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정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대관이 진휼 정사에 관한 일을 다시 또 논계하였으므로 결정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각의 계사 내용이 비국의 사목과 그다지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 점에 있어서는 사실이지만, 조곡을 분급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각의 견해가 무상 분급을 하자고 하니, 이 한 조항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마른 쌀을 무상으로 분급하도록 허락하게 되면, 곡식의 수가 널리 보급되지 못하니 나중에는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고, 대사헌 이민적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우심한 자에게는 무상으로 나누어 주고, 조금 나은 자에게는 조곡으로 나눠 줬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상이 그들의 견해를 참작하여, 평민에게는 식구의 수를 헤아려 조곡을 나누어 주고, 떠돌이와 거지들에게는 죽을 쑤어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3월 3일 기유
이익·여성제를 승지로, 정유악을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전 제용감 정(濟用監正) 조사기가 정원에 와서 투소(投疏)하기를,
"조종조 때부터 왕위를 계승하고 나면 곧바로 재궁(梓宮)015) 을 준비하고 해마다 옻칠을 했었는데, 그 뜻이 심원합니다. 효종 초년에 신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명을 받아 장생전(長生殿)의 재궁을 칠하는 데 농간을 부리는지 조사한 일이 있으니, 효종께서 깊이 유의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효종의 초상에는 연판(連板)의 관을 사용했으니, 이것이 신하로서의 정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효종께서 승하하신 날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이때를 당해서는 오직 어버이를 높이 받드는 도리를 다하고 마지막 보내는 예를 다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적통(嫡統)이니 서자(庶子)니 하는 설들이 왜 갑자기 분분하게 일어나 끝내는 지체를 깎아내려 기년으로 단상하고 말았단 말입니까. 먼 뒷날에라도 필시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불가불 후회한다는 뜻을 보이시어 하늘에 계신 효종의 영혼을 위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옛 신하 정개청(鄭介淸)의 조예는 신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지만, 호남 일도의 유생들이 사당을 짓고 받들어 온 지 거의 백년이 되는데 하루 아침에 철거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사당을 지어 받드는 것은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것과는 다르고 보면 사당을 철거한 것은 너무 심한 것으로서, 한 도의 유생들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인데, 영남의 유생 가운데 혹 이의를 제기한 자들을 흉칙하고 사특한 자로 지목하여 평생 폐고(廢錮)시켜 과거를 못 보게 하거나 혹 과거에 급제한 자가 있더라도 평생토록 사판(仕版)에 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릇 임금에게 죄를 진 신하도 금방 거두어 써서 영원히 내버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유생들에게만 한때 의견이 달랐다 하여 평생 동안 금고시키는 죄를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 역시 변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야 할 하나의 일입니다.
과거의 폐단으로 말하면, 지난해 정시(庭試)에서 어떤 시권(試券)에 표문(表文)의 넉 자 단구(短句)에서 두 개의 ‘특(特)’자를 양쪽에 나란히 써서 한 구절을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이는 크게 격식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분명히 표시해 놓은 것이고, 문리도 분명치 않았으나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비가 고시관으로 있었으므로 사방에 웃음거리가 되어 사람들의 의혹을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고 욕하든 말든 좋은 벼슬을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오직 박천영(朴千榮)에 대해서만 글자 하나를 고친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합격자를 이미 발표한 뒤에 이름을 빼버렸으니,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죄를 받아 유배된 사람 가운데 어찌 억울한 자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는 죄인을 모두 용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전에 없던 흉년과 돌림병으로 거의 다 죽어가는 때를 만났으니, 악역(惡逆)·강상(綱常)을 범한 죄인을 제외하고는, 대소 경중을 따지지 말고 특별히 크게 용서해 주는 은전을 베풀어 민심을 기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인대할 때에 도승지 장선징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사기가 소를 바칠 때 숙직을 하고 있던 승지가 지레 입계부터 하였으나, 그 상소는 괴이한 말이 많았습니다. 연판 재궁에 관한 설은 신하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점이 있고, 예론(禮論) 한 조목에 있어서는 이미 조정의 금령이 있었는데도 【병오년에 유세철(柳世哲)이 올린 상소로 인해 상께서 엄금시키라고 특별히 명하고 중외에 포고하였다.】 승지가 살피지 못하고 몽롱하게 그의 소를 받아들였습니다. 대신도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고 말하였습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고,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어찌 이렇게 괴이한 일이 있겠습니까. 사기가 그를 탄핵한 글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곧바로 소를 올렸으니,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그 소 가운데 ‘다른 사람이 비웃고 욕하든 말든’이라는 말은 이인환을 지적한 것인데, 조금 전에 그 사람에게 호되게 논박을 받고는 금세 그 사람의 과거장에서의 일을 거론하였으니, 누가 보더라도 말할 나위조차 없는 짓입니다. 또 재궁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만약 전판(全板)이 있었는데도 연판을 썼다고 하면, 주관한 신하는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신이 호조 판서로 있었고 정치화(鄭致和)가 공조 판서로 있으면서 힘을 다해 전판을 찾았으나 끝내 얻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쩔 수 없어서 한 일을 이제 와서 제기했으니,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예를 논한 한 조항에 있어서는, 예란 알기 어려운 것이니만큼 의논이 갖가지이니, 사기가 오늘날 말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령을 반포한 데 대해서는, 신은 그것이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예론을 빙자하여 별도의 다른 뜻을 가진 자도 많았으니, 예를 들자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는 극히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상께서 특별히 금지시키게 하신 것인데, 어떻게 법을 무시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상소가 들어온 뒤에 반드시 정원의 계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끝내 없었다. 병오년의 금령은 나 역시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사기의 상소를 받아들인 승지가 이미 소를 올려 체직을 청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계자(啓字)’를 찍으실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소가 아직도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기의 원래 상소는 아직 내려보내지 않았으나, 내려보낸 뒤에는 마땅히 순서대로 처리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승지는 아무래도 공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먼저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이혜, 동부승지 이익상이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0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사법-탄핵(彈劾)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註 015] 재궁(梓宮) : 임금의 관(棺).
전교하였다.
"전 제용감 정 조사기의 상소는 애초에 부당하게 봉입된 것이니, 도로 내주도록 하라."
상이 양심합에 나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상황의 좋은 계책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일보다 나은 방법이 없는데, 역을 줄이고 베를 없애자는 일은 대사헌 이민적이 맨 먼저 그 단서를 제기하였습니다. 신해년 이전의 갖가지 신역 가운데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것들은 지징무처(指徵無處) 여부를 논하지 말고 마땅히 전부를 탕감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병판 민정중이 아뢰기를,
"받아들일 기한을 연장해 준 것과 아직 거두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한꺼번에 모두 탕감할 것입니까?"
하였고,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은 그것을 구별하여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한꺼번에 일률적으로 탕감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 의논에 따르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군병의 가포와 각사 노비의 신공과 내노비의 신공도 아직 수납되지 않은 것은 한꺼번에 모두 탕감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민적이 아뢰기를,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지난해와 올해에 도망하거나 죽은 자로 인해 궐액이 매우 많다. 그런데 갖가지 군병들을 만약 3년 내에는 충정시키지 말도록 할 경우, 삼년 후에 가서는 관(官)이나 민(民)이 모두 감당을 할 수가 없게 되므로, 이전에 도망하거나 죽은 인원은 당분간 3년이 지난 뒤에 수를 나누어 충정하도록 하고, 올해 도망하거나 사망한 인원은 지금부터 그대로 대정(代定)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이 일을 만약 좋게 해나가면 백성들이 입게 되는 은혜가 탕감시키는 일에 비해 더욱 클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방법도 좋기는 하나, 만약 연한을 정하지 않게 되면, 각 아문이 필시 자기네들 마음대로 독정(督定)을 할 것이니, 신의 생각은 꼭 연한을 정하고 싶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약 대정을 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망한 자의 가포는 또한 인족에게서 거둬들이면 안 된다. 이에 따라 3년을 기한으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갖가지 신역과 각읍의 군포를 특별히 탕감하도록 하신 이 일이야말로 전에 없던 큰 은명이고, 오래 전에 도망하거나 죽은 군병에 대해 당분간 충정시키지 말도록 한 것은 곧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을 한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이러한 일을 반드시 조령(詔令)으로써 반포를 하였지 담당 신하가 받들어 행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았으니, 지금 또 유신으로 하여금 자책(自責)하고 애통히 여긴다는 교서를 기초(起草)하게 하되, 직언을 구한다는 말까지 아울러 언급하여 팔방에 널리 알린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대신에게 이 말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허적이 아뢰기를,
"이 말이 매우 좋습니다."
하였고,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거행조건(擧行條件)을 내지 말고 비망기로써 판하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결정을 본 일이니만큼 거행조건을 내더라도 해로울 게 뭐 있는가."
하였다. 사간 이합이 아뢰기를,
"무릇 대각의 계사에 대해서는 비록 윤허하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시비를 깨우쳐 신하들 마음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매번 ‘윤허하지 않는다.’고만 비답을 하시니, 신하들의 심정이 매우 답답합니다. 근래 양사의 계사 가운데에는 비록 꼭 쟁집해야 할 일이더라도 오래 버티기가 어려워 정계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사망한 군병의 가포 등에 대한 일은 만약 오늘의 등대가 없었으면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였고, 수찬 최후상이 아뢰기를,
"오늘 두 건의 일을 특별히 변통하게 해 주셨으니 백성들이 받게 된 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래 인접하시는 일이 몹시 드물어 공사가 지체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우상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지금까지도 내려지지 않았고 대신의 소장도 오래도록 안에 머물려두고 계시니,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승지를 시켜서 앞에 나아가 문서를 읽도록 하거나 판부(判付)를 쓰게 해도 안 될 것이 없는 일입니다."
하니,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후상이 한 말이 실로 여러 신하들의 똑같은 심정입니다."
하였다. 이때 우상 송시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오래도록 내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후상이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날 상이 또 제주 목사 윤계를 인견하였다.
3월 4일 경술
도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전 정(正) 조사기의 상소 내용이 괴상망측하고 당찮은 점은 우선 접어두더라도, 그 가운데 금령을 범한 것이 있으니 그냥 둘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상소를 마땅히 유사에게 주어 죄를 감정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조 참의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들으니, 중종 대왕의 폐비 신씨(愼氏)는 그의 조카 신사원(愼思遠)에게 의탁하라 명하였고, 그가 죽자 또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명하고는 이어 사원으로 하여금 상을 주관하고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사원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그 딸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그 딸의 아들에게 또 아들이 없자, 그의 딸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딸이 아들을 두었는데, 이진황(李震璜)입니다. 지금 살아있기는 하나 의지할 데 없이 가난하고 궁색하여 조석간에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폐비의 신주를 그 집에서 모시고는 있으나 제사와 전(奠)을 모두 폐지하였고 향화도 끊겼다고 합니다. 대개 들으니, 국가에서 처음에는 그의 묘소 아래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나 오래 되어 흩어져 없어지자, 인조조에서 이어 약간 명을 두었는데 병자년 난리에 또 남김없이 사망하였고, 그 뒤로는 다시금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 살아서 국모(國母)를 지낸 분이고 폐비가 된 것은 자기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죽은 뒤에 사당의 제사와 묘소의 제사가 모두 끊겼으니, 진실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청컨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만약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으니 뭇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고 하면 그 신주를 묻어버려야 할 것이고, 만약 이렇게 두는 것이 미안하다고 하면 그 사당과 무덤의 제수(祭需)를 모두 관에서 주도록 하고 묘소를 수호하는 사람을 다시금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고 판서 박장원(朴長遠)은 효행(孝行)이 특별히 뛰어났는데, 불행히도 그의 어미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그 집안이 지금 끼니조차 굶고 있어서 80이 된 그의 어머니를 봉양할 길이 없다 하는데 진실로 가긍한 생각이 듭니다. 이 역시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그의 어머니에게 매월 급료를 주어 3년 상을 마치게 하고 그의 아들이 상을 마치고 녹을 받아 봉양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효도로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실로 적합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단하의 상소를 허적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읽고 난 뒤에 허적이 아뢰기를,
"폐비의 일을 전하께서는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종조의 폐비 신씨의 일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폐위된 것은 매우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당초 중종께서 훈신(勳臣)들의 의논에 못이겨 부득이 폐위시켰는데, 장경 왕후(章敬王后)가 승하하신 뒤에 유신(儒臣) 가운데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장경 왕후께서 이미 중전의 자리에 올라 원자(元子)를 낳으셨는데 만약 신씨가 복위(復位)되어 아들을 낳고 가례(嘉禮)의 선후를 따질 경우, 동궁(東宮)을 어느 위치에 두어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의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신비(愼妃)의 신주를 묻는 것과 묘소를 수호할 인원을 결정하여 주는 것과 제수를 관에서 주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대신과 의논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니, 영의정 정태화와 우의정 김수항이 의논드리기를,
"신씨 집의 직계 자손으로 생존한 자가 있으니, 그 신주를 모셔서는 안될 집에 그대로 모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신주를 본가에 돌려주고 제수는 관에서 헤아려 지급하여 향화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 묘소에는 약간 명의 인원을 정해 주어 나무꾼이나 목동이 들어가지 않도록 금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또 명하여, 박장원의 노모에게 살아있는 동안까지는 해조로 하여금 월료를 제급하도록 하였다.
3월 5일 신해
조사기를 의금부에 내렸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에게 명해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오늘날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별도로 변통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경술년 이전의 각종 신역(身役) 중에 미수분(未收分)은 모두 탕감해주고, 신해년의 각종 신역 중에 도망한 자도 감면해주어 백성의 힘이 조금이나마 펴지게 하라."
3월 6일 임자
상이 하교하였다.
"천하 국가가 있은 이래로 기근과 흉년이 없었던 시대가 있었겠는가마는 어찌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이 있었겠는가. 지난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들어보지 못했다. 아, 내가 덕이 박하고 재주가 둔한 자질로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좋아하지 않아 재이가 거듭 나타나고, 수재·한재·풍재(風災) 등 천지의 변괴가 없는 해가 없었다. 그런데도 어리석고 혼미하여 하늘의 견책에 재대로 응답하지 못하였기에 하늘이 크게 노하여 경술년과 신해년의 망극한 기근과 돌림병을 내려, 우리 동방 수천리의 억만 백성들로 하여금 길거리에 죽어 넘어져 쌓인 시체가 서로 겹치고 성시(城市)와 촌락(村落)이 거의 다 비어 버렸다.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이 참혹한 재앙을 당하니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으나, 단지 스스로 슬피 울먹이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며 사경에 놓인 만백성의 생명을 이 몸으로 대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 이게 무슨 때이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사람의 도리가 모두 사라져 어미와 자식이 서로 버리는 등 윤기의 변괴가 거듭 발생하고 있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보호하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은 오늘에 비하면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것 같다. 국가의 일이 이미 백척간두에 이르러, 내를 건너는 데 끝이 보이지 않고 사나운 파도 속에 배가 새는 것으로도 그 위태로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진휼 정사가 한창 급한데도 국가의 곡식이 매우 적으니, 장차 어떻게 구제하여 살려낸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한 심정이다.
아, 마침 발육하는 시기인 봄을 만나 만물이 모두 살아나는데, 오직 우리 백성들만 유독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망극한 재난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애통한 마음이 급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생각건대, 덕이 부족하고 몽매한 나의 과실과 국사에 이익이 되고 해가 되는 것과 백성을 구제하는 계책에는 말할 만한 점이 많을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 교서를 초안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해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인재를 뽑아 등용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릴 때 첫번째의 일이다. 그러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평상시의 규례에 구애받지 말고 각기 재주와 국량이 넉넉한 사람을 천거하여 전조에 보내 재주에 따라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수십 년동안 등용되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국가에서 사람을 쓰는 도리로 볼 때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 역시 전조로 하여금 일체 거두어 쓰도록 하라. 아, 오늘날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희 대소 신료와 서민들은 각기 품은 생각을 말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도록 하라."
3월 7일 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영부사 정태화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번에 신역을 감면해준 일은, 듣고본 적이 드문 일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조 이래 없었던 쾌거이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쾌거에 이어 죄수를 소결하여 석방시키는 은전이 있게 되면, 백성들의 소망을 위로하고 하늘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신의 생각만 그러할 뿐이 아니라 태화의 의견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소결하여 석방시키고자 한다면, 호적에 누락되어 전가 사변의 율을 적용한 자들을 모두 사면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고 기타 전가 사변 죄인 중에도 소결을 해야 할 자가 있다."
하였다. 좌참찬 이경억이 아뢰기를,
"법(法)이라는 것은 지켜야 되지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신중하게 살피고 함부로 용서하지 말라.’고 한 것은, 대체로 형벌이 느슨해지면 백성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인데, 지금처럼 전에 없는 흉년을 당해서는 우연히 한차례 거행하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형(徒刑)·유형(流刑) 이하는 모두 석방하고 잡범(雜犯)으로서 죽을죄에 포함된 자 가운데 살인한 자와 음행(淫行)을 저지른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면을 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햇수가 오래된 포흠은 재량껏 견감해야 하는데 모년(某年)을 기한으로 정해 그 이전 것을 일체 탕감시키는 것이 제일 편한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0년 이상 된 포흠과 5년 이상된 포흠의 실수를 조사해 낸 뒤 품정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인재를 찾아내는 일이 오늘날 무엇보다도 긴요한데, 외방에 대해서는 어제의 비망기 가운데 이미 도신으로 하여금 천거해 알리도록 하였으니, 조정에서도 인재를 천거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품(二品) 이상으로서 이미 동반(東班)의 실직에 행공하고 있는 자 및 육조의 참의와 삼사로 하여금 모두 인재를 천거토록 하되, 천거를 한 뒤에는 한 곳에 모여서 의논하여 어울리지 않는 자를 빼고, 등급을 나누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이전에는 무재(武才)일 경우 천거하는 자가 전무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업무(業武)나 한량(閑良)이더라도 천거해 알리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은상을 형조 참판으로, 김만기를 부제학으로, 이민적을 동지경연으로, 정륜을 승지로, 김익경을 호조 참의로, 민시중을 예조 참의로, 오정위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신정을 전라 감사로 각각 삼았다. 이때 이조 판서 김수항이 아뢰기를,
"형조 판서와 전라 감사를 차출해야 되는데 의망할 만한 사람이 부족하니, 형조 판서는 의정부의 서벽을 의망에 아울러 포함시키고 감사는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천거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명하기를,
"형조 판서도 대신에게 물어서 종2품 중에서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고, 이에 허적이 오정위를 추천하였고, 또 감사에 대해서는 신정과 정유악을 경연 석상에서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정위는 경기 감사로 있다가, 신정은 부응교로 있다가 모두 발탁 제수된 것이다.
3월 8일 갑인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에 사신의 장계를 보건대, 서장관 정적이 수천리 밖에서 객사를 하였다니 몹시 마음이 쓰리다. 세 도로 하여금 각별하게 호송을 하도록 하고, 또한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참작하여 제급토록 하라."
3월 9일 을묘
이만영을 우윤으로, 김익경·원만리를 승지로, 최후상을 부교리로, 이훤을 수찬으로, 임유후를 경기 감사로 각각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의관에게 명해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춘궁(春宮)의 문안(問安)하는 일은 수라를 살피는 일 외에 별다른 일이 없으면 상께서 신료들을 인접하실 때 비록 매번 시좌할 수는 없더라도 입진(入診)할 때와 같은 경우, 와서 문후(問候)토록 하는 것이 예법으로 볼 때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적곡을 탕감시키는 일을 오늘 의논하여 정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오년 이전의 미수곡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십만여 석입니다."
하자, 상이 전부 탕척해 주라고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상평청 등의 곡물 외에 각 영의 적곡 중에 호조에 관련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는데, 이것은 각 고을에서 조적하는 예에 따라 병오년 이전의 미수곡을 전부 탕척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해운 판관이 아뢴 계사 중에 한가지 사안이 바로 조군(漕軍)의 과거 응시에 관한 일입니다. 삼가 임진년 이후의 과거 사목을 살펴보니, 조군·수군으로서 법을 무시하고 응시한 자들을 모두 처벌하였는데, 지금은 이미 수군이 과거에 응시하는 길을 열어주었으니만큼 조군이 원통하다고 하는 게 당연합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이 모두 허락해야 된다고 여기었으나, 이 일이 대단한 변통에 관계된 것이므로 범연히 회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면전에서 여쭈고자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군과 똑같이 응시를 허락하라는 뜻으로 회계하라."
하고, 또 승지에게 이르기를,
"전 우윤 권시가 졸하였다니 몹시 놀랍고 슬프다. 선조에서 예우하던 신하에게 죽음을 애도하는 전례가 없어서는 안되겠으니, 이조에 말하여 정2품 벼슬을 추증하도록 하고, 제사 물품과 역군도 본도로 하여금 넉넉하게 제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양부의 민가에서 닭이 병아리 한 마리를 깠는데, 머리 하나에 날개가 셋, 다리가 넷이었다.
3월 11일 정사
진휼청이 두 곳에서 【동교(東郊)와 조지서(造紙署)이다.】 죽을 쑤어 기민을 구제하였다.
3월 12일 무오
권우(權堣)를 판결사로, 민종도(閔宗道)를 필선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각각 삼았다.
의금부에서 조사기의 죄를 논하여, 도삼년(徒三年)에 정배하기로 법을 적용하였다.
사간 이합이 아뢰기를,
"조사기의 상소 가운데 종통이니 적통이니 하는 말은 윤선도가 앞에서 창도하고 세철이 뒤에서 이었던 것인데, 그들의 음험·간사하고 도깨비 같은 행적들이 해와 달 아래 달아나 피할 수 없었으므로 특별히 금제를 만들어 중외에 반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기가 방자하게 소를 올려 전혀 거리낌 없이 감히 ‘지체를 깎아내려 단상하였다.’는 등의 말로 떠벌려 시험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 실제로 범한 죄를 따져보면 마땅히 먼곳에 유배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이제 그를 적용한 법이 겨우 도년(徒年)에 그쳤으니, 이게 어찌 당초에 금제를 정한 뜻이겠습니까. 멀리 유배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합 등이 여러 날 논계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함경도에서 굶주려 죽은 백성이 1백 10명이었다. 이를 도신이 보고하였다.
3월 13일 기미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는데,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관이 각기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하였고,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과 양사 및 옥당 역시 입시하였다. 저녁까지 석방할 죄수를 결정하였는데, 사면을 받은 자는 잡범(雜犯)과 사죄(死罪) 이하의 현재 수금된 죄수로서 경기도와 충청도 등을 합해 1백 40여 명이었다.
3월 14일 경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양남(兩南)과 함경도에 유배된 죄인 및 현재 수감된 죄수의 석방을 결정하였는데, 2백 40여 명이 사면을 받았다.
3월 15일 신유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강상(綱常)·살인(殺人)·장오(贓汚) 및 유배된 죄인 가운데 정리(情理)가 매우 중한 자는 모두 사면령 중에도 사면할 수 없는 자들인데 어떻게 소결하는 날에 사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죄인 황(晃) 등 6명과 김조(金𥶏) 등 27명은 전처럼 그대로 정배(定配)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 이합과 헌납 윤심이 아뢰기를,
"사복 정(司僕正) 박지(朴贄)는 조정에서 하는 행동이 사대부로서의 풍도를 많이 잃었으니,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16일 임술
홍만용(洪萬容)을 승지로, 이민서(李敏敍)를 호조 참의로, 홍주국(洪柱國)을 보덕으로, 유헌(兪櫶)을 문학으로, 윤가적(尹嘉績)을 사서로, 이우정(李宇鼎)을 정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설서로, 목창명(睦昌明)을 검열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죄수들을 소결하였다. 함경도와 평안도에 유배된 죄인 1백 90여 명이 사면을 받았다.
상이 자책(自責)하는 뜻으로 교서를 반포하여 죽을죄 이하의 잡범들을 사면하였다. 교서는 다음과 같다.
"아, 너희 중외 대소 신민들은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듣도록 하라. 하늘이 백성을 내시어 그들의 임금을 세운 것은 대체로 그로 하여금 백성을 보살피게 하려는 것이었다. 백성의 영췌(榮悴)·휴척(休戚)에 임금 노릇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려 있으니, 그 책임이 아무려면 무겁지 않은가.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조종의 큰 기업을 이어받아 뭇 신민의 웃자리에 앉은 지가 지금까지 십삼년이 흘렀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짊어진 책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를 걱정하여, 백성을 다스릴 때 감히 신중함을 폐하지 못하였고 하늘을 섬김에 감히 공경함을 잃지 않았으며, 또한 감히 놀고 즐기는 데에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덕이 사람들에게 젖어들지 못하고 다스리는 일에 요령을 알지 못한 채 고식적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스스로 위험하고 어지러운 상태에 이름으로써, 원망이 아래에서 일어나고 꾸지람이 위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후가 순조롭지 못하고 음양이 조화를 잃어, 홍수와 가뭄의 피해가 거의 없는 해가 없었고, 낮에 별이 나타나거나 벼락이 내리치는 변괴와 곤충·초목에 생기는 괴이한 현상이 날마다 일어나 이루 다 쓸 수가 없을 지경이니, 하늘이 나를 깨우치는 것 또한 부지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소시킬 방도를 갖지 못하였고, 이제 와서는 또 하늘이 극심한 흉년을 내리어, 작년엔 온갖 곡식이 흉작이었고 지난 여름엔 보리와 밀이 큰 흉작이었다. 이미 우리 백성들의 살아갈 방도가 끊어진 데다 열에 하나도 낫지 않는 돌림병까지 겹쳤으니, 불쌍한 우리 강토의 백성으로서 구덩이에 죽어 뒹구는 자가 그 얼마이며 길에서 쓰러져 죽은 자가 그 얼마인가. 도시에는 쌓인 시체가 냄새를 풍기고 촌락은 온통 쑥대밭이 되었으며, 재앙이 소나 말에까지 미치어 돌림병으로 쓰러져 거의 바닥이 났다. 우리 나라 수천리 강토를 다 둘러보아도 전연 생기라고는 없으니, 병란을 치른 참혹함으로도 형용하기에 부족하고, 서적에 기록된 것으로도 비할 데가 드문 일이다.
아, 지금이 어떤 때인가. 저 하늘은 나에게 꾸지람을 내리지 아니하고 저 죄없는 백성에게 내렸으니, 백성의 부모된 나로서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추위와 더위에 헐벗고 지낼 모습을 생각하면 잠잘 때도 자리가 편안하지 못했고, 굶주림에 시달려 누렇게 부황이 든 얼굴이 떠오르면 먹을 때도 음식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나의 쓰라린 마음이란 마치 고질병이 내 몸에 있는 듯하여, 한시바삐 하늘에 명을 청하고 싶었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온종일 노심초사 애를 태우며 강구해보지 않은 대책이 없었다.
내 이미 주선(廚膳)도 줄였고 내 이미 내온(內醞)도 없앴으며, 내 이미 절일(節日)의 헌상도 정지시켰고 내 이미 상방(尙方)의 베짜기도 그만두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굿간에 기르는 말의 숫자도 이미 줄였고 호위 군사의 인원수도 이미 감액하였으며, 제사(諸司)의 경비에 대해서도 이미 그 쓸데없는 비용을 감축하였고 백료에게 주던 녹봉도 이미 월름(月廩)으로 대체시켰으며, 양 자전의 어공에 대해서까지도 벌써 재량껏 줄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면 어찌 감히 아끼겠는가. 그러나 공사(公私) 간에 바닥이 나서 나라의 창고가 씻은 듯이 텅빈 까닭에, 기근을 구제하고 싶어도 꺼내서 줄 만한 곡식이 없고, 파종을 권장하고 싶어도 도와 줄 만한 종자가 없다.
생각건대, 갖은 고생을 겪으며 어렵사리 견디어 다행히 가까스로 생존한 저 백성들마저 또 장차 죽어가는 상황을 멀거니 서서 보게 될 것인데, 백성이 전부 쓰러져 죽게 되면 나라는 장차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바야흐로 지금은 봄이 무르익어 만물이 소생을 하고 겨우내 움츠리고 지내던 것들이 모두 즐거움을 맞고 있는데, 저 우리 백성들은 홀로 위망(危亡)에 허덕이는데도 누구 하나 보살피는 자가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듯 쓰린 심정이다.
슬프도다. 민간의 풍속이 크게 파괴되어 윤기(倫紀)가 끊어짐으로써, 어미로서 자식을 잡아먹는 자가 있고 아내로서 지아비를 죽이는 자가 있었으며, 좀도둑과 간사한 무리들이 제멋대로 설치어, 말푼 곡식을 노려 분탕질을 해대고 한 소쿠리 밥을 탐내 사람을 해쳤다. 이는 모두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그 본심을 잃은 것이나, 우리 백성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모두 나의 허물이지 저들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생각건대, 우리 열성(列聖)께서는 인후(仁厚)로써 나라를 보전하고 덕교(德敎)로써 백성을 교화하여, 깊고 지극한 인택(仁澤)이 사람들의 살갗속에까지 파고들었는데, 과인에 이르러서 끝내 수백년 동안 깍듯이 보살펴 온 백성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게 만든다면, 나 소자(小子)는 어찌 감히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또한 우리 조종께서도 ‘내가 후사를 제대로 두었다.’고 하시겠는가.
아, 국세의 위태로운 상황이 마치 큰 내를 건너는 데 끝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나, 곰곰 생각해보면 재앙을 초래한 그 이유가 어찌 없겠는가. 대체로 내가 깊은 궁중에서 자란 까닭에 농사가 얼마나 힘든 줄을 모르고, 누적되어 온 폐단을 덤덤하게 여기어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운 점을 살피지 못했다. 보살피는 조치는 비록 자주 내렸으나 은택이 아래에 파고들지 못하였고, 정령(政令)은 한갓 번거롭기만 할 뿐 믿음이 먼저 수립되지 아니함으로써, 군병이 시름에 젖고 백성이 원망을 하여 원근이 떠들썩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질병이 오래 낫지 않아 지기가 태만해지므로써 강학도 중지하였고, 인접도 뜸했다. 온갖 정무가 이 때문에 적체되고 신하들의 심정이 이 때문에 막혔던 것이니, 하늘이 몹시 노여워 하고 나라의 근본이 쓰러져 가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죄가 실로 나에게 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이제부터 전화위복 하는 것도 진정 나에게 달려 있고 멸망의 길로 나가는 것도 나에게 달려 있으니, 나는 새로운 각오로 마음을 크게 가다듬어 나 자신을 반성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시원스레 제거함으로써, 신민들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겠다. 너희 경사 대부(卿士大夫)들은, 나를 어쩔 수 없는 부족한 자라고 여기지 말고 각자 그대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쳐 함께 공경하고 협조함으로써, 장래를 안정시키고 쓰러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지속하게 하라.
비상한 변고를 당해서는 반드시 비상한 조처가 있어야 하니, 이에 지난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는 은전을 넓히고, 이어 너그럽게 용서하는 혜택을 베푸노라. 경술년 이전 각해[各年]의 신역 가운데 아직 걷히지 않은 것과 신해년의 도망하거나 사망한 자에게 징수할 베를 모두 면제토록 하고, 신해년 이전 갖가지 군병의 궐액은 삼년에 한하여 당분간 보충하는 일을 정지하고, 병오년 이전의 갖가지 관조로서 포흠된 것들은 일체 모두 탕척하도록 하고, 이 달 16일 새벽 이전의 강상에 관련된 십악 죄인을 제외한 죽을 죄 이하 잡범·도류(徒流)·정배(定配)·충군(充軍) 죄인을 모두 사면하고, 전가 사변(全家徙邊)·위노정속(爲奴定屬) 죄인으로 상사(常赦)에 포함되지 못한 부류들도 의논해 처결을 하도록 하고, 견책을 당해 폐고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모두 지난 잘못을 씻어주어 대도(大道)에 동참하게 하고, 조정 선비로서 여러해 동안 승진이 막혀 있는 자에 대해서도 전조로 하여금 재주에 따라 조용(調用)하여 침울함을 한탄하는 이가 없도록 하라.
아, 국가의 치란은 인재에 달려 있는 법이니,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이 일보다 급한 일이 없다. 열 집이 모여 사는 작은 고을에도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이 있는 법인데 더구나 나라 전체를 놓고 볼 때 어찌 인재가 없다고 하겠는가. 다만 찾아내는 것이 정성스럽지 않은 게 걱정될 따름이다. 그러니 각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상격(常格)에 구애받지 말고 숨은 인재를 폭넓게 찾아, 혹은 행의(行誼)로써 혹은 재주로써 혹은 용력으로써, 비록 한 가지 선행이나 한 가지 재예라 할지라도 모두 천거하여 알리도록 하라. 내 장차 발탁하여 써보겠다. 하찮은 사람의 말이더라도 반드시 취택(取擇)하는 일을 성인께서도 오히려 그러했거니, 하물며 못난 나에 있어서야 어찌 이 점을 소홀히 하겠는가. 전후로 구언하는 교지를 내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입을 다물고 지내는 게 유행처럼 되어 입바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는 내가 말을 들어주는 실상이 없었던 까닭이니만큼 내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니 중외 관직에 있는 여러 신하들 및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들로 하여금 위로는 나의 잘못으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의 잘잘못이나 백성들의 이해에 이르기까지 숨김없이 곧이곧대로 말하게 하라. 내 장차 기꺼이 받아들여 시행을 해나가겠다. 옛날에는 단지 한 아낙네가 품은 원한이 3년 가뭄을 들게 하였다. 지금 이번에 소결하여 석방하는 죄수들 이외에도 어찌 억울한 일로 원한을 품고서 하늘의 조화를 가로막는 사례가 없겠는가. 그러니 각도의 관리들로 하여금 나의 걱정하는 마음을 몸받아 별도로 분명하고 신중하게 살피어 소재지의 갇혀 있는 죄수들을 한시바삐 처결함으로써 감옥에서 말라죽는 걱정이 없게 하라. 설혹 저지른 죄가 중한 죄수이나 정상이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시일의 구근(久近)에 구애받지 말고 다시 살펴서 위에 여쭙도록 하라. 내 장차 옥안(獄案)을 토대로 하여 공정하게 처리할 것이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교화를 펴는 것은 감사에게 달려 있고, 걱정을 나눠갖고 함께 다스리는 것은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각자 그대들의 직책에 힘써, 되도록 한 백성이라도 살려내고 한 가지 폐해라도 줄이고자 노력하여, 내가 위임하여 면려하는 중임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내 장차 성적을 살펴 출척을 하겠노라.
아, 하늘의 운수는 떠나 갔다가도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으니, 장차 비운이 다하고 태평이 오게 될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느낌이 있으면 통하는 법이니,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하노니, 마땅히 잘 알았을 것으로 믿는다." 【대제학 김수항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0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인사-선발(選拔)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과학(科學)
3월 17일 계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평안·황해·경상 등도의 정배 죄인을 소결하여 1백 30여 명이 용서를 받았다.
경기 감사 임유후를 나문 정죄하라고 명하였다. 영상 허적이 어전에서 아뢰기를,
"경기의 조적을 거두어 들일 때 허위로 장부를 기록한 수령·찰방을 결장하라는 일을 월초(月初)에 이미 계하했는데도 감사가 즉시 거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후 감사 모두가 극히 해괴한 자들이니 마땅히 경고하는 도리가 있어야 하겠으나, 이번에 사면령을 반포한 날을 맞아, 결장토록 한 수령·찰방 등에 대해서는 탕척을 해줘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수령 등의 결장을 탕척하도록 하고, 전임 감사 오정위는 추고하고 현임 감사 임유후는 나문 정죄하도록 하였다.
3월 18일 갑자
왕대비전의 건강이 회복된 이유로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여, 죽을 죄 이하 잡범들을 사면하고 백관에게 가자하였다.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陳賀)를 하였다.
정언 이우정이 조사기와 친척되는 혐의가 있어서 본원의 계사에 연명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간 이합과 헌납 윤심은 박지를 파직시키라는 논계를 한번 아뢴 후 도로 정계한 일로 물의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언 서문상은 조사기가 작고한 숙부 이경휘를 엉뚱하게 헐뜯었는데 혐의 때문에 논계에 참여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이우정·서문상은 출사시키고, 이합·윤심은 체차하도록 하였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경기의 적곡을 거두어들일 때 장부를 허위로 기록한 수령들을 결장하도록 한 명이 9일에 내려졌는데, 전임 감사 오정위가 아직 관인을 인계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 즉시 명을 받들어 거행했어야 하고, 신임 감사 임유후는 경내에 도임한 날짜가 12일이었는데, 그 사이 3일 동안 무슨 곡절이 있었길래 아예 각읍에 분부를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장단(長湍)과 고양(高陽)에 품신을 해야 될 일이 있어서였다면, 그 밖의 여러 고을에는 또 어째서 관문을 보내지 않았단 말입니까. 조정의 명령이 내려간 지 이미 7, 8일이 지나도록 감사가 즉시 거행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면으로 인해 탕척되게 만들었습니다. 기강에 관계된 일이라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는데 단지 신임 감사만을 죄주는 것은 처벌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형조 판서 오정위도 똑같이 나문하고, 수령 중에도 이미 도임을 했으면서 도신에게 알리지 않아 그들이 온 것을 모르게 한 자가 있으니, 그들도 도신으로 하여금 적발하여 아뢰도록 함으로써 죄를 다스릴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수령을 적발하여 계문하도록 하자는 일만을 따랐다.
3월 20일 병인
강백년을 대사성으로, 맹주서를 승지로, 장응일을 공조 참의로, 윤심을 부수찬으로, 민종도를 헌납으로, 김우형을 경기 감사로 각각 삼았고, 예조 판서 정지화에게 숭정의 품계를 가자하였고, 도승지 장선징에게 자헌의 품계를 가자하였다. 약방 제조에게 자전의 옥후가 회복된 후 논상을 한 것이다. 이조가 아뢰기를,
"정2품 도승지가 비록 전례에 있긴 하나, 혹은 특명으로 제수하거나 혹은 가망에 의한 것으로 모두 상규(常規)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장선징의 본직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신병을 이유로 사직을 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보내 전유토록 하였다. 우상 송시열이 상소하여 지척한 까닭이었다.
3월 21일 정묘
영의정 허적이 책임을 느끼고서 정고(呈告)를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지중추부사 이완이 소를 올려 나이를 이유로 본직 및 겸직인 수어사·비변사 등의 직임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이상진이 세 차례 정고한 후 재차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한시바삐 출사하라고 명하였다.
이상진은 전에 이민서 등과 논의가 맞지 않아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고, 이 때문에 시골로 물러나 살면서 누차에 걸쳐 벼슬을 사양하였는데, 이때 와서 상경을 하였고 또 이와 같이 사직을 하였다.
3월 22일 무진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번에 도류(徒流) 이하 죄인을 모두 용서한 날을 맞아, 전과를 씻어주는 은전이 없을 수 없으니 양전(兩銓)의 세초(歲抄) 때 모두 전과를 씻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5일 신미
헌납 민종도가 아뢰기를,
"조사기 상소 중에 예제를 논의한 한 가지 일은, 이미 성헌(成憲)을 두어 중외에 반시함으로써 영구히 준행할 바탕을 삼고 장래에 논의가 분분해지는 폐해를 막은 것이었습니다. 성상의 염려가 원대하였고 나라의 법금이 엄중한데도, 사기가 도리어 감히 다시 제기를 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고 ‘내려 깎아 단상(短喪)을 했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그 속셈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가 지은 죄를 논하자면 그야말로 먼곳에 내쫓아야 제격이니, 원지에 유배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판의금부사 김수항이 지의금부사 정지화가 이번에 새로 가자되었으니 으레 판의금에 승진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사은 겸 동지 상사 정치화, 부사 이만영 등이 청나라로부터 환국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그들을 인견하니, 치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사명을 받들어 조정을 하직할 때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모두들 ‘세폐를 이번 기황(飢荒)이 든 때를 이용해 줄여달라고 청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이다.’고 하였는데, 저곳에 가보니 자문을 트집잡을 뿐만 아니라, 방물에 있어서도 하마터면 말썽이 생길 뻔 하였습니다. 지난번에는 집정(執政)이 모두 심양의 구로(舊老)들이었으므로 병자년 이전에 이웃 나라로 서로를 대한 예를 잘 알고 있어서 모든 일을 편리하게 서로 거들어 주고 깍듯이 대접하는 뜻이 꽤 있었는데, 오늘날은 권세를 쥐고 있는 자들 또한 죄다 연소한 한인(漢人)들인데다, 우리 나라를 증오하여 거들어 도와주는 일도 전혀 없었고, 또 덩달아 방해까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저곳의 형세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인구가 성하여 매우 많이 번식을 하였습니다. 신이 갑진년에 사명을 받고 그 곳에 들어간 지 지금까지 7, 8년 동안에 인구가 배나 많아져 길에는 행인들이 북적대고 있었습니다. 일행 중에 상대를 잃게 되면 즉시 찾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였고, 만영이 아뢰기를,
"신은 명나라 병자년과 지난 신묘년에 모두 서장관으로서 왕래하였는데, 신묘년에도 병자년에 비해 인구가 제법 많아졌었으나 지금은 신묘년에 비해 다시 열 배는 더 많아졌습니다. 명나라 때는 길에 거지들이 무척 많아서 서너 걸음 걷는 동안에도 너댓 사람을 꼬박꼬박 마주칠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하나도 얼씬거리지 않았고 저자 또한 매우 풍성하였습니다."
하였다.
3월 27일 계유
좌의정 정치화가 차자를 올려 사직을 하면서 또 종묘 제조 직임을 우선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고 어의를 보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날 종묘를 개수하는 일이 있었는데 치화가 병 때문에 진참하지 못하여 이번에 사직을 한 것이다.
충주 유생 한치상(韓致相) 등이 상소하여 고(故) 유신 문의공(文毅公) 이자(李秄), 교리 이연경(李延慶), 재신 김세필(金世弼), 상신 노수신(盧守愼) 등의 서원 사액을 청하였고, 유학 정미(鄭渼) 등 20여 명은 또 소를 올려 청풍(淸風)의 고(故) 대사성 김식(金湜), 고(故) 충간공(忠簡公) 김권(金權), 고(故) 상신 김육(金堉) 등의 서원 사액을 청하였다. 일이 예조에 회부되었는데, 예조가 이자 등의 서원에 대해서는 수교(受敎)를 끌어대어 방계하였고, 김식 등의 서원에 대해서는 전부터 특명으로 사액을 한 전례를 다분히 끌어대고서 방계하는 것으로써 결말을 지었으나, 상이 모두에게 특명으로 사액을 하였다.
이자와 연경은 바로 기묘 사화 때의 명유(名儒)인데, 이자는 더욱 중한 명망이 있었고, 배척을 받고 난 뒤에는 모두 충주에 붙어살다가 졸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만력 임오년에 이미 사당을 세워 제향을 하였다. 세필 또한 기묘 사화 때의 명사로서 조광조가 화를 입은 뒤 능히 바른 의논을 제기하여 신변하는 말을 꺼냈으나, 급기야 하옥되어 신문을 받을 때에 가서는 도리어 극력 자기 변명을 함으로써 끝까지 소신을 지키지는 못했다.
수신은 처음에는 당대의 중망을 받았으나, 재상이 된 뒤로는 오로지 시세에 영합하기만을 일삼았고 만절(晩節)을 상실하였으며, 학문도 순수하지 못했다. 세필은 그 자손들이 충주에 많이 살았고 수신은 당인들이 또 존숭하여, 그뒤에 함께 같은 사당에 추배(追配)되었다.
김식은 조광조와 서로 벗하여 학술이 세상에 알려지고, 기묘년에 유배를 당해 끝내는 거창(居昌)의 산속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의 현손인 고(故) 재상 김육(金堉) 부자의 지체가 높아짐에 이르러 고향 사람들이 비로소 거창에 사당을 세우고 또 지평(砥平)에도 건립하여 조광조와 더불어 함께 제향을 하였는데, 이때 와서 정미 등이 또 청풍에다 사당을 세우고서 김식을 주향(主享)하고 김권·김육을 배향하였다. 그 이유는 청풍은 바로 김식의 성향(姓鄕)이고 김권 또한 김식의 손자로서 성혼(成渾)에게 수학했고 절의로써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3월 28일 갑술
정언 서문상이 소패에 나오지 않은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29일 을해
이때 작년부터 금년 봄까지 돌림병이 계속 들끓어 2월 이후로 기근 때문에 병사한 자가 무수하였다. 각도에서 알려온 보고는 실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었는데도 함경도는 7백여 명, 황해도는 4백 70여 명, 평안·전라 두 도는 4백 수십여 명, 충청도는 2백 60여 명, 경상도는 5백여 명, 원양도는 1백여 명, 경기도는 3백여 명이었다. 상평청과 진휼청이 조석으로 구제해 준 기민들이 많게는 4천 3백여 명, 적게는 2천여 명이었으며, 외방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 떼를 지어 도적질을 함으로써 화적떼가 인명을 살상하는 변고가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민간에 저축된 건 벌써 바닥이 나서 그들이 훔쳐가는 것이랬자 고작 됫박쌀에 불과하였는데, 길에서 장사치나 여행자를 만나면 뒤질세라 서로 달려들어 약탈을 하였다. 호남과 영남의 중간 지역이 특히 도적떼의 소굴로 변했고, 충청도 청주 등 고을에서는 보름 사이에 인명을 살상한 곳이 많을 때는 열네 군데나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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