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을해
이때 전염병이 또 치열해져 팔도에서 사망한 인민이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다.
6월 2일 병자
전 감사 정언황(丁彦璜)이 죽었다. 언황은 혼조(昏朝)의 대관(臺官)을 지낸 정호관(丁好寬)의 아들이다. 일찍 등제하였으나 아비의 흠 때문에 처음에는 현로가 막혔다가 후에 대성을 두루 역임하고 제조(諸曹)의 참의를 거쳐 관동에 관찰사로 나갔다. 중년에는 원주(原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여러 번 승지를 제수하였으나 다 취임하지 않더니, 이때 와서 죽었다.
6월 3일 정축
임유후(任有後)를 호조 참판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조원기(趙遠期)를 헌납으로, 이유(李濡)·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이훤을 수찬으로 각각 삼았고,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에게 대제학을 겸임토록 하였다. 처음에는 문형(文衡)이, 대신이 으레 겸임하는 벼슬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의정을 재가할 때 문형 자리를 감하(減下)033) 하였는데, 해조가 추후에 고상(故相) 김유(金瑬)·홍서봉(洪瑞鳳)이 겸임을 하였던 전례를 계품하여, 상이 그대로 겸대를 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다시 재가를 한 것이다.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소장을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선유(先儒)들이 곽공(郭公)034) 이 망한 이유를 논해 말하기를 ‘그는 선인을 좋아하긴 하였으나 등용하지 못하였고 악인을 미워하긴 하였으나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지난 겨울 윤경교가 대신을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흉칙하고 교활하다고 배척하고 악을 멀리하려고 내쫓았으니, 그를 미워함이 지극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또 신의 소장 내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신이 악의 우두머리에 해당되고 경교는 위협에 못이겨 따른 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요전 사헌부 신료의 소장에 ‘전하께서 이미 송시열과 윤경교는 표리(表裏)라고 하시고서도 도리어 송시열의 죄를 윤경교에게만 준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 옳았고, 전하께서 그 말에 대해 스스로 해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전하께서는 또 윤경교를 근래 사건의 장본인이라 하여 안치의 법률을 더하였다고 합니다. 윤경교가 참으로 장본인이라면 신은 또 장본인 중의 장본인이니, 그 죄는 안치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신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 직임의 임명까지 있었습니다. 왜 전하께서는 악을 미워하는 도리가 이같이 전도되었으며 몸소 곽공(郭公)의 그릇된 전철을 따르려고 하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허적(許積)의 소장에 신과 함께 효종(孝宗)의 명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신이 옛날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 이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지금 그날의 일들을 자세히 진달하자니 진정 차마 말할 수 없는 바가 있는데다가 전하의 효심만 괴롭힐 것이므로 감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체로 조정에 함께 있는 자는 형제의 도리가 있는 것이니 그 정의가 자연 가볍지 않은 사이인데, 더구나 허적은 신에게 있어 사체로나 의리로 헤아려 볼 때 다른 사람과는 각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허적이 국사를 담당한 뒤로부터 시골 백성들이 세금의 독촉이 너무 심하다고 원망하면, 신은 나라 살림이 급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였고, 그가 너무 상의 뜻에만 순종한다고 비방하는 이가 있으면, 신은 또 온 조정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한데 왜 허적만 나무라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평소 아첨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를 인도하였다면 이 사람의 허물만은 아니라고 하였고, 혹은 그가 너무 지나치게 독단적이다고 하면, 신은 또 백관을 쓰거나 안 쓰는 것은 대신의 직분이니 의당 그가 누구를 쓰고 안 쓰는가를 살펴볼 따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허적을 꾸짖는 말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그 말을 막아 허적을 보호할 마음이 있었는데, 이는 허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효종의 밝으심에 손상이 있을까 두려워한 것이며 또한 개인적인 의리를 돌아본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늘 내심에, 허적에게 충직하고 그가 남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자는 신보다 더한 자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 신이 허적에게만 유난히 후하게 대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지만 신은 끝까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와서 허적에게 대단한 실망을 하고서는 신의 병통을 지적하던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 다.
국가가 화란을 겪은 이래로 큰 윤리와 도리가 그나마 다 없어지지 않게 된 것은, 두세 명의 훌륭한 신하가 죽음으로써 의리를 밝히고 효종께서 그들을 포장(褒奬)하신 은전이 유명(幽明) 간에 환히 빛났기 때문인데, 온 동방의 인류들이 앞으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작년에 마침 이미 죽은 자의 문자를 찬수하는 일로 인해 무신년 11월 등대하였을 때의 이야기 내용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허적이 두세 명의 신하를, 일벌리기 좋아하고 명예를 낚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허적의 소견과 마음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이는 천하의 사람을 이끌어 오랑캐나 금수의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것이니, 그 화가 어찌 홍수나 맹수의 해독 정도로 끝나겠습니까. 다행히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어 그 말을 물리치고 환하게 밝히셨기 때문에 인류가 인류다운 구실을 할 수 있었으니, 성명의 공로가 우(禹) 임금보다 못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 허적이 효종의 밝으심을 손상시키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신이 비록 현저하게 배척하지는 못하였지만 항상 마음이 쓰라리고 슬프게 탄식하면서 거의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는데, 이게 어찌 허적의 일신만을 위해서였겠습니까.
송준길(宋浚吉)의 소장에 있어서는 심지어 노기(盧杞)035) 를 들어 말하였는데, 그 주된 뜻을 살펴보면 허적을 꼭 노기에다 비교한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깨닫지 못하심이 그 당시와 같은 바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한 것이 딱 들어맞지 않았으므로 사람들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허적의 소장이 한번 나오자, 사람들의 말에는 더 이상 허적에 대하여 아까워함이 없어졌으나, 신은 더욱 허적을 위해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대체로 ‘어진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술을 마셨다.’는 말로 송준길을 이임보(李林甫)036) 에다 비유하였으면 이는 자신을 노기에 비유했던 말에 충분히 갚은 셈이 되니, 속이 후련할 만하고 또한 여기서 그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반드시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로 성상의 마음을 의심하게 하고 노하게 하는 일대 관건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군자를 모함하는 소인들이 이것으로 말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우리 나라로 말하면 중종 대왕께서 기묘(己卯)의 여러 신하들에게 대우가 융숭하였으며, 심지어는 김식(金湜)이 급제하자 유달리 기쁘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당시 소인들이 틈을 탈 꼬투리가 없자 마침내 이 말을 만들어서 상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비록 중종의 명철하심으로도 망극한 사람의 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간사함이 왕망(王莽)이나 동탁(董卓)과 같다.’는 하교를 내렸으며, 한 시대의 신하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한마디의 말은 기실 고금 소인들의 기화(奇貨)였는데, 지금 다시 대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우연히 한때의 노기(怒氣)에 격동되어 말한 것이라면 그래도 해독은 없겠지만 만약 깊은 뜻이 없지 않다면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 시골에 있으면서 거만하게 구는 자나 연소한 대간(臺諫)들로서 과격한 것만 일삼아 고려함이 없는 자라고 한다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허적은 세 조정을 거친 노련한 신하로 영의정이 된 몸이니, 의당 국가를 위해 여러모로 깊이 걱정하고 멀리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한때의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방금 만리 밖에 두려운 이야기가 있는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 당시 사신 이남(李枏)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청나라 황제가 ‘너희 나라는 왕이 약하고 신하는 강하다.’고 한 말이 있었다고 하였다.】 말을 함부로 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송준길이 한 말이 지나쳤다고 했던 자들이 지금와서는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고 합니다만, 신은 허적에 대해서 일찍이 언급한 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효종 때의 일을 말하였기에, 신이 슬픈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서 대략 한두 가지 사실을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끄러운 시비는 본디 신하들의 시비 득실이니 참으로 큰일이 아닙니다만, 오직 전하의 지나친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 정승이 있는 줄만 알고 종사와 국가가 있는 줄은 모르시니, 어찌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을 주달하였으나 오래도록 답하지 않으니, 그 일을 말하고 나서는 신하들이 많았다. 그 뒤 7월에 【계해(癸亥).】 상이 사관을 보내 소에 대한 비답을 전유하기를,
"경이 이미 나의 뜻을 잘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사직을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이 정승에 제배된 지 이미 한 해가 넘었는데도 지금까지 시골에 묻혀 있으니, 내 마땅히 예우를 극진하게 쏟지 못한 책임을 져야 될 것이나, 경 또한 끝까지 이다지도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다니, 마음이 정말 부끄럽다. 소중(疏中)에 말한 동료 정승의 일은 경이 일을 함께 한 사람으로서의 뜻이 이다지도 깊고 간절할 줄 내 어찌 알았겠는가. 어서 올라와 치도를 논함으로써 조야의 소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6월 4일 무인
수찬 이훤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삼가 요사이 일을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언로를 막는 것이 대신을 위안하는 길이라고 여기시는데 너무나 생각해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옛말에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지나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의 입도 막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간쟁하는 신하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관직을 삭탈하는 벌이 시골에 물러가 있는 선비에게까지 미쳤고, 다른 일로 노한 분풀이로 이미 죄준 신하에게 죄를 추가하였으니, 이는 혼란한 세상에서도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전하의 허물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는데도 한 마디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영화만 취한다는 것은 신의 본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소장을 아뢰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도 소장을 올려 견책당한 여러 신료들을 구원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기의 유학 구문찬(具文粲)이 상소를 하여 좨주(祭洒) 송준길을 논구(論救)하면서 허적의 간사함을 공척하였는데, 소를 들였으나 아무 대꾸가 없었다.
평안 감사 원만리(元萬里)가 졸하였다. 만리는 고상(故相) 원두표(元斗杓)의 아들이자 부마(駙馬) 원몽린(元夢鱗)의 아비이다. 그는 늦게야 과거에 급제하여 좋은 벼슬을 두루 지낸 다음 자급이 승진되어 수원 부사로 나갔다가 그만두고 돌아와서 또 승지로 있다가 이 직책에 발탁 제수되었는데, 미처 부임을 하기 전에 급작스런 병으로 죽은 것이다. 그의 사람됨은 기개(氣槪)가 있어 장점도 되었으나, 사람들이 더러는 그의 마음씨가 거친 점을 흠잡기도 하였다.
6월 5일 기묘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경교의 상소 내용이 서툴고 망령스러운 것이야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당초에 외임에 보직시킨 일은 그야말로 진정(鎭定)시키는 도리에 맞는 것이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죄벌을 한층 더 가하여 안치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타당성을 잃은 것입니다. 상께서 조신(朝臣)을 그와 한통속인 것으로 의심을 하고 계시나, 노신(老臣)이 이제 다 늙어 죽을 날이 가까워진 나이에 어찌 경교와 더불어 뜻이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교가 장우(張禹)를 인용하면서까지 말을 하여 놀랍기 그지없었으나, 이는 단지 경교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었다. 그래서 외직에 보임시켰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일 때문에 지금까지 시끄럽구나. 그때 만약 경교를 무겁게 다스렸더라면 필시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태화가 다시 명령을 환수하시라는 뜻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우의정 김수항이 차자를 올려 문형(文衡) 직임을 사직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 다시 누차 상차하여 고사(固辭)를 하니, 마침내 체직을 허락하였다.
6월 6일 경진
정유악(鄭維岳)을 문학으로 삼았다.
6월 10일 갑신
가주서 남궁후가 서계(書啓)하기를,
"신이 명을 받들어 좌의정 송시열에게 가서 전유하였더니, 시열이 아뢰기를 ‘조금 전에, 소지(召旨)가 이른 까닭에 감히 면직을 간청하는 글을 올리면서 자진 논열하여 죄를 청했는데, 봄철에 외람스레 올린 소장에 대해서도 비답을 내려 주시고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가 다시 이르기까지 하였으니, 신은 죽을 때가 가까워진 병중에 황감하여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장령 이수만이 어미의 병을 이유로 소를 올려 면직되었다.
6월 11일 을유
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예조 참의로, 조원기(趙遠期)를 사간으로, 박증휘(朴增輝)를 보덕으로, 임규(任奎)를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윤치적(尹致績)을 겸설서로, 최석만(崔錫萬)을 검열로, 이만영(李晩榮)을 평안 감사로 각각 삼았다.
우의정 김수항이 차자를 올려 문형(文衡)을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근래 성상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거조가 마땅함을 잃어, 견벌(譴罰)이 산야(山野)의 인사(人士)에게까지 미치고 독책(督責)이 대각(臺閣)에 대해서도 가차없었습니다. 이에 중외가 기가 꺾이고 상하가 뜻이 막혔으니, 진정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있는 사람이면, 그 누가 깊이 우려하고 긴 탄식을 자아내지 아니하겠습니까.
이상(李翔)의 상소는, 뜻이 유현(儒賢)의 심사(心事)를 통쾌하게 밝히고 경례(敬禮)를 변하지 않도록 하려고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격해진 것인 바, 만약 ‘말을 다듬을 줄 모른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성상의 하교에서 하신 말씀은 아마 그 본정(本情)이 아닐 듯합니다. 초야의 선비가 진언(進言)을 하였다가 죄를 얻게 된 일은, 역대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난 명묘조(明廟朝) 때에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이 글을 올려 시사(時事)를 극언하면서 ‘자전(慈殿)은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殿下)는 선왕의 일개 고사(孤嗣)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였으나, 명묘(明廟)께서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징소(徵召)를 중지하지 않으신 일은, 오늘날까지 전해 내리면서 성덕(盛德)으로 여기고 있고, 선조(先朝) 때에는 장령 안방준(安邦俊)이 소를 올려 고(故) 상신 김육(金堉)을 지척하면서 ‘나라를 그르쳤다.’고 하는 등 과격한 말이 많았는데도 선왕께서 대신을 위유(慰諭)하는 비답에 ‘산야(山野) 인사(人士)의 말은 본래 이와 같은 법이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 어찌 전하께서 깊이 따라야 될 법이 아니겠습니까.
윤경교를 저멀리 내쫓으신 이번 일은 어찌된 일입니까. 갑(甲)에게서 화난 일을 을(乙)에게 분풀이하는 것도 안 될 일이라고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무슨 말을 하면 대뜸 화를 더 내시니, 정사에 해가 되고 덕에 누가 됨이 아마 오늘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일마다 그 과실과 결점을 보완해 나가는 것이 대간의 책무인데도 전하께서는 헌부의 신하들에 대해 의심이 너무 지나치고 성내심이 너무 급작스러워, 선사 후공(先私後公)한다는 죄를 씌우셨고, 또 간신(諫臣)의 인피에 대해서도 형편없다는 말로 배척을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건도(乾道)037) 는 나날이 드세어지고 하정(下情)038) 은 나날이 막히어 언로가 날로 닫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다들 전하께서 유현에 대해 예우(禮遇)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을 하나, 신 혼자만큼은 지나친 염려라고 생각합니다.
선조(先朝)에서 깊이 신뢰하고 의지한 정도가 천고에 탁월하였고 유현의 일심(一心)이 충성심으로 뭉쳐 있음은 신명(神明)에게조차 물어볼 수 있을만큼 분명하여, 전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깍듯이 대해준 예도 쇠하거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말 한 마디가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느닷없이 박절하게 대하고 소원히 절연(絶緣)할 수 있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전후의 비망기(備忘記) 내용이 평소에 존경하고 신뢰해 오던 뜻과는 전연 딴판이었으니, 뭇 신하들이 의혹을 느끼는 것이야 본디 이상할 것도 없는 것인데 ‘산림(山林)에 몸을 의탁하여 오로지 당론만을 일삼는다.’는 말씀이 내렸고 보면, 불안하게 여길 사람이 어찌 다만 이상(李翔) 혼자 뿐이겠습니까.
좌상 송시열이 거듭 매복(枚卜)에 뽑혔던 것이 우연한 뜻이 아닌만큼 마땅히 성의와 예우를 다하여 기어코 이르게 했어야 하는데도, 의례적으로 소유(召諭)하여 그저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았으며, 소(疏) 하나에 대한 비답이 걸핏하면 서너 달을 넘기면서 한갓 직명(職名)으로만 헛되이 구속을 하고 있으니, 천직(天職)을 함께 다스리고자 하시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고서도 그가 선뜻 마음을 바꾸고 올라오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근일의 인심과 세도야말로 아름답지 못하고 거칠기만 하다고 할 것이다. 느닷없이 적신(賊臣)의 일을 대신(大臣)에게 덮어씌우다니, 그 누가 능히 나라를 위해 원망을 감당하며 힘과 성의를 다할 자이겠는가. 안방준(安邦俊)의 일을 어찌 오늘날에다 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6일 경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왜관에 시장을 열 때 난잡한 폐단이 많습니다. 이 폐단을 염려하여 시장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필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왜관에 가서 몰래 사들여 연경(燕京)에 전매할 것입니다. 국법이 점점 해이되고 인심이 점점 악해져 잇속이 있는 곳엔 금령도 행해지지 않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우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폐단이 비록 이 지경에 이르게 되더라도 그 일을 덮어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의당 동래(東萊)와 의주(義州)로 하여금 엄명하게 신칙해서 통렬히 금지시켜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윤경교(尹敬敎)의 일에 대해 해가 지난 뒤에 무거운 법을 적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신은 말이 졸렬하고 정성이 얕아서 상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였으니 실로 황공스럽기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교의 일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근일의 풍파는 실로 경교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상(李翔)이 이미 삭탈 관작의 벌을 받았는데, 경교가 어찌 임소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비록 늙었으나 경교의 일에 있어서는 결단코 지나친 줄로 압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명철한 임금의 마음은 이치로써 결정한다.’고 하였으므로 신의 생각엔 이치로서 상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고 여기었으나 신은 말을 잘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수항의 말이 매우 명백하니, 성상께서는 다시 생각하시고 헤아려 처리하소서."
하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정태화가 어찌 사사로이 경교를 옹호하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노여움을 잊으면 마음이 공평해진다.’고 하였으니, 마음을 평정시켜 느긋하게 생각해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상의 말이 과연 거만스러움에서 나온 것인가?"
하자, 김수항이 아뢰기를,
"인정이란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상이 어찌 대신을 적신(賊臣)에다 비교하였겠습니까. 신의 생각엔, 이름자를 빌려 쓰다가 자신도 모르게 망발한 것으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소장의 말뜻은 글을 잘못 쓴 소치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가 인용한 주운(朱雲)의 말에 대해 괴이하고 망령되어 엉뚱하다고 여기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반드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상의 하교에 ‘굳게 결탁하여 괴롭히고 해쳤다.’는 등의 말씀이 계셨습니다만, 어찌 이상 등이 남과 서로 약속해서 이 일을 만들었겠습니까. 임금이 벌을 씀에 있어 억지로 죄명을 정해서야 되겠습니까. 정태화는 머리털이 하얀 노신으로 나라를 위한 정성이 다른 사람보다 각별한데 그가 진달한 말이 이와 같으니, 의당 살피시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볼품없는 신이 외람되게 이 직위에 있어 세 조정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신이 감히 다시 진달하지 못한 것은, 만약 외부 사람들이, 신이 누누이 말씀드렸으나 가납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신의 마음이 황공스럽고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성상의 덕에 손상이 있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늙은 이 신하로 말미암아 성상의 덕에 거듭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경교를 안치시키지 말고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으라."
하였다. 장령 임규가 아뢰기를,
"지금 대신의 말로 인해 윤경교의 벌을 감등시켜 삭탈 관작하고 내쫓으라는 명이 계셨으니, 성상의 덕이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당초 외직에 제수한 것이 이미 그의 죄가 아니라면 완전히 사면시켜 성상의 덕이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삭탈 관작하여 내쫓으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은 그렇지 않으나 대신의 진달이 이러하므로 감등시킨 것이다. 꼭 직임을 제수해야만 후련하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신이 엉뚱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직임을 맡아, 신의 형 호판 수흥과 비국을 출입할 때 좌차(坐次)와 예모(禮貌)에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의 형이 연일 소를 올리고 나오지 않고 있으니, 신이 이 때문에 더욱 감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판 의 사직소가 이 일 때문인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신병이 있어서라고 말은 하였으나, 우상의 일 때문에 불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례(古例)가 없는가?"
하였다. 이에 태화가 아뢰기를,
"명묘조(明廟朝) 때 이준경(李浚慶)이 상신으로 있고 그의 형 이윤경(李潤慶)이 판서를 지냈는데, 공조(公朝)에서의 예(禮)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호판을 우상 때문에 해직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득이하다면, 비국이 회좌할 때 예수(禮數)를 생략하고 좌차에 나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수항이 아뢰기를,
"신 혼자만 갈 경우에는 예수를 생략한다는 것도 무방하겠으나, 조당(朝堂)은 체모가 몹시 중한 곳이니만큼 이것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하였고, 태화가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북벽(北壁)에 앉고 제당상(諸堂上) 중에 호판이 종1품으로서 먼저 들어오되, 만약 다른 상신들과 동좌(同坐)를 했을 경우에는 호판이 행례(行禮)할 때 우상은 잠시 협방(夾房)에 들어가 있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신 등이 동료 상신으로서 그로 하여금 행례(行禮)를 하지 말도록 해주는 것도 무방합니다."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6월 18일 임진
사간 조원기, 정언 이유가 전 집의 이상의 삭직을 환수하시라는 계사에 ‘전(前)’ 자를 쓰지 아니하여 성교(聖敎)를 귀찮게 해드렸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였다. 그 이튿날 대사간 강백년이 처치하여 출사하도록 청하니, 상이 체차하기를 특별히 명하였고, 백년도 이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19일 계사
정석(鄭晳)을 승지로 삼았다.
이에 앞서 대마주 태수(對馬主太守) 평의진(平義眞)이 강호(江戶)에 들어갔다가, 이때 와서 대마도로 돌아와 귤성진(橘成陳)을 보내어 보고하니, 조정에서 역관에게 명하여 위로하게 하였다. 예조가 평의진에게 글을 보내 꾸짖기를,
"우리 양국이 서로 잘 지낸 지 이제 백 년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양국 사이에 사신이 오고 가는 데 있어서 만약 예의를 멸시하고 금령을 범한 일이 있으면 더욱 서로 고해주고 경계하여 앞날이 잘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관(正官) 평성태(平成太) 등이 사신으로 왔을 때, 조정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사리가 어떠한지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억지만 부렸으니, 이것만도 불가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관문(館門)을 뛰쳐나와 방호군(防護軍)을 구타하고 곧바로 동래부(東萊府)까지 갔으니 이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정에서는 평소의 우호를 생각하고 관대한 덕의를 미루어 변신(邊臣)으로 하여금 조용히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성태 등은 끝내 개전하지 않았고 급기야 평성태가 죽자, 부관(副官) 등이 다시 한결같이 시일을 끌면서 왜관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 밖에 갖가지로 횡포를 부린 일들도 일일이 세기가 어렵습니다. 조정의 명을 받고 사신 접대의 임무를 맡은 관리에 있어서는 체면이 자별한데도 감히 핍박하고 욕되게 하여 거리낌이 없었는가 하면, 또 그의 수행인을 풀어놓아 다른 고을로 넘어가게 하였으니, 이는 방자한 짓 중에서도 더욱 방자한 짓이었습니다.
대체로 예의를 멸시하고 금령을 범하는 것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이면 다같이 미워하는 일입니다. 가령 우리 나라 사람이 귀국에 사신으로 가서 이같은 짓을 하였다면 우리 조정에서는 반드시 국법으로 다스리지 용서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귀국 역시 어찌 사신을 곡진하게 옹호하여 멋대로 횡포를 부리게 놔두겠습니까. 이에 역관을 시켜 이 뜻을 알리게 하니, 한 차례 법으로 다스려서 맹약이 더욱 굳건해지고 성의와 신의가 끊임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6월 22일 병신
강백년(姜栢年)을 형조 참판으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이흥발(李興浡)을 사간으로 각각 삼았다.
6월 23일 정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이 아뢰기를,
"흉년으로 인해 세초(歲抄)039) 를 정지하였습니다만, 정초군(精抄軍)과 포보(砲保)의 경우, 세초를 기다리지 않고 채우는 것은 대궐의 숙직과 호위를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응사(鷹師)040) 도 날마다 어공(御供)을 진상하는 역이므로 결원에 따라 충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전 대간의 계사로 인해 군병의 정원을 보충시키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외방에서 와서 물어보는 자가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사도 포보의 예에 따라 일체로 충당시키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는 어영군에 결원이 있을 때는 그들의 보인을 승호(陞戶)하는 것이 편리하겠다는 것을 진달하였고, 민정중도, 그들이 스스로 대신자를 얻는 것은 한정(閑丁)을 찾아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상황을 진달하였다. 한흥군(韓興君) 이여발은 한정으로서 소속되기를 원하는 자로 충당시키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정중이 또 아뢰기를,
"경술년 이전의 갖가지 신역 가운데 아직 거두지 않은 것과 호조가 관리하는 패선미(敗船米)로서 아직 환징(還徵)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탕척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선혜청이 관장하는 양호(兩湖)의 패선곡(敗船穀) 가운데 아직 환징하지 못하고 있는 수량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였더니, 쌀은 3천 8백 45석, 콩은 1백 58석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똑같이 탕척을 하라."
하였고, 정중이 또 아뢰기를,
"작년에 도민(都民)에게 나누어 준 조미(糶米) 2만 4천 5백 90석 내에 추수 후 도로 거둔 것이 2만 2천 6백 97석, 아직 거두지 못한 것이 1천 8백 98석인데, 그 중에 전염병으로 인해 일가족이 모두 죽어 징수할 데가 없는 것이 1백 84석이고, 이미 휼전(恤典)을 입어 탕감시켜야 될 것이 63석, 유망(流亡)하여 간 곳을 모르는 것이 55석으로, 그 숫자를 통계하면, 4백 35호(戶)이며, 쌀로는 3백 3석입니다. 이것을 전에 상세히 조사하라는 분부가 계셨는데 이제야 조사를 끝마쳤으므로 계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울러 탕척하라."
하였고, 정중이 또 아뢰기를,
"세자가 전에는 강학을 할 때 보양관이 앞에 나아가 글자를 짚어가면서 강을 하였는데, 책봉을 한 뒤에도 빈객이 그대로 전례(前例)에 따라 진강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세자의 문리(文理)가 크게 진보하였으니 앞에 나아가 강독한다는 것은 사체상 적절치 못한 일입니다. 청컨대 고사(故事)에 따라 물러나 앉아서 별도의 책을 갖고 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통감》의 촉한기(蜀漢紀)를 필강(畢講)한 후에는 《대학》을 가르치라고 명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가 12세로 《동몽선습》·《소학》 등의 서책을 다 떼었고 지난해부터 《통감》을 배우고 있었는데, 문의(文義)가 나날이 향상되어 조신들이 다들 기뻐하였다. 수항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게도 유례없는 흉년을 당하여, 성상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애통히 여긴다는 교서를 내리시고 크게 사면을 베푸는 은전을 행하심으로써 신역(身役)과 해묵은 조곡을 모두 탕감토록 허락하셨으니, 중외의 인심이 다들 반기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단지 일시적인 혜택에 불과한 것으로, 계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못됩니다. 그러니 마땅히 상께서 분발·진학하시는 뜻을 세우시어 폐단을 없애고 새로 시작하는 도리를 쓰셔야 하는데, 근일 매사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충 그럭저럭 넘기고 마는 습성이 전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실로 신 등의 허물이기는 하나, 가만히 생각하면 전하의 ‘근본을 가다듬는 자세[端本]’에도 아마 미진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지난날 반겨 기뻐하던 자가 풀이 죽고, 의욕이 솟구쳐 고무된 자가 실망을 하면서 다들 금일의 거조에 대해 개탄스런 심정으로 몹시 서운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날의 일시적인 혜택이 결국에는 하나의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아 애당초 하지 아니한 것만도 못한 셈입니다. 시사(時事)가 이런 모양이니, 서둘러야 하는 일은 인재를 수습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별천(別薦) 제도가 비록 더러 폐단이 있기도 하였으나 인재를 등용하는 규정으로는 아무래도 이 방법을 놔두고 달리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일찍이 별천을 재가하신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아무런 지시가 없으시니, 이 또한 인순 고식하는 하나의 실마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입계한 천목(薦目)에 간혹 빠뜨린 조건이 있었으므로 제경(諸卿)과 더불어 상의하여 하려고 하였으나, 근래 연거푸 사고(事故)가 생긴 까닭에 내리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수항이 또 아뢰기를,
"기근이 잇따라 발생하여 국가 예산이 탕갈되었는데도 사치를 숭상하는 풍속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법사(法司)가 의례적으로 금단하고 마는 것은 폐단을 종식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상께서 반드시 몸소 솔선수범을 해야만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주의 혼례가 박두하였는데 되도록 절약을 하시어 백성들의 본보기[民則]가 되는 것이야말로 전하께서 마음을 쓰셔야 되는 부분입니다. 전일 세자빈의 가례 때 쓸데없는 비용과 자질구레한 행사를 별로 줄인 바가 없었던 까닭에 지금까지도 민정(民情)이 그 일을 아쉽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에는 일이 궁가에 관련되었으므로 신하들 또한 상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면이 있음을 내심 헤아렸으나, 지금 이 혼례는 오직 상께서 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검소[儉]’라는 것은, 덕을 양성(養成)할 뿐만이 아니라 복(福)까지도 양성한다는 것이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일(期日)이 이미 박두하였기 때문에 지금 갑작스레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아뢴 말은 참으로 훌륭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신의는 임금의 보배이니, 옛날부터 백성에게 신의를 잃고도 치업을 이룩한 자는 없었다. 금년 봄에 상이 특별히 자신을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그중에 각종 군병의 결원은 3년 동안 보충시키지 말아서 민력이 펴지게 하라고 하였다. 이런 임금의 말씀이 한 번 내리자 누가 귀담아 듣고 좋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대궐 숙직은 중대하다는 이유로 정초군을 보충시켰고, 조련을 정교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포보를 정하였으며, 어공의 역이라는 이유로 응사를 충당시키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한정을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소요 속에 편치 못하였으니, 백성에게 신의를 크게 잃은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정으로 하여금 신의를 잃게 하고 말았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1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왕실-행행(行幸) / 왕실-경연(經筵)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재정-진상(進上)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인사-선발(選拔) / 사법-법제(法制) / 역사-사학(史學)
[註 039] 세초(歲抄) : 정기적으로 군병의 결원을 보충하는 일.[註 040] 응사(鷹師) : 응방(鷹坊)에 속한 잡직.
사신은 논한다. 신의는 임금의 보배이니, 옛날부터 백성에게 신의를 잃고도 치업을 이룩한 자는 없었다. 금년 봄에 상이 특별히 자신을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는데, 그중에 각종 군병의 결원은 3년 동안 보충시키지 말아서 민력이 펴지게 하라고 하였다. 이런 임금의 말씀이 한 번 내리자 누가 귀담아 듣고 좋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대궐 숙직은 중대하다는 이유로 정초군을 보충시켰고, 조련을 정교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포보를 정하였으며, 어공의 역이라는 이유로 응사를 충당시키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한정을 찾아내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소요 속에 편치 못하였으니, 백성에게 신의를 크게 잃은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정으로 하여금 신의를 잃게 하고 말았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남용익과 이민적을 겸 비국제조로 삼았다.
전 정(正) 조사기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부산 첨사 이연정(李延禎)을 의금부에 내렸다.
이때 부산진의 군관 정종필(丁宗弼)이 왜인과 몰래 상거래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비국이 경상(境上)에 효시할 것을 청하고, 연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단속을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나문할 것을 청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게 된 것인데, 후에 고신을 박탈하였다.
6월 24일 무술
홍문관 본관록(本館錄)을 작성하였다. 5점(點)은 조사석(趙師錫)·신익상(申翼相)이고, 4점은 심유(沈攸)·정재희(鄭載禧)·조원기(趙遠期)·김계광(金啓光)·이옥(李沃)·윤지선(尹趾善)·윤가적(尹嘉績)·강석창(姜碩昌)·이인환(李寅煥)·임상원(任相元)·이하진(李夏鎭)·홍만종(洪萬鍾)·조근(趙根)·정유악(鄭維岳)·유상운(柳尙運)·이유(李濡)·서문상(徐文尙)이다. 이조록(吏曹錄)에는 조사석이 뽑히었다. 그 뒤 도당록(都堂錄)에는 조사석·신익상·조근이 준허(准許)되고, 6점을 받은 심유 등 14인과 윤지완(尹趾完)·권유(權愈)·임규(任奎)·박태상(朴泰尙) 등 4인은 모두 5점으로서 피선이 되었고, 김계광·이옥은 참록(參錄)되지 못하였다.
도목 대정을 하였다.
이민적(李敏迪)을 행 대사성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병조 참의로, 이선(李選)을 응교로, 조원기(趙遠期)를 사간으로, 조위봉(趙威鳳)을 헌납으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정언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지평으로, 임규(任奎)를 필선으로, 서문상(徐文尙)을 문학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사서로, 심유(沈濡)를 설서로 각각 삼았고, 공조 참의 이후산(李後山)을 한성 우윤에 특별 제배하고, 박세견(朴世堅)을 공조 참의로 삼았다.
이에 앞서 전관(銓官)이 경연 석상에서
"우윤을 차출해야 하는데 의망할 만한 사람이 모자란다."
고 말을 하니, 대신이
"정3품 중에서 성상이 골라 뽑으소서."
하였기 때문에 상께서 이에 후산을 발탁하여 제수한 것인데, 그가 연로한 구신(舊臣)인 까닭이었다.
6월 26일 경자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아홉 가지의 천거 조목을 정하게 하고 2품 이상과 육조의 참의 및 삼사(三司)에게 각기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 조목은, 몸가짐이 방정하고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 의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학술이 있는 자, 지모가 뛰어나 장수의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용력이 출중하여 급할 때 쓸 수 있는 자, 과감하고 확고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 세상일에 마음을 두고 일처리에 밝고 민첩한 자, 자상하고 청렴하여 수령에 적합한 자, 집안에서 효성과 우애가 있어 고을에서 칭찬을 받는 자, 문장의 재주가 특이하여 글을 잘 짓는 자 등이었다.
6월 27일 신축
헌납 조위봉(趙威鳳)이 아뢰기를,
"신이 현재 언지(言地)에 있으면서 이번의 논계(論啓)를 당하고 보니, 신의 정세가 더욱 어렵게 되어,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소회를 낱낱이 진달하겠습니다. 신의 아비 임년(臨年)이 한 번 올린 소로 인하여 유림들의 비위를 거슬려서 거의 귀양가게 되었다가 성상의 은혜를 입어 마침내 고향에서 살게 되었으니, 신의 몸이 가루가 된들 어떻게 티끌만큼이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와 지금의 소견이 비록 다르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저절로 혐의에 구애됩니다. 신이 이런 때에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아첨한다고 하여 침을 뱉을 것이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면 세상은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입니다. 아첨하는 것은 마음에 차마 못할 일이며 앙갚음을 하기 위한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가 되니, 신의 말이 이번 논계에 끼이기 어렵다는 것은 단연코 명백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옥당의 말석에서도 동료들에게 언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는데, 이에 대사간 홍만용(洪萬容)이 처치하기를,
"지난날의 일이 지금과 다르다면 공의(公議)가 있는 바이니 논계에 참여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첨이나 앙갚음을 한다느니 한 말은 어투가 어긋난 것이니,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이수만이 패초를 받고도 나아오지 아니한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6월 28일 임인
예조가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가례(嘉禮) 차비를 그전 정식에 비추어 계달하였는데, 상이 꽤 감소시켰다. 심지어는 채선(彩扇)에 장식할 진주(眞珠)의 값도 삼분의 일이나 감하였으므로 신료들이 그 검소한 덕을 흠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29일 계묘
행 대사성 이민적(李敏迪)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 찬선 송준길(宋浚吉)은 덕망 있고 노숙한 선비로 사림의 표상이고, 전 집의 이상(李翔)은 시골에 묻혀사는 숨은 선비로 본래부터 두터운 명망이 있었습니다. 지금 국가의 원기와 세상의 모범이 되는 자는 이 몇 사람들 뿐입니다. 원기의 소재가 이 사람들 말고 누구이겠습니까. 전하께서 평소 두 신료에게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예우하셨습니다만, 일을 논하다가 조금 성상의 뜻에 합당하지 않자 갑자기 당인(黨人)으로 지목하고 삭탈 관작하여 내쫓는 법을 가하셨습니다. 이런 위압적인 명령이 내리자 너나없이 당황하고 실색하여 사기(士氣)가 떨어져서 이미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전임 정승이 중외의 비방을 받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하늘은 위에서 노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원망하며 국가에는 큰 재앙이 있어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가는데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아첨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니, 일을 맡은 신하가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까.
신들처럼 구차하게 국록이나 도둑질하는 자는 실로 한 테두리 안에 든 혐의라도 있습니다만 초야에서 자신을 깨끗이 닦는 선비들이야 무엇을 꺼리어 전하를 위해 한마디의 말을 하여 대우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일을 맡긴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시종 그들을 보전하여 예의로써 진퇴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크게 위엄과 노여움을 내시면서 힘써 공의와 싸우시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전하에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깊이 국가의 원기를 배양하는 데에다 뜻을 두소서."
하였다.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임규(任奎)를 장령으로, 이경억(李慶億)·민정중(閔鼎重)을 겸 지경연사로 삼았다. 정중이 전에 동지경연을 겸임하였고, 이때 와서 경억이 지경연을 겸임하였는데, 해조가 두 사람의 자급의 고하가 구애되는 점이 있다고 진계하니, 정중을 지경연으로 승진시켰다.
작년 겨울 고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재임 중 병으로 죽었는데 병을 앓을 때 소를 지었다. 그 소의 내용은, 재이를 없애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법과 인재를 수습하는 도리에 대해 진술하고, 마지막에는 보필할 사람을 구하기에 힘쓰라고 권면하였는데,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이를 미처 올리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 박빈이 상소하면서 아비가 남긴 소를 올렸으나, 한 해가 지나도록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조 참의 이단하가 일찍이 상소 내에서 그 일을 말했는데, 이때 와서야 비답을 내리기를,
"경의 아비가 임종시에 진언한 상소를 살펴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나를 사랑한 정성이 다른 때보다 배나 깊었다. 재삼 살펴보면서 매우 슬픈 마음이 들었다."
하였다.
경상 도사 정도성(鄭道成)이 왜인을 접위하는 일로 명을 받고 내려갔다. 이에 앞서 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 등이 왜관 이전의 일로 나왔으나 조정에서 왜관의 이전을 허락하지 않자, 차왜가 해가 지나도록 머물렀다. 이때 향접위관(鄕接慰官)인 경상도 도사 민홍도(閔弘道)가 동래부(東萊府)에 있었는데, 이 해 여름 석 달 동안의 전최(殿最)를 감정(勘定)하는 일로 순찰사 영문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차왜가 그가 가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고사(故事)에, 도사가 전최에 참여하지 않으면 법률상 파직에 해당하므로 감사가 전례에 따라 파직시켰다. 민홍도는 파직되자 즉시 행장을 꾸려 가지고 서울로 향하였고, 동래부에서는 역관을 시켜 민홍도가 파직되어 돌아간 사유를 말하게 하였다. 이에 차왜 등이 화를 내며 통사(通事) 왜인과 졸개들을 시켜 역관을 붙잡아 놓고 칼을 들고 빙둘러 서서 칼날을 목에 들이대며 온갖 위협과 공갈을 다하였다. 동래부에서 별차역(別差譯)을 시켜 꾸짖기를
"접위관이 파직되어 돌아간 것은 실로 너희들이 그가 순찰사 영문에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를 반성할 줄은 모르고 역관에게 허물을 돌린단 말인가. 역관이 비록 낮고 미약하나 곧 왕의 심부름을 하는 자인데, 어찌 감히 이같이 욕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차왜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 역관과 함께 순찰사 영문에 가서 자세히 사유를 알아본 다음 서울로 가려고 한다." 하였다. 동래부에서 또 사람을 보내 꾸짖으면서 반복해서 효유시켰으나 끝까지 듣지를 않았다. 마침 그 이튿날 두모포 만호(豆毛浦萬戶) 김원상(金元祥)이 왔는데 차왜가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대개 김원상이 일찍이 제주(濟州)로 가다가 바람에 배가 표류되어 일본에 닿아 해가 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일본의 사정을 꽤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두모진에 차출해 보낸 것이다. 김원상이 차왜를 만나 여러 가지로 꾸짖고 개유하자, 차왜가 비로소 뜻을 돌려 역관을 내보내고 또 철수해 돌아갈 마음을 가졌다. 다만 반드시 접위관이 오기를 기다려 거취를 결정하려 하였으므로 동래부에서 속히 도사를 차출해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역관으로서 붙잡혀 국가를 욕되게 하였으니 그대로 차왜를 접대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여 다른 역관을 보낼 것을 요청하니, 따랐다.
이 달에 도성 백성 중 전염병에 걸려 야외로 옮긴 자가 5백 20여 명이었고 병사하거나 굶어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다. 그 밖에 제도에 여역과 기근으로 사망한 자가 많았다.
해서(海西)에서 고을 원을 죽인 죄인 조대립(趙大立)과 같은 패거리 2인을 체포하여 효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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