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을사
대사간 홍만용(洪萬容) 등이 인동 부사(仁同府使) 안명로(安命老)의 사람됨이 난잡하고 교활하여 수령의 직임에 합당치 못하다고 탄핵하면서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며칠 뒤에야 따랐다.
의관(醫官) 함득일(咸得一)을 대마도(對馬島)에 파견하였다. 이에 앞서 대마 도주가 그 나라의 이정암(以酊菴)에 거주하는 장로(長老)가 병이 들었다고 하면서 동래부를 통해 조정에서 양의를 보내 치료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동래 부사가 이를 보고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우리 나라와 왕복하는 서계(書契)를 반드시 글을 이해하는 승려로서 관장하게 하고, 그를 ‘장로(長老)’라고 칭했는데, 이정암은 그 장로가 거주하는 사찰이다. 함득일이 동래부에 도착하자 장로는 이미 죽었으나, 도주가 마침 또 병이 났기 때문에 그대로 들여 보내 도주의 병을 치료하고 해를 넘겨서 돌아왔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목 부위의 종기가 곪았기 때문이었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찬선 송준길(宋浚吉)의 병이 매우 위독하다는 것을 신이 감히 진달하였으나 지금까지 처분이 없습니다. 만약 상께서 병이 그리 위중하지도 않은데 은전을 청한 것인가 하고 신을 의심한다면 매우 황공스럽습니다."
하자, 도제조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평소 예우하던 신하가 병들어 죽어가는데도 조정에서 모른다면 흠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성상께서 아랫사람들이 고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실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은상이 진달했던 것입니다. 연전에 권시(權諰)가 죽었을 때 돌봐준 은전이 있었으므로 아랫사람들이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묵묵히 있었다.
7월 3일 병오
장령 임규(任奎)가 추감(推勘)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여, 체직이 되었다.
7월 5일 무신
어진익(魚震翼)을 장령으로, 이유(李濡)를 문학으로, 조위봉(趙威鳳)을 필선으로 각각 삼았다.
7월 6일 기유
대사헌 장선징 등을 체차하라고한 명을 환수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7월 7일 경술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신병을 이유로 상차하여 면직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어의를 보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7월 8일 신해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정익(鄭榏)을 병조 참판으로, 이선(李選)을 집의로, 강시경(姜時儆)을 장령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지평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부교리로 삼았다. 시경은 위인이 용렬하였는데도 누차 대직에 제수되기까지 하였다.
상이 대사성 이민적(李敏迪)의 관직을 낮추어 특명으로 인동 부사(仁同府使)에 제수하고 당일 내로 출발하라고 명하였다.
장령 어진익(魚震翼),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이민적이 얼마 전에 소를 올린 것은 결점을 보완하는 데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답을 오래도록 내리지 않다가 견책하는 벌이 갑자기 내렸고, 또 뒤이어 빨리 출발하라고 독촉하여 마치 몰아내듯이 하셨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아, 요즈음 모든 신료들의 상소가 조금이라도 정승에게 저촉되면 죄와 벌이 뒤따라 조정이 거의 비어버렸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국사를 어느 지경에 두려고 하십니까? 특별히 인동 부사에 제수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조정의 신료를 외직에 제수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고 전에도 있었던 일인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아뢰면서 이같이 급급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대신(臺臣)이 오정창(吳挺昌)·이상(李翔)·윤경교(尹敬敎)의 일에 대해 아뢰어 비답을 받은 뒤에 또 이민적의 일을 아뢰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민적이 저들의 괴수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명에 관계되는 것도 아닌데 평소의 규례까지 파탈하면서 오히려 구해내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매우 놀랍다. 대각(臺閣)이라 하여 관대하게 용납하고 덮어두어 그들의 간교한 싹을 키울 수는 없다. 어진익과 정유악을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 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는 곳이니만큼 만약 규례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즉시 아뢰고 처리해야 할 것인데 버젓이 받아들였으니, 규례를 어겨가며 비방을 멀리하려는 태도가 더욱 놀랍다. 해당 승지를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이에 정석(鄭晳)이 해당 승지였으므로 나갔는데, 정륜(鄭錀)이 자신도 함께 의논하여 받아들였다는 이유를 들어 역시 나갔다. 때는 벌써 밤 3경이었다. 당직 주서(注書)가 정원이 숙직을 거르게 된 상황을 보고하자, 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정륜에게 이르기를,
"이미 해당 승지라고 하였으니, 해당자가 따로 있다. 너는 또 무엇 때문에 나갔느냐?"
하니, 정륜이 아뢰기를,
"신도 그와 같이 일을 하였으니 감히 잠시라도 정원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정륜·정석과 계사를 전한 대간 정유악 등이 숙장문(肅章門)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대궐문이 열린 뒤에 나갔다.
7월 9일 임자
도승지 이은상(李殷相) 등이 계사를 엮어 진달하여, 사헌부의 두 신료와 해당 승지를 파직 추고하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면서 다시 생각하시기를 두 번이나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정원의 사체로 볼 때 잠시도 숙직을 떠날 수 없다. 그런데 해당 승지는 의당 파직 추고를 받아야 하거니와, 정륜은 갑자기 숙직을 이탈하여 마음대로 행동하였으니 너무나 기탄하는 바가 없었다. 만약 호되게 다스리지 않으면 장래의 망령된 일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니, 잡아다 문초하고 죄를 결정하라."
하니, 정원이 잡아다 문초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 하여 실정을 살펴 죄를 결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문한 뒤에도 끝내 입직하지 않은 채 하고픈 대로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이것이 곧 사실대로의 죄안(罪案)이다. 이 계사는 매우 터무니없다."
하였다.
대사간 홍만용(洪萬容), 사간 조원기(趙遠期), 정언 박태상(朴泰尙) 등이 아뢰기를,
"이민적을 외직에 제수한 것은 진정 성스런 조정의 지나친 일이므로 그 명을 도로 거두시라는 의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에 두 번 아뢴다는 것은 대간의 체통에 어긋나기에, 입다물고 있으면서 잠시 동안 기다려 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물의를 들으니 일정한 규례에 구애되어 즉시 쟁론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들 합니다. 신들이 직분을 다하지 못한 상태가 더욱 드러났습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피혐한 내용이 매우 가소롭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간원에서 감히 물의를 끌어들여 나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니 그 습관이 밉살스럽다. 이같은 일은 반드시 장래에 시끄러운 폐단이 있을 것이니, 앞으로는 하루에 두 번 계사를 올릴 경우,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라."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차자를 올려 이민적을 구원하면서 외직에 제수한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민적의 상소는 사기(士氣)를 빌리고, 이상(李翔)의 논의에 호응하여 밖으로는 모난 행동을 가리고 안으로는 음험한 뜻을 품었으니, 특별히 인동 부사에 제수한 것만도 죄를 감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경의 차자가 이에 이르렀으니 내 참으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부교리 김만중(金萬重)과 수찬 이당규(李堂揆)가 처치하여 홍만용(洪萬容) 이하를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1일 갑인
이경억(李慶億)을 우빈객으로, 이연년(李延年)·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임규(任奎)를 장령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조근(趙根)을 사서로 삼았다.
대사간 홍만용 등이 정륜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침을 맞았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하루에 두 번 아뢰지 못하게 영구히 길을 막는다면 또한 구애되어 반드시 난처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신하를 외직에 제수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데도 이같이 급급해 하니, 후일의 분잡스런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앞으로 인명에 관계되거나 국가의 대사로서 때가 지났는데도 미처 바로잡지 못한 것들은 이 규례에 구애받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이상진(李尙眞) 등이 아뢰기를,
"이민적을 특별히 제수한 명이 뜻밖에 나왔으니 승지는 의당 내용을 만들어 진달해서 제때에 명을 거두어들여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끝내 한 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성심껏 왕명을 출납하는 책임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사체에 관계되므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당 승지와 그 당시 승정원에 있던 승지를 모두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부제학 김만기(金萬基), 부응교 홍주국(洪柱國), 부교리 김만중(金萬重), 수찬 이당규(李堂揆) 등이 차자를 올려 이민적을 외직에 제수한 일과 헌부의 신료 및 해당 승지를 파직 추고케 한 명과, 정륜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을 취소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 황흠(黃欽) 등이 소를 올려, 이민적을 구원하면서 이미 출발한 길을 정지시키고 다시 체차되기 전의 직임에 둘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조정이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유생들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 매우 타당치 못하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7월 12일 을묘
상이 하교하였다.
"수령은 변장과는 달라 도임 날짜를 보고하는 규례가 없다만, 이번 인동 부사의 도임 날짜는 감사로 하여금 속히 보고케 하라."
7월 13일 병진
오정창(吳挺昌)을 삭출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이때 정창이 모친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양사가 더이상 힘껏 쟁론하지 않고 그만 정지하였다.
이태서(李台瑞)가 죄가 있어 옥리에게 내렸다. 태서의 아비 이취인(李就仁)은 혼조(昏朝) 때 흉소(凶疏)에 참여하였다. 그 때문에 태서는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하다가 예조 낭관이 되었을 때 대간의 논핵을 중하게 받았다. 전해 여름에 태서가 쟁(錚)을 치면서 그의 아비의 일을 호소하기를,
"신의 아비 취인(就仁)은 이위경(李偉卿)과 척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위경이 흉악한 의논에 앞장서던 때부터 서로 절교하였고, 어몽렴(魚夢濂) 등이 소를 올려 이위경의 죄를 성토할 것을 청하였을 때는 일가라는 혐의를 피하느라 비록 이름은 쓰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 의논을 주장하였고 또 그 소를 지어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 있던 신서정(申瑞廷)·이추인(李推仁)이란 자가 흉악한 소장에 연명을 하였는바, 이추인의 성명이 신의 아비 취인과 음이 비슷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잘못 안 것이 바로 이 때문인데 이로써 싸잡아 일컫고 있으니, 어찌 매우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정 인사나 유생으로서 흉악한 의논에 참여해 죄를 받은 자들은 그 성명이 모두 의금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빨리 유사에게 명하시어 문서를 근거로 조사하소서."
하였다. 태서가 그의 아비의 못된 짓을 엄폐하려고 일찍이 옥사를 심리할 때 의금부의 관리와 짜고 의금부에 있는 문서를 갖다가 ‘취(就)’자를 문질러 버리고 ‘추(推)’자로 고쳤다. 그리고 묽은 먹물로 자획을 흐르게 하여 긁어 문지른 자취를 가려서, 누명을 풀 계획을 삼고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금부에서 문서를 상고하여 사유를 갖춰 진계하였는데, 이번에 옥리에 내려진 뒤 여섯 차례의 형신을 당하고도 승복하지 않자, 상이 형신을 정지하고 법률을 적용하도록 명하여 그의 고신(告身)을 박탈하였다.
7월 14일 정사
함경도에서 상례로 바치는 공물인 단천(端川)의 은 3백 냥을 진상하였다. 당초 단천에서 백금이 생산되자 해마다 1천 냥을 바치도록 정하였다. 이 때에 와서 은혈(銀穴)의 맥이 끊어졌다는 감사의 보고로 인하여 4백 냥을 감하고 6백 냥을 봄 가을 두 번으로 나누어 채취 납부케 하였다.
7월 15일 무오
민유중(閔維重)을 형조 판서로, 김휘(金徽)를 예조 참판으로, 장선징을 좌부 빈객으로, 심유(沈攸)를 보덕으로, 이규령(李奎齡)·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이훤을 부수찬으로, 송규렴·윤심(尹深)을 이조 좌랑으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임규(任奎)를 헌납으로, 조창기(趙昌期)를 지평으로, 최관(崔寬)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최관은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여 정치가 엄중하고 분명하였다. 그가 수령을 출척(黜陟)한 것은 비록 전부 타당하게 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요컨대 형세를 꺼리어 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온 도내가 칭찬을 하였는데 미구에 하찮은 죄로 파직되어 돌아갔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근래에 상께서 연이어 지나친 거조를 하시고 전후의 성교 또한 몹시 적절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다들 놀라고 있습니다. 이민적의 일로 말하자면 우상이 이미 차자를 올렸습니다만, 하필이면 질언거색(疾言遽色)041) 을 보이시어 뭇 신하들로 하여금 그 잘잘못을 의논하도록 만드십니까."
하고, 우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근일 건도(乾道)는 드세어지고 하정(下情)은 막히어 갈수록 자꾸 격렬해지고 언로가 닫히니, 성덕에 누가 될 뿐만 아니라 나랏일에 있어서도 장차 다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부제학 김만기, 대사간 홍만용, 지평 조사석 등이 진언하여
"대계(臺啓)에 대해 정한(定限)을 하신 것은 언로를 방해하는 일이다."
고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16일 기미
우승지 이지익(李之翼)과 동부승지 민종도(閔宗道)가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승지의 직임은 왕명을 출납하고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 좌부승지 이동직(李東稷)은 죄수가 사건에 끌어들여 갑자기 옥리에 내려졌으니 조정의 체모에 크게 손상이 되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승지를 잡아다 문초할 일이 있으면 먼저 직책을 체차시키는 왕지(王旨)를 받들게 하여, 직명을 띤 채로 심리에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 하문하시어 영구한 법식으로 정하소서."
하였다. 그 후에 상이 대신에게 의견을 물으니, 다들 체직을 시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냥 두었다.
7월 18일 신유
최일(崔逸)을 승지로 삼았다.
7월 19일 임술
대사헌 이상진(李尙眞) 등이 아뢰기를,
"동지 성익(成釴)은 본래 난잡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여러 번 곤수를 지내면서 오로지 자신을 살찌우기에만 일삼았습니다. 급기야 황해 병사에 제수되어서는 더욱 탐욕을 부려 군포(軍布)를 독촉해 받아 짐바리가 줄을 이은 까닭에 군인과 백성들의 원망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는가 하면, 체차되어 돌아온 뒤에는 옛집을 철거하고 크게 새집을 지었으니,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방자한 짓을 한 행동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1일 갑자
여성제(呂聖齊)를 승지로, 오시수(吳始壽)를 예조 참의로, 박증휘(朴增輝)를 필선으로 삼았다.
7월 24일 정묘
이혜를 승지로 삼았다.
전 병사 성익을 의금부에 내렸다.
성익이 서도 병사에 재임하면서 자기 여종을 진무(鎭撫) 김충갑(金忠甲)과 혼인을 시키고는, 자물쇠와 열쇠를 주어 그가 백금(白金)·군목(軍木)을 훔쳐가도록 내버려 두었고, 이어 서울로 데리고 왔다. 후임 관원이 이 일을 포착하여 그를 잡으려고 하자 숨겨두고 보내지 않았는데, 이때 와서 일이 탄로나 체포를 당했고, 누차 고신(拷訊)을 받으며 한 해를 넘긴 끝에 사형(死刑)을 감면받아 남쪽 변지에 유배되었다.
대사헌 이상진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당초에 성익이 황해 병사로 있을 때에 탐욕을 부린 사실을 논하여 아뢰고 죄를 주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뒤 이어서 들으니, 그곳 아문의 두 여종을 색리에게 시집보내면서 군목(軍木)을 훔쳐낸 일이 있다기에, 그 일을 첨입하여 잇따라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어저께 들으니, 비국이 조사하느라 그 노복들을 가두기까지 하였는데 노복들의 공사(供辭)에 성익의 간사한 정상이 숱하게 드러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그 문서를 가져다 상고하여 잡아들이기를 청하려는 참이었는데 잡아다 문초하라는 상의 비답이 먼저 내렸습니다. 신들이 일을 논함이 허술하여 형벌을 죄에 걸맞게 적용하지 못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양사가 승지를 파직 추고하자는 계사를 정지하였다.
호남 순천부(順天府)의 목장에서 기르는 말 25필을 범이 물어서 죽였다.
7월 26일 기사
대사헌 이상진(李尙鎭) 등이 【집의 이선(李選), 장령 이수만, 지평 조사석(趙師錫).】 아뢰기를,
"포천(抱川)의 유학(幼學) 이세붕(李世鵬)이 본부에 소장(訴狀)을 올렸습니다. 대개 그 소장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작년 진휼할 때에 그의 처조카 이환(李煥)의 무고로 유배의 형벌을 받았다가 이번의 대사령(大赦令)으로 다행히 석방되었습니다. 일찍이 민정중(閔鼎重)의 진달로 인해 다시 형조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토록 하였는데, 이환이 당초 증거댔던 고양군(高陽郡)에 올린 두 번의 소장은 위조라는 것이 해색(該色) 낭청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에 형조가 이환을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붕의 아들 이익화(李益華)가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추후에 낱낱이 열거하여 소장을 올리자, 형조에서 도리어 익화가 이환의 송척(訟隻) 신성로(辛聖老)와 동모하여 꾸민 것으로 의심하고 신성로와 이익화를 모두 가두어 놓고 반드시 엄하게 형문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신들이 전후의 문서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이환이 위조했던 사실이 구절마다 숨기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형조에서는 이를 깊이 탐색해 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호소한 이익화를 가두었으니 크게 옥사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일이 결말나지 않았으므로 잠시 덮어두었습니다. 그런데 형조가 또 이세붕이 자식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절차를 무시하고 곧바로 상사에 기소한 것이라고 하여 가두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법부(法府)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본디 있는 법례인데, 형조에서 이세붕을 가두고 치죄하였으니 이게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더구나 이미 위조의 죄에 관계되었다면 이는 막중한 송사이니, 보좌하는 관원이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판서가 없는 틈을 타 급급하게 끝내려는 뜻이 현저하게 있었으니,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더욱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들으니, 요전 이환의 위조 장문을 형조의 당상이 가지고 가서 이환에게 주려고 하다가 해당 낭청이 따진 뒤에야 도로 해방(該房)에 내렸다고 하니, 편사(偏私)의 자취가 훤히 드러났고, 이외에도 청탁을 받아 잘못 판결한 일이 많아 사람들의 말썽을 초래하였다 합니다. 형조의 해당 당상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중하게 추고만 하게 하였다. 해당 당상은 곧 형조 참의 목내선(睦來善)이다. 삼가 살피건대, 이환은 본래 윤휴의 족당(族黨)으로 포천(抱川)에 살았고 또 조위봉(趙威鳳)과 더불어 서로 절친하였다. 이 때문에 내선에게 촉탁을 하려고 이번에 법을 어기고 편우(偏右)하는 행동을 한 것인데, 상진과 수만 등이 곧 내선·이환을 논핵하여 뒤에 또한 도배(徒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환은 늘 정중과 이선에게 원한을 품었고, 금상(今上) 기미년에 윤휴와 더불어 은밀히 익명(匿名)의 흉서(凶書)를 내걸어 정중 등 문무 8, 9인이 반란을 꾀한다고 하였으며, 윤휴는 또 밀소를 올려 어서 치죄하기를 청하였다. 장차 큰 옥사가 일어날 참이었다가 급기야 일이 탄로났고, 이환은 단지 유배되는 벌만을 받았는데, 경신년에 이르러 결국 이 때문에 윤휴·이환은 모두 논사(論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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