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 1672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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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병자

조수익을 예조 참판으로, 이은상을 병조 참판으로, 이만영을 형조 참판으로, 홍주삼을 승지로, 조위봉을 부수찬으로, 정재희와 조이병을 정언으로, 윤치적을 대교로 각각 삼았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과천 현감 한진하(韓振夏)는 도살장을 많이 설치하여 이익을 독점하므로써 제 뱃속을 불리고 있다.’는 이유로 잡아다 문초하기를 계청하고, 또 아뢰기를,
"외방 부자들이 사곡(私穀)을 봉채(封債)하는 행위에 대해 이미 금령이 있었는데도, 주현에서는 전연 봉행하지 않고 있어 믿음을 잃고 원망을 자아냅니다. 각도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도록 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조사해 아뢰도록 하자는 일만을 따랐다.

 

행 대사간 이상진이 병 때문에 소명에 나아가지 못했으니 추함을 받아야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좌의정 정치화가 첫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비답하기를,
"저번 차자의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말하였으니 경은 필시 내 뜻을 잘 알았을 텐데, 겸손해 하는 말이 어쩌면 그리도 심한가.
아, 오늘날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더라도 상신이 한꺼번에 사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보기가 드문 일이다. 혹시 마음에 불안히 여기는 게 있는 것은 아닌가? 경의 도량이라면 필시 잗단 일로 얼굴을 붉히지 아니할 텐데, 어째서 그만 나랏일이 몹시 어려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경에게 질병이 없어 노고를 견딜 만하다는 뜻이 아니다. 경이 또 물러나게 되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병중이라서 말을 자세히 못하니 경은 모쪼록 나의 뜻을 헤아려 안심하고 몸조리나 잘하라. 다시는 사직을 고집하지 말고 내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참의 이민서가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와서 직무를 살피라는 내용으로 비답하였다.
민서는 고양 군수를 스스로 그만두고 고향에 살면서 벼슬에 나서지 않다가 자급이 승진되자 서추(西樞)의 직임을 사양하고 즉시 귀향하였는데, 이때 와서 벼슬 임명이 있어서 이번 사직소를 올린 것이었다. 재차 사직을 하니, 이에 체직되었다.

 

이때 팔도에서 창고를 열어 기민들을 진휼하였는데, 경상도의 기민이 33만 명에 이르러 여러 도 가운데 가장 많았다.

 

4월 2일 정축

대사헌 이민적, 장령 조원기·이수만, 지평 정유악, 병조 판서 민정중 등이 청대하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인견하였는데 호조 판서 김수흥도 뒤를 따라 입시하였다. 민적이 아뢰기를,
"경술년 조(條)의 전세(田稅)에 대해, 두 해 전세를 한꺼번에 거듭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을 염려하여, 절반만 수납하고 절반은 연기하여 거두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춘궁기를 맞아 민력이 이미 바닥난 상태에서는 신·구(新舊) 전세를 마련해 바칠 길이 만무하니, 경술년조 전세 중에 연기하여 받기로 한 절반을 이미 거둔 것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를 특명으로 탕감해주면, 백성들이 살아 남을 수 있고 덕의(德意) 또한 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명하여 이미 거둔 것은 서울로 실어오고 아직 안 거둔 것은 독촉을 정지하도록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유호(柳湖) 등이 살인한 죄는 용서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본원의 계사에 이미 그 일을 빠짐없이 말씀드렸는데도 아직껏 윤허를 하지 않으시니, 신은 저으기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유호를 전대로 정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봉령(李鳳齡) 역시 살인한 자가 아닌가?"
하였다. 이에 정중이 아뢰기를,
"봉령이 전에 평안 감사의 군관으로 있으면서 숙천(肅川)에 갔다가 체례상의 일로 인해 사람을 잡아다 곤봉으로 일곱 차례 쳤는데 맞은 자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봉령은 지금 훈련원 부정으로 있습니다."
하니, 민적이 아뢰기를,
"민정중이 한 일은 몹시 잘못되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어 죄를 받은 자를 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제수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중히 고르려는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민적이 또 아뢰기를,
"해조의 관원이 이미 제대로 가리지 않아 추고를 받게 되었으면, 봉령 역시 그대로 그 벼슬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단지 체차만 하라고 하였다. 지평 정유악이 아뢰기를,
"얼마 전에 좌상을 만나 유호에 관한 일을 언급하였는데 그가 ‘아홉 차례 장을 쳐서 인명이 죽게 되다니, 정상이 십분 놀라운 일이다.’ 하였습니다."
하였고, 장령 조원기가 아뢰기를,
"유악이 감히 대신의 사저에서 나눈 얘기를 성상께 상달하다니, 대각의 체면을 손상하는 행위이고 뒤폐단에도 관계된 일입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3일 무인

상이 명하여 유지를 내려 우의정 송시열, 호군 송준길, 전 찬선 이유태, 전 참판 윤문거, 집의 이상을 부르도록 하고, 또 구언을 하였다. 송시열·송준길에게는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으나, 모두 사직하고 오지 않았다.

 

상이 명하여 강도의 곡식 3천 9백여 석과 해서의 관향곡 6천 석을 경기도와 황해도의 재해를 입은 고을로 수송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누어주어 파종을 하도록 하였는데, 헌부의 계청을 따른 것이었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청대하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인견하니, 정중이 아뢰기를,
"해서의 곡물 2만 석을 제주에 떼어주라는 일을 전에 이미 품정하였습니다. 다만 해서 각 고을의 두 해 전세를 그곳에서도 지금 거두고 있는데 또 이렇게 이전하는 조처가 있게 되면 참으로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휼청이 5, 6천 석을 덜어내 제주에 옮겨줌으로써 2만 석의 수량을 채우고, 해서의 곡물 5, 6천 석은 그대로 유치하여 그곳의 급한 상황을 끄도록 하는 게 편리하겠다."
하였다. 그 뒤 또 호남의 쌀을 옮겨 진휼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맹주서가 아뢰기를,
"예전에 사신의 명을 받고 나갔다가 이역(異域)에서 죽으면, 으레 추증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서장관(書狀官)        정적(鄭樍)을 이와 똑같이 시행해야 될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전례대로 추증하라고 하였다.

 

4월 4일 기묘

영의정 허적이 일곱 번째 사직서를 올렸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인피하고 들어간 지 이미 반 달이 지났으므로 병이 나았을 만도 한데 급히 사직을 청해 마지않고 있으니, 어찌 내 뜻을 이다지도 이해하지 못한단 말인가. 좌상이 이번에 또 인피하고 들어갔다. 지금의 국가 형세로 세 정승의 자리가 한꺼번에 비어버렸으니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경이 만약 이를 생각해 보았다면, 반드시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조정에 나올 것이다. 어찌 여러 말을 할 것이 있겠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다시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치도(治道)를 논하여 조정과 재야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동래의 한 백성이 왜관의 왜인에게 베를 꾸어서 쓰고는 오랫동안 갚지 않았는데, 하루는 왜인이 몰래 와서 꾸어간 베를 달라고 급히 조르자, 그 사람이 왜인을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그를 효수하였다.

 

4월 5일 경진

이상진을 좌윤으로, 여성제를 대사간으로, 김만균을 승지로, 박세당을 부응교로, 이합을 필선으로, 윤심을 이조 좌랑으로, 이우정을 지평으로, 최석만을 설서로 각각 삼았다.

 

원양도의 양양·강릉·삼척·울진 등 네 고을에 산불이 거세게 번지는 통에 하루 사이에 불이 번져 타버린 민가가 1천 9백여 채나 되었고, 강릉의 우계창(羽溪倉)과 삼척의 군기고가 모조리 불에 타버렸으며, 화상을 입어 사망한 백성이 65명이었다. 도신이 이 일을 알려오니, 상이 명하여 영서의 곡물 1천 석을 옮겨 진휼하도록 하였다.

 

4월 6일 신사

상이 뜸을 떴다.

 

영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또 차자를 올려 사직을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4월 7일 임오

상이 뜸을 떴다.

 

4월 8일 계미

상이 뜸을 떴다.

 

신후재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무릇 세초(歲抄)하는 규정에 비록 상년(常年)인 경우라 하더라도 반드시 세전(歲前)에 감정을 하도록 한 것은 의도가 있어서 한 일인데 얼핏 들으니, 외방에서 조정의 뜻을 몸받지 않고 더러는 능력을 뽐낼 심산으로 여름철이 닥쳤는데도 장정을 계속 긁어모으고 있다 합니다. 진휼하는 일이 한창 다급하고 농사철이 점차 닥쳐오는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감히 성상께서 보살피려 하시는 뜻을 어겨가면서 함부로 법에 벗어난 일을 행하므로써 백성들을 거듭 곤궁하게 한단 말입니까. 해도의 감사·병사·수사 및 병무(兵務)를 주관하는 각 아문으로 하여금 일체 금지하게 하고, 그 가운데 특히 심한 수령에 대해서는 또한 적발 계문토록 하여 죄를 부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9일 갑신

상이 뜸을 떴다.

 

좌의정 정치화가 세 번째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4월 10일 을유

부제학 김만기 등이 차자를 올려 《맹자(孟子)》의 "항상 걱정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하라."는 말을 인용016)  하여 상에게 "다난(多難)한 가운데 나라가 흥하고 걱정을 많이 가져야 거룩하게 된다."는 점을 권면하였으며, 또 서너 명의 재야 유신을 초치하여 자문하고 강구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4월 11일 병술

작년 봄과 여름 사이에 굶주려 죽은 시체가 길에 즐비하여 진휼청이 수레에다 실어 동·서 교외 및 목멱산 너머 기슭에다 묻어주었는데, 이때 와서 서울과 가까운 곳에다 묻어서는 안된다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경조로 하여금 10리 밖에다 옮기도록 하였다. 그 시체의 수가 3천 6십여 구(口)였다.

 

4월 12일 정해

상이 침을 맞았다.

 

영의정 허적이 열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승지를 보내 도타이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4월 14일 기축

경기의 양주 등 네 고을에 연일 밤에 서리가 내렸다.

 

대사헌 이민적이 거둥에 참여하지 못했고 또 소패를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15일 경인

좌의정 정치화가 네 번째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온후한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신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다.

 

4월 17일 임진

이경억을 대사헌으로, 이민적을 예조 참판으로, 김익경을 병조 참의로, 민종도를 사간으로, 윤진을 헌납으로, 윤치적을 봉교로 각각 삼았다.

 

장령 조원기·이수만 등이 아뢰기를,
"부수찬 신후재는 얼마 전에 사명(使命)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이유로 하옥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초의 형편이 아무리 자유스럽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모멸을 당하고 치욕을 끼친 그의 죄는 누가 봐도 피할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전과를 씻어주는 은전에 따라 서용을 받게 되었더라도 금세 경악에 앉히는 일은, 물의가 들고 일어나 다들 너무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 등이 체차를 논하려고 하였으나 동료의 의논이 그것은 안 된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신들의 말이 신뢰받지 못한 까닭이니, 체차해 주소서."
하였고, 지평 김환이 아뢰기를,
"그 날 동료가 부수찬 신후재를 체차해야 된다는 일로 석상에서 발론하기에, 신의 생각에는 ‘후재가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과실이 있었을 때에 맞춰 조정에서 이미 옥에 회부하여 법에 따라 죄를 부과하였는데, 이제 서용받아 벼슬에 제수된 뒤에 와서 예전 일을 뒤늦게 탓하고, 또 다시 체직을 논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친 일이다.’고 여겼습니다. 신의 소견이 이러하여 끝내 구차히 동조할 수 없는 형편이니, 체차해 주소서."
하였는데, 지평 이우정이 처치하여 모두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8일 계사

좌의정 정치화가 다섯 번째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호군        송준길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탑전에서 사직하고 물러날 때 ‘신이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로 돌아가더라도 조정의 잘못을 듣게 되면 서슴없이 글을 갖추어 진달하고 싶습니다.’고 아뢰자, 성명께서 흔쾌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때의 그 마음이 환히 가슴에 박혀 있습니다.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잊었겠습니까. 그런데 수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으니, 신이 전하를 저버린 것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면, 신이 감히 위축되어 입을 다물고 있음으로써 제깐에 일신을 영위하려는 꾀를 부린 것이 아니라, 향리에 물러나 살고 있는 사람이 자꾸 조정의 과실을 논하여 시끄러움을 일으키게 되면 도리가 아닐 듯해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초고를 엮었다가 도로 없애버린 적도 여러번이었습니다. 이제 마침 전하께서 어려운 국면을 맞아 크게 마음에 놀라시어 이미 자책하는 교서를 내리시고도 또 직언을 구하는 별도의 유지를 신에게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한마디 말도 없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신이 죽기 전에 다시는 말할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은 그야말로 전하를 저버린 몸이 됩니다. 그러니 신이 만번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찌 말을 사양하겠습니까.
증자(曾子)의 말씀에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그 말이 착해진다.’고 하였으니, 못난 신이 죽을 날을 앞에 두고 하는 말에도 혹시 착한 면이 있어 들어줄 만 할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공평한 마음과 온화한 기분으로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신이 지난 겨울, 외진 산속에 병들어 누워 지내면서 삼가 윤경교의 일에 대해 소식을 들었는데, 그 일로 전하께서 노여움을 몹시 터뜨리며 언성을 몹시 높이셨고, 그간에 마땅치 않은 명령과 사리에 어긋난 거조가 필설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장사숙(張思叔)은 그저 일개 미천한 선비에 불과했는데도 마부에게 욕을 하며 꾸짖자,017) 이천(伊川) 선생이 그를 ‘어찌 참을성이 없이 행동하느냐.’고 나무랐거늘, 하물며 당당한 천승(千乘)의 임금으로서 이러한 언성과 기색을 대각의 직언하는 신하에게 쓸 수가 있겠습니까.
세력이 있는 곳으로 온 조정이 휩쓸려 들어가고 아첨을 앞다투어 떨어대면서 번갈아 부추켜댐으로써, 끝내 전하로 하여금 천고에 없었던 은례(恩例)를 베풀게 하여 저 능글맞게 거드름을 피우는 자를 도로 백료의 윗자리에 앉혀 놓았으니, 총애하는 신하의 처지를 위해주는 점은 지극하다고 할 것이나, 성명께서 만고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롱과 비웃음거리를 크게 남기신 점에 대해서는 어쩌면 좋겠습니까. 신은 저으기 가슴이 아픕니다.
신이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지난 기유(己酉)의 해에 상께서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 대신(臺臣)인 권격(權格)이라는 자가 일을 흐리터분하게 논하여 크게 성상의 노여움을 건드렸는데, 그때 그를 꾸짖은 여덟 글자에 대해 신하치고 실색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글자깨나 깨친 사람이면 다들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환궁한 뒤 신이 탑전에서 반복하여 진달하고, 전 영의정        정태화 역시 힘껏 그 일 을 말하자, 마침내 성상께서 정원에 명하여 부표(付標)하여 지워버리도록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잘못을 얼버무리지 않고 명백하게 고치셨으니 사람치고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까지 원근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교의 일에는 전후의 성교(聖敎)가 화풀이에서 비롯되어 정당함을 잃은 것이 한둘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흉악하고 교활하다.’느니, ‘짐승같다.’느니, ‘귀신의 심보’라느니, ‘패거리를 부르고 당류를 끌어들인다.’느니 하신 말씀은, 모두가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것들이고 중외에서 다함께 놀라고 걱정하는 바입니다. 권격에다 비하면 경교가 그간에 받은 은총이 또 몇 계단 더 깊을 뿐이 아니었으니, 우러러 생각건대, 전하께서 한밤중 잠을 이루지 못하실 때나 조용히 깊은 생각에 잠기실 즈음에, 틀림없이 스스로 후회가 들어 고치려고 생각하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대대적인 은전을 베풀어 전과를 말끔히 씻어주는 일이 어디에고 이르지 않은 데가 없으니, 진정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서 분명한 글을 내리시어 정원에 명하여 지난해 권격의 예에 따라 성교 가운데 위에 말씀드린 서너가지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전부 부표하여 지워버리도록 하심으로써 뉘우치는 뜻을 시원스레 보이소서. 그리하여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경교를 소환하여 다시 대각에 앉힘으로써, 올곧은 기개를 표창(表彰)하고 모범적인 풍채를 면려시킨다면 국가가 아마 국가답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당사(唐史)》를 읽다가 ‘덕종(德宗)이 이필(李泌)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노기(盧杞)를 간사하다고 말하는데 짐(朕)은 노기가 간사한 줄 모르겠다.」 하자, 이필이 대답하기를 「그것이 그가 간사한 까닭입니다.」 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면, 미상불 읽던 책을 덮고서 탄식을 하곤 했습니다. 덕종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에게 홀린 일은 그야말로 후세 임금들의 본보기가 될 만하고, 이필이 대답한 말은 어쩌면 그리도 딱 들어맞고 의미가 있습니까.
아,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모르고 계시는 정도 뿐만이 아닙니다. 신은 언제나 삼대(三代) 거룩한 임금들의 정밀하고 전일한 전통을 전하께 기대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말세의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이게 어찌 평소에 기대해오던 것이겠습니까. 그야말로 통곡을 해도 모자랄 일입니다.
신이 전에 탑전에서, 그림자를 통해 형체를 살피는 자018)                  가 있는 듯하기에 감히 사전에 대비하시라는 경계를 말씀드리면서 ‘성상께서 사정(邪正)과 시비(是非) 사이에 대해 만약 세심하게 살펴 명백하게 분별하지 못하신다면 후일의 염려를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아직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십니까? 신의 이 말 때문에 뭇사람들의 분노가 불꽃처럼 거세게 일어나 신이 몸을 하마터면 스스로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의 말에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는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는데, 지금 신이 말한 바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니, 정녕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몹시 두렵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미 이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라의 계책과 백성의 우려가 차마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는데, 까마득한 하늘에는 물어볼래야 물을 길이 없으니, 하늘이 손을 떼면 장차 버틸 수 없는 일이겠습니까. 아, 어찌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우러러 생각건대, 성상의 어질고 돈후한 덕은 신명(神明)에게도 물어볼 만하니, 이런 임금이 계시는데 어찌 깊이 우려를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이 믿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 점에 있습니다. 근일 백성을 보살피는 정사는 누가 봐도 지극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어찌 말할 만한 문제점이 없겠습니까. 역사책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군덕(君德)과 언로(言路)야말로 대체에 관계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이 다른 일에 대해 언급을 아니하고 오로지 이 일을 간곡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전하의 일심(一心)은 하늘을 감격시킬 수 있고 신민을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 ‘마음’이라는 것이 출입을 함에 정해진 때가 없고 지니고 잃음이 무상하여, 항상 보존하여 가꾸고 성찰을 함으로써 끊임없이 순수하게 간직하기란, 그야말로 천하의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옛사람은 군덕의 성취를 경연에 책임지웠습니다. 신이 전후의 장주에다 이 뜻을 진달드린 적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는데 연래에 경연을 줄곧 폐하고 계십니다. 옥후가 편찮으셔서 미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는 하나, 식자들의 우려를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에 면전에서 아뢸 적에 ‘원컨대 전하께서는 먼저 표준을 세우고서 학문에 힘쓰고 덕을 닦아나아감으로써, 후손에게 물려줄 바탕을 만들고 군사(君師)로서의 책임을 다하소서.’라고 말씀드린 것은, 대체로 경연과 서연에 기대를 가진 것으로, 그 뜻이 실로 매우 간절하였는데 조금이나마 성상께서 기억을 하시겠습니까.
주자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혹시 깊은 궁중 안에 한가로이 지내는 가운데 가슴 깊이 사물을 응접하는 곳에, 이른바 ‘천리’라는 것이 순수하지 못한 데가 있다거나, 이른바 ‘인욕’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천리가 순수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선(善)을 할 때 항상 제 양(量)을 채우지 못하고, 인욕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악(惡)을 제거할 때 항상 그 부리를 없애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는 행하되 제 양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악을 제거하기는 제거하되 그 부리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잠깐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공사(公私)·사정(邪正)·시비(是非)·득실(得失)의 기틀이 미상불 유별(類別)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여 안에서 교전(交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을 예우하는 것이 후하지 않은 게 아닌데도 아첨을 떨고 새살을 까는 삿된 것들이 외려 임금에게 깊은 신뢰를 받게 되고, 천하의 공의(公議)·정론(正論)을 즐겨 듣지 않는 게 아닌데도 또한 때로는 수용하지 않을 때가 있게 되고, 천하의 참소하는 말과 못된 행동을 없애고자 않는 게 아닌데도 또한 잘못 듣는 때가 있게 되고, 백성을 보살피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닌데도 간혹 탄식하고 근심 걱정하는 소리를 면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등용시킨 신하가 비록 전부 적임자가 아닌 게 아니고 말미암아 나가는 통로가 비록 전부 바른 길이 아닌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또한 그 도리에 모조리 합당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이 논설이 실로 오늘날의 일에 근사하니, 감히 전하를 위해 바칩니다.
진정 능히 일심으로 하늘에 짝하고 간단(間斷)하는 바가 없게 하여, 위로 하늘을 감격시키고 아래로 신민들을 감동시키는 바탕을 삼는다면, 상제와 귀신이 어찌 위엄과 노여움을 도로 거두지 않겠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어찌 다 함께 기쁨에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여러가지 걱정에 잠겨 지내면 거룩하게 되고 갖은 어려움을 겪다보면 나라가 흥하는 법이다.’고 하였습니다. 죽을 때가 가까워진 못난 신은 저으기 이 말에 기대를 거는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살펴 보건대, 준길은 이때 병이 이미 깊어진 몸이었는데 이 상소로써 죽음에 다다라 바치는 충성을 삼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간신(奸臣)을 논척한 내용이 특히 간절하고 통절하였다. 그리고 준길이 김징(金澄)을 신구한 후부터 상은 참설이 누차 들어감에 따라 준길 역시 편당을 한다고 크게 의심을 하였는데, 이때 와서 또 이번의 소가 있게 되자 상의 노여움이 크게 발하여 은의와 예우를 전부 없애버렸다. 이를테면 이상·이민적이 소를 올려 준길을 신구했을 때 번번이 계속해서 견책을 당한 것이다. 이는 실로 음양이 소장(消長)으로 나뉘는 일대 관건이었으며, 후일에 사류들이 낭패를 보게 된 것도 단지 예론(禮論)만이 그 부리였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4월 19일 갑오

정언 정재희(鄭載禧)가 지평 이우정이 동료들을 처치할 때 시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체차하자고 청한 것은 대간으로서의 체통이 아니라고 탄핵하면서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허적이 열두 번째 정사(呈辭)를 하니,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다.

 

황해도 평산(平山) 등 다섯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경기도의 음죽(陰竹) 등 세 고을에는 우박이 내렸다.

 

4월 20일 을미

상이 승지 홍주삼(洪柱三)을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 유시하였다.
"아, 국사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러 이미 믿을 만한 형세가 없게 되었다.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공도(公道)가 날로 사라짐에 따라,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힘쓰는 자는 없고, 당파를 두호하고 자기들과 다른 자를 배척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자만 있어, 경으로 하여금 그 지위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니, 내 매우 통탄스럽다. 경을 내쫓고자 한다면 어찌 트집잡을 말이 없을까 걱정하겠는가. 대신이 교외(郊外)로 나가 있는 것은 실로 이보다 큰일이 없으니 경은 사체를 손상해서는 안 된다. 속히 들어와 조용히 일처리를 하는 것이 불가하지 않으니,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빨리 들어오도록 하라."

 

종친부가 아뢰기를,
"지난달 사헌부의 금리(禁吏)가 경순 군주(慶順郡主) 집의 중문(中門) 안에 함부로 들어가 비복들을 구타하고 점차 내당(內堂)에까지 들이닥치고 있을 때, 군주(郡主)가 마침 청사(廳事)에 있다가 이 뜻하지 아니한 변고를 만나 급히 다른 방으로 달려가 피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이리저리 엎어지고 넘어지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금리들은 팔을 휘두르며 전진하여 주방을 온통 뒤지고 나서 자기들의 죄를 스스로 알고는 담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이는 실로 전에 없던 일이니만큼, 자연히 그 집에서 헌부에다 정장을 하였던바, 헌부는 그 금리를 치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장한 하인을 잡아 가두었다가 얼마 뒤 보방(保放)하더니, 그날 저녁에 다시 금리와 함께 한꺼번에 수금을 하였습니다.
하루 사이에 금세 풀어 주었다가 금세 도로 가둔 일이 어떤 의견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금리도 이미 함께 가두었으면 조사하여 따지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그런데 그저께 모인 자리에서 금리에 대해서는 대충 형장을 시행하는 것으로 책임을 때우고서 풀어 내보내고, 군주 집의 하인에게는 형신을 엄하게 가한 뒤 그대로 수금을 하였습니다. 군주 집에서 소란을 피운 아전에 대해서는 그 죄가 오히려 가벼웠고, 정장을 한 죄없는 하인이 도리어 중률에 걸렸습니다. 법부(法府)에서 하는 일이 진정 이같단 말입니까.
홀몸이 되어 살고 있는 군주의 집은 보통 사대부들의 집과는 크게 다른 법인데, 어찌 헐장 수십 도(度)로 그 고약하게 소란을 피운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사체로 볼 때 그야말로 극히 한심한 일입니다. 해당 금리에 대해서 유사로 하여금 잡아가두고 엄히 치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금리는 수금하여 엄히 형신하고, 군주 집의 하인은 당장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4월 21일 병신

좌승지 이연년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고 영의정 허적에게 가서 유지를 전했더니, 허적이 ‘신은 이미 정세가 민망하고 병이 깊어서 미리 긴 글을 써가지고 녹사(錄事)에게 주고는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어제 저물녘에야 비로소 신을 배척하는 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록 자진해서 해명을 하지 않더라도 즉시 가벼운 견책만 받고 물러나오게 해주실 테니, 으레적인 정고(呈告)는 감히 하지 못할 점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리가 잘못 전하여 결국 성상께 올려지게 되었으므로 신은 짚자리를 깔고 앉아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한결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지금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여기에 와서, 죽을 죄를 짊어진 신에게 성상의 유지를 전하니,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좌부승지 홍주삼이 영의정 허적에게 가서 유지를 전한 뒤 복명을 하니, 상이 주삼으로 하여금 다시 되도록 빨리 들어오라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였다.

 

4월 22일 정유

승지 이연년·홍주삼·원만리 등이 아뢰기를,
"영의정 허적에게 전한 유지 내용 중에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이면 무조건 공격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이 비록 대신을 위안하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유신을 예우하는 도리에 부족함이 있는 듯하니, 황공하오나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감히 ‘벌이(伐異)’ 두 글자를 따지고 드는가. 몹시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정원이 성상의 비답이 엄했다는 이유로 대죄를 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성제를 승지로, 홍만용을 대사간으로, 이익상을 호조 참의로, 홍주국을 부응교로, 정재희·어진익을 장령으로, 오정창·정유악을 지평으로, 조원기를 문학으로, 조사석을 정언으로 각각 삼았다.

 

경상도의 태백(太白)·문수(文殊) 두 산에 눈이 내렸다.

 

4월 23일 무술

상이 동부승지 원만리를 보내 영의정 허적에게 전유하게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사흘 동안에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세 차례나 이르고 전유하는 성상의 뜻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시니, 이것은 실로 세상에 보기가 드문 남다른 은수(恩數)입니다. 세상에 보기가 드문 남다른 은수를 엉뚱하게 천고의 소인에게 내리시다니, 사리로 따져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이런 죄명을 짊어지고도 한시바삐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원만리에게 명하여 다음과 같이 전유하게 하였다.
"죄명을 억지로 씌우는 일은 평범한 관원에게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대신에 있어서랴. 경이 갈수록 더욱 굳이 사직을 하고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게 아닌가. 어서 들어와서 나의 뜻에 부응해야 옳다."

 

부제학 김만기, 부응교 홍주국, 부교리 김만중·최후상 등이 "다른 쪽을 공격한다."는 말씀을 유신에게 해서는 마땅하지 않다는 내용으로 차자를 올려 논변하였는데, 그 말한 내용이 몹시 절실하였다. 수십일이 지난 뒤에야 상이 단지 알았다고만 비답하였다.

 

충청도 공산(公山) 등 세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청주(淸州) 등 13개 고을에 우박이 쏟아졌다.

 

4월 24일 기해

우박이 쏟아졌는데 생김새가 콩과 같았다.

 

동부승지 원만리가 전유한 뒤 복명을 하니, 상이 또 만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전유하게 하였다.
"나의 뜻을 이미 남김없이 다 말했으나 경의 대죄(待罪)하는 청이 갈수록 보기에 안타까우므로, 내 마땅히 가슴에 깊이 담고 있는 생각을 펴서 알리도록 하겠다.
경의 재덕과 큰 도량을 따를 자가 없다고 여겨서도 아니고, 또 일을 하다보면 어떻게 매사를 전부 잘 할 수가 있겠는가. 다만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만큼은 경이 진정 남보다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에 불과하다.
아, 수십년 이래 재상에 임명된 자가 오직 경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간사하고 째째한 무리들이 틈을 노려 저격을 해도 성사가 안 되고 일의 기틀이 좋지 않게 되어가자, 말을 퍼뜨려 비방을 자아냄으로써 재야 유신의 귀에 들어가게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의 일이 필시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경이 불안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죄를 청하는 말을 그만 멈추지 않는다면 나의 불안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마땅히 나의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여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좌의정 정치화가 일곱 번째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영상 이 지금 또 급히 강가로 나가 버렸는데 이런 때를 맞아 나랏일을 어찌할 것인가. 더구나 경은 병을 조섭한 지가 이미 몇 순(旬)이 지났으니만큼, 마땅히 나랏일을 몸받아 어서 나와 공무를 수행함으로써 지극한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지평 정유악이 아뢰기를,
"종친부의 계사로 인해 상께서 금리(禁吏)를 엄히 형신하라고 특명을 하셨는데, 신이 바로 당초에 금리를 내보낸 사람입니다. 소의 도살을 금하는 법을 겨우 얼마 전에 밝혀 알렸는데도,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버젓이 도살하여 판매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리에게 분부하여 궁가·사대부가를 막론하고 일체 엄금하도록 하였는데, 하루는 금리가 쇠고기를 가져와 바치면서 그 범금한 자는 붙잡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 물었더니, 경순 군주의 집에 관계된 일이라서 범금한 사람을 감히 잡아올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곧이어 군주 집에서 정장을 하여 ‘금리가 중문에 함부로 들어와 비복들을 때려 상해를 입히고 군주를 놀라게 하였다.’고 하기에, 신이 허실을 밝히려고 다친 사람을 불렀더니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내보내 보여주지를 아니했습니다. 다친 사람을 내보내 보여주지 않는 이상, 금리가 정말 말썽을 부린 것인지에 대한 허실을 밝혀내기가 곤란한 일이고, 군주 집에서 소를 도살한 죄를 묻지 않고 그냥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육금(肉禁)을 이유로 그 궁노를 가두고 말썽을 부린 죄로 금리도 가둠으로써, 회좌하기를 기다려 사실 조사를 해서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미처 철저하게 밝혀내기 전에 신은 금세 체직이 되었습니다. 이 일의 결말은 신이 이미 체직된 후에 났으니만큼, 비록 신은 그 자초지종을 아는 바가 아니기는 해도, 대체로 형리에게 받은 한 차례의 형장이 본디 헐장이 아니었고, 범금한 궁노를 형신한 뒤 그대로 가둔 일은 법으로 볼 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종실들이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법부를 탓하였으니, 이러다가는 조정의 금령이 시행되지 않는 바가 있게 되고, 귀하고 가까운 집을 꺼리게끔 제압할 방법이 없을 것이니, 장차 법부를 어디에다 쓰시렵니까. 해당 금리에게 엄한 형신의 분부가 내려진 이상, 신도 편한 마음으로 재직할 수 없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금리의 죄는 단지 내당에 함부로 들어간 점에 있을 따름이다. 상해를 당했는지 여부를 검사하는 일은 논할 바가 아니다. 전에 선처를 하지도 못했고 또 뒤에 와서 자성(自省)도 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계사한 사람을 책망하다니, 어쩌면 그리도 매우 엉뚱한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정재희가 처치하여 출사토록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정유악이 또 엄한 비답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정유악은 또다시 재희와 더불어 금리를 엄형하라는 분부를 환수하고, 주가(主家)의 궁노를 그대로 수금하여 금령을 밝히라고 계청하였다. 누차에 걸쳐 아뢰었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 뒤 복창군 이정이 소를 올려 유악을 몹시 심하게 논척하자, 정유악은 인피하여 면직되었고, 동참한 대신(臺臣)들이 다른 벼슬에 이임되고 나서도 다들 소를 올려 자진 논열하였으며, 재희는
"종반(宗班)이 대신을 논척하고 드는 것은 사체를 손상하는 일이며 또 사실이 아닌 말로 누차 성상을 귀찮게 하는 것은 고자질이나 마찬가지이다."
고 아뢰면서 복창군 정을 추고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누차 엄한 비답을 내리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때, 이정(李楨)·이남(李枏) 등이 은총을 믿고 대신을 능욕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굴었는데, 상이 시종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이와 같았다.

 

4월 25일 경자

좌승지 이연년이 영의정 허적에게 전유를 한 뒤 복명하니, 상이 명하여 다시 가서 "어찌 다시 여러 말을 하겠는가. 지극한 뜻을 몸받아 사직하지 말고 들어와서 애타게 기다리는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는 내용으로 전유하게 하고, 또 어의 이동형을 보내 간병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홍만용이 추고를 받은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4월 26일 신축

이조 판서 김수항이 첫 번째 사직서를 올리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며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4월 27일 임인

개성부에 우박이 내렸다.

 

지평 오정창(吳挺昌)이 상소하기를,
"유신(儒臣)의 장주(章奏)가 한번 나오자 대신(大臣)의 죄명이 지극히 무겁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드디어 성상의 생각이 어지럽게 얽히고 여러 신하들은 놀라 의혹하여 조정의 분위기가 삭막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놀랍고 이상한 일입니다. 만일 ‘상신(相臣)의 도량과 지식이 한시대의 여망에 맞지 않고, 계획과 시행이 당세의 요구에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후한 말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고 상신 자신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유신이 의견을 아뢸 때는 중도에 맞아야 귀한 것이므로, 사안이 가벼우면 그 허물을 들어 바로잡고 무거우면 그 악(惡)을 하나하나 들어 배척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곧바로 귀신과 같은 간사한 사람이라고 뒤집어 씌웠으니, 정말 사람을 너무나 각박하게 논한 것이고, 또한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 사람에 비겨보아 끝내 그 말과 비슷한 점이 없다면, 마음속에 의아심을 안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먼저 마음을 맑게 가져 치우침이 없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상소를 재상에게 내려 물으시되 송 인종(宋仁宗)이 이부(二府)를 불러 문언박(文彦博)에 대해 의논하게 한 고사019)  처럼 하신다면,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어떠한지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신이 일찍부터 그가 간사한 인물임을 알아채기를 과연 곽자의(郭子儀)가 노기(盧杞)를 상대한 것020)  처럼 하였고, 상소 가운데 조목별로 나열한 것이 노기와 같은 간신임을 밝힌데다가 측근의 신하와 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를 노기라고 말한다면, 이는 정말로 노기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아무리 곡진히 두호해서 온전하게 해주고 싶어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론이 저절로 정해지고 대신이 어디에 머물러야 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어찌 한 마디 말이나 한 마디 노성으로 시비를 결정하실 계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한갓 언성만 엄하게 드러내며 그만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라는 말로 기어코 이기려고 힘을 겨루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억지로 ‘유입하였다’는 하교를 내려 끝내는 대신이 견제를 당해 방황하고 있다고 낙착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느닷없이 대성인의 정대한 거조를 상실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상의 마음이 어떠한지 엿보게 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심복처럼 막힘없이 따르건 안 따르건 간에 서로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부에 대한 말을 그 사람에게는 말해주지 않고 격분한 하교를 다른 사람에게 내리시니, 이 또한 진언한 자가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전하의 앞뒤 처분이 이와 같이 잘못되었는데도 일찍이 전하를 치우침이 없는 공평한 지경으로 인도하는 자가 없으니, 오늘날 거리낌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이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일을 말한 자는 재야의 선비이고 배척을 받은 자는 조정의 대신입니다. 온 조정의 신하가 한갓 유신을 그르다 하면 시론(時論)에 죄를 얻고 대신을 그르다 하면 상에게 노여움을 산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승정원이 복역을 할 때나 경연에서 아뢸 때에,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들어 임금을 분명히 깨우치는 자는 전무하고, 어진이를 대우하는 예(禮)에 대해서만 말을 떠벌리면서 겨우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서너 글자에 대해서만 간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하 혼자서만 신경을 써 병을 조섭하시는 데 불편하게 하고 있으니, 전하의 측근에 과연 충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임금이 존중하고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사람으로서 대신과 유신보다 더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에서 시비가 결정되지 않고 죄명(罪名)이 분명하지 않으면, 장차 들뜬 의논을 진정시키고 한 시대의 모범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공평하게 갖고 일에 임해 통쾌하게 결정을 내려 망설이지 말고 시비를 가리소서. 그러면 이 일을 처리하기에 아직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갔으나, 비답이 없었다.

 

4월 28일 계묘

이민적을 대사간으로, 정륜을 승지로, 이혜를 병조 참의로, 홍만용을 공조 참의로, 박세당을 보덕으로 각각 삼았다.

 

우승지 여성제가 영상 허적에게 전유한 뒤 복명을 하니, 상이 또 명하여, 어서 들어와 애타는 바람에 부응하라는 일로 다시 가서 전유하게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가 여덟 번째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좌승지 이연년, 좌부승지 홍주삼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송준길이 초야에 있던 신하로서 열성의 지우를 받고 이번에 재해를 당하여 별도로 유시한 날을 맞아, 고을을 통해 글을 올렸습니다. 비록 그 말이 절재(節裁)를 할 줄 모르고 끌어댄 비유가 들어맞지는 않았더라도 그의 본심을 미루어 말하자면, 누가 보더라도 충성심을 바치려는 데에서 나온 일입니다. 그러므로 얼마 전에 수상에게 전유하라는 비답을 감히 복역한 것인데, 지금 지평 오정창이 극언을 하면서 정원이 복역한 일을 크게 비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얼굴을 들고 반열에 나아갈 수가 없는 형편이니, 신 등의 직책을 삭거해 주소서."
하였고, 도승지 장선징이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동료의 당초 복역이 동의를 얻은 뒤 나온 일이니만큼, 어찌 감히 불참을 핑계대고 태연히 재직하겠습니까."
하면서 이어 전후 사지(辭旨)가 마땅함을 잃었다고 극언하는 한편, 특별히 윤음을 내리어 뉘우치는 뜻을 시원스레 보이시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상소하기를,
"신이 그릇 정승의 직임을 맡은 이래 9년 동안에 사람들의 비난과 배척을 받은 것이 앞뒤로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 지난 겨울 윤경교의 상소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완고하지만, 그래도 이 몸이 결코 금세에 용납되지 못하리라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향리로 돌아가고픈 뜻이 어찌 강남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제비만큼만 되겠습니까마는, 단지 그때 정승 자리가 텅 비고 조정에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의 불안한 형편을 헤아려 주시지 않고 매일 측근의 신하를 보내 교서를 선유(宣諭)하시는 것이 수십 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 끝내는 천고에 없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신이 이에 어쩔 줄을 몰라 일신의 염치나 훗날의 곤경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얼굴을 들고 조정에 나갔는데, 이는 대개 성상의 은혜를 갚고 잠시 동료 정승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려고 한 것입니다. 어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술을 마셨노라고 옛사람이 말하였는데, 머뭇거리다가 도로 정승의 자리에 앉으려는 것이 어찌 신의 본심이겠습니까.
신이 물러나게 해달라고 청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으나 상께서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시므로 신이 바야흐로 정황이 군색하여 몸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재야의 신하가 신이 능글맞게 거드름을 피우면서 떠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다가 소를 올려 있는 힘을 다해 신을 공격하면서 심지어는 신을 만세의 간사하고 흉측한 자에게다 비유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정신없이 곤두박질하여 밤에 도성 밖으로 나왔습니다만, 생각건대 신의 죄명(罪名)이 극히 무거워서 국법(國法)으로 볼 때 용서받기 어려웠으므로 공손히 처벌을 기다린 지 열흘 가까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아,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흉악하기 짝이 없는 자로는 노기와 같이 심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 임금의 성질이 편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여우처럼 홀리는 방법을 써서 총애를 받고, 그 임금이 재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 백성을 수탈하여 욕구를 채워줍니다. 그렇게 한 뒤에 임금의 권력을 훔쳐 농락하고 화복(禍福)의 권한을 키워, 당류를 심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하며, 충량(忠良)한 사람을 해쳐 위세를 세우고 장사(將士)들의 노여움을 건드리어 재앙의 씨앗을 빚어냄으로써, 끝내 봉천성(奉天城)이 포위되고 양주(梁州)로 파천하게 한 것이 모두 노기의 짓입니다.
신이 사기(史記)를 읽을 때면 책을 덮고 팔뚝을 휘두르며 덕종(德宗)이 그의 죄를 다스리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정사를 하면서 과연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습니까? 간가(間架)의 세금021)  과 파천(播遷)의 변022)  은 물론 성조(聖朝)에서 걱정할 바가 아닙니다만, 임기응변의 능란한 말과 꿀처럼 비위를 맞추는 행실로 어깨를 추스르고 아첨하는 짓은 신이 실로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며, 분노를 감추고 유감을 풀어 선류(善類)를 중상모략하는 것은 신이 전부터 매우 미워하던 짓입니다. 그리고 한 시대를 농락하고 조정의 권세를 쥐고서 잇속을 주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게 하고 취향이 다른 자는 반드시 화를 받게 하다가 드디어는 서리와 이슬을 머금고 토해내어 그 형세가 임금을 뒤흔들어 천하의 백성으로 하여금 감히 말하거나 감히 성내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노기의 가장 큰 죄로서, 신은 그와 성격이 서로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형세 역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머리가 허옇게 된 나이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짓을 늘그막에 배워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사특과 정직을 분변하기 어렵다는 것은 진실로 그 사람의 말과 같습니다만, 세 조정의 명철하심으로도 이미 신의 사특함을 살피지 못하셨고 보면, 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역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유신의 사전에 대비하시라는 경계가 과연 어느 때에 있었으며, 그의 몸을 거의 보존하지 못할 뻔했다는 것 또한 과연 어떤 일이었습니까? 신이 혼자 기억하기로는, 유신이 김징(金澄)을 신구하던 날 심지어 사특과 정직이라는 말을 꺼내기에 신이 묵묵히 있을 수 없어서 대략 그 비교한 말이 걸맞지 않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말하기를 ‘시비(是非)라고 해야 할 것인데 사정(邪正)이라고 잘못 썼다.’ 하고는 실언한 것을 사과하였는데, 성상께서도 필시 식별하셨을 줄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한때 가부(可否)를 논한 말이 이리저리 굴러서 오늘날 사(邪)를 분변하는 증거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신이 지금의 우의정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선왕의 명을 받았는데 그 역시 알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의 신이 바로 지난날의 신인데, 사정의 논의가 지금 처음으로 나왔으니, 어쩌면 신의 죄상을 교묘하게 얽으려는 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보잘것없는 신으로 인하여 성상의 덕이 도리어 어둡고 용렬한 덕종만도 못하게 되어버렸고, 지금 또 천고에도 볼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으니, 만고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를 남기는 것이 어찌 지난날의 그 정도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신을 형관에게 회부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고 나라 사람 들에게 사례함으로써 나라의 복을 구하고 신하로서 당파를 심어 나라를 그르치는 자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러면 그지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또 처벌을 기다리는 것 외에 또 스스로 가슴에 슬퍼하는 바가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베개를 어루만지며 슬퍼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미워하는 마음은 본성에 뿌리박힌 것이므로 제딴엔 늙도록 쇠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는데, 어찌 오늘날 스스로 악에 빠질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지금 신에게 죄주려고 하는 자가 만약 ‘위복(威福)의 권한이 위에 있지 않은데도 임금의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세월이나 보내고 일찍이 진언한 적도 없다. 이를 죄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해도 신 역시 스스로를 변명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지위에 있으면서 말하지 않은 죄까지 아울러 다스려 그 태만한 것을 드러내소서."
하였다. 상이 승지 정륜을 보내어 전유하기를,
"아, 오늘날 국사를 어떠한 때라고 하겠는가. 백성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비록 구휼하고 있지마는 나라의 곡식이 이미 바닥이 났으므로 장래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때를 만나 세 정승이 힘을 다한다 해도 극복해내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오늘날 정승 자리가 텅 빈데다가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고, 조정에는 당론(黨論)만 분분하여, 사사로운 일보다 공적인 일을 먼저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매우 한스럽다.
다만 생각건대, 경에게는 노기와 같은 죄악이 없고 나는 덕종과 같은 문답이 없는데, 경은 왜 그리도 지나치게 죄를 청한단 말인가. ‘죄를 지었다.’고 쓴 데 있어서는 더욱 과격한 것이었다. 내 마음이 불안하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경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빨리 들어와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허적의 상소 가운데 스스로 직명을 깎아내리고 ‘죄를 지은 신하’라고 썼기 때문에 상의 분부가 이와 같았다.

 

원양도 원주(原州) 등의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정선(旌善) 등의 고을에 눈이 내렸다.함경도 문천(文川)·길주(吉州) 등 일곱 고을에 서리가 내리고, 삼수(三水)·갑산(甲山) 두 고을에는 눈이 거의 반 자나 내렸다.

 

4월 29일 갑진

부제학 김만기 등이 오정창이 소를 올려 지척을 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였고, 수찬 이훤은 어제 차자를 올려 논변할 때 비록 연명을 하지는 못했으나 맨 먼저 간통을 냈고 차자의 내용도 전에 동참하여 함께 논의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부산의 왜인 차사와 그의 수행 왜인들이 오랫동안 작은 집에 거처하다 보니 답답함을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때때로 구역을 벗어나는가 하면, 심지어는 동래 향교와 온천 및 냇가와 야외 등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통사(小通事)들이 옷을 잡아당기면서 만류하면, 결박하거나 환도(鐶刀)로 때리면서 막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왜관의 왜인 14명이 온천에 가서 목욕을 하고는 앞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감동창(甘同倉)을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통사가 따라가 그들을 막자, 막대기를 휘둘러 쫓아버리고 강변을 배회하며 두루 구경한 뒤에 돌아갔다. 이른바 감동창이란 곧 양산(梁山) 땅이다. 이는 전에 없었던 일이다.

 

4월 30일 을사

영상 허적이 충주(忠州)로 돌아갔다. 상이 좌승지 이연년을 뒤쫓아보내, 영영 떠나려는 뜻을 속히 돌이켜 병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라는 등의 하교로 전유하게 하였다. 허적이 떠날 무렵에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의 죄명은 천지 사이에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니, 아무리 조정의 실형(失刑)으로 인해 죽임을 다행히 면했다고는 하더라도 자진해서 먼곳에 처박히는 것이 분수에 맞는 일이기에, 미처 물러남을 아뢸 겨를도 없이 곧장 먼저 달아나는 바입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약방의 직임을 영영 그만두게 되어 성상의 안부 소식이 까마득히 막히고 말았으니, 애가 타는 일념이 오직 이 점에 있습니다. 신의 사정을 성상께서도 틀림없이 불쌍히 여겨주시리라 믿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우부승지 여성제를 보내 전유하기를,
"내 뜻은 저번의 비답에서 이미 유시하였는데, 경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경이 마음에 불안하게 여겨 기어코 향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직명이 몸에 있기 때문이므로, 내 경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지금 잠시 애써 경의 뜻을 따라주겠으니, 경도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영영 가버리려는 뜻을 속히 바꾸라. 지금 애써 따라주는 것은 사체로 따져볼 때 매우 불가한 일이지만, 실로 경의 처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 경이 어떻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서둘러서 떠나서야 되겠는가. 아, 맹자(孟子)는 성인에 버금가는 분인데다가 또 부를 수 없는 신하인데도 사흘을 묵고 주(晝) 땅을 떠났다023)   경이 만약 이를 생각해 보았다면 내 말을 듣지 않고도 스스로 깨달았을 것이다. 경의 마음에는 비록 시원하겠지만 사리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더구나 내 병이 나날이 더욱 심해지는데, 경은 또 어찌하여 결단코 버리고 떠난단 말인가. 내 뜻이 다하고 말도 다했으니, 경은 내 뜻을 헤아려 마음을 가라앉혀 대죄하지 말고, 빨리 생각을 돌려 돌아와 나의 갈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간원이 비로소 조사기를 원지에 유배하라는 논의를 정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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