다.’는 얘기가 공회(公會)에서 제기되기까지 했는데도, 잠깐 들어왔다가는 금세 도로 나가는 식으로 태연히 행공을 하고 있습니다. 사대부의 염치가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9일 을미

헌납 민종도(閔宗道)가 인피하기를,
"어제 동료가 조사기의 일로 의논을 제기할 때 신은 더 자세히 실정을 살피고자 재삼 곤란하게 여기다가 끝내는 동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론을 들어보니, 대목(帒木)을 끌어다 쓰는 잘못된 관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그 죄를 범한 자가 한둘이 아닌데 사기만을 논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용감의 아전을 불러 물어보니, 끌어다 쓰는 규정은 과연 계묘년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사기가 그릇된 전례를 그대로 따른 죄는 실로 있습니다만, 이 일을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니, 여론이 그르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체차하소서."
하고, 정언 이인환 역시 인피하기를,
"신이 조사기 혼자만을 논핵한 것은 그가 잘못된 전례를 답습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의 씀씀이가 무절제하여 모두 사적인 데에 쓰거나 자질구레한 일에 낭비를 함으로써 원성이 떼 지어 일어나고 추한 소문이 전파되게 만들었으며, 장관이 그 짓을 금지시키는 말을 하기까지 했는데도 외려 부끄럽게 여길 줄을 모른 채 잠깐 들어왔다가 금세 나가버리는 태도로 전혀 염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이미 물의를 이유로 피혐했으니만큼, 신 또한 편한 마음으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였으며, 사간 이합이 아뢰기를,
"포대목을 끌어다 쓰는 일이 계묘년에 시작되었으니, 그동안 거쳐 나간 관원이 여러 사람인데 ‘삼가지 않는다.’는 얘기가 유독 조사기 혼자에게만 언급된 것은, 어찌 그럴 만한 까닭이 없는데도 그러하겠습니까. 의논을 제기한 동료가 내세우는 부분이 대체로 이 점에 있는데, 헌납 민종도가 이미 물의를 이유로 피혐을 했으니만큼,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하였다. 이에 헌부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토록 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행 중추부 지사 이완이 상소를 하여 노병을 이유로 본직 및 겸 대직인 수어사·비국 당상을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조 참의 여성제가 상소를 하여 면직해 주기를 간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타일렀다. 성제는 은대(銀臺)010)  에 재임하고 있을 때 윤경교의 일로 상의 재고(再考)를 청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어 구금을 당했는데, 이때 와서 비로소 제명(除命)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사직을 한 것이었다.

 

이조 참의 이단하가 상소를 하여 국사에 대해 논하니, 상이
"내 마땅히 유념을 하겠다."
고 답하였다.

 

2월 21일 정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으로 하여금 들어와 진찰하도록 하였다.

 

2월 22일 무술

헌납 민종도가 이인환의 인피하는 글 가운데 모욕하는 말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또 인피를 하였고, 이인환 역시 민종도에게 지척을 당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를 하였으며, 사간 이합은 두 동료가 인피를 하였으니 지금 처치를 해야 하는데 신이 일을 함께 한 사람으로서 감히 가부를 논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를 하였고, 지평 김환은 전에 이미 처치를 어긋나게 하였으니만큼 감히 다시 처치를 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인피를 하였다. 이에 헌부가 처치하여 이인환·이합·김환은 출사토록 하고 민종도는 체차토록 하였다. 지평 이우정은 또 소패에 나아가지 않은 일로 체차되었다.

 

황해도 해주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2월 23일 기해

황해도 곡산부(谷山府)의 민가에서 황소가 꼴과 곡식을 입에 대지 않은 채 자주 누웠다 일어났다 하기를 수십여 일 동안 계속하다가 뱀을 한 마리 낳았는데, 길이가 1자 5치이고 머리·꼬리·비늘이 진짜 뱀과 똑같다고 도신이 알려왔다.

 

2월 24일 경자

김수흥을 지경연으로, 목내선을 형조 참의로, 윤심을 헌납으로, 조근을 지평으로, 신선온을 검열로, 전동흘을 황해 병사로 각각 삼았다. 전라 병사 노정을 가선 품계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전에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진휼을 잘한 공로로 포상한 것이었다.

 

2월 25일 신축

사간 이합, 정언 이인환이 아뢰기를,
"갖가지 신역 가운데 징수할 데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 일찍이 탕감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희천군(熙川郡) 내노비(內奴婢)는 난리를 겪은 이래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는데도 매년 신공을 인족에게 침징하니 인족들도 견딜 수가 없어서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습니다. 이에 50여 명의 신공을 받아들일 곳이 없어지니 부득이 민결에 분할 징수하고 있어, 한 고을의 백성들이 살아남을 길이 없는 상황을 전에 간신이 탑전에 자세히 진달드림으로 인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여 여쭈어 처리하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사하여 아뢴 장계가 올라온 뒤에도 끝내 시행을 보지 못하고 있어서, 당초 조사하여 묻도록 한 본의를 아무런 실효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고질적인 폐단이 개혁되지 않고 있어 먼 데 사는 백성들이 실망을 느끼고 있으니, 청컨대 본도가 조사하여 아뢴 내용에 따라 특별히 탕감을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6일 임인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안주(安州)의 교생(校生) 양계장(梁繼璋)이 그의 노비가 상의원(尙衣院)의 공천(公賤)이 되었다고 본부에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본국인 이진(李珍)이 중국에 뽑혀 들어가서 태감(太監)011)  이 되었다가, 중종(中宗) 정덕(正德)012) 무진년013)  에 흠차 정사(欽差正使)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 특명으로 덕천(德川)에 사는 장례원(掌隷院)의 노비 4명을 주었습니다. 그때 교지(敎旨)에 찍힌 어인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당시 관반(館伴)과 낭청(郞廳)이 증명의 글을 써서 이진의 조카 수남(秀男)에게 영원히 주도록 하였고, 또 그의 누이의 딸 오씨(吳氏)에게 이전해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대대로 서로 전해 계장에게 이르기까지 전수한 문기(文記)가 매우 명백합니다. 그런데, 형조에서는 단지 수남과 오씨, 숙질 사이에 전수한 문기에 관청의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천을 삼아버렸으니, 그가 억울하다고 한 것이 당연합니다. 정덕 연간의 교지가 완연히 새것과 같습니다. 명나라 태감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노비를 하사받기까지 한 일을 어찌 다시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도 필시 백 년을 전후한 사태의 변화에 대해 측은하고 개연(慨然)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두셋의 노비를 주거나 뺏는 것이 공사간에 무슨 큰 관계까지야 있겠습니까마는, 사체에 관계된 바는 매우 큽니다. 그러니 장례원으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한 다음 여쭈어서 처리해, 그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임진년 병란 뒤에 궁궐이 불타버린 까닭에 선조(宣祖)께서 서울로 돌아오시어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옛집에 머무르셨으니, 이는 실로 중흥(中興)의 유기(遺基)로서, 비유하자면 소흥사택(紹興使宅)과 같은 것입니다. 인조조에서 정침(正寢) 구전(舊殿)을 특별히 봉(封)하고, 그 나머지 빈터는 모두 그의 자손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이 어찌 종족을 돈독히 대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혜택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의 손자 이찬(李纘)이 내사(內司)와 분쟁하고 있는 것은 이 빈터입니다. 그런데 종전에 내사에서 금지의 한계를 두지 않았고, 그 자손들 역시 자기 소유로 여겨 수십년 동안 분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약한 자손들이 사체를 모른 까닭에 단지 내사의 하인들이 조종하는 폐단만 알고, 내사 역시 승전 직첩(承傳直帖)을 받는다는 요즈음의 규례를 몰라, 망령되이 ‘난대(鸞臺)014)  를 경유하지 않았으니 어찌 어명이라 할 수 있느냐.’는 옛말을 빙자하여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계속하다가 스스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실로 불쌍히 여기셔야지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석방하라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로도 여러 번 간쟁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충청도 공산(公山)지역에 땅이 꺼져 구덩이가 되었는데, 항아리 모양처럼 위는 좁고 가운데는 넓었다.

 

2월 27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신병을 이유로 내국 제조를 먼저 체직시켜 주라고 간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고서, 안심하고 몸조리를 잘하라고 유시하였다.

 

2월 29일 을사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전라 감사의 장계를 보니, 천관산(天冠山)의 바위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서고, 대둔사(大芚寺)의 종이 저절로 울린 일을 모두 괴탄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상한 일을 모두 괴탄한 것으로 귀착시킨다면 해에 무지개가 있거나 별이 낮에 나타나는 것도 어느 것이 괴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뒤 폐단과 관계되는 일이니만큼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 오시수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에 정월 보름 후로 굶주림과 돌림병으로 죽은 백성이 7백여 명, 돌림병으로 죽은 소와 말이 1백여 마리라고 도신이 알려왔다.

 

병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가례 후 별시 무과의 초시 인원수를 본조에서 여쭈어 정하여야 하는데, 서울과 지방으로 나누어 수를 정해 시취하라는 분부가 이미 있었으므로 전례를 가져다 고찰해보니, 을유년 왕세자 책례 별시의 초시에는 서울과 지방을 분리 설행하여 모두 6백 명을 뽑았고, 을사년 정시의 초시에는 서울과 지방을 분리 설행하여 모두 1천 5백 명을 뽑았으며, 같은 해 대왕 대비전 평복(平復) 별시의 초시에는 서울과 지방을 분리 설행하여 모두 3백 명을 뽑았습니다. 이제 어느 해의 전례를 따라 설행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8백 명을 뽑도록 하라."

 

2월 30일 병오

이연년을 승지로, 이상을 집의로, 이수만을 장령으로, 신익상을 설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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