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병오
우부승지 여성제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영상 허적이 말하기를 ‘한밤중에 측근의 신하가 말을 달려 객사로 찾아와 성상의 비답을 전해주었습니다. 신의 직책의 체차를 허락하여 더러운 이름이 조정의 사판에서 삭제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성상께서 극진하게 보살펴주신 지극한 뜻입니다. 그 감사하고 다행스러움이 어찌 단지 신의 마음만 조금 편안할 뿐이겠습니까. 신의 죄명을 돌아보건대 이미 천지 사이에서 용납받기 어려웠으므로 감히 도성 안에 태연히 있지 못한 것이지, 실로 직명의 유무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이 이제 영원히 물러나면서 만 가지 생각이 모두 사라졌습니다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마음속에 맺혀서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다만 상의 건강이 좋지 않으신 점입니다. 대궐이 점차 멀어지자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한 번씩 돌아보았는데, 오늘 나날이 쇠약해진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신의 마음이 더욱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부득불 떠나는 것은 진실로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땅에 엎드려 감읍할 뿐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성제를 보내 전유하기를,
"어제 측근의 신하를 보내 놓고 경이 반드시 나의 뜻을 이해할 것으로 여기어 새벽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이제 부득불 떠나야겠다고 말을 하니, 나의 섭섭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오늘의 일은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단지 경의 처지만을 위해서 한 것인데, 경이 이를 이해해주지 않으니 어찌 내가 바라는 바이겠는가. 대개 경의 이번에 물러가는 일이 어쩔 수 없어서 나온 일이라는 것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경이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나 경이 꼭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그 뜻이 실로 다름이 없다. 그러니 경은 이 점을 생각하여 영영 떠나려는 뜻을 빨리 돌이키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이 뜻을 체득해 속히 돌아와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의관에게 명하여 들어와 진찰하도록 하였다. 상이 종기를 터트린 뒤 옥후가 아직 노곤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청대하여,
"경기 백성들의 종자곡(種子穀)을 남한산성 및 평안도에서 실어올 쌀 1만여 석으로 지급해주어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부산 첨사 유성위를 잡아다 문초하자고 청했는데, 왜인을 살해한 사람을 붙잡아 올 때 왜인에게 탈취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5월 2일 정미
이상진을 예조 참판으로, 이지익을 승지로, 이수만을 장령으로 각각 삼았다.
좌의정 정치화가 아홉 번째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였고, 행 이조 판서 김수항 역시 신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였는데, 상이 모두에게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3일 무신
경기의 수원 등 열 고을에 우박이 쏟아졌다.
5월 4일 기유
우부승지 여성제가 여주 땅의 영상 허적이 가고 있는 데까지 급히 가서 전유한 뒤 복명을 하니, 상이 다시 성제에게 명하여 가서 전유하게 하기를,
"내 기어코 소환을 하고야 말겠으니, 어서 올라 와서 병중의 안타까운 심정을 누그러지게 하라."
하였다.
5월 5일 경술
허적을 판중추부사로, 정익을 좌윤으로, 최후상을 지평으로 각각 삼았다.
대사헌 이경억은 추감(推勘)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대사간 이민적은 금리에 관한 일로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장령 이수만·정재희 등이 아뢰기를,
"행 부호군 송준길(宋浚吉)이 세 조정의 은혜를 받고 남달리 알아주심에 감격하다가 마침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받아 정성을 다해 글을 올리면서 저촉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현임 재상을 지척한 것은 실로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쫓아내려 한다고 의심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지척하시는 등, 전후의 비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북스러웠으니, 이게 바로 간사한 자의 심보를 열어 인도하고 참소하는 자의 말을 부르는 것입니다.
지평 오정창이 성상의 뜻을 엿보다가 불쑥 소를 올렸는데, 말이 교묘하고 뜻이 간사하여 밖으로는 화평한 척하면서 속에는 덫을 감추어, 감히 ‘의아심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로 시비를 현혹하려 하였고, 또 ‘견제되어 방황한다.’는 말로 상의 마음을 격동시키려고 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뭇거리지 말라[祛疑違]’는 세 글자에 있어서는 기회를 틈타 화를 전가하려는 작태를 숨기기가 어렵고, ‘이 일을 결론짓는 것이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말로 맺음을 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처리되어야 바야흐로 그의 마음에 시원하단 말입니까.
또 유신(儒臣)과 상신(相臣)의 일을 들어 은연중 그 속에 끼워넣었으니, 그의 마음씀이 음흉하고 교활하다는 것을 더욱더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소장(消長)의 기미가 매우 두렵습니다. 인심이 놀라고 통분하며 공론이 지극히 엄하니, 삭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참소하는 말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정언 조사석이 아뢰기를,
"오정창의 상소는 의도가 바르지 않아 논설(論說)이 간사하고 장황하게 기교를 부려 반복해서 현란케 만드는 작태를 엄폐할 수 없었는데, 사람의 말이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유신이 정승의 과오를 조목조목 들어 아뢰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를 삼았고, 또 승정원이 복역(覆逆)할 적에나 경연에서 아뢸 때에 임금을 밝게 깨우쳐드리지 못한 것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제딴에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해와 달 같은 상의 총명을 속일 수 없고, 우레와 같은 노여움을 격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밖으로는 화평한 체하면서 안으로 기회를 엿보는 마음을 품고서 제깐엔 종이에 가득히 쓴 농간의 뜻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줄로 생각했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형태가 모두 드러나고 말았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일에 대해 말하는 규례는 그 방법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어떻게 꼭 낱낱이 열거해야만 되겠습니까. 가령 전에 산림(山林)의 유신이 올린 소에 조목별로 나열해 진술하기를 정창의 말과 같이 하였다면, 정창이 끝까지 그 사이에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일의 옳고 그름을 정말로 이미 알았다면, 대각에 있는 신분으로 무엇이 꺼릴 게 있어 통렬히 분변하지 아니하고, 단지 묘당(廟堂)에 물어서 시비를 결정하라고 말하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이 성상을 분명히 깨닫게 하지 못했다고 책망한단 말입니까. 공론을 끼고서 속에 숨긴 생각을 마음대로 부려 국시(國是)를 전도시키고 성상을 의혹시킨 죄를 통렬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논의가 나는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양사가 이 문제를 가지고 여러달 동안 극력 간쟁하였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5월 6일 신해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장선징을 대사헌으로, 여성제를 대사간으로,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오시수를 승지로, 임규를 필선으로 각각 삼았다. 상이 처음에 복상(卜相)을 명했을 때 좌상 정치화가 병 때문에 예궐하지 못하자, 상이 지난 복상 단자를 들여오라고 명하였고, 이에 태화를 제배하였다.
5월 7일 임자
상이 뜸을 떴다. 도승지 이은상이 아뢰기를,
"우의정 송시열이 올린 소와 옥당이 올린 차자에 모두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시지 않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기를,
"못난 신의 나이가 이미 칠순을 넘었고 풍에 맞은 질병이 삼 년째 낫지 않고 있으니, 이는 조석간에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반열에 나아가 직무를 살피게 될 가망이라곤 결코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어서 해직시켜 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지금 전처럼 건강하지 못하다는 점을 내 몰라서가 아니라, 이런 때에 이런 직임을 경이 아니고선 수습할 만한 자가 없으니, 비록 관청에 누워서 치도를 논하더라도 손상될 게 뭐가 있겠는가."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도록 명하였다.
평안도 덕천군에 눈이 내렸고, 운산 등 고을에는 크기가 주먹만한 우박이 쏟아져 땅에 거의 한 자[尺] 정도 쌓인 채 하루가 지나도록 녹지 않았다.
5월 9일 갑인
상이 뜸을 떴다.
좌의정 정치화가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의 형 태화가 수상에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 나랏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경이 아니고서는 수습을 할 만한 자가 없다고 본다. 나이가 늙어 귀가 어두운 것이 혐의로울 게 뭐 있는가. 다리병에 대해서는 나 또한 경에게 부지런히 다니기를 요구하지 않았는데, 경은 어찌하여 글을 올려 어서 면직시켜 달라고 청하면서 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가. 모쪼록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치도를 논하여 애타는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상이 명하여 이조 판서 김수항을 패초하여 직임을 살피라고 하였는데, 수항이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다.
5월 11일 병진
정치화를 판중추부사로, 이민적을 병조 참판으로, 이훤을 헌납으로 각각 삼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집의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천재가 자꾸 발생하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극언하기를,
"《시경(詩經)》을 살피건대, 4월에 서리가 빈번하게 내리는 현상은 사람을 쓰는 일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사가(史家)의 말에, 삼공(三公)이 적임자가 아니면 삼광(三光)024) 이 밝지 않다고 하였으며, 방교(房喬)025) 의 글에, 뭇 간인(奸人)들이 뜻을 뭉치면 그에 따른 이변으로 바람이 분다고 하였고, 채옹(蔡邕)026) 의 말에, 권력이 임금에게 있지 않으면 우박이 농작물을 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책을 폭넓게 살펴볼 것같으면 이러한 기록들이 한둘이 아니니만큼, 재이의 발생은 위임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닌 데서 말미암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재앙의 토대가 벌써 형성되었는데도 전하께서는 깨닫지 못하고 계시니, 어찌 깊이 우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의 상소 내에다 사정(邪正)을 변별해야 된다는 한 가지 문제점을 대략 언급하면서 제딴에는 경방(京房)이 원제(元帝)를 대하던 뜻027) 을 되살림으로써 성상께서 느껴 깨달으시기를 기대하였으나, 채택해주지 아니하고서 안에 두고 내리지 않은 채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 들으니, 송준길이 상소 내에서 영의정 허적을 공척하였다고 하는데, 신이 비록 그 소본(疏本)을 아직 보지는 못했으나 그 큰 줄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준길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신하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누를 수 없어 구언(求言)하는 교서에 따라 간신을 변별하는 글을 용감히 올린 것이니, 신은 상께서 뜨끔히 깨닫고 일찌감치 어떤 처분을 하실 것으로 알았으나, 들리는 얘기로는 전하께서 죄를 주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은혜와 대우를 더욱 융숭하게 내리고 만류하는 예우가 갈수록 간절해지며, 도리어 유신의 정론을 그르다 하여 미안한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였다는데, 비록 정말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만약 전연 허무맹랑한 얘기만은 아닐 경우, 전하께서는 간신에게 가리워 지내심이 어쩌면 그리도 심하단 말입니까. 혹시 유신의 상소 내에서 그의 간사한 정상을 남김없이 말하지 아니한 까닭에, 신임을 하다보니 그래도 아직은 깨닫지 못하셔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음양이 소장(消張)하고 사정(邪正)이 승부(勝負)하는 무렵에 세도(世道)의 승강(升降)과 국세(國勢)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화가 무섭다고 극언을 아니하여 우리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신이 평소부터 허적의 위인을 알고 있는데 그저 비루한 작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경박하게 촐랑대는 꼴이 애당초 길사(吉士)가 아니었고 약삭빠르게 요리조리 둘러대는 짓이 원래부터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허적의 또래들에게 그를 평하여 보라고 해도 감히 괴상하고 엉뚱하다고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관직에 그를 제수하면 취할 만한 장점이 한 가지라도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에게 정승 자리를 내주게 되면 어찌 재해가 한꺼번에 닥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미 허적을 재상에 앉혀 놓고 또 송준길을 조정에 같이 있게 하려 하다니, 이것은 향초·잡초와 얼음·재를 한그릇 속에다 섞어 놓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그것들이 광결(光潔)하고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라기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허적에게 푹 빠져 지내심이 유난히 심한 것은, 어찌 ‘허적이 능히 국사(國事)를 스스로 맡고 나선다.’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스스로 맡고 나서는 것은, 사욕을 이루기 위해서이고 패거리를 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나서는 것은 도리어 잠자코 입다물고 지내면서 녹이나 받아먹는 자가 외려 해로운 바는 없는 것만도 못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허적은 안으로 척리(戚里)·환시(宦侍)와 결탁하고 밖으로 조정 사대부와 결탁하고 아래로 시정 잡배들과 결탁하고 위로 임금에게 아첨을 하므로, 헛된 칭찬이 좍 깔려 ‘허충신(許忠臣)’이라는 설까지 안팎에 두루 찼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그가 옳다는 얘기만 듣고 그가 그르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고, 단지 그가 어질다는 얘기만 듣고 그가 나쁘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시니, 훈김에 물씬 젖어든 나머지 그를 의지하고 후대하는 정도가 마치 이윤(伊尹)·여상(呂尙)·주공(周公)·소공(召公) 과 같게 된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아, 지난 선조 때에 송준길 등이 악을 배척하고 선을 선양하는 의론을 도맡아 주장하였는데, 그때에는 김적(金賊)028) 의 악이 아직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였고 정사 공신(靖社功臣)이라는 지위 또한 허적이 견줄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효종 대왕께서는 공의(公議)를 좇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의심을 갖지 않으셨으며,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준길을 접견하면 마치 지란(芝蘭)029) 을 마주한 듯하다.’고 하셨으니, 보살피고 후대하신 뜻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를 예우하심이 성대한 점에 있어서도 시종 변함이 없어 사림에 모범이 되고 역사에 길이 빛나기에 충분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일개 간사한 신하를 논척한 이번 일로 인해 또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의심을 가지시는 것입니까. 신은 아마 전하께서 평소에 유신을 대우하신 것이 애당초 성의에서 나온 일이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신이 비록 송준길의 학문이 높은지 낮은지에 대한 등급은 모르지만, 이치를 따져 밝히고 마음가짐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지니는 것이야말로 그가 일생동안 공부해 온 과정으로서, 그의 밝은 안목은 허적의 간사함을 꿰뚫어보기에 충분하고 그가 하는 말은 당세에 믿음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지금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에 이르러 외려 편당(偏黨)을 하는 과실을 저지르기야 하겠습니까.
아, 당론이 일어난 이후로 간사하고 참소하는 못된 무리들이 등에 업은 세력이 있어 그 악을 스스로 엄폐하면서 시비를 현란시키니, 아무리 명군(明君)·성주(聖主)라 할지라도 그들의 술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漢)·당(唐)의 일은 오늘날도 그것을 얘기하자면 오히려 뜻있는 사람들의 탄식을 한층 더 자아내게 하니, 어찌 통탄스러울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주자(朱子)의 말에 ‘진실로 군자라면 오히려 그 당인이 적을까 걱정스럽다.’ 하였고, 선조 대왕께서도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으니만큼, 전하께서 마땅히 힘써 흠모하여 따라가기를 도모하셔야 될 일이 이에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이 초야의 미천한 신하로서 일신의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일대의 권간(權奸)을 말하여 이미 기울어진 표준을 붙들어 세우려고 하니, 그야말로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항시 또렷이 잊지 않고 있는 충성심에, 임금이 계신 점만 알고 있을 뿐 다른 것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다보니, 끝내 스스로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원스레 용단을 내리시어 간사한 사람을 물리쳐 멀리하시고 임금을 훈계하는 훌륭한 노신(老臣)과 함께 나랏일을 꾸려나가신다면, 그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5월 12일 정사
이조 판서 김수항이 신병을 이유로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면서 소패를 어기고 나아가지 아니한 죄를 자청하니,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간 여성제, 정언 조이병·조사석 등이 차자를 올려, 유신을 자주 접견하여 치도를 자문하시라는 일과 각아문의 둔전, 제궁가의 면세전 및 산택(山澤)을 입안하여 준 일을 없애어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피시라는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송준길의 봉장(封章)은 실로 숨김없이 말하려는 마음에서 우러난 일인데, 실정을 벗어난 꾸지람을 현저히 보이신만큼, 마땅히 성상의 비답을 도로 반환하여야 됩니다. 전후의 온당하지 못했던 하교를 지워서 고치고, 소에 대한 비답을 어서 내리시어 보살펴 우대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5월 13일 무오
영의정 정태화가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나의 뜻을 남김없이 다 말했는데도 경은 어찌하여 헤아리지 않는가. 마땅히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다시는 고사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하도록 명하였다.
5월 14일 기미
전라도 곡성(谷城)·광양(光陽) 등 10여 고을에 우박이 쏟아졌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집의 이상(李翔)을 우선 체차부터 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도승지 이은상, 우승지 정륜, 좌부승지 이지익, 동부승지 원만리.】 아뢰기를,
"이상은 초야의 신하로서 언책에 있다가 마침 별도의 유시로 구언하는 날을 맞아, 유지에 응하여 글을 올리므로써 감히 소회를 진달하였는데, 느닷없이 체차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은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흠결이 되는 듯하여 구구한 소회를 감히 이에 진달드리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체차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될 일인데, 계사가 몹시 망령되고 경솔하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서 이어 내의를 보내 간병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영상 정태화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태화가 노병(老病)을 이유로 사직을 하고 나오지 않자, 상이 사관을 보내 숙배(肅拜)를 하지 말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죽기 전에 천안(天顔)을 한번 뵙고 싶어 가까스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매우 정성껏 위로하고 타일렀다. 예조 판서 정지화가 아뢰기를,
"왕대비전 평복 경과(平復慶科)를 왕세자 가례 별시와 합하여 설행하는 일을 전에 이미 재가하셨는데, 그 규정을 이제 여쭈어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가례 별시를 이미 육백관시(六百館試)로 설행하기로 정했는데 또 1경(一慶)을 합하면, 강경(講經)은 제외해야 마땅합니다. 또 조종조에서도 전시(殿試)에 폭넓게 시취(試取)한 때가 있었으니, 상께서 액수를 정하시는 게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초장(初場)은 부(賦)·표(表)로 바꾸고 강경을 제외시켜 폭넓게 시취토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무과(武科)는 처음에 정한 대로 8백 명을 뽑을 것입니까?"
하고, 태화가 아뢰기를,
"무사(武士)라고 해서 유독 경사(慶事)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과는 1천 명을 뽑으라."
하였다. 대사간 여성제가 오정창을 삭출하는 일로 연이어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성제가 또 아뢰기를,
"신이 들어와 대청(臺廳)에 나아가서야 비로소 ‘집의 이상(李翔)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 놀랍고 의혹스런 느낌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이 임하(林下)의 선비로서 언책(言責)에 있던 중 유지에 응해 글을 올린 것은 실로 숨김없이 모두 말하려는 뜻에서 나온 일이었는데, 그의 논변하는 상소로 인해 이번에 특명으로 체차시키는 일이 있게 되었으니, 언로에 손상되는 바가 큽니다. 환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제학 김만기가 오정창 상소의 말씨가 음험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누누이 말을 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만일 대신을 위안하고자 하셨으면 어찌 다른 말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한때의 격노로 인해 ‘벌이(伐異)’등의 하교까지 내리시고, 그뒤에 또 ‘재야의 유신에게 흘러 들어갔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만약 뭇 신하들이 조언(造言)하여 유전(流傳)한 것으로 지레 의심을 하셨다면, 그야말로 임금된 자가 신하들을 대할 때 지레 거짓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며, 또한 어찌 유신을 예우하는 뜻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정창의 상소를 타당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양사의 논계 또한 몹시 온당치 못한 것이다."
하였다. 만기가 또 이상을 특별히 체직시킨 것은 몹시 타당치 못하다고 말을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5월 15일 경신
사은사 흥평위(興平尉) 원몽린과 부사 홍처대, 서장관 이합이 청나라에 갔다. 몽린은 의주(義州)에 이르러 아비의 부음을 듣고 급히 돌아왔고, 복평군(福平君) 이인(李禋)을 가자하여 뒤따라 보냈다.
민종도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고, 이흥발을 사간으로, 유상운을 지평으로, 최후상을 부수찬으로, 신선온을 대교로 각각 삼았다. 민종도는 이때 옥당에 재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탁 제수된 것이다.
5월 16일 신유
송시열을 좌의정으로, 김수항을 우의정으로 각각 제배하고, 이경억을 이조 판서로, 이동직을 승지로, 김익경을 예조 참의로, 조위봉을 부교리로, 이당규를 수찬으로, 홍석구를 평산 부사로 각각 삼고, 조성보를 발탁하여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홍석구의 아비 홍준(洪浚)은 초명(初名)이 엽(燁)으로 곧 이이첨(李爾瞻)의 패거리인 봉선(奉先)의 아들이자 또 한옥(韓玉)의 사위로서, 소시적에 고(故) 지평 임숙영(任叔英)에게 수학하였다. 이때 【을묘년 겨울.】 임숙영이 광주(廣州)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마침 정인홍(鄭仁弘)이 조정에 나아가는 때를 만나 문생인 이해창(李海昌)·조수항(趙壽恒) 등과 함께 서로 비난하고 배척을 하였다. 얼마 후, 숙영은 남을 비방하고 헐뜯었다는 이유로 삭출을 당하였고 이해창 등도 모두 정거(停擧)를 당했는데, 대개 이첨이 자기 패거리를 사주하여 논핵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해창 등이 홍엽이 누설한 것이라고 몹시 의심을 하였고, 이때부터 홍엽은 감히 다시는 숙영의 문하에 발을 들이지 못하였다. 정사년에 진사시에 새로 참방한 사람으로서, 또 폐모론(廢母論)을 내세우는 이영구(李榮久)의 흉악한 상소에 동참하였고, 계해년 뒤로 비록 ‘익(益)’으로 개명(改名)을 하였으나,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한 채 끝까지 불우하게 살다가 죽었다.
석구는 문재(文才)가 있어 아우인 홍성귀(洪聖龜)와 더불어 동방(同榜)에 등과(登科)하였다. 처음에 성균관에 분속되었는데 해창이 대간직에 있으면서 세루(世累)로써 삭직하기를 논하여 교서관에 개임(改任) 차송하였으나, 석구 등은 감히 제 스스로 대꾸를 하지 못한 채 즉시 고분고분 취임을 한 뒤에, 일시의 명류(名流)들을 폭넓게 교제하였다. 얼마후 이단하(李端夏)가 전관(銓官)에 들어감에 이르러 극력 추켜세우면서 청망(淸望)에 올리고자 하니, 대사간 이태연(李泰淵)이 다시 홍엽의 일을 거론하여 석구의 아우 성귀를 논핵하였다. 그러자 석구가 신설(伸雪)할 마음을 먹고서 소를 올려
"아버지는 임숙영(任叔英)을 시종 친신(親信)하였으므로 정사년에 방방(放榜)한 뒤 즉시 숙영의 집에 가 있었는데 흉도(凶徒)가 강제로 그 이름을 쓴 것이다. 해창이 논핵한 것도 악감정을 품고서 무함하려는 데에서 나온 일이고, 임유후(任有後)가 동문생(同門生)으로서 아직 세상에 살아 있는데 그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고 송변(訟辨)하고서는, 유후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신구(伸救)하고 해명해 주기를 간곡히 빌어 그 답서를 얻어서 신원(伸冤)을 할 증거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유후는 엄준한 말로 거절하면서 그 아비가 사문(師門)에 발길을 끊은 사실을 지척하여 말하였다. 【그 서신에 대략 이르기를 "선대인(先大人)이 불행하게 당인(黨人)과 인척(姻戚)을 맺었는데, 사생(師生)의 삭출(削黜)·정거(停擧)가 때마침 뜻하지 않게 발생하였네. 그때 눈물을 떨구며 스승을 따르고 문하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 비방을 그 자리서 당장 밝힐 수가 있었으나, 나이 어린 사람이 그렇게 할 줄을 몰라 머뭇머뭇하면서 발길을 끊었기에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것이네……." 하였다.】 석귀는 그 일을 걱정하여 마침내 그 서신을 숨기고 내놓지 않고는, 다시 그 당시 재신(宰臣)이던 조복양(趙復陽)·김좌명(金佐明) 등에게 간곡히 빌면서 흉소(凶疏)에 누차 동참한 것을 실상이 아니라고 핑계대니, 그의 신리(伸理)를 허락하였다. 이에 공의(公議)가, 복양 등이 사정(私情)을 따른 것을 몹시 비난하였고, 영상 정태화 역시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홍엽이 대북(大北)030) 과 친밀히 지낸 것은 가릴 수 없는 면이 있다."
고 하였는데, 이때 와서 이 직임에 제수된 것이었다. 그러나 단하는 끝내 그를 청반(淸班)에 올려 놓지 못하였고 석구는 겨우 지방관을 지내고 죽었다.
대사간 여성제가 이상(李翔)을 체차하라는 분부를 환수토록 하시라는 명을 거듭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평안도 양덕현(陽德縣)에서 까마귀가 흰 새끼를 깠다.
5월 17일 임술
상이 뜸을 떴다.
5월 19일 갑자
영의정 정태화가 신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우의정 김수항이 상소하여, 어질고 덕있는 사람으로 다시 복상(卜相)하여 국사를 꾸려나가도록 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재주와 덕망이 그야말로 태정(台鼎)031) 에 합당한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사직하는 글을 올리는가. 어서 나와 치도를 논함으로써 상하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게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상이 산림의 선비에 몸을 의탁해 오직 당론(黨論)만 일삼고 있다. 조정에서 유신(儒臣)을 후하게 대우하느냐 박하게 대우하느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연 공론이 있는 것인데, 이상이 기회를 틈타 올린 상소는 말의 뜻이 간교하고 망령되어 반드시 해를 입히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진실로 놀랍고 분하다. 아, 초야에 있는 사람이면 내세우는 논리가 공평한 다음에야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키고 당시의 임금에게 중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상소 가운데 인용한 역적 김자점의 말이나 왕망의 설은 음험하기 이를 데 없으니, 이는 정대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지금 동서(東西) 당파의 병폐가 나날이 깊어져 나라가 나라 꼴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는데, 주자(朱子)의 말을 빌려 ‘오직 당인(黨人)이 많지 않을까 걱정한다.’고 하였으니, 끝내 어떤 지경에 이르겠는가. 아, 이상이 선비의 이름을 지니고서 그의 분수를 지키지 않고 세로(世路)에 분주하여 오직 따라가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으니, 그의 태도와 처신은 길가는 사람들도 알 것이다. 이상을 삭탈 관작하라."
하니, 승지 민시중 등이 복역(覆逆)하면서 이상을 삭탈 관작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20일 을축
대사간 여성제, 헌납 이훤, 정언 조이병 등이 아뢰기를,
"이상이 산림의 선비로 언론의 직책에 있으면서 자신의 몸을 잊고 말씀을 올렸는데, 갑자기 크게 노하시고 죄안을 만들어 언론자들을 견제하려고 하셨으니, 예우하는 도리에 어긋나고 성상의 덕에 큰 누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돌이킬 수 없는 실언을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언로(言路)가 이로부터 영영 막히고 사기(士氣)가 이로부터 영영 좌절될 것이니, 삭탈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사헌 장선징, 장령 정재희, 지평 유상운 등이 아뢰기를,
"이상은 산림의 선비로 두 조정의 은혜를 받은 데다가 언관의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정성이 마음에 복받쳐 그의 말이 질박하고 숨김이 없었으니, 모두가 충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지나치게 노하시고 실정에 벗어난 분부로 지척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체차하시더니 이제 또 관작을 삭탈하시니 갈수록 더욱 엄하십니다. 한번은 ‘말뜻이 교묘하고 망령되다.’ 하시더니, 한번은 ‘기어코 모함하여 해치려 한다.’ 하시니, 신들은 저으기 해와 달 같이 총명하신 상께 유감이 있습니다. 역적 김자점과 적신 왕망의 설에 있어서는 문장이 완곡하지 못하고 글의 비유가 좀 덜 들어맞습니다만, 이는 실로 초야(草野)의 선비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말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세속의 교활한 자의 태도가 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가 음험하고 바르지 않다 하시니, 어찌 전하의 헤아리지 않으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들이 크게 두려워하고 크게 걱정하는 것은 일개 이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에 하나 상께서 판단을 잘못내려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는다면 소장(消長)의 기미와 치란(治亂)의 판가름이 여기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관직을 삭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한 해가 다하도록 논집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상의 죄는 관작을 삭탈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의 처벌 역시 줄여준 것인데, 이제 헌부의 계사를 보니, 앞장서서 구해주되 갖은 방법을 다 썼다. 비록 당론(黨論)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국사(國事)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조목에 따라 변명하면서도 음험한 맺음말에 대해서는 분변하지 아니하고 ‘이상의 비유가 좀 덜 들어맞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상의 상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 대신을 역적에다 비유하였는데도 초야의 선비가 거리낌 없이 말하는 태도라 하고, 또 모두가 충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로 모르겠다. 사적인 일을 먼저 하고 공적인 일을 뒤로 제치면서 국가의 법을 돌아보지 않는 작태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헌 장선징, 장령 정재희, 지평 유상운은 우선 모두 체차하라."
하였고,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요즈음 이 일은 윤경교(尹敬敎)한테서 발단이 되었고 장우(張禹)가 말한 ‘헛된 칭찬’이라는 등의 말까지 전후로 이어지고 있으니, 당을 굳게 결속하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경교의 벌이 이에 비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그의 나쁜 짓을 징계하지 못한 것이다. 그 죄를 더욱 엄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경교를 갑산(甲山)에 안치하라."
하였다. 정원이 【도승지 이은상, 우승지 이지익, 좌부승지 이동직, 우부승지 민시중, 동부승지 민종도.】 비망기를 두 차례에 걸쳐 봉환(封還)하면서 선징 이하를 체차하라는 명과 경교를 안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여 세 차례까지 아뢰었으나, 상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1일 병인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진시에 계하(啓下)한 일을 오시가 되어서야 입계하였으니, 그 태만함이 진실로 매우 놀랍다. 금부 낭청을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라. 정원 또한 마땅히 서둘러야 하는데 마치 관망하는 자처럼 한번도 언급하지 않으니, 매우 해괴하다. 해당 승지를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라."
하였다. 좌부승지 민시중이 이 일 때문에 연좌되어 파직을 당하였다. 정원이 진계하여 죄벌을 함께 받겠다고 청하기를,
"진시(辰時)에 계하(啓下)한 공사를 오시(午時)에 와서 바치게 된 것은 대개 여러 당상들에게 회고(回告)할 즈음에 그 형세가 자연히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인데, 신 등이 청중(廳中)에 함께 있었으니만큼 잘못한 것이 똑같습니다."
하니, 상이 대죄(待罪)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판의금 정지화(鄭知和)가 낭청(郞廳)이 벌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여성제, 헌납 이훤, 정언 조이병 등이 헌부의 여러 관원을 특별 체차시킨 일과 경교를 안치시킨 일과 해방 승지를 파직 추고시킨 일을 들어 매우 힘써 쟁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고 헌신(憲臣)이 계속해서 들고 일어나 한 달 남짓 논집(論執)을 하였지만, 끝내 청한 대로 되지 못했다.
관학 유생 윤징주(尹徵周) 등이 소를 올려, 송준길은 충현(忠賢)이고 허적은 간사한 소인이라고 극언을 하였는데, 소를 봉입하였으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5월 22일 정묘
상이 하유하여 송시열을 회덕(懷德)에서 불렀다.
5월 23일 무진
우의정 김수항이 세 번째 상소하여 면직을 간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같은 때에 재덕과 중망이 경말고 누가 있는가.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몸받아 사직한다는 글을 어서 끊고 속히 나와 치도를 논함으로써 당면한 어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수항이 다시 소를 하나 올리고는 나가버렸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로, 근래에 연소한 자로서 입각(入閣)032) 한 이는 이덕형(李德馨) 후로 2명밖에 없다고 한다.
5월 24일 기사
판중추부사 정치화가 차자를 올려 겸대한 제사(諸司)의 제조를 해직시켜 주기를 간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6일 신미
행 지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직명을 없애주기를 간청하고 또 녹봉을 사양하였다. 시열이 일찍이 진언하여 논사(論事)를 하였으나 상이 오래도록 비유(批諭)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사직을 한 것인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경이 도와 헤쳐 나가려는 뜻을 생각하지 않으니 장차 어찌할 것인가. 병중의 심정이 이 점에 대해 더욱 간절하여 지금 막 사관을 보내니, 경은 모쪼록 나의 뜻을 몸받아 한시바삐 선뜻 올라옴으로써 조야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전유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5월 28일 계유
이조 판서 이경억(李慶億)이 재차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하였는데, 상이 한시바삐 직무를 살피라고 명하였다.
5월 29일 갑술
대사간 여성제, 헌납 이훤, 정언 조이병 등이 누차에 걸쳐 엄한 비답을 받았고 패초를 받들고도 나아오지 아니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3년 1672년 7월 (0) | 2025.12.07 |
|---|---|
| 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 13년 1672년 6월 (1)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 1672년 4월 (0)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 1672년 3월 (1) | 2025.12.07 |
| 현종개수실록25권, 현종 13년 1672년 2월 (0) | 2025.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